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젠더다 1 : 연재를 시작하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한국에는 세 가지 성이 있다. 남성, 여성, 아줌마.” 


   이건 아주 오래된 농담이지만 여전히 널리 사용된다. 지하철 빈 자리에 가방을 던져 뛰어가 앉거나, 마트 할인 매장에서 사람들을 제치고 물건을 집어 드는 중년 여성들을 우스갯 거리 삼을 때 주로 이런 말을 입에 올린다. 성적 매력이 없다는 의미로 ‘아줌마'를 남성/여성으로부터 분리하면서도 그들을 다시 제3의 성으로 호출해 내는 이 농담의 작동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그렇게 제 3의 성으로 분류된 ‘아줌마'의 섹슈얼리티는 아마도 (안하무인의) 생존력일 것이다.  


   <이 악질적인 농담에도 유효한 지점은 있다. 이 농담이 은연 중에 적시하고 있는 것처럼 아줌마는 남성이나 여성과는 다른 ‘성적 주체’이다. 이들의 섹슈얼리티는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을 다루는 방식과는 다르게 다루어진다. 말하자면 ‘아줌마'를 제 3의 성으로 일컫는 이 농담 속에서 ‘아줌마'를 하나의 젠더 문제라고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아줌마의 섹슈얼리티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억압되거나 배제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공화된 것이다. 그녀들의 성은 가족 구성원들에 의해 전유되고, 재구성된다. 이 과정에는 ‘육아'와 ‘엄마'라는 또 다른 단어들이 개재되어 있다. ‘엄마'라는 이름은 아줌마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그다지 다르지도 않다. 단지 ‘아줌마'로 향하는 과정적인 이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기를 임신했을 때, 우연히 길을 가다 한 모녀를 본 적이 있다. 3-4살 정도로 추정되는 딸아이는 레이스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머리까지 예쁘게 땋고서 유모차 안에 앉아 있었는데, 그 엄마는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짝이 맞지 않는 츄리닝을 입고 다크서클이 깊게 패여 흡사 환자 같은 얼굴로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 아이에게 맞추느라 자신은 돌보지 못했을 그녀의 일상을 상상하면서, 어쩐지 앞으로의 내 삶이 두려워지기까지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그녀처럼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나를 보살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육아의 과정을 겪어내며 이 생각은 송두리째 달라졌다. 그 전까지 내 질문이 ‘어떤 사람이 아줌마가 되는가.’였다면, 이제 내 물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 아줌마라는 제 3의 성이 탄생하게 되는가.’이다. 


   개인적인 의지만으로는 ‘아줌마'로 가는 길에서 탈출할 수 없다. 운 좋게 성평등 관념이 투철한 남편을 만나 가부장제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병원 시스템이나 SNS, 육아 시장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적으로 요구되는 ‘아줌마'의 역할에서 빠져나오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사회의 부름에 따라 아기를 가진 그 순간부터(즉 ‘엄마’라는 역할을 부여받는 순간부터) 여자는 ‘아줌마’가 되어야 한다. 


   웹진 <제3시대>에서 소중한 지면을 허락해주신 덕택에, 이제부터 나는 ‘누가 아줌마를 요청하는가.’라는 주제를 탐구하려 한다. 글의 초반부에서는 임신-육아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내가 아줌마로 이행하게 된 과정’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그리고 중후반부에서는 다른 여성들의 엄마-되기를 인터뷰로 풀어내려 한다. 엄마가 된다는 과정 가운데 자아를 잃지 않으려 고군분투하고, 저항하며 때로는 타협하는 삶을 듣고, 그 가운데에서 어떤 때에 스스로를 아줌마로 느끼게 되는지, 사회가 요청하고 과거의 내가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아줌마’에 대해 관찰하려고 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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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든어택2> 서비스 종료에 부치는 글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1.


    먼 옛날의 이야기부터 꺼낸다. 어린 시절 나는 게임 마니아였다. 누군가 게임이란 뭐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지금의 나를 만든, 어두운 십대 시절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유일한 친구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심한 왕따를 겪었다. 하루하루가 우울하고 고통스러웠던 내게 게임은 단지 가상의 것이 아니라, 내 존재를 긍정해주는 유일무이한 세계이자, 나의 접속을 받아주는 단 하나의 네트워크였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모든 게임이 좋았다. 후에는 온라인에 빠졌지만 초창기에는 오프라인 게임에 매료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소년 만화 잡지 <챔프>를 사면 게임 시디를 무료로 증정했는데, 나와 친오빠는 그 시디들을 소중하게 모으곤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플레이했던 건 <메타녀2> 였다. <메타녀2>는 메타토폴리지 대학 부속 여자 고등학교가 배경인 여고생들의 전투 RPG 게임이다. 주된 스토리 라인은 고등학교 내 동아리 전쟁이다. 동아리 간의 균형을 깨고 생물부가 반란을 일으키고, 생물부의 사주로 천문부 역시 네오 천문부와 오리지널 천문부로 쪼개진다. 주인공들은 오리지널 천문부의 일원들로 학생회 등과 힘을 합쳐 메타여고의 정의를 다시 세우려고 한다.  


   <메타녀2>의 캐릭터들은 모두 여자이다. 등장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일본 특유의 짧은 교복 치마를 입고 있지만 모두 제각기의 설정에 맞게 갑옷이나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바이오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생물부 일원은 대개 실험 가운을 입고 있고, 수영부는 수영복(비키니가 아니라 학생들의 원피스 수영복) 차림 위에 길다란 가디건을 걸쳤다. 비행부는 전형적인 파일럿 차림이다. 그외 마술부, 학생회, 천문부 모두 각자 부서의 특성에 맞게 제복을 차려입고 있다.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등장인물들의 코스튬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는다.


    게임에는 ‘메타여고'라는 제목을 상기시키지 않으면 헷갈릴 정도로 중성적인 캐릭터가 다수 등장한다. 짧은 숏컷에 강력한 공격력, 화끈한 성격을 갖춘 사토 노리코(노유리)는 대사마저 걸걸한 말투로 번역되었다. 듬직한 궁수로 등장하는 야마다 타쿠미(하유미)는 긴 생머리를 갖고 있지만, 특유의 근엄한 표정과 정제된 말투로 그녀가 여고생 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꼬마 유치원생 같은 캐릭터도 있지만 군인 그 자체 같은 캐릭터도 있다. 게임은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매력을 깊게 살려 그에 맞는 스킬과 대사, 에피소드들을 균형 있게 할당한다. 


   그러나 <메타녀2>의 인기는 사실 대단하지 않았다. 그때 정말 유행했던 건 <프린세스 메이커2>였다. 사람들 모두 너나할 것 없이 딸을 교육시키고, 아르바이트에 보내고, 무사수행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나도 <프린세스 메이커2>를 재미있게 했었는데 몇 번 C급 엔딩을 보고나선 그만 지쳐버리곤 했다. 그때가 되어 찾는 건 치트 프로그램이었다. 돈 액수를 늘리거나 매력, 기품 지수를 조정하여 왕자를 만나고 결국 ‘프린세스' 엔딩을 맞이하고 난 이후로는 딸의 미래에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치트 프로그램을 만지다가 우연히 딸이 완전히 속옷 바람으로 벗겨지는 치트가 발동되었다. 깜짝 놀랐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딸을 벗겨 놓은 채, 혹은 노출도가 굉장히 심한 레어 코스튬을 입혀 놓은 채로 플레이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패턴과 단일한 스토리 라인을 ‘보완’하는 의미로 게임은 코스튬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프린세스 메이커2>가 전체 이용가였던 반면 <메타녀2>가 19세 이상 이용가였다는 사실이다. <메타녀2>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전쟁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혼세하디 혼세한 난을 진압하고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데서 더 없이 ‘교훈적'인데다가, 캐릭터들이 겪는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이 첨예하게 표현되어 시나리오가 굉장히 문학적인데도 불구하고 슬립 수준의 코스튬이 난무한 <프린세스 메이커2>보다 더 유해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십 년도 더 된 이야기다. 


