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선택받은 사람인가? I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뽑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헐고, 세우고, 심는 야훼


우리가 ‘예언자’ 또는 ‘선지자’ 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든 애끓는 외침 또한 이런 타자를 생산해내는 구조를 타파하고 돌이켜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처음 이루었던 그 약조를 기억하고 그 약속으로 돌아가 공동체를 경영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벌이는 야훼의 불타는 사랑 고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렘 1:10)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스라엘 국가가 왕조의 시대를 열고 난 다음의 이야기를 간단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왕조가 생기고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이스라엘이 강력한 국가의 꿈을 꾼 것이 사울과 다윗의 때였는데,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꽃피운 후에 둘로 분열되고 말았다. 잠시 잠깐 팔레스타인 지방의 맹주 이스라엘이라는 ‘꿈’은 다시 힘을 잃고 몰락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한 때 오므리 왕조에서 큰 번영을 한 번 이루긴 했지만, 그 시기를 제외하고 많은 침략과 강대국 사이의 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남왕국 유다 또한 그나마 전쟁의 화마에서 비껴나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평성대를 누리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것이 아니라, ‘별로 탐나지 않는 영토’를 가진 탓에 산골 구석에서 떨며 세월을 보냈다. 두 나라 모두 이런 강대국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설움을 견디며 자생하려 애썼지만, 결국 비교적 강대국이었던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해 기원전 723년에, 남왕국은 바빌로니아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왕조의 탄생 이래, 다윗 시대 나단처럼 국가에 속한 선지자이든지 엘리야, 엘리사 등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선지자 집단이든지 국가의 권력에 대항한 선지자 그룹이 남/북왕국 모두 계속해서 계승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결 같았다.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 맺어진 약조, 곧 ‘법’은 유효하며 지금도 그 법으로 다 형용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야훼 하나님의 신실한 ‘개입’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로서 고통 받을 때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간음 행위를 저지르고(호세아), 동족들을 신발 한 켤레 값을 갚지 않았다는 죄 아래 종으로 팔아 넘기고(아모스),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지 마음은 멀리 떠난(이사야) 행위를 서슴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버림 받은 자'들의 공동체였던 이스라엘이라는 기원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숨기려고 했다. 이들은 지나간 출애굽 사건을 운운하거나 기억할 때가 아니라 오로지 미래의 더 많은 풍요로운 ‘생산’을 국가의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야훼를 과거의 뒷방 늙은이 취급하였다. 그리곤 다른 나라들의 훌륭하고 멋지고 폼나는 기원을 가진 자들처럼 거짓 신화를 만들어내거나 야훼가 아닌 다른 신과의 동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다. 뽑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헐어버리고 세우고 심는 삶의 역동성이라는 본질을 주제를 가차없이 내팽개쳤다. 이런 야훼의 속성은 불안하고 예측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등한시하고 바알의 ‘오직 성장, 오직 번영, 오직 풍요’의 길로만 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야훼의 예언자 전통, 곧 나단이나 엘리야의 그것처럼 열정 넘치고 정념 어린 시도들이 가끔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외침’으로 여겨지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뿔뿔이 흩어졌고, 잠시 고레스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통해 새로운 성전을 짓고, 다시 독자적인 공동체를 시작해보려 했지만, 이내 그런 시도들 또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 중의 하나인 로마를 만나 좌절당했다. 이제 더 이상 일어날 힘조차 없어져 버린 것이다.


예수가 '폐허 속에서' 꿈꾼 이스라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찬란했던 다윗 왕조의 역사와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마음의 자부심이 사라져 갔다. 선택받아 ‘약속의 가나안 땅’을 (무려) ‘차지’하게 된 우월하다고 여겨진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러번에 걸친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부서지고 짓이겨져 형체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수많은 야훼의 예언자들이 히브리의 전통을 기억하고 왜 우리가 선택되었는지, 그리고 선택받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일러주었지만, 그 모두 처음으로 돌이키기에는 늦어버렸다. 하지만, 예언자들을 통해 근근이 명맥을 이은 야훼 신앙과 이집트 노예 히브리와의 계약이라는 기원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고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예수가 등장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크로산은 추측한다.


사회적인 차별을 계속 당하고 불의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외세의 지배, 식민지 착취의 물결이 유대 영토를 휩쓸자 사람들은 오랜 동경으로 신성해지고 유토피아적인 이상주의로 충만한, 지나간 시대의 평화와 영광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미래의 다윗과 같은 지도자를 마음에 그리게 되었다. 예언자 미가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활동한 예언자 이사야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서 그보다 젊고 또 그와는 달리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이 미가의 책에 모아진 예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열렬한 희망이 들어 있다.(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각주:1]


그들에 대한 통제가 점점 더 총체적인 것이 되어 가고, 아울러 그 희망이 점점 더 절박하게 되자 당시의 개인들이나 집단들은 흔히 묵시종말적인(Apocalyptic)입장으로 돌아서 하나님의 개입(divine intervention), 즉 하늘을 땅으로 가져오고 땅을 하늘로 높이는 대규모적인, 세계를 뒤흔드는 하나님의 개입을 상상하기에 이른다.[각주:2]


로마가 유대 땅을 지배한 이래로 유대인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사람들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야훼 하나님이 전쟁에서 진 것은 아닌지, 전쟁에서 졌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된 것인지, 혹 계속해서 메시야를 기다려야 한다면 그 메시야의 모습이 우리가 이제까지 상상하던 모습과 다른 건 아닐지 의견들이 분분해진 것이다. 이스라엘은 급기야 묵시종말적인 메시야를 기대하는 움직임들이 성행을 이루었다. 다윗 왕조란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는 일이 아니라 야훼의 불과 칼로 모든 현재의 권력을 뒤엎고, 지금의 시공간을 중단시키며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열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라는 사건일 것이라 기대하기 시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가 그린 하나님의 통치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꿈꾼 ‘자유와 해방’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건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여기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너무나 현재적이고 너무나 현실적인 일이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자. ‘현실적’이란 말은 현재의 체제들을 다 인정하고 그대로 현재의 법들이 유효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이 아니었다. 현재의 정치 사회체제를 모두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있기에, 우리가 잘 모르는 ‘원형(archetype)’을 본떠 지금의 덕이나 윤리, 또는 ‘지혜’를 통해 슬쩍슬쩍 알려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배우고 마음 속으로 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조금은 도식적이지만 존 도미닉 크로산이 제시한 아래의 도표[각주:3]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가 주장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것은 묵시론자들의 그것처럼 너무나 타의적이어서 그것에 대한 ‘홍보나 설득’ 정도로만 국한되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또한 현자들처럼 윤리나 지혜의 어떤 박식하고 복잡한 것들을 습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이고 정치적이며 우리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었고 새로운 이름을 얻어 자기가 사는 곳에서 모두 축제를 벌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엄연한 족보와 가문이 있어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었던 권력자들이 통치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지금을 끝장낼 하나님의 통치가 ‘언젠가는’ 이루어 질 것이라고 무력하게 앉아서 골방에서 하늘만 쳐다보는 무능력하고 모래알 같은 노예들의 나라도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계속해서 주장해왔던 이스라엘의 기원,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과 소속 없고 떠돌던 사람들로서의 이스라엘, 그럼에도 느슨하지만 아름다운 연합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품고 살아갔던 그 출애굽 공동체의 원형을 기억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간 이가 바로 예수다. 왜 그리 말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 나타난 수많은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우리의 주제와 연관된 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아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예수가 가정을 공격했다는 점과 둘째는 너무나 파격적인 공동식사를 벌였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곧 혈통으로 형성된다는 주장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방의 사람과 결혼한 자는 곧 쳐죽여야 할 중대 범죄임을 성서 내에서 말하고 있고, 그것이 처음에는 이방신과 우상의 유입을 막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대단히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배타성’을 지키는 강고한 논리로 이어졌다. 심지어 “이스라엘 = 혈통”, 즉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은 혈통으로만 계승된다는 논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있는 저 중동 팔레스타인 땅의 ‘이스라엘’ 국가에서도 발견된다.[각주:4] 그런데, 예수는 2천여년 전에 이미 이스라엘 곧 야훼 하나님의 울타리는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다.[각주:5] 두번째 파격적인 공동식사의 자리 이야기는 하나님이 애초에 만들었던 하비루들의 공동체가 어떠했는지 그 원형을 그대로 나타내준다.[각주:6] 이 공동식사에 관해서 크로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잔치 준비가 다되었는데 자리가 텅 빈 것이다. 주인은 오지 않은 손님들의 자리를 거리의 뒷골목에서 아무나(Anyone off the street) 불러다 채운다. 그런데 만일 실제로 뒷골목에서 아무나 데려왔다면, 그 자리는 모든 신분과 성과 계층이 온통 뒤섞여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각주:7]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열려 있고, 음식 속에서 다 뒤섞일 수 있는 식사란 무엇일까? ‘사회의 수직적인 차별과 수평적인 분열의 축소판 지도가 되는 식탁을 초월해서 함께 나누는 식사’[각주:8]인데, 곧 이런 식사를 통해 예수가 얻은 별명 곧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경멸적인 호칭은 ‘고대 지중해 지역의 문화와 사회에서 기본적인 가치가 되는 명예와 수치와 근본적으로 충돌’[각주:9]하는 것이다. 매우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예수는 단순히 사회의 관습에 도전하는 멋드러진 히피(hippie)가 아니었다. 그는 명예를 모르고 수치도 모르는 성격 이상자에 가까웠다.[각주:10] 그 옛날 하비루처럼 어떤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떤 언어도 소유하지 못한 차가운 눈빛을 받는 그야말로 ‘마음이 가난한 자’였다.


단단한 혈통이 아닌 '느슨하고 서먹서먹한 사이'로서 이스라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우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처음 형성되었던 시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된 예수까지 유일한 참 하나님, 야훼와 그의 ’선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각주:11] 어찌 되었든 야훼 하나님이 애초부터 꿈꾸고 불러 모았던 이스라엘은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야훼 하나님이라면 지금 중동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의 폭력으로 억지로 국가를 수립해버리고 거대한 장벽을 치고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나아가서 지금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지금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선민의식을 어떻게 보실까? 일요일이면 예배당에 가고, 밥을 먹을 때 기도를 드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비(非)신앙인들을 수렁에서 끌어올려주어야 할 사람으로 여기고, 또한 일부 근본주의자들[각주:12]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성애자와 동성애를 배격하고 이단 사설들을 모두 궤멸시키는 사명을 하나님의 목표인 것처럼 말하는 이 ‘경계들’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다.’ 이 말은 곧 내가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결코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내가 내일이 되어서, 1년 후에도,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 어떻게 호언장담할 수 있는가? 믿음이 내 ‘의지’와 관련되어 너무나 흔들리기 쉬운 근거이기에 그것을 혈통이라는 아주 견고한 근거, 곧 내 몸 속에서 빼낼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그 피 속에 근거를 심었던 이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선택된 백성이란 곧 ‘순수 혈통’이란 믿음을 가졌던 유대인들, 아랍인들, 그리고 나치주의 에 물든 독일인들, 그리고 수많은 근본주의자들이 가진 폭력성을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많이 목도해 왔다.[각주:13]


또한 이렇게 확고하지 않은 이런 저런 근거(경계)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우리는 이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정체성, 선민의식을 하나의 특권의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다른 정체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부심의 근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는 않더라도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어떤 때는 누군가를 ‘구원’해 주어야 할 사명을 받은 자로, 어떤 때는 근엄하게 ‘훈계’해야 할 특명을 받은 자로 이해하고 있는건 아닌가?

<영화 '네 멋대로 해라' 중 한 장면>[각주:14]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래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주 어딘가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롭게 별이 되어 이 세상에 홀로 던져졌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나는 ‘원래’부터 태어나보니 금수저, 부자였네, ‘원래’부터 빼박상남자였네, ‘원래’ 어디 출신이었네”와 같은 말을 지껄인다면 그 수준의 저열함을 들키는 일이다. 그대의 ‘원래’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대가 말하고 있는 말 ‘이전의 상태’이며, 말로부터 유유히 빠져나온 가능성으로서 말 ‘그 이후의 상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런 ‘정체성’의 환상과 마법에서 늘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을지 그 긴장의 연속선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 중 2계명의 ‘우상숭배 금지령’의 정신이기도 하다. 내가 안주할 수 있는 나의 스펙, 나의 출신, 나의 가족마저도 우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연극 언어 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고안해 낸 ‘소격효과(疏隔效果 : Verfremdungseffekt)’라는 말이 있다. 풀이하면 "낯설게 하기”라는 뜻으로도 쓸 수 있는 이 말은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서, 의도적으로 관객과 작품 사이에 거리를 두는 기법’을 의미한다.[각주:15] 이것을 우리의 이야기에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내가 행동하고 따르고 있는 것들, 내가 나도 알지 못하게 움직이고 있는 규칙들을 늘 낯설게 보고, 거기서 빠져나와 세계와 부조화에 신경증적으로 시달릴 수 있는 사람만이 역설적으로 타인을 끌어안을 수 있는 자이며, 늘 실패하는 사랑으로서’만’ 존재하여 가고자 하는 곳에 끝끝내 닿지 못해 부둥켜 안으려 애쓰다가 실패하지만 또 다가가는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자이다.


<덧붙여>


마지막으로, 내가 최근 읽은 책 중 자신의 정체성과 비정체성 사이의 간극을 고뇌하면서 쓴 한 작가의 글을 옮기고자 마치려고 한다. 그는 자칭 ‘세속적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무엇이어야 하는지, 세계대전에서 수백만 이상이 희생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현대에 자기 자신과 인류 모두에게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 수없이 많이 고민한 흔적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고 있다.


