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묵시록 14 : 대중문화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설국열차


    <설국열차>란 특이한 제목의 영화가 묵시록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건 그 영화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알고 보니 그 영화의 원작은 이미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만화였고, 미국에선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기대하면서 기다리던 마니아들이 많았었다. 다행히 동네 도서관에 영문 번역판이 있어서 빌려다 보았다. 그런 정성까지 들인 이유는 묵시록 장르의 소설이 한국에서 어떤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했고, 또 서구사상의 깊은 열망이 담긴 묵시록이 한국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최근 <부산행>이란 좀비 영화도 동일한 궁금증을 갖고 보았다. 비서구권에서 일본은 핵폭탄의 경험을 통해 묵시록의 영화가 일찍부터 등장했고, 대재난과 몰락의 서사는 일본의 대중문화 속에 중요한 일부로 남아있다. <설국열차>는 지구에서 생명이 끝날 때 멈추지 않는 기차에 올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고, <부산행>은 죽은 자가 깨어나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좀비영화의 일종이다. 좀비 영화가 지속해서 유행하는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패러디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미 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고도 죽지 않고 좀비와도 같이 사람들을 파멸의 길로 끌어들이는 자본주와 이를 피해 쫓겨 다녀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 속에서 찾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좀비는 바이러스를 통해 유지되고, 인류가 멸종하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묵시록의 의지로 무장해 있다. 두 영화에서 묵시록에 대한 한국적인 해석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찾기 힘들었던 건 그런 의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설국열차>에서 한국인 주인공의 등장은 묵시록의 주제를 희석시키기도 하지만, 원작에서부터 드러나는 세상이 망한 이후에도 인간사회의 갈등이 존재한다는 문제의식은 영화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설국열차>의 기차는 목적 없이 궤도를 돈다. 목적이 없는 게 아니라 엔진이 꺼지지 않고 끝없이 얼음과 눈 위의 궤도를 돌아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움직임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기차 안에는 끝나는 세상을 피해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있다. 남들보다 먼저 기차를 탄 사람들은 엔진이 있는 앞부분에 자리를 잡고 뒤편에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계급과 차별과 억압이 존재한다. 사람 사는 곳에 종교가 없을 수 없다. 기차를 지키는 게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기차는 종교였고 엔진은 신으로 섬김을 받는다. 속도가 떨어지는 기차의 엔진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원작의 줄거리다. 영화에선 기차가 멈추어도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와 같은 최근 미국의 포스트 묵시록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토피아의 건설은 세상이 철저히 망해야만 가능하지만, 세상이 망하게 되는 과정이나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에 심판이나 재림은 없다. 대중문화 속의 묵시록이 세속화된 것을 보여준다.


미국과 영화


    활동사진의 기술을 우리가 아는 영화로 만든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에게 영화는 기술이나 예술 또는 오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영화에서 미국을 발견했고, 또 영화를 통해 미국을 생산해냈다. 그 결과 우리의 상상 속의 미국과 영화는 분리될 수 없는 상태에서 미국은 영화로 또 영화는 미국으로 남아있다. 20세기의 역사가 견딜 수 없는 악몽의 역사였다면, 실제와 가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미국이 현실 역사의 대안으로 혹은 역사 없는 초현실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아도르노(Adorno)는 영화와 미국이 하나가 되는 모호함을 자본주의 영화산업 때문이라 파악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미국의 현실 도피적인 병리 현상이라고 판단했다. 반면에 보드리야르는 미국이라는 사건이 역사가 아니라 영상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미국을 그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실험장으로 삼았다.


    미국의 사막과 고속도로에 주목한 것은 보드리야르만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서부 곧 미국 문명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사막과 그 문명의 상징인 대륙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그리고 그 둘이 만나 형성하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형상은 미국에 대한 상상에서 빠질 수 없다. 생명의 습함을 앗아가는 사막의 광활함은 역사가 비껴간 빈 공간으로 이해되었고, 그 위의 도로는 임의적인 두 장소를 이어주는 길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형이상학의 기호를 연상시켰다. 사막의 형이상학은 프랑스 학자들 특유의 심오함이 아니어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막은 극기와 수양과 초월의 의지를 시험하는 곳이었고, 이를 통해 접신을 꾀했던 공간이었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던 청교도들이 상상했던 광야의 미국적인 원형이 사막이었다. 서부영화에서 사막은 선과 악이 벌이는 최후 결투의 장소였다. 그 장소는 문명의 타협과 계산이 통하지 않는 곳으로,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다만 지리적인 장소에 불과했다. 여기서 선과 악은 제도화되지 않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었다. 사막은 미국 서부의 끝이고, 한때 서구 문명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그 끝에서 역사의 끝, 곧 묵시록의 사건을 상상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사막의 토양 위에 할리우드라는 환상과 자본의 산업이 탄생해 미국 그 자체를 재생산해온 것이다.  


    미국역사에서 사막이 묵시록의 무대였다는 사실은 영화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사막은 과거 핵실험의 주 무대였고, 지금도 종말의 핵무기들이 대기 중인 곳이다. 무수한 외계인과 UFO에 관한 음모와 소문의 진원지이다. 네바다 사막의 ‘Area 51’이란 곳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거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군사기지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막의 묵시록은 당연히 영화를 통해 완성됐다. <매드맥스> 영화 시리즈가 사막에서 벌어지는 종말의 전투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지만, 사막이 핵전쟁으로 생명이 사라진 세상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사막의 묵시록을 다루는 영화는 많다. 묵시록이 최근 종교가 아니라 영화의 장르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해서 그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건 아니다. 묵시록에서 종말은 언제나 세상의 종말이고, 그 종말이 누구의 행위 때문에 시작되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종말의 사건들이 묵시록이란 예언이 변하는 방식이 중요하고 그 방식은 대중문화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읽는데 매우 중요하다. 묵시록의 영화는 미국의 영화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단지 그런 영화들이 흥행성 때문이 아니라 미국역사의 묵시록을 이어받아 그 이념을 지속해서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역사의 시작부터 세상의 종말에 관심이 있었다. 영화 산업이 출범하던 시기가 서구 문명의 몰락을 고했던 1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이유도 있었고,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매체로 영화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장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적인 것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것이었고, 전쟁만큼 실제의 극치는 없었다. 20세기 첨단의 무기는 인명 살상만이 아니라 세상의 파괴를 가능케 했고, 그 파괴된 세상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는 작업을 영화화해낸 측면이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속의 묵시록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상이다. 세상을 한순간에 끝낼 수 있는 핵무기의 등장이 가져다 준 정신적인 분열과 충격은 이루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세상의 종말만큼이나 창의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195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묵시록의 영화는 다양한 종말의 사건과 그 결과를 예측해 주었다.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파괴된 세상의 종말론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슈퍼맨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구하는 서사는 할리우드 영화가 완성한 묵시록의 구조였다. 최근의 묵시록이나 디스토피아 영화에선 구원자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해피엔딩이 아니라 고통과 좌절의 사건들을 반복되는 영화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건 세상이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암묵적 합의가 공동체 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할 에덴동산도 없고, 꿈꿀 유토피아도 없는 세상은 이루어진 묵시록 또는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말한다.


공룡의 상상력


    1950년대 미국에 고속도로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시카고에서 제일 중요한 도로는 미시간 호수를 옆에 끼고 도심을 남북으로 가르는 레이크쇼어라는 길이었다. 1990년대 재공사를 하기 전까지, 그 도로를 타고 도심을 지날 때면 한 박물관을 정면으로 보고 달리다 그 건물을 우회해서 지나가게 돼 있었다. 마치 그 웅장하고 고전적인 건물을 바라보면서 경의를 표하고 그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받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 건물은 자연사박물관이었다.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란 개념이 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과정도 매우 흥미롭지만, 미국에 있는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기울이는 투자와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필드뮤지움이라 불리는 시카고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물은 단연코 ‘수’(Sue)란 이름의 공룡이다. 13m의 길이에 현재까지 발견된 공룡 가운데 가장 크고 많은 뼈가 남아 있는 T-Rex(티라노사우루스)라 한다. 인기가 많아 다른 나라에 대여되기도 한다. 몇 천만 년 전에 살았다는 동물에 대해 현대인들이 갖는 관심은 합리적이라 하기엔 너무 과하다. 화석이 된 공룡의 뼛조각을 근거로 생겨난 공룡 산업은 영화에서 박물관 그리고 관광상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규모가 크다. 미국의 여러 주는 그 주의 공식 공룡까지 지정해놓고 있고, 모든 주들은 공식 화석을 갖고 있다. 일례로 일리노이 주는 털리몬스터(Tully Monster)라는 삼천만 년 전에 살았다는 해조류 동물의 화석이다. 동물의 화석에 대한 환상적인 애착, 그 긴 시간의 거리를 애써 무시하고 인간과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의지를 어떻게 설명할까? 지구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탐구 정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최소한 문명의 무의식적인 부분까지 생각해야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관점에선 화석화된 동물에 대한 애착과 그 속에서 인간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를 ‘멸종’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공룡에 대한 관심은 공룡이 멸종했다는 데에서 출발했고, 더 나아가 멸종한 공룡의 뼈를 발굴해 전시하고 또 찾아가 이를 확인하고 증언하고자 하는 현상을 종교적 종말론의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구 사상사에서 화석의 의미는 매우 흥미롭다. 어떤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기독교 세계관에 더 큰 충격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천문학은 우주의 찬란함을 연구해서 신의 섭리를 깨닫고 영광을 돌린다는 의도의 자연과학 발전을 초래했고, 화석의 발견은 지구과학 발전의 동기가 됐다. 하지만 화석의 발견은 성경을 역사책으로 보던 시각에 큰 도전을 의미했고 인간이란 존재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혔다. 코페르니쿠스보다 다윈이 서구역사에서 더 큰 논란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화석의 의미는 그 동물이 멸종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멸종이란 개념은 18세기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멸종이 인간의 세상 인식에 등장하면서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에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에 살았던 동물 중에 지금은 멸망해서 사라진 동물의 종이 있다는 사실은 신의 계획에 따라 창조된 세상에 대한 믿음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신이 의도를 갖고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 세상의 일부인 동물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창조질서에 대한 믿음도 문제였지만 멸종이 가져다준 또 다른 문제는 종말에 대한 이해에 있었다. 기존의 종말론은 신의 뜻 안에서 역사가 끝나면서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었으나, 멸종으로 종말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끝이 한 번만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종말론을 뜻하는 것이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세상에 존재했던 동식물 중 절대 다수가 이미 멸종했다는 연구결과는 신과 창조물의 관계 그리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하였다. 인간의 끝을 멸종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본질을 새로운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멸종을 설명하는 일은 이후 많은 학자들이 풀려고 했던 오랜 숙제였지만 그 의미는 지구역사의 이해나 지질학의 범주를 넘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이유가 있었다. 종말론에 대한 관심과 세상에서 인간이 갖는 의미를 찾는 관심이 반영된 것이었다. 멸종에 대한 근거를 처음 제시한 조루즈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멸종의 이유로 홍수를 포함한 어떤 커다란 재난이 지구를 덮쳤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윈의 진화론도 멸종의 원인을 제공하는 이론이었다. 퀴비어의 재난설을 거부한 다윈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 등의 논리로 적응력이 떨어지는 종이 자연적으로 도태된다는 설명을 했다. 특히 다윈은 멸종하지 않은 동물도 진화를 통해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 간다는 이론을 펼치면서 인간의 존재 역시도 상대적이고 우연적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가능성을 제기했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의 충격은 기독교 신앙에만 가해진 게 아니었다. 멸종과 멸망이 신의 주권과 권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의 내적인 구성논리에 의한 것이란 인식은 재난 묵시록의 보편화로 나타났다. 종말의 묵시록이 종교인들만의 세계관이 아니라 소설과 영화와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일반적인 세상 이해가 된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멸종의 가능성이 신의 불완전함을 의미하고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그 논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멸종에 대한 언급 없이 창조의 목적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고, 멸종이라는 게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에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논리도 등장했고, 멸종되어 사라진 동물들이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란 입장을 펼친 사람도 있었다. 멸종을 설명한 다윈의 진화론은 19세기 미국에서 무신론의 원형으로 또 사탄의 이론으로 비판받고 근본주의가 형성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지금도 멸종과 창조질서가 병행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의 실제적인 주제는 종말론이다. 성서적이라는 종말론과 다른 종말의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충돌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드러나는 건 서구 사상사에서 종말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 중요성은 오늘날 화석이 된 공룡의 뼈를 발굴해 모셔놓고 또 설치된 뼈를 보기 위해 몰려오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현상은 생명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집념을 드러낸다. 최근 멸종된 동물에서 DNA를 채취해 다시 탄생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공상과학의 논의는 멸종을 번복할 수도 있다는 종말론의 새로운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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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는 곳[각주:1]

