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파기합니다. 나는 믿습니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약해진 믿음을 강하게!


    최근 신도수가 줄어든 교회에서는 남아 있는 신도들을 향해 ‘믿음이 약해졌다, 믿음이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외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믿음이란 게 무슨 단단한 고체와 같은 것이어서 근육처럼 그 힘의 정도가 약해졌다가 강해졌다가 할 수도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인 가보다. 발음 한 번으로도 입이 앙다물어지면서 힘껏 눈을 부릅뜨게 만드는 단어 ‘믿음’. 그 단어는 단지 듣거나 발음하기만 해도 너무나 단단하고 확고부동하여 토를 달거나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즉, 적어도 개신교 내부에서는 약해진 믿음(신심)은 곧 열등한 믿음을 의미하며, 믿음이란 자고로 강해야만 그것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고, ‘믿음’이라 불리울만 한 것으로 여긴다. 믿음은 그렇게 단단하고 확고하게 자리를 이탈하지 않으며 자태를 뽐내는 그런 것이어야 하나보다. 그 믿음이란 것이 어떻게 단단해지는지, 단단한 상태의 믿음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어떤 합의도 없는 채로.


   최근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하여 각 처에서 ‘믿음’ 이 더욱 단단하고 확고해지기를 요구받고 있다. 그 사정은 이러하다.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시작했다(?)고 일컬어지는 마틴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의 성서 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을 통해 회심을 얻었다고 알려진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루터는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핵심 곧 구원론을 교회나 교황 등의 외형적인 상징이나 표지로 획득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신도 개인이 가지는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 구원의 핵심이라 설파했다. 루터는 당시의 모진 괴롭힘과 박해를 뚫고 이 ‘오직 믿음(Sola Fide)’을 앞세운 이신칭의의 주장을 사수하여 프로테스탄트 혁명의 선두에 섰고 지금의 개신교 계통의 우두머리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프로테스탄트라는 종파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신칭의 곧, ‘구원=믿음’이라는 이 공식은 프로테스탄트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고, 그 경계 밖을 나가는 교리는 소위 성서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이고, 거짓 이단사설 정도로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한데, 예수의 후예들이 예수가 행했던 실천과 선언들, 곧 역동적이고 ‘운동성’이 담긴 입체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를 버리고, 안온한 의자에 앉아 사건성이 제거된 예수를 ‘숭배’만 하고 그 숭배의 파토스를 악용해 예수라는 브랜드의 장사치들로 변질되었듯이 루터와 그의 후예들인 프로테스탄트들도 루터가 당시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부여잡았던 저항의 정신과 당시 개혁운동의 사건성을 쏙 빼버리고 ‘믿음’ 이라는 단어 쭉정이를 숭배하며, 나아가 믿음이라는 이름의 ‘왕국’을 세워 루터와 개혁가들의 이름을 팔며 장사를 서슴치 않고 있다.


    그런 이들 중에 한국의 개신교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는 믿음 장사꾼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한국 개신교 내 최대 종파인 장로교 통합측의 경우, 101회 총회를 통해 ‘다시, 거룩한 교회로!’로, 102회 총회 주제를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라는 주제를 2년동안 잇달아 내놓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며 거룩하지 못하였다고 진단하고, 거룩의 히브리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구별’된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다 잃어버려 세상의 신뢰마저도 잃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차이가 아무 것도 없고 그렇기에 자기들을 다른 종류의 인간들과 식별(Identify)하여 동일화(identification)할 수 있는 표식을 강화해야만 우리의 믿음이 강해질 것이라고 집단적으로 강변한다. 짠 맛을 내는 소금의 주성분이 염화나트륨(Nacl)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실체적인 ‘성분’을 찾자는 게 요즘 주류 개신교 사회의 목소리다.


    9월 말경에 일괄적으로 열린 개신교 대형교단들의 총회에서는 이런 흐름을 극렬하게 반영한다. 이번 총회들은 그리스도인을 식별하는, 그리스도인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그 신원 확인서의 요건을 강화하고 명문화(明文化)하는 작업의 향연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성애자 뿐 아니라 동성애자 ‘옹호/지지자’의 교단 신학교 입학 금지 및 항존직 피택 금지, 이혼/재혼의 간음화(化) 등 기묘하고도 기괴한 상상력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경쟁을 벌였다. 특히, 심지어 최근 한 교단 총회에서는 교단 산하 신학교 교수들에게 ‘이신칭의론’ 곧 행위와도 같은 다른 불순물 하나 포함되지 않는 ‘순수’ 믿음으로 구원을 완전히 이룬다는 그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지 그 견해를 일일이 확인해달라는 제언을 하기도 하였다.[각주:1] 마치 사상검증을 통하여 ‘마녀’라도 사냥해야 속이 풀리겠다는듯이…


프로테스탄트와 믿음


    그러나 루터가 자신의 손에 들었던 무기인 ‘믿음’은 지금의 많은 개신교인들이 기억하고 심폐소생시키려는 믿음제일주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신칭의론 제창과 같은 강력한 프로파간다와 일치하는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루터 당시의 교회가 잃어버렸다고 주장한 믿음, 그것은 어떤 것일까?


    최근 루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출간된 책 ‘루터의 재발견’에서 저자인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는 루터파 등 일단의 개신교 진영이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들고 일어난 개혁과 혁명의 기치를 높이든 16세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특징을 설명한다.


1520년 루터는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 교서를 받고 이듬해 보름스 제국의회(1521)에서 실질적 제재 조치인 제국 추방령을 선고 받는다. (…) 당시 유럽은 오스만 튀르크 족의 유럽 침입으로 기독교 세계가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은 모든 제후들의 힘을 빌려 이슬람에 대항하는 정치적 연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526년 6월 25일 제 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의 통치자의 종교로 한다’는 종교 선택의 원칙을 결의하게 된다. 이 결의의 이면에는 보름스 제국의회(1521)에서의 루터에 대한 판결을 덮어 두겠다는 정치적 합의가 숨겨 있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 이슬람 군대가 퇴각함에 따라 국제 정치 지형도가 급변하고 이슬람의 위협이 사라지자, 황제는 곧바로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1529년 4월 19일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소집하게 된다. 이 회의가 열리기 직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는 모든 루터파 제후들에게 경고장을 발송한다. 루터파를 떠나 모교회 품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과 검이 루터파 제후와 영주들을 찾아갈 것이라고 경고장을 발송한다.[각주:2]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루터와 루터파 제후들이 선택한 것은 항복이 아니었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성서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회유와 갖가지 협박에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읽어버리고 만 성서’,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읽을 수도 없고 해석할 수도 없게 라틴어로 쓰여 있는 그 성서 거기에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말하고 있던 셀 수도 없이 많은 그 종교적 장치들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루터는 수도사 생활을 하는 동안 참회와 형벌의 문제를 고민하였는데, 교회가 오랜 기간 동안 제작해 놓은 구체적이고 세밀한 ‘생명-정치’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뼛속 깊이 착취하는 행태는 성서의 이야기들과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그는 성서를 다시 읽었다. 최후의 심판과 구원의 주체는 사람이나 교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읽고 말았다. 그리곤 그것에 올라타 소용돌이 속으로 기꺼이 휘말려 들어갔다.


    그 후 루터와 믿음의 동지들은 누구도 신앙을 강요할 수 없다는 ‘신앙의 자유’, 교회 공의회나 사제의 권위보다 높은 ‘성서의 권위’, 성서는 성서 자체가 해석한다는 ‘성서 해석의 원리’[각주:3] 이 원리들을 붙잡고 계속해서 자신의 고백의 길을 이어갔다. 무려 1천여년 가까이 이어온 역사의 전통과 관습도 성서에서 비롯된 그의 ‘믿음’보다 상위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믿음’은 저항하는 믿음이었고, 좋은 게 좋은 것,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것이란 주장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십계명의 제 1계명이 천명하는 것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고 지탱하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 즉 ‘오직(Sola)’이라는 태도로만 성립하는 것이었다. 개신교 신학의 다섯 가지 표제어인 ‘5대 솔라Sola’ – Sola Scriptura 오직 성서,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총, Sola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는 단독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강조를 뜻하며,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에 대한 반대 표제어라 할 수 있다.[각주:4] 루터가 주창한 ‘오직’과 ‘믿음’의 결합이란 신자들의 믿음의 대상을 교회 기득권층 마음대로 지정하고 조작하던 것에 질문하고 반대하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번잡스럽게 헌금함을 채워야 연옥을 면하는 것도 아니고, 성찰, 통회, 정개, 고백, 사죄, 보속 이 여섯 단계로 이루어진 고해성사 ‘절차’ 또한 성서가 말하는 믿음이 아니었다. 믿음의 목적어들, 곧 믿음의 대상을 요리조리 자기 입맛에 맞게 귀에 걸고 코에 걸었던 관행을 정지시키고 오직 믿음 그 자체를 통해 구원으로 향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어 있는 것’으로서 믿음, 곧 다른 것 아닌 ‘오직 믿음 그 자체’라는 사실에 루터와 프로테스탄트는 주목했던 것이다. 이제 루터 이후로는 믿음과 대상이 분리된 상태, 곧 주술적인 행위로서의 믿음에서 ‘믿는다’는 행위 자체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믿음을 파기하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시대에서 ‘믿음’은 어떤 식으로 해석되어야 할까? 새로운 저항과 변화의 신호탄으로서 믿음을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공회 신학자이며, 예수 세미나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역사적 예수’ 연구로 잘 알려진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이 시대에 잃어버린 신앙 언어들의 역사적 연원을 살피면서 동시에 그 언어들이 지금 어떻게 우리 시대에 다시 새로운 의미로 새겨져야 할지를 설명하는 책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를 썼다. 이 책 ‘믿음과 신앙’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보그는 ‘믿음(Faith)’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적 정의를 설명하며 이들 간에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믿는다는 것은 확실성의 정도는 다르지만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 어떤 진술을 믿는다는 것으로 정의되며, 실제로 믿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전제한다. 불확실성이 없다면 ‘믿다’가 아니라 ‘안다’라고 해야할 것이다.[각주:5]


    그렇다. 굳이 보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체로 ‘믿는다’고 말할 때는 모두에게 자명하고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서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것, 어느 정도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그것을 거짓이 아니라 ‘참’으로 받아들이고, 진실로 받아들이고자 ‘결단’하는 그 행위를 ‘믿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사실이 확률로 존재하고,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기에 ‘그렇다/아니다’라고 단정짓기 모호한 것들에 단호히 선을 ‘그어버림’으로써 그것에 형태를 주고, 형체로서 드러내는 일, 그것을 우리는 ‘믿는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란 ‘하느님에 대한 충절로서의 신앙, 하느님을 더욱더 중심에 두는 삶의 결실’이며, 특히 ‘하느님의 부력(浮力, buoyancy)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그는 이야기한다. 이어서 보그는 이 ‘믿다’라는 동사는 신뢰하다(Believe in)라는 말의 의미와 가까우며, 이는 단순히 어떤 진술이나 누군가의 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의미에까지 다다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부력을 의지하는 믿음’이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마태복음서 14장에서 풍랑 속에 베드로에게 다가가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했을 때처럼 부력을 의지하여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고(마 14:30), 이 액체와 같은 세상의 바다 위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발을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가 베드로에게 요구한 믿음이란 예수라는 것을 바라보고 그 사잇길이 어떠하든지, 무엇을 만나든지 ‘걸어오는 동작’을 멈춰서버리지 않는 것, 동작을 이어나가고 계속하기를 견뎌내는 것, 그 동작, 계속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어떤 거대하고 강건하여 유동하지 않는 단단한 그것을 부여잡아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는 명사적인 것으로서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믿음이 목적어로 취하고 있는 그 부여잡은 대상들, ‘물(物)’을 믿음과 일치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믿음’ 은 진리와 진리라는 권위가 고정되어 있으며,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기득권들의 허구적 현실을 ‘재구성, 재창조, 재설계’하는 언어다. 현실의 관행적인 ‘믿음들’을 부수고 ‘나는 이렇게 믿소!’하고 어깃장을 놓으며 연약하기만한 새로운 가능성에 철갑옷을 입히는 행위다. 루터가 말한 프로테스탄트의 핵심이 저항과 질문, 소통의 문제라는 점도 믿음의 이러한 특징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완전한 타자를 내 앞에 붙잡아 앞에 갖다 놓고 여기 저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도록 형상화(形象化)하여 심지어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에 구원의 결정 여부를 갖다 붙이는 행위, 마녀라는 이름으로 눈이 감각할 수 있는 확실한 ‘적’을 생산하여 공포를 조장하는 알량한 정치전술을 펼치는 행위를 절단(切斷)하고 파쇄시키는 행위이지 않겠나 말이다.


