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파기합니다. 나는 믿습니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약해진 믿음을 강하게!


    최근 신도수가 줄어든 교회에서는 남아 있는 신도들을 향해 ‘믿음이 약해졌다, 믿음이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외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믿음이란 게 무슨 단단한 고체와 같은 것이어서 근육처럼 그 힘의 정도가 약해졌다가 강해졌다가 할 수도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인 가보다. 발음 한 번으로도 입이 앙다물어지면서 힘껏 눈을 부릅뜨게 만드는 단어 ‘믿음’. 그 단어는 단지 듣거나 발음하기만 해도 너무나 단단하고 확고부동하여 토를 달거나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즉, 적어도 개신교 내부에서는 약해진 믿음(신심)은 곧 열등한 믿음을 의미하며, 믿음이란 자고로 강해야만 그것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고, ‘믿음’이라 불리울만 한 것으로 여긴다. 믿음은 그렇게 단단하고 확고하게 자리를 이탈하지 않으며 자태를 뽐내는 그런 것이어야 하나보다. 그 믿음이란 것이 어떻게 단단해지는지, 단단한 상태의 믿음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어떤 합의도 없는 채로.


   최근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하여 각 처에서 ‘믿음’ 이 더욱 단단하고 확고해지기를 요구받고 있다. 그 사정은 이러하다.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시작했다(?)고 일컬어지는 마틴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의 성서 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을 통해 회심을 얻었다고 알려진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루터는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핵심 곧 구원론을 교회나 교황 등의 외형적인 상징이나 표지로 획득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신도 개인이 가지는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 구원의 핵심이라 설파했다. 루터는 당시의 모진 괴롭힘과 박해를 뚫고 이 ‘오직 믿음(Sola Fide)’을 앞세운 이신칭의의 주장을 사수하여 프로테스탄트 혁명의 선두에 섰고 지금의 개신교 계통의 우두머리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프로테스탄트라는 종파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신칭의 곧, ‘구원=믿음’이라는 이 공식은 프로테스탄트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고, 그 경계 밖을 나가는 교리는 소위 성서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이고, 거짓 이단사설 정도로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한데, 예수의 후예들이 예수가 행했던 실천과 선언들, 곧 역동적이고 ‘운동성’이 담긴 입체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를 버리고, 안온한 의자에 앉아 사건성이 제거된 예수를 ‘숭배’만 하고 그 숭배의 파토스를 악용해 예수라는 브랜드의 장사치들로 변질되었듯이 루터와 그의 후예들인 프로테스탄트들도 루터가 당시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부여잡았던 저항의 정신과 당시 개혁운동의 사건성을 쏙 빼버리고 ‘믿음’ 이라는 단어 쭉정이를 숭배하며, 나아가 믿음이라는 이름의 ‘왕국’을 세워 루터와 개혁가들의 이름을 팔며 장사를 서슴치 않고 있다.


    그런 이들 중에 한국의 개신교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는 믿음 장사꾼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한국 개신교 내 최대 종파인 장로교 통합측의 경우, 101회 총회를 통해 ‘다시, 거룩한 교회로!’로, 102회 총회 주제를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라는 주제를 2년동안 잇달아 내놓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며 거룩하지 못하였다고 진단하고, 거룩의 히브리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구별’된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다 잃어버려 세상의 신뢰마저도 잃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차이가 아무 것도 없고 그렇기에 자기들을 다른 종류의 인간들과 식별(Identify)하여 동일화(identification)할 수 있는 표식을 강화해야만 우리의 믿음이 강해질 것이라고 집단적으로 강변한다. 짠 맛을 내는 소금의 주성분이 염화나트륨(Nacl)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실체적인 ‘성분’을 찾자는 게 요즘 주류 개신교 사회의 목소리다.


    9월 말경에 일괄적으로 열린 개신교 대형교단들의 총회에서는 이런 흐름을 극렬하게 반영한다. 이번 총회들은 그리스도인을 식별하는, 그리스도인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그 신원 확인서의 요건을 강화하고 명문화(明文化)하는 작업의 향연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성애자 뿐 아니라 동성애자 ‘옹호/지지자’의 교단 신학교 입학 금지 및 항존직 피택 금지, 이혼/재혼의 간음화(化) 등 기묘하고도 기괴한 상상력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경쟁을 벌였다. 특히, 심지어 최근 한 교단 총회에서는 교단 산하 신학교 교수들에게 ‘이신칭의론’ 곧 행위와도 같은 다른 불순물 하나 포함되지 않는 ‘순수’ 믿음으로 구원을 완전히 이룬다는 그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지 그 견해를 일일이 확인해달라는 제언을 하기도 하였다.[각주:1] 마치 사상검증을 통하여 ‘마녀’라도 사냥해야 속이 풀리겠다는듯이…


프로테스탄트와 믿음


    그러나 루터가 자신의 손에 들었던 무기인 ‘믿음’은 지금의 많은 개신교인들이 기억하고 심폐소생시키려는 믿음제일주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신칭의론 제창과 같은 강력한 프로파간다와 일치하는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루터 당시의 교회가 잃어버렸다고 주장한 믿음, 그것은 어떤 것일까?


    최근 루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출간된 책 ‘루터의 재발견’에서 저자인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는 루터파 등 일단의 개신교 진영이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들고 일어난 개혁과 혁명의 기치를 높이든 16세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특징을 설명한다.


1520년 루터는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 교서를 받고 이듬해 보름스 제국의회(1521)에서 실질적 제재 조치인 제국 추방령을 선고 받는다. (…) 당시 유럽은 오스만 튀르크 족의 유럽 침입으로 기독교 세계가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은 모든 제후들의 힘을 빌려 이슬람에 대항하는 정치적 연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526년 6월 25일 제 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의 통치자의 종교로 한다’는 종교 선택의 원칙을 결의하게 된다. 이 결의의 이면에는 보름스 제국의회(1521)에서의 루터에 대한 판결을 덮어 두겠다는 정치적 합의가 숨겨 있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 이슬람 군대가 퇴각함에 따라 국제 정치 지형도가 급변하고 이슬람의 위협이 사라지자, 황제는 곧바로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1529년 4월 19일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소집하게 된다. 이 회의가 열리기 직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는 모든 루터파 제후들에게 경고장을 발송한다. 루터파를 떠나 모교회 품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과 검이 루터파 제후와 영주들을 찾아갈 것이라고 경고장을 발송한다.[각주:2]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루터와 루터파 제후들이 선택한 것은 항복이 아니었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성서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회유와 갖가지 협박에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읽어버리고 만 성서’,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읽을 수도 없고 해석할 수도 없게 라틴어로 쓰여 있는 그 성서 거기에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말하고 있던 셀 수도 없이 많은 그 종교적 장치들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루터는 수도사 생활을 하는 동안 참회와 형벌의 문제를 고민하였는데, 교회가 오랜 기간 동안 제작해 놓은 구체적이고 세밀한 ‘생명-정치’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뼛속 깊이 착취하는 행태는 성서의 이야기들과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그는 성서를 다시 읽었다. 최후의 심판과 구원의 주체는 사람이나 교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읽고 말았다. 그리곤 그것에 올라타 소용돌이 속으로 기꺼이 휘말려 들어갔다.


    그 후 루터와 믿음의 동지들은 누구도 신앙을 강요할 수 없다는 ‘신앙의 자유’, 교회 공의회나 사제의 권위보다 높은 ‘성서의 권위’, 성서는 성서 자체가 해석한다는 ‘성서 해석의 원리’[각주:3] 이 원리들을 붙잡고 계속해서 자신의 고백의 길을 이어갔다. 무려 1천여년 가까이 이어온 역사의 전통과 관습도 성서에서 비롯된 그의 ‘믿음’보다 상위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믿음’은 저항하는 믿음이었고, 좋은 게 좋은 것,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것이란 주장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십계명의 제 1계명이 천명하는 것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고 지탱하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 즉 ‘오직(Sola)’이라는 태도로만 성립하는 것이었다. 개신교 신학의 다섯 가지 표제어인 ‘5대 솔라Sola’ – Sola Scriptura 오직 성서,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총, Sola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는 단독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강조를 뜻하며,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에 대한 반대 표제어라 할 수 있다.[각주:4] 루터가 주창한 ‘오직’과 ‘믿음’의 결합이란 신자들의 믿음의 대상을 교회 기득권층 마음대로 지정하고 조작하던 것에 질문하고 반대하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번잡스럽게 헌금함을 채워야 연옥을 면하는 것도 아니고, 성찰, 통회, 정개, 고백, 사죄, 보속 이 여섯 단계로 이루어진 고해성사 ‘절차’ 또한 성서가 말하는 믿음이 아니었다. 믿음의 목적어들, 곧 믿음의 대상을 요리조리 자기 입맛에 맞게 귀에 걸고 코에 걸었던 관행을 정지시키고 오직 믿음 그 자체를 통해 구원으로 향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어 있는 것’으로서 믿음, 곧 다른 것 아닌 ‘오직 믿음 그 자체’라는 사실에 루터와 프로테스탄트는 주목했던 것이다. 이제 루터 이후로는 믿음과 대상이 분리된 상태, 곧 주술적인 행위로서의 믿음에서 ‘믿는다’는 행위 자체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믿음을 파기하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시대에서 ‘믿음’은 어떤 식으로 해석되어야 할까? 새로운 저항과 변화의 신호탄으로서 믿음을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공회 신학자이며, 예수 세미나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역사적 예수’ 연구로 잘 알려진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이 시대에 잃어버린 신앙 언어들의 역사적 연원을 살피면서 동시에 그 언어들이 지금 어떻게 우리 시대에 다시 새로운 의미로 새겨져야 할지를 설명하는 책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를 썼다. 이 책 ‘믿음과 신앙’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보그는 ‘믿음(Faith)’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적 정의를 설명하며 이들 간에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믿는다는 것은 확실성의 정도는 다르지만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 어떤 진술을 믿는다는 것으로 정의되며, 실제로 믿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전제한다. 불확실성이 없다면 ‘믿다’가 아니라 ‘안다’라고 해야할 것이다.[각주:5]


    그렇다. 굳이 보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체로 ‘믿는다’고 말할 때는 모두에게 자명하고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서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것, 어느 정도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그것을 거짓이 아니라 ‘참’으로 받아들이고, 진실로 받아들이고자 ‘결단’하는 그 행위를 ‘믿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사실이 확률로 존재하고,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기에 ‘그렇다/아니다’라고 단정짓기 모호한 것들에 단호히 선을 ‘그어버림’으로써 그것에 형태를 주고, 형체로서 드러내는 일, 그것을 우리는 ‘믿는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란 ‘하느님에 대한 충절로서의 신앙, 하느님을 더욱더 중심에 두는 삶의 결실’이며, 특히 ‘하느님의 부력(浮力, buoyancy)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그는 이야기한다. 이어서 보그는 이 ‘믿다’라는 동사는 신뢰하다(Believe in)라는 말의 의미와 가까우며, 이는 단순히 어떤 진술이나 누군가의 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의미에까지 다다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부력을 의지하는 믿음’이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마태복음서 14장에서 풍랑 속에 베드로에게 다가가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했을 때처럼 부력을 의지하여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고(마 14:30), 이 액체와 같은 세상의 바다 위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발을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가 베드로에게 요구한 믿음이란 예수라는 것을 바라보고 그 사잇길이 어떠하든지, 무엇을 만나든지 ‘걸어오는 동작’을 멈춰서버리지 않는 것, 동작을 이어나가고 계속하기를 견뎌내는 것, 그 동작, 계속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어떤 거대하고 강건하여 유동하지 않는 단단한 그것을 부여잡아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는 명사적인 것으로서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믿음이 목적어로 취하고 있는 그 부여잡은 대상들, ‘물(物)’을 믿음과 일치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믿음’ 은 진리와 진리라는 권위가 고정되어 있으며,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기득권들의 허구적 현실을 ‘재구성, 재창조, 재설계’하는 언어다. 현실의 관행적인 ‘믿음들’을 부수고 ‘나는 이렇게 믿소!’하고 어깃장을 놓으며 연약하기만한 새로운 가능성에 철갑옷을 입히는 행위다. 루터가 말한 프로테스탄트의 핵심이 저항과 질문, 소통의 문제라는 점도 믿음의 이러한 특징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완전한 타자를 내 앞에 붙잡아 앞에 갖다 놓고 여기 저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도록 형상화(形象化)하여 심지어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에 구원의 결정 여부를 갖다 붙이는 행위, 마녀라는 이름으로 눈이 감각할 수 있는 확실한 ‘적’을 생산하여 공포를 조장하는 알량한 정치전술을 펼치는 행위를 절단(切斷)하고 파쇄시키는 행위이지 않겠나 말이다.


