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비


<욥기>를 통해 본 고통 마케팅에 대한 비판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눕기만 하면, 언제 깰까, 언제 날이 샐까 마음 졸이며, 새벽까지 내내 뒤척거렸구나. 내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구나.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터져 버리는구나. ―〈욥기〉 7,4~5 



    거실 창가에 배열해둔 딸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그는 한참을 미동도 않는다. 생전 처음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에 눈길이 머문다. 촛대바위와 바다를 등지고 친구와 두 손을 입에 모아 힘껏 소리를 내지르는 포즈의 사진을 본다. 그 옆에는 가족과 함께 다녀온 미국 여행 사진이다. 콜로라도의 메이사 베르데 국립공원 입구에서 오른 손을 흔들고 있는 딸은 아직 초등학생의 모습이다. 그 옆에는 검은 사각모에 빨강, 파랑, 검정이 어우러진 가운을 입고 어설프게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유치원 졸업사진이 있다. 벌써 14년이나 지난 일인데, 몇 달, 아니 며칠 전의 일 같기만 하다. 그리고 가운데, 커다란 눈이 예쁜 딸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다.

   수능시험을 치룬 다음날 딸은 오빠의 오피스텔에서 목을 매고 말았다. 지리학과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입학만 하면 페루 여행을 허락받았던 그녀는 두 번의 실패와 세 번째 예감된 실패를 비관하며 서둘러 삶을 마무리 지어버렸다. 삼년간 유예된 페루 여행을 육체를 벗어버리고서라도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죽던 그 한 해 전에 대학생이던 아들이 군 입대를 앞두고 페루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 딸의 인내력은 폭발하고 말았다. 함께 가겠다고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시위를 하더니 학원에서 쓰러졌고, 몇 시간 링거주사를 맞고 퇴원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녀의 아비는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한두 주 빠지고 여행 좀 한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날까봐 딸의 자존심을 그토록 헤집어 놓았을까. 링거주사를 꽂은 채 몇 시간을 침대에 구속되어 있던 딸의 속마음은 이미 그때부터 자기에게 한계시간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그는 타살자의 심정이 되어버린다.  

   딸을 잃고 자책하던 한 아비의 일이 기억에서 희미해졌을 무렵,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만 2년이 조금 모자란 날, 아들의 돌연사로 망연자실해 있던 또 다른 아비가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며 유학을 준비하던 과학도인 아들이 갑자기 쓰러졌고, 가족이 달려왔을 땐 이미 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못 되어서 아들의 사망을 확인하는 서명을 했고, 슬픔도 눈물도 없이 3일간의 장례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자 미뤄두었던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겨우 진정을 찾은 듯 앉아있는 아내가 다시 오열하며 실신할지 몰라 걱정하여 안경을 닦으며 조용히 책장을 넘기려 하는데, 자제할 수 없이 슬픔이 솟구친다. 그날 밤 그는 창자가 끊어질 듯 통곡했다.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 함께 다니기로 했다. 구원에 관한 교리가 여전히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혹여 아들이 천국에 가는 데 아비가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장례를 집전했던 목사는, 이 아이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으니 ‘성도’(聖徒)란 문구를 쓸 수는 없지만, 부모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이미 고인이 된 자녀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며 성도임을 ‘보증’하는 의미에서 그 문구를 허락한다고 했다.

    그 논리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만의 하나 그게 정말이라면 어쩌나 싶어 열심히 기독교 신자가 되고자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예배는 반드시 참여하고, 신자대학에도 등록했다. 날마다 성서를 읽었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신앙이라는 게, 그 교리라는 게 허술하기 그지없었지만, 하여 순간순간 회의적 물음들이 튀어나왔지만, 폐부를 찌르는 목사의 한 마디 말에 그는 모든 비판적 문제의식에서 스스로를 무장해제시켰다. “신앙이 없으면, 하느님은 나를 치거나 혹은 가족을 치십니다.”

    이 말은 수준 높은 지식의 소유자인 그가 신앙에 관한 한 자기의 지식을 유보시키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게 하는 효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그에게 이 말은 자기가 자식을 죽였다는 자책감을 낳은 것이다.

   그가 내게 물었던 첫 질문은 “어떻게 해야 신앙이 빨리 성장할 수 있나요?”였다. 대개 이런 물음은 교회의 제도 속에 순순히 편입되는 것에 자기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그런 이들은 교회의 신앙제도의 모범생이 되려는 강렬한 의지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그의 내면에서 그 의지가 흔들리고 있다. 억제하고 있기에 그 동요가 의식으로 표출되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흔들리고 있다는 자각에 좀처럼 이르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신앙제도의 모범생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동요하게 한다.

    어떤 말이든 위로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만난 이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신앙성장을 위한 비법 전수’, 이 순간 그가 위로받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은 바로 이런 것이겠다. 한데 나는 그런 ‘묘수’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심지어 묘수라고 회자되는 것들에 야유를 퍼붓는 데 익숙한 자니 그를 위로할 길은, 내게는, 별로 없다.

    추측컨대 평소의 그라면 아마도 나와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자식의 돌연사에 직면한 이에게 신앙제도와 신앙 사이의 거리에 대해 얘기하고, 교회의 가르침이 대변하는 신앙제도, 그것의 위기를 넘어서는 것에 관한 냉철한 토론은 얼마나 무망한 것일까.

