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II (2)
: Episode 2. 니체 曰: “니들이 근대를 알아?”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웹진 19호>[각주:1] 에서 필자는 영화 ‘박쥐’로부터 기인하는 근대와 탈근대를 둘러싼 논의의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하였고, 그 논의의 진앙지를 니체로 설정한다고 명시하였다. 왜 니체인가? 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근대를 향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를 떠받치고 있는 서구정신 근간에 대한 시비와 싸움질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이 니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니체는 “근대를 믿느니 차라리 허무와 악마를 믿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각주:2] 라는 독설을 퍼부으며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왜, 무엇 때문에 근대는 문제적인가? 니체의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의 탄생>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해체 과정을 진술하면서 풀어나간다.  

비극(悲劇)의 탄생

니체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필자가 보기엔 니체는 철저한 복고주의자이다. 적어도 그리스문화를 바라보는 니체의 분석틀만을 따로 떼어본다면 말이다. 니체에게는 역사를 평가하는 분명한 기준점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가 바로 그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후기 아테네 철학시대가 아니라, 그 이전, 즉 B.C 6세기 초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같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활동하던 시대 말이다.[각주:3] 
이 시대의 특징을 유명한 맑시스트 철학자인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각주:4]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 이러한 이원성 속에서도 원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영혼의 모든 행위는 하나같이 의미 속에서, 또 의미를 위해서 완결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루카치가 말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는 자아와 세계, 대상과 인식, 주관과 객관이 하나였던 시대였다. 니체는 이런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 비극의 운명에 관한 고찰을 통해 근대문명 일반에 대한 비판을 도모한다. 그리스 비극에 관해 니체가 내세우는 첫 번째 길항관계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이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논리의 상징이면서도 그리스 비극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두 축이었다. 아폴론적 원리는 무미건조, 절제, 이성, 질서, 형식을 상징하는 것에 반해,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것은 열광과 무절제, 과도함, 방종 및 불안정성과 관련된다.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극은 다분히 아폴론적이었고, 무대 위 45도 각도(신의 각도, 신의 시선)에 배치된 코러스는 디오니소스의 몫이었다.  

특별히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코러스의 합창을 통해 고립된 아폴론적 개인은 기쁨에 넘치는 디오니소스적인 공동체의 성원으로 비로소 편입될 수 있었다. 이렇듯 그리스 비극은 개념적인 이성과 음악적인 리듬이 합쳐진, 아폴론적인 명석성과 명료함, 디오니소스적인 의지와 충동이 결합된 역동적 삶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내면서 그리스 문명은 찬란하게 역사의 수면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성(理性)의 탄생

그리스 비극의 시대는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철학의 시대’로 전환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합하여져 구성되었던 세계의 심연은 소크라데스-플라톤-아리스토델레스를 거치면서 논리적 지식의 집합체 혹은 합리적 사유의 거점 확보를 위한 폐쇄적 공간으로 치환되어 진다.

루카치는 그리스 비극의 시대에 대한 고별사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철학이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비극의 운명까지도 경험적 사실의 조야하고 무의미한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고, 주인공의 정열도 지상의 가치와 결부된 것이며, 또 주인공의 자기 완성도 주체에게 우연히 주어진 한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삶과 본질이라는 문제에 대한 비극의 대답은 더 이상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나의 기적으로서 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위에 놓여 있는 연약하면서도 확고한 무지개 다리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적 정신은 영원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또 그 해답도 가져다 주었지만, 그리스의 ‘정신적 공간’내에 있던 가장 본래적인 그리스적 요소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각주:5]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어우러진 비극 속에서 이제는 아폴론적인 질서만을 갈구하는 소크라테스주의에 의해,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은 사라지고 만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역동하는 삶의 세계가 소크라테스로 대변되는 이성주의에 의해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이성에 대한 신뢰와 이성에 기반한 낙관주의는 이후 서양정신사의 주류전통을 형성하게 된다.

