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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기록-기획과 윤리적 삶


김수한
(출판편집자)


누군가에게서 혹은 어떤 매체에서 듣고 읽은 정보만으로 시사 사안을 파악하거나 평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때, 문득 이야기 속 인물과 듣는 이에게,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긴장되고 열쩍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내가 그 상황을 살지 않아서? 맥락과 사태의 전개를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삶을 뒤적거리는 일은 독한 짓이다. 더군다나 팩트를 왜곡하여 강변하는 ‘제 잇속이 꽉찬’ 언어는 몹쓸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사실을 구하고 사정을 살피는 글쓰기를 찾아 책으로 엮자는 생각으로 두리번거리는 일을 하고 있다. 앞서 말한 ‘주체 넘은’ 느낌으로 벌써부터 겸연쩍지만, 하는 일과 시사를 엮어 써보라는 주문에 단상들을 짜깁기해본다. 

칠레의 광부들 33명이 무너진 광산의 지하 수백 미터 대피소에서 69일간 함께 생존하다 무사히 전원 구출되었다. 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쁜 소식이 지난주 내내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 넘쳤다. 광부들의 생존이 확인된 뒤부터 구출을 위한 칠레 정부의 움직임과 생존자들의 심신을 보살필 목적으로 제공된 여러 서비스에 대한 기사를 연이어 접했다. 구출 예상일을 두 달 정도 앞당긴 굴착 기술과 광부들을 태우고 끌어올릴 구출 키트의 구조에 대한 기사가 봇물이더니 드디어 주인공들이 차례대로 지상에 출현하였다. 칠레 정부와 과학기술의 성가, 우애와 리더십 예찬, 전 세계의 성원과 인생 역전 등 공적인 사연은 넘치나, 극한의 상황을 광부 개인과 동료들이 어떻게 참고 견뎌냈는지를 질문하고 증언하는 사적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어떤 매체가 전하기로는 이 ‘숭고한 사건’을 영화화하고 책을 만들기로 계약한 광부들과 기획사가 인터뷰 방식과 내용에 대한 사전 협의와 연습을 했기에 개인의 이야기는 접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물론 끔찍한 경험을 한 당사자의 실존적인 함구의 경우는 탓할 수 없으나, 앞서 추측성 보도대로 조직적 차원의 관리라면 아쉽고 불편하다. 서른세 명이 겪은 기억을 한 권의 기록으로 정리하는 기획에서 조정되고 삭제되고 부각될 언어가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기억일까? 천안함 사건의 병사들처럼 칠레 광부들에게는 개인적 기록이 없을 것인가? 아마도 이 기획은 <슈퍼스타K>만큼의 호응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기억-기록-기획’이라는 편집 행위의 논리와 정치성에 대한 엉성한 질문을 지난 10월 8일 열린 ‘2010 인문주간 <기억과 윤리적 삶> 세미나’를 기웃거리면서도 생각해보았다. ‘지역 아카이브, 민중 스스로의 기억과 삶을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행사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기억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주류 공식 역사 기술에 기록되지 않은 지역민들의 삶의 기억과 생활의 자취를 이미지(사진 ․ 영상)와 글(구술 ․ 출판)로 기록해온 네 곳의 아카이브 활동 현황을 퍼뜨리고 진단하는 자리였다. 재개발 움직임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주민들의 노력으로 작은 마을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대구시 삼덕동 사람들, 생태적 농촌공동체의 대안적 모델로 꼽히는 충남 홍성군 홍동, 산업도시 인천을 고향으로 기억하며 개인사와 도시공간을 기록 전시한 한 인천토박이, 2001년 용담댐 건설로 사라진 고향을 기억하고 기록한 전북 진안의 수몰 지역 이주민들. 이 네 동네 사람들의 구체적인 기억과 자발적 기록은 생활의 보편성과 장소의 역사성을 드러내면서 삶의 지속성과 지역공동체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기억-성찰하고 기록할 때 조금씩 갖추게 되는 윤리적 태도(가령,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가’라는 한 말씀)가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삶의 양식으로 풍부해지는 것. 개인의 이야기와 공적인 서사가 서로 스미고 짜여 입체적으로 삶의 기쁨과 슬픔을 드러낼 때의 총체성. 그런 윤리적 감각으로 사람의 문양(人文)을 기록하는 일이 바로 인문학의 의미가 아닐까?

그런 기획이 튼실하게 구현된 사례를 소개한다. 이 행사를 공동 기획한 이경민 씨는 지난 2008년 광주항쟁 28주년을 기념하여 5·18기념재단이 주최한 ‘오월의 사진첩’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이 전시는 『오월의 사진첩』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이 ‘문제적인’ 전시는 5·18 희생자 10명과 5·18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생존자 8명 등, 모두 18명의 개인 사진첩에서 골라낸 기념사진으로 구성되었다. 5·18이라는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잠시 만나 운명적 삶을 함께 했던 서로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개인사를 마주하는 것. 추억의 기념사진 속에는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졌던 ‘개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다양한 신분 ․ 직업 ․ 나이 ․ 성별로 구별되는 그들의 평범한 통과의례를 담은 생애사에서 ‘나와 같음’을 발견하고서 우리는 새롭게 5·18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술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광주’를 다시금 찾게 된다.

