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가부장제의 역설,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각주:1]


 

권오윤[각주:2]



       전쟁은 모든 것을 망칩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며, 인류가 성취한 경제적 번영은 잿더미로 변하고, 사회 문화적 자산은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잠겨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요.

       이 영화 <프란츠>는 바로 그런 처지에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의 어느 마을,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은 안나(폴라 비어)는 그의 부모와 함께 살며 날마다 무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구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나는 아직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나는 프란츠의 무덤가에 서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프랑스 청년 아드리앙(피에르 니네이)을 보고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심지어 그는 저녁 무렵에 우수에 젖은 얼굴로 집까지 찾아와 프란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요. 안나는 아드리앙이 프란츠가 프랑스 유학 시절 사귀었던 친구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안나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아드리앙은 이후로도 여러 번 집을 찾아 프란츠에 대한 추억을 들려 줍니다. 프란츠의 부모와 안나는 예의 바르고 섬세한 아드리앙에게 금세 매료됩니다. 안나는 프란츠 부모의 배려로 아드리앙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자주 가지면서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하지요. 그러나 아드리앙으로부터 그동안 숨겨 왔던 진실에 대해 듣게 되고, 감정적으로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할리우드 고전의 리메이크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독일 출신 명감독 에른스트 루비치가 만든 <내가 죽인 남자>(Broken Lullaby)(1932)를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리메이크힌 영화입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남성의 죄책감에 초점을 맞춘 원작과는 달리, 안나의 감정에 집중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배우, 로케이션, 촬영 이렇게 세 가지에 공을 들여 담백하게 표현한 점이 돋보입니다. 프랑수아 오종 하면 재기발랄한 내러티브 구성과 도발적인 문제 의식 같은 것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형식상 매우 고전적입니다. 그림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배우의 자연스런 연기를 이끌어 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화면에 담는, 영화 제작에서 기본이 되는 것들에 충실합니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신중히 계획된 인물 샷들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앵글과 샷의 크기, 초점 이동 등을 세심하게 조절하여 화면에서 인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도록 하지요. 극의 구성상 중요한 장면들은 물론이고, 무덤가에 서 있거나 기차역에서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등 언뜻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까지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곤 하는 것은 모두 그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 장면의 흑백 화면에서 꿈 같은 시간을 의미하는 컬러 화면으로 바뀌는 순간들, 아드리앙이 프란츠의 가족 앞에서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 20번의 애수어린 멜로디 등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킵니다. 이렇게 영화는 전사한 연인의 친구에게 끌리는 안나의 마음에 집중하며 서서히 절정에 다다릅니다.

       안나 역을 맡은 독일 여배우 폴라 비어는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선 굵은 연기를 보여 주며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섬세한 감정 표현보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와 드러낼 때의 극적인 차이를 통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쪽입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2016년 베니스 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비극 초래한 가부장제, 그것을 뒤엎는 역설


       이 영화는 전쟁이 초래한 비극에 가부장제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을 적시합니다. 극 중 프란츠의 아버지가 후회하듯,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은 조국의 영광을 앞세운 아버지들이었습니다. 안나 역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의 희생양입니다. 약혼자의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장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권유받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극 중 안나가 겪게 되는 일들은 가부장제의 미몽과 억압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독일 마을에서 벗어나 파리와 프랑스 시골 저택까지 간 끝에,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만이 행복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안나의 각성은 두 가지 역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안나를 중심으로 오가는 거짓말들입니다. 프란츠나 아드리앙은 안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 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녀를 가부장적 질서 안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안나는 이것을 프란츠의 부모에게 고스란히 돌려 줍니다. 그들의 낭만적 환상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이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내지요. 한 때는 그녀를 옭아맸던 허구의 이야기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안나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보게 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자살>입니다. 살롱 전시에 선정되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화가를 적나라하게 그린 이 그림은 생생한 죽음의 현장을 담고 있지만, 안나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스토리가 안나의 애초 바람대로 흘러갔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낭만적인 연애담이 주는 만족감이 상당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감독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안나는 좌절을 겪은 끝에야 진정한 희망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절망의 끝에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며 그것을 붙잡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 <프란츠>의 미덕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7월 30일자 기사 <전쟁과 가부장제의 상처,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4653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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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팩트가 전하는 진실한 감동, 그야말로 ‘독보적’ [각주:1]


 

권오윤[각주:2]



       흔히 역사학의 의의는 과거의 일을 되돌아봄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갖고 영화를 만들 때도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일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거나 이야기의 밑 재료로만 활용하고 말아 버린다면, 역사적 사실에 관한 영화를 찍는 의의가 없는 것 아닐까요?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는 것은 힘들다 하더라도, 최소한 오늘날의 현실에 질문을 던지는 역할은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 <박열>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황태자 암살 계획 모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한국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박열(이제훈)은 3.1운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와 인력거꾼 등의 막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 및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아나키스트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합니다. 그의 시 '개새끼'를 읽고 호감을 느낀 일본인 동료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제의로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동거를 시작하기도 하죠.

       그런데 도쿄와 요코하마 일원을 강타한 간토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엄청난 피해로 인해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괴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려 시민들의 분노를 돌리려 합니다. 일본인들은 자경단 등을 결성하여 무려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외국인이 발음하기 힘든 '十五円五十錢'(15엔 50전)을 시켜 보고 이걸 제대로 못 하면 바로 죽여 버리는 식이었죠.

