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직교사의 '삶의 고백'


김영승
(한백교회 교인)

 

지난 월요일은 해직된 지 만 2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느새?' 싶을 정도로 빨리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그동안의 여러 일들을 생각하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훨씬 덤덤한 마음으로 삶의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지났나 봅니다.

2008년의 교육감 선거 관련 형사소송은 대법원에, 1차 파면무효 민사소송도 작년 12월 승소해서 대법원에, 2차 파면은 이제 3월에 행정소송 1심이 시작됩니다.

법원에서 날아오는 여러 우편물이 어떤 것들은 뜯기지도 않은 채 탁자 위에, 신발장 위에 , 피아노 위에,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쌓일 정도로 이젠 아내와 아이들한테까지도 긴장감을 주지 못하는 시간이 해결해주는 일들로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해직 1년차에는 해고의 부당성과 일제고사 등 이명박 정부의 경쟁강화 교육정책을 규탄하는데 쓰이느라 농성도 많이 하고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2년차에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해고는 너무 심했기에 무효다라는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교육의 문제를 교육적 관점에서 제대로 판단해줄 리 없는 이명박 정부의 사법부에게 패소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재판 열심히 준비하여 복직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전교조 업무를 하나 맡아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해직 3년차.
학교에 있으면 아이들, 동료교사들과 있으면서 자연스레 휴식과 충전도 되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기에 혼자 알아서 쉬고 알아서 충전해야 하는 터라 조금 뺀질거리면서 숨을 고르려하고 있습니다. 제가 봐도 큰 변화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변명으로 새로운 일을 찾아볼 생각도 않고, 버거운 일은 과감히 내 역할과 일이 아니라며 도망쳐버립니다. 12월말부터 한달반 가까이 쉬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소설책도 빌려보고, 클래식기타도 하나 사서 틈나는대로 만져봅니다. 설 연휴 마치고 사무실에 출근하면서는 8km 다되는 길을 그냥 걸어서 갑니다. 자꾸 나오는 뱃살도 뺄 겸 그냥 운동 삼아 또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지며 걷기도 합니다.

지나온 2년은 13년쯤 열심히 살아서 주어진 휴가였고, 앞으로의 시간은 이제 복직하면 또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미리 당겨주는 휴가일거라고, 그래도 이런 휴가라도 받는 나는 참 운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기로하고, 그렇게 걷습니다.

사실은 좀더 뺀질거리면서 출근을 늦추려고 했는데 얼마 전 신우와 의견충돌이 있은 후 일부러 아빠 들으라고 그랬는지 엄마에게 "아빠는 도대체 언제 출근해?"라고 신우가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는 그 다음 날도 집에서 빈둥거릴 수는 없었습니다.

둘째 선우는 아빠의 해직이 자기와 더 많은 시간 놀아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나 봅니다. 그래서 아빠는 왜 학교도 안나가면서 나와 놀아주지 않느냐고 따질 땐 아빠는 그것으로 자기에게 미안함을 대신해야한다고 항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큰녀석 신우는 아빠가 자기 삶에 너무 간섭하는게 싫습니다. 부모로부터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은 사춘기에 아빠는 자기에게 많은 불안 요소를 주었을 뿐 아니라 남는 시간으로 자기 삶에 간섭하니 그 불만이 엄청납니다.

제 주변 사람들에게 신우의 별명은 '우리 신우'입니다. 나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기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을 떠버리더니 아이를 낳고 나서는 "우리 신우가요...","우리 신우는요..."하고 아이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산다고 주변 사람들이 붙여 준 별명입니다. 신우는 제게 그런 딸이었습니다.

선우가 소년과학동아를 보고 싶다며 정기구독시켜달라고 할 때 "너 조.중.동.이 뭔지 알아? 조선, 중앙, 동아의 줄인 말인데 소년과학동아의 동아가 바로 그 동아야. 아빠 학교에서 쫓겨난거 당연하다고 하는 신문. 너 그런데도 그책 봐야겠어?"라며 동생을 철없다고 해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너무 알게한 건 아닌지,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도 고집을 부려 대견하기보다 미안한 마음까지 들게 했던 그런 딸입니다.

