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비


<욥기>를 통해 본 고통 마케팅에 대한 비판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눕기만 하면, 언제 깰까, 언제 날이 샐까 마음 졸이며, 새벽까지 내내 뒤척거렸구나. 내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구나.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터져 버리는구나. ―〈욥기〉 7,4~5 



    거실 창가에 배열해둔 딸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그는 한참을 미동도 않는다. 생전 처음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에 눈길이 머문다. 촛대바위와 바다를 등지고 친구와 두 손을 입에 모아 힘껏 소리를 내지르는 포즈의 사진을 본다. 그 옆에는 가족과 함께 다녀온 미국 여행 사진이다. 콜로라도의 메이사 베르데 국립공원 입구에서 오른 손을 흔들고 있는 딸은 아직 초등학생의 모습이다. 그 옆에는 검은 사각모에 빨강, 파랑, 검정이 어우러진 가운을 입고 어설프게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유치원 졸업사진이 있다. 벌써 14년이나 지난 일인데, 몇 달, 아니 며칠 전의 일 같기만 하다. 그리고 가운데, 커다란 눈이 예쁜 딸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다.

   수능시험을 치룬 다음날 딸은 오빠의 오피스텔에서 목을 매고 말았다. 지리학과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입학만 하면 페루 여행을 허락받았던 그녀는 두 번의 실패와 세 번째 예감된 실패를 비관하며 서둘러 삶을 마무리 지어버렸다. 삼년간 유예된 페루 여행을 육체를 벗어버리고서라도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죽던 그 한 해 전에 대학생이던 아들이 군 입대를 앞두고 페루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 딸의 인내력은 폭발하고 말았다. 함께 가겠다고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시위를 하더니 학원에서 쓰러졌고, 몇 시간 링거주사를 맞고 퇴원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녀의 아비는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한두 주 빠지고 여행 좀 한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날까봐 딸의 자존심을 그토록 헤집어 놓았을까. 링거주사를 꽂은 채 몇 시간을 침대에 구속되어 있던 딸의 속마음은 이미 그때부터 자기에게 한계시간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그는 타살자의 심정이 되어버린다.  

   딸을 잃고 자책하던 한 아비의 일이 기억에서 희미해졌을 무렵,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만 2년이 조금 모자란 날, 아들의 돌연사로 망연자실해 있던 또 다른 아비가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며 유학을 준비하던 과학도인 아들이 갑자기 쓰러졌고, 가족이 달려왔을 땐 이미 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못 되어서 아들의 사망을 확인하는 서명을 했고, 슬픔도 눈물도 없이 3일간의 장례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자 미뤄두었던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겨우 진정을 찾은 듯 앉아있는 아내가 다시 오열하며 실신할지 몰라 걱정하여 안경을 닦으며 조용히 책장을 넘기려 하는데, 자제할 수 없이 슬픔이 솟구친다. 그날 밤 그는 창자가 끊어질 듯 통곡했다.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 함께 다니기로 했다. 구원에 관한 교리가 여전히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혹여 아들이 천국에 가는 데 아비가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장례를 집전했던 목사는, 이 아이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으니 ‘성도’(聖徒)란 문구를 쓸 수는 없지만, 부모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이미 고인이 된 자녀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며 성도임을 ‘보증’하는 의미에서 그 문구를 허락한다고 했다.

    그 논리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만의 하나 그게 정말이라면 어쩌나 싶어 열심히 기독교 신자가 되고자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예배는 반드시 참여하고, 신자대학에도 등록했다. 날마다 성서를 읽었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신앙이라는 게, 그 교리라는 게 허술하기 그지없었지만, 하여 순간순간 회의적 물음들이 튀어나왔지만, 폐부를 찌르는 목사의 한 마디 말에 그는 모든 비판적 문제의식에서 스스로를 무장해제시켰다. “신앙이 없으면, 하느님은 나를 치거나 혹은 가족을 치십니다.”

    이 말은 수준 높은 지식의 소유자인 그가 신앙에 관한 한 자기의 지식을 유보시키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게 하는 효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그에게 이 말은 자기가 자식을 죽였다는 자책감을 낳은 것이다.

   그가 내게 물었던 첫 질문은 “어떻게 해야 신앙이 빨리 성장할 수 있나요?”였다. 대개 이런 물음은 교회의 제도 속에 순순히 편입되는 것에 자기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그런 이들은 교회의 신앙제도의 모범생이 되려는 강렬한 의지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그의 내면에서 그 의지가 흔들리고 있다. 억제하고 있기에 그 동요가 의식으로 표출되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흔들리고 있다는 자각에 좀처럼 이르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신앙제도의 모범생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동요하게 한다.