성령을 둘러싼 세 가지 에피소드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 1:2)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다.”(요3:8)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행 2:4) 



프롤로그 


    키에슬로브스키라는 폴란드 영화 감독이 있습니다. <십계>(1988) <살인에 관한 짦은필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88),<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세 가지 색: 블루(1993), 화이트(1994), 레드(1994)>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초기 작품들에서는 동구권 특유의 사회주의적인 리얼리즘에 입각한 사회적 문제를 영화화 하였고,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이야기, 선 굵은 주제의식보다는 단일한 해석으로 묶일 수 없는 사건과 의미의 유동성, 혼종성으로 주제를 옮겨갑니다. 특별히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색> 시리즈에서는 이데올로기적인 허위의식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보다는, 우연과 improvisation (즉흥성)이 어쩌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고 영위케하는 본질 아닌가, 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우연과 즉흥성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들끼리의 관계, 사랑과 미움들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 바로 <세 가지 색: 블루> <세가지 색: 화이트> <세가지 색: 레드>입니다. 블루에는 ‘뽕네프의 연인들’로 막 뜨기 시작한 즐리엣 비노쉬가 나왔고, 화이트에는 비포선 라이즈에 나왔던 쥴리델피가 나오죠. 레드에는 이렌느 야곱이 나옵니다. 블루(자유), 화이트(평등), 레드(박애) 프랑스 혁명의 3대정신인데, 영화가 이것을 제목으로 삼은 이유는 역으로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 구속이고, 불평등 관계이며, 미움과 증오가 작동하는 이드(Id)의 장인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순수하고 절대적 이상과 가치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인간사이 부자유한 관계 속에, 불평등한 관계 속에, 평화롭지 못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그것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자유와 평등과 사랑은 불가능한 가능성의 형태가 아닐런지요.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늘 뜻 초반에 한 이유는, 제가 오늘 하고 싶은 성령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의 도입을 이끌어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늘 뜻 제목을 <성령에 대한 세 가지 에피소드> 라 붙였습니다. 과연 성령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면 성령이 손에 잡힐까요. 그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Episode 1 : 빛과 성령


   여러분 성령받으셨나요? (보통 영화에서는 아멘 합니다) 성령이 무엇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 혹은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성령체험의 상태는 무엇인지, 뭐 이런 것이 성령론의 주된 테마입니다. 90년대부터는 영성이라는 말로 진화되어 사용되었고, <사회적 영성>에 대한 책도 나왔죠. 흔히 ‘성령을 받았다’함은 종교적으로‘깨달음을 얻었다’라는 말로도 전환이 가능할 것 습니다. 각 종교마다 ‘깨달음’을 중요시 하죠. 일시적. 찰나적 깨달음을 중시하는가, 아니면 깨달음의 수행적 측면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종교적 파벌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제가 2주전에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주기도문을 테마로 한 마지막 하늘 뜻을 나누면서 악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가 거라사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 축귀하는 사건을 통해 악의 전체성, 집단성에 대해 밝혔습니다. 이 구절 이외에도 성서에서 악이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구절은 곳곳에 많이 분포합니다. 그것은 창세기를 펼치자마자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 2-3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혼돈, 공허, 어둠, 깊음>의 단어는 악이 삶에서 출몰할 때 벌어지는 악의 현상학이 아닐까 합니다. 혼돈과 공허는 일종의 쌍입니다. 혼돈은 형태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겠고, 공허는 비어있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둘 다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 구분이 되지 않고, 판단이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이죠. 인간은 모르면 불안해하고, 형체나 대상을 짐작할 수 없을 때 공포를 느낍니다. 유령은 바로 형상이 없는 존재입니다. 형상과 질서가 있어야 세계와 자연은 안정을 찾고, 그 안정된 터전위에서 비로소 생명은 피어나고 활동을 개시합니다. 혼동과 공허, 카오스적인 상태에서는 불안과 공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의 저자들은 혼돈과 공허를 악의 근원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다음 창세기 구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루아흐 엘로힘; a wind from God)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깊음> 이 가득한 곳에 하나님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공식적으로 한 첫 번째 음성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빛이 생겨라”, 그 다음 구절에 보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적혀있고,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고 어둠을 밤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사실은 영을 빛과 연관시키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정신사에서 진행되어 왔던 온갖 종류의 빛의 해석학과 현상학의 기원이 됩니다.

    빛(밝음, 이데아, 근원적 진리)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형이상학의 동심원적 구조에서, 변방과 주변은 빛의 효력이 비치는 않는 영역입니다. 그것은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 주의서부터 근대의 계몽주의까지. 계몽주의를 Enlightment라고 하죠. 가운데 빛(Light)배치되어 있습니다. 몽매한 중세의 어둠을 빛(light)의 명증성으로 밝히겠다는 의지가 계몽이성입니다.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서구 역사에서 대상들은 타자로 설정되었고, 빛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상은 타자화되어 정복과 계몽과 타도와 착취와 훈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은 곧이어 등장하는 ‘빛의 탄생’과 연동되어 빛과 어둠을 나누어 배제와 혐오의 메카니즘을 작동시키는 처음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라는 불순한 생각을 들게 합니다.


Episode 2 : 성령의 유령성(Haunting)


    두 번째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성경구절은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대 사람의 지도자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는 구원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달려온 니고데모에게 “그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와같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이때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바람이 불어가는 곳은 ‘어디(Where)’라는 의문사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goes). 예수에게 있어 바람이란 과거의 어디론가 부터 불어오는 바람이고, 또 그것은 어딘가를 향해 불어가는 바람입니다.

    의문사 where로 처리된 공간과 시간은 메시아의 때이고 메시아의 공간임을 암시합니다. 성서는 그 시간과 공간을 빈 시간과 공간으로 남겨둔 채, 즉 메시아의 도래를 텅빈 기표로 남겨둔 채, 바람이 들고 날 수 있도록 허락 하였습니다. 그 바람이 어딘가에서부터 불어와 우리를 감싸고 우리를 데리고 어딘가로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는 이것을 ‘바람이 분다!’라는 시적인 문장으로 진술하였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성령은 빛의 명증성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오히려 어떤 진리에 대한 강박과 히스테리에 빠져있는 니고데모를 향해, 성령충만을 갈망하고 그것을 향해 질주하는 오늘의 신앙인들을 향해 찬물을 끼어얹는 듯합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성령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에 대해 딴지를 걸면서, 현실에서 불순물과 균열과 틈으로 존재하는 성령의 유령(Haunting)성에 대해 요한복음은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 대목에서 나는 또다시 데리다를 초대합니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리다는 잘 아시다시피『맑스의 유령들 Specters of Marx』(1993)을 출판하였습니다. 당시는 1990년 사회주의 멸망 이후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왕성하게 진행되던 무렵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유령론에 대한 모티브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 있는 한 구절,“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에서 빌어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자본주의가 본 궤도에 진입하고 있을 무렵,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마로 공산주의를 도모했던 자들(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가상적 시나리오가 작성되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가 그 운명을 다하고 사라진 후에 유령이 되어 전 유럽을 떠돌아다닌다는 상상이었습니다. 그들의 치기어린 생각은 얄궂게 현실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실제로 1990년도에 공산주의는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20세기 내내 실험되었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1993년에, 세계를 평정한 자본주의에 대한 송가가 흘러넘치던 그 무렵, 생뚱맞게 데리다가 『맑스의 유령들』을 들고 나오면서 다시금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도래를 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 지구적으로 승리한 자본의 제단에 재를 뿌리는 역할을 한 셈이죠.

