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개요


  이번 포럼은 이슈토크로 진행합니다. 주제는 임보라 목사에 대한 개신교계 주류교단 이단대책위원회들의 이단성 조사국면에 즈음한 한국개신교의 마녀사냥의 정치학에 관한 것입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신학과 신학 사역자에 대한 이단시비는 처음이 아닙니다. 김재준 목사와 변선환 목사에 대한 이단성 조사와 판결은 한국개신교에 커다란 상처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수치스런 한국개신교의 폭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개신교계의 8개 주류교단들이 공조한 이단성 시비는 선례가 거의 없는 사태입니다. 물론 교단들의 합의나 신자들의 동의가 없는 일부 이단심판관 집단의 도발적 행보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에 대한 각 교단의 공식적인 대응이 없는 것은 이 사태에 대해 한국개신교 전체가 책임을 져야하는 일인 듯합니다. 

  이번 이슈토크에서는 이 사태를 둘러싼 교회의 반동성애 운동의 정치학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 사태와 관련한 향후 전개에 대해 전망해보고자 합니다. 진지한 대화와 토론에 함께 할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일시_ 2017. 7. 31(월) 오후 7:30


장소_ 안병무홀(서대문역 1번출구)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한국 개신교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교육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한참 종북몰이를 하는 야당 국회의원이 나오는 TV를 시청하던 한 초로의 택시기사가 내게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저렇게 말하죠?” 전임 대통령과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말한 그는 평생 보수를 지지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저런 말에 짜증난다고 토로했다. 그는 영화 카피 같은 말 한마디를 던지며 식당 밖으로 나갔다. “저 양반(야당 국회의원)의 시계는 거꾸로 가나봐!”  

   순간 그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사역을 하는 한 여성 목사가 떠올랐다. 내 생각엔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목사 선배들의 계보를 이을 만한 대단한 인물이어서, 후배임에도 늘 경이롭게 올려다보는 이다. 그는 얼마 전 한 보수적 교단 산하 ‘이단피해대책 조사연구위원회’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교단 총회에 제출된 안건에 따라 이단성 여부를 조사 중이니 자기들이 요구하는 자료를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신학적 관점을 달리하는 타 교단 소속 목사에게 이런 식의 공문을 보낸 단체의 무례함의 근저에는 자신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은 악마의 마수에 걸려든 자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예상대로 그 단체와 교단에 조롱과 비난이 폭주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 법이다.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이들은 대개 무수한 대중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위용’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우선 쪽수가 밀린다고 생각했는지 동료들이 몰려왔다. 이른바 ‘한국교회 8개 교단 이단대책위원회’라는 단체가 입장 발표를 했다. 이들 8개 교단은 한국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 신자 수와 교회당 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 그 발표의 내용은 문제의 목사에 대한 이단성 조사에 공조하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퀴어성서 주석’의 번역을 주도했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 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성소수자’ 문제가 그들의 무례한 행동의 요체였다. 그들에 의하면 성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성서를 ‘일점일획도 어길 수 없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불가피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가령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는 <레위기> 20장13절을 들이대며, 성소수자 인권이라는 건 ‘극단적인’ 반성서적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이 과연 게이 간의 사랑을 문제시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는 이 본문을 제사장 중심의 정치체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제사장적 순결주의를 정치적 어젠다로 활용한 흔적으로 해석하였다. 물론 그들은 내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니, 그들 식으로 이 본문을 보자. 이제 그들은 레즈비언이나 트랜스젠더의 사랑에 대해서 좀 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성서는 트랜스젠더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않고 있고, 레즈비언에 대해선 억지 해석이 필요한 텍스트들이 몇 개 있을 뿐이다. 더욱 문제인 건, <레위기> 20장의 16개나 되는 극형 목록에 ‘남의 아내와 성관계를 한 자는 사형에 처하라’는 구절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목사들의 성추문 사건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단들은 성추문 주역인 목사들에 대해 경미한 징계를 내리거나 아예 모른 체한다. 더구나 이것은 십계명에도 등장할 만큼, 남자 간의 성관계보다 엄중한 죄에 속한다. 그렇다면 그들 식의 해석을 따른다면 목사의 성추문을 묵과한 목사들 모두는 이단 심판의 대상이다.