    어떤 말이든 위로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만난 이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신앙성장을 위한 비법 전수’, 이 순간 그가 위로받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은 바로 이런 것이겠다. 한데 나는 그런 ‘묘수’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심지어 묘수라고 회자되는 것들에 야유를 퍼붓는 데 익숙한 자니 그를 위로할 길은, 내게는, 별로 없다.

    추측컨대 평소의 그라면 아마도 나와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자식의 돌연사에 직면한 이에게 신앙제도와 신앙 사이의 거리에 대해 얘기하고, 교회의 가르침이 대변하는 신앙제도, 그것의 위기를 넘어서는 것에 관한 냉철한 토론은 얼마나 무망한 것일까.

    그럼에도 서투른 카운슬러인 나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 얘기로 대화를 이끌어갔고, 점잖고 사려 깊은 사람인 그는 나의 어법 속으로 순순히 들어와 주었다. 다행히도 그는 30년쯤 전, 대학생이던 시절에 기독교에 대한 남다른 지적 탐구의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었고, 이 대화는 오래 묵은 그 기억을 회상해내는 시간이 되었다.

    창조가 어떻고, 노아의 방주가 어떻고, 예수의 기적이 어떻고 등등, 얘기가 열띠게 오가던 중 그는 뜬금없이 자기의 숨겨진 갈등을 털어놓는다. 자식의 죽음 이후 다시 교회를 다니면서 꾸물거렸던, 하지만 잘도 숨겨져 있던 내적 흔들림의 실체가 언어를, 즉 형상을 얻게 된 것이다. 자기에게 닥친 이 고통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그의 목숨을 그렇게 앗아간다는 것일까요?” “도대체 교회에 안 다녔다고 자식을 빼앗아 가는 신이 어딨나요?”라고.

    하느님을 잘 믿으면 시련이 닥쳐와도 결국에는 몇 배로 보상해 주신다는 의미로 목사가 권한 〈욥기〉에서 그는 이미 전혀 다른 의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서론부(1~2장)와 결론부(42,7~17)에 나오는 이야기대로라면, 아들의 죽음은 결국 하느님이 사탄과 벌인 내기에 다름 아니라는 당황스런, 하지만 타당한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욥기〉에서 이런 의문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텍스트 속의 하느님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한데, 이 글 앞에서 인용된 본문인 〈욥기〉 7,4~5 같은 내용이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는 사람, 그 처참한 고통으로부터 잠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시간마저도 박탈당한 사람, 그렇게 매순간 지옥을 체감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은, 죽은 아들의 시선으로 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이 구절은, 그가 기도생활을 잘 못한 탓에 아들이 죽은 것이라는 목사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해석학적 문제의식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욥기〉에서 서두와 끝의 이야기를 빼면, 내내 욥의 원망과 항변으로 점철되고 있다는 것을 읽어냈다. 욥의 친구들, 나중에 그 대화에 끼어드는 젊은이, 그리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닥친 재앙과 신앙 사이에는 인과성이 있다는 통념의 수호자들이다. 하여 심문관처럼 욥을 추궁한다. ‘네 잘못으로 네가 재앙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한데, 실은 그것이 하느님의 장난이라니......

    요컨대 〈욥기〉는 당시 통념으로 작동하던 인과성의 신학에 대한 저항을 담은, 매우 지적인, 일종의 반신학적 통속적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대중 사이에서 회자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서두와 결론이 개작되어 통속소설화된 것이 우리가 접하는 〈욥기〉인 듯하다. 그러므로 본 내용을 통속화시킨 서론부와 결론부를 빼고 본론부만 읽는다면, 네 잘못이 재앙의 원인이라는 식의 통속적 주장에 대한 욥의 반신학을 읽을 수 있다.

    딸의 자살에 직면해서 자기의 잘못을 상상했던 한 아비, 그리고 아들의 돌연사에서 자기 자신의 불신앙을 보아야 했던 다른 아비, 이 둘은 바로 그 생각으로 인해 딸이, 그리고 아들이 겪고 있던 세상의 고통에 직면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세상은 그 죽음들로부터 면죄부를 얻게 된다. 물론 때로 고통에 직면해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매우 훌륭한 성찰의 태도다. 한데 문제는, 자책이라는 고통의 표현 방식이 종교제도나 국가제도, 심지어는 자본에 의해 마케팅의 도구로 활용되곤 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욥기〉는, 통념에서 벗어나 읽는 이에게는, 바로 이러한 은폐의 신학에 대항하는 반신학적 신학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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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노동』
- 고통과 노동의 창조적 존재론

지은이 : 안토니오 네그리
옮긴이 : 박영기
펴낸날 : 2011년 11월 25일
분  야 : 인문 비평
판   형 : 신국판
정  가 : 13,000원
펴낸곳 : 논밭출판사

책소개

1982년 네그리가 감옥에 수감되 있으면서 쓰기 시작한 <욥의 노동>은 고통의 존재론과 메시아 계보학을 통해서 낡은 척도를 부수고 탄생하는 새로운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은 고달픈 노동과 고통의 연속이다. 그 고통이 억울한 고통일 때가 너무도 많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욥’이 된다.

