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코미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다[각주:1]


 

권오윤[각주:2]



살다 보면 과연 인간에게 선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쁘거나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기 마련이니까요. 자기 코가 석 자라 남의 처지에 관심을 두거나 도울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영화 <쓰리 빌보드>의 주인공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역시 그런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 달 전 참혹하게 살해당한 자기 딸의 사건은 여태껏 해결되지 않고 있고, 이에 대해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녀는 동네 외곽도로에 있는, 낡은 대형 광고판에 거금을 들여 광고를 게재합니다. 수십 년 동안 방치됐던 이 광고판에 그녀가 큼지막하게 써 놓은 문구는 마을의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를 직접 겨냥한 것입니다.

그녀의 광고는 당연히 지역 사회를 술렁이게 합니다. 윌러비는 지역 사회에서 나름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윌러비를 비롯한 지역 경찰서 식구들은 이 광고 문구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특히 흑인 용의자를 무리하게 수사해서 문제가 된 사고뭉치 경찰 딕슨(샘 록웰)은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목사나 치과 의사 같은 지역의 유력 인사들은 밀드레드가 괜한 짓을 한다며 말리려 듭니다. 말기암 환자인 윌러비는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서라도 광고판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밀드레드는 끄떡도 안 합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딸을 살해한 범인을 잡아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하는 것뿐이니까요.

사진 :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주)


미스터리 스릴러 설정의 블랙 코미디


줄거리 소개만 보면, 지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진지한 미스터리 스릴러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약점을 후벼 파는 농담을 거침없이 던집니다. 상대를 모욕하고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밀드레드의 말과 행동 역시 일반적인 피해자 가족의 태도와는 아주 다릅니다. 실제라면 심각한 수준의 폭력 장면과 방화 사건까지 일어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영화 속 맥락 안에서 관객이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요소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런 게 우리네 삶의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소 과장돼 있긴 하지만, 각자 자기한테 관심 있는 것만 보고 그게 바르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은 아주 비슷합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런 모습을 관찰하면 꽤 웃길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추구한 유머입니다.

원래 영국 연극계에서 천재 극작가로 더 유명한 마틴 맥도나는 감독 데뷔작 <킬러들의 도시>(2008)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인 <세븐 싸이코패스>(2012)도 그랬지만, 그의 장기는 스릴러 장르의 진지함을 비틀어 쓴웃음을 자아내는 블랙 코미디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 자락 남아 있는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보여주는 것을 잊지 않죠. 세 번째 감독작인 이 영화 <쓰리 빌보드>는 감독의 작품 세계가 영화적으로 가장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좋은 배우들이 필요합니다. 감독이 의도하는 대사나 연기의 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연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코미디는 뉘앙스가 한 끗만 달라져도 웃기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밀드레드 역으로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캐스팅한 것은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로 신랄한 대사를 내뱉으면서도, 섬세한 표현으로 다채로운 감정을 내뿜을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연상을 받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역시 올해 아카데미에서 조연상을 받은 샘 록웰의 연기도 인상적입니다. 마마보이인 데다 만날 농땡이만 치는 나사 풀린 경찰 딕슨이 어떤 감정 변화를 겪게 되는지 지켜보는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함께 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우디 해럴슨의 연기 또한 감독이 지향하는 영화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잘 보여줍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함께 사는 방법


인간은 누구나 무지와 편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저는 아시아의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에 미국의 흑인이나 저소득층 백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성 소수자와 여성의 처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경험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부지불식간에, 혹은 생각이 짧아서 다른 인종이나 성적 취향, 젠더에 대해 차별적인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지와 편견이 드러났을 때 취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회 구성원과 함께 살아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짧은 견해를 자연법칙이요, 진리라고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행동이란 이런 겁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약육강식은 자연법칙'이라며 무한 경쟁 체제만을 옹호하는 논리를 폅니다. '남자는 원래 씨를 뿌리는 본능이 있다'며 미투 운동을 폄하하기도 하죠. '인간이라면 후손을 낳아 기를 수 있어야 한다'면서 동성애 혐오를 당연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은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아주 고약한 사고방식이죠.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인간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험난한 자연계의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따라서 정말 '인간적'인 행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타인에 대한 예의와 기본적인 선의를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싫다면, 그냥 속세를 등지고 야생으로 돌아가 다른 동물처럼 살거나 아예 동물원에 거처를 마련하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사나운 저소득층 백인의 긍정적 변화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주리주는 미국 중부 내륙 애팔래치아 산맥 인근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입니다. 여기에는 권위를 무시하고 호전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 저소득층 백인들이 많이 삽니다. 밀드레드와 딕슨처럼요.

두 사람은 처음에 각자 자기만의 시각과 주장에 갇혀 있는 극단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밀드레드의 분노는 정당했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받을 상처를 헤아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딕슨은 늘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서 타인을 무시하고 배척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변화합니다. 자신을 향한 다른 이들의 아주 조그만 선의를 경험하게 되면서요. 밀드레드는 인권이나 절차 따위는 무시하고 오로지 딸의 사건 해결만을 바란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감사할 줄 몰랐던 자신을 뒤돌아봅니다. 딕슨은 자신의 편견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파국을 초래하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과거 자신이 했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듯 온갖 어설프고 이기적인 실수를 하지만, 변화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하는 마음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고 실천한다면요. 이것이 바로 언뜻 보기에 막장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 <쓰리 빌보드>가 남긴 속 깊은 교훈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2018년 2월 2일자 기사 <참혹하게 살해된 딸... 분노한 엄마와 예의없는 경찰>(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14876)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갈등과 치부 솔직하게 드러내 참사의 본질을 직시한 다큐[각주:1]


 

권오윤[각주:2]



       2009년 1월에 일어난 용산 참사는 이명박 정권의 비인간성과 자본의 민낯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뉴타운 사업이 철거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지연되자 용역과 공권력을 투입하여 무리하게 진압했고, 그 와중에 일어난 화재는 철거민 5명과 의경 1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법적 책임은 당시 진압을 책임졌던 경찰 지휘부나, 경찰 지휘 책임이 있는 정부가 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옥 같은 불길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철거민들이 그 책임을 떠안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참사에 원인 제공을 한 ’공동정범’으로 기소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됐지요.