    이런 게 바로 이단몰이의 특징이다. 성서를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극한적인 증오를 퍼붓는 것이다. 마치 종북몰이가 그렇듯이.  

   이단몰이까지는 아니지만, 최근 위의 8개 교단들을 포함한 개신교의 무수한 교단들에선 여성혐오주의도 커다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령,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단에 속하는 한 교파는 총회 대의원 가운데 여성이 1.6%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비판하는 안건이 제출되었는데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대의원들이 그 제안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여성 대의원이 가장 많다는 교단도 10~15%에 그치는 형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교단들에서 여성은 목사도 장로도 될 수 없다. 그러니 총회 대의원 비율은 당연히 0%다. 이런 놀라운 비율은 전 세계적으로 기록에 남을 만한 일임에도 한국 교회에선 말도 꺼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 교단 총회장의 분위기를 전한 신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거긴 여성혐오주의가 토네이도처럼 휩쓸고 지나간 현장이에요.” 

    한국 개신교는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 여성혐오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전 지구적으로 인권의 관점에서 가장 주목받는 범죄다. 그런 범죄가 불꽃을 일으키는 현장, 그곳에 일부 목사들이 있다. 그들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06302108015 이 글은 경향신문 2017. 6. 30일자 오피니언란에 실린 칼럼입니다.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치명적인 파국에 이르는 소소한 균열

<세일즈맨 (아쉬가르 파르하디, 2016)> 




이희승*



  2017년 1월, 막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가 이란을 포함한 이슬람 7개국 국민의 입국 및 비자 발급을 금지하는 반이민 행정명령조치를 발표해서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마치 세상을 “그들”과 “우리”라는 이름으로 두동강 내려는 듯 말입니다. 제 89회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이란출신의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 역시 입국 금지 대상자에 포함되었죠.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아카데미 참석을 공개적으로 보이콧했지만, 그의 영화 <세일즈맨>은 오스카를 거머쥠으로써 오히려 트럼프가 정권 초기 야심차게 시도한 반이슬람 정책의 야만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파르하디 감독의 수상이 반트럼프적 정서를 가진 헐리우드의 정치적 계산이라는 해석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세일즈맨>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2011)> 이라는 작품으로 이미 아카데미의 영광을 누린 바 있는 파르하디 감독의 명성에 걸맞은 수작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세일즈맨>은, 연극 연출을 전공한 파르하디 감독의 예술적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연극무대와 그 연극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참여하는 배우들의 일상을 교묘히 엮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다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에 관하여(2009)>,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그리고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2013)> 등의 전작에서 보여준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익숙한 인물들과 꾸밈없이 평범한 대화를 비범하고 독창적인 영화적 구성 속에 담아냄으로써, 가장 일상적인 순간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섬뜩한 인간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라고 하겠습니다. 이란 영화라 하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담담하고 동화적인 영화를 기대했던 저이기에, 파르하디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나서 느낀 서늘함은 쉽게 떨쳐 버리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만, 이란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공간이 갖는 의미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적 환경과 개인적 욕망, 그리고 이 두 인위적 요소를 지배하는 듯한 시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제가 겹쳐져 만들어내는 비극적 운명의 보편성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들은 소소한 일상의 균열들이 빚어내는 현대의 비극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네요.


