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윤리적 화두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미국의 작은 사립 대학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학과 여성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종종 학생들과 힘들게 씨름하는 주제가 ‘전쟁’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폭력과 전쟁으로 시작되어서, 지금까지도 그 폭력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에서 신학적 머리로 접근하기 힘든 화두가 ‘전쟁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인가, 아니면 죄에 빠진 인간들의 권력 투쟁인가, 만약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이 있다면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왕국들의 흥망 성쇠가 이어졌던 유럽에서는 교회가 거룩한 전쟁을 결정하는 주체가 되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비열한 권력욕의 실체로 판단될 수 있는 십자군 전쟁, 백년전쟁, 제3세계의 식민지 전쟁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의 모든 전쟁들은 교회의 적극적인 지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전세계의 수많은 기독교 윤리학자들이 전쟁 윤리에 매달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전쟁이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가장 파괴적인 수단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폭력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공포의 실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쟁을 겪을 때마다 인간은 상상을 초월한 잔혹성을 경험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들은 다시 부메랑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떠한 존재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느님은 이 전쟁의 불길 속에서 어디에 계셨던 것인가’ 등등의 실존적 질문들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전쟁이야말로 인간 정체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역사적, 물리적 힘이 아닐까요?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와스 (Stanley Hauerwas)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미국인이라는 시민 정체성이 전쟁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지구상에 생겨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전쟁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에서 희생당한 참전 용사들을 기억하며 애국심을 다지고, 이들의 피로 지켜낸 미국을 영원히 지키자는 다짐을 해왔습니다. 기독교인들 또한 군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쟁 영웅들의 희생과 초대 기독교 순교자들의 피를 동일시하면서, 끊임없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미군들과 전장에서 죽은 거룩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선’을 수호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군사들로 자신들을 이해해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우어와스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전쟁은 인류 사회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뿌리 깊은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성서적 바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전쟁’이론이 기독교 전쟁 윤리의 지배적인 담론이 되는 이유는,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인간 사회의 실체라는 생각을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전쟁을 거부하는 담론이 아니라, 전쟁을 실체화하는 담론인 것입니다. 전쟁이 인간 사회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생각이 팽배한 세계는 비폭력 평화주의자들을 희생을 거부하는 이기주의자들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Stanley Hauerwas, War and American Difference [Baker Academy, 2011])
            하우어와스의 주장은 신선하게 들립니다. 지금까지 주류 기독교 윤리 담론이 소위 말하는 ‘정치 현실론 (Real Politik)’ 또는 ‘기독교 현실주의 (Christian Realism)’에 기초하여, 전쟁의 필연성을 가정한 데서 출발하였다면, 하우어와스는 전쟁의 필연성 자체, 즉 ‘전쟁은 계속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란 생각이 ‘과연 증명이 필요없는 합리적인 가정인가’라고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전쟁이 기독교 정체성에 부합하는 것인가’ 하고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존 요더 (John Yoder)의 비폭력 평화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은 하우어와스에게 있어서, 전쟁은 기독교 정체성에 반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전쟁이 굳이 피할 수 없는 인류 사회의 현실이 될 합리적 이유도 없습니다.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류터 또한 하우어와스와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비록 힘의 대결로 일어난 전쟁과 폭력이 인간 역사를 지배해 오기는 했지만, 인류는 사랑과 정의, 화합에 바탕을 둔 신뢰와 공존의 관계를 유지해 오기도 했습니다. 예수가 그러했고,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원 운동, 간디의 비폭력 평화 운동,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흑인 인권운동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이들이 보여 준 사랑과 정의, 화합에 기반한 공존의 관계는 역사적 현실이 아닌 걸까요? 류터는 폭력의 역사 만큼이나 사랑의 역사 또한 현실이라고 주장합니다. (Rosemary Ruether, Christianity and Social Systems [Rowman and Littlefield, 2008])  