    그럼에도 서투른 카운슬러인 나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 얘기로 대화를 이끌어갔고, 점잖고 사려 깊은 사람인 그는 나의 어법 속으로 순순히 들어와 주었다. 다행히도 그는 30년쯤 전, 대학생이던 시절에 기독교에 대한 남다른 지적 탐구의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었고, 이 대화는 오래 묵은 그 기억을 회상해내는 시간이 되었다.

    창조가 어떻고, 노아의 방주가 어떻고, 예수의 기적이 어떻고 등등, 얘기가 열띠게 오가던 중 그는 뜬금없이 자기의 숨겨진 갈등을 털어놓는다. 자식의 죽음 이후 다시 교회를 다니면서 꾸물거렸던, 하지만 잘도 숨겨져 있던 내적 흔들림의 실체가 언어를, 즉 형상을 얻게 된 것이다. 자기에게 닥친 이 고통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그의 목숨을 그렇게 앗아간다는 것일까요?” “도대체 교회에 안 다녔다고 자식을 빼앗아 가는 신이 어딨나요?”라고.

    하느님을 잘 믿으면 시련이 닥쳐와도 결국에는 몇 배로 보상해 주신다는 의미로 목사가 권한 〈욥기〉에서 그는 이미 전혀 다른 의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서론부(1~2장)와 결론부(42,7~17)에 나오는 이야기대로라면, 아들의 죽음은 결국 하느님이 사탄과 벌인 내기에 다름 아니라는 당황스런, 하지만 타당한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욥기〉에서 이런 의문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텍스트 속의 하느님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한데, 이 글 앞에서 인용된 본문인 〈욥기〉 7,4~5 같은 내용이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는 사람, 그 처참한 고통으로부터 잠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시간마저도 박탈당한 사람, 그렇게 매순간 지옥을 체감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은, 죽은 아들의 시선으로 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이 구절은, 그가 기도생활을 잘 못한 탓에 아들이 죽은 것이라는 목사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해석학적 문제의식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욥기〉에서 서두와 끝의 이야기를 빼면, 내내 욥의 원망과 항변으로 점철되고 있다는 것을 읽어냈다. 욥의 친구들, 나중에 그 대화에 끼어드는 젊은이, 그리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닥친 재앙과 신앙 사이에는 인과성이 있다는 통념의 수호자들이다. 하여 심문관처럼 욥을 추궁한다. ‘네 잘못으로 네가 재앙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한데, 실은 그것이 하느님의 장난이라니......

    요컨대 〈욥기〉는 당시 통념으로 작동하던 인과성의 신학에 대한 저항을 담은, 매우 지적인, 일종의 반신학적 통속적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대중 사이에서 회자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서두와 결론이 개작되어 통속소설화된 것이 우리가 접하는 〈욥기〉인 듯하다. 그러므로 본 내용을 통속화시킨 서론부와 결론부를 빼고 본론부만 읽는다면, 네 잘못이 재앙의 원인이라는 식의 통속적 주장에 대한 욥의 반신학을 읽을 수 있다.