니체에 의하면 서양의 근대란 소크라테스의 정신적 후예들에 의해 만들어진 야만적인 것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로 표상되는 이론적 인간, 또 그들에 의해 개진된 ‘과학적 세계관’은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차단했으며, 그러한 점에서 “진리에 대한 일종의 교묘한 정당방위이며 비겁이자 허위, 교활”[각주:6] 이다. 이러한 니체의 견해는 근대 문명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는 데 일조한다. 그는 “언젠가 저 멀리 우주의 한 귀퉁이에, 수 많은 태양계들 속에 속한 별들중에서 지식을 발명한 영리한 동물들이 살던 별이 하나 있었다.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오만하고 허위에 가득 찬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단지 찰나였을 뿐…”[각주:7] 이라고 서술하면서 근대적 사유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선언한다.

결국, 니체는 무엇을 원했나?

요약하면, 니체가 말하는 탈이성, 탈근대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전통적인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그 사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동심원적 구조를 해체하여, 의미로 환원되기 이전의 유동하는 욕망의 기호로서의 디오니소스적인 무의식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최고 목표로서 예지가 과학을 대신하고, 이런 예지가 과학의 유혹적인 견제에 의혹됨이 없이 세계의 전모를 확고한 자세로 응시하고, 거기에 나타나는 영원의 고뇌를 자신의 고뇌로서 동적인 사랑을 갖고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각주:8] 

이러한 니체의 전략은 기존의 이성 개념을 실마리로 하여 형성된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관, 하나의 참된 목적을 지향하는 근대적 역사관이 허위이고 환상임을 고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니체를 탈근대를 열었던 실험적인 사상가였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9]  니체는 그의 후기 작품들로 갈수록 더 노골적이고 거칠게 서구문명, 특별히 서구문명의 근간을 형성하는 기독교 문명과 기독교 윤리에 대한 가차없는 칼부림을 단행하는데……<계속>  

ⓒ 웹진 <제3시대>


  1.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II (1): Episode 1. 영화‘박쥐’에 기인한 아폴론적, 혹은 디오니소스적 상상 -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150 [본문으로]
  2. 니체, 『비극의 탄생』, 곽복록 역 (서울: 범우사, 1989), 28. [본문으로]
  3. 미국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며 힘들었던 부분 중 하나는 서양고전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이론신학 혹은 철학관련 수업의 1/3(혹은 1/4) 지점까지는 거의 예외 없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칸트, 헤겔 등 서양정신사를 수놓았던 굵직한 인물들의 작업을 점검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현대 기독교의 삼위일체 논쟁’을 한 학기 동안 공부한다고 할 때,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지녔던 질료와 형상, 운동에 대한 문제, 이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반응,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해설, 중세 안셀름, 토마스아퀴나스, 근대 데카르트, 칸트,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까지 빠르게 학습한 후에 나머지 수업의 2/3를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 현대 신학자들의 다양한 삼위일체론을 다루는 형식이다. 특별히 모든 수업에 있어 그리스철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고 말했던 것처럼, 서양의 인문학과 신학은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많은 자양분을 공급받고, 그런 다음 비로소 그 영향에서 벗어날 용기를 얻는 듯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많은 안내서들이 나와 있는데, 모든 교수들은 바로 원전을 읽으라고 조언한다. 그래도 비굴하게 그리스 철학에 대한 개론서를 한 권 추천해 달라고 졸랐더니, (좀 오래되긴 했지만) Guthrie가 쓴 The Greek Philosophers-From Thales to Aristotle (Harper & Row, 1960)를 권한다. 얇고 쉽고 깔끔하다는 이유다 (그러면서 개론서는 두껍고 어렵고 복잡하면 안 된다는 말을 덧붙힌다. 내게는 그 책 역시 두껍고 복잡하고 어렵게 다가왔지만) 혹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그리스 철학에 대한 개론적 이해를 영어로 접하고 싶다면 Guthrie의 책을 추천한다. [본문으로]
  4. 루카치, 『소설의 이론』, 반성완 역 (서울: 심설당, 1998). [본문으로]
  5. 루카치, 『소설의 이론』, 반성완 역 (서울: 심설당, 1998). 34. [본문으로]
  6. 니체, 『비극의 탄생』, 곽복록 역 (서울: 범우사, 1989), 17. [본문으로]
  7. Friedrich. Nietzsche,「On Truth and Lie in an Extra-Moral Sense」in the Portable Nietzsche, Edited by Walter Kaufman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8), 42. [본문으로]
  8. 니체, 『비극의 탄생』, 곽복록 역 (서울: 범우사, 1989), 133. [본문으로]
  9. “니체는 현대철학이 다시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가 현대철학의 향방을 오랫동안 계속 주도할 것임은 분명하다.”- Michel. Foucault, The Order of Thing; An Archaeololgy of the Human Sciences, Translated by Les Mots et les choses. (New York: Pantheon Books, 1970), 353-35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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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II (1)
: Episode 1. 영화‘박쥐’에 기인한 아폴론적, 혹은 디오니소스적 상상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시작하며

