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묵시록 2 - 청교도에 관하여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미국이 민족적인 동일성이나 지형적인 특수성에 기초하지 않고 이념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익숙한 사실이다. 그 이념을 자유나 평등과 같은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만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 저변에는 선택받았고, 다르다는 자의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목적이나 의도성이 없는 선택은 없다. 여기 연재되는 글에선 그 목적과 의도를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종말론적인 사명을 미국의 무의식의 일부로 또 아직도 진행 중인 미국의 세계적 역사의 일부로 이해한다. 이번 호에선 청교도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코튼 매더는 여기서 일부 다루고 그의 종말론은 다음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말론과 함께 더 서술할 예정이다)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


    내가 교수로 있는 시카고 신학대학이 3년 전 지금의 건물로 이사 오기 전까지 한 백년 가까이 쓰던 건물에 특이한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일층 내부의 벽에 돌출되어 있는 작은 돌조각이었다. 바로 위엔 그 돌이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의 일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나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그 옆을 지나 다녔지만 그 의미와 상징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큰 것이었다. 플리머스 바위란 1620년 청교도들이 (엄밀히 말하자면 청교도들과는 견해가 약간 달랐던 필그림Pilgrim들이었지만 큰 맥락에서 청교도라 쓴다) 배에서 내릴 때 첫발을 디뎠다는 바위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바위에 불과했지만 반석 위에 세워진 미국의 정신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언약을 상징하는 징표로 이해되어 온 미국역사에서 더 없이 중요한 유물이다. 어떻게 그 역사적 바위의 한 조각이 1855년에 설립된 시카고의 한 신학대학 건물의 내벽에 부착되게 되었는지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광야와 같이 무질서하던 19세기 중반 시카고에 신학교를 처음 세우며 플리머스 바위와 같은 반석이 되라는 뜻이 담겨있는 건 분명한데, 그 바위조각의 출처를 아는 사람은 없다. 당시 신문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플리머스 바위조각을 신학교에서 소장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당시 시카고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학교의 입장은 플리머스 바위가 해안가에서 최종 이전되기 전 개인적으로 바위를 깨서 기념품으로 보관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학교에서 소장하게 된 조각도 그렇게 사적으로 보관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황당한 사기극에 휘말린 거라 믿는 사람도 많았다.  


<Plymouth Rock>


    그 바위조각의 진위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플리머스 바위라고 하는 미국 사람들 마음속의 ‘만세반석’이 실제로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그런 바위가 아예 없었다는 게 상식적인 이해이고, 그렇다면 시카고 신학대학의 바위조각은 ‘실제적이지 않은 플리머스 바위의 비실제적인 조각’이 된다. 20세기 후반 사람들이 영광스런 플리머스 바위 옆을 무심코 지나쳤던 이유는 플리머스 바위의 신화 즉 미국이 신의 섭리를 토대로 시작되었다는 신화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광과 섭리의 신화가 미국역사에서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때 플리머스 바위가 맡았던 역할은 - 다음에 더 서술할 기회가 있겠지만 -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이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내면서 절대적 상징으로 등장한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가 맡고 있다. 


    그렇다면 플리머스 바위에 대한 신화는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사명을 안고 신대륙에 도착한 영국의 선민들의 첫 발자국이 어린 바위가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보다 120년이 지난 후 대각성이란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당시 94세의 연로한 토머스 파운스Thomas Faunce 장로는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들려 플리머스 해안가로 향했다. 거기서 미국의 정신과 신앙의 토대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바위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파운스 장로의 증언 외에 플리머스 바위의 진실을 밝혀줄 증거는 없었지만, 그 바위의 진실은 결국 믿음이었기 때문에 당시 별 의심 없이 미국의 신앙과 정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파운스 장로가 그런 증언을 하게 된 동기다. 유력한 설은 영적인 각성을 요구하는 부흥운동이 감정주의로 치우치고 기존 교회공동체들과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청교도 교회의 제도와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그가 어렸을 때 들은 플리머스 바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 1세대들은 자신들이 반석 위에 내린 게 아니라 거칠고 마귀들이 들끓는 광야에 착륙한 것으로 이해했다. 파운스 장로의 해석은 청교도들의 역사가 끝나가는 시대, 거친 광야가 개척지로 변하고, 신대륙이 신앙의 실험장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로 변모해가는 시대에 가능했던 수정주의적인 역사이해에 속한다.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청교도들에게 아메리카란 개념은 없었다. 단지 새로운 땅이 있었고 그 위에 종교개혁을 완성시키고 새로운 에덴동산과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자는 신화적 상상력과 믿음이 있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후 아메리카라는 개념이 국가적인 정체성을 수반하길 요구받고 있을 때 광야가 아니라 반석의 신화가 필요했고, 따라서 플리머스 바위는 그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할 수 있다. 