    딸의 자살에 직면해서 자기의 잘못을 상상했던 한 아비, 그리고 아들의 돌연사에서 자기 자신의 불신앙을 보아야 했던 다른 아비, 이 둘은 바로 그 생각으로 인해 딸이, 그리고 아들이 겪고 있던 세상의 고통에 직면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세상은 그 죽음들로부터 면죄부를 얻게 된다. 물론 때로 고통에 직면해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매우 훌륭한 성찰의 태도다. 한데 문제는, 자책이라는 고통의 표현 방식이 종교제도나 국가제도, 심지어는 자본에 의해 마케팅의 도구로 활용되곤 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욥기〉는, 통념에서 벗어나 읽는 이에게는, 바로 이러한 은폐의 신학에 대항하는 반신학적 신학을 말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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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7]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후기구조주의와 해체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라는 믿음을 깨뜨리고, 인간의 주체성은 구조에 의해 구성된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파헤친 것은 구조주의의 성과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시작되는데, 그는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며, 기의란 기표의 차이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라 말한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언어가 실체와 조우할 수 없는 한계내에서 발생하는 언어들의 차이라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구조[각주:1]를 분석함으로서 실체를 로고스에서 발견해왔던 기존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거부하는 대신, 언어의 차이와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명증한 사실로 여겨진 자아 혹은 의식을 실재의 출발로 보았던 자아중심주의에 균열을 가하였다.이같은 구조주의적 관심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사에서 실존주의가 봉착했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면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가? 후기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푸코, 라캉, 들뢰즈, 알튀세르, 데리다와 같은 이들은 구조주의의 업적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 구조주의가 간과하였던 문제를 니체, 프로이트, 맑스주의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에 기반하여 전개한다. 말하자면, 라캉은 프로이트를,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푸코와 들뢰즈는 니체에 대한 다시읽기를 주장하는데, 물론 이들의 시도 조차도 소쉬르의 언어학으로 시작된 구조주의의 기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은 실체적 형이상학의 철학사를 뒤집기 위해 다른 경로를 채택했지만, 지향했던 지점은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표현대로 하자면, 기원과 중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중심이나 기원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당위적인 것으로 여겨진 시뮬라르크에 대한 위계질서와 그에 대한 차별과 억압도 일시에 무효화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한발 더나아가 구조주의의 노력으로 그나마 밝혀진 차이의 구조마저 의미관계의 본질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후기구조주의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된다. 구조주의는 영화에서처럼 매트릭스라는 거대한 컴퓨터 가상 인식체계가 지배하는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매트릭스라는 완벽한 통제시스템에 의해 컨트롤 당하고 있음을 구조주의는 드러냈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는 매트릭스의 실체를 밝혀낸 구조주의의 성과를 인정하지만, 매트릭스가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로 한 발 더 나간다. 말하자면, 매트릭스 조차도 가상적인 조작물일 뿐이지, 인간은 매트릭스에 의해 구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매트릭스에 장악되지 않는 '네오(키아누 리브스)' 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시온이라는 구역이야말로 매트릭스의 구조가 지배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을 일정한 규칙성과 폐쇄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로 인정하는 순간, 철학은 형이상학적 로고스 중심의 철학사가 걸어온 길로 되돌아갈 위험에 빠질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따라서, 모든 중심과 기원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매트릭스의 존재를 직시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네오와 같이 매트릭스의 감시를 빠져나오는 탈주하고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현상을 바로 인식하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가 넘어서려 했던 지점이 여기에 있다. 푸코는 성(sexuality)이 구조적으로 억압되어 왔다는 가설을 깨고 성에 대한 지식과 담론은 오히려 확산되어왔음을, 들뢰즈는 영토화/코드화된 억압적 체계를 인정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영토를 가로지르는 노마딕한 탈주선을 제시하였고, 라캉은 구조화된 무의식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의 주제로 등장시켰지만 동시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한걸음 더 나아갔으며, 알튀세르는 자본의 착쥐구조를 넘어 이데올로기와 국가장치라는 중층적 관계를 인식론적 틀로 제시하였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deconstruction)는 실체론적 철학에 저항하기 위한 구조주의의 기초위에 세워졌지만 구조주의적 인식체계 마저 넘어서려는 탈구조적인 사유행위를 함축해 놓은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매트릭스라는 형이상학의 시스템을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완벽할 것 처럼 보이는 구조 안에서도 네오처럼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놈이 반드시 하나쯤은 있다’는 사실에 의해 매트릭스조차 마침내 부정되고 해체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치밀한 관계망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내는 송곳 같은 현상이야말로 매트릭스로 구조화된 사회를 인식하는 본질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메타적 구조가 아니라, 구조를 전복시키는 미시적인 차이와 차이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던 태도에서 벗어나서, 안정과 질서라는 이름의 경계를 넘어 일탈하는 작은 변화들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질적 변화를 가져다 주는지를 묻는다. 이렇게 데리다에게서 후기구조주의는 전통적 사유방식을 해체(deconstruction)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해체된 빈 공간 위에 아무것도 다시 구축하지 않으려는 탈-구조화(de-construction)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무엇을 해체하려고 했으며, 해체 뒤에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해체를 허무주의의 유포라고 비판하는 우려에 대한 반론은 무엇인가? 해체론 안에서 주체의 윤리적 실천의 계기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이글이 관심하는 주제인데, 그의 핵심적인 개념들 몇가지로 제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텍스트


    데리다는 로고스중심주의 철학을 현존(presence)의 형이상학, 음성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로 파악하며, 이를 해체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전통적인 이성중심의 형이상학을 타겟으로 삼는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어떠한 기원이나 중심위에 세워진 사유체계도 아님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둔다. 형이상학의 근거지가 부정될 때에 순수성의 신화는 궤멸하게 되고, 비로소 본질과 현상, 선과 악,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음성과 문자 등과 같이 이항대립의 관계로 놓고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을 필연적인 결과로 정당화시켜왔던 근거들이 폭력적인 위계질서에 불가할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Of Grammatology)’에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데리다의 주장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였던 니체와 존재의 복구를 통해 근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하이데거, 그리고 소쉬르의 반실체적인 구조주의적 언어학의 성과를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차이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관계에 선행하는 원초적인 기원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구조를 유한하고 폐쇄된 총체성으로 이해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소쉬르에게서 문자에 대한 음성의 우월적 지위는 완전히 제거되지 못하였다는 것이 데리다의 진단이다.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타난 음성우월주의는 소쉬르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문자는 언어를 표상하는 유일한 목적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텍스트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시킴으로서 로고스중심주의의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소쉬르적인 구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음성 대신 텍스트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일까?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 항목들을 복권시키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것으로 로고스중심주의로 파생된 폭력적인 위계질서는 해체될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데리다의 해체전략은 또다른 형태의 이항대립구조의 탄생에 의해 좌초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의도한 것은 매트릭스를 대체할 다른 구조물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총체적인 구조로 실체를 파악해야한다는 어떠한 형태의 시도도 출현하지 않을 만큼의 해체로 까지 밀고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는 단순히 형이상학의 근거를 전복시키는 작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에게, 해체란 부수고 무너뜨리는 과격한 파괴운동(destruction)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어떠한 위계지배질서의 출현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탈-구조화(de-construction)에 대한 지향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차연(difference)’이라는 개념은 탈-구조화를 위한 그의 의도안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차연