       <공동정범>은 불공정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던 철거민 중 다섯 명의 출소 후 모습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당시 용산4구역 대책위원장으로서 함께 망루에 올랐던 아버지를 잃은 이충연 씨는 여러 언론을 통해 가장 주목을 많이 받은 인물입니다. 출소 후에도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반면, 다른 네 사람은 용산 지역 철거민이 아닙니다.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소속의 다른 지역 철거민으로, 당시 연대 행동을 목적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용산구 신계동 철거민 김주환 씨 , 동작구 상도4동 철거민 천주석 씨, 성남시 단대동 철거민 김창수 씨, 중구 순화동 철거민 지석준 씨가 그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아픔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진 : 시네마달


솔직한 묘사, 공감으로 이어지다.


       소수자의 입장을 다루는 작품을 만들 때 창작자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은 그들을 지지하는 마음이 앞서 논지를 전개하는 데 유리한 측면만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 치부 같은 불리한 면모를 드러내면 왠지 이들의 정당성이 훼손될 것만 같고, 주장을 스스로 뒤엎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면만 보여주면 짧은 구호나 뉴스 기사 같은 이미지로만 남게 될 뿐, 관객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며 잘못된 판단을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이 앞설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을 오해하거나 왜곡된 기억을 진짜라고 믿기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인간이므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작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노동 계급의 문제를 다뤄온 켄 로치 감독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중심인물의 치부나 한계를 보여주는 데 그리 인색하지 않은 편입니다.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그들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죠.

      <공동정범>의 감독들이 가장 고민했고 조심스럽게 접근한 것도 이런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이충연을 비롯한 용산 쪽 사람들과 다른 지역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적 앙금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들 사이에는 참사 당시는 물론 출소 전후의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과 오해, 미안함 같은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창작자로서 이들의 갈등을 아예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감정싸움은 벌써 사람들로부터 잊혀가고 있는 용산 참사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일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들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선택의 결과는 좋습니다. <공동정범>은 감정적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영화 속 용산 참사 관련자들의 심정은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것들이니까요.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철거민이 돼 본 적도 없을 테지만, 이들이 서로에게 가진 미안함과 서운함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용산 참사라는 비극의 본질을 다시 한번 직시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겪은 이유는 턱도 없는 보상금에 분노해서 싸웠기 때문도 아니고, 다른 지역 문제에 오지랖 넓게 나서서 연대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자본의 편에 서서 공권력을 동원해 주먹을 휘둘렀고, 부당한 판결을 통해 이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은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니까요.


차이보다 공통점에서 얻는 희망


       어떤 모임이나 단체든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공존합니다. 대의와 목적을 위해 효율적으로 움직이자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과 연대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지요. 이런 견해차는 종종 다툼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갈등이 노출됩니다. 참사의 진상 규명과 재심을 위한 노력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이충연의 태도와 인간적인 관계와 연대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다른 지역 철거민들의 이야기는 확실히 지향점이 다릅니다.

       양쪽 입장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으로는 안됩니다.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기만 하면,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지쳐서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또한, 인간관계에만 신경 쓰다 보면 일반적인 동호회 모임과 다를 것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요.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백 사람이 있으면 백 사람 모두 각자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에만 주목하면 세상에는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차이는 인정하되 공유하는 가치와 목표에 집중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 <공동정범> 제작에 힘을 보탠 이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이 시급히 이뤄지길 빕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2018년 2월 2일자 기사 <갈등-치부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해 더 마음이 가는 다큐>(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01216)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그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꿨던 반란...’커닝’ 스릴러 온다[각주:1]


 

권오윤[각주:2]



       끊임없는 시험의 연속인 학창 시절에 ‘커닝’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만큼 흔한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좀 덜했지만, 입시 부담이 높아지는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심지어 대학에서도 크고 작은 부정행위 시도는 늘 있었습니다.

       유형도 다양합니다. 남의 답안지를 무단으로 훔쳐보는 것부터 처음부터 여럿이 짜고 공부 잘 하는 친구의 답안을 공유하기로 하거나, 자기만 아는 곳에 공부한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놓기도 합니다. 남의 답을 그대로 베꼈다가 탈이 나는 경우도 있고, 좀 더 머리를 굴려 적절히 알아서 다르게 적거나 그냥 자기 풀이에 참고하는 정도로만 쓰기도 하지요.

       <배드 지니어스>는 바로 이 ‘커닝’을 소재로 한 스릴러입니다. 방콕의 명문 고등학교로 전학한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은 같은 반의 바로 뒷번호 학생인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와 친해집니다.

       그런데, 연기자를 꿈꾸는 그레이스는 일정 성적 이상을 받지 못하면 연극반 공연을 할 수 없다는 규정에 걸릴까 봐 고민입니다. 린은 그레이스가 제일 어려워하는 수학을 따로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막상 시험 시간이 되자 그레이스는 전혀 답안을 쓰지 못합니다. 보다 못한 린은 그레이스에게 시험 감독의 눈을 피해 답을 직접 알려 주게 되지요.

       그레이스의 부자 남자 친구 팟(티라돈 수파펀핀요)은 이 소식을 듣고 린에게 접근합니다. 자기에게도 답을 알려 주면 과목당 3천 밧(우리 돈으로 약 10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죠. 팟뿐만 아니라 다른 급우 몇 명도 똑같은 조건을 제시하며 답을 요구합니다. 린은 고민 끝에 본격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기로 하고, 완벽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사진 저작권자: (주)팝엔터테인먼트


흥미진진한 '커닝' 스릴러


       불법 행위를 모의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서스펜스와 스릴에 집중한, 전형적인 케이퍼물의 공식에 충실한 영화입니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블랙 유머, 서스펜스 넘치는 장면들이 돋보입니다. 그런데도 범죄극의 필수인 피와 죽음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순전히 돈으로 좋은 성적을 사려는 금수저의 욕망, 실력은 있어도 돈이 부족한 흙수저의 처지, 기발한 커닝 기법이 맞물리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까지 맡은 감독 나타우트 폰피리야는 2012년에 <카운트다운>이란 데뷔작을 내놓은 신예로서, 5년 만에 두 번째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잘 짜인 샷 구성과 감각적인 편집을 통해 탄탄한 연출력을 보여주는데, 특히 인물의 심리 상태를 과장하고 영화 속 시간을 늘려서 서스펜스를 창출하는 실력이 발군입니다.