나는 항상 지나간 고난을 탄식하는 데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일을 피해 왔고 과거의 불행을 보상받겠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난 여기에, 그리고 지금 넘쳐나는 불의를 찾아서 뿌리를 뽑거나 최소한 줄이기라도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속한다. 박해받고 희생당했던 과거는, 오늘날 박해받는 사람들과 내일 희생자가 될 사람들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난 역사 속에서 사냥꾼과 사냥감,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역할이 매우 자주 뒤섞이며, 그러한 하나의 장으로서 역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고 있다.[각주:16]


ⓒ 웹진 <제3시대>



  1.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50쪽. [본문으로]
  2. 위의 책, 66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96~101쪽의 내용을 도표로 요약한 것이다. [본문으로]
  4. 내(저자인 슐로모 산드)가 국민으로 있는 나라는 인구 조사에서 나의 민족 정체성을 ‘유대인’으로 정의하며, 그 자신을 ‘유대 민족’의 국가로 부른다. 즉, 이 나라와 그 법을 만든 이들은 이 국가를 국민 전체가 가진 민주적 주권의 제도적 표현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지에 상관없는 ‘전 세계 유대인들’의 집합적 자산으로 간주한다. 이스라엘 국가는 나를 유대인으로 규정한다. 내가 유대 언어를 쓰고, 유대 노래를 흥얼거리고, 유대 음식을 먹고, 유대 책을 쓰거나 어떤 유대적인 활동을 통해 나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이며, 외할머니는 외증조할머니 덕분에(또는 때문에) 유대인이다. 그렇게 세대의 고리가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슐로모 산드, ⌈유대인, 불쾌한 진실⌋, 훗, 14~15쪽) [본문으로]
  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무리 가운데서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눅 11:26~27)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마 10:34~36) [본문으로]
  6. 21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였다. 22 그렇게 한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23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눅 14:21~23) [본문으로]
  7. 위의 책, 114~115쪽. [본문으로]
  8. 위의 책, 116쪽. [본문으로]
  9. 위의 책, 116쪽. [본문으로]
  10. 위의 책, 117쪽. [본문으로]
  11. 물론, 예수 이후 바울과 사도들로 이어지는 초대 교회 내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간의 이야기는 우리가 말한 이스라엘과 선민의식에 대해 나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와 많은 부분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12.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자기에게 타락한 현대사회의 치료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은 자기가 치료하는 척하는 그 질병의 증상이다.(John Gray, Straw dogs, London Granta, 2003, p. 18. 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 110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3. https://www.youtube.com/watch?v=VbYqP5j1SVM ⌈The DNA Journey⌋,이 영상을 참고해 보라. [본문으로]
  14.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mbom74&logNo=220014597824&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본문으로]
  15. https://www.youtube.com/watch?v=LUocsdy-8TE 장 뤽 고다르가 보여준 여러 가지 파격적인 영화 편집 기법들은 당시 누벨 바그 영화들이 보여준 ‘소격효과’를 전형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 [본문으로]
  16. 슐로모 산드, ⌈유대인, 불쾌한 진실⌋, 훗, 60~61쪽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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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선택받은 사람인가? (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택하신 족속?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 상반절)


교회에서 매우 좋아하는 성서의 구절 중에 하나기도 하고, 유명한 성경구절이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만들고, 전쟁에도 능하시며, 모든 세계의 만물을 주관하시는 유일한 신, 하나님에게 선택되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 곧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자리에 올라설 수 있으며, ‘거룩한 나라’, 곧 하나님이 친히 소유하고 계신 백성이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가슴 뛰는 일인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왜 가슴 뛰는가? 왜 우리를 설레게 하는가?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윤리적으로도 정당한 이야기일까? 우리만 특별하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또다른 진술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한 번 차근차근 이 질문들을 풀어나가도록 하자.


종교의 시작


종교의 시작은 인류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한다. 지금이야 종교가 갈등과 분란의 씨앗인 상황이 되었지만, 종교는 본래 인간을 대(大)집단화하고, 그런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초기 인류의 시대에는 인간의 개체수가 적어서 어떤 집단과 집단 간에 만날 일도 별로 없고 자원으로 인해 갈등이 벌어질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점점 인간의 개체수가 많아지고 유목 생활이 아닌 농업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한 집단은 다른 집단과 만나야 하고, 협상해야 하고, 때로는 싸워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들 간에는 어쩔 수 없이 갈등이 생기고 누군가는 그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승리하고 다른 누군가는 배제된다.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전쟁을 하려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전쟁에서 무조건 상대방을 죽임으로써 합의를 보자니 끝이 없었다. 내가 누군가의 의사를 배제하고 올라섰다는 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즉, 죽이지 않고도 의사결정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했다. 결국에는 누가 더 정당하냐, 누가 더 먼저냐를 평화롭고 순조롭게 합의하기 위해서, 또한 승리한 개인/또는 집단이 계속해서 그 승리를 보증할 수 있도록 이름표를 붙여주기 위해서는 서열이 필요했는데, 곧 시간적, 공간적 기원들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물체나 사건이라기보다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의 집합이다. 곧, 기원을 상정하고 대집단을 이루는 것이 종교의 시작이자 목표다. 다시 말해, 종교와 기원을 만들어낸 이유는 ‘서열’과 ‘순서’를 창출해내기 위해서다.


인간이 대집단을 만들기 전, 그러니까 모두가 조그마하게 유목을 하던 시절에도 아주 단순한 애니미즘 계열의 종교는 있었다. 모든 생물체들이 자기들만의 영(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인간은 세계의 수많은 생명체, 영을 가진 존재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류가 대집단화 되면서 신들 또한 성장했다 -- 성장시켰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광범위한 영토를 다스리고, 심지어는 자연마저도 통제하며, 세상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위대한 신’의 등장이 필요했다. 고로 인간 집단의 전쟁이 벌어지면 이는 곧 신들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곤 했다. 전쟁을 하면서 신들에게 제의를 올림으로 전쟁의 승리를 염원했고, 전쟁이 끝나고 나면 신들의 서열이 재배치되고, 점점 그 과정이 반복되어 거대한 집단이 제국의 형태로 성장하면 그 제국의 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은 신이 아닌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이 ‘위대한 신’에서 훗날 ‘유일한 신’으로 바뀌게 되는 궤적이다.


애니미즘 이후 ‘위대한 신’들의 등장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種)의 위치 또한 격상되어야 했다. 많은 뭇생명들 중 하나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신계와 세속을 이어주는 신의 형상을 모방한 자(창 1:27)나 신을 대신하여 세속을 통치하고 경영하는 존재(창 1:28, 2:15)의 역할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는 수많은 생명들 중 하나의 존재였던 인간이 ‘신의 형상’의 자리를 부여받게 되고, 다른 생명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다. 성서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 그 중에서도 1,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 또한 그렇게 시작한다. 인간이란 존재에 부여된 우월성을. 이제 그 우월함과 열등함의 서열 정리는 단지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 만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인간 안에서도 격렬하고 첨예한 서열다툼이 시작된다. 창세기 1장에서도 인간은 남자라고 표명되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그 갈빗대를 취하여 종속적이고, 모방적인 존재로서 ‘여성’이 등장한다. 이미 기원부터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기에 충분하도록 만든 설정이겠다.


이처럼 종교가 시작되면서 나와 내가 아닌 것, 우리와 우리 아닌 것 사이의 격렬한 투쟁의 상태, 그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상태로 우리는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에덴 동산부터 그렇게 지어졌다는데, 그 이전의 존재들 간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상태라는 상상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꼴이 되었다.


야훼가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


종교는 기원을 설정하고, 그 기원을 통해 서열을 정리하는 것이 그 속성이라고 앞에서 정리하였다. 그렇기에 구약을 포함해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으라면 바로 ‘내력(תוֹלְדוֹת, 톨레도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창 2:4)으로 시작하고, 그것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비롯한 무수한 사람과 가문의 ‘내력/족보’으로 이어졌으며, 신약의 시작인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의 세계(Genesis, 게네시스, 내력)’로 이어진다. 성경에 수많은 족보가 나오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지구라는 푸른 별 위에서 시작부터 이어져온 인류 및 각종 생명체가 서로 동떨어져 생겨나지 않았으며, 고로 우리가 태어난 맥락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기원에 대한 정당성, 나아가서 그것들 간의 서열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은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며 인류 모든 보편적인 기원과 그 족보에 관한 이야기 같이 보이지만, 실로 구약 성경은 인류의 기원과 내력에 관한 이야기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내력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직하다. 일단 성경은 히브리어라는 말로 쓰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보고 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각주:1]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구약 성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고, 다른 집단에 비해 달라도 뭔가 다른 사람들이라는 그 기원에 관한 책인 것을 알 수 있다. 선택되었다 함은 구별되었다는 말과 통한다. 왜 구별해냈겠는가? 당연히 특별한/우월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앞에서 읽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후반절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택하신 족속’이 된 이유는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다. 한 마디로 선민(選民)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이유는 애초부터 훌륭한 사람임을 보증해 주기 위해서다. 종교에서 어떤 이들을 가리켜 ‘선택되었’다 말할 때, ‘흙수저'로 선택되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선택에는 우월감을 부여하려는 목적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 선민이 되었다는 의식은 사전적인 의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떤 대집단 내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별도로 칭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성서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기원은 뭔가 수상한 곳이 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은 유전자가 우월하거나 전쟁을 잘한다거나 부자거나 특별히 잘 난 구석이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Hebrew)의 기원


이스라엘은 히브리인들이다.[각주:2] 이스라엘은 히브리(Hebrew)라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다. 히브리라는 단어는 어디서 왔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히브리는 ‘천민’ 또는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다. 이집트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등 당시 성서가 기록되었던 근동 지역의 문헌에서 천민의 대명사로 나오는 ‘아피(비)루’, 또는 ‘하피(비)루’라고도 표기할 수 있는 말이 구약성서의 ‘히브리'[각주:3]이다. 고대 문헌에서 ‘하비루'가 사용되는 용례를 살펴 보면, 고향에서 뿌리 뽑혀 떠돌이 생활을 하며 남의 전쟁에 목숨을 거는 ‘용병’(메소포타미아 북쪽 도시 마리), 계약을 맺은 노예(티그리스 강가 도시 누지), 일꾼 또는 도둑떼/약탈자(주전 15C 이집트) 등으로 사용된다. 기본적으로 고향에서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각종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이 바로 하비루들이었다. 이러한 배경들을 토대로 문익환은 히브리라는 특징적 집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히브리는 종족, 혈족으로 단위를 이루는 배타적인 칭호가 아니라, 당연히 자주적인 주격으로 해방되어야 할 밑바닥 계층,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약자들을 포괄하는 총칭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1. 전쟁포로들이 하비루가 되어 노예로 혹사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노예로 전락하고 용병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이 된 사람들, 농촌에서 밀려난 이농민들이 하비루가 되었습니다. 

3. 야곱의 이야기나 모세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떤 이유건 고향에 남아 있을 수 없는 사람들, 남에게 붙어사는 떠돌이, 더부살이, 천더기들이 하비루로 전락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각주:4]


바로 이런 부족이 없는 자들, 소속이 없는 자들, 집단 아닌 집단, 어떤 혈통에서 온지도 모르는 근본 없는 떠돌이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부유물 같은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하셨다. 이들이 히브리들이고, 그 히브리들을 향해 불같이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이기지 못한 야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출애굽기 3:7)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또 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이집트의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여라. (출애굽기 3:18)


왕과 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지만, 이런 기원에도 불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히브리들은 자신들이 힘겹게 떠돌이 생활을 했던 것과 그 눈물을 불쌍히 여겨 압제에서 건져 내준 야훼의 사랑을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새로운 ‘내력’을 필요로 했다. 자기네들이 ‘천민’ 출신이 아니라 원래부터 선택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본래 어떤 개인도 그렇고 집단도 그렇고 전쟁에서 승승장구를 하다보면 문득 생각이 든다. ‘내가 진짜 잘 나서 선택 되었고, 어딘가 모르게 잘난 구석이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지점이다. 그것을 성서에서 ‘하나님을 잊은 백성’이라 표현한다.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준 야훼 하나님과 그와 맺은 영구적인 계약을 잊어 버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 시에만 기름 부음 받은 사사(판관)를 세워 위기를 극복하곤 했던 사람들은 급기야는 ‘왕’을 요청하게 된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다른 나라처럼 더 많은 영토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다.[각주:5]


매번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당하다보니 불안했다. 물론, 이제까지의 전쟁을 그 때 그 때 야훼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막아내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가장 훌륭한 방어전략은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영토의 확장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종교적인 사제가 다스리는 원시 부족 국가의 형태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왕을 가지고, 그걸 통해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낼 수 있는 멋진 정치 제도를 가지고 싶었다. 분명히 사무엘(을 통해 말한 야훼 하나님)은 이러한 요구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경고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요구는 끈질겼고, 이제부터 더욱 가열찬 영토 확장 전쟁을 하기 위해 ‘야훼(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선민사상은 왕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그 권력을 유지해야만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해서 확장해 나간다. 그래서 집단 없고 소속 없는 사람들의 집단 히브리들은 자신들의 뿌리에 관한 역사를 조사하기 시작하고, 또한 그것을 강력한 기제로 만들기 위해 불문율이었던 여러 관습이나 전통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자신들만의 규율을 문자로 적어 표현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춘 성문법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을 기틀로 하는 법전이다.


국가로서의 체제가 정비되고 영토가 확장되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국가의 신화는 정비되고 민족이 형성된 기원의 이야기가 정리되기 마련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법을 수령한 이야기와 출애굽의 이야기는 본래 다른 이야기였는데, 국가의 태동기에 두 이야기가 합류되었다고 주장한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떠돌던 규모가 작은 유랑 공동체에게 기록되고 명시된 법문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울 뿐더러 의사결정에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각주:6] 광야를 떠돌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하고, 그런 상황 변화에 고정된 ‘법문’으로 대처하기보다 역동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체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법 수령 설화와 출애굽 설화)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말이 두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야훼 하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하비루들은 애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비루들과 야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은 진실이며, 그것이 ‘열 가지 계명’이라는 전통으로 전해져 내려와 국가가 형성될 때 정비되고 다듬어져 국가 법령의 정신이자 기틀이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각주:7] 아무튼 이제 정착을 하고, 안정된 국가 체제를 가지기 시작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점점 더 이질적인 부분이나, 각 부족들의 이해관계를 넘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공동체성을 강고하게 가져가기 위해 십계명을 기초로 하는 법문을 세워 ‘법치국가’임을 천명하는 등 여러 가지 방책을 펼치기로 작정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내부적인 결속을 위해 법을 만든다는 의미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어떤 선명한 바리케이트를 치게 되는 작업이고, 다시 이스라엘이 애굽 시대에 겪었던 것처럼 경계 바깥 사람들, 집단 없는 집단, 소속 없는 사람들을 새로이 ‘생산’해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겠다는 ‘의도하지 않은 의도’가 되는 것이다. 타자(곧 적, The enemy)의 생산 없이 어떤 집단이 생성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연관되어 또 하나 법을 세워 통치하겠다는 의미는 중요한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야훼 하나님을 ‘타자’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본래 유랑민이었을 때의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관계이다. 상황을 만날 때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을 물었고, 서로 의사가 교류되는 관계였다. 공동체 안에 맺어진 대원칙은 있었겠지만, 결코 어떠한 텍스트나 문자 속에 갇히지 않고 맥동치는 바로 그 살아있는 ‘긴밀한 관계’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원천이었다. 사사 시대의 그것은 다른 국가들의 강력한 법치보다 느슨해 보였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유연하고도 긴밀한 관계’가 국가의 더욱 소중한 요소임을 시간이 갈수록 잊었다. 그럼에도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순진했던 것일까? 자신이 법문 안에 갇힐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상 8장의 경고를 남기고 자신의 자리를 왕과 법에게 내어주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찬란한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나라는 쪼개져 버린 것이다.