  <세일즈맨>의 첫 장면에서 공연을 준비 중인 텅빈 연극 무대를 정적인 몽타주로 잡아내면서, 파르하디 감독은 이 영화가 캐릭터의 개별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의 운명이 만들어지고 결정되어지는 공간에 더 관심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잠시 암전이 있은 후, 소란스러운 소음이 어수선한 분위기로 장면을 전환하면서, 영화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라나와 에마드가 사는 아파트 내부로 관객을 안내합니다. 전쟁이라도 난 듯, 한밤중에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채 다급히 아파트를 빠져 나가느라 아우성입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아파트 유리창에 불길한 균열이 생기자, 카메라는 갈라지는 유리창 너머를 응시합니다. 긴박하게 대피를 해야 할 만큼 위태롭게 금이 가기 시작한 아파트 건물 바로 옆에서는, 늦은 시각까지 불을 밝히고 건물 기초 공사가 한창인 불도저가 바삐 땅을 파내고 있지요. 그러니까, 영화는 처음부터 건설과 붕괴가 한덩어리가 된 채, 사람들을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일순간 거리로 몰아내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이란의 실상을 꼬집습니다. 불도저식 개발, 그리고 사람과 환경보다는 투자가치를 먼저 생각하는 재개발로 얼룩진 도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말없는’ 카메라의 응시 속에 담긴 원망과 후회가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시에 폐허로 변해버린 아파트에 짐을 챙기려고 돌아온 라나와 에마드의 분주한 모습 사이로, 집주인들의 예술적 기질과 지적인 취향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단정했던 보금자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마드는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인기있는 젊은 선생님이자 극단 활동을 하는 연극인이고, 라나는 그의 부인이자 예술적 동지입니다. 극단에서 준비하고 있는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도 둘은 주인공 부부인 윌리와 린다를 맡아 연기하죠. 살던 집을 잃은 라나와 에마드에게 같은 극단에서 연극을 하는 바박이 자신이 소유한 옥탑방을 빌려 줍니다. 몹시 낡고 좁지만 달리 대책이 없던 젊은 부부는 곧장 이사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전에 살던 세입자가 작은방에 짐을 잔뜩 쌓아 놓은 채로 이삿날에 나타나지 않자, 집주인인 바박은 무자비하게 방문을 뜯고서 찾아 가지 않은 그녀의 짐들을 집밖에 내놓기로 합니다. 라나와 에마드는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에 손을 대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속히 짐정리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바박을 말리지 않고 방관합니다. 그리고 그 밤, 허락도 없이 집 밖으로 버려진 이전 세입자의 짐은 세차게 퍼붓는 비에 속수무책 젖어버리죠.


    불운의 시작은 이 영화가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소멸과 생성이 자연스럽게 순환고리를 만들어야 하는, 옛 것과 새 것, 혹은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자리바꿈을 해야 하는 운명의 접점. 크고 작은 인간의 탐욕이 그 접점에 끼어 들어 원치 않는 운명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지점말입니다.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얻기에 급급한 성마른 자본주의적 선택으로 인해 건설과 붕괴, 건축과 재건축이 마구 뒤엉킨 그 공간 안에서 사람들 또한 서로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무심히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야 맙니다. 이사 다음날, 공연을 마치고 홀로 집에 돌아온 라나는 이전 세입자와 그녀의 어린 아들이 남겨 놓은 흔적을 부지런히 지워 버립니다. 여러 남자들과 수시로 관계를 맺었던 이전 세입자의 고객 중 한사람은, 다음 세입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못한 ‘그녀’의 물건들과 아직 깨끗이 비워지지 않은 공간에 밀고 들어온 라나와 에마드가 어색하게 공존하는 아파트를 불쑥 찾습니다. 그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던 라나를, 전부터 자신이 찾았던 ‘그녀’인줄로만 알고 범하려다가 크게 부상을 입히고 황급히 사라지죠.. 