    앞에서 ‘안다’는 것과 ‘믿다’는 것의 차이에서도 보았듯이 믿는다는 행위는 미완의 상태로 있는 것들에 경계를 주어 완전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이러저러한 가능성과 불온한 유언비어로만 치부되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고 그것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동적 행위다. 적어도 ‘믿음’은 어떤 대상을 부여 잡고 주워 섬기며 숭배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타자화하는 데에 그쳐서는 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사건’ 속에서 밀고 당기고, 들고 나는 호흡하는 동적인 유기체다.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정적인 완전성을 붙드는 것은 어리석다. 세계가 부단히 움직이며 상호작용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바르다. 움직임을 멈추면 죽는다. 가라앉는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말한 그 믿음도 예수를 향해 계속해서 부력을 의지하여 걸음을 옮기는 ‘믿음-행위’ 때에만 성립한다. 예수를 봤다는 이유로, 바람이 분다는 등등의 이유로 멈추면 물 속으로 빠진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움직임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움직인다는 ‘섭리’란 어떤 고정된 스케쥴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사건의 결을 따라 동적 균형을 이룬 완전성을 의미하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서 신뢰해야 한다. 고로 믿음이란 ‘믿습니다’라는 행위로서만 존재할 뿐이며, 믿습니다’들’의 연속적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고로 믿음은 행위와 둘이 아니다. ‘믿습니다’로서 하나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둥, 믿으면 행동이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둥, 행위와 믿음을 언어 자체에서 구분하고 보는 자가 신앙의 적(敵)이다. 어떤 대상을 고착시켜 받드는 일로서의 신앙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정초하고 깊이 머무르되 또다시 박차고 일어나 의심하고 끊임없이 다시 고백하는 ‘믿습니다’의 여정, 그 속에 우리의 숨과 삶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3337 [본문으로]
  2. 최주훈, '루터의 재발견'(2017, 복 있는 사람), 48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5.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2009, 비아), 158~15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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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말고 동무 I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나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 맞지?’


    지난 글에서 필자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없어 쉼을 누리지 못하여 세계의 흐름에 반대되는 고정되고 틀에 박힌, 그래서 안정적인 나와 세계를 찾고자 ‘친구’라는 허위로 도망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밝혀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안심, 안정, 안돈’이라는 감정의 돌을 꼭 껴안은 채 침몰해 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다시 의문을 품자면, 왜 사람들은 안심, 안정, 안돈에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두며 살아갈까? 2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 ‘바깥’과 창구역할을 하는 휴대폰을 바꾸고, 2년이 지나면 삶의 터전인 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이 배운 지식이 4년 후 졸업할 즈음에는 ‘헌 지식’이 되어 있고, 공학기술자가 지닌 지식의 수명은 5년이 되지 않아 폐기/신설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데도 평균수명은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에 육박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정초해야 할 기초가 사라지며, 뿌리내려야 할 지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마음 둘 곳이 없어지니 그야말로 고립무원이다. 고로 이 초고속시대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동색(同色)이었던 친구를 갈구하고, 내 몸에 흐르는 피가 자동적으로 가리키는 혈통으로 회귀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찌할 도리 없고, 피할 수 없는 세상 풍파를 어떻게든 면해 보고자 친구와 가족으로 퇴각하는 개개인들의 회귀를 침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불러야만 하는가? 김영민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온갖 연줄로 얽혀든 사회 속의 우리는 ‘남’이 되지 못했으므로 ‘나’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고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부르’게(198) 된다고 말이다. 즉,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눈빛으로 두려움을 읽고 눈빛으로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어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 ‘군중(또는 대중)’의 무리에서 자칫 떨어져 도태될까봐 두려워하는 공포를 말이다. 한 번도 ‘남’이 되어보지 못한 존재들이란 바로 그런 존재들이다. 이는 일종의 유아들이 겪는 분리불안 증세와도 그 종류가 비슷한 것일텐데 부모로부터 몸은 떨어졌으나 경제적, 사회적으로 자기 두 발로 서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폐적인 퇴각’(204)이나 ‘모든 종류의 실천과 연대를 방해하고 금가게 하는 냉소’(200)만으로 언제까지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가상의 현실 안에서 자기를 확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김영민이 제안하는 동무는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


동무, 듣는 관계


    친구라는 동색(同色)으로 향하는 자폐적인 퇴각을 막고 서늘하고 버텨 서서 같은 것(同)이 없음(無)을 통해 세세한 버릇의 양태를 서로 고치고 서로 성장시키는 동무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듣기’가 필요하다.

    여기서의 듣기란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잘 듣는 수동적 듣기’(210)를 말하지 않는다. 먼저 우리는 친구, 연인들간의 듣기는 매우 수동적인 듣기 방식이란 것을 우리는 알아채야 한다. 친구와 연인끼리는 별 공을 들이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저 하던 말을 하면 되고, 서로간에 조율된 ‘선’ – 여기의 선이란 ‘경계(Line, 또는 Borderline)’라는 의미와 선(Good, 또는 Virtue)’ 양 의미를 포함한다 – 에 의지하여 말하면 된다. 굳이 내 의지를 다해 미간을 좁히며 자세히 듣지 않더라도 맘놓고 떠들고 들어도 되는 듣기다. 김영민은 특별히 이런 말하기와 듣기의 풍경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자리로 ‘술자리’를 많이 언급하는 편인데 대체로 아래의 사진의 분위기와 거기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상상해보면 된다. 아래와 같은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김영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술자리가 얹힌 ‘기운(Stimmung)’, 혹은 어떤 ‘두께’ 속에서 해반주그레하게 피어오르는 낭만주의,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 올라오는 대화적 휴머니즘은, 결국은 바로 그 기운 탓에 실없이 부풀어 오른 개인의 자잘한 자기도취에 기대고 있다. (380)


    이러한 ‘자잘한 자기도취’가 왜 문제인가? 바로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버릇, 혹은 그 버릇의 지향과 지형이 되먹여져 재생산될 기존 세계의 언어 수행, 생활의 양식 때문이다. 고로, 김영민이 제안하는 동무 간의 듣기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210)인 듣기이다. 시공간의 동질성에 근거한 추억과 의리의 과거적 관계는 ‘듣지 않고’(211)도 말할 수 있지만 동무 간의 듣기는 섬세하고도 서늘한 듣기, 즉 ‘버텨듣기’를 말한다. ‘사사화된 정리의 늪 속으로, 그 한 패거리의 움직임 속으로, 축축하고 뜨겁게 저락하는 ‘친구’를 불러 세우고 일견 메마르고 서늘한 행위(211) 속에서 동무 간의 듣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동무는 거기서 태어나는 것이다.


듣기의 본적(本籍), 침묵


    우리가 서로 만나 성장하는 사이가 되려면 실로 보낸 시간과 경험과 추억의 가짓수를 늘려서 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작업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세심하게 돌보고 수행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그 방법을 한 번에 깨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삶의 양식과 ‘버릇’의 문제로 귀결된다. 곧, 다시 지적한 바대로 ‘일상의 만남/사귐의 구태를 번연히 고수한 채 새 이름의 기치 아래 재집결해서 서푼어치 인식의 확장을 꾀하거나 각오를 다진다고 대체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인가?’(205)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우리가 입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동무 간의 듣기를 하기 위해서는 ‘긴절한 침묵(209)’이 절실히 요청된다. 꺼지지 않는 카톡 대화방 알림 속에서 잡담과 수다와 고백을 일삼으며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회집(209)하는 게 ‘사귐과 교제’가 될 수 없다. 타자의 말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그의 말이 성성하게 살아 있는 그대로 응대하고 말의 표준화, 정식화, 그리고 축약화를 철저히 경계하는 것(210), 그저 듣기라는 행위가 하나의 ‘풍경’이나 ‘배경장치’가 아니라 관계맺음의 전면적이고 절대적인 행위임을 아는 것, 거기서 바로 동무 간의 듣기는 탄생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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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끈을 절단하는 아무도 아닌 이[각주:1]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이 책(『신정-정치』)이 출간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5월 9일 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이른바 정권의 교체, 민주정부 3기가 시작되었다. 광장을 달구며 ‘탄핵’이라는 점으로 수렴되었던 목소리 중 많은 이들은 승리의 환호를 질렀고, ‘수호되어야 할’ 정부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의견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목소리 즉, 이제 세워진 저 권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수호’하기만 하면 그 촛불’들’이 말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이에 대해 ‘신정-정치’는 그간 우리 사회는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기까지 걸어온 지난한 과정을 이야기하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이고 철저하게 은폐함으로 감춰졌던 어두운 역사의 경로를 폭로하여 광장에서 냈던 그 목소리’들’이 ‘새 정부’라는 알리바이 속으로 어느 하나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인양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미 자명하게 알고 있듯이, 역시 시작과 끝은 세계를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하는 그 성스러운 끈(7), 곧 성스러운 화폐와 자본의 힘이다. ‘성스러운(거룩한)’과 ‘화폐/자본’을 연결하는 이 언어는 단순히 물질의 세계를 신화화하여 표현하는 게 아니다. 즉, 다시 말해 신정-정치란 돈을 물신화하는 은유가 아니라 등가적이며, 그 운동을 통해 세계의 실재를 구축해 나간다. 그것들은 무한하게 순환하며 서로를 떠받침으로써 우리의 실제적이고 물리적 삶을, 사회적 관계들의 끈끈함을 스펙터클-사회로, 다른 말로 ‘사이비 신성체’로(24) 전환시켜 나간다. 이를 골자로 한 제단 위에 각 종류의, 각 사연이 담긴 피들이 제물로 섬겨진다. 4. 16의 피, MERS의 피, 이창근의 피, 바로 지금의 언어로는 갇혀 있는 한상균과 동성애자 A대위의 피 등 유혈이 낭자한 (사이비) 사회. 거기가 바로 우리의 삶이 바들바들 떨며 놓여진 풍찬노숙/각자도생의 현장이다. 거기서도 모두가 한 입으로 외워야 할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다.(8)”


.

   신정-정치의 사제들은 사목의 권력을 이용해 먹이며, 살리고, 심지어는 머리털까지 센다고도 할 수 있는 바(누가복음 12:7), 진정 그리 살고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바틀비의 변호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심지어 매일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고통 앞에서 마음의 운동을 자기 안락을 위한 자위의 도구로, 자기가 속한 법의 권역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로 환수하는 고통의 질료화/추상화(350)’하기를, 조남호가 그랬던 것처럼 김주익을 모른다 하며 ‘눈물을 훔치면서’ 김진숙을 불법자로 매도하기를(257), 그리고 바로 지금 최순실이 법정에서 진실을 묻던 의원을 딸아이의 영혼살인자로 매도하며 울부짖는 스펙터클을 매순간 집전한다. 그 ‘사이비성’과 실제 지금/여기의 삶을 묶는 전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최초의 가치이자 성부인 축적의 법과 그것을 운동시키면서 매개하여 잉여가치로 화하는 성자인 국법의 이위일체, “신-G’”(13)이다.


   이에 사람들은 저 ‘성스러운 끈’, 세계를 단단히 매고 있는 저 매개/매듭에 다양한 방식으로 봉헌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성스러운 끈의 매듭을 더 매는 방식으로, 그 반대 편의 이는 그 끈의 성분을 조사하고 끈을 푸는 지식을 체계화하여 이른바 ‘지식팔이, 책팔이’를 하는 방식으로, 또는 그 둘의 결합의 모양으로 이 세계에 매개의 매개를 더하고 있다. 그 끈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는커녕! 한 번 엉킨 작은 실타래나 목걸이를 풀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안다. 풀려고 할수록 더 엉키고, 자신이 더 엉김을 가하고 있는 자신, 변수에 기하급수적 변수를 얹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의 그 분노를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모세의 사목권력적 후생체에 봉교하는 인간(92) 떼들에 맞서 정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매개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 수단 그 자체를 그대로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목적의 영역도 아니고 이러저러한 목적에 종속된 수단의 영역도 아닌 인간 사유와 행위의 장으로서의 목적 없는 순수 매개성의 영역”(226)이다.


    그 정치를 누가 수행하는가? 누가 그 매개/매듭들의 경첩을 절단할 수 있는가? 비존재들을 분리/양산하고 그들을 재합성함(291)으로써 축적의 축적을 거듭하고 급기야는 모든 매개를 절멸시켜 ‘순수한 축적’ 곧 금융자본주의G-G’(96)의 체제 속에서 빚(Schuld)을 볼모삼아 피를 빨아먹고 사는 체제를 끝장낼 수 있는가? 바로 폭력의 당사자들 즉, 고통의 최전선에서 고통을 사변적으로 환원시키려는 자들에 분통과 원통으로 소리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을 위시하여 깨어 있기로 결단한 ‘모두가 된’ 이들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아니’었던 수많은 5. 18 엄마들이 ‘모든 이’로 화하여 4. 16 엄마들에게 보내는 저 절절한 인사말이 선취하였고 그것이 광화문과 곳곳의 불로 옮겨 붙어 최순실-박근혜-이재용(104)으로 이어지는 비밀의 카르텔을 끝장냈듯이.

