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혐,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각주:1]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 이사야 1:15

 


이사야가 살던 시절


    이사야서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은 유다국의 개혁군주입니다. 그는 북왕국 멸망시기와 겹치는 남왕국의 왕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 앞에 있었던 왕이 아하스입니다. 여기서 잠시 기원전 7-8세기 남왕국을 다스렸던 왕들의 족보를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요시야로 이어지는 왕들 중 히스기야와 요시아왕이 평등주의 계열의 왕이었다면, 아하스와 므낫세는 발전주의를 주장했던 왕이었습니다.[각주:2] 특별히 제1이사야와 맞물리는 시대는 아하스 시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국은 아하스 왕 때 약소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당시 고대 근동은 앗시리아가 득세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제국의 반열에 오른 앗시리아에 맞서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동맹이 맺어졌고, 유다국에게도 동맹에 참여하라는 압박이 전해져 오지만, 아하스는 거부하고 친 앗시리아 정책을 폅니다. 야훼를 버리고 제국의 질서를 택한 것이죠. 이에 앙심을 품은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국을 유린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급기야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국난 해소를 위한 번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기적처럼 아시리아가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을 초토화 시키는 일이 발생했고, 그 결과 유다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후 유다국은 전례없는 발전을 하게 됩니다. 앗시리아 침공으로 인한 주변국 난민들이 유다국으로 유입되면서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가운데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제국의 논리에 의지해 성장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득세를 하였고, 그들은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농민들에 대한 착취를 두둔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양극화가 초래되더라도 일단 경제적 파이를 키우면 그것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낙수효과가 발생해 점차 양극화가 극복되리라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들의 논리는 닮아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소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대지주들이 제공하는 자본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교회와 언론이 자본의 논리에 영향을 받는 오늘의 현실과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이러한 시대에 대해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았던 교회에 대해, 그리고 그 곳에서 드려지던 예배를 향해 던지는 하나님의 추상과도 같은 비판의 메시지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불의에 공조하던 교회에 대한 이사야의 저주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런 전 이해를 갖고 다시한번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이 구절은 비록 수천년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오늘의 교회를 향한 너무나도 정확하고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주간에 이사야가 다시 환생해서 한국교회를 본다면 한국교회를 향한 저주의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 죄목은 여혐입니다.   


한국 교회, 여혐의 인큐베이터


    얼마 전 발생한 강남역 화장실 여성 피살사건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제가 윤리를 전공하고, 윤리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이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하거나, 윤리적 해법이 담긴 글을 쓰라고 합니다.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번 학기 바쁘기도 하지만, 이 사건들을 분석을 하거나 비평을 하는 일보다 먼저 회개하고 애통하고 탄식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의 배후에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교회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국교회는 이 사건들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늘 하늘 뜻 나누기 제목을 ‘여혐,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라는 제목으로 뽑았는데 과연 한국 교회의 어디에 그런 면모가 있는 것일까요? 일단 표면적으로 한국교회는 ‘여성혐오’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만나왔던 교회 오빠들 어떤가요?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제한적이긴 하지만, 여성 억압과 차별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려 했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들 중에서 교회만큼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가 남성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교회와 여성혐오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보도에 의하면 강남역 살인남은 “여자가 무시해서” 범행 장소에서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들어오는 첫 번째 여성을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교회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살인남은 목회를 꿈꾸던 신학생이었고 자퇴 후에는 교회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주로 영향을 받은 곳은 교회였다는 뜻이겠지요. 그는 누군가의 친절하고 다정한 교회 오빠였거나, 교회 누나가 보기에는 신뢰가고 듬직한 연하남 교회 동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유독 여성의 무시를 못 견뎌 여성을 살해하기로 작정했던 것일까요? 그에게서 여성 혐오는 도대체 어떤 경로로 거치면서 형성되었을까요? 물론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교회에서 보고 자란 영향이 꽤 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드러내놓고 여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성 차별을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구조화시켜왔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교리적 잣대로, 제도적으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도록 하였고, 교회 내에서 여성의 권위와 공헌은 헌신과 순종이라는 미담과 간증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거부하고 있고, 아직도 한국교회의 강단 위로는 여성이 오르지 못합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당회는 남자들 일색입니다. 여성의 비율이 교회에서 60% 이상을 상회할텐데, 최소한 50%는 안 될지언정 당회의 여성비율이 10%도 안 되는 기이한 인력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교회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 내에서 남성의 무시는 당연히 참아야 되는 성질이 되지만, 어떤 여성의 무시에는 분노해도 되는 것입니다. 어찌 목사 안수도 받을 수 없는 자들의 무시를, 어찌 장로도 될 수 자들의 무시를, 어찌 교회 강단에도 서지 못하는 자들의 무시를 견딜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어쩌면 평범한 한국 남자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인내심 테스트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인내심은 교회내에서는 작동을 하겠지만, 교회 밖을 벗어나면 무장해제 됩니다.  

