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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성서와 나 : 계시, 이성, 고전, 참여와 종말(이해청)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8. 5. 3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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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나 : 계시, 이성, 고전, 참여와 종말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프롤로그


역사적 예수와 관련해 한때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간주하기도 했던 웰스는 위에 인용된 고린도 후서 6장 2절을 설명하면서 왜 바울은 지상의 예수 시기가 아닌 자기의 시기를 구원의 날로 선포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다시 말해, 예수가 지상의 인물로 존재했다면 구원의 날은 바울이 선포하고 돌아다니는 지금이 아니라 갈릴리의 어느 한 때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주석을 달고 해명을 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왜 과거의 어느 한 때가 아니라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구원의 날로 선포했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이뿐이랴.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소식을 복음이라 칭하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향해 개들이라 딱지 붙이며 심지어 멸망에 이르는 소식을 전한다고 비난한다. 알다시피, 바울은 제자들처럼 지상의 예수를 본 적도 없으며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을 빚기까지 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훨씬 강경한 분파, 예를 들면 할례당과 같은 분파들과 갈등이 빚어졌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돌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구나 다른 학자들은 생애 마지막까지 바울은 예루살렘 지도자들, 특히 주의 형제 야고보와 화해를 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대담한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베르거는 『신약신학의 역사』에서 “바울의 사도 개념에 나오는 유비들은 현재적 요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파송 받은 자의 개념과 관련됨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각주:1]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성령 체험은 할례로부터 자유로운 이방선교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모든 한계들을 제거하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각주:2]라고 적었다. 나아가 은사운동 및 종말론 역시 성령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양태가 처음부터 이렇게 존재했던 것일까? 다시 말해, 이러한 이해들은 예수에게서 연원한 것일까? 흥미롭게도, 베르거는 “헬라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성령주의자로 묘사할 수 있다.”[각주:3]고 말한다. 게다가, 성령을 모르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세례까지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던 전통이 초기에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행전의 이야기를 참조하면, 바울이 어떠한 전통에 서 있는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했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달변가이며 성서에 능통했다. 이 사람은 주님의 길을 배웠고 영으로 달아올라 예수에 관한 일들을 정확하게 말하고 가르쳤으나, 오직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아폴로가 고린토에 있는 동안… 바울로가 그들을 향하여 당신들이 믿게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그에게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잘 알다시피, 성령의 역할과 체험에 대한 강조 그리고 그에 따른 신학적 전개가 바울에게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 바울은 헬라파 유대계 그리스도인 전통에 서 있는 셈이다. 사실, 이 전통에서는 “종말론은 현존하지 않는 종말에 관한 가르침이나 소식이 아닌 하나님의 현존방식이다. 만약 이것이 성령이라면 비로소 축복과 저주 또는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각주:4]는 베르거의 말처럼 성령이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전승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가 역사적 정확성이 아니라 현재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이라는 인식이 빚어지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을 보여주는 한 가지 훌륭한 예가 복음서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서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이 주님으로 고백하는 분의 지상적 생애와 그 전승마저도 자신의 신학적 이해와 필요를 위해 때론 침묵하거나 때론 다른 방향으로 유도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장 6절),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갈 6장 17절)는 그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이라는 바울의 선포는 기괴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물론, 바울의 이러한 노력과 수고는 성서가 역사적 정보를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담고 있는 문헌이라며 성서무오설을 고집하는 문자주의자들이나 역사에 대한 정확한 복원만이 교회와 신학을 진정으로 새롭게 세우는 길이라며 역사비평학적 주석을 힘써 외치는 자들에겐 당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때문에,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문자주의자들이나 역사비평학적 주석자들 공히 이단이라고 외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 다소 보수적인 루크 티모시 존슨의 입장을 영지주의 입장이라고 공격한 크로산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존슨은 “우리의 주제는 역사적 방법이 추구하는 과거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살아 있는 예수를 배우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런 복합적이고 비평적인 조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는 곳, 즉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각주:5]라고 받아친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각주:6]


나의 책에서 역사적 탐구가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전제에 도전했습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전제에 도전했지요. 첫째 역사라는 용어를 좁은 의미에서 정의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과거에 대해 인간이 구성한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모든 역사의 불가피하게 선택적이고 편협한 성격과, 수정의 여지가 있는 성격을 강조했지요. 둘째 부활을 초기 기독교를 출발시키고 규정하는 근원적 요소로서, 또한 역사적 방법만으로는 온전히 입증할 수 없으나 “진정한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신앙체험으로 강력하게 해석했습니다.