<5. 18 엄마가 4. 16 엄마에게>[각주:2]


   고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각주:3] 라는 저 맑스의 말을 바로 오늘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의 불로, 세계의 무능/유능(406)을 도려내고 태워버리는 불로, 사목적 게발트로 위장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밀스런 끈으로 거듭re엮고 매회 짜이게 하는ligio, 그럼으로써 축적이라는 비밀스런 제 1목적의 위기를 관리하고 종교적religious 원상복구를 수행하는 공동 ‘비선’의 게발트”(118)를 대항하는 익명들 곧 ‘아무도 아니’(296)로 존재하는 고유한 존재자들로 맞아들이자. 최종목적론적이고 메시아주의적인 선언문을 쇠말뚝처럼 박아댐으로서 세계의 ‘잔여’(351)가 그 맹아로 품고 있는 ‘파송된 그리스도-아이들’(153), ‘바틀비-그리스도(348)’등을 절멸시키려는 의지를 꺾고, 계속해서 그 입지점을 ‘다른 곳에’ 세움으로 ‘사랑의 시도’(291)를 이어 나가는 그 말로 읽도록 하자. 그 ‘다른 곳’이란 김영민이 정의 내린 ‘세속’이 가리키는 바, “스치고 섞이면서 만날 수 없고, 겹치고 묶이면서 만날 수 없고, 손을 잡고 혼인하면서 만날 수 없고, 악수를 하고 계약을 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어긋남의 표상. 내 속에 있으면서도, 아니,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너와의 아득한 거리에 대한 표상”[각주:4]이며, “개인의 호의 앞에 무력한 관계의 구조 곧 그 애틋하고 알뜰했을 호의가 속절없이 부닥치는 벽” [각주:5]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윤인로의 책 『신정-정치』(갈무리)에 관한 서평입니다. [본문으로]
  2. 오월어머니집과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 등 5·18 단체 회원들이 지난 11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하고 조속한 세월호 선체 인양을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팽목항에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라는 제목으로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펼침막을 내걸었다. 사진=5·18 기념재단. 연합뉴스 원문보기: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6508.html#csidx1afe6d7bc52ceb493856a24879f17e8 [본문으로]
  3. K. Marx,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2011. 25쪽 [본문으로]
  4. 김영민, 『동무론』, 한겨레출판사, 2008, 164쪽. [본문으로]
  5. 앞의 책, 16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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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묻는다, 


5월 9일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선택을 할지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리스도인이 선거에 임하는 자세?


    5월 9일이 다가오고 있다. 헌법 최초 탄핵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촛불을 들었건 들지 않았건 모두가 ‘내가 바라는 다음 세상’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나의 소중한 목소리를 내는 소중한 선거란 어떤 것일까? 분명 예년의 투표보다 그 무게가 남다름을 인지하면서도 짧은 선거 기간만큼이나 응축된 생각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하루하루다. 필자는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삶의 신념과 정체성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라 고백하는 1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필자보다 더 오래되고 노련한 정치 의식-행동과 삶의 경륜에 의해 다져진 선택 방법에 대해 존중을 표하고, 아직 한참 모자라고 설익은 한 마디를 내놓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 말이다.

   먼저는 이 질문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갖는 특정한 선거의 방법 또는 선거를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이 과연 누구이기에 선거를 하는 태도가 따로 있다는 것일까? 우리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럼 예수를 우리의 삶과 이 세계의 주인, 통치자로 고백하는 우리는 예수처럼 선거를 하면 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예수를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가만, 생각해보자.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있었던가?


.

2017, 예수의 선택?


   그렇다.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없었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통치에 관한 한 황제 1인이 다스리는 군주제도였고 지금 우리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제도가 있었다. 너무 난감하다. 예수의 투표 성향을 분석해서 우리도 그와 같이 투표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예수와 우리 사이에 있는 2천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한반도라는 공간 이 두 가지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라도 한 걸까? 게다가 한 가지 렌즈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티나의 역사적 체험을 전제로 하지만, 유럽의 역사 과정 속에서 탄생한 종교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앙 제도와 해석 체계는 유럽의 경험에 기반을 둔 예수 신앙의 산물이다. 즉,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유럽의 문화로 재해석되고, 그것이 다시 우리의 삶의 기반으로 재구성되어온 역사를 인지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이 다중적인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소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접어두도록 하자. 이미 수많은 텍스트론들이 말하고 있다시피 예수에 대한 재구성은 ‘읽는 이’의 바람과 삶의 경험들에 의해 심하게 교란된다는 것이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 것 자체가 물음표로 던진 이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팔레스티나에 살고 죽었던 하나의 예수’의 구성은 불가능함이 천명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5월 9일에 투표한다면 0번에 찍을 것이다.’라고 점찍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직 말하고 싶은 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선거와 투표, 예수님이 지금 이 시점에 오셔서 투표하신다면? 이런 생각을 하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많다는 것이다. 곁가지로 생각해 보자. 우리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라는 것의 함의, 곧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분, 따라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이 틀거리. 이 언어가 민주주의 사회 즉 백성(民) 또는 시민이 주인이라 하는 2017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그리고 신과 결별하고 ‘생각하는 인간(데카르트)’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 국가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주체라고 이미 천명된 근대 이후의 이 세계 안에서 당신은 정말 뼛속 깊이 이해가 되는가 말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로의 접근이 불가능하였듯이 예수와 선거를 연결짓는 일은 너무 깊은 작업이라 포기해야만 할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불가능하기에 더욱 흥미진진해 보이는 건 나 뿐인가. 비단 정치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아니었던가 말이다.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


    자, 이제 길었던 서문은 제쳐 두고 예수 당시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예수가 보여주었던 삶의 행적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야겠다.

    예수의 모든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이 글에서 모두 다룰 수 없지만, 그의 행위가 최종적으로 다다른 지점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삶이 보여주는 정치적 함의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작년(2016)에 진행된 본 연구소 신학아카데미 탈/향 강좌에서 김진호(본 연구소 연구실장)의 ‘예루살렘에서의 7일’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해 보도록 하자.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이것은 고대의 전형적인 ‘잔혹극’의 한 실례다. 잔혹극이란 ‘희생양’의 배제를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형식으로 공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권력의 지엄함을 승인하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체제는 피압박 대중의 욕망분출 방식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욕망 분출의 기회를 봉쇄하는 극단의 배제집단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배제집단을 천민 계층(마지널 휴먼)이라 하는데, 대중은 이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카타르시스를 일상 속에서 경험한다. 이때 극단의 배제집단은 자신의 욕망분출의 계기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광기’의 사람들, 즉 악령 들린 사람들로 만드는,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배제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사회적 지배의 기재로 활용된다. 다른 한 유형은 잔혹극을 통한 욕망의 카타르시스다. 대중은 출구를 찾아 정처 모르게 내면을 휘젓고 다니는 무의식적 욕망을 분출할 안전한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잔혹극의 희생양이다. 대중은 억압된 욕망에 분풀이라도 하듯 분노를 한껏 그에게 폭발시킨다. 그리하여 권력은 그 대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잔혹하게 처벌한다. 권력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이기라도 한 듯이. 요컨대 잔혹극은 대중의 축제이기도 했다. 그 축제를 축제로서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자신이 역모자의 적극적 추종자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십자가형은 처형자를 위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인 사람을 재판 없이 함께 처형하는 관례를 동반했던 것이다. 

메시아가 일으킨 변혁을 향한 불, 아니 메시아라는 변혁의 불. 그것을 지르는데 공범이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하는 화재경보기에 놀라 무대에서 흩어져버린다. 이제 그들 중 누구도 성전의 억압의 장치들을 불 질러 태워버려야 한다는 ‘불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다. 화재경보기가 울린 뒤, 불을 냉동시켜버릴 듯 거세게 내뿜을 소방차의 잔인한 물줄기가 온 세상을 뒤덮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세상을 향해 찢어질 듯 경고음을 발한 뒤, 그 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불의 호소’만이 허공 속에서 춤판을 벌이며 남은 공연을 실연할 뿐.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고, 추종자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멀찍이서 침묵 속에 관망하는 가운데, 처절하게 찢겨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예수는 죽어간다. 여기서 ‘신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잔혹극의 가학성, 권력과 대중의 공모 속에 벌어지는 역사의 사디즘(sadism) 속에 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신은 죽었다. 아니 가학성을 가학성으로 보복하는 신은 죽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변혁 행위를 꿈꿨으나 하느님은 변혁행위를 통해 예수와 만나지 않았다. 예수사건은 바로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는 모든 이의 침묵 속에 도살당한다. 바로 그 현장, 신마저 침묵하고 있다는 바로 그 현장에서 변혁 행위의 주체인 신도 도살당한다.[각주:1]


    메시아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물러나 사람들의 마음 따위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피안의 세계를 전파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가 도래하여 통치를 벌이는 하나님의 나라 는 죽음 이후인 내세의 삶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 내면의 안정, 안심을 얻는 ’힐링캠프’는 더더욱 아니다. 메시아란 철저히 현실 내의 정치적인 존재였다. 예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며, 현실적이라 함은 곧 생활 즉 삶을 이야기하는 예수를 통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를 일컫는다. 인간들은 예수를 봄으로써 현실(the Real)을 읽고, 예수를 읽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과 세상은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하나님과 인간 및 세상이 화해한 ‘하나의 장소(One Place)’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까지 말했다. 즉, 우리의 현실은 어디인가? 그리스도라는 공간이다. 그리스도라는 공간 안에 채워진 그리스도의 삶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는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던지며 살았다/죽었다. 예수는 불을 지르는 사람인 동시에 아버지인 신을 도살하는 주체였다. 매일이 반복되는 이 지루한 일상의 세계가 변할 수 있음을 알렸고, 이전부터 약속된 바로 그 ‘야훼의 날’이 오늘 여기에 다가왔다고 선언하며 모든 죄와 아픔을 치료하는 실천적 존재였으며 ‘아버지’로 표상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상(像)을 파탄내는 무뢰배였다. 방금 살펴본 ‘예루살렘에서 7일’간의 행적은 모든 메시아로서의 삶을 축약하고 종합하고 결론짓는 일이었다. 즉, 십자가를 포함한 예수의 삶 전체는 아픈 사람들의 병을 ‘지금 그 자리에서’ 고치고 사회 속에서 ‘죄’라고 여겨졌던 고정된 편견과 맞서서 싸워 논쟁을 일으키고 불화를 일으키는 삶이었다.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누가복음 12:49~53)


    제도정치를 주관하여 이 지루하고 억압된 일상을 마비시킴으로 유지시키고 유지시킴으로 마비시키는 제도의 권력들과 싸웠다. 제도의 권력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였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생각이 마비된 사람들이라면 질문으로 일깨우고, 사회적 시선으로 일상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탄생부터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리고 죽는 순간과 다시 부활하는 그 순간까지 모두 그 한 걸음 걸음이 사람들에게 불을 던지고 일깨우는 정치적 존재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연극의 희생양으로 죽임 당했지만, 메시아 예수를 죽인 그 손들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세상의 곳곳을 치료하며 불의한 세상에 균열을 내고 불을 던지는 사람들로 변화해 갔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특정한 신의 특정한 뜻, 특정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러 온 사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그 하나님의 통치란 다름 아닌 사람이 어느 하나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간에 하나님에게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피는 꽃까지 모두 일일이 살리고 돌보시는 그 원리에 의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그가 민의(民意)의 화육(化肉),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있음/없음들의 몸’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는 비단 정치인들이 떠받드는 - 동시에 떠받들지 않는 - 민심의 지엄함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심의 부끄러운 민낯 또한 만천하에 드러내신 분이기도 하다. 훈련되지 않고 오로지 짐승 같은 대중의 에너지가 어떻게 권력자들에게 악용될 수 있는지 또한 자신의 몸으로 똑똑히 대면시켜 주신 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불을 던져 놓고 그 불이 자기에게로 향하게 되었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자신에게 들이대는 불길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후일에 자신의 죽음 이후에 벌어질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들도 상상하면서 말이다.


