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라 목사 ‘이단’ 시비를 통해서 본 ‘연대’와 ‘퀴어신학’의 가능성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이성애가부장제(heteropatriarchy)의 붕괴와 젠더 위계질서의 분열에 대한 두려움을 ‘동성애’에 대한 공격으로 분출해온 개신교 우파의 최근의 권력행사의 대표적 사례는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성’ 여부 조사일 것이 다. 예장합동의 이단대책위원회가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성조사를 표명했고, 7개 교단 이단대책위가 공조 하면서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 여부를 조사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급기야는 임 목사를 소환하겠다고 나섰다. 지금 한국 개신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성애 관련 ‘이단’ 시비는 ‘정통’과 ‘비정통’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이 성애가부장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신학적 입장, 목회, 목사를 ‘이단’으로 명명한 뒤에, ‘정통’과 ‘다르고’, 다르기 때문에 ‘비정상’이고, ‘비정상’이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에 ‘해’가 되기에 낙인을 찍겠다는 것이다. 비정 통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려 차별, 배제, 멸시, 폭력,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던 존재들은 21세기 한국사회에서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와 관련하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포럼을 개최했고, 나는 임보라 목사와 함께 포럼에 참여하였다. 동성애에 대한 ‘교리신학’적, ‘윤리신학’적 이해에 대한 짧은 고찰과 8개의 개신교 교단에서 자신들의 교단에 속하지 않은 임보라 목사를 왜 ‘마녀사냥’하듯 이단으로 몰아가는지에 대 해서 의견들이 오갔다. 한데 질의・응답시간에 나눈 의견들과 질문들 중 하나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고 있 다. 맨 마지막에 제기된 것인데, “이 날의 포럼이 퀴어들의 경험을 대상화하는 것은 아닌지”라는 것이다.[각주:1]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 이 짧은 질문은 ‘퀴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하냐를 묻는 퀴어정치학(queer politics)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한, 이 질문은 성소수자,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하며, 더 나아가 ‘누가 퀴어신학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퀴어’(queer)는 일반적으로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 자신의 성과 젠더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일 컫고, 이들과 연대하는 ‘엘라이들’(allies)도 포함하는 총괄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이렇듯 ‘퀴어’가 LGBTQIA(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stioning, Intersex, Asexual)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의미로 규정될 수 없고 그렇게 제한되기를 거부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영어에서 명사로도, 동사로도, 형용사 로도 쓰이는 ‘퀴어’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지워버린다는 의미, ‘뭔가를 위반하는 행위’, 또는 ‘이성애규범 성(heteronormativity)에 대한 대항’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각주:2]


    퀴어정치학은 성적인 ‘일탈자’와 ‘타자’로 규정되는 주체들을 소수자들로 낙인찍고 억압하는 여러 가지 규 제와 범주화에 의해 성적 주체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성정체성의 이분화를 비판하 고 이성애를 포함한 다양한 범주의 섹슈얼리티에 분포된 권력의 여러 지점들(힘의 불균형)을 예리하게 짚어낸다.[각주:3] 또한, 퀴어 이론가들은 동성애의 어떤 규범적 위치(position)를 옹호하는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에 대 해서, 그리고 ‘퀴어’를 ‘이상화’(idealization)하거나 ‘동일시’(assimilation)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4]


    이렇게 ‘퀴어’가 한 가지 의미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엘라이’로서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 자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엘라이로서의 연대는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성적 ‘일탈자’로 규정된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거나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연 대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근간인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 젠더 위계질서를 끊임없 이 비판하고, 성과 젠더의 사회적 작동과정에서 차별과 배제, 고통을 유발하고 재생산해내는 사회의 권력구 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비록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의 아픔과 고통의 깊이를 충분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들에게 고통을 부과하는,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이 연대의 유의미한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정체성의 ‘다름’을 차별로 전환시키는 권력구조의 작동 임이라는 사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자신의 성과 젠더 정체성을 퀴어로 규정짓 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을 통해서 성소수자나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가 가능하게 된다. 다름을 비정상으로, 비정상을 해악으로 규정하면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메커니 즘을 각인하고, 그 속에서 여러 차별과 배제가 어떻게 생겨나고, 여러 가지 고통과 아픔이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인식한다면 그런 권력구조의 종식을 위해서 연대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연대 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획일적’으로 이성애를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엘라이가 이성애자나 시스젠 더(cisgender. 태어나면서 지정받은 '신체적 성별[sex]'과 자신이 정체화 하고 있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일치한다고 여기는 사람) 로서 알게 모르게 특권을 누려왔음을, 그러한 (무)의식적 메커니즘에 기생하고 있어왔음을 자기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또한 성소수자와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는 이성애가부장제와 그것을 지탱하는 다른 권력 구조와 억압 체제들에도 대항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왜냐면 억압구조들은 서로 교차하고 그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형성되고 작동되는 과정에서 편견과 차별, 배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대의 끈과 망은 계속 넓혀져 갈 수 밖에 없다.


    ‘퀴어’의 다양한 의미와, 성소수자와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퀴어신학에 대한 이해도 확장하게 된다. 약 30여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퀴어종교학(퀴어 기독교신학 포함)도 변해왔다. ‘퀴어’라는 용어가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듯이 퀴어종교학/신학도 내부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퀴어’를 LGBTQIA를 총 괄하는 용어로 규정하면서 퀴어정체성과 퀴어경험에서 출발하는 퀴어신학이 있고, 퀴어를 단지 성과 젠더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신학도 있다. 다시 말해서, ‘게이로서 신학하기’라는 정체성과 경험에 근 거한 신학에 머무르지 않고, 기독교의 뿌리 깊은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를 비판하고, 또 기독교내에 이미 존재하는 ‘퀴어성’(queerness)을 재발견해내려 하는 퀴어신학의 흐름도 있다. 이는 퀴어신학이 LGBTQIA의 경험만을 신학화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다름’을 ‘차별’로 규정하고 성과 젠더에 대한 지배 규범을 생산해 내 는 사회의 권력구조를 비판하면서 기독교 역사와 전통, 기존의 성서해석과 신학을 퀴어적 시각에서 다시 읽 고 재해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렇게 ‘퀴어’가 한 가지 의미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엘라이’로서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 자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엘라이로서의 연대는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성적 ‘일탈자’로 규정된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거나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연 대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근간인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 젠더 위계질서를 끊임없 이 비판하고, 성과 젠더의 사회적 작동과정에서 차별과 배제, 고통을 유발하고 재생산해내는 사회의 권력구 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비록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의 아픔과 고통의 깊이를 충분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들에게 고통을 부과하는,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이 연대의 유의미한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광범위한 퀴어신학의 한 분야인 퀴어적 성서 해석도 성서에서 ‘동성애’에 관한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들을 재해석하거나 성서의 몇몇 등장인물들을 ‘게이’로, 또 그들의 관계를 ‘동성 간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시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식론적 관점으로서의 ‘퀴어’를 통해 성서의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 가부장제, 젠더의 위계 질서를 비판하고, 성서에 나타난 규범과 비규범의 이분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비판함과 동시에 재해석 하고, 성서에 내재된 퀴어성을 해석해 내기도 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내부적으로 다양한 퀴어 신학은 정상과 비정상의 극명한 대조를 해체하고, 규범과 비규범의 경계를 지우고, 차이와 경계들을 만들어 내는 권력구조를 비판하며, 그런 권력구조가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계속해서 질문 하면서 경계 허물기를 도모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신학적 시도는 소위 ‘정통’신학에 대한 비판까지도 포함한다.


    임보라 목사와 퀴어신학의 ‘이단성’을 판단하겠다는 세력에게 대항하는 방식으로서 그들의 ‘비정통성’이나 ‘이단성’을 되물으면서 또 다른 경계를 짓기보다는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 권력구조의 억압성과 죽음 의 정치학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폭로하면서 그들의 낙후되고 치졸한 ‘이단’ 시비에 대한 집단적인 대항의 목소리와 행동을 보여야 할 것이다.


    최근 교회의 경계 긋기와 벽쌓기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높고 폐쇄적으로 구축되어 가는 경계를 허무는 퀴어목회와 퀴어신학은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그렇기에 퀴어목 회와 퀴어신학을 실천하는 임보라 목사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내일로 미뤄질 수 없다.



ⓒ 웹진 <제3시대>



  1. 이 질문을 한 오세요 전도사님에게 감사드린다. [본문으로]
  2. Patrick S. Cheng, Radical Love: An Introduction to Queer Theology (Seabury, 2011), pp. 3~5을 보라. 또한 Susannah Cornwall, Controversies in Queer Theology (SCM, 2011)을 보라. [본문으로]
  3. Cathy J. Cohen, “PUNKS, BULLDAGGERS, AND WELFARE QUEENS: Radical Potential of Queer Politics?” GLQ vol. 3(1997), pp. 437~465을 보라. [본문으로]
  4. Lisa Duggan, The Twilight of Equality? Neoliberalism, Cultural Politics, and the Attack on Democracy (Boston: Beacon Press, 2003)을 보 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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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관하여[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어느 신학교 노교수의 자살


    1973년부터 2012년 까지 40년 동안 시카고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프로이트와 융을 가르치면서 정신분석학과 신학 사이 학제간 연구를 주도했던 로버트 무어 교수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내게 전해졌다. 시카고 신학대학원이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퀴어신학, 흑인신학, 포스트콜로니얼니즘 등 진보적인 색깔로 유명한 학교이지만, 원래 이 학교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목회상담 때문이다. 100년 전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는 최초로 임상목회실습(CPE)과정을 실시하면서 신학의 대중화 내지 현장화를 이끌어 낸 학교가 시카고 신학교였다. 미국 목회상담의 아버지라 평가받는 안톤 보이스(Anton T. Boisen)가 시카고 신학교에 근무하면서 이 운동을 이끌었고 지금도 학교 도서관의 한 방은 안톤 보이슨 Room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에 사망한 로버트 무어(Moore) 교수는 시카고 신학교의 심리신학을 담당하던 교수이고, 특별히 그는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분석심리학을 만든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전문가로 미국에서 손꼽히는 학자다. 무어 교수는 시카고에 있는 융 연구소를 이끌었고, 융의 집단 무의식과 신학자 폴 틸리히의 궁극적 실재를 연결하여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구성하려 했던 창의적 신학자였다. “네가 아직 알지 못하는. 네 안에 있는 그것을 발견해라! 그것이 궁극적 실재이고, 그것이 신과 만나는 통로이다!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라!”를 외치면서 많은 신학도들과 수많은 내담자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학자이자 상담가였던 로버트 무어 교수는 늘 매니아들을 거느리고 다녔던 스타강사이기도 했다.

   2012년 은퇴 후에도 학교는 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연구실도 그대로 남겨두었고, 교수 명단에서도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그만큼 시카고 신학교에서 로버트 무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2016년 6월 22일 시카고 경찰은 로버트 무어 교수가 부인과 함께 총에 맞은 채 발견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아직 사고의 원인은 조사중이다’라고 브리핑하였고, 다음 날 로버트 무어 교수가 부인을 권총으로 쏴서 먼저 죽이고 본인도 바로 스스로 자살했다고 공식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알콜, 약물중독, 마약에 의한 혐의는 밝혀진 바 없 다”라는 소견을 달았다.

   교수님이 왜 자살했을까? 한동안 내가 10년 동안 봐 왔던 무어 교수가 했던 말과 그의 모습 을 되살리면서 무어교수의 죽음을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려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자료들을 가지고는 온전히 그것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어떤 사건과 인물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 ‘무어 교수가 발견한 당신 안의 그것이 과연 무엇이엇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얼마나 그것이 매혹적이고 좋았으면 선생은 이생에서의 삶을 그리 서둘러 단축했을까.

    하지만, 이런 결정은 내가 아는 무어 교수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그렇게 폭력을 혐오하고, 폭력에 저항했던 선생이었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그리고 자신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며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나로서는 당혹스럽다.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일단, 지금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무어교수는 나에게 신학이 얼마나 매력적인 학문인지, 아니 신학이 얼마나 불안하고 균열이 가득한 학문인지를 일러준 스승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2016년 6월 30일 일기 中에서


   자살에 대한 해석


    사건 직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수소문을 해봤지만 사건에 대한 자세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시카고 지역 신문에서 사건에 대해 몇 차례 보도되어 약간 술렁이는 듯 하더니 그것으로 끝이다. 시카고 신학교 차원에서 유감의 표현과 추모예배를 드렸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 건이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소식은 들은바가 없다. 무어 교수 부부의 소장품들이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다는 소식, 무어 교수 집 앞에서 책이랑 생활용품을 펼쳐놓고 무슨 업체 같은 데서 나온 사람들이 garage sale 하는 것을 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마 도 두 노부부의 유품을 정리하고 처분해 줄 가족조차 없어 그런 일을 대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뒷처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며, 무어 교수 집 근처에 사는 옛 동료가 귀뜸해 주었다. 와이프가 심각한 건강 이상에 시달렸다는 소식, 무어 교수가 2012년 돌연 학교에 사의를 표하 고 사라졌는데 그 무렵부터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는 소문까지... 그 누구도 무어 교수에 대해 아무것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무어 교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아내를 먼저 총으로 쏴서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신학교수를 말이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가고, 중세 때는 자살을 시도한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었으며, 자살자의 교회 예식에 따른 장례식은 로마 카톨릭에서는 거부되고 있다. 왜냐하면 자살이 회개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자살에 대한 그 리스도교 차원에서의 공식적 반대의견은 중세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에 와서 정교하게 완성되었다. 아퀴나스가 자살을 반대한 이유는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인간의 자기 사랑과 자기 보전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의무이며, 둘째, 인간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 고, 셋째, 생명의 권한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교리적이고 율법적인 잣대로 자살자의 입장과 처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없이 자살을 반대하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너무나 무지하고 폭력적이다.