지난 웹진 8호 (2009년 6월)에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이라는 짧막한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이번호 웹진부터(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연재하는 글의 큰 제목도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고 이름 짓는다. 졸고가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는 술어가 생략된 비어있는 제목으로 연재되는 이유는(매회마다 소제목을 달리 첨부하겠지만) 분명하다. 내가 겪고 있는 근대와 탈근대라고 불리우는 것들 사이에서의 방황,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길찾기 혹은 탈주에 대한 모색이 여전히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진행중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는 완결되지 않은 글의 제목은 완결되지 않은 내 사상의 괄호를 고백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 글이 마무리 될 무렵 그 방황이 잠잠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져있는 이중적인 의미인 셈이다.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II’라고 붙인 이유는 웹진 8호에 실렸던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와 차별을 두기 위함임을 밝힌다.

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몇 해전 <올드 보이>로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칸느 영화제가 좋아하는 (혹은 칸느 영화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 박찬욱이 이번에는 뱀파이어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 사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상에서 뱀파이어는 단골 메뉴였다. 마치 구미호가 한국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진화하는 Character를 제시하는 것처럼, 뱀파이어라는 치명적 매력 역시 서구인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뱀파이어 관련 영화만 생각해도 탐 크루즈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떠오르고, 몇 해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안녕, 프란체스카’도 뱀파이어를 소재로 했던 독특한 작품이었다. 주의해서 살펴보면 시대별로 뱀파이어에 관한 대표적인 영화가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왜, 뱀파이어인가? <터미네이터>나 <에일리언>류의 최첨단 테크놀러지로 무장된 괴물도 있고, <링>, <식스센스> 류의 인간의 심령을 소재로 한, 즉 ‘내 안에 있는 타자성’을 소재로 삼는 영화가 요즘 공포영화의 대세인데, 왜 박찬욱은 또다시 뱀파이어로부터 소재를 끌어 온 것일까?
나는 아직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보지 못했다. 칸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는 보도, 송강호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기사, 사제가 뱀파이어라는 설정과 그 사제가 친구의 아내와 눈이 맞아 그 친구를 죽였다라는 내용 등등......이상은 내가 <씨네 21>을 뒤적이며 얻은 영화 ‘박쥐’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이다. 영화 내용에서 내게 흥미를 끌었던 대목은 사제가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대칭적 위치를 점하는 사제와 흡혈귀의 영역이 한 인물안에서 중첩되고, 멀어지면서 극의 긴장과 이완이 반복될것이며, 결국에는 그 둘 사이의 진동이 빨라지다가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영화상의 관습을 예상하는 것 말고, 내게 순간적으로 스쳤던 무엇이 바로 아폴론적 혹은 디오니소스적 상상이었다.
이러한 상상을 하게 된 이유는 다분히 이번 학기 내가 겪고 있는 (학문적) 가위눌림에 힘입은 바 크다. 필자는 현재 탈근대적 사유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되는 인물인 ‘니체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니체의 거의 전 저작을 ‘전기-중기-후기’로 분류하여 읽고 있는데[각주:1],  니체가 아폴론적인 유럽문명과 그것을 떠바치고 있는 기독교세계 전체를 향해 광인처럼 퍼붓는 독설과 야유는 내게 통쾌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선사하였고, 그 거북한 동거가 나로 하여금 이번 글쓰기의 동기와 여백을 제공하였다.
이 글에서 나는 사제를 아폴론으로, 뱀파이어를 디오니소스로 치환 시킬것이며, 각각의 인물을 서술하면서 니체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후기 작품인 <Anti-Christ>와 <Ecce Homo>에 나타난 근대(성)와 기독교를 향해 내뿜었던 니체의 독설에 주목할 것이다. 아울러 니체철학의 사상적 세례를 받았다고 평가되는 푸코와 데리다의 글들도 중간 중간에 삽입할 생각이다.  
글의 전개 양상은 아폴론적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인간과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탈 근대적 인간상에 대한 소묘, 그리고 근대적/탈근대적 증상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에 대한 나열 혹은 비교에 많은 양을 투자할 것이고, 결국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원주의와 전체주의 (자본의 질서가 유일한 세계운영의 원리라는 측면에서) 라는 서로 다른 인식의 축이 지배하는 21세기 사회속에서 니체식 딴지걸기에 대한 의미를 반추해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가 우리 밖에 있는(혹은 우리 안에 있는) 타자와 대면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몰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글의 의미는 족하다.
(한가지 양해를 구하는 것은, 이 글은 영화 ‘박쥐’가 주는 자극으로 쓰여진 것은 분명하지만, 영화 ‘박쥐’와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는 글이라는 점이다. 자칫 Popularism에 영합하여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비쳤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시기를) 

