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하나님의 뜻 그리고 종말



 

민기욱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아내와 차를 타고 가다가 잠깐 신학논쟁(?)이 벌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있던가? 결혼을 결심할 때, 왜 나를 선택했느냐가 주제였다. 아내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서운했다. 내가 매력적이었다거나, 장래가 있어 보였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착해 보여서 나를 선택했다고 말하길 기대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었단다. 가끔 교우들 중에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꼭 목사에게 “하나님의 뜻”일까 여부를 묻는 경우가 있다. 솔직히 말해 겉으론 진지하지만 속으론 웃을 때가 많다. “진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겁니까?”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두 가지의 양 극단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인형극장” 모델이다. 이 세상을 인형극장으로 생각해 창조주 하나님이 일일이 줄을 당겨서 오직 그 분이 하라는 대로 모든 창조계가 춤을 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운명을 점친다랄지, 팔자를 탓하는 것이 크게 보면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이는 결정론적 사고 모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관객” 모델이다. 우주라는 무대가 잘 돌아가도록 준비해 놓고, 이제는 무심하게 내버려두는 관객이 되어버리는 그런 하나님이다. 지난 세기의 “이신론” 즉 “눈먼 시계공” 모델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양 극단을 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최초의 창조를 시작하고서 팔짱을 끼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창조하고 계신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140억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창조주이셨고 오늘의 창조주이시다.  

      또한 그 분의 연속적인 창조는 “피조물들의 자유”를 허락하신다. 덕분에 역사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연”이 생겨났다. 그러나 스스로를 자각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줄 아는 존재들이 우주 역사의 과정에서 순전히 우연으로 생겨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목적이 있다. 물론 역사의 우발성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진행하다보면 궁극적으로 만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악과 고통”의 문제다. 어느 누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먼저 “도덕적 악”의 문제에 직면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범죄를 듣고 본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악을 허용하셨는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잠시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라. 만약 우리에게 선 대신 악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세상을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통해 수없이 많은 전쟁과 인간의 잔악함을 본다. 우리의 선택을 통해 커다란 고통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기계로 대체할 수는 없다. 이렇게 악이 발생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인간의 자유라는 더 큰 선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이며, 이를 “자유 의지 방어”라 부른다.  

       또 다른 하나는 “자연적 악”이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지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리스본 대지진을 아는가? 1755년 All Saints Day에 발생한 이 지진으로 교회가 무너져 5만 명이 죽었다. 과연 지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옥스퍼드의 신학자 오스틴 파러는 이렇게 답변했다. “신의 뜻은 지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그 본성에 맞게 작용해야 한다”고. 이를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자유 과정 방어”라 부른다. 하나님은 살인자의 행위와 병의 발생을 직접 의도하지는 않으신다. 다만 허용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약함”이거나 “간과함” 혹은 “냉담함” 때문이 아니다. 다만 불가피한 대가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고통의 미스테리나 “참담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버클리 지역도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잊을만하면 잠자고 있는 순간에,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에서, 예배를 마치고 주차장을 나서는 순간에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지진이 잘 나는 곳이었지!” 하고 자각하게 하며 땅은 흔들어대며 나를 깨운다. 매번 무섭다. 어느 날은 책장에서 “종말론”에 관한 자연과학자와 신학자들의 대화를 수록한 책을 다시 꺼내 보았다. 대충 훑어 파악될 내용은 아니었지만 십 수 년 전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기억은 우리의 “종말”에 관해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절망을 말하고, 신학자들은 “희망”을 말하더라는 것이다. 왜 그들은 절망을 말하고, 희망을 말하는 것일까? 또한 극과 극을 달리면서도 왜 그들은 서로 한 자리에 앉아 대화하려는 것일까?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데도 말이다.  