    이것보다는 좀 나아 보이는 그리스도교의 자살에 대한 이해가 있다. 그리스도교가 자살을 거부하는 이유는 복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 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것이 된 존재, 이것이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고 이것을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챤 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법칙과 강제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들이고,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온갖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이 말은 크리스챤은 세상의 명령과 육신의 명령에 따라 살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현실의 어려움과 절망과 환난 가운데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괴로운 질문으로부터 해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현실의 환난에 처한 크리스챤들에게 현실을 견디는 희망으로 작동할 수도 있 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복음의 능력으로 자살의 충동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정신의학에서 일탈적 행위를 보이는 개인이 치료를 통해 사회로 복귀하는 것과 같다. 사회, 즉 대타자는 완벽하다. 완벽한 대타자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순응하지 못하는 개인이 문제다. 정신병 걸린 사람이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신병원에서 하는 것이다. 이를 자살과 복음의 관계에 적용하면 이렇다. 복음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완벽하다. 자살은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과연 복음이 완벽한 균열이 없는 매끈한 진리인가. 어처구니 없게도 20세기 내내 전 세계적으로 복음전파의 모범으로 군림했던 대한민국이 압도적으로 자살율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자살공화국


    2014년 2월 2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서 엄마 박모(60) 씨와 장녀 김모(35) 씨, 차녀 김모(32) 씨가 번개탄을 이용 동반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현장에서는 현금 7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다음과 같은 메모가 발견되었다; “주인 아주머니께...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건은 생활고에 시달 리던 선량하고 정직한 서민이 시스템이 정해 놓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힘겹게 살다가 그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 법의 명령을 어길까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이 발생했던 2014년 그해 우리나라 자살율은 세계 최정상급이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통계청 2014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은 10만 명당 28.7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이는 하루에 40명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2003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 1위다. OECD 평균이 12명인데 한국은 두 배가 넘는 수치다. 헝가리(19.4명)와 일본(18.7명), 슬로베니아(18.6명), 벨기에(17.4명) 등이 자살율이 높은 나라들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하지만 한국의 자살률이 처음부터 고공행진을 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만 해도 자살률은 8.8명으로 당시의 일본(17.5명)과 독일(17.1명)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랬던 한국의 자살률은 1997년 IMF와 2008년 미국발 금융대란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며 급증했다. 자살률은 IMF이후 서서히 증가하여 2000년 13.6명, 그리고 2003년 22.6명으로 껑충 뛰었다. 2009 년 31.0명, 2010년 31.2명, 2011년 31.7명으로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2012년 28.1명으로 줄어든 이후 2013년 28.5명으로 다시 상승했다.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자살의 원인은 고령화와 경제난이라고 한다. 인구 고령화 시대로 치닫는 사회적 추이속에서 노인들의 삶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고, 노인들을 섬기고 대우해주었던 공동체는 파괴된 지 오래다. 전 세대 전 연령층에서 자신들에게 닥쳐온 현실적 삶의 무게 를 견디느라 모두가 아우성이고 그런 까닭에 우리 이웃을 돌아볼 물리적, 감정적 겨를이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나라 살림도 어려워 각종 복지정책은 뒤로 밀리고 있고 그에 따라 사회적인 안전망이 제거되는 상황속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위험사회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은 압도적 자살국의 지위로 등극하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살율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 시간당 시급을 만원으로 올리고, 기초생활 수급자 대상의 층과 범위를 확장하고, 임시직.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70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50만원 정도씩 보장하고, 치매와 암, 그리고 기타 불치병 희귀병의 치료와 후원에 국가가 전면적으로 개입하면 자살문제는 해결될까? 그렇다면 분명 자살율은 감소할 것이고, 그러한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우리의 권리를 부르짖으며 사회적 안전망을 다시 재건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물리적인 노력들을 실천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살에 대한 공부다. 우리는 그동안 진지하게 자살을 다루어 본 적이 없다. 자살은 감추고 숨기고 피해야 하는 마치 주홍글씨 같은 낙인과 같아서 자살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 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자살에 대한 객관적 안내를 제공하는 자료가 지금 소개할 뒤르겜의 『자살론』이다. 100년도 훨씬 전에 뒤르겜의 자살에 대한 통계를 바탕 으로 작성한 이 책은 희미하고 불명확했던 자살의 현상학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빛나는 성과라 할 수 있다.


   뒤르겜의 '자살론'


    자살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 성과물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에밀 뒤르겜의 ‘자살론’[각주:2]은 자살을 둘러싼 현상학 혹은 종교사회학에서 이룩했던 성과 중 단연 빛나는 저작으로 지금까지 손꼽힌다. 뒤르겜은 우리가 생각하는 여러 자살의 요인들, 예를 들어 정신질환, 유전적 요소, 인종적 특징, 계절과 자살의 관계, 알콜과 자살, 빈곤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후에 “자살은 사회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다”[각주:3]라고 말하였다. 뒤르겜의 발언은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이 근대성의 일면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렸고, 그것은 현대의 자살현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고. 중세 시대에도 물론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당대의 봉건적인 이데올로기와 종교가 내세우는 강압 속에서 수치스럽고 욕된 삶을 산다고 생각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어 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끼리의 관계가 촘촘히 얽히기 시작하면서 자살율은 가파르게 상승하였다. 봉건사회보다 근대사 회는 사회적인 끈끈함(social cohesion)이 느슨한 이기적(egoistic) 사회이다. 뒤르겜은 이기주의를 자살의 중요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지나친 이기주의는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을 촉 발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자살을 유도하는 원인이다.”[각주:4] 근대로 접어들면서 개인주의적인 삶이 고착화되면서 공동체를 바탕으로 했던 삶의 원리는 점차 사라져갔고,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정글속에서 홀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뒤처지고 도태되는 개인이 다시 사회로 편입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근대적 삶의 패턴과 자살율의 증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뒤르겜은 최종적으로 사회적 통합의 정도가 자살율의 감소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상하 였다: “자살은 종교 사회의 통합, 가족사회의 통합, 정치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한다.”[각주:5] 뒤르겜에 의하면 자살율 1위를 자랑하는 한국사회는 종교의 사회 통합 기능면에서 실패하였고, 가정의 붕괴와 정치의 상실 또한 이미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실제로 한국은 전체 가구 중에서 1인 가구의 비중이 30%에 접근해가고 있고, 서울시의 1인 가구비율은 30%를 훌쩍 넘었다. 개인의 삶을 지탱한다는 최소 단위인 가정이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또한 한국 국민의 성직자, 특별히 개신교 목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의 수준은 밑바닥이고,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도 성직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한국사회의 현실은 뒤르겜의 자살률 증가원인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측면에서 눈여겨 볼만 하다.

    뒤르겜의 『자살론』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종교별 자살율 추이다. 종교별 자살율은 개신교-카톨릭-유대교 순으로 개신교가 월등히 높다.[각주:6]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우선 개신교는 가톨릭과 유대교에 비해서 응집력이 느슨하다. 유대교와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훨씬 조직의 힘이 강하고 뚜렷하다. 예전과 교회법을 중시하는 면에서도 개신교를 월등히 압도한다. 유대교와 카톨릭에 비해 개신교는 훨씬 개인적이다. 개인의 결단이 구원의 필수요소이고, 신과의 접촉도 사제라는 매개없이 직통으로 가능하고, 경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평신도 각자가 말씀에 대한 이해를 갖고 신 앞으로 나간다. 신과 개인 사이 일대일 관계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격이 가장 강한 종교가 개신교라는 것이다. 개인의 탄생이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때, 개신교는 근대정신과 부합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성향의 개신교도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은 한국의 높은 자살률을 이해 하는데 있어 중요한 포인트이다. 한국 개신교도들의 자살률만을 따로 떼어 연구한 결과물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의 신앙패턴이 자살율과 상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나는 자살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뒤르겜의 『자살론』을 토대로 자살이라 는 현상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자살에 대해 유독 거부반응을 보이는 그리스도교의 자살 해석에 대한 반론이 도모될 것이다.


   신의 음성, 신의 위로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보고 있다”(이사야 49:16)


    이사야서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예언서이다. 이 책은 바벨론 포로기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이사야서는 66장까지 있는데, 흔히 1-39장을 제1이사야, 40-55장을 제2이사야, 56-66장을 제3이사야서라 부른다. 제 1이사야는 바벨론으로 잡혀가기 이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사야 예언자가 하나님을 대신해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고, 제 2이사야는 바벨론으로 잡혀가 절망과 슬픔과 비탄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제 3이사야는 새로운 희망을 선포하는 메시지다. 위에 적혀 있는 이사야 49장은 위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제 2이사야 중 한 대목 이다.

    고대시대 전쟁에 패한 국가의 백성들은 포로의 신세로 전락하였고, 포로들의 삶이 어떠했는 지는 미루어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남자들은 끌려가서 고된 일과 또 다른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패전국의 여인들은 승전국 남자들에게 의해 온갖 고초와 능욕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더러는 모진 노동에 시달리다 죽을 것이고, 더러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진 운명에 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자기의 존엄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람들 향해, 그렇게 주변에서 사라진 형제, 자매와 부모, 자식을 기억하고 있는 살아남은 자들을 향해 신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들의 이름을 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이다.

    극심한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 말이 무슨 소용이 있나, 라는 부정적 마음이 들다가도 한편으로는 이 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애도한다는 신의 위로가, 삶의 공포와 절망에 지쳐 생을 포기한 이들 하나 하나의 이름을 다 기억하겠다는 신의 다짐이, 욕된 세월을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이렇게 말하는 신이 자살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었으리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은 그 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 하나하나의 이름 을 당신의 손바닥에 꾹꾹 눌러 새기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신이라면 오히려 “너를 쓸쓸히 혼자 내버려 둬서, 너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자살을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사를 찾아와 상담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첫째는 목사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한국교회가 보여 온 번영지상주의, 축복 일변도의 신앙패턴도 영향이 있다. 축복받은 삶만이 신앙의 결실이자 열매라는 잘못된 신앙이 어느 때부터 주입된 관계로, 실패한 사람이나 삶이 주는 무게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은 믿음 이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받기에 교회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신은 정 말로 번영과 축복만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만을 칭찬하고 반기는 신인가?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나기 전에 모세가 신에게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33:18)라고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러한 모세의 요청 에 신은 이렇게 답하였다.“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33:23) 멀리 길을 떠나는 친구에게,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가정과 새로운 다짐을 굳게 하는 친구가 찾아와 복을 빌어달라고 요청한다면 여러분은 뭐라 말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될거야, 넌 할 수 있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의 뜰거야...”등의 온갖 긍정 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그렇게 일이 술술 잘 풀리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길을 떠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축복을 빌어주십시오”라는 요청에 하나님은 가장 정직한 답변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 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너희들이 원하고 생각하는 축복을 내게서 보이라면 난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무심하지만, 항상 없는 듯 너희 곁에 있다”고 말이다. 다석 유영모는 이런 하나님을 “없이 계시는 분”이라고 말하였고, 디트리 히 본회퍼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라는 아포리즘으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표현하였다.

    나는 신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인도 하시지만, 우리 앞에서 그 빛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빛은 우리 앞에서 비추는 빛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등 뒤에서 길을 비춘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강렬한 빛이 내 눈 앞에 있으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눈이 멀고 만다. 빛은 오직 등 뒤에서 비출 때 우리가 갈 길을 밝힐 수 있다. 그리고 그 빛이 우리 등 뒤에서 비추는 까닭에 그림자가 우리 앞에 있다. 그 그림자는 물론 우리 자신의 그림자이다. 신이 인도하는 삶, 빛으 로 밣히는 길 위에도 어둠과 그림자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인생의 그림자를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던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를 좀 더 나의 문제와 현실로 받아들 일 수 있지 않을까. 자살한 사람들의 결정에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라고 한 신의 자비만을 구할뿐이다.


   신정론(Theodicy)에서 인정론(Anthropodicy)으로


    정신과 의사들에 의하면,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살에 대한 죄악성 유무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다. 만일 자살의 원인이 온갖 숨겨진 폭력에 기인한다면, 자살의 동기가 경제적 위기, 혹은 외로움과 고독 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모두가 자살의 잠재적 가해자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은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 대목에서 자살에 대한 문제는 신정론에서 인정론으로 넘어온다.

    이유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해석은 모든 종교들이 최종적으로 고심하는 난문제이다. 고통에 대한 정의가 어려운 이유는 고통에 대한 이해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수 만큼 이나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고, 각 종교 전통마다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 다.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고통과 악에 대한 신학적 답변이다. 신정론은 의인에게 닥치는 고난과 악의 명백한 현존 속에서도 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한 다는 사실, 그런 신의 전능과 계획에 의해 악과 고난은 현실적 차원이 아닌 신의 섭리가 작동 하는 영역으로 고양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론이다. 현재의 고난은 미래에 도래할 축복의 징 표, 라는 신정론적 위안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알 수도 없고 설명도 불가능한 고난 속에서 흔들리는 믿음과 신앙을 지켜주었던 강력한 신학적 근거였다.

    레비나스는 그리스도교의 신정론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지난 20세기에 발생한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원폭 등으로 대표되는 대학살의 기록은 더 이상 고난의 유의미성을 내세우는 신정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정론이 내세우는 고난의 낙관성, 즉 신적 섭리로서의 고난, 고난의 유미성에 대한 해석이 고난 자체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길을 막는다고 하면서 신정론의 폐기를 선언하였다.[각주:7]

    자살의 문제는 원인과 이유도 모른 채 다가오는 우리시대 대표적인 고통의 현상학이다. 기존의 신정론은 자살의 유의미성과 자살 뒤에 숨겨진 신의 섭리에 대해 주목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너의 (개인)구원에 몰두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고통 의 당사자 혹은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일 뿐 아니라,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과 책임에 대 한 방임과 면책의 사유가 된다.