탄생, 뱀파이어

어렸을 때 40권짜리 계몽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이 집에 있었다. 누가 언제 구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전집에 꽃혀 있었던 대부분의 책을 읽지 않았다. ‘세계문학을 40이라는 전체성 안으로 몰아넣어 이것만 읽으면 세계문학을 섭렵할 수 있다는 구호에 분연히 저항하노라!’고 외치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에게 있어 서가에 정갈하게 꽃혀 있던 ‘세계문학’이라는 객관성과 보편성,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엄선된 40이라는 대표성이 선사하는 숭고함은 그 시절 내게 책읽기에 대한 무거움과 비장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책읽기에 대한 무거움과 비장함은 얼마 안 있어 죄책감으로 변했다.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숭고함을 무시했다는 사실, 아니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숭고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한동안 괴롭혔다. 그 고뇌 끝에 내가 세계문학전집에서 몇 권 무겁게 꺼내어 읽었던 책들이 있었는데 (그래도 다섯 손가락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중 한 권이 드라큘라이고 또 다른 한 권이 그리스신화이다.
<드라큘라>는 브람 스토커(Bram Stocker)라는 영국 작가가 1897년 발표한 괴기소설이다. 소설속 드라큘라 백작의 모티브가 된것은 루마니아의 블라드공이라고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3세기 유럽인구의 1/3의 생명을 안아간 페스트의 공포, 십자군 전쟁 패배이후 실추된 교황권과 이를 계기로 새로운 판세를 형성하려는 영주권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 종교재판, 마녀사냥 등등......중세 암흑기를 설명하는 여러 사건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드라큘라와 관련시켜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대목은 투르크족의 유럽침략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권에 의한 발칸반도의 대부분과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기독교 문명권에 있었던 그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공포와 전율 그 자체였다. 블라드공은 그 무렵에 등장해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이슬람세력에 맞서는 기독교 문명권의 수호신 같은 역할을 하였다. 블라드공은 포로들에 대해 굉장한 잔혹성을 보였다 한다. 산채로 불태워 죽이거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꼬챙이로 찔러서 죽였다고 하여 투르크 병사들 사이에서 그를 ‘창에 꿰어 죽이는 자’라는 호칭까지 얻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잔혹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후 400년 후에 잠자고 있던 블라드공은 뱀파이어가 되어서 드라큘라라는 소설속의 인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뱀파이어에 대한 해석, 그리고 상상