한국과 청교도 그리고 천로역정


    한국의 기독교를 미국 청교도들의 신앙과 연관 지어 이를 책에 소개한 사람은 아더 브라운 (Arthur Judson Brown, 1856–1963)이 처음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해외선교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고, 초기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관여했던 인물로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선교정책을 주장했던 목사였다. 선교지의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서구중심의 우월의식에서 벗어난 선교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급격한 교회성장으로 주목받던 한국의 선교현장을 돌아보고 극동의 정세와 한국의 선교 상황을 다룬 책 <The Mastery of the Far East>1919년에 출간했다. 한국의 미국선교사들이 청교도적인 성향을 지녔고 한국의 교인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는 그의 유명한 분석이 그 책에서 나온다. 브라운은 구체적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오래 전 청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고, 춤이나 담배 또는 카드놀이를 죄악이라 생각했고,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전천년주의적인 믿음을 진리라 여겼고,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을 위험한 이단이라 간주했다고 지적했다. 이 내용은 이후 한국 개신교의 특성을 설명하는 글에서 자주 인용이 되어왔다. 그런 부류의 글에서 또 흔히 듣게 되는 건 한국교회 신앙의 뿌리를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찾아야 하고, 그 신앙을 본받고 회복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에서 청교도들에 대한 평가는 일방적이거나 단순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극적으로 대립되는 평가는 아직도 존재한다. 청교도적이라 했던 미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에 대한 브라운의 평가도 앞서 언급한 내용만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최근 청교도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흔히 듣게 되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청교도들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인 면이 많았다. 청교도들의 유산을 극복의 대상으로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청교주의는 신정일치를 내세우는 권위와 독선을 연상시켰고, 다른 신앙의 노선을 이단이라 탄압하는 삐뚤어진 정통주의를 떠올리게 했다. 청교도들이 강조한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 이해는 역으로 유니테리언(Unitarian)이라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동기가 되었고, 에머슨의 미국적인 학문은 청교도들의 인간이해를 부정하면서부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청교도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기까지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청교주의를 비판한 소설 <주홍글씨>의 작가 나다니엘 호손이었다. 한때 에머슨과 소로우와 함께 콩코드에서 살기도 했던 호손의 고향은 매사추세츠 주 살렘이라는 동네였다. 청교도 역사의 큰 오점으로 남아있는 살렘의 마녀재판이 있었던 바로 그곳이다. 호손은 뒤늦게 그 재판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요술 부리는 마녀로 낙인찍어 죽음의 형벌을 내렸던 판사가 자신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환멸을 느껴 자신의 성까지 Hathorne에서 Hawthorne으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호손은 <주홍글씨>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작품에서 청교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19세기 중반이후 미국인들이 청교도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데 크게 기여했다. 20세기 중반 미국에 매카시즘의 바람이 불어 양심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 당대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아더 밀러Arthur Miller는 이를 청교도 마녀재판과 비교한 희곡 <시련The Crucible>을 써서 마치 청교주의가 매카시즘의 원조였다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호손이 살았던 시대 청교도들에 대해 매우 다른 생각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란 고전적인 책을 쓴 불란서 사람 알렉시스 토크빌이었다. 그에게 청교도들은 종교적 실험을 하러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실천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토크빌은 교회의 권력만이 아니라 국가의 권력까지도 분산시키고,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대의 정치제도를 실현한 것은 청교도들의 목적이 부의 축적이 아니라 자유의 실천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파악했다. 토크빌은 그 자유의 개념, 더 나아가 개인적 자유의 개념까지도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출발한 것으로 신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믿었고, 미국의 역사적 운명이 이미 청교도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란 의미심장한 분석까지 했다. 미국을 잠시 다녀간 사람의 관찰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통찰력 있는 분석임에 틀림없다. 호손과 토크빌의 차이를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다. 토크빌은 미국의 제도를 설명하고자 했고 호손은 미국에서의 삶의 경험을 얘기하고자 했다. 