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의 인종청소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피바다가 흐르는 끔찍한 땅으로 변질되었다. 사실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약속의 땅의 적나라한 모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당황스럽고 씁쓸하다. 구약 성서학은 거룩한 전쟁이라는 신학적 담론 아래 가나안 원주민의 희생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약속의 땅과 거룩한 전쟁 같은 이데올리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근대에 세워진 국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종청소”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부끄러운 일이다. 


  공교롭게도 성서에서 처음으로 “인종청소”를 언급된 곳이 다름 아닌 히브리 노예의 해방을 기록한 출애굽기다:


나의 천사가 너희 앞에서 너희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전멸시키겠다(출 23:23, 새번역).


  성서의 “인종청소” 언급은 신명기에서 더욱 심각하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사는 모든 남성, 여성, 심지어 어린이까지 죽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 우리 하나님이 그를 우리 손에 넘겨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와 그의 아들들들과 그의 온 군대를 쳐부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모든 성읍에서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켰습니다(신 2:33-34, 새번역).


    더욱 놀라운 점은 신명기에서 “인종청소”의 주도적 역할은 다름 아닌 야훼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는 것이다(참조, 신 7:1-11; 9:1-; 11:8-9; 23:31-23). 여호수아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특별히 첫 번째 부분은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는 이념 아래 “인종청소”를 합법적으로 설명한다(여호수아 2-12). 그야말로 야훼가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가나안 원주민의 피로 얼룩진 땅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성서의 “인종청소” 개념이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사실이지만, 야훼가 이를 직접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충격적이다.


 성서의 거룩한 전쟁은 “인종청소”라는 면에서 도덕적/윤리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가나안 “인종청소”가 근대 이스라엘의 성립 과정 중 행해진 팔레스타인 “인종청소”에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는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각주:1] 더구나 고대에 기록된 성서가 근대의 역사에서 “인종청소”의 도구로 오용되도록 성서를 해석한 성서학자들의 학문은 재고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서 1장에서 12장에서 언급하는 가나안 정복설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초기 이스라엘은 다른 인종과 점진적이고 평화적 융합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초기 왕정시대인 철기시대의 팔레스타인 산악지대의 거주지는 오히려 “가나안”과 “이스라엘”사이의 인종적 구별이 없음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은 외부에서의 침략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랜 세월동안 내부의 혼합 과정을 거친 평화로운 민족 형성의 과정이다.


 지난 2000년 9월 10일자 뉴욕타임즈에 150명의 유대인 학자와 랍비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시오니즘 운동의 정당성을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이스라엘 땅에 대한 존중을 표해야 한다. 홀로코스트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다름 아닌 약속의 땅에 재건된 이스라엘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성서에 기초한 종교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사실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인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다른 많은 이유로 근대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에 유대인들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유럽의 유대인은 나치정권 유대인 말살정책인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인종청소”의 희생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근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말살하는 “인종청소”의 주역이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서를 언급하면서 미국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구애를 펼쳤다. UN과 미국의 지지 아래 1948년 근대 이스라엘이 탄생하게 된 이래, 이스라엘은 줄곧 미국의 어마어마한 재정적 지원을 받아왔다. 아래 도표에서 보듯이, 1948년 이후, 이스라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군사적이고 경제적 도움을 받은 최대의 수혜국이다.


 수많은 성서학자들이 땅에 대한 신학적/신앙적 논의를 하였지만, 정녕 “인종청소”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다. 미국 듀크대학 명예교수인 데이비스(W. D. Davies)는 자신의 책 The Gospel and the Land에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를 지지하게 되었다고 소고했다. 구약성서학의 대가인 발트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도 1977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 The Land도 같은 맥락이다. 브루거만 역시 성서신학에서 땅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가나안 원주민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달리 키스 와이트램(Keith Whitelam)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1948년에 세워진 근대 이스라엘을 정당화하는 날조된 학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근대 이스라엘의 합법성에 문제제기를 한 유일한 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책,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1997)에서 “다윗왕조와 근대 이스라엘 사이의 유사성을 비교하면서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성서해석”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각주:2] 아래의 삽화는 1948년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근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종청소”의 의미를 한눈으로 잘 보여준다. 성서학자들은 “인종청소”라는 폭력적인 정책의 성서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바바라 로씽(Barbara Rossing)의 책 The Rapture Exposed: The Message of Hope in the Book of Revelation은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세대주의 종말론((Dispensationalism)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종말론 소설인 남겨진 자(Left Behind)와 같은 부류의 소설은 성서에 근거를 두지 않을 뿐 아니라, 폭력과 전쟁, 특히 “인종청소”를 정당화화는 위험한 책이라는 것이다.[각주:3] (필자의 블로그 참조: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종말론).