    본래 유령에 대한 논의는 심령과학 혹은 환타지 소설에나 등장하는 것이지, 철학과 담론의 장에서는 한 번도 정중히 다루어진 적이 없는 소재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분명한 언어와 개념을 지향하는 학문인 관계로, 유령과 같은 불확실하고 초현실적인 개념은 취급불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유령을 끌어들여 현실의 법칙이 되어버린 전지구적 자본에 흠집을 내려는 데리다의 시도에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유령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대한 기억과 애도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제거되거나 억제될 때, 현재로 도래하는 무엇이 바로 유령입니다. 데리다는 <맑스의 유령들>에서 햄릿에 등장하는 죽은 아버지의 유령을 거론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한을 햄릿에게 갚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말입니다. 비단 햄릿에서뿐 아니라, 동서양 문학작품들에는 이런 유령이 현실로 귀환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얼마 전 공유와 김고은이 나왔던 <도깨비>도 유령의 귀환이고. <장화.홍련>도 그렇습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론의 핵심은 “time is out of joint. 시간은 탈구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혼종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변증법적 인과율과 시간의 흐름(과거-현재-미래)이 지배하는 현실의 질서가 뒤틀리고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 유령론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 2016년 늦가을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데리다의 유령론이 실재가 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월호의 유령이 대한민국의 정의와 진실을 밝히는데 있어 원동력이 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구천을 떠도는 세월호의 영령들이 우리를 지치지 않게 하였고, 그리하여 수백, 수 천만명의 시민들이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내내 광화문에서 촛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봄에 대통령 박근혜는 탄핵되었고, 5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정권은 교체되었습니다. 데리다가 살아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당신이 말했던 유령론이 한국에서 실재가 되고, 역사가 되었다”고 저는 자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주의하여야 합니다. 유령은 중심이 꽉 찬 기표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텅 비어 있는 기표와 같습니다. 바람이 우리의 손에 잡히지 않듯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성령을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라고 규정을 한 후에,“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부연설명을 하는 것 아닐런지요. 결국 성령이란 역사의 어느 풀리지 않는 매듭에서 메시아적 계기를 불어넣고 정작 자기는 어떤 체계에 갇히지 않고 불고 싶은 곳으로 사라지는 새로움 이어야 함을 예수는 말하고자 했던 아닐까요.


Episode 3 : 소통의 영


    사도행전 2장은 유명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한 성령강림에 대한 기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 보면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2:2)이 내려온 이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2:3) 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언의 은사가 발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리 한 것은 그 다음구절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2장 6절-7절).

    이 본문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간단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남왕국 유다가 587년에 망한 후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60-70년 세월이 흐른 후 에스라-느헤미아때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죠. 하지만, 그때 돌아오지 못하고 바벨론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일제시대를 연상하면 됩니다. 해방이 된 후에 일본으로, 만주로, 연해주로, 중국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거나 흩어졌던 조선백성들이 해방 후에 한국으로 모두 돌아오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부터 500년 이상 흐른 시간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오백년이면 세대로 따져도 15세대 이상이 흐른 다음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어언 70년이 되어갑니다. 지금 각지로 흩어져사는 한민족들이 이민 2세대, 혹은 3세대까지 생겨났습니다. 사할린에, 일본에, 만주에, 중국본토에, 러시아에,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잘 구사할까요?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 자제들인 경우 대부분 영어만 사용할 줄 알았지 한국말 구사는 못하는 경우가 거의 다반사입니다.

    이렇듯 2세대 3세대까지 흘러도 모국어를 잃어버리는데, 바벨론 패망 이후 500년이 넘게, 15세대, 16세대, 17세대 넘게 이방 땅에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 경우가 아니었을까요. 그들 역시 흩어져서 지금 거하고 있는 그 땅의 풍토와 문화와 언어에 동화된 채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국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다행히 야훼 신앙을 간직했던 사람들이 있어 그들 가운데 있어, 민족의 명절인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바대인, 매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보도와 아시아….등지에서 몰려들었다고 적혀있습니다(사도행전 2:9-11). 우리로 따지면 재일교포 15세, 재미교포 16세, 재중 교포 16세, 재러시아 교포 17세, 재멕시코 교포 15세, 재하와이 교포 16세, 재타슈겐트 교포 15세, 재사할린 교포 15세가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이 말을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복음을 전했겠죠: “내가 만났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그 분은 우리 같은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내가 곧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그 분이 말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뭐가 그리 놀랍다는 거죠? 내가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미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멕시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한국말을 모르죠. 그런데 성령의 바람이 임하니까 내가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나라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너무 놀라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냐? what does this mean?”

    “저 사람이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난 영어밖에 모르는데, 나는 일본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중국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한국 말은 배워 본 적도 없는데, 어찌하여 한국말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야? What does this mean?”“나는 메소보다미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갑바도기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아라비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로마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이스라엘 말을 모르는데 어찌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하는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우리가 출신 성분도 다르고, 자라온 배경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해서 그 모든 차이와 다름이 극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

    여러분 성령을 체험했다는 것은 무슨 마술적인 신비체험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와 차별을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는 공동체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순과 분열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게끔 하는 공동체 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상처와 아픔을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공동체 입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강림사건을 종합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방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치유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며, 예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성령의 능력은 차이와 다름을 매개하는 의사소통의 성령, 대화적 성령인 셈입니다.


에필로그


    제가 오늘 하늘뜻 이야기에서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다음 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한지 오십일이 되는 날 마가의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일반인들이 달력을 쓰듯, 교회전통에서는 교회력을 씁니다. 오늘이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이고, 다음주일부터 교회력상으로는 성령강림 첫 번째 주일이 시작됩니다. 성령강림이 교회역사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예수의 부재이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어왔고, 그것들은 당연히 잘 정리되지 못한 채 균열과 틈이 가득 찬 채 그대로 봉합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였다는 것이죠. 그것이 초대교회의 고백입니다. 그 성령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질문과 의혹은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성령에 대한 세 가지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성령이 제일 본인에게 맞습니까? 세 가지 성령을 우리가 다 받으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까? 어쩌면 성령이 지금 말한 저 세 가지 범주 밖 어딘가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어쩌면 성령은 성령의 텍스트성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작동하는 컨텍스트를 들여다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성령의 법칙성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문득 이 순간 지난 30년 동안 한백을 한백이게 했던 성령의 역사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창립 30주년을 맞는 올해 한백의 영성에 대해 각자가 한번 쯤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고백해보는 시간들이 가끔씩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1. 한백교회 5월28일 ‘하늘뜻 나누기’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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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우울한 노동자'[각주:1]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ㄱ은 프로그래머다. 스마트폰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한다. 어제도 새벽에 퇴근했는데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새벽에 회사로 출근했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이번주는 징검다리 휴일이 많아 하루 15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이른바 ‘전투모드’. 그러다 보면 집이 회사인지, 회사가 집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빨갛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달력에 빨갛게 표시된 오늘 날짜를 본다. 근로자의날. 막내디자이너가 근로자의날에 회사가 쉬는지 팀장에게 물었다. 팀장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그런 거 없어.”

   ㄴ은 베트남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휴대폰 부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일한다. 한 달에도 여러 새로운 제품이 나오기 때문에 부품의 종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여러 하청업체를 거쳐 일감을 받고 있기 때문에 물량이 늘 들쭉날쭉하다. 일이 없는 날은 회사 옆 컨테이너에서 일주일 넘게 쉴 때도 있고, 일이 몰리면 주말까지 잔업과 특근을 해야 한다. 베트남에서 5월1일 노동절은 국가에서 정한 중요한 공휴일이다. 그날은 일하러 가지 않고 동료나 가족들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ㄴ은 노동절에 회사를 쉬어본 적이 없다. 다른 공장 이주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날에 왜 회사가 쉬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사장이 말했다. “이놈 빨갱이네.”

   ㄷ은 오토바이 퀵서비스로 물건을 배달하는 일을 한다. 오토바이는 10년이 넘은 골동품을 타고 다니는데, 스마트폰은 화면이 큰 최신 기종으로 4개를 사용한다. 주문을 뿌려주는 중개업체마다 각각 다른 프로그램을 쓰는 데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빨리 좋은 주문을 받으려면 프로그램을 항상 켜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물건을 싣고 이동하는 중간에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물건을 전해주고 배달비를 받지만 수수료, 휴대폰 비용을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얼마 없다. “당신은 노동자입니까?”라는 질문에 ㄷ은 스스로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하루 10시간 열심히 일하지만 회사에서 정해준 일이 아닌 매일 콜을 받아 일하니 노동자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자영업자 대우받는 것도 억울하다 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둘) 사이 어디쯤 있지 않을까요?”

   ㄹ은 음식을 배달하는 일을 한다. 학교를 다니며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고 시작했던 치킨배달이 벌써 3년이 넘었다. 똑같은 치킨매장에서 일하는데 올해부터 월급을 다른 곳에서 받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월급이 아닌 ‘배달수당’을 받는다. 배달직원을 직접 쓰지 않고 배달대행업체로 위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휴대폰 터치 한 번이면 주문이 가능하고, 배달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다. ㄹ은 ‘알바’가 아닌 유니폼을 입은 ‘라이더’가 되었으나 학자금 대출금은 줄어들지 않았다. 자영업자가 되면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기 어렵고, 다쳐도 산재로 치료받기 어렵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ㄹ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도 그랬어요.”

    오늘은 127주년 노동절이다. 1년에 단 하루,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유급휴일이다. 그러나 하루 8시간만 일하며 “햇빛을 보고 싶고, 꽃 냄새도 맡아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스마트폰 게임을 만드는 프로그래머들은 오늘도 하루에 15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고 있고, 스마트폰의 부품을 만드는 이주노동자들은 고된 일이 끝나고 공장 옆 작은 컨테이너로 돌아가야 한다. 스마트폰을 4개씩이나 오토바이에 달고 다니며 하루종일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이들과 배달 애플리케이션의 등장으로 늘어나고 있는 라이더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이 발명한 가장 최첨단 기술이라는 정보기술(IT)이 발달할수록 노동권은 후퇴하고 노동자의 얼굴은 사라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0430204903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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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의 사진일기



신윤주*



9월 9일: 사치 

습도가 낮아지고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이 가벼워지고 볕은 더욱 맑아지는 계절이 책상 앞에 드리운 옅은 그림자 끝에 걸려있다. 그리고 나는 문득, 기쁜 마음으로 고요를 발견한다. 가을볕이 드는 창가를 고요히 누리는 것. 살아있음의 특권이다.