           하우어와스와 류터의 신학적 질문들은 한국 사회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한국 전쟁을 통해 만들어져 왔습니다.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기억하고, 분단의 현실에 마음 아파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흘린 이들을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뼈아픈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들도 공산주의와 싸우면서, 대한 민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물질적 영적 힘을 보태었습니다. 이제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은 전쟁과 분단, 반공주의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생각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고 예수의 평화를 묵상해 봅시다.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만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는 길일까요? 한국의 교회는 전쟁에 대해 어떤 신학적 생각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성공회 신부입니다. 매주 미사에 성찬식을 시작하며 신자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우리가 이야기하는 “주님의 평화”는 무엇일까요? 이 평화는 현실에선 얻을 수 없는 희망일까요? ‘한국 기독교인들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현실과, 얻을 수 없는 주님의 평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 잃은 어린 양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라는 화두를 던지며 이 글을 마칩니다. 길을 찾기 위해선 앞으로 전쟁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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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입은 광인[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그들은 예수에게 와서, 귀신 들린 사람 곧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 「마가복음」 5장 15절 中 

 

오늘의 본문(막5:1~20)은 ‘거라사 광인’ 일화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서들에 소개된 예수의 이적기사 중 단일한 사건이 이 본문처럼 길게 서술된 다른 예는 없습니다. 그런데 서술 분량이 많다고 해서 의문의 여지가 없을 만큼 설명이 충분히 돼 있는 본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분량이 많은 만큼 의문도 많아지고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 의문들 중에서 저는 성서기자가 15절에서 전하는 광인의 최종상태, 즉 “제정신이 든” 상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에 집중해 오늘의 이야기를 펼쳐볼까 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 일화를 군대 귀신이 들려 광인이 됐던 한 남성이 예수의 축귀를 통해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됐다는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그 과정에서 군대 귀신이 옮아 붙은 2천 마리의 돼지 떼가 갈릴리 호수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놀라운 이야기와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과 관련된 설교들을 찾아보면, 주로 ‘끔찍한 상태에 있던 광인이 예수를 만나 삶이 바뀌었다’, ‘마을사람들은 돼지라는 재산을 잃은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예수(영생)를 거절했다’, ‘거라사 광인인 단순히 정신병자가 아니라 귀신 들린 것이다. 악마는 실재한다’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일반적 이해방식들은,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광인의 변화, 즉 “아무도 휘어잡을 수 없는” 광인의 상태(4절)에서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든” 상태(15절)로 변화한 것에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으며, 때문에 이 일화가 우리 삶의 현장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해석될 가능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 해석은 성서기자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기자는 이 일화 속에서 주요 인물들의 대립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려내려 하고 있습니다. 주제의식이라는 것은, 예수가 악마까지 다스리는 권능자라는 것과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대립은 예수와 광인, 다음 단계에서는 예수와 마을사람들의 대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3~5절을 통해 예수와 광인의 대립 전에 광인과 마을사람들의 대립이 먼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서기자가 광인의 상태를 묘사하는 이 부분에서 마을사람들의 시점만을 대변하는 편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서기자는 광인을 가리켜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휘어잡다는 표현에 대응하는 헬라어는 ‘다마조(δαμάζω)’인데 의미는 ‘통제하다, 길들이다’에 가깝습니다. 