<다음 호에서 계속>


ⓒ 웹진 <제3시대>



  1.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있다. 어떤 한 존재가 그 언어를 벗어나서 형성될 수 없다는 뜻이다. 언어란 단순히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의사소통을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음성과 문자가 담고 있는 사회의 모든 관습과 생각의 집합체, 즉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하다. 성경 또한 이스라엘의 언어로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구성원의 이데올로기 즉, 그들의 ‘창’으로 본 것이고, 그 창으로 보여진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류 보편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가장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존재, 이스라엘이라는 언어의 ‘창’으로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본문으로]
  2. 현재 서부 아시아의 남쪽, 이집트의 동쪽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땅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대인의 국가’로 정의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고학적이고, 역사적인 기원을 따지자면 이야기할 것이 너무 많아지므로, 마지막 별도의 내용으로 기술하도록 한다. [본문으로]
  3.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정한책방, 27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32쪽. [본문으로]
  5. 다음과 같이 사무엘상 8장에서는 사무엘과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해 놓았다. 4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갔다. 5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10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11 "당신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합니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입니다. 12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왕의 밭을 갈게도 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도 하고,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입니다. 13 그는 당신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유도 만들게 하고 요리도 시키고 빵도 굽게 할 것입니다. 14 그는 당신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왕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 당신들이 둔 곡식과 포도에서도 열에 하나를 거두어 왕의 관리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입니다. 16 그는 당신들의 남종들과 여종들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왕의 일을 시킬 것입니다. 17 그는 또 당신들의 양 떼 가운데서 열에 하나를 거두어 갈 것이며, 마침내 당신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18 그 때에야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을 터이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9 이렇게 일러주어도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20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본문으로]
  6. ’법의 백성’이라는 호명은 국가 시대의 산물이다. 성서의 문맥을 보면 출애굽과 십계 이야기는 광야를 유랑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이 법의 백성으로 부름받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텍스트의 역사적 자리는 ‘국가'라는 세속적 실체다. 유랑민들은 법이 필요 없다. 그만큼 규모가 작고 단순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법이 필요한 것은 여러 종족이 한 정치체로 묶이고 전이해와 현실이해를 달리하는 여러 기억과 경험들이 교차하는 상황에서다. 그리하여 법은 유랑 시대가 아니라 국가 시대에 등장한다. 그것도 원시국가 형태가 아니라 '잘 발달된' 국가 시대의 산물이다. (김진호 외 9인,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글항아리, 8~9쪽) [본문으로]
  7. 출애굽기 20장에 나타난 내용과 신명기 5장에 나타난 내용은 서로 상반된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1~2절)이라고 서문을 맺고 바로 계명이 나오는 반면, 신명기 5장의 경우 1~5절이라는 긴 서문을 진술한 후에, 서문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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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것'이 이끄는 삶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내가 몸 담고 있는 교회에서는 각 교회학교 부서별로 제자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간략히 설명하여 ‘제자학교’라 함은 일종의 교회 내 성인교육에서 열풍을 일으켰던 제자 훈련의 교회학교 버전인 셈이다. 이 글에서는 이번에 ‘읽기와 쓰기’라는 주제 아래 초등학교 1, 2, 3학년 아이들과 활동을 진행하였는데, 흥미로운 결과가 있어 이 지면을 통해 공유하려 한다.


시를 쓰기가지 있었던 일


   우리는 ‘읽기와 쓰기’라는 주제 아래, 2주에 걸쳐 시를 쓰는 시간을 가졌다. 초등학교 저학년 친구들에게 막연히 주제를 던져 시를 쓰게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나는 한 가지 특별한 방법을 써서 아주 ‘낯선 하루’를 경험해보기로 했다. 그 특별한 방법이란 하루의 활동을 미리 계획하지 않고, 일종의 룰렛 게임처럼 임의대로 1) 누가(주체), 2) 어디서(장소), 3) 어떻게(교통수단), 4) 무엇을(활동) 할 지 각 항목별로 여러 후보를 정해놓은 후 아이들이 다트를 던져 다트가 꽂히는대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준비한 다트판은 다음과 같았다.



1회차(171028) “모두 다 버스를 타고 월드컵 공원에서 자유시간을 가진다.”


   위 그림판을 이용해 다트를 던져 첫 날에 해야할 우리의 행동은 “1) 모두다 2) 월드컵 공원에서 3) 버스를 타고 4) 자유시간을 가진다.”로 정해졌다. 이 결과는 아이들이 원하는 결과와는 매우 달랐다. 아이들은 최근 개장한 ‘국내 최대 및 최신식’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만큼 대단히 화려한 종합쇼핑몰, 스타필드 고양을 가는 것이었고, 거기에 가장 편안한 방법인 자가용을 타고 맘껏 돈도 쓰고 시간도 쓰는 자유시간을 가지길 원했다. 하지만, 다트를 익숙하게 던지지 못하는 아이들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손에 안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마지못해 월드컵 공원으로 향했다. 교사들과 나는 그 곳에도 아주 재미나게 놀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말해보았지만, 아이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그 곳으로 가는 첫 걸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한 번에 그 곳으로 가는 버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하철도 불광역에서 월드컵공원역을 가는 데에 한 번에 6호선으로 약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버스는 그렇지 못했다. 저학년이라 버스에 익숙하지 못한 친구들은 처음부터 힘들어했다. 어쩔 수 없이 연신내역 정거장까지 가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신내역부터 월드컵 공원까지 가는 버스는 이미 우리가 타기 전부터 손님들로 꽉 찬 ‘만원버스’였다. 덩치가 작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틈바구니에 밀려 뒷좌석 쪽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앞에서 있는 대로 힘들어했다. 마침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자리를 양보해준 몇몇 친구들은 그나마 자리를 앉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여기저기 꽉 끼여서 ‘숨막힌’ 여정을 가야했다. 승객이 중간에 조금이라도 빠질 줄 알았지만,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많이 줄지 않았고, 겨우겨우 인파의 틈을 뚫고 버스에서 내렸을 때 아이들과 교사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 버렸다. 이제 우리는 힘든 길을 달려 가기로 한 곳에 도착했으니 그나마 다행히 어떤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시간을 가지’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배도 고프고 지쳐버린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아이들이라 그런지 일단 넓은 곳에 도착하니 뛰어 놀고 싶은 눈빛이 살아나는 것 보였다. 게다가 공원에 와서 무슨 계획된 활동을 가지는 게 아니라 ‘자유시간’을 갖는 것이었으니 지친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조금 걸어가서 편안해 보이는 장소를 찾고 편의점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정식 식당도 아니고 편의점이다보니 아이들은 그저 컵라면만 먹고 싶어했다. 힘들게 바깥 활동을 나와서 귀한 집 자식들에게 컵라면을 먹이려니 어른으로서 조금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그마저도 배고팠던 아이들에게는 맛있게 느껴졌는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고마웠다. 그렇게 한참을 컵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50대 남자 한 분이 낮부터 거나하게 취하셔서 아이들이 먹고 있는 곳 주변으로 어슬렁거리셨다. 아이들은 힐끔힐끔 바라보았고 생각보다 무서움을 느끼던 그 때, 아저씨는 아이들을 향해서 소리를 쳤다. 아이들은 뭐라고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단히 공격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어떤 한 아이의 말로는 ‘죽어버리라’는 말도 내뱉었다고 한다. 뜬금없는 아저씨의 소리지르는 모습에 먹던 컵라면도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아이들은 소스라치듯 놀랐고, 다행히 물리적 접촉은 없었지만 교사 중 한 명이 경찰에 신고를 하여 아저씨는 아이들 근처에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몇몇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어떤 아이들은 이 광경이 너무나 낯선 경험이라 많이 놀란 듯 보였다.


    식사 이후에 아이들은 마침 옆에 있는 놀이터를 발견하고 놀이터에서 놀게 되었다. 야외 놀이터 치고 월드컵 공원 내에 있는 ‘아기새 모험 놀이터’는 꽤 규모가 크고 평소에 일반 동네에 있는 놀이터보다 더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놀잇감들이 있었다. 요즘은 잘 볼 수 없는 ‘흙바닥’ 놀이터에다가 아주 어린 유아들이 놀 수 있는 기구로부터 큰 아이들도 시시해 하지 않고 재미있게 놀 수 있는 크고 높은 놀이기구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아이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놀았고, 시를 쓸 때에도 거침없이 하루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떠올리면서 써나갔다. 아이들이 쓴 시의 소재는 매우 다양했다. 어떤 아이들은 화창한 바깥 날씨에 대해서 썼고, 어떤 아이는 유난히 맛있었던 라면에 대해서, 어떤 아이는 놀이터에서 자신에게 버겁고 힘겨웠던 놀이기구에 대해서 썼다. 반짝 거리는 돌을 설명한 아이도 있었고, 지저귀는 새 소리에 대해서 쓴 아이들, 그리고 밥먹는데 다가와 죽어버리라고 소리친 대낮의 취객 아저씨에 대해서 쓴 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루를 즐겁게 놀고 시를 쓰는 아이>


2회차(171104) “모두 다 지하철을 타고 스타필드 고양에서 자유시간을 가진다.”


    아이들은 그렇게 즐겁게 놀이터에서 놀았지만, 몸 안의 습속이란 그렇게까지 쉽게 변하지는 않는 법이다. 1주일이 지나 다시 다트판 앞에 선 아이들에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어보았더니 서슴없이 스타필드에서 자유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했다. 당연히 그 지난 주의 버스를 타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부모를 통해 들은 한 이야기로는 아이가 1주일 후에 다시 다트를 던진다는 생각에 1주일 내내 다트를 연습했다는 풍문도 있었다. 결국 아이들은 지난 주보다 훨씬 집중하여 다트를 던졌고, 본인들이 원하는 결과로 가장 가고 싶은 스타필드 고양을 편안하고 안락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여 자유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결정지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스타필드 고양을 들어선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눈이 휘둥그레해질만큼 화려한 불빛들과 간판들을 비롯한 다양한 볼거리들이 아이들의 눈을 쉴새없이 잡아 끌었지만 과연 그렇게 눈과 마음을 빼앗긴 채 시간이 흘러서 아이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이나 할 수 있을지, 그걸 가지고 어떤 글을 쓸 수 있을지가 참으로 의심스러웠다. 역시나 아이들은 실내로 들어서자 자기보다 몇 배나 크고 거대한 규모의 매장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도열하고 있는 곳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손에 잡히지 않는듯 신기해하기만 할 뿐, 정작 재미있게 자기들이 가진 ‘자유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알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나 또한 스타필드에 왔고 시간을 보내야 하니 어떻게든 발걸음을 옮기고는 있었지만, 무한정의 돈이 주어져 있지도 않은 우리로서는 무엇을 해야 여기서 ‘자유롭게’ 재미있게 놀 수 있을지 전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스타필드 고양의 중앙광장, 거대한 광고'기둥'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솟아 있다.>


    겨우 그 정처 없는 우리들의 발걸음의 방향을 이끌어 준 것은 그 곳에 와본 적이 있는 교사 한 명이었다. 그 교사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이 많이 있는 공간으로 가자고 했고, 아이들은 장난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 곳에 가서 슬슬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산더미와 같은 장난감은 애초에 구매를 목표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다 가지고 놀 수는 없었다. 그나마 몇 가지의 장난감 ‘상품’을 잠시 ‘체험’하는 의미로 갖고 놀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두었는데 아이들은 많고 체험하는 상품으로서의 장난감은 아주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양보의 압박을 받으며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정도의 시간만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어째 그렇게 ‘그림의 떡’들에 눈을 빼앗기고 있을 때쯤에 배가 고픈 시간이 되었고, 드디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커다란 피자와 탄산음료, 핫도그 등 아이들의 입맛에 최적화된 음식을 아주 싼 가격에 먹을 수 있었다. 지난 주에 죽일듯이 노려보는 취객 아저씨와 어슬렁거리는 비둘기 무리 속에서 겨우 컵라면을 먹었던 것에 비하면 위험한 일도 없고, 비둘기도 없이 입맛에 딱딱 맞는 피자와 탄산음료를 먹는 일은 매우 행복한 일이었다.


    즐거운 식사가 끝난 뒤, 아이들은 포만감으로 가득한 채로, 다시 장난감 가게로 들어가 찔끔찔끔 노는 것이 싫었던 듯, 바깥으로 나가서 놀기를 제안했더니 좋다고 했다. 바깥은 11월 초여서 조금 춥고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정도의 제약은 노는 데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넓은 공터에서 아이들은 술래잡기, 얼음 땡, 멀리뛰기 등을 하며 놀았고 특히 어른들과 함께 한 림보 게임을 하며 신나게 시간을 보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경직된 웃음에서 자기도 모르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들이 지은 시 비교


    하루는 월드컵 공원에서 하루는 스타필드에서 보내고 난 뒤에 아이들이 쓴 시를 비교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고, 과연 그 시들은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먼저 첫 날 월드컵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지은 아이들의 시를 보자.


낯선 하루 – 남00(2학년) 


파라솔 밑에서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먹으면서 가을 풍경을 감상한다. 


짹짹짹 울부짖는 새소리. 

푸득푸득 비둘기 소리. 


가을이 온 것 같다. 


 한강시민공원 – 민00(3학년) 


 한강시민공원에 도착 

도착하자마자 후루룩쩝쩝 라면 먹는데 

어떤 아저씨가 욕을 많이 하네. 


 라면 다 먹고 나서 

아기새 모험 놀이터에 와서 재밌게 논다. 


 시끌벅적 웃음소리가 들린다.


    여기 아이들의 시에서는 풍경들이 등장한다. 주변이 한가하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라면을 먹어도 가을 풍경을 볼 수 있고, 재미있게 놀고 있다 해도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주변이 시끄럽지 않으니 라면을 먹어도 그 소리가 들리고, 새가 울어도, 그저 지나가기만 해도 짹짹짹거리는 새소리와 푸드득 거리는 새의 발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하루를 보내면서 주변과 만나고 있고,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음 시들을 보자.


기쁜 하루 – 선00(2학년) 


아기새 모험 놀이터에서 놀았다. 

어려운 것도 있었고 쉬운 것도 있었다.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초록봉 오르기였다. 

쉬운 것 중 하나는 정글짐이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바퀴타기이다. 


 이 시를 쓰려고 논 것이 아니었다. 

심심해서 논 것이었다. 


 낯선 하루 – 지00(1학년) 


 한강시민공원에 갔다. 

이 시를 쓰려고 여기에 왔다. 


다트도 했는데 롯데월드와 스타필드를 가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아저씨도 봤다. 


오늘은 참 낯선 하루다.