며칠 전부터 거리에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센서스)’를 알리는 홍보물이 나붙었다. 센서스를 알리는 광고의 카피 ‘내일을 준비하는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에서 대한민국은 누구인가. 이 호명은 왜 서늘한 느낌을 주는가? 기억하지 않고 통계 내려 하는 기관처럼 굴지 않고서, 이 땅과 사람의 처지를 기억하고 헤아리는 우리 곁의 ‘윤리적 삶들’을 만나 그 노하우를 듣고 싶다. 그때는 삶의 느낌이 덜 멋쩍을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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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빠 이야기’ 연구 동향 (3)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1. 구전되고 기억된 역사로서 복음서

영국의 신약학자 제임스 던(James D.G. Dunn)은 복음서의 형성 과정이 “과거를 다시 현존하게 함으로써(Vergegenwärtigung), 정확하게 과거와 현재의 지평을 융합하는 ‘기억함’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각주:1] “그렇다면 공관복음서의 최초 이야기들 속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처음 제자들의 기억들이다―즉, 예수 자신이 아니라 기억된 예수인 셈이다.”[각주:2]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근본적으로 예수에 관한 지지자들의 기억의 산물이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역사적 진실로서 입증되기 어렵다고 해서, 반드시 이 이야기의 ‘모든 것’들이 후대에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허구라고 간주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종래의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이 추구해온 역사적 진실은 역사적 재구성에 바탕을 둔 고고학적 진리, 즉 고고학자들이 유적발굴 작업에서 조각난 파편들을 긁어모아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과 유사한 차원의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고고학적 진리 복원의 작업을 통해 성서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진실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날카롭게 구분할 수 있다고 자신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빠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 따라서 문학적으로 창조된 허구라고 간단하게 결론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복음서의 이야기 및 어록들이 애초부터 지지자들의 기억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진실이 곧바로 고고학적 진실로 환원되고 고고학적 진실이 아닌 것은 문학적 허구로 간주되는 그 모든 작업의 절차들은 전면적으로 재고될 수밖에 없다.
 
복음서라고 하는 텍스트가 기억 속에서 구전된 서사라는 것을 상기할 때, 우리는 복음서가 말하는 역사적 예수의 그 ‘역사적’이라는 말을 새롭게 재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가 지지자들의 자발적/비자발적인 기억 행위, 특히 그 기억행위가 담겨 있는 구술연행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나아가 그것이 기억주체 혹은 전승주체의 서사적 정체성 수립을 가능하게끔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우리는 기억 속의 예수 이야기들을 고고학적 차원의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차원의 허구로 단순 도식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기억이 현재의 욕망에 따라 하나의 창조적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복음서와 같이 언어로 기록된 기억, 그 서사적 구성에도 당연히 고고학적으로 완벽하게 복원 가능한 역사적 진실이 들어있진 않은 것이다. 오히려 기억에 기초한 복음서의 기록은 다른 차원의 역사적 진실에 속한다. 우리는 고고학적 차원에 속하진 않지만, 그 기억의 주체에게 있어서는 엄연한 사실로 존재하는 이와 같은 역사적 진실을 기억사적 진실 혹은 서사적 진실로 명명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빌라도가 이러한 유월절 사면을, 즉 나자렛 예수와 바라빠라고 하는 이름의 인물을 무리들의 요구에 따라 바꿔준 그러한 사건을 ‘실제로’ 수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증하려는 데 두고 있지 않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관점을 따르자면, 무릇 과거는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시점의 상황과 서술자의 욕망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다. 서사 행위는 현재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과거의 ‘사후적’인 재구성 행위라는 이른바 ‘사후성의 원리’[각주:3]에 따르자면,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과거는 '기억사적 진실‘인 동시에 ’서사적 진실‘이다. 욕망과 기억에 의해 구성되는 그러한 ‘서사적 진실’에서 ‘서사의 욕망’ 내지 ‘욕망의 서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된 과거가 이야기하는 당사자와 청자/독자의 현재의 상황 내지 욕망에 의해 재구성된 허구라고 보는 서사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도 현재의 상황과 필요에 따른 구성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진실성 역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이 분명한 역사적 예수 자신에게 있(을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예수 사후부터 구전(口傳)되어 오던 예수운동의 이야기를, 66-74년에 이르는 유대전쟁의 시기 중에, 특히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가까운 전후(前後) 시기 어느 시점에서 수집하여 문서화한 후 그것을 다시 ‘새로운 기억 전승’과 결합시켜 구전으로 연행(連行)해 나갔을 마가공동체에 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밝혀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마가공동체의 ‘기억의 삶의 자리’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억 행위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들에게 이러한 기억의 서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기억의 서사를 창안해내도록 했냐는 것이다. 덧붙여 이 기억의 서사가 단순히 관념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모종의 행위를 동반한 적극적 실천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2. 트라우마적 기억의 서사로서 수난사화

마가복음 14-16장에 이르는 소위 ‘수난사화’(The Passion Narrative)에서는 무리들, 즉 오클로스(οχλος)뿐만이 아니라, 제자들, 그리고 여성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모든 예수의 지지자들이 예수를 배신하거나 예수를 따르는 데 끝내 실패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예수를 그 적대자들에게 팔아넘긴 존재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이었고, 예수의 제자를 대표하는 베드로 역시 예수를 면전에서 부인했다. 더욱이 제자들과 무리들이 모두 예수를 배신하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무덤에 안장되었을 때까지도 예수를 따랐다고 하는 여성 제자들(15:40-41, 47; 16:1-8) 역시 빈 무덤을 목격하고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접했을 때는 정작 “무덤에서 도망하였”고, “벌벌 떨며 넋을 잃었”고,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6:8). 그녀들은 예수가 부활할 것이라고 약속한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했다.[각주:4]
 