    앞에서 ‘안다’는 것과 ‘믿다’는 것의 차이에서도 보았듯이 믿는다는 행위는 미완의 상태로 있는 것들에 경계를 주어 완전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이러저러한 가능성과 불온한 유언비어로만 치부되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고 그것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동적 행위다. 적어도 ‘믿음’은 어떤 대상을 부여 잡고 주워 섬기며 숭배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타자화하는 데에 그쳐서는 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사건’ 속에서 밀고 당기고, 들고 나는 호흡하는 동적인 유기체다.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정적인 완전성을 붙드는 것은 어리석다. 세계가 부단히 움직이며 상호작용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바르다. 움직임을 멈추면 죽는다. 가라앉는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말한 그 믿음도 예수를 향해 계속해서 부력을 의지하여 걸음을 옮기는 ‘믿음-행위’ 때에만 성립한다. 예수를 봤다는 이유로, 바람이 분다는 등등의 이유로 멈추면 물 속으로 빠진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움직임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움직인다는 ‘섭리’란 어떤 고정된 스케쥴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사건의 결을 따라 동적 균형을 이룬 완전성을 의미하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서 신뢰해야 한다. 고로 믿음이란 ‘믿습니다’라는 행위로서만 존재할 뿐이며, 믿습니다’들’의 연속적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고로 믿음은 행위와 둘이 아니다. ‘믿습니다’로서 하나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둥, 믿으면 행동이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둥, 행위와 믿음을 언어 자체에서 구분하고 보는 자가 신앙의 적(敵)이다. 어떤 대상을 고착시켜 받드는 일로서의 신앙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정초하고 깊이 머무르되 또다시 박차고 일어나 의심하고 끊임없이 다시 고백하는 ‘믿습니다’의 여정, 그 속에 우리의 숨과 삶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3337 [본문으로]
  2. 최주훈, '루터의 재발견'(2017, 복 있는 사람), 48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5.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2009, 비아), 158~15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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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22]



조르지오 아감벤 IV-호모 사케르에 대한 본론(2)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감벤이 보기에 여기서 성스러운 것이 가지는 성격(호모 사케 르)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에게 바쳐질 수 없으면서, 동시에 죽여도 법에 의해 심판받지 않는다는 두 가지 특성이 결합되어 있으며 이 성스러운 삶(호모 사케르)가 나타난 것은 법과 주권이 생겨날때, 즉 정치와 종교가 함께 배재의 영역을 만들어 낼때 이다. 이러한 아감벤의 말을 듣다보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성서에서 찾아낼 수 있다. 바로 바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4 [새번역])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논쟁을 행하면서, 율법을 통해서 들어온 저주, 곧 사망의 저주에서 풀려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신명기 21-23절, 즉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다는 근거를 가지고(이는 바울의 해석학적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 신명기의 콘텍스트는 예수의 십자가와 매우 다르다.) 예수가 바로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는, 거룩함에 들 수 없는, 정결하지 않는 생명이란 말이 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바울에게 나타나는 율법폐기론적 관점은 역으로 구약의 신에게는 드려질 수 없는, 신에게 바쳐질 수 없는 예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8 [새번역])


    한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극명하게 대조하면서 세상의 통치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다고 일갈한다. 바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가 그들이 지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서 세상의 통치자들이 불리우는 세력들 속에 로마 제국를 넣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바로 로마의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를 연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로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바쳐지지 못하는 생명이며 (율법 때문에), 세상의 법으로 죽임을 당하여도 그 책임이 발생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이다.

    아감벤은 2015년에 출판된 [Pilate and Jesus (빌라도와 예수)] (Adam Kostkotrans., Stanford University Press)에서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을 읽으며 예수의 재판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관찰을 보여준다. 아감벤은 요한복음은 절대로 크리시스 (심판하다)라는 동사를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베마(심판하는 왕좌)라는 단어가 나타난다.(2015, 13-14) 빌라도가 예수에게 왕이냐고 물어볼때, 예수는 자신의 나 라는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요한의 내러티브에서 군중들은 예수를 죽이기 원하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불경함과 제국에 대한 반란이다. 이 재판이 로마의 합법적인 재판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자. 문제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죽음을 언도했는지, 유죄를 판결했는지가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요한복음 19-13)


    빌라도는 예수를 데리고 분명, 자신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명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 재판석에 앉았다. (아감벤은 이에 대한 해석으로 “예수를 데리고 나와 재판석에 예수를 앉혔다.”로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한다. [헬라어 번역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번역은 마태와 누가에서 예수를 왕처럼 옷 입히고 ‘유대인의 왕ʼ이라 칭하는 장면과 도 연결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마태복음 27-26절과 누가복음 23-25절과 같이 빌라도는 요한복음 19장 16절에서 예수를 심판하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그를 “넘겨”(파레도켄)준다. 즉, 재판은 있었으나 심판은 없었다(2015, 51). 이러한 ‘미스테리ʼ한 예수의 재판의 귀결은 십자가이다. 만약에 예수의 십자가가 로마의 법 안에서 이루어진 정당한 판결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바로 죽음에 넘겨진 것이다. 정당한 법적 판결이 아니라면 이를 정치적 또는 제사적 희생아라 볼 수도 없다. 즉, 예수야말로, 아감벤의 담론에서는, 호모 사케르, 죽일 수 있으나 신을 위해 희생되지도 못하고, 그를 죽인자가 벌을 받지 않는, 호모 사케르, 헐벗은 생명이다.


- 다음회에서는 이러한 성서적 읽기가 아감벤에게 어떤 결론을 주는지, 그리고 바울신학에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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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지오 아감벤 IV-호모 사케르에 대한 본론(1)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이번 웹진의 중요 텍스트는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입니다. HS로 표기합니다.-


   태초에 인간이 있었고, 인간에게는 삶이 있다. 인간에게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동물의 삶과 같이 그저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일상의 단순한 생명현상으로의 삶과 특정한 사회나 개인으로서의 삶을 구분하는 것이 정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아감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삶(생명)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두개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HS, 33). 조에(zoe)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며 비오스(bios)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뜻한다. 이 두 단어를 이용해서 아감벤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를 새롭게 정의한다. 바로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조에)을 분리해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 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HS, 45). 바로 이것을 생각해낸 아감벤의 상상력이 그를 현대의 정치학, 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부터 신학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쉽게 말하면, 보통 정치를 당을 짓고 다른 당과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치를 쉽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어떤 일에 대해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힘을 만들어 그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누르고 원하는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정치라고들 한다. 단순히 국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정치가 아니라 집안에서도 그것이 일어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을 얻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들이 정치적 행위이다. 이러한 정치의 의미 저변에는 개인이 각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식의 정치이해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헌법이 보장한 기본적인 인권과 투표권을 통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이런 식이면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보인다. 이러한 정치 이해에 일침을 놓은 사람이 바로 미셀 푸코이다. 아감벤도 말하듯이 푸코는 2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근대 국가는 ‘영토’중심의 국가, 즉 땅 따먹기 중심의 국가에서 ‘인구국가’ 즉 국민의 삶을 담당하는 국가로 바뀌었다(HS, 27). 그와 함께 국가는 자본주의의 끝없는 국가간의 경제적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위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내는 생명권력 중심의 국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HS, 27). 그러나 아감벤은 이러한 푸코의 생각은 정치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그 나름의 대안을 생산할 정도까지 나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감벤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올바르게 길러내는 전통적인 정치론과 국민을 세뇌하여 노예화 하는 푸코식의 주체화를 통합시켜 이해하는 현대의 정치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40), 이를 위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이해하게 된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성스러운 인간(sacred human being)이 바로 그러한 현대 정치를 이해하는 시작점이다. 이 호모 사케르는 위에 말한 조에(zoe), 그저 간신히 살아있기만 한 삶은 되지만 비오스(bios)인 정치적 존재는 되지못하는 인간이다. 여기에서 아감벤은 매우 도발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데, 이 조에인 인간이 정치적 인간으로 포섭 되어야만 주권자는 스스로의 주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 즉, 시민이 존재해야만 현대 정치에 주권자는 (박근혜든 문재인이든 생각해보자) 자신의 주권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주권자는 언제나 조에인 인간을 비오스의 인간으로 포섭할 때 항상 ‘포함인 배제’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HS, 43). 쉽게 말하면 포함하면서도 배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주기는 하지만 언제나 내어쫓는 방법으로만 받아들인다. 무슨 뜻일까? 여기서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는 말이 나온다. 즉, 인간에게 정치적 권리를 주지만 그 권리는 오로지 예외상태에서만 주어진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백명만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에 천명이 지원했다고 해보자. 이 천명에게 공정한 방법으로 경쟁해서 최상위 백명 만을 선발한다는 법이 있다고 하자. 이 법에 따라 백명의 학생을 선발할 것이다. 그런데 이 법에는 단서 조항이 있다. 단, 예외 상태인 경우, 또는 특별한 상황인 경우, 합격자는 총장이 임의로 선발한다고 적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번 학생을 선발할 때마다 예외 상태의 법률을 적용한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법을 전혀 어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법을 어길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저 생존할 뿐인 삶을 정치적 삶으로 받아들이되 언제나 예외적 상황만을 계속된다면 정치적 삶이 아니라 생존의 삶, 헐벗은 삶만이 계속될 뿐이다.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정치적 상황이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자. 성소수자를 예로 들 수 있다. 인간이기에 법의 적용을 받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계속적인 차별을 받는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예외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들이 그를 예외의 상태로 볼 때, 그는 인간의 삶이 아닌 생존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 삶의 모든 장소가 예외가 규칙이 되어버리는 과정과 인간을 정치적 존재(비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완전히 동시에 일어난다면 정치 자체가 예외 상태가 되어버리게 되고, 결국 인간은 “배제와 포함, 외부와 내부, 비오스와 조에, 법과 사실”이 구분 불가능한 영역으로 변해버린 상태가 바로 아감벤이 말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HS, 46).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란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으며, 바로 인류 사회가 법을 가지기 시작한 때부터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계속 되었다고 말한다. 즉, 현대에 들어와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로 인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법전통에 필수 불가결하게 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아감벤은 로마의 법에 대한 연구에서 “최초로 인간의 생명 자체와 결부되고 있는 형상에 대한 기억”을 찾는다.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인데, 희생제물로 바칠 수 없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 받지 않는다”(HS, 155). 이러한 종교적 전통과 법전통의 한 중간에 서있는 존재인 ‘성스러운 인간’(호모 사케르)는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함께 포함하는 동종의 두 변이”이다. 즉, 보통 우리는 순결한 것과 더러운 것이 나누어져 순수한 것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지만, 성스럽다는 것은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함께 지칭하는 단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HS, 166). 로버트슨의 연구에서 착안하여 아감벤은 고대의 종교적 전통은 언제나 순결한 것과 불결한 것에 대한 규칙들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것을 만질 수 없다는 것에서는 동일한 것들이며 (성스러운 것과 불결한 것의 공통점은 만들 수 없다는 것) 그것을 구분하는 명료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언제나 그 두개의 개념은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HS, 162-163). 여기에서 추방령이 의미하는 바가 재미있는데, “추방이란 신성에 대한 일종의 봉헌이며, 추방하다라는 동사는 흔히 바치다 또는 헌신하다라는 뜻으로 전이 된다”(163). 언뜻 보면 이러한 설명들은 매우 종교적인 분야로 보이지만 이런 종교학적 연구를 아감벤은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왜냐하면 아감벤이 보기에는 이러한 양가적 신성에 대한 이해는 종교와 법이 맞닿아있는 연구의 장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HS, 170). 여기에서 아감벤의 정치에 대한 이해는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 종합되는 장으로 들어가는데, 이러한 아감벤의 관점은 그가 현대 정치와 인간 사회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말함에 있어서 고대의 텍스트와 성서를 읽어가는 정당성을 제공한다. 조금 더 나아가 아감벤이 어떻게 신성함이라는 종교적 코드를 법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지 살펴보자.

    아감벤이 보기에 여기서 성스러운 것이 가지는 성격(호모 사케르)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에게 바쳐질 수 없으면서, 동시에 죽여도 법에 의해 심판 받지 않는다는 두가지 특성이 결합되어 있다. 즉, 인간의 법으로부터 예외인 동시에 신의 영역에서도 예외인 인간을 뜻한다(HS, 174). 바로 신의 영역에서도 설명되지 않고 인간의 법적 전통에서도 속하지 않는 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바로 이것이 아감벤이 묻고자 하는 질문인데, 그 질문의 답은 다음과 같다. 아감벤에 따르면 바로 주권(Sovereignty, 또는 통치권한)이 나타나는 영역에서 발견되는 인간이다(HS, 178). 여기서 아감벤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주권은 바로 법적 예외 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다. 쉽게 말하면 계엄령을 발발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러한 주권에 대한 이해는 칼 슈미트에 의해 개진되었는데, 칼 슈미트는 주권이 법에 의해 부여된 통치권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법을 정지시키는 계엄령의 권한까지 있기때문에 법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예를 들면, 광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을때, 당시 군부독재정권은 시민의 권한을 송두리채 부정하고 자의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주권이 국민에게 나오는데 어떻게 그 주권으로 국민을 살해할 수 있을까? 바로 계엄령을 발발시키는 주권이 그 법을 뛰어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바로 그것을 허락하는 법에 의해서 말이다(계엄령의 관한 법이 있기때문). 그러므로 주권은 법안에 있으면서도 법 밖에 존재하며, 그를 통해 예외상태를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 예외상태를 규칙으로 또는 일상화함으로 법자체를 정지시켜 버리는 것이 바로 주권의 힘이다. 바로 이런 인간의 정치 자체가 생겨나는 영역, 즉 주권의 통치권한이 나타나는 곳이 바로 모든 인간을 호모 사케르, 즉 성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순간이다. 즉, 생명을 성스러운 것이라 우리가 말할때, 보통 우리는 이 생명이 신에게 부여 받은 것이기에 절대적인 기본 인권을 가진 가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감벤이 보기에는 신의 영역에 버림받고 법의 영역에 보호받지도 못하는 죽음의 권력 아래에 놓인 헐벗은 삶(Bare life)를 말하는 것이라 주장한다(HS, 177). 그러므로 아감벤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보통의 정치학이 말하는 법과 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신과 함께 살아가는 종교적 영역에도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 두 개의 영역이 동시에 포함되면서도 부정되는 이중의 배제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 다음 웹진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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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2] 창조과학/과 동성애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최근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가 청문회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고 결국 사퇴한 한 교수가 이른바 ‘창조과학’을 신봉한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었다. 물론 ‘사퇴’까지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른바 ‘뉴라이트’ 경향의 역사관에 따른 활동들이 노출되면서였지만, 그러한 부정적 요인들이 드러나도록 촉진하는 분위기가 처음 조성되는 데에 ‘창조과학’의 역할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듯 하다.

   창조과학이 한 공직 후보자의 평가에 이렇게도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담론들이 그만큼 비상식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좀 더 깊게 들어가면, 그러한 비상식적인 점들은 이미 해당 인사가 공직 후보자에 오르기 전에 아예 걸러지거나 혹은 시정을 약속받아야 할 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처 없이 버젓이 등장했기 때문에 더더욱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오게 되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장관이 되기야 했지만 다른 부처의 장관 후보자도 이른바 ‘유사역사학’ 문제 때문에 비슷한 상황을 겪기도 했었고 말이다. 