민주주의와 선거와 예수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예수와 민주주의는 사실 애당초에 불가능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떤 투표를 해야하는지 어렴풋하게 실마리를 잡아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2항>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 1조 1항의 말은 언설(言說)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 대한민국은 백성이 주인인 국가이다. 민주 공화국이란 뜻은 사전 뜻풀이를 가져 오자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해서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를 의미한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여 ‘민’이 주인이라는 것은 개별 개체로서 ‘내’가 주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합체로서의 민의’이다. 즉, 공동의 의사 결정이 반영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럼 위에서 말한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 체제는 예수가 꿈꾸었던 정치, 즉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현실적인 정치체제와 모습을 갖추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가 어떻게 통치하는지 그 체제의 정답을 어디에도 계시한 적이 없다. 왕정 시대로 접어들면서 성서 기자는 하나님이 못마땅해 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사 시대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시대였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하나님과 소위 ‘독대’하여 하나님과의 채널이 단일했던 모세-여호수아로 이어지는 광야와 초기 가나안 시절의 ‘임시정부’형 체제가 하나님의 통치에 더 가까웠을까?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족장 시대? 에덴동산…? 대체 우리는 그럼 얼마의 시간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이런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아니면 소위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듯 교회가 많아져서 ‘복음화율’이 높아진다면, 즉 교회에 등록한 기독교 신자들이 늘어나 그 수치가 100에 가까워지면 그 때서야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가장 ‘직접’ 반영하는 정치체제야말로 환상에 가까우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엄명을 어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체제는 현재 잠정적으로 가장 우리에게 적합한 체제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민주주의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 체제가 아니라는, 이것보다 더 나은 정치체제를 고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에겐 정의를 추구하는 능력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하며, 다른 한편 불의를 행하려는 경향성도 지니고 있기에 민주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사회정의 실현에 있다.[각주:2] 오늘날 구약 시대의 신정 정치 즉 하나님께서 특정 매개자를 통해 통치하시는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여러 세속 정치 형태 중에서 민주주의가 희년 정신 즉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해 주는 정치 체제라고 판단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것은 곧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 도래의 선포, 곧 누가복음 4장 16, 17절의 말씀의 내용과 가장 가까운 정신을 구현한 체제일 것이라 고백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170509 대선의 의미


    여기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비단 정치체제의 조형(造形)만이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를 치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 즉, 금번 국정농단 사태, 소위 박근혜-최순실의 비(반)민주적 통치의 상태가 드러낸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은 우리 사회의 곳곳이 어디 하나 빠짐없이 병들어 썩어 문드러진 사회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각주:3] 특히 박근혜-최순실은 삼성의 이재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드러났다.[각주:4]



    즉,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 특히 이번 선거와 이어지는 정치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사회는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정치(제도)의 개혁, 경제의 민주화, 동북아시대를 맞이하면서 통일과 외교에서의 주도권 장악, 점증하는 생태위기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시급하고도 안전한 대책 등이 이번 선거를 시작으로 앞으로 계속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결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체제”의 심판과 그 사태의 종결로서 인지 되어선 안 된다. 이제 대한민국, 아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디자인되어야 그 기초를 쌓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예레미야 31:31)”


그렇다면 나의 목소리를 내는 투표란?


    예수, 나, 민주주의, 그리고 2017 대통령선거라는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이번 대선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일단은 선거를 해야 한다. 아무나 되겠지 하면 정말 ‘아무나’ 된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최악의 지도자로부터 통치를 받을 것이다. 그 때부터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옛날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하자. 마키아벨리를 통치기밀의 폭로를 통한 반-폭정주의 및 공화주의의 실천자로 인식했던 바로크시대 보깔리니는 법정에 선 마키아벨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검사는 마키아벨리가 한밤중 양떼 속에 숨어들어가 ‘개의 이빨로 만든 의치’를 끼우려다 발각되었으며, 그런 행위는 양의 젖을 짜고 털을 깎는 ‘목자들’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며, 이후 양떼는 목자들의 ‘휘파람과 지팡이’를 따르지 않게 될 것이고, ‘밧줄로 둘러친 울타리’로는 더 이상 양떼를 관리할 수 없게 될 것인바, 바로 그때 ‘양털과 치즈의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의 이빨로 만들어진 의치는 양을 개처럼 물어뜯을 수 있게 하는 힘, 목자들의 호명과 지시를 거절하는 힘, 목자들이 매번 재설정하는 목양의 울타리와 영양배분의 경계를, 목자들이 정립한 법의 경계를 무화하는 힘이다. 개의 그 이빨, 그 힘은 검사에 의해 ‘극히 위해한 성격의 안경’으로 기소되는데, 그 안경은 그들 목자들의 법 연관이 양털과 치즈 가격의 관리를 통한 축적의 보호상태임을 문제시하는 시력을, 그런 축적의 보호가 ‘신성의 가장’과 ‘국가이성이라는 폭정의 비밀’에 의해 관철되고 있음을 폭로하는 시력/시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각주:5]



    투표는 가장 작지만 확실하게 당신의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고 가장 적확하다. 15명의 정치인이 대선에 출마했다. 누구를 찍든 찍는 게 당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작이다. 다시 말하건대, 이번 선거는’시작’에 불과하다. 근본부터 시작하는 선거다. 세월호 참사가 던진 질문, ‘과연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삶,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이 곳이, 내가 운명처럼 태어나게 된 이 곳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뜻’이 있다고 믿는 이 곳에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 ‘현실’에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면 이제는 응답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이 단번의 투표에 이룰 수 없다. 투표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당신은 당신이 찍은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 사람과 그 주변의 세계가 당신이 점찍어둔 사람을 찍을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 그 후 어떤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 비록 당신이 찍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 그 때부터 그를 사정없이 움직여야 한다. 정당 가입과 활동으로, 시위와 집회에 참가함으로, 전화로, SNS로 말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당신’의 시작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16 신학 탈/향 강좌 <예수, 트랜스-크리스천 히스토리를 위하여>(강사 : 김진호)의 1강 ‘역사의 출발, 십자가에 달린 그 이’ 중 한 단락을 발췌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2017 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 지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 (2017, 동연) 11쪽 인용 [본문으로]
  3.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두 인물이 있지만, 사실 그들과 그들이 가지고 논 권력을 둘러싸고 있는 층위는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다. 일차적으로 그들을 비호하고 키운 정치 기관들 - 청와대 비서실, 국정원, 검찰, 헌법재판소 등 - 과 그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그리고 군대가 있고, 또한 그들의 충성스러운 ‘입(Speaker)’ 역할을 한 그들의 입장을 매일 매순간 퍼나르고 재생산해낸 언론권력(조중동 등의 일간지, 공영방송과 종편방송 및 포털사이트)이 있을 것이다. 비단 그것 뿐인가. 그들의 권위를 뒷받침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소위 각계각층의 지식팔이 ‘전문가 집단’과 대중의 영적인 상태를 주관하는 종교권력들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자신의 역할들을 충실히 집행함으로써 직접 책임지지는 않지만 모두가 조금씩의 힘을 보태어 만든 사태가 결국 여기-지금 오늘의 생명-삶을 갉아 먹는 체제로 현신(現身)한 것이다. 사회학자 윤인로는 박근혜 정부와 그 주변을 둘러싼 권력들을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간접권력’이란 개념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 보호능력 없는 채로 복종을 요구하고, 정치의 위험을 몸소 받지 않고서 명령권을 가지며, 책임을 다른 기관에 강요하면서 그 기관을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간접권력’ (칼 슈미트, 홉스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 교육과학사). 여기의 간접권력이란 무엇인가. 체계적인 무책임의 통치상태, 곧 기술적(객관적, 기계적, 외적)으로 된 통치체의 중성화(다원화, 분권화, 합리화) 상태, 공모한 사적 당파성들의 ‘영원한 수다’ 상태.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90쪽) [본문으로]
  4. 가장 왼쪽은 실제 타임지(아시아판, 2012. 12. 17) 표지, 그리고 이후 2장의 사진은 패러디물이다. 각각 왼쪽부터 ‘독재자의 딸(박근혜)’, ‘독재자의 딸의 무당(최순실)’, ‘독재자의 딸의 무당의 후원자(이재용)’로 표현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13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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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말고 동무 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친구 / 친구사이


    옛부터 어른들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누차 말씀하셨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갈 수도 있고, 친구 따라 감옥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아이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아이의 환경은 어떠한지 늘 노심초사 감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럴까, 심지어 요즘은 천진난만하게 아무에게나 ‘너 나랑 친구할래?’라고 말을 걸며 코묻은 간식을 건네던 어린이들의 풍경은 온데간데 없고, 아이들이 먼저 친구를 어른들의 기준에 따라 ‘가려서’ 사귄다는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이들이 사는 동네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한다거나, 임대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친구를 왕따시키는 등의 행동은 돈에 찌들어버린 어른들과 이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물론 어느 누가 친구를 잘 사귀고 싶지 않을까? 그 누구도 좋은 친구를 만나서 ‘강남’ 가고 싶어 하지 어두컴컴한 감옥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친구 하나 잘 사귀어서 삶의 도약을 이룬 사례와 친구 하나 잘못 만나서 인생을 망친 사례는 늘 존재하는 것이니 미리 그 사실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그 덕으로 ‘강남’ 한 번 가보겠다는 심산을 누가 모르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좋은 친구를 가려서 만나는 방법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애초에 그런 방법이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렇게 친구를 ‘가려가며’ 만남으로써 우리가 반드시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 꼭 맞는 맞춤의상처럼 잘 만들어진 ‘완제품’으로서의 친구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즉, 애초에 좋은 친구란 없다. 오로지 존재하는 게 있다면 나와 친구의 ‘사이’만 있을 뿐이다. 나와 만나기 전에 좋은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리란 보장이 없다. ‘좋은 친구’를 만남으로써 내 삶이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며 친구와 나는 많은 기억과 경험들이 켜켜이 쌓이고 그 와중에 상호적으로 에너지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모진 비바람을 헤쳐 나가 어느덧 옥석같이 빛나는 ‘친구사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친구란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친구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 그 친구’사이’를 일컫는 말이었던 게다.


   한데, 이 생각에 기초하여 오히려 이 참에 한 발 더 나아가서 ‘친구’라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의심을 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좋은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챘다면 이제는 과연 친구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관계를 지향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김영민 그리고 '동무론'


    이에 나는 김영민이라는 한 철학자를 소개하려 한다. 그는 오랫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습을 고민하고 디자인해 온 이다. 특히 친구라는 관계의 그 ‘끈끈함’과 ‘축축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런 친구라는 관계의 특성이 끌어들이는 여러 부작용들에 대해 고민했다. 하여 그는 친구의 대안으로 ‘동무’라는 새로운 관계 양식에 대해 꾸준히 발언해 왔고 단행본으로 세 권에 걸쳐 – ⌜동무론⌟ (한겨레출판 2008), ⌜동무와 연인⌟ (한겨레출판사, 2008),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한겨레출판사, 2011) – 왜 우리는 친구라는 관계 말고 ‘동무’여야 하는지에 대해 길게 논의를 펼쳤다. 나는 여기서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할 수는 없지만, 몇 회에 걸쳐 짤막하게 김영민의 동무론을 소개함으로 우리가 이제까지 맺어온 친구 또는 친구 사이를 성찰해보고 새로운 관계의 방식,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려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김영민이 말하는 동무란 ‘동무(同無)’다. 다시 말해, 동무란 즉 ‘같음이 없는 사이’인 것이다. 본래 동무란 순우리말로서 친구를 의미하지만, 김영민은 기존의 친구에 관한 통념을 뒤엎고 자신만의 특별한 동무론을 펼치기 위해 일부러 ‘동무’를 한자로 언어놀이하듯 만들어 ‘친구’라는 관계와 차별화하였다. 그에 의하면 친구와 동지, 그리고 동무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과 인간이 새롭게 맺어야 할 교우관계는 그 셋 중 ‘동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복잡하고 헷갈리니 길지만, 직접 그가 말하는 ‘동지’와 ‘친구’, 그리고 ‘동무’의 비교를 들어보도록 하자.