      무조건 높은 성적과 좋은 대학만을 원하는 과도한 교육열, 뭐든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극심한 빈부 격차가 동시에 존재하는 태국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포착해낸 것도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태국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가 경제 성장 과정에서 겪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배드 지니어스>가 중국과 동남아 각국에서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휩쓸었던 데에는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가 친숙하게 느껴진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극 중 린 역할을 맡은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을 비롯한 태국 젊은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편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미숙한 구석은 있지만, 자기 이익이 걸리면 어른 이상으로 영악해지는 중심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잘 살려내었습니다. 린의 아버지 역할로 출연한, 태국의 유명 록 뮤지션 타네 와라카누크로 역시 진솔하고 안정감 있는 연기로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합니다(그는 올해 BIFF 상영작이자, 선댄스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싱가포르 영화 <뽀빠이>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부정행위 이면에 도사린 사회의 책임


       어떤 경우든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단 꼼수로 좋은 성적을 받겠다는 계획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반칙 행위를 저지른 학생들만 나무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굳이 이렇게 남을 속여 가며 점수에 연연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시험 점수로 개인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고 미래까지 결정해 버리는 사회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요 인물들이 그토록 부정행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학벌과 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 자식의 진짜 능력에 대해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시험 점수와 좋은 학교 입학 여부에만 관심 있는 부모는 모두 이들의 공범입니다.

       또한, 부조리한 기성세대의 행태도 이들의 윤리 의식을 흐릿하게 하는 데 한몫합니다. 영화에서 모범생 린이 커닝 사업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학교가 학부모들로부터 추가로 운영비를 뜯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불법을 저지르는 학교를 속이고 돈을 버는 행위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젊은 세대나 청소년의 비행을 언론 보도로 접하면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은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요즘 애들 참 문제다.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라며 남의 일 이야기하듯 하죠. 하지만 그렇게 모른 척, 아무 상관도 없는 척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에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회를 만든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니까요.

       젊은 세대의 악행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먼저 돌아보고,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고 힘든 부분이 있다면 곁에서 도와줄 수도 있어야겠지요. 이것이 바로 <배드 지니어스>에서 린의 아버지가 내린 결정이자, 이 영화가 제시하는 현명한 대안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1월 3일자 기사 <그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꿨던 반란... ‘커닝' 스릴러 온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73707)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전쟁과 가부장제의 역설,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각주:1]


 

권오윤[각주:2]



       전쟁은 모든 것을 망칩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며, 인류가 성취한 경제적 번영은 잿더미로 변하고, 사회 문화적 자산은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잠겨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요.

       이 영화 <프란츠>는 바로 그런 처지에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의 어느 마을,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은 안나(폴라 비어)는 그의 부모와 함께 살며 날마다 무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구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나는 아직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나는 프란츠의 무덤가에 서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프랑스 청년 아드리앙(피에르 니네이)을 보고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심지어 그는 저녁 무렵에 우수에 젖은 얼굴로 집까지 찾아와 프란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요. 안나는 아드리앙이 프란츠가 프랑스 유학 시절 사귀었던 친구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안나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아드리앙은 이후로도 여러 번 집을 찾아 프란츠에 대한 추억을 들려 줍니다. 프란츠의 부모와 안나는 예의 바르고 섬세한 아드리앙에게 금세 매료됩니다. 안나는 프란츠 부모의 배려로 아드리앙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자주 가지면서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하지요. 그러나 아드리앙으로부터 그동안 숨겨 왔던 진실에 대해 듣게 되고, 감정적으로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할리우드 고전의 리메이크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독일 출신 명감독 에른스트 루비치가 만든 <내가 죽인 남자>(Broken Lullaby)(1932)를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리메이크힌 영화입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남성의 죄책감에 초점을 맞춘 원작과는 달리, 안나의 감정에 집중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배우, 로케이션, 촬영 이렇게 세 가지에 공을 들여 담백하게 표현한 점이 돋보입니다. 프랑수아 오종 하면 재기발랄한 내러티브 구성과 도발적인 문제 의식 같은 것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형식상 매우 고전적입니다. 그림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배우의 자연스런 연기를 이끌어 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화면에 담는, 영화 제작에서 기본이 되는 것들에 충실합니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신중히 계획된 인물 샷들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앵글과 샷의 크기, 초점 이동 등을 세심하게 조절하여 화면에서 인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도록 하지요. 극의 구성상 중요한 장면들은 물론이고, 무덤가에 서 있거나 기차역에서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등 언뜻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까지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곤 하는 것은 모두 그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 장면의 흑백 화면에서 꿈 같은 시간을 의미하는 컬러 화면으로 바뀌는 순간들, 아드리앙이 프란츠의 가족 앞에서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 20번의 애수어린 멜로디 등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킵니다. 이렇게 영화는 전사한 연인의 친구에게 끌리는 안나의 마음에 집중하며 서서히 절정에 다다릅니다.

       안나 역을 맡은 독일 여배우 폴라 비어는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선 굵은 연기를 보여 주며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섬세한 감정 표현보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와 드러낼 때의 극적인 차이를 통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쪽입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2016년 베니스 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비극 초래한 가부장제, 그것을 뒤엎는 역설


