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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08 [비평의 눈] 희망의 확실성 (심범섭)



희망의 확실성



심범섭



    고등학교 때 배웠던 영어구문 가운데 ‘A no more B than C’라는 게 있었다. 


A whale is no more a fish than a horse is.  


    ‘말이 물고기가 아닌 것처럼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로 해석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구문을 처음 배울 때 이 문장이 왜 주어진 방식으로 해석되는지 이해는 못했다. 그리고 내가 읽은 책에도 설명이 나와있지 않았고 학교 선생님도 그 원리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 가서 어느 날 문득 이 구문의 의미 구조를 이해하게 되었다. 위 예문을 직역하면 ‘고래는 말만큼만 물고기이다’가 된다. 그런데 ‘말만큼 물고기이다’라는 표현은 사람 사는 세상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전혀 물고기가 아니다’를 뜻한다. 그래서 ‘고래도 전혀 물고기가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중요한 것은 ‘A no more B than C’라는 구문에서 ‘than’ 다음에는 누가 봐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 전혀 논의의 여지가 없는 현상(‘말은 물고기가 아니다’)을 거꾸로 말하는 진술이 나오고, ‘than’ 앞에는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대한 명쾌한 주장이 나온다. 예를 들어 말이 물고기가 아닌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고래가 물고기가 아닌 것은 고래가 물고기처럼 생겼기 때문에 자명한 사실이 못되기도 한다. 위의 예문을 말하는 사람은 고래에 대한 이러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혼동스럽거나 오해받는 고래의 정체를 더 이상 혼동스럽지 않은 것으로 확립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래 공식은 이미 확실한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에 기대어 아직은 불확실하다고 여겨지는 명제가 확실한 것으로, 보편적 상식으로 수용되게 하려는 용도로 쓰인다. 달리 말해 이 구문은 사회의 ‘상식(자명한 것)의 권위’에 의존하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문은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주 사용하는 언어자원의 하나로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앎을 필요로 하고 또 이를 근거로 삼아 확실한 앎을 점점 더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고래공식에서 다루어지는 확실성은 어떤 명제가 현실을 정확하게 지시함으로써 얻어지는 확실성이다. 이러한 확실성은 현재의 현상뿐만 아니라 과거의 현상 (“우리는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다’고 확신한다”같은 표현에서처럼)과 미래의 현상(“분명히 ‘인류는 화성에서 살게 될 것이다’”같은 표현에서처럼)에도 적용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문제시하는 확실성에는 이러한 명제의 정확성 이외에도 적어도 두 가지가 더 있는 듯 하다. 하나는 정도를 말할 수 있는 경험에서 그 정도가 높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감격,” “확실한 군정 종식” 같은 표현에서처럼) 얻어지는 확실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떤 존재가 시간이 경과해도 변하지 않을 때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같은 표현에서처럼) 얻어지는 확실성이다. 물론 정확성, 정도, 변화 여부라는 이 세 가지 범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한 범주를 다른 범주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 때도 많다.    

    현재의 좋은 확실함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라는 사실의 관점에서 유겐 드러베어만(Eugen Drewermann)이란 독일 학자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를 해석한다. 드러베어만은 최초의 인류가 신의 명령에 거역한 이유로 흔히 거론되는 이유, 곧 탐욕, 정욕, 교만, 불복종이 일관성 있는 논의를 낳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가 그들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실존적 공포라고 가정한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는 그들 자신이 그들 존재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주가 언제든지 자신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들이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해석한다. 물론 드러베어만은 창세기의 실낙원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으며, 인간이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적용하는 것이다.[각주:1] 하지만 이 해석에서도 역시 인간은 영원히 얻을 수 없는 확실성을 욕망하면서 확실함의 영역을 더 늘이려고 애쓰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 해석이 설득력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현실적 삶에서 확실성이 중요하고 보편적인 문제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드러베어만의 창세기 이야기 해석은 존재의 불확실성을 인간의 피조물성과 연관시키므로 세상에서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상대적으로 더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상정하고 이를 안정적 토대로 삼아 삶을 영위한다. ‘말은 물고기가 아니다’라는 인식(사실, 현상)도 이런 의미에서 확실한 것의 한 예이다.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더 인간다운 삶을 설계하고 이를 하나하나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의미의 확실성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확실성이 위협받을 때 우리는 불안하게 되고 때로 절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확실해야만 하는 여러 근본적인 요소들이 불확실한 형편이다. 국가는 재난에서 국민을 지켜주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중산층이 무너져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졌고, 내집 마련은 비현실적인 목표가 되었으며,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도 허약해졌다. 경쟁은 극심하고 약자에 대한 배려와 패자가 부활할 수 있는 제도도 없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신뢰가 없고 각자도생, 각개전투만이 살 길이며, 이 나라를 아예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취업의 문턱이 너무 높고 일자리를 구해도 고용이 불안하고 터무니없이 착취당하는 경우가 많다.  