소설이 쓰여 질 무렵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일컬어지던 빅토리아 왕조시대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영국은 18-19 세기에 엄청난 파워로 세계질서의 가장 강력한 축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화려한 명성을 날리던 대영제국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역학 관계속에서 서서히 과거의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는데, <드라큘라>가 출판되었던 시기가 바로 그 무렵이다. 
소설은 한 축에 중세의 암흑, 공포, 거세의 대상, 모더니티의 적대자인 드라큘라를 '타자(Other)'로 배치시킨다. 그리고 나머지 한 축은 빅토리아 시대 최첨단 지성과 테크놀로지로 무장된, 반 헬싱 박사를 필두로 하는 강호의 고수들이 드라큘라와 맞서기 위해 포진되어 있는 형국이다. 소설속에 드러난 이러한 대립구도는 19세기 빅토리아 왕조시대 영국인들이 지녔던 당대의식을 전달코자 했던 setting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식민지의 확보와 착취, 그리고 보존과 유지를 위해 주체인 나를 먼저 설정하고, 그 주체안으로 포섭해야 하는 대상(피식민지국 혹은 영국과 함께 식민지 쟁탈을 다투는 다른 경쟁국들)을 상정한 후, 주체가 대상을 인식해 가는 과정이 바로 이성의 능력이고 계몽이며, 진보라는 근대성의 신화가 이 소설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드라큘라>는 단순한 괴기 공포 소설로 읽혀질 수 없다. 전근대와 근대, 이성과 광기, 문명과 야만, 그리고 아롤론과 디오니소스간의 대립으로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문제는 근대와 탈근대논의까지 뻗어간다.

ⓒ 웹진 <제3시대>

  1. 미국내에서 Nietzsche에 대한 번역과 소개는 전적으로 Walter Kaufmann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Nietzsche 철학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첫 시기는 The Birth of Tragedy 비극의 탄생으로 대표되는 시기이고, 두 번째 시기는 Human All Too Human, The Gay Science 등의 작품에서 나타난 ‘긍정의 정신’으로 특징지어지는 기간이다. 마지막 시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적 저작들이 몰려있는데, Beyond Good and Evil 선과 악을 넘어서,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도덕의 계보학, Twilight of the Idols 우상의 황혼, The Anti-Christ,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등의 책들을 통해 니체 특유의 서구 정신사에 대한 전적 부정과 기독교윤리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폭로가 이어진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저작이라 할 수 있는 Thus Spoke Zarathustra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마지막 시기와 중간시기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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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 시간과 공간에 관한 아주 짧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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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Ethics Ph.D 과정)

     얼마 전 보도에서 서울대 철학과 백종현 선생이 <판단력 비판> 번역을 끝으로 칸트의 3대 비판서 번역을 완료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80년대 말, 혁명의 기운이 잦아들던 그 시기에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최재희 선생이 번역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임석진 선생이 번역한 헤겔의 <정신현상학>, 김수행 선생이 번역한 맑스의 <자본론>을 어깨너머로 읽으며 비장하게 (혹은 우울하게) 칸트와 헤겔과 맑스를 접했던 세대로서 칸트가 새롭게 번역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 당시는 한자로 쓰여져 있었던 책 제목과 번역자들의 이름이 우선 나를 짓눌렀고, 온갖 암호와 같은 불친절한 개념어들이 주는 압박이 나로 하여금 칸트와 헤겔을, 그리고 맑스를 허공에 떠있게 만들었다. 사실 돌이켜보건데 그때는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무엇인지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른 채 쫓아만 다녔던 시절이기도 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칸트의 비판서들이 새롭게 번역된 것을 계기로 경쾌하고 발랄하게 칸트가 한국의 청년 학도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라고, 아울러 헤겔과 맑스도 새롭게 번역되어 다시 읽혀지기를 바래본다.
    