9월 25일: 자녀 

언젠가 너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염려하고 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은 눈을 뜨면 맞이하는 아침처럼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일상이라는 교묘한 함정조차 망각한 채 나는 네가 없었던 시간도 없을 시간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지금 내가 그를 사랑하는 모양처럼 꼭 그렇게. 망각할 숙명이 싫었다. 두려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망각 이후의 애도를 요청 받을 순간까지 꽤나 긴 찰나를 살게 될 거라고, 뜻밖에도 쉽게 끝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니 그때까진 모른 체 하고 살아볼까 보라고, 한번 그래볼까 보라고 말을 건넨다. 성급히 붉어진 단풍에게, 커다랗게 지는 붉은 해에게, 흙빛 심장이 시샘하는 순간의 흔적이 거기 있음으로 인하여.



9월 29일: 할머니 혹은 거짓부렁 

행복감의, 살아있음의 휘발되지 않은 잔여물이 일으키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다. 죽음은 그보다 더 거짓말 같은 것이다. 비존재는 언제나 농담처럼 건네진다. 그녀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했다. 나는 일이 년 있으면 죽을 거야. 실존의 측면에서 그녀는 나의 과거로부터 존재하나 생활의 측면에서 그녀는 다만 과거에 있다. 그럼에도, 만일, 그녀의 죽음이 도래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도적 같고 거짓말 같을 것이다. 내 인생의 두 번째 여자. 저무는 인생의 모습이 아름답기를 원하는 나의 욕망은 그녀와 나의 관계만큼이나 오래 묵은 것이다.



10월 14일: 수치 

빛은 지는 빛이었으나 색을 압도했다. 푸른 나뭇잎이 주홍빛 석양을 등에 지고 실루엣으로 변하였다. 존재는 한낱 그림자가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잎을 만나고 석양의 속임수로부터 존재를 확인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노래 한 소절을 불러보았다. 노래는 하루의 수고를 위로하였다. 숨을 고르고 말해주었다. 나역 때로 나의 존재를 구원하기 위하여 다른 존재의 진실로 다가가지 않는다.



11월 2일: 반성문 

연극 공연이 영화 상영과 다른 점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아마 그것의 재생 불가능성일 것이다. 일단 조명이 들어오고 무대가 시작되면 의도된 연출이 아닌 이상 준비한 공연이 마칠 때까지 무조건 'go'다. 요리도 그렇다. 예정된 시간에 맞춰 준비하기 시작한 요리는 신호탄과 함께 출발한 단거리 주자처럼 그렇게 앞만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요리는, 상연을 마친 공연처럼, 재생될 수 없다. 요리가 완성된 직후 그것의 온도가 아직 최적의 맛을 선사하는 동안 식사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무대를 보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특히 어떤 분야의 요리는 더더욱, 데워먹는 경우 방금 만든 음식과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음식 만든 사람은 안다.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몹쓸 '이것만 끝내고 가야지' 때문에 집에 도착한다고 한 시간이 다 되어 출발하게 되었다. 남편이 요리를 준비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내가 얼마나 잘못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반성문을 작성하였다. 여보 미안합니다.



11월 10일: 사치 II 

오늘 아침, 세 번째 마주침. 나는 그간 나무가 잎을 떨구는 거라고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가벼운 바람결에도 우수수 지는 잎을 보며 애초에 나무에게는 잎을 떨구고 말고 할 힘이 없었음을 듣게 된다. 가능한 것이 있다면, 놓치는 것뿐이다. 흩어지도록 내버려두는 일뿐이다. 우아한 흩음조차 나무의 몫은 아니다. 앙상해져가는 동안 풍성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쯤은 가능한 옵션일지 모르겠다. 또, 아주 앙상해질 날들을 준비하는 것도. 떨구는 행위인줄 알았던 것이 실은 그저 놓치는 일이었던 거라고 해도 내 손에 쥐어진 아주 작은 몫의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노래하고 싶은 아침.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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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노인의 나라에 나는 없을 것이다.



유하림*

 


    서울 시청 지하에 위치한 공정무역 카페에서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한지 2년 째다. 가끔씩 큰 집회가 있을 때면 손목이 뻐근하도록 컵에 얼음을 퍼야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리 바쁜 편이 아니다. 게다가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도 있고, 음료의 레시피도 간단하다. 흔히 말하는 꿀알바인 셈이다. 

   바야흐로 2016년 12월. 가끔씩 열리던 큰 집회가 매주 열리면서 ‘꿀알바’는 ‘쓴알바’로 바뀌었다. 시청 광장을 가득 채웠던 ‘태극기’가 카페마저 가득 채우게 된 것이다. 볼이 따갑게 세찬 바람이 부는데도, 어깨와 발등에 쌓이게 눈이 내려도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었다.

   태극기를 든 사람 중에는 노인이 많았다. 가만 보면 그들은 자못 진지해 보인다. 서로를 향해 당신이 대한민국의 희망이라고 어깨를 두드리고, ‘투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며 ‘투투사’ 라고 부르겠단다. 비록 당신들의 커피를 만드는 어린 여자 알바생에게는 “언니가 잘해주면 매일 카페에 와주겠다”고 말할지라도 탄핵반대집회에 나오는 것을 과업으로 여기는 듯 했다.

   계산하려고 꺼낸 지갑 안에 박정희 사진이 들어있기도 했고, 어디서 난건지 각종 뱃지를 단 군복을 입고 오기도 했다. 적당히 손님이 빠지면 카페 내부를 정리해야하는데 그 때마다 기괴한 것들을 발견한다. ‘계엄령을 선포하라’, ‘촛불은 종북, 태극기는 애국’이라고 뾰족뾰족한 글씨체로 적혀진 빨간색 종이,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접착성 좋은 스티커, 커다란 성조기.  

   처음부터 태극기 노인들이 카페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최순실에 대한 비리가 밝혀지고 나서 한달 정도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카페를 채웠다.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주문을 하려고 선 줄이 카페 바깥까지 이어져있어서 계속해서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었다. 특대형 쓰레기 봉투를 자주 교체해야 했고, 영업시간이 끝나면 모아둔 쓰레기만 내 키를 훨씬 넘었다. 그치만 즐겁게 일했다. ’박근혜 탄핵’이라는 문구가 적혀진 피켓을 정리하면서 몇장은 가방에 넣어 챙기기도 했고, 앞치마에는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고 연대의 의미를 전했다.

   김일성 만세의 자유 뿐 아니라 박근혜 만세의 자유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내 탓일까. 태극기를 든 노인들은 유독 일을 힘들게 만들었다. 어린 여자 알바생으로서 나이 든 손님을 상대한다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반말은 물론이고, 돈 던지기, 아무 말 안하고 서 있기, 소리 지르기, 본인 순서가 아님에도 불쑥 끼어들어 주문하기, 성희롱 하기 등 갖은 진상 짓을 마스터하여 우리를 곤란에 빠트린다. 거기에 태극기과 성조기를 나란히 든 모습이라니.

   특히 날이 갈 수록 유려해지는 성희롱 기술에 나는 더 이상 웃으며 주문을 받을 수 없었다. 조금만 미소를 보이고 친절하게 대하면 “예쁘다”, “너 때문에 내가 여기에 온다”며 불쾌한 말들을 남발했다. 스탭 중에 한 명을 지목한 뒤 쟤가 내 스타일이야 하지를 않나,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으면 노골적으로 위아래를 훑어 본다. 유일한 남자 스탭에게는 “꽃밭에서 일해서 좋겠다”며 나름의 ‘유머’를 건네고, 내게는 “커피가 네가 줘서 더 맛있다며” 나름의 ‘칭찬’도 잊지 않는다. 웃지 않는 건 선택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말이 두려워 웃을 수 없어졌을 뿐이다.

   나는 22살, 여자, 알바생.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표적이 되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태극기 노인들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나를 부른다. 기분이 안좋으면 ‘야’하고 부르고, 기분이 좋으면 ‘아가씨’하고 부른다. 내 몸을 훑고 싶으면 언제든 그렇게 한다. 그러다 한마디 건네고 싶으면 그러면 된다. 내가 농담을 받아주지 않고, 웃지 않으면 ‘좀 잘해달라’며 내 탓을 하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들은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남자고, 나이 들었고, 그들에게 나는 어린 여자 알바생이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 어린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해본 적 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꿈꾸는 자유 대한민국에 내 자리는 없겠지. 그치만 나는 그들에게 여전히 커피를 팔아야겠지.

   태극기 노인들과 6개월은 마주한 것 같다. 나는 그들이 태극기를 드는 행위에서 오는 만족감을 마주했다. 그것은 대통령을 ‘수호’하며, 나라를 ‘지킨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는 나라에 나는 없을 것이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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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3)

 

 




 

서부이촌동 고가를 지나다 보면 폐허가 된 철도 조차장의 모습이 보인다. 물웅덩이며 시간과 비바람에 의한 공장식 건축물의 속도 빠른 해체가 선명하다. 어쩌자고 도시 한 복판의 저 너른 땅은 67년 전의 전쟁 자료 사진과 닮은 꼴 모습을 여전히 하고 있는 걸까.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철도 조차장은 용산역과 더불어 일제의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철도기지로서의 신용산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번화한 길가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용산역 뒤 쪽, 이촌동과 청파로에 이르는 26만 평방미터의 거대한 덩치다.

 

 

전쟁이란게 원래 그런 건가 아님 이 땅의 전쟁이 더 그러한가. 1950년 6월 28일 새벽 800여명의 희생자를 낸 한강 인도교 폭파가 적군이 아닌 아군에 의한 것이듯 용산 조차장을 포함한 용산지역의 대대적 폭격역시 북한군이 아닌 미군에 의한 폭격이었다. UN군은 북한군의 군수물자 보급루트를 하는 용산역 구내와 철도 조차장을 폭격하여 북한군의 전쟁 수행능력을 떨어뜨리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군의 지폐인쇄를 막기 위해 용산구 용문동에 있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공장을 파괴하고자 했다. 1950년 7월 16일, 양 날개의 길이가 70미터에 달하는 B29편대 50기 이상이 서울, 특히나 용산지역을 융단 폭격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폭격에 의해 사망한 서울 시민은 4,250명, 부상자는 2,413명. 용산구만의 집계로는 사망자 1,589명, 부상자 842명으로 서울 전체의 1/3 이상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들 사망자와 부상자 대부분은 바로 7월 16일 오후에 있던 폭격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지금은 가림막이 둘러쳐져 사람도 자동차도 불허한 채 오히려 도시 열기를 내리는 빈 공간으로 있지만 이내 자본의 융단 폭격을 맞을 터, 저 이질적인 공간에서 오늘도 눈을 떼지 못한다.
 