    이 대목에서 자살에 대한 신정론적 회피는 인정론적인 대응으로 전환된다. 인정론은 고통과 탄식 가운데서 발견해야 할 인간의 몫에 대한 문제이다. 신정론이 고통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신을 향한 인간의 질문에서 비롯된다면, 인정론은 고통에 직면했을 때 역으로 등장하는 인 간을 향한 신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신정론의 질문이 “왜 내게 이런 고난이 발생합니까?”라면, 인정론적 질문은 “거기 너 있었는가?”이다. 성서에 나오는 신의 인간을 향한 질문들, 예를 들어 에덴에서 범죄를 저지른 아담을 향한 신의 질문인 “네가 어디있느냐?” 복음증거를 핍박하는 사울을 향한 신의 음성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를 떠올려보면 신을 향한 우리 들의 질문 못지않게, 신 역시 우리를 향해 묻는다: “이 고난의 현장에서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결국 인정론은 고통의 시대, 죽음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질문하는 신의 물음이라 할 수 있겠다.

    자살에 대하여 내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자살을 향한 인정론적 개입이다. 신정론적 낙관 혹은 관조로 한국사회 자살 현상학을 바라보지 말자.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고, 그렇게 대응하다 우리 모두는 한국 사회 자살열풍의 부역자 내지 당사자가 될 수 있 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살에 대한 책임적인 물음과 자세를 가질 때만 이 죽음의 대열이 잠잠해 질 것이다. 우리시대 고통의 요체가 무엇인지, 자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살에 맞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것이 살아남은 우리들이 던져야 하는 질문이고 행동의 원 칙이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켜켜이 쌓인 고통의 결을 드러내고 그 진실의 힘으로 죽음을 생산하는 매커니즘을 해체하는 것, 그것이 인정론적인 개입 안에 담겨진 기대이고 요청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2017년 6월 25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각색했습니다. [본문으로]
  2. 에밀 뒤르겜 지음, 황보종우 옮김, 『자살론』 (파주: 청아출판사, 2008) [본문으로]
  3. Ibid., 129. [본문으로]
  4. Ibid., 251. [본문으로]
  5. Ibid., 249. [본문으로]
  6. Ibid., 173~185. [본문으로]
  7. Emmanuel Levinas, “Useless Suffering” in Entre Nous: On Thinking-0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srshav.(New York: Columbia Uiversity Press, 1998), 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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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1] 그들이 ‘이단’인 이유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인간 예수가 하느님이다”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부인할 수 없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그래서 더더욱 더 골치거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하느님인 인간 예수”가 있음으로 해서, 그리스도교는 같은 히브리 성서의 전통을 공유하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는 달리,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반드시 ‘삼위’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 예수 이전의 하느님, 하느님인 인간 예수, 인간 예수 이후의 하느님 이 3가지 현상을 반드시 함께 다뤄야 하니까. 한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3가지 현상을 관통하는 ‘한 가지’ 통일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하긴 오히려 그래서, 이 ‘3과 1이라는 두 숫자의 관계’에 대해서 담론이 풍성해지는 측면도 없지 않긴 하겠지만.

   게다가 이 ‘하느님인 인간 예수’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철저하게 구별된다는 사고가 기본에 깔려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위시한 소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의 특색인데, 갑자기 한 인간이 동시에 하느님이기도 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말이다. 실제로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그리스도교 교회 중에서도, 사실은 ‘하느님인 인간 예수’가 아니라 인간성을 흡수하여 단일한 신성을 만든 ‘하느님인 예수’였다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존재하니까.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 현재 ‘정통적인 견해’는 이런 것이다. 예수는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다”라는 것.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쨌든 모두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래야만 예수라는 존재를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담긴 견해라고 할 수 있겠고, 필자도 그러한 생각에 큰 이의는 없다.

   그러나, ‘참 하느님인 동시에 참 인간’이라고 말을 하게 되면, 다른 질문 거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도대체 ‘참 하느님’과 ‘참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2. 

   어느새 성소수자 인권운동 지지 기독교인의 대표격이 되어 버린 섬돌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에게 다른 교단에서 엉뚱하게도 무려 '이단 시비'를 걸었다. 그 이단 시비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과정에서 요런 소리가 나왔나 보다. 성소수자 이슈 관련 신학적 논의에서 예수를 성소수자라고 한대나. 그러니 이런 '이단 논의'를 소개하려는 목사가 '이단'이 아니면 뭐냐면서.

   글쎄. 먼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긴 한지부터가 확인이 되어야겠으나(뭐 필자도 예수와 요한복음의 '그가 사랑한 제자' 사이의 관계를 동성애적 상상으로 읽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앞에서 본 것처럼 “참 하나님이자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그런 인간인 예수인데, 그 인간 삶의 중요한 측면 중에 하나인 '성'이라는 측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다는 것이다(그래서 덕분에 '막달라 마리아'와 짝짓기하는 상상이 종종 나오기도 하지 않던가). 웃기는 것은 그렇게 비어 있는 와중에도 '남성'이란 건 꼭 붙들고 앉아, 예컨대 여성이 신부나 목사가 되면 절대 안 된다는 근거 중의 하나가 된다고 우긴다는 것이지만. 

  사실 '그가 사랑한 제자'니 막달라 마리아니 뭐니 그런 상상하지 말고, 그냥 기록에 남은 대로 성 관련 이야기는 아예 없었다, 즉 성 측면에선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라고 한다면, 농담 조금 심하게 섞으면 '고자'라 해도 할 말 없고, 조금 진지 모드를 섞어 보면, LGBT가 AIQ로 확장될 때 A(무성애자)라고 해 볼 만도 할 텐데, 그럼 예수를 성소수자라고 한다고 해서 굳이 틀린 말이 될 것도 없을 지도.

   물론 기록이 없는 것뿐인데 함부로 추측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방금까지의 이야기가 ‘함부로 추측’이라면, 예수가 음경을 갖고 있었다고 ‘이성애자 남성’이라고 단정하는 것 역시 ‘함부로 추측’이긴 마찬가지일 터.


   3.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는데, 그래서 ‘참 하나님’은 무엇이고 ‘참 인간’은 무엇인가, 그래서 예수가 어떤 존재라는 것인가를 물으려니, 당장 ‘참’까지도 안 가고 ‘인간’부터 이렇게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게 된다. 어쨌든, 예수가 ‘참’자를 달든 말았든 '신인 동시에 인간'이라면, 그건 1차적으로는 예수라는 존재, 더 나아가 그 예수라는 존재에 근거해서 신을 이야기해야 하는 그리스도교라는 지평을 깔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에 근거해야 한다는 뜻일 것은 분명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가 보면, 예수란 존재가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 예수라는 존재에 근거해서 ‘신’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을 같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신'이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 '인간'이란 것의 모든 구석구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다면 반대로 '인간'이란 것을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지금 이야기되지 않은 것'에서 나타날 지도 모르는 '신'에게 뒤통수 맞을 준비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당장 바로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한 종류인 성소수자 문제만을 고려해도, 상황이 꽤 달라지지 않던가.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건드린다면, 그런 '신'은 우리에게 어떤 따라야 할 '모범'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차라리 뒤통수 때리는 존재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나를 소환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그래서, 필자는 "예수를 본받자"라는 이야기가 그다지 맘에 내키지 않는 편이다. 그건 이미 '예수'를 어떤 '모범', 즉 이미 현재의 세상에서 '모범'이라고 수긍이 되는 존재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테니. 또한,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건드림으로써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신’이라면, 그 ‘신’을 이야기하는 근거가 되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는, 1세기 팔레스틴에 살았다는 기록을 남긴 존재로서의 ‘역사적 예수’와 동일하지만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이야기하면서 '신'이란 것을 찾아야 한다면, 예수를 통해서 '신'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그런 의미라면, 예수를 통해서 이야기되는 '신'이 성소수자라는 게 '이단'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에 이단이라고 거품을 물면서 ‘신’은 절대 성소수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바로 그들이 '이단'이지 않겠나.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통해 이야기되어야 하는 ‘신’을, 감히 ‘성소수자 인간’은 빼고 이야기하자고 덤비는 ‘신성모독’자들일 테니까 말이다.

   뭐, 길게 이 소리 저 소리 늘어 놓았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 한 마디면 될 일이다. 

   "아따, 성소수자도 되지 못하는 신을 어따가 쓸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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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대한 담론: 정의의 문제이자 실천신학의 주제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최근 독일에 한 달 정도 머문 적이 있다.

    유럽 연합 국가내에서 최고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국가로서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고 불편한 점도 있었다. 동시에, 환경문제 극복을 위한 재생에너지 개발, 재활용 부분면에서 독일 정부와 독일에 사는 사람들이 해내는 멋진 실천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부러웠던 점을 이 지면을 통해 나누고 싶다. 그건 바로 모든 도로에 설치된 자전거전용 도로이다. 

    한달 간의 체류동안 네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보았다.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나찌에 저항해서 개신교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선언을 작성하고 발표한 바르멘이라는 도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항이 작성되고 발표된 비텐베르그, 이 두 도시는 작은 도시에 속한다. 통일독일의 수도이자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를린과 동독 시절, 비폭력 평화기도회를 통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도출했던 기독교교회들이 속한 라이프찌히는 큰 도시에 속한다.

    이 네 개의 도시 어느 곳을 가봐도 모든 도로에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안전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자전거만 건너는 신호등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자전거를 들고 전기차인 trams를 타고, 기차를 탄다. 기차역엔 자전거 승객을 위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기차안엔 자전거를 둘 수 있는 기차객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 모든 제반시설은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적극 독려하고 있다. 이 제반시설을 설치하고 그 설치를 위해 투여된 과학 기술과 재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삶의 방식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있는 독일 사람들의 성숙한 의식과 의지에 감동을 받았다.

    전기차와, 기차, 자전거가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기에 가솔린과 디젤로 인해 생성된 매연을 품어대는 차들이 일반 도시 거리에 별로 없다. 그런 차들은 아마도 고속도로나 아우토반을 가야 만나게 될 것이다. 고속도로에 즐비한 그런 차들이 일반 거리엔 많지 않기에 그 차들이 품어대는 엔진과 머플러 소음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이른바 교통체증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 체증으로 인해 짜증내는 운전자들의 빵빵거리는 경적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았다. 그렇게 깨끗한 공기와 자동차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된 거리에서 독일 사람들의 일상적 하루의 생활들을 보고 감상하는 그 시간이 참 소중했고 아름다웠다.

    자전거 전용도로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독일에서 내가 본 자전거 전용 도로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사는 카나다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스케일의 도로였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최소 자동차도로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자동차 1차선인 곳에도 자전거 전용도로는 마련되어 있었다. 전 세계 도시를 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장담하건대 대다수 도시에 제대로 된 자전거전용도로는 없다고 본다. 만약 있다하더라도 차가 다니는 도로차선에 비하면 아주 작게 할당된 일종의 깍두기, 구색만 갖추어둔 도로일 것이다. 약 1차선, 2차선 도로일 경우, 자전거전용도로를 기대하긴 어렵다. 꽤나 잘 만들어진 4차선 도로라 하더라도 한차선 정도만 할애된 자전거도로가 대부분이다. 4차선 이상되는 도로의 경우는 차들이 너무 빨리 달리고, 그렇게 속도를 내대는 차옆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마치 불나방이 불꽃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위험하다. 자전거를 앞질러 가는 차들이 뿜어대는 매연을 마시면서 자전거를 타는 일 역시 불쾌하고 건강에 해롭다. 그렇기 때문에 차를 안 쓰고, 자전거를 타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쉽게 할 수 없다. 그 의지를 현실화하려면 그 의지를 뒷받침해주는 특, 즉 공간적 제반시설과 제도적 의지가 필요하다.

    여기서 난 인간의 삶이, 아니 인간적인 삶, 특히 약자와 평범한 자들의 삶을 보호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길과, 인간이 만들어낸 공적 제반시설이 주는 중요성간 불가분관계를 보고자 한다.

    퀴어페미니스트이자 문화이론가인 쥬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는 정치적 행위, 즉, 시위, 공적 저항의 모임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모인 자들의 의지, 전술, 전략, 즉, 시위의 목적과 내용만이 아니라 그 모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간, 즉, 제반시설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이 중요성을 적나게하게 드러내고자 제반시설의 약화, 제반시설의 부재에 대한 예를 드는데,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모여 시위를 하는 이유를 제반시설의 부재로 치자. 아니 대부분 우리가 시위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제반시설이 부재하거나, 있더라도 계속 악화되고, 그 상태를 고치고자 하는 정부, 책임자들의 방기가 계속되어가는 점을 지적하고, 그의 개선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위를 하는 거다. 즉, 노숙자, 피난민들을 위한 일시적 대기소, 또는 빈곤층들이 사는 게토화된 주변부 도시들, 이들의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반시설들의 망가짐과 부재가 이런 예들에 속한다. 실제로 이는 책에 등장하는 예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매일의 현실이다. 깨끗한 식수용 청결용 물의 부재, 그런 물의 정화하는 상수도 제반시설의 약화, 또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거나, 마련된 화장실 정수관이 막혀서 실제로 쓸 수 없는 상태, 또 비와 눈,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숙소의 부재와, 숙소의 열악한 상황이다.[각주:1]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정치적 시위를 하는 데 있어 그 시위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는 단순히 시위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그 거리 자체의 실재가 제반시설이라는 그 공간의 담론이 주는 공공선 (public goods)이라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다시말해, 제반시설의 개선과 확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할 때, 그 시위를 가능케하는 그 공간을 지켜내는 일 자체가 정치적 행위이자 시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여기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 물적 조건의 중요성을 각인하는 것이 바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하는 근본적 이유와 직결된다는 그 불가분의 관계를 주장한다. 쉽게 말해, 시위를 할 수 있는 거리가 없다면, 아니 그 거리, 또는 광장이 시위를 하기 어려운 열악한 상태라면, 그 거리와 광장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일이 시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와 직결되는 것이고, 동시에, 구체적인 시위와 저항의 목적과도 연관된다는 것이다. [각주:2]

    물적 토대에 관심을 두는 이론은 막시즘, 그리고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포스트콜로리얼 탈식민주의에서 중요시하는 인식론이다. 즉, 선형적 시간 (linear time)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위계적 식민주의를 가능케한 인식론이었다면, 이를 반박하면서 대안적 인식론으로서 공간적 다수성 (spatial plurality)이 제안된다. 즉, 과거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다른 그룹들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가해자와 피해자, 이주민과 정착민)이 공존하며 살아가기위해 창조되어야 할 그 다름의 공간, (plural differences), 공간적 다수성이 확보되는 담론으로 강조된다.[각주:3] 

   이런 공간의 중요성을 논하는 담론은 동시에 신학적 화두이자 실천신학에서 특별히 관심하는 주제이다. 실천신학은 매일의 삶에 관심한다. 그 매일의 삶이 그냥 다람쥐 쳇바퀴돌아가듯이 관성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매일의 삶이 풍부해지도록 의미있도록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한다. 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각주:4]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각주:5]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 자전거 전용도로 제반시설에 대한 담론은 그런 점에서 실천신학의 주제이자 약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의의 문제이다.