 구약성서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학문인 구약 성서학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를 옹호하는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과 화해를 위해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 야훼의 말씀을 오늘날 올바르게 재해석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 외래교수,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Michael Prior, "Confronting the Bible's Ethnic Cleansing in Palestine," in Burning Issues: Understanding and Misunderstanding The Middle East: A 40-Year Chronicle (eds. John Mahoney, Jane Adas, and Robert Norberg (New York: Americans for Middle East Understanding, 2007), pp. 267-90. [본문으로]
  2. Keith W. Whitelam,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London: Routledge; Revised ed. edition, 1997), p. 137. [본문으로]
  3. 바바라 로씽,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 종말론: 요한묵시록의 희망 이야기』 (번역: 김명수, 김진양;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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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과 해방: 팔레스타인의 눈으로 보는 출애굽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옥중에서 완성된 문익환 목사의 책 「히브리 민중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신학교에서 구약성서를 가르칠 때, 흔히 학생들이 들이대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애굽에서[각주:1] 종살이하다가 도망쳐 나온 히브리인들이 40년 후에는 오히려 침략군으로 전락 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해방군이 침략군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문 목사는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에서 침략군이 아니라 여전히 해방군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인이 가나안의 농민과 합세하여 가나안 봉주를 물리친 해방군으로서 출애굽의 진정한 정신은 애굽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의 해방전쟁에서 완성된다고 주장한다.[각주:2]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보면, 초기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경험한 히브리인과 가나안 민중이 연대하여 가나안 봉주에 항거한 민중 봉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을 가나안 민중과 연대한 해방군의 이미지보다는 가나안 침략군의 이미지를 서술하고 있다. 출애굽의 해방군이 가나안의 침략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넋두리를 쳐야 할 사람들은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이 아닐까?

 

이 글은 세 명의 팔레스타인 지식인들이- 탈식민주의 이론의 선봉자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 정치 사회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팔레스타인 성공회 신부 나임 아틱(Naim Ateek), 베들레헴 루터란 교회 목사 미트리 레헵(Mitri Raheb)- 말하는 출애굽의 의미를 되짚어 보면서 출애굽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난 80년대 중반 이스라엘 계 미국인 마이클 월츠와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 에드워드 사이드 사이의 출애굽 논쟁이 뜨거웠다. 이 논쟁의 시작은 정치 철학자이자 사회 비평가인 마이클 월츠가 「출애굽과 혁명」 (Exodus and Revolution)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 월츠는 출애굽을 모든 혁명의 패러다임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청교도나 미국의 식민지 개척자, 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 민족주의자, 미국 인종차별에 대항한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시민혁명은 출애굽의 혁명정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이들에게 출애굽은 ‘억압에서의 자유’를 상징한다. 따라서 왈츠는 혁명정신에서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첫째, 애굽이라는 ‘억압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둘째, ‘더 나은 세상’인 약속의 땅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지해야 한다. 셋째, ‘약속의 땅’은 반드시 광야를 거쳐야만 한다.[각주:3] 그러나 월츠가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억압의 세상’과 현대의 ‘억압의 세상’에 문제가 있다. 그는 애굽인들이 히브리인들을 박해한 것을 20세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비교하면서, 아랍국가와 근대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을 애굽인과 히브리인 사이의 갈등으로 동일시 한 것이다.

 

이에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이고 상황적인 갈등을 왜곡한 해석이라고 즉각 비판했다. 사이드의 논지는 분명하다. 월츠의 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관계를 왜곡하고 합리화한 책으로 [해방군 히브리인이 가나안 침략군으로 전락한 것처럼] 가나안 땅 정복의 단순한 역사적 반복이다’고 비판하였다.[각주:4] 월츠의 출애굽은 20세기에 세워진 국가인 이스라엘의 정책을 옹호하는 빈약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월츠는 아메리칸 대륙의 인디안을 학살하며 땅을 빼앗은 청교도의 이미지를 간과했고, 나치정권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일을 그대로 답습한 유대인 시오니즘을 간과한 것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즉, 월츠는 애굽의 압제에서 탈출한 해방군이 가나안의 땅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침략군으로 전락한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성공회 신부 나임 아틱(Naim Ateek)은 성서가 정치적으로 오용되고 남용된 점을 지적한다. 특히 근대 이스라엘의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성서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안타깝게도 히브리인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고 해방시킨 하나님이 팔레스타인에게는 편파적이고 차별적인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장처럼 아틱 신부는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시오니즘의 시각에서 읽혀졌던 출애굽의 의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아틱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성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던진다:

 

과연 어떤 차원에서 구약성서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해방신학자들은 출애굽 해방 정신에 기초하여 구약성서를 해방의 근 거로 역설하지만, 오히려 성서는 팔레스타인을 노예로 전락시킨 문헌적/종교적 근거 제공하고 있다.[각주:5]


베들레헴 루터란 교회 목사인 미트리 레헵(Mitri Raheb)는 히틀러의 박해라는 ‘애굽’에서 출애굽 한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이주한 이후 유럽에서 온 침략군으로 변했다고 한다. 레헵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출애굽을 강연할 때 주고받은 학생과의 대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목사님! 출애굽은 히브리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의 이야기인가요?”
“바로 우리 팔레스타인의 이야기입니다.”
 
1969년 이후 팔레스타인은 새로운 이스라엘 건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팔레스타인은 아무런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1980년 이후 팔레스타인은 높은 세금 폭탄을 맞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방되거나 학살당했다. 팔레스타인의 박해는 히브리인들이 바로의 압제 아래 박해 받았던 것과 상황이 다르다. 히브리인과는 달리 팔레스타인은 외부에서 유입된 ‘침략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지금의 이스라엘 땅과 웨스트 뱅크)본토민이다. 출애굽의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이 해방을 의미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자신들의 땅 안에서 해방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다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에게 애굽은 지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각주:6]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의 협상도 거절한다. 따라서 레헵 목사는 하나님의 개입만이 진정한 출애굽을 가져 올 것이라고 믿는다. 레헵 목사는 열 가지 재앙은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경제봉쇄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팔레스타인의 출애굽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경제 봉쇄없이 불가능하다고 레헵 목사는 주장한다.[각주:7]
 

세 명의 팔레스타인이-사이드, 아틱, 레헵- 말하는 출애굽은 자유나 해방이라는 단어로 결코 출애굽의 진정한 의미를 담을 수 없다. 출애굽은 억압과 노예에서의 자유를 넘어 끊임없는 해방을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05년 겨울, 베들레헴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소 근처의 벽에 그려진 그림.

이스라엘 사람들이 군인으로 묘사된 점이 특이하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 외래교수,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애굽을 지칭하는 히브리어는 ‘미츠라임’으로서 이 히브리어를 가장 잘 번역한 단어가 ‘애굽’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집트와 고대의 이집트 사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애굽’이라는 지명을 의도적으로 사용함을 알린다. [본문으로]
  2.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38쪽. [본문으로]
  3. Michael Walzer, Exodus and Revolution (New York: Basic Books, 1985), p. 149. [본문으로]
  4. William D. Hart, Edward Said and the Religious Effects of Cultur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 1. [본문으로]
  5. Naim S. Ateek, "A Palestinian Perspective: The Bible and Liberation," in Biblical Studies Alternatively: An Introductory Reader. ed. Susanne Scholz (New Jersey: Upper Saddle River, 2003), p. 397. [본문으로]
  6. Mitri Raheb, I Am A Palestinian Christia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p. 89. [본문으로]
  7. Mitri Raheb, I Am A Palestinian Christian, p. 9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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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세상 흥할 하나님 나라: 다니엘서 2장과 7장 비교분석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복음서가 서술하는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예수 사역의 중심주제는 하나님 나라다.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예수운동이 반제국주의 메시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반제국주의적인 하나님 나라는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각주:1] 다니엘서 2장과 7장의 비교 분석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반제국주의를 주장하였던 다니엘서 저자의 신학적 기조를 밝혀보려고 한다.


  1. 다니엘서는 세상 제국의 지배체제와 구조를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다니엘서는 두 언어로 (히브리어: 다니엘서 1장, 8-12장; 아람어: 다니엘서 2-7장) 기록된 사실 자체도 이미 다니엘서의 저자가[각주:2] 세상제국의 지배아래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3] 다니엘서 2-6장 설화는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인의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 1장은 제국의 음식을 먹고 제국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식민지 유대인의 상황, 다니엘서 2장과 4장은 주류인 제국 관리와 바벨론 점성가들 사이에서 차별받는 유대인 소수인종의 삶, 다니엘서 3장과 6장은 금 신상 또는 황제숭배를 강요당하는 유대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서 5장은 제국의 웅장한 축제를 소개하면서 제국의 위협을 과시한다.


