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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인종, 빈곤, 다름의 고통과 갈등: 나와 타자들의 공생을 넘어 상생을 위하여(김혜란)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6. 1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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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빈곤, 다름의 고통과 갈등: 나와 타자들의 공생을 넘어 상생을 위하여

 


김혜란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클래아몬트 대학 강의차 미국 로스앤젤레스 LA 에 지난주 갔다. LA 를 여러번 가 보았지만, LA 다운타운에 정착된 한인타운이 있는 곳을 제대로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LA에서 40년을 살았고, 그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 (이민상담, NGO 조직활동)을 한 목사님의 훌륭한 안내로 짧지만 굵게 LA 한인 사회를 보게 되었고, 그 관점으로 미국의 모습을 다시한번 보게 되었다. 그에 대한 미력한 생각을 이 지면을 통해 나누고 싶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LA는 한국을 빼놓고, 전 세계에서 가장 한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한인타운을 가면, 한인들이 세운 은행들도 몇 개가 되고, 큰 백화점 수준의 커다란 빌딩이 즐비해 있다. 소위 그 빌딩숲을 걷다보면, 여기가 한국, 아니 서울 대도시를 걷고 있는 착각을 하게 된다. 안내를 해 주신 그 목사님은 여기는 “서울시 LA, 나성구” 라고 사람들이 부른다고 알려주셨다. 홍익대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신세대 카페도 있고, 50년전 오픈한 오래된 음식점도 있다. 옛날과 오늘이 공존하는 이 곳, 한국 문화와 다양한 미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모습과 함께 끔찍한 모습을 함께 보게 되었다.

이번 LA 방문에서 본 가장 충격적인 모습은 바로 텐트촌이다. 집과 일자리가 없는 흑인 (Afro-Americans)들이 도심에서 빌딩과 빌딩사이 골목안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수백개의 텐트가 화려한 빌딩, 아름답게 조경된 그 도시 구석 구석에 퍼져있음을 발견했다. 제대로된 잠자리는 커녕,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먹을 곳도 없는 그 곳에서 이들은 하루 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도 못했고 말을 해보지도 않았지만, 텐트에 사는 많은 이들의 얼굴 (아이와 노인, 젊은이, 어른들)은 삶의 고뇌, 생존을 위해 견디는 아픔으로 가득차 보였다.

밤에는 가면 위험한 곳이란다. 골목 사이에서 총기, 마약, 폭력, 매춘들이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살기위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 텐트촌, 도저히 인간적인 삶으로 볼 수 없는, 거의 좀비에 가까운 모습, 묵시록에나 나올 법한 그 광경은, 그 텐트촌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 대안 하나를 제안했다. 이는 도심한복판에 이들을 위한 쉼터, 노숙자 센터를 마련하는 것이다. 어디에 노숙자 센터가 들어설까? 바로 한인타운이라고 한다.

한인타운 한 복판에 LA 시 소속 공영주차장이 있다. 나날이 치솟는 부동산 가격, 그 도심에 쉼터 자리를 찾기가 어렵기에, 시에 속한 그 주차장을 쉼터로 세운다는 계획이다. 겉으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대안같다. 그런데, 이 대안이 LA에 사는 한인들을 불편하게 한다. 아니, 그 쉼터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왜?

LA 한인타운은 주거공간이라기보다 고용공간이다. 즉 그 타운에서 다양한 사업, 상업들이 이루어진다. 물론 은퇴한 한인들이 사는 시니어홈도 있다. 차가 없어도 대중교통, 도보로 필요한 것을 이용할 수 있고 그 안에 쇼핑몰, 식당, 병원, 은행, 공원, 교회들이 다 집중되어 모여있기에, 연로하신 한국분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한인타운을 찾는 분들은 소위 일을 보러 오는 것이다. 일을 하러, 일을 보러, 장을 보러… 그런데, 그 곳에 노숙자 쉼터가 들어서면, 사업, 상업에 지장이 있다고 한인타운에서 반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수백개의 한인교회들은 반대시위를 주일에 벌이고 있었다. 2018년 벌어지는 이 사건은 1992년 Rodney King LA 폭력사태, 한인타운에서 벌어진 흑인과 한국인 분쟁사건, 이른바 “사이구(429)” 사건을 연상케한다. 아니, 한인타운에서 그 사건을 겪은 이들에겐 트라우마가 재현되는 것이다.