    세계 어느 곳을 가서, 그 곳이 좋다고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그 한 기준은 바로 그 곳이 얼마나 공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가로 가늠된다. 즉, 가진 자, 특권층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평범한 곳, 더 나아가, 약자와 소수자가 안전하고 즐겁게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면, 그 곳이 살기 좋은 곳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즉, 공간이 말한다 (space speaks). 특히, 이런 공적 공간이 사유화, 신자유주의, 그리고 증폭된 경제적 불균등, 독재에 버금가는 전제주의체제의 증가로 피해, 아니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공간에 대한 담론이 신학의 주제로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 점에서 자전거 전용도로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

    한국처럼 석유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남북이 분단되어 그 나마 작은 땅덩이가 절반으로 잘린 채 북적거리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황사와 매연 등으로 최악의 공기를 자랑하는 한국 대도시에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일은 참 어리석다. 그런데도 한국만큼 자동차를 선호하는 나라도 없다. 왜 그럴까? 자동차 산업의 강국이어서?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역할관계로 인해 (우리가 만들었으니 소비해줘야지)? 부의 상징? 허례허식의 폐해? 불편함을 싫어해서?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내게, 복잡한 대도시에서 운전을 해 본 적이 없는 대개, 자동차를 소유하고 매일 교통대란을 겪는 대도시안에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 분들의 대답을 듣고 싶다. 

    한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지만 대도시에 설치된 공공지하철 제반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몰게 하기 위해 여전히 산을 뚫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개선하는데 드는 비용이 자동차를 쓰지 않도록 독려하는 제반시설의 투자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고 대중교통수단의 질을 높이는 논의를 공간에 대한 담론의 한 시도로, 정의의 문제로 실천신학적 주제토론으로 삼으면 어떨까? 


ⓒ 웹진 <제3시대>



  1. Judith Butler, Notes toward a Performance Theology of Assembl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본문으로]
  2. Judith Butler, “Rethinking Vulnerability and Resistance,” in Vulnerability in Resistance, edited by Judith Butler, Zeynep Gambetti, and Letical Sabs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6), 13. [본문으로]
  3. Bill Ashcroft, Gareth Griffiths, and Helen Tiffin, The Empire Writes Back: Theory and Practice in Post-colonial Literature (London: Routledge, 1989), 36—37. [본문으로]
  4. Dorothy C. Bass, ed. Practicing Our Faith: A Way of Life for a Searching People (San Francisco: Jossey-Bass, 1997), X. [본문으로]
  5. 위에서 언급한 Bass, Practicing Our Faith는 몸 존중, 환대, 안식일, 증거, 분별, 공동체 만들기, 용서, 치유, 잘 죽기, 그리고 삶을 노래하기를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반면, 다음 책에선 고통, 치유,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 축복을 신앙을 형성시키고 삶의 도를 알려주는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Bonnie J. Miller-McLemore, The Wiley-Blackwell Companion to Practical Theology (Chichester: Wiley-Blackwell, 2012), 23—8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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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9]



조르지오 아감벤 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바울서신의 쟁점을 크게 두개로 나누어 본다면 하나는 구원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는 종말에 관한 것이 된다. 즉, 구원론과 종말론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바울서신을 메시아니즘을 중심으로 읽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있어서 바울의 종말론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바울 이전시대에 있었던 유대 종말론을 메시아니즘을 통해 바울이 어떻게 재해석하느냐가 그 방점이 된다. 유대의 종말론은 신의 심판과 다스림이 현재의 역사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측면에서 바울을 이해하는 것은 이천년전이라면 모르겠으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어려운 도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않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다. 전통적인 바울의 종말론은 이 둘 사이에서 매우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 그 대표적인 이해가 바로 ‘이미’와 ‘아직’이란 도식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실히 ‘이미’ 시작되었고 그 완성은 ‘아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있으며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지만 죽어서 가는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몇가지 질문을 해보자. 첫째로, 곧 온다던 예수는 틀린 건가? 둘째로, 예수가 곧 온다던 바울은 틀린건가? 세째로 그들이 틀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 먼저 첫째와 둘째가 맞다고 한다면 일단 신학적 서술에서 종말론을 빼버려야한다. 바로 종말론이 없어도 제대로 설 수 있는 신학을 구성해야한다. 실제적으로 요즘의 신학은 구원론 중심의 신학이다. 특히나 바울의 신학이 ‘이신칭의’가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수 있다. 또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삶의 추구에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내세를 바라거나 메시아의 재림을 기리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서서 자신의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학을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 최근의 성서신학은 몇가지 논쟁점을 남겨놓았다. 먼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종말론적 표현들이나 재림에 대한 표현들이 실제로 ‘역사적 예수’의 말인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이러한 심판과 재림의 메세지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 생각한다. 특별히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신이 분부한 삶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끈 혁명적 지도자로써 그려진다. 만약에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 기독교의 종말론이라면 바울은 그러한 종말론을 구성한 일세대 신학자에 속하게 된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만약에 예수가 말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소위 종말론이라는 것, 즉 그리스도 공동체의 종말론의 1세대 정도되는 종말론 또한 ‘이미’와 ‘아직’이라는 도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아감벤은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바울의 메시아니즘의 정수는 메시아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는 가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자체를 새롭게 이해하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보통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라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새롭고도 보편적인 인간을 상상한다. ‘새시대 새일꾼’이라는 표현이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등은 이전의 역사를 끝마치고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뭔가 새로운 인간을 꿈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감벤에게 중요한 것은, 또는 아감벤이 생각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시대를 어떻게 끝마칠 수 있느냐이다.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끝마치지도 않고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열수 있겠는가? 또는 이전의 시대를 맺음을 통해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 그 자체일 수는 없을까? 이를 맑스식으로 말하면 맑스가 꿈꾼것은 ‘새로운 계급’의 시대가 아니라 계급이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각주:1] 결국 핵심은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떤 사건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조건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 된다.[각주:2] 바로 메시아닉한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결국 주체가 새롭게 구축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아니라 주체가 그 현재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방법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확보되는 것, 즉 “오로지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구원을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일이 부활을 통해 일어났다고 바울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하나님 나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되지 않는다.[각주:4] 이 세계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세계의 개념들을 하나님 나라와 대치시키며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바울은 메시아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두개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하나가 법이고 두번째가 시간이다. 지난 웹진에서 필자가 아펠레스와 포로토제네스의 이야기를 다룰 때, 바울이 어떻게 법이 분리시킨 유대인과 비유대인, 로마인과 비로마인의 분리를 어떻게 새로운 분리를 더함으로, 즉 육과 영으로 분리시켜 법자체를 정지시키는지를 논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바울의 논의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으로 이전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것을 갈등의 극한으로 몰고감으로써 비판의 정점에서 반대로 완성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오랜 기간동안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율법관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바울은 율법을 반대하는가? 그런데 왜 완성시킨다고 말하는가?(롬 10:4) 아감벤에 따르면 오로지 율법을 그 극한의 갈등으로 스스로 몰아넣어서 마지막에 율법을 완전히 무장해재 시키는 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메시아닉한 관점에서는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각주:5]

    이후에 논하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알랜 바디우와 상극을 이루는 아감벤의 바울 읽기이다. 아감벤은 명확하게 바디우를 비판하는데, 아감벤은 ‘하나의 보편적인 생각이 어떻게 완전한 타자들의 기초위에서 동일성과 평등성을 나타낼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각주:6] 바디우에게는 바울이 어떤 새로운 보편성을 더함으로 새로운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었다면 아감벤에게 바울은 ‘유대인’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로 묶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법에 의해 생성된 아이덴티티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포착할 수 없음을 말한다. 결국 법자체를 inoperative(활동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아감벤은 새로운 주체가 아니라 법이 중지되어, 그 어떤 주체적 정의에도 포함되지 않는 ‘남은 자’(Remnant)들이 바울에게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 남은 자들은 “전체도 아니고 전체의 부분도 아니고, 부분이나 전체의 불가능성”을 나타낸다. 즉 모든 사람이나 민족들이 그 자신을 전체가 아니라 남은자로 놓는 것이다. [각주:7]예를 든다면 모든 사람들이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고 그 둘이 아닌 남은자가 될때 계급은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논의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상상력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데리다의 논의를 바울로 이끌고 들어와 바울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바울읽기는 그의 시간에 대한 개념에도 나타나있다.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은 다음 웹진에서 논해보자.


참고도서

Agamben, Giorgio.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 웹진 <제3시대>



  1.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31. [본문으로]
  2. Ibid., 41. [본문으로]
  3. Ibid., 42. [본문으로]
  4. Ibid., 43. [본문으로]
  5. Ibid., 48. [본문으로]
  6. Ibid., 52. [본문으로]
  7. Ibid., 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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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개혁하는” (Semper Reformanda): 2017년 세계개혁교회연합 총회를 앞두고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매 해가 의미있고, 매 해마다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난다. 매 해에 벌어지는 일들에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다. 의미부여, 의미 만들기, 의미해석하기, 이 작업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일이자 또한 신학자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2017년에 대한 신학적 단상을 하고자 한다.

    정치적으로 2017년은 의미있는 해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이자, 박근혜를 탄핵시킨 해이자,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이다.

    종교적으로 2017년 역시 의미있는 해이다. 2017년은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이에 맞추어 세계개혁교회연합 (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 전 세계개혁교회연맹, WCRC) 총회가 6월말 독일에서 열린다.

    이번 총회주제는 “Living God, Renew and Transform Us!” 이다. 주제가 명백하게 보여주듯이, 이번 총회는 개혁을 넘어 우리의 신앙과 삶,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본 연합 (WCRC)는 8천만명이 소속된 기독교인들을 대변하는 개혁교회 최대 에큐메니칼 조직이다. 이 조직을 하나로 묶는 신학적 끈은 첫째, “언제나 개혁하는” 개혁교회 신앙의 끈, 둘째, 코이노니아 정신을 모태로 분리가 아니라 연합을 향한 소망의 끈, 그리고, 정의추구가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고백의 끈이다. 이 세가지 끈은 다양한 신앙고백 (1982년 Belhar, 아파타이드 반대) 과 신학 선언 (2004년 Accra, 경제부정의과 제국 반대) 등을 통해 교회를 묶어왔고 엮어왔다.

    2017년 총회 준비 자료 (Prayerful Preparation)를 보면 “언제나 필요한 개혁”(Semper Reformanda) 개혁교회 모토를 신학적으로 조명한다.[각주:1]

    자료집 서문에서 WCRC 총무인 크리스 퍼거슨은 21세기 연합이 품고 가야할 전지구적 사회적 문제로 경제부정의, 즉,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빈부격차와 자본의 횡포가 날로 심각해지는 현실, 또 생태위기, 환경문제, 기상이변과 재해, 오염등으로 약자, 약한 나라, 인간이 아닌 생태계 생명들이 파괴되어가는 현실, 그리고 이주의 문제를 들었다. (다음 기고에 경제부정의, 생태문제, 그리고 이주의 문제를 연이어 다룰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세가지 이슈가 WCRC 를 엮고있는 세가지 끈, 신앙, 연합, 그리고 정의와 어떻게 긴밀하게 연관되는지 설명한다.

    WCRC 연합 의장인 제리 필레는 종교적으로, 성서문자근본주의에 입각한 차별의 문제를 들면서, 개혁교회 신학인 Sola Scriptura의미는 성서가 기득권자,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해 선별적 해석이 되는 것으로 부터 보호할 책임이 개혁교회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Sola Gratia로 연결되는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신학교리에 대한 해석을 한다. 

    성서문자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양한 차별과(성차별, 남성성직자주의, 성소수자, 인종차별) 다양한 폭력 (성폭력, 전쟁폭력, 환경파괴)을 극복하는 신학적 응답과 실천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는 은총의 실천이 신앙의 잣대가 되어야함을 주장한다. 세상의 이데올로기, 선입견, 편견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일만이 궁극적임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의 은혜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 삶, 그리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궁극적 힘이다. 아니, 예수님이 보여주신 은혜를 따르는 일이 선입견, 편견, 차별와 억압을 가능케하는 그 폭력을 끊어내는 저항과 변화의 힘이라는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 페니미스트 신약학자이자 이번 연합 총회 신학교육과정 Global Institute of Theology 책임담당자이자 학장인 무사 두베는 자료집을 통해 로마서 12장 말씀을 해석하면서 사도바울의 철저한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이 본 말씀에 담겨져 있다고 주장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12:1) 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변화되었기에, 부패한 제국이 우리를 억압하지만, 그 더러운 손길이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자유의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다음 구절 역시, 제국에 굴복하지 말고, 아니, 제국과 타협하지 말고 (confirm),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변화(transform)되라는 것이라고 본문에 대한 의미부여를 한다.