2.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갈 즈음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되고, 뒤이어 내 인생 게임인 <바람의 나라>가 나왔다. <바람의 나라>가 단일 서버였을 때부터 열성 유저였던 나는 <바람의 나라>를 시작으로 <어둠의 전설>, <라그나로크>, <퀴즈퀴즈> 등 온라인 게임 세계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대개 2D의 귀여운 캐릭터들이 아장아장 걷는 그래픽이었다. 노출도가 심할래야 심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긴 했지만 그때도 레어템은 대개 여캐의 코스튬인 경우가 많았다. 레어가 아닐 지라도 게임 내 코스튬 비중은 여캐의 것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고렙 템이거나 레어템일 수록 전투에 불편할 기다란 드레스나 원피스 종류가 많았다. 지금 <서든어택2>에서 문제되었던 것처럼 속옷 수준의 코스튬은 아닐지라도 직업적 특수성을 살린 남캐의 장비에 비해 여캐의 것은 언제나 게임 밖, 게이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졌다.


    사실 게임을 신나게 플레이하고 있던 그때는 그 내용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즐겨 플레이했던 <메타녀2>와 무언가 다르다는 위화감 정도만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메타녀2>의 캐릭터는 확실히 <서든어택2>와 달랐다. 특정한 맥락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메타녀2>의 캐릭터들은 구태여 여성스럽지 않아도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건 <메타녀2>가 유달리 여자 캐릭터들의 매력을 다중적으로 잘 살려냈다기보다는, 게임 자체의 퀄리티가 탄탄할 때 풍부한 컨텍스트 속에서 캐릭터가 저마다의 매력을 갖추게 되는 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웹툰 <게임회사 여직원들>에 보면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한국 게임 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죠. 재밌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돈이 없고, 돈이 있는 사람은 돈 버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재밌는 게임을 만드는 건 판타지다.”[각주:1] ‘돈 버는 게임’은 어떤 걸까. 모르긴 몰라도 <서든어택2>는 ‘돈 버는 방식’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서든어택2>에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은 ‘서든어택’의 세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짧디 짧은 바지, 출렁거리는 가슴, 한없이 음란스러운 여캐 시체들은 오히려 포르노의 세계에 가까운 것이다. 게임의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는 이 캐릭터들은 오로지 선정성만으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초창기 플레이하던 유저들도 대부분 ‘총을 쏘아 맞추는’ 희열이 아니라 ‘야릇한 시체를 구경하는’ 재미로 게임을 한다는 이야기가 돌 지경이었다. 


   <서든어택2>의 실패는 말초 신경의 패배다. <서든어택2> 개발팀은 게이머를 이끄는 것이 자극과 선정성이라고 여겼던 모양이지만, 그건 게임 업계가 여태 제도적으로 부당하게 제한되어 온 그 시각들과 바로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서든어택2> 개발팀은 게임을 폄하하고 무시하는 입장을 <서든어택2> 안에 완전히 내재화한 것이다. 반면 충실히 FPS의 세계를 구현하고, 그 세계관 속에서 저마다의 매력을 갖춘 캐릭터들을 적절하게 배치한 <오버워치>는 대 성공을 거뒀다. 게이머들은 여기에 정확하게 응답하고 있었다. 


3. 


   ‘프린세스 메이커’의 시대는 끝났다. 더 이상 누구도 - 디즈니조차도 ‘공주’를 만들기 위해 매달리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서든어택2>에서 본 바와 같이, 여성혐오는 (정당하지 않지만) 효과적이지도 않다. 여성의 코스튬으로 승부하고 여자 캐릭터를 언제나 반쯤 포르노의 세계 속에 위치시켰던 모든 게임들은 기획을 다시 짜야 할 것이다. 게임이 게이머를 위해 있을 지언정 캐릭터는 게이머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캐릭터는 게임의 세계관 속에 그대로 녹아 들어 있어야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된다. 


   <서든어택2>는 이 사실을 완전히 잊었거나, 무시하고 있었다. 게임의 세계관과 무관하게 창조된 캐릭터들은 방황하다가 끝내 그들의 탄생지를 ‘강남역 10번 출구’로 택하고야 말았다.[각주:2] 지금 우리 사회의 전 이슈가 몰려 있는 곳, 그리고 그 장소 자체로 ‘여성혐오’를 뜻하게 된 ‘강남역’ 말이다. 이윽고 <서든어택2>는 ‘여성혐오 게임’으로 회자되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단순히 우연으로 엮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본업이 개발자인 나는 얼마 전 모 게임 회사에서 이직 면접을 본 적이 있었다. 임원 면접에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말이 있냐길래, “게임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라고 물었더니 한 면접관이 이렇게 답했다. “게임으로 사람들이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하고 싶다.”라고. 아마 그건 그 사람 개인만의 답변이 아니라, (비록 형식적인 것일 지언정) 게임 업계에 종사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이제 다시 그 말을 게임업계에 되돌려주고 싶다. 포르노와 여성혐오, 여성 멸시와 차별은 이미 현실 세계에서 염증이 나도록 널려 있다. <서든어택2>은 단지 이러한 여성 혐오의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이어서, 게이머는 게임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엿볼 수조차 없었다. 게임이 스스로 웜홀의 기능을 포기한다면, 게이머가 굳이 그 세계에 접속할 필요가 있을까. 다시 게임이 ‘다른 세계'를 회복할 수 있기를, 그리고 2016년 7월 29일[각주:3]을 기점으로 ‘돈 되는 게임'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1. 다음 <만화속 세상> 연재 작 <게임회사 여직원들> 85화 중 [본문으로]
  2. <서든어택2>의 홍보 티저 영상 배경이다 [본문으로]
  3. <서든어택2> 개발사인 넥슨 지티가 <서든어택2> 서비스 종료를 고시한 날짜다. (서비스 종료 예정일은 2016년 9월 29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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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준석
    2016.08.08 09:1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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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궁금했는데 쓰시는 필명은 무슨 뜻인가요?
    • 2016.08.11 06: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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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사실 별 뜻은 없습니다.ㅎ 필명을 굳이 쓰는 이류는 본명에 컴플렉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 본명에 "경"이 들어가 있어서 보통 "갱" 으로 많이 불렸어요.^^ (경민 >> 갱민 식으로요 ㅎㅎ )
  2. 2016.08.11 10:1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당신은 당신의 장점이 뭔지 아시나요/
    남자들은 물이 많은 여성을 좋아합니다
    당신이 전형적인 수,,여성입니다
    다만, 지금 그것을 발견못한것 같은데
    한번 도전해볼래요


사회 : 유승태(연구소 상임연구원), 정용택(연구소 상임연구원)

패널 : 갱(만화평론가, 연구소 회원)

홍혜은(나무)

송란희(한국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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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호프집에선 한 여자가 죽었다


-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0.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떠들썩하던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거, <채식주의자> 읽어 봤냐?” “네, 당연히 읽어봤지요.” 아버지는 내 감상을 조곤조곤 물어보다가, 내가 나름 긍정적이었다고 하자 ‘큼'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난 별로더라. 어떻게 그런 소설이 상을 탔는 지 모르겠다.”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왜 별로였냐고 묻는 내게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감동이 없고, 인간적인 정도 없고.. 그런게 뭐 상을 탔나 싶다.” 