  이렇듯 문제시되고 있는 창조과학의 비상식적인 속성은 역시 창조과학이 사실상 “성서에는 생명이 (진화가 아니라) 창조된 것이라고 나와 있으므로 그것이 맞다/맞아야 한다”는 전제를 미리 가지고 그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증명’을 위해서 과학적인 것인양 보이는 담론들을 만들어 내고 그 담론들에 과학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해 달라고 우기는(그래서 역설적으로 ‘과학’의 권위를 더더욱 보강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대중들의 일각에 퍼져 있는 편견(그래서 유달리 많이 들먹이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생명이 진화되었다면 ‘최초의 생명’은 어디서 나온 거냐. 그러니 진화론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이기도 하다)을 끌어와, 자신들의 견해의 정당성을 보충하려 드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모든 모습은 결국, “성서가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했으므로 진화가 아니라 창조가 맞다/맞아야 한다”는 전제가 깊이 뿌리박혀 있으므로 가능한 것일 터이다.


2. 


  그런데 이렇게 창조과학을 곱씹어 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성서가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했으므로 창조가 맞다고 우기는 것과, 성서가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했으므로 동성애는 죄다라고 하는 것 사이에는, 대체 다른 것이 무엇일까.

  일단 바로 앞에서 보았듯이 출발점은 다르지 않다. “성서가 그렇게 말했다니까”이다. 물론 성서에 등장하는 소위 ‘동성애’가 오늘날 정설로 정립된 성적 지향으로서의 동성애가 아니라는 것은 그들에게 상관없다. 오히려 성서에 그런 동성애가 안 나오므로 동성애는 성적 지향이 아니라 성적 일탈이 될 뿐이라고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성서가 그렇게 말했다니까”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 특히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는 이야기들을 끌어 대고, 거기에 대중들의 편견까지 동원한다는 점에서도 둘은 다를 바 없다. 벌써 논파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오는’ “동성애=AIDS” 담론이나 전환치료 담론, 도덕적 타락으로 매도하기 등의 담론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하나 더 보탠다면, 동성애를 이렇게까지 매도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좀 이상한 건 맞지 않나라고 여기는 흔한 생각이 결국 저러한 매도의 연료가 된다는 것은 굳이 두 번 말할 이유는 없을 듯 하다.


3. 


  그런데, 이렇게 창조과학이나 반동성애담론이라 그 형성 원인과 작동 방식이 별 다를 바 없다고 한다면, 한 가지 질문이 머릿 속에 생긴다. 별 다를 바 없는 두 개의 담론 중, ‘창조과학’은 장관 후보자를 낙마시키는 ‘흠결’이 되는데, 어째서 ‘반동성애담론’은 거꾸로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낙마시키고 대법원장 후보를 낙마시킬 뻔한 ‘동력’이 되는 것인가.

  그만큼 반동성애담론을 밀어붙이는 극우적 개신교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극우적 개신교의 집착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창조과학도 집착 대상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저러한 차이의 이유를 ‘극우적 개신교’에서만 찾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을까. 아니, ‘극우적 개신교’의 입장에서도, 적어도 동성애 이슈에 대해서는 상대편에 ‘틈’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앞에서 이미 동성애를 강하게 매도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좀 이상한 건 맞지 않나라고 여기는 흔한 생각을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생각이 명백한 하나의 ‘틈’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얹어 본다면, 동성애 이슈에 대해 인권보호라는 당연한 차원의 입장 표명을 못 하는 이유를 “사회적 합의가 없어서”라고 후보 시절에 변명하고 아예 동성애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대선토론 때 이야기하기도 했던 현직 대통령과, 그 변명에 자신들 나름대로의 변명을 지지자들이 양산하는 모습에서도 그러한 ‘틈’이 보인다고 할 것이다.

  특히 후자의 모습을 곱씹어 보면, 그 지지자들이 대선토론 때의 후보의 문제발언에 대해 LGBT 운동가들이 항의 퍼포먼스를 한 것을 두고 “만만하니까 그런 항의를 하는 거냐”라고 거품을 물었던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지점에서,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할 것이다. 이 때, 전자가 전형적인 ‘권력자’들의 행태(그럼에도 여전히 ‘노무현’을 들먹이면서 자신들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행태도 보이지만 말이다)라는 것도 짚어 둘 만할 것이다. 물론 이 때의 ‘권력’은 흔히 생각하는 ‘소수에 독점된 권력’이 아니라 ‘다수’로서 행사할 수 있는, 그래서 언제든지 ‘소수’에 대한 배제로 돌변할 수 있는 그런 ‘권력’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쯤 오게 되면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던, ‘강하게 매도하진 않아도 좀 이상한 건 맞지 않나’와도 통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다수’에 의한 ‘소수’의 배제. 그리고 그런 배제에 대해서 No라고 말하라는 것이야말로 성서의 핵심 메시지 중의 하나라는 건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러니, “성서가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니까 동성애를 죄라고 하고 반대해야 한다”는 게 ‘성서적’ 신앙이라는 말 이상의 코미디가 어디 있겠나. 오히려 성서 모독으로 짤없는 지옥행을 예약한 언행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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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HRA
    2017.10.09 18: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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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는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에 법 질서를 깨고 무너트리는 죄다...
    당신 자녀가 동성애자라면 그렇게 소수의 인권이라 이야기할수 있는가...
    먹으면 정녕 죽는다...하신 선악과와 같이
    하나님이 죄라 하셨고 죽이라 명 하셨으니
    분명 죄고 하지 말아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2. jmh
    2017.10.11 14:4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도끼가 어찌 찍는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이사야 10:15,16

    우리가 어떤 위치인가요? 도끼이고 막대기이며 몽둥이이지요..누구의 손에 붙들여있는지 안다면 경홀히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도 하지 않는 동성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지 맙시다.!


탈식민적 읽기로서의 '종교'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Ⅰ. 세속과 분리된 것으로서의 ‘종교’


     익숙한 어떤 것들과 관련해 사람들에게 당신이 당연시하는 그것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원했고 또한 사용되어 왔는지를 아느냐고 물으면 곤혹스러워 한다. 말이 꼬이기 시작하고 급기야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그래서 당연함 혹은 상식은 습속인 동시에 한 문화의 지배전략으로서의 권력이라는 주장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간혹 어떤 이들은 과감히 깨고 새로운 사고를 개척한다. 대홍수의 이야기를 번역하고 있던 자신에게 줄루족의 응기디가 역사적으로 정말 일어난 것으로 믿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소개한 콜렌소의 이야기는 한 예일 것이다. 문화적 습속에 얽매여 자신들의 종교적 이야기를 당연시하고 강요하기까지 하는 종교인들과 달리 그는 "만일 한 명의 천진난만한 줄루인에 의해서 성서의 역사적 정확성이 의문시될 수 있다면, 어찌하여 기독교 선교가 이를 문제시하지 않은 채 다만 절대적인 진리로 성서를 선전하는 데에만 급급할 수 있단 말인가?"[각주:1]라고 되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콜렌소처럼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에 관해 되물을 용기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지만, '종교'라는 용어가 오늘날엔 비서구 세계와 관련한 서구문화의 지배와 실천을 보여주는 하나의 용어로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한번쯤 되짚어 보는 일은 꽤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구글에서 종교라는 용어를 검색하면, 신이나 조차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나온다. 만일 이 설명을 접한 사람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아브라함 종교들 중 하나를 믿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곳에선 종교란 규정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와 그들이 가진 신앙체계나 문화적 체계를 말한다라고 나온다. 이것은 신을 전제한 앞의 설명보단 낫지만 그럼에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세계의 모든 종교가 신앙체계로 설명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종교학자 러셀 맥커천은 『종교연구 길잡이』라는 자신의 책 맨 앞에 "현실을 그 일상성 그대로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도 없다. …사회학자들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문제에 마주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일상성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일상성이라는 게 얼마나 비일상적인 것인지를 알게 될 그런 방식으로 일상성을 환기시킬 수 있을까?"[각주:2]라는 부르디외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책의 마지막 「연구자들」이라는 부분에서 학자들이 종교를 어떻게 정의해 왔는지와 관련해 13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실어 놓았다. 맥커천의 이런 편집은 무엇을 의미할까? 과거와 달리 오늘날 종교에 대한 정의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실린 학자들 가운데 조너선 스미스와 토모코 마스자와의 논의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스미스의 논의를 들어보도록 하자.[각주:3]


종교를 위한 자료 같은 것은 없다. 종교란 다만 연구자의 연구가 창조해 낸 것일 뿐이다. 종교는 비교하고 일반화하는 연구자의 상상적 활동에 의해, 연구자의 분석적 목적을 위해 창조된다. 종교는 학문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좀 더 특정하게는 종교사학자는 끊임없이 자의식적이어야 한다. 자료는 오직 그것이 종교를 상상하는 것에 관련된 어떤 근본적인 문제의 사례 역할을 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


     경건한 신자들에게 스미스의 이런 논의가 안겨줄 충격은 상상할 만하다. 물론, 우려와 달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학자들이란 다 그렇지. 종교를 가슴이 아닌 머리로 배운 탓에 그런 것이지 라고 할 수도 있고, 게다가 오늘날 종교라는 개념에 대해 기독교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들이 부정적인 레토릭을 써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미스의 이런 논의를 단순히 지적인 허영심으로 치부하거나 각 종교들은 원래 종교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해서 해결될 문제일까? 장석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각주:4]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 연구자의 주장이 맞았는지 아니진 해당 종교의 신자들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이 지(조나단 스미스)는 그런 생각이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보겠다는 것인가? 그 누가 대표성을 가진다고 여긴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이가 스스로 자신을 그 종교의 대표자라고 주장한다면 과연 그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런 식의 질문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그럴 듯해 보이는 이 관점이 얼마나 허황된지 금방 드러나게 된다.


     나아가, 인간 개념에 대해 의문을 표했던 푸코와 마찬가지로 "인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구인이 종교를 상상해 온 것은 지난 몇 세기에 지나지 않는다"[각주:5]는 스미스의 주장을, 그리고 이에 대한 반론으로 등장한 "그래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종교의 역사를 다루는 모든 개론서에서 종교가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등장하여 심지어 구석기 시대에도 종교가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호모 렐리기오수스라고 널리 알려진 말은 이미 인간의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종교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각주:6]하는 질문을 소개한다. 그런 후 스미스의 논의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각주:7]


언어학에서 말하는 언어, 그리고 인류학에서 말하는 문화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것이 경험적인 범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종교라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총칭하는 이차적인 추상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은 존 모리얼과 타마라 손에 의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들에 따르면 "삶 속에서 종교적인 것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그 범주에 속하지 않은 여타의 것들과 구별될 수 있다."[각주:8]고 보는 관점은 15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사학자들에게 "종교라는 개념은 1500년대에 유럽에서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영역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처음 도입"[각주:9]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라는 말에 해당하는 라틴어 렐리지오는 이전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삶 속에 종교적인 것이라는 범주가 따로 구별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50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치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사람들이 주교나 교황에게 바치는 충성과 봉사의 일부를 차지하고 싶어 했던 국왕이나 황제의 정치와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은 현실세계 곧 세속 세계에 관한 일들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했다. 따라서 교회 공직자들의 활동을 내세, 즉 영원한 세계를 다루는 일로 제한하고자 했다. 또한 교회공직자들이 권력정치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각주:10] 그리고 이로 인해, "정치와 다른 것으로서의 종교에 관한 새로운 개념"[각주:11]이 정착되었다.

     불행히도, 이런 서구적 개념은 비서구세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종의 식민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구는 자기와 다른 종교들에 직면하여 새로운 개념을 발견해내야 했다. 이와 관련해 모리얼과 타마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2]


유럽 기독교도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종교를 적용하여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같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생물 분류상 사자panthra leo와 호랑이 panthera tigiris를 표범속genus panthera에 속하는 종으로 분류하듯, 그들은 그 지역의 전통들을 수많은 다른 전통들과 함께 종교라는 속genus에 속하는 종들로 분류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별 탈은 없을 듯하다. 즉, "영국인들이 인도를 식민지화하기 전에는 인도인들에게 종교와 힌두교라는 개념이 없었다. 인도에는 원래 힌두교도라는 말이 없었고, 1800년대까지는 힌두교라고 말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각주:13]고 말이다. 한데, 인도만 이러했을까? 그렇지 않다. 다시 이들의 말을 참조해 보자.[각주:14]


불교 역시 무수한 사람들이 2500년 넘게 활동하며 생각한 것들을 종합하여 종교로 분류한 유럽식 개념이다. 불교라는 다양한 수행의 공식 창시자는 고타마인데 그는 부처, 곧 깨달은 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신들, 영혼, 천국, 지옥, 구원, 종교에 관한 서양식 개념들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오늘날 대학교 철학과에서는 불교를 가르치기도 하는데 부처의 방법들 중 일부는 자기계발 심리학으로 분류된다. ……유교는 종종 사회관계와 통치제제에 관한 일종의 철학으로 분류된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공자는 신들이나 영혼, 사후세계 같은 내세의 일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사들과 학자들은 종교라는 속屬에 속하는 일종의 종種으로서 유교라는 범주를 만들었다. 그들은 중국의 여러 잡다한 사상과 풍습을 도교라는 범주로 함께 묶어버렸고, 그것을 종교라는 속에 속하는 또 다른 종으로 다루었다.