    하지만, 교회 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무지하거나 무관심 합니다. 한국 교회의 간판 옆에는 여전히 전도폭발, 성령체험, 치유와 힐링 등의 문구가 난무합니다. 근래에는 사탄의 음모인 동성애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투사적인 열정과 교회와 사회를 붉게 물들이는 좌파용공 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그들에게 장착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언명법들 앞에 늘 숭고하고 치열했던 한국교회였던지라 젠더에 대한 문제, 양성 평등, 페미니즘 따위의 문제들에 한 눈을 팔 수가 없었던 게지요.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여러 진보담론들을 살펴봐도 약자의 카테고리에서 여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민중신학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언급은 미비합니다.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 민족통일이라는 큰 그림들을 그리시느라 이런 쪼잔한 양성평등 같은 미시적 문제들에는 미처 손길이 미치지 못했나 봅니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라 자부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조차도 여성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벽은 높기만 합니다. 기장교단에 속한 목사후보생 신학생들은 각자가 속한 노회에서 참여하여 정기적으로 목회자 후보생 교육을 받고 면접을 치룹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여자신학생 상당수는 남성 목사님들 앞에서 질문을 받으면서 모욕감을 느꼈고, 심지어는 강간을 당하는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증언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여자가 신학을 해서 뭐하려고?”, “한국은 아직까지 여성 목회가 힘들어”, “신학교에서 연애하면서 사모되면 되겠네” 등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적 질문들이 그 자리에서 오고 간다고 하네요.   

    이렇듯 한국 사회 전체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그곳이 세속적인 공간이든 성스러운 공간이든 상관없이 여성문제에 대해서든 공히 같은 마음 아닐까 합니다. 그것의 표현이 누구는 조금 세련된 것처럼 보이고, 그 문제에 대처하는 태도가 누구는 조금 진일보하고 누구는 여전히 티나게 후지지만, 그들의 무의식은 똑같습니다. 여성문제에 관해서는 관심도, 애정도 솔직히 없습니다. 애정과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문제의 심각성도 모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이러한 발아조건 속에서 서서히 싹 터오면서 진화해갔고, 드디어는 ‘강남 살인남’ 같은 증상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앞으로 닥쳐올 더 큰 유사사건들에 대한 징후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 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잡수십시오!” 이렇게 정부는 발표했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권력의 마음과 국가의 진실


    하지만, 경찰이 내린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은 저의 생각과는 많이 달라보입니다. 경찰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가 아닌 단순 정신질환자의 “묻지 마!” 사건으로 결론지었습니다. 경찰은 김씨가 2003∼2007년 "누군가 나를 욕하는 것이 들린다"고 자주 호소하며 피해망상 증세를 보였고, 이 증세는 2년 전부터 '여성들이 자신을 견제하고 괴롭힌다'는 피해망상으로 변화됐다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서빙 일을 하던 식당에서 이달 5일 위생 상태가 불결하다는 지적을 받고 이틀 뒤 주방 보조로 옮겼는데, 이 일이 여성 음해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 범행을 촉발한 요인이 됐다고 경찰은 분석했습니다.  