    본 자료집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또 한가지 문제는 바로 성차별의 문제이다. WCRC 소속 교회의 연합을 막고 있는 장벽으로 여성안수문제를 지적한다. 이를 위해 나도 자료집 저자로 발탁이 되어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하여, 본 총회를 통해 아직까지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주지 않는 WCRC 소속교단으로 하여금, 앞으로 7년 안에, 즉, 다음 총회까지 안수문제를신앙의 고백으로 실천할 것을 의결하는 안건이 올라와 있다. 동시에 성차별과 가부장제에 입각한 남성성직자주의의 문제는 성소수자에 대한 안수의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걸 지적한다. 그러므로, 21세기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WCRC는 성소수자, 성정체성, 그리고 성 다양성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성찰과 실천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본 총회가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열린다는 그 장소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해석한다. 독일 신학자 울프 크뢰트케 (Krötke)는 자료집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그 해, 동독국가 종말의 시작을 알렸던 그 해부터 벌어진 월요일 비폭력시위 (Monday Demonstrations), 평화를 향한 기도회 (prayer for peace)가 라이프찌히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한다. 라이프찌히는 냉전시기엔 동독에 속한 도시였다. 기독교인들에게 동독에 속해서 종교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회주의체제안에 속한 교회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타협과 절충, 심지어 굴복이었다. 그러나 신앙의 탄압과 교회에 대한 정부의 제제가 강해질수록 동독기독교인들의 저항과 인내의 힘은 줄지 않고 늘었다. 1980년대가 되면서 평화, 비폭력,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퍼져갔다. 그 와중 1989년 10월 9일 동독 국가 40주년 기념식에서 벌어진 시위는 120만명을 전대미문의 참여로 이어졌다. 같은해 벌어진 중국 천안문 사태를 주시하면서, 사회주의, 전제주의체제가 불러오는 폭력, 인권과 종교의 탄압에 대해 라이프찌히에 속한 교회들은 침묵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개혁하는” 개혁교회 정체성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정확히 1달 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500주년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의미는 과거에 대한 향수도 아니요, 기독교 문화 중심주의로 돌아가고자하는 절박함도 아니다. “언제나 개혁하는” 그 신앙, 파격적 (radical)이고 신앙적 (faithful)인 그 개혁교회 정체성을 되새기면서 현재 8천만 개혁교회가 교회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들과 교회가 소속한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예언자적으로 목회적으로 다루자는 의미이다. 


    2017년 세계개혁교회연합 총회가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역사적인 획을 긋는 총회가 되길 기도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켜주소서! 

    “Living God, Renew and Transform Us!”


ⓒ 웹진 <제3시대>



  1. Prayerful Preparation: Exploring the 2017 General Council Them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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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하나의 키워드 : 이단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Ⅰ.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초기 기독교 이단 연구에 대한 비판적 읽기


     이단이란 정통종파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교리나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흔히 붙여지는 종교적 용어로서 대체로 불온하고 미심쩍으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수반한다. 한 예로, 사전에도 "헬라어 원어 하이레시스의 기본 의미는 선택이나 의견으로서 단순히 분파, 파(벌) 등을 일컫는 경우(행22:22)와 교회 내에서의 편당(고전 11:19)을 뜻하는 경우, 그리고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벧후 2:1) 등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나온다. 하지만 사회학자 피터 버거에게 이단적 명령은 근대 사회의 전형적 특성에 속한다. "전근대적 인간에게는 이단은 가능성에 불과했고 대개 거리가 먼 가능성이지만,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전형적으로 이단이 하나의 필요성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근대성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이 상황에서 취사선택은 하나의 명령인 것이다."[각주:1] 따라서, 앞서 본 사전적 정의와 달리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 해석자로서 권위에 대한 도전을 감행한 개척자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이단에게 부여될 수 있다. 물론, 맥그라스라면 단호히 대처할 것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단이란 용어는 겉으로는 복음의 모양을 하고 있되 궁극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전복시키는 신앙 체계를 가리키는 말이다."[각주:2] 사실, 이단적 명령에 따른 하나의 신학적 프로그램으로 버거는 19세기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을 지지하고 있는데, 맥그라스에게 이것은 근대 유럽 초창기 자유지상주의의 열망과 궤적을 같이하는 인간주의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이단이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해방을 안겨준다는 신념은 1세기의 현실보다는 오늘날 서양의 문화 풍토와 훨씬 더 관련이 깊다."[각주:3]고 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확실히 이 같은 맥그라스의 비판은 어떤 면에선 꽤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알다시피, 해석자란 역사를 자기 시대와 관련해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에 대한 맥그라스의 견해 역시 비판적인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맥그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단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평가적 개념이다. 어떤 차원에서 보면 이단은 어떤 공동체의 사상에 대한 판단 내지는 평가가 낳은 결과인 만큼 구성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각주:4] 다시 말해, "이단은 역사적 분석으로 정당성이나 부당성을 증명할 수 없는 평가적 개념"[각주:5]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놓고 "이단에 관한 역사적 연구는 다른 이들이 이미 규정지은 것을 역사가가 묘사해야 하는 일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정통인지에 대한 판단은 역사가가 정당한 역사방법론을 활용하여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각주:6]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단을 정의하고 구성하는 그의 방식은 애초에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 작업은 아닌 셈이다. 그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특정한 신학적 관점이 미리 전제된 작업이고, 그에 따른 평가인 것이다. "사실은 잘못된 견해가 초창기부터 등장했기 때문에 후대가 이를 바로 잡아야 했다."[각주:7]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게다가, 초기 기독교는 어떤 종류든 획일성을 강요하는 권위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훗날에 정립된 신학 공식들은 명시적으로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사상과 예배 속에 이미 내재해 있던 사상과 주제를 점진적으로 펼쳐 보이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각주:8]는 고어의 말을 자연스럽게 인용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 주장이라기보다는 기독교 교리의 역사를 설명할 때 정통주의자들이 흔히 동원하는 씨앗의 비유와 유사한 주장이란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4세기에 정립될 정통주의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정통주의를 발현할 씨앗은 처음부터 품고 있었다고 보는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당시의 정통은 그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는 중이었다고 말이다. 정통은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진 상태가 아니라 씨앗처럼 상당 기간에 걸쳐 자라나는 중이었다. 장차 정통의 구조에 편입될 모든 기본 주제들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각주:9]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그에게 다윈은 기독교의 역사를 살피는 데에 적격인 인물로 등장한다. "교리의 발전이란 사상은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됨과 동시에 새로운 지적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생물학 세계에서 진화를 얘기할 수 있다면 사상의 세계에서도 그와 똑같은 과정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각주:10]

     그러므로, 기독교의 이단에 대한 맥그라스의 평가는 역사이기보다는 특정한 신학적 이해를 전제한 하나의 해석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발터 바우어라면 이러한 신학적 전제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고 비판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2세기 말까지 대다수의 장소에 있었던 주류 기독교는 정통파가 아니라 이단들이었다."[각주:11] 앞서 언급된 맥그라스의 씨앗 비유를 참조하면 "정통은 최초의 원래 견해와 다수의 보편적 견해를 모두 함의하고 있으며 이단은 그러한 정통적 믿음을 고의로 저버리는 타락을 뜻한다."[각주:12]는 에오세비오스의 설명을 맥그라스가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 얼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각주:13]


바우어의 입장은 단순한 주장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에우세비오스의 기록과는 달리 최초기와 혹은 승리자측이 지배하기 이전에는 대부분 지역에서 이단적 형태의 기독교, 즉 승리자측이 나중에 공격한 기독교의 제형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후기의 정통 기독교인들은 승리를 거둔뒤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발생한 내분의 역사에 대한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어만의 이런 주장을 다소 과장된 레토릭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바우어를 비판하고 있는 맥그라스조차도 바우어의 핵심적인 테제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바우어가 확실히 옳은 점이 한 가지 있다. 초기 기독교가 당시의 대표적인 일부 인물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인상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양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더 이상 논란거리나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각주: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그라스는 바우어의 주장을 수용한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받아친다. 한 예로, 영지주의를 페민적인 평등주의 운동으로 보는 페이절스의 주장에 대해 영지주의 저술은 반여성적 진술로 가득하다는 매크라이트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전혀 근거가 없다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단이 정통에 대해 자신의 합법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는 바우어의 주장이 붕괴되진 않는다. 애석하게도, 이 지점에서 맥그라스는 논점을 교묘하게 흩뜨리고, 정통은 비록 원형적 혹은 씨앗의 형태지만 애초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 이단들에 대한 맥그라스의 작업을 단적으로 평한다면 발터 바우어를 비롯해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최근의 학문적 작업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각고의 노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가 당면한 진정한 도전은 정통이야말로 강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정서적으로 매력있고, 심미적 감각을 증진하며,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주는 것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각주:15]는 그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각고의 노력이 “이단은 후기 고전 시대의 다원적이고 경쟁적인 세계 안에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결함이 있고 무기력하고 진정성이 없는 기독교의 한 부류였다. 반면에 정통은 그 장래를 안전하게 지키는 수단으로 진정성에 대한 추구를 촉진하는 등 이단보다 더 강한 생존력을 갖고 있었다.”[각주:16]는 논리비약인 동시에 일종의 결과론적인 주장으로까지 치닫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안쓰러워 보인다. 어떻게 역사가 맥그라스가 말한 바처럼 씨앗으로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평가하고 마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 개념의 역사란 반드시 그의 점진적인 세련화의, 계속 증가하는 그의 합리성의, 그의 추상화의 변화율의 역사가 아니라 그의 구성과 유효성의 다양한 장의, 그의 사용에 있어서 계기적인 규칙들의, 그의 정교화가 추구되고 성취되는 복수적인 이론적 환경의 역사일 수 있다.”[각주:17]는 푸코의 지적은 애초에 상상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때문에, “마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전통을 재구성하는 것에, 진화론적인 곡선을 따라가는 것에, 목적론을 기획하는 데에, 그리고 끊임없이 생명이라는 은유에 호소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차이를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간극과 분산을 기술하는 것에 대한, 동일한 것의 확고한 형태를 해체시키는 것에 대한 어떤 거부감을 느낀 듯이”[각주:18]라는 푸코의 지적을 맥그라스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에 대한 푸코의 논점이 중세에만 해당된다고 맥그라스가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권력이라는 개념을 순전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맥그라스의 푸코에 대한 오독이다. 푸코에게 권력이란 단순히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행사되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비교해볼 때 기독교는 믿음체계라는 맥그라스의 주장 자체가 푸코에겐 이미 하나의 권력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4세기 황제의 정치적 수단에 의한 이단 규정이 2세기와 같은 초기에는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지식의 형태라는 점에서 보면 권력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푸코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단일한 기원이라는 신화를 해체하고 복수적인 기원을 상상함으로써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을 맥그라스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볼 여지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발터 바우어의 논의를 숙고함으로써, 다시 말해 때론 수용하고 때론 거부하고 때론 혁신하면서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과 관련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그런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예로 맥그라스가 이단으로 낙인찍은 에비온파를 들 수 있다. 하나의 이단적 명령으로서 “타종교와 심각한 대결을 한다면, 적어도 가설적으로 다른 종교 역시 진리라는 명제에 대하여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달리 표현한다면 종교간의 대결에 돌입하려면 자기 자신의 현실관까지도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각주:19]는 버거의 주장을 참조하고서 버메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경청한다면[각주:20] 다소 비극적이지만 그럼에도 초기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정통이 이단이라고 낙인찍은 에비온파는 유대교와의 대화에도 생산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화 등과 같은 기독교의 부착물 없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던 토라를 준수하던 유대인들로 구성된 1세기의 수확인 유대-기독교의 쇠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유대인 진영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이방인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가장 가까이 남아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여겼고 기독교인들을 그들을 이단으로 여겼다. 제롬이 어거스틴에게 보낸 글을 보면 그들은 유대인이면서도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기 원했지만 그들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져갔고 생존하던 몇몇 사람들은 다시 유대인 진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예수가 전하고 실천했던 종교의 흔적은 마침내 사라져 버리고 비유대인 세계에서 헬라화된 기독교가 승전가를 부르며 승전을 거듭할 수 있게 되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생소한 교리적, 교회적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가난한 자를 위해 부를 포기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나 우리의 시대에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람바레네에 있는 병든 자를 위해 초기한 알버트 슈바이처, 그리고 노구를 이끌고 캘커타의 더러운 거리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돌보는 테레사 수녀를 통해 본을 볼 수 있는 동기의 순수성에 대한 강조, 자비의 마음과 같은 예수의 경건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아직도 소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에비온파와 관련한 맥그라스의 이야기 역시 상당히 흥미롭게 들린다. “최근에 유대적인 기독교가 부활함에 따라 예수의 중요성을 유대인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일에 새로운 관심이 생겼다.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헬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이유로 그 이름을 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방식들이 그리스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진정한 유대적인 방식으로 다시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를 선지자로 보는 것이 그런 예이다. 이로 말미암아 유대의 기독교 진영에서는 에비온주의 그리스도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각주:21]


ⓒ 웹진 <제3시대>



  1. 피터 버거, 『이단의 시대』, 서광선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81, p.36 [본문으로]
  2.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홍병룡 옮김, 포이에마, 2011, p.291 [본문으로]
  3.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20 [본문으로]
  4.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59 [본문으로]
  5.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03 [본문으로]
  6.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03 [본문으로]
  7. 알리스터 맥그라스, 앞의 책, p.48 [본문으로]
  8.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45 [본문으로]
  9.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25 [본문으로]
  10.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12 [본문으로]
  11. 정용택,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자리, 2012, p.45 [본문으로]
  12. 정용택, 같은 책, p.43 [본문으로]
  13. 바트 어만,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이제, 2008, p.365 [본문으로]
  14. 알리스터 맥그라스, 앞의 책, p.123 [본문으로]
  15.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343 [본문으로]
  16.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34 [본문으로]
  17.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1998, p.21 [본문으로]
  18. 미셸 푸코, 같은 책, p.33 [본문으로]
  19. 피터 버거, 앞의 책, p.169 [본문으로]
  20. 게자 버미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 노진준 옮김, 은성, 1995, p.262 [본문으로]
  21. 알리스터 맥그라스, 앞의 책, p.17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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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진보 신학의 버팀목, 

시카고 신학대학원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프롤로그 : 시카고를 아시나요?