    두 시는 참 재미있게도 상반된 진술을 보이고 있다. 한 아이는 ‘이 시를 쓰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고 했고, 한 아이는 ‘이 시를 쓰려고 논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같은 하루를 보내고 같은 공간에서 놀았지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같은 시간과 공간을 보낸 사람들 간에도 상반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자신이 놀이터에서 잘 다루지 못하는 놀이기구가 있다는 것을 알기도 했으며, 이상한 아저씨가 자기에게 접근한 기록까지 남기고 있다. 공히 자기에게 어렵고 힘들고 어색한 경험이 머릿 속에 맴돌고 있고, 그 감정은 그닥 불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고, 그것은 가치 판단의 이전 문제인 것이며, 자연스럽게 세상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수용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반면에, 1주일이 지나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스타필드 고양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낸 아이들의 시를 살펴 보자.


피자 – 우00(3학년) 


 나는 처음으로 먹물 피자를 먹었다. 

맛있었다. 다음에도 또 먹고 싶다.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맛있었다. 

또다시 오면 이걸 또 먹고 싶다. 


 아이스크림 – 전00(3학년)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사르르 아주 진하다. 

이런 아이스크림은 역시 스타필드 트레이더스 아이스크림이지!!!!!!


    일단 첫날 월드컵 공원에 가서 시를 쓴 것보다 훨씬 짧아진 것을 볼 수 있다. 아이들 머릿 속에는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시 속에 나타나 있지 않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첫날에 보여주었던 서정적이고 세계를 감상하며 자기의 언어로 사실을 기술하려고 애썼던 아이들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전혀 아무런 감흥 없이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거나 즉자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렬하게 자극했던 피자와 아이스크림에 대한 혀의 반응을 기술할 뿐 과연 아이들이 자신들이 만났던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고 보여지지 않을만큼 단순하게 기술하고 심지어 이 시 안에 있는 자아만큼은 홀로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틀 모두 참석한 아이 중 한 아이의 시를 비교해보면서 하루를 어떻게 다르게 느꼈는지를 살펴보자.


낯선 하루 – 황00(2학년) 


 파라솔 밑에 무서운 아저씨 

욕 쓰고 죽으라고 하며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무서운 아저씨 

너무 무서운 점심 


모험 놀이터에서 재미있는 자유시간 

남자 화장실에 들어온 아줌마 

 아주 낯선 하루 


 스타필드의 날 – 황00(2학년) 


 스타필드에서 놀았다.


    이 두 시에 대해서는 이 시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의 시를 통해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다.


    여전히 아이들에 대한 교육방식과 방침에 대해서는 의견과 이론들이 분분하다. 한 쪽에서는 아이들의 의사와 아이들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여 충실히 그것을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의견이 있고, 그 반대 쪽에는 여전히 아이들에 대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무조건 자기의 의견대로 아이들을 이끌고자 하는 부모들의 행태도 더욱 극단적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아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간과하는 것은 아이들을 학대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어느 정도 진전된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두 번을 겪어본 결과, 아이들은, 더 나아가서 나를 포함한 모든 어른들조차도 스스로 자기 속에 있는 진짜 욕망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나아가 수 년 전에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부터 오늘날까지 그 유사제품으로 유통되고 있는 ‘YOLO (You Only Live Once)’ 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기획하여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모든 패러다임에 대해서 적어도 이제는 기각을 선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은 결코 자기가 기획한 대로 선형적으로 진행되어 마지막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사소하지만 불현듯 도래하는 ‘만남’,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수용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적어도 이번 활동 안에서 아이들은 거대한 자본의 성전인 스타필드에서 ‘자유시간’을 가졌지만, 어떤 어색한 순간도, 어떤 낯선 순간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자유를 누리지 못했으며, 기껏해야 자기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피자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정신과 몸을 압도하는 자본의 에워쌈 속에서 ‘논 것’이 아닌, ‘놀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반면에 월드컵 공원에서 벌어지는 아주 사소하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낯설고 어색한’ 순간들을 통해서 아이들은 세상과 만났고 소중한 자기를 확장했으며, 생의 통찰을 얻어냈다.


    물론, 모든 삶에 대한 기획을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그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지금도 몸부림을 치고 있으며,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해도 내일의, 1년 후의, 10년 후의 자기의 욕망을 점검하고, 방향을 짓는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의 벌이를 위해 메시아가 문 앞에서 두드리고 있는데도 매몰차게 방이 없다고 거절했던 여관의 주인들처럼 우리 또한 도래하고 있는 구원의 표지들을 놓치고 상습적인 욕망의 수레바퀴 안에서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 웹진 <제3시대>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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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파기합니다. 나는 믿습니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약해진 믿음을 강하게!


    최근 신도수가 줄어든 교회에서는 남아 있는 신도들을 향해 ‘믿음이 약해졌다, 믿음이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외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믿음이란 게 무슨 단단한 고체와 같은 것이어서 근육처럼 그 힘의 정도가 약해졌다가 강해졌다가 할 수도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인 가보다. 발음 한 번으로도 입이 앙다물어지면서 힘껏 눈을 부릅뜨게 만드는 단어 ‘믿음’. 그 단어는 단지 듣거나 발음하기만 해도 너무나 단단하고 확고부동하여 토를 달거나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즉, 적어도 개신교 내부에서는 약해진 믿음(신심)은 곧 열등한 믿음을 의미하며, 믿음이란 자고로 강해야만 그것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고, ‘믿음’이라 불리울만 한 것으로 여긴다. 믿음은 그렇게 단단하고 확고하게 자리를 이탈하지 않으며 자태를 뽐내는 그런 것이어야 하나보다. 그 믿음이란 것이 어떻게 단단해지는지, 단단한 상태의 믿음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어떤 합의도 없는 채로.


   최근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하여 각 처에서 ‘믿음’ 이 더욱 단단하고 확고해지기를 요구받고 있다. 그 사정은 이러하다.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시작했다(?)고 일컬어지는 마틴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의 성서 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을 통해 회심을 얻었다고 알려진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루터는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핵심 곧 구원론을 교회나 교황 등의 외형적인 상징이나 표지로 획득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신도 개인이 가지는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 구원의 핵심이라 설파했다. 루터는 당시의 모진 괴롭힘과 박해를 뚫고 이 ‘오직 믿음(Sola Fide)’을 앞세운 이신칭의의 주장을 사수하여 프로테스탄트 혁명의 선두에 섰고 지금의 개신교 계통의 우두머리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프로테스탄트라는 종파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신칭의 곧, ‘구원=믿음’이라는 이 공식은 프로테스탄트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고, 그 경계 밖을 나가는 교리는 소위 성서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이고, 거짓 이단사설 정도로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한데, 예수의 후예들이 예수가 행했던 실천과 선언들, 곧 역동적이고 ‘운동성’이 담긴 입체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를 버리고, 안온한 의자에 앉아 사건성이 제거된 예수를 ‘숭배’만 하고 그 숭배의 파토스를 악용해 예수라는 브랜드의 장사치들로 변질되었듯이 루터와 그의 후예들인 프로테스탄트들도 루터가 당시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부여잡았던 저항의 정신과 당시 개혁운동의 사건성을 쏙 빼버리고 ‘믿음’ 이라는 단어 쭉정이를 숭배하며, 나아가 믿음이라는 이름의 ‘왕국’을 세워 루터와 개혁가들의 이름을 팔며 장사를 서슴치 않고 있다.


    그런 이들 중에 한국의 개신교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는 믿음 장사꾼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한국 개신교 내 최대 종파인 장로교 통합측의 경우, 101회 총회를 통해 ‘다시, 거룩한 교회로!’로, 102회 총회 주제를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라는 주제를 2년동안 잇달아 내놓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며 거룩하지 못하였다고 진단하고, 거룩의 히브리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구별’된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다 잃어버려 세상의 신뢰마저도 잃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차이가 아무 것도 없고 그렇기에 자기들을 다른 종류의 인간들과 식별(Identify)하여 동일화(identification)할 수 있는 표식을 강화해야만 우리의 믿음이 강해질 것이라고 집단적으로 강변한다. 짠 맛을 내는 소금의 주성분이 염화나트륨(Nacl)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실체적인 ‘성분’을 찾자는 게 요즘 주류 개신교 사회의 목소리다.


    9월 말경에 일괄적으로 열린 개신교 대형교단들의 총회에서는 이런 흐름을 극렬하게 반영한다. 이번 총회들은 그리스도인을 식별하는, 그리스도인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그 신원 확인서의 요건을 강화하고 명문화(明文化)하는 작업의 향연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성애자 뿐 아니라 동성애자 ‘옹호/지지자’의 교단 신학교 입학 금지 및 항존직 피택 금지, 이혼/재혼의 간음화(化) 등 기묘하고도 기괴한 상상력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경쟁을 벌였다. 특히, 심지어 최근 한 교단 총회에서는 교단 산하 신학교 교수들에게 ‘이신칭의론’ 곧 행위와도 같은 다른 불순물 하나 포함되지 않는 ‘순수’ 믿음으로 구원을 완전히 이룬다는 그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지 그 견해를 일일이 확인해달라는 제언을 하기도 하였다.[각주:1] 마치 사상검증을 통하여 ‘마녀’라도 사냥해야 속이 풀리겠다는듯이…


프로테스탄트와 믿음


    그러나 루터가 자신의 손에 들었던 무기인 ‘믿음’은 지금의 많은 개신교인들이 기억하고 심폐소생시키려는 믿음제일주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신칭의론 제창과 같은 강력한 프로파간다와 일치하는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루터 당시의 교회가 잃어버렸다고 주장한 믿음, 그것은 어떤 것일까?


    최근 루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출간된 책 ‘루터의 재발견’에서 저자인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는 루터파 등 일단의 개신교 진영이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들고 일어난 개혁과 혁명의 기치를 높이든 16세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특징을 설명한다.


1520년 루터는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 교서를 받고 이듬해 보름스 제국의회(1521)에서 실질적 제재 조치인 제국 추방령을 선고 받는다. (…) 당시 유럽은 오스만 튀르크 족의 유럽 침입으로 기독교 세계가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은 모든 제후들의 힘을 빌려 이슬람에 대항하는 정치적 연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526년 6월 25일 제 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의 통치자의 종교로 한다’는 종교 선택의 원칙을 결의하게 된다. 이 결의의 이면에는 보름스 제국의회(1521)에서의 루터에 대한 판결을 덮어 두겠다는 정치적 합의가 숨겨 있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 이슬람 군대가 퇴각함에 따라 국제 정치 지형도가 급변하고 이슬람의 위협이 사라지자, 황제는 곧바로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1529년 4월 19일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소집하게 된다. 이 회의가 열리기 직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는 모든 루터파 제후들에게 경고장을 발송한다. 루터파를 떠나 모교회 품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과 검이 루터파 제후와 영주들을 찾아갈 것이라고 경고장을 발송한다.[각주:2]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루터와 루터파 제후들이 선택한 것은 항복이 아니었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성서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회유와 갖가지 협박에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읽어버리고 만 성서’,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읽을 수도 없고 해석할 수도 없게 라틴어로 쓰여 있는 그 성서 거기에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말하고 있던 셀 수도 없이 많은 그 종교적 장치들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루터는 수도사 생활을 하는 동안 참회와 형벌의 문제를 고민하였는데, 교회가 오랜 기간 동안 제작해 놓은 구체적이고 세밀한 ‘생명-정치’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뼛속 깊이 착취하는 행태는 성서의 이야기들과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그는 성서를 다시 읽었다. 최후의 심판과 구원의 주체는 사람이나 교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읽고 말았다. 그리곤 그것에 올라타 소용돌이 속으로 기꺼이 휘말려 들어갔다.


    그 후 루터와 믿음의 동지들은 누구도 신앙을 강요할 수 없다는 ‘신앙의 자유’, 교회 공의회나 사제의 권위보다 높은 ‘성서의 권위’, 성서는 성서 자체가 해석한다는 ‘성서 해석의 원리’[각주:3] 이 원리들을 붙잡고 계속해서 자신의 고백의 길을 이어갔다. 무려 1천여년 가까이 이어온 역사의 전통과 관습도 성서에서 비롯된 그의 ‘믿음’보다 상위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믿음’은 저항하는 믿음이었고, 좋은 게 좋은 것,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것이란 주장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십계명의 제 1계명이 천명하는 것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고 지탱하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 즉 ‘오직(Sola)’이라는 태도로만 성립하는 것이었다. 개신교 신학의 다섯 가지 표제어인 ‘5대 솔라Sola’ – Sola Scriptura 오직 성서,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총, Sola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는 단독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강조를 뜻하며,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에 대한 반대 표제어라 할 수 있다.[각주:4] 루터가 주창한 ‘오직’과 ‘믿음’의 결합이란 신자들의 믿음의 대상을 교회 기득권층 마음대로 지정하고 조작하던 것에 질문하고 반대하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번잡스럽게 헌금함을 채워야 연옥을 면하는 것도 아니고, 성찰, 통회, 정개, 고백, 사죄, 보속 이 여섯 단계로 이루어진 고해성사 ‘절차’ 또한 성서가 말하는 믿음이 아니었다. 믿음의 목적어들, 곧 믿음의 대상을 요리조리 자기 입맛에 맞게 귀에 걸고 코에 걸었던 관행을 정지시키고 오직 믿음 그 자체를 통해 구원으로 향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어 있는 것’으로서 믿음, 곧 다른 것 아닌 ‘오직 믿음 그 자체’라는 사실에 루터와 프로테스탄트는 주목했던 것이다. 이제 루터 이후로는 믿음과 대상이 분리된 상태, 곧 주술적인 행위로서의 믿음에서 ‘믿는다’는 행위 자체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믿음을 파기하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시대에서 ‘믿음’은 어떤 식으로 해석되어야 할까? 새로운 저항과 변화의 신호탄으로서 믿음을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공회 신학자이며, 예수 세미나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역사적 예수’ 연구로 잘 알려진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이 시대에 잃어버린 신앙 언어들의 역사적 연원을 살피면서 동시에 그 언어들이 지금 어떻게 우리 시대에 다시 새로운 의미로 새겨져야 할지를 설명하는 책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를 썼다. 이 책 ‘믿음과 신앙’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보그는 ‘믿음(Faith)’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적 정의를 설명하며 이들 간에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믿는다는 것은 확실성의 정도는 다르지만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 어떤 진술을 믿는다는 것으로 정의되며, 실제로 믿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전제한다. 불확실성이 없다면 ‘믿다’가 아니라 ‘안다’라고 해야할 것이다.[각주:5]