     임마누엘 칸트는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 논의를 접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인물이다. 물론 근대가 무엇인가? 에 대한 많은 규정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인식론적인 맥락에서는 ‘선험적 주체의 탄생’을 근대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고, 경제학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그에 반하는 사회주의의 탄생’을 또 다른 근대의 한 축으로 상정하기도 한다. 정치적으로는 ‘민족국가와 제국주의의 등장’, 지리학적으로는 ‘지리상의 발견(노출)에 따른 공간의 확장(수탈)’, 물리학적으로는 ‘뉴우튼의 고전 물리학 이론’등......이렇듯 근대를 규정하는 편차가 다양한 까닭에 근대와 탈근대를 둘러싼 논의들은 상당 경우 사전 논의 과정에서 일정의 조율이 필요하다.
      칸트는 근대적 주체를 정의하면서 ‘선험적 주체’를 이야기 한다. 선험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영어로는 trancendental이라 쓴다. 인간의 인식은 다분히 경험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칸트는 인간의 인식이 잡다한 경험의 다발이 아니라, 그 경험을 가능케하는 ‘선험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순수이성 비판> 초반부 ‘선험적 감성론’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근대적 주체의 첫 단추를 열어나간다.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설정과 이해와 정복이 근대적 인간의 첫 출발점인 셈이다.
     
     근대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다른 각도에서도 충분히 하나의 맥으로 엮을 수 있다. 뉴우튼의 고전물리학에 등장하는 가속도의 법칙, 힘의 법칙에서 시간은 절대적 위치를 부여받는다. 시간에 대한 절대성이 근대적 패러다임의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지리상의 발견에서 비롯된 서구 세계 공간의 확장 (or 서구가 아닌 세계의 공간적 노출)은 결론적으로 치열한 식민지 경쟁(비서구의 착취과정)을 통해 서구 유럽의 막대한 부의 축적을 야기시겼고, 이를 계기로 서구사회는 급속도로 민족국가화, 제국주의화 되어간다. 이는 자본주의의 등장과 발전, 그에 반하는 사회주의와의 대결로 이어지면서 20세기 말까지 지속되게 되는데, 이 모두가 근대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와 정복의 신화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나의 표상이 너희의 진리다.” 히틀러의 말이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꿔 쓸 수 있다. “나의 공간과 나의 시간이 너희의 절대적 표준이다.” 이런 확신은 비단 히틀러만의 화법은 아닐것이다. 근대적 인간 일반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이고 특징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이러한 절대성에 대해 Totality (전체성)라 비난하면서 ‘Face of the Other'(타자의 얼굴)을 이야기하고, 데리다는 그러한 서구 인식론의 Deconstruction(해체)를 주장하며, 푸코는 이 가열참을 ’광기의 역사‘라 쏘아붙인다.. (탈근대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필자가 공부하는 시카고에는 몇몇 특색있는 신학교들이 있다. 특별히 ‘Religion & Science' 분야의 최고 연구기관이자 정기적으로 기관지를 발행하는 ‘Zygon Center for Religion and Science’(줄여서 그냥 Zygon이라 부름)이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 내에 있다. Zygon의 운영자이자 미국내 '종교와 과학' 분야의 대부가 바로 Philip Hefner이다. 시카고에서 석사과정 수학하면서  훼프너 교수가 개설하는 'Religion & Science'와 ‘Ethics & Science' 두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천문학자, 물리학자, 분자생물학자, 진화생물학자등 시카고에 있는 과학분야의 교수들을 초빙하여, 이야기를 듣고 신학적 질문과 대답을 듣는 시간이었는데, 사실 내용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학 용어와 과학적 상식의 부족이 나로 하여금 수업으로의 몰입과 집중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간이었는데, 그날 주제가 양자물리학중에서, 뉴우튼의 고전물리학에 타격을 주었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부분이었다. 전자 현미경 상에서 원자의 속도를 재려고 빛을 취하는 순간 빛을 비추는 조작 때문에 원자의 위치가 불안정해진다는 것, 즉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원자의 위치가 사실은 그 위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빛을 취하는 순간 원자의 속도와 위치에 왜곡이 가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전자현미경 상에서 어떤 원자의 시간(속도)과 공간(위치)을 동시에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정복을 자신했던 근대적 주체에게 ‘불확정의 원리’는 많은 것을 시사하면서, 곧바로 근대적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에 입각한 우리 인식과 삶에 의혹을 제기한다. 
     혹 우리 삶의 속도, 우리 욕망의 속도가 우리가 거하는 물적, 정신적 공간에로의 정확한 안내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레비나스는 이 절대성에 기인한 사고와 행위에 다음과 같은 판정을 내린다: “우리는 단일성으로 통합되지 않는 다원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감행할 수만 있다면 파르메니데스와 결별하고자 한다.” 데리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절대성에 기반한 서구정신을 ‘빛의 폭력’이라 규정하며 다음과 같은 사망선고를 내린다: “우리를 여전히 자신의 법으로 속박하는 그리스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고 말이다.
   