   노벨문학상에 버금간다는 ‘맨부커상’에 대해 접하곤, 아버지는 <노인과 바다>나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소설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 단단한 근육 위로 바짝 선 핏줄 같은, 노장의 짙은 풍미가 지배하는 세상 말이다.  


   아버지는 어쩐지 추천해드린 <7년의 밤>도 퍽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저 스릴러 영화 같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생신 선물을 고민하다가, 고민 끝에 시인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을 골라 들었다. <사슴>을 들고 계산을 기다리면서 나는 어떤 고집 센 취향에 대한 상념에 빠져 들었다.


1.


    얼마 전 SNS에서 대학 시절 교수님의 포스팅을 접했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아득하게 남았다. “실제로 중앙 문단의 한국문학사도 ‘순수/대중’으로 전개되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순수/대중’의 대립은 ‘순수’ 비평가의 틀이어다. 또 이 틀은 구별짓기에 기초하며 꽤 ‘혐오적’이다. 여성, 소수자, 노동자 및 대중에 대해.”[각주:1] 


   한강의 소설은 한국 문단에서 분명 ‘순수 문학’에 속할테지만 이청준, 김훈, 그리고 수많은 세계의 ‘명작 전집’을 읽어 온 아버지의 시각에서는 ‘장르 문학’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계기들이 일상의 시간을 파열내 버리고, 이윽고 소설의 세상은 현실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작가의 의견이나 목적같은 건 강하게 휘몰아치기 보다는, 바스라지는 듯한 생의 감각과 섬세하게 엮인 감각의 틀 속에 사라질 듯 말 듯 고요히 잠자고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나 <데미안>처럼 명실상부하게 얘기해주지 않고, <노인과 바다>처럼 직접 대화를 건네지도 않는다. 보여주는 건 실타락처럼 풀어헤쳐지는 어떤 기묘한 감각과 감성들 뿐. 분명 그건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세계명작 전집>에 여성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 전집들 사이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을 찾기는 극히 힘들었다. 아버지의 서재엔 <죄와 벌>, <무기여 잘 있거라>, <좁은 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방인>, <데미안>, <1984>, <위대한 개츠비> 등이 있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고전 명작 시리즈의 팔할 정도가 꽂혀 있었고, 아버지가 구매하지 않은 나머지 이할의 목록을 찾아보니 그나마 <인형의 집> 한 권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을 상황은 눈에 보이고도 남았다. 그것은 결코 순전한 개인의 취향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가 여태 접해 온 세계 명작, 그리고 고전 시리즈 가운데 여성의 세계는 거의 없었다. 여성 작가도, 여성성의 세계도, 그리고 여성이라는 질문 조차도.


2.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근처에 위치한 호프집의 공용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 시간이나 화장실을 서성였던 가해자는 이십대의 여자를 발견했고, 그녀는 억울하게 살해 당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간에는 ‘나는 너다’ 혹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라는 포스트잇이 붙었다. ‘여성혐오 범죄’라는 말이 끓어 올랐고, 너무나 쉽게 반대편의 전선이 생겨났다.


   이 전선에서 한 발짝 떨어진 일각에서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목소리를 두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 고 했다. 정신분석학과 수사학은 이 사건을 조현증 환자의 개별 문제로 보았고, 사회학과 여성학은 한 사람의 가해자보다 그를 둘러싼 이 사회 속의 여성 혐오 문화를 지적했다. 서로의 결에 따라 분석하고 도출해낸 결과였으나 합리와 객관은 전자가, 비약과 감성은 후자가 각각 차지했다. 남녀 뿐 아니라 학문 역시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학문과 전문가도 그랬는데 비전문가인, 순전히 ‘여성’일 뿐인 그녀들의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인해 여성들의 공포 수위는 끔찍하게 치솟았는데,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되려 ‘남성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이 모든 일은 고인의 삼일장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한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영혜는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다. 왜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느냐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꿈을 꿨어"라고 나직이 답한다. 그녀의 꿈은 붉은 피와 날것의 고깃덩어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꿈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고기를 끊고, 브래지어를 풀어버린다. 영혜의 남편은 ‘고기 냄새가 난다'며 섹스를 거부하는 영혜를 강제로 벗겨 삽입하고, 아버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영혜의 입에 강제로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단지 그녀는 채식을 할 뿐이었다. 


   영혜를 둘러싼 남성성의 세계는 영혜를 혐오했다. 티셔츠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유두와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그녀의 식성, 그리고 지극히 비합리적인 그녀의 이야기까지-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입을 틀어 막고, 멸시하고, 폭행하고, 강간했던 것이다.


3.


   한강의 소설에 대해 ‘K문학의 쾌거'라고 묘사하는 사람들은 ‘여성혐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같은 날 일어난 대조적인 이 두 사건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졌다. 한 여자의 성공은 사회가 너무나 손쉽게 취득해 가는 데에 반해, 다른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책무에 대해 모두가 침묵한다. 아니, 침묵을 넘어서 그 책무에 대해 열렬히 반대한다. 그것을 ‘남성 혐오'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일부러 오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성혐오'라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멸시하고 혐오하고 조롱한다. 심지어는 성적인 표현을 끌고 들어와 모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언제나 ‘너무 과잉되었다.’라는 평가는 늘 ‘여성 혐오’를 주장하는 그녀들의 몫이다. 채식을 고집했을 뿐인 영혜를 향해 모두가 힐난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 모두가 실은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도 하고, 주말에는 아기를 잘 돌보는 사람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군대도 다녀온데다가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게 ‘잠재적 가해자'라니, 분노할 수밖에 없을 일이겠지만 ‘여성혐오'라는 말은 오직 당신만을 탓하는 게 아니다. 고전 문학 시리즈에 여성의 작품이 없는 것, 역사 책에 여자란 선덕여왕과 유관순밖에 없는 것, 대기업 임원급에 여자는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사실들. 이 모든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던 영혜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안돼?” 그녀는 그녀의 몸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했고, 그에 대해 인정과 존중을 받기 원한 것 뿐이었다. 바라건대 영혜와 함께 질문해주시라. ‘그러면 안되는 걸까? 왜 안됐었을까’라고. 대답이 아닌, 질문조차도 우리에겐 희망이다.


   꽃보다도 아름다울 나이, 그녀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 웹진 <제3시대>

  1. 천정환 교수 페이스북에서 발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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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진짜 여성'에 대하여


- 장강명 소설 [댓글부대]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0.


    이 글은 <댓글부대>에 다는 하나의 긴 댓글이다. 내 뒤엔 합포회도 없고, 수십만의 조작된 ‘좋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은 쏟아지는 다른 컨텐츠들에 금방 묻혀버릴 것이다. 그래도 구태여 이 글을 쓰는 건 <댓글부대>의 독자인 나, 불쾌하고 속상한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 대부분의 댓글이 그런 목적에서 쓰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1.


   <댓글부대>의 주요 전선은 정치 성향이 아니라 젠더였다. 여초 커뮤니티를 붕괴시키는 것이 팀-알렙의 목적이어서만은 아니다. <댓글부대>에서 여성은 가장 하찮고 대상화된 존재인 동시에, 가장 중요하며 언제나 중심에 있다. 둘의 증오는 여성이 자의식을 가진 하나의 주체로 등장했다는 데에서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들에게 여성의 주체성은 그 자체로 남성의 기득권 상실이다. 마음대로 가슴을 주무를 수 없고, 내키는대로 섹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의 성욕을 반영하는 것처럼, <댓글부대>에서는 섹스가 매 챕터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룸살롱과 안마방에서 시작해 요정에 이르기까지 작품 내 등장하는 다양한 성매매 장소는 팀-알렙과 합포회의 남성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남성성은 진보로 표방되는 여성(혹은 여성으로 표방되는 진보)에게 끊임없이 위협 받는데, 그래서 더욱 더, 팀-알렙과 합포회의 남자들은 본인들이 지배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성기로서의' 여성들 속으로 파묻힌다.