    이웃들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와 두려움과 수치심에 사로잡힌 라나와, 아내의 상처보다는 괴한의 공격에 정신을 잃은 라나가 벌거 벗은 채 욕실에서 피흘리는 모습을 이웃에게 보인 것 때문에 더욱 괴로운 에마드는 이제 더이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지각없는 난상 개발이 아파트 벽에 만들어 놓은 균열은 이 부부 사이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갈라 놓은 듯 합니다. 따뜻한 시선을 주고 받던 둘은 이제 서로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합니다. 둘 사이의 명랑하고 지적인 대화는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비난으로 변하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을 아내를 소리없이 원망하고 각자 자신을 분노와 절망 속에 고립시키고 가두어 버립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에마드는 당황한 범인이 흘리고 간 단서를 가지고 범인 찾기에 집착하고, 그런 에마드를 지켜 보는 라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절감합니다. 두 주연배우의 거듭되는 실수로 공연은 엉망이 되어 가고, 이제 연극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 윌리의 고독과 소외, 그리고 때이른 죽음이 아니라, 느닷없이 닥친 불행에 몸부림치는 라나와 에마드를 위한 무대가 된 듯합니다. 파르하디의 영화는 첫 장면에서 암시한 것처럼 두 개의 세계가 성급히 하나로 모아지는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비극을 세밀한 필체로 그려냅니다. 무대위의 비극과 무대 밖의 현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담아 내는 감독의 치밀함은, 거듭된 난개발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이 곳곳에 균열이 드러난 이란의 도시 풍경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야기가 중간 지점에 도달할 즈음, 연극 출연을 잠시 중단한 라나는 극단에서 함께 연극을 하고 있는 이혼녀 사남의 어린 아들을 돌봐 주기로 하고 아파트로 데리고 옵니다. 이 작은 아이는 라나가 내동댕이친 이전 세입자의 이삿짐 사이를 헤집고, 전에 살던 아이가 벽이 그려 놓은 낙서에 정성스레 덧칠을 합니다. 이제 오래되고 잊혀지고 지워져서 창백해진 나무에 진한 초록색을 덧입힙니다. 마치 옛 시간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 버리는데 집착하던 라나와 에마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소멸과 생성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 하나의 운명임을 보여 주려는 듯 말입니다. 일상적 이미지에다 독창적인 구성으로 새로움을 불어 넣는 <세일즈맨>은 사소한 균열들이 치명적인 비극을 향해 달려 가는 이야기의 반환점에 벌써 해답을 숨겨 놓은 것 같네요. 어디서 멈추고 숨을 고를지는 개인의 선택으로 남긴 채 말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보험[각주:1]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한백교회 교인)




  일자리 정책과 소득주도 경제성장은 새 정부의 핵심 경제 의제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최저임금 1만원을 2020년까지 달성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지자체나 자영업자 모두 걱정이 태산같다. 단기적으로는 이들의 염려가 수긍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대기업 독점이 아니라 공정한 거래와 합리적인 경쟁이 이뤄지는 시장을 만든다면, 정규직 전환이나 최저임금 1만원도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헨리 포드 2세가 미국 자동차노조위원장 월터 루터와 함께 자동화된 공장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헨리 포드 2세가 월터 루터에게 “앞으로 이 로봇들에게도 노조회비를 걷을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사장님은 앞으로 저 로봇들에게도 차를 팔거냐”고 되받아쳤다. 노동자들의 소득이 올라 구매력이 늘어나면 기업에도 도움이 된다. 최저임금 1만원 정책과 기본소득 정책이 함께 동반된다면 사장님들의 염려는 좀 더 빨리 사라질 수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창의적인 발상이 나올 가능성도 커진다. 그 이유는 빈곤층의 정신적 처리량(mental bandwidth)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엘다 샤퍼 교수와 센딜 멀레이너선 교수는 독특한 실험을 했다. 쇼핑몰에서 고객들에게 설문을 했다. 만일 당신 차가 고장 나서 정비소에 갔는데, 수리공이 다 고치는 데 150달러가 들겠다고 하면 차를 지금 고치겠는가, 아니면 다음에 고치겠는가? 이번에는 수리비용을 1500달러로 늘렸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사람들의 소득수준도 확인했다. 그리고 응답자들이 고민하는 동안 간단한 인지능력 테스트를 시행했다. 테스트 결과를 종합해봤더니 차 수리비로 150달러가 드는 상황에서는 응답자가 고소득자건 저소득자건 테스트 점수에 차이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1500달러가 드는 상황에서는 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테스트 점수가 낮았다. 저소득층은 수리비가 커지자 생각이 복잡해져 테스트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소득층에게는 150달러나 1500달러나 상대적으로 큰 차이가 없어서 여유있게 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도 컴퓨터처럼 너무 많은 정보를 처리하게 되면 과부하가 걸려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된다. 이게 정신적 처리량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근시안적 해결책에 매달리거나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하는 이유는 우둔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다. 열악한 환경이 너무 많은 일상적 고민을 안겨주기 때문에 그들의 정신적 처리량이 한계에 부딪힌다. 가난한 사람들의 정신척 처리량은 언제나 한계치에 달해 있다. 샤퍼와 멀레이너선은 이것을 정신적 처리량에 매겨진 세금이라고 하였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이 세금을 많이 낸다. 인내심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하기가 무척 힘든 피곤한 상태에 늘 놓이게 된다. 따라서 실제로 빈곤을 없애려면 사람들의 성격이 아닌 그들의 결핍상태를 해결해야 한다. 최저임금 1만원과 기본소득은 바로 이러한 결핍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시급하게 삶을 짓누르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면 정신적 처리량의 부하도 줄어들고 창의적인 생각도 가능하게 된다. 특히 청년층에게는 이러한 마음의 여유와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여유와 시간을 제공하는 것은 사회적 투자다. 이들의 창의력과 열정은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할 수 있는 보험이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706191531591 이 글은 주간경향에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흩어짐을 면하려던 사람들