       이런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자,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대책을 세우려 합니다. 이때 주목받은 것이 바로 박열과 그의 동료들의 황태자 암살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폭탄 확보를 하지 못해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지만, 박열과 후미코를 '대역죄인'으로 몰아 국론을 결집하기엔 아주 좋은 재료였지요.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


       당시는 일본이 3.1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 후 악화한 국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 통치'라는 것을 시도했던 때입니다. 국제 사회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자기네가 대역 죄인에게도 공정한 법적 절차를 보장할 정도로 문명국이라는 점을 보여 주려 했습니다. 박열은 이런 상황을 역이용하여, 재판 과정을 3.1운동과 간토 대학살의 진상을 세계만방에 알릴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영화는 이런 부분을 명확히 짚어 나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박열이 심문 도중에 일갈하듯, 일본이 만약 진정한 문명국이라면 식민 지배 자체를 말았어야 했습니다. 섣부른 유화책으로 여론을 호도하려 들지 말고요.

       이것은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비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 일본 정부의 행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이미 아시아를 벗어났다고 속으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겠지만, 여전히 그들의 정부는 간토 대학살은 물론 위안부 문제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아직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제국주의 일본이 보여 준 여론 통제 및 정치 권력의 부당한 재판 개입은 지난 박근혜 정부의 전횡을 곧바로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정당성을 잃은 권위가 억지로 그것을 유지하려고 할 때의 행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똑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훈은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특유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자유롭고 편하게 청년 박열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장난기와 결연한 의지를 번갈아 보여 주는 악동 박열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파수꾼>으로 처음 주목받던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후미코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최희서는 이 영화의 진정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나키스트 여성 활동가로서의 기백과 애인으로서의 사랑스러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써, 후미코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인물로 만들었으니까요. 감독의 전작 <동주>가 송몽규의 영화이기도 하듯, 이 영화는 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동지적 연대에 기반을 둔 그녀의 강한 의지와 사랑은 박열의 투쟁을 밝힌 횃불이었고 굳건한 지지 기반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간악함을 대표하는 인물인,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역할을 맡은 김인우 역시 이번 영화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재일교포 3세 출신인 그는 <암살>, <동주> 등의 영화에서 최근 몇 년간 일본인 배역 전문으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준 바 있지요.


감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역사적인 인물을 다루는 전기 영화로서 <박열>이 뛰어난 점은, 섣불리 감정을 자극하려 들지 않고 관객에게 인물이 처한 상황을 다각도로 따져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주요 인물들이 느꼈을 법한 진짜 감정과 딜레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기존의 한국 역사물들과 이 영화가 차별화되는 지점입니다. 그동안 객관적인 역사적 상황을 보여 주기보다는, 실존 인물이 느꼈을 법한 가상의 감정을 작가나 감독이 추정하여 극화한 영화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 장면은 대부분 사족이거나, 너무 단순해서 신파조로 느껴지곤 했지요. 최고 흥행기록을 가진 <명량>부터 몇 주 전에 개봉했던 <대립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가 공통으로 가진 약점이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인 <사도>나 <동주>도 이런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특히 절정 부분이나 결말에 다가갈수록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그런 장면들이 생각만큼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인물 그 자체보다는, 인물에 대한 감독과 각본가의 해석이 더 중요했던 영화들이기도 했고요.

       그에 비하면 <박열>은 인물과 역사적 상황을 앞세우고 감독이 한발 물러서는 쪽이라서, 관객은 이 세기의 아나키스트 커플에게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기백과 의지, 동지로서의 연대,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동료들의 마음 같은 것들을 하나씩 가슴에 품어 가면서요. 바로 그런 것들이, 미끈하게 잘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진심을 담고 있는 이 영화가 건네는 소중한 선물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6월 30일자 기사 <역사적 팩트가 전하는 진실한 감동, 그야말로 ‘독보적’>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38271) 으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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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와 공포의 경계에서 차별을 말하다[각주:1]


 

권오윤[각주:2]



       공포물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프로이트적 개념을 충실히 구현한 장르입니다. 일상에서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것들이 고약한 형태로 나타나 주인공을 위협하지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문명 세계에서 추방됐던 유령이나 괴물이 출현하고, 인간에 대한 공격성과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체화한 살인마가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면, 우리가 그동안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억눌러 온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 <겟 아웃>은 이러한 공포 영화 특유의 설정을 공유합니다. 흑인 사진작가 크리스 워싱턴(다니엘 칼루야)은 매력적인 백인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엄스)와 사귀고 있습니다. 주말을 맞아 로즈의 가족을 방문하기로 한 크리스에게,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경찰인 로드(릴 렐 하워리)는 백인인 그들이 널 반길 리가 있겠냐면서 농담조로 조심하라고 합니다.

       다행히 로즈의 부모는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적어도 겉으로는 크리스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크리스는 좀처럼 불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가사 일을 돕고는 있지만 괴이하게 행동하는 흑인 하인들과, 예의 바른 태도 속에 차별 의식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로즈의 가족들 때문이지요. 더 껄끄러운 것은 바로 그 주말이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가족 행사 때문에 백인 손님들을 초대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상식과 합리,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아래에 있는 백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의식입니다. 이것은 극이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끝에, 후반부에서 뒤틀리고 일그러진 방식으로 형상화됩니다.

       처음에는 풍자적인 블랙 코미디인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쿨한 척하는 백인이라도 별수 없구나 싶어 쓴웃음을 머금게 되지요. 그러나 뭔가에 홀린 것처럼 행동하는 흑인 하인들과, 로즈네 가족 행사에 참여한 유일한 흑인 손님 앤드류의 모습을 보면 이게 그냥 비웃고 넘길 상황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유발된 궁금증과 왠지 모를 껄끄러움은 로즈 가족의 정체가 드러나는 후반부까지 극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줍니다.

       로즈 가족의 계획과 그들이 여는 행사의 정체는 '흑인들의 육체적 능력만큼은 인정하지만 그들의 지적 능력은 별 볼 일 없다'라는 뿌리 깊은 편견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는 순간, 이제까지 나왔던 모든 장면은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배려와 친절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모두 끔찍한 계획과 연결돼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니까요.