    팀-알렙과 합포회의 일원들은 성매매 업소에서만 쾌락과 안정감을 느낀다. 잠시동안 합포회의 일원이 미팅을 주선했던 ‘강연 카페'같은 곳들은, 그들이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트렌드이자 위협이다. SNS와 온라인을 지배하지 않으면, 지금의 돈도 권력도 깡그리 무력화될 것이라는 불안도 같은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들이 지배하지 못했고,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공간들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선다. 그래서 합포회는 몇 천만 원의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지능형 댓글 알바'인 팀 알렙-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공간을 붕괴시켜 이윽고 온라인을 지배하기 위해서. 


   이러한 맥락에서 합포회는 팀-알렙에게 진보적 정치 성향을 띤 여성 커뮤니티를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팀-알렙은 합포회에서 준비해 준 커뮤니티 아이디들을 활용하여 커뮤니티 안에서 논쟁의 불씨를 피우고 싸움을 부채질해가며 손쉽게 커뮤니티를 붕괴시킨다. 그들은 여성 커뮤니티에 내부 균열을 일으켜 회원 간 갈등을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이중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사회의 폭력성’을 누구보다도 경계하는 이들이 조그마한 계기가 주어지자 내부에서 서로를 ‘폭력적’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댓글부대>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듯 했다. “온라인에서 제 아무리 여성/진보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실제 세력은 남성/보수들의 손아귀에 있으며, 온라인도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깨부술 수 있다”고. 그러나 <댓글부대>라는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다른 메세지는 이렇다. “아무리 온라인을 누군가 침입해서 깨부수더라도, 여성/진보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는다.” 


   끝내 그들이 여성을 혐오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커뮤니티를 부술 뿐이지, 여성을 부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여초 커뮤니티 하나를 끝장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보의 ‘망조'를 불러낸 건 아니다. 손에 꼽는 국지전이고, 어차피 이들은 그들의 커뮤니티 하나를 잃었을 지언정 스스로의 정체성에 위협을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댓글부대>라는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신변상의 위협을 느끼는 건 팀-알렙과 합포회다. 커뮤니티의 여성들은 기껏해야 고소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할 뿐이다.


2. 


    나는 현실과 허구의 영역이 모호할 정도로 세심하고 사실적으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유독 젠더 양상만 극단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여성들 중에서도 그가 채택한 건 극단의 여성상이었다. 한 부류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팀-알렙, 합포회 남성들에게 성적 쾌락을 주는 여성들이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여초 사이트에서 정치적 성향을 뚜렷하게 내보이며 팀-알렙, 합포회를 은연 중에 비웃는다.(실제 비웃지 않았더라도, 팀-알렙과 합포회는 여초 커뮤니티의 회원들이 자신들을 비웃고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한다.)


   이 극단화된 여성상은 온라인의, 그것도 남초 커뮤니티의 상상적인 여성상을 그대로 베껴 놓은 듯 했다. 그에 비하면 그나마 작중의 남성들은 다양화된 편에 속한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임을 이해하고 있는 K신문 기자와 업소 여자에 대해 저속한 뒷담화를 나누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들과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찻탓캇, 여자는 그저 노리개로만 취급하는 합포회까지 나름의 스펙트럼을 갖추고 있다. 


   <댓글부대>는 온라인에서 과잉묘사된 여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마치 정말 있는 여자처럼, 어딘가에서 본 사람처럼. 사실 이건 남초의 보수 커뮤니티에서 여성 혐오를 부풀리는 데에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사실이 아닌 사건을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날조하면서 ‘역시 김치녀 클라스’라는 식으로 여성을 매다는 것이다. 


3.


   <댓글부대>의 남성 캐릭터는 입체적이다. 특히 <댓글부대>의 주요 화자인 찻탓캇이 그렇다. 본인들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 어떤 불안감을 직시하고, 성매매 여성을 ‘더럽게’ 보면서도 그녀들에게 어떤 연민과 애정을 가진다. 그러나 <댓글부대>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단편적이다. 이중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작중에 여성 ‘캐릭터’는 없다. 이 작품에서 여성은 그저 ‘관찰된 객체’로서만 존재한다. 


   <댓글부대>가 지닌 리스크는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장강명은 <댓글부대>가 진보와 보수, 그리고 온라인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작중에 설정된 여초 커뮤니티의 이미지와 성매매 업소들의 비중 때문에 사실 ‘정치적 성향’의 문제는 크게 보이지 않았다. 구태여 짚는다면 ‘역시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군’이라는 뻔하디 뻔한 클리셰 정도. 오히려 읽혔던 건 이런 말이었다. “조작 가능한 건 ‘정치적 여론’이 아니라 ‘성별 간 적대감’이다.”


   나는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여성을 ‘된장녀/간장녀/생강녀’라는 식으로 개인들의 다양한 성질들을 과장하여 구분짓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어째서 우리 사회의 성적 구도는 늘 한결같이 ‘극단적’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혐도, 여혐혐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쉽게 구분하고 판단 짓지 못하는 개인들이 다양하게 있을 뿐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스타벅스를 좋아하면서(된장녀) 에코백을 메고 다니는(생강녀) 사람도 분명 있는 것처럼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전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극단’과 ‘중간적인 것’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문단만을 여기 옮겨 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극단에 적용될 것이네. 다시 말하면 매우 신속한 것과 매우 느린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검은 것과 흰 것 등등. 이처럼 모든 것에 있어서 극단은 희귀한 데 비해 그 중간적인 것은 대단히 많은 법이네. 자넨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관찰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나?”[각주:1]  


   나는 이 질문을 그대로 장강명에게 돌리고 싶다. ‘자넨 중간적인 여성에 대하여 관찰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나?’[각주:2] 정말로?  



ⓒ 웹진 <제3시대>

  1. 플라톤 저, <파이돈> 중 [본문으로]
  2. 이전에도 나는 장강명 작품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아쉬움에 대하여 쓴 적이 있다. <표백>, <삶어녀 죽이기>, <한국이 싫어서> 의 여자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비현실성과 마녀성이 주제였다. 해당 글 원문은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http://ichungeoram.com/958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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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이름으로_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몇 년 전부터 친족을 상대로 한 범죄 행위가 뉴스에 끊임 없이 등장한다. 물론 이건 현대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만 해도 자신의 형제를 가차없이 죽였던 인물이고, 가족의 비극을 낳는 이러한 왕족의 역사는 어느 나라에서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인류가 이야기를 시작한 이래로 가족은 수 많은 문학, 연극,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한때 한국 문단에서도 신춘문예에 당선되려면 무조건 가족을 소재로 써야 한다는 공식이 있었을 정도다. 


   가족은 진부하고 구태의연하다. 문학 작품의 소재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의 영역에서도 그 하나하나의 역할들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 아빠, 딸, 아들. 호칭은 그대로 이름이 되고, 우리는 여기에 때때로 이름들을 더하고 빼며 자를 대고 그린 것만 같은 올곧은 직선으로 ‘가족'이라는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수 세기의 작품들이 단호하게 지시하는 것처럼,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1. 