어쨌든, 존슨의 이러한 주장을 참고한 다음, 시계를 1세기로 돌린다면 존슨과 흡사한 이해를 지닌 사람으로 바울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존슨을 바울의 복화술사로 간주해도 무방한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현존하는 분으로서의 주님/성령에 대한 바울의 체험과 그에 따른 살아 있는 주님의 현존에 대한 바울의 강조를 존슨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존슨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7]


예수가 살아있는 분이라면, 모든 것이 변한다. 이것은 더 이상 역사적 기록과 관련되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규칙을 깨뜨린 자 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묻게 되는 문제이다. 이때 예수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시는 분이다. 다시 말해, 단지 분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기억의 대상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와 대면하여 우리에게 지시하는 대리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 관해 배운다는 것에는 예수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포함된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든 오늘날이든 바울과 존슨의 이러한 주장을 모든 사람들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크로산은 존슨을 영지주의자로 분류하고 있다. 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말을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러한 관점은 적어도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 가지 유용한 관점은 제공해 주고 있다. 그것은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이나 역사비평적 주석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성서 자체를 역사로 간주하고 문자를 고수/숭배하거나 아니면 엄격한 역사적 방법에 따라 역사를 정확히 복원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차라리 현존하는 주님/성령을 따라 이전의 전승들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심지어 변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임을 가리킨다. 내게 이것은 참여와 종말의 문제로 수렴된다. 텍스트 읽기와 관련해 에코와 데리다가 벌인 논쟁을 떠올릴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1.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된 성서


성서는 어떤 책인가 라고 물으면 일단 내 머리엔 어렸을 적, 교회 유년 주일학교 오후 시간 잘 부르던 찬송가 가사,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밌게 듣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면서 가슴이 따뜻하고 포근해지며 어느새 쉼과 위로와 관련한 여러 이미지들이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이런 순간은 대단히 짧다. 정신을 차리고선 성서가 무엇이지 자문한 다음 답변을 주고자 애쓰지만 곧바로 딱히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난처한 형국에 빠지게 된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디모데 후서 3장 16절,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라는 말을 은근 슬쩍 갖다 댄다. 그렇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이제는 낯설어진 용어 계시. 어쨌든, 이에 대해 라이프 성경 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각주:8]


문자적인 의미는 ‘···로부터 베일을 벗기다’, ‘펼쳐서 보여 주다’로서,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어 명확하게 밝히는 행위, 즉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속한 구원의 신비와 거룩한 진리, 또는 당신의 뜻과 섭리를 사람들에게 친히 나타내 보여 주시는 거룩한 행위를 가리킨다(고후 12:1; 엡 3:3; 골 1:25-27). ‘묵시’라고도 한다. 하나님과 관련된 신적(神的) 지식은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택하고 세우신 신실한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시마다 때마다 당신의 뜻을 보여 주셨고, 독생자 그리스도를 인간 세상에 보내 당신의 선한 뜻과 섭리를 친히 보여 주시고 또한 이루셨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주체요, 내용이며, 완성자이시다(계 1: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지금까지 되어진 계시의 내용을 책으로 기록하여 주셨다(딤후 3:16; 벧후 1:21).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인데(옵 1:1; 나 1:1; 암 1:1), 이런 점에서 성경말씀은 ‘계시의 책’으로도 불린다.