고달픈 노동과 육체적 고통으로 절규하는 민중들, 절규하는 메시아. 네그리는 이 책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이 기존의 척도나 권력에 맞설 때 그 힘potenza은 신적인 것[메시아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고통과 노동, 사랑과 연민을 통해 구성된 메시아적 주체는 역사를 생성으로 전화시키고, 세상을 재창조한다.

보통 자본주의의 본질은 노동(력)의 상품화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노동을 ‘타자를 위한 사용가치로서 육체적 활동의 대여’라고 개념 정의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의 상품화는 노동에 있어서 자율(자유)과 창조성, 연대성을 억압하고, 고달픔과 고통만을 증폭시킨다. 이런 생산의 지옥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해방의 길을 찾을 것인가?

네그리는 그 통로가 고통의 경험을 통한 주체화(메시아적 주체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모델이 바로 욥이다. 네그리에게 욥은 고통의 경험을 통해 기존의 척도(변신론, 변증법)를 고발하고, 마침내는 척도에 대한 새로운 정초를 세우는 메시아의 상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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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고통과 예수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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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마가복음 15:33-35]

 
1.

1962년 미국의 John F. Kennedy 대통령이 암살범의 흉탄에 목숨을 잃었을 때에 전 미주의 TV 방송은 한 시간 동안 흑색 화면에 “SHAME” (수치)이라는 자막만 띄워서 전국에 방영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이 일어난 마지막 일주일을 고난주간이라 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예수의 체포 - 재판 - 처형의 과정을 그의 고난/수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의 고난주간 중에는, 즉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활동하신 마지막 일주일 기간 동안에는 이상하게도 단 한 건의 기적을 행하지도, 단 한 건의 자연계의 기이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예수의 저주 한 마디에 말라버렸다 (마가복음에는 그 이튿날에, 마태복음에는 당장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도함)는 예수의 기적 능력의 과시라기보다는 더 이상 생명을 산출하지 못하는 유대교의 종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다고 보도합니다. 영화 벤허에서처럼 예수의 운명 시각에 천지가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천둥번개와 더불어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자연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에게 내려오는 기이한 현상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 바록 그것이 마가복음의 보도대로 예수의 주관적 체험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 울리지 않았습니다. 낮중에 가장 밝은 시점인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는 현상은 처형 현장의 사람들에게 경외심이나 두려운 감정을 일으킬 자이한 자연현상으로 제시되었기보다는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비참한 끝장에 접하여 눈앞이 캄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당혹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수의 이 십자가 처형 장면을 목도한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실의에 잠겨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길손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당신들이 무슨 일을 두고 그렇게 침통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하고 길손에게 핀찬을 주었습니다. 그 길손은 그들에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나사렛 예수의 활동을 보고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희망을 품고 가슴이 벅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는 기대와는 달리 바참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하여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벅찬 꿈은 산산조각이 나서 허공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에는 벅찬 가슴으로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허탈한 심경에 빠져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다가 그의 허망한 죽음 때문에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은 유독 이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 - 더 정확히 표현해서 죽임 당하신 사건 - 은 예수를 따르던 처음 제자들이 극복해야 했던 가장 어려운 최대의 걸림돌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도된 대로 사흘 만에 일어난 부활 사건으로 십자가 사건의 거리낌이 하루아침에 녹듯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전 1장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감추어서 없애야 할 거리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선포의 내용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처형에도 불구하고’ (inspite of the cruxifiction)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해야 했는데 나중에는 ‘십자가 처형 때문에’ (because of the cruxifiction)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해석 작업이 덧붙여졌습니다. 이렇게 덧붙여진 여러 가지 신학적 해석들은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의 핵심으로 구축한 긍적적 기여를 한 측면도 있지마는 지나친 신학적 해석 일변도가 역사적-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은폐시키는 폐단도 있었습니다.


3.