    경찰은 범행 당시 김씨의 망상 증세가 심화한 상태였고 표면적인 동기가 없다는 점,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범죄 촉발 요인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이번 사건이 묻지마 범죄 중 정신질환 유형에 해당된다고 설명합니다. 또 김씨가 화장실에 들어온 여성을 보자마자 바로 공격한 점으로 미루어 범행 목적성에 비해 범행 계획이 체계적이지 않아 전형적인 정신질환 범죄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사회에 확인된 여성혐오 현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경찰의 발표는 과거의 자아 심리학에서 말하는 환자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 주체와 대타자(예: 사회, 국가, 교회 ...)가 있습니다. 주체는 분열된 주체입니다. 분열된 주체라 함은 대타자의 법과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섞이지 못하는 주체를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정신질환자라 부릅니다. 반면, 대타자인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교회는 완벽한 시스템, 목소리, 그리고 법과 품격을 지닌 대상입니다.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는 분열된 주체를 완벽한 대타자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입니다. 대타자의 음성에 순응을 하고, 반응을 하게 될 때, 우리는 그를 ‘정상인’이라 부릅니다.   

    경찰의 인식은 이런 것입니다. 대타자 대한민국은 여성혐오 같은 것은 없는 완벽한 사회이고, 대타자 대한민국은 여성의 인권과 안전이 유지되는 정상적인 사회임을 먼저 전제합니다. 어쩌다 미친놈이 하나 등장해서 재수없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 너무 이 문제를 확대 해석하지 마십시오. 한 개인의 우발적 행동이었고, 더군다나 그는 미친 놈입니다. 그 미친 놈 하나만 제거하면 이 사회는 여전히 안전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대타자 대한민국은 안전한 공간입니까?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도 대타자 대한민국이 보인 반응은 같았습니다. 한 개인의 일탈적 사건으로 세월호 사건을 몰고 갔습니다. 세월호 발생 초기 모든 언론은 유병언을 쫓는데 혈안이 되었드랬습니다. 분열된 주체의 일탈적 행위로 인해 세월호가 발생했음을 드러내 보이는 액션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안전한데 사이비 광신도 집단으로 인해 이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싹을 제거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세월호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밝혀진 진실은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2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마무리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구조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도....우리는 아직까지 확실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국정원이 개입했고, 여러 가지 부패의 커넥션이 이 사건 안에는 가득한 듯 한데 우리는 정확하게 그 진상에 대해 모릅니다.  

    결국, 세월호 사건이 처리되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국가란 없음!’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주체도 분열되어 있지만, 완벽한 대타자였던 국가 역시 분열되어 있음을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는 알아버렸습니다. 하지만, 대타자인 정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네들은 완벽하고, 문제가 없고, 순결한 존재이고, 너희들 분열된 주체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열된 주체를 좌파, 빨갱이, 동성애자, 이슬람 테러리스트로 지목하였고, 강남역 묻지마 사건을 거치면서 정신질환자가 그 목록에 추가될 것입니다. 이런 거대한 공조에 숭고한 대타자들은 함께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조중동, 그리고 한국 개신교는 이러한 거대한 공조의 파트너 들입니다.  


제발, 그 예배를 걷어치우라!


    여혐은 한국사회 층층히 쌓여있는 구조적 폐습 어느 한 구석에 완고하게 자리 잡은 집단무의식이 아닐까 합니다. 정신분석학의 기본이 무엇이었나요? 억압된 것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여혐의 출몰은 그러한 점에서 위태롭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그 무의식이 출현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이렇듯 여혐은 나도 모르는 내안에 있는 어떤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면 강남역 사건과 같은 야만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야만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야만의 시스템 한 가운데 우리들의 교회가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 진실을 봐버린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알아차린 예언자 이사야는 그 사실에 견딜 수 없어서 “당장 너희들이 드리는 그 더러운 예배를 걷어치우라!”고 절규하는 것 아닐런지요. 이렇듯 이 천년도 훨씬 전에 울려퍼졌던 이사야의 외침이 돌고 돌아 21세기 한국땅에서 똑같은 울림으로 공명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우리는 지금 숨가쁘게 지나고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지난 2016년 5월 30일 주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김진호, 『산당들을 폐하라』(동연, 2016), 11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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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존엄한 삶