       영국 출신의 주연 배우 다니엘 칼루야는 크리스가 겪는 다양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코미디와 공포의 경계에 서 있는 이 영화의 전략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모국에서는 주로 TV에서 활동했으나 최근 들어 할리우드 영화에도 진출했습니다. 내년 개봉 예정인 마블의 <블랙 팬서>에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합니다.

      각본과 감독을 맡은 조던 필은 이 작품이 감독 데뷔작이지만, 오랫동안 TV에서 활약해 온 코미디언입니다. SNL과 자주 비교되는 MadTV 출신으로, 동료 키건 마이클 키와 공동 기획하고 함께 출연한 스케치 코미디 프로그램 <키 앤 필>(Key & Peele)로 2016년에 에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보여 준 인종 차별에 대한 풍자적인 묘사를, 공포물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이 영화 <겟 아웃>의 매력을 더했습니다.

       미국 흑인의 시점에서 백인의 인종 차별 의식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이 영화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온전히 즐기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인종 차별을 풍자할 때 사용되는 코드에 익숙하지 않으면, 폭소를 터뜨리기는커녕 약간 냉소적인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지나가기 쉽지요. 그러나 이것을 우리에게도 익숙한 성차별 문제로 바꿔 보면,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꼬집으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차별 관련 이슈가 부각되면 많은 남자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니 싸잡아 이야기하지 좀 말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그러나 성별이나 인종, 혹은 사회 경제적 위치에 있어서 차별당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려는 노력을 따로 하지 않으면 무엇이 차별이고 차별이 아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게 별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지요.

       차별은 일부 극단주의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될 때, 혹시 그것이 자기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에게만 상식인 것은 아닌지 반드시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실질적인 노력 없이 자신의 양심과 결백함을 증명하려 하거나,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여 개념적으로만 평등을 주장하면 차별 문제는 결코 해소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겟 아웃>이란 영화가 풍자적인 코미디와 공포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전하려고 한 메시지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5월 22일자 기사 <웃다가 공포에 떨게 되는 영화, 어떤 메시지 담았나>(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2730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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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대 위해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일, 그가 보여줬다[각주:1]


 

권오윤[각주:2]



       <엑스맨> 시리즈의 특징은 주요 캐릭터들이 초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로서 사람들의 몰이해와 선입견 때문에 잘못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시리즈 내의 모든 갈등이 여기서 출발하지요. 차별적 대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잘 조절해서 인류를 위해 사용하자는 입장의 '엑스맨'들은, 차별에 맞서 자신들의 위대함을 보여 주자는 매그니토 같은 다른 돌연변이들이나, 돌연변이를 없애거나 통제하고 싶어 하는 정상인들을 적으로 맞이하여 끊임없는 싸움을 해 왔습니다.

       이 영화 <로건>은 특유의 치유 능력인 '힐링 팩터' 때문에 '남들과 다른 삶'을 어떤 돌연변이보다도 오래 살아가야 했던, 엑스맨의 대표 캐릭터 울버린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로건(휴 잭맨)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출장 리무진 기사로 일하며 몹시 늙어버린 프로페서 X(패트릭 스튜어트)를 비밀리에 돌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울버린임을 알아보고 접근하는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어린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지정된 좌표의 지역으로 데려다줄 것을 부탁하며 돈을 건네고, 마침 돈이 필요했던 로건은 내키지 않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로라를 쫓고 있는 의문의 기계 팔 사나이 도널드 피어스(보이드 홀브룩)와 그가 이끄는 조직의 습격을 받게 되고, 그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로라 역시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갖춘 돌연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정조는 서글픔입니다. 캐릭터 설정부터 그렇지요. 거친 마초 캐릭터였던 로건은 황량한 멕시코 국경에 숨어 프로페서 X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과거 놀라운 정신 능력을 지녔던 프로페서 X는 이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늙은이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로라 역시 천부적인 살상 능력을 지녔지만, 그토록 어린 나이에 피 튀기는 싸움에 내몰리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로드 무비 같은 중반부나, 결말부의 대결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사 가족 관계인 프로페서 X-로건-로라의 여정은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 과정에서 치르게 될 참혹한 대가에 대한 어두운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이미 쇠락한 육체적 능력을 억지로 끌어올려 마지막 싸움에 나서는 로건의 모습은, 여태껏 사랑하는 이들을 잃기만 했던 그의 과거와 맞물려 일종의 숭고함을 느끼게 하지요.


       이 영화의 폭력 묘사는 수위가 다소 높은 편입니다. 하지만 <킥 애스> 시리즈처럼 깜찍한 소녀 전사의 매력을 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킹스맨>에서와 같이 시각 디자인적 요소를 첨가하여 오락적인 볼거리로 만들거나, <존 윅> 시리즈처럼 사실적인 액션과 고난도 스턴트를 통해 쾌감을 주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과 없이 등장하는 가차 없는 폭력과 죽음의 이미지들은 로건이 헤쳐 온 처절했던 과거의 삶, 그의 일행이 맞닥뜨린 섬뜩한 현실적 위협, 그리고 로라를 비롯한 차세대 돌연변이들이 맞이하게 될 미래의 숙명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그 때문에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한층 더 커집니다.