    이름은 공식적으로 가족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성을 나누거나 출생, 입양 등을 통해 성과 이름을 물려주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경우엔 돌림자로 이름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황정은의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의 가족은 이름도 비슷하지 않고, 성씨도 나오지 않는다. 부모에게도 엄마, 아빠라고 하지 않고 애자, 금주씨라고 부른다. 엄마인 애자는 소라와 나나의 양육자로서의 엄마라기보다는 금주씨를 끔찍이 사랑했던 연인이고 소라와 나나도 피를 같이 하는 자매라기보다는 서로를 애틋하게 챙겨주는 동거인 관계에 가깝다. 오래 입어 느슨해진 바지 허리춤처럼 이들이 지닌 가족적인 색깔은 엷디 엷다. 소라가 표현하듯, 정형성을 입은 다른 가족이 ‘물감으로 그린 가족'이라면 이들은 ‘간장으로 그린 가족'이다. 


   소라와 나나의 가족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애자가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았던 금주씨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이후, 애자는 남은 생을 놓아버린다.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다가,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음식을 하기도 하고, 또 어딘가를 향해 훌쩍 떠나버렸다가 느닷없이 돌아오기도 한다. 생의 이유를 잃은 애자는 소라와 나나에게도 인생이란 너무나도 허망한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아직 어렸던 소라와 나나를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건 그때부터였다. 기댈 친척도 없었으니 소라와 나나는 둘이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런 소라와 나나를 대신 돌본 것은 순자였다. 순자는 배가 고파 쉰떡을 데워 먹던 소라와 나나의 손에서 떡을 빼앗아 먹어버리고 떡 대신 따뜻한 밥을 차려주었다. 또한 소라와 나나에게 늘 점심 도시락을 챙겨주고, 때가 되면 같이 만두를 빚곤 했다. 나기와 소라, 나나는 그때부터 늘 함께였다. 나기의 존재는 특별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옆집 남자아이에서 소라와 나나를 은근히 챙겨 주는 가족이 되기까지 크게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몇 년 동안 밥을 함께 먹었고, 서로의 등굣길을 함께 했을 뿐. 그렇게 조용히 이어져 온 일상은 방치되었던 소라와 나나를,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없어질 뻔한 이 두 삶을 천천히 다시 끌어 올렸다. 소라와 나나가 ‘계속해'볼 수 있었던 것, 그 뒷편에는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무엇보다도 커다란 이 일상의 지속이 있었다. 


   소라와 나나의 이름이 의미를 갖게 된 것도 아마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나기의 이름은 소라와 나나와 합하여져서 ‘소나기'라는 단어를 갖는다. 가족이 나누는 작명법과는 완연히 다르고, ‘소나기'라는 단어가 그렇게 특별히 의미있는 단어도 아니지만 이렇게 만들어 진 새로운 이름은 새로이 구성된 이 관계를 다른 가족들과 사뭇 다르게 품어 낸다. 한 단어를 쪼개어 나누어 가진 이름처럼, 이들의 동행은 서로의 삶에서 ‘따로 또 같이' 다.


2.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나의 뱃속에서 열 달을 길러 아기를 낳아 만든 나의 가족. 이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내가 우리 집으로 불러들여 가족으로 삼을 수 있을까. 기꺼이 손 내밀고 싶은 사람은 너무나 많지만 계약으로도 혹은 혈연으로도 맺어지지 않은 완연한 타인을 내가 지금의 가족처럼 사랑하고 보살필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의 방법을 찾고 싶었고, 그 생각 끝에서는 이런 물음이 들었다. 어쩌면 사랑을 넓힐 수 있는 방식은 기존의 가족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에서 확장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부둥켜 묶어 놓은 매듭을 한 겹 풀어내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기를 낳고 기르면서도 나는 종종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건 불공평한 게 아닌가. 사람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고, 누군가가 와주기를 바라며 울고 있는 수만의 아기들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단지 내가 낳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아기만을 사랑해 준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설픈 박애주의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답이 없는 이 생각 속에 도착한 사실은, 우리네의 가족이 너무나도 편협하다는 것이다. 이 편협함은 가족을 둘러싼 안팎으로 나타난다. 가내 집기가 날아다니는 대형 폭력이 발생해도 경찰들은 부부싸움이라고 하면 끼어들지 않는다. 그와 동일선상에서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 자체도 수면 위로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족의 일이니까 제 삼자는 신경을 꺼야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족의 일이기 때문에 가족의 구성원들은 무엇에든 강제된다. 그래서 이 가족 내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반복되는 폭력의 굴레 속에 사로잡혀 버리고, 바깥 쪽의 사람들은 이 완고한 경계선 안으로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순자 역시 가족의 틀에 그대로 사로 잡혀 있던 사람이었다면, 소라와 나나는 지금처럼 살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담벼락 안으로 불쑥 들어 온 순자의 손은 이들에게 수치심을 주지도 않으면서 이 두 소녀에게 자신의 아들과 같은 자리를 기꺼이 내주었다. 게다가 여전히 이들 사이에 놓여진 낮고 얇은 이 담벼락 하나는 이들의 관계를 확장된 가족이라기보다는 ‘따로, 또 같이'하는 새로운 관계임을 암시한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는 데에 있어 가족이라는 단어 외의 것으로도, 그러니까 서로에게 정해진 역할과 의무의 굴레를 씌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분명 ‘계속’될 수 있음을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는 이름을 나눠 갖기로 하자. 

   아주 공평하게. 


   지금까지의 시간은 

   너무 이기적이고 외로웠어. 


   우리는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와 

   수많은 머리칼이 있지만 

   나의 몫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신해욱, <따로 또 같이> 중  


   가족의 몫은 언제나 분할된다. 가사일은 엄마의 역할, 직장은 아빠의 역할, 애교는 딸의 의무이고 가족의 미래는 아들의 것. 그러나 <계속해보겠습니다>에는 엄마도, 아빠도, 딸도, 아들도 없다. 그곳에는 마음이 따뜻한 순자와 열정적으로 금주를 사랑했던 애자, 나나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소라, 자신의 의견이 분명한 나나, 차분한 나기가 어울려 산다. 서로의 역할을 강제하지도 않고, 따라서 의무도 책임도 없다. 딸도, 아들도 아닌 이들은 그저 떨어져 나온 한 명, 한 명의 하찮은 개인이지만 이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공존의 방식을 모색한다. 


   나나가 임신한 아기는 그야말로 이 이야기의 정점이다. 기꺼이 아기 아빠와의 결혼을 거부했으니 나나의 아기는 이제 나나와 소라, 나기의 아기로서 자라게 될 것이다. 단순히 형태가 다른 가족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이라는 단단하고 견고한 벽이 일견 허물어 진 공동체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 공동체에는 ‘가족'과 같은 끈끈함은 없다. 언제든 툭, 끊어져버릴 것 같지만 이들은 서로를 먼 발치에서 늘상 바라보고 있다.


   나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소라 너는 ‘소라'라는 부족, 나나는 ‘나나'라는 부족, 나기는 ‘나기'라는 부족. 이 세상엔 한 명 뿐인 부족도 있는거야.’ 이들의 동행은 이렇다. 서로를 같은 부족으로 섣불리 에두르지 않고, 한 명 한 명을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 세워 준다. 이들의 이름은 쪼개지지도 겹쳐지지 않는다. 단지 나란히 서로에게 어깨를 기댄 채 그렇게 서 있다. 계속해서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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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지보수자의 편지_소설 <표백>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1. 

