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혀
- 공정사회 비판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8절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의 어느 때쯤, 자기가 ‘야고보’라고 주장하는 이는 세계 각처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향해 글을 씁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주의 형제이자 예루살렘 예수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문서의 저자가 그 인물 자신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우선 30년대에 청년이었던 사람과 시차가 너무 큽니다. 그리고 이 문서의 저자는 헬라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고, 유대주의보다는 지중해권의 대도시 문화에 보다 익숙한 사람입니다. 물론 이 문서 속에는 야고보의 그림자가 도처에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오늘 우리는 실존인물 야고보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기에 이 문서에서 그의 체취가 얼마나 배어있을지에 대해서 더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저자가 주의 형제 야고보와 관련이 있든 없든, 이 문서는 독자적인 그리스도 공동체인 교회가 어느 정도 제도화된 상황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보는 주의 교회들은 부자에게 공동체의 관심과 신의 축복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반세기 전, 아직 주의 교회가 유대교로부터 독립된 공동체가 아닌 때에 바울이 관여했던 공동체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격차는 훨씬 더 큰 듯합니다. 요컨대 바울 당대에 부자는 도시에 집을 가지고 있는 정도인 듯한데, 「야고보서」에서는 시골에 소작을 준 꽤 큰 땅이 있는 부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4인 가족이 빠듯하게 살며 경작할만한 소작지가 대략3천 평 정도라고 하니, ‘착취당한 일꾼들의 아우성 소리’(5,4)라는 표현은 최소한 수만 평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다수 있었다는 뜻일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50년 전의 바울과 대조되는 주장이 이 문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적 신학이 그의 선교관을 넘어서, 하나의 교회의 신학으로 정착되고 있던 상황에서, 그것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면서 주류의 교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교회관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건이 바로 이 문서가 아닐까 합니다.

첫째로, 양자는 모두 부자와 가난한 자의 화해를 강조하지만, 바울은 양자의 화해를 위해 ‘사랑의 가부장주의’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즉 서로를 사랑으로 배려하는, 하지만 위계질서 자체는 문제시하지 않는 방식의 화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아마도 종말론적 급진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에 오히려 그는 그 때가 올 때까지 급진적 모험주의를 자제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면 「야고보서」는 ‘수평적 연대’를 강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의 역전이 필요합니다. 하여 그는 역전의 수사를 도처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천한 신도는 자기의 처지가 높아짐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부자는 자기의 처지가 낮아짐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1,9~10)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2,5)

바울의 현상주의는 부자들을 향하여 ‘배려의 윤리’를 강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야고보의 변혁의 이상은 가난한 자들의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 가능성을 도모합니다. 즉 약자들이 수동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향해, 부자를 향해,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하는 새로운 공동체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차이는,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바울의 믿음론에 대해 이 문서는 실천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아스포라 회당의 유대주의와 율법관이 주변부 대중을 이방인화하는 배제의 신학적 메커니즘임을 비판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짐을 상징하는 언표로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의 문제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율법에 대한 해체의 언술이며, 스스로는 비어있는 말, ‘공백의 기표’인 것입니다. 개념화할 수 없는 말, 개념화를 거부하는 말이지요.

이것은 훌륭한 신학적 성과이지만, 바울 자신도 그 공백의 기표를 더 해명해야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대에 갈수록 이 공백의 기표는 ‘채움의 기표’로 전환됩니다. ‘그것은 이런 것’이라고......

이제 믿음은 ‘새로운 율법’이 됩니다. 특히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적 윤리를 수행하는 것이 된 것이지요. 예전(禮典)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규율에 순종하는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이 비어 있는 기표인 믿음의 의미로 채워진 것입니다.

한데 그럴수록, 의미가 단단히 규정될수록 믿음은 다른 것들을 가리는 언어가 됩니다. 가령, 믿음의 자녀들 사이의 계층적 차이와 그들 사이의 현실적 삶의 갈등 같은 것은 가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 보는 그러한 현실의 갈등에 대한 무심함은 바로 이런 이유 탓이지요.