   2015년 10월 19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내놓은 ‘2015 삶의 질(How’s Life?)’ 보고서에는 대한민국의 이러한 실정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는지를 묻는 ‘사회 관계 지원’ 항목에서 OECD 34개국 가운데 최하위를 차지했다. 주관적 건강 만족도에서도 꼴찌였으며, 밤에 혼자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끼는 정도에서는 28위였다.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도 하루 48분으로 최하위였으며 (OECD 평균은 151분), 이 중 아빠가 같이 놀아주거나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하루 3분, 돌봐주는 시간도 하루 3분에 지나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의 OECD 평균은 47분). 그리고 개인이 평가한 삶의 만족도에서는 OECD 34개 회원국과 러시아, 브라질을 포함한 36개국 가운데 29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불안하고 불만스럽고 더하여 분노하게 하는 각박한 대한민국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아는 바이다 (2011년 기준 인구 10만 명 당 33.3명, OECD 평균 12.4명; 2013년 기준 28.5명).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주간은 “우리는 이렇게 살 이유가 없다”라는11월 24일자 칼럼에서 “지난해 미국인 총기사망자는 1만2563명, 한국인 자살자는 1만3836명이었다. 한국인에게는 총이 없지만, 한국 사회 자체가 대량살상무기다.”라고 개탄하기도 한다.    

    최근 등장한 수저론을 빌려 말하면 금수저나 은수저가 아니라 동수저나 흙수저나 똥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에게 대한민국은 전망이 없는 곳이다. 얼마 전부터 절망적인 대한민국을 “헬조선”, “망한민국”, “지옥불반도”로 일컫는 표현도 들린다. 대한민국은 지옥인가? 지옥은 나쁨이 극한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다. 위에서 말한 확실함의 특성을 적용하자면 나쁨의 정도가 극단적으로 높다는 확실성과 이런 나쁨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확실성이 구현되는 공간이다. 우리 사회에서 좋은 확실성과 안정성이 무너지면서 그에 상응하여 나쁜 확실성이 증가했고, 이런 부정적 확실성이 극점에 이르렀다는 인식이 “헬”과 “지옥”이라는 표현으로 전달된다.  

    몇 년 전 2-30대 젊은이를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로 부르는 “3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들이 곧 내집 마련과 인간관계도 포기한5포 세대가 되었고, 이제는 꿈과 희망마저도 포기한 7포 세대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마지막 항목으로 등장한 ‘희망’은 일곱 가지 포기 대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희망은 인간 정신의 근원적인 성향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했다는 것은 결혼이나 출산 같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삶과 생명에 대한 긍정 자체를 포기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지옥에 처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특성인 듯 하다.  

    실제로 우리는 몇몇 문호의 작품에서 지옥이 그러한 곳이라는 말을 듣는다. 15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대표작 <신곡>의 “지옥”편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들어오는 자들은 모든 희망을 버려라!”(3장 9행)라고 씌여있다고 말한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턴은 대표작 <실낙원>에서 방금 지옥에 떨어진 사탄의 눈에 비친 그곳을 이렇게 묘사한다.    


즉시 그는 본다, 천사의 눈이 닿는 한의 

그 황량하고 거친, 처참한 광경을. 

주위 사방에는 무서운 암굴, 그것은 마치 

불길 이는 화덕, 그러나 이 화염에는 

빛이 없고, 오히려 보이는 어둠에 

드러나 보이는 것은 다만 비참한 광경뿐. 