    이 글을 쓰는 나는 시스템 유지보수 인원이다. 영어로 SM(System Maintenance) 인력이라고 한다. 돈이 오가는 인터넷 뱅킹, 수강 신청을 위해 접속하는 대학교 인트라넷, 혹은 자잘한 인터넷 쇼핑몰이나 소규모 출납 관리 시스템들에도 나와 같은 SM 인력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개 비슷하다. 처리가 잘 안된다는 사용자의 단순 문의부터 시작해 시스템의 기능을 이러저러하게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기능 개선 의견 등을 접수하고, 때에 따라서는 변동된 세금 정책에 맞추어 시스템의 계산 로직을 변경한다.


    현실 세계의 가능성을 기준으로 하면 시스템은 늘 그보다 두 발짝, 혹은 세 발짝 뒤에 있다. 이미 현실 세계에서 확정된 것들만 시스템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때로 기술이 현실을 리딩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필요성이나 상상력은 이미 사람들 대다수가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는 불편함 속에 이미 존재해왔다. 기획자는 그러한 불편함을 조금 더 날카롭게 캐치하는 사람이고, 나와 같은 시스템 유지보수 인력은 선두 그룹이 재빠르게 만들어 둔 시스템들이 이미 한참 전에 철이 지났음에도, 뒤처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땜빵하고 도색하는 역할을 한다.


    《표백》에서 자살 선언을 이끄는 세연이 본다면 기가 찰 노릇이다. 획기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아니고, 심지어 ‘그려진 밑그림에 따라 개선하는 일(77쪽)’도 아니며, 그저 이 구식 퇴물을 퇴물로 보이지 않도록 질질 끌고 가는 일이다. 시스템이 누렸던 가장 큰 영광은 다른 이들이 이미 맛 본 후라 단물이 쪽 빠져 버린 이 늙은 시스템을 하루하루 연명시키는 것이 나의 주된 노동인 것이다. 물론 세연이 바라보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도 그다지 어울리는 시스템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이루는 본연이라면 어떨까.


2. 

    장강명의 장편소설 《표백》은 이 시대 청년들의 좌절과 절망이 세상의 완벽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하는 한 청년, 세연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의 논리는 이렇다. 이 세계는 이미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어떤 노동도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1970년대 정서를 지배했던 새마을 운동과 같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노동도 아니고, 90년대 벤처붐 때와 같이 신기술을 주도하는 노동도 아니며 지금의 노동은 그저 있는 시스템을 ‘유지보수'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 시대의 개인들은 어떠한 이념이나 당위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생존만을 위해 노동한다. 여기에서 청년들의 삶은 아무리 노력해도 생존을 위한 삶 그 이상을 넘어갈 수 없고, 그조차도 선택된 소수에게만 가능하다.


    그리고 세연은 이 티 없이 완벽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싶다. 모두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예수와 같은 선구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자살이다. 그것도 이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조건을 갖추어, 일반적 기준에 비추었을 때 자살할 이유가 하등 없는 상태에서 수행하는 자살이어야 한다. 그녀는 그녀와 그녀를 뒤따른 연쇄 자살이 완벽한 이 세계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해석 불가능의 영역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성공이 예정된 청년들의 자살로 하여금 이 세계의 작동 원리로 포섭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살하기 위해 사회적 성공의 토대를 마련한다. 삼성전자 합격, 대학원 수석 졸업, CPA 합격 등이 그것이다. 아무리 봐도 자살할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자살을 ‘연출’하는 것이 세연과 세연 무리의 목적이다. 그리고 자살 직전 이 세상에 반대한다는 메세지를 남긴다. 그들은 이것을 ‘자살 선언'이라고 불렀다. 이 자살 선언은 완벽하게 새하얀 이 세계에 어떠한 색도 더하지 못하는 다른 청년들, 이른바 ‘표백 세대'를 대신해 세상에 핏빛 얼룩을 새겨낸다. 그리고 그 얼룩은 작중의 사회 구성원들 뿐 아니라 <표백>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까지 붉게 스며든다.


   이것은 상처다. 오래도록 아물지 않을 것만 같은 상처. 세연의 자살 선언은 살아남은 자에게도, 혹은 이들과는 다른 이유로 자살을 선택한 이에게도 이 사회에서 패배했다는 수치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이들이 견디어 온 삶은 살아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구차해진다. 세연이 잡기에 빼곡히 적어 둔 논리의 망을 피해 ‘살아야 할 이유’[각주:1]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사람들의 잘못인가. 우리 사회는 누구에게도 살아야 할 이유를 주지 않았다. 숨이 붙어있기 바쁜 세상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다시 되돌아 우리를 상처 입힌다.


   세연은 우리의 노동이 단지 세상을 유지보수할 뿐이며, 따라서 우리의 삶은 이 완벽한 세상의 부품 이상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제시하는 자살 선언에도 삶이 들어 설 자리는 없다. 이 자리를 대신 채운 건 그들의 죽음을 완벽하게 연출하기 위한 내러티브 뿐이다. 세연이 하고 싶었던 것, 가고 싶었던 곳을 포함한 그녀 본인의 열망들은 혹시라도 자신의 자살이 오독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가차없이 희생된다. 세연의 친구들 역시 그들에게 남은 생의 나머지 시간을 성공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소진한다.


   그녀가 제시한 자살 선언자들의 죽음은 그녀가 닮고 싶어한 예수의 죽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는 그가 살아 온 삶의 연장선 상에서 그간 그가 지켜내 온 삶의 가치들을 고양시키는 마지막 정점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세연이 선택하는 죽음은 오히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가 자신의 시스템을 지켜내기 위해 인간들의 삶을 부품으로 격하시키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들은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가 제공하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인간의 무쓸모 등을 자살이라는 행위로 맞받아 쳤지만, 그 자살 안에도 결국 삶의 의미는 없었다. 세연과 그녀의 친구들 역시 그들의 삶을 자살 선언을 감행할 수 있는 조건 정도로만 축소시켰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오랫동안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던 세연의 안으로 괴물의 심연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각주:2]


   세연도 이를 알았을 것이다. 그녀의 삶이 온전히 자살 선언만을 위해 맞추어져 있고, 그러한 삶의 주인공은 세연 자신이라기보다 단지 영웅을 꿈꾸는 한 명의 청년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세계에 자신이라는 존재의 발자국을 찍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상처 입히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세연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 상처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윽고 자살 선언을 이행하는 날, 세연은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3. 

   그러나 분명 이 세계에 절망만이 남겨진 건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시대를 유동하는 근대라고 정의했다. 세연이 묘사하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더 이상 변형 불가능한 고체에 가깝지만, 사실 이 세계는 끊임없이 일렁이는 거대한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 지구가 회전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이 세계의 일렁임도 결코 멈출 수 없다. 한 예로 얼마 전 한국 사회를 두려움에 몰아 넣었던 메르스 사태를 떠올려보자. 메르스 사태로 사람들은 그토록 거대했던 사회가, 꿈쩍도 하지 않을 것만 같던 세계가 경제활동의 둔화에 따라 서서히 중단되는 것을 목격하고 공포에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염병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던 사람들의 경제활동 감소는 은유로서가 아니라 하루 끼니가 달린 누군가의 생계였기 때문이다. 메르스 국면이 완화됨에 따라 경제활동도 도로 페이스를 회복했지만, 이는 현대 사회의 성격을 비약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즉 지금의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정체된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일렁이는 어떤 움직임이다. 만약 어느 순간 이 움직임이 중단된다면, 그건 그 자체로 이미 다른 세계를 뜻할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일렁이는 사회의 특징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세연이 ‘자살 선언'을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었던 명불허전 대기업인 삼성 그룹의 내일조차도 말이다. 성공은 극소수에게만 허락되는 보상이지만 이조차 지속 가능하지는 않다.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실패가 될 수 있고, 오늘의 패배자가 내일의 승리자가 될 수도 있다. 명백한 성공이란 그 스스로도 흥행에서 참패한 자기계발서에 박제되어 있을 뿐이다. 오히려 확실한 건, 이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이 안에서 보장되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건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게도 동일하고, 노년에게나 청년에게도 똑같다. 성공의 가능성 뿐 아니라 윤리 규범이나 가치 또한 불확실하며, 지속적으로 변동된다. 