바꿔 말하면, 마을사람들은,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가축을 결박하듯이 그를 묶어두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광인’이나 ‘귀신들린 사람’과 같은 호칭은 모두 스스로 자신에게 붙인 이름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가 그 세계 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대상을 언어화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세계는 그를 광인이라 불렀고 그를 가축처럼 결박해 길들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그를 부르는 이름 속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이미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일반적인 해석들에서도 이러한 평가절하는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부순 그의 행동은, 세계가 자신에게 행하는 길들이기 시도와 평가절하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물론 이때 저항이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치적 대의를 따르는 행동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저항자의 ‘자의식’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억측이기만 하지 않은 것은, 고대인들이 생각한 ‘귀신들린 사람’은 현대인들이라면 서로 다른 범주라고 생각할 것들을 모두 지칭하는 대상이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아개념이 형성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정신병과 (그 사회의 통념과 상식을 거스른다는 의미에서의) 반사회적 행동을 구분하는 세밀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귀신들린 사람의 행동 범주 안에는 정신병 증상과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행동이 구분되지 않고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본문을 다시 보면, 거라사 광인은 단순히 귀신의 조종을 받는 ‘사탄의 인형’인 것이 아니라, 그를 휘어잡아 길들이고자 하는 주변 세계에 대항해 사투를 벌이며 탈주를 꿈꿨던 인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거라사 광인은 자신의 이상행동들, 세계화 불화하는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가 예수를 만난 후 “제 정신이 들었다”(15절)고 기술함으로써 그의 행동이 갖는 다른 의미의 가능성을 일축해버립니다. 그저 이전의 행동은 미친 짓들에 불과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광인을 바라보고 통제하고자 하는 이들의 시각이지 광인 자신의 시각은 아닙니다. 이처럼 성서가 그를 묘사할 때 사용한 ‘편파적’ 언어 때문에 우리는 광인의 행동이나 말을 충분히 공감하거나 이해하기보다는 우선 대상화하고 표면적으로만 바라볼 위험이 큽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표현의 의미는 마을사람들이 시도했던 ‘길들이기’와 무엇이 다른지(혹은 같은지) 묻지 않고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인을 길들이려는 마을사람들의 태도나 그 태도에 동조하는 성서기자의 편파적 시각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광인의 눈으로 본 세계는 어땠을지 묻는 것이 그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겪은 광인은 어떤 자기이해를 가지게 됐을지 물어야 성서가 말하는 “제정신이 든” 상태란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마가복음의 ‘거라사의 광인’ 에피소드(5:1~20)와 루쉰의 「광인일기」라는 소설의 교차읽기를 통해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중국의 작가 루쉰은 1918년 5월 「광인일기」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합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이 쓴 동명의 소설에서 제목, 주인공의 수기라는 형식, 그리고 그 수기를 쓴 주인공이 ‘광인’이었다는 설정 등 여러 문학적 장치를 빌려온 루쉰은 이 소설을 통해 중국 신문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이 뭔가 껄끄러운 느낌을 줍니다. 자신의 일기장 표지에 ‘미친놈의 일기’라고 제목을 적는 사람을 보는 게 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내밀한 자기고백을 담는 기록형식인 일기 앞에 ‘광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소설의 서장에서 광인일기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은 서술자(광인의 중학교 시절 친구)는 “책명은 본인이 완쾌된 후에 붙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기를 쓴 사람과 일기의 제목을 붙인 사람은 동일인물입니다. 그러나 일기를 쓴 것과 일기의 제목을 붙인 것 사이에는 단순히 시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존재합니다. 즉, 일기의 제목을 붙일 당시의 주인공이 스스로 과거의 자신을 광인이라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쾌된” 현재의 주인공은 자신을 미치광이 취급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수용해 과거의 자신을 바라봅니다.
때문에 광인일기라는 제목은 주인공이 주변 세계와의 갈등에서 결국 패배하고 말 운명임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연하면, 마을사람들과 자신의 가족들, 나아가 중화 문명 속에서 4천년 이상 이어져온 야만(식인)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주인공은 더 이상 주변 세계와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근거로 사람들을 계몽하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식인풍습’을 혁파하려는 그의 목소리는 주변사람들에게는 광인의 헛소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계를 뒤집어엎을 힘이 없던 주인공은 방에 감금당한 채 자신도 사람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않은 아이들을 구해내야 한다는 다짐으로 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자신의 소신과 다짐대로 산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순응해 자신의 과거를 ‘광인’의 상태로 규정하고 관직 후보가 돼 마을을 떠났습니다. 주인공과 주변 세계의 갈등상황에서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주변 세계가 붙인 꼬리표인 광인이라는 호칭을 주인공이 스스로 수용한다는 것은 자아와 세계의 갈등에서 자아의 패배, 세계질서의 일방적 수용을 의미합니다. 또한 관직 후보가 됐다는 것은 자신이 식인의 체제라고 규정하던 기존 질서에 편입되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완쾌됐다는 것은 그의 위치가 ‘광인’에서 ‘식인’으로 바뀐 것을 뜻할 뿐입니다.