예수에 대한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은 예수를 종말적 구원자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 예언된 종말적 구원자 상(像)의 대표적인 칭호는 ‘메시야’였습니다. 이 밖에도 ‘사람의 아들’, ‘다윗의 자손’ 등이 있었습니다. 어느 칭호로 지칭되든지 상관 없이 구약성서의 종말적 구원자는 신적 능력을 발휘하여 이스라엘에 또는 세계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할 존재였습니다. 종말적 구원자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패배한다는 것은 구약성서의 종말적 구원자 상과 절대로 부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처형으로 죽임을 당한 나사렛 예수를 구약성서에 예언된 바로 그 종말적 구원자로 믿고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 종말적 구원자가 ‘반드시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는 논리를 펼쳐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낯선 얼굴로 나타나서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 (The Christ should suffer these things and enter into his glory.) 는 것을 증언하고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고 했으나 구체적으로 구약성경의 어느 곳을 지시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만일 하나님이 종말적 구원자가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데는 구원자가 반드시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만 하는 그 일 자체를 필요불가결한 요건으로 설정하셨면 그러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디즘(sadism)에 사로잡힌 분이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죽임당하심이 인간 구원 사업의 필수요건이라면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룟 유다와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는 구원 사업의 필요불가결한 일등 공신으로 찬양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유다복음서> 같은 위경(僞經)은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예수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고 수행한 참된 제자로 내세웠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러한 시각(視角)으로 십자가 처형을 그 현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면 “감사합니다. 멈추지 말고 좀 더 피를 계속 흘리시고 죽으셔서 구원 사업을 이루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과히 사디즘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4.

제2 이사야 (사 40-55장)에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한 시가가 네 개 들어있습니다. 특히 넷째 번에 나오는 시가 (사 53장; 정확하게는 사 52:13-53:12)는 고난을 당하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종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하고 또는 어느 특정한 미지의 역사적 인물을 지칭한다고도 보며 미래의 어떤 이상적인 인물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유대교의 주석에서는 이 여호와의 종과 종말적 구원자인 메시야와 결부시키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초대 그리스도 교회는 아주 일찍부터 이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예수의 고난과 결부시켜서 종말적 구원자인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 이하에 전도자 빌립이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위 관리인 한 내시가 귀국하는 마차 안에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는 장면과 마주칩니다. 그가 마침 읽고 있던 구절은 이것이었습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내시는 빌립에게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입니까?” 하고 물었고 빌립은 이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빌립은 이샤야 53장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결부시켜 해석했음에 틀립없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4절a)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5절a)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8절)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1절c)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12절e)
“그는 그의 영혼을 속죄 제물로 내놓았다.” (10절b)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형벌을 우리를 대신하여 겪었으며 그의 목숨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속죄하는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죄의 응보로서의 형벌과 죽음의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예수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죄값을 다 지불하셨다면, 우리는 이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인간의 삶의 문제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수직적 관계만으로 다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원만히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내 주변에서 불의와 폭력의 희생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셈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떠나서는 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신학적, 종교적 뜻매김이 내 이웃의 문제 해결에 적절하지 않다면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는 왜 그의 삶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까? 성서의 어느 곳도 그의 예루살렘 행의 목적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슨 근거에서, 무슨 죄목으로 처형당했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또는 ‘우리 죄를 위해서’라는 신학적, 종교적 목적 이외는 다른 어떤 근거도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20세기의 신약신학의 거장 R. Bultmann의 주장처럼 예수의 처형은 순전히 사법적인 오판(誤判) 때문이었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집권자들이 예수를 제거해야 할 근거가 무엇인지는 그의 생애 초두에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막 3:6) 예수의 적대자들의 이러한 모의는 마가복음 1:14-3:5에 전개된 예수의 갈릴리 선교 활동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이 자기네의 지배질서와 조화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사정은 예루살렘의 지배층에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막 12:12; 14:1). 집권자들은 예수의 요구에 순응할 수도, 묵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면서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현 사회의 무권자들에게 삶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선교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예수는 이 사람들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사회의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밑바닥 무지레기들이 하나님나라 잔치의 주빈으로 영접되는 것은 현 사회의 지배층르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의 주동자인 예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6.

그리스도교 신학은 고통, 고난, 재난, 불행 등의 문제를 인간 개인의 죄와 관련지어서 너무나 근원적인 차원에만 국한하여 다루기 때문에 이 문제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고통을 예로 들어 봅시다. 고통은 하나님이 죄에 대한 마땅한 응보로서 내리신 징벌이기 때문에 고통의 당사자는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통은 죄인에게 그의 죄를 각성하게 하여 그를 회개시키고 순화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통의 매저키즘(masochism)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뿐만 아니라 고통이나 고난은 인격을 단련시키는 교육적 기능도 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에 만연한 수 많은 이웃의 고통과 불행을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용한 것으로 용인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서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성서는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을 우리의 우리의 인간됨의 주요한 임무로 명했습니다. 성서는 그들이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있든지, 다른 누구에게 있든지 상관 없이 - 따져 본 후에 도우라 하지 않고 그저 도우라고만 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의 노역으로 신음하기 때문에 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노예생활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의 고통과 고난을 용인한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현 세상의 지배자인 파라오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7.

알베르 까뮈가 1947년 발표한 소설 <페스트>가 생각납니다.