신윤주



   창문을 열면 인왕산 자락이 빼꼼히 보이는 집에서 결혼하고 네 해를 살았다. 바다는커녕 개울가로도 둘리지 않은 한 동짜리 아파트였지만 건축할 당시의 유행을 따랐는지 유난히 벽이 희었고 한쪽에는 등대를 닮은 파이프가 기둥처럼 솟아 있었기에, 하늘이 파랗게 맑은 날이면 나는 사진으로만 봤던 산토리니의 풍경 속에 들어있기라도 하듯 황홀해했다. 그리고 언제나 계절은 안방과 거실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널찍한 창 너머에서 바람과 풍경과 소리를 실어 날라주었다.    

   그 널찍한 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건 이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정오 무렵에 여자는 왕복 이차선 너비의 골목 쪽으로 난 창가에 서서 삼십분 이상 욕설을 퍼부어댔다. 쌍시옷이 잔뜩 들어간 말들로, 분노를 담아 힘껏, 세상을 향해 자신의 남편과 남편의 내연녀에 대한 험담을 쏟아냈다. 아랫집 여자였다. 적잖이 거슬리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경비 아저씨에게 내려갔다. 아랫집 여자 아무래도 좀 이상한 것 같다고,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상의를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히려 여자를 안타까워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는 바람에 저렇게 됐다나봐. 그냥 놔 둬.”   

    또 하루는 문 밖 복도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보다 위층에서부터 씩씩대고 중얼중얼하며 계단을 내려가는 아랫집 여자의 소리였다. 옥상에는 왜 갔을까. 얼마 뒤에 보니 인터넷이 되지 않고 있었다. 전화 상담을 통해 할 수 있는 조치를 해보았지만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서비스 기사분을 불렀다. 그는 옥상 위에 전선이 다 끊어져 있다고,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전선에 일부러 가위질을 해놓는 것 같다고 했다.  

    여자의 맞은편 집에 사는 302호 부부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앞집에서 이상한 전파 소리가 들린다며 무작정 쳐들어가 소리를 추적하려 한 것이다. 우리 집에도 올라온 적이 있다. 아기 소리가 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리 부부 사이에는 아기가 없다.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장롱에 아기를 숨겨 놓았을 거라며 집에 들어오려는 걸 겨우 문간에 세워두었다. 지나치게 확신에 찬 여자를 보며 확실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반응들은 어떤 소리 혹은 응시에 대한 반응 같았다. 그런 가설을 세운 뒤로는 여자와 여자의 딸이 외출하는 시간에 복도나 계단에서 마주치게 될 경우에 되도록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이 행동했다. 그러던 중에 여자가 어린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러 외출하는 시간과 내가 집에서 나서는 시간이 이틀 연속으로 비슷한 때가 있었다. 내려가던 계단에서 멈춰서는 것도 애매해서 최대한 둘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는 다시 경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여자는 딸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니 저 여자는 왜 자꾸 우리가 나가는 시간에 나와? 미쳤나봐. 확실히 미쳤어.” 