    그렇다. 굳이 보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체로 ‘믿는다’고 말할 때는 모두에게 자명하고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서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것, 어느 정도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그것을 거짓이 아니라 ‘참’으로 받아들이고, 진실로 받아들이고자 ‘결단’하는 그 행위를 ‘믿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사실이 확률로 존재하고,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기에 ‘그렇다/아니다’라고 단정짓기 모호한 것들에 단호히 선을 ‘그어버림’으로써 그것에 형태를 주고, 형체로서 드러내는 일, 그것을 우리는 ‘믿는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란 ‘하느님에 대한 충절로서의 신앙, 하느님을 더욱더 중심에 두는 삶의 결실’이며, 특히 ‘하느님의 부력(浮力, buoyancy)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그는 이야기한다. 이어서 보그는 이 ‘믿다’라는 동사는 신뢰하다(Believe in)라는 말의 의미와 가까우며, 이는 단순히 어떤 진술이나 누군가의 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의미에까지 다다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부력을 의지하는 믿음’이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마태복음서 14장에서 풍랑 속에 베드로에게 다가가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했을 때처럼 부력을 의지하여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고(마 14:30), 이 액체와 같은 세상의 바다 위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발을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가 베드로에게 요구한 믿음이란 예수라는 것을 바라보고 그 사잇길이 어떠하든지, 무엇을 만나든지 ‘걸어오는 동작’을 멈춰서버리지 않는 것, 동작을 이어나가고 계속하기를 견뎌내는 것, 그 동작, 계속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어떤 거대하고 강건하여 유동하지 않는 단단한 그것을 부여잡아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는 명사적인 것으로서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믿음이 목적어로 취하고 있는 그 부여잡은 대상들, ‘물(物)’을 믿음과 일치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믿음’ 은 진리와 진리라는 권위가 고정되어 있으며,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기득권들의 허구적 현실을 ‘재구성, 재창조, 재설계’하는 언어다. 현실의 관행적인 ‘믿음들’을 부수고 ‘나는 이렇게 믿소!’하고 어깃장을 놓으며 연약하기만한 새로운 가능성에 철갑옷을 입히는 행위다. 루터가 말한 프로테스탄트의 핵심이 저항과 질문, 소통의 문제라는 점도 믿음의 이러한 특징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완전한 타자를 내 앞에 붙잡아 앞에 갖다 놓고 여기 저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도록 형상화(形象化)하여 심지어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에 구원의 결정 여부를 갖다 붙이는 행위, 마녀라는 이름으로 눈이 감각할 수 있는 확실한 ‘적’을 생산하여 공포를 조장하는 알량한 정치전술을 펼치는 행위를 절단(切斷)하고 파쇄시키는 행위이지 않겠나 말이다.


    앞에서 ‘안다’는 것과 ‘믿다’는 것의 차이에서도 보았듯이 믿는다는 행위는 미완의 상태로 있는 것들에 경계를 주어 완전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이러저러한 가능성과 불온한 유언비어로만 치부되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고 그것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동적 행위다. 적어도 ‘믿음’은 어떤 대상을 부여 잡고 주워 섬기며 숭배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타자화하는 데에 그쳐서는 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사건’ 속에서 밀고 당기고, 들고 나는 호흡하는 동적인 유기체다.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정적인 완전성을 붙드는 것은 어리석다. 세계가 부단히 움직이며 상호작용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바르다. 움직임을 멈추면 죽는다. 가라앉는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말한 그 믿음도 예수를 향해 계속해서 부력을 의지하여 걸음을 옮기는 ‘믿음-행위’ 때에만 성립한다. 예수를 봤다는 이유로, 바람이 분다는 등등의 이유로 멈추면 물 속으로 빠진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움직임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움직인다는 ‘섭리’란 어떤 고정된 스케쥴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사건의 결을 따라 동적 균형을 이룬 완전성을 의미하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서 신뢰해야 한다. 고로 믿음이란 ‘믿습니다’라는 행위로서만 존재할 뿐이며, 믿습니다’들’의 연속적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고로 믿음은 행위와 둘이 아니다. ‘믿습니다’로서 하나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둥, 믿으면 행동이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둥, 행위와 믿음을 언어 자체에서 구분하고 보는 자가 신앙의 적(敵)이다. 어떤 대상을 고착시켜 받드는 일로서의 신앙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정초하고 깊이 머무르되 또다시 박차고 일어나 의심하고 끊임없이 다시 고백하는 ‘믿습니다’의 여정, 그 속에 우리의 숨과 삶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3337 [본문으로]
  2. 최주훈, '루터의 재발견'(2017, 복 있는 사람), 48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5.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2009, 비아), 158~15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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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말고 동무 I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나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 맞지?’


    지난 글에서 필자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없어 쉼을 누리지 못하여 세계의 흐름에 반대되는 고정되고 틀에 박힌, 그래서 안정적인 나와 세계를 찾고자 ‘친구’라는 허위로 도망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밝혀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안심, 안정, 안돈’이라는 감정의 돌을 꼭 껴안은 채 침몰해 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다시 의문을 품자면, 왜 사람들은 안심, 안정, 안돈에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두며 살아갈까? 2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 ‘바깥’과 창구역할을 하는 휴대폰을 바꾸고, 2년이 지나면 삶의 터전인 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이 배운 지식이 4년 후 졸업할 즈음에는 ‘헌 지식’이 되어 있고, 공학기술자가 지닌 지식의 수명은 5년이 되지 않아 폐기/신설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데도 평균수명은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에 육박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정초해야 할 기초가 사라지며, 뿌리내려야 할 지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마음 둘 곳이 없어지니 그야말로 고립무원이다. 고로 이 초고속시대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동색(同色)이었던 친구를 갈구하고, 내 몸에 흐르는 피가 자동적으로 가리키는 혈통으로 회귀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찌할 도리 없고, 피할 수 없는 세상 풍파를 어떻게든 면해 보고자 친구와 가족으로 퇴각하는 개개인들의 회귀를 침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불러야만 하는가? 김영민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온갖 연줄로 얽혀든 사회 속의 우리는 ‘남’이 되지 못했으므로 ‘나’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고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부르’게(198) 된다고 말이다. 즉,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눈빛으로 두려움을 읽고 눈빛으로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어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 ‘군중(또는 대중)’의 무리에서 자칫 떨어져 도태될까봐 두려워하는 공포를 말이다. 한 번도 ‘남’이 되어보지 못한 존재들이란 바로 그런 존재들이다. 이는 일종의 유아들이 겪는 분리불안 증세와도 그 종류가 비슷한 것일텐데 부모로부터 몸은 떨어졌으나 경제적, 사회적으로 자기 두 발로 서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폐적인 퇴각’(204)이나 ‘모든 종류의 실천과 연대를 방해하고 금가게 하는 냉소’(200)만으로 언제까지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가상의 현실 안에서 자기를 확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김영민이 제안하는 동무는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


동무, 듣는 관계


    친구라는 동색(同色)으로 향하는 자폐적인 퇴각을 막고 서늘하고 버텨 서서 같은 것(同)이 없음(無)을 통해 세세한 버릇의 양태를 서로 고치고 서로 성장시키는 동무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듣기’가 필요하다.

    여기서의 듣기란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잘 듣는 수동적 듣기’(210)를 말하지 않는다. 먼저 우리는 친구, 연인들간의 듣기는 매우 수동적인 듣기 방식이란 것을 우리는 알아채야 한다. 친구와 연인끼리는 별 공을 들이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저 하던 말을 하면 되고, 서로간에 조율된 ‘선’ – 여기의 선이란 ‘경계(Line, 또는 Borderline)’라는 의미와 선(Good, 또는 Virtue)’ 양 의미를 포함한다 – 에 의지하여 말하면 된다. 굳이 내 의지를 다해 미간을 좁히며 자세히 듣지 않더라도 맘놓고 떠들고 들어도 되는 듣기다. 김영민은 특별히 이런 말하기와 듣기의 풍경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자리로 ‘술자리’를 많이 언급하는 편인데 대체로 아래의 사진의 분위기와 거기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상상해보면 된다. 아래와 같은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김영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술자리가 얹힌 ‘기운(Stimmung)’, 혹은 어떤 ‘두께’ 속에서 해반주그레하게 피어오르는 낭만주의,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 올라오는 대화적 휴머니즘은, 결국은 바로 그 기운 탓에 실없이 부풀어 오른 개인의 자잘한 자기도취에 기대고 있다. (380)


    이러한 ‘자잘한 자기도취’가 왜 문제인가? 바로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버릇, 혹은 그 버릇의 지향과 지형이 되먹여져 재생산될 기존 세계의 언어 수행, 생활의 양식 때문이다. 고로, 김영민이 제안하는 동무 간의 듣기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210)인 듣기이다. 시공간의 동질성에 근거한 추억과 의리의 과거적 관계는 ‘듣지 않고’(211)도 말할 수 있지만 동무 간의 듣기는 섬세하고도 서늘한 듣기, 즉 ‘버텨듣기’를 말한다. ‘사사화된 정리의 늪 속으로, 그 한 패거리의 움직임 속으로, 축축하고 뜨겁게 저락하는 ‘친구’를 불러 세우고 일견 메마르고 서늘한 행위(211) 속에서 동무 간의 듣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동무는 거기서 태어나는 것이다.


듣기의 본적(本籍), 침묵


    우리가 서로 만나 성장하는 사이가 되려면 실로 보낸 시간과 경험과 추억의 가짓수를 늘려서 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작업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세심하게 돌보고 수행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그 방법을 한 번에 깨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삶의 양식과 ‘버릇’의 문제로 귀결된다. 곧, 다시 지적한 바대로 ‘일상의 만남/사귐의 구태를 번연히 고수한 채 새 이름의 기치 아래 재집결해서 서푼어치 인식의 확장을 꾀하거나 각오를 다진다고 대체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인가?’(205)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우리가 입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동무 간의 듣기를 하기 위해서는 ‘긴절한 침묵(209)’이 절실히 요청된다. 꺼지지 않는 카톡 대화방 알림 속에서 잡담과 수다와 고백을 일삼으며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회집(209)하는 게 ‘사귐과 교제’가 될 수 없다. 타자의 말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그의 말이 성성하게 살아 있는 그대로 응대하고 말의 표준화, 정식화, 그리고 축약화를 철저히 경계하는 것(210), 그저 듣기라는 행위가 하나의 ‘풍경’이나 ‘배경장치’가 아니라 관계맺음의 전면적이고 절대적인 행위임을 아는 것, 거기서 바로 동무 간의 듣기는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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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끈을 절단하는 아무도 아닌 이[각주:1]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이 책(『신정-정치』)이 출간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5월 9일 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이른바 정권의 교체, 민주정부 3기가 시작되었다. 광장을 달구며 ‘탄핵’이라는 점으로 수렴되었던 목소리 중 많은 이들은 승리의 환호를 질렀고, ‘수호되어야 할’ 정부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의견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목소리 즉, 이제 세워진 저 권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수호’하기만 하면 그 촛불’들’이 말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이에 대해 ‘신정-정치’는 그간 우리 사회는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기까지 걸어온 지난한 과정을 이야기하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이고 철저하게 은폐함으로 감춰졌던 어두운 역사의 경로를 폭로하여 광장에서 냈던 그 목소리’들’이 ‘새 정부’라는 알리바이 속으로 어느 하나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인양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미 자명하게 알고 있듯이, 역시 시작과 끝은 세계를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하는 그 성스러운 끈(7), 곧 성스러운 화폐와 자본의 힘이다. ‘성스러운(거룩한)’과 ‘화폐/자본’을 연결하는 이 언어는 단순히 물질의 세계를 신화화하여 표현하는 게 아니다. 즉, 다시 말해 신정-정치란 돈을 물신화하는 은유가 아니라 등가적이며, 그 운동을 통해 세계의 실재를 구축해 나간다. 그것들은 무한하게 순환하며 서로를 떠받침으로써 우리의 실제적이고 물리적 삶을, 사회적 관계들의 끈끈함을 스펙터클-사회로, 다른 말로 ‘사이비 신성체’로(24) 전환시켜 나간다. 이를 골자로 한 제단 위에 각 종류의, 각 사연이 담긴 피들이 제물로 섬겨진다. 4. 16의 피, MERS의 피, 이창근의 피, 바로 지금의 언어로는 갇혀 있는 한상균과 동성애자 A대위의 피 등 유혈이 낭자한 (사이비) 사회. 거기가 바로 우리의 삶이 바들바들 떨며 놓여진 풍찬노숙/각자도생의 현장이다. 거기서도 모두가 한 입으로 외워야 할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다.(8)”


.

   신정-정치의 사제들은 사목의 권력을 이용해 먹이며, 살리고, 심지어는 머리털까지 센다고도 할 수 있는 바(누가복음 12:7), 진정 그리 살고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바틀비의 변호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심지어 매일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고통 앞에서 마음의 운동을 자기 안락을 위한 자위의 도구로, 자기가 속한 법의 권역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로 환수하는 고통의 질료화/추상화(350)’하기를, 조남호가 그랬던 것처럼 김주익을 모른다 하며 ‘눈물을 훔치면서’ 김진숙을 불법자로 매도하기를(257), 그리고 바로 지금 최순실이 법정에서 진실을 묻던 의원을 딸아이의 영혼살인자로 매도하며 울부짖는 스펙터클을 매순간 집전한다. 그 ‘사이비성’과 실제 지금/여기의 삶을 묶는 전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최초의 가치이자 성부인 축적의 법과 그것을 운동시키면서 매개하여 잉여가치로 화하는 성자인 국법의 이위일체, “신-G’”(13)이다.


   이에 사람들은 저 ‘성스러운 끈’, 세계를 단단히 매고 있는 저 매개/매듭에 다양한 방식으로 봉헌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성스러운 끈의 매듭을 더 매는 방식으로, 그 반대 편의 이는 그 끈의 성분을 조사하고 끈을 푸는 지식을 체계화하여 이른바 ‘지식팔이, 책팔이’를 하는 방식으로, 또는 그 둘의 결합의 모양으로 이 세계에 매개의 매개를 더하고 있다. 그 끈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는커녕! 한 번 엉킨 작은 실타래나 목걸이를 풀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안다. 풀려고 할수록 더 엉키고, 자신이 더 엉김을 가하고 있는 자신, 변수에 기하급수적 변수를 얹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의 그 분노를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모세의 사목권력적 후생체에 봉교하는 인간(92) 떼들에 맞서 정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매개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 수단 그 자체를 그대로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목적의 영역도 아니고 이러저러한 목적에 종속된 수단의 영역도 아닌 인간 사유와 행위의 장으로서의 목적 없는 순수 매개성의 영역”(226)이다.


