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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외면해선 안 되는 불편한 진실 (심범섭)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3. 1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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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해선 안 되는 불편한 진실



심범섭*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이런 말을 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7장 6절). 개와 돼지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마음에 느끼는 심한 불편(당황)을 달리 해소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곧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거나 자신이 감당(소화)할 수 없는 것을 마주쳤을 때에 느끼는 불편을 성숙한 방식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어 이를 폭력적으로 표현하고 마는 것이다.

영국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드(Frederick Forsyth)가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Opera)>에 바탕하여 쓴 일종의 속편 소설 <맨해튼의 유령 (The Phantom of Manhattan)>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 에릭(Erik)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의 일부가 심히 일그러진 사람이라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젊은 시절 어느 날 밤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불량배 몇 명과 만나 시비에 휘말리는데, 어느 순간 그의 가면이 벗겨지고 불량배들은 그의 추한 얼굴을 보게 된다. 이때 이들은 반사적으로 에릭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들이 에릭을 얼굴을 보고 폭행을 시작한 동기에 대해 소설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추한 것은 악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이 깡패들은 에릭의 비정상적인 얼굴이 주는 불편함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이러한 불편함을 일으키는 대상은 악한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반사적으로 판단했고, 이 판단이 일으키는 거친 감정(아마 공포도 포함하는)을 해결할 방법으로 폭력행사 이외의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예수의 말에서 개와 돼지가 야만적인 불편반응을 보이는 대상과 포사이드의 소설에서 불량배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대상은 일반적인 인식에서 그 평가가 상반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진주는 좋아하고 심히 훼손된 얼굴은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이 일반적으로 좋거나 나쁘게 평가 받음을 떠나 무엇이든 그것을 마주친 사람에게 불편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러한 난폭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예수의 말에서 개와 돼지는 먼저 좋은 선물 자체를 "발로 밟"아 무시하고 그것으로는 분이 안 풀려 그 다음에는 이 선물을 준 사람을 난폭하게 공격하기까지 한다. 이 두 단계는 모든 미성숙한 불편 반응에 적용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었는데 제사장이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그냥 지나쳤고 그 다음에 레위인도 그를 보고 똑같이 행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0:30-31).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불편한 상황을 만나자 이 상황을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인데, 이는 성숙하지 못한 불편반응의 1단계를 예시한다고 할 수 있다.

못된 불편반응의 2단계까지 나아가는 예로서 이런 것은 어떠한가? 서울의 모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사람으로부터 수 년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한 교수가 자기가 번역 출판하고자 하는 영어원서를 대학원생 몇 명과 함께 번역해 보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모임에서 교수가 어떤 대목을 번역하는데 이 학생이 보기에 잘못 옮기고 있어서 교수에게 이리이리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일러주었다. 그러자 그 교수는 화를 내면서 자기 의견이 맞다고 우겼다. (이 학생은 이 순간 다시는 교수의 오역을 바로 잡아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다른 학생도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오역이 지적 받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가 성숙한 사람이었다면 학생의 의견을 받아들였겠지만 그러지는 못 했는데, 그래도 불편반응의 1단계까지만 가서 그냥 학생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문제는 의견 일치가 안 되니 더 생각해 봅시다"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는 이 정도도 못 할 정도로 마음이 비좁은 위인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 자신은 과연 이 두 단계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어떤 것을 마주쳤을 때 그것을 제대로 알려고 하기보다 단지 불편한 것이 싫어 그것을 은근슬쩍 무시하고 외면하는 일이 없는가? 더하여, 불편반응 2단계까지 나아가, 비록 예수가 말하는 개와 돼지처럼, 그리고 바로 앞에서 예로 든 신학교 교수처럼 난폭하게 반응하지는 않더라도, 불편하게 하는 대상 또는 제3자에게 경미하나마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는가? 인간은 사실 편안함에 깊이 중독된 존재라 이러한 철없는 반응에서 완전히 자유롭기가 어렵다.

그런데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 가운데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중요한 것일 때가 있으며, 이 불편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큰 어리석음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진실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정신 차리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권침해의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미투 (ME, TOO) 운동"이 전개되면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말하고 있고 이에 온 사회가 충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이 드러내는 진실이 초래하는 불편에 대해 이런저런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안희정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폭로 이후 "김지은과 함께 하는 사람들 성명서"를 발표한 사람들의 반응은 성숙한 반응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자신들이 과거에 성폭력을 묵과한 점을 반성하고, 김지은씨를 비롯해 모든 피해자와 함께 하겠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이 문제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펜스 룰(Pence Rule)"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펜스 룰은 현 미국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2002년 미국 의회 전문지 <더 힐 (The Hill)>에 밝힌 것으로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 단둘이 식사하지 않고 아내가 옆에 없으면 술자리에도 가지 않겠다"는 규칙이다.[각주:1] 성적인 차원에서 오해를 받거나 유혹을 받을 상황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원칙인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회식이나 출장에서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식으로 번지고 있다"[각주:2]고 한다. 이런 반응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미성숙한 불편반응 2단계에서 1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반응, 곧 드러난 진실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반응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간 것으로 판단되는, 미련하고 난폭한 불편반응도 만나게 된다. 얼마 전 민주당 소속 부산시 시의원 출마자가 미투 운동에서 나온 성폭행 폭로에 대해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SNS에서 저열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당에서도 제명 당했다.) 홍준표가 3월 7일 청와대 오찬 회동에서 임종석 비서실장에게 안희정 사건에 대해 "임종석이 기획했다는 얘기가 있던데"라고 말한 것, '세계여성의날'인 3월 8일 자유한국당 성폭력근절대책특위 위원장인 박순자가 "우리에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거의 터치나 술자리 합석에서 있었던 일들이지, 성폭력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고 말한 것은 어떠한가? 이들의 말은 정치적인 계산이 포함되어 있어 민주당 시의원 출마자의 말보다 그 의미구조가 더 복잡하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분별력 없으며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다고 여겨진다.