  다니엘서를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제국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보이는 다니엘서 7-12장의 묵시적 비전과는 달리 다니엘서 1-6장은 제국에 충성하거나 또는 제국에 순응하는 유대인의 삶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각주:4] 그러나 최근 성서학자들은 다니엘서 1-6장의 설화와 7-12장의 묵시적 비전 모두 제국의 억압적 지배에 대한 저항적 메시지가 있다고 주장한다.[각주:5]


  다니엘서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람어로 기록된 다니엘서 2장의 설화와 다니엘서 7장의 묵시적 비전이다. 다니엘서 2-7장은 각각 주전 6세기의 바벨론 제국, 5세기의 페르시아 제국, 2세기의 헬라 제국이 그 역사적 배경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역사상 연속적으로 발생한 네 제국을 독특한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각주:6]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다니엘서 2장은 네 개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상으로 그리고 다니엘서 7장은 네 개의 짐승으로 제국을 각각 묘사하고 있다.



  다니엘서 저자는 왜 네 개의 금속으로 된 거대한 신상과 네 짐승으로 제국을 표현했을까? 그 이유는 다니엘서 저자가 보는 제국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 즉, 다니엘서 저자가 경험한 역사상 모든 제국은 모두가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제국이 강력한 힘과 영광으로 영원할 것 같지만 실은 언젠가는 멸망 할 수밖에 없는 금속 조각 같은 것이며, 포악한 짐승처럼 날카로운 이빨로 위협하지만 결국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서 저자가 묘사하는 제국의 이미지인 네 금속과 네 짐승을 자세히 살펴보자.


    다니엘서 2장은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거대한 신상을 통해 제국의 모습을 서술한다. 이 거대한 신상은 크고 그 빛이 아주 찬란하며 그 모습이 무시무시하다 (다니엘 2:31). 머리는 순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 무릎 아래는 놋쇠, 발의 일부는 진흙이다 (다니엘 2:32-33). 다니엘서 저자는 이 거대한 신상이 결국 부서져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될 운명이라고 기록한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청동과 은과 금이 산산 조각나 여름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니엘 2:35).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은 이 거대한 신상의 머리로서 세상의 모든 사람과 짐승을 통치하는 권력자고 그 이후 느부갓네살보다 못한 나라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뒤에 놋쇠로 된 셋째 나라가 온 땅을 다스릴 것이라고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나라는 놋쇠처럼 강할 것이라는 것이 다니엘의 꿈 해석이다.  

 다니엘서 7장은 제국을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니엘서 7장은 천사가 다니엘에게 환상을 설명한다. 다니엘은 바다에서 모양이 서로 다른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오는 것을 본다. 첫째 짐승은 사자같이 보이나 독수리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 첫째 짐승이 바로 바벨론 제국이다. 둘째 짐승은 곰처럼 생겼는데 갈빗대 세 개를 물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 둘째 짐승은 메디아 제국이다. 셋째 짐승은 표범처럼 생겼으나 등에 새 날개가 네 개나 있었고, 머리도 네 개나 달려 있었으며 아주 권위가 있어 보인다고 한다. 넷째 짐승은 사납고 무섭게 생겼으며 힘이 아주 세다. 쇠로 된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먹이를 잡아먹고, 으스러뜨리며, 먹고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아 버렸다. 이 짐승은 앞에서 말한 짐승들과는 달리 열 개나 되는 뿔을 달고 있다.


 네 짐승 중 마지막 네 번째 짐승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앞의 세 짐승들과 구별된다. 첫째, 이 짐승은 매우 사나워 나머지 짐승들을 발로 짓밟아 버리고 놋쇠 이빨과 놋쇠 발톱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다니엘서 2장의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이전의 모든 제국을 다 부셔버린 네 번째 제국의 모습과 동일하다 (다니엘 2:40). 둘째, 이 짐승은 머리에 열 개의 뿔이 달려 있다. 성서에서 뿔은 힘을 상징하며 다니엘서 7장의 네 번째 짐승의 뿔은 폭력적인 제국의 힘을 상징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네 번째 짐승의 머리에 열 개의 뿔에 눈이 달려 있고, 그 뿔들에는 교만하게 떠드는 입이 있으며 그 모습은 다른 뿔들보다 더욱 강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다니엘 7:20). 이 괴상한 모습의 정체는 바로 주전 2세기 유대인을 박해했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를 가리킨다. 다니엘서 7장 23-25절은 넷째 짐승의 억압적 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넷째 짐승은 땅위의 일어날 넷째 나라로서 다른 모든 나라와 다르고, 온 땅을 삼키며 짓밟고 으스러뜨릴 것이다.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다. 그 뒤에 또 다른 왕이 일어날 것인데, 그 왕은 먼저 있던 왕들과 다르고, 또 전에 있던 세 왕을 굴복시킬 것이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