     따라서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기 위해, 프런티어 이론가들은 하나와 여럿,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그리고 낯선 것과 친숙한 것 사이에서 비교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효과적으로 새롭게 창출되었다."는 치데스터의 말은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2. 분리에 따른 인종차별담론으로서의 종교


     그래서일까. 장석만 역시 “종교 개념이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타났으며, 일정한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고 썼다. 사실, 종교학의 기원이 공간적으로는 서구이고 시간적으로는 19세기라면, 이런 문제제기가 괴상한 것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종교학은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현존재가 가진 선입관을 깊이 간직한 채 시작한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과학을 표방하면서 그 연구를 시작했지만 종교학의 역사는 이 연구가 진화론에 물들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 예로, 샤프도 『종교학: 그 연구의 역사』라는 책에서 진화론은 종교학에서도 하나의 만능열쇠였다고 말한 바 있다. "진화론자들의 가설은 1880년 즈음 이미 사실상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스펜서는 인간문화의 전반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고 이제는 하나하나의 세목에서 그의 통찰을 확인하는 일만 남은듯 했다. 진화론자들의 눈에는 종교가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쳤다. 종교를 일단의 계시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발전하는 유기체로 보게 된 것이다."[각주:15]

     하지만 종교를 발전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자 했던 이러한 진화론적 연구방식이 처했던 맥락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푸코의 다음과 같은 논의는 폐부를 찌른다. 다소 길지만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6]


19세기의 기본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소위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인 것 같다. ……그것은 열등한 인종이 좀더 사라지고 비정상의 개인들이 좀 더 제거된다면 종의 퇴화를 좀더 잘 막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는 좀더 강하고 좀더 활기차게 살아남아 많은 후손을 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관계다. 그러니까 군사적이거나 전투적 혹은 정치적인 관계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관계이다. ……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수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19세기의 생물학 이론과 정치 담론 사이에 재빨리 맺어진 관계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넒은 의미의 진화론-다윈의 이론 자체보다는 그의 개념들을 한데 합친 전체로서의 진화론-은 아주 자연스럽게 19세기의 몇 년 동안 단순히 정치적 담론을 생물학적 용어로 옮겨 놓거나 과학의 외피 밑에 정치적 담론을 숨겨 놓은 방식이 아니라 식민정책의 관계와 전쟁의 필요성, 범죄와 광기·정신병의 현상, 다양한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의 역사 등을 사유하는 진지한 방식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생물권력의 양식으로 기능하는 근대사회에서 왜 인종주의가 발전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러셀 맥커천의 책 마지막 부분인 「연구자들」에 실린 마스자와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꽤 타당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각주:17]


사회과학에서든 인문학에서든 똑같이 종교라는 범주는 대체로 비역사회 되고, 본질화 되어 왔으며, 비판적 분석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태생적으로 이를 거부한다고 은연중에 전제되어 왔다. 학문의 입장에서 이런 실패, 분석적 관심의 이런 결여, 그리고 종교라는 주제와 관련된 고집스러운 맹목, 이런 것들의 원인은 의심할 바 없이 많고 복잡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런 담론의 형성 전체에 관해 다른 종류의 면밀한 검토를 꾸준하고 다소 구불구불한 역사적 분석을 한다면, 그 복잡성은 비판적 압력에 굴복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튼, 이제 종교라는 개념은 지극히 서구적인 것이었고, 게다가 인종적인 범주에 속하는 문제였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치데스터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종교연구에 있어 푸코가 지적한 생물권력이 어떻게 활성화되었고, 또한 인종담론으로 수렴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각주:18] 물론,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앞서 언급했던 모리얼과 타마라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바였겠지만 말이다. 들어보도록 하자.


학문적 고찰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고찰이 드러내는 유사성과 차이의 유희 안에서 남부 아프리카에서 행해진 프런티어 비교종교는 제종교간의 비교를 위한 범세계적인 전략들도 동시에 개발하였다. 여기서 세 가지의 기본적 유형의 범세계적인 비교전략-분류법, 계보론, 유형론-을 다시 검토해 볼 수 있겠다. 박물학의 분야에서 스웨덴의 과학자 린네는 동식물과 인간을 속 및 종의 차이로 체계화하기 위한 기초적인 비교원리로서 분류학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이와 흡사한 방식으로 18세기 유럽인 비교론자들은 종교를 또한 종의 차이들에 의하여 나누어질 수 있는 하나의 유개념, 즉 특별히 유대교, 이슬람교, 이교라는 종들로 나뉘어질 수 있는 유개념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남부 아프리카 프런티어에서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와는 또 다른 분류법이 출현하였다. 다수의 프런티어 비교론자들은 하나의 시원적 고대종교로부터의 역사적 퇴화론을 선호하였다. 아프리카 종교들이 특정 시원적 계시종교로부터 퇴화하였다는 이론은 남부아프리카에 기독교 문명을 진척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강구하기 위한 전력적인 논쟁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블리크의 진화론적 작업은 아프리카인의 종교적 계보를 추적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다 일반적으로 인류전체의 종교적 계보를,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문명화된 유럽인의 종교적 계보를 구축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었다. 그저 우리네 인종의 초기발전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아프리카에 널리 퍼져 있는 인종들의 분파들을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긴요한지를 입증하고자 하였다.


     결국, 치데스터는 종교연구에서 서구의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간의 "유사성이 붕괴되었을 때 그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인종이었다."[각주:19]고 직격탄을 날린다.

     한데, 이쯤에서 몹시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과연 신학은 대체 이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을까 하는 점 말이다. 흥미롭게도, 스미스는 생물학적 분류가 종교학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언급하면서 "서구종교를 상상하는 커다란 틀 안에서 볼 때 유대교가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각주:20]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장석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각주:21]


유대교는 가깝지만 멀고, 비슷하지만 괴상하며, 서구적이지만 동방적이고, 또한 평범하지만 이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낯익음과 낯섦 사이의 이런 긴장은 유대교를 상상하는 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인식을 환기하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긴장은 비교할 필요성을 불러일으키며, 비교를 요청한다. 유대교는 비교와 해석이 필요할 만큼 이국적이다. 반면에 유대교는 비교와 해석이 가능할만큼 가깝기도 하다. 가까운 것과 먼 것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교의 긴장 덕분에 유대교는 정의와 비교와 같은 핵심적인 방법론적 문제를 다루는 데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게다가 유대교는 종교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상상력, 자기의식, 그리고 선택과 같은 보다 포괄적인 영역을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사례를 제공해 준다.


     유대인의 이러한 유용함은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인종을 분류하는 담론으로서의 생물권력이 종교연구에 적용되기도 했다는 치데스터의 말을 참조한다면, 신학에선 홀로코스트 이후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반유대주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알다시피 이미 사이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에른스트 르낭은 이에 해당되는 최적의 인물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종교문헌의 비교를 수행함에 있어 르낭은 셈어를 인도 유럽어에 비해 윤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타락한 것으로 보았다.[각주:22] 그의 유명한 『예수의 삶』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는 결단코 유대인으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또한, 결코 예수가 유대인일 수가 없었기에 유대인과 그 종교에 대한 그의 독설은 짙었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현학적인 태도, 신랄함, 증오, 그리고 영혼의 왜소함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그곳에서는 광신이 극에 달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결국 궤변가의 문제로 귀착되어 버리는 율법연구가 유일한 공부였다. 유대 박사와 율법학자들의 지식은 완전히 미개한 것이었으며, 도덕성이 완전히 결여된 보상없는 부조리였다."[각주:23] 사실, 르낭의 이런 인식은 우연히 태어난 게 아니었다. 19세기 분류체계의 정식화를 따랐고, 사이드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비교하면서라는 말에 의해 셈어와 인도-유럽어 간에 통용되는 복잡한 패러다임적인 관계의 네트워크를 의도"[각주:24]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생물분류학과 비교, 그리고 그에 따른 인종이라는 19세기의 배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그는 “그리스 문명 이외의 다른 모든 문명을 하나같이 조악하고 야만적으로 간주”[각주:25]할 수 있었고, 유럽인을 다른 어떤 인종보다 고상한 종족으로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예수는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대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르낭만 유별난 하나의 예외적인 그런 인물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근대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에게서도 이 점은 어렵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의 유명한 책, 즉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에서 슐라이어마허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각주:26]


유대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사멸된 종교이기 때문에 나는 이제 종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유대주의는 어린아이 같은 아름다운 특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나쁜 것과 함께 모두 버려졌으며 여기서 전체는 예전에 그를 믿던 대중들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고 부패된 희귀한 예가 되어버렸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그 고유한 근본 직관을 통해 종교와 종교사 가운데서 우주를 가장 많이 가장 아름답게 본 종교”[각주:27]로 이해되고 있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종교 자체를 종교를 위한 소재로 변형하고 조작하며 이로써 종교의 최고능력"[각주:28]인 것이다. 유한자 가운데서 무한자를 직관하는 것이 종교라는 그의 정의를 참조한다면, 기독교는 무한자를 가장 잘 직관하는 종교인 반면 유대교는 퇴화하고 부패한 사멸된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점은 그의 책, 『기독교 신앙』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에서 유대교나 이슬람교로 이행하는 것을 오로지 퇴행과 병적인 예외로 간주할 수 있다.”[각주:29] 따라서 그는 “유대교 예언자의 예언은 오로지 기독교를 위해서만 증거력을 가질 수 있는”[각주:30]것이라고 쓸 수 있었다.

     이쯤이면, 유럽의 다른 지성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레너드는 자신의 책, 『소크라테스와 유대인』에서 칸트 이후 유럽의 여러 지성인들이 어떻게 유대인과 그 종교를 이해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슐라이어마허 못지않게 헤겔 역시 그러했음을 알 수 있다. 레너드의 말을 들어보자.[각주:31]


헤겔은 유대인들에게 미가 없으며, 심미적 영역과 관련된 이런 결핍은 자유의 결핍을 수반한다고 여겼다. 헤겔은 그 안에서 진리, 미, 자유, 그리고 정신성이 각각 상호 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강력한 등식을 구축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영속적인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모세의 법이라는 도덕적 명령이 유대인들을 노예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오직 새로운 종교의 출현만이 그들을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보았다.


     때문에, 르낭도 그러했지만 헤겔 역시 예수를 유대교와 대립되는 것으로 놓을 수 있었다. 레너드는 “헤겔은 그리스도교의 출현을 유대교의 실증성을 외면하는 것으로 특징지었다. 예수는 순전히 객관적인 명령들과 그것들과 완전히 이질적인 것, 즉 일반적으로 주관적인 것과 대립시킨다.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그 운명>은 예수와 유대인들의 연관성을 전혀 추적하지도 않은 채 예수를 유대인 신앙의 대척점에 놓았다.”[각주:32]고 적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일은 유럽 이외의 식민지에서도 일어났다. 물론, 지금까지 본 것처럼 유럽의 맥락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반유대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1914년 <남아프리카 원주민이 지니는 유대인 혹은 셈족의 전설과 관습>이라는 시드니 멘델손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치데스터가 "멘덴솔은 유대인과 남부 아프리카의 모든 토착민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형태적 유사성과 공통의 혈통에 대해서 그것도 상당히 세부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각주:33]고 말했다는 것을 유념하도록 하자. 게다가, 아프리카인들을 보면서 멘델손이 "이들 검은 얼굴들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나는 저 착각을 불허하는 유대인적 용모를 보았고, 그러한 연유로 그들을 이 기묘한 땅의 이방인들로 거의 환영하고 싶은 충동이 일 뻔하였다."[각주:34]고 썼다는 점도 말이다. 확실히, 유럽인이 타자인 비유럽인을 정의할 때 유대인과 그 종교를 동원했듯, 비유럽인 역시 다른 누군가와 관련해 자신을 정의할 필요가 있었을 경우엔 유대인과 그 종교를 동원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반유대주의를 논하면서 유대인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나라에서 유대인이 출몰한다는 노만 콘의 말은 참조할 만하다.[각주:35]


절멸적인 반유대주의가 맹렬히 불타오르는 현상은 대중이 유대인이라는 존재가 그들 이외의 인류를 섬멸하고 지배하고자 획책하는 집단적인 악의 화신이라고 상상하는 경우로만 한정된다. 이런 종류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 현실 생활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실제로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한 번도 유대인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수백 년도 전에 유대인이 사라진 나라들에서도 출현한다.


     알다시피, 일유동조론은 이에 해당하는 적절한 한 예다. 타츠루는 “언제 유대인이 일본에 출현하게 됐는지, 우리는 그 날짜까지 알 수 있다. 그럼 소개하겠다. 일본에 유대인을 존재하게 만든 사람은 스코틀랜드인 선교사 노먼 매클러드라는 인물이다. 그는 일본에서 행한 현지 조사의 결과 일본인은 유대인의 잃어버린 10부족의 후예라는 기상천외한 설을 1875년에 발표했다. 이것이 그 후 현재까지 전해지는 일유동조론의 기원이 되었다.”[각주:36]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유대인이 하나의 대립항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역설한다.[각주:37]


낮과 밤, 남과 여, 평화와 전쟁, 이러한 대립은 그 밖에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립은 현실적인 세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립은 현실 세계에 골격과 축과 구조를 부여하고, 현실 세계를 조직화하고, 인간에게 현실이 존재하게 하고, 그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그러한 대립입니다. …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라는 대립은 현실적인 세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대립이 아니다. 반대로 이 대립은 현실 세계에 골격과 축과 구조를 부여하고, 현실 세계를 조직화하고, 인간에게 현실이 존재하게 만드는 대립이다.


     그리고 이런 대립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이렇게 적었다. “반유대주의란 꼭 유대인을 배척하라는 명시적인 박해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 일종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매개로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사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유대인에 대해 친화적인 태도나 경의를 표한다고 해도, 반유대주의자와 기본적인 세계인식의 도식을 공유한다는 말이다.”[각주:38]라고 말이다.

     한데, 타츠루의 책을 번역한 박인순의 말은 이보다 더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39]


북왕국이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하면서 10부족은 아시리아로 끌려가 나머지 2부족에 의해 잃어버린 10부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기록이 남지 않아 이들의 행방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게 되었다. 10부족의 일부가 아프가니스탄, 인도, 미얀마, 중국, 일본, 한국, 영국, 미국, 스키타이, 아프리카 등으로 이동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10부족의 일부가 이동했다는 지역으로 언급되고 있는 지역 가운데 우리나라가 들어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부족 중 하나인 단지파가 바로 한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들어보도록 하자.[각주:40]


삼성기 하편에 의하면 환국의 12국 중 하나인 수밀이국은 단군 족, 곧 백두산족의 일파이다. 기독교의 12지파 중에 단지파가 있다. 체형, 언어, 생활습관이 수메르인과 이스라엘인과 한국인이 유사하다이스라엘이 말하는 선민(選民)은 그 뜻을 선택받은 민족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원어는 chosen people로써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조선 사람」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단군 민족이라는 의미다. 세계를 방황하던 이스라엘이 유엔에 청원할 때 만주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고향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은 수메르 인으로써 함께 천신제(天神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민족과 이스라엘의 동질적 역사와 문화(文化)를 보면 너무나 유사점이 많이 있다.