근데 그 딸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옳은 것 그른 것, 바람직한 것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보다는 맘에 드는 것 그렇지 않은 것, 친구들이 많이 하는 것 그렇지 않은 것, 귀찮은 것 그렇지 않은 것으로만 세상을 구분하는 것처럼만 보여 대의와 합리성을 고집하는 소심한 아빠와 갈등이 심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한테는 져주고 기다려주면서 왜 내 딸한테 그렇지는 못할까 내 딸이라 그런가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2차 파면 당했을 때 "나 중학생 되기 전엔 복직한다더니 중학교 졸업 전에도 복직 못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해, 안심시키려고 지나가는 말로 했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사실에 놀라며 한참 민감할 나이에 아빠의 해직이 많은 아픔이 되었을 아이에게 잘해주고 싶은데, 아빠의 그런 마음을 이용할 줄도 아는 영악함에 놀라 경계를 하게도 합니다.

인생 쉽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2년의 해직생활이 주는 깨달음입니다.

쉽지 않지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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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자필 사망신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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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뭔가 다르겠지.” 이것은 세화여중 김영승 교사의 문제를 놓고 학교측의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동안에 애써 가져본 한 가닥 바람이었다. 그것은 결국 허망한 꿈이었다. 지난 2월 14일 김교사에게 송달된 것은 파면 통고서였다. 지난해 10월에 치른 전국적 초중고등학교 일제고사 사건과 관련하여 서울 지역의 공립학교 초ㆍ중등 교사 7명에게 파면 또는 해임이라는 중징계가 이미 내려졌던 터이지만 세화여중은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참된 교육기관이기를 자부하는 한, 교육청의 압력쯤은 버텨 낼 수 있으며 또 그러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우리는 희망적인 기대를 가져 보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허황한 꿈으로 끝나버렸다.

교사에게 ‘파면’이라는 징계는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셈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 죽는 것은 어느 쪽인가? 김영승 교사가 잃는 것은 교단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일 따름이다. 그 대신에 학생들 앞에서 참된 스승으로서의 양심에 충실하였다는 그의 명예는 길이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죽는 것은 누구인가? 나의 눈에는 이 파면장의 이면에 씌어 있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사망 신고서’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하여 우리는 스스로 죽기로 결의하였음을 만천하에 공고하는 바입니다.” 라는 설명문이 뒤따르고 그 밑에 이 파면을 결의한 징계위원들의 명단과 함께 일주학원이라고 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살아 있으나 죽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본분을 상실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교육기관이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분을 내팽개치면 그 생명은 이미 상실한 것이다. 지난 2월 5일과 12일에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그 때마다 부당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데 두 번 다 당사자인 세화여중 앞은 비워 둔 채  그 옆에 있는 반포여중 앞에서 해야 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세화여중 측에서 시위를 봉쇄하기 위하여 자기네 학교 앞 집회 신고를 미리 해서 허가를 받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임수였다. 교육기관으로서 이러한 속임수를, 그것도 반복해서, 사용했다는 것은 교육기관임을 스스로 포기한 처사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참된 인간을 육성하는 것 아닌가? ‘정직성’을 빼놓고 인격교육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2회에 걸친 징계위원회는 이러한 속임수 연막 속에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그 결의는 원천무효이다.

학교가 단지 지식 전수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입시학원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아야 할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민주사회의 건전한 시민에 합당한 인격을 양성하는 것 아닌가. 비판이 없는 민주사회란 바람 없이 연을 날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비판하고 저항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는 결국 독재적인 암흑사회로 전락한다. 미친 소가 느닷없이 온 나라의 모든 교실에 나타나 날뛰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들이받고 교육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김영승 교사는 교육자적 양심의 눈으로 일제고사가 마치 이 미친 소처럼 우리나라 교육 자체를 황폐화시킨다는 것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이러한 미친 소의 횡포를 비켜갈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온 몸으로 감히 이 미친 소의 고삐의 한 가닥을 잡아보려고 나섰던 것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그의 환상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비판정신과 용기있는 저항은 상찬할 미덕일지언정 징계할 사유가 될 수 없다. 들판에 가 보면 두 종류의 웅덩이를 보게 된다. 하나는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고 다른 하나는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다. 맑은 물 웅덩이는 그 밑바닥에서 작은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이고 썩은 물 웅덩이는 맑은 물의 공급이 차단된 것이다. 어느 단체나 기관이나 사회든지 밑바닥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비판의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면 결국에 썩고 만다.