수난사화에서 보자면, 열 두 제자로부터 시작하여 여성을 포함한 보다 넓은 범주의 제자들, 그리고 무리들에게 이르기까지, 예수의 모든 지지자들은 예수를 끝까지 지지하고 따르는 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무리의 배신 혹은 적대적 태도로의 돌변이 마가복음의 전체적인 서사 구조에서 이탈한 것이라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세 차례에 걸친 수난예고와 동반되어 제시된 예수를 지지하고 따름에 요구되는 진정성과 성실성의 철저함(8:34b-37; 9:33-35; 10:42-45)을 확인시켜 주는 문학적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첫 번째 수난예고에서부터 세 번째 수난예고에 이르기까지 거듭 제자와 무리들을 포괄한 그의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와 함께 제국의 폭력과 종교적 타락에 대항하여 걷는 것이며,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는 것임을 주지시켰다.[각주: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따르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가 16장 8절의 여성 제자들에게서도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서, 마가복음의 청중 및 독자들에게도 예수를 따름에 있어 긴장과 결단을 유도하는 열린 결말의 구조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마가복음이다.[각주:6]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추종해온 무리들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무리들의 모습을 종합해보건대, 이 무리를 예루살렘 주민이 배제된 갈릴리의 출신의 무리로만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운동의 초창기부터 이미 예루살렘에서 온 예수 지지자로서 무리들을 언급하고 있다(3:8).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예수의 성전에 대한 태도 때문에 그를 배척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각주:7]은 마가복음의 어떠한 본문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마가복음 저자의 의도는 이들이 예루살렘의 무리인지 아니면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온 무리인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바라빠 이야기가 첨가되면서, 빌라도의 재판 이야기에 등장하는 오클로스의 정체가 다소 모호해지긴 했지만, 예수의 모든 지지자들의 총체적인 실패와 배신을 강조하고 있는 수난사화 및 마가복음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물론 이 오클로스가 14:43-50의 오클로스와는 구별되는 것이 분명하지만―기존에 계속 언급되어온 예수의 지지자로서 그 오클로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라빠 이야기가 만들어진 배경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이 이야기의 컨텍스트를 초기 그리스도교의 변증적 상황이라고 보고, 또한 이 이야기의 청중을 마가공동체 내부가 아닌 외부의 유대인 일반이라고 본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존의 논의들은 유대인들에게 예수 죽음의 책임을 전가하고 대신에 로마인들의 책임은 면제해주려는 의도에서 바라빠 이야기가 창작되었다는 견해를 되풀이해왔다. 그럼으로써, 마가복음과 마가공동체를 반유대주의적(anti-Semitic) 텍스트 및 집단으로 규정해온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오클로스에 관한 많은 연구들을 참조해보고, 또한 수난사화의 문맥 안에서 오클로스 및 예수의 지지자들 일반에 관한 진술을 살펴 보건대, 마가복음이 상정하고 있는 이 이야기의 ‘저자적 독자’(authorial audience)[각주:8] 혹은 ‘청중’은 공격의 대상으로서 그리스도교 외부의 유대 군중들이 아니라, 마가공동체 안에 남아 있는, 즉 이 이야기의 본래적 상황과 연관된 예수의 지지자였던 유대 군중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열 두 제자들과 다른 나머지 제자들, 즉 여성 제자들(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을 포함한 일반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수난사화 안에서 명예를 복권시켜 놓고 있지 않다. 오히려 수난사화 이전의 본문에서 한 번도 예수의 지지자 중의 일원으로서 부각되지 않았던 이들, 예컨대 무명의 여인(14:3-9), 역시 무명의 백부장(15:39),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15:43-46) 정도만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운동의 초기부터 그를 지지하며 따랐던, 혹은 적어도 예루살렘 입성을 즈음하여 합류했던 그 많은 지지자들이 예수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데 실패했음을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도처에서 다양하게 시사하고 있다.