슬픔의 지역, 우수의 그림자, 평화와 

안식은 없고, 사람이면 모두가 갖는 

희망마저 없고, 다만 끝없는 가책이 

휘몰아치고, 꺼지지 않고 불타는 

유황에 붙은 불의 홍수가 소멸하지 않는다. (제1편 59-69행)[각주:2]  


    “사람이면 모두가 갖는 희망”이라는 표현은 “희망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아오른다 (Hope springs eternal in the human breast)”라는 영어 속담을 상기시킨다. 희망이 사람에게 본능과도 같은 것이며, 우리에게는 살고자 하는 욕구처럼 뿌리 깊게 희망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밀턴의 지옥은 이러한 희망도 소멸된 곳이다. 이 사실은 지옥의 어둠이 지니는 성격과 상응하는 면이 있다. 밀턴은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은 빛을 발하지 않고, 이곳에는 “오히려 보이는 어둠(rather darkness visible)”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어둠은 원래 빛이 없는 상태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실체가 없는데, “보이는 어둠”은 스스로 실체가 있는 어둠, 물체로서 존재하는 어둠으로 이해된다. 빛의 부재로서 존재하는 어둠은 빛이 들어오면 곧바로 사라지지만 실체로서 존재하는 어둠은 빛을 아예 가로막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어둠”은 궁극적인 어둠, 극한의 어둠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어둠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옥의 어둠은 이곳에는 인간에게 본능과도 같은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물리적 차원에서 상징하는 듯 하다.[각주:3]  

    지옥은 과연 절망의 어둠만이 지배하는 곳인가? 단테와 밀턴은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우리에게 조금 다른 답변을 제시한다. 그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에서 위고는 당대 최하층민의 은어(argot)에 대해 길게 논하는 대목에서 프랑스 대혁명 전의 파리 샤틀레(Châtelet) 지하감옥을 언급한다. 이곳은 툴롱(Toulon)의 갤리선(노예나 범죄자가 노를 저었던 전투 선박)으로 가는 죄수들이 보통 한두 달, 때로는 6개월 정도 수용되었던 곳이다. 세느 강보다 2.5미터 정도 더 낮은 곳에 위치했던 이 감옥에는 창문이나 환풍시설도 없었고, 바닥은 25센티미터 정도 두께로 진흙이 덮여있었다. 어둠 속에서 죄수들은 목에 감은 쇠사슬이 짧아 누울 수도 없었고, 잠이 들어도 계속 깨어나야 했다. 무릎까지 진흙에 빠져있었고, 다리에는 자신의 배설물이 뭉개져 있었고, 진흙 위에 던져진 빵은 다리로 끌어와야 했다. 당연히 이곳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윽고 위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 지옥같은 무덤에서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무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그들은 죽었다—그리고 지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희망이 없는 곳에 여전히 노래는 있다. 몰타 근해에서 갤리선이 접근할 때 노 젓는 소리보다 먼저 들리는 것은 노래 부르는 소리였다. 샤틀레 지하감옥에서 살아남았던 밀렵꾼 쉬르방상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계속 살게한 건 그 운문(rhymes 노랫말)이었다.” [각주:4]  


    이 인용문에 보이는 “희망이 없는 곳에”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는 위고 또한 지옥을 희망이 불가능한 곳으로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지하감옥과 갤리선이라는 지옥에 떨어진 인간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위고는 이렇게 답한다. “어떠한 고통을 가해도 인간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는 사랑을 파괴할 순 없다.”[각주:5] 위고는 사랑을 희망과는 다른 것으로 상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랫말에서 살 힘을 얻었던 쉬르방상의 예는 이 지옥의 노래가 그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위고가 사랑이라고 규정하는 힘이 본질적으로 희망과 같은 것, 또는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성향 또는 욕망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위에서 언급한 “희망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아오른다”라는 속담도 이렇게 결론내리는데 도움을 준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위고의 지옥에서 분명히 희망은 가능하다고 이해한다.  

