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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판문점(양권석)

시평

by 제3시대 2018. 5. 1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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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중앙에 군사 분계선이 가로 질러 지나면서 남한과 북한을 가르고 있다. 그리고 남북의 끝에는 각각의 경비병 막사가 자리잡고 있고, 그 다음으로 남쪽에는 평화의 집과 자유의 집이 북쪽에는 통일각과 판문각이 반으로 접어면 그대로 하나가 될 듯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경비병 초소들의 배치도 어김없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왼쪽으로 사천이라는 내가 남북을 가로 질러 흐르고 있는데, 군사분계선이 이 사천강을 만나면 남쪽을 향해 90도로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래서 지도상으로는 판문점의 남쪽 귀퉁이에 해당하는 곳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사천강과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르고 있다.




판문점은 숨기거나 포장할 필요를 전혀 못 느끼는 듯, 뻔뻔하고도 유치한 그대로 민 낯을 드러낸 분단의 축소 도형이다. 송강호와 이병헌이 열연한 영화를 통해서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이곳의 정식 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 JSA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땐 오히려 그 비현실적 구성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영화가 판문점의 숨겨진 진실을 잠시 보여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군사분계선을 가로질러 몰래 만나기도 했을 것이고, 어느 순간 그런 만남의 자리가 작은 갈등의 자리가 되기도 했을 것이고, 그 갈등의 자리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사태로 발전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건이 나면 남과 북의 당국은 각기 제 주장만 목청껏 외치고, 몰래 만나 놀면서 쌓은 우정을 서로를 향한 총질로 끝내 짓밟아야 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말도 없었고, 허락된 언어도 없었다. 자살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귀가 있고 진실을 보려는 눈이 있다. 중립국 파견 수사관 소피(이영애), 그녀는 전후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포로 교환 과정에서 남쪽도 북쪽도 아닌 제삼국을 택한 전쟁 포로의 딸이다. 판문점은 처음부터 그랬다. 경계선이면서 동시에 경계선 사이에 놓인 공간이다. 우정이 꿈틀거리는 곳이고, 그 우정이 무력으로 제압당하는 곳이고, 또 진실이 남쪽도 북쪽도 아닌 제 삼의 통로로 흘러 나가는 곳이다.


“널문리”가 판문점의 본래 지명이었다 한다. 그 이름의 유래도 안타깝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한양을 버리고 파천하던 선조가 사천강을 건너야 했을 때, 이 곳 사람들이 자기들 집의 문짝을 뜯어 내다 다리를 만들어 왕을 무사히 건너가게 했다고 널문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다. 왕의 피난에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을 불태우고 노비문서를 불살랐다는 이야기나, 나중에는 평양성마저 버리고 다시 떠나려 할 때, 분노한 백성들이 물리적으로 왕의 피난을 막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믿기 힘든 이야기다. 왕의 피난길에 방문의 문짝마저 뜯어 바치고 한데잠을 자야 했을 가난한 백성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욱 또렷하다. 민중의 분노와 절망이 왕을 향한 충성심으로 포장되던 곳, 그곳에 널문리라는 이름이 있었고, 사천강에 놓인 널문 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이 널문 다리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되었다. 휴전하면서 전쟁 포로 들은 이 다리 위에서 남쪽이나 북쪽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하였다. 그리고 선택한 쪽을 향해서 한번 다리를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다. 아니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다. 그래서 다리가 아니라 남과 북을 절대적으로 갈라놓는 경계선일 뿐이다. 그 다리 위에는 머물 곳도 없고, 또 다리 위가 확장되어 만들어 질 수 있는 제삼의 공간 같은 것도 없다. 최인훈의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경계를 넘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전쟁포로가 되어 남쪽도 북쪽도 아닌 제삼국을 택한다. 그리고 인도로 가는 배 타고르호 위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다시 돌아올 길도 제삼의 길도 허락하지 않는다. 넘지 말아야 할 절대적 경계선을 넘어 우정을 만든 공동경비구역의 사내들이 처한 운명 역시 다르지 않다. 그렇게 허락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어간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서로를 죽여야 했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그 참혹한 경험을 안고 돌아 온 이수혁(이병헌)에게는 허락된 삶의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리를 건너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보았고, 또 스스로 그 진실을 짓뭉개고 살아서 다리를 다시 건너 온 그가 갈 수 있었던 제삼의 길 역시 자살이었다.


결코 사랑이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곳, 결코 우정이 엮어질 수 없는 곳, 남쪽이나 북쪽의 울타리를 흠집 낼 가능성은 아예 허락되지 않는 곳, 혹시나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가차 없이 진압당하는 곳, 그곳이 바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다. 교조적 장벽이 빈틈없이 서로 맞닿아 있어서 변방의 가능성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 곳이며, 어떤 전복적 상상력도 인정되지 않는 공간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다리가 있는 한 건너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 판문점과 분계선도 마찬가지다, 문이 있는 한 오가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 그 엄혹했던 시절에도 여러 사람들이 판문점 군사 분계선을 가로질러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남에서 북으로 건너오고 건너갔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언제든 건너 가고 올 수 있는 다리로 만들기 위해서 였다. 경계선을 교조적 장벽이 아니라, 변방으로 만들기 위해서 였다. 남과 북이 아닌 제삼의 길이 자살로 끝나는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가 울려퍼지는 남북 정상회담의 그림을 바라보며, 아마도 이 순간은 예수의 무덤이 빈 무덤임을 선언하는 순간 같은 것이 아닐까? 가두어야 할 무덤이, 문을 열고 새로운 희망을 속삭이는 무덤이 되는 순간이 아닐까? 이제 분단의 경계선이 장벽이 아니라, 남과 북을 향해 새로운 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무덤을 봉쇄하는 무덤 문 같은 것이 아니라, 빈무덤의 열린 문처럼 남과 북에 갇혀 있던 것들이 밖으로 나와 서로 만나는 소통의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판문점도 지금 보다 훨씬 넓게 펼쳐 열어서 남과 북이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남쪽도 북쪽도 버리고 끝내 바다에 몸을 던진 이명준의 속 마음도, 그리고 공동경비구역의 그 사내들의 아픔도 함께 나눌 수 있지 않을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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