지극히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한 LA 시의 쉼터제안이 왜 사이구사건의 트라우마를 재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사이구 사건으로 돌아가야한다. 사이구사건은 흑인 운전수Rodney King에게 폭력을 가한 백인 경찰이 무죄 선고를 받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부정의한 재판결과에 분노한 흑인들의 백인 공권력에 관한 폭동이 1992년 사이구사건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흑인의 폭력이 행해진 곳이 한인타운이었다는 점이다. 왜 백인공권력에 대한 분노가 한인들에게 향해졌을까? 4월 29일부터 약 1주일간 벌어진 이 폭동으로 90% 한인타운이 파괴되었다. 거의 전쟁에 가까웠다. 60명이 살해되었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폭동이 시작되자 마자 미국 백인 언론방송은 한인에 의해 희생당한 흑인소녀이야기를 집중 보도함으로써, 흑인들의 백인공권력에 대한 분노를 한인들에게 가도록 파행적으로 보도했다. 백인우월주의 (수구주의)에 입각한 언론조작이었다. 경찰은 흑인들의 분노가 백인들, 부자들이 사는 베버리 힐스와 할리우드에 가지 않도록 이들만을 지켰다고 한다. 백인특권층을 보호하기 위해 한인과 흑인이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는 것을 방기한 것이다. 이것이 백인우월주의와 공권력이 만난 제국의 모습이다. 그 제국의 폭력 (방기)에 소수 인종들이 희생당한 것이다. 그렇게 한인들이 흑인-백인 인종갈등의 희생양이 되었다.

물론, 한인들과 흑인 간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흑인들에 대한 한인들의 폄하, 선입견, 무시가 있었다. 한인들의 이주와 사업으로 많은 흑인들이 집터, 일터를 잃은 것도 사실이다. 약자였던 흑인들은 성공하는 한인들에게 질투와 시기가 있었고, 백인들에게는 못하는 폭력을 소수인종인 한인들에게 행했다. 그 점에서 보면, 미국사회에서 성공한 한국이민자들은 그 사회 특권층이요, 흑인들의 피땀으로 세워진 나라의 혜택을 보는 자들이다. 그러나, 한인들의 미국 이주와 흑인들의 열악한 삶의 현실은 식민주의 (노예제도 포함)와 미국 문화 제국주의, 신자유자본주의, 국제화의 문제와 동떨어져 사고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억압과 이슈의 교차성 (인종, 식민주의, 계급, 문화, 이주)의 한 가운데, 텐트촌이 있다. 텐트촌의 발생, 증가는 결국, 인종, 빈곤, 계급 간 양극화와 다름의 갈등이자 식민주의,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의 산물이다. 그리고, 약자인 소수 인종을 가르게 하고 그리하여 백인특권층의 이해를 보호하는 정책이다 (divide and conquer). 사이구사건을 분석한 신학자 조원희는 이를 두고, 파이하나를 두고, 한국인과 흑인들이 그 파이 조각을 먹기위해 갖기 위해 서로 싸우고 갈등하는데 몰입하는 동안, 그 파이를 구운 자들 (경제적 자본주의 엘리트, 시공무원 간부, 권력을 가진 정책입안자)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한인-흑인의 갈등을 통해 이들이 얻을 이익, 이들의 무책임을 우리도 모르게 방조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각주:1]

그런 점에서 텐트촌의 현실, 한인타운에 세워질 노숙자 쉼터의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바로 이 쉼터 제안을 준비할 때, 파이구운자들이 (시청 직원들, 정치인들) 한인타운협회와의 상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곳을 일터로 집터로 삼고 살고 있는 한국이민자들의 공간에 대한 기본 존중과 인식이 있었다면, 적어도 그들의 동의를 얻기위해 한인들과의 조정과 의사소통을 해야했을 것이다. 아니 해야한다. 만약 이 곳이 한인타운이 아니고 백인특권층이 사는 곳이었다면 아무 상의와 동의없이 쉼터를 세우겠다고 시가 선언했을까?

텐트촌에서 죽음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100% 흑인이다. 이 텐트촌은 미국 흑인-백인 인종갈등의 연속선상에서 벌어지는 폭력이자 부정의의 얼굴이다. 흑인노예제도를 미국의 원죄로 말한 신학자 Larry Rasmussen의 주장처럼, 이 원죄는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고 현대판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이어진다. 텐트촌에 사는 이들은 소위 과거의 노예는 아니지만, 노예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거기서 한인들도 고통을 겪고 있다. 동시에 한인들도 이들의 고통으로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나 (한인)와 타자 (비한인, 소수인종, 그리고 백인) 가 공생하기 위해, 서로 총을 겨누고, 파이를 먹기 위해, 땅따먹는 싸움을 하지 않기 위해, 한인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인종차별 의식, 편견과 무지를 깰 필요가 있다. 동시에, 가르고 정복하기 (divide and conquer) 논리에 빠지지 말고, 그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백인 우월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함께 연대할 필요가 있다. 서로를 알기 위해 만나고, 서로의 고통과 상반된 이해관계를 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힘을 길러, 공권력, 백인특권층 세력에게 문제제기를 하고, 또다시 사이구와 같은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공생 (단순히 함께 사는 일)을 넘어 상생 (서로에게 의존하고 삶을 나누는)의 길로 가길 기원한다. 아니 각자 우리의 삶의 공간을 그렇게 만들어보자. 이 공간을 위해 내가 받은 혜택, 기득권, 또는 희생이 무엇인지 성찰해보자. 그 성찰 후 상생의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해야할 일을 정리해서 실천하자!


ⓒ 웹진 <제3시대>



  1. Wonhee Anne Joh, Heart of the Cross: A Postcolonial Christology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2006), 4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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