이런 정의를 보면 감동을 느끼고 무릎을 치면서 진리를 얻은 냥 자신만만해야 하지만 사실 별 감흥이 없다. 신앙생활을 너무 오래해서일까. 글쎄다. 그보다는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런 정의는 성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일단 받기 때문이다. 이미 정경으로 승인된 성서본문을 들고 이런 저런 식으로 해명하는 꼴이라고나 할까. “비록 신약성서의 책들이 하나의 수집물의 일부로서만 교회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고는 해도, 그 책들 중에 어느 것도 그러한 수집물을 이루게 되리라는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것은 없다… 1세기 말 이전에 이미 확정된 구약 경전이 있었는지, 따라서 원시 기독교가 구약을 하나의 완벽하게 규정된 통일성이 있는 것으로 인식했는지 여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 Justin에서부터 2세기 말까지는 우리는 신약 정경의 발달에 대해서 단지 불확실한 정보만을 가지고 있다.”[각주:9]는 큄멜의 말을 참조하면, 과연 저렇게 간단하게 정의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정경이 형성되는 과정과 사도들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이야기나 편지를 쓴 그 순간을 서로 혼돈하지 말라고 충고할 것이다.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사실 이것도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성서 자체 내에서도 한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대자들 간의 논쟁을 살피다보면 과연 하느님의 영감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난처한 상황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바울의 적대자들은 영감을 받지 않은 반면 바울은 영감을 받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바울과 달리 영감을 받지 않은 채 행동을 했던 것일까? 등등 여러 생각이 든다. 결국, 영감이나 계시라는 말은 정통과 이단이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삼을 때서야 비로소 타당하게 쓰일 수 있는 용어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이뿐이랴. 사람들은 계시라는 말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각주:10]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영감된 것이며 무오한 것을 믿을진대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성경도 영감된 것이며 무오한 것을 믿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예수의 말씀은 영감되고 무오한 것을 믿으면서 그것을 기록한 것은 유오한 것으로 보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곧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성서가 이처럼 무오하기에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세계관은 성경적일 때만 우리의 생활을 정당하게 인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1]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얼만을 참조한다면, 무오성 논지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사실 하나님이 영감을 불어넣어 오류가 전혀 없는 그 말씀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성서는 오류가 하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필사자들이 베낀 말씀이 아닌가? 부분적으로는 정확하게 베꼈을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부정확하게 베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자필 원고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더군다나 대다수의 사본들은 시간적으로 원문보다 수 세기나 후대의 것들이고,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각주:12] 게다가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같은 본문을 읽더라도 제리 폴웰 같은 사람은 성서에 근거해 인종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폴웰 뿐일까. 흑인노예들을 정당화한 서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서가 아주 요긴하게 쓰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때문에, 성서가 오늘날의 문제에 대해 정답을 주는 유일한 창구라고, 따라서 거기에 비추어 자신을 검토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스퐁의 말을 들려주도록 하자.[각주:13]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 이방인, 혹은 악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여 분리되어야 할 것을 정당화하려고, 히브리 성경의 많은 본문들을 별 어려움 없이 인용하였다. 그것은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주제였으니, 예컨대 에스라 10:12, 15, 느헤미야 13:1~3을 보라. …복음주의적인 집단에서 하는 아동훈육은 보통 신체적인 처벌의 경향을 띠는데, 이는 아이들이 죄속에서 태어난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아이들은 악마적이기 때문에 성경의 잠언이 가르치는 바대로 길러야 된다. 즉 자식이 미우면 매를 들지 않고, 자식이 귀여우면 채찍을 찾는다(잠언 13장 24절). …똑같은 정신상태는 이른바 닳고닳은 주류교회들 속에서도 보다 복잡하고도 감정적인 이슈들에 대한 대응에서 발견된다. 이런 주류교회들은 미국 남부 근본주의자들이 옹호했던 흑백분리주의 패턴을 그대로 변호하라면 매우 당혹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편견은 창조의 과정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정해진 부분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여성에 대한 편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리고 성경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정은 미국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미국의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듯한 여신도에 대한 비하나 성추행은 뉴스거리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페민을 비롯한 동성애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문구에 박힌 전투적 신앙은 타종교에 대한 무례를 넘어 말살하고자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절에 들어가 땅 밟기를 하거나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하는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더욱이 “한국은 독재를 해야 한다. 하나님도 독재를 하셨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가 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독재하는 곳”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대체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성서가 오류가 없는 진리를 전하는 책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 포이에르 바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아주 인상적이다.[각주:14]