「야고보서」는 바로 이 점을 먼저 각인한 문서인 듯합니다. 저자는 믿음은 실천을 통해야만 살아있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이때 믿음은, 위에서 본 것처럼,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교회적 윤리에만 몰두한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실천은 이 문서가 내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갈등을 넘어서려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 문서의 이와 같은 문제제기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혀의 주체는, 저자 자신과 같은 존재, 곧 ‘교사’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지식인 같은 자입니다. 지식인의 ‘길들여지지 않은 혀’는 지식이라는 권력자원을 가지고 군림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여 그것은 “세속적이고 육욕적이며 악마적인 지혜”입니다.(3,15) 

부자가 화폐라는 자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라면, 지식인은 지식, 곧 혀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특히 저자는 무엇보다도 이 길들여지지 않은 혀를 강조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8.15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공정’이라는 단어를 무려 10회나 사용했습니다. ‘공정한 사회’라는 말을 새로운 국정의 아젠다로 제시한 것입니다. 이때 ‘공정사회’란, 대통령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분야에 기회를 균등하게 주자는 것이고, 그 ... 결과에 대해선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사회입니다.

그 직후 터져 나온 외교부 장관 딸의 특채비리, 그이고 연이은 유사사건들은 우리사회가 그 핵심부에서부터 대통령이 말한 공정사회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당사자들은 이런저런 변명으로 정당화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길들여지지 않은 혀의 저주’는 그들을 더욱 옥죄었습니다.

그러니 대통령의 공정사회 주장은 한편에선 공허한 소리 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뼈를 깎으면서까지 제기되어야 할 꼭 필요한 의제임에 분명해졌습니다. 어찌 보면 MB 정부가 그토록 거리두기 하려고 애썼음에도 결국 참여정부가 강조한 ‘특권 없는 사회’론으로 돌아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MB 정부가 집권 직전부터 강조한 ‘선진화’ 주장이 긴 우회로를 지나 이렇게 도달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집권 직후,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뭐든 이전 정부의 것을 청산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 결과, 일종의 무뢰배정치 같은 방식으로 밀어붙여댔다가, 우여곡절을 격은 뒤 이제야 ‘선진화’의 내용을 이렇게 채워가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저는 MB 정부 집권 직전 ‘선진화론’이 나올 때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저들의 주장을 예의 주시해 왔습니다. 필경 이 정부 내에는 선진화론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그들은 한국 보수주의 정치를 미학화하는 주역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보수주의가 미학화되면 보수적 가치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제도화할 수 있는 동력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진보정치는 더욱 어렵게 되겠지요.

공정사회론은 아직 대중으로부터 깊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그 주장 자체가 문제여서가 아니라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공정사회 주장 자체는 새로운 국정 아젠다로서 충분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청와대 참모진이 그 연설문을 가지고 한 달 가량 20회 가까운 토론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니 이 의제는 용의주도하게 기획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혀’처럼 쉽게 드러나는 권력비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이전보다 더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정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데 공정사회론이 주장하는 가난해도 공부할 기회를 공정하게 얻을 수 있고 아프면 진료를 차별 없이 받는 사회는 가난한 이가 왜 주어진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지, 왜 여전히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되는지에 대한 검토가 없습니다. 가난은 단지 가진 것이 없는 현상만이 아니라 ‘무력함’을 동반하기에 동등한 기회만으로 공정성, 곧 정의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하여, 「야고보서」가 하듯이 약자의 자존성 회복에 관한 담론적, 제도적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화려한 수사는 단지 ‘길들여진 혀’의 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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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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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준혁아범
    2010.09.28 10:5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늘 신앙과 정치상황을 빗대어 그것이 분리될 것이 아니라

    곧 해결해야하는 문제의 장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단순히 대통령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한번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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