한데,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수의 열 두 제자와 여성 제자들, 심지어 무리들이 이후에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고 그를 다시 따랐다는 사실을 다른 복음서의 부활사화 및 사도행전(1:13-15a), 그리고 바울서신(고전 15:5-7)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예수가 죽은 이후에 전에 예수를 지지했던 오클로스의 후일담에 관해 마가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어떠한 보도도 찾을 수 없지만, 마가복음보다 후대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누가복음은 뜻밖에 중요한 정보 하나를 제공하고 있다. 누가복음 23:44-49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서, 마가복음 15:33-41과 평행하는 본문이다. 시간과 장소가 일치하며, 예수의 운명 당시 정황이 유사하며, 백부장과 여성 제자들의 등장이 일치하는 두 본문에서 한 가지 대조되는 것은 누가가 48절에서 오클로스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는 오클로스가 예수가 죽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고 보도하며, 더 나아가 이들 오클로스가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누가에 따른다면,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끌고 가서 그를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다”고 고발했던 그 다수의 무리들 가운데 일부의 무리(눅 23:1, 4)가 나중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할 때 ‘그 무리들’(23:48, οἱ ὄχλοι)로 다시 등장한다. 브라운은 23:48절의 동사 τύ́πτοντες와 15:19의 ἔτυπτον의 원형이 같은 것(τυπτω)에 주목한다. 로마 군인들이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던 행동과 예수 처형을 지켜보던 무리가 스스로에게 한 행동이 같다는 것이다. 만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참조했다는 복음서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여기서 누가는 오클로스에 대한 마가의 부정적 묘사를 최대한 완화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누가의 오클로스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했다는 그 충격적인 사실을 뒤늦게 인식하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자신들이 지지하고 따랐으며, 자신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베풀었던 그 의로운 인물을 죽이는 데 동참했다는 사실은 오클로스에게 이제 트라우마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예수가 체포될 당시부터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열 두 남성 제자들(막 14:50),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현장을 지켜보고, 또한 그의 무덤까지 찾아갔지만, 끝내 부활을 믿지 못하고 도망쳤던 여성 제자들(16:8), 그리고 예수를 살리기 위해 빌라도를 찾아갔지만, 결국 대제사장들의 선동으로 인해 예수를 죽이는 동참한 무리들(15:6-15). 이 모든 예수의 지지자들에게 있어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에 공범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은 ‘통탄스러운’, 혹은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는 슬픈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이 사건은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어떻게든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예수를 애도하고자 했다. 그의 죽음을 현실로 수용하고, 기존에 유지되던 모든 친밀한 인관관계 혹은 공동체를 그대로 놓아둔 채 그의 부재를 현실 안에 통합하려 했다. 예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예수의 지지자들은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부터 예수에게 ‘고인’이란 칭호를 붙여줄 것이고, 그 결과 그는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지평 안에 안전하게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물론, 이때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망각/은폐될 것이다. 예수의 여성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그의 무덤을 찾은 것은 바로 이러한 애도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을 때, 모든 애도는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제는 정말 잊고 싶은 자신들의 과거 소행을 상기시키는 ‘놀라움’과 ‘두려움’의 사건이었다. 여성들이 예수의 부활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 그 놀라운 소식을 빨리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그 사실을 그녀들이 도저히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녀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희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예수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자신들의 과거가 영원히 덮을 수 없는 악몽으로 남을 것이기에 그녀들은 부활의 소식 앞에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죽음 이면에 존재하는 예수 지지자들의 실패와 배신, 그리고 좌절을 결코 망각/은폐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사건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트라우마란 개인이 대상(그것이 자신일 수도 있는데)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충격적인 계기인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고 난 후 생기는 증상을 일컫는다. 다른 사건에 의해 본래의 트라우마적 사건 또는 원인적 사건에 관한 기억이 다시 살아날 때, 비로소 트라우마로 느끼게 된다. 이 원인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뒤늦은 계기” 혹은 “사후적 사건”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것이다.[각주:9] 필자는 예수의 실패한 지지자로서 오클로스와 그에 연관된 예수의 남녀 제자들에게 예수 죽음의 트라우마가 반복적으로 경험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단순한 상처나 슬픔으로 남지 않고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예수의 죽음에 예수의 지지자들이, 특히 오클로스와 제자들이 깊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즉 예수를 배신한 원인적 사건을 불러오는 사후의 사건이 반복적으로 그들을 찾아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에게 그렇게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트라우마의 귀환, 그 “억압된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으로서 어쩌면 바라빠 예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오클로스가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한 근원적인 제1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이 당시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단지 충격만 주고 그 후 제2, 제3의 예수 사건을 통해 사후에야 비로소 제1의 예수 죽음 사건의 의미가 드러났던 것이 아닐까? 바라빠 예수는 오클로스들의 예수 죽인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그런 예수의 부활, 혹은 억압된 것의 귀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필자가 그리고 있는 가설은 이런 것이다: 마가공동체는 트라우마 쓰기 즉 ‘외상 후 쓰기’(post-traumatic writing)라고 하는 사후 작용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들 당대의 또 다른 예수들 혹은 예수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을 개작(working over)하고, 심지어 어느 정도까지는 해제(working through)의 과정까지 나아가게 된다.[각주:10] 이러한 트라우마 다시 쓰기를 사후 작용에 의해 촉발시킨 계기가 바로 예수 사후부터 70년 유대전쟁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출현한 바라빠 예수와 같은 그런 인물들, 즉 테러리스트, 강도, 젤롯데 같은 이들과의 조우였던 것이다.[각주:11]  

3. 오클로스의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바라빠 이야기’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와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기억된 역사로서 바라빠에 관한 이야기를 70년경 마가의 역사적 상황과 확고하게 연결시킨다. 그들은 먼저 이 이야기에 묘사된 무리들과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 혹은 마가공동체를 분리시켜 사고한다. 마가복음이 그리고 있는 무리는 예수 시대의 무리인 동시에 유대전쟁을 전후한 마가공동체 당시의 무리이기도 하다. 마가는 그 무리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창작해낸 것이며, 이때의 바라빠는 말 그대로 하나의 메타포일 뿐이다. 즉, 70년 전쟁 발발 전까지 유대 군중들이 나자렛 예수 대신에 선택해왔던 다른 많은 혁명적 지도자들을 상징하는 인물인 것이다. 보그와 크로산은 바라빠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가 모두 혁명가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두 사람 다 로마제국에 도전했지만, 바라빠 예수는 폭력에 호소했고, 나자렛 예수는 비폭력에 호소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적어도 66년까지 예루살렘 무리들은 (혹은 유대 땅에 살고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방식이 아니라 바라빠의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다.[각주:12] 이들의 논의는 간략한 스케치에 그치고 있지만, 바라빠 이야기를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컨텍스트를 66-70년의 유대전쟁과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크로산은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에서 바라빠 사건, 즉 공개적이며 미리 예장된 유월절 특별사면은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마가의 창작임에 분명하다고 일단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빌라도이건 아니면 다른 어느 로마 총독이건 간에, 그런 축제일에 군중이 요구하는 죄술를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가의 서사 전략에서 이 특별사면은 매우 훌륭한 해결책이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마가에게 있어서 그 특별사면이 상징적으로 그 이전 기간들의 사건을 요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백성들은 한 사람의 의적과 예수 가운데 선택받도록 ‘늘’ 요청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평화주의자 예수보다는 바라빠 예수와 같은 폭력적 혁명가를 선택하곤 했다. 마가가 보기에는 그래서 66년의 로마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각주:13] 크로산에 따르면, “바라빠 사건은 실제로 그 사건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과정으로서는 진실한 것이다.”[각주:14]
 