     사실, 이런 말은 누가 봐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허무맹랑하여 정신병자가 지껄이는 말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인이 이 가상의 유대인을 반복하여 호출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사정 때문이었다. 일유동조론부터 시오텐의 반유대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에 공통된 점은 국민국가의 정치적 위기와 국민적 정체성의 동요라는 두 가지 정치적 요인이다.”[각주:41]라는 타츠루의 말을 참조하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은 아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유대인의 지혜를 배우자는 소리가 한국 개신교 내에서 호응을 얻는 이유는 최근 침체한 한국의 경제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를 살해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유대인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개신교인들의 신앙적 고백과 모순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이러한 모순을 뚫고 한민족이 단지파라는 망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이런 망상 뒤에는 현실적으로 막강한 전세계적인 힘을 누리고 있는 현재의 유대인의 기원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한민족이라고 말함으로써 지금의 위기상황을 타계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한데, “반유대주의란 꼭 유대인을 배척하라는 명시적인 박해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 일종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매개로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사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유대인에 대해 친화적인 태도나 경의를 표한다고 해도, 반유대주의자와 기본적인 세계인식의 도식을 공유한다는” [각주:42]타츠루의 말을 대입하면, 이런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해진다. 반유대주의가 유럽 및 비유럽을 가리지 않고 출몰한다는 콘의 지적은 여기서도 핵심을 찌르고 있다고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1. 데이비드 치데스터, 『새비지 시스템: 식민주의와 비교종교』, 심선영 옮김, 경세원, 2008, p.247 [본문으로]
  2. 러셀 맥커천, 『종교연구길잡이』, 김윤성 옮김, 한신대학교 출판부, 2015 [본문으로]
  3. 러셀 맥커천, 같은 책, p.299 [본문으로]
  4. 조너선 스미스, 『종교상상하기』, 장석만 옮김, 청년사, 2013, pp.14~15 [본문으로]
  5. 조너선 스미스, 같은 책, p.15 [본문으로]
  6. 조너선 스미스, 같은 책, p.15 [본문으로]
  7. 조너선 스미스, 같은 책, p.16 [본문으로]
  8. 존 모리얼·타마라 손, 『신자들도 모르는 종교에 관한 50가지 오해』, 이종훈 옮김, 휴, 2015, p.22 [본문으로]
  9.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22 [본문으로]
  10. 존 모리얼·타마라 손, 앞의 책, p.23 [본문으로]
  11.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24 [본문으로]
  12.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24 [본문으로]
  13.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25 [본문으로]
  14.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p.26~27 [본문으로]
  15. 에릭 샤프, 『종교학: 그 연구의 역사』, 윤이흠·윤원철 옮김, 한울아카데미, 1998, pp.71~72 [본문으로]
  16.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박정자 옮김, 동문선, 1998, pp.277~295 [본문으로]
  17. 러셀 맥커천, 앞의 책, p.259 [본문으로]
  18. 데이비드 치데스터, 앞의 책, pp.405~410 [본문으로]
  19. 데이비드 치데스터, 앞의 책, p.450 [본문으로]
  20. 조너선 스미스, 앞의 책, p.24 [본문으로]
  21. 조너선 스미스, 같은 책, p.24 [본문으로]
  22.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p.257 [본문으로]
  23. 에른스트 르낭, 『예수의 삶』, 박무호 옮김, UUP, 1999. p.189 [본문으로]
  24.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책, P.255 [본문으로]
  25. 미리엄 레너드, 『소크라테스와 유대인』, 이정아 옮김, 생각과 사람들, 2014, p.300 [본문으로]
  26. 슐라이어마허,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 최신한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2, p.235 [본문으로]
  27. 슐라이어마허, 같은 책, p.239 [본문으로]
  28. 슐라이어마허, 같은 책, p.239 [본문으로]
  29. 슐라이어마허, 『기독교 신앙』, 최신한 옮김, 한길사, 2006, p.92 [본문으로]
  30. 슐라이어마허, 같은 책, p.131 [본문으로]
  31. 미리엄 레너드, 앞의 책, p.148 [본문으로]
  32. 미리엄 레너드, 같은 책, p.148 [본문으로]
  33. 데이비드 치데스터, 앞의 책, p.450 [본문으로]
  34. 데이비드 치데스터, 같은 책, p.451 [본문으로]
  35. Norman Cohn, Warrant for Genocide, London: Eyre & Spottiswoode, 1967, p.252 [본문으로]
  36. 우치다 타츠루, 『유대문화론』, 박인순 옮김, 아모르문디, 2011, p.65 [본문으로]
  37.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39 [본문으로]
  38.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75 [본문으로]
  39. 우치다 타츠루, 앞의 책, p.65 [본문으로]
  40. http://www.dailywrn.com/sub_read.html?uid=5775 [본문으로]
  41.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96 [본문으로]
  42.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7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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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20]



조르지오 아감벤 III-호모 사케르에 대한 서론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이전 웹진까지 아감벤에 대해 논할 때 그의 저서 [남겨진 시간]을 중심으로 아감벤이 해석하는 바울의 종말론과 메시아론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감벤의 철학중에 [남겨진 시간]은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또한 이 부분은 아감벤의 전체적인 사상의 그림 속에서 볼 때, 더욱 그 의미가 확실히 드러난다. 이번 웹진부터 2회에 걸쳐서 아감벤이 그리는 그림 중에 가장 핵심적인 줄기에 속하는 [호모 사케르](2008, 새물결)를 중심으로 아감벤의 현대 사회에 대한 진단을 살펴본다.


   보통 일반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정치를 논할 때, 근대의 민주정치는 길고 긴 인간 정치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신화의 시대에 묶여서 고대 국가의 왕이나 제국의 황제를 신의 대리자로 섬기던 정치 사회에서 중세의 봉건사회의 귀족 정치를 넘어 중앙집권적 왕권의 역사를 지나, 비로소 민주정치의 시대를 인간은 이루었다. 근대의 민주정치는 주권자(대통령이든 의회이든)가 가진 국가 운영하는 힘을 민주사회를 이루는 시민 모두에게서 찾는다. 소위 천부인권사상에 의지해서, 모든 시민은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함으로써 주권자는 잠시 동안 시민의 삶과 행복을 위해 국가를 통치한다. 이전의 고대사회나 중세 사회와 다른 점은 주권의 주인인 국민들의 인권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관은 근대 이래로 수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의심되어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미셀 푸코를 들 수 있는데 그의 미시권력에 대한 이해 또한 이러한 민주정치제도의 환상을 비판하고 있다.

   민주정치제도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야기했지만 요즘에 와서 아감벤이 많은 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야곱 타우버스(Jacob Taubes)와 칼 슈미트(Karl Schmitt)간의 논쟁에서 나타난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의 이해를 계승 발전시켜 현대를 진단하는 새로운 정치학의 관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Today everything is theology, except what the theologians declare to be such.”(Karl Schmitt) 

    -오로지 신학자들이 신학이라고 일컫는 것들을 제외하고 오늘날의 모든 것이 신학이다.[각주:1]


    슈미트는 근대 정치를 진단하면서 근대의 정치학에서 현실 정치를 이해함에서 벗어나 신학적 방법론으로 정치를 이해해야한다고 말한다. 보통 우리는 신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보통 ‘주권’이란 것은 신이 지배하던 시대가 종식되고 난 후에 인간 개개인의 권리에서 찾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슈미트가 보기에 주권은 이미 신적 권위에 의해 만들어진 법안에 장치되어 있었고 이제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으로서,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란 법질서 안에 속하면서도 그 법이 중지를 명령할 수 있음으로 법자체를 무화시켜 버릴 수도 있는 법밖에 존재하는 자이다.[각주:2] 이러한 슈미트에 대한 이해를 통해 아감벤은 현대정치를 말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과 인간의 삶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며 그에 대한 주권자의 위치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아감벤의 이해는 몇천년전의 고전을 읽는 것이 법과 인간 삶의 역사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법이 우리의 삶에서 동떨어져서 법학이란 분과학문으로 바뀌거나 국회에서 법의 제정자와 주권자의 전유물이 되기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 법을 통해 현실 사회를 바꿔보려고 했던 시대나 법안에 신의 뜻이 들어있다고 믿었던 시대의 법과 기록물들을 살펴봄으로써 좀 더 명확한 서구 정치의 원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아감벤의 방법이라 생각된다. 거기에 덩달아 성서라는 것이 가진 새로운 정치적 의미가 발견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감벤이 바라보는 현실의 삶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현실의 정치는 모든 사람들을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만든다. 여기서 호모 사케르란 인간이란 호모(homo)와 성스러운(Sacred)의 라틴어 합성어로서 ‘성스러운 인간’을 뜻한다. 그리고 현실 정치의 주권자는 모든 인간을 호모 사케르로 만듦으로 자신의 주권을 확보하여 정치적 입지를 유지한다. 여기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등장하는데, 아감벤은 이를 매우 절망적인 상황으로 본다. 단순하게 다시 말하면 아감벤은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나찌의 수용소(Concentration Camp)라고 여기고 이 수용소를 주권자들에 의해 호모 사케르가 된 사람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여러가지 질문이 등장한다. 왜 ‘성스러운 인간’이 된다는 것이 이리도 부정적인 것이고, 주권자는 도대체 어떻게 거대한 수용소를 건설하여 인류를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간다는 것일까? 아감벤의 이러한 시대 개관은 매우 중요한데, 바로 어떻게 시대를 진단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해법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웹진에서 이야기했던 [남겨진 시간]의 바울의 이야기는 아감벤이 바울을 통해 발견한 나름의 해법이다. 필자는 이천년전의 문서에서 아감벤이 발견한 하나의 특이한 생각의 방식을 바울을 통해 소개했고 이제 그 방식이 왜 현실 정치의 상황에 대한 해법이 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아감벤이 말하고 있는 ‘주권’의 개념, ‘호모 사케르’의 정체를 살펴보며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한 수용소로 한발자국 들어가보고자 한다. 다음 웹진에서는 본격적으로 호모 사케르의 역사를 살펴보자.


참고도서

Agamben, Giorgio.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 웹진 <제3시대>




  1. Carl Schmitt, letter to Armin Mohler, 14 August 1959, in Jacob Taubes, Ad Carl Schmitt: Gegenstrebige Fügung (Berlin: Merve, 1987), p. 37. [본문으로]
  2.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Vier Kartel zur Lehre von der Souveränität[1922](Berlin: Dunkcer & Humblot, 1996), 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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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라 목사 ‘이단’ 시비를 통해서 본 ‘연대’와 ‘퀴어신학’의 가능성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이성애가부장제(heteropatriarchy)의 붕괴와 젠더 위계질서의 분열에 대한 두려움을 ‘동성애’에 대한 공격으로 분출해온 개신교 우파의 최근의 권력행사의 대표적 사례는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성’ 여부 조사일 것이다. 예장합동의 이단대책위원회가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성조사를 표명했고, 7개 교단 이단대책위가 공조하면서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 여부를 조사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급기야는 임 목사를 소환하겠다고 나섰다. 지금 한국 개신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성애 관련 ‘이단’ 시비는 ‘정통’과 ‘비정통’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이성애가부장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신학적 입장, 목회, 목사를 ‘이단’으로 명명한 뒤에, ‘정통’과 ‘다르고’, 다르기 때문에 ‘비정상’이고, ‘비정상’이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에 ‘해’가 되기에 낙인을 찍겠다는 것이다. 비정통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려 차별, 배제, 멸시, 폭력,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던 존재들은 21세기 한국사회에서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와 관련하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포럼을 개최했고, 나는 임보라 목사와 함께 포럼에 참여하였다. 동성애에 대한 ‘교리신학’적, ‘윤리신학’적 이해에 대한 짧은 고찰과 8개의 개신교 교단에서 자신들의 교단에 속하지 않은 임보라 목사를 왜 ‘마녀사냥’하듯 이단으로 몰아가는지에 대해서 의견들이 오갔다. 한데 질의・응답시간에 나눈 의견들과 질문들 중 하나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고 있다. 맨 마지막에 제기된 것인데, “이 날의 포럼이 퀴어들의 경험을 대상화하는 것은 아닌지”라는 것이다.[각주:1]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 이 짧은 질문은 ‘퀴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하냐를 묻는 퀴어정치학(queer politics)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한, 이 질문은 성소수자,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하며, 더 나아가 ‘누가 퀴어신학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퀴어’(queer)는 일반적으로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 자신의 성과 젠더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일컫고, 이들과 연대하는 ‘엘라이들’(allies)도 포함하는 총괄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이렇듯 ‘퀴어’가 LGBTQIA(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stioning, Intersex, Asexual)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의미로 규정될 수 없고 그렇게 제한되기를 거부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영어에서 명사로도, 동사로도, 형용사로도 쓰이는 ‘퀴어’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지워버린다는 의미, ‘뭔가를 위반하는 행위’, 또는 ‘이성애규범 성(heteronormativity)에 대한 대항’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각주:2]


    퀴어정치학은 성적인 ‘일탈자’와 ‘타자’로 규정되는 주체들을 소수자들로 낙인찍고 억압하는 여러 가지 규제와 범주화에 의해 성적 주체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성정체성의 이분화를 비판하고 이성애를 포함한 다양한 범주의 섹슈얼리티에 분포된 권력의 여러 지점들(힘의 불균형)을 예리하게 짚어낸다.[각주:3] 또한, 퀴어 이론가들은 동성애의 어떤 규범적 위치(position)를 옹호하는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에 대 해서, 그리고 ‘퀴어’를 ‘이상화’(idealization)하거나 ‘동일시’(assimilation)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4]


    이렇게 ‘퀴어’가 한 가지 의미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엘라이’로서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 자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엘라이로서의 연대는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성적 ‘일탈자’로 규정된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거나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연대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근간인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 젠더 위계질서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성과 젠더의 사회적 작동과정에서 차별과 배제, 고통을 유발하고 재생산해내는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비록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의 아픔과 고통의 깊이를 충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고통을 부과하는,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이 연대의 유의미한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정체성의 ‘다름’을 차별로 전환시키는 권력구조의 작동임이라는 사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자신의 성과 젠더 정체성을 퀴어로 규정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을 통해서 성소수자나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가 가능하게 된다. 다름을 비정상으로, 비정상을 해악으로 규정하면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각인하고, 그 속에서 여러 차별과 배제가 어떻게 생겨나고, 여러 가지 고통과 아픔이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인식한다면 그런 권력구조의 종식을 위해서 연대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연대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획일적’으로 이성애를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엘라이가 이성애자나 시스젠 더(cisgender. 태어나면서 지정받은 '신체적 성별[sex]'과 자신이 정체화 하고 있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일치한다고 여기는 사람)로서 알게 모르게 특권을 누려왔음을, 그러한 (무)의식적 메커니즘에 기생하고 있어왔음을 자기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또한 성소수자와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는 이성애가부장제와 그것을 지탱하는 다른 권력 구조와 억압 체제들에도 대항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왜냐면 억압구조들은 서로 교차하고 그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형성되고 작동되는 과정에서 편견과 차별, 배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대의 끈과 망은 계속 넓혀져 갈 수 밖에 없다.