    그 정치를 누가 수행하는가? 누가 그 매개/매듭들의 경첩을 절단할 수 있는가? 비존재들을 분리/양산하고 그들을 재합성함(291)으로써 축적의 축적을 거듭하고 급기야는 모든 매개를 절멸시켜 ‘순수한 축적’ 곧 금융자본주의G-G’(96)의 체제 속에서 빚(Schuld)을 볼모삼아 피를 빨아먹고 사는 체제를 끝장낼 수 있는가? 바로 폭력의 당사자들 즉, 고통의 최전선에서 고통을 사변적으로 환원시키려는 자들에 분통과 원통으로 소리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을 위시하여 깨어 있기로 결단한 ‘모두가 된’ 이들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아니’었던 수많은 5. 18 엄마들이 ‘모든 이’로 화하여 4. 16 엄마들에게 보내는 저 절절한 인사말이 선취하였고 그것이 광화문과 곳곳의 불로 옮겨 붙어 최순실-박근혜-이재용(104)으로 이어지는 비밀의 카르텔을 끝장냈듯이.

<5. 18 엄마가 4. 16 엄마에게>[각주:2]


   고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각주:3] 라는 저 맑스의 말을 바로 오늘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의 불로, 세계의 무능/유능(406)을 도려내고 태워버리는 불로, 사목적 게발트로 위장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밀스런 끈으로 거듭re엮고 매회 짜이게 하는ligio, 그럼으로써 축적이라는 비밀스런 제 1목적의 위기를 관리하고 종교적religious 원상복구를 수행하는 공동 ‘비선’의 게발트”(118)를 대항하는 익명들 곧 ‘아무도 아니’(296)로 존재하는 고유한 존재자들로 맞아들이자. 최종목적론적이고 메시아주의적인 선언문을 쇠말뚝처럼 박아댐으로서 세계의 ‘잔여’(351)가 그 맹아로 품고 있는 ‘파송된 그리스도-아이들’(153), ‘바틀비-그리스도(348)’등을 절멸시키려는 의지를 꺾고, 계속해서 그 입지점을 ‘다른 곳에’ 세움으로 ‘사랑의 시도’(291)를 이어 나가는 그 말로 읽도록 하자. 그 ‘다른 곳’이란 김영민이 정의 내린 ‘세속’이 가리키는 바, “스치고 섞이면서 만날 수 없고, 겹치고 묶이면서 만날 수 없고, 손을 잡고 혼인하면서 만날 수 없고, 악수를 하고 계약을 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어긋남의 표상. 내 속에 있으면서도, 아니,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너와의 아득한 거리에 대한 표상”[각주:4]이며, “개인의 호의 앞에 무력한 관계의 구조 곧 그 애틋하고 알뜰했을 호의가 속절없이 부닥치는 벽” [각주:5]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윤인로의 책 『신정-정치』(갈무리)에 관한 서평입니다. [본문으로]
  2. 오월어머니집과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 등 5·18 단체 회원들이 지난 11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하고 조속한 세월호 선체 인양을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팽목항에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라는 제목으로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펼침막을 내걸었다. 사진=5·18 기념재단. 연합뉴스 원문보기: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6508.html#csidx1afe6d7bc52ceb493856a24879f17e8 [본문으로]
  3. K. Marx,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2011. 25쪽 [본문으로]
  4. 김영민, 『동무론』, 한겨레출판사, 2008, 164쪽. [본문으로]
  5. 앞의 책, 16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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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묻는다, 


5월 9일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선택을 할지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리스도인이 선거에 임하는 자세?


    5월 9일이 다가오고 있다. 헌법 최초 탄핵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촛불을 들었건 들지 않았건 모두가 ‘내가 바라는 다음 세상’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나의 소중한 목소리를 내는 소중한 선거란 어떤 것일까? 분명 예년의 투표보다 그 무게가 남다름을 인지하면서도 짧은 선거 기간만큼이나 응축된 생각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하루하루다. 필자는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삶의 신념과 정체성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라 고백하는 1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필자보다 더 오래되고 노련한 정치 의식-행동과 삶의 경륜에 의해 다져진 선택 방법에 대해 존중을 표하고, 아직 한참 모자라고 설익은 한 마디를 내놓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 말이다.

   먼저는 이 질문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갖는 특정한 선거의 방법 또는 선거를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이 과연 누구이기에 선거를 하는 태도가 따로 있다는 것일까? 우리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럼 예수를 우리의 삶과 이 세계의 주인, 통치자로 고백하는 우리는 예수처럼 선거를 하면 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예수를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가만, 생각해보자.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있었던가?


.

2017, 예수의 선택?


   그렇다.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없었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통치에 관한 한 황제 1인이 다스리는 군주제도였고 지금 우리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제도가 있었다. 너무 난감하다. 예수의 투표 성향을 분석해서 우리도 그와 같이 투표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예수와 우리 사이에 있는 2천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한반도라는 공간 이 두 가지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라도 한 걸까? 게다가 한 가지 렌즈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티나의 역사적 체험을 전제로 하지만, 유럽의 역사 과정 속에서 탄생한 종교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앙 제도와 해석 체계는 유럽의 경험에 기반을 둔 예수 신앙의 산물이다. 즉,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유럽의 문화로 재해석되고, 그것이 다시 우리의 삶의 기반으로 재구성되어온 역사를 인지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이 다중적인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소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접어두도록 하자. 이미 수많은 텍스트론들이 말하고 있다시피 예수에 대한 재구성은 ‘읽는 이’의 바람과 삶의 경험들에 의해 심하게 교란된다는 것이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 것 자체가 물음표로 던진 이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팔레스티나에 살고 죽었던 하나의 예수’의 구성은 불가능함이 천명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5월 9일에 투표한다면 0번에 찍을 것이다.’라고 점찍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직 말하고 싶은 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선거와 투표, 예수님이 지금 이 시점에 오셔서 투표하신다면? 이런 생각을 하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많다는 것이다. 곁가지로 생각해 보자. 우리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라는 것의 함의, 곧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분, 따라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이 틀거리. 이 언어가 민주주의 사회 즉 백성(民) 또는 시민이 주인이라 하는 2017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그리고 신과 결별하고 ‘생각하는 인간(데카르트)’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 국가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주체라고 이미 천명된 근대 이후의 이 세계 안에서 당신은 정말 뼛속 깊이 이해가 되는가 말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로의 접근이 불가능하였듯이 예수와 선거를 연결짓는 일은 너무 깊은 작업이라 포기해야만 할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불가능하기에 더욱 흥미진진해 보이는 건 나 뿐인가. 비단 정치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아니었던가 말이다.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


    자, 이제 길었던 서문은 제쳐 두고 예수 당시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예수가 보여주었던 삶의 행적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야겠다.

    예수의 모든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이 글에서 모두 다룰 수 없지만, 그의 행위가 최종적으로 다다른 지점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삶이 보여주는 정치적 함의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작년(2016)에 진행된 본 연구소 신학아카데미 탈/향 강좌에서 김진호(본 연구소 연구실장)의 ‘예루살렘에서의 7일’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해 보도록 하자.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이것은 고대의 전형적인 ‘잔혹극’의 한 실례다. 잔혹극이란 ‘희생양’의 배제를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형식으로 공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권력의 지엄함을 승인하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체제는 피압박 대중의 욕망분출 방식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욕망 분출의 기회를 봉쇄하는 극단의 배제집단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배제집단을 천민 계층(마지널 휴먼)이라 하는데, 대중은 이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카타르시스를 일상 속에서 경험한다. 이때 극단의 배제집단은 자신의 욕망분출의 계기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광기’의 사람들, 즉 악령 들린 사람들로 만드는,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배제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사회적 지배의 기재로 활용된다. 다른 한 유형은 잔혹극을 통한 욕망의 카타르시스다. 대중은 출구를 찾아 정처 모르게 내면을 휘젓고 다니는 무의식적 욕망을 분출할 안전한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잔혹극의 희생양이다. 대중은 억압된 욕망에 분풀이라도 하듯 분노를 한껏 그에게 폭발시킨다. 그리하여 권력은 그 대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잔혹하게 처벌한다. 권력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이기라도 한 듯이. 요컨대 잔혹극은 대중의 축제이기도 했다. 그 축제를 축제로서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자신이 역모자의 적극적 추종자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십자가형은 처형자를 위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인 사람을 재판 없이 함께 처형하는 관례를 동반했던 것이다. 

메시아가 일으킨 변혁을 향한 불, 아니 메시아라는 변혁의 불. 그것을 지르는데 공범이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하는 화재경보기에 놀라 무대에서 흩어져버린다. 이제 그들 중 누구도 성전의 억압의 장치들을 불 질러 태워버려야 한다는 ‘불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다. 화재경보기가 울린 뒤, 불을 냉동시켜버릴 듯 거세게 내뿜을 소방차의 잔인한 물줄기가 온 세상을 뒤덮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세상을 향해 찢어질 듯 경고음을 발한 뒤, 그 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불의 호소’만이 허공 속에서 춤판을 벌이며 남은 공연을 실연할 뿐.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고, 추종자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멀찍이서 침묵 속에 관망하는 가운데, 처절하게 찢겨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예수는 죽어간다. 여기서 ‘신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잔혹극의 가학성, 권력과 대중의 공모 속에 벌어지는 역사의 사디즘(sadism) 속에 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신은 죽었다. 아니 가학성을 가학성으로 보복하는 신은 죽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변혁 행위를 꿈꿨으나 하느님은 변혁행위를 통해 예수와 만나지 않았다. 예수사건은 바로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는 모든 이의 침묵 속에 도살당한다. 바로 그 현장, 신마저 침묵하고 있다는 바로 그 현장에서 변혁 행위의 주체인 신도 도살당한다.[각주:1]


    메시아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물러나 사람들의 마음 따위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피안의 세계를 전파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가 도래하여 통치를 벌이는 하나님의 나라 는 죽음 이후인 내세의 삶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 내면의 안정, 안심을 얻는 ’힐링캠프’는 더더욱 아니다. 메시아란 철저히 현실 내의 정치적인 존재였다. 예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며, 현실적이라 함은 곧 생활 즉 삶을 이야기하는 예수를 통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를 일컫는다. 인간들은 예수를 봄으로써 현실(the Real)을 읽고, 예수를 읽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과 세상은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하나님과 인간 및 세상이 화해한 ‘하나의 장소(One Place)’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까지 말했다. 즉, 우리의 현실은 어디인가? 그리스도라는 공간이다. 그리스도라는 공간 안에 채워진 그리스도의 삶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는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던지며 살았다/죽었다. 예수는 불을 지르는 사람인 동시에 아버지인 신을 도살하는 주체였다. 매일이 반복되는 이 지루한 일상의 세계가 변할 수 있음을 알렸고, 이전부터 약속된 바로 그 ‘야훼의 날’이 오늘 여기에 다가왔다고 선언하며 모든 죄와 아픔을 치료하는 실천적 존재였으며 ‘아버지’로 표상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상(像)을 파탄내는 무뢰배였다. 방금 살펴본 ‘예루살렘에서 7일’간의 행적은 모든 메시아로서의 삶을 축약하고 종합하고 결론짓는 일이었다. 즉, 십자가를 포함한 예수의 삶 전체는 아픈 사람들의 병을 ‘지금 그 자리에서’ 고치고 사회 속에서 ‘죄’라고 여겨졌던 고정된 편견과 맞서서 싸워 논쟁을 일으키고 불화를 일으키는 삶이었다.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누가복음 12:49~53)


    제도정치를 주관하여 이 지루하고 억압된 일상을 마비시킴으로 유지시키고 유지시킴으로 마비시키는 제도의 권력들과 싸웠다. 제도의 권력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였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생각이 마비된 사람들이라면 질문으로 일깨우고, 사회적 시선으로 일상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탄생부터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리고 죽는 순간과 다시 부활하는 그 순간까지 모두 그 한 걸음 걸음이 사람들에게 불을 던지고 일깨우는 정치적 존재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연극의 희생양으로 죽임 당했지만, 메시아 예수를 죽인 그 손들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세상의 곳곳을 치료하며 불의한 세상에 균열을 내고 불을 던지는 사람들로 변화해 갔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특정한 신의 특정한 뜻, 특정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러 온 사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그 하나님의 통치란 다름 아닌 사람이 어느 하나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간에 하나님에게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피는 꽃까지 모두 일일이 살리고 돌보시는 그 원리에 의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그가 민의(民意)의 화육(化肉),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있음/없음들의 몸’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는 비단 정치인들이 떠받드는 - 동시에 떠받들지 않는 - 민심의 지엄함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심의 부끄러운 민낯 또한 만천하에 드러내신 분이기도 하다. 훈련되지 않고 오로지 짐승 같은 대중의 에너지가 어떻게 권력자들에게 악용될 수 있는지 또한 자신의 몸으로 똑똑히 대면시켜 주신 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불을 던져 놓고 그 불이 자기에게로 향하게 되었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자신에게 들이대는 불길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후일에 자신의 죽음 이후에 벌어질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들도 상상하면서 말이다.


민주주의와 선거와 예수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예수와 민주주의는 사실 애당초에 불가능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떤 투표를 해야하는지 어렴풋하게 실마리를 잡아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2항>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 1조 1항의 말은 언설(言說)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 대한민국은 백성이 주인인 국가이다. 민주 공화국이란 뜻은 사전 뜻풀이를 가져 오자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해서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를 의미한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여 ‘민’이 주인이라는 것은 개별 개체로서 ‘내’가 주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합체로서의 민의’이다. 즉, 공동의 의사 결정이 반영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럼 위에서 말한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 체제는 예수가 꿈꾸었던 정치, 즉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현실적인 정치체제와 모습을 갖추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가 어떻게 통치하는지 그 체제의 정답을 어디에도 계시한 적이 없다. 왕정 시대로 접어들면서 성서 기자는 하나님이 못마땅해 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사 시대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시대였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하나님과 소위 ‘독대’하여 하나님과의 채널이 단일했던 모세-여호수아로 이어지는 광야와 초기 가나안 시절의 ‘임시정부’형 체제가 하나님의 통치에 더 가까웠을까?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족장 시대? 에덴동산…? 대체 우리는 그럼 얼마의 시간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이런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아니면 소위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듯 교회가 많아져서 ‘복음화율’이 높아진다면, 즉 교회에 등록한 기독교 신자들이 늘어나 그 수치가 100에 가까워지면 그 때서야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가장 ‘직접’ 반영하는 정치체제야말로 환상에 가까우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엄명을 어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체제는 현재 잠정적으로 가장 우리에게 적합한 체제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민주주의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 체제가 아니라는, 이것보다 더 나은 정치체제를 고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에겐 정의를 추구하는 능력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하며, 다른 한편 불의를 행하려는 경향성도 지니고 있기에 민주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사회정의 실현에 있다.[각주:2] 오늘날 구약 시대의 신정 정치 즉 하나님께서 특정 매개자를 통해 통치하시는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여러 세속 정치 형태 중에서 민주주의가 희년 정신 즉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해 주는 정치 체제라고 판단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것은 곧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 도래의 선포, 곧 누가복음 4장 16, 17절의 말씀의 내용과 가장 가까운 정신을 구현한 체제일 것이라 고백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170509 대선의 의미


    여기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비단 정치체제의 조형(造形)만이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를 치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 즉, 금번 국정농단 사태, 소위 박근혜-최순실의 비(반)민주적 통치의 상태가 드러낸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은 우리 사회의 곳곳이 어디 하나 빠짐없이 병들어 썩어 문드러진 사회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각주:3] 특히 박근혜-최순실은 삼성의 이재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드러났다.[각주:4]



    즉,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 특히 이번 선거와 이어지는 정치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사회는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정치(제도)의 개혁, 경제의 민주화, 동북아시대를 맞이하면서 통일과 외교에서의 주도권 장악, 점증하는 생태위기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시급하고도 안전한 대책 등이 이번 선거를 시작으로 앞으로 계속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결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체제”의 심판과 그 사태의 종결로서 인지 되어선 안 된다. 이제 대한민국, 아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디자인되어야 그 기초를 쌓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예레미야 31:31)”


그렇다면 나의 목소리를 내는 투표란?