다시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오늘의 본문 역시 광인일기의 내용과 유사하게 읽힐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자신을 식인의 문명과 맞서 싸우는 계몽가로 생각할 때 그는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피해망상증을 앓는 광인에 불과합니다. 거라사 광인도 (그것이 망상에 근거한 것일지언정) 자신을 “군대”라고 정의하는 명확한 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때 그가 말한 군대란, ‘레기온(λεγιών)’ 즉 로마의 군단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6000명의 거대한 군단을 이끄는 장군으로 여기고 세상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을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 못하는 과대망상증 환자였지만, 광인은 (사실은 자해의 흔적이었지만) 자신의 몸에 난 상처들이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 제정신이 든 광인을 묘사하기 위해 성서기자가 사용한 표현은 그가 “옷을 입었고 ... 앉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묘사들을 보면 그는 꼭 문명의 질서에 길들여진 것 같습니다. 마치 제정신이 된 모습은 세계와의 갈등이 없는 상태, 그 갈등을 없애기 위해 사회적 통념에 투항한 듯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거라사 광인 이야기는 ‘저항(주인공)-억압(세계)’의 서사가 ‘굴복(주인공)-훈육(세계)’의 서사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광인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체제에 먹혀버렸던 것처럼, 거라사의 광인도 사회적 통념에 부합하는 예의를 갖춤으로써 스스로 그 사회에 길들여지고 평가절하 받는 길을 택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서 읽기 방식은 성서 안에서 윤리적 정당화 방식, 본받을 대상, 동일시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에서는 그런 대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라사 광인 이야기에서 어떤 윤리적 함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 과연 윤리적 함의라는 것이 그 이야기 안에 있기는 한 것일까요? 저는 거라사 광인 이야기와 광인일기의 의미가 이야기 ‘내부’에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미덕은 이야기 내부에 우리가 쉽게 ‘동일시’하고픈 주인공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두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반면교사’(윤리적 주인공의 뒤집힌 거울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이 두 서사는 등장인물 중 어느 한쪽에도 쉽사리 동조할 수 없는 심리적 상태를 초래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앞에 놓인 두 이야기가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만드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요? 윤리적 동일시의 대상을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통념화된 윤리관의 정지, 이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던 윤리적 사고의 토대에 대해 회의를 갖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고, 그 계기를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사고가 시작될 단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윤리적 성찰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손쉬운 동일시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지 묻는 태도인 것은 아닐까, 묻게 됩니다. 옷을 입은 광인은 우리에게 자기와 쉽게 화해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그렇게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윤리적 성찰의 지점 또는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2013.11.10.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1562차 예배)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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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경계의 신학'[각주:1]을 위하여...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신학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신학은 시대를 전제하고 시대의 문제와 도전에 대처하고 응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본서의 제목으로 사용된 ‘탈경계의 신학’은 ‘신학, 시대와 통하라!’는 신학적 전제에 대한 현대적 각론 내지는 현대적 version 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탈경계’라는 말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대면하고 있는 당대의식 이기에 그렇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이념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계질서는 20세기 말에 밀어닥친 현실 사회주의의 패망과 함께 종말을 고하였고, 바야흐로 현재의 세계는 자본의 전지구화라는 보다 간교하고 유령과도 같은 지배질서로 대체되었다. 유령과도 같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 권력의 배후와 실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전 시대의 권력의 양태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화와 세계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개되는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의 첫 번째 강령은 경제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무역 장벽의 철폐였지만, 그것은 단순히 재화와 자본의 유통을 가로막는 국경의 해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전 영역에서의 개방과 해체를 의미하고 그 틈을 타고 유입되는 모든 낯선 것에 대한 열림과 환대가 이 시대의 미덕이고 윤리라 가르친다.
