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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남의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2(심범섭)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5. 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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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2



심범섭*



지지난 번, 곧 1월 초에 이 웹진에 실은 글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 세 가지(체험적, 상상적, 설명적 이해)를 이야기하면서 다음 글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일상적인 경우들을 몇 가지 이야기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 글에서 미투 운동이라는 시의성 강한 주제를 다루느라 (비록 고통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처음의 계획을 따르지 않았다. 이번 글에서는 이 계획을 실행하여, 우리 삶에서 흔히 일어나는, 타인의 고통을 잘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가운데 세 가지를 들어 이야기하고 싶다.


1. 잘 난 사람을 잘 대하자


도올 김용옥이 <월간동아>에 연재했던 시평을 모아 1990년에 출간한 책 <도올세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이어령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김용옥은 이런 말을 듣는다. “조심해라. 우리 사회는 못난 놈은 밟아 죽이고, 잘난 놈은 띄워 죽인다.” 못난 놈을 밟아 죽인다는 것은 금방 이해가 되는데 잘난 놈을 띄워 죽인다는 것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슨 말일까 이리저리 궁리를 해 보았다.

먼저 “띄운다”라는 말은 추켜세우는 것인데, 누구를 추켜세우면 그가 기분 좋아하겠지만 이것이 적절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그의 마음의 균형을 빼앗고 그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면 부적절한 띄우기가 불편하여 마음의 평정을 잃을 것이요, 교만한 사람이라면 더욱 교만해져 올바르게 처신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띄우기에는 추켜세우는 태도와 말과 행동에 더하여 흔히 어떤 무리한 요구가 동반하기 마련이고, 이것이 잘난 사람의 안녕을 침해하고 성장을 저해하게 된다. 띄우기가 단순한 경탄에서 비롯되어도 이러할 것인데, 여기에 띄우는 사람의 어떤 이기적인 동기나 열등의식 등이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고약해진다.

띄워서 죽인다는 것은 부적절히 추켜세워서 괴롭힌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 잘난 사람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와 무시가 포함되는 것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비범한 사람을 칭찬하고 칭송할 때 그를 초인이나 영웅 같은 특별한 인간의 범주에 집어넣고 그의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다보아야 할 것이다.

특별한 사람에 대한 바람직하지 못한 심리와 태도는 반드시 내가 범접하기 어려운 비범한 사람에 대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아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이런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유난히 똑똑한 젊은이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자기를 그리 주의 깊게 보살피지 않아서 불만이었다고 한다. 아이가 공부도 정말 잘 하고 영특하니까 부모는 ‘쟤는 뭐 자기 일은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방임한 것이었다. 또 이 사람은 최근에 무슨 기술관련 수업을 수 개월 들으면서 강사가 자기한테 별로 관심을 안 보여서 고충이 있었다고도 했다. 강사 역시 그가 수강생 가운데에서 단연 뛰어났기 때문에 ‘저 학생은 뭐 혼자서 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자세히 살펴주지 않은 것이었다.

니체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시장의 파리들에 대해서"라는 장이 있는데, 여기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위대한 사람에게 범용한 인간들로부터 도망가라고 열변한다. 그는 용렬한 자들이 "그대의 주변에서 칭찬으로 웅웅거린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들이 "그대에게 신 또는 악마에게 하듯 아부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더불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도 말한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복수로부터 도주하라!"

물론 니체가 말하는 상황은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경우보다 더 심원한 차원에 속하며 또 훨씬 더 드문 상황이지만, 잘난 사람을 띄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교훈이 있는 듯 하다. 특히 "보이지 않는 복수"라는 강한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남을 띄우는 진정한 동기를 더 깊고 진지하게 성찰하게 한다. 우리의 동기가 진정 복수심(뒤틀린 열등의식의 반동)이든 순수한 경외심이든 띄우기는 띄워지는 사람의 고통에 우리를 둔감하게 한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그를 먼저 한 연약한 인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내 경험을 쉽게 일반화하지 말자