    예수, 나, 민주주의, 그리고 2017 대통령선거라는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이번 대선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일단은 선거를 해야 한다. 아무나 되겠지 하면 정말 ‘아무나’ 된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최악의 지도자로부터 통치를 받을 것이다. 그 때부터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옛날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하자. 마키아벨리를 통치기밀의 폭로를 통한 반-폭정주의 및 공화주의의 실천자로 인식했던 바로크시대 보깔리니는 법정에 선 마키아벨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검사는 마키아벨리가 한밤중 양떼 속에 숨어들어가 ‘개의 이빨로 만든 의치’를 끼우려다 발각되었으며, 그런 행위는 양의 젖을 짜고 털을 깎는 ‘목자들’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며, 이후 양떼는 목자들의 ‘휘파람과 지팡이’를 따르지 않게 될 것이고, ‘밧줄로 둘러친 울타리’로는 더 이상 양떼를 관리할 수 없게 될 것인바, 바로 그때 ‘양털과 치즈의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의 이빨로 만들어진 의치는 양을 개처럼 물어뜯을 수 있게 하는 힘, 목자들의 호명과 지시를 거절하는 힘, 목자들이 매번 재설정하는 목양의 울타리와 영양배분의 경계를, 목자들이 정립한 법의 경계를 무화하는 힘이다. 개의 그 이빨, 그 힘은 검사에 의해 ‘극히 위해한 성격의 안경’으로 기소되는데, 그 안경은 그들 목자들의 법 연관이 양털과 치즈 가격의 관리를 통한 축적의 보호상태임을 문제시하는 시력을, 그런 축적의 보호가 ‘신성의 가장’과 ‘국가이성이라는 폭정의 비밀’에 의해 관철되고 있음을 폭로하는 시력/시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각주:5]



    투표는 가장 작지만 확실하게 당신의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고 가장 적확하다. 15명의 정치인이 대선에 출마했다. 누구를 찍든 찍는 게 당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작이다. 다시 말하건대, 이번 선거는’시작’에 불과하다. 근본부터 시작하는 선거다. 세월호 참사가 던진 질문, ‘과연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삶,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이 곳이, 내가 운명처럼 태어나게 된 이 곳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뜻’이 있다고 믿는 이 곳에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 ‘현실’에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면 이제는 응답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이 단번의 투표에 이룰 수 없다. 투표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당신은 당신이 찍은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 사람과 그 주변의 세계가 당신이 점찍어둔 사람을 찍을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 그 후 어떤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 비록 당신이 찍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 그 때부터 그를 사정없이 움직여야 한다. 정당 가입과 활동으로, 시위와 집회에 참가함으로, 전화로, SNS로 말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당신’의 시작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16 신학 탈/향 강좌 <예수, 트랜스-크리스천 히스토리를 위하여>(강사 : 김진호)의 1강 ‘역사의 출발, 십자가에 달린 그 이’ 중 한 단락을 발췌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2017 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 지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 (2017, 동연) 11쪽 인용 [본문으로]
  3.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두 인물이 있지만, 사실 그들과 그들이 가지고 논 권력을 둘러싸고 있는 층위는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다. 일차적으로 그들을 비호하고 키운 정치 기관들 - 청와대 비서실, 국정원, 검찰, 헌법재판소 등 - 과 그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그리고 군대가 있고, 또한 그들의 충성스러운 ‘입(Speaker)’ 역할을 한 그들의 입장을 매일 매순간 퍼나르고 재생산해낸 언론권력(조중동 등의 일간지, 공영방송과 종편방송 및 포털사이트)이 있을 것이다. 비단 그것 뿐인가. 그들의 권위를 뒷받침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소위 각계각층의 지식팔이 ‘전문가 집단’과 대중의 영적인 상태를 주관하는 종교권력들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자신의 역할들을 충실히 집행함으로써 직접 책임지지는 않지만 모두가 조금씩의 힘을 보태어 만든 사태가 결국 여기-지금 오늘의 생명-삶을 갉아 먹는 체제로 현신(現身)한 것이다. 사회학자 윤인로는 박근혜 정부와 그 주변을 둘러싼 권력들을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간접권력’이란 개념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 보호능력 없는 채로 복종을 요구하고, 정치의 위험을 몸소 받지 않고서 명령권을 가지며, 책임을 다른 기관에 강요하면서 그 기관을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간접권력’ (칼 슈미트, 홉스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 교육과학사). 여기의 간접권력이란 무엇인가. 체계적인 무책임의 통치상태, 곧 기술적(객관적, 기계적, 외적)으로 된 통치체의 중성화(다원화, 분권화, 합리화) 상태, 공모한 사적 당파성들의 ‘영원한 수다’ 상태.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90쪽) [본문으로]
  4. 가장 왼쪽은 실제 타임지(아시아판, 2012. 12. 17) 표지, 그리고 이후 2장의 사진은 패러디물이다. 각각 왼쪽부터 ‘독재자의 딸(박근혜)’, ‘독재자의 딸의 무당(최순실)’, ‘독재자의 딸의 무당의 후원자(이재용)’로 표현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13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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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말고 동무 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친구 / 친구사이


    옛부터 어른들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누차 말씀하셨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갈 수도 있고, 친구 따라 감옥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아이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아이의 환경은 어떠한지 늘 노심초사 감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럴까, 심지어 요즘은 천진난만하게 아무에게나 ‘너 나랑 친구할래?’라고 말을 걸며 코묻은 간식을 건네던 어린이들의 풍경은 온데간데 없고, 아이들이 먼저 친구를 어른들의 기준에 따라 ‘가려서’ 사귄다는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이들이 사는 동네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한다거나, 임대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친구를 왕따시키는 등의 행동은 돈에 찌들어버린 어른들과 이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물론 어느 누가 친구를 잘 사귀고 싶지 않을까? 그 누구도 좋은 친구를 만나서 ‘강남’ 가고 싶어 하지 어두컴컴한 감옥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친구 하나 잘 사귀어서 삶의 도약을 이룬 사례와 친구 하나 잘못 만나서 인생을 망친 사례는 늘 존재하는 것이니 미리 그 사실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그 덕으로 ‘강남’ 한 번 가보겠다는 심산을 누가 모르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좋은 친구를 가려서 만나는 방법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애초에 그런 방법이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렇게 친구를 ‘가려가며’ 만남으로써 우리가 반드시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 꼭 맞는 맞춤의상처럼 잘 만들어진 ‘완제품’으로서의 친구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즉, 애초에 좋은 친구란 없다. 오로지 존재하는 게 있다면 나와 친구의 ‘사이’만 있을 뿐이다. 나와 만나기 전에 좋은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리란 보장이 없다. ‘좋은 친구’를 만남으로써 내 삶이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며 친구와 나는 많은 기억과 경험들이 켜켜이 쌓이고 그 와중에 상호적으로 에너지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모진 비바람을 헤쳐 나가 어느덧 옥석같이 빛나는 ‘친구사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친구란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친구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 그 친구’사이’를 일컫는 말이었던 게다.


   한데, 이 생각에 기초하여 오히려 이 참에 한 발 더 나아가서 ‘친구’라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의심을 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좋은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챘다면 이제는 과연 친구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관계를 지향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김영민 그리고 '동무론'


    이에 나는 김영민이라는 한 철학자를 소개하려 한다. 그는 오랫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습을 고민하고 디자인해 온 이다. 특히 친구라는 관계의 그 ‘끈끈함’과 ‘축축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런 친구라는 관계의 특성이 끌어들이는 여러 부작용들에 대해 고민했다. 하여 그는 친구의 대안으로 ‘동무’라는 새로운 관계 양식에 대해 꾸준히 발언해 왔고 단행본으로 세 권에 걸쳐 – ⌜동무론⌟ (한겨레출판 2008), ⌜동무와 연인⌟ (한겨레출판사, 2008),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한겨레출판사, 2011) – 왜 우리는 친구라는 관계 말고 ‘동무’여야 하는지에 대해 길게 논의를 펼쳤다. 나는 여기서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할 수는 없지만, 몇 회에 걸쳐 짤막하게 김영민의 동무론을 소개함으로 우리가 이제까지 맺어온 친구 또는 친구 사이를 성찰해보고 새로운 관계의 방식,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려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김영민이 말하는 동무란 ‘동무(同無)’다. 다시 말해, 동무란 즉 ‘같음이 없는 사이’인 것이다. 본래 동무란 순우리말로서 친구를 의미하지만, 김영민은 기존의 친구에 관한 통념을 뒤엎고 자신만의 특별한 동무론을 펼치기 위해 일부러 ‘동무’를 한자로 언어놀이하듯 만들어 ‘친구’라는 관계와 차별화하였다. 그에 의하면 친구와 동지, 그리고 동무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과 인간이 새롭게 맺어야 할 교우관계는 그 셋 중 ‘동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복잡하고 헷갈리니 길지만, 직접 그가 말하는 ‘동지’와 ‘친구’, 그리고 ‘동무’의 비교를 들어보도록 하자.


대의가 푯대라면 그 푯대 아래 ‘동지’가 모인다. 그들은 거사에 함께 투신하고 혁명에 신명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은 무시되어도 좋고, 사랑조차 종종 걸림돌일 뿐이며,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부차적이다. 더불어 벤야민의 비평론이 가르치듯이 객관성마저도 당파적 실천을 위해서 희생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배신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대의도 이데올로기도, 관념의 일관성만으로 묶어둘 끈도 없다. 전두환들이나 김영삼들이, 최민수들이나 강호동들이 웃는 표정만으로도 족하다. 이론이 부재한 자리를 정서적 일체감이 들물처럼 채우는 사적 우연성, 그것이 친구다. 공유된 이념이 없으니, 원칙상 배신도 존재할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관계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배타적 관계의 형식은 대의와 이념의 부재가 남긴 정서의 진공 속에서 생긴다. 대의라는 공간적 관념의 정합성이 없는 대신,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 (중략) 그러나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굳이 조어로 그 취지의 한 극단을 잡아내자면, 동무는 동무(同無)다! 오히려 서로 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면서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 눈을 팔면 머-얼-리 몸을 끄-을-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중략) 우선적으로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 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 (동무와 연인, 31~32쪽)


    김영민이 말한 동지라는 관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지’적 관계가 맞다. 이들은 어떠한 신념에 의하여 결합되어, 특정하고 뚜렷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인 사이다. 그들 관계 안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다. ‘큰 뜻(대의)’ 곧 이데올로기가 움직이는 대로 사람은 거기에 맞춰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의를 저버리니 ‘배신’이다. 푯대를 향해서 가는 데에 거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만두어야 하고,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이라면 그것 역시 뭉개야 한다. 동지들 사이에서는 신념과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곧 존재 이유다. 그런 신념이 맞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하루 아침에 결별과 재결합도 가능하다.


    반면에 친구는 동지의 대의와는 아주 상반된 관계다. 친구는 동지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큰 뜻(대의)’ 자체가 온데간데 없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비어 두기로 작정한 관계다.안재욱의 노래 ‘친구’에서 나오는 것처럼 ‘괜스레 힘든 날 무턱대고 전화하여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는’ 관계다. 즉, 수많은 자기 자신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입었던 옷들을 다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이더라도 전혀 괘념치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관계가 친구다. 이런 말을 들으며 우리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김영민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그것은 ‘환상’이라고 말이다.


당신은 ‘친구’를 붙잡는다. 끈끈해서, 혹은 공유된 기억이 축축해서, 어렵지 않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무론, 197쪽)


    친구는 끈끈하고 축축하다. 아니 그런데 ‘대의’, 이데올로기와 같이 사람을 물건 대하듯 폭력이 사라진 관계, 사회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써야만 하는 가면 즉 페르조나라는 나를 가두고 억압하는 잔인한 것들이 사라진 관계, 그런 칭찬받아야 마땅한 친구사이가 왜 그런 부정적인 호칭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촉촉하고 포근하다면 모를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김영민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내 실천의 진정성을 담보해주던 그 완고한 사물의 질서는 꺼져내리고, 다만 기표들의 편차와 그 점증, 혹은 점감하는 시선들만이 나를 표시해주는 시대, 신화와 상징마저 전자화되는, 전자적 기호들의 유희가 절정에 달한 시대, 그 속에서 흔들리며 미끌어지는 낡은 주체는 그 낡은 ‘친구’ 관계를 통해서, 그들이 나누고 있는 공통의 기억, 그 습도, 혹 열기를 통해서 제자리, 혹은 그 죽을 자리를 잡는다. (중략) 친구의 미소, 그 주름살, 그 걸음걸이와 뱃살, 그 술잔과 그 담배 연기, 그 변치 않는 말버릇과 허장, 그 과도한 기대와 그 과소한 실천의 패턴 속에서 제자리, 혹은 죽을 자리 찾으며, 당신은 안심하고 안정하며 안돈하는 것이다. (동무론, 198~199쪽)


    쉽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느낌은 온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와 과연 ‘나’란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 즉 존재의 붕괴, 고정된 나로서 존재할 수 없고 늘 하염없이 흔들리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가 그나마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말하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손에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친구인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말대로 늘 ‘액체 상태’인 세계, 즉 사물의 소비와 유통이 너무 빨라서 그 유동이 물과 같이 되어버린 상태인 세계에 멀미하는 와중에 ‘친구야, 우리가 남이가!’라며 내 손에 다 낡은 진리 한움큼 쥐어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친구란 말이다.