신앙은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라고 구별한다. 신앙은 진리를 오직 신앙에로 돌린다. 신앙은 본성적으로 배타적이다. 단지 하나의 일만이 진리이고 단지 한 사람만이 신이며 단지 한 사람에게 신의 아들의 독점권이 소속된다. 다른 모든 것은 무이며 오류이며 망상이다. 신앙은 특수한 명예감과 자기 감정을 인간에게 부여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주인에게 공적인 명예를 돌리기 위하여, 자기를 위한 모든 공적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 공적이 그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의 명예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명예감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 신앙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대하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쁘게 대한다. 신앙 속에는 악한 원리가 가로놓여 있다. … 신앙은 본질적으로 비관용이다. 신앙은 사랑의 반대물이다. … 신앙은 처벌한다.


이러한 지적과 함께 포이에르 바하는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인간과 인간 자신과의 관계,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과 자기의 본성, 즉 자기의 주관적인 본성과의 관계이다. 신적 존재는 인간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각주:15]라고 선언한다. 물론 이 같은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일말의 진실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잔혹한 종교적 행위들이 성서에 근거해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서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된 진리로 받아들이고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그것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을 윤리적으로 비인간적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인간적 욕망과 야욕을 하느님의 이름을 빌미삼아, 특히 계시된 성서라는 말을 들이대며 얼토당토않게 일삼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신존 존재는 인간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포이에르 바하의 말이 과연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성서를 빌미로 타자를 처벌하면서 동시에 자기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했다며 교회에서 칭송받기를 원한다면 포이에르 바하의 말을 한번쯤은 기억해볼만 하지 않는가.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쯤에서 사람들은 그러면 당신에게 성서란 대체 무엇이요 하고 물을 것 같다. 어만의 이야기로 대신하고자 한다.[각주:16]


나는 종종 이렇게 쓰인 범퍼 스티커를 본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믿는다. 그러면 결론은 분명하다.” 나는 그런 말에 이렇게 응답한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전해주는 책이라고 당신이 옆에 끼고 다니는 책이 만일 인간의 말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서가 낙태문제와 여성인권 문제와 동성애 문제와 종교적 패권주의 문제와 서구식 민주주의 문제 등 현대 사회의 제반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성서를 거짓된 우상으로 삼지 않고, 또한 전능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삼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서가 우리 삶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무오한 지침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명백한 이유는 많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를 파다보면 또 다른 이유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만이 유일하게 계시된 책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하는 난점이 존재한다. 일단 오늘날 카톨릭과 성공회가 사용하고 있는 성서와 일반적으로 한국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서 간에는 차이가 있다. 일반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서에는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마카베오 상, 마카베오 하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카톨릭과 성공회는 이러한 문헌들도 경전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며 소중히 여긴다. 이 문헌을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 간에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서로 차이 나지 않을까? 물론 차이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한데, 초기 기독교에서 성서란 구약이며 신약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구약이라고 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고 보는 큄멜의 말을 참조하면 또 다른 생각이 전개된다. 게다가 어만을 참조하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 것이다.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이 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동고동락한 사도들이 썼다고 알려진 또 다른 복음서들과 행전들 그리고 서신과 계시록 계열의 다른 텍스트들도 신봉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각주:17] 사실, 작고한 하바드 대학교의 신약학자 헬무트 쾨스터는 『고대 기독교 복음서들』 이라는 책에서 정경에 편입되지 못한 책들을 살피면서 우리가 가진 정경문헌들만이 사도적 기원과 역사적 우선권을 지닌다는 주장은 도그마적 편견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Q자료, 도마복음서, 구주의 대화록, 에거톤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등을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할 때 권위를 지니는 유용한 문헌으로 제시했다.[각주:18]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가진 경전이 아닌 초기 교회에서 애용되던 다른 문헌들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오늘날 제기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답을 구할 수 있는 바는 아니다. “영지주의에 속하며 페이절스가 초기의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간주하는 도마복음 끝 부분을 살펴보자. 이 대목은 절대로 페미니즘에 속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학자 캐스린 그린 매그라이트가 지적하듯이 영지주의 저술은 여성과 관련해 문제 있는 신약성경 단락들 무색하게 할 정도로 여성 혐오증이 담긴 반여성적 진술로 가득하다.”[각주:19]고 지적한 맥그라스의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경에 편입되지 않은 문헌을 들여다보면 정통이 성서를 기반으로 어떻게 여성들을 억압해 왔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게다가 정경에 편입된 경전이 보여주는 가부장적 초기 기독교와는 또 다른 모습, 특히 오늘날 제기되는 페민과 관련해 정통과는 다른 모양을 취한 또 다른 기독교를 발굴함으로써 새로운 유익을 구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여타 비전되는 문서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내세워 여성의 활동이 베드로를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간주하는 정통파 공동체 지도자들을 위협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 베드로가 저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그가 여성을 증오하기에 저는 그가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며 예수에게 베드로와 자유로이 말을 나누지 못함을 알렸다.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정반대의 의견을 펼치고 있는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서한이며 대화 내용으로 응수하였다. 가장 유명한 예는 앞서 인용한 바울의 이름을 사칭한 서한이다. 디모데 전서 및 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여자가 남자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각주:20]