       이 영화는 전쟁이 초래한 비극에 가부장제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을 적시합니다. 극 중 프란츠의 아버지가 후회하듯,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은 조국의 영광을 앞세운 아버지들이었습니다. 안나 역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의 희생양입니다. 약혼자의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장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권유받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극 중 안나가 겪게 되는 일들은 가부장제의 미몽과 억압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독일 마을에서 벗어나 파리와 프랑스 시골 저택까지 간 끝에,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만이 행복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안나의 각성은 두 가지 역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안나를 중심으로 오가는 거짓말들입니다. 프란츠나 아드리앙은 안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 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녀를 가부장적 질서 안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안나는 이것을 프란츠의 부모에게 고스란히 돌려 줍니다. 그들의 낭만적 환상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이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내지요. 한 때는 그녀를 옭아맸던 허구의 이야기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안나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보게 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자살>입니다. 살롱 전시에 선정되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화가를 적나라하게 그린 이 그림은 생생한 죽음의 현장을 담고 있지만, 안나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스토리가 안나의 애초 바람대로 흘러갔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낭만적인 연애담이 주는 만족감이 상당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감독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안나는 좌절을 겪은 끝에야 진정한 희망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절망의 끝에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며 그것을 붙잡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 <프란츠>의 미덕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7월 30일자 기사 <전쟁과 가부장제의 상처,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4653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역사적 팩트가 전하는 진실한 감동, 그야말로 ‘독보적’ [각주:1]


 

권오윤[각주:2]



       흔히 역사학의 의의는 과거의 일을 되돌아봄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갖고 영화를 만들 때도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일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거나 이야기의 밑 재료로만 활용하고 말아 버린다면, 역사적 사실에 관한 영화를 찍는 의의가 없는 것 아닐까요?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는 것은 힘들다 하더라도, 최소한 오늘날의 현실에 질문을 던지는 역할은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 <박열>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황태자 암살 계획 모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한국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박열(이제훈)은 3.1운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와 인력거꾼 등의 막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 및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아나키스트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합니다. 그의 시 '개새끼'를 읽고 호감을 느낀 일본인 동료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제의로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동거를 시작하기도 하죠.

       그런데 도쿄와 요코하마 일원을 강타한 간토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엄청난 피해로 인해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괴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려 시민들의 분노를 돌리려 합니다. 일본인들은 자경단 등을 결성하여 무려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외국인이 발음하기 힘든 '十五円五十錢'(15엔 50전)을 시켜 보고 이걸 제대로 못 하면 바로 죽여 버리는 식이었죠.

       이런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자,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대책을 세우려 합니다. 이때 주목받은 것이 바로 박열과 그의 동료들의 황태자 암살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폭탄 확보를 하지 못해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지만, 박열과 후미코를 '대역죄인'으로 몰아 국론을 결집하기엔 아주 좋은 재료였지요.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


       당시는 일본이 3.1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 후 악화한 국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 통치'라는 것을 시도했던 때입니다. 국제 사회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자기네가 대역 죄인에게도 공정한 법적 절차를 보장할 정도로 문명국이라는 점을 보여 주려 했습니다. 박열은 이런 상황을 역이용하여, 재판 과정을 3.1운동과 간토 대학살의 진상을 세계만방에 알릴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영화는 이런 부분을 명확히 짚어 나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박열이 심문 도중에 일갈하듯, 일본이 만약 진정한 문명국이라면 식민 지배 자체를 말았어야 했습니다. 섣부른 유화책으로 여론을 호도하려 들지 말고요.

       이것은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비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 일본 정부의 행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이미 아시아를 벗어났다고 속으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겠지만, 여전히 그들의 정부는 간토 대학살은 물론 위안부 문제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아직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제국주의 일본이 보여 준 여론 통제 및 정치 권력의 부당한 재판 개입은 지난 박근혜 정부의 전횡을 곧바로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정당성을 잃은 권위가 억지로 그것을 유지하려고 할 때의 행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똑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훈은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특유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자유롭고 편하게 청년 박열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장난기와 결연한 의지를 번갈아 보여 주는 악동 박열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파수꾼>으로 처음 주목받던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후미코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최희서는 이 영화의 진정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나키스트 여성 활동가로서의 기백과 애인으로서의 사랑스러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써, 후미코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인물로 만들었으니까요. 감독의 전작 <동주>가 송몽규의 영화이기도 하듯, 이 영화는 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동지적 연대에 기반을 둔 그녀의 강한 의지와 사랑은 박열의 투쟁을 밝힌 횃불이었고 굳건한 지지 기반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간악함을 대표하는 인물인,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역할을 맡은 김인우 역시 이번 영화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재일교포 3세 출신인 그는 <암살>, <동주> 등의 영화에서 최근 몇 년간 일본인 배역 전문으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준 바 있지요.


감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역사적인 인물을 다루는 전기 영화로서 <박열>이 뛰어난 점은, 섣불리 감정을 자극하려 들지 않고 관객에게 인물이 처한 상황을 다각도로 따져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주요 인물들이 느꼈을 법한 진짜 감정과 딜레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기존의 한국 역사물들과 이 영화가 차별화되는 지점입니다. 그동안 객관적인 역사적 상황을 보여 주기보다는, 실존 인물이 느꼈을 법한 가상의 감정을 작가나 감독이 추정하여 극화한 영화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 장면은 대부분 사족이거나, 너무 단순해서 신파조로 느껴지곤 했지요. 최고 흥행기록을 가진 <명량>부터 몇 주 전에 개봉했던 <대립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가 공통으로 가진 약점이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인 <사도>나 <동주>도 이런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특히 절정 부분이나 결말에 다가갈수록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그런 장면들이 생각만큼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인물 그 자체보다는, 인물에 대한 감독과 각본가의 해석이 더 중요했던 영화들이기도 했고요.

       그에 비하면 <박열>은 인물과 역사적 상황을 앞세우고 감독이 한발 물러서는 쪽이라서, 관객은 이 세기의 아나키스트 커플에게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기백과 의지, 동지로서의 연대,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동료들의 마음 같은 것들을 하나씩 가슴에 품어 가면서요. 바로 그런 것들이, 미끈하게 잘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진심을 담고 있는 이 영화가 건네는 소중한 선물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6월 30일자 기사 <역사적 팩트가 전하는 진실한 감동, 그야말로 ‘독보적’>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38271) 으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코미디와 공포의 경계에서 차별을 말하다[각주:1]


 

권오윤[각주:2]



       공포물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프로이트적 개념을 충실히 구현한 장르입니다. 일상에서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것들이 고약한 형태로 나타나 주인공을 위협하지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문명 세계에서 추방됐던 유령이나 괴물이 출현하고, 인간에 대한 공격성과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체화한 살인마가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면, 우리가 그동안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억눌러 온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 <겟 아웃>은 이러한 공포 영화 특유의 설정을 공유합니다. 흑인 사진작가 크리스 워싱턴(다니엘 칼루야)은 매력적인 백인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엄스)와 사귀고 있습니다. 주말을 맞아 로즈의 가족을 방문하기로 한 크리스에게,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경찰인 로드(릴 렐 하워리)는 백인인 그들이 널 반길 리가 있겠냐면서 농담조로 조심하라고 합니다.