    그때는 정신병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증상들은 DSM의 진단 체계를 따라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분류되거나, 다른 분류법에 의거하여 편집증으로 진단되기도 하는 정신 질환에서 흔히 확인되는 양상이었다.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정신자동증mental automatism'에 걸린 사람은 늘 어떤 목소리가 자신에게 뭔가 말한다고 느낀다. 들리는 말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중얼대는 목소리가 있고 나중에는 그 목소리에 적대감이 서려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각주:1] 환청이나 환각과 더불어 망상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증상으로 꼽힌다. 환청이나 환각이 떨어져나가지 않은 충동의 대상인 목소리나 응시가 출현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증상이라면, 프로이트-라캉주의에서 망상은 이러한 현실적인 것the real과 대면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의미를 고정하는 자가 치료 기제로서 의미를 지닌다.[각주:2]  

    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프로이트의 분석 사례 중 편집증 환자 슈레버에 관한 것이 있다. 슈레버는 42세에 처음으로, 51세에 두 번째로 발병을 했다. 슈레버가 두 번째로 발병 했을 때 그는 항소심 법원의 재판장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나중에 라캉은 슈레버가 재판장으로 호명된 사건을 두고 부성 은유 혹은 상징적 은유 기능의 잠재적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계기로 보았지만,) 당시 슈레버 자신은 과중한 업무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믿었다. 불면증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증세로 고통 받던 슈레버는 첫 번째 발병 시에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 재입원을 결정하고, 이후 증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프로이트는 슈레버가 입원했던 존넨슈타인 요양소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슈레버의 증상이 악화되는 과정을 전한다. 


    ‘즉 그는 뇌가 물러졌다거나 혹은 자기는 곧 죽을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환각을 근거로 한 피해망상이 이미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비록 초기에는 가끔 나타나기만 했지만 말이다. 동시에 감각 과민증이 심하게 나타났다. 후에 시각적인 환각과 청각적인 환각이 점점 자주 일어났고 동시에 일반 감각도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환각이 그의 감정과 생각을 지배했다. ...... 그는 목욕탕에 빠져 죽으려고 몇 차례 시도했고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청산가리”를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의 망상은 점점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신과 직접 대화한다고 하였고 혹은 자기는 악마의 놀이감이라고도 했고 ...... 나중에는 자기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또 자기를 괴롭히고 다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다.[각주:3]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는 동안 슈레버는 고문에 가까운 목소리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결국 그 목소리의 메시지에 순종하듯 자신의 망상 체계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여자로 변하는 환각이 든다는 것이 괴롭기만 했지만 점차 이러한 생각과 화해해 가면서 자신의 몸으로 느낀 여성적 포지션의 흥분을 권리이자 의무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 새 인류를 낳는 소명을 맡은 여자가 되기로 한다. 슈레버에게 이 서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 혹은 현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면 완전히 다른 현실 감각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서사는 정신병자의 망상 체계일 뿐이다. 어떤 정신병자의 망상 체계는 실제로 타자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기도 하기 때문에 망상을 환자 스스로의 회복을 꾀하는 일종의 서사 체계로서 이해한다고 해도 인식 기반의 차이 이상의 불안과 공포를 유발할 수 있다.  

    보름쯤 전에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의 범인 역시 정신병을 앓는 주체였다. 경찰은 피해자의 상처 부위가 깊고 잔인했다는 점을 보아 이 사건은 면식범에 의해 저질러진 일일 것이라고 추측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둘은 원한 관계가 없었다. 원한 관계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관계도 맺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살해된 젊은 여성은 범인에게 어떤 잘못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그를 무시하고 공격했다는 여성 일반(에 관한 망상)에 대한 죗값을 치렀다. 그녀에게 ‘희생양’이라는 말 외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러나 여성에게 적절한 이름을 붙이는 일에 서투른 한국 사회의 몰지각한 호명 방식을 따라 그녀를 ‘화장실녀’라고 부르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부적절한 호명은 그녀에게 꽂힌 두 번째 비수였다. 아니,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무수히 반복된 공격의 연장이었을지 모른다.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현상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대하는 대중의 반응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확연히 얼굴을 드러냈다.  