 


 

 

 


 


  

오종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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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13 : 자본주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21세기 초반 묵시록 담론의 중심에 자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은 자본주의 묵시록에 의해 대체되었다. 냉전 체제가 붕괴한 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세상의 몰락을 읽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경쟁 속에서 자연과 생태계는 파괴되어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믿음과 세상이 망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을 것이란 자괴적인 인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 자본주의 소비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동원된 반생명적인 기술의 대가는 신체의 질병과 인류가 쌓아 올린 가치의 파괴로 나타났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욕망과 소비의 주체로 만들었다. 이전의 도덕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 이해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인간 이해로 대체되었다. 인간은 경쟁의 상황 속에서 가장 인간적일 수 있고, 세상은 도덕적인 인식이 아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모여도 건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자원으로 전락한 자연은 균형을 잃고 결국 재난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망치고 있고 결국에는 몰락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진단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세상의 파괴와 종말의 묵시록으로 이해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에 의해 디스토피아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 개념이 좀비다. 좀비는 무기력하게 죽음과 삶 사이를 배회하면서, 반죽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살을 뜯어 먹어야 한다. 결코 이길 수 없는 경쟁의 서바이벌 게임을 하도록 강요받고 사는 현대인들은 좀비에서 그들의 아바타를 찾았다. 인간적인 세상은 이미 끝났고, 마지막 세상에서 생존해 있기 위해서 모든 가치의 종말과 패배를 인정하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떠도는 모습이다. 그 상태에서도 유지되는 생각 없는 생산과 소비는 자본주의가 원하는 세상을 완성하고 있다. 인류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좀비 영화들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 인문학의 공통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미국문화의 저변에 묵시록적인 종말론이 흐른다면 미국의 자본주의는 그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실제로 자본주의를 미국의 정신으로 인정하고 미국이 없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상상할 수도 없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종말론을 연결할 수는 없을까?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유명한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추론을 해보자. 베버는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그의 책에서 다뤘지만, 거기서 묵시록의 근거도 찾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에게 미국은 청교도의 나라였고, 그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다면 어떤 종교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베버는 그 이유를 청교도들의 신학 즉 칼빈주의의 예정론에서 찾았다. 구원은 신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예정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저주의 대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상태는 두렵고도 외로운 번민의 상태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의 삶은 외부에서 보기에도 달라야 했다. 그들은 신의 부름을 받아 세상으로 왔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의무를 다하고 충실한 삶을 사는 게 하늘에 합당한 선민의 삶이었다. 베버에 의하면 그런 삶은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모든 맡겨진 일에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임하는 자세를 요구했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일상의 생활에서 성실하고 자신감 있게 산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베버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생각해보자. 베버는 청교도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의식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런 모습이 선택받은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 했지만, 청교도들의 소명의식 중에 세상의 마지막 날을 준비할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한다는 종말론적인 사명을 간과했다. 세상의 사람들과 구분되어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은 그 자체로 종말의 사건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을 신에게 선택된 사람에게 합당한 성실과 열성을 다해 살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만약 베버의 말대로 청교도들의 소명의식이 자본주의 정신의 조건이었다면 그들의 삶은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하는 종말론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적인 삶은 종말의 과도기적인 삶이었고 곧 사라질 시대를 사는 방식이었다는 추론도 제기해볼 수 있다. 그 방식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세계관을 도입해 불필요한 생각과 활동을 제한하고 단순한 삶의 추구를 의미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서구의 기독교 문화 속에서 등장할 수 있었을까 묻는 것은 그 문제가 더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지금도 가치 있는 질문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정신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자본주의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19세기에 자본주의의 탐욕이 아닌 정신을 얘기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베버와 같은 학자의 영향과 자본주의가 체질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모순된 가치라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베버 자신은 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가치가 중세에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탐욕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베버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청교도들이 자본 친화적인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했던 세계관을 칼빈주의의 예정론에서 찾았지만, 그 연결고리가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돈을 벌고 재물을 축적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고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와는 큰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재물을 쌓아두는 행위 그 자체를 죄악이라 생각했던 종교문화 속에서 자본주의가 등장했다고 믿기 위해서는 큰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고 이를 베버는 잘 알고 있었다. 베버에게 그런 발상의 전환을 체득하여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한 인물이 벤자민 프랭클인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부자가 되는 법>은 그가 살아있던 18세기에 이미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자였다. 그는 지금도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미국인으로 손꼽힌다. 베버는 프랭클린을 청교도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묶어낸 인물로 설정하면서 그의 근면 정신과 시간 이해에 주목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또는 ‘시간은 금이다’와 같은 프랭클린을 통해 알려진 격언들에 그의 인생철학이 담겨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의 핵심은 그의 시간관이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은 언제나 짧다. 시간을 잘 시켜라. 쉬고 싶으면 시간을 잘 써라.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을 수 없다. 시간을 낭비하는 건 인생을 헛사는 길이다. 프랭클린은 청교도의 후예였지만 교회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신 중심의 생활보다는 합리적이고 정직하고 근면한 생활을 더 강조했다. 그의 생각은 매사에 신의 뜻을 찾지 않아도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행위 그 자체에 도덕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재물이 목적이 될 수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 도덕성을 부여하게 된 것은 큰 발상의 전환이었다 할 수 있다. 프랭클린에게서 종말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자본주의 정신이 청교도의 윤리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세속화된 것이라면, 돈과 시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즉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아까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짧아서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등식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론에 불과하지만, 개인의 종말 또는 시대의 종말 앞에서 재물의 있고 없음이 중요하지 않다면 프랭클린에게 자본의 도덕성은 과도기적이거나 마지막 시대의 현상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만약 청교도들이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를 닦았고 또 그들의 삶의 형태가 종말론적인 것이었다면, 청교도들은 그들의 삶, 즉 자본주의적인 삶을 종말론적인 것이라 보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런 생각이 가능하다면 청교도들은 이미 자본주의 종말론 또는 종말의 자본주의를 예견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종말론의 차원에서 이해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내적인 모순으로 인한 과잉생산으로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그 잔재 위에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적인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는 맑스주의의 진단이다. 여기서 종말론은 자본주의가 망해야 천년왕국과 같은 역사의 완성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역사의 구조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가 이 세상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현대 인문학의 진단이다. 맑스주의는 미국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이 예언한 자본주의의 종말과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은 미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 이유를 자본주의가 이미 미국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반대를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자본주의가 미국에서 그만큼 용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청교도 시대부터 현재까지 흐르는 미국의 종말론적인 사상 때문일 가능성이다. 그리스도가 지배할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 혹은 곧 닥칠 환란과 휴거에 대한 기대 때문에 자본주의의 탐욕을 마지막 날의 현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도적 제한을 두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자유를 실천하는 이념이라는 공식이 성립한 후에는 자본에 대한 규제는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자본주의의 ‘자유’를 다가올 천년왕국의 가치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본주의에서 다가올 천년왕국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과 자본주의가 세상을 재난과 파괴의 종말로 이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중립적인 입장은 있을 수 없다.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미국의 제도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가 ‘자유’를 지향하는 시스템으로 포장되어 홍보된 역사가 있다. 자유는 원래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들에 의해 기독교의 본질로 그리고 미국정신의 근거로 뿌리내린 개념이었다. 지금도 자유는 미국을 의미하고 대변하는 개념으로 인정받고 있고, 미국은 곧 자유라는 관념의 등식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자유를 표방하는 개념으로 포장되지 않으면 미국에서 수용될 수 없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미국에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이 주류의 시민 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미국의 정신인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최고의 정치와 경제의 제도가 바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논리가 펴졌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가 미국의 신앙으로 변하게 되기까지 오랜 홍보와 선전의 역사가 있었다. 미국에서 ‘기업’이라는 영리를 위한 조직이 19세기에는 법적인 사람의 권리를 갖게 되고, 자유의 주체가 되고, 20세기에는 무소불위의 통제되지 않는 권력으로 부각되는 역사다. 시장의 자유가 그 어떤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자유이고, 시장의 자유를 못 믿는 사람은 자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밀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1960년대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미국의 자유를 자본의 자유와 동일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시장의 자유를 종교적 양심의 자유로 또 미국의 정신으로 승화시킨 건 신자유주의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행태가 용인되어온 미국의 역사 저변에 자본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미국정신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묵시록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픽션이나 실존의 갈등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다.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묵시록의 힘은 어떤 실제적인 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공상과학이란 장르가 묵시록의 테마들을 차용했다고 해서 묵시록이 공상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묵시록에 대한 신뢰가 남다른 미국 보수 기독교인들은 지구온난화의 현상을 믿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종말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선과 악, 재림과 부활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자본주의라는 인간 제도의 남용과 같은 하찮은 이유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온난화의 과학적인 근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미국엔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학적인 사고를 우선시하던 사람들은 묵시록의 종말론을 추종하던 이들을 광신적인 종교에 빠져있고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류가 묵시록의 종말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묵시록을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존적인 픽션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의 묵시록은 급박한 종말의식을 종교적 세계관에서 상식과 과학의 세계관 일부로 만들었다. 냉전 이후에 등장한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는 묵시록의 전환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은 핵무기를 소유한 소수의 국가들에 세상의 운명을 맡기고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불공평한 세상의 현실을 반영했지만, 세계화 시대의 환경재난의 묵시록은 모든 인간을 공범으로 만들어 자본주의 묵시록을 보편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묵시록은 멸망의 묵시록이고 이 시대 유일한 보편적인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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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비


<욥기>를 통해 본 고통 마케팅에 대한 비판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눕기만 하면, 언제 깰까, 언제 날이 샐까 마음 졸이며, 새벽까지 내내 뒤척거렸구나. 내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구나.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터져 버리는구나. ―〈욥기〉 7,4~5 



    거실 창가에 배열해둔 딸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그는 한참을 미동도 않는다. 생전 처음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에 눈길이 머문다. 촛대바위와 바다를 등지고 친구와 두 손을 입에 모아 힘껏 소리를 내지르는 포즈의 사진을 본다. 그 옆에는 가족과 함께 다녀온 미국 여행 사진이다. 콜로라도의 메이사 베르데 국립공원 입구에서 오른 손을 흔들고 있는 딸은 아직 초등학생의 모습이다. 그 옆에는 검은 사각모에 빨강, 파랑, 검정이 어우러진 가운을 입고 어설프게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유치원 졸업사진이 있다. 벌써 14년이나 지난 일인데, 몇 달, 아니 며칠 전의 일 같기만 하다. 그리고 가운데, 커다란 눈이 예쁜 딸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다.