       다행히 로즈의 부모는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적어도 겉으로는 크리스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크리스는 좀처럼 불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가사 일을 돕고는 있지만 괴이하게 행동하는 흑인 하인들과, 예의 바른 태도 속에 차별 의식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로즈의 가족들 때문이지요. 더 껄끄러운 것은 바로 그 주말이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가족 행사 때문에 백인 손님들을 초대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상식과 합리,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아래에 있는 백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의식입니다. 이것은 극이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끝에, 후반부에서 뒤틀리고 일그러진 방식으로 형상화됩니다.

       처음에는 풍자적인 블랙 코미디인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쿨한 척하는 백인이라도 별수 없구나 싶어 쓴웃음을 머금게 되지요. 그러나 뭔가에 홀린 것처럼 행동하는 흑인 하인들과, 로즈네 가족 행사에 참여한 유일한 흑인 손님 앤드류의 모습을 보면 이게 그냥 비웃고 넘길 상황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유발된 궁금증과 왠지 모를 껄끄러움은 로즈 가족의 정체가 드러나는 후반부까지 극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줍니다.

       로즈 가족의 계획과 그들이 여는 행사의 정체는 '흑인들의 육체적 능력만큼은 인정하지만 그들의 지적 능력은 별 볼 일 없다'라는 뿌리 깊은 편견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는 순간, 이제까지 나왔던 모든 장면은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배려와 친절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모두 끔찍한 계획과 연결돼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니까요.

       영국 출신의 주연 배우 다니엘 칼루야는 크리스가 겪는 다양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코미디와 공포의 경계에 서 있는 이 영화의 전략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모국에서는 주로 TV에서 활동했으나 최근 들어 할리우드 영화에도 진출했습니다. 내년 개봉 예정인 마블의 <블랙 팬서>에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합니다.

      각본과 감독을 맡은 조던 필은 이 작품이 감독 데뷔작이지만, 오랫동안 TV에서 활약해 온 코미디언입니다. SNL과 자주 비교되는 MadTV 출신으로, 동료 키건 마이클 키와 공동 기획하고 함께 출연한 스케치 코미디 프로그램 <키 앤 필>(Key & Peele)로 2016년에 에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보여 준 인종 차별에 대한 풍자적인 묘사를, 공포물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이 영화 <겟 아웃>의 매력을 더했습니다.

       미국 흑인의 시점에서 백인의 인종 차별 의식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이 영화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온전히 즐기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인종 차별을 풍자할 때 사용되는 코드에 익숙하지 않으면, 폭소를 터뜨리기는커녕 약간 냉소적인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지나가기 쉽지요. 그러나 이것을 우리에게도 익숙한 성차별 문제로 바꿔 보면,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꼬집으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차별 관련 이슈가 부각되면 많은 남자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니 싸잡아 이야기하지 좀 말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그러나 성별이나 인종, 혹은 사회 경제적 위치에 있어서 차별당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려는 노력을 따로 하지 않으면 무엇이 차별이고 차별이 아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게 별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지요.

       차별은 일부 극단주의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될 때, 혹시 그것이 자기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에게만 상식인 것은 아닌지 반드시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실질적인 노력 없이 자신의 양심과 결백함을 증명하려 하거나,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여 개념적으로만 평등을 주장하면 차별 문제는 결코 해소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겟 아웃>이란 영화가 풍자적인 코미디와 공포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전하려고 한 메시지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5월 22일자 기사 <웃다가 공포에 떨게 되는 영화, 어떤 메시지 담았나>(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2730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미래세대 위해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일, 그가 보여줬다[각주:1]


 

권오윤[각주:2]



       <엑스맨> 시리즈의 특징은 주요 캐릭터들이 초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로서 사람들의 몰이해와 선입견 때문에 잘못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시리즈 내의 모든 갈등이 여기서 출발하지요. 차별적 대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잘 조절해서 인류를 위해 사용하자는 입장의 '엑스맨'들은, 차별에 맞서 자신들의 위대함을 보여 주자는 매그니토 같은 다른 돌연변이들이나, 돌연변이를 없애거나 통제하고 싶어 하는 정상인들을 적으로 맞이하여 끊임없는 싸움을 해 왔습니다.

       이 영화 <로건>은 특유의 치유 능력인 '힐링 팩터' 때문에 '남들과 다른 삶'을 어떤 돌연변이보다도 오래 살아가야 했던, 엑스맨의 대표 캐릭터 울버린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로건(휴 잭맨)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출장 리무진 기사로 일하며 몹시 늙어버린 프로페서 X(패트릭 스튜어트)를 비밀리에 돌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울버린임을 알아보고 접근하는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어린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지정된 좌표의 지역으로 데려다줄 것을 부탁하며 돈을 건네고, 마침 돈이 필요했던 로건은 내키지 않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로라를 쫓고 있는 의문의 기계 팔 사나이 도널드 피어스(보이드 홀브룩)와 그가 이끄는 조직의 습격을 받게 되고, 그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로라 역시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갖춘 돌연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정조는 서글픔입니다. 캐릭터 설정부터 그렇지요. 거친 마초 캐릭터였던 로건은 황량한 멕시코 국경에 숨어 프로페서 X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과거 놀라운 정신 능력을 지녔던 프로페서 X는 이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늙은이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로라 역시 천부적인 살상 능력을 지녔지만, 그토록 어린 나이에 피 튀기는 싸움에 내몰리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로드 무비 같은 중반부나, 결말부의 대결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사 가족 관계인 프로페서 X-로건-로라의 여정은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 과정에서 치르게 될 참혹한 대가에 대한 어두운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이미 쇠락한 육체적 능력을 억지로 끌어올려 마지막 싸움에 나서는 로건의 모습은, 여태껏 사랑하는 이들을 잃기만 했던 그의 과거와 맞물려 일종의 숭고함을 느끼게 하지요.