마가복음의 수난사화는 마가공동체의 트라우마가 재현되고 ‘반복’되는 이야기의 공간이자 그것을 그들이 어떻게 극복해나갔는가를 보여주는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라빠 이야기가 결합된 빌라도의 재판 이야기이다. 마가복음의 저자가 빌라도의 재판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오클로스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그 문제가 트라우마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 이야기 안에 현재적인 바라빠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치료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데 오클로스가 가담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즉 과거의 고통스러운 사건을 과거의 자리에 그대로 위치시키고 현재와 미래를 과거로부터 구분하면서도, 그 이야기 안에 바라빠라고 하는 가공의 상징적 인물을 예수의 대조인물로(foil)로 만들어 넣고, 자신들이 지금 따라야 할 길이 누구의 길인지를 상기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지난날의 실패의 고통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억압된 기억들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몸으로 겪어냄으로써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실패를 반복함으로써, 실패를 극복하는 것. 그것이 마가공동체가 다시 쓰는 오클로스의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바라빠 이야기’인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제임스 던/차정식 옮김,『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서울: 새물결플러스, 2010), 197-198[James D. G. Dunn, Jesus Remembered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3), 130]. [본문으로]
  2. 제임스 던, 앞의 책, 198. [본문으로]
  3. ‘사후 작용’(differed action) 혹은 ‘사후성’(differed)의 원리는 프로이트가 “심리적 시간, 인과성의 개념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한 용어”로서, “경험, 이상, 기억 흔적은 사후에 새로운 경험과 관련을 맺으면서 수정되어 다른 차원으로 발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후 작용에 의해 원초적 외상의 사건은 새로운 의미와 심리적 효과를 부여받는 것이다. 즉 외상의 흔적이 계속해서 잊혀 지지 않은 채로, 또 그 의미를 비밀에 부친 채로 연기되다가 후에 다른 사건을 계기로만 사후적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후성이란, 거꾸로 된 인과율을 내포하고 있다. [본문으로]
  4. 막 16:8에 묘사된 빈 무덤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부활 소식에 대한 두려움과 침묵을 제자도를 실천하는 데 실패했다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논의들로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할 것: John Dominic Crossan, “Empty Tomb and Absent Lord (Mark 16:1-8),” in The Passion in Mark (ed. Werner H. Kelber; Philadelphia: Fortress, 1976) 135-52, 특히, 149; Malbon, “Fallible Followers Women and Men in the Gospel of Mark,” Semeia 28(1983), 29-48, 특히, 44-45; Andrew T. Lincoln, “The Promise and the Failure: Mark 16:7, 8”, JBL 108/2 (1989), 283-300, 특히, 293-295; Susan Miller, “‘They Said Nothing to Anyone: The Fear and Silence of the Women at the Empty Tomb (Mk 16.1-8),” Feminist Theology 13.1(2004), 77-90, 특히 88-90. [본문으로]
  5. 마르쿠스 보그(Marcus J. Borg) &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오희천 옮김,『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서울: 중심, 2007), 142-143. [본문으로]
  6. Malbon, “Disciples/Crowds/Whoever: A Markan Narrative Pattern,” 126. [본문으로]
  7. F. Belo, A Materialist Reading of the Gospel of Mark (New York: Orbis Books, 1981), 224-225; E. P. 샌더스(Sanders)/이정희 옮김,『예수운동과 하나님 나라: 유대교와의 갈등과 예수의 죽음』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526. [본문으로]
  8. 김학철, “마태공동체 연구사에 관한 비판적 고찰과 전망,” 『신학논단』47(2007), 31-32. 김학철에 따르면, “저자적 독자란 저자가 글을 쓰면서 마음에 품고 있는 독자를 말한다. 저자는 이 청중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지식과 해석적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저자적 독자'는 하나의 ‘이상적 독자’(ideal reader)이지 실제 독자(real reader)는 아니다. 저자적 독자와 실제 독자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저자적 독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특정한 사회/해석적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의미이다. 저자와 그가 기대하는 독자들이 서로 공유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특정한 방식으로 독서하도록 저자가 초청하는 그 초청을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9. Dominick LaCapra, Soundings in Critical Theory (Ithaca: Cornell Univ Pr, 1989), 34-35. [본문으로]
  10.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이덕하 옮김,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끝낼 수 있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서울: 도서출판b, 2004), 104-121. [본문으로]
  11. 물론 프로이트는 트라우마적 기억의 계기를 제공하는 원초적 사건이 정말 사실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허구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왜냐면 그것은 환자의 순수한 기억이었다기 보다는 분석가 프로이트가 여러 상황들을 바탕으로 하여 재구성한 일종의 가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트라우마적 기억 속에 간직된 원초적 장면이라는 ‘근원’은 ‘있었던’ 근원이 아닌 ‘부재’의 근원이 되어버리며, 담론 혹은 서사가 만들어 낸 허구적 산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정신적 시간성과 인과성’에 있어서 기억이 ‘새로운 경험’에 맞추어 수정될 수 있다고 하는 사후성의 논리는 결국 전이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과거는 현재에 의해 다시 써지고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근원이 더 이상 근원이 아니고 실제가 더 이상 실제가 아니라는 말이며 역사적 진리를 전복시키는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트라우마적 기억을 적용하고 있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마가공동체 안에 속한 집단이거나, 마가복음으로 편입된 수난전승 배후에 있으면서 오클로스로 지칭되는 예수의 지지자 집단이다. 개인적 기억에 있어서는 트라우마적 사건의 실제성 여부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만, 집단적 기억에 있어서는 그 기억의 ‘사회적 틀’, 즉 그러한 기억을 가능케 한 사회적 동인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 [본문으로]
  12. 보그 & 크로산,『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서울: 중심, 2007), 205; Marcus J. Borg, Jesus: uncovering the life, teachings, and relevance of a religious revolutionary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6), 265. [본문으로]
  13. 존 도미닉 크로산/김준우 옮김,『역사적 예수』(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619-20. [본문으로]
  14. 크로산,『역사적 예수』, 6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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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 기행 - prologue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각주:1]

 




경계(境界).