      감독 제임스 맨골드가 직접 쓴 각본은 '울버린의 최후'라는 중심 소재에 맞게 모든 것이 잘 조직돼 있습니다. 감독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듯, <셰인> 등 기존의 다른 영화들로부터 극적 아이디어나 정서 측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새롭다고 할 만한 지점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세심하게 등장인물을 선택하고 에피소드를 구성한 것, 복선을 설정하고 작품 안의 상황을 빠짐없이 설명할 수 있도록 디테일을 잘 채워 넣은 점을 고려하면 성실하게 잘 쓴 시나리오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허트 로커> <월드 워 Z> <설국열차> 등에 참여했던 영화 음악가 마르코 벨트라미의 음악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캐릭터에게 느끼는 처연함과 그들이 처한 비정한 현실이 이질감 없이 잘 맞물릴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그의 공입니다. 특유의 타악기 리듬을 활용한 액션 장면들과 흐르는 선율로 감싸 안은 황량한 풍경들은 기묘한 서글픔을 자아냅니다.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게 되면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예전만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즉각적인 격한 반응만 하고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나서 봤자 바뀌는 건 하나도 없더라', '어차피 힘 있는 사람들 마음대로 돌아가게 돼 있다'는 체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의 씁쓸한 경험과 현실에서 느끼는 막막함은 그런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개를 들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 고난과 아픔이 나중에 더 심화한 형태로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말 테니까요. 우리에겐 다음 세대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지도 않는 조언으로 참견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작게나마 실천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어려움을 조금씩 바꿔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이 영화 속에서 로건이 그렇게 애쓴 것 역시 자신이 겪은 죽음과 폭력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도 처음부터 알았을 겁니다. 어린 친구들이 국경을 넘는다고 해서 돌연변이들을 악용하고 말살하려는 시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 거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그가 죽음을 앞두고 이뤄 낸 '작은 성공'은 로라를 비롯한 다음 세대의 돌연변이들에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지난 몇 달간 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었습니다. 국가 조직을 동원해 사익을 추구하여 나라의 부를 털어먹은 이명박 일가와 그 주변 사람들,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일족 같은 사람들로 인해 고생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촛불의 힘이 대통령 탄핵을 넘어 실질적인 국가 개혁으로 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이 기억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희망의 씨앗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3월 8일자 기사 <미래세대 위해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일, 그가 보여줬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05005)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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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희진
    2017.04.20 10:3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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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만 가득했던 로건의 생 끝무렵에 아이를 만나 그래도 마지막은 편히 눈 감았기를 빌며, 제 마음속에서 로건을 떠나보냈네요. 나이 들고 병들었지만 끝까지 강인했던 로건, 겉모습은 거칠지만 마음이 넓고 따뜻했던 캐릭터여서 참 정이 갔었는데 .. 휴잭맨 님도 이 마지막 영화를 찍으면서 참 여러가지 감정이 들었을 것 같아요.
    기성세대들 그리고 갓 사회인이 된 저 같은 어른들부터, 꾸준하게 노력을 행동하고 실천하여, 우리 미래세대들의 앞길이 조금 더 밝아지는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 피터김
    2017.07.01 06:4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우리는 고개를 들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 고난과 아픔이 나중에 더 심화한 형태로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말 테니까요. 우리에겐 다음 세대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지도 않는 조언으로 참견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작게나마 실천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어려움을 조금씩 바꿔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명문입니다.


"우리는 개가 아니다" 당연한 '인간 존엄'을 되찾기 위한 그의 여정[각주:1]


 

권오윤[각주:2]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영국 하층 노동 계급에 속한 주인공의 삶을 다룹니다. 주인공의 애정 생활이나, 가족 혹은 유사 가족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국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죠. 그 중에서도 불합리한 영국 복지 제도에 대한 비판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구직 활동을 해야 실업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노동 복지의 현실은 <외모와 미소>(Looks and Smiles)(1981) 같은 초기작뿐 아니라, 90년대의 <레이닝 스톤>(1993), <내 이름은 조>(1998) 등의 영화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 바 있습니다. 또한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1994) 같은 영화에서는, 지키기 힘든 조건들을 내세우는 관료적인 사회 복지 제도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싱글맘을 보호하고 돌보기는 커녕, 점점 사회 바깥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통찰을 보여 주기도 했지요.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그런 계열입니다. 40여년간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 온 60대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심장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는 법적으로 보장된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담당 직원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실랑이를 벌인 끝에 지급을 거부당합니다. 항소를 준비하면서 실업 급여라도 받기 위해 애를 쓰지만, 절차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관료적인 영국 복지 제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직접 찾아간 고용 센터에서는, 불과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고용 센터 상담을 거부당한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도우러 나섰다가 쫓겨나기까지 하지요. 영화는 이 때부터 다니엘과 케이티 두 사람의 삶을 따라갑니다.

 

켄 로치 영화의 주인공들은 하층 계급의 리얼리티에 맞게 인간적인 단점도 많이 지니고 있고, 결국 큰 사고를 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반적인 중산층의 도덕 기준으로 볼 때 많이 부족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이들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기 위한 설정이지요. 각기 아버지가 다른 4명의 아이를 키우면서도 또 다시 쉽게 사랑에 빠지곤 하는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의 싱글맘 매기, 마약 거래로 모은 돈으로 어머니와 살 멋진 집을 구입할 꿈을 꾸는 꾸는 <스위트 식스틴>(2002)의 리암, 친구들과 함께 값비싼 싱글 몰트 위스키를 훔칠 생각을 하는 <엔젤스 셰어>(2012)의 비행 청소년 로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잘’ 해 보려고 합니다. 규정과 절차에 질린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것을 존중하는 가운데,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안간힘을 쓴 대가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멸감뿐입니다. 다니엘은 고용 센터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하나 둘씩 어렵게 맞춰 나가지만, 그럴 수록 시스템은 그에게 더 완전한 복종을 원합니다. 그는 아내의 추억이 깃든 집안의 가구를 몽땅 팔아치우지 않고서는 연명할 수 없는 처지에까지 몰립니다.

