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기록-기획과 윤리적 삶


김수한
(출판편집자)


누군가에게서 혹은 어떤 매체에서 듣고 읽은 정보만으로 시사 사안을 파악하거나 평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때, 문득 이야기 속 인물과 듣는 이에게,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긴장되고 열쩍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내가 그 상황을 살지 않아서? 맥락과 사태의 전개를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삶을 뒤적거리는 일은 독한 짓이다. 더군다나 팩트를 왜곡하여 강변하는 ‘제 잇속이 꽉찬’ 언어는 몹쓸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사실을 구하고 사정을 살피는 글쓰기를 찾아 책으로 엮자는 생각으로 두리번거리는 일을 하고 있다. 앞서 말한 ‘주체 넘은’ 느낌으로 벌써부터 겸연쩍지만, 하는 일과 시사를 엮어 써보라는 주문에 단상들을 짜깁기해본다. 

칠레의 광부들 33명이 무너진 광산의 지하 수백 미터 대피소에서 69일간 함께 생존하다 무사히 전원 구출되었다. 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쁜 소식이 지난주 내내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 넘쳤다. 광부들의 생존이 확인된 뒤부터 구출을 위한 칠레 정부의 움직임과 생존자들의 심신을 보살필 목적으로 제공된 여러 서비스에 대한 기사를 연이어 접했다. 구출 예상일을 두 달 정도 앞당긴 굴착 기술과 광부들을 태우고 끌어올릴 구출 키트의 구조에 대한 기사가 봇물이더니 드디어 주인공들이 차례대로 지상에 출현하였다. 칠레 정부와 과학기술의 성가, 우애와 리더십 예찬, 전 세계의 성원과 인생 역전 등 공적인 사연은 넘치나, 극한의 상황을 광부 개인과 동료들이 어떻게 참고 견뎌냈는지를 질문하고 증언하는 사적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어떤 매체가 전하기로는 이 ‘숭고한 사건’을 영화화하고 책을 만들기로 계약한 광부들과 기획사가 인터뷰 방식과 내용에 대한 사전 협의와 연습을 했기에 개인의 이야기는 접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물론 끔찍한 경험을 한 당사자의 실존적인 함구의 경우는 탓할 수 없으나, 앞서 추측성 보도대로 조직적 차원의 관리라면 아쉽고 불편하다. 서른세 명이 겪은 기억을 한 권의 기록으로 정리하는 기획에서 조정되고 삭제되고 부각될 언어가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기억일까? 천안함 사건의 병사들처럼 칠레 광부들에게는 개인적 기록이 없을 것인가? 아마도 이 기획은 <슈퍼스타K>만큼의 호응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기억-기록-기획’이라는 편집 행위의 논리와 정치성에 대한 엉성한 질문을 지난 10월 8일 열린 ‘2010 인문주간 <기억과 윤리적 삶> 세미나’를 기웃거리면서도 생각해보았다. ‘지역 아카이브, 민중 스스로의 기억과 삶을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행사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기억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주류 공식 역사 기술에 기록되지 않은 지역민들의 삶의 기억과 생활의 자취를 이미지(사진 ․ 영상)와 글(구술 ․ 출판)로 기록해온 네 곳의 아카이브 활동 현황을 퍼뜨리고 진단하는 자리였다. 재개발 움직임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주민들의 노력으로 작은 마을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대구시 삼덕동 사람들, 생태적 농촌공동체의 대안적 모델로 꼽히는 충남 홍성군 홍동, 산업도시 인천을 고향으로 기억하며 개인사와 도시공간을 기록 전시한 한 인천토박이, 2001년 용담댐 건설로 사라진 고향을 기억하고 기록한 전북 진안의 수몰 지역 이주민들. 이 네 동네 사람들의 구체적인 기억과 자발적 기록은 생활의 보편성과 장소의 역사성을 드러내면서 삶의 지속성과 지역공동체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기억-성찰하고 기록할 때 조금씩 갖추게 되는 윤리적 태도(가령,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가’라는 한 말씀)가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삶의 양식으로 풍부해지는 것. 개인의 이야기와 공적인 서사가 서로 스미고 짜여 입체적으로 삶의 기쁨과 슬픔을 드러낼 때의 총체성. 그런 윤리적 감각으로 사람의 문양(人文)을 기록하는 일이 바로 인문학의 의미가 아닐까?

그런 기획이 튼실하게 구현된 사례를 소개한다. 이 행사를 공동 기획한 이경민 씨는 지난 2008년 광주항쟁 28주년을 기념하여 5·18기념재단이 주최한 ‘오월의 사진첩’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이 전시는 『오월의 사진첩』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이 ‘문제적인’ 전시는 5·18 희생자 10명과 5·18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생존자 8명 등, 모두 18명의 개인 사진첩에서 골라낸 기념사진으로 구성되었다. 5·18이라는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잠시 만나 운명적 삶을 함께 했던 서로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개인사를 마주하는 것. 추억의 기념사진 속에는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졌던 ‘개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다양한 신분 ․ 직업 ․ 나이 ․ 성별로 구별되는 그들의 평범한 통과의례를 담은 생애사에서 ‘나와 같음’을 발견하고서 우리는 새롭게 5·18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술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광주’를 다시금 찾게 된다.

며칠 전부터 거리에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센서스)’를 알리는 홍보물이 나붙었다. 센서스를 알리는 광고의 카피 ‘내일을 준비하는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에서 대한민국은 누구인가. 이 호명은 왜 서늘한 느낌을 주는가? 기억하지 않고 통계 내려 하는 기관처럼 굴지 않고서, 이 땅과 사람의 처지를 기억하고 헤아리는 우리 곁의 ‘윤리적 삶들’을 만나 그 노하우를 듣고 싶다. 그때는 삶의 느낌이 덜 멋쩍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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