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경계의 신학'[각주:1]을 위하여...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신학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신학은 시대를 전제하고 시대의 문제와 도전에 대처하고 응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본서의 제목으로 사용된 ‘탈경계의 신학’은 ‘신학, 시대와 통하라!’는 신학적 전제에 대한 현대적 각론 내지는 현대적 version 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탈경계’라는 말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대면하고 있는 당대의식 이기에 그렇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이념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계질서는 20세기 말에 밀어닥친 현실 사회주의의 패망과 함께 종말을 고하였고, 바야흐로 현재의 세계는 자본의 전지구화라는 보다 간교하고 유령과도 같은 지배질서로 대체되었다. 유령과도 같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 권력의 배후와 실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전 시대의 권력의 양태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화와 세계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개되는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의 첫 번째 강령은 경제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무역 장벽의 철폐였지만, 그것은 단순히 재화와 자본의 유통을 가로막는 국경의 해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전 영역에서의 개방과 해체를 의미하고 그 틈을 타고 유입되는 모든 낯선 것에 대한 열림과 환대가 이 시대의 미덕이고 윤리라 가르친다.
   한국 또한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강력한 단일민족문화 전통속에서 형성되었던 경계와 질서들이 해체되고 재편되는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실례로 2009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110만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이는 전체인구의 2%가 넘는 수치로 전년대비 약 25% 증가한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전체인구의 1/10이 외국인이 될 것이라 예상한다. 십 여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요 근래는 동남아 일대에서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온 처녀들이 정착하여 한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2세들이 태어나면서 다문화가정의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우리사회도 다인종, 다문화, 그리고 그에 따르는 다종교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대는 우리에게 세계가 겪고 있는 변화와 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에 걸맞는 적극적 해명, 그리고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전략과 리듬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경계와 차이와 다양성들에 대한 환대의 방식을 숙고케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우리 사회속에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다름에 대한 차별과 배제와 폭력에 대해서는 분노하라고 가르친다. ‘탈경계의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시대를 향한 신학의 답변은 늘 어색하고 어눌했고 위험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자기만의 자리, 자기만의 언어를 고집하려 했다면 신학은 이미 예전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로마교황청의 교권주의를 넘어 종교개혁을 감행한 마틴루터, 히틀러의 광기와 맞섰던 고백교회와 본회퍼, 흑인차별이라는 무너질것같지 않았던 장벽을 돌파한 마틴루터 킹 목사,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이용만 당하는 타자, 즉 민중을 신학의 전면으로 내세웠던 민중신학 등 세계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의 장벽과 경계에 막혀 신음하던 시절, 신학은 늘 그렇게 위험한 상상과 무모한 도발을 감행해왔다. ‘탈경계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등장했던 자랑스런 변혁지향적 전통을 지지하면서, 신학의 전통주제인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문제를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속에서 어떻게 다시 묻고 대답할 수 있을지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교회 안에만 갇혀 있었던 신학의 외연이 확장되어 신학의 탈영토화 (대중지향적, 현장지향적, 소수자지향적, 학제간 연구)를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의 발견과 그 과정에서 원활한 소통의 통로가 되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탈경계의 신학’은 ‘탈경계’라는 말속에 숨어있는 정치-경제적 음모와는 과감한 결렬을 시도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법칙처럼 탈경계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또 있을까?  오직 부의 축적을 위해서라면 자본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이 이념이든, 신앙이든, 역사든… 자본은 그것들 안에 저장되어 있었던 기억과 상처들을 모두 깔끔히 지우고는 자본의 원활한 유통을 막는 또 다른 경계를 찾아 경쾌히 돌아다닌다. 이렇듯 자본에 의한, 자본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탈경계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이라 할 만하다. 역사상 등장했던 제국의 모습이 무엇이었나? 모든 경계를 무너뜨렸던 세력들 아니었나? 화폐를 통일하고, 언어를 통일하고, 사상을 통일하고, 급기야는 종교까지 통일한다. 자본은 21세기형 제국이다. ‘탈경계의 신학’은 21세기형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입을 통해 선포되고 선전되는 ‘탈경계’에 대해서는 저항한다. 그것이야 말로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경계이자 한계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탈경계의 신학’은 ‘탈경계’에 대한 옹호와, ‘탈경계’에 대한 배반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적이고 변증법적이다.      