[각주:2]






그곳은 중심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기도 하고,








[각주:3]






중심을 향한 욕망이 가장 치열한 곳이기도 하다.









 

사람, 상품, 돈이 넘나드는...
경계, 그곳은 ‘흐르는 공간’이다.

 





 

‘사잇섬’(간도, 間島)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던 연변 일대는 지금,
‘개혁․개방’, ‘지구화’... 이름이야 어찌됐든,
사회․경제적 변화를 극렬하게 겪어내고 있다.




[각주:5]




이러한 ‘변화’는 부모들의 ‘노동이주’와 청년층의 ‘교육이주’라는 유출을, 그리고 엄청난 ‘자본’의 유입을 초래했다. 늦은 밤, ‘경계도시’ 연길에는 ‘남겨진 청소년/녀’의 물결이 자본이 밝힌 ‘불’을 따라 이리저리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변화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불안’을 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각주:7]








‘일송정’과 ‘해란강’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들 필요가 없는 청소년 세대를 보며 “떼놈 다됐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고,

 



 
 





중국 중앙정부의 동북지역 개발 계획이 추진되면서 (조선족은 유출되는 반면) 한족 유입이 많아져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위상, 나아가 자치주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언어, 기억, 공간...
‘조선족’의 정체성/경계를 담보하던 것들이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게
불안의 근원이었다.

그들의 불안과 기억은
그리고 연변이라는 공간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중국 연변 기행>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고작 5박6일의 경험으로 무언가를 아는 척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또 없을 것이다.

이 기획은 우리가 그간 잘 몰랐던
연변의 어떤 ‘본질’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구화’와 ‘조선족 정체성 위기’라는 두 항 사이에서
‘오늘, 여기’에 사는 나의 삶의 의미를 포착하려는
일종의 스케치 작업이다.

때문에 이 시리즈는 여행 중 얻은 인상들을
다시 끄집어내 반추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끌어 모아
그 의미를 되묻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기억을 구성하는
계기들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본격적인 작업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연변에서의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중국 연변 기행’에
다소 재미가 없더라도 함께해 주시길... ^^;


[다음호 제목...]

‘연변 처녀’에 대한 기억과 ‘북간도’라는 상상의 공간

 

  1. 중국과 북한의 국경 다리 위에서. 여기서 한발을 더 내디디면 북한이다. [본문으로]
  2. ‘장암촌 학살현장’ 기념비 부근에서. ‘3.13 반일운동’으로 ‘시체 살해’까지 당한 33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를 찾았다.(이 역사는 아직 한국에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사진에 작게 나온 할아버지는 올해 85세인데, ‘걸어다니는 역사책’이라 불러도 될 만큼 비상한 기억력으로 일제시대 간도의 역사를 이야기해주셨다. [본문으로]
  3. 연길시 숙소 창문에서 찍은 연길 시내 사진. 개발광풍이 불고 있다. 어딜 가도 아파트 건축현장과 타워크레인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돈을 벌고 돌아온 이들은 아파트를 서너 채씩 매입하고 있다고 한다.(공산국가라 땅은 사유하지 못하나, 건물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한다. 수년 이내에 땅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소문도...) [본문으로]
  4. 연길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부르하통하’ 강. 러시아에서 발원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강 주변엔 유원지가 조성돼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청소년들이 이곳의 주고객이다. 사진은 ‘디스코팡팡’과 그 앞에 몰려든 사람들. 중국어와 조선족어를 섞어 말하는 DJ가 인상적이었다. [본문으로]
  6. 용정 가는 길 터널. [본문으로]
  7. 일송정 터에서 내려다본 해란강. 일송정이 사라진 터에는 시멘트로 만든 정자가 서있었고, 해란강은 하천 정비사업을 하는지 한참 파헤쳐지는 중이었다. 지리적 ‘지문’은 조금씩 바뀌는 중이지만, 용이 내려앉은 것 같은 용정의 풍광과 그 풍광이 주는 숙연함은 쉽게 바뀌지 않을 듯하다. 용정에 가시거든 꼭 일송정 터에 올라 보시길... [본문으로]
  8. 길림시의 새벽시장. 많은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아침을 사먹거나 조리가 끝난 음식을 사다가 집에서 가족과 간단히 먹고 출근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출근 전 아침부터 시장에 인파가 넘친다. ‘아침 외식’ 문화랄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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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0.07.16 03: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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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신선하고 재미있는 기획기사가 될 것 같군요. 만져지는 촉각적 느낌만큼 사람들에게 훅 다가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글을 읽고 연길에 대한 느낌이 몸으로 전해져 옴을 느낍니다. 아마도 내 몸 구석 어딘가에 연길, 간도, 용정을 매개시키는 칩이 저장되어 있나? 김재준, 안병무, 문익환, 강원용 이런 분들이 그 지역 출신이라 관련된 전설들(?)도 많이 듣고 자랐고, 특별히 지금 제가 사역하는 시카고교회에 있는 유학생청년중 연길에서 미국으로 유학온 조선족 유학생이 있는데 지금 방학을 맞아 연길에 가 있습니다. 문득 위에 제공된 연길 밤풍경 사진에 찍힌 젊은이들 모습을 보니 그 청년이 생각나네요.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중에 오면 물어봐야 될 것 같습니다.좋은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나의 한국방문 답사기
: 거리의 몰락, 기억의 종말, 그리고 MB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7월 한달 간 한국을 방문했다. 2년 만에 찾은 조국은 정권이 바뀌어 있었다. 용산에서는 사람들이 불타 죽어갔으며, 전 정권의 대통령은 현 정권의 표적수사에 심한 모멸감과 자괴감에 빠져 자살했다고 누군가 내게 귀띔해 주었다. 내가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기간에도 방송법이 국회에서 한 바탕의 볼거리를 제공하며 통과되었고, 쌍용자동차 사태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살한 전직 대통령의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도 가보고, 용산참사가 일어났던 그 서글픈 건물에도 가봤는데 사람들은 모여있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이 정도의 메머드급 사건들이 줄줄이 터졌더라면 뭔 일이 일어나도 벌써 일어났을텐데. 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무일 없다. 그래, 우리는 이제 그렇게 아무일 벌이지 않아도 꾸역꾸역 살 수 있게 되었다. 잘된 일이다. 하지만 한번 물어나 보자, 그 동안 무엇이 달라진걸까? 내가 서울에 와서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이었다.