많은 경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방해되는 것은 그의 어려움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속단인 것 같다. 이런 속단은 특히 타인이 겪은 것을 나도 이미 겪어보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가난과 싸우면서 별의별 일을 다 해 본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곧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과 같은 일을 해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경험한 고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제대로 공감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어느 지점부터는 각 사람의 고유함이 관여하게 된다. 비록 이름이 같은 고통이라도 각 사람에게는 그에게 고유한 고통이 있음과 나는 이것까지는 모름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병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생각해 보자.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떤 공통된 경험이 있으며 어떤 일반적 경향이 나타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병의 구체적인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듣는 약이나 요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듣지 않는다. 병세가 안 좋아 금방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오히려 더 악화되지 않고 근근이 살아가는 반면 병세가 미미하여 큰 걱정 없던 사람이 갑자기 악화되어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오래 전에 이런 우스갯소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파리 때문에 성가심을 느끼고 있었다. 잡으려고 해도 안 잡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파리가 이 사람 앞에 앉게 되었다. 드디어 파리를 잡을 기회를 얻은 이 사람은 파리를 노려보면서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손을 다시 내렸다. 옆에 있던 동무가 물었다. “왜 파리를 안 잡아?”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까 그 파리가 아니야.” 이 농담은 직접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각 개인의 고유성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생각하도록 일깨워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각 개인의 고통의 독특함에 대해 더 민감하게 생각해야겠다는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나도 겪어봐서 잘 알지’같은 생각은, 납치한 사람의 다리를 침대에 맞춰 늘이거나 자른 프로크루스테스의 폭력과도 같을 수 있다.


3. 추상적인 이해의 부작용을 경계하자


때로 우리는 어떤 경험을 추상적인 원리로써 요약해석하여 그 안에 배어있는 고통을 못 보고 만다. 예를 들어 월남전에서 전사한 군인의 죽음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숭고한 희생’ 같은 말로 정의한다면 이 병사가 한 인간으로서 관통해야 했던 크고 작은 고통은 모두 은폐되어 버린다.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를 만난다. 열 여덟 살 소녀 소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스스로 공창에 들어간다. 이러한 소냐의 결단과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소냐의 가족과 같은 건물에 세들어 사는 레베쟈트니코프라는 진보주의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내 생각에, 곧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그녀는 한 여자가 처할 수 있는 가장 정상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 . . 사회의 현재 질서에서는 그녀의 상황은 온전히 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에게 강요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미래 사회의 질서에서는 이 상황은 완전히 정상적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될 거니까요. . . . 소피아 세묘노브나의 개인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사회 질서에 대한 힘차고 진심어린 항의라고 봅니다. 그녀를 바라볼 때 나는 기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서 레베쟈트니코프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온전히 실현되는 미래 사회를 강하게 희구한 나머지 소냐의 현재 상황이 이러한 이념을 실천하는 경우라고 주장하고 만다. 소냐의 현실을 온전히 자신의 사회사상에만 비추어 판단할 뿐 소냐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사실 소냐의 실상은 자신의 처지를 매우 혐오한 나머지 (여러 번) 자살할까도 생각했지만 계모와 어린 동생들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소냐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베쟈트니코프는 어설픈 이념에 취해 소냐의 고통은 짐작조차도 못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며 "기쁘기까지" 하다는 망언도 서슴지 않는다. 소설의 화자는 레베쟈트니코프를 저속하고 어리석고 단순한 사람으로 규정하는데, 소냐에 대한 그의 판단도 이러한 규정을 예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철학과 이념이 구체적인 개인들이 경험하는 고통에 이렇게 눈 멀어 있다면 비록 그것이 겉으로는 자유와 해방을 표방하더라도 새로운 구속과 억압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죄와 벌>에는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에 대해 "그는 젊고 이론적이였으며 그 때문에 잔인했다"라고 평하는 대목도 있다. 소설의 화자가 이런 평가를 적용하는 맥락은 지금 내가 펼쳐놓은 맥락과는 다르지만 '이론적이므로 잔인하다'라는 기술은 추상적인 철학이 섬세한 공감을 가로막는 부작용을 명료히 지적한다고 본다. 우리는 이론의 '맹'과 '치'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고통이 진정 공기처럼 편재해 있다. 우리는 이런 고통에 눈과 귀를 더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감과 이해의 노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취지로 쓴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언급하고 싶은 중요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때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그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모순적 현실이다. 생각해 보면 어떤 고통은 비밀로 남아있는 것이 그 당사자의 존엄을 위해 더 나을 수 있다. 때로 침묵이 최고의 웅변이듯 때로 무관심이 고통에 대한 최고의 배려일 수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잘 이해하자는 선의가 또 하나의 경직된 이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결국 고통을 이해하는 문제는 이 세상의 다른 많은 문제처럼 깊고 섬세한 지혜를 요구하며 많은 주저함이 불가피한 어려운 문제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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