   데리다는 탈-구조화의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서, 소쉬르가 주장했던 ‘기표 사이의 차이에 의해 기의가 구성된다’는 주장을 기원의 개념으로 확장시킴으로서 순수한 기원에 대한 신화를 완전히 제거하기에 나선다. 다시말해서, 기의는 기표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처럼, 기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표들의 차이가 반드시 기원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렇게 기표와 기의의 관계구조 안에서 보면, 기원은 더 이상 실체적인 것,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데, 기원이라는 것 역시 기원에 선행하고 우선하는 다른 하위 기표들의 차이와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보다 더 앞선 기원도 텍스트에 의해 차이화된 것에 불과하다. 데리다의 표현 그대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텍스트 중심주의는 기존의 사유체계를 철저하게 전복시킨다. 기표(문자)는 로고스철학에서 원본과는 무관한 열등한 것으로 배제되어 왔지만, 기표와 기의의 관계구조를 기원으로까지 확대적용시킬 때에 문자(기표)는 말(기의, 로고스)에 우선하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로써 기원의 기원으로서 적용된 기표들의 차이와 관계는 기원이 가지는 말의 모순성을 폭로하며 마침내 기원의 기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시킨다.

    기표들의 차이를 기원으로 확장시킴으로서 데리다는 순수한 기원이란 말 자체가 가지는 모순을 드러냄과 동시에 음성중심의 기원의 신화를 해체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곧 말에 대한 텍스트의 우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한다면 탈-구조화(de-construction)는 재-구조화(re-construction)로 퇴색하고 말 것이다. 텍스트는 기원적이지만 결코 기원의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 텍스트는 대상을 지시하는 ‘대리보충(supplement)’으로서의 기능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문자는 그 자체로 대상을 의미하지 못하고 단지 대리적인 보충물로서 문자들간의 차이를 통해 대상의 존재를 흔적으로 남길 뿐이다. 그러므로 흔적은 이미 시간적으로 항상 뒤에서서 대상을 쫓아가는 지연된 관계에 놓여 있다. 흔적으로서 텍스트는 대상을 은유적으로 지시할 수는 있지만 대상과 동일성을 가질수는 없다. 대상은 텍스트에 의한 ‘차이’와 ‘지연’이라는 시공간적 방식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공간성의 차이와 함께, 시간성의 지연이라는 이중적인 운동을 통해서 기원은 파악될 수 없는 흔적으로만 남겨지게 된다. 이렇게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인 지연을 통칭하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데리다는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고 여기게 만드는 의미의 효과가 사실은 무의미한 것임을 주장한다. 이렇게, ‘차연’은 소쉬르의 기표가 드러내는 공간성의 차이만으로는 형이상학의 인식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주의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이이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게 하는 근거가 되어온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뒤섞어 버림으로서 끊임없이 기원을 재생산해 내려는 모든 철학적 시도를 봉쇄해 버리려는 해체와 탈-구조화의 이중적인 전략을 수행하는 데리다의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유령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철학하기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에 따른다면, 철학이 무언가에 대해 설명하고 논증하기 위해 텍스트를 동원할수록 지시하려는 대상은 자꾸만 멀어져 갈 뿐이기 때문이다. 흔적으로서 글쓰기가 증명하는 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 뿐이다. 프랑스의 68혁명의 분위기에서 지식인들에게 보다 날카롭고 급진적인 정치철학의 태도가 요구되었던 것을 감안하자면, 데리다의 해체는 한가한 지식인의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투항주의적인 태도로 비춰진다. 데리다의 비판론자들이 그를 철학의 종말을 고하는 허무주의로, 심지어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동력마저 무력화시키는 위선자로 낙인하는 이유는 이점에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초기에 거침없이 써내려간 해체적 입장이 의미하는 정치 윤리적 실천의 면모는 그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전개된 유령론에서 드러난다.

   데리다에게 차연은 전통적 시공간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개념인데, 전통적인 입장에서 현존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단절되었으며 미래와는 연결되지 않은 ‘지금’이라는 정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안에서만 파악되는 것이지만, 차연의 운동은 현존의 대상을 끊임없이 과거로 밀어내고 다시 미래를 향해 달아나며 남기는 흔적을 추적해야 하는 통시적인 시간속에서 파악된다. 차연의 통시적 효과는 과거, 현재와 미래의 시간성들이 일직선상위에 차례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안에서 현존은 과거에 의해 부정되며, 미래에 의해서만 유추될 수 있는 불확실성으로 남는다. 따라서 현존하는 것은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존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모호한 것이다. 그는 이를 유령(specter)으로 표현한다. 유령은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기에, 존재의 부재와 더불어 부재의 존재를 지칭하기에 매우 적절한 은유로 채택된다. 유령과 결부된 과거와 미래는 지금, 여기의 현존을 일자의 동일성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한다. 유령은 그것과는 무관한 개방적이고 불투명한 절대적인 타자성이다. 데리다는, 철학이 당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자아와 현존의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을 유령으로 존재하는 비현존의 존재론으로 뒤집어 놓는다. 인식의 근거는 자아의 의식, 혹은 기원이 아니라 유령과 같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흔적으로 등장하는 타자일 수밖에 없다. 유령으로서 존재하는 타자는 자아의 이성과 판단에 의해 포섭되지 않으며 단지 무조건적으로 환대(hospitality)해야할 관계일 뿐이다.