 

 

아무 기술도 없고 배움도 부족한 싱글맘 케이티는 더 기가 막힌 일들을 당합니다. 그녀는 돈이 부족하기 때문에 늘 아이들이 우선이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마트에서 먹거리와 아이들 물건은 사면서도 개인 위생용품인 생리대와 데오드란트, 면도기 등을 살 돈이 없어 훔치다 창피를 당하기도 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푸드 뱅크에서 장을 보다가 배고픔을 못 이기고 그 자리에서 통조림을 따서 입에 마구 욱여 넣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 참혹한 빈곤의 굴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정직하고 성실한 노력만으로는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돈을 손에 쥐어야만 탈출이 가능합니다. 다니엘의 운명과 케이티의 삶이 달라지는 분기점이 케이티가 성매매에 나서기 시작하면서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설정입니다. 자본의 논리와 그것에 기초한 사회 체제는 돈이 없다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걸 서슴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 나온 영국 복지 제도의 뻣뻣하고 관료적인 모습은 영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정 기준을 갖춘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는 보편 복지가 아닌, 차등적으로 적용되는 선별 복지 제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일입니다. 대상자가 얼마나 지원을 필요로 하느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원 대상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한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주업무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나라의 초중고 무상급식 논쟁부터 시작하여, 양육 수당의 차별적 적용, 기초생활수급자 선정 기준 문제, 기초노령연금 차등 지급 등과 관련한 논란들 역시 재정 여력이 없다는 핑계로 선별 복지 개념을 추구하면서 벌어진 것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의 복지 제도는 국민에게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어야지,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시혜 행위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자선과 기부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받는 사람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드러내게 만듦으로써 더 큰 모멸감을 줄 뿐입니다. 먹고 살려면 자존감이라도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푸드 뱅크의 자상한 사람들, 위생용품을 훔친 사실을 눈 감아 주는 점장, 성매매를 알선해 주는 포주 등은 케이티에게 모두 같은 요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니엘 역시 질병 수당이나 실업 급여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절차와 규정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노예처럼 행동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영화 말미에 다니엘이 겪는 불행은 부당한 처사에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고, 당당한 인간으로 버텨낸 끝에 받게 된 징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고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 힘 있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다니엘 블레이크의 꿋꿋함과 주저하지 않는 연대 의식에 감명 받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의 안타까운 실패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와 사회 제도를 만드는 일에 소중한 씨앗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2월 18일자 기사 <"우리는 개가 아니다" 당연한 '인간 존엄'을 되찾기 위한 그의 여정>(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71106)으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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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각주:1]


 

권오윤[각주:2]



       현실 사회에서 범죄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금기시 하는 행위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범죄자의 편이 되어 그를 응원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범죄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이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다루는 케이퍼 영화가 대표적인 경우죠. 값진 물건을 절도하거나 현금성 자산을 강탈하는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마치 자기가 그 일원이라도 된 것처럼 스릴을 느낍니다.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 영화, 즉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과 그에 맞서는 인물이 엇비슷한 분량으로 등장하면서 쫓고 쫓기는 대결을 펼치는 경우에도 범죄자에게 어느 정도 감정 이입할 수 있습니다. 범죄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요. 사람을 마구 죽이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동일시 할 관객은 거의 없을 테지만, 강간범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여성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범죄자에 대한 호감은, 관객의 마음 속에서 범죄 행위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과 갈등을 일으키며 영화에 대한 흥미와 집중도를 높여 줍니다. 이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그런 식의 양가 감정을 잘 활용하여 영화의 재미를 확보한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과가 화려한 형 태너(벤 포스터)와 차분한 성격의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는 서부 텍사스의 미들랜드 은행 지점에 연쇄적으로 침입해 현금을 강탈합니다. 이 은행에 저당 잡힌 가족의 농장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대출 만기일이 다가와 소유권을 완전히 박탈당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맡은 베테랑 수사관 해밀턴(제프 브리지스)은 이들의 범죄 수법을 간파하고 곧바로 추적에 나섭니다.

       황량한 텍사스를 무대로 서로 쫓고 쫓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영화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그만큼 냉혹한 하드보일드도 아니고 이야기 구성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행 강도에 나서게 된 형제의 감정과 상황을 자세히 보여 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는 데 주력합니다.


       벤 포스터와 크리스 파인의 앙상블이 빛을 발하는 지점도 그런 부분들입니다. 두 배우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말썽꾸러기 형과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냉정한 성격의 동생이라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진짜 형제 간에 있을 법한 감정의 교류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때문에 관객은 이 어설픈 무법자 형제들이 어떻게든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은퇴를 앞둔 수사관 역할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는 보수적인 텍사스 남자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늙은 수탉 같은 느낌을 잘 표현하면서 현실감을 높여 줍니다. 베테랑 특유의 직감과 혜안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그의 존재감은 주인공 형제들이 정말 잡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주면서 극에 스릴을 더하지요.

      <영 아담>(2003), <할람 포>(2007) 등으로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던 영국 감독 데이빗 맥켄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에 개봉됐던 <스타드 업>(2013)으로 상업적인 아이템에도 자신의 연출력이 통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바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의 잡힐 듯 말 듯 이어지는 서스펜스를 점진적으로 끌어 올려 결말까지 쭉 밀고 나가는 뚝심을 보여 줬습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의 각본으로 이름을 알린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범죄 행위와 수사하는 과정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재현합니다. 삼촌과 사촌 형제들이 모두 텍사스 주의 법 집행관인 ‘텍사스 레인저’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초반부는 다소 심심하지만, 형제의 진짜 동기가 제시된 이후의 전개는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곳곳에 자리잡은 세련되고 맛깔스런 대사들이 돋보이지요.

       이 세상에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삶에 만족하고 욕심부리지 않는 태도를 좋게 여기는 ’안빈낙도’라는 말도 있지만, 이 사자성어의 대표격으로 칭송받는 공자의 제자 안회는 평생을 궁핍하게 살다가 불과 서른 한 살에 요절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도 안 되어 늘 쪼들리는 사람에게 ‘도’를 논하자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영화 속의 형제는 다음 세대에게 가난을 물려 주지 않기 위해서 은행 강도를 저지릅니다. ‘빈곤은 모두를 피폐하게 하는데, 그걸 내 자식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주인공 토비의 말은 너무나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돈과 기회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탈한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에 불과합니다. 자신들의 빈곤과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을 한 것 뿐이니까요.