       이 영화의 폭력 묘사는 수위가 다소 높은 편입니다. 하지만 <킥 애스> 시리즈처럼 깜찍한 소녀 전사의 매력을 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킹스맨>에서와 같이 시각 디자인적 요소를 첨가하여 오락적인 볼거리로 만들거나, <존 윅> 시리즈처럼 사실적인 액션과 고난도 스턴트를 통해 쾌감을 주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과 없이 등장하는 가차 없는 폭력과 죽음의 이미지들은 로건이 헤쳐 온 처절했던 과거의 삶, 그의 일행이 맞닥뜨린 섬뜩한 현실적 위협, 그리고 로라를 비롯한 차세대 돌연변이들이 맞이하게 될 미래의 숙명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그 때문에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한층 더 커집니다.

      감독 제임스 맨골드가 직접 쓴 각본은 '울버린의 최후'라는 중심 소재에 맞게 모든 것이 잘 조직돼 있습니다. 감독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듯, <셰인> 등 기존의 다른 영화들로부터 극적 아이디어나 정서 측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새롭다고 할 만한 지점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세심하게 등장인물을 선택하고 에피소드를 구성한 것, 복선을 설정하고 작품 안의 상황을 빠짐없이 설명할 수 있도록 디테일을 잘 채워 넣은 점을 고려하면 성실하게 잘 쓴 시나리오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허트 로커> <월드 워 Z> <설국열차> 등에 참여했던 영화 음악가 마르코 벨트라미의 음악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캐릭터에게 느끼는 처연함과 그들이 처한 비정한 현실이 이질감 없이 잘 맞물릴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그의 공입니다. 특유의 타악기 리듬을 활용한 액션 장면들과 흐르는 선율로 감싸 안은 황량한 풍경들은 기묘한 서글픔을 자아냅니다.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게 되면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예전만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즉각적인 격한 반응만 하고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나서 봤자 바뀌는 건 하나도 없더라', '어차피 힘 있는 사람들 마음대로 돌아가게 돼 있다'는 체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의 씁쓸한 경험과 현실에서 느끼는 막막함은 그런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개를 들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 고난과 아픔이 나중에 더 심화한 형태로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말 테니까요. 우리에겐 다음 세대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지도 않는 조언으로 참견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작게나마 실천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어려움을 조금씩 바꿔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이 영화 속에서 로건이 그렇게 애쓴 것 역시 자신이 겪은 죽음과 폭력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도 처음부터 알았을 겁니다. 어린 친구들이 국경을 넘는다고 해서 돌연변이들을 악용하고 말살하려는 시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 거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그가 죽음을 앞두고 이뤄 낸 '작은 성공'은 로라를 비롯한 다음 세대의 돌연변이들에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지난 몇 달간 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었습니다. 국가 조직을 동원해 사익을 추구하여 나라의 부를 털어먹은 이명박 일가와 그 주변 사람들,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일족 같은 사람들로 인해 고생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촛불의 힘이 대통령 탄핵을 넘어 실질적인 국가 개혁으로 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이 기억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희망의 씨앗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3월 8일자 기사 <미래세대 위해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일, 그가 보여줬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05005)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김희진
    2017.04.20 10:3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고통만 가득했던 로건의 생 끝무렵에 아이를 만나 그래도 마지막은 편히 눈 감았기를 빌며, 제 마음속에서 로건을 떠나보냈네요. 나이 들고 병들었지만 끝까지 강인했던 로건, 겉모습은 거칠지만 마음이 넓고 따뜻했던 캐릭터여서 참 정이 갔었는데 .. 휴잭맨 님도 이 마지막 영화를 찍으면서 참 여러가지 감정이 들었을 것 같아요.
    기성세대들 그리고 갓 사회인이 된 저 같은 어른들부터, 꾸준하게 노력을 행동하고 실천하여, 우리 미래세대들의 앞길이 조금 더 밝아지는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 피터김
    2017.07.01 06:4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우리는 고개를 들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 고난과 아픔이 나중에 더 심화한 형태로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말 테니까요. 우리에겐 다음 세대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지도 않는 조언으로 참견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작게나마 실천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어려움을 조금씩 바꿔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명문입니다.


"우리는 개가 아니다" 당연한 '인간 존엄'을 되찾기 위한 그의 여정[각주:1]


 

권오윤[각주:2]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영국 하층 노동 계급에 속한 주인공의 삶을 다룹니다. 주인공의 애정 생활이나, 가족 혹은 유사 가족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국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죠. 그 중에서도 불합리한 영국 복지 제도에 대한 비판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구직 활동을 해야 실업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노동 복지의 현실은 <외모와 미소>(Looks and Smiles)(1981) 같은 초기작뿐 아니라, 90년대의 <레이닝 스톤>(1993), <내 이름은 조>(1998) 등의 영화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 바 있습니다. 또한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1994) 같은 영화에서는, 지키기 힘든 조건들을 내세우는 관료적인 사회 복지 제도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싱글맘을 보호하고 돌보기는 커녕, 점점 사회 바깥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통찰을 보여 주기도 했지요.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그런 계열입니다. 40여년간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 온 60대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심장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는 법적으로 보장된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담당 직원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실랑이를 벌인 끝에 지급을 거부당합니다. 항소를 준비하면서 실업 급여라도 받기 위해 애를 쓰지만, 절차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관료적인 영국 복지 제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직접 찾아간 고용 센터에서는, 불과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고용 센터 상담을 거부당한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도우러 나섰다가 쫓겨나기까지 하지요. 영화는 이 때부터 다니엘과 케이티 두 사람의 삶을 따라갑니다.