    데리다에게서 해체의 정치적 급진성은 바로 이 유령의 존재에서 발견된다. 유령은 자아중심적인 시공간 구조에서 만들어지는 예측된 미래를 추구하는 일체의 목적론적 실천행위를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착취의 현실에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 역시 공산주의의 필연성을 낙관하는 것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맑스의 공산주의라는 단선적이고 목적론적 구조위에서 공산주의는 ‘유럽 전역을 떠돌며 자본가를 위협하는 유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데리다는, 맑스를 넘어 계급, 국가, 제도의 경계를 허물고 도래하는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새로운 형태의 타자들과의 연대를 요구한다. 경계를 넘어선 개방적인 연대 안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오늘의 불의한 착취의 구조안에서 다시 소환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실체론적 존재론은 자본주의와의 공모관계안에서 세계를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로 계층화하고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시켜 왔다면, 맑스의 공산주의는 같은 방식으로 가시적인 현존을 인간사회의 진보 가치로 삼아왔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 양쪽 모두가 믿어온 현존의 공간과 시간적인 경계를 넘어서 출몰하는 유령의 존재를 인식하고 유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정치윤리를 제안한다.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구축해 놓은 확고부동한 존재를 존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유령으로 대체시켜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모호하다. 존재가 아닌 유령을 실재하는 것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데리다는 주체의 구성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봉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데리다의 의도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정관념 하나를 지워버릴 필요가 있다. 데리다의 형이상학적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은 주체를 부정하느냐 긍정하느냐는 식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추궁하는 것은 유령론이 지시하는 정치윤리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주체는 존재하는가, 부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익숙해 왔던 전통적인 접근법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해 고흐의 그림 “끈이 달린 낡은 구두”를 소재로 사용한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입장에서 이 그림에 대한 감상법을 재구성하는데, 샤피로는 구두 그림의 제작자인 화가가 누구인지를, 하이데거는 이 구두의 소유자에게 관심을 둔다고 본다. 두 사람의 감상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구두그림의 귀속관계가 그림을 그린 화가에 있든지, 아니면 실제 구두를 신었던 한 노동자로 보든지 간에 그들은 구두의 주체를 발견해 내려는 노력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만큼은 동일한 감상법을 취한다고 보았다. 반면, 이 그림을 보는 데리다는, 이 두 감상법이 모두 적절치 않다고 본다. 왜냐면, 이 구두의 그림은 신고 있는 상태가 아닐 뿐 아니라, 그림은 이미 화가의 화실에서 떠나 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두의 주인은 화가도, 실제 신었을 법한 누군가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구두의 주인는 부재할 뿐이다. 그러나 구두의 주인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구두는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는 폐쇄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주체의 부재를 통해 주장하려는 바는 대상을 특정 주체에 귀속시키는 것으로는 사물의 실재에 다가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유령과 같이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실재는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데리다가 유령론을 통해서 말하려는 바는 자기 동일적인 주체를 해체하려는 것이며, 자기 동일성이 현존의 근거로 왜곡되어온 형이상학전통을 차이와 반복, 흔적으로 치환하려는 것에 있다. 존재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을 통해 인간의 책임과 윤리를 말해왔던 전통을 해체하고, 역으로 절대적인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윤리적 태도를 통해서만 존재에 대해 말하려는 철학의 시도는 가능해 진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유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환대의 윤리는 소수자, 약자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행동규범을 도덕적 감성에 기대어 호소하려는 것과 거리가 멀다. 유령론은 서양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해체작업이며 차이와 흔적을 통해서 출현하게 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경계없이 예측불가능하게 도래하게 되는 선물과 같은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며, 기존의 사고방식과 틀을 넘어서는 낯선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데리다는 묻는다. 유령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것인가, 유령을 축출할 것인가? 윤리적 주체로 설 것인지 말것인지는 그 물음에 달려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소쉬르는 언어가 ‘랑그’와 ‘빠롤’이라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 설명한다. 랑그가 언어의 원리/체계라면 빠롤은 언어를 말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랑그는 빠롤을 통해 나타난다. 여기서, 그의 중요한 또다른 개념, 시니피앙(기표/기호)과 시니피에(기의/대상)가 있는데, 이 구분을 통해 소쉬르가 주장하려 한 것은,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의 차이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언어는 사물/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는 것. 소쉬르는 서구의 로고스 중심의 형이상학적 언어학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실체란 언어의 구조와 기표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구조적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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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편재와 인간의 공간



유승현

(GTU Ph.D Candidate)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편 139:7-8)



New Horizons


   2015년 7월 14일 우리 지구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6년 1월 19일 플로리다 주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된 우주 탐사선 New Horizons 호가 약 9년 반 동안 30억 마일이 넘는 여행을 거쳐 목적지인 명왕성 (Pluto)을 서울과 뉴욕 사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로 통과했습니다. 탐사선은 며칠 동안 명왕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과 정밀한 사진들을 지구로 보내왔습니다. 실로 우리는 우리 인간의 과학기술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 탐사선에는 흥미 있는 물체 두 가지가 부착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25센트 짜리 쿼터 동전 2개 입니다. 동전 한 개는 탐사선이 발사된 플로리다 주 동전이고, 다른 한 개는 탐사선이 조립된 메릴랜드 주의 동전입니다. 왜 두 개의 동전을 달았을까요? 실용적인 이유로는 그 동전 두개가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용적인 이유 말고도 상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작은 명왕성에도 그 둘레를 도는 위성이 있습니다. 그 위성의 이름은 ‘카론’입니다. 카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계의 강을 건너주는 뱃사공인데, 그는 뱃삯을 내는 사람만 배에 태워주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명왕성의 위성 카론에게 줄 뱃삯으로 주기 위해 50센트를 매달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쓸데 없는 미신처럼 들리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는 낭만적인 소재입니다. 그리고 이 동전들 말고 다른 한 가지 중요한 물건이 작은 통 안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1930년 명왕성을 최초로 발견한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 (Clyde Tombaugh)의 유해 일부분입니다. 그의 뼛가루가 들어있는 이 작은 통에는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안에 미국인 클라이드 톰보의 유해가 있습니다. 명왕성과 태양계 제 삼지대의 발견자, 아델과 모론의 아들, 천문학자, 교사, 달변가이자 친구: 클라이드 W. 톰보 (1906년부터 1997년)”