       개개인이 자력 구제 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그냥 저절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각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고, 돈과 권력이 있으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을 용인해 온 이 사회가 만들어 낸 일입니다. 개인의 탐욕을 위해 멋대로 사회의 룰을 바꾸려 한 사람들과, 자기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기에 빌붙고 떡고물을 얻어 먹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썩은 고름이지요.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적절하게 제어하여 다수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혜실 게이트’(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제대로 단죄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보여 주는 확고한 이정표를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못하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지옥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황량한 벌판에 석유 시추기만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텍사스의 풍경이 바로 그런 세상의 미래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1월 9일자 기사 <빈곤을 물려 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58964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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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넘은 '악동' 마이클 무어의 진솔한 호소[각주:1]


 

권오윤[각주:2]



       사회의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대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때 찾게 되는 것이 다른 나라의 사례죠. 이 문제를 더 합리적이고도 올바른 방식으로 처리하는 나라가 있는지, 또 그들의 방식을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궁리해야 하니까요.

       재치 있고 신랄한 다큐멘터리로 미국의 사회 문제를 정면 비판해 온 마이클 무어가 신작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취한 방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미국에 없는 다른 나라의 좋은 사회 제도들을 훔쳐오기 위해 혼자서 '침공한다'는 설정을 만들고,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아홉 나라의 제도들을 취재하지요. 그 과정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제들이 낱낱이 파헤쳐집니다.

       처음에는 우리 피부에 와 닿는 문제들부터 시작합니다. 1년에 6주 유급 휴가가 기본이고 결혼하면 2주 추가에 다 못 쓰면 다음 해에 붙여서 쓸 수 있는 이탈리아, 지방의 작은 학교 급식에서도 셰프가 서빙하는 코스 요리가 나오는 프랑스, 숙제를 없애고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도록 밀어주는 것만으로 세계 최고의 교육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핀란드, 대학 교육이 완전 무료라서 학자금 대출의 압박에 시달리는 미국 학생들도 많이 유학 가는 슬로베니아.

       이런 나라들의 이야기는 사회 통념이나 복지 제도의 측면에서 미국, 일본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들입니다. 특히 개봉 전에 유튜브 영상으로도 많이 공유되었던 핀란드의 교육 이야기는 학교가 제시하는 커리큘럼과 과제에 찌든 학창 시절을 보내야만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가슴 아프게 여길 만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이클 무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갑니다.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상적인 근무 여건을 가지고 있는 독일에서 결국 마이클 무어가 훔치기로 선택한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로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고 기억하는 자세였죠. 그들은 유대인 학살 책임을 사회 전체가 나뉘고 사과와 반성을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해 왔으니까요. 감독은 미국 역시 인종 차별과 학살로 얼룩진 과거의 역사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반성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저작권자: 판시네마(주))


       이때를 기점으로 영화는 본격적으로 미국 사회의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마약 사용을 범죄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마약 사용이 줄어든 포르투갈, 수감과 처벌이 아닌 진정한 교화를 목표로 하는 개방형 교도소를 운영하는 노르웨이. 이 두 나라의 모습을 통해 미국의 사법 제도와 교도 정책이 얼마나 많은 증오와 인종 차별을 부추겨 왔는지를 고발합니다.

       또한, 국가가 임신과 출산, 피임과 낙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고 있는 튀니지가 재스민 혁명에 성공하고 헌법에 여성의 권리를 명시하게 된 것, 1980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을 정도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아이슬란드가 2008년의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투자 은행의 책임자들을 제대로 사법 처리할 수 있었던 이유 등을 두루 살펴보며 미국의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행동을 촉구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숱한 문제가 있습니다. 마이클 무어의 조국 미국보다 여러모로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처럼 머리로만 문제를 생각하고 입으로만 되뇌기만 해서는 절대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문제 집단을 손가락질하고 욕하면 속은 후련할지 몰라도 그들이 바뀌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과 제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걸 바꿀 수는 없겠지요. 무엇보다 기존 질서의 저항이 극심할 테니까요. 최근 시행된 부정청탁과 금품 수수 방지에 관한 법률만 봐도 그렇습니다. 많은 기득권자가 이것을 굳이 '김영란법'이라는 별명을 붙여 잘못된 프레임을 짜고, 제대로 된 시행을 막으려고 온갖 훼방을 놓았지요. 농어민의 수입 감소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까지 붙여 가면서요.

       이런 식의 방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확고한 신념과 중단 없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당장 눈에 띄는 큰 변화를 만들기는 어렵고, 변화의 효과를 우리 세대가 곧바로 누릴 수는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환갑을 넘은 감독이 전에 없이 진솔한 목소리로 작은 노력에서부터 시작하자고 호소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9월 18일자 기사 <환갑 넘은 '악동' 마이클 무어, 그가 진솔하게 호소한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44393) 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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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이 정글의 법칙이라고? 아니죠![각주:1]


 

권오윤[각주:2]



       요즘 디즈니가 신경 쓰는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 고전들을 실사 영화로 리메이크하는 것입니다. '소재 우려먹기' 라는 점에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늘 하는 게으른 선택이라 할 수 있지만, 작년에 나온 <신데렐라>처럼 오래된 이야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방식이라면 나쁘지 않은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정글북> 역시 그런 기획의 일환입니다. 리메이크의 원본으로 삼은 디즈니의 1967년 작 애니메이션은, 러디어드 키플링의 원작에서 늑대와 함께 자란 소년 모글리가 나오는 이야기 몇 편을 따와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관객층인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만화적'으로 순화시키다 보니, 원작 소설이 가진 나름의 박진감과 긴장감 대신 히피풍의 유쾌함이 강조된 작품이 돼 버렸지요. 