대의가 푯대라면 그 푯대 아래 ‘동지’가 모인다. 그들은 거사에 함께 투신하고 혁명에 신명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은 무시되어도 좋고, 사랑조차 종종 걸림돌일 뿐이며,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부차적이다. 더불어 벤야민의 비평론이 가르치듯이 객관성마저도 당파적 실천을 위해서 희생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배신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대의도 이데올로기도, 관념의 일관성만으로 묶어둘 끈도 없다. 전두환들이나 김영삼들이, 최민수들이나 강호동들이 웃는 표정만으로도 족하다. 이론이 부재한 자리를 정서적 일체감이 들물처럼 채우는 사적 우연성, 그것이 친구다. 공유된 이념이 없으니, 원칙상 배신도 존재할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관계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배타적 관계의 형식은 대의와 이념의 부재가 남긴 정서의 진공 속에서 생긴다. 대의라는 공간적 관념의 정합성이 없는 대신,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 (중략) 그러나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굳이 조어로 그 취지의 한 극단을 잡아내자면, 동무는 동무(同無)다! 오히려 서로 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면서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 눈을 팔면 머-얼-리 몸을 끄-을-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중략) 우선적으로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 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 (동무와 연인, 31~32쪽)


    김영민이 말한 동지라는 관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지’적 관계가 맞다. 이들은 어떠한 신념에 의하여 결합되어, 특정하고 뚜렷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인 사이다. 그들 관계 안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다. ‘큰 뜻(대의)’ 곧 이데올로기가 움직이는 대로 사람은 거기에 맞춰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의를 저버리니 ‘배신’이다. 푯대를 향해서 가는 데에 거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만두어야 하고,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이라면 그것 역시 뭉개야 한다. 동지들 사이에서는 신념과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곧 존재 이유다. 그런 신념이 맞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하루 아침에 결별과 재결합도 가능하다.


    반면에 친구는 동지의 대의와는 아주 상반된 관계다. 친구는 동지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큰 뜻(대의)’ 자체가 온데간데 없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비어 두기로 작정한 관계다.안재욱의 노래 ‘친구’에서 나오는 것처럼 ‘괜스레 힘든 날 무턱대고 전화하여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는’ 관계다. 즉, 수많은 자기 자신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입었던 옷들을 다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이더라도 전혀 괘념치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관계가 친구다. 이런 말을 들으며 우리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김영민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그것은 ‘환상’이라고 말이다.


당신은 ‘친구’를 붙잡는다. 끈끈해서, 혹은 공유된 기억이 축축해서, 어렵지 않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무론, 197쪽)


    친구는 끈끈하고 축축하다. 아니 그런데 ‘대의’, 이데올로기와 같이 사람을 물건 대하듯 폭력이 사라진 관계, 사회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써야만 하는 가면 즉 페르조나라는 나를 가두고 억압하는 잔인한 것들이 사라진 관계, 그런 칭찬받아야 마땅한 친구사이가 왜 그런 부정적인 호칭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촉촉하고 포근하다면 모를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김영민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내 실천의 진정성을 담보해주던 그 완고한 사물의 질서는 꺼져내리고, 다만 기표들의 편차와 그 점증, 혹은 점감하는 시선들만이 나를 표시해주는 시대, 신화와 상징마저 전자화되는, 전자적 기호들의 유희가 절정에 달한 시대, 그 속에서 흔들리며 미끌어지는 낡은 주체는 그 낡은 ‘친구’ 관계를 통해서, 그들이 나누고 있는 공통의 기억, 그 습도, 혹 열기를 통해서 제자리, 혹은 그 죽을 자리를 잡는다. (중략) 친구의 미소, 그 주름살, 그 걸음걸이와 뱃살, 그 술잔과 그 담배 연기, 그 변치 않는 말버릇과 허장, 그 과도한 기대와 그 과소한 실천의 패턴 속에서 제자리, 혹은 죽을 자리 찾으며, 당신은 안심하고 안정하며 안돈하는 것이다. (동무론, 198~199쪽)


    쉽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느낌은 온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와 과연 ‘나’란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 즉 존재의 붕괴, 고정된 나로서 존재할 수 없고 늘 하염없이 흔들리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가 그나마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말하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손에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친구인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말대로 늘 ‘액체 상태’인 세계, 즉 사물의 소비와 유통이 너무 빨라서 그 유동이 물과 같이 되어버린 상태인 세계에 멀미하는 와중에 ‘친구야, 우리가 남이가!’라며 내 손에 다 낡은 진리 한움큼 쥐어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친구란 말이다.


    그래서 김영민은 묻는다. 과연 그 ‘안심, 안정, 안돈’이 이 세계와 나를 성장시키는가 하고 말이다. 기독교의 친숙한 언어로 말하자면, 그런 안심, 안정, 안돈의 관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다. 결국 친구에 관한 우리의 과도한 긍정은 그 긍정의 크기만큼 우리가 얼마나 현실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없고 쉼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는 그런 세계의 흐름에 반대되는 고정되고 틀에 박힌, 그래서 안정적인 ‘나’와 ‘세계’를 찾고자 ‘친구’라는 허위로 도망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끝없는 ‘다름’들이 쏟아져 구역질이 날 정도의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도피하는 곳, 거기가 ‘친구’다. 그 친구에게 가서 우리는 묻고 또 묻는다.


    “나 원래 괜찮은 사람인 거 맞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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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가 사라진 곳에서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개역개정)


    감사, 영광, 기쁨 찬양과 같은 송영의 언어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이런 언어들은 그 무게로만 따지자면 사랑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은 언어이지요. 감사와 찬양, 기쁨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그 분을 향한 무한한 긍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송영의 언어는 존재론으로는 하나님이 ‘신’으로서 누리는 독점적인 지위를 밝히 드러내는 말이며, 동시에 윤리적으로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늘 상기시키고, 겸손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언어들입니다.


   그런데, 실상 지금 우리의 생활과 기독 공동체 안에서는 정작 송영의 신학은 천박한 인과율의 굴레 안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제 아들이 이번에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 사업이 술술 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언어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늘 맴도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송영은 번영신학과도 강력히 결합되어 우리의 기존 신앙 체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번영신학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송영의 언어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컨대 ‘하나님, 이번에 제가 일본여행을 계획했는데, 마침 다른 일로 취소되어서 못 갔더랬습니다. 그런데, 가려던 그 곳에 지진이 난 겁니다. 그 곳에 가지 못하게 막으신 당신의 계획이 놀랍습니다!’ 라든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만약 몰랐다면 저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와 같은 언어는 결코 우리의 귀를 거슬리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인과율의 송영이 녹아든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18:11~13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인과율 송영’의 전형입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는 바리새인의 기도 말이죠. 이는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이미 천년도 더 이전에 부정하셨던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교회 안에서는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송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제대로 된 송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또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떤 감사의 제목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은 온전한 감사가 아니라는 지적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하박국 본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입니다. 내게 키우는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인 포도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올리브 열매는 달린 것이 없습니다. 내게 우유를 제공하고 고기를 제공해 주는 자산 중의 자산, 양과 소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음에도 내게는 구원의 여호와가 계시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사건이 진행될지라도, ‘통념적인 감사의 제목’들이 사라질지라도 내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찬양과 감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은 앞에서 살펴본 인과율의 송영보다는 훨씬 송영의 본질에 가까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 찬양 등 송영의 언어는 성서 곳곳에서 나타나듯이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고, 소망과 믿음을 통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러한 기도는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나는 ‘날 때부터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아비와 그 당사자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라고 여기던 인과율의 연줄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오직 그가 맹인인 이유는 그 날 그 순간에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목도하고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의 찬송을 돌리게 하려고 생긴 일이라 설명하십니다. 즉, 송영이란 현실의 당면한 문제, 가시적인 개별 현상을 뛰어넘어 드려지는 것이며, 소망과 믿음의 이름으로 영원 불멸한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를 감사하라는 일종의 ‘정언명령’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다윗의 탄원 시편이라든지 오늘 읽은 하박국의 본문에서 등장하는 ‘비록 ~할지라도’의 신학은 현실을 뛰어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서도 그러한 송영이 윤리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은 신앙의 순전함을 강력하게 보장하는 송영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최근의 신학에서도 이런 송영을 장려하지요.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마치 어디를 가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만이 ‘답’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겠지만, 하나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라. 하나님이 계시는데 대체 불평할 게 무엇인가?”라는 당위적인 선언으로 그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과율의 송영보다 더 억압적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역사 속에서 긴 호흡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무화(無化)시키는 결과를 빚어냅니다. 이러한 송영과 송영의 장려가 지금 고난과 고통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을 얼마나 매만져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당장 내 주머니에는 소유한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이라는 ‘백지수표’를 소유했다는 말은 마치 미래의 수입을 담보로 끌어 쓰는 신용카드와 무엇이 다릅니까! 현재 존재하지 않아서 끌어쓰는 감사는 스스로를 위무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채우는 것’으로서의 감사라는 매커니즘은 더욱 공허한 종교적인 허무를 초래하지는 않을까요? 최근 횡행하는 힐링의 담론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는 식의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아도 황폐한 우리 마음에 더욱 큰 구멍을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우리가 불러야 할 송영은 무엇일까요? 다시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있지도 않은 티끌만한 감사의 이삭을 줍고 또 주워 감사와 찬양의 제삿밥을 짓는 그런 류의 송영은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다짜고짜 감사해야 합니까? 왜 감사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름만으로 감사하라는 공허한 기계적 감사를 해야 하겠습니까?


    이 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송영의 첫걸음은 송영에 대한 강박과 조급증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송영에 앞서 잠잠해지는 것, 달리 말하면, 그 감사의 제목, 그 자리가 비어 있음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섣불리 비어있는 송영의 자리에 하나님을 앉히지 않는 것 말입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감사가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며, 어서 하나님을 송영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정의 자리에 홀로 서서 송영을 멈추고 결연히 견뎌야 합니다. 이육사의 시 ‘광야’는 이렇게 불가능한 송영 앞에 서서 그 모욕과 부정의 시간을 견디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친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선 지고 

   큰 강물이 드디어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에 대해 황현산 선생이 내린 해석과 우리가 모색하고자 하는 송영의 대안에 대해 연결지어 설명해보려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현실은 산맥들도 차마 범하지 못한 그 광야,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렸지만, 결코 그 곳만은 길닦기를 포기한 그 광야를 닮았습니다. 송영이 가능할 리 만무한 이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큰 강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큰 강물, 부지런히 계절을 피고 진 인류 전체의 고고한 역사의 강물은 흐르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마치 이소라가 노래한 것처럼,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고 고백할만큼의 고독이 강렬합니다. 그 강물 앞에서 나란 존재는 광야 앞에서 찌질한 삶을 견디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짧은 한 인생 살다 지는 티끌이 된 듯 합니다. 그렇지만, 화자는 말합니다. 눈은 내리고 있고, 매화 향기는 홀로 가득하다구요. 매화 향기는 작지만 고결하고, 단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 매화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 부끄러워하지만, 오히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된 세월의 아득함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그 장구함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결국 현재로서는 별다른 힘을 지닌 것도 아니고 합창해주는 사람도 얻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화자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결심하고 있습니다.[각주:1]

    가난한 노래의 씨, 이것이 우리가 불러야 할 송영이 아닐까요? 줍느니만 못한 감사의 조각들을 주워 연명하는 인과율적인 송영을 그만 두십시오.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라는 허구적 이름으로 치환하여 지금을 위무하는 ‘비록 ~할지라도’의 감사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에게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감사할 수 없음에 감사하십시오. 오히려 우리가 송영의 자리를 비워 두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면, 천고의 뒤에 광야에서 목을 놓아, 진정한 초인(들)[각주:2]이 부를 그 송영을 꿈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웹진 <제3시대>


  1. 이 단락의 내용은 황현산의 책,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2015), 18~19쪽의 내용을 요약, 각색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이 ‘초인’에 대한 설명 또한 황현산의 해석으로 읽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 초인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름지기 그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며, 저마다의 자유의지로 행동하게 될 미래의 인류다. 이 “초인”이라는 표현에는 고난의 극한에서 노래 부르기를 선택한 자의 의지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과, 높은 정신적 경지를 확보할 미래의 인간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겹쳐 있다. 이 새 시대의 새 인류는 지금 시인이 숨죽여 부르는 노래를 마음 놓고 “목 놓아 부르게” 될 것이다.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2015), 1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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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났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어떤 '한 아이'의 탄생



    베들레헴 작은 말 먹이통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말 먹이통이란 가혹함 그 자체다. 포근하기보다는 까슬까슬한 촉감, 엄마의 젖내보다 악취가 더 먼저 그를 맞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아이의 탄생 장면은 ‘비록’ 말 먹이통일지라도 사랑해주는 부모와 경배하는 목동들, 동방의 박사들에 둘러싸인 아늑하고 훈훈한 풍경일 것 같지만 이제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아니 ‘염원’하는만큼 그 풍경이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생명에 대한 축하와 격려의 자리라기보다는 엄혹한 세월의 비바람 속에 ‘생존’의 가능성마저 의심받는 회한과 우려의 자리였을 것이다.