(사실 이렇게 미성숙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애당초 인권침해의 고통에 대해 불편한 느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들에게 불편한 것은 인간의 억울한 고통이 아니라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어 초래되는 현실적인 제약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어리석음이 엄존하는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해져서 인권침해라는 진실의 불편함에 더 현명하게 반응하고 더불어 인권침해를 더 예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다양한 주제로 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에서 다소 원론적으로 들릴 수 있는 두 가지 노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이 가운데 한 가지는 3월 10일 경향신문에 실린 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본부장의 인터뷰에 나오는 말에서 예시된다. "실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미투 폭로 이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심각하다"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렇게 응답한다.


미투는 드라마 소재가 아니다. 개인끼리의 농담마저 막을 수는 없지만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 남성들이 피해여성의 입장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내 딸이나 내 아내가 피해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라도 생각해봐야 한다. 미투는 남성·여성을 떠나 자신의 문제로 봐야 한다. 그러면 함부로 2차 피해를 입히지는 못할 것이다.[각주:3]


여기에서 이지문 본부장은 남성들에게 "내 딸이나 내 아내가 피해자"라고 가정하면 피해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내 식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의 구체성에 되도록 가까이 가려는 "상상적 이해"를 시도해 보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적 이해의 시도 및 훈련은 이미 일어난 고통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앞으로 같은 고통이 발생하는 것을 더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밤(Martha Nussbaum, 1947~ )은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Not for Profit: Why Democracy Needs the Humanities)"라는 강연에서 성숙한 민주시민을 기르기 위해 세 가지 차원, 곧 철학과 역사와 예술 차원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예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는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상상하는 능력이 키워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각주:4] 우리 사회에서도 예술을 통한 상상 교육, 공감 훈련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권침해의 고통에 더 지혜롭게 대처하고 더불어 이를 더 잘 예방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경주해야 할 또 다른 노력은 인권침해라는 폭력이 왜 나쁜 것인지를 깊게 고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철학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중세에 가톨릭 교회가 막강한 힘을 누렸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도 제시한다.


교회가 싸워야 했던 전통으로 로마와 게르만 전통이 있었다. 로마 전통은 이탈리아에서, 특히 법률가 사이에서 가장 강했고, 게르만 전통은 야만인들을 정복함으로써 태어난 봉건 귀족에게서 가장 강했다. 그러나 여러 세기 동안 이 두 전통 가운데 어느 것도 교회에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 했다. 그 주된 이유는 이 전통들이 적절한 철학(adequate philosophy)으로 구현되지 못 했다는 사실에 있다.[각주:5]


러셀은 이런 견해를 밝힌 다음 왜 적절한 철학을 마련하는 것에 힘이 있는가를 전혀 설명하지 않고 다른 화제를 도입한다. 하지만 러셀이 철학을 이렇게 중시하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깊고 견실한 철학(사상, 이론)은 그 문제에 관련된 경험들을 언어로 명확히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며, 인간이 결단력 있게 행동하는데 필수적인 '이유'와 '명분'을 제공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 사회의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통해 심오하고 견고한 철학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과 예방하기 위한 교육에 모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각주:6]

불편한 진실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권침해의 고통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가 지금 이를 그냥 짓밟고 묻어버린다면 지금의 어린 세대가 나중에 우리에게 '당신들은 비겁한 어른들이었다!'고 욕할 것이다. 그리고 신과 역사가 우리를 이렇게 저주할 지도 모른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 .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5:26, 30).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http://tip.daum.net/question/102379210 [본문으로]
  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082056015&code=990100#csidx60c9a8d011fb757999cfe9a4577136d [본문으로]
  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101114001&code=940100#csidx234c576532f7409871bd72bb54df41e [본문으로]
  4. https://www.youtube.com/watch?v=mxgYsx1AJ68 [본문으로]
  5. Bertrand Russell,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Simon and Schuster, New York, 1945, p.302. [본문으로]
  6. 한 정치인은 올해 2월 23일 '스리체어스'라는 출판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의 성폭력 해결에 대해 다음과 같은 훌륭한 견해를 제시했다. 여성이 성희롱과 차별의 문화를 겪은 이유는 여성의 세력화된 정치적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여성을 건드려도)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빨리 뽀뽀하라는 얘기야'는 류의 왜곡된 성 인식이 생긴 것 . . . 현재의 성희롱과 성폭력의 문화에선 우리 모두가 피해자"라며 "일차적으로 여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거부권을 확실히 정치적으로 보장해줘야 한다. . . 섹슈얼리티(sexuality)라는 것에 대해 최근 몇 년 동안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 . 여성의 지위가 높아져야 직장 내 성희롱이든, 이런 문화들도 자연스럽게 견제된다. 여성 공무원들이 관리 및 간부직으로 승진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런데 서글픈 것은 이 정말 말이 되는 말씀을 한 사람이 안희정이라는 사실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101133011&code=940100#csidx361c784084f1251b84e4df286a8e49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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