민주주의의 자유가 토크빌의 주제였다면 호손의 주제는 종교의 억압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유산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달랐고, 그 엇갈린 평가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시 브라운으로 돌아가보자. 브라운의 책에서 ‘청교도’라는 낱말은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 선교사들의 성향을 설명하는 용도로 쓰였을 뿐, 더 큰 비교나 분석을 의도하지는 않은 것이다. 또 그가 청교도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청교도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안 드러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책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브라운은 일본교회에 비교해 선교사들의 신앙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의 책은 극동지역에서 일본의 패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기독교에 대해 편향된 입장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한국교회에 대한 그의 진단은 지금 읽어도 매우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그는 한국교회는 왜 자율적이지 못한지 물었고, 어떻게 당시의 선교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록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가 한국을 중국과 일본에 비교해가며 내세운 이유들은 그다지 한국교인들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브라운에게 분명했던 것은 여러 이유로 한국인들의 마음속엔 선교사들의 복음의 씨앗을 받아드릴 기름진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브라운은 이것을 청교도 시대의 정서를 떠올리는 표현을 써가며 비유했다. 한국은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국 서부의 초원과 같았고, 반면에 중국은 뉴잉글랜드 해안의 바위 숲으로 비유했다. 한국의 교회는 준비된 심성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세계 어느 곳보다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주일성수와 전도에 대한 열정이 높은 교회를 만들었지만 그가 보기에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교리적 경직성이 문제였고, 신학적 입장은 달라도 복음에 대한 열정은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브라운은 그 이유를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의 청교도적인 신앙을 재생산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한국의 기독교는 다음 세상에만 관심이 있을 뿐, 복음을 사회변화에 적용시키지 못했다. 타락한 이 세상을 이 ‘세대’에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몰락할 세상을 증거하고 선택받은 교인들을 모아 예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브라운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교육과 질병치유 등 사회구제를 위한 노력을 했지만 큰 맥락에서 볼 때 개인 중심적이고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브라운이 청교도적인 신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면, 그 입장은 20세기 초반 미국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청교도적’(Puritanical)이라는 표현은 지금도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이지 않는다. 청교도 신앙을 ‘재생산’한 당시의 한국교회가 종말론에 치우쳐 있다는 그의 진단은 지금 들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브라운은 한국교회의 그런 신앙을 <천로역정>과 비교해 설명했다. 하지만 망해가는 이 세상을 버리고 천국의 도시를 찾아나서는 고행의 길을 우화로 그려낸 천로역정을 한국교회가 사실적인 묘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 않는지 우려했다. 브라운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게일 선교사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었고, 선교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외선교의 동반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도. 실제로 미국의 해외 선교지에선 <천로역정>이 성경 다음으로 번역되어야 할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브라운이 <천로역정>을 한국교회와 연결해 그만한 언급이라도 한 것은, 그가 그 책의 청교도적이고 종말론적인 배경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번연은 영국의 청교도였고 <천로역정>은 청교주의의 천년주의 사상에 기초해 쓰인 책이었다. 번연의 천년주의와 종말론 사상은 그의 다른 저작 <적그리스도>나 <거룩한 전쟁>을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천로역정>만으로도 충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서양 근대의 역사에서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책이 바로 <천로역정>이었다. 문체는 단순하고 철학적인 논리는 빈약할지 몰라도 세상에 미친 영향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이나 홉스의 정치학보다도 컸다. 이런 대조가 가능한 이유는 <천로역정>이 뛰어난 문학작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라고 할 만한 세상에 대한 의도성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로역정>의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영향력은 20세기에 와서 사라졌다. 최근엔 꿈과 우화와 풍자를 가르치는 영문학의 교재로, 때로는 문학 연구논문의 텍스트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을 제외하고 서구역사에서 그 책만큼 오랜 기간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내고 도덕의식과 종교의식을 형성한 작품은 없었다. 서구에서의 영향력이 사라지던 20세기 초 <천로역정>은 한글로 번역되어 새로운 땅에서 종말론적 개종과 회개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느낀다.  