로보트 태권 V, 광화문 사거리에서 길을 잃다

과연, 서울은 달라져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현 대통령의 서울시장시절 업적이라는 청계천을 잠시 둘러보고 찾은 인사동은 현대와 고전이 조화된 어울림으로 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고전과 현대 그 어느 것 하나 살아남지 않은 동떨어짐으로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세계화된 거리 인사동, 그곳 스타벅스 매장 간판은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쓰여져 있었다. [스 타 벅 스 커 피] 라고 말이다. 전통을 고수하려는 그 피맺힌 절규와 숭고함에 하마터면 눈물이 날뻔했다.

인사동을 끼고 있었던 피막골은 도심정비 사업때문인지 정리중이었고, 창경궁부터 시작해서 인사동 윗길을 지나 광화문으로 이르는 고즈넉한 그 길도 공사중이었다. 광화문 사거리는 무슨 광장을 조성한다는 팻말이 크게 붙어있었는데 머지 않아 완공된다고 한다. 지금쯤이면 완성이 되었으려나. 광화문광장 조성공사를 보며 광장 콤플렉스에 걸려있는 현 정권의 마스터베이션 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은 왜일까? 이렇듯 내가 살짝 돌아본 서울은 온통 파헤쳐져 있었다. 도시전체는 뉴타운 열풍으로, 대학은 경쟁력 있는 대학을 모토로, 거리 거리는 세계화된 도시에 걸맞게 요소요소에 스타벅스와 멀티플렉스 극장을 배치시키며 발빠르게 공사중이거나 그 변신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서울을 돌아보고 난 제주도로 내려갔다. 부모님이 그 섬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제주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3학년이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왔다. 30년 만에 찾은 제주도 역시 변해 있었다. 관광코스를 개발하고, 해안을 따라 도로를 조성하며, 한라산 산간에 골프장을 건설하여 관광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야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도심은 30년 전과 비교 할 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지 2학년이었는지 확실히 기억은 안 나는데, 김청기 감독의 ‘로버트 태권 V’를 보러 갔던 극장이 여전히 남루한 채 보존되어 있었다. 그날 ‘로보트 태권 V’를 보고 하늘을 날아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표준전과와 동아전과를 사러 갔던 동네 어귀 ‘남문서점’도 그대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자식들에게 표준전과나 동아전과 한 권 사주는 것으로 부모님들의 1년 사교육비 지출이 끝이 났던 말도 안 되는 세상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저녁 먹고 나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했었는데, 술래가 손등에 이마를 대고 주문을 외우던 건물 대문 위엔 ‘제주소방공사’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그 곳은 아직도 영업중이었다. 아버지에게 ‘제주소방공사’ 끝에 붙어있는 ‘공사’가 ‘한국방송공사’ 끝에 붙어 있는 ‘공사’와 같은 것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뭐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웠다.

아버지가 나를 가끔 데리고 갔었던 다방이 도심 한가운데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친구분과 계란이 떠 있는 쌍화차나 다방커피를 드셨고, 내게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시켜주셨다. 난 그곳에 있었던 커다란 어항 속 금붕어 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여행 기간 중 밤길 제주를 걷다가 발견한 불이 켜져 있는 30년 전 그 다방의 간판이 왜 그리도 나의 마음을 환하게 하던지. 다음날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거리의 몰락, 기억의 종말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조국의 무엇이 달라진걸까?  2년 만에, 아니 미국으로 유학간 지 5년 만에 찾은 서울의 무엇이 달라진걸까?  거리가 달라졌다. 동네가 변해 있었다. 정권이 바뀐 것 보다 내가 놀던 동네와 내가 활보했던 거리가 달라졌다는 것이 내게는 더 어색했다. 무작정 ‘그때 그 거리를 기억하십니까? 그때가 좋았죠’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 큰 거리로 나가야 하고, 더 큰 세상으로 진출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씁쓸한걸까?