알제리아의 오랑 시에 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병은 급속히 번져갔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도시는 불가항력의 이 재난 앞에서 큰 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성문은 폐쇄되고 외부와의 왕래가 차단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등장인물들 가운데서 특히 주인공인 의사 리외와 예수회 신부 파늘루 신부가 이 재난에 대하여 나타내 보인 극명하게 대조되는 처신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리외는 페스트라는 재난을 막기에 인간은 역부족이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환히 알면서도,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을 있는 힘을 다해서 저항하는 데 투신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것은 하나님이 불신자에게 내리는 천벌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으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라고 설교하면서 페스트와의 투쟁에 방관적 태도를 취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그들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의사 리외: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소. 그런고로 하나님 편에서도, 인간 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는 편이 좋지 않겠는 소? 하늘로 눈을 돌리지 않고 말이오. 보시오,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지 않소.”
신부 파늘루: “그래요, 나도 안다고요. 그러나 당신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일 뿐이지 않소.”
의사 리외: “그렇다고 해서 전투를 중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요.” 

리외의 투쟁은 죄 없는 아기의 죽음을 보고 더욱 고양됩니다. 그리고 신부도 죄 없는 아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입장의 변화를 일으켜서 리외를 도와보건소에 봉사하게 됩니다. 리외는 점점 더 많은 동지를 얻게 되고 결국에 페스트도 일단 정복됩니다. 그렇지만 리외의 아내도, 늘루 신부도 페스트의 희생자 되는 아픔을 남겼습니다.

마침내 페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성문은 다시 열리고 오랑 시는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뤼는 이 질병에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할만한 것 보다는 감탄할 만한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글로 써서 들어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재난과 불행은 승산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을 극복하려고 맞서 싸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원인을 밝히는 것은 문제 해결과 관계 없는 한 한가한 관념의 유희일 따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신론자인 의사 리외의 자세가 신부 파늘루의 자세보다 훨씬 친인간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수행한다는 아이로니를 배우게 됩니다.


8.

이웃의 고난에 무관심한 것은 이웃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죄악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고귀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순전히 종교적인 의미만 부여하는 것은 중대한 왜곡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의 권리를 쟁취하고 수호하려는 데서 불가피하게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어떤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경우에 우리는 그 희생되는 짐승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의 심정에 사로잡히지 그 짐승을 나쁜 놈으로 학대하거나 미워할 리는 전혀 없습니다. 이수현씨는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 사회는 그를 의인이라 칭송합니다. 이사야 53장 12c,d에 “그는 자기 목숨을 죽음에 내맡겼다. 그래서 그는 죄인으로 셈해졌다/여겨졌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그는 죄인들을 중재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남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면 의인으로 칭송받아야 바땅하지 왜 죄인으로 셈해져야 합니까? 그것은 그가 목숨을 바친 것은 인간 일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따돌림 받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지배자층은 그 사람을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의 하나로 지목하여 배척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도 이와 꼭 마찬가지 이치였습니다. 그는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지목 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3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은 남의 고난을 퇴치하기 위하여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재현한다는 것을 뜻하지 인격도야를 위한 육체적 학대나 나 신비주의적 고행을 수행하겠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신도들을 선동하는 그의 적대자들을 겨냥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갈 6:17) 라고 용감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상처 자국’은 예수가 당하신 고난의 길을 뒤따르는 데서 얻은 육체적 상처를 말합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승리의 상처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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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차 월례포럼 (제4회 맑스 코뮤날레 세션 참여로 대체합니다.)

세계화 시대의 '이주'와 사회적 고통
- '결혼 이주'를 통해 보는 한국 사회의 감성적 경계의 재영토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그동안 신학의 경계를 넘어 인문.사회과학과 대화하려는 시도를 지속해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이번 제4회 맑스 코뮤날레에서 본 연구소는 주관단체 세션에서 민중신학적 관점으로 현대사회를 읽는 시도를 하고자 합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론'을 발판으로, 현대 한국사회에서 세계화로 인해 교란되고 재영토화되고 있는 경계가 무엇이며, 포섭/배제는 어떤 기제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지 밝혀보고자 하는 의미있는 시도가 될 것입니다.

▲ 일 시 : 2009년 6월 25일(목) 오후 4시 ~ 7시
▲ 장 소 :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관 103호 (찾아가는 방법 안내 클릭)
▲ 주 제 : 세계화시대의 '이주'와 사회적 고통
― 발제1. 결혼이주자의 '경제주체 되기'
              - '타자' 재생산을 통해 구성되는 '다문화 자본주의'의 꿈
           발제: 유승태_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논찬: 김현준_CAIROS 회원, 서강대 사회학과 석사 수료
― 발제2. 대중매체의 결혼이주자 재현과 상징폭력
           발제: 정용택_한신대 신학과 Th.M 과정 신약학
           논찬: 김민아_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간사
▲ 문 의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02-363-9190) / yminjung@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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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독한 열정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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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무엘기하」 13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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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지스와프 백진스키 作 <무제>