    ‘퀴어’의 다양한 의미와, 성소수자와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퀴어신학에 대한 이해도 확장하게 된다. 약 30여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퀴어종교학(퀴어 기독교신학 포함)도 변해왔다. ‘퀴어’라는 용어가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듯이 퀴어종교학/신학도 내부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퀴어’를 LGBTQIA를 총 괄하는 용어로 규정하면서 퀴어정체성과 퀴어경험에서 출발하는 퀴어신학이 있고, 퀴어를 단지 성과 젠더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신학도 있다. 다시 말해서, ‘게이로서 신학하기’라는 정체성과 경험에 근거한 신학에 머무르지 않고, 기독교의 뿌리 깊은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를 비판하고, 또 기독교내에 이미 존재하는 ‘퀴어성’(queerness)을 재발견해내려 하는 퀴어신학의 흐름도 있다. 이는 퀴어신학이 LGBTQIA의 경험만을 신학화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다름’을 ‘차별’로 규정하고 성과 젠더에 대한 지배 규범을 생산해 내는 사회의 권력구조를 비판하면서 기독교 역사와 전통, 기존의 성서해석과 신학을 퀴어적 시각에서 다시 읽고 재해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광범위한 퀴어신학의 한 분야인 퀴어적 성서 해석도 성서에서 ‘동성애’에 관한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들을 재해석하거나 성서의 몇몇 등장인물들을 ‘게이’로, 또 그들의 관계를 ‘동성 간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시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식론적 관점으로서의 ‘퀴어’를 통해 성서의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 가부장제, 젠더의 위계 질서를 비판하고, 성서에 나타난 규범과 비규범의 이분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비판함과 동시에 재해석하고, 성서에 내재된 퀴어성을 해석해 내기도 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내부적으로 다양한 퀴어 신학은 정상과 비정상의 극명한 대조를 해체하고, 규범과 비규범의 경계를 지우고, 차이와 경계들을 만들어 내는 권력구조를 비판하며, 그런 권력구조가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계속해서 질문 하면서 경계 허물기를 도모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신학적 시도는 소위 ‘정통’신학에 대한 비판까지도 포함한다.


    임보라 목사와 퀴어신학의 ‘이단성’을 판단하겠다는 세력에게 대항하는 방식으로서 그들의 ‘비정통성’이나 ‘이단성’을 되물으면서 또다른 경계를 짓기보다는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 권력구조의 억압성과 죽음 의 정치학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폭로하면서 그들의 낙후되고 치졸한 ‘이단’ 시비에 대한 집단적인 대항의 목소리와 행동을 보여야 할 것이다.


    최근 교회의 경계 긋기와 벽쌓기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높고 폐쇄적으로 구축되어 가는 경계를 허무는 퀴어목회와 퀴어신학은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그렇기에 퀴어목회와 퀴어신학을 실천하는 임보라 목사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내일로 미뤄질 수 없다.



ⓒ 웹진 <제3시대>



  1. 이 질문을 한 오세요 전도사님에게 감사드린다. [본문으로]
  2. Patrick S. Cheng, Radical Love: An Introduction to Queer Theology (Seabury, 2011), pp. 3~5을 보라. 또한 Susannah Cornwall, Controversies in Queer Theology (SCM, 2011)을 보라. [본문으로]
  3. Cathy J. Cohen, “PUNKS, BULLDAGGERS, AND WELFARE QUEENS: Radical Potential of Queer Politics?” GLQ vol. 3(1997), pp. 437~465을 보라. [본문으로]
  4. Lisa Duggan, The Twilight of Equality? Neoliberalism, Cultural Politics, and the Attack on Democracy (Boston: Beacon Press, 2003)을 보 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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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관하여[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어느 신학교 노교수의 자살


    1973년부터 2012년 까지 40년 동안 시카고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프로이트와 융을 가르치면서 정신분석학과 신학 사이 학제간 연구를 주도했던 로버트 무어 교수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내게 전해졌다. 시카고 신학대학원이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퀴어신학, 흑인신학, 포스트콜로니얼니즘 등 진보적인 색깔로 유명한 학교이지만, 원래 이 학교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목회상담 때문이다. 100년 전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는 최초로 임상목회실습(CPE)과정을 실시하면서 신학의 대중화 내지 현장화를 이끌어 낸 학교가 시카고 신학교였다. 미국 목회상담의 아버지라 평가받는 안톤 보이스(Anton T. Boisen)가 시카고 신학교에 근무하면서 이 운동을 이끌었고 지금도 학교 도서관의 한 방은 안톤 보이슨 Room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에 사망한 로버트 무어(Moore) 교수는 시카고 신학교의 심리신학을 담당하던 교수이고, 특별히 그는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분석심리학을 만든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전문가로 미국에서 손꼽히는 학자다. 무어 교수는 시카고에 있는 융 연구소를 이끌었고, 융의 집단 무의식과 신학자 폴 틸리히의 궁극적 실재를 연결하여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구성하려 했던 창의적 신학자였다. “네가 아직 알지 못하는. 네 안에 있는 그것을 발견해라! 그것이 궁극적 실재이고, 그것이 신과 만나는 통로이다!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라!”를 외치면서 많은 신학도들과 수많은 내담자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학자이자 상담가였던 로버트 무어 교수는 늘 매니아들을 거느리고 다녔던 스타강사이기도 했다.

   2012년 은퇴 후에도 학교는 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연구실도 그대로 남겨두었고, 교수 명단에서도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그만큼 시카고 신학교에서 로버트 무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2016년 6월 22일 시카고 경찰은 로버트 무어 교수가 부인과 함께 총에 맞은 채 발견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아직 사고의 원인은 조사중이다’라고 브리핑하였고, 다음 날 로버트 무어 교수가 부인을 권총으로 쏴서 먼저 죽이고 본인도 바로 스스로 자살했다고 공식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알콜, 약물중독, 마약에 의한 혐의는 밝혀진 바 없 다”라는 소견을 달았다.

   교수님이 왜 자살했을까? 한동안 내가 10년 동안 봐 왔던 무어 교수가 했던 말과 그의 모습 을 되살리면서 무어교수의 죽음을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려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자료들을 가지고는 온전히 그것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어떤 사건과 인물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 ‘무어 교수가 발견한 당신 안의 그것이 과연 무엇이엇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얼마나 그것이 매혹적이고 좋았으면 선생은 이생에서의 삶을 그리 서둘러 단축했을까.

    하지만, 이런 결정은 내가 아는 무어 교수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그렇게 폭력을 혐오하고, 폭력에 저항했던 선생이었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그리고 자신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며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나로서는 당혹스럽다.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일단, 지금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무어교수는 나에게 신학이 얼마나 매력적인 학문인지, 아니 신학이 얼마나 불안하고 균열이 가득한 학문인지를 일러준 스승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2016년 6월 30일 일기 中에서


   자살에 대한 해석


    사건 직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수소문을 해봤지만 사건에 대한 자세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시카고 지역 신문에서 사건에 대해 몇 차례 보도되어 약간 술렁이는 듯 하더니 그것으로 끝이다. 시카고 신학교 차원에서 유감의 표현과 추모예배를 드렸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 건이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소식은 들은바가 없다. 무어 교수 부부의 소장품들이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다는 소식, 무어 교수 집 앞에서 책이랑 생활용품을 펼쳐놓고 무슨 업체 같은 데서 나온 사람들이 garage sale 하는 것을 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마 도 두 노부부의 유품을 정리하고 처분해 줄 가족조차 없어 그런 일을 대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뒷처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며, 무어 교수 집 근처에 사는 옛 동료가 귀뜸해 주었다. 와이프가 심각한 건강 이상에 시달렸다는 소식, 무어 교수가 2012년 돌연 학교에 사의를 표하 고 사라졌는데 그 무렵부터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는 소문까지... 그 누구도 무어 교수에 대해 아무것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무어 교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아내를 먼저 총으로 쏴서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신학교수를 말이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가고, 중세 때는 자살을 시도한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었으며, 자살자의 교회 예식에 따른 장례식은 로마 카톨릭에서는 거부되고 있다. 왜냐하면 자살이 회개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자살에 대한 그 리스도교 차원에서의 공식적 반대의견은 중세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에 와서 정교하게 완성되었다. 아퀴나스가 자살을 반대한 이유는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인간의 자기 사랑과 자기 보전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의무이며, 둘째, 인간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 고, 셋째, 생명의 권한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교리적이고 율법적인 잣대로 자살자의 입장과 처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없이 자살을 반대하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너무나 무지하고 폭력적이다.

    이것보다는 좀 나아 보이는 그리스도교의 자살에 대한 이해가 있다. 그리스도교가 자살을 거부하는 이유는 복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 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것이 된 존재, 이것이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고 이것을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챤 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법칙과 강제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들이고,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온갖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이 말은 크리스챤은 세상의 명령과 육신의 명령에 따라 살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현실의 어려움과 절망과 환난 가운데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괴로운 질문으로부터 해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현실의 환난에 처한 크리스챤들에게 현실을 견디는 희망으로 작동할 수도 있 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복음의 능력으로 자살의 충동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정신의학에서 일탈적 행위를 보이는 개인이 치료를 통해 사회로 복귀하는 것과 같다. 사회, 즉 대타자는 완벽하다. 완벽한 대타자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순응하지 못하는 개인이 문제다. 정신병 걸린 사람이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신병원에서 하는 것이다. 이를 자살과 복음의 관계에 적용하면 이렇다. 복음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완벽하다. 자살은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과연 복음이 완벽한 균열이 없는 매끈한 진리인가. 어처구니 없게도 20세기 내내 전 세계적으로 복음전파의 모범으로 군림했던 대한민국이 압도적으로 자살율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자살공화국


    2014년 2월 2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서 엄마 박모(60) 씨와 장녀 김모(35) 씨, 차녀 김모(32) 씨가 번개탄을 이용 동반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현장에서는 현금 7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다음과 같은 메모가 발견되었다; “주인 아주머니께...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건은 생활고에 시달 리던 선량하고 정직한 서민이 시스템이 정해 놓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힘겹게 살다가 그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 법의 명령을 어길까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이 발생했던 2014년 그해 우리나라 자살율은 세계 최정상급이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통계청 2014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은 10만 명당 28.7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이는 하루에 40명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2003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 1위다. OECD 평균이 12명인데 한국은 두 배가 넘는 수치다. 헝가리(19.4명)와 일본(18.7명), 슬로베니아(18.6명), 벨기에(17.4명) 등이 자살율이 높은 나라들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하지만 한국의 자살률이 처음부터 고공행진을 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만 해도 자살률은 8.8명으로 당시의 일본(17.5명)과 독일(17.1명)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랬던 한국의 자살률은 1997년 IMF와 2008년 미국발 금융대란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며 급증했다. 자살률은 IMF이후 서서히 증가하여 2000년 13.6명, 그리고 2003년 22.6명으로 껑충 뛰었다. 2009 년 31.0명, 2010년 31.2명, 2011년 31.7명으로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2012년 28.1명으로 줄어든 이후 2013년 28.5명으로 다시 상승했다.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자살의 원인은 고령화와 경제난이라고 한다. 인구 고령화 시대로 치닫는 사회적 추이속에서 노인들의 삶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고, 노인들을 섬기고 대우해주었던 공동체는 파괴된 지 오래다. 전 세대 전 연령층에서 자신들에게 닥쳐온 현실적 삶의 무게 를 견디느라 모두가 아우성이고 그런 까닭에 우리 이웃을 돌아볼 물리적, 감정적 겨를이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나라 살림도 어려워 각종 복지정책은 뒤로 밀리고 있고 그에 따라 사회적인 안전망이 제거되는 상황속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위험사회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은 압도적 자살국의 지위로 등극하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살율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 시간당 시급을 만원으로 올리고, 기초생활 수급자 대상의 층과 범위를 확장하고, 임시직.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70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50만원 정도씩 보장하고, 치매와 암, 그리고 기타 불치병 희귀병의 치료와 후원에 국가가 전면적으로 개입하면 자살문제는 해결될까? 그렇다면 분명 자살율은 감소할 것이고, 그러한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우리의 권리를 부르짖으며 사회적 안전망을 다시 재건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물리적인 노력들을 실천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살에 대한 공부다. 우리는 그동안 진지하게 자살을 다루어 본 적이 없다. 자살은 감추고 숨기고 피해야 하는 마치 주홍글씨 같은 낙인과 같아서 자살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 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자살에 대한 객관적 안내를 제공하는 자료가 지금 소개할 뒤르겜의 『자살론』이다. 100년도 훨씬 전에 뒤르겜의 자살에 대한 통계를 바탕 으로 작성한 이 책은 희미하고 불명확했던 자살의 현상학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빛나는 성과라 할 수 있다.