   New Horizon호와 명왕성이라는 작은 소행성을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서 저는 가슴이 뭉클함과 측은함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바쳐서 연구했고 가 보고 싶었던 작은 별에 그는 85년이 지난 후에 살아서가 아니라, 죽은 후 유해로서 지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우주 탐사선의 이름 New Horizons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새로운 공간의 지평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재 명왕성을 지나 태양계 바깥으로 끊없이 향하고 있는 그 탐사선과 한 번 교신을 하는데만 약 9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전파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이 일초에 약 삼십만 킬로미터를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빠른 속도로도 왕복하는데 9시간이 걸린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이 지구가 얼마나 좁은 곳인가, 그 보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참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이번에는 꼭 이 곳에 여행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가 보아도 평생을 여행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가 가 본 곳은 너무나 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어떤 순간에 우리의 몸이 있는 오직 그 곳에만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까?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우주선을 만듭니다. 통신기술을 개발해서 세계 어디에서나 소통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의 기술로 만들어진 우주 탐사선이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4.2 광년 떨어진 별까지 날아가는데는 무려 7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편재성을 말하는 성경의 구절들


   이런 인간의 유한한 공간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편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는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5장 3절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3절과 24절은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히브리어로 하늘과 땅, 천지라는 말은 온 우주와 우주에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들을 모든 방법으로 채우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장 6절도 말씀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이 우주의 만유에게 생명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모든 철학과 사상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의 저명한 철학자들을 대면해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고 자신이 알고 믿는 우주 어디에나 계시고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면서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이 어렵게 보이는 말을 영어성경은 간단한 말로 표현합니다: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즉,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어디에나 계실까?


   우리는 여기서 미련한 질문이지만 좀 더 깊이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작은 제한된 공간에서만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실까요? 이런 물음을 우리만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근대 시대 유명한 과학자였고 신앙인이었던 아이작 뉴튼은 아무 것도 없는 우주 공간을 통해서 빛이 전달되는 것에 의문을 느꼈고, 빛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에테르’라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에도 많은 천문학자들이 우주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우주 전체는 23%의 암흑물질과 73%의 암흑에너지, 그리고 4%의 별들과 행성, 생명체 같은 일반적인 물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주가 실제로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들의 실체를 밝히려고 하는 것은 아주 값어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는 많은 무신론적인 과학자들은 우주가 그런 물질로서 채워져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은연 중에 우주 전체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주가 채워져 있든 비워져 있든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 7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여기서 “주의 신”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물질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서 즉, 영으로서 존재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왜 우주 전체에 충만할 수 있는지를 계속 묻는다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학자 어거스틴 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나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 전체에 충만한 이유에 대해 우리의 이성으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은 그의 시간과 능력이 무궁하시듯이, 그의 임재에 있어서도 매이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한하기에 그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라고, 더 나아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기도한 것처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왕상 8:27) 라고 겸손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공간에서 도우시는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공간에 계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간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 하나님을 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바다에 던지시고 큰 물고기를 예비해서 그를 삼키게 하셨을 때, 요나는 깊은 심연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편재하시는 하나님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요나 2장 2절에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요나의 이 기도가 진실하지 않은 기도였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물고기 뱃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건지신 다음 요나서 3장에서 나오는 그의 행동을 살펴봤을 때 끝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요나는 이미 죽은 것과 같은 생명의 위기를 통해서 물고기의 뱃속, 더 나아가 스올 즉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도 계시는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39편을 쓴 다윗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왜 다윗이 139편 8절처럼 하늘로, 음부로 9절처럼 바다 끝까지 가야 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소들은 생명이 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 더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은 한계 상황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그런 위기를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 곳에서조차 다윗은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깨닫고 10절에서 고백합니다: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도 4절에서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망의 골짜기에는 마치 명왕성의 위성 카론이 명계의 강을 건너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죽음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한계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공간을 넘어서


   우리는 공간을 점유해야만 하는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 땅과 영토를 확보해야만 하고, 큰 집과 큰 자동차가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와 이웃과 피조물 전체의 공간이 아니라 오직 나의 공간만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끝내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컴퓨터의 가상 공간을 찾고 끝내 자신의 방 안에 갖혀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야만 하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2011년 통계로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라고 불리는 은둔형 외톨이가 7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30만명의 사람들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미국에도 약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은둔형 외톨이이거나 그렇게 될 소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내 자신이며 각종 미디어와 첨단 기기에 빠져 사는 내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 수 있는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공간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시편 139편 23절에서 다윗이 마지막으로 고백했던 겸손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나를 살피시라고 간곡히 기도한 다윗처럼, 내 스스로가 나만의 공간을 만들려고만 하지는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공간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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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



심범섭*



   스물 두 해 전 군대 시절 어느날 한 동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죽음을 탐구하는 철학자가 되겠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그 무렵 자신에게 “검은 옷을 입은 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젊고도 젊은 그 시절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 결심을 금방 잊어먹고 오랫동안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이 나에게 사색과 배움의 가장 큰 주제가 되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가까운 분이 작고하신 일이지만 아마 그 동안 살아오면서 죽음을 더 많이 보고 들으면서, 또 내 몸의 노화를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관심이 점차 자라왔으리라고도 생각한다.