    따라서 이 세계는 지속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가시적으로 보고 있는 이 세계는 어제의 연장이 아니라 어제와는 미묘하게 또 다른 시공간일 지 모른다. 어제까지 건실하던 회사가 오늘은 망해버렸고, 어제 범죄자로 취급되던 아이돌은 오늘 다시 명성을 회복했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는 이 거대 시스템은 그 자신조차 통제가 불가능한 하나의 흐름이다. 여기에 어제도 오늘도 존재하는 것은 이 시스템이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유지보수자들의 노동 뿐이다.


    따라서 이 세계를 시스템으로 환원시키자면 이 시스템의 본질 역시 전면에 있지 않고 그 후면에, 즉 어두컴컴한 전산실 속에 있다. 세연은 유지보수의 노동이 새로운 것의 설계나 건설과는 다른 것이라고 선을 긋지만, 사실상 이 노동은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근원적인 힘이자 언제든 이 세계를 중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결국 이 세계가 우리의 노동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이 세계의 끝도 노동으로써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4.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는 자의 변명일까. 나는 나의 노동이 그리 부끄럽지 않다. 내가 어떤 시스템을 유지보수하건, 유지보수자는 시스템의 황금기를 누릴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이미 이 시스템이 최초 도입되었을 때 받았을 영광과 찬란함은 다른 이의 것이고, 그 이후의 필요성을 위해 퇴물이 되기 시작한 시스템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우리는 시스템과 동고동락한다. 안쓰럽기도 하고, 증오스럽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자식 같기도 한 시스템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질질 끌고 나간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는 총체는 실상이 없는 추상과도 같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의 그림자에는 나와 같은 수많은 유지보수자들이,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두컴컴한 전산실에 숨어 있다. 결국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란 모두가 애증으로 다루고 있는 시스템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환상과도 같다.


    그것은 첨단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래의 기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맨손의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며 출시된 순간부터 노쇠되어 간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는 세계가 끊임없이 일렁이듯이, 시스템조차 변화되지 않고서는 제 자리를 유지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완성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스템은 완성된 즉시 미완성의 길로 들어선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자들의 시스템 유지보수 자체는 시스템에 이끌려가는 부품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을 앞서 이끌고 가는 노동이다.


    이것을 가능성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 할 수 있다면 나는 현실에 존재할 세연들에게 감히 죽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의 시도가 헛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당신이라는 생명을 이 세계의 얼룩 정도로 꺼뜨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유지보수하는 일개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이 세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신과 같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실낱같은 가능성을 붙잡고 당신에게 사라지지 말라고 말을 건네고 싶다. 이 편지가 부디 닿기를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1. <표백> 작중 화자인 적그리스도는 세연에게 반대해 ‘디스이스리즌닷컴'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하고자 마음 먹는다. 세연의 자살선언을 싣는 ‘와이두유리브닷컴'에 대항하고자 함이다. [본문으로]
  2.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 프리드리히 니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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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에, 당신, 당신, 당신들 뿐


(연구집단 CAIROS)



 태초에 말이 있었다.

 나는 항상 이 문장이 궁금했지만, 왜냐는 물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어떤 말이었을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내게 일어났던 ‘어떤 일들’,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내 ‘감정들’까지 나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말하지 마. 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십 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금기는, 내게 사랑하는 것보다도 먼저, 나를 사랑해주는 모두에게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르쳤다. 단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숱한 사례로 교육받아왔다. 나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나 자신, 그리고 아무도 없는 어둠 속ㅡ장롱 안 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장롱 안에 있었다. 장롱 안에서 말을 던지면, 목소리는 뿌연 안개와 같은 메아리로 내게 돌아왔다. 나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자주 나에게 묻고, 나에게 대답하는 식으로 어둠에 대화를 걸었다.
 장롱 안은 어두웠지만, 문틈의 빛줄기가 칼날같이 날카롭게 반을 가르는 곳이기도 했다. 장롱 안에서 나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는데, 가끔 누군가에게 발칵 문이 열릴 때면, 하릴없이 튀어나와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혹시나 백마 탄 왕자님이 마음 넓게 귀를 쫑긋 세워줄지도 모르니까. 빛줄기가 문 앞에 선 누군가에게 가려져 완전한 어둠이 될 때, 나는 공포와 설렘으로 마음이 뛰곤 했다.

 죽음과 삶이 있다.
 언제나 단절된 것이었을까. 나는 이것도 궁금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어둠 속이었으므로, 나는 생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는 죽음이 내게 가까웠고, 나는 장롱 속에 들어가듯 죽음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죽음을 동반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알지 못했지만, 확실히 삶은 죽음보다 훨씬 먼발치에서 그 자신을 방조하고 있었다.

 삶은 언제나 나를 짓눌렀지만, 죽음은 늘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죽음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 죽음은 슬그머니 다가와 내게 말을 들려주었는데, 그건 반쯤은 우렁찬, 검은 강의 물소리였다.

 
1.

 여자의 강이었다. 《The Hours》(스티븐 달드리, 2003)의 강이라거나, 《시》(이창동, 2010)의 강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 두 여자가 내처 몸을 맡긴 것만큼 중요했던 건, 그들의 편지였다. 각각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세상과, 그녀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는 《The Hours》에서 낭송되었던 것과는 다른, 버지니아 울프의 실제 유서 중 한 단락이다.

“(전략)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했고, 당신[각주:1]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애를 느껴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건, 정신병 때문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죽어갈 생명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강물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와 함께 했던 건 단 한 장의 편지-그리고 편지를 읽는 하나의 목소리, 그러니까 내게 다가온 ‘말’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저작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을 상상했었다. 셰익스피어만큼의 열정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의 ‘불우한 성별’은 그녀를 예술가로 만들어줄 수 없었고, 끝내 그녀는 이름 없는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상상은 단지 비극으로 그치지는 않았다. 오히려는 희망찼는데, 그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에게 언젠가 이름을 불러줄, 그리고 이름을 넘어 그녀 자신만의 방, 누구에게도 점유되지 않는 그녀만의 온전한 몸을 돌려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만약 한 세기가 더 지난 후, 우리 모두에게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신만의 방이 주어지고, 우리가 자유를 습관으로서 가지고, 또한 생각하는 그대로 글로 써내는 용기를 지닌다면, 현실 속 서로의 관계에서 인간을 파악하고, 사실을 사실로서 바라보고, 우리를 이끌어줄 팔은 없으니 결국 홀로 걸어가야 하며, 현실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인식한다면,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었던 죽은 시인은 그녀의 버림받았던 육신을 다시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 믿습니다.[각주:2]