       하지만 실사판은 다릅니다.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통해 정글 배경과 동물 캐릭터들을 사실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원작이 지닌 야생의 느낌을 아주 잘 살려냈거든요. 특히 각각의 특징을 실감 나게 포착한 다양한 동물 캐릭터들의 존재는, 그들 사이에 기본적으로 흐르는 긴장감은 물론이고 액션 시퀀스의 박진감과 스릴까지 배가시킵니다. 3D로 보면 확실히 더 좋은 영화들이 매년 한두 편씩은 꼭 있기 마련인데, 올해는 이 영화가 그런 것 같습니다.

       시각 효과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짜는 기술도 괜찮은 편입니다. 메인 플롯은 주인공 모글리의 전형적인 성장 서사인데, 내면의 성장을 위한 여정과 호랑이 쉬어칸과의 대결 과정을 잘 배합해 리듬감 있게 뽑아냈습니다. 또한 모글리를 돕는 동물 캐릭터들의 내적 성장까지 서브플롯으로 함께 다루면서 진정한 '정글의 법칙'이란 어떤 것인지 그 의미를 되새긴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주요 배역을 맡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가 좋은데, 그중에서도 곰 발루 역할을 맡은 빌 머레이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모글리에게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전해주는 느긋하고 수다스러운 발루의 캐릭터는 빌 머레이의 체념 섞인 말투와 아주 잘 어울리죠. 또한 이번 영화에서 발루는 모글리를 위해서 자신의 한계를 여러 번 넘어서야 했는데, 그런 장면들의 뉘앙스까지 세심하게 잘 표현한 것도 점수를 줄 만합니다. 


영화 "정글북" 포스터 (저작권자: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2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모글리 역할에 캐스팅된 아역 배우 닐 세티는, 꾸밈없는 감정 표현과 대사 처리를 통해 인간의 세계에 물들지 않은 야생의 순수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배경과 상대 캐릭터가 모두 CG였기 때문에, 가끔 인형들과 함께할 때 말고는 거의 혼자서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을 감안한다면 정말 좋은 연기를 보여준 겁니다. 물론 감독 존 파브로의 연기 지도가 그만큼 효과적이었다고 해야겠죠. 

       흔히 '정글'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비정한 약육강식의 논리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센 육식동물이 약한 초식동물들을 사냥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글은 하나의 생태계로서, 구성원 모두가 도움을 주고받는 커다란 순환 체계거든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우리 인간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연스러운 순환의 고리를 깨뜨리기 일쑤였습니다. 정글을 불태우고 개간하여 개인 소유의 경작지로 만들고, 각종 희귀 동식물들을 삶의 터전에서 뿌리째 뽑아내서 구경거리로 만들어 돈벌이에 나섰던 거죠.   

      약육강식의 논리란 본디 자기가 가진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작자들이 자연 현상을 멋대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러하듯 힘의 우위를 통해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행동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이 영화 <정글북>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연대의 정신만이 정글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정글의 법칙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호랑이 쉬어칸의 몰락과, 인간인 모글리가 진정한 정글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통해서요. 지속 가능하고 건강한 인간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혹은 전 지구적 생태 순환계를 보전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제목에 대한 주석으로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6월 14일자 기사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18018)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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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의 비결[각주:1]


 

권오윤[각주:2]



       가족 중 누군가를 병으로 잃는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투병 기간 중 제일 힘든 것은 물론 환자 본인이겠지만, 그와 함께 하는 가족이 받는 스트레스 또한 어마어마합니다. 그렇게 고생한 환자를 결국 떠나 보내야만 할 때의 상실감은 또 어떻고요. 살아서 함께 보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제대로 깨닫게 되는 것은 영원히 떠나 보낸 다음의 일입니다.  

       이 영화 <하나와 미소시루>의 주인공 치에는 남자친구 싱고와의 결혼을 앞두고 유방암 선고를 받습니다. 치에가 수술을 받은 후에도 두 사람의 마음은 굳건합니다. 원래 계획대로 결혼을 하고, 재발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낳아 기르며 꿋꿋이 8년간의 투병 생활을 이어가지요. 병세가 깊어지자, 치에는 다섯 살 난 딸 하나에게 현미밥과 미소된장국 만드는 법을 가르치며 차분히 이별을 준비합니다. 

       알려져 있듯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야스타케 치에가 자신의 일상을 블로그에 연재하고 그것이 유명해지자,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그녀를 취재하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죠. 이미 일본에서는 TV 다큐와 스페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안타까운 소재를 마냥 차분하고 슬프게만 풀어가는 영화는 아닙니다.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치에 가족의 생활도 배꼽 잡게 웃기는 때가 있는가 하면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일상의 순간들도 있고,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과 찡한 감동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주인공 치에 역을 맡은 히로스에 료코의 연기는 훌륭합니다. 병색이 진하게 묻어나는 분장도 마다하지 않고 치에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 진심을 다하는 모습이 돋보이죠. 약 1천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하나 역할로 캐스팅된 아카마츠 에미나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귀엽다는 탄성을 자아내면서도 애잔한 울림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영화의 주제가 <만텐호시(満点星: 만점 별)>에도 사연이 있지요. 이 노래는 대만 출신의 배우 겸 가수인 히토토 요우가 가사를 붙이고 직접 불렀는데, 야스타케 치에가 실제로 가장 좋아했던 노래가 그녀의 대표곡 <모라이나키(もらい泣き)>였기 때문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히토토 요우는 극중에서 주인공의 언니 역할로 직접 출연도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편집입니다. 장면들 자체만 놓고 보면 괜찮습니다. 관객의 감정을 제대로 건드려서 폭소와 눈물 바람을 오가게 하니까요. 문제는 그것들이 모두 느슨하게 이어 붙여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템포도 일정하게 느린 편이어서 리듬감이 부족하죠. 따라서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마치 훌륭한 에피소드들이 가득한 블로그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드는 쪽입니다. 