   수능시험을 치룬 다음날 딸은 오빠의 오피스텔에서 목을 매고 말았다. 지리학과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입학만 하면 페루 여행을 허락받았던 그녀는 두 번의 실패와 세 번째 예감된 실패를 비관하며 서둘러 삶을 마무리 지어버렸다. 삼년간 유예된 페루 여행을 육체를 벗어버리고서라도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죽던 그 한 해 전에 대학생이던 아들이 군 입대를 앞두고 페루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 딸의 인내력은 폭발하고 말았다. 함께 가겠다고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시위를 하더니 학원에서 쓰러졌고, 몇 시간 링거주사를 맞고 퇴원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녀의 아비는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한두 주 빠지고 여행 좀 한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날까봐 딸의 자존심을 그토록 헤집어 놓았을까. 링거주사를 꽂은 채 몇 시간을 침대에 구속되어 있던 딸의 속마음은 이미 그때부터 자기에게 한계시간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그는 타살자의 심정이 되어버린다.  

   딸을 잃고 자책하던 한 아비의 일이 기억에서 희미해졌을 무렵,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만 2년이 조금 모자란 날, 아들의 돌연사로 망연자실해 있던 또 다른 아비가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며 유학을 준비하던 과학도인 아들이 갑자기 쓰러졌고, 가족이 달려왔을 땐 이미 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못 되어서 아들의 사망을 확인하는 서명을 했고, 슬픔도 눈물도 없이 3일간의 장례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자 미뤄두었던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겨우 진정을 찾은 듯 앉아있는 아내가 다시 오열하며 실신할지 몰라 걱정하여 안경을 닦으며 조용히 책장을 넘기려 하는데, 자제할 수 없이 슬픔이 솟구친다. 그날 밤 그는 창자가 끊어질 듯 통곡했다.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 함께 다니기로 했다. 구원에 관한 교리가 여전히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혹여 아들이 천국에 가는 데 아비가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장례를 집전했던 목사는, 이 아이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으니 ‘성도’(聖徒)란 문구를 쓸 수는 없지만, 부모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이미 고인이 된 자녀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며 성도임을 ‘보증’하는 의미에서 그 문구를 허락한다고 했다.

    그 논리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만의 하나 그게 정말이라면 어쩌나 싶어 열심히 기독교 신자가 되고자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예배는 반드시 참여하고, 신자대학에도 등록했다. 날마다 성서를 읽었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신앙이라는 게, 그 교리라는 게 허술하기 그지없었지만, 하여 순간순간 회의적 물음들이 튀어나왔지만, 폐부를 찌르는 목사의 한 마디 말에 그는 모든 비판적 문제의식에서 스스로를 무장해제시켰다. “신앙이 없으면, 하느님은 나를 치거나 혹은 가족을 치십니다.”

    이 말은 수준 높은 지식의 소유자인 그가 신앙에 관한 한 자기의 지식을 유보시키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게 하는 효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그에게 이 말은 자기가 자식을 죽였다는 자책감을 낳은 것이다.

   그가 내게 물었던 첫 질문은 “어떻게 해야 신앙이 빨리 성장할 수 있나요?”였다. 대개 이런 물음은 교회의 제도 속에 순순히 편입되는 것에 자기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그런 이들은 교회의 신앙제도의 모범생이 되려는 강렬한 의지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그의 내면에서 그 의지가 흔들리고 있다. 억제하고 있기에 그 동요가 의식으로 표출되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흔들리고 있다는 자각에 좀처럼 이르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신앙제도의 모범생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동요하게 한다.

    어떤 말이든 위로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만난 이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신앙성장을 위한 비법 전수’, 이 순간 그가 위로받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은 바로 이런 것이겠다. 한데 나는 그런 ‘묘수’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심지어 묘수라고 회자되는 것들에 야유를 퍼붓는 데 익숙한 자니 그를 위로할 길은, 내게는, 별로 없다.

    추측컨대 평소의 그라면 아마도 나와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자식의 돌연사에 직면한 이에게 신앙제도와 신앙 사이의 거리에 대해 얘기하고, 교회의 가르침이 대변하는 신앙제도, 그것의 위기를 넘어서는 것에 관한 냉철한 토론은 얼마나 무망한 것일까.

    그럼에도 서투른 카운슬러인 나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 얘기로 대화를 이끌어갔고, 점잖고 사려 깊은 사람인 그는 나의 어법 속으로 순순히 들어와 주었다. 다행히도 그는 30년쯤 전, 대학생이던 시절에 기독교에 대한 남다른 지적 탐구의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었고, 이 대화는 오래 묵은 그 기억을 회상해내는 시간이 되었다.

    창조가 어떻고, 노아의 방주가 어떻고, 예수의 기적이 어떻고 등등, 얘기가 열띠게 오가던 중 그는 뜬금없이 자기의 숨겨진 갈등을 털어놓는다. 자식의 죽음 이후 다시 교회를 다니면서 꾸물거렸던, 하지만 잘도 숨겨져 있던 내적 흔들림의 실체가 언어를, 즉 형상을 얻게 된 것이다. 자기에게 닥친 이 고통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그의 목숨을 그렇게 앗아간다는 것일까요?” “도대체 교회에 안 다녔다고 자식을 빼앗아 가는 신이 어딨나요?”라고.

    하느님을 잘 믿으면 시련이 닥쳐와도 결국에는 몇 배로 보상해 주신다는 의미로 목사가 권한 〈욥기〉에서 그는 이미 전혀 다른 의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서론부(1~2장)와 결론부(42,7~17)에 나오는 이야기대로라면, 아들의 죽음은 결국 하느님이 사탄과 벌인 내기에 다름 아니라는 당황스런, 하지만 타당한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욥기〉에서 이런 의문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텍스트 속의 하느님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한데, 이 글 앞에서 인용된 본문인 〈욥기〉 7,4~5 같은 내용이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는 사람, 그 처참한 고통으로부터 잠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시간마저도 박탈당한 사람, 그렇게 매순간 지옥을 체감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은, 죽은 아들의 시선으로 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이 구절은, 그가 기도생활을 잘 못한 탓에 아들이 죽은 것이라는 목사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해석학적 문제의식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욥기〉에서 서두와 끝의 이야기를 빼면, 내내 욥의 원망과 항변으로 점철되고 있다는 것을 읽어냈다. 욥의 친구들, 나중에 그 대화에 끼어드는 젊은이, 그리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닥친 재앙과 신앙 사이에는 인과성이 있다는 통념의 수호자들이다. 하여 심문관처럼 욥을 추궁한다. ‘네 잘못으로 네가 재앙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한데, 실은 그것이 하느님의 장난이라니......

    요컨대 〈욥기〉는 당시 통념으로 작동하던 인과성의 신학에 대한 저항을 담은, 매우 지적인, 일종의 반신학적 통속적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대중 사이에서 회자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서두와 결론이 개작되어 통속소설화된 것이 우리가 접하는 〈욥기〉인 듯하다. 그러므로 본 내용을 통속화시킨 서론부와 결론부를 빼고 본론부만 읽는다면, 네 잘못이 재앙의 원인이라는 식의 통속적 주장에 대한 욥의 반신학을 읽을 수 있다.

    딸의 자살에 직면해서 자기의 잘못을 상상했던 한 아비, 그리고 아들의 돌연사에서 자기 자신의 불신앙을 보아야 했던 다른 아비, 이 둘은 바로 그 생각으로 인해 딸이, 그리고 아들이 겪고 있던 세상의 고통에 직면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세상은 그 죽음들로부터 면죄부를 얻게 된다. 물론 때로 고통에 직면해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매우 훌륭한 성찰의 태도다. 한데 문제는, 자책이라는 고통의 표현 방식이 종교제도나 국가제도, 심지어는 자본에 의해 마케팅의 도구로 활용되곤 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욥기〉는, 통념에서 벗어나 읽는 이에게는, 바로 이러한 은폐의 신학에 대항하는 반신학적 신학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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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7]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후기구조주의와 해체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라는 믿음을 깨뜨리고, 인간의 주체성은 구조에 의해 구성된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파헤친 것은 구조주의의 성과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시작되는데, 그는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며, 기의란 기표의 차이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라 말한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언어가 실체와 조우할 수 없는 한계내에서 발생하는 언어들의 차이라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구조[각주:1]를 분석함으로서 실체를 로고스에서 발견해왔던 기존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거부하는 대신, 언어의 차이와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명증한 사실로 여겨진 자아 혹은 의식을 실재의 출발로 보았던 자아중심주의에 균열을 가하였다.이같은 구조주의적 관심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사에서 실존주의가 봉착했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면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가? 후기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푸코, 라캉, 들뢰즈, 알튀세르, 데리다와 같은 이들은 구조주의의 업적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 구조주의가 간과하였던 문제를 니체, 프로이트, 맑스주의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에 기반하여 전개한다. 말하자면, 라캉은 프로이트를,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푸코와 들뢰즈는 니체에 대한 다시읽기를 주장하는데, 물론 이들의 시도 조차도 소쉬르의 언어학으로 시작된 구조주의의 기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은 실체적 형이상학의 철학사를 뒤집기 위해 다른 경로를 채택했지만, 지향했던 지점은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표현대로 하자면, 기원과 중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중심이나 기원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당위적인 것으로 여겨진 시뮬라르크에 대한 위계질서와 그에 대한 차별과 억압도 일시에 무효화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한발 더나아가 구조주의의 노력으로 그나마 밝혀진 차이의 구조마저 의미관계의 본질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후기구조주의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된다. 구조주의는 영화에서처럼 매트릭스라는 거대한 컴퓨터 가상 인식체계가 지배하는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매트릭스라는 완벽한 통제시스템에 의해 컨트롤 당하고 있음을 구조주의는 드러냈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는 매트릭스의 실체를 밝혀낸 구조주의의 성과를 인정하지만, 매트릭스가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로 한 발 더 나간다. 말하자면, 매트릭스 조차도 가상적인 조작물일 뿐이지, 인간은 매트릭스에 의해 구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매트릭스에 장악되지 않는 '네오(키아누 리브스)' 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시온이라는 구역이야말로 매트릭스의 구조가 지배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을 일정한 규칙성과 폐쇄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로 인정하는 순간, 철학은 형이상학적 로고스 중심의 철학사가 걸어온 길로 되돌아갈 위험에 빠질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따라서, 모든 중심과 기원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매트릭스의 존재를 직시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네오와 같이 매트릭스의 감시를 빠져나오는 탈주하고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현상을 바로 인식하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가 넘어서려 했던 지점이 여기에 있다. 푸코는 성(sexuality)이 구조적으로 억압되어 왔다는 가설을 깨고 성에 대한 지식과 담론은 오히려 확산되어왔음을, 들뢰즈는 영토화/코드화된 억압적 체계를 인정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영토를 가로지르는 노마딕한 탈주선을 제시하였고, 라캉은 구조화된 무의식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의 주제로 등장시켰지만 동시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한걸음 더 나아갔으며, 알튀세르는 자본의 착쥐구조를 넘어 이데올로기와 국가장치라는 중층적 관계를 인식론적 틀로 제시하였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deconstruction)는 실체론적 철학에 저항하기 위한 구조주의의 기초위에 세워졌지만 구조주의적 인식체계 마저 넘어서려는 탈구조적인 사유행위를 함축해 놓은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매트릭스라는 형이상학의 시스템을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완벽할 것 처럼 보이는 구조 안에서도 네오처럼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놈이 반드시 하나쯤은 있다’는 사실에 의해 매트릭스조차 마침내 부정되고 해체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치밀한 관계망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내는 송곳 같은 현상이야말로 매트릭스로 구조화된 사회를 인식하는 본질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메타적 구조가 아니라, 구조를 전복시키는 미시적인 차이와 차이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던 태도에서 벗어나서, 안정과 질서라는 이름의 경계를 넘어 일탈하는 작은 변화들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질적 변화를 가져다 주는지를 묻는다. 이렇게 데리다에게서 후기구조주의는 전통적 사유방식을 해체(deconstruction)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해체된 빈 공간 위에 아무것도 다시 구축하지 않으려는 탈-구조화(de-construction)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무엇을 해체하려고 했으며, 해체 뒤에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해체를 허무주의의 유포라고 비판하는 우려에 대한 반론은 무엇인가? 해체론 안에서 주체의 윤리적 실천의 계기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이글이 관심하는 주제인데, 그의 핵심적인 개념들 몇가지로 제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텍스트