   몇 달 전 강릉시 포남동에 있는 대지서점에 갔을 때 사장님한테 죽음에 대한 책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장님은 그렇다고 하시면서 몇 년 전부터 죽음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말에 이어 “100세 시대니까!”라고 덧붙이셨다. 사장님의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의학발전으로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 죽음의 경험을 이전과는 다르게 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새로운 관심으로, 더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장님이 말한 이유가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고령화 사회이므로’라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더 생각하게 된다면, 한 사회도 평균 연령이 높아질수록 죽음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오늘의 시대가 이전보다 감정과 종교 및 전인적이고 인문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죽음은 강렬한 슬픔과 두려움과 연관되고 종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태양과 죽음은 오래 바라볼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죽음은 생각을 시작하기에도 생각을 지속하기에도 쉬운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기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거의 언제나 제기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이다. 이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방법은 ‘죽는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라고, 조금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럴 때 잘 죽는 것은 당연히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하지만 더 일상적인 용법에서 ‘죽는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경우에 따라 며칠 또는 몇 달 또는 몇 년이 되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사는 것을 뜻한다. 이 기간을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만약 당신이 한달 후에 죽는다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드러내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나에게 잘 죽는 것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기간에만 아니라 언제라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또 늘 이렇게 산다면 죽음에 임박해 삶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가 없을 것이다. 또한 죽음이란 언제든지 우리에게 닥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다시금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든 잘 살면 잘 죽는 것이라는 견해는 설득력이 크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이 물음은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이며, 수 많은 짧고 긴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만난 한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한 좋은 대답으로 내 마음에 감명을 주었다. 이 표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를 소박하게 생각해 보았다.


1. 사랑과 생명


    우선 사랑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하겠지만 그래도 사랑에 서로 다른 개체들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있음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책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을 인간이 혼자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루는 연합”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20세기의 큰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도 “사랑은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이다”라고 말한다.

    두 학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사랑과 생명을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은 실재하는 존재이고 사랑은 생명을 움직이는 힘이다.” 프롬은 사랑의 구성요소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달리 말해 사랑은 생명을 더 증진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며, 이는 사실 프롬이나 틸리히 같은 대학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직관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의 부재를 뜻하는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과 조화하기 위해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반응인 듯 하다.  

    윤동주 시인이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할 때에도 사랑을 죽음과 대비되는 생명의 힘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는 사랑이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을 극복하거나 죽음과 조화하는 “가장 강력하고 심오한” 힘이라는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우리는 이 싯구에 숨어 있는 최상급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랑


    앞에서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했는데, 윤동주 시에서 “죽어가는”의 의미는 이 가운데 어느 것일까? 태어나는 순간에 시작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그것이 “서시”라는 시에 담긴 고양된 도덕적 정서 및 완벽주의와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기”를 바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시인에게서 인지되는 완벽주의와 이상주의에 이런 넓은 의미가 더 잘 어울린다고 본다.

    살아가는 과정, 곧 죽어가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 과정에 고통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인생은 결국 죽음이라는 한계를 맞아야하므로 서글프지만 그 과정에서 이러저런 괴로움이 많아서 또 슬픈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신경쓰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필연보다는 당장 닥쳐온 구체적인 고민거리이다. 흔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태어났다고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면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의 구체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 가운데에서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큰 비중을 차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울 때 우리의 생명은 위축되며, 그러므로 고통은 죽음에 더 다가선 상태이다. 우리는 생명을 더 많이 누리길 바라므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럴 때 누군가 고통을 이해해 주면 우리는 하나되는 느낌을 받고 위로를 받는다. 달리 말해 위로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확장을 느끼는 것, 내 안에서 생명력이 더 증가하는 사건이다. 이렇게 생명력이 부족할 때 새로이 공급받는 것이 이미 생명력이 넉넉할 때 더 받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경험인 듯 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는 이미 아쉬울 것 없는데 더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결여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대답은 이것인 것 같다. 곧, 부족한 생명력을 더해주는 것은 그 대상이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생명을 아예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먹을 것이 넉넉할 때 누가 나한테 밥 한 그릇을 주는 것보다 당장 굶어죽을 지경에 밥 한 그릇을 주는 것이 훨씬 더 고맙고 또 의미있을 것이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경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경계에 가까이 간 존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덜어주거나 없애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영어 속담도 생겨난 것 같다. 히브리 성서 <시편> 1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개인과 공동체가 좋은 삶을 추구할 때, 결여와 고통이 없는 것이 풍족하고 즐거움이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함을 암시한다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히브리 성서 <이사야>서에 이런 말이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50:4). 이 말을 하는 이사야도 위로하는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위로의 말을 어떻게 할 지를 하나님이 알려준다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축하의 말을 해야할 지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사실도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에는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들도 있다. 말보다는 적절한 행동적 조처나 물질제공이 더 시급한 경우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 그냥 같이 있어주는 것 등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그러나 최선의 방안이 말이든 다른 것이든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사야의 말에 암시된, 말로 위로하기의 어려움은 사실 모든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대변할지도 모른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학자들의 혀”를 얻었다고 하는데, 위로를 잘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동시에 “위로학”을 하는 노력을 경주해야할지도 모른다.