한 아이 : 그들 중 하나(One of them)


   그렇게 그 한 아이는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피난민 신세다.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상황이 예상과는 달리 진행되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 일러준 예언의 기쁨도 잠시, 결국 헤롯의 칼날을 피해 아무도 알지 못하는 타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 명의 ‘메시아 용의자’ 찾기에 혈안이 된 헤롯은 박사들과의 대화를 기준으로 두 살 아래의 핏덩이들을 모두 죽여버렸고, 그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내 품의 아이가 진정한 하나님의 메시아인지 ‘죽음의 화신(化身)’인지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고로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사실, 그것은 이제 입 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그는 한 명의 평범하고도 이름 없는 자로 살아가야 했다. 메시아의 목숨을 찾아 헤매던 ‘승냥이’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에 이스라엘로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고향의 상황은 떠나오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서슬퍼런 권력의 칼날에는 ‘헤롯’에서 그의 아들 ‘아켈라오’로 이름만 바뀌어 새겨져 있을 뿐 살아있는 권력으로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게 아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평범하게 자라나갔다. 

   한 명의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간 그 ‘한 아이’는 배고프면 먹었고, 잠이 오면 잤다. 여느 나사렛 사람들처럼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밤이 되면 쉼 없는 고된 노동에서 오는 피곤에 짓눌려 잠자리에 파묻혔다. 메시아가 태어났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왔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의 탄생을 두고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예언은 한바탕 봄날의 꿈을 꾼 듯 씁쓸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평범한 민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갔다.

    마치 우리 시대 루시드폴의 ‘평범한 사람’이란 노래가사말이 그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한 아이’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그 어느날이었다. 사람들이 수군수군거리며 어떤 ‘한 사람’ 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저 변방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가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혈혈단신 맨 몸으로 성전과 권력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과 같은 혼란과 번잡한 일들을 일으켜 일상을 무력과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노동으로부터 사람을 소외시켜 자기 몫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죄와 악의 굴레를 영원히 맴돌도록 만드는 이들에 대해 분연히 일어난 ‘한 사람’이라 했다. 그 아이가 본 광경은 생경하면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한 사람’은 당장이라도 잡혀 죽임을 당했을 이야기를 하고 다녔지만, 그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진리를 외쳤다. 한 사람이 의연하게 빛을 밝히니 사람들이 모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켰을 때, 모든 이들이 그 촛불이 있는 곳을 자연스레 쳐다보게 되듯이… 하나둘 그 ‘한 사람’ 곁에 여럿이 모여서 물결을 이루었다. 결국 헤롯 안티파스를 중심으로 한 권력자들도 의심의 눈초리로 세례자 요한을 노려 보았지만, 소요의 위험 때문에 함부로 그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한 사람의 용기로 비춘 불빛은 이제 들불이 되어 타올라갔다.

    그러나 그 ‘한 사람’ 세례자 요한도 별 수 없는 ‘한 사람’이던 것일까? 헤롯 안티파스의 치부를 집요하게 건드린 결과로, 순식간에 목이 베여 쟁반에 담긴 신세가 되었다. 구름 떼와 같이 모였던 무리들은 흩어지고 도망쳤다. ‘한 아이’도 그 무리들처럼 한편으로는 다시 찾아온 패배감과 무력감을 안고 또다시 일상으로 숨어들어갔다. 그 ‘한 아이’도 이름 없이 무력한 ‘그들 중 하나’인 순간이었다.


한 아이 : 바로 그 한 사람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4~15> 


    ‘한 아이’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서는 강력하게 증언한다. 분연히 ‘한 사람’이 잡히고 난 뒤에 ‘한 아이’가 다시 일어났다고 말이다. 세례자 요한과 똑같은 메시지를 들고 말이다. ‘요한이 잡히고 난 뒤’라는 시간의 진술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무력하게 도망친 무리 중 하나, ‘한 아이’가 예수로, 그리고 더 나아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로 세상에 ‘나타나는’ 시점, 그리고 그가 외친 ‘말’은 반드시 몸조심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험한 말을 가지고 그가 등장했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어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 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554쪽


    만약 세례자 요한 이후, 예수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무력을 떠안고 별 일 없이 살았다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못 들었을 뻔하였다. 하지만, “강력하고 집요하게 악의 정신이 지배할 때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인류 속에 고고하게 흐르고 있는 진리의 편에 서서 꺾이지 않고 균형을 잡고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갔다. 하지만, 그도 별 수 없는 ‘한 사람’이었을까. 몇 년동안 사람을 모으고 소동을 피우며 조금은 시끌벅적했지만 세례자 요한처럼, 또 한 명의 권력의 손아귀에 넘겨져 놀아나고 조롱 당하고 모욕 당하며 죽어갔다. 그로 인해 아주 잠깐 새 이스라엘의 희망을 가졌던 이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그의 손이 먹인 양식으로 배를 불렸던 무리들이 ‘야훼의 이름으로’ 그를 직접 처단하는 칼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결과는 그렇게까지 참혹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여느 때처럼 ‘한 사람’을 쳐다보던 무리들은 또 뿔뿔이 흩어졌지만, 단 한 사람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이후에도 등장하고 또 등장했다. 최후의-최초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켜갔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의외의 장소에서 사건은 늘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대 '바로 그 한 사람'으로 살길      

 

    우리는 요즘 아무리 여러 사람이 공들여 탑을 쌓아도 한 사람이 세상을 완전히 망칠 수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사람’의 의미가, 결코 ‘많은 사람’의 반의어가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중요성은 성경 내에서 아주 뿌리깊게 흐르고 있는 정신이다. 물론 여러 사람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끊어지지 않는 세겹줄(전 4:12)의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 또한 원자로서의 ‘한 사람’, 근원으로서의 ‘한 사람’을 뺀다면 세겹줄은 아예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주변에도 수천명이 모여 있었지만, 단 열두 사람만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해석해주셨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사람(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이 주님을 대접한 것으로 나오는 등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한 사람’의 엄중한 무게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오히려 ‘한 사람’이란 그 자체로서 스스로 온전히 하나이신 분인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 ‘가능성으로서의 온전함’, 또는 ‘온전한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역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갈 소명을 부여 받았다. 그러니 그대, 결코 혼자라고 마음을 놓거나 쓰러지지 마시길 빈다.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어 꿋꿋이 촛불을 켠다면 세상의 어둠은 단 한 순간에 스러져 물러가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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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허락되지 않은 삶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진실이 갖는 허무함


    그렇다. 실로 진심으로 우려하던 바가 실제로 밝혀졌다. ‘그’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한다. 7시간 중 90분의 행동이 나왔고 나머지 시간을 캐는 건 의미 없다. 이미 90분 머리한 게 이미 7시간을 대표하고 있다. 나머지 5시간 반은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 그냥 ‘그’는 머리를 하기 전에 전날 고질적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수면제를 먹었거나 평소 즐겨하던 약물을 맞고 그 기운에 취해서 자고 있었을테다. 그리고 일어나서 머리하고 옷 입고 중대본으로 나갔다. 돌아와서는 평소와 조금 달랐던 일과를 보낸 기념으로 ‘보약’인 밥을 한그릇 뚝딱 해치웠을 것이다. 7시간 동안 취해 있었던 주사가 마늘 주사든 태반 주사든 프로포폴이든 수면제든 마약이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닌듯 싶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머리하기 전에는 잤고, 머리하고 난 뒤에는 옷 챙기고 메이크업했다. 상의는 정해졌으니 바지 고르고 화장하고 나간 것이다. 부스스하게 머리를 만진 것도 크게 의미 둘 필요 없다. 옆에서 참모들이 너무 평소대로 화려한 “육여사 올림머리” 하고 가면 좀 그래 보이니까 적당한 연출을 하자는 것 뿐이었다. (평소 참모들이 하는 말이 고작 이런 수준의 말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랬다. 그는 청와대의 해명 그대로였다. 한 일이라고는 오로지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보고를 "받.고.만 "있었다. 보고를 받는 순간의 그의 대사를 예상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예, 그런가요. 아이들이 빠졌군요. 하던 대로 조치하세요.” 


<그렇다, 그는 졸려 보인다>


   멍했다. 자다 일어나서 “아이들이 구명 조끼를 입었다는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라고 말한 걸 번역하자면 ‘나는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의 변형이다. 즉, 사고 전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고, 보고 후에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조치를 해야할 순간에 조치를 하지 않았다.


'얌전한' 광기


    사람들은 생각한다. 매우 거대한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정윤회 문건 수사를 막아야 했고, 부정선거 의혹을 잠재워야 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보여온 행태를 보면 매우 치밀하게 음모를 꾸밀 만한 사람이라고. 중대본에 나타나지 않는 와중에는 손가락 물어 뜯으면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광인’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물론, 그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통영함과 미군 함대의 출동을 막았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수상하기는 하다. 하지만, ‘광기’라는 것이 매우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그러한 ‘얌전한’ 광기와 더불어 참모들도 그의 광기와 그닥 다르지 않았음은 불보듯 뻔하다. 그들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윗선에서 아무 지시가 없는데 구조한답시고 움직였다가 뭔 불호령을 들을지 모르는 인간들이다. 즉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받드는 우리 내각과 관료들이 출동을 막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김기춘이 바로 ‘그’ 옆에서 이 모든 정황들을 만들어내는 구심점이다.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시대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단련된 이가 김기춘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부터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는 이가 김기춘이다. 자기 죽은 아들을 팔고서도 결코 진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 괴수가 김기춘이다. 그런 이가 ‘그’ 우편에서 호위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참모로서 자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  


    실로 그렇게 아무 일은 없었다. 그들은 보고했고, 그는 보고를 받았다. 점심도 먹었고, 저녁도 먹었다. 머리도 했고, 자기 리듬에 따라 출근한다. 급박한 상황은 바닷 속에 갇혀 있는 사람과 갇혀 있는 사람의 가족들 몇몇에게만 급박했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심기의 문제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장면을 연상해보면 좋겠다. 삼성의 이재용을 비롯한 9명의 재벌 총수들이 12월 6일에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장면 말이다. ‘모르겠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송구스럽다, 죄송하다, 더 잘하겠다’를 마치 ‘자동응답기’마냥 되풀이하는 이들을 보고 한편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질책 아닌 질책을 받는데 괴롭지는 않을까, 자기에게 추궁을 저리도 하는데 심란한 마음을 갖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럴 일은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그 와중에 건조한 입술에 립밤을 바른다>


    우리가 글의 앞에서 ‘그’라고 부르는 정체 모를 생물의 눈빛은 매우 일관되다. 삼성의 전(또는 현) 주인 이건희를 비롯하여 그 일가와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최순실을 비롯하여 그 일가도 마찬가지다. 대단히 기계적이고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닮아 있다. 깜빡임도 별로 없고, 사람의 희로애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딘지 모르게 멍하다.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누가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대한 반응을 하기보다는 일단 ‘죄송하다’고만 선수를 친다. 묘하게도 이 생물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순진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증인 장시호에게 안민석 의원이 ‘나 밉죠?’라고 물어보았을 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대답하는 것은 김기춘의 ‘신중한’ “모릅니다.”, “부덕의 소치입니다”와는 대비된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모질게 단련이 되어 있다. 그들은 목숨을 건지는 요령에 도가 텄다. ‘대의’라는 큰 그림에는 절대적으로 소인배처럼 행동하며, 후일을 기약하는 간신 눈빛을 하다가도 바로 그 즉자적인 상황을 모면하는 것에는 도가 트였다. 고(故) 황유미씨의 500만원 이야기에는 꿈쩍 않다가도 자기 상속세 이야기에서는 동공이 지진 나는 게 그런 생물들의 특징이다. 후일에 벌어질 뒷처리를 해주는 사람과 '아버지'를 비롯한 후견인이 있으니 자기는 그 상황만을 넘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 사람에게나 한껏 짜증을 내고도 뒤에 있는 엄마를 믿고 사과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버지의 눈만 속이고 형제들 몇몇만 제거하면 8조의 재산이 내 통장에 들어와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고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쉽고 간편한 ‘e-편한세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실패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의 거대한 실패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적인 감각만이 있을 뿐이다. 먹이를 포착하는 맹수와 같은 살기가 있지만, 그 외의 상황 자체에 대처하는 능력이란 눈곱만큼도 없다. 그저 생존과 관련하여 특화된 몇몇 상황에만 기가 막힌 대처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멍한 채로 구명조끼를 이야기할 수 있고, 바닷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갈 때 주사를 맞을 수 있고 엄중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립밤을 바를 수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실제로 거대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큰 존재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대타자’라고 명명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들의 아버지는 실로 막강한 권력과 막강한 대통령과 재벌 총수다. 박근혜의 아버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었다. 그는 북한체제와 경쟁하여 승리한 남한 사회의 영웅이었고, 말 한 마디면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것은 예삿일이었던 것이 아버지 박정희다. 부하의 배신에 스러졌지만, 전쟁의 잿더미에서 국가를 일으킨 불멸의 영웅 아니던가. 이재용의 아버지 이건희는 20세기 말과 21세기 들어 휘몰아친 경제의 흥망성쇠간에 꿋꿋이 살아남은 삼성 재벌가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소위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선의 화신이 아닌가 말이다.   