   시카고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시카고 대화재(1871년)와 1920년대와 30년대 시카고를 장악했던 미국 갱의 전설 알카포네, 1990년대 NBA를 장악했던 농구천재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건축과 재즈의 도시, 바람과 호수의 도시, 그리고 얼마 전 퇴임한 바락 오바마 대통령 까지, 이상은 빅테이터를 돌리면 나오는 시카고 관련 내용들입니다.

    시카고는 미 중부 일리노이주에 있고, 미시건 호수 남서쪽에 자리잡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정치적으로 시카고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민주당 초강세 지역으로 분류됩니다. 이런 까닭에 마약, 낙태, 총기규제, 반전, 흑인, 동성애와 이민자 정책 등에 있어 시카고는 미국내에서 진보담론의 진원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시카고의 특징들 가운데 빠진 것이 있다면, 시카고는 대학의 도시, 신학의 도시라는 점입니다. 명문 시카고대학, 노스웨스턴대학, 예수회 계통의 로욜라대학, 미국 내 최대 카톨릭 대학 중 하나인 드폴(De Paul)대학, 일리노이주립대학 등이 시카고에 위치하고 있고, 특별히 신학교육에 있어서 시카고는 바티칸 다음으로 가장 크고 내실있는 신학 네트워크가 조성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미 최대의 신학 도시, 시카고


   시카고의 가장 큰 신학적 특색을 꼽으라면 초교파적으로 구성된 12개의 신학교가 연합체(ACTS: The Association Of Chicago Theological Schools)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각주:2] ACTS에 속한 학생들은 어느 학교 수업이든 수강할 수 있습니다. 각기 다양한 신앙전통 속에 존재하는 신학, 예전, 역사들을 배우며 오늘의 신학을 재구성할 수 있는 풍부한 논의를 경험할 수 있는 있다는 말입니다. ACTS에 소속된 전임 교수는 260여명, 학생은 3천여명, 1년에 개설되는 강의는 총 700여 강좌에 육박합니다. 비슷한 형태의 샌프란시스코의 GTU나, 캐나다 토론토와 비교했을 때 비록 공동학위 시스템은 아니지만, 규모와 스케일 면에서는 가히 전미 최대 신학 도시라 할만 합니다.

    매학기 마다 수강신청을 하기 전에 무엇을 들을까 하고 ACTS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350개가 넘는 과목의 실라버스가 뗘 있습니다. 그것만 확인하는데도 일주일 넘게 걸립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 기독교윤리가 전공이었는데, 학기 시작 한 달전 ACTS에 소속된 윤리학 전공 30여명의 교수가 개설하는 50여 기독교 윤리 과목에 대한 research로부터 학기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달 동안 실라버스 확인하여 강의 내용과 일정, Text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됩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내가 듣고 싶은 과목 3-4개를 선택하여 수강을 합니다.

    또한 ACTS에 속한 학생들은 수강 신청 전에 사전 협의만 하면 시카고대학, 노스웨스턴 대학, 로욜라(Loyola) 대학, 드폴(DePaul) 대학의 철학과 종교학 수업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책임윤리의 계승자로 알려진 시카고 대학의 슈바이커 교수의 강의를 오전에 듣고, 점심 먹고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건너가 철학과에서 데리다의 정치신학을 강의하는 도이처 교수의 강좌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로욜라 대학에 있는 미국 내 레비나스 번역가로 알려진 페이퍼 젝 교수가 개설하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 수업도 수강 가능합니다.

    종합하면, 시카고가 지닌 신학교육의 특징은 Interdisciplinary Studies (학제간 연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시카고가 지닌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의 상황속에서 시카고의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질문에 대해 철저한 제 학문간 연대와 제휴를 통해 신학적으로 다양한 색깔과 무닉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ACTS가 위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시카고 지역의 신학적 토양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미국 진보신학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 이하 CTS)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시카고 신학교가 위치한 시카고 남부 Hyde Park[각주:3]


   시카고 신학대학원 길라잡이


   저는 2004년 시카고로 도미하여 2014년 학위를 마치고 10년만에 귀국했습니다. 멕코믹 신학교에서 석사과정(MATS)을 마치고(2007), 바로 CTS로 진학하여 7년 동안 윤리학으로 Ph.D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지금부터 시카고 유학시절 CTS에서 공부하면서 배우고 느낌 점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CTS는 미국연합그리스도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교단 소속의 신학교로서 1855년에 세워졌습니다. UCC 교단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교단으로 이민, 흑인, 반전, 동성애, 여성문제에 대한 선교정책에 있어 전향적인 자세와 실천을 이루어내고 있는 교단입니다. 우리 기장과는 1986년부터 파트너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 지역 회중교회들을 모체로 세워진 시카고신학교는 미국연합그리스도교단 출신 학생뿐만 아니라 개신교 각 교단과 천주교, 동방정교회, 나아가 유대교, 이슬람 계통의 학생까지 모여 공부하는 초교파, 범교단적 신학교입니다. 이름이 비슷해 혼동하기 쉬운 시카고대학 Divinity school과 CTS는 초기에 교수진과 학생 교류, 학교 행정을 같이 하는 관계였다가 1960년 이후에는 단순한 협력관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수업과 도서관은 여전히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CTS는 역사적으로 교수와 학생 모두 시민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신학생들과 교수들은 사회적 문제와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이런 저런 형태로 현실의 문제에 개입합니다. 이라크 전쟁 반대시위,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Ocuupy Wall Street(월가를 점령하라!)’ 운동 가담, 그 밖에 동성애와 여성, 이민자 문제 등에서 CTS 구성원들은 대외적으로 활발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 때문일까요, CTS는 미국 인권운동의 대명사 마틴 루터 킹 명예학위를 주는 최고의 고등기관이기도 합니다. 이 상은 198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기독교의 반 인종차별 운동에 앞장섰던 투투주교에 수여되기도 했습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맨토로 유명한 트리니티 유나이티드 교회(UCC) 전 담임목사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가 CTS 출신입니다. 그는 미국의 패권적 외교정책에 대해 “Got damn America! (빌어먹을 미국)” 이라 비난하면서 문제적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1980년대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도 참여한 제시 잭슨 목사도 CTS 출신입니다. 이들은 CTS에서 행사(졸업식, 각종 기념식)가 있을 때 가끔씩 등장해 연설을 하면서 좌중을 쥐락펴락 하면서 행사장의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계절 학기 강사로 강단에 서기도 합니다.

       종합하면 CTS는 대사회적 메시지와 참여에 충실한 한신 신학의 학풍과도 매우 유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제가 Ph.D 과정 지원 할 때 SOP(학업계획서) 쓰면서 CTS 지원이유에서 ‘나는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인 한신 출신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적었더니 교수님들이 흡족해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제로 CTS는 미국 신학계에서 한국 신학계에서 한신이 점하는 위치와 같은 진보적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신이 요즘 안팎으로 변했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여전히 그 색깔을 변치 않고 시대에 맞게 진화하며 꾸준히 진보적 신학담론을 창출하는 CTS에서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시카고 신학대학원의 학풍


   CTS는 앞서 이미 언급 했듯이 미국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로 각종 사회적 이슈들에서 Radical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CTS는 전통적으로 아웃사이더 신학이 강합니다. 전에는 해방신학, 여성신학, 정치신학의 입장이 강했고, 근래는 Queer Theology (Ken Stone), Postmodern Theology (Jennings, Schneider), Black & Womanist Theology (Butler, Terrell)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학자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CTS는 목회상담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 안톤 보이슨(Anton T. Boisen)에 의해 전미에서 최초로 신학교에서 CPE를 시행했던 학교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CTS를 임상 목회상담의 산실로 우뚝 자리잡게 하였습니다. 특별히 CTS를 오랫동안 대표했던 모어(Moore) 교수는 목회상담과 융과 틸리히를 연결하여 나름 그 분야 학제간 대화의 독보적 인물로 평가됩니다.

    특별히 저같이 데리다, 푸코, 라깡, 들뢰즈, 레비나스, 지젝등 현재 활발히 논의되는 유럽의 탈근대적, 좌파적 철학자들의 사상을 신학적으로 어뗳게 해석하여 운동(윤리)의 차원으로, 해방의 차원으로 승화시킬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CTS는 미국내 최상의 학교입니다. Theology, Ethics & Human Science 분야의 전교수가 이 문제를 갖고 연구하는 분들이시고 권위자입니다. 올해 은퇴한 테드 제닝스(Ted Jennings) 교수는 요즘 가장 핫한 바울에 대한 정치신학 비평으로 유명한 학자이고, 서구 정신사를 인문 신학적으로 꿰고 있는 국보급 진보신학자입니다. 레비나스와 지젝을 통해 서구 전통신학에 반기를 들었던 서보명 교수는 근래에는 유영모,함석헌 사상을 바탕으로 서구신학에 대한 대안을 모색합니다. 지금은 벤더빌트로 옮긴 슈나이더(Schneider) 교수도 CTS에서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본회퍼와 탈근대 사상을 연결하는 학자이자, 차세대 페미니즘을 대표할 신학자로 벌써부터 메이나 층이 형성된 신학자입니다

    CTS의 성서학은 전통적인 역사비평의 틀을 넘어서서 해석학적인 성서비평으로 유명합니다. 포스트콜로니얼의 시각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양승애 교수는 리타 나카시마 브럭(Rita Nakashima Brock)과 곽퓨란(Kwok Pui Lan)등과 어깨를 견주는 대표적 아시아 여성신학자입니다. 구약학자 켄스톤 (Ken Stone)의 이름은 앞으로 반드시 숙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미국내 Queer 관점으로 구약성서를 재해석하는 독보적 학자입니다. 이렇듯 CTS에 포진하고 있는 엣지있는 교수들과 학교자체의 진보적 색채 때문에 전미에 분포하는 개혁적 성향의 신학도들에게 CTS는 여전히 매력적인 신학교입니다.


* CTS 새 캠퍼스[각주:4]


   변화하는 시카고 신학대학원


   2010년을 넘어가면서 CTS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신학교들도 그러하듯이 미국의 신학교들 역시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미국 내 진보성향의 신학교들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CTS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2012년에 큰 결단을 내려 원래 Hyde Park 55가에 위치했던 덩어리가 컸던 캠퍼스를 정리하고, 한 블록 위에다 새롭게 아담한 캠퍼스를 조성하였습니다.

    옛 건물을 처분하고 캠퍼스를 줄여 옮겨 가는 과정에서 이익이 발생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학사업과 그 밖의 교육프로그램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신학교협의회(ATS: The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로 부터 인가를 받아 Mainline Protestant Seminary 중 최초로 online으로 M.Div. 학위를 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의 정신과 커리큘럼에 동의하고 흥미를 느끼면서도 거리상 입학할 수 없었던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신학도들이 CTS M. Div 온라인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Eco-Community(생태 공동체) 프로그램과 Interreligious Institute(종교간 센터)를 새롭게 만들어 운영하면서 좋은 평을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 기획된 프로그램들은 CTS에 기존에 있었던 LGBTQ Center (Queer theology), Christian-Muslim Studies, Christian-Judaism Studies, Center for Study of Black theology, Center for Study of Korean Christianity 등의 기관과 유기적으로 협조를 합니다. 이러한 커리큘럼 재정비를 통해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 타자를 환대하는 목회자, 타자와 더불어 함께 연대하는 목회자 양성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관계자 말에 의하면 M.Div 온라인 과정 신설과 여러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전에 비해 30% 가까이 학생수가 증가했다고 합니다.[각주:5]

    몇몇 CTS의 상징적 교수들이 은퇴를 하거나 학교를 옮겨 교수보강이 시급했는데 좋은 교수들이 임용되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슈나이더 교수 후임으로 2015년 Christoph Ringer 교수가 Public Theology and Ethics 교수로 부임하였고, 불행하게 세상을 등진 모어 교수 후임으로는 작년 2016년에 Zachary Moon 교수가 새로 영입되었습니다. Stephanie Buckhanon Crowder는 womanist(흑인여성신학) 관점에서 성서와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독특한 학자인데, 새롭게 CTS의 교수진으로 수혈된 젊은 학자입니다. 특별한 소식을 하나 더 하자면, Bexley-Seabury 성공회 신학대학이 CTS 건물로 이주해 시설과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한 캠퍼스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신학교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에필로그


    CTS에서 유학생 하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던 것은 민중신학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입니다. 그것은 민중신학의 빛바랜 과거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화석화된 민중신학에 대한 주례사 비평은 더더욱 아닙니다. 단지 미국 와서 신학을 공부한다고해서, 몇 가지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신학이슈들에 발빠르게 대처한다고 해서 호박이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죠. 진보란 열려있음을 전제로 변혁을 꿈꾸는 정신성이고, 부단히 삶의 자리에서 실행되어야 하는 구체성입니다. 또한 진보란 부단히 흘러가면서 새로움을 상상하는 정신이자 그것을 감행하는 실재입니다. 이러한 진보적 유전자가 민중신학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CTS에서 공부하는 동안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CTS에서 배우고 살면서 느꼈던 것은 민중신학이 표방하는 성서 해석학, 예수에 대한 이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세계적인 신학이었고, 첨단의 신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해왔던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변했으니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더 악랄하고 집요해졌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민중신학의 자리를 점검하면서 새로운 진보신학의 언어를 발굴하고 적용하며 실천하는 일에 우리의 의지와 상상을 모을 때 입니다.