그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얼굴, 몸매, 목소리, 걸음걸이, 그녀에 얽힌 모든 것이 하나하나 사랑스러웠다. 저 멀리 사람들 틈에서도 금방 그녀임을 알아 볼 수 있었고, 눈을 감고 있어도 그녀의 자태가 선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그녀를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밤에 잠을 자는 것은 상상 속에서 그녀를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스케줄은 그가 꿰고 있는 그녀의 동선(動線)을 따라 짜였고, 그녀 때문에 국정을 배우는 일에도 더욱 열정을 다할 수 있었으며, 신체를 연마하는 데도 더욱 부지런히 준비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할 의지가 북돋아졌고, 그녀가 있었기에 최고를 위한 경쟁에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계획은 모두 그녀와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이복누이동생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와 왕권을 두고 경쟁하는 이와 같은 혈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집은 정말 재수 없는 집안이었다. 유다 왕국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새똥만한 나라(요르단 동북부 바산 지역에 있는 소국인 그술)에 불과한데, 그것도 왕족 출신이라고 얼마나 있는 척하는지 아니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왕족이라는 점이 대신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부담스러웠고 부러웠다. 게다가 그자는 용모가 준수했고 기골이 장대했다. 말은 또 어찌나 수려한지, 감언이설에 넘어가 장자인 자기보다 그 동생을 지지하기로 한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가 왕이 되고 싶은 것은, 적어도 그 즈음에는, 이복누이인 다말 때문인데, 그가 왕이 되려는 한 그녀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녀의 친 오라비인 압살롬은 대권을 포기할 자가 아니고, 자기 또한 그럴 수 없었다.

마침내 병이 들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정이었기에, 욕정은 더욱 불타올랐고, 그런 마음을 다스릴 만큼 그는 야심만만한 성품도 단호함도 갖추지 못했다.

궁이란 이런 낌새가 비밀로 지켜질 만한 곳이 아니다. 더구나 대권을 두고 싸우는 두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궁의 모든 사람들의 표적이었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지만, 각자는 그 정보 하나하나를 두고 치밀한 계산을 하며, 전략을 편다. 암논, 이 영리하지 못한 왕의 장자는 자기의 약점을 노리면서 펼쳐지는 온갖 술책들을 간파할 이해력도 없었고, 사랑의 열정은 그나마 있는 부족한 판단력마저 마비시켜 놓고 말았다.

그때 왕의 노련한 책사인 요나답이 접근해 왔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너무나 영리한 자여서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는 자기가 아닌 왕의 사람이다. 근데 어느 날 그가 와서 권한다. 자리에 아예 누워 앓는 시늉을 하라고, 왕이 문병 오면 다말의 시중을 청하라고 말이다. 그녀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는 단박에 그렇게 행동을 한다.

아버지 다윗은 암논의 청을 들어준다. 궁내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왕이 저 조심성 없는 장자의 간청을 들어주었다가 자칫 형제간에 골육상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법한데, 어찌된 일인지 왕은 요나답이 예상한 대로 행동했다. 왕의 측근의 한 사람이기에 왕이 허락할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위에서 추측한대로, 왕의 허락이 조심성 없는 것이라면, 요나답은 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왕이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은 허락했다.

그렇다면 잠시 왕의 입장에서 사태를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요나답이 암논의 사정을 알고 다가와 자문을 해주었다면, 다윗이 그것을 모를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말했듯이 요나답은 왕의 측근이고,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것임을 잘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그 허락이 초래할 사태까지도 계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장자인 암논은 영리하지 못한 아들이다. 나라를 맡기기엔 부족했다. 한편 다말의 친오라비인 압살롬은 너무 영리했다. 게다가 그의 어미는 그술국의 공주다. 그술국과의 친선관계가 유다 왕국에게 유리했기에 다윗은 그녀와 정략결혼을 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왕권을 그술국 공주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왕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대신들이다. 대신들은 벌써 줄서기를 시작했다. 이 두 왕자가 왕권을 승계할 유력한 후보들이니 그들을 지지하는 파가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하여 왕과 책사인 요나답은 일련의 음모를 기획하였던 것은 아닐까. 두 왕자를 제거하려는 .........

아무튼 간병차 방문한 이복누이를 암몬은 충동적으로 강간해 버린다. 상사병으로 몸져 누워있던 터였다. 오직 다말 생각에 판단력이 극도로 흐려져 있던 차였다. 하여 그는 순간의 욕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걱정이 밀려온다. 가뜩이나 압살롬에게 호감을 갖는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는데, 가뜩이나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이 돌고 도는데, 누이동생을 강간했다는 소문이 나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사태가 예상되었다. 게다가 아버지 왕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를 몸서리치게 했다.