   뒤르겜의 '자살론'


    자살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 성과물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에밀 뒤르겜의 ‘자살론’[각주:2]은 자살을 둘러싼 현상학 혹은 종교사회학에서 이룩했던 성과 중 단연 빛나는 저작으로 지금까지 손꼽힌다. 뒤르겜은 우리가 생각하는 여러 자살의 요인들, 예를 들어 정신질환, 유전적 요소, 인종적 특징, 계절과 자살의 관계, 알콜과 자살, 빈곤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후에 “자살은 사회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다”[각주:3]라고 말하였다. 뒤르겜의 발언은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이 근대성의 일면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렸고, 그것은 현대의 자살현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고. 중세 시대에도 물론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당대의 봉건적인 이데올로기와 종교가 내세우는 강압 속에서 수치스럽고 욕된 삶을 산다고 생각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어 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끼리의 관계가 촘촘히 얽히기 시작하면서 자살율은 가파르게 상승하였다. 봉건사회보다 근대사 회는 사회적인 끈끈함(social cohesion)이 느슨한 이기적(egoistic) 사회이다. 뒤르겜은 이기주의를 자살의 중요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지나친 이기주의는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을 촉 발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자살을 유도하는 원인이다.”[각주:4] 근대로 접어들면서 개인주의적인 삶이 고착화되면서 공동체를 바탕으로 했던 삶의 원리는 점차 사라져갔고,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정글속에서 홀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뒤처지고 도태되는 개인이 다시 사회로 편입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근대적 삶의 패턴과 자살율의 증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뒤르겜은 최종적으로 사회적 통합의 정도가 자살율의 감소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상하 였다: “자살은 종교 사회의 통합, 가족사회의 통합, 정치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한다.”[각주:5] 뒤르겜에 의하면 자살율 1위를 자랑하는 한국사회는 종교의 사회 통합 기능면에서 실패하였고, 가정의 붕괴와 정치의 상실 또한 이미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실제로 한국은 전체 가구 중에서 1인 가구의 비중이 30%에 접근해가고 있고, 서울시의 1인 가구비율은 30%를 훌쩍 넘었다. 개인의 삶을 지탱한다는 최소 단위인 가정이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또한 한국 국민의 성직자, 특별히 개신교 목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의 수준은 밑바닥이고,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도 성직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한국사회의 현실은 뒤르겜의 자살률 증가원인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측면에서 눈여겨 볼만 하다.

    뒤르겜의 『자살론』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종교별 자살율 추이다. 종교별 자살율은 개신교-카톨릭-유대교 순으로 개신교가 월등히 높다.[각주:6]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우선 개신교는 가톨릭과 유대교에 비해서 응집력이 느슨하다. 유대교와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훨씬 조직의 힘이 강하고 뚜렷하다. 예전과 교회법을 중시하는 면에서도 개신교를 월등히 압도한다. 유대교와 카톨릭에 비해 개신교는 훨씬 개인적이다. 개인의 결단이 구원의 필수요소이고, 신과의 접촉도 사제라는 매개없이 직통으로 가능하고, 경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평신도 각자가 말씀에 대한 이해를 갖고 신 앞으로 나간다. 신과 개인 사이 일대일 관계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격이 가장 강한 종교가 개신교라는 것이다. 개인의 탄생이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때, 개신교는 근대정신과 부합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성향의 개신교도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은 한국의 높은 자살률을 이해 하는데 있어 중요한 포인트이다. 한국 개신교도들의 자살률만을 따로 떼어 연구한 결과물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의 신앙패턴이 자살율과 상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나는 자살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뒤르겜의 『자살론』을 토대로 자살이라 는 현상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자살에 대해 유독 거부반응을 보이는 그리스도교의 자살 해석에 대한 반론이 도모될 것이다.


   신의 음성, 신의 위로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보고 있다”(이사야 49:16)


    이사야서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예언서이다. 이 책은 바벨론 포로기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이사야서는 66장까지 있는데, 흔히 1-39장을 제1이사야, 40-55장을 제2이사야, 56-66장을 제3이사야서라 부른다. 제 1이사야는 바벨론으로 잡혀가기 이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사야 예언자가 하나님을 대신해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고, 제 2이사야는 바벨론으로 잡혀가 절망과 슬픔과 비탄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제 3이사야는 새로운 희망을 선포하는 메시지다. 위에 적혀 있는 이사야 49장은 위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제 2이사야 중 한 대목 이다.

    고대시대 전쟁에 패한 국가의 백성들은 포로의 신세로 전락하였고, 포로들의 삶이 어떠했는 지는 미루어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남자들은 끌려가서 고된 일과 또 다른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패전국의 여인들은 승전국 남자들에게 의해 온갖 고초와 능욕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더러는 모진 노동에 시달리다 죽을 것이고, 더러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진 운명에 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자기의 존엄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람들 향해, 그렇게 주변에서 사라진 형제, 자매와 부모, 자식을 기억하고 있는 살아남은 자들을 향해 신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들의 이름을 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이다.

    극심한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 말이 무슨 소용이 있나, 라는 부정적 마음이 들다가도 한편으로는 이 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애도한다는 신의 위로가, 삶의 공포와 절망에 지쳐 생을 포기한 이들 하나 하나의 이름을 다 기억하겠다는 신의 다짐이, 욕된 세월을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이렇게 말하는 신이 자살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었으리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은 그 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 하나하나의 이름 을 당신의 손바닥에 꾹꾹 눌러 새기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신이라면 오히려 “너를 쓸쓸히 혼자 내버려 둬서, 너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자살을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사를 찾아와 상담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첫째는 목사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한국교회가 보여 온 번영지상주의, 축복 일변도의 신앙패턴도 영향이 있다. 축복받은 삶만이 신앙의 결실이자 열매라는 잘못된 신앙이 어느 때부터 주입된 관계로, 실패한 사람이나 삶이 주는 무게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은 믿음 이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받기에 교회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신은 정 말로 번영과 축복만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만을 칭찬하고 반기는 신인가?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나기 전에 모세가 신에게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33:18)라고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러한 모세의 요청 에 신은 이렇게 답하였다.“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33:23) 멀리 길을 떠나는 친구에게,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가정과 새로운 다짐을 굳게 하는 친구가 찾아와 복을 빌어달라고 요청한다면 여러분은 뭐라 말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될거야, 넌 할 수 있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의 뜰거야...”등의 온갖 긍정 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그렇게 일이 술술 잘 풀리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길을 떠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축복을 빌어주십시오”라는 요청에 하나님은 가장 정직한 답변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 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너희들이 원하고 생각하는 축복을 내게서 보이라면 난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무심하지만, 항상 없는 듯 너희 곁에 있다”고 말이다. 다석 유영모는 이런 하나님을 “없이 계시는 분”이라고 말하였고, 디트리 히 본회퍼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라는 아포리즘으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표현하였다.

    나는 신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인도 하시지만, 우리 앞에서 그 빛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빛은 우리 앞에서 비추는 빛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등 뒤에서 길을 비춘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강렬한 빛이 내 눈 앞에 있으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눈이 멀고 만다. 빛은 오직 등 뒤에서 비출 때 우리가 갈 길을 밝힐 수 있다. 그리고 그 빛이 우리 등 뒤에서 비추는 까닭에 그림자가 우리 앞에 있다. 그 그림자는 물론 우리 자신의 그림자이다. 신이 인도하는 삶, 빛으 로 밣히는 길 위에도 어둠과 그림자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인생의 그림자를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던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를 좀 더 나의 문제와 현실로 받아들 일 수 있지 않을까. 자살한 사람들의 결정에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라고 한 신의 자비만을 구할뿐이다.


   신정론(Theodicy)에서 인정론(Anthropodicy)으로


    정신과 의사들에 의하면,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살에 대한 죄악성 유무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다. 만일 자살의 원인이 온갖 숨겨진 폭력에 기인한다면, 자살의 동기가 경제적 위기, 혹은 외로움과 고독 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모두가 자살의 잠재적 가해자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은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 대목에서 자살에 대한 문제는 신정론에서 인정론으로 넘어온다.

    이유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해석은 모든 종교들이 최종적으로 고심하는 난문제이다. 고통에 대한 정의가 어려운 이유는 고통에 대한 이해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수 만큼 이나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고, 각 종교 전통마다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 다.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고통과 악에 대한 신학적 답변이다. 신정론은 의인에게 닥치는 고난과 악의 명백한 현존 속에서도 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한 다는 사실, 그런 신의 전능과 계획에 의해 악과 고난은 현실적 차원이 아닌 신의 섭리가 작동 하는 영역으로 고양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론이다. 현재의 고난은 미래에 도래할 축복의 징 표, 라는 신정론적 위안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알 수도 없고 설명도 불가능한 고난 속에서 흔들리는 믿음과 신앙을 지켜주었던 강력한 신학적 근거였다.

    레비나스는 그리스도교의 신정론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지난 20세기에 발생한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원폭 등으로 대표되는 대학살의 기록은 더 이상 고난의 유의미성을 내세우는 신정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정론이 내세우는 고난의 낙관성, 즉 신적 섭리로서의 고난, 고난의 유미성에 대한 해석이 고난 자체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길을 막는다고 하면서 신정론의 폐기를 선언하였다.[각주:7]

    자살의 문제는 원인과 이유도 모른 채 다가오는 우리시대 대표적인 고통의 현상학이다. 기존의 신정론은 자살의 유의미성과 자살 뒤에 숨겨진 신의 섭리에 대해 주목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너의 (개인)구원에 몰두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고통 의 당사자 혹은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일 뿐 아니라,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과 책임에 대 한 방임과 면책의 사유가 된다.

    이 대목에서 자살에 대한 신정론적 회피는 인정론적인 대응으로 전환된다. 인정론은 고통과 탄식 가운데서 발견해야 할 인간의 몫에 대한 문제이다. 신정론이 고통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신을 향한 인간의 질문에서 비롯된다면, 인정론은 고통에 직면했을 때 역으로 등장하는 인 간을 향한 신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신정론의 질문이 “왜 내게 이런 고난이 발생합니까?”라면, 인정론적 질문은 “거기 너 있었는가?”이다. 성서에 나오는 신의 인간을 향한 질문들, 예를 들어 에덴에서 범죄를 저지른 아담을 향한 신의 질문인 “네가 어디있느냐?” 복음증거를 핍박하는 사울을 향한 신의 음성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를 떠올려보면 신을 향한 우리 들의 질문 못지않게, 신 역시 우리를 향해 묻는다: “이 고난의 현장에서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결국 인정론은 고통의 시대, 죽음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질문하는 신의 물음이라 할 수 있겠다.

    자살에 대하여 내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자살을 향한 인정론적 개입이다. 신정론적 낙관 혹은 관조로 한국사회 자살 현상학을 바라보지 말자.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고, 그렇게 대응하다 우리 모두는 한국 사회 자살열풍의 부역자 내지 당사자가 될 수 있 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살에 대한 책임적인 물음과 자세를 가질 때만 이 죽음의 대열이 잠잠해 질 것이다. 우리시대 고통의 요체가 무엇인지, 자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살에 맞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것이 살아남은 우리들이 던져야 하는 질문이고 행동의 원 칙이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켜켜이 쌓인 고통의 결을 드러내고 그 진실의 힘으로 죽음을 생산하는 매커니즘을 해체하는 것, 그것이 인정론적인 개입 안에 담겨진 기대이고 요청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2017년 6월 25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각색했습니다. [본문으로]
  2. 에밀 뒤르겜 지음, 황보종우 옮김, 『자살론』 (파주: 청아출판사, 2008) [본문으로]
  3. Ibid., 129. [본문으로]
  4. Ibid., 251. [본문으로]
  5. Ibid., 249. [본문으로]
  6. Ibid., 173~185. [본문으로]
  7. Emmanuel Levinas, “Useless Suffering” in Entre Nous: On Thinking-0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srshav.(New York: Columbia Uiversity Press, 1998), 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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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1] 그들이 ‘이단’인 이유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인간 예수가 하느님이다”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부인할 수 없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그래서 더더욱 더 골치거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하느님인 인간 예수”가 있음으로 해서, 그리스도교는 같은 히브리 성서의 전통을 공유하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는 달리,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반드시 ‘삼위’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 예수 이전의 하느님, 하느님인 인간 예수, 인간 예수 이후의 하느님 이 3가지 현상을 반드시 함께 다뤄야 하니까. 한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3가지 현상을 관통하는 ‘한 가지’ 통일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하긴 오히려 그래서, 이 ‘3과 1이라는 두 숫자의 관계’에 대해서 담론이 풍성해지는 측면도 없지 않긴 하겠지만.

   게다가 이 ‘하느님인 인간 예수’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철저하게 구별된다는 사고가 기본에 깔려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위시한 소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의 특색인데, 갑자기 한 인간이 동시에 하느님이기도 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말이다. 실제로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그리스도교 교회 중에서도, 사실은 ‘하느님인 인간 예수’가 아니라 인간성을 흡수하여 단일한 신성을 만든 ‘하느님인 예수’였다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존재하니까.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 현재 ‘정통적인 견해’는 이런 것이다. 예수는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다”라는 것.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쨌든 모두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래야만 예수라는 존재를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담긴 견해라고 할 수 있겠고, 필자도 그러한 생각에 큰 이의는 없다.

   그러나, ‘참 하느님인 동시에 참 인간’이라고 말을 하게 되면, 다른 질문 거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도대체 ‘참 하느님’과 ‘참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2. 