이성호

(GTU Ph.D / 현 명지전문대 교목)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1~9)



   이번 주일은 환경선교주일입니다. 이 환경선교 주일에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을 먼저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날로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안타까운 현실도 우리 안에 있지요. 그래서, 환경선교 주일에 그리스도교 교회는 그러한 문제를 돌아보고, 참회하며, 그리스도인이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흩어짐을 면하려던 사람들”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본문을 통해 환경선교의 문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혹시 엔트로피라는 말을 아시나요?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잘 모르시더라도 열역학 제1, 2 법칙이라는 얘기를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는 것이 제1법칙이고, “엔트로피의 총량은 계속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 제2법칙이지요. 예전에 과학시간에 배운 것이 어렴풋이 기억날 듯 말 듯 하실 텐데요. 제가 갑자기 물리학 법칙 얘기를 하고 있으니 이상하시죠?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읽은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제목은 “엔트로피”이고 제리미 리프킨이라는 미국의 미래학자이자 유명한 문명 비평가가 쓴 책입니다. 최근에,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이라는 시리즈로 된 책들을 내놓으면서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지요.

   열역학 법칙에 대해 좀 더 얘기하면, 듣기에는 굉장히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굉장히 간단한 법칙입니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이 일정하다”는 얘기는 우주의 역사 속에서 수 많은 별들이 생성되고 사라진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주가 최초에 시작된 이후로 발생한 에너지들이 모여 지거나 흩어지는 등의 방식으로 그 형태들이 변해가지만 그 전체를 합쳐놓은 양은 같다는 것입니다. 지구라는 행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지구의 기후가 계속 변해도, 수많은 생명이 태어났고 죽어도, 초대형 건물이 세워졌다 부서진다 해도, 형태만 달라진 것일 뿐 에너지의 양은 일정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시작 이후에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된 적은 없다라는 것이지요. 전도서에 나와 있는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말씀이 자명한 진리라는 것을 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네요.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에너지의 양은 일정해도 에너지가 한 가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 일정액의 벌금과 같은 것을 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2법칙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쉽게 말하면,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라는 옛말들이 모두 열역학 2법칙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주변에서 이러한 예들은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는데요.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우리는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지요. 그 기름은 자동차라는 기계를 통해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는 운동에너지가 되는데, 그 뒤에 배출되는 것이 뭐죠? 배기가스지요. 그런데 그 배기가스를 잘 모으면 나중에 기름이 되나요? 절대 그럴 수 없지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우리 식탁에 매일 올라오는 맛있는 음식들은 동물, 식물들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가공하고 요리해서 식탁에 올라온 것이지요. 또, 이 음식이 몸 속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물질로 분해되어서 에너지가 되고, 나머지는 배설됩니다. 분해된 물질과 배설물의 에너지 합은 음식물의 에너지와 갖겠지만 그것이 다시 음식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음식물이 다시 원래의 동, 식물로 되돌아가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에너지가 변환되면 무언가 손실되는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엔트로피”입니다. 그래서 우주에는 시간이 갈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데 이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고요.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는 계속 팽창하다, 엔트로피의 증가 때문에 우주는 결국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에 처음과 나중, 태초와 종말이 있다고 얘기하는 성서말씀은 여기서도 진리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레미 리프킨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이 피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라면, 그 우주에 있는 지구라는 행성도, 또, 지구의 역사 속에서도 최근에 등장한 인류도, 인류가 일어낸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류의 발달된 문명도, 그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근대 이후에 현대사회가 이루어지기까지 인류는 “인간 문명이 계속 발전하고 진보한다, 그리고 인류의 지식과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인류는 발명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해낸다”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인류는 어떠한 것을 새롭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어떠한 것을 새롭게 조합해서 다른 형태로 바꾸고 분배된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인류가 발전했다고, 최첨단이라고 자랑하는 현대 문명이 가만히 놔두어도 증거하는 엔트로피 법칙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쓰는 에너지들이 석유에서 주로 오지만, 과거에는 석탄이었고, 더 오랜 옛날에는 나무였었지요. 이렇게 바뀌어오면서 더 효율적으로 발전해왔다 생각하지만, 사실 석유를 생산하는 과정 자체만 봐도,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운송 수단이 말, 마차, 기차, 자동차, 비행기로 변화되어오면서 속도도 빨라지고, 효율성이 증가했다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인류 문명은 발전해 가는 듯 보이지만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써버리고, 또 폐기하고, 쓰레기를 배출하는 그래서 지구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고갈시켜 버릴 태세로 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전 세계의 많은 환경학자들은 인류 사회가 만들어낸 오염 물질이 결국 온실효과를 만들어내 지구 전체의 온도를 높이게 될 것이고 전 지구적 기후의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을 예측했습니다. 특별히, 최근 수년 동안 유엔 산하에 있는 “기후변동을 위한 정부간 패널(IPCC)”은 인간 문명에 의한 기후의 변화가 우리 인류를 포함한 전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리프킨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주의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를 막을 수는 없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는 것이지요. 엔트로피 증가를 더디게 할 수 있도록 인류 문명의 체질 자체가 바뀌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 성경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 볼까요? 지금으로부터 무려 4천년, 5천년 전에 살았던 그리고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의 선조들이, 제레미 리프킨이 인류 사회에 경고하고 있는 얘기를 동일하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한 번 들여다 볼까요?