 

켄 로치 영화의 주인공들은 하층 계급의 리얼리티에 맞게 인간적인 단점도 많이 지니고 있고, 결국 큰 사고를 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반적인 중산층의 도덕 기준으로 볼 때 많이 부족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이들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기 위한 설정이지요. 각기 아버지가 다른 4명의 아이를 키우면서도 또 다시 쉽게 사랑에 빠지곤 하는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의 싱글맘 매기, 마약 거래로 모은 돈으로 어머니와 살 멋진 집을 구입할 꿈을 꾸는 꾸는 <스위트 식스틴>(2002)의 리암, 친구들과 함께 값비싼 싱글 몰트 위스키를 훔칠 생각을 하는 <엔젤스 셰어>(2012)의 비행 청소년 로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잘’ 해 보려고 합니다. 규정과 절차에 질린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것을 존중하는 가운데,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안간힘을 쓴 대가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멸감뿐입니다. 다니엘은 고용 센터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하나 둘씩 어렵게 맞춰 나가지만, 그럴 수록 시스템은 그에게 더 완전한 복종을 원합니다. 그는 아내의 추억이 깃든 집안의 가구를 몽땅 팔아치우지 않고서는 연명할 수 없는 처지에까지 몰립니다.

 

 

아무 기술도 없고 배움도 부족한 싱글맘 케이티는 더 기가 막힌 일들을 당합니다. 그녀는 돈이 부족하기 때문에 늘 아이들이 우선이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마트에서 먹거리와 아이들 물건은 사면서도 개인 위생용품인 생리대와 데오드란트, 면도기 등을 살 돈이 없어 훔치다 창피를 당하기도 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푸드 뱅크에서 장을 보다가 배고픔을 못 이기고 그 자리에서 통조림을 따서 입에 마구 욱여 넣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 참혹한 빈곤의 굴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정직하고 성실한 노력만으로는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돈을 손에 쥐어야만 탈출이 가능합니다. 다니엘의 운명과 케이티의 삶이 달라지는 분기점이 케이티가 성매매에 나서기 시작하면서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설정입니다. 자본의 논리와 그것에 기초한 사회 체제는 돈이 없다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걸 서슴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 나온 영국 복지 제도의 뻣뻣하고 관료적인 모습은 영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정 기준을 갖춘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는 보편 복지가 아닌, 차등적으로 적용되는 선별 복지 제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일입니다. 대상자가 얼마나 지원을 필요로 하느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원 대상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한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주업무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나라의 초중고 무상급식 논쟁부터 시작하여, 양육 수당의 차별적 적용, 기초생활수급자 선정 기준 문제, 기초노령연금 차등 지급 등과 관련한 논란들 역시 재정 여력이 없다는 핑계로 선별 복지 개념을 추구하면서 벌어진 것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의 복지 제도는 국민에게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어야지,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시혜 행위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자선과 기부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받는 사람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드러내게 만듦으로써 더 큰 모멸감을 줄 뿐입니다. 먹고 살려면 자존감이라도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푸드 뱅크의 자상한 사람들, 위생용품을 훔친 사실을 눈 감아 주는 점장, 성매매를 알선해 주는 포주 등은 케이티에게 모두 같은 요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니엘 역시 질병 수당이나 실업 급여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절차와 규정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노예처럼 행동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영화 말미에 다니엘이 겪는 불행은 부당한 처사에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고, 당당한 인간으로 버텨낸 끝에 받게 된 징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고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 힘 있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다니엘 블레이크의 꿋꿋함과 주저하지 않는 연대 의식에 감명 받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의 안타까운 실패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와 사회 제도를 만드는 일에 소중한 씨앗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2월 18일자 기사 <"우리는 개가 아니다" 당연한 '인간 존엄'을 되찾기 위한 그의 여정>(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71106)으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빈곤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각주:1]


 

권오윤[각주:2]



       현실 사회에서 범죄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금기시 하는 행위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범죄자의 편이 되어 그를 응원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범죄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이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다루는 케이퍼 영화가 대표적인 경우죠. 값진 물건을 절도하거나 현금성 자산을 강탈하는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마치 자기가 그 일원이라도 된 것처럼 스릴을 느낍니다.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 영화, 즉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과 그에 맞서는 인물이 엇비슷한 분량으로 등장하면서 쫓고 쫓기는 대결을 펼치는 경우에도 범죄자에게 어느 정도 감정 이입할 수 있습니다. 범죄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요. 사람을 마구 죽이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동일시 할 관객은 거의 없을 테지만, 강간범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여성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범죄자에 대한 호감은, 관객의 마음 속에서 범죄 행위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과 갈등을 일으키며 영화에 대한 흥미와 집중도를 높여 줍니다. 이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그런 식의 양가 감정을 잘 활용하여 영화의 재미를 확보한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과가 화려한 형 태너(벤 포스터)와 차분한 성격의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는 서부 텍사스의 미들랜드 은행 지점에 연쇄적으로 침입해 현금을 강탈합니다. 이 은행에 저당 잡힌 가족의 농장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대출 만기일이 다가와 소유권을 완전히 박탈당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맡은 베테랑 수사관 해밀턴(제프 브리지스)은 이들의 범죄 수법을 간파하고 곧바로 추적에 나섭니다.

       황량한 텍사스를 무대로 서로 쫓고 쫓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영화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그만큼 냉혹한 하드보일드도 아니고 이야기 구성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행 강도에 나서게 된 형제의 감정과 상황을 자세히 보여 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는 데 주력합니다.


       벤 포스터와 크리스 파인의 앙상블이 빛을 발하는 지점도 그런 부분들입니다. 두 배우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말썽꾸러기 형과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냉정한 성격의 동생이라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진짜 형제 간에 있을 법한 감정의 교류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때문에 관객은 이 어설픈 무법자 형제들이 어떻게든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은퇴를 앞둔 수사관 역할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는 보수적인 텍사스 남자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늙은 수탉 같은 느낌을 잘 표현하면서 현실감을 높여 줍니다. 베테랑 특유의 직감과 혜안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그의 존재감은 주인공 형제들이 정말 잡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주면서 극에 스릴을 더하지요.

      <영 아담>(2003), <할람 포>(2007) 등으로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던 영국 감독 데이빗 맥켄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에 개봉됐던 <스타드 업>(2013)으로 상업적인 아이템에도 자신의 연출력이 통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바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의 잡힐 듯 말 듯 이어지는 서스펜스를 점진적으로 끌어 올려 결말까지 쭉 밀고 나가는 뚝심을 보여 줬습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의 각본으로 이름을 알린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범죄 행위와 수사하는 과정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재현합니다. 삼촌과 사촌 형제들이 모두 텍사스 주의 법 집행관인 ‘텍사스 레인저’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초반부는 다소 심심하지만, 형제의 진짜 동기가 제시된 이후의 전개는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곳곳에 자리잡은 세련되고 맛깔스런 대사들이 돋보이지요.