   어느새 성소수자 인권운동 지지 기독교인의 대표격이 되어 버린 섬돌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에게 다른 교단에서 엉뚱하게도 무려 '이단 시비'를 걸었다. 그 이단 시비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과정에서 요런 소리가 나왔나 보다. 성소수자 이슈 관련 신학적 논의에서 예수를 성소수자라고 한대나. 그러니 이런 '이단 논의'를 소개하려는 목사가 '이단'이 아니면 뭐냐면서.

   글쎄. 먼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긴 한지부터가 확인이 되어야겠으나(뭐 필자도 예수와 요한복음의 '그가 사랑한 제자' 사이의 관계를 동성애적 상상으로 읽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앞에서 본 것처럼 “참 하나님이자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그런 인간인 예수인데, 그 인간 삶의 중요한 측면 중에 하나인 '성'이라는 측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다는 것이다(그래서 덕분에 '막달라 마리아'와 짝짓기하는 상상이 종종 나오기도 하지 않던가). 웃기는 것은 그렇게 비어 있는 와중에도 '남성'이란 건 꼭 붙들고 앉아, 예컨대 여성이 신부나 목사가 되면 절대 안 된다는 근거 중의 하나가 된다고 우긴다는 것이지만. 

  사실 '그가 사랑한 제자'니 막달라 마리아니 뭐니 그런 상상하지 말고, 그냥 기록에 남은 대로 성 관련 이야기는 아예 없었다, 즉 성 측면에선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라고 한다면, 농담 조금 심하게 섞으면 '고자'라 해도 할 말 없고, 조금 진지 모드를 섞어 보면, LGBT가 AIQ로 확장될 때 A(무성애자)라고 해 볼 만도 할 텐데, 그럼 예수를 성소수자라고 한다고 해서 굳이 틀린 말이 될 것도 없을 지도.

   물론 기록이 없는 것뿐인데 함부로 추측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방금까지의 이야기가 ‘함부로 추측’이라면, 예수가 음경을 갖고 있었다고 ‘이성애자 남성’이라고 단정하는 것 역시 ‘함부로 추측’이긴 마찬가지일 터.


   3.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는데, 그래서 ‘참 하나님’은 무엇이고 ‘참 인간’은 무엇인가, 그래서 예수가 어떤 존재라는 것인가를 물으려니, 당장 ‘참’까지도 안 가고 ‘인간’부터 이렇게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게 된다. 어쨌든, 예수가 ‘참’자를 달든 말았든 '신인 동시에 인간'이라면, 그건 1차적으로는 예수라는 존재, 더 나아가 그 예수라는 존재에 근거해서 신을 이야기해야 하는 그리스도교라는 지평을 깔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에 근거해야 한다는 뜻일 것은 분명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가 보면, 예수란 존재가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 예수라는 존재에 근거해서 ‘신’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을 같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신'이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 '인간'이란 것의 모든 구석구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다면 반대로 '인간'이란 것을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지금 이야기되지 않은 것'에서 나타날 지도 모르는 '신'에게 뒤통수 맞을 준비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당장 바로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한 종류인 성소수자 문제만을 고려해도, 상황이 꽤 달라지지 않던가.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건드린다면, 그런 '신'은 우리에게 어떤 따라야 할 '모범'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차라리 뒤통수 때리는 존재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나를 소환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그래서, 필자는 "예수를 본받자"라는 이야기가 그다지 맘에 내키지 않는 편이다. 그건 이미 '예수'를 어떤 '모범', 즉 이미 현재의 세상에서 '모범'이라고 수긍이 되는 존재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테니. 또한,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건드림으로써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신’이라면, 그 ‘신’을 이야기하는 근거가 되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는, 1세기 팔레스틴에 살았다는 기록을 남긴 존재로서의 ‘역사적 예수’와 동일하지만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이야기하면서 '신'이란 것을 찾아야 한다면, 예수를 통해서 '신'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그런 의미라면, 예수를 통해서 이야기되는 '신'이 성소수자라는 게 '이단'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에 이단이라고 거품을 물면서 ‘신’은 절대 성소수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바로 그들이 '이단'이지 않겠나.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통해 이야기되어야 하는 ‘신’을, 감히 ‘성소수자 인간’은 빼고 이야기하자고 덤비는 ‘신성모독’자들일 테니까 말이다.

   뭐, 길게 이 소리 저 소리 늘어 놓았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 한 마디면 될 일이다. 

   "아따, 성소수자도 되지 못하는 신을 어따가 쓸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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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대한 담론: 정의의 문제이자 실천신학의 주제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최근 독일에 한 달 정도 머문 적이 있다.

    유럽 연합 국가내에서 최고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국가로서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고 불편한 점도 있었다. 동시에, 환경문제 극복을 위한 재생에너지 개발, 재활용 부분면에서 독일 정부와 독일에 사는 사람들이 해내는 멋진 실천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부러웠던 점을 이 지면을 통해 나누고 싶다. 그건 바로 모든 도로에 설치된 자전거전용 도로이다. 

    한달 간의 체류동안 네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보았다.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나찌에 저항해서 개신교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선언을 작성하고 발표한 바르멘이라는 도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항이 작성되고 발표된 비텐베르그, 이 두 도시는 작은 도시에 속한다. 통일독일의 수도이자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를린과 동독 시절, 비폭력 평화기도회를 통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도출했던 기독교교회들이 속한 라이프찌히는 큰 도시에 속한다.

    이 네 개의 도시 어느 곳을 가봐도 모든 도로에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안전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자전거만 건너는 신호등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자전거를 들고 전기차인 trams를 타고, 기차를 탄다. 기차역엔 자전거 승객을 위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기차안엔 자전거를 둘 수 있는 기차객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 모든 제반시설은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적극 독려하고 있다. 이 제반시설을 설치하고 그 설치를 위해 투여된 과학 기술과 재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삶의 방식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있는 독일 사람들의 성숙한 의식과 의지에 감동을 받았다.

    전기차와, 기차, 자전거가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기에 가솔린과 디젤로 인해 생성된 매연을 품어대는 차들이 일반 도시 거리에 별로 없다. 그런 차들은 아마도 고속도로나 아우토반을 가야 만나게 될 것이다. 고속도로에 즐비한 그런 차들이 일반 거리엔 많지 않기에 그 차들이 품어대는 엔진과 머플러 소음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이른바 교통체증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 체증으로 인해 짜증내는 운전자들의 빵빵거리는 경적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았다. 그렇게 깨끗한 공기와 자동차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된 거리에서 독일 사람들의 일상적 하루의 생활들을 보고 감상하는 그 시간이 참 소중했고 아름다웠다.

    자전거 전용도로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독일에서 내가 본 자전거 전용 도로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사는 카나다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스케일의 도로였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최소 자동차도로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자동차 1차선인 곳에도 자전거 전용도로는 마련되어 있었다. 전 세계 도시를 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장담하건대 대다수 도시에 제대로 된 자전거전용도로는 없다고 본다. 만약 있다하더라도 차가 다니는 도로차선에 비하면 아주 작게 할당된 일종의 깍두기, 구색만 갖추어둔 도로일 것이다. 약 1차선, 2차선 도로일 경우, 자전거전용도로를 기대하긴 어렵다. 꽤나 잘 만들어진 4차선 도로라 하더라도 한차선 정도만 할애된 자전거도로가 대부분이다. 4차선 이상되는 도로의 경우는 차들이 너무 빨리 달리고, 그렇게 속도를 내대는 차옆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마치 불나방이 불꽃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위험하다. 자전거를 앞질러 가는 차들이 뿜어대는 매연을 마시면서 자전거를 타는 일 역시 불쾌하고 건강에 해롭다. 그렇기 때문에 차를 안 쓰고, 자전거를 타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쉽게 할 수 없다. 그 의지를 현실화하려면 그 의지를 뒷받침해주는 특, 즉 공간적 제반시설과 제도적 의지가 필요하다.

    여기서 난 인간의 삶이, 아니 인간적인 삶, 특히 약자와 평범한 자들의 삶을 보호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길과, 인간이 만들어낸 공적 제반시설이 주는 중요성간 불가분관계를 보고자 한다.

    퀴어페미니스트이자 문화이론가인 쥬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는 정치적 행위, 즉, 시위, 공적 저항의 모임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모인 자들의 의지, 전술, 전략, 즉, 시위의 목적과 내용만이 아니라 그 모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간, 즉, 제반시설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이 중요성을 적나게하게 드러내고자 제반시설의 약화, 제반시설의 부재에 대한 예를 드는데,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모여 시위를 하는 이유를 제반시설의 부재로 치자. 아니 대부분 우리가 시위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제반시설이 부재하거나, 있더라도 계속 악화되고, 그 상태를 고치고자 하는 정부, 책임자들의 방기가 계속되어가는 점을 지적하고, 그의 개선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위를 하는 거다. 즉, 노숙자, 피난민들을 위한 일시적 대기소, 또는 빈곤층들이 사는 게토화된 주변부 도시들, 이들의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반시설들의 망가짐과 부재가 이런 예들에 속한다. 실제로 이는 책에 등장하는 예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매일의 현실이다. 깨끗한 식수용 청결용 물의 부재, 그런 물의 정화하는 상수도 제반시설의 약화, 또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거나, 마련된 화장실 정수관이 막혀서 실제로 쓸 수 없는 상태, 또 비와 눈,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숙소의 부재와, 숙소의 열악한 상황이다.[각주:1]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정치적 시위를 하는 데 있어 그 시위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는 단순히 시위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그 거리 자체의 실재가 제반시설이라는 그 공간의 담론이 주는 공공선 (public goods)이라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다시말해, 제반시설의 개선과 확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할 때, 그 시위를 가능케하는 그 공간을 지켜내는 일 자체가 정치적 행위이자 시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여기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 물적 조건의 중요성을 각인하는 것이 바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하는 근본적 이유와 직결된다는 그 불가분의 관계를 주장한다. 쉽게 말해, 시위를 할 수 있는 거리가 없다면, 아니 그 거리, 또는 광장이 시위를 하기 어려운 열악한 상태라면, 그 거리와 광장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일이 시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와 직결되는 것이고, 동시에, 구체적인 시위와 저항의 목적과도 연관된다는 것이다. [각주:2]

    물적 토대에 관심을 두는 이론은 막시즘, 그리고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포스트콜로리얼 탈식민주의에서 중요시하는 인식론이다. 즉, 선형적 시간 (linear time)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위계적 식민주의를 가능케한 인식론이었다면, 이를 반박하면서 대안적 인식론으로서 공간적 다수성 (spatial plurality)이 제안된다. 즉, 과거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다른 그룹들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가해자와 피해자, 이주민과 정착민)이 공존하며 살아가기위해 창조되어야 할 그 다름의 공간, (plural differences), 공간적 다수성이 확보되는 담론으로 강조된다.[각주:3] 

   이런 공간의 중요성을 논하는 담론은 동시에 신학적 화두이자 실천신학에서 특별히 관심하는 주제이다. 실천신학은 매일의 삶에 관심한다. 그 매일의 삶이 그냥 다람쥐 쳇바퀴돌아가듯이 관성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매일의 삶이 풍부해지도록 의미있도록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한다. 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각주:4]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각주:5]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 자전거 전용도로 제반시설에 대한 담론은 그런 점에서 실천신학의 주제이자 약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의의 문제이다.

    세계 어느 곳을 가서, 그 곳이 좋다고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그 한 기준은 바로 그 곳이 얼마나 공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가로 가늠된다. 즉, 가진 자, 특권층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평범한 곳, 더 나아가, 약자와 소수자가 안전하고 즐겁게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면, 그 곳이 살기 좋은 곳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즉, 공간이 말한다 (space speaks). 특히, 이런 공적 공간이 사유화, 신자유주의, 그리고 증폭된 경제적 불균등, 독재에 버금가는 전제주의체제의 증가로 피해, 아니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공간에 대한 담론이 신학의 주제로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 점에서 자전거 전용도로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

    한국처럼 석유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남북이 분단되어 그 나마 작은 땅덩이가 절반으로 잘린 채 북적거리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황사와 매연 등으로 최악의 공기를 자랑하는 한국 대도시에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일은 참 어리석다. 그런데도 한국만큼 자동차를 선호하는 나라도 없다. 왜 그럴까? 자동차 산업의 강국이어서?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역할관계로 인해 (우리가 만들었으니 소비해줘야지)? 부의 상징? 허례허식의 폐해? 불편함을 싫어해서?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내게, 복잡한 대도시에서 운전을 해 본 적이 없는 대개, 자동차를 소유하고 매일 교통대란을 겪는 대도시안에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 분들의 대답을 듣고 싶다. 

    한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지만 대도시에 설치된 공공지하철 제반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몰게 하기 위해 여전히 산을 뚫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개선하는데 드는 비용이 자동차를 쓰지 않도록 독려하는 제반시설의 투자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고 대중교통수단의 질을 높이는 논의를 공간에 대한 담론의 한 시도로, 정의의 문제로 실천신학적 주제토론으로 삼으면 어떨까? 


ⓒ 웹진 <제3시대>



  1. Judith Butler, Notes toward a Performance Theology of Assembl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본문으로]
  2. Judith Butler, “Rethinking Vulnerability and Resistance,” in Vulnerability in Resistance, edited by Judith Butler, Zeynep Gambetti, and Letical Sabs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6), 13. [본문으로]
  3. Bill Ashcroft, Gareth Griffiths, and Helen Tiffin, The Empire Writes Back: Theory and Practice in Post-colonial Literature (London: Routledge, 1989), 36—37. [본문으로]
  4. Dorothy C. Bass, ed. Practicing Our Faith: A Way of Life for a Searching People (San Francisco: Jossey-Bass, 1997), X. [본문으로]
  5. 위에서 언급한 Bass, Practicing Our Faith는 몸 존중, 환대, 안식일, 증거, 분별, 공동체 만들기, 용서, 치유, 잘 죽기, 그리고 삶을 노래하기를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반면, 다음 책에선 고통, 치유,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 축복을 신앙을 형성시키고 삶의 도를 알려주는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Bonnie J. Miller-McLemore, The Wiley-Blackwell Companion to Practical Theology (Chichester: Wiley-Blackwell, 2012), 23—8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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