   노아의 홍수 이후, 사람들은 다시 자손을 낳고, 공동체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벽돌을 구워, 돌을 대신하고, 오늘날의 아스팔트와 비슷한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해, 하늘에 닿을 만한 건축물을 만들자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바벨탑이라 부르지요. 이러한 건축물은 단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지금도 중동 지역에 가보시면 지구랏트라는, 높이 쌓아 올려진, 탑과 같은 아주 오래된 건축물들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탑을 쌓아 제단으로 삼고, 자신들이 믿는 신을 섬겼습니다. 아주 거룩하고 고귀한 장소이자 건축물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건축물들을 보면서, 당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짓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였던 언어를 혼란케 하고 나누어 버리고, 또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리셨습니다. 흩어지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말이지요. 바벨탑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늘 말씀을 잘 살펴보면, 바벨탑은 하나님 보시기에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4절을 보실까요.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자, 첫 번째 문제는,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는 데에 있습니다. 하늘에 닿게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목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높이 올라가서 하나님과 보다 가까이 있고 싶다는, 신앙적인 이유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싶고, 알리고 싶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바벨탑은 문명을 상징합니다. 바벨탑이 만들어진 재료가 무었입니까? 자연 상태 그래로의 돌, 진흙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손을 거친 벽돌과 역청입니다. 인간은 문명을 통해 자기를 확장하고, 정복하고, 자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인간들이 결국 자신을 창조해낸 그리고 노아의 홍수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도전까지 하게 되는 교만한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문제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 말 자체만 놓고 보면, 흩어지지 않고 단합하겠다는 것 같아 좋은 뜻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벨탑 이야기가 노아 홍수 이야기 바로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을 눈 여겨 봐야 합니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통해서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고, 다시 한 번 세상 가운데에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창세기 9장 1절을 보면, 노아의 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안심하고 세상 곳곳에 흩어져 행복하게 살 것을 요청하신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높은 탑을 쌓고 건축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홍수를 경험한 이들은 홍수가 온 것 보다 더 높은 건물 위에 내가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던 것은 멸망 당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들은 다시는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잊어 버렸습니다. 홍수로부터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자기들의 힘으로 쌓아 올린 문명의 힘에 의존해서 자기들이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 이것은 엄청난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벨탑과 그 탑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부정되었고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말고, 문명에 의지 하지 말고,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존재에 의존하며 어떤 존재를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결점이 있음을 간과한 채 순진하게 믿기만 한다면 돌아오는 실망과 상처도 크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이 부모이든, 자녀이든, 혹은 친구이든, 그들에게서 우리가 상처를 받는 것은 그 사람들 뒤에, 그들을 창조한 영원한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물질은 어떻습니까? 돈에 의지 하십니까? 돈만 많이 벌면 행복할까요? 명예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가요? 명예를 얻어서 남에게 인정만 받으면 우리가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요? 좋은 대학을 가려고 좋은 직장을 가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단지 돈을 많이 버는 직장을 가기 위해서,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는지 신앙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회와 국가, 민족은 어떤가요? 그 또한 절대적이고 영원할까요? 인류 문명은 영원히 지속되는 참되고 선한 것일까요? 앞서서 제리미 리프킨 박사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대 문명은 지나치게 기술의존적이고, 기계의존적입니다. 그 문명 속에서 살면서 혜택을 받고 있기에 우리들은 그것이 엔트로피 증가 속도를 빠르게 하여 파국의 길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나르시시즘에 걸린 자처럼, 자신의 문명이 발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그 문명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만물에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 문명, 역사, 자연, 우주…그 어떤 존재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부디 영원한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 분을 신뢰하십시오. 그것이야 말로 나의 존재가 나다워지는 길입니다. 나의 삶이 진정한 삶, 아름다운 삶이 되는 길입니다. 스러져 갈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영원성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결국은 사라져 갈 수 밖에 없는 사람, 돈, 명예, 권력, 인간의 문명 등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고 의존하여 나만의 바벨탑에 갇히게 되고, 그 바벨탑과 함께 흩어지는 불행을 겪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영원하고 참된, 우주와 만물의 창조자이자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분께 의지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 참된 축복,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바울신학가이드19]