    데리다는 로고스중심주의 철학을 현존(presence)의 형이상학, 음성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로 파악하며, 이를 해체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전통적인 이성중심의 형이상학을 타겟으로 삼는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어떠한 기원이나 중심위에 세워진 사유체계도 아님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둔다. 형이상학의 근거지가 부정될 때에 순수성의 신화는 궤멸하게 되고, 비로소 본질과 현상, 선과 악,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음성과 문자 등과 같이 이항대립의 관계로 놓고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을 필연적인 결과로 정당화시켜왔던 근거들이 폭력적인 위계질서에 불가할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Of Grammatology)’에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데리다의 주장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였던 니체와 존재의 복구를 통해 근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하이데거, 그리고 소쉬르의 반실체적인 구조주의적 언어학의 성과를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차이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관계에 선행하는 원초적인 기원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구조를 유한하고 폐쇄된 총체성으로 이해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소쉬르에게서 문자에 대한 음성의 우월적 지위는 완전히 제거되지 못하였다는 것이 데리다의 진단이다.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타난 음성우월주의는 소쉬르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문자는 언어를 표상하는 유일한 목적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텍스트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시킴으로서 로고스중심주의의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소쉬르적인 구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음성 대신 텍스트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일까?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 항목들을 복권시키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것으로 로고스중심주의로 파생된 폭력적인 위계질서는 해체될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데리다의 해체전략은 또다른 형태의 이항대립구조의 탄생에 의해 좌초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의도한 것은 매트릭스를 대체할 다른 구조물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총체적인 구조로 실체를 파악해야한다는 어떠한 형태의 시도도 출현하지 않을 만큼의 해체로 까지 밀고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는 단순히 형이상학의 근거를 전복시키는 작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에게, 해체란 부수고 무너뜨리는 과격한 파괴운동(destruction)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어떠한 위계지배질서의 출현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탈-구조화(de-construction)에 대한 지향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차연(difference)’이라는 개념은 탈-구조화를 위한 그의 의도안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차연


   데리다는 탈-구조화의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서, 소쉬르가 주장했던 ‘기표 사이의 차이에 의해 기의가 구성된다’는 주장을 기원의 개념으로 확장시킴으로서 순수한 기원에 대한 신화를 완전히 제거하기에 나선다. 다시말해서, 기의는 기표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처럼, 기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표들의 차이가 반드시 기원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렇게 기표와 기의의 관계구조 안에서 보면, 기원은 더 이상 실체적인 것,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데, 기원이라는 것 역시 기원에 선행하고 우선하는 다른 하위 기표들의 차이와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보다 더 앞선 기원도 텍스트에 의해 차이화된 것에 불과하다. 데리다의 표현 그대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텍스트 중심주의는 기존의 사유체계를 철저하게 전복시킨다. 기표(문자)는 로고스철학에서 원본과는 무관한 열등한 것으로 배제되어 왔지만, 기표와 기의의 관계구조를 기원으로까지 확대적용시킬 때에 문자(기표)는 말(기의, 로고스)에 우선하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로써 기원의 기원으로서 적용된 기표들의 차이와 관계는 기원이 가지는 말의 모순성을 폭로하며 마침내 기원의 기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시킨다.

    기표들의 차이를 기원으로 확장시킴으로서 데리다는 순수한 기원이란 말 자체가 가지는 모순을 드러냄과 동시에 음성중심의 기원의 신화를 해체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곧 말에 대한 텍스트의 우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한다면 탈-구조화(de-construction)는 재-구조화(re-construction)로 퇴색하고 말 것이다. 텍스트는 기원적이지만 결코 기원의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 텍스트는 대상을 지시하는 ‘대리보충(supplement)’으로서의 기능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문자는 그 자체로 대상을 의미하지 못하고 단지 대리적인 보충물로서 문자들간의 차이를 통해 대상의 존재를 흔적으로 남길 뿐이다. 그러므로 흔적은 이미 시간적으로 항상 뒤에서서 대상을 쫓아가는 지연된 관계에 놓여 있다. 흔적으로서 텍스트는 대상을 은유적으로 지시할 수는 있지만 대상과 동일성을 가질수는 없다. 대상은 텍스트에 의한 ‘차이’와 ‘지연’이라는 시공간적 방식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공간성의 차이와 함께, 시간성의 지연이라는 이중적인 운동을 통해서 기원은 파악될 수 없는 흔적으로만 남겨지게 된다. 이렇게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인 지연을 통칭하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데리다는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고 여기게 만드는 의미의 효과가 사실은 무의미한 것임을 주장한다. 이렇게, ‘차연’은 소쉬르의 기표가 드러내는 공간성의 차이만으로는 형이상학의 인식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주의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이이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게 하는 근거가 되어온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뒤섞어 버림으로서 끊임없이 기원을 재생산해 내려는 모든 철학적 시도를 봉쇄해 버리려는 해체와 탈-구조화의 이중적인 전략을 수행하는 데리다의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유령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철학하기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에 따른다면, 철학이 무언가에 대해 설명하고 논증하기 위해 텍스트를 동원할수록 지시하려는 대상은 자꾸만 멀어져 갈 뿐이기 때문이다. 흔적으로서 글쓰기가 증명하는 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 뿐이다. 프랑스의 68혁명의 분위기에서 지식인들에게 보다 날카롭고 급진적인 정치철학의 태도가 요구되었던 것을 감안하자면, 데리다의 해체는 한가한 지식인의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투항주의적인 태도로 비춰진다. 데리다의 비판론자들이 그를 철학의 종말을 고하는 허무주의로, 심지어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동력마저 무력화시키는 위선자로 낙인하는 이유는 이점에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초기에 거침없이 써내려간 해체적 입장이 의미하는 정치 윤리적 실천의 면모는 그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전개된 유령론에서 드러난다.

   데리다에게 차연은 전통적 시공간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개념인데, 전통적인 입장에서 현존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단절되었으며 미래와는 연결되지 않은 ‘지금’이라는 정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안에서만 파악되는 것이지만, 차연의 운동은 현존의 대상을 끊임없이 과거로 밀어내고 다시 미래를 향해 달아나며 남기는 흔적을 추적해야 하는 통시적인 시간속에서 파악된다. 차연의 통시적 효과는 과거, 현재와 미래의 시간성들이 일직선상위에 차례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안에서 현존은 과거에 의해 부정되며, 미래에 의해서만 유추될 수 있는 불확실성으로 남는다. 따라서 현존하는 것은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존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모호한 것이다. 그는 이를 유령(specter)으로 표현한다. 유령은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기에, 존재의 부재와 더불어 부재의 존재를 지칭하기에 매우 적절한 은유로 채택된다. 유령과 결부된 과거와 미래는 지금, 여기의 현존을 일자의 동일성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한다. 유령은 그것과는 무관한 개방적이고 불투명한 절대적인 타자성이다. 데리다는, 철학이 당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자아와 현존의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을 유령으로 존재하는 비현존의 존재론으로 뒤집어 놓는다. 인식의 근거는 자아의 의식, 혹은 기원이 아니라 유령과 같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흔적으로 등장하는 타자일 수밖에 없다. 유령으로서 존재하는 타자는 자아의 이성과 판단에 의해 포섭되지 않으며 단지 무조건적으로 환대(hospitality)해야할 관계일 뿐이다.