   한국 또한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강력한 단일민족문화 전통속에서 형성되었던 경계와 질서들이 해체되고 재편되는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실례로 2009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110만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이는 전체인구의 2%가 넘는 수치로 전년대비 약 25% 증가한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전체인구의 1/10이 외국인이 될 것이라 예상한다. 십 여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요 근래는 동남아 일대에서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온 처녀들이 정착하여 한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2세들이 태어나면서 다문화가정의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우리사회도 다인종, 다문화, 그리고 그에 따르는 다종교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대는 우리에게 세계가 겪고 있는 변화와 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에 걸맞는 적극적 해명, 그리고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전략과 리듬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경계와 차이와 다양성들에 대한 환대의 방식을 숙고케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우리 사회속에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다름에 대한 차별과 배제와 폭력에 대해서는 분노하라고 가르친다. ‘탈경계의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시대를 향한 신학의 답변은 늘 어색하고 어눌했고 위험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자기만의 자리, 자기만의 언어를 고집하려 했다면 신학은 이미 예전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로마교황청의 교권주의를 넘어 종교개혁을 감행한 마틴루터, 히틀러의 광기와 맞섰던 고백교회와 본회퍼, 흑인차별이라는 무너질것같지 않았던 장벽을 돌파한 마틴루터 킹 목사,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이용만 당하는 타자, 즉 민중을 신학의 전면으로 내세웠던 민중신학 등 세계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의 장벽과 경계에 막혀 신음하던 시절, 신학은 늘 그렇게 위험한 상상과 무모한 도발을 감행해왔다. ‘탈경계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등장했던 자랑스런 변혁지향적 전통을 지지하면서, 신학의 전통주제인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문제를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속에서 어떻게 다시 묻고 대답할 수 있을지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교회 안에만 갇혀 있었던 신학의 외연이 확장되어 신학의 탈영토화 (대중지향적, 현장지향적, 소수자지향적, 학제간 연구)를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의 발견과 그 과정에서 원활한 소통의 통로가 되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탈경계의 신학’은 ‘탈경계’라는 말속에 숨어있는 정치-경제적 음모와는 과감한 결렬을 시도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법칙처럼 탈경계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또 있을까?  오직 부의 축적을 위해서라면 자본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이 이념이든, 신앙이든, 역사든… 자본은 그것들 안에 저장되어 있었던 기억과 상처들을 모두 깔끔히 지우고는 자본의 원활한 유통을 막는 또 다른 경계를 찾아 경쾌히 돌아다닌다. 이렇듯 자본에 의한, 자본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탈경계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이라 할 만하다. 역사상 등장했던 제국의 모습이 무엇이었나? 모든 경계를 무너뜨렸던 세력들 아니었나? 화폐를 통일하고, 언어를 통일하고, 사상을 통일하고, 급기야는 종교까지 통일한다. 자본은 21세기형 제국이다. ‘탈경계의 신학’은 21세기형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입을 통해 선포되고 선전되는 ‘탈경계’에 대해서는 저항한다. 그것이야 말로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경계이자 한계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탈경계의 신학’은 ‘탈경계’에 대한 옹호와, ‘탈경계’에 대한 배반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적이고 변증법적이다.      

‘탈경계의 신학’을 위한 방법론

   필자는 기독교윤리를 전공하고 있다. 다른 여타의 학문들과는 달리 윤리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인간의 행위이고, 윤리학은 바로 그 행위의 분석을 위한 종합적인 학문이다. 윤리적 행위가 종합적이려면 윤리적 판단 기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여러가지 윤리적 판단기준이 있겠지만, 기독교 윤리학에서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궁극적 목표는 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신학이론들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의학적인) 공부가 현실에서의 행위의 준칙으로 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현실의 질서와 운동의 법칙은 다양한 제 학문간 교류와 협력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소박한 교리적인 접근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현상에 접근할 수 없다. 바로 그 접점에 기독교 윤리학이 위치한다.
   그러므로, 다원화된 사회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행위를 묻는 기독교 윤리학, 즉, 현대 세계 속에서 올바른 판단의 기준과 행위의 준칙을 묻는 기독교 윤리학은 인문 사회과학적 현실 인식과 대안을 다양한 신학적 사고들에 연결하여 대결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이데올로기(혹은 교회)의 위선과 폭압을 넘어서고, 우리 의식, 무의식에 영토화되어 우리를 지배하는 온갖 (신학적인, 그리고 이념적인) 우상과 맞설 수 있는 기독교윤리학으로 바로 설 수 있다.
   소제목으로 ‘탈경계의 신학을 위한 방법론’이라고 붙였는데, 그 보다는 ‘탈경계의 신학에 걸맞는 글쓰기’ 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글쓰기는 다분히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윤리학이 목표로 하는 학문적 지향점을 겨냥한다. 올바른 기독교윤리적 판단을 위한 기준은 내게 있어 신학과 인문학적 상상력과의 만남을 통해 그 체적을 넓혀왔고, 그에 걸맞는 구체적 행위로의 결단은 세계 기독교 역사 안에 간직되어 있는 해방을 향한 전통들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틀 속에서 필자는 본서에서 윤리적 판단의 직영 확대를 위해 현대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인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당대의 문화와 사건속에서 만나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신학과 합류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였다.