       이 세상에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삶에 만족하고 욕심부리지 않는 태도를 좋게 여기는 ’안빈낙도’라는 말도 있지만, 이 사자성어의 대표격으로 칭송받는 공자의 제자 안회는 평생을 궁핍하게 살다가 불과 서른 한 살에 요절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도 안 되어 늘 쪼들리는 사람에게 ‘도’를 논하자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영화 속의 형제는 다음 세대에게 가난을 물려 주지 않기 위해서 은행 강도를 저지릅니다. ‘빈곤은 모두를 피폐하게 하는데, 그걸 내 자식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주인공 토비의 말은 너무나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돈과 기회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탈한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에 불과합니다. 자신들의 빈곤과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을 한 것 뿐이니까요.

       개개인이 자력 구제 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그냥 저절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각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고, 돈과 권력이 있으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을 용인해 온 이 사회가 만들어 낸 일입니다. 개인의 탐욕을 위해 멋대로 사회의 룰을 바꾸려 한 사람들과, 자기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기에 빌붙고 떡고물을 얻어 먹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썩은 고름이지요.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적절하게 제어하여 다수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혜실 게이트’(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제대로 단죄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보여 주는 확고한 이정표를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못하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지옥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황량한 벌판에 석유 시추기만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텍사스의 풍경이 바로 그런 세상의 미래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1월 9일자 기사 <빈곤을 물려 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58964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환갑 넘은 '악동' 마이클 무어의 진솔한 호소[각주:1]


 

권오윤[각주:2]



       사회의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대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때 찾게 되는 것이 다른 나라의 사례죠. 이 문제를 더 합리적이고도 올바른 방식으로 처리하는 나라가 있는지, 또 그들의 방식을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궁리해야 하니까요.

       재치 있고 신랄한 다큐멘터리로 미국의 사회 문제를 정면 비판해 온 마이클 무어가 신작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취한 방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미국에 없는 다른 나라의 좋은 사회 제도들을 훔쳐오기 위해 혼자서 '침공한다'는 설정을 만들고,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아홉 나라의 제도들을 취재하지요. 그 과정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제들이 낱낱이 파헤쳐집니다.

       처음에는 우리 피부에 와 닿는 문제들부터 시작합니다. 1년에 6주 유급 휴가가 기본이고 결혼하면 2주 추가에 다 못 쓰면 다음 해에 붙여서 쓸 수 있는 이탈리아, 지방의 작은 학교 급식에서도 셰프가 서빙하는 코스 요리가 나오는 프랑스, 숙제를 없애고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도록 밀어주는 것만으로 세계 최고의 교육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핀란드, 대학 교육이 완전 무료라서 학자금 대출의 압박에 시달리는 미국 학생들도 많이 유학 가는 슬로베니아.

       이런 나라들의 이야기는 사회 통념이나 복지 제도의 측면에서 미국, 일본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들입니다. 특히 개봉 전에 유튜브 영상으로도 많이 공유되었던 핀란드의 교육 이야기는 학교가 제시하는 커리큘럼과 과제에 찌든 학창 시절을 보내야만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가슴 아프게 여길 만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이클 무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갑니다.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상적인 근무 여건을 가지고 있는 독일에서 결국 마이클 무어가 훔치기로 선택한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로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고 기억하는 자세였죠. 그들은 유대인 학살 책임을 사회 전체가 나뉘고 사과와 반성을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해 왔으니까요. 감독은 미국 역시 인종 차별과 학살로 얼룩진 과거의 역사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반성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저작권자: 판시네마(주))


       이때를 기점으로 영화는 본격적으로 미국 사회의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마약 사용을 범죄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마약 사용이 줄어든 포르투갈, 수감과 처벌이 아닌 진정한 교화를 목표로 하는 개방형 교도소를 운영하는 노르웨이. 이 두 나라의 모습을 통해 미국의 사법 제도와 교도 정책이 얼마나 많은 증오와 인종 차별을 부추겨 왔는지를 고발합니다.

       또한, 국가가 임신과 출산, 피임과 낙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고 있는 튀니지가 재스민 혁명에 성공하고 헌법에 여성의 권리를 명시하게 된 것, 1980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을 정도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아이슬란드가 2008년의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투자 은행의 책임자들을 제대로 사법 처리할 수 있었던 이유 등을 두루 살펴보며 미국의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행동을 촉구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숱한 문제가 있습니다. 마이클 무어의 조국 미국보다 여러모로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처럼 머리로만 문제를 생각하고 입으로만 되뇌기만 해서는 절대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문제 집단을 손가락질하고 욕하면 속은 후련할지 몰라도 그들이 바뀌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과 제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걸 바꿀 수는 없겠지요. 무엇보다 기존 질서의 저항이 극심할 테니까요. 최근 시행된 부정청탁과 금품 수수 방지에 관한 법률만 봐도 그렇습니다. 많은 기득권자가 이것을 굳이 '김영란법'이라는 별명을 붙여 잘못된 프레임을 짜고, 제대로 된 시행을 막으려고 온갖 훼방을 놓았지요. 농어민의 수입 감소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까지 붙여 가면서요.

       이런 식의 방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확고한 신념과 중단 없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당장 눈에 띄는 큰 변화를 만들기는 어렵고, 변화의 효과를 우리 세대가 곧바로 누릴 수는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환갑을 넘은 감독이 전에 없이 진솔한 목소리로 작은 노력에서부터 시작하자고 호소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9월 18일자 기사 <환갑 넘은 '악동' 마이클 무어, 그가 진솔하게 호소한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44393) 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904)
특집 (11)
시평 (103)
목회 마당 (65)
신학 정보 (146)
사진에세이 (45)
비평의 눈 (72)
페미&퀴어 (30)
시선의 힘 (152)
소식 (160)
영화 읽기 (39)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6)
새책 소개 (38)
Total : 455,463
Today : 57 Yesterday :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