    자기들 또한 경쟁자들을 뚫고 아버지의 권력과 부의 옷을 입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 아니겠는가. 한 번의 실패는 곧 낭떠러지이며, 죽음이다. 실패를 통한 배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패는 죽음과 동의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실패는 실패 그 자체다.  수많은 정적들을 제쳐야만 한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의 전말을 보고 우리는 영화가 현실인지 현실이 영화인지 그 경계마저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다. 보통의 멘탈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내야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재용 또한 지금의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형제자매를 제쳐야 했고, 수많은 외척들과 싸워야만 했다. 빈 틈은 죽음이다. 자기들 나름대로 눈물 흘릴만한 '시련'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던 그들의 가슴에 종국적으로 붙여진 이름표는 ‘살인마’다. 박근혜 살인마는 304명을 죽이고, 5천만 대한민국 시민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인류의 존엄을 모욕했다. 이재용 살인마는 고(故) 황유미씨를 죽이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가정을 짓밟았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돈 귀신을 심었다.


우리 아이들을 실패하게 하라      

 

    우리는 촛불을 오랫동안 들었고, 국회에서 탄핵안은 가결되었다. 앞으로도 먼 길이 남아 있다. 누가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누가 더 실패했는가를 따질 것은 따지되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도 작은 실패를 가르쳐줄 때다. 넘어지기를 가르치고, 무너지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 넘어지되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환경, 그렇지만 그것을 아이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세밀한 셋팅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넘어져도 괜찮다, 잃을 것은 강냉이 몇 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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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짓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누가 이름을 함부로 짓는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 방에는 고서(古書)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할아버지가 소장하신 책은 죄다 한자여서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그나마 몇 개 알아볼 수 있는 몇 개의 한글제목 책이 있었다. 그 소수의 책들 의 제목 또한 거의 한글로는 되어 있으나, 대체 무슨 책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한자 음역의 책 제목들이 다수였고, 내 관심이나 깜냥으로는 알 수 없는 책들이 많았다. 그 중에 제목이 너무나 강렬하여 내 눈 속으로 돌격해 오는 제목이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누가 함부로 이름을 짓는가?’라는 책이었다. 책 표지마저 새빨간 색이었던 그 책은 제목은 너무나 강렬했지만,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이름을 잘 지으라’는 이야기겠거니 하며 꺼내서 읽어 보지는 못했던 그런 책이었다. 그 책을 탐독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돌아가버리신 할아버지는 이름이란 자고로 ‘부르기도’ 좋아야 하고, ‘뜻’도 좋아야 한다는 성명에 관한 확고한 이론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6년이 지난 지금 할아버지의 책 중에서 그 책이 가장 생각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그 책의 제목이 어린 시절 내 마음 속에 강렬했던 모양이다. 이름을 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매우 신중한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줄곧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고, 무의식 속의 그 명령 때문인지 얼마 전 태어난 나의 딸 아이의 이름은 고등학교 1학년인 17살 무렵에 이미 생각해 놓았던 ‘김수현’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








나의 이름을 지어가기      


   누구나 — 별명이 아닌 자기 고유의 — 이름은 누군가로부터 지음을 받는다. 이미 태어났는데 이름은 지어져있다. 어느 순간 의식을 차려보면 나는 이름이 있다. 그것이 아버지가 되었든 어머니가 되었든, 할아버지/할머니, 심지어 이름 짓는 작명소가 되었든 나 아닌 다른 이가 나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너는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관해 애초에 나에게는 권한이 없다는 의미다. 이름이란 모름지기 정체성, 곧 그 존재의 의미를 뜻하는데 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애초에 나에게 결정권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면 그만큼 나란 존재가 이미 타자에 의존된 존재란 것을 알 수 있다. 너는 애초에 ‘무엇이어야 한다’는 그 일면 축복과 강요가 뒤엉킨 그것이 바로 ‘나의 이름’인 것이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무엇’이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존재의 가능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치 내가 태어난 것이 미리 예정되었고 결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앞서 말했듯 축복과 강요의 정치학이 살아있는 한국의 이름짓기 방식은 ‘돌림자’라는 특유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요즘은 그 돌림자라는 것이 구태의연하단 생각이 많아서 돌림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고 부르기 좋거나 유행하는 이름을 넣는 방식으로 짓곤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왠지 모르게 마음 한 켠에 가문에 소속되지 못할 것만 같은 부담감을 이겨내야만 하는 숙제가 있다. 그것이 화석화되어 지금은 그저 허울뿐인 가부장제의 잔재로만 남아 있어 그런 부담감마저도 들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만큼 이름에는 나의 계보와 근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우주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떠안고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 계보와 근원 말이다.

    고로 내가 떠안고 있는 나의 이름이란 지금 내가 이뤄내야 할 하나의 사명이다. 내가 ‘OOO’이란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이름의 성취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기로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 아주 작지만 매우 소중한 일부분의 일을 맡아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나는 동녘 동(東)에 윤택할(또는 빛날, 젖은) 윤(潤)이라는 이름을 쓰는 나는 곧 빛나고 윤택한 삶을 살도록 요구받은 것이다. 윤택하다는 것은 내 존재가 빛나라는 온 가족의 염원을 담아 지어진 것이겠지만, 그 이름은 ‘빛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윤택한 삶’이란 게 무엇인지 날 고민하게 하였다. 나의 이름을 지은 할아버지는 ‘개인’으로서의 내가 그런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 그런 이름을 지으신 것일테지만, 이미 그 의미는 할아버지나 나의 손을 떠나 이제 그 이름을 지닌 나란 존재가 어떻게 윤택하게 살 것이며, 나 뿐만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을 이루는 사회 전체가, 더 나아가서는 지구 상의 생명체 모두가 ‘윤택하게 산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로써 ‘김윤동’으로서의 나는 내가 다른 이와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 윤택함, 즉 다른 사람의 어둠을 먹이 삼아 얻을 수 있는 윤택한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생명이 윤택한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나 혼자가 아닌 더불어 윤택하게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신 것이다. 


    즉, 이름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이름을 ‘짊어진’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이름을 설계도 삼아 삶을 짓는 건축가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집을 짓듯 나의 삶을 그 이름에 걸맞게 짓고 만들어가야 한다. 내 이름은 ‘선취(先取)’된 것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만, 이미 지어졌다. 내 이름의 뜻으로 나는 비록 완성되진 않았더라도, 살아서 완성해내야 하는 존재로 탄생되었다. 내 존재의 의미란 하나님에 의해 태초에 계획되었고, 아버지/어머니에 의해 매개되었으며, 나라는 존재에 의해 성취되는 구조다. 설령 나의 이름이 아버지가 딸 낳고 술 잡수신 채로 제발 내 아래로는 아들을 꼭 낳으라는 뜻으로 ‘O자(O子)’라고 이름 붙여졌을지라도 그것이 단순히 아들을 낳기 위한 염원을 넘어 왜 우리 사회에서 아들을 꼭 낳아야 하는 것인지, 아들을 낳는 것은 어떻게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유익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 그 존재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지어진 것으로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이게 바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가진 ‘이름의 운명’이다. 나라는 존재는 결코 이 우주의 장구한 역사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 내 이름을 지어가기 위한 사람이다. 내 이름에 걸맞는 내 삶을 튼튼한 벽돌로 기초를 세우고 비어 있는 틈을 메우고 아름다운 장식물로 꾸며 완성해 내야할 사명을 지닌 사람이다. 대체 이렇게 저렇게 끼워 맞춰도 의미가 찾아지지 않는 내 이름의 의미라 할지라도 그 이름은 온 인류의 과제를 짊어진 이름임을 기억해야 한다.


타자를 부름으로써 지어지는 내 이름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존재가 이름을 부여 받았다는 것은 삶의 설계도를 부여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 이름이라는 설계도를 지으려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밥을 지으려면 쌀이 있어야 하듯 설계대로 내 삶을 지을 재료가 있어야 한다. 나 홀로 내 이름을 지을 수 없다. 즉, 나는 설계도만 가졌을 뿐 아무 것도 아니다. 혼자인 나는 ‘가능성’일 뿐 실제로는 존재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름만 가진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모든 이름이란 그래서 존재의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게 역설적인 특징이다.

    결국 내가 이 세상에 있기 위해서, 나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타자를 불러야 한다. 모든 일은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김춘수의 ‘꽃’이 왜 이름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시가 되었고, 우리의 존재를 뒤흔드는 시가 되었을까. 바로 ‘타자를 부르는 일’로부터 우리의 이름이 시작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1연과 2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몸짓’과 ‘꽃’은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멀다. 그가 몸짓이라고 흔들어 대도 내가 불러주지 않으면 그것은 몸짓이지 꽃이 아니다. 여기서 ‘그’와 ‘나’를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3, 4연에서는 결국 1, 2연에서 벌어진 몸짓과 꽃의 관계를 근거 삼아 나의 존재를 성찰한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즉, 부름은 모든 일과 사건의 시작이다. 내가 부름으로 타자는 불려지고, 사건은 발생한다. 또한 타자를 내가 부름으로 나는 비로소 그에 대응하는 ‘내’가 된다. 부름이 사건을 만들어 서로의 이름이 되고, 그 이름은 존재가 ‘된다’. 기묘하게도 창세기 2장의 창조기사에서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개역개정)


       이 구절 전까지 아담은 그 최초의 개체로서의 인간, 바로 그 사람으로서의 ‘아담(Adam)’이라고 불려지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고 했을 때는 그 개체가 속한 종(種)의 집합적인 이름으로 일컫는 것이고, 또한 그를 일컫는 말 ‘남자’, 또는 ‘생령’이라는 그의 다른 이름은 종의 집합(무리)이 가진 특질(Character)을 말하는 것이었지, 그 개체의 고유 이름 ‘아담(Adam)’은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하와가 창조되기 전이므로 복수(複數)의 인간이 없었기에 이름에 개체적 특징과 집합적 특징이 구분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성경에서 그가 단독적인 몸을 가진 바로 그 한 사람 ‘아담’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각종 들짐승과 새들을 이끌어 가셔서 관계를 맺게 하실 때에 마침내 그는 ‘아담(Adam)’이 된다. 전까지 아담이 아니었던 그가 하나님이 들짐승과 새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시면서 비로소 ‘아담(Adam)’이라는 고유성을 획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담(Adam)은 ‘흙’이라는 자기 이름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되고자 했다가 그만 타락했다. 아담 안에서 죄를 짓게 된 인류는 이후 ‘이름이 없는’ 죽음과 무(無)의 심연 속에서 고통받으며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성경에서는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결코 해명되지 않는다. 언제 어떤 형태로 죽을지 어떤 이유로 죽게 될지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린 ‘죄의 결과’라고 매끈하게 단정짓기 전에 죄란 게 당최 무엇인지 해명해내야 하며, 그 전까지는 ‘매우 지당한 죽음’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설사 그것이 매우 그럴싸해 보이는 알고리즘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나 존재의 죽음 앞에서 – 보통의 사람이라면 – 우리는 ‘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두 번째 아담이자, 새로운 인류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는 탄생부터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승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죽음과 그에 따른 고통에 이름을 짓는 자리에 늘 계셨다. 그 분이야말로 태어날 때부터 고통의 현장에서 고통 그 자체를 몸소 겪으신 분이다. 아비 없는 자식으로 알려져 세상에 빛도 보기 전에 돌에 맞아 죽을 뻔한 바로 그 분이 바로 ‘임마누엘’ 아니던가? 헤롯왕이 휘두른 영아 살해의 칼날 앞에서 홀로 살아남아 겨우 도망친 ‘유대의 임금’아니신가? 이 세상의 무자비한 전쟁과 폭력 속에서 늘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 자체가 아니신가?

       그러나 그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이름을 부르셨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 수군수군거릴 때, 그 천한 신분으로 가장 신성하고 높으신 야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다.’(눅 2:49) 이후에도 예수는 거침이 없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던 촌뜨기들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역자로 불렀다. 이러한 부름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등 권력자들이 보기에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고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될 눈엣가시와도 같은 부름이었다. 또한 안식일에 배고파 하는 자들을 위해 직접 일을 지휘하심으로써 안식일을 ‘사람을 위한 날’이라 개명(改名)하셨다. 하지만, 이름 없어 고통당하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셨다. 베드로에게는 게바라는 이름을 더하셔서 그를 튼튼한 반석 위에 존재를 세우셨다. 또한 매일 밤낮 소리 지르고 자기 몸을 못살게 구는 이에게 모두가 한결같이 ‘귀신들린 자’라고 낮춰 부를 때, 찾아가 대체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신 것이 바로 예수였다. 앞뒤 모르고 경계없이 날뛰는 자에게 한계를 일러줌으로써 귀신들림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셨다. 또한 죄인이라 낙인 찍혀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그 이름들에 다정하게 ‘순결하고 의로운 자야!(삭개오의 이름 뜻이다.)’라고 부르시며 그가 단지 세리나 죄인이 아닌 ‘삭개오’라 호명(呼名)하셨다. 예수의 사역은 곧 권력자들이 독점하고 악용하는 이름들에 대한 개명(改名) 사역이요, 이름 없이 사회 속에서 존재 없는 자들에게는 명명(命名)사역이었으며, 잊혀진 이름을 다시 불러 이 세상으로 소환하는 호명(呼名)사역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타자를 부르고 이름을 짓는 일들을 통해 예수는 ‘자기 민족을 구원할 자’라는 선취된 자기 이름을 지어갔던 것이다.