   이는 미국 진보신학계의 일반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바 크다. 신학이 지나친 교리논쟁, 법리논쟁에만 몰두하여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는 상황과 이론에 대한 설명과 각주가 가득 차야 신학이라고 평가받는 풍조에 맞서 구성신학은 개인의 내러티브를 기본으로 그것이 어떻게 다종의 다성의 목소리와 어울리며 신학함(doing theology)으로 모아져 가는지에 주목한다. 개체발생은 개통발생을 반복한다. 우리의 피부, 머리카락, 장기의 어느 조직을 검사해도 그것은 나만의 DNA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구성신학은 우리 각각의 내러티브 역시 놀라우리만큼 그분의 섭리안에서 작동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강한 믿음을 역설적으로 전제한다. 그리하여 구성신학은 엄한 교리적 잣대로 신학/앙을 단죄하는 근본주의 신학/앙을 향해 과도한 신학적 설명과 신학적 단죄를 그만 중단하고, 이제부터는 각각의 걸어온 경험과 역사와 신앙, 그리고 신학을 풀어놓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함께 대화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탈경계의 신학’은 내 나름의 구성신학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지적흐름속에서 ‘어떻게 신학이 이 시대를 가로지를 수 있을까?’ 에 대한 필자 나름의 물음이자 고민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기독교가 개독교로 전락한 우리사회의 서글픈 현실속에서 교리 안에 갇혀버린 신학의 폐쇄성을 폭로하고, 물신에 취한 교회를 향해서는 시장 논리와의 의식적 결렬로 나설 것을 요구하며, 신학과 교회전통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공격에 매진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대화의 테이블로 나설 것을 제안한다.

   본서는 체계적인 이론서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난 2년간 ‘제3시대 그리스도 연구소’가 운영하는 웹진 <제3시대>를 통해 발표된 필자의 졸고를 다듬고 수정한 결과물이다. 수정하고 다듬었다고는 하나, 아직 영 글지 않은 내 생각의 단초들이고 걸음마이다. 혹 책의 제목이 <탈경계의 신학>이라 ‘탈경계의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전적 의미, 내지 그에 대한 신학적 각주를 기대했던 사람들이나, ‘탈경계의 신학’이라는 말에서 어떤 새로운 조류 내지 선언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은 실망스러운 결과물이 될 것이다.
   내 처지에서 다양한 인문학적 전통과 신학과의 접속을 도모하는 가운데, 주류신학계 속으로 영토화되지 않고 탈주하는 외침과 몸부림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탈경계’이고, 이것이 신학의 외연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기대 섞인 전망에서 책 제목을 최종적으로 <탈경계의 신학>이라 이름 붙였지만, 지금 다시 한번 책의 목차를 훑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각각의 내용들이 오늘 탈고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필자가 투신하고픈 신학적 과제들로 남겨진 채 저 앞으로 미끄러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앞으로 필자가 그려나갈 학문적 궤적을 암시하는 지형도 내지 밑그림이자, 내 스스로가 상정한 신학적 논란의 제목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이르니 더욱 이 책을 독자들에게 내놓기가 부끄럽다. 학문적 완성도면에서 많이 부족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에 ‘신학노트’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비록 지금은 ‘노트’라고 이름 붙여진 소박한 결실이지만,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내 안에서 ‘탈경계의 신학’에 대한 보다 집요하고 구체적인 모색이 일어나고, 아울러 단순한 신학적 구호의 나열이 아니라 삶과 신앙의 차원으로 번져나갈 수 있는 방안까지를 포괄하는 ‘탈경계의 신학’으로 진화하기를 소망한다. 

  1. 2009년 6월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첫 원고를 보낸 이후 지금까지 매월 ‘제3시대 웹진’ [신학정보]란에 필자의 글이 게재되고 있습니다. 독자님들이 많이 읽어준 덕에 조만간 책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책 제목은 『탈경계의 신학: 시카고에서 띄우는 신학노트』 (기획: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출판: 동연출판사)입니다. 웹진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몇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였고, 미흡한 부분들은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내용을 보강하였습니다. 이번 호 웹진에 올린 글은 출판예정인 책의 머리말 중 일부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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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향한 서로 다른 포물선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유감레비나스

레비나스가 걸어온 사유의 여정은 감동적이다. 현대 사상계의 화려하고 감각적인 내공을 지닌 고수들과 달리 레비나스는 평생 타자와 윤리라는 밋밋한 주제를 갖고 강호를 누볐다. 이런 그의 완고함과 철저함으로 인해 감히 함부로 레비나스와 맞짱을 뜨려는 검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데리다가 그의 생의 초반에 썼던 논문 ‘Violence and Metaphysis: An Essay on the Thought of Emmanuel Levinas’ (『Writing and Difference 』,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pp.79-153)에서 잠시 레비나스를 향해 딴지를 걸었던 것을 빼곤 별로 기억나는 레비나스 비판은 없다.

