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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예멘 난민, 인권의식 정립할 기회다(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8. 7. 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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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난민, 인권의식 정립할 기회다[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인권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던 노태우 정권은 1990년 국제인권협약, 1991년 국제노동기구(ILO),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 ‘유엔난민협약’에 연달아 가입했다. 마찬가지로 인권과는 거리가 먼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2년에 ‘난민법’이 제정되었다. 대표발의자는 한나라당 의원인 황우여다. 판사로 재직할 때부터 숱한 반인권적 판결들로 유명했던 그가 이 법안을 주도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법은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제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수정권들이 인권문제를 제도화하는 데 앞장섰다. 시민사회가 거세게 주장한 인권문제들을 외면하고 심지어 탄압을 일삼았던 정권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이러니하지 않다. 한국의 역대 정권들이 거의 그렇지만 특히 보수정권의 인권 지수는 심각할 정도다. 몇몇 인권 관련 국제기구나 협약에 가입한 것은 대내외적 이미지 정치의 수단에 다름 아니었고, 실제적인 인권 개선에 보수정부들이 만들어놓은 제도들은 거의 실효성이 없었다.

그 난민문제가 그 대표적 사례다. 2015년 세계 난민 인정률이 37%인데 반해 한국은 1.8%였다. 1994~2015년까지 한국의 난민 인정률도 고작 3.8%에 그친다. 그나마 10%를 상회했던 때는 참여정부 시절에 심사가 진행된 몇 년에 불과하다. 또 난민 지원시설, 지원금, 지원프로그램 등에서도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최하위 수준이다.   

이런 최악의 성적표를 갖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인권 친화적 정부를 자처하는 문재인 정권이 탄생했다. 이 정부의 정치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참여정부 시절에는 집권세력의 힘은 미약했고 보수세력은 막강했다. 반면 이 정권은 출범부터 빈사상태에 빠진 보수세력을 압도하는 국민적 지지를 받았고, 그 후 1년이 지난 지금 보수는 회생불가로 보일 만큼 궤멸 상태에 있으며 대통령과 정권 지지율은 더욱 높아졌다.

물론 지난 두 정권이 초래한 경제적 파탄과 미국의 극한적 보호무역주의가 낳을 세계 경제위기의 조짐은 이 정부가 인권의 정치에 큰 관심을 기울일 여유를 앗고 있다. 그럼에도 시민의 촛불정신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로선 인권문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숙제다.  

마침 제주도로 들어온 500여명의 예멘 출신 유랑이주민들이 인권문제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들을 난민으로 받아줄 것인가를 두고 전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부는 이 논쟁을 경청하면서 당면한 문제에 대해 빠른 방안을 찾아내야 하지만, 동시에 유엔난민협약 가입국이자 난민법을 보유한 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인권적 정의에 동참하는 것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설득해야 한다. 국민과 국가가 함께 성숙해지지 않는 한, 보수정권들의 영혼 없는 이미지 정치는 개선될 수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전 세계 난민의 수는 급증했다. 20세기 초·중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엄청난 난민이 발생했던 때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유엔난민기구의 2017년 동향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현재 세계 난민의 수는 6560만명에 이른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은 난민문제에 대해 충분하진 않아도 비교적 ‘잘 준비된’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난민 현상은 그런 정도의 ‘준비’로는 감당할 수 없어, 수많은 세계의 지성들의 절절한 고언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파시즘 현상을 연상케 할 만큼 반지성주의적 극우주의 현상이 극심해졌다.  

반면 한국에선 난민문제가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한 뒤에도 오랫동안 아무런 대책이 없어도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지 않을 만큼 소소했다. 그런데 최근 난민 신청자가 급증했다. 2011년에 처음 1000명을 넘었고, 올해는 1만명이 넘을 것이 예상된다. 미국과 유럽에 비할 수는 없어도 이제 이 문제에 대해 더 미룰 수 없는 시간이 도래했다. 그런 차에 예멘 난민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도 그들은 수만 혹은 수십만명이 아니라 500여명이다. 그 정도는 현재의 우리로서도 감당할 만하고, 하여 미래를 대비할 틈도 생겼다. 우리에 비해 훨씬 수준 높은 제도와 인프라, 그리고 담론적 성과물이 넘쳐나는 몇몇 서구 국가들도 오늘의 심각한 난민문제 앞에 극심한 사회 혼란과 혐오주의로 물들고 있는데,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한가롭게 대비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이때를 놓치면 개신교 극우파를 포함해 혐오주의를 부추기는 이들이 사람들의 당황한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을 수 있다. 그러면 한국은 더욱 인권 퇴행적 사회가 될 것이고, 그 결과는 한국인 자신도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로 귀결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7132056015&code=990100#csidxd2a39b8cfe69fccb7bec285c312c45d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7. 13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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