    데리다에게서 해체의 정치적 급진성은 바로 이 유령의 존재에서 발견된다. 유령은 자아중심적인 시공간 구조에서 만들어지는 예측된 미래를 추구하는 일체의 목적론적 실천행위를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착취의 현실에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 역시 공산주의의 필연성을 낙관하는 것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맑스의 공산주의라는 단선적이고 목적론적 구조위에서 공산주의는 ‘유럽 전역을 떠돌며 자본가를 위협하는 유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데리다는, 맑스를 넘어 계급, 국가, 제도의 경계를 허물고 도래하는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새로운 형태의 타자들과의 연대를 요구한다. 경계를 넘어선 개방적인 연대 안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오늘의 불의한 착취의 구조안에서 다시 소환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실체론적 존재론은 자본주의와의 공모관계안에서 세계를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로 계층화하고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시켜 왔다면, 맑스의 공산주의는 같은 방식으로 가시적인 현존을 인간사회의 진보 가치로 삼아왔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 양쪽 모두가 믿어온 현존의 공간과 시간적인 경계를 넘어서 출몰하는 유령의 존재를 인식하고 유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정치윤리를 제안한다.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구축해 놓은 확고부동한 존재를 존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유령으로 대체시켜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모호하다. 존재가 아닌 유령을 실재하는 것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데리다는 주체의 구성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봉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데리다의 의도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정관념 하나를 지워버릴 필요가 있다. 데리다의 형이상학적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은 주체를 부정하느냐 긍정하느냐는 식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추궁하는 것은 유령론이 지시하는 정치윤리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주체는 존재하는가, 부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익숙해 왔던 전통적인 접근법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해 고흐의 그림 “끈이 달린 낡은 구두”를 소재로 사용한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입장에서 이 그림에 대한 감상법을 재구성하는데, 샤피로는 구두 그림의 제작자인 화가가 누구인지를, 하이데거는 이 구두의 소유자에게 관심을 둔다고 본다. 두 사람의 감상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구두그림의 귀속관계가 그림을 그린 화가에 있든지, 아니면 실제 구두를 신었던 한 노동자로 보든지 간에 그들은 구두의 주체를 발견해 내려는 노력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만큼은 동일한 감상법을 취한다고 보았다. 반면, 이 그림을 보는 데리다는, 이 두 감상법이 모두 적절치 않다고 본다. 왜냐면, 이 구두의 그림은 신고 있는 상태가 아닐 뿐 아니라, 그림은 이미 화가의 화실에서 떠나 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두의 주인은 화가도, 실제 신었을 법한 누군가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구두의 주인는 부재할 뿐이다. 그러나 구두의 주인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구두는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는 폐쇄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주체의 부재를 통해 주장하려는 바는 대상을 특정 주체에 귀속시키는 것으로는 사물의 실재에 다가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유령과 같이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실재는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데리다가 유령론을 통해서 말하려는 바는 자기 동일적인 주체를 해체하려는 것이며, 자기 동일성이 현존의 근거로 왜곡되어온 형이상학전통을 차이와 반복, 흔적으로 치환하려는 것에 있다. 존재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을 통해 인간의 책임과 윤리를 말해왔던 전통을 해체하고, 역으로 절대적인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윤리적 태도를 통해서만 존재에 대해 말하려는 철학의 시도는 가능해 진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유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환대의 윤리는 소수자, 약자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행동규범을 도덕적 감성에 기대어 호소하려는 것과 거리가 멀다. 유령론은 서양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해체작업이며 차이와 흔적을 통해서 출현하게 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경계없이 예측불가능하게 도래하게 되는 선물과 같은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며, 기존의 사고방식과 틀을 넘어서는 낯선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데리다는 묻는다. 유령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것인가, 유령을 축출할 것인가? 윤리적 주체로 설 것인지 말것인지는 그 물음에 달려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소쉬르는 언어가 ‘랑그’와 ‘빠롤’이라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 설명한다. 랑그가 언어의 원리/체계라면 빠롤은 언어를 말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랑그는 빠롤을 통해 나타난다. 여기서, 그의 중요한 또다른 개념, 시니피앙(기표/기호)과 시니피에(기의/대상)가 있는데, 이 구분을 통해 소쉬르가 주장하려 한 것은,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의 차이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언어는 사물/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는 것. 소쉬르는 서구의 로고스 중심의 형이상학적 언어학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실체란 언어의 구조와 기표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구조적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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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편재와 인간의 공간



유승현

(GTU Ph.D Candidate)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편 139:7-8)



New Horizons


   2015년 7월 14일 우리 지구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6년 1월 19일 플로리다 주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된 우주 탐사선 New Horizons 호가 약 9년 반 동안 30억 마일이 넘는 여행을 거쳐 목적지인 명왕성 (Pluto)을 서울과 뉴욕 사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로 통과했습니다. 탐사선은 며칠 동안 명왕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과 정밀한 사진들을 지구로 보내왔습니다. 실로 우리는 우리 인간의 과학기술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 탐사선에는 흥미 있는 물체 두 가지가 부착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25센트 짜리 쿼터 동전 2개 입니다. 동전 한 개는 탐사선이 발사된 플로리다 주 동전이고, 다른 한 개는 탐사선이 조립된 메릴랜드 주의 동전입니다. 왜 두 개의 동전을 달았을까요? 실용적인 이유로는 그 동전 두개가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용적인 이유 말고도 상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작은 명왕성에도 그 둘레를 도는 위성이 있습니다. 그 위성의 이름은 ‘카론’입니다. 카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계의 강을 건너주는 뱃사공인데, 그는 뱃삯을 내는 사람만 배에 태워주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명왕성의 위성 카론에게 줄 뱃삯으로 주기 위해 50센트를 매달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쓸데 없는 미신처럼 들리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는 낭만적인 소재입니다. 그리고 이 동전들 말고 다른 한 가지 중요한 물건이 작은 통 안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1930년 명왕성을 최초로 발견한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 (Clyde Tombaugh)의 유해 일부분입니다. 그의 뼛가루가 들어있는 이 작은 통에는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안에 미국인 클라이드 톰보의 유해가 있습니다. 명왕성과 태양계 제 삼지대의 발견자, 아델과 모론의 아들, 천문학자, 교사, 달변가이자 친구: 클라이드 W. 톰보 (1906년부터 1997년)”

   New Horizon호와 명왕성이라는 작은 소행성을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서 저는 가슴이 뭉클함과 측은함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바쳐서 연구했고 가 보고 싶었던 작은 별에 그는 85년이 지난 후에 살아서가 아니라, 죽은 후 유해로서 지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우주 탐사선의 이름 New Horizons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새로운 공간의 지평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재 명왕성을 지나 태양계 바깥으로 끊없이 향하고 있는 그 탐사선과 한 번 교신을 하는데만 약 9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전파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이 일초에 약 삼십만 킬로미터를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빠른 속도로도 왕복하는데 9시간이 걸린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이 지구가 얼마나 좁은 곳인가, 그 보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참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이번에는 꼭 이 곳에 여행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가 보아도 평생을 여행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가 가 본 곳은 너무나 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어떤 순간에 우리의 몸이 있는 오직 그 곳에만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까?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우주선을 만듭니다. 통신기술을 개발해서 세계 어디에서나 소통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의 기술로 만들어진 우주 탐사선이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4.2 광년 떨어진 별까지 날아가는데는 무려 7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편재성을 말하는 성경의 구절들


   이런 인간의 유한한 공간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편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는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5장 3절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3절과 24절은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히브리어로 하늘과 땅, 천지라는 말은 온 우주와 우주에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들을 모든 방법으로 채우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장 6절도 말씀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이 우주의 만유에게 생명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모든 철학과 사상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의 저명한 철학자들을 대면해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고 자신이 알고 믿는 우주 어디에나 계시고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면서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이 어렵게 보이는 말을 영어성경은 간단한 말로 표현합니다: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즉,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어디에나 계실까?


   우리는 여기서 미련한 질문이지만 좀 더 깊이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작은 제한된 공간에서만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실까요? 이런 물음을 우리만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근대 시대 유명한 과학자였고 신앙인이었던 아이작 뉴튼은 아무 것도 없는 우주 공간을 통해서 빛이 전달되는 것에 의문을 느꼈고, 빛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에테르’라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에도 많은 천문학자들이 우주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우주 전체는 23%의 암흑물질과 73%의 암흑에너지, 그리고 4%의 별들과 행성, 생명체 같은 일반적인 물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주가 실제로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들의 실체를 밝히려고 하는 것은 아주 값어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는 많은 무신론적인 과학자들은 우주가 그런 물질로서 채워져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은연 중에 우주 전체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주가 채워져 있든 비워져 있든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 7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여기서 “주의 신”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물질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서 즉, 영으로서 존재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왜 우주 전체에 충만할 수 있는지를 계속 묻는다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학자 어거스틴 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나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 전체에 충만한 이유에 대해 우리의 이성으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은 그의 시간과 능력이 무궁하시듯이, 그의 임재에 있어서도 매이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한하기에 그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라고, 더 나아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기도한 것처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왕상 8:27) 라고 겸손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공간에서 도우시는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공간에 계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간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 하나님을 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바다에 던지시고 큰 물고기를 예비해서 그를 삼키게 하셨을 때, 요나는 깊은 심연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편재하시는 하나님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요나 2장 2절에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요나의 이 기도가 진실하지 않은 기도였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물고기 뱃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건지신 다음 요나서 3장에서 나오는 그의 행동을 살펴봤을 때 끝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요나는 이미 죽은 것과 같은 생명의 위기를 통해서 물고기의 뱃속, 더 나아가 스올 즉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도 계시는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39편을 쓴 다윗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왜 다윗이 139편 8절처럼 하늘로, 음부로 9절처럼 바다 끝까지 가야 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소들은 생명이 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 더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은 한계 상황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그런 위기를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 곳에서조차 다윗은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깨닫고 10절에서 고백합니다: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도 4절에서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망의 골짜기에는 마치 명왕성의 위성 카론이 명계의 강을 건너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죽음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한계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공간을 넘어서


   우리는 공간을 점유해야만 하는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 땅과 영토를 확보해야만 하고, 큰 집과 큰 자동차가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와 이웃과 피조물 전체의 공간이 아니라 오직 나의 공간만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끝내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컴퓨터의 가상 공간을 찾고 끝내 자신의 방 안에 갖혀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야만 하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2011년 통계로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라고 불리는 은둔형 외톨이가 7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30만명의 사람들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미국에도 약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은둔형 외톨이이거나 그렇게 될 소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내 자신이며 각종 미디어와 첨단 기기에 빠져 사는 내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 수 있는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공간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시편 139편 23절에서 다윗이 마지막으로 고백했던 겸손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나를 살피시라고 간곡히 기도한 다윗처럼, 내 스스로가 나만의 공간을 만들려고만 하지는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공간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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