    헬조선은 단테와 밀턴의 희망이 불가능한 지옥인가, 위고의 희망이 가능한 지옥인가? 순진한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절망과 좌절의 어둠이 짙은 이 대한민국이 그래도 위고의 지옥에 가깝다고 믿는다. 어떤 이에게는 궁색한 근거로 들릴 수 있겠으나 단테와 밀턴이 그리는 지옥은 결국 상상의 산물이고 위고가 이야기하는 지옥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본다. 나는 희망의 확실성을 믿고자 한다. 상상의 지옥에서 희망의 부재를 강조하는 것은 아직 살아있는 자들에게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물론 위고의 지옥에서 죄수들이 불렀던 노래가 처음부터 희망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위고도 샤틀레 감옥의 노래 대부분은 슬픈 노래였다고 말한다.[각주:6] 그러나 절망을 토로하는 노래라도 이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르는 행위 자체가 절망의 무게를 덜어주었고 새로운 희망을 일깨우기도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헬조선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제안이 나와있다. 어떤 이는 지속적인 연대와 작은 변화라도 촉발하는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어떤 이는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여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제일 과제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정부와 국회에게 가장 큰 책임과 역할이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진정한 토론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사회전체의 구조를 바꾸기는 힘들기 때문에 그저 개인적으로나마 획일적 기준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살아가자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헬조선이란 표현은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해서 나온 것인데 개발도상국에 가서 한 달만 지내보면 자긍심이 생길 것이라는 괴상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이나 방안을 제시할 능력은 없다. 대신 희망의 확실성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인간은 절망하면서도 또 다시 희망한다는 이 경이롭고 신비로운 사실에 대해 사색하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사색에서도 우리의 노래가 태어나고, 그리고 우리가 “서로 함께” 노래한다면, 지금 우리를 덮은 어둠이 설사 실체로서 존재하여 빛을 가로막는 어둠이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 이를 분쇄할 수 있지 않을까?  

    위고의 말처럼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서 불멸하는 것이라면 희망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사랑과 희망이 확실한 것이라면 이상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고가 이상의 빛이 잠시 가리워질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을 말하는 문장이 내가 읽은 영역본에서 마침 고래 공식으로 씌여있어 이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The ideal is . . . no more in danger than a star in the jaws of the clouds. 

(이상은 . . . 구름의 주둥이 안에 든 별처럼 위태롭지 않다.) [각주:7]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드러베어만의 이 견해는 다음 저서에 나타난다. Strukturen des Boesen: Sonderausgabe. Die jahwistische Urgeschichte in exegetischer/psychoanalytischer/phhilosophischer Sicht (3 vols.; Paderborn: Schoeningh, 1985-86). 나는 이 저서를 읽은 것이 아니라 드러베어만의 해석을 소개하는 내용을 다음 글에서 읽었다. “The Lamb of God and the Forgiveness of Sin(s) in the Fourth Gospel”, Sandra M. Schneiders,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73, 2011, p.6. [본문으로]
  2. 이 인용문은 이창배 교수의 번역문(<실낙원 (Paradise Lost)>, 범우사, 1996, p.16)을 내가 원문을 이해한 것에 따라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3. 이창배 교수는 “darkness visible”을 “간신히 보일 정도의 짙은 어둠”으로 옮겼다. 나는 “visible”의 대상을 어둠으로 보는데 반해 이창배 교수는 어둠 속에 있는 대상(사물과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이창배 교수의 번역은 내 해석보다 덜 문학적이지만 대신 이 어둠 속에서도 사물과 사람이 보인다는 내용과 상식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어둠”이라는 내 해석은 새로운 성격의 어둠을 소개하고 희망의 부재라는 인간 내면 상태와 상응하는 문학적 효과를 거두지만 이런 극단적인 어둠 속에서도 사물과 사람이 보인다는 모순을 내포한다. [본문으로]
  4. 이 인용문은 펭귄 출판사에서 나온 영역본(<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 노먼 데니 (Norman Denny) 번역, 펭귄 (Penguin), 2013, p.1224)에서 해당 구절을 내가 번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5. 같은 책, p.1225. [본문으로]
  6. 같은 책, p.1224. [본문으로]
  7. 같은 책, p.13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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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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