일주학원은 지금이라도 김영승 교사의 징계가 부당했음을 자각하고 하루 속히 철회하는 것이 일주학원 자체의 실추된 명예와 질식당하는 이 나라 교육의 생명을 되살리는 길임을 깨달아 하루 속히 현명한 조치를 취하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과거의 거울 속에서 미래를 앞 당겨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이 교육현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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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쪽이
    2009.03.11 00:4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다시 또 추스려 힘을 내봅니다. 저는, 우리는 이겼습니다. 그걸 더 확실히 보여주는 것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통너머 희망의 소리를

양미강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 연구소 운영위원)

지난 주일 예배 찬송소리가 유난히 작았다. 노래가 어려워서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대충 눈치를 챘나? 교회 주보 알림난에 실린 교우소식. 그 난에 새겨진 김영승 선생의 일제고사 거부로 인한 파면소식. 나는 주보를 만들면서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 난감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 걸까? 이미 교인들은 매스컴을 통해서 파면소식을 전해들은 것 같다. 중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막상 파면통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맥이 풀리고 화가 난다.

지난해 10월부터 불거진 일제고사 거부로 인한 전교조의 대량해직 사태. 이미 서울에 있는 공립학교 선생님 7명이 해임, 파면된 상황이고, 사립학교에서는 김영승 선생이 유일하게 파면조치를 받았다. 강원도에서도 4명에 대한 중징계가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80년대 전교조의 대량해직 이후 일제고사문제로 많은 수의 교사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아이들을 일렬로 세우는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갈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알려준 것이 교사가 학교현장으로부터 내몰려야 할 범법행위인가? 학생들에게 부모님과 상의해서 일제고사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주는 일이 해임과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받을 정도인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가? 아니면 판단할 권리가 없는가? 아이들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고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이 정 믿기 어렵다면 부모님들이 그 판단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이 그 선택권을 아이들과 부모에게 돌려주었다고 해서 교사에게 사형선고인 파면과 해임조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9월말 미국에서 1년간의 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서울의 모습은 횡횡했다. 미국에서 먼저 들어온 후배가 귀국할 때 심호흡을 하고 들어오라고 한 말이 실감났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시민단체들은 빨간색 좌파로 몰리기 일쑤였고, 날마다 국회로부터 각종 감사에 시달려야만 했다. 찍히면 죽는다 했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불순하게 규정되면 전후좌우 무시되고 오직 한가지, 솎아내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색깔은 ‘빨강과 파랑’, 그리고 방향은 ‘좌와 우’뿐인 것 같다. 그러니 세상을 표현하는 무늬는 동그라미 두 개 뿐이다. 겹쳐지지 않는 동그라미 두 개 말이다. 좌파와 우파만이 존재하는 이 세상. ‘편가름’과 ‘솎아내기’가 이 시대를 담아내는 키워드인 셈이다.

좌우 할 것 없이 입으로 되뇌던 다양성, 창의성, 민주성은 다 어디로 갔을까? 치열한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선 다양성, 창의성, 민주성은 옷에 붙이는 자크처럼 편리하게도 사용된다. 일제고사를 거부해서 나름대로 인생의 최대고비를 맞고 있는 교인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왜 찍혔소? 남들처럼 적당히 살아가면 되지. 뭐하러 소신을 분명하게 말해서 ‘솎아냄’을 당했소? 수만 명의 교사가 다 그럭저럭 순응하며 사는데 당신 하나 소리지른다고 세상이 변할 것 같소? 혼자만 다친다오. 세상 더럽네 하면서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리고 살면 속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소?

그러나 차마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 당신이라면 뭐라 이야기할까?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에게 병 낫기 위해 거적을 가지고 연못가로 달려가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네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셨던 태도를 보면, 그의 태도는 더욱 분명하지 않을까? 자리를 걷어차버려! 하면서 단호하게 호통칠 예수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 이거야... 남들은 파면을 당하면 다 끝났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아니야. 다시 시작이다. 이제부터라고 다짐하는 오늘 기자회견장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희망을 떠올리고 있다. 매서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함께 모여있는 아이들과 부모들, 그리고 선생님들에게서 고통 너머 희망의 소리를 듣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 한백교회 http://www.hanbai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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