조르지오 아감벤 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바울서신의 쟁점을 크게 두개로 나누어 본다면 하나는 구원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는 종말에 관한 것이 된다. 즉, 구원론과 종말론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바울서신을 메시아니즘을 중심으로 읽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있어서 바울의 종말론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바울 이전시대에 있었던 유대 종말론을 메시아니즘을 통해 바울이 어떻게 재해석하느냐가 그 방점이 된다. 유대의 종말론은 신의 심판과 다스림이 현재의 역사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측면에서 바울을 이해하는 것은 이천년전이라면 모르겠으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어려운 도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않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다. 전통적인 바울의 종말론은 이 둘 사이에서 매우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 그 대표적인 이해가 바로 ‘이미’와 ‘아직’이란 도식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실히 ‘이미’ 시작되었고 그 완성은 ‘아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있으며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지만 죽어서 가는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몇가지 질문을 해보자. 첫째로, 곧 온다던 예수는 틀린 건가? 둘째로, 예수가 곧 온다던 바울은 틀린건가? 세째로 그들이 틀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 먼저 첫째와 둘째가 맞다고 한다면 일단 신학적 서술에서 종말론을 빼버려야한다. 바로 종말론이 없어도 제대로 설 수 있는 신학을 구성해야한다. 실제적으로 요즘의 신학은 구원론 중심의 신학이다. 특히나 바울의 신학이 ‘이신칭의’가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수 있다. 또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삶의 추구에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내세를 바라거나 메시아의 재림을 기리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서서 자신의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학을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 최근의 성서신학은 몇가지 논쟁점을 남겨놓았다. 먼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종말론적 표현들이나 재림에 대한 표현들이 실제로 ‘역사적 예수’의 말인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이러한 심판과 재림의 메세지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 생각한다. 특별히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신이 분부한 삶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끈 혁명적 지도자로써 그려진다. 만약에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 기독교의 종말론이라면 바울은 그러한 종말론을 구성한 일세대 신학자에 속하게 된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만약에 예수가 말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소위 종말론이라는 것, 즉 그리스도 공동체의 종말론의 1세대 정도되는 종말론 또한 ‘이미’와 ‘아직’이라는 도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아감벤은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바울의 메시아니즘의 정수는 메시아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는 가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자체를 새롭게 이해하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보통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라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새롭고도 보편적인 인간을 상상한다. ‘새시대 새일꾼’이라는 표현이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등은 이전의 역사를 끝마치고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뭔가 새로운 인간을 꿈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감벤에게 중요한 것은, 또는 아감벤이 생각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시대를 어떻게 끝마칠 수 있느냐이다.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끝마치지도 않고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열수 있겠는가? 또는 이전의 시대를 맺음을 통해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 그 자체일 수는 없을까? 이를 맑스식으로 말하면 맑스가 꿈꾼것은 ‘새로운 계급’의 시대가 아니라 계급이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각주:1] 결국 핵심은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떤 사건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조건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 된다.[각주:2] 바로 메시아닉한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결국 주체가 새롭게 구축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아니라 주체가 그 현재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방법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확보되는 것, 즉 “오로지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구원을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일이 부활을 통해 일어났다고 바울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하나님 나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되지 않는다.[각주:4] 이 세계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세계의 개념들을 하나님 나라와 대치시키며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바울은 메시아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두개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하나가 법이고 두번째가 시간이다. 지난 웹진에서 필자가 아펠레스와 포로토제네스의 이야기를 다룰 때, 바울이 어떻게 법이 분리시킨 유대인과 비유대인, 로마인과 비로마인의 분리를 어떻게 새로운 분리를 더함으로, 즉 육과 영으로 분리시켜 법자체를 정지시키는지를 논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바울의 논의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으로 이전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것을 갈등의 극한으로 몰고감으로써 비판의 정점에서 반대로 완성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오랜 기간동안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율법관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바울은 율법을 반대하는가? 그런데 왜 완성시킨다고 말하는가?(롬 10:4) 아감벤에 따르면 오로지 율법을 그 극한의 갈등으로 스스로 몰아넣어서 마지막에 율법을 완전히 무장해재 시키는 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메시아닉한 관점에서는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각주:5]