    한국기독교에서 <천로역정>을 읽고 그 감동으로 회심과 개종을 하게 된 사람으로 흔히 길선주 목사를 떠올리게 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궁금해진다. 동양의 종교와 사상에 뛰어난 학식을 갖췄다는 학자가 <천로역정>을 읽고 무엇을 느꼈을까? 어찌 보면 삽화가 실린 그림책에 불과했던 책 한 권을 읽고 기독교의 어떤 진리를 만나게 되었을까? <천로역정>과 같은 기독교 고전의 영향력은 이미 증명이 된 것이지만, 그 책의 내용이 종말론적 세상인식이라는 독특한 신학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만은 지적해야 한다. 17세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그 책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었고, 바로 그들 자신이 망해가는 세상을 버리고 고난 속에 천국의 도시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 크리스천이라 생각했다. 몰락하는 유럽을 떠나 새로운 예루살렘을 신대륙에서 건설해 역사를 완성하자는 묵시적 관점에서 그 책을 이해했다. 크리스천이 거칠고 황량한 세상을 지나 도달하는 낙원을 청교도들은 천년왕국으로 이해했다. 이 책의 특징은 구원을 세례나 회심과 연결시켜 이해하지 않고 끝없는 광야에서 한걸음 씩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과정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낙원이라는 미래의 목적이 설정되어 있지만, 신앙의 삶은 광야에서의 순례였다. 모든 순례는 길 위에서 걷는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다. ‘길 위에서’라는 로드의 모티브는 이미 <천로역정>에서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청교도들은 광야에서 예루살렘을 꿈꾸었지만, 광야에서의 삶이 갖는 영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천로역정>이 길선주 목사에게 미친 영향은 그의 신학사상에서 읽을 수 있다. 길선주 목사는 계시록을 만 번이나 읽었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묵시적 종말론에 심취해 있었다. 말세를 연구해 풀이해 <말세학>이란 책도 썼고, 그 내용을 도표로 만든 ‘말세도’를 펼치고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길선주 목사가 20세기에 수용한 종말론은 번연보다 더 신학적으로 투철한 것이었다. 번연은 자신의 신앙의 비전을 풀어내는데 급급했다면, 길선주의 종말론적 신학은 당시 성행했던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에 기초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천년설이 옳음을 증명하는 건 그에게 매우 중요했다.


청교도들의 종말론


    큰 의미에서 서구의 근대를 만든 사상은 합리주의가 아니었고 계몽이나 이성의 사상도 아니었다. 미셸 푸코가 비슷한 생각으로 한때 근대 내면의 긴장성을 이성과 광기로 대립으로 표현했지만, 나에게 광기보다는 ‘묵시’란 개념이 더 큰 함축성을 지닌다. 근대가 자유를 향한 시간의 행진이었다면 그 자유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상태, 종국에는 역사와 시간의 가능성을 끝낼 종말 앞에 열린 상태의 자유까지를 말한다. 시간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자유까지도 포함한다. 근대의 역사에서 그 자유에 대한 상상을 떠맡은 건 묵시적 종말론이었다. 청교도들은 그 자유를 종교개혁의 완성과 연결 지어 생각했다. 자유가 종말론적인 차원을 지닌다면, 종교개혁의 완성은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들의 신앙 속에서 허용된 종말론적 사건은 적그리스도와의 전쟁, 재림 예수의 심판과 최후의 심판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이런 종말의 사건들을 준비하는 단계로 성서의 예언을 이루어낼 새로운 이상의 도시, 새로운 에덴 또는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었다. 그들의 종말사상은 16-17세기 영국의 치열한 정치와 종교적 갈등과 전쟁 속에서 탄생한 종말의 신앙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 신앙은 이후 미국을 통해 종교적 신념을 넘어 근대적 삶의 자세로 또는 세계관으로 포장되어 전해지고 있다.