      어쩌면 ‘선’의 반대말은 ‘악’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악은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절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종교(Religion)적 절대성이든, 이념(Ideology)적 절대성이든, 인종(Race)적 절대성이든, 아니면 요즘 Queer이론에서 문제 삼는 성(Sexuality)에 대한 절대성이든......인류가 저질렀던 모든 학살과 전쟁과 광기는 이런 절대성들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유전되어 지금도 작동된다. 그렇다면 ‘선’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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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03 03: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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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의 시간과 공간"을 철학적, 정치적, 경제적, 지리학적인 차원에서 논리정연하게 정의한 좋은 글이군요.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정복한 역사가 근대이고, 그 출발은 칸트다"라는 필자의 주장은 탈근대성이라는 철학적 담론의 주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네요. 좋은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에서 다룰 탈근대 사상가들의 철학적 담론을 기대합니다.
  2. 박재형
    2009.06.03 20:3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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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좋은 글 잘 읽었어요. 형의 글에서 보듯이 근대는 인간에 대한 재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네요.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소외는 다시 새로운 인간의 발견을 특별이 인간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가치 평가와 자리매김이 필요한거 같아요. 저도 여기서 열심히 해야 겠네요. 요즘 같아서는 그냥 한국으로 들어가 함께하고 싶은 마음 아마 형의 마음과 같을거 같네요. 형도 힘내시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기대할께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보고싶어요.
  3. 2009.06.05 01:4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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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선명하게 구별하신 좋은 글입니다. 한국 정치와 교회가 여전히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이번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기점으로 한국 정치와 교회에 탈근대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그 몫은 우리들이 짊어져야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음 글을 기대합니다. ^^
  4. 노언철
    2009.06.05 11: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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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호!! 위에처럼 저런 글 써야 하는건가? 죽겠네.ㅋㅋ 우리 모두 홧팅!!
  5. 이상철
    2009.06.05 21:3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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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님께 부탁드립니다. 독자 한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왔네요. 글을 읽다가 오타를 발견했다고... 후반부 영문 스펠중 ideology가 idology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ideology로 수정바랍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 2009.06.06 09:3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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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꼼꼼하게 읽고 교정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ideology로 고쳤습니다.
  6. 봉.
    2009.06.12 14:4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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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화이3333!! 쵝오 ;)
  7. 2009.07.06 05:4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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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에세이 잘 읽었습니다. 편하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의미있는 글쓰기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절대가 악이라는 말씀에 적극 동의하며, 그 '절대'를 삶의 근거로 놓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영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똘아이 중 종교적 신념으로 뭉쳐진 똘아이가 가장 상_똘아이겠죠. 정말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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