거리와 동네가 사라지고 달라진다는 것은 이름이 없어지고 기억이 상실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제 예전 거리의 이름과 옛날 동네어귀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회상하는 것에 대해 낯설어하고 불편해한다. 그곳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미끄러져 들어가 앉은 피막골에서 가뿐 숨을 몰아 그날의 전과를 과장하며 마시던 막걸리와 석쇠 위에서 구워지던 고갈비를 이제는 그 거리에서 먹을 수 없다.

인사동의 혹은 신촌의 어느 선술집에서 김광석이나 해바라기가 불렀던 노래들을 낮게 읊조리는데, 한 친구가 ‘지금이 그런 사랑타령이나 하는 노래를 부를때냐? 너 같은 뿌띠 부르조아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며 나를 몰아친다. 나도 열 받아 ‘변혁에 참여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면 안 돼냐구. 혁명이 식어버린 심장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면 난 기꺼이 빠지겠다’며 고래고래 티격태격 각자의 진정성을 알아달라고 우겨대던 철없고 유치했던 그 시절! 그때의 거리와 그 당시 동네가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서 함께 놀던 사람들까지도. 그래서 불안하다.

혹시, MB가 민중들이 지니는 기억의 매커니즘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마다 4월과 5월 그리고 6월이 되면, 거리와 광장에서 출렁이며 메아리 쳐졌던 민중들의 율동과 함성 안에 감추어져 있는 봉기의 기억과 그 기억의 반복이라는 매커니즘을 말이다. 그것이 지니는 파괴력을 성실히 학습한 후 그것에 대처하는 자세를 MB가 이미 터득한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가 우선적으로 민중들이 지닌 기억의 연쇄고리를 하나씩 절단하기로 작정을 했고, 그 잘려나간 지면을 잘 다지고 정리하여 새로운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새롭게 조성된 광장과 거리에서 제한적으로 뛰어 놀게 하고, 폼 나게 단장된 동네에서 세계시민이 되어 촌티내지 말고 세련되게 그 문화를 향유하라고 다독이고 있다면 말이다.

다시 보자, MB!

점점 발전하는 터미네이터나 에어리언처럼 MB정권은 많은 실험과 시행착오와 학습을 거쳐 이제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트랜스포머와 같이 진화한 정권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한국 방문 기간 내내 스멀스멀 올라와 기분이 엿 같았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MB 정권을 향해 실소와 비웃음, 격멸에 찬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한 달 가까이 그가 다스리는 땅을 밟으면서 그의 진정성을 느끼며 그가 결코 호락 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깨닫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원칙과 소신을 강조했는데, MB는 노무현보다 훨씬 더 자신의 원칙과 소신에 철저하다. 노무현이 걸어갔던 정치·문화적 행보와 경제적 측면간의 행보가 갈지자였다면, MB는 정치, 경제, 문화적 정책 어느 것 하나 흔들림 없이 수미일관 하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전혀 동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MB는 노무현 보다 훨씬 더 자신의 원칙과 소신에 철저하다. 무엇보다 이 정권이 악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깨우고 부추긴다는 점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뱀과 같다. 우리의 ‘이드’와 우리 ‘에고’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MB에게, 당신의 리비도에 충실해도 괜찮다고 국가가 그것을 보장하겠다고, 그러니 당신의 욕구를 구태여 ‘슈퍼 에고’를 작동하여 다스리려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해주는 MB의 속삭임 앞에 우리가 모두 못 이기는 척하면서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우리를 멈춰 서게 했고 모이게 했던 ‘민주’와 ‘통일’, 우리를 춤추게 하고 고함지르게 했던 ‘평등’과 ‘인권’, 우리를 울게 하고 웃게 했던 ‘정의’와 ‘자유’라는 강력한 ‘슈퍼 에고’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 하나하나의 기억이 서려있는 우리의 거리와 광장과 동네를 MB가 집요하게 파헤치고 뒤엎어 고쳐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사들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욕망의 눈덩이를 끊임없이 증폭시켜야 한다는 압박이 MB정권을 유령처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뉴타운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어 사람들의 ‘이드’을 한껏 부풀리고, ‘영어공교육’이다 ‘특목고’다 하면서 자식들을 볼모로 부모로서의 ‘에고’에 어떻게 하면 충실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차라리 표준전과와 동아전과 하나로 자녀교육이 모두 해결되던 우리 부모 세대가 더 행복했는지 모르겠다). 세계화된 경제시스템 아래에서 전통적인 고용정책과 경제운영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기업마다 구조조정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면서 노동시장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경제가 살아난다. 그러니 언제 잘릴지 모른다. 미리미리 자기 앞길, 자기 밥벌이 잘 챙기고 미래를 위해 긴 안목으로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잠시 한눈 팔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러니 열심히 뺑이쳐라. 그래야 살아남는다. 명심하란다. 그것이 이 시대의 정언명법임을.

에필로그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악몽에서 깨어난 느낌이다. 이명박이 다스리는 땅에 내가 없다는 안도감과 이명박이 다스리는 땅을 내가 떠나있다는 면목없음이 널을 뛰는 요즘이다. 몇 년후 내가 돌아갈 때쯤이면 서울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로보트 태권 V’는 지구를 잘 지키고 있을까? 제주에 있는 ‘남문서점’과 ‘제주소방공사’는 무사할까? 우리가 정말 대단한 놈을 만난 것일까? 별것 아닌데 내가 너무 오바하나? 어쨌든…

두 눈 똑바로 뜨자.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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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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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양
    2009.09.08 14:4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거리의 목락" "기억의 상실" 대단히 묵직한 화두입니다. 이번 한국 방문이 아마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정신이나 이념보다는 물질적 풍요를 위해 내 달리는 한국의 현실을 꿰뚫는 화두인 것 같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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