순간 그는 이 모든 것이 다말 때문이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피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자고 오라비의 경쟁자인 자신에게 왔단 말인가. 혹 압살롬, 그자의 간계는 아닌가. 몸을 팔아서라도 자기 오라비를 왕으로 만들려고......, 이런 창녀 같으니라고.
암논은 그녀를 사납게 밀치고 내쫓아 버린다.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한 여인이 버림받으면 그것은 그녀의 수치이고 가문의 수치다. 해서 그녀는 뭇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아야 한다. 그게 사대부가나 왕실 여성의 법도다. 암논이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 순간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배신은 자기가 한 게 아니라 저 창녀 같은 여자가 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충동적으로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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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 Dine 作 <The Six Foot Heart Machine>(1991)

모든 것을 다 걸만큼 열렬했던 그의 사랑은 한 순간에 재로 변했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던 사랑의 열정은 한 순간에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가장 심각한 장애물로 각인되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했고 저주했다. 그의 사랑, 그 ‘독한 열정’은 녹아버린 더러운 눈의 잔해에 다름 아니었다.

드라마 같은 얘기다. 대개의 현실은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독한 열정만큼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열정적 사랑들이 불꽃을 일으켰다. 사랑의 열정과 열병은 누구나 거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다가왔다 지나간다. 삶의 커다란 동력이 되고, 가장 소중한 것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강한 충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불꽃을 일으키며 사랑을 불태우고 있는 그 순간조차도 그 격정적 감정들은 다른 욕망들과 겹쳐지며 표출되곤 한다. 그리고 종종 열정적 사랑은 독기를 내뿜으며 증오를 일으키고 극심한 상처를 발생시킨다. 하여 사랑은, 그 앞뒤 안 가리는 열정은 가끔 독한 열정으로 변모한다.

한데 모든 열정적 사랑이 독기를 일으키며 상처를 야기하는 이별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열정적 사랑이 결혼으로, 이별을 억제하는 그 제도 안으로 안착한다. 일단 이 제도 속에 포섭되면 이별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의 완성이라는 미학적 담론으로 포장된 그 제도를 둘러싼 현실이 또한 사랑의 독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수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 제도로의 진입의례라고 할 수 있는 결혼예식에 관하여, 그 독성의 가능성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열정적 사랑에 빠진 이는 결혼을 그 제도 속의 일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것을 포장하는 판타지를 통해 열망한다. 그런 점에서 결혼을 향한 열병은 현실을 유보시키는 ‘초월적인 정념’이다. 한데 누구든 그 제도 속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다가서면, 그 초월적 정념은 지극히 세속화된 현실과 접속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초월과 세속의 접속은 사랑의 열정이 진행되는 도처에서 체험된다. 사랑의 열정 자체도 그러한 계산법과 결코 분리되어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혼예식은 그 중의 단지 하나의 체험일 뿐이다. 

최근 결혼의 상업화 현상을 연구한 한 논문에 따르면, 2003년에 결혼예식 전후 과정(상견례에서 집들이까지)을 포함하여 평균 1억 3천5백만 원 정도가 지출되었다고 추산한다. 이 중 신혼집을 구매하는 비용이 가장 높으며, 가구 가전 등 살림기구의 구매 비용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예식 자체를 위한 비용도 적지 않다.

이러한 지출구조는, 1998년을 예외로 하면, 1990년대 이후 줄곧 가파른 증가추세를 띠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결혼 컨설팅 업체들의 활발한 마케팅의 소산이며, 드라마 영화 가요 뮤직비디오 등에서 이른바 ‘사랑 마케팅’이 고도로 첨예화된 탓이다. 좀더 넓게 보면,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소비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일상의 상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하나의 양상으로 결혼을 둘러싼 소비시장이 극대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랑은 일상의 상업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부문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결혼이라는 판타지를 활용한 마케팅은 소비욕망을 불러온다. 이 욕망은 치밀한 ‘사랑의 계산법’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위신의 전략’이기도 하다. 소비사회는 위신이라는 자본을 위한 비용을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위신의 계산법은 사랑의 열정을 녹아버린 더러운 눈처럼 만들기도 한다. 아니 사랑의 열정 자체가 상업화되는 사랑의 계산법과 뒤엉키면서 이미 독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알게 모르게 그 열정 속에 상처 주고 상처 받는 파괴적 독기가 함유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혼비용의 과다지출은 결혼 당사자의 수입으로는 불가능한 액수다. 하여 그 비용은 많은 경우 부모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은 부모세대 가계부채의 주요 요인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한 노년의 비루함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이것이 가족주의를 온존시키는 하나의 요인임을 지적고자 한다. 그런데 소비사회의 주체화된 개인들은 전통적 가족을 수용할 수 없는데, 아직 소비사회에 적합한 대안적 가족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가족주의는 여전히 전통과 접속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결혼의 과다지출은 가족 내의 갈등을 야기하는 고통의 주된 요인이 되곤 한다.