남겨진 과제 : 지어가야 할 이름들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짓지 말아야 함을.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왜곡 자체란 것을. 사실 우리는 이미 십계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함부로) 짓지 말아야 함을 알고 있다. 내 멋대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짓지 말아야 할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나와 타자의 이름 또한 함부로 지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서 비롯된다. 5. 16을 ‘군사혁명’이라 부를지, ‘쿠데타’라 부를지, 5. 18을 ‘민주화운동 또는 민주화혁명’이라 부를지 ‘사태’라 부를지, 4. 16을 ‘사고’라 부를지 ‘학살’이라 부를지 모든 것이 이름의 문제다. 어디에 설 것인가는 어떻게 부르고, 어디까지 다다를 것(이르다->이름)인지에 대한 문제다. 이름 안에 실체가 있고, 이름이 실체다.

       하지만, 우리는 명백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을 ‘모퉁잇돌’이라 기억하는 그 이름 예수의 비밀을 믿는 자들 아니던가.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이름, 짓는’ 모습들을 말이다. 가서 이와 같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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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카
    2016.09.20 13:4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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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윤택한 하루가 되었습니다.
  2. 윤동
    2016.09.21 09:2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저도 감사합니다 :)


그 곳이 시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 곳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음 한 켠에 어떤 하나의 장소, ’그 곳’을 두고 산다. 이 문장을 접한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그 곳’은 행복하고 기뻤던 기억이 있었던 곳이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프고 슬픈 기억이 있었을 수도 있다. 또한 시간이라는 축으로 비교해보면 과거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일 수도 있지만,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 하늘나라’처럼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는 그런 장소일 수도 있다.  


       ‘그 곳’하면 떠오르는 그 장소가 좋았던/나빴던 기억이 있는 곳이든 혹은 과거 어느 한 때의 장소이든, 미래에 도달해야 할 그 장소이든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별개로 아주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장소에서 살아간다. 일상적인 터전을 —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 잃은 유민이나 난민의 신세가 아니라면,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거의 비슷한 공간을 점유하고 경험하며 살아간다. 매번 같은 교통수단을 타고 출근을 해서 같은 공간에 가서 업무를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같은 집 안에서 매번 해 오던 살림을 반복하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한데 왜 유독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일상적인 공간과 다르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세 가지의 의미에서 ‘시(이)기’ 때문이라 상상해본다.   


1. 그 곳은 시(Ti)다 : '결핍'으로서의 그 곳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는 계이름이 있다. 우리 고유의 오음계도 있지만, 근대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의 음계는 도(Do),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 시(Ti). 이렇게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의 7음계에서는 음정을 쌓아 화음을 만드는데, 서로 잘 어울리는 음끼리 쌓으면 ‘협화음’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으면 ‘불협화음’으로 분류한다. 보통 1, 4, 5, 8도 화음을 협화음 중에서도 가장 잘 어울린다 하여 ‘완전’협화음이라 부르고 나머지는 완전하지 않더라도 어울리는 화음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관심하는 계이름 ‘시(Ti)’는 불협화음 중에서 ‘장7도’이라 불리는 화음을 생산한다. 그나마 ‘장 2, 3, 6도’ 화음은 우리의 귀에 완전협화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감을 주는 반면, 장 7도만큼은 가장 불안정한 화음을 들려준다.

  

        내가 ‘그 곳’을 ‘시(Ti)’라고 표현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Ti)’라는 계이름을 통해 불협화음이 발생하듯이 ‘그 곳’은 늘 우리 삶에서 불완전한 화음으로 한 켠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가 들어가는 major7 이라는 코드는 결정적으로 첫 번째 음인 ‘도’에서 ‘미’, ‘미’에서 ‘솔’까지 세 음씩 쌓을 때는 아주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화음이지만, 거기서 또다시 세 음째인 ‘시’음을 쌓으면 앞에 쌓았던 조화가 모두 무너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달리기 경주에서 1~3번 주자가 줄곧 선두를 지키다가 앵커 주자가 중간에 넘어져 모든 경주가 어그러지는 기분이다. 절룩거리는 시, 완벽을 깨뜨리는 이 ‘시’는 마치 미운 오리 새끼처럼 눈총을 받기 딱 좋은 녀석인 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성과 그 조화에 일침을 가하며, 조화로움을 깨뜨린다 비난받는 ‘시’는 기죽거나 위축되지 않고 자기 소리를 낸다. 발가벗겨진 채로 적나라하게 자기 자신을 내비치고 내던지는 기분이다. 협화음이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철옹성같은 완벽성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 곳은 ‘시’음이 만들어내는 ‘major7’ 코드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늘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장밋빛 계획을 늘 세우고, 그렇게 실행해 가지만 그 행복한 삶 속에서 언제나 ‘시’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거기에 끼어들어 절룩거리게 한다. 가난, 폭력, 이기심, 시기, 질투, 질병, 그리고 죽음 등 우리를 늘 괴롭히는 그 고통의 장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과거에 좋았던 기억을 가진 장소나 미래에 다다러야 할 그 장소들은 ‘지금 없기’에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가 현실에서 만족할 가능성을 지연시킨다.  


       이러한 ‘결핍’으로서의 그 곳, ‘시(Ti)’로서의 그 곳을 최근의 철학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용어, ‘타자(他者)’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을까? 우리는 결핍들인 ‘타자’를 끝없이 사랑하고 성취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미워하고 어서 그것들이 사라지도록 바라기도 한다. 인간은 언제나 결핍으로서의 ‘타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아가며 그것이 곧 삶의 주된 동력이라고까지 부를 수도 있을만큼 강력하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은 오히려 그러한 욕망이 사라지면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는 그 욕망의 성취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지연시키기까지 한다고 말한 바 있지 않았던가!   


2. 그 곳은 시다(Sour) : 몸이 먼저 반응하는 '새콤한' 그 곳


       그 곳은 신 맛이다. 그 곳을 맛 중의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 ‘신 맛’과 가장 가까울 것이다. 비유의 언어일 따름이지만, 만약 그 맛이 짜거나 달콤하거나 맵다면 우리 기억에 강렬하게 ‘그 곳’으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신 맛은 매우 묘한 매력을 가진 맛이다. 신맛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노오란 색의 레몬 또는 집 안에 있는 식초가 떠오를 것이다. 이런 음식들은 생각만 해도 벌써 침부터 고이고, 미간이 찌푸려지곤 한다. ‘여우의 신 포도’라는 우화에서 나오듯이 인간에게 신 맛은 고대로부터 부정적인 맛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동시에 신 맛은 인간에게 사랑받는 맛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명이 뱃속에 잉태했을 때, ‘신 맛’을 찾기도 하고, 뭔가 깔끔하게 뒷맛을 잡아주거나 잡내를 제거하는 데에 신 맛을 이용한다. 심지어 가학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그 애증의 맛. 그 맛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곳’의 맛과 연결 지어볼 수 있다. 한 블로거가 표현한 ‘신 맛’에 대한 말을 인용하면서, 그 신 맛이 가지고 있는 묘한 매력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사실, 신 맛이 그렇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호사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달콤함의 옆에 어느새 능청스럽게도 자신의 성격을 죽이며 새콤함으로 다가가 달콤함을 보조해 주기도 하고, 온통 지치기 쉬운 미각을 흔들어 깨우며 식도락의 기쁨을 되새김질 하도록 격려해온 결과이다. 심지어 가끔은 단 맛에게 자신의 공적마저 양보하며 자취를 완전히 감추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 신 맛은 악착같다. 때로는 자신의 고개를 숙이기도, 때로는 쉽지만은 않은 일을 도맡아 오며 각고의 노력을 들여 악착 같게도 신 맛은 인정받고 있다.[각주:1]  


       우리가 기억하는 ‘그 곳’이 주는 맛도 레몬처럼 시큼하다. ‘그 곳’에 대한 기억과 향수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잠복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곳’과 관련된 자극이 주어지면 불현듯 나타나 우리의 뇌와 몸을 쏘고 도망간다. 그 자극은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이성의 판단을 받을 틈을 주지 않고 빠르고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이성이 중지되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상이 무료하기 짝이 없을 때마다 ‘그 곳’은 자연스럽게 아무 일 없는듯이 흘러가는 일상을 중지시키고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는지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곳’은 그렇게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숨어 있으면서도 불현듯 나타나 우리의 존재를 건드리는 ‘신 맛’과도 같다.  


3. 그 곳은 시다(Poem) : '극단적'인 것으로서의 그 곳


        ‘그 곳’은 우리 삶의 ‘시(poem)’로서 존재한다. 그 ‘시’라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인지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공감하고 있는 ‘시적인 무엇’이란 것이 있다고 우리는 공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학비평가 황현산 선생은 『우물에서 하늘보기』(2015. 삼인)에서 ‘시적인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에는 한 편 한 편마다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 있다.(…)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에게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란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시는 늘 우리에게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닌 것 같은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 사람들은 저마다 제 심정이 한 자락 노래를 타고 날아오르듯 약동하고, 삶의 어떤 매듭이 물결처럼 밀려드는 몽환에 휩쓸리고, 정신이 문득 소스라치면서 도 하나의 새로운 각성에 이르던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시적인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동력과 연결된 모든 것들을 말한다. 그 동력은 정신이 집중된 시간에도 나타나고 심신이 풀려 자유로워진 시간에도 솟아올라 내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은 아님을 알려주곤 한다."[각주:2]


        ‘그 곳’은 그렇게 극단적인 무엇이다. 우리가 삶에서 있는 힘껏 치닫다가도 애써 발을 땅에 끄을며, 멈추어야 하는 거기에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바로 ‘그 곳’이다. 가고는 싶고 어디인지도 알고 있지만, 갈 수 없는 곳. 그래서 더욱 갈망하게 되는 곳이 ‘그 곳’이다. 그래서 ‘그 곳’은 시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곳이다. 너무나 원하지만, 갖가지 현실의 제약으로 갈 수 없는 곳, 그럼에도 ‘시’라는 극단적인 언어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거기가 ‘그 곳’이다.

       마치 신명기 34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모압평지에 선 모세의 느낌이라고 하면 어떨까. 분명히 자기 자신의 발로서는 넘어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준엄한 소리가 계속해서 가로막는다. ‘너는 거기에 건너가지 못할 것이다.’(신 34:4)라고 말하기에 오히려 더욱 미치도록 건너가고 싶은 그 곳! 모세에게는 삶의 이유였고, 광야 여정의 최종 목적인 그 곳! ‘여기까지 그 많은 사람들은 데려온 게 나인데, 그깟 잘못 하나 때문에 이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가!’라고 울부짖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그 곳, 거기가 ‘그 곳’이다.


그 곳은 없다, 하지만...



        ‘시다’라는 말로 정리해 본 ‘그 곳. 과연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디일까?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그 곳’이라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한 언술이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 곳’이란 ‘없음’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 그리고 거기서 함께했던 그 ‘시간’, 그 ‘사람’ 그리고 ‘수많은 무언가들’은 이제 없기에 존재한다. 그 곳이 없기에 고통스럽고, 그 곳이 없기에 이성과 의식이 아닌 무의식과 몸으로만, 언어를 초월한 언어로만 갈 수 있다. 그래서 꿈에서나마 그려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곳’은 가려고 해도 결코 갈 수 없는, 어떤 극단적인 무언가로 남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훗날 우리가 미래의 그 순간에 기억할 ‘그 곳’은 언젠가 과거에 우리가 지나온 ‘현재적 공간’이었다. 없음으로 그리워하고 추억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 곳’으로 만들어지기 이전 찰나와 같은 그 순간에 별과 같이 반짝이는 ‘그 곳’을 소중하게 만들려 몸부림친다면 시린 가슴으로 ‘그 곳’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을 것 같다고.


ⓒ 웹진 <제3시대>

  1. http://berkeleyopinion.com/440 [본문으로]
  2.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보기』 (2015. 삼인), 8~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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