 여기에 하나의 진실이 있다. 버지니아는 글로써 저항하다가 절필과 동시에 몸을 던졌고, 그것은 분명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삶들을 사랑하는 의미였다. 그녀에게 ‘몸’은 매초마다 펌프질하는 심장이 아니었다. 오히려는 언제든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물로) 걸어가는 것은 오로지 ‘홀로’였음에도, 걸어갈 ‘육신’은 다른 이들의 자가 인식을 통하여, 그러한 인식들이 뒷받침되는 세상을 통하여 다시금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생명을 위한 자살’이라는 건 결코 모순이 아니었다. 온몸을 던진 그녀의 투쟁을 통해, 그녀는 재차 반전과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들에 대한 인식의 울림, 거듭된 각성에의 요청이었다. 오로지, 생(生)들을 위한.
 이러한 맥락에서, 《시》의 <아네스의 노래>는 물에 뛰어든 소녀의 육신을 되살려냈던 진정 시/노래였다. 누구의 귀에도 와 닿지 않았던 소녀의 말은 무던히 허공을 떠돌다가 이윽고 미자(윤정희 역)와의 시/노래로 드러난다. 그제야 그녀는 그녀의 사랑했던 것들과 작별 인사를 건넬 목소리를, 그리고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미자는《시》에서 항상 두 차원의 공간을 떠돌아다닌다. 남성성이 지배하는 일방적 권력의 현실과, 그녀와 사물이 편견 없이 공존하는 시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양 쪽 모두 언어의 장이었고, 실제로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도록 혼재되어 있었지만, 양쪽의 경계가《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던 건 미자의 망각 덕택이었다. 그녀는 현실을 끊임없이 망각했고, 그 망각의 순간동안 대신 그녀는,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집중했다. 꽃, 새소리, 나무, 살구…미자는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피며 글들을 메모했고, 그것은 바로 그녀가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 방법이었다. 동백꽃을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짙은 고통으로 보고, 살구를 땅으로 뛰어들은 하나의 몸으로서 대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소녀가 뛰어들었던 강을 만났을 때 그녀의 메모지를 채운 건 어떤 글귀가 아니라, 단지 물방울이었다. 침묵이 아닌 깊은 애도, 말로서 꺼내질 수 없는 하나의 슬픔을 그녀는 마주쳤던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는 그녀와 소녀의 고통으로 탄생한 노래다. 생전에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여성이, 서로의 고통이 겹쳐지는 순간, 현실과 시 양자의 관계를 뒤바꾸어 놓는 몸의 말을 발화하는 것이다. 시는 작중에서 언제나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 어떤 논리로도 접근 불가능한 것, 즉 정복할 수 없는 잉여의 것으로 남는다. 시를 쓰기 위해서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강사의 말은 “어렵다”에 내포된 논리와 해석의 위계들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바로 이 안에서 ‘말’이 떠오른다. 어떤 이해관계에도 포섭되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관계를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의 몸 저 쪽 끝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통의 소리.
 성서의 누가복음 7장에는 한 청년이 등장한다. 과부의 아들로 지칭되는 이 청년은 죽어 관에 실려 나가는 중이었다. 예수가 관에 손을 대고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했을 때, 청년은 일어나 앉아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음에서 막 깨어난 그가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각주:3] 
 과부의 아들로서 어떤 삶을 살아냈을 지, 그 이른 나이에 어떤 이유로 죽었을 지, 아무도 몰랐지만, 예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 고통들을 감싸 안고,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을 때, 그는 이윽고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몸의 일어남과 동시에 터져 나왔던 그 말들은, 어떤 말이었을지 감히 추측할 수도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은 바로 고통 자체, 몸 자체인 말이었다는 사실이다.

2.

 그리고 말은 흐른다. 편지가 끝난 후에도 강은 여전히 흐른다.
 여기에서 물음은 남는다. 이 물소리는 왜 미자에게만 들렸을까. 소녀의 어머니조차 다가서지 않았던 곳에, 소녀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미자가 그 자리로 다가갔을까. 혹은, 왜 버지니아 울프가 죽었어야 했을까. 전쟁터와는 다소 먼 시골에서 살았던 그녀가, 그녀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던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왜 그녀를 던져야 했을까. 혹은…그 청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이 왜 예수였던 것일까. 잉여의 물음에 잉여의 언어로 대답한 것은, 이 ‘강’에 대해 오래 생각했던 유하였다.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서둘러 노을의 하늘을 갈아치우는 잠자리의 눈동자
흔들릴 때마다 나뭇잎 속에 깃드는 푸른 신성같은 것,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
덧없는 물살에 덧없는 마음의 지느러미만
하릴없이 놓아 주다가

다만 물고기는 간데없고 남아 있는
비늘의 번득임만 안타까이 건져 올리듯
기어코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릴 때,
사라짐보다 더 아픈 정지의 순간이 오고
치자꽃 향기 밟으며
온 강에 멎을 듯 내려앉는 별빛의 나비떼

스쳐가는 바람이 거기 없었다면
송두리때 제 넋을 흔들어 구원받는 갈대를
누가 알기나 했으리[각주:4]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의 목소리가 도저히 사회의 그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에서 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숨 막힐 듯 사방을 가로 막은 남성들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미자의 말은 어디에도 가 닿을 수 없었다. 실은 버지니아 울프와 미자도, 전쟁터에서 죽어갈 사람들, 그리고 강으로 뛰어든 소녀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조차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도처에 흐르고 있지만 여전히 들리지 않았던 말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단지 스쳐지나갈 뿐, 어느 순간 있었는지도 모르게 잦아들을 뿐인 바람이 있었기에 갈대가 보였던 것처럼.


3.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다시 읽는다. 여기에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나는 내 몸의 상처를 자극적인 서사로 재구성해 던지곤 했는데, 그건 타인을 향한 발화의 두려움에서 발로했던 자기방어였다. 어이없게 웃으면서 술안주 삼아 던지는 이야기들에는 내 감정이 없었고, 따라서 내 말도 없었다. 모든 고통을 배제시키고 사건들만 부각시키는 서사적 말하기는, 여전히 나의 고통을 진짜 ‘고통’으로 수용하기를 보류하고 있었다.
 고통을 말하기. 고통으로서 말하기. 그리고 고통을 위해 말하기.
 장롱에서 말하고 장롱에서 돌아오는 내 자폐적 서사를 깨뜨렸던 건 오로지 그녀의 말이었다. 한 세기를 건너 나와 공감할 수 있었던 그녀의 말은 나로서 내 고통마저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 상처들로 인해서 말할 수 없었지만, 말할 수 없었기에 그녀의 말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녀의 말은 한 세기를 건너, 그보다도 더 멀리 계속해서 살아 숨 쉬고 있던 것이다. 더 넓은 진폭으로, 보다 많은 생을 만나기 위해. 그렇다면 FTA를 반대하는 말들, 쌍용차의 해고를 규탄하는 말들을 포함하여, 전-지구적으로 외쳐지는 반(反)생명에 대한 우리의 울림들도 결코 공중에서 흩어지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말들은 강물처럼 도처에 흐르고 있다가, 또 다시 말 못하는 이의 귀에 희망으로 닿으리라.


4.


 태초에 말이 있었다.
 몸이 태어날 말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고통이, 사무치는 아픔들이.

 그러므로 내가 만났었던 것처럼, 그 어떤 죽음에도 침묵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생보다도 훨씬 가까운 곳에서, 생만큼이나 우렁차게 외쳤던 볼륨이었다. 오로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하여, 더 큰 삶을 사랑하기 위하여 말이다. 그리고 그 말 안에서 바로 내가, 우리가, 태어났던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편지는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 직전, 그녀 인생의 동반자였던 레너드에게 부친 것이었다. [본문으로]
  2.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본문으로]
  3. 2010년 9월, 충정로 맑은샘교회의 렉시오디비나 성서 나눔에서 공유된 이야기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4. 유하, 「7월의 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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