여기에서 언급한 것은 결혼비용의 과대화가 초래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말했듯이 이것은 사랑의 상업화, 직접적으로 ‘사랑 마케팅’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사랑 마케팅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망은 사랑의 열정 속에 스며들어 있다. 하여 사랑의 열정은,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욕망은 누구나, 대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장화된 가치에 의해 잠식되어 있다. 요컨대 사랑의 욕망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의 배후에는 시장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암논의 욕정과 배신의 배후에는 왕권쟁탈이라는 전근대정치로서의 권력의 원리가 작동했다면, 현대인에게는 시장의 정치로서의 권력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기리면서 나는 이 시대의 고통에 관해 얘기하고자 했다. 특히 고통을 일상적 차원에서 살피고자, 그 중 두드러진 하나인 열정적 사랑과 결혼에 관해 얘기했다. 그 아름답게 포장된 정념과 제도가 담고 있는 독한 성질에 대해, 사랑하던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죽게 할 수도 있는 그 독함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성찰하고자 했다. 부활을 기리는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고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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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소통의 단절, 그리고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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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애
(부모교육/MBTI 강사)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41세에 죽은 카프카가 죽기 5년 전, 36세에 45장에 걸친 장문의 편지를 아버지에게 쓴다.
철옹벽 같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항의며 호소며 절규였으나 결국 부치지 못한 편지다.
아버지로 부터 겪은 것은 소소한 일상에서의 좌절이지만 상처 받은 카프카에게는 존재의 문제가 된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와 끊임없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노력이 불후의 명작들을 낳았지만 그 주제는 불통 속의 절망적인 실존이다.
자신을 한낱 벌레로 표현한 '변신'을 읽으면 카프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느낌을 짐작할 수 있고 평생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반란이 결혼이었으나 3번의 약혼과 파혼만 되풀이 하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었으니 가족-특히,부모와의 관계에서 겪는 불통은 단지 고통을 넘어 파괴적이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어느 날 갑작스레 맞은 아내의 죽음. 남편은 당황한다.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 아내의 자취는 옷과 사진첩.
"부토(원폭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현대무용, 칠흑같은 어둠의 춤이란 뜻)"를 추며 찍은 사진 속의 아내는 너무나 생소하다.
아내 생전, 자신이 보기엔 낭비처럼 보여, 아내의 취미인 부토를 막아 버렸던 남편은  재산을 정리하여 아내가 가고 싶어했던 일본으로 떠난다.
아내를 위하여.
이런 아버지를 자식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일상의 리듬이 깨지는 것이 싫어서 부담스러워 하기까지 한다.

작가와 감독은 가족간 단절의 숨통을 일본의 가족애에서 찾으려 한다.
벚꽃이 만발한 일본의 공원에는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가득하고 남편은 공원에서 부토를 공연하고 있는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분홍 전화기를 들고 부토를 추며 그림자인 자신과 만나고 저승의 엄마와도 만나 행복한 얼굴이다.
이 소녀만이 주인공 남편과 소통한다.
남편과 소녀는 후지산으로 떠나,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후지산을 기다린다.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몇 날이 지나고, 드디어 안개가 걷혀 환한 밤, 후지산은 선연히 자태를 드러내고, 남편은 달 빛 아래서 부인의 옷을 입고 부토를 춘다.
후지산 앞에서, 부토의 춤 속에서, 드디어 아내를 만나고 남편은 쓰러진다.
엔딩 자막이 다 올라가고도 한참동안, 어느 한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사랑은 소통이다
그러나 어렵다.
때때로 칠흙같은 어둠 속에 빠진 느낌이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당연히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랑의 상대가  눈 앞에서 사라졌을 때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알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또 얼마나 사랑의 상대를 좌절시켰나를 깨닫고 좌절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내 가족, 연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아파하고 있는지!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 특히 부모로 부터 상처를 받는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어서.
그리하여 내가 받은 좌절과 상처에만 급급하여 내가 사랑해야 할 상대에게 상채기를 내며 보복을 하기도 하며 많은 이들이 한생을 적개심과 분노로 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상처에 메여 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한다.
 
불통-다름과 차이
 
사람들은 누구나 내 잣대로 판단한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 오해하고 상대가 잘못 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어 날 때 기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태어난다.
이미 갈등의 소지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얘기다.
흔히 성격 차라고 말하며 극복하기에 벅차들 하는 부분이다.
이 다름과 차이는 타고 난 것이기에 바꿀 수 없으며 그냥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하며 이 근본적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갈등은 해소되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소통은 받아들임이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질 때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되며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는 인정과 수용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양식이 되고 특히 유아기와 아동기에 받는 부모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은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남편은 아내의 옷을 입고 후지산 앞에서 부토를 추며 아내를 만난다.
우리도 사랑하는 이의 옷을 입고 춤을 추며 사랑하는 이와  만나자.
물론 살아있는 오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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