   청교도들의 신앙이나 신학을 생각하면서 종말론을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겠으나, 그 이상 그들의 세계관을 설명해주는 개념은 없다. 그들에게 가톨릭교회는 마귀의 세력이었고, 이제 영국의 교회까지도 마귀의 세력에 함몰되었다는 인식은 절박한 것이었다. 마귀와의 싸움은 예수의 재림과 심판에 앞서 벌어질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살렘의 마녀재판의 배경에는 요술을 부리는 마녀들의 활동을 종말의 징조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응징을 재림 전에 있을 묵시적 전쟁의 수순으로 보는 시각도 분명히 있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예수 재림의 시기를 예언하는 천년설들이 구분하지 않았다.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또는 이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전천년설 또는 후천년설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개념이었고 무천년설은 그보다도 더 늦은 20세기의 개념이었다, 청교도들이 주로 전천년설을 믿었고, 청교도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즈가 후천년설을 처음 믿기 시작했다는 분석은 후대의 계산적인 평가일 뿐이다. 당시에는 환란과 심판과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만 혼재되어 있었고, 자신들의 생각을 이론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다음 기회에 다루겠지만 청교도들의 종말론적 사명의식은 ‘부름 받아 나섰다’는 선민사상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선민사상은 미국의 역사에서 세상을 이끌고 구해내야 한다는 메시아적 사명으로 드러난다.


코튼 매더 (Cotton Mather)


    시카고 북쪽에 Mather High School이라는 공립 고등학교가 있다. 예전엔 그 주변에 한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 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여럿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들은 기억도 없는데 나는 오랜 세월 그 매더(Mather)라는 인물이 17세기 미국의 청교도 목사였던 코튼 매더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 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준 기억이 있는 나를 행복한 무지에서 깨워준 건 인터넷이었다. 알고 보니 그 고등학교는 코튼 매더가 아니라 20세기 초에 살았던 그의 먼 후손으로 스티븐 매더(Stephen Mather)의 이름을 따서 세운 학교였다. 그나마 같은 집안의 인물이라 아주 틀린 건 아니란 생각을 위안으로 삼으며 들여다 본 인터넷 사이트에서 눈에 띈 건 스티븐 매더의 이력이었다.


    그의 조상 코튼 매더는 17세기 미국의 제일 중요한 사상가였다 (매더가 17세기 미국의 제일 중요한 사상가라면 18세기에 그 역할을 한 사람은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9세기엔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20세기엔 듀이John Dewey라 말할 수 있겠다). 뉴잉글랜드로 불리던 땅에 미국(America)라는 정체성을 확립시켰고, 엄숙한 칼뱅주의를 바탕으로 청교도 신앙을 신학으로 정리했고, 곧 다가올 예수의 재림과 종말의 사건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했던 목사였다. 최근의 역사책에선 살렘의 마녀재판 때 무고한 여성들을 마녀로 낙인찍어 처형한 사건에 참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스티븐 매더는 조상의 신앙을 물려받지 않고 오히려 청교도 신앙에 저항했던 헨리 소로우 쪽에 더 가까웠다. 소로우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소로우의 사상을 환경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자연주의자 존 뮤어John Muir를 만나 큰 감동을 받고 미국 국립공원의 설립과 보존 운동에 헌신했다. 그런 공적과 시카고에서 살았던 이력으로 자신의 이름이 붙은 고등학교까지 생기게 된 것이었다.


    코튼 매더의 후손은 조상의 청교주의를 버리고 에머슨과 소로우의 초월주의를 선택한 것일까? 17세기 청교주의와 19세기 초월주의의 관계를 대립적으로만 생각했던 과거에는 그렇게 볼 여지가 있었지만, 20세기 후반 학자들의 연구는 청교주의와 초월주의 그리고 20세기의 실용주의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들이 중요한 부분에서 연속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다. 그 관계의 공통적인 주제는 개인주의적인 인간이해, 모든 권력에 대한 회의 의식, 스스로 해야 한다는 자립정신 등이었다. 20세기 중반 미국 청교도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람은 역사학자 페리 밀러Perry Miller였다. 그의 대표작 은 출판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꾸준히 인용되고 있고, 그중에서도 ‘에드워즈에서 에머슨까지’란 장은 여러 번 읽을 정도로 내게 의미가 있었다.



참고서적에 대하여


    아더 브라운의 책 <The Mastery of the Far East> 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참고한 부분은 한국기독교를 다룬 32장과 33장이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참고한 부분은 주로 1권 3장에서 청교도들을 다룬 부분이다. 파운스 장로의 일화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내용을 글에서 간단히 옮겼지만 깊이 있는 논의는 플리머스 바위의 역사적 상징성만을 다룬 란 책 특히 3장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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