    이후에 논하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알랜 바디우와 상극을 이루는 아감벤의 바울 읽기이다. 아감벤은 명확하게 바디우를 비판하는데, 아감벤은 ‘하나의 보편적인 생각이 어떻게 완전한 타자들의 기초위에서 동일성과 평등성을 나타낼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각주:6] 바디우에게는 바울이 어떤 새로운 보편성을 더함으로 새로운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었다면 아감벤에게 바울은 ‘유대인’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로 묶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법에 의해 생성된 아이덴티티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포착할 수 없음을 말한다. 결국 법자체를 inoperative(활동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아감벤은 새로운 주체가 아니라 법이 중지되어, 그 어떤 주체적 정의에도 포함되지 않는 ‘남은 자’(Remnant)들이 바울에게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 남은 자들은 “전체도 아니고 전체의 부분도 아니고, 부분이나 전체의 불가능성”을 나타낸다. 즉 모든 사람이나 민족들이 그 자신을 전체가 아니라 남은자로 놓는 것이다. [각주:7]예를 든다면 모든 사람들이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고 그 둘이 아닌 남은자가 될때 계급은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논의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상상력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데리다의 논의를 바울로 이끌고 들어와 바울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바울읽기는 그의 시간에 대한 개념에도 나타나있다.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은 다음 웹진에서 논해보자.


참고도서

Agamben, Giorgio.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 웹진 <제3시대>



  1.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31. [본문으로]
  2. Ibid., 41. [본문으로]
  3. Ibid., 42. [본문으로]
  4. Ibid., 43. [본문으로]
  5. Ibid., 48. [본문으로]
  6. Ibid., 52. [본문으로]
  7. Ibid., 55.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5)
특집 (8)
시평 (96)
목회 마당 (61)
신학 정보 (139)
사진에세이 (41)
비평의 눈 (59)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9)
소식 (154)
영화 읽기 (34)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5)
새책 소개 (38)
Total : 381,752
Today : 47 Yesterday : 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