하지만, 레비나스 윤리학이 선사하는 이러한 감동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존재한다. 쇼펜하우어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비판한 것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레비나스의 ‘표상할 수 없는 타자’라는 테제 앞에서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이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에 그렇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레비나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왜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작아지는가? 급격한 초월의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때문이다. 그 벽은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이 드러날 때 겨우 열린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초월적 타자와 수직적으로 만난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그 순간을 감지하고 찬양하는 숭고함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양자간의 초월적 관계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다. 수많이 타자들이 자아내는 다름과 차이에 대한 숙고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곳이 지금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볼 때 레비나스의 윤리는 작금의 다원화된 세계화된 사회에서 유통가능한 복수의 윤리를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순결하고 완고하다. 위에서 언급한 레비나스 윤리의 완고함 내지 우직함은 레비나스 사상을 지배하는 유대교적 철저함, 즉 무한인 하나님은 오직 타자의 얼굴을 통해 드러낸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궁극적으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신비로 밀어붙였던 것이다.[각주:1] 여기에는 제3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공동체의 자리, 즉 다른 타자들과의 횡적연대를 도모할 여지가 남겨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위치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구조이고, (교회) 공동체에 대한 여전한 신뢰를 놓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그것과도 차이가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번 웹진에서 레비나스 윤리의 외연 확대를 위해 그리스도론에 입각하여 타자의 윤리를 전개하는 본회퍼를 끌고 올 것이다.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존재’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강화시킬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본회퍼의 기독교 윤리

일반적으로 본회퍼는 본인의 신학과 삶을 통해 신앙과 사회적 책임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루터의 ‘두 왕국설’을 임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거나, 나치로 상징되는 정치지도자들이 행하는 악에 방관했던 당시의 교회현실에 맞서 사회적 책임이 신앙의 영역에 포괄된다는 사실을 주장했고 이러한 본회퍼의 사회윤리는 후에 서구의 정치신학과 세속화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각주:2]

본회퍼 신학의 출발점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인간은 추상적 관계의 총체가 아니라 공동체에 바탕한 구체적 관계의 총체이다. 본회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 총체성의 중앙에 위치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현실’[각주:3] 속에서 모든 개인들은 얽히고 연대하여 하나로 모아진다. 그러므로 본회퍼 윤리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고 주어진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계의 현실성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 우리가 얼마만큼 긴밀하게 참여할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기독교윤리의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그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윤리에 있어서는 당위와 존재, 이념과 실현, 동기와 결과의 대립에 의해 그 특징이 드러나지만 기독교 윤리에서는 현실과 현실화, 과거와 현재, 역사와 사건의 관계나 애매한 개념들을 사건의 불분명한 이름으로 대치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가 문제된다. 선에 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문제가 된다.[각주:4]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본회퍼는 칸트 이래 서구 윤리학이 걸어왔던 개인적 차원의 심정윤리학도 거부하였고 동시대에 미국에서 활동했던 라인홀드 니버의 분열된 현실인식 또한 부정한다. 본회퍼에 있어 윤리란 인간의 의지나 정신적 행위에 역점을 두는 존재의 윤리도 아니고, 업적이나 성공, 지위를 강조하는 행위의 윤리도 아니다. 본회퍼에 이르러 주체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로 선언되었고, 이 주체는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묻는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Dietrich Bonhoeffer (1906-45)



타자를 위한 존재

‘그리스도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끌어낼 수 있는가?’ 본회퍼 신학이 묻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회퍼의 하나님은 고통가운데 숨어계시는, ‘없이 계시는 하나님이다.’[각주:5] 하지만, 자칫 이 말은 악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다. 강성영은 이러한 의심에 맞서 본회퍼가 주장하는 신의 자기은폐는 십자가상에서 피조세계의 고통에 참여하는 신의 탄식이었음을 분명히 한다.[각주:6] 이는 그리스도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신 이해이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본회퍼는 비로소 본인의 윤리적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본회퍼의 ‘십자가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단어가 ‘대리(stellvertretung)’이다. 본회퍼는 1941년 여름부터 1942년 초 사이에 쓴 『기독교 윤리』에서 책임의 문제를 다루었다. 본회퍼는 그의 책임윤리를 그리스도론으로 설명하면서 책임적인 삶의 형태가 ‘속박(Bindung)’과 ‘자유(Freiheit)’에 의해 이중적으로 규정됨을 밝힌다. ‘속박’은 ‘대리’와 ‘현실적응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는 ‘생활과 행동의 자기음미’와 ‘구체적인 결단의 모험’으로 드러난다. 