    2006년도에 신조어와 유행어 1위를 기록한 ‘된장녀’라는 단어의 등장을 기점으로 여성들은 ‘~녀’로 손쉽게 호명되기 시작했다. 희화화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범주화될 수 있는 여성들은 ‘된장녀’, ‘김치녀’, ‘건어물녀’ 등 주로 먹을거리와 연관된 이름들로 시작되어 ‘취집녀’, ‘무개념녀’, ‘오크녀’ 등으로 무수히 이어지고 그 외의 단발적 사건 속에서조차 언론의 주도로 가십성 ‘~녀’들이 생산되었다. 

    신조어는 기존의 어휘들로는 담아낼 수 없는 어떤 사물이나 개념을 가리키기 위해 새로 만들어내는 말이다. 일군의 ‘~녀’ 시리즈를 한 범주의 신조어군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특히 최근 10~15년 사이에 기존의 이데올로기로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이 출현했다는 뜻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시리즈의 첫 주자인 ‘된장녀’에 관한 묘사를 표본적으로 살펴보면 몇 가지 키워드가 발견되는데, 명사(구)로는 ‘외국계 커피전문점’, ‘뉴요커’, ‘패밀리 레스토랑’, ‘남자 탤런트’, ‘남자 선배’, ‘비싼 밥’, ‘문자메시지’ 등이, 그리고 용언에 해당하는 구문으로는 ‘착각하다’, ‘수다를 떨다’, ‘빌붙다’, ‘얻어먹다’, ‘의미없는 ...... 작성하다’, ‘시간을 허비하다’ 등이 나타난다.[각주:4]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보았을 때 (반대 성의 연예인에 관해 평가하고 시시덕거리는 것은 남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인데) 여자가 남자 탤런트를 두고 평가의 잣대를 들이미는 일은 가당치 않으며,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외국계 커피전문점에 밥값에 준하는 돈을 지불하고 커피를 향유하는 것은 스스로 뉴요커라는 착각하며 사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소비 주체가 여자라는 이유로 여전히 남자 선배에게 빌붙어 비싼 밥을 얻어먹으려고 하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남자’이고 ‘선배’이기 때문에 밥을 사줘야할 것 같은 압박감이 그들을 괴롭게 한다. 이것이 십여 년 전의 인식이다.  

    이 딸들의 어머니들은 자신들을 길러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했으나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가족 내 남성 형제들에 대하여 박탈당했던 권리를 딸에게는 회복시켜주고 싶지만 동시에 성 역할에 관한 한 아직 일정한 혼란을 겪는다. 이 아들들의 아버지들은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어머니 세대와는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 일정한 불만을 지니기 쉬우며 산업의 역군으로서의 자부심과 급변하는 산업 구조에서 파생되는 변화 속에 불안을 느낀다. 이들 부모 세대의 욕망 속에 전근대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될 수 없는 여성과 남성이 출현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경쟁했으며 사회에 진출했다. 이제 남성들은 공적인 장에서 양적으로 배가된 대상들과 경쟁해야 하고 사적인 장에서 이전보다 까다로운 타자들에게 구애해야 하게 되었다. 새로운 여성은 남성의 선택을 기다리는 대상에 머무는 대신 유혹하고 선택한다. “ ‘선배 졸려염 ㅠㅠ’ 같은 의미 없는 문자메시지를” 전송하고 난해한 해석의 문제를 야기하는 주체인 것이다. 만일 이러한 여성 주체를 ‘~녀’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을 통해 고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시대착오적 망상일지 모른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산업화 세대의 정상성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는 시대에 수정되지 않은 여성적 정상성을 요구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정조가 여성혐오다. 그러나 산업화 세대의 도덕규범은 이미 영토를 초월한 교류를 통해 세계적 보편을 상당히 공유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상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성 역할, 성적 취향, 성 정체성, 나아가 혼인, 출산, 성매매 포르노 등에 관한 도덕규범과 법규범이 제시하는 정상성은 한국 사회에는 더 이상 정상적인 여자, 정상적인 성, 정상적인 결혼,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정상성은 신화일 뿐이다. 정상성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겠지만 기준을 조정해나가는 일은 상대적으로 가능한 접근이다. 가령 범죄에 대한 규정과 접근을 달리함으로써 범죄율이 감소하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다시 사회에 복귀하고 사회 안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의 비율이 늘어나는 효과를 낸 네덜란드의 사례가 있다. 결과적으로 교도소 운영에 필요한 예산은 절감되었고 대신 범법자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은 늘어났다.[각주:5] 이 사례의 시사점은 한국 내 범법자를 처우하는 법제도를 변경하는 일에 있다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에 있다. 지금껏 한국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방식이 격리하거나 못 본 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들을 사회 안으로 끌어안고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약한 것은 근절해야 하는 질병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개인과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의 가해자는 3월 말 경에 가출을 하고 한동안 한 지하철역의 남자화장실에서 노숙을 했다고 한다. 만일 그가 가출을 하지 않았거나, 가출을 했더라도 좀더 안정적인 사회적 보호 시설에서 머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까? 또한 애초에 그가 가출한 동기는 아버지가 그를 다시 병원에 입원시키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각주:6] 만일 그의 아버지가 관리 불가한 자신의 아들을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키는 대신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가족이 가정 안에서 모든 경제적, 정신적 비용을 부담하고 돌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처했던 사연을 들었을 때 한때 아랫집에 살았던 여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삶의 조건이 무엇이었든 그녀는 상대적으로 존엄을 지키며 일상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정신분열증 연구자인 실바노 아리에티는 치료를 받지 않는 “평범한” 정신병자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모르며 미묘하고 절제된 광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백색 정신병,” “평범한 정신병”, “일상적 정신병”, “비밀스러운 정신병” 등으로 일컬어졌다. 대리언 리더는 이러한 정신병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며 우리는 미치지 않고도 미친 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리더는 우리가 정신병의 편재함을 알아야 하며, 정신병의 구조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광기가 촉발된 사람을 돕기 위해서다.[각주:7]  