    그래서 김영민은 묻는다. 과연 그 ‘안심, 안정, 안돈’이 이 세계와 나를 성장시키는가 하고 말이다. 기독교의 친숙한 언어로 말하자면, 그런 안심, 안정, 안돈의 관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다. 결국 친구에 관한 우리의 과도한 긍정은 그 긍정의 크기만큼 우리가 얼마나 현실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없고 쉼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는 그런 세계의 흐름에 반대되는 고정되고 틀에 박힌, 그래서 안정적인 ‘나’와 ‘세계’를 찾고자 ‘친구’라는 허위로 도망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끝없는 ‘다름’들이 쏟아져 구역질이 날 정도의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도피하는 곳, 거기가 ‘친구’다. 그 친구에게 가서 우리는 묻고 또 묻는다.


    “나 원래 괜찮은 사람인 거 맞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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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가 사라진 곳에서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개역개정)


    감사, 영광, 기쁨 찬양과 같은 송영의 언어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이런 언어들은 그 무게로만 따지자면 사랑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은 언어이지요. 감사와 찬양, 기쁨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그 분을 향한 무한한 긍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송영의 언어는 존재론으로는 하나님이 ‘신’으로서 누리는 독점적인 지위를 밝히 드러내는 말이며, 동시에 윤리적으로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늘 상기시키고, 겸손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언어들입니다.


   그런데, 실상 지금 우리의 생활과 기독 공동체 안에서는 정작 송영의 신학은 천박한 인과율의 굴레 안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제 아들이 이번에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 사업이 술술 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언어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늘 맴도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송영은 번영신학과도 강력히 결합되어 우리의 기존 신앙 체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번영신학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송영의 언어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컨대 ‘하나님, 이번에 제가 일본여행을 계획했는데, 마침 다른 일로 취소되어서 못 갔더랬습니다. 그런데, 가려던 그 곳에 지진이 난 겁니다. 그 곳에 가지 못하게 막으신 당신의 계획이 놀랍습니다!’ 라든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만약 몰랐다면 저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와 같은 언어는 결코 우리의 귀를 거슬리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인과율의 송영이 녹아든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18:11~13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인과율 송영’의 전형입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는 바리새인의 기도 말이죠. 이는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이미 천년도 더 이전에 부정하셨던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교회 안에서는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송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제대로 된 송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또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떤 감사의 제목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은 온전한 감사가 아니라는 지적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하박국 본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입니다. 내게 키우는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인 포도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올리브 열매는 달린 것이 없습니다. 내게 우유를 제공하고 고기를 제공해 주는 자산 중의 자산, 양과 소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음에도 내게는 구원의 여호와가 계시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사건이 진행될지라도, ‘통념적인 감사의 제목’들이 사라질지라도 내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찬양과 감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은 앞에서 살펴본 인과율의 송영보다는 훨씬 송영의 본질에 가까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 찬양 등 송영의 언어는 성서 곳곳에서 나타나듯이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고, 소망과 믿음을 통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러한 기도는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나는 ‘날 때부터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아비와 그 당사자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라고 여기던 인과율의 연줄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오직 그가 맹인인 이유는 그 날 그 순간에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목도하고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의 찬송을 돌리게 하려고 생긴 일이라 설명하십니다. 즉, 송영이란 현실의 당면한 문제, 가시적인 개별 현상을 뛰어넘어 드려지는 것이며, 소망과 믿음의 이름으로 영원 불멸한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를 감사하라는 일종의 ‘정언명령’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다윗의 탄원 시편이라든지 오늘 읽은 하박국의 본문에서 등장하는 ‘비록 ~할지라도’의 신학은 현실을 뛰어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서도 그러한 송영이 윤리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은 신앙의 순전함을 강력하게 보장하는 송영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최근의 신학에서도 이런 송영을 장려하지요.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마치 어디를 가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만이 ‘답’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겠지만, 하나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라. 하나님이 계시는데 대체 불평할 게 무엇인가?”라는 당위적인 선언으로 그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과율의 송영보다 더 억압적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역사 속에서 긴 호흡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무화(無化)시키는 결과를 빚어냅니다. 이러한 송영과 송영의 장려가 지금 고난과 고통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을 얼마나 매만져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당장 내 주머니에는 소유한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이라는 ‘백지수표’를 소유했다는 말은 마치 미래의 수입을 담보로 끌어 쓰는 신용카드와 무엇이 다릅니까! 현재 존재하지 않아서 끌어쓰는 감사는 스스로를 위무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채우는 것’으로서의 감사라는 매커니즘은 더욱 공허한 종교적인 허무를 초래하지는 않을까요? 최근 횡행하는 힐링의 담론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는 식의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아도 황폐한 우리 마음에 더욱 큰 구멍을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우리가 불러야 할 송영은 무엇일까요? 다시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있지도 않은 티끌만한 감사의 이삭을 줍고 또 주워 감사와 찬양의 제삿밥을 짓는 그런 류의 송영은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다짜고짜 감사해야 합니까? 왜 감사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름만으로 감사하라는 공허한 기계적 감사를 해야 하겠습니까?


    이 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송영의 첫걸음은 송영에 대한 강박과 조급증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송영에 앞서 잠잠해지는 것, 달리 말하면, 그 감사의 제목, 그 자리가 비어 있음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섣불리 비어있는 송영의 자리에 하나님을 앉히지 않는 것 말입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감사가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며, 어서 하나님을 송영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정의 자리에 홀로 서서 송영을 멈추고 결연히 견뎌야 합니다. 이육사의 시 ‘광야’는 이렇게 불가능한 송영 앞에 서서 그 모욕과 부정의 시간을 견디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친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선 지고 

   큰 강물이 드디어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에 대해 황현산 선생이 내린 해석과 우리가 모색하고자 하는 송영의 대안에 대해 연결지어 설명해보려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현실은 산맥들도 차마 범하지 못한 그 광야,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렸지만, 결코 그 곳만은 길닦기를 포기한 그 광야를 닮았습니다. 송영이 가능할 리 만무한 이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큰 강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큰 강물, 부지런히 계절을 피고 진 인류 전체의 고고한 역사의 강물은 흐르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마치 이소라가 노래한 것처럼,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고 고백할만큼의 고독이 강렬합니다. 그 강물 앞에서 나란 존재는 광야 앞에서 찌질한 삶을 견디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짧은 한 인생 살다 지는 티끌이 된 듯 합니다. 그렇지만, 화자는 말합니다. 눈은 내리고 있고, 매화 향기는 홀로 가득하다구요. 매화 향기는 작지만 고결하고, 단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 매화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 부끄러워하지만, 오히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된 세월의 아득함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그 장구함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결국 현재로서는 별다른 힘을 지닌 것도 아니고 합창해주는 사람도 얻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화자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결심하고 있습니다.[각주:1]

    가난한 노래의 씨, 이것이 우리가 불러야 할 송영이 아닐까요? 줍느니만 못한 감사의 조각들을 주워 연명하는 인과율적인 송영을 그만 두십시오.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라는 허구적 이름으로 치환하여 지금을 위무하는 ‘비록 ~할지라도’의 감사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에게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감사할 수 없음에 감사하십시오. 오히려 우리가 송영의 자리를 비워 두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면, 천고의 뒤에 광야에서 목을 놓아, 진정한 초인(들)[각주:2]이 부를 그 송영을 꿈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웹진 <제3시대>


  1. 이 단락의 내용은 황현산의 책,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2015), 18~19쪽의 내용을 요약, 각색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이 ‘초인’에 대한 설명 또한 황현산의 해석으로 읽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 초인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름지기 그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며, 저마다의 자유의지로 행동하게 될 미래의 인류다. 이 “초인”이라는 표현에는 고난의 극한에서 노래 부르기를 선택한 자의 의지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과, 높은 정신적 경지를 확보할 미래의 인간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겹쳐 있다. 이 새 시대의 새 인류는 지금 시인이 숨죽여 부르는 노래를 마음 놓고 “목 놓아 부르게” 될 것이다.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2015), 1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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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났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어떤 '한 아이'의 탄생



    베들레헴 작은 말 먹이통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말 먹이통이란 가혹함 그 자체다. 포근하기보다는 까슬까슬한 촉감, 엄마의 젖내보다 악취가 더 먼저 그를 맞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아이의 탄생 장면은 ‘비록’ 말 먹이통일지라도 사랑해주는 부모와 경배하는 목동들, 동방의 박사들에 둘러싸인 아늑하고 훈훈한 풍경일 것 같지만 이제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아니 ‘염원’하는만큼 그 풍경이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생명에 대한 축하와 격려의 자리라기보다는 엄혹한 세월의 비바람 속에 ‘생존’의 가능성마저 의심받는 회한과 우려의 자리였을 것이다.





한 아이 : 그들 중 하나(One of them)


   그렇게 그 한 아이는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피난민 신세다.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상황이 예상과는 달리 진행되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 일러준 예언의 기쁨도 잠시, 결국 헤롯의 칼날을 피해 아무도 알지 못하는 타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 명의 ‘메시아 용의자’ 찾기에 혈안이 된 헤롯은 박사들과의 대화를 기준으로 두 살 아래의 핏덩이들을 모두 죽여버렸고, 그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내 품의 아이가 진정한 하나님의 메시아인지 ‘죽음의 화신(化身)’인지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고로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사실, 그것은 이제 입 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그는 한 명의 평범하고도 이름 없는 자로 살아가야 했다. 메시아의 목숨을 찾아 헤매던 ‘승냥이’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에 이스라엘로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고향의 상황은 떠나오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서슬퍼런 권력의 칼날에는 ‘헤롯’에서 그의 아들 ‘아켈라오’로 이름만 바뀌어 새겨져 있을 뿐 살아있는 권력으로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게 아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평범하게 자라나갔다. 

   한 명의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간 그 ‘한 아이’는 배고프면 먹었고, 잠이 오면 잤다. 여느 나사렛 사람들처럼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밤이 되면 쉼 없는 고된 노동에서 오는 피곤에 짓눌려 잠자리에 파묻혔다. 메시아가 태어났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왔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의 탄생을 두고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예언은 한바탕 봄날의 꿈을 꾼 듯 씁쓸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평범한 민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갔다.

    마치 우리 시대 루시드폴의 ‘평범한 사람’이란 노래가사말이 그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한 아이’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그 어느날이었다. 사람들이 수군수군거리며 어떤 ‘한 사람’ 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저 변방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가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혈혈단신 맨 몸으로 성전과 권력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과 같은 혼란과 번잡한 일들을 일으켜 일상을 무력과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노동으로부터 사람을 소외시켜 자기 몫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죄와 악의 굴레를 영원히 맴돌도록 만드는 이들에 대해 분연히 일어난 ‘한 사람’이라 했다. 그 아이가 본 광경은 생경하면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한 사람’은 당장이라도 잡혀 죽임을 당했을 이야기를 하고 다녔지만, 그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진리를 외쳤다. 한 사람이 의연하게 빛을 밝히니 사람들이 모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켰을 때, 모든 이들이 그 촛불이 있는 곳을 자연스레 쳐다보게 되듯이… 하나둘 그 ‘한 사람’ 곁에 여럿이 모여서 물결을 이루었다. 결국 헤롯 안티파스를 중심으로 한 권력자들도 의심의 눈초리로 세례자 요한을 노려 보았지만, 소요의 위험 때문에 함부로 그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한 사람의 용기로 비춘 불빛은 이제 들불이 되어 타올라갔다.

    그러나 그 ‘한 사람’ 세례자 요한도 별 수 없는 ‘한 사람’이던 것일까? 헤롯 안티파스의 치부를 집요하게 건드린 결과로, 순식간에 목이 베여 쟁반에 담긴 신세가 되었다. 구름 떼와 같이 모였던 무리들은 흩어지고 도망쳤다. ‘한 아이’도 그 무리들처럼 한편으로는 다시 찾아온 패배감과 무력감을 안고 또다시 일상으로 숨어들어갔다. 그 ‘한 아이’도 이름 없이 무력한 ‘그들 중 하나’인 순간이었다.


한 아이 : 바로 그 한 사람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4~15> 


    ‘한 아이’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서는 강력하게 증언한다. 분연히 ‘한 사람’이 잡히고 난 뒤에 ‘한 아이’가 다시 일어났다고 말이다. 세례자 요한과 똑같은 메시지를 들고 말이다. ‘요한이 잡히고 난 뒤’라는 시간의 진술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무력하게 도망친 무리 중 하나, ‘한 아이’가 예수로, 그리고 더 나아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로 세상에 ‘나타나는’ 시점, 그리고 그가 외친 ‘말’은 반드시 몸조심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험한 말을 가지고 그가 등장했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어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 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554쪽


    만약 세례자 요한 이후, 예수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무력을 떠안고 별 일 없이 살았다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못 들었을 뻔하였다. 하지만, “강력하고 집요하게 악의 정신이 지배할 때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인류 속에 고고하게 흐르고 있는 진리의 편에 서서 꺾이지 않고 균형을 잡고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갔다. 하지만, 그도 별 수 없는 ‘한 사람’이었을까. 몇 년동안 사람을 모으고 소동을 피우며 조금은 시끌벅적했지만 세례자 요한처럼, 또 한 명의 권력의 손아귀에 넘겨져 놀아나고 조롱 당하고 모욕 당하며 죽어갔다. 그로 인해 아주 잠깐 새 이스라엘의 희망을 가졌던 이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그의 손이 먹인 양식으로 배를 불렸던 무리들이 ‘야훼의 이름으로’ 그를 직접 처단하는 칼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결과는 그렇게까지 참혹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여느 때처럼 ‘한 사람’을 쳐다보던 무리들은 또 뿔뿔이 흩어졌지만, 단 한 사람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이후에도 등장하고 또 등장했다. 최후의-최초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켜갔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의외의 장소에서 사건은 늘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대 '바로 그 한 사람'으로 살길      

 

    우리는 요즘 아무리 여러 사람이 공들여 탑을 쌓아도 한 사람이 세상을 완전히 망칠 수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사람’의 의미가, 결코 ‘많은 사람’의 반의어가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중요성은 성경 내에서 아주 뿌리깊게 흐르고 있는 정신이다. 물론 여러 사람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끊어지지 않는 세겹줄(전 4:12)의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 또한 원자로서의 ‘한 사람’, 근원으로서의 ‘한 사람’을 뺀다면 세겹줄은 아예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주변에도 수천명이 모여 있었지만, 단 열두 사람만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해석해주셨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사람(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이 주님을 대접한 것으로 나오는 등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한 사람’의 엄중한 무게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오히려 ‘한 사람’이란 그 자체로서 스스로 온전히 하나이신 분인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 ‘가능성으로서의 온전함’, 또는 ‘온전한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역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갈 소명을 부여 받았다. 그러니 그대, 결코 혼자라고 마음을 놓거나 쓰러지지 마시길 빈다.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어 꿋꿋이 촛불을 켠다면 세상의 어둠은 단 한 순간에 스러져 물러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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