       먼저 “절망”에 귀 기울여 보자. 너무 낙담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는 마시라. 과학적인 사실일 뿐이다. 그들의 주장 속에 섞여 있는 환원주의적, 유물론적, 결정론적 “신념들”을 잘 파악하시고 새겨들으시기를 바란다. 1994년 7월을 기억하시는지. 나는 잊지 못한다. 7월 8일 토요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을 듣던 나는 판문점 근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부대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정말 아찔했다. 일명 GP, GOP에서 군복무하는 자들의 심정을 아시는지. 한달 동안 음산한 장송곡을 듣는 심정을. 우울증 정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일주일 후 7월 16일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유명한 “슈메이커 레비 9”이라는 혜성의 파편 중 21개가 거의 일주일 동안 목성과 충돌했었다. 이 충돌로 목성에 상흔이 생겨나 까맣게 반점이 목격됐는데 그 크기가 지구의 크기보다 더 컸다. 겨우 직경 1.5-2km 정도의 작은 파편으로 지구보다 큰 상흔을 남겼다. 그렇다. 만약 그 파편들 중 하나라도 지구와 충돌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이미 과학적 정설로 자리 잡고 있는 6천 5백만 년 전의 대규모 충돌로 인한 공룡의 멸종은 혜성과 유성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유성과 혜성에 의한 충격 분화구가 지구상에 몇 개나 남아있을까? 현재 140-150여개가 발견됐으며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런 지구상의 흔적과 혜성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우리는 또 얼마나 낙담하고 있는지. 그렇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언제든 “종말”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든든히 서 있는 이 땅도 지구 전체의 차원에서 볼 때는 마치 생계란의 얇은 껍질처럼 한없이 약한 지각껍질일 뿐이다. 지진이나 화산폭발에 의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절망”이다. 그러나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과학이 말하는 섬뜩한 종말은 너무나 순식간에 찾아오기에 기다릴 여유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24시간이라는 하루도 우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정말 절망적이다. 그러나 희망을 위한 이유들을 한 번 찾아보자. 우선 독일 본 대학의 신학교수인 게르하르트 자우터(Gerhard Sauter)가 던지는 우스개 소리로 절망적인 현재를 잠시 잊어 보심이 어떨지.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선한 우유 항아리에 두 마리의 개구리가 빠졌다. 한 개구리는 비관적, 다른 한 개구리는 낙관적이었다. 비관적인 개구리는 “이 항아리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 조만간 죽게 되겠지. 그렇다면 지금 바로 체념하고 모든 희망을 포기하자.” 그래서 곧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낙관적인 개구리는 희망을 결코 잃지 않았다.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몸부림을 칠뿐이었다. 밤이 새도록 발버둥 쳤다. 그러다 그 발버둥은 우유를 버터로 변형시켰고, 드디어 항아리 바깥세상으로 탈출했다. 정말 근사한 이야기다. 자 여러분은 어떤 개구리에 속하는가, 이렇게 질문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우터 교수는 비껴간다. 두 개구리가 어떤 기독교 교단에 속하는지 설명한다. 비관적 개구리는 개구리의 연약함을 걱정하며, 단지 하나님께 항아리 안으로 사다리를 넣어달라는 짧은 기도를 할 것이나 사다리는 보이지 않고 결국 불행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독일 루터교에 해당한다. 다른 개구리는 자신이 힘차게 투쟁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이는 미국 장로교 개구리였다고. 그러나 이 이야기는 너무 단순할 뿐이며, 교회에서 듣기에는 너무 경박한 일방적 성공담일 뿐이다. 어찌 낙관주의, 낙천주의, 심지어 긍정적 사고가 기독교가 말하는 “희망”과 혼동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밝은 생각, 적극적 사고가 우리 삶에 풍요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혹시 멋진 차, 근사한 집이 생길지도. 그러나 종말이라는 거대한 폭풍에 대처하려거든 단단히 준비하시라. 비닐우산 따위는 그만 접어두는 지혜가 필요할 터. 좀 더 진지하게 “희망”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희망의 이유, 희망의 뿌리를 찾아 나설 때가 되었단 말이다. 

       아이가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울지도 않고 엄마, 아빠가 있는 거실, 혹은 주방으로 걸어올 때가 간혹 있다. 다 컸구나! 그러나 내 경우는 달랐다. 심지어 십대 초반에도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 물론 울지는 않는다 – 부모님을 찾다가 당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방 저 방 두리번거리다가 집 안에 아무도 없을 때 그 놀람이란. 휴거라고 들어보셨는지. 어린 시절 “휴거”에 관련된 영화가 어찌 그리 각인이 되었던지 지금도 텅 빈 집 안을 보다가 놀랄 때가 있다. 멋쩍다.

       그러나 내가 믿던 기독교는 종말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쳐왔던 게 사실이다. 어느 날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 예수의 재림이 도래하고 그렇게 종말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종말의 끝은 온 우주의 끝과 “새 하늘 새 땅”의 도래가 될 것이다. 그 새 하늘 새 땅은 영원한 낙원이 된다. 어떤가.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종말론은 어디까지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 또한 우주의 역사는 6천년 내지 고작 1만 년이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다시 코페르니쿠스 이전으로 돌아가야 조화될 수 있는 종말론이다. 즉 온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어야 하고, 온갖 별들은 지구를 덮고 있는 저 천장에 촘촘히 매달려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와 십자가 사건 또한 지구 중심적 구원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어 왔다. 허나 자연과학은 기독교 신앙인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혹은 그렇게 믿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오늘의 신학은 아니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학문의 활동과 대화를 통해 늘 새롭게 구성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상식이다. 즉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등 현대과학의 연구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신학적으로 수용하여 기존의 전통 교리를 새롭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종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가 현대 천문학의 견해에 따르면 몇 십억 년 후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연구 결과에 의해 기존의 “종말론”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까마득한 미래보다 훨씬 빨리 예수의 재림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즉 지구의 시간에만 하나님의 심판이 묶여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인류 구원의 최종적 사건으로 이해되던 기존의 종말 역시 우주적 관점에서 새롭게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은 글을 통해 종말론 전체를 기대하지는 마시라.)

       내 어머니에게서 들은 종말론은 그야말로 현실적이며 무시무시했다. “아마겟돈” 전쟁으로 인해 핵무기가 사용되고,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인류와 생명체들은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 받아야 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휴거를 받아 아마겟돈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구출되어야 한다. 물론 더 자세하게, 그리고 매끄럽게 기술되어야 하나 이를 우리는 “세대적 종말론”이라 부른다. 그들이 말하는 종말은 그러나 지구상의 생명체의 멸절로 끝나는 단순한 “종말”일 뿐. 더 이상 현대 신앙인들에게 호소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입지가 너무나 좁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 말하는 150억 년 더 생존할 우주적 차원에서, 혹은 50억 년 남은 지구의 생존 확률 속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한편 현재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 – 생태계 파괴, 인구 증가, 자원의 고갈 등 – 을 볼 때 스스로 자멸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또한 성서가 말하는 경고 – 인간의 어리석음 – 에 대해 조금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초래하는 종말에 대해 더 고민할 때 “희망”이 싹트지 않을까.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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