* CTS 새 캠퍼스 로비에 있는 문익환 목사님 이미지[각주:6]



ⓒ 웹진 <제3시대>



  1. 『세계와 선교』(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실리게 될 ‘세계 신학교 탐방’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ACTS (http://www.actschicago.org/) 소속 12개 신학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UCC,기장과 자매교단), McComick Theological Seminary (미국 장로교, 기장과 자매교단), Meadvill·Lombard Theological Seminary (유니테리안), Luthern School of Theological at Chicago* (루터교), Bexley-Seabury Seminary Federation(성공회), Loyola Institute for Pastoral Studies (예수회), Garreett-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감리교), Nor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침례교), North-Park Theological Seminary (언약교단),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복음적 자유교회 소속), Catholic Theological Seminary (천주교), Mundelein Seminary (천주교) (*가 있는 학교는 Ph.D 학위가 있는 학교임), 이 밖에도 1800년대 중후반 시카고를 중심으로 미국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무디(Moody)을 기념하는 Moody Bible Institute도 시카고 시내에 있다. [본문으로]
  3. 오바마의 정치적, 사상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시카고 남부 Hyde-Park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적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살아있는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인 제시 잭슨 목사, 오바마의 멘토로 유명한 제레마이어 라이트 목사 등이 모두 시카고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다. 위의 사진은 Hyde-Park에 위치하고 있는 시카고 대학과 시카고 신학교 전경이다. 우측 하단에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건물이 시카고 대학을 건립한 록펠러를 기념하여 세운 록펠러 채플이고, 바로 건너편 빨간 벽돌로 높이 솟아있는 탑이 시카고 신학교이다. 2012년 까지 이곳에서 신학수업이 이루어졌다. 사진 중앙을 가로 지르고 있는 길이 University Ave이다. 그 길 건너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카고 대학이 펼쳐진다. 좌측 중앙에 보이는 회색 건물이 시카고 대학 메인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뢰겐스타인 도서관이다. University Ave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신학자 폴 틸리히가 자주 갔다는 맥주집이 길 모퉁이에서 아직도 성업중이다. 저 멀리 시카고 다운 타운이 보이고, 사진 상단 파란부분은 남한 땅이 풍덩 빠져도 남는다는 미시건 호수이다. [본문으로]
  4. 새로 옮긴 CTS 캠퍼스. 위에 옥상의 동그란 부분이 채플실. 3층이 도서관과 학생 휴게실. 1,2층에 강의실 및 각종 부속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본문으로]
  5. CTS에는 다음과 같은 학위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석사과정에 M.Div, STM, MA, 박사과정에 D.Min, ph.D. 좀 더 자세한 입학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아래 학교 공식 홈피(https://www.ctschicago.edu/)에 접속하셔서 바탕화면에 떠 있는 Admission를 누르고 들어가면 됩니다. [본문으로]
  6. 새 캠퍼스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하고자 분투했던 신앙인들의 얼굴이 우리를 맞습니다. 본회퍼, Harriet Tubman(노예였으나 탈출한 뒤에 수많은 노예를 해방시킨 '장군'이라고 불리었던 여성), 간디, Millard Fuller(해비타트 운동의 창시자), 마틴 루터 킹, Audre Lorde(흑인 여성주의자였던 시인), 로메로 신부, 마더 테레사 등....그리고 우리의 문익환 목사님도 그 벽화에는 새겨져 있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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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인종청소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피바다가 흐르는 끔찍한 땅으로 변질되었다. 사실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약속의 땅의 적나라한 모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당황스럽고 씁쓸하다. 구약 성서학은 거룩한 전쟁이라는 신학적 담론 아래 가나안 원주민의 희생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약속의 땅과 거룩한 전쟁 같은 이데올리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근대에 세워진 국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종청소”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부끄러운 일이다. 


  공교롭게도 성서에서 처음으로 “인종청소”를 언급된 곳이 다름 아닌 히브리 노예의 해방을 기록한 출애굽기다:


나의 천사가 너희 앞에서 너희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전멸시키겠다(출 23:23, 새번역).


  성서의 “인종청소” 언급은 신명기에서 더욱 심각하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사는 모든 남성, 여성, 심지어 어린이까지 죽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 우리 하나님이 그를 우리 손에 넘겨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와 그의 아들들들과 그의 온 군대를 쳐부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모든 성읍에서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켰습니다(신 2:33-34, 새번역).


    더욱 놀라운 점은 신명기에서 “인종청소”의 주도적 역할은 다름 아닌 야훼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는 것이다(참조, 신 7:1-11; 9:1-; 11:8-9; 23:31-23). 여호수아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특별히 첫 번째 부분은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는 이념 아래 “인종청소”를 합법적으로 설명한다(여호수아 2-12). 그야말로 야훼가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가나안 원주민의 피로 얼룩진 땅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성서의 “인종청소” 개념이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사실이지만, 야훼가 이를 직접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충격적이다.


 성서의 거룩한 전쟁은 “인종청소”라는 면에서 도덕적/윤리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가나안 “인종청소”가 근대 이스라엘의 성립 과정 중 행해진 팔레스타인 “인종청소”에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는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각주:1] 더구나 고대에 기록된 성서가 근대의 역사에서 “인종청소”의 도구로 오용되도록 성서를 해석한 성서학자들의 학문은 재고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서 1장에서 12장에서 언급하는 가나안 정복설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초기 이스라엘은 다른 인종과 점진적이고 평화적 융합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초기 왕정시대인 철기시대의 팔레스타인 산악지대의 거주지는 오히려 “가나안”과 “이스라엘”사이의 인종적 구별이 없음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은 외부에서의 침략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랜 세월동안 내부의 혼합 과정을 거친 평화로운 민족 형성의 과정이다.


 지난 2000년 9월 10일자 뉴욕타임즈에 150명의 유대인 학자와 랍비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시오니즘 운동의 정당성을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이스라엘 땅에 대한 존중을 표해야 한다. 홀로코스트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다름 아닌 약속의 땅에 재건된 이스라엘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성서에 기초한 종교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사실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인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다른 많은 이유로 근대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에 유대인들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유럽의 유대인은 나치정권 유대인 말살정책인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인종청소”의 희생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근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말살하는 “인종청소”의 주역이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서를 언급하면서 미국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구애를 펼쳤다. UN과 미국의 지지 아래 1948년 근대 이스라엘이 탄생하게 된 이래, 이스라엘은 줄곧 미국의 어마어마한 재정적 지원을 받아왔다. 아래 도표에서 보듯이, 1948년 이후, 이스라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군사적이고 경제적 도움을 받은 최대의 수혜국이다.


 수많은 성서학자들이 땅에 대한 신학적/신앙적 논의를 하였지만, 정녕 “인종청소”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다. 미국 듀크대학 명예교수인 데이비스(W. D. Davies)는 자신의 책 The Gospel and the Land에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를 지지하게 되었다고 소고했다. 구약성서학의 대가인 발트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도 1977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 The Land도 같은 맥락이다. 브루거만 역시 성서신학에서 땅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가나안 원주민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달리 키스 와이트램(Keith Whitelam)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1948년에 세워진 근대 이스라엘을 정당화하는 날조된 학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근대 이스라엘의 합법성에 문제제기를 한 유일한 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책,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1997)에서 “다윗왕조와 근대 이스라엘 사이의 유사성을 비교하면서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성서해석”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각주:2] 아래의 삽화는 1948년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근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종청소”의 의미를 한눈으로 잘 보여준다. 성서학자들은 “인종청소”라는 폭력적인 정책의 성서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바바라 로씽(Barbara Rossing)의 책 The Rapture Exposed: The Message of Hope in the Book of Revelation은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세대주의 종말론((Dispensationalism)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종말론 소설인 남겨진 자(Left Behind)와 같은 부류의 소설은 성서에 근거를 두지 않을 뿐 아니라, 폭력과 전쟁, 특히 “인종청소”를 정당화화는 위험한 책이라는 것이다.[각주:3] (필자의 블로그 참조: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종말론).


 구약성서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학문인 구약 성서학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를 옹호하는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과 화해를 위해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 야훼의 말씀을 오늘날 올바르게 재해석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 외래교수,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Michael Prior, "Confronting the Bible's Ethnic Cleansing in Palestine," in Burning Issues: Understanding and Misunderstanding The Middle East: A 40-Year Chronicle (eds. John Mahoney, Jane Adas, and Robert Norberg (New York: Americans for Middle East Understanding, 2007), pp. 267-90. [본문으로]
  2. Keith W. Whitelam,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London: Routledge; Revised ed. edition, 1997), p. 137. [본문으로]
  3. 바바라 로씽,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 종말론: 요한묵시록의 희망 이야기』 (번역: 김명수, 김진양;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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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라!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욕망으로의 초대


   근대 주체철학의 신화가 완성되던 무렵 근대성 일반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 천재들이 19세기에 등장했으니, 다름 아닌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 맑스(Karl Marx, 1818~1883)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그들은 각기 서양 주류철학이 걸어왔던 관념과 의식과 이성 중심주의에 맞서, 물질과 무의식과 반이성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욕망담론은 무의식과 반이성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던 그때로부터 1세기가 흐른 현 21세기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욕망에 대한 사유는 전통 사상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분야다. 그것은 프로이트와 라깡, 그리고 근래 지젝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 내지 윤리화 과정에서 부각되고 있는 새로운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욕망인가. 이 대목에서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지금부터 논의하게 될 욕망담론은 자본의 무한질주에 따른 소비에 대한 욕구와 충동을 격려하고 뒷받침하는 이론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로 재편된 21세기 현실 속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한 정언명법은 자본이다. 거대하고 막강한 자본이 선사하는 강제로 인해 지구촌 인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지만, 지옥과도 같은 자본의 압제를 벗어날 전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시기에 욕망이론이 현실 저편을 지향하면서 현실을 넘어가는 에너르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혹시 자본의 막강한 벽에 균열을 가하거나, 그 벽을 타고 넘을 힘을 제공하지 않을까라는 기대에서 사람들은 욕망이론을 펼쳐든다. 그럼 지금부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탑승하기로 하겠다.


욕망이 출몰하기까지


   정신분석학의 기본명제는‘모든 억압된 것은 귀환한다’는 것이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욕망은 억압의 산물이고 귀환을 일으키는 매개라 할 수 있다. 욕망이 담론사에서 정식으로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자끄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이라는 걸출한 정신분석가로 부터가 아닐까 싶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일어났던 예수운동이 바울을 통해 세계화되면서 그리스도교로 발전했듯이, 이념으로서의 맑시즘을 실천철학화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견인했던 레닌처럼, 정신분석학의 발전과정에서 프로이트와 라깡의 관계도 그러하다.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단계의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라면, 라깡의 경우는‘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법과 제도와 규범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남근(pennies)은 라깡의 남근(phallus, 팔루스)과 다르다. 전자가 단순한 생물학적 성기라면, 후자는 상징계(the Symbol), 즉 사회적 인정과 권위를 나타내는 기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세공포(Castration complex)는 생물학적 성기에 대한 제거의 공포라기보다는, 자기의 사회적 자리와 지위가 인정되지 않고 박탈되는 것에 대한 공포이고, 이것이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남겨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이렇게 라깡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사회-문화적 해석의 틀로 확장시킬수 있었던 원인은 그의 언어관에 있었다.

    1953년 라깡은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외치면서 본인 이론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라깡은 본인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언어의 개입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특별히 그는 유아가 말을 배우는 시기인 6개월에서 18개월 정도의 기간을 ‘거울단계(mirror stage)’라 불렀다.

    라깡이 ‘거울단계’를 끌고 오는 이유는 분명하다.‘상상계(the imaginary)’를 언급하기 위함이다.‘거울단계’의 아이는 남들이 보기에는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고, 정신적, 육체적 발달이 안 된 불안한 상태이지만,‘거울단계’아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이나 낙관적이고 낙천적이다. 양육자(예: 엄마)와의 관계에서 100%의 쾌락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아이는 자신과 양육자에 대한 구분이 없다. 이처럼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는, 다른 아이를 때리고도 자기가 맞은 것으로 오인하고, 다른 아이가 울면 따라서 울기까지 한다. 라깡은 이 시기를‘거울단계’라 부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유아들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거울과 나를 분리하기 시작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면서 세상의 질서로 편입하게 된다.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유아와 양육자사이 형성되었던 2항 관계는, 아버지의 개입으로 깨지고 만다. 아이는 엄마와 자기 사이에 있었던 은밀하고 내밀한 근친상간적 욕망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거대한 타자의 등장으로 폭로되고 위축되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한다. 이때 아이는 자기의 성기가 색정의 원인이므로 아버지가 자신의 성기를 제거할 것이라는‘거세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아이는 체념 속에서 근친 상간적 욕구를 억누르고, 자신을 현실원리에 적용시키고,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의 질서에 복종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이라 칭한다.

   그런데 이 시기가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시기와 겹친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면서 타자를 만나고, 내안으로 침입하는 타자의 개입을 참아내면서 아이는 자라난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자음과 모음을 배우고, 단어를 익히고,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구성하는 시스템속으로, 즉 기호의 세계, 상징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언어의 습득은 아이로 하여금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본능에서 초자아로, 자연에서 문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라는 제도로의 이행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이전단계(상상계)에서 가졌던 양육자와의 100% 쾌락이 붕괴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이때‘아버지의 이름으로’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상징계를 지배하는 대타자이다. 이것은 사회를 작동케 하는 원칙들, 예를 들어, 도덕, 관습, 법, 관례, 예전, 이념 같은 것들이다.


욕망의 심층


    이제 본격적으로 욕망의 심층으로 내려가보자. 라깡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설명하기 위해 ‘the ideal ego(이상적 자아)’와 ‘the ego-ideal(자아이상)’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각각은 상상적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동일시와 쌍을 이루는 말이다. 지젝은 상상적 동일시를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표상하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 당하는 장소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소를 동일시 함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고 좋아할 만하게 보이는 것”이라 정의한다.

    예를 들어, 엄마의 젖가슴 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와 합일이 가능했던 아이에게, 어느 날 엄마가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나와 합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치자.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는 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성화다. ‘너는 교수다!’ ‘너는 의사다!’ ‘너는 박사다!’ 이렇듯 엄마는 자신의 젖가슴만을 탐닉하면서 상상계속에만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닌, 교수, 의사, 박사, 판검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표화 된 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제시하는 이름표(기표)를 따는,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라깡은 desire와 jouissance를 구분한다. Desire은 상징계속 주체가 갖는 욕망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CEO되는 것과 같이 어떤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남이 좋아라 하는 시선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상징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볼까?’ 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고, 신부의 집안 배경은? 혼수도 얼마나 했는지? 예식장은 어디? 신혼여행은? 이 모든 사항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정되고 꾸며진다.