본회퍼는 책임이 대리행위를 근거로 생겨난다고 보았고,[각주:7] 그 다음 페이지에서 본인의 사상을 지탱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에 대한 중요한 서술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생명자체이고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대신 사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그가 대신 사신 삶이다. 예수는 결코 스스로가 완전성에 도달하려고 한 단독자가 아니라, 단지 자신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나를 받아들이고 감당하신 분으로 사신사신 것이다. 그의 생활, 행위, 노력의 전체는 대리다. 인간이 살고, 행동하고, 괴로워해야 할 것이 그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의 인간적인 실존을 형성하고 있는 이 진실한 대리의 행위에서 그는 책임을 지는자가 되었다.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모든 생명은 대리된 것으로서 규정된다.[각주:8]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적 타자인 하나님에게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은 없다.신의 입장에서도 인간은 타자이어야 한다. 그래야 신의 신다움이 보장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대리를 통해 양자간의 극복될 수 없었던 타자성은 긍정될 수 있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대리적 죽음으로 파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철저히 ‘타자를 위한 존재’로 규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것은 인간의 전존재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경험이요,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이다. 예수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초월경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에서 비로소 전능, 전지, 편재가 유래한다. 신앙이란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 관여하는 일이다.(수육,십자가,부활).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생각할 수 있는 사고상의 최고, 지대, 최선의 존재-이것은 결코 진정한 초월이 아니다-에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다.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타인을 위한 존재”에 있어서의, 곧 예수의 존재에의 관여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이다.[각주:9]

이제 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드러난 ‘타자를 위한 삶‘을 통해 새로운 자기동일성을 획득하였다. 신은 자기동일적인 공간이 아니라, 세상과 타자를 위해 자기를 개방할 때 비로소 신의 신됨이 선포된다. 그리스도의 대리에 나타난 하나님 현현이 그것을 보증한다. 이렇듯 ‘타자를 위한 존재’로 특징지어지는 본회퍼의 사상은 그의 윤리뿐 아니라 교회론에도 영향을 끼쳤다.[각주:10] 이 말은 윤리란 개인의 실존과 공동체를 양대축으로 삼고 전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본회퍼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개인과 공동체를 매개하는 이음새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한 대리자로 고백하는 본회퍼의 사상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당연히 거부할 것이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무한은 오직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타자의 얼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통해 발견되어지는 것이지, 성육신의 도그마에 의존하는 본회퍼의 그리스도 이해를 따라 하나님 앞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고 레비나스는 답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레비나스의 신인식에 대해서는 반박할 필요를 못 느끼겠고, 또 그럴만한 내공도 없다. 개신교 목사라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유대교 석학의 신 이해에 대해 그것이 나의 고백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딴지를 건다면 신앙의 오만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서는 그의 신 인식과는 별개로 묻고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1996), 85. [본문으로]
  2. 본회퍼 연구가 강성영(한신대, 기독교윤리)은 그의 논문 “타자와 민중을 향한 외침: 본회퍼 신학과 한국교회의 미래”에서 이러한 본회퍼의 신학을 ‘실천적 해석학’, ‘참여의 해석학’, 그리고 ‘타자를 위한 삶’으로 요약하고 있다 - 강성영. 『생명 .문화. 윤리: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주제탐구』,(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252. [본문으로]
  3. 본회퍼 저/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 162. [본문으로]
  4. Ibid., 163. [본문으로]
  5.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D. Bonhoeffer, Widerstand and Ergebung, Neuausgabe, hrsg.v.E. Bethge, 3. Aufl, Munchen: 1985(=WEN), 27. 강성영, 앞의 책, 23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6. “그는 하나님의 초월을 피안의 초월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삶의 한가운데 있는 초월을 말하였고, 하나님의 전능을 그의 권력과 지배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무기력함과 약함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의 전능으로 이해하였다.”- 강성영. 『생명 .문화. 윤리: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주제탐구』, 238. [본문으로]
  7. 본회퍼 저/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 193. [본문으로]
  8. Ibid., 194-195. [본문으로]
  9. 본회퍼 저/고범서 역. 『옥중서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개정3판), 229. [본문으로]
  10. “The church is the church only when it exists for others.”- D. Bonhoeffer, Letters & Papres from Prison, ed. E.Bethge.(NY: The Macmillan, 1971), 3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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