어쨌든, 이쯤에서 논의를 끝내자. 중요한 물음, 즉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가 아니라면 성서란 무엇인가와 관련해 되새기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바울의 말이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중심으로 현재의 삶의 모순들을 돌파하려는 그의 관점. 현장에서 몸으로 직접 부딪혀야 하는 프론티어, 즉 선교사로서의 그의 삶, 나아가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그의 소망.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은 가슴을 울린다. 과거에 적힌 문자가 아니라 현존하는 하느님의 영을 따라 도래할 그분을 고대하며 성서에 박힌 문자를 읽어가는 방식. 성서란 내게 그러한 것이며, 따라서 읽기란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눈을 통해 읽을 때 드러나는 유한성을 인식하는 읽기다. 때문에 성서를 이성적으로 읽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찾을 때, 유용하게 쓰라고 준 도구라 믿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1. 클라우스 베르거, 『신약신학의 역사Ⅰ』, 박두환 옮김, 민들레책방, 2003, p.102 [본문으로]
  2. 클라우스 베르거, 같은 책, p.103 [본문으로]
  3. 클라우스 베르거, 같은 책, p.272 [본문으로]
  4. 클라우스 베르거, 앞의 책, p.103 [본문으로]
  5. 루크 티모시 존슨, 『살아있는 예수』, 손혜숙 옮김, 청림출판, 2012, p.31 [본문으로]
  6. 루크 티모시 존슨,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손혜숙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p.239 [본문으로]
  7. 루크 티모시 존슨, 『살아있는 예수』, p.23 [본문으로]
  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90258&cid=50762&categoryId=51387 [본문으로]
  9. W. G. 큄멜, 『신약정경개론』, 박익수,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p.482~494 [본문으로]
  10. 김의환, 『현대신학과 개혁주의 신학』, 총신대학교출판부, 1999, p.359 [본문으로]
  11.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 옮김,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1992, p.18 [본문으로]
  12. 바트 어만, 『성경왜곡의 역사』, 민경식 옮김, 청림출판, 2006, p.31 [본문으로]
  13. 존 쉘비 스퐁, 『성경을 해방시켜라』, 한성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pp.24~28 [본문으로]
  14. 포이에르 바하, 『기독교의 본질』, 박순경 옮김, 종로서적, 1982, pp.129~133 [본문으로]
  15. 포이에르 바하, 같은 책, p.46 [본문으로]
  16. 바트 어만, 앞의 책, p.43 [본문으로]
  17. 바트 어만,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박철현 옮김, 이제, 2008, p.24 [본문으로]
  18. Hellmut Koester, Ancient Christian Gospels, SCM Press, 1990, p.xxx~xxxi [본문으로]
  19.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홍병룡 옮김, 포이에마, 2011, pp.124~125 [본문으로]
  20. 일레인 페이절스,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하연희 옮김, 루비박스, 2006, 여pp.118~11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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