   반면, jouissance는 상상계에 남겨진, 혹은 상징계로 진입할 때 제거당한 내 마음 속 잔여를 향한 욕망이다. 어쩌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통과의례를 경험한 주체는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 깊숙히 간직한 주체다. 왜냐하면, 상징계속 주체(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아기(상상계속 주체)가 지녔던 것 중 일부가 상징계속 주체안으로 편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시카고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땄고, 한백교회 담임목사이고, 한신대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상철이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말로 나를 다 표현할 수 있나? 뭔가 헛헛하고 아쉽고 섭섭하고 안타까운 무엇이 있다. 상징계속 이상철, 현실 속 이상철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상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즉 잔여다.

    이런 이유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상상계속 자아의 일부를 상징계로 진입하는 도중에 거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spaltung(파열)이라 말한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올 때, 엄마의 배가 찢어지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낯선 타자와 직면하는 고통을 견뎌야 아기가 살 듯, 상징계의 주체 역시 마찬가지다. 상상계라는 제2의 자궁을 뚫고 나와 사회로 진입하면서, 사람은 드디어 인간(人間)이 된다.


슬라모예 지젝 曰 : "하지만, 이건 아니올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 인간의 욕망은, 상상계속 나의 욕망이 아니라, 상징계속 타자들의 욕망이다. 이를 좀 더 우리의 일상과 결부시키면 이렇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의 역사를 회고해보라. 얼마나 많은 민주투사와 열사가 등장하여 조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가. 조국의 근대화와 자주국방을 위해, 수출강국을 위해, 경제발전을 위해, 선진국 진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계처럼 일하면서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가. 진보진영에도 강력한 대타자의 목소리가 있었고, 보수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 기표를 흠모하면서 행위했다. 대타자의 음성은, 그것이 보수의 목소리든 진보의 목소리든 간에, 현실의 우리를 지배하면서, 우리를 뒤에서 조정하던 실세였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를 현재화할 때 사용되는 해석의 준거였고, 우리의 미래까지를 담보한다고 여겨지는 묵시였다. 욕망이란 대타자의 목소리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동되는 주술이라 보면 맞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대타자가 지니고 있다는 권위와 숭고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롱한다:


대타자는 주체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 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 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지젝에게 있어 대타자는 실재가 아니라 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타자가 실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를 몇 해 전 개봉했던 영화‘국제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오후 늦은 시간에 국기 하강식을 하던 시절, 전 국민이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가 끝날 때 까지 부동자세로 태극기를 바라보던 장면이 영화에서 연출되었다. 그 영화 개봉 이후 누군가에 의해 국기하강식 전통을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이후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다소 소란스러웠다.

    웬 국기하강식?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종북 좌파 빨갱이로 몰린다. 그런 낙인이 찍히면 살기 피곤해 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비록‘반공이데올로기’가 중심이 비어있는 텅 빈 기표임에도 불구하고, 상징적 세계인 대한민국에서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는 대타자의 명령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형태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근본주의는, 대타자를 향한 확고한 집단적 도착적 믿음위에서 탄생하였고, 그 믿음을 먹으면서 성장하고 나서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대상을 향해서는 광기를 표출하는 삶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중간정리) 쉽게 이해하는 욕망論: “라면 먹고 갈래요?” 


    앞서 우리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본능에서 초자아로, 자연에서 문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라는 제도로의 이행을 뜻한다고 배웠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상상계에서 가졌던 양육자와의 완벽했던 양자합의 관계가 깨어지는 상실과 아픔을 경험한다. 누가 그랬던가 아픔만큼 성숙해진다고.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성숙이란 요구와 욕구사이의 괴리로부터 발생하는 슬픔과 상실을 견디는 법이겠지만, 그 작업은 언제나 실패하여 욕망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욕망은 요구와 욕구사이의 함수관계에서 결정된다. 욕구는 보통 생리적 욕구다. 배고프면 먹고, 배설하고 싶으면 싸는 그런 욕구 말이다. 요구는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잔여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고시원에 혼자 사는 비정규직 열정 페이 청년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녀)는 배가 고파서 (텅 빈)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두 개 끓여 먹었다. 그런데 라면을 먹는데 갑자기 마음이 안 좋아진다. 엄마가 차려준 집 밥도 생각나고, 하루 종일 일하다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오는 자신의 처지도 처량하다. 라면을 두 개나 먹어 배가 불러 욕구가 해결되었는데 뭐가 문제지? 아마도 그(녀)가 원했던 것은 라면이나 밥이 아닐런지 모른다. 그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아닐까.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안에 담긴 사랑 이라든지,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먹던 저녁상가에서 벌어졌던 수다와 웃음이라든지...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요구의 영역이다.

    라면을 이용한 욕망계산법의 유명한 예화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 등장한다. 연상녀 이영애는 늦은 밤 문밖에 서있는 연하남 유지태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제안을 한다. 연하남 유지태는 정말 라면만 먹고 그 집에서 가만히 무사히(?) 있다 나온다. 정말 착한 교회오빠 스타일이다. 두 남녀가 이해한 "라면"은 서로 다른 의미였다. 연하남 유지태는 라면을 배가 고플 때 먹는 육체적 욕구의 대상으로 해석을 한 것이고, 연상녀 이영애에게 있어 라면은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심리적 요구였다. 나의 허기진 마음을, 나의 외로움과 고독을, 나의 이 쓸쓸함을 알아주고 만져주라는 싸인이 라면인데, 아직 세상을 몰랐던 유지태는 이영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나중에 둘은 헤어지고 마는데... 잘 헤어졌다! 유지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따져 묻지만, 순수가 얼마나 문제의 본질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지, 사랑이 때로는 얼마나 저열하고 구질구질하고 남루한 현상인지를 어린 유지태는 몰랐다. 그런 유지태가 여인 이영애에게는 버거웠던 것이고. 그 영화를 보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영애의 선택이 현명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나도 속물이, 아니 성인(成人) 되어가나 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중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생리적으로는 배가 부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헛헛한 무엇이 항상 나의 무의식을 맴돈다. 그것은 욕구와 요구사이의 차이 혹은 결핍으로 설명할 수 있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상상계에서 누렸던 요구의 100% 충족이 상징계속 대타자의 개입으로 깨어짐을 전제한다. 바로 그 지점이 욕망이 출현하는 진앙이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이해를 갖고 빨강구두를 둘러싼 욕망의 변증법으로 넘어가보자. 거기에는 또 다른 욕망의 세계가 펼쳐진다.


빨강구두와 죽음충동


   Google에서 ‘Red Shoe’를 쳤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고급에로영화의 대명사인격인 잘만 킹 감독의 시리즈 포스터들이다. 한국에서 방송되는 <사랑과 전쟁>의 미국판 19금 버전이랄까. <사랑과 전쟁>은 이혼직전 남녀가 변호사에게 찾아와 당신들의 입장을 하소연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는 한 남자의 우편함으로 배달된 여성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녀들이 겪었던‘사랑과 전쟁’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랑과 배신, 잘못된 만남, 어긋난 사랑, 뒤늦은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성적 환타지를 아주 농익은 영상으로 수놓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상징하는‘빨간 구두’란 그야말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그것이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고 조절되지도 않으면서 자꾸만 미끄러져 가는 욕망의 기표다.

잘만 킹 감독의 <Red Shoe Diaries> 포스터


    안데르센 동화 <빨강구두>에 등장하는 소녀가 신은 구두가 그렇다. 마치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운동하는 근육인 불수의근(involuntary muscle)과 같다. 심장에 있는 근육, 소화기관이나 생식기관에 있는 근육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을 뛰게 하고 소화의 촉진을 도우며, 성기를 빳빳하게하는 자동인형 같은 근육이다. 동화에서 소녀는 춤을 추지만 사실은 그것은 그녀가 추는 춤이 아니다. 빨강구두가 추는 춤이다. 그녀의 춤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구두가 끼워져 있는 발을 잘라내는 것이다. 결국, 빨강구두는 나와는 상관없이 보이나 강력하게 나를 지배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고, 소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녀로 하여금 끝없이 춤을 추게 하여 발을 잘라내야 한다는 결정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죽음 충동’과 상관한다.

    ‘죽음 충동’이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오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겠다. 삶에 대한 충동인‘에로스’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생명을 끊으려고 삶의 에네르기와 단절하려는‘죽음 충동’은 그 제목부터가 무척이나 어색하고 심지어는 엽기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죽음충동에 대한 논의는 프로이트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이트의 전기사상이「꿈의 해석」(1889)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그의 후기 사상은「쾌락의 원칙을 넘어서」(1920)와「자아와 이드」(1923)에서 언급하는 이드(Id)-에고(ego)-초자아(Superego) 사이의 역학관계에 관심한다. 특별히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욕망을 두 차원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에로스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스와 반대적인 에네르기라 할 수 있는 죽음충동(타나토스)이다. 에로스가 삶에 대한 충동이라면, 죽음충동은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에 반하는 에네르기인 셈이다.

   ‘죽음 충동’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주체와 실재(the Real)에 대한 새로운 상상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실재란 상징적인 세상 밖에 있는 초월적 실재(absolute being)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실재는 다르다. 내안에 있지만 나도 모르는 그 무엇, 상징시스템 밖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실재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을 전제하고 이미 상징계 속에 들어와 있지만, 상징시스템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무엇이 바로 실재(the Real)이다. 빨강구두가 그런 것 아닌가. 내안에 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 나와 붙어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실재이고 그것이 빨강구두인 셈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근대적 이성을 바탕으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역사의 진보를 향해 달려가는 주체는 어쩌면 근대성이 부여한 환상일런지 모른다. 우리를 완성된 주체로 만드는 요인은 빨강구두처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우리조차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영역 때문 아닐까. 그 이질적인 것들이 출몰할 때 주체는 비로소 온전한 주체의 모습을 바닥까지 다 드러내는 것 아닐는지.


파국의 욕망, 혹은 욕망의 파국


    앞서도 언급했듯이 상징계 속 주체는 결핍과 결여의 존재다. 상상계에서 누렸던 100% 쾌락을 거세당한 채 사회화과정을 밟으며 성장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 결핍은 드러나지 않지만, 인생의 고비고비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스멀스멀 올라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욕망은 어쩌면 그 결여와 구멍을 메우기 위한 인간의 방어기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욕망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대타자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욕망은 모른다. 돈을 많이 벌어도, 박사학위를 받아도 멋진 신랑 신부와 결혼을 해도, 성형수술을 해도 그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알고 싶어서‘케 보이(Che Vuoi)?’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답변은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죽음충동은 이 순간에 발동한다. 온갖 내공을 다 부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삶의 에네르기는 방향을 틀어 묻는다.‘죽어버릴까. 내가 죽어버리면 대타자는 만족하지 않을까. 죽으면 이 쓸쓸함과 공허와 이별하는 것 아닌가. 이제는 지친다. 죽자, 죽어버리자’어쩌면 우리의 근원적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의 진정한 의도는, 마치 수학(數學) 극한(Limit)에서 0을 향해 무한히 수렴(收斂)해 가는 것처럼, 죽음을 향해 수렴하는 무한질주 아닐까. 그렇다면 욕망과 존재의 근원인 제로(Zero), 무(無)로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구원으로 이르는 계단 아닐까. 그 비상구는 에로스로 차고 넘치는 욕망의 거리에 있지 않고, 타나토스가 똬리를 틀고 앉은 욕망의 이면 어느 텅 빈 구멍 속 아닐까.

   정신분석학에서는 죽음충동을 성령으로 이해한다. 지젝은 라깡이 죽음충동을 성령으로 이해한 프로이트의 해석을 근거로 성령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우리가 성령 안에 우리의 위치를 정하면 우리의 존재는 성스럽게 변하고 생물학적 삶 너머에 이는 또 다른 삶으로 진입한다.” 성령을 죽음충동과 연관시킨 대목은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성령임재 사건들이 갖는 특징을 언급하라면, 한마디로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상징계 속 기표와 욕망과 기억과 경력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기득권을 어찌 다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죽음충동이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로 인해 역사의 물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고, 무너질 것 같이 않았던 전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완고했던 시스템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성령을 체험했던 모세에 의해 파라오는 무너졌고, 성령을 체험한 바울이 로마로 들어가면서 제국의 기독교화는 시작되었다. 성령을 체험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백인과 흑인간의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넘었고, 성령을 체험한 문익환 목사는 냉전과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 성령, 즉 죽음충동이 임하자 자아는 사라지고 텅 빈 충만이 자리했고, 그 힘으로 그들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욕망의 전복성


   요약하면, 욕망은 삶에 대한 욕동인 ‘에로스’와 죽음을 향한 욕동인‘타나토스’로 구분될 수 있겠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빨강구두’는 삶에 대한 애착과 환희를 향한 욕망인‘에로스’를 상징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발을 잘라내어야만‘빨강구두’가 추는 춤이 중단되어 원래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죽음 충동’을 닮았다.‘빨강 구두’로부터 시작된‘죽음 충동’은 현실 속 그 무엇도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의 욕망은 현실 저편의(혹은 아래의) 무엇을 지향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상상은 근대적 주체에 대한 불신과 전통 형이상학에서 말해왔던 완벽한 대타자와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하지만,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보편성의 중핵이 텅 비어있다는 욕망이론의 발언은 통쾌하다. 현재 전 지구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완고한 신자유주의의 보편성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놓고 골몰하던 이들에게, 정신분석학의 제안은 현실의 원칙에 집착하는 욕망이 아닌, 상징계 너머에 존재하는, 아니 상징계의 텅 빈 중핵을 겨냥하는 욕망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이 21세기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자본에 균열을 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틈을 통해 진입하는 혁명의 가능성을 노래하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이 제안하는 욕망은 전복적이고 급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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