    이 위로학은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마태복음 10:16)과 폭넓은 공부와 면밀한 분석 등을 요구할 것이다. 이 위로학에서 놓칠 수 없는 진실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경우 위로자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말하듯 “인생의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엄연한 진실로부터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싯구에 그 영혼이 공명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위로학의 길을 가고 훌륭한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3. 보편적 사랑


    이어서 주어진 구절에서 우리의 생각이 머물러야 할 표현은 “모든”이 아닐까 한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한 비범한 의식, 일상적 의식에서 벗어난 확장되고 고양된 의식을 본다. 일상적 의식에서 사랑은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에 국한되기 쉽다. 마태복음 5:46-47에서 예수가 하는 말도 바로 이러한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가 강조하는 포괄적인 사랑을 결심하는 비범한 의식은 “서시”에서는 생명있는 존재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시인의 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간 깨달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 또한 죽는다!’라는 인식일 것이다. 생명있는 존재는 ‘나를 비롯하여’ 모두 죽는다라는 필연을 직시하는 데에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생명있는 존재를 사랑해야겠다는 의지가 태어났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런 인식과 다짐에는 깊은 공감과 유대의식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대의식을 힘있게 잘 표현한 문장으로서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사제였던 존 돈(John Donne 1572 ~ 1631)이 쓴 구절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위축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이 울리나 알아보려 절대로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 조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이러한 유대의식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정의에 온전히 맞아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은 이미 하나임을 상기할 때 우러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틸리히가 (앞에서 소개했듯이) 사랑을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으로 정의한 다음, 이 연합이 “본질적으로 함께 속하는 것[이] 분리”된 다음 “재연합(reunion)”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도움이 되는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이 통찰은 존 돈과 윤동주 두 시인이 말하는 넓은 사랑을 더 충실하게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넓은 사랑을 “모든”이라는 양적으로 포괄적인 표현과 어울리는 “보편적”이라는 또 다른 양적인 개념을 사용해 “보편적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양적인 표현은 이런 사랑의 요건이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질적인 특성을 간과하게 할 위험이 있다. 이 질적인 특성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동기에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진정한 보편적 사랑은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해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흠 없는 통로일까? 누구도 완벽한 통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완벽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하여, 닿을 수 없는 지평선을 향하여 걸어가듯 계속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보편적인 듯한 사랑의 동기에 이기적인 추구가 우려할 만큼 도사리고 있을 때 이런 사랑은 가짜 보편적 사랑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6:1-4에서 예수가 하는 말은 이런 가짜 사랑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편적 사랑을 이야기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한데 힘을 합쳐 이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능력과 자원은 심하게 제한되어 있어 아무리 그 의지의 지향에서 “모든” 생명있는 존재(또는 모든 사람)를 사랑하고자 하더라도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한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 돌보다가 이튿날 길을 떠나기 전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 . .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10:35)라고 말한다. 이때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함께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자고 초대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주막 주인에게 이 초대는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점도 있다. 왜냐하면 환자를 돌보는 비용이 두 데나리온 넘게 들어 자기 돈을 썼는데 사마리아인이 약속을 어기고 다시는 안 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보편적 사랑을 실천할 때 많은 경우 현실적인 손해를 각오하거나 감수해야 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실천이 한계에 부딪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초대를 우리는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용기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맺는 말


    영국이 낳은 천재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1872 ~ 1970)은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어느날 밤 내연녀와 함께 호텔방에 있는데 갑자기 바깥 세상이 지옥이 된 듯 했다. 당시는 2차대전 중이었는데 그날 밤 독일군이 런던을 공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 러셀은 겁에 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온전한 두려움은 사랑을 내쫓는다.” 이 말은 요한1서 4:18절에 나오는 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를 뒤집은 것이다. 비록 러셀이 이 말을 한 상황은 격조가 없지만 이 말 자체는 요한1서의 진술처럼 사랑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다.

    사랑과 두려움이 인간의 모든 동기의 두 가지 근원이라는 이해와 더불어 사랑과 두려움이 양립할 수 없다는 요한1서와 러셀의 이해는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의미있는 통찰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윤동주 시인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의지는 두려움과 죽음의 어둠을 사랑과 생명의 빛으로 쫓아내려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서시”는 조용한 독백처럼 씌여졌지만 이 시를 읽는 사람에게 이 빛을 확장하는 길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일깨울 수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고 말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함으로써 더 많은 사랑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죽음의 영역을 더 축소시키기를 소망한다.

    이 글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죽는 길로서 잘 사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주어진 싯구를 다루는 방식에는 적어도 한 가지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이 구절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문장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수식어구를 논의에서 제외함으로써 내 해석 방식에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느낌이 더해지게 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 번 글에서 이 수식어구, 그리고 (해당 문장과 함께 “서시”에서 시인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나타내는) 바로 다음 문장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를 다루겠다고 계획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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