    정부는 강남역 사건의 대책으로 공중 화장실을 개선하고, CCTV의 수를 늘리며, 조현병 환자들을 전수 조사하여 행정 입원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이것은 이 사회로부터 여성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말만큼이나 문제의 핵심과 무관한 듯이 보인다. 애초에 여성혐오는 여성을 계속해서 대상의 위치에 두고자 하는 욕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안전과 여성혐오의 연관성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주체성과 욕망을 지닌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이데올로기적 거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바탕으로 이슈를 다뤄야 한다. 마찬가지로 조현병 환자들을 전수 조사하여 병원에 몰아넣는 것은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들은 불안해 보이는 방식으로 세계를 대하지만 여전히 존엄한 인간 주체이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국가는 이 영토에 머무는 인간 주체들의 존엄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남성은 여성을, 신경증자는 정신병자를, 이성애자들은 LGBT를, 국적을 소지한 자들은 외국인 체류자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동등한 욕망을 지닌 주체일 수 없는 것처럼 취급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젠 더불어 존엄하게 살 길을 모색하자. 언 발에 다시 오줌을 누기에 한국 사회는 너무 춥다.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대리언 리더, 『광기』, 배성민 옮김 (까치글방, 2012), 60-61쪽. [본문으로]
  2. 대리언 리더, 위의 책, 29, 96쪽. [본문으로]
  3. 지그문트 프로이트, 전집 9권 『늑대 인간』, 김명희 옮김 (열린책들, 2003), 112-113쪽. [본문으로]
  4. 백승찬, “ ‘된장녀’가 어쨌다고...”, 「경향신문」 2006년 8월 6일. [본문으로]
  5. True Activist, “Netherlands Closing 19 Prisons Due to Lack of Criminals”, True Activist, April 12, 2004 <http://www.trueactivist.com/netherlands-closing-19-prisons-due-to-lack-of-criminals/> [본문으로]
  6. "검거된 미제사건-강남역 살인 사건의 전말", <그것이 알고 싶다>, SBS, 2016년 6월 4일 방송분. [본문으로]
  7. 대리언 리더, 『광기』, 2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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