       또한, 실화라고는 하지만 몇몇 설정도 거슬립니다. 집안일에 거의 신경쓰지 않는 싱고를 통해 볼 수 있는 가정 내 남녀 성역할 구분 문제, 아이 낳는 문제를 거의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장면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린 아이에게 밥하고 된장국 끓이는 걸 저렇게까지 해서 가르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는 점 등이 그렇지요. 일본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을 고려하면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멀쩡하게 잘 살아 있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에 예기치 못한 운명의 장난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 때문에 자포자기 해서, ‘어차피 끝날 건데 뭐하러 열심히 사느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질문을 조금만 바꿔 주면, ‘어차피 끝날 건데 조금이라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 가는 게 어떠냐’는 권유 섞인 물음이 되지요. 좀 더 나은 하루하루를 위해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사용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은 세상 어떤 일보다 행복감을 높여줍니다.

       이 영화 속 치에의 짧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바로 그런 인생의 진실을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데서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5월 3일자 기사 <딸을 두고 떠나야 하는 엄마, 그녀의 마지막 된장찌개>(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0631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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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적인 사회에 맞선 당찬 도전장[각주:1]


 

권오윤[각주:2]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013년부터 매년 국제 여성의 날(3월 8일)을 앞두고 ‘유리천장 지수’(Glass-ceiling Index)를 발표해왔습니다. 이 지수는 고등교육과 임금의 남녀간 격차, 기업 임원 및 국회의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 등을 종합해 점수로 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올해까지 4년 연속 OECD 회원국 중 꼴찌를 찍고 있지요. 작년과 올해에 우리보다 아주 조금 점수를 더 받아 꼴찌를 면한 나라가 있는데, 바로 터키입니다. 

       이 영화는 그 터키의 북동부, 그러니까 수도 이스탄불에서 1천km 떨어진 흑해 연안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부모없이 할머니와 삼촌 밑에서 살고 있는 다섯 자매는 여름 방학날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바닷가에서 남자애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자유를 박탈당합니다. 전화나 인터넷 같은 문명의 이기도 완전히 빼앗긴 이들은 칙칙한 색깔의 긴 옷을 입은 채, 집안에서 신부 수업이나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지요. 

       이들을 옭아매는 것은 낡아빠진 순결 이데올로기입니다. 이 시골 마을에서 젊은 여성이란, 스스로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발산하는 건 꿈도 못 꾸고, 처녀성을 잃기 전에 시집이나 빨리 가야 하는 번거로운 존재에 불과합니다. 영화는 다섯 자매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이에 저항해 나가는 과정을 인상깊게 그려냅니다. 

       어떤 영화의 완성도를 논할 때, 촘촘하게 잘 구성된 서사라든지 기술적인 탁월함, 어떤 장면이 담고 있는 속깊은 의미 같은 것들을 따지게 됩니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적은 예산의 신인 감독 데뷔작인 이 영화를 아주 높이 평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 테마를 영화적으로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영화의 성취는 탁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과 세계와의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과 그 해소를 다루는 간명한 플롯, 그리고 공간이나 행위의 연속성보다는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 과감한 편집이 쟁점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으니까요.  

       흔히 이렇게 이야기보다 주제가 강조되는 영화에서는 모호한 비유나 상징이 난무해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잘 짜여진 극적 에피소드보다는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장면들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 그리고 의도가 분명하게 잘 드러나는 설정들을 사용하여 그런 함정을 잘 피해 나갑니다. 

       또한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순결 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이면에는 폭력적인 가부장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적시함으로써,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환기합니다. 이 터키 시골 마을 소녀들의 이야기가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면 바로 그런 부분 때문일 겁니다. 

       감독 데니즈 감제 에르구벤은 터키에서 나고 자랐지만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외국 생활을 오래했고,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작업해 온 여성 감독입니다. 장편 데뷔작인 이 작품 역시, 프랑스/터키 합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도 프랑스 영화를 대표해서 올라갔었지요.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영화가 터키에서 공개되었을 때 꽤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 속의 상황이나 배우들의 억양이 터키의 실제 현실과 전혀 가깝지 않으며, 이슬람에 대해 험담하기 좋아하는 서양인들의 시선에 기초한 것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았었죠. (그러나 터키의 시골은 여전히 끔찍하게 보수적이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새 신부에 대한 처녀막 검사도 실제로 많이 시행된다는 반론 역시 존재합니다.)

       21세기 한국 관객의 눈으로 보기에도, 순결을 잃기 전에 무리하게 결혼을 시키려 하는 설정 자체가 너무나 전근대적이어서 현대에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달을 봐야 합니다. ’유리 천장 지수’가 보여주듯 우리나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터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떠올려 보세요. 

       한국 여성의 전화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동안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 당한 여성이 90명, 살인 미수 사건에서 살아남은 여성 또한 95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불과 이틀에 한 번 꼴로, 여성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남성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런 통계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으로 비하하는 기사나 댓글쯤은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제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 한국 남성으로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사람도 동물이기 때문에, 성적 욕망이 높은 남성이 여성에 대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합리화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날 동물적 욕망 탓을 하며 스스로를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보다는,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속적인 학습과 교정을 통해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차별과 억압을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3월 18일자 기사 <처녀성 잃기 전에 빨리 시집이나 가라? 헐…>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191564&PAGE_CD=C1400&BLCK_NO=4&CMPT_CD=S5011)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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