‘탈경계의 신학’을 위한 방법론

   필자는 기독교윤리를 전공하고 있다. 다른 여타의 학문들과는 달리 윤리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인간의 행위이고, 윤리학은 바로 그 행위의 분석을 위한 종합적인 학문이다. 윤리적 행위가 종합적이려면 윤리적 판단 기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여러가지 윤리적 판단기준이 있겠지만, 기독교 윤리학에서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궁극적 목표는 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신학이론들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의학적인) 공부가 현실에서의 행위의 준칙으로 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현실의 질서와 운동의 법칙은 다양한 제 학문간 교류와 협력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소박한 교리적인 접근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현상에 접근할 수 없다. 바로 그 접점에 기독교 윤리학이 위치한다.
   그러므로, 다원화된 사회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행위를 묻는 기독교 윤리학, 즉, 현대 세계 속에서 올바른 판단의 기준과 행위의 준칙을 묻는 기독교 윤리학은 인문 사회과학적 현실 인식과 대안을 다양한 신학적 사고들에 연결하여 대결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이데올로기(혹은 교회)의 위선과 폭압을 넘어서고, 우리 의식, 무의식에 영토화되어 우리를 지배하는 온갖 (신학적인, 그리고 이념적인) 우상과 맞설 수 있는 기독교윤리학으로 바로 설 수 있다.
   소제목으로 ‘탈경계의 신학을 위한 방법론’이라고 붙였는데, 그 보다는 ‘탈경계의 신학에 걸맞는 글쓰기’ 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글쓰기는 다분히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윤리학이 목표로 하는 학문적 지향점을 겨냥한다. 올바른 기독교윤리적 판단을 위한 기준은 내게 있어 신학과 인문학적 상상력과의 만남을 통해 그 체적을 넓혀왔고, 그에 걸맞는 구체적 행위로의 결단은 세계 기독교 역사 안에 간직되어 있는 해방을 향한 전통들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틀 속에서 필자는 본서에서 윤리적 판단의 직영 확대를 위해 현대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인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당대의 문화와 사건속에서 만나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신학과 합류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였다.
   이는 미국 진보신학계의 일반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바 크다. 신학이 지나친 교리논쟁, 법리논쟁에만 몰두하여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는 상황과 이론에 대한 설명과 각주가 가득 차야 신학이라고 평가받는 풍조에 맞서 구성신학은 개인의 내러티브를 기본으로 그것이 어떻게 다종의 다성의 목소리와 어울리며 신학함(doing theology)으로 모아져 가는지에 주목한다. 개체발생은 개통발생을 반복한다. 우리의 피부, 머리카락, 장기의 어느 조직을 검사해도 그것은 나만의 DNA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구성신학은 우리 각각의 내러티브 역시 놀라우리만큼 그분의 섭리안에서 작동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강한 믿음을 역설적으로 전제한다. 그리하여 구성신학은 엄한 교리적 잣대로 신학/앙을 단죄하는 근본주의 신학/앙을 향해 과도한 신학적 설명과 신학적 단죄를 그만 중단하고, 이제부터는 각각의 걸어온 경험과 역사와 신앙, 그리고 신학을 풀어놓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함께 대화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탈경계의 신학’은 내 나름의 구성신학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지적흐름속에서 ‘어떻게 신학이 이 시대를 가로지를 수 있을까?’ 에 대한 필자 나름의 물음이자 고민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기독교가 개독교로 전락한 우리사회의 서글픈 현실속에서 교리 안에 갇혀버린 신학의 폐쇄성을 폭로하고, 물신에 취한 교회를 향해서는 시장 논리와의 의식적 결렬로 나설 것을 요구하며, 신학과 교회전통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공격에 매진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대화의 테이블로 나설 것을 제안한다.

   본서는 체계적인 이론서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난 2년간 ‘제3시대 그리스도 연구소’가 운영하는 웹진 <제3시대>를 통해 발표된 필자의 졸고를 다듬고 수정한 결과물이다. 수정하고 다듬었다고는 하나, 아직 영 글지 않은 내 생각의 단초들이고 걸음마이다. 혹 책의 제목이 <탈경계의 신학>이라 ‘탈경계의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전적 의미, 내지 그에 대한 신학적 각주를 기대했던 사람들이나, ‘탈경계의 신학’이라는 말에서 어떤 새로운 조류 내지 선언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은 실망스러운 결과물이 될 것이다.
   내 처지에서 다양한 인문학적 전통과 신학과의 접속을 도모하는 가운데, 주류신학계 속으로 영토화되지 않고 탈주하는 외침과 몸부림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탈경계’이고, 이것이 신학의 외연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기대 섞인 전망에서 책 제목을 최종적으로 <탈경계의 신학>이라 이름 붙였지만, 지금 다시 한번 책의 목차를 훑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각각의 내용들이 오늘 탈고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필자가 투신하고픈 신학적 과제들로 남겨진 채 저 앞으로 미끄러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앞으로 필자가 그려나갈 학문적 궤적을 암시하는 지형도 내지 밑그림이자, 내 스스로가 상정한 신학적 논란의 제목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이르니 더욱 이 책을 독자들에게 내놓기가 부끄럽다. 학문적 완성도면에서 많이 부족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에 ‘신학노트’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비록 지금은 ‘노트’라고 이름 붙여진 소박한 결실이지만,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내 안에서 ‘탈경계의 신학’에 대한 보다 집요하고 구체적인 모색이 일어나고, 아울러 단순한 신학적 구호의 나열이 아니라 삶과 신앙의 차원으로 번져나갈 수 있는 방안까지를 포괄하는 ‘탈경계의 신학’으로 진화하기를 소망한다. 

  1. 2009년 6월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첫 원고를 보낸 이후 지금까지 매월 ‘제3시대 웹진’ [신학정보]란에 필자의 글이 게재되고 있습니다. 독자님들이 많이 읽어준 덕에 조만간 책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책 제목은 『탈경계의 신학: 시카고에서 띄우는 신학노트』 (기획: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출판: 동연출판사)입니다. 웹진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몇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였고, 미흡한 부분들은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내용을 보강하였습니다. 이번 호 웹진에 올린 글은 출판예정인 책의 머리말 중 일부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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