 마카비서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마카비전서 1:44-50). 그는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금지하고 유대인들의 안식일과 종교적인 절기를 더럽혔고, 유대인 성전 재단에 우상을 세우고, 할례를 금지하여 유대인의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 하였다. 주전 169년에 안티오코스는 유대인들에게 제국의 바알 샤먼을 (Baal Shamen) 섬기기를 강요하고 그 신이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 다니엘서 3장의 설화는 느부갓네살왕이 금 신상을 만들고 그것에게 경배하기를 강요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는 결코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을 예배하지 않는다. 느부갓네살과 바벨론 사람들이 그들을 불타는 용광로에 집어넣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손끝하나 다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 안티오코스의 신 바알 샤먼을 예배하기를 강요당하는 주전 2세기의 독자들에게 다니엘 3장은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제국을 짐승으로 묘사하는 다니엘서 7장은 요한계시록 저자의 역사적 상황에서 재인용되었다. 요한은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인 한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본다 (요한계시록 13:1). 이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하며 열 뿔은 로마제국의 황제들을 상징한다.


 다니엘서 2장에 의하면, 그 거대한 신상은 난데없이 날아온 “작은 돌”[각주:7] 하나에 의해 부서지고 후에 큰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 찬다고 한다 (다니엘 2:34-35). 다니엘서 7장에 의하면, 하늘의 하나님이 짐승으로부터 나라와 권세를 빼앗아 “사람의 아들”에게 영원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었다고 한다 (다니엘 7:12-14). 즉,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하나님의 통치 혹은 하나님 나라를 각각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다.


 다니엘서 저자가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로 비유하는 하나님 나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하늘의 하나님이 세우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작은 돌],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백성에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도리어 다른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다니엘 2:44). 


 옛적부터 계신분이 그에게 [사람의 아들]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모든 백성들이 그를 섬기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다니엘 7:14).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세상제국과 하나님 나라는 여러 측면에서 대조된다. 첫째, 짐승이 제국을 상징하는 반면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둘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지만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온다. 셋째, 짐승의 나라는 일시적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



 여기서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는 없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메시야라는 한 개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민족의 회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J. A. Montgomery: 185-92). 폴 리꾀르는 앙드레 라콕의 책 『다니엘과 그 시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글이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할 때 그러한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 글이 쓰인 삶의 자리를 재 구성한다는 것이다” (앙드레 라콕: 22). 즉, 다니엘서 저자의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은 주전 2세기 셀류커스 제국의 황제 안티오코스의 박해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였던 묵시적 비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은 초대 기독교인과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전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의 책 『유대 고대사』에서 다니엘 2:44의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이 “작은 돌”에 대한 해석을 기피했다 (Antiquities of the Jews 10:210).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요세푸스는 로마가 하나님 나라에 의해 멸망될 것이라는 해석하여 로마인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G. Pfandl: 250). 초대 기독교인들은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을 자신들의 교회와 그리스도 이해에 각각 적용하였다. 예를 들면,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다니엘 2장의 “작은 돌”에 비유한다 (마가복음 12:10; 마태복음 21:42; 누가복음 20:17). 특히 다니엘서 2장의 제국들이 작은 돌에 의해 파괴되듯이 누가복음 저자는 로마제국의 통치를 대변하는 율법학자와 대제사장들에 의해 예수가 수난을 받지만 결국 불의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이야기 한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하고 기록된 말은 무슨 뜻이냐? 누구든지 그 돌 위에 떨어지면, 그는 부스러질 것이요, 그 돌이 어느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표준새번역, 누가복음 20:18-19).[각주:8]


 마가복음 저자도 예수가 대제사장에게 수난 받는 장면에서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하나님 오른편에 앉을 것이고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부활과 다니엘서 7장의 “사람의 아들”을 연결시킨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4:61). 교회 교부들도 다니엘서 2장의 “작은 돌”을 예수의 성육신에 비유하고 다니엘 7장의 “사람의 아들”을 예수의 부활에 비유하였다. 예를 들면, 이레니우스는 세상 제국의 불의한 힘을 무찌르고 부활하신 예수가 바로 다니엘서가 예언한 “작은 돌”이라고 하였다 (Against Heresies 5.26.1).


 다니엘서의 하나님 나라를 논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니엘서 2장, 4장, 6장에서 느부갓네살과 다리우스에 의해 고백된 신을 찬양하는 영광의 성가다 (Doxology). 이 찬양의 성가는 제국 황제의 힘과 그들의 영광을 부인하고 오직 하늘의 하나님의 권세와 나라만이 영원하다고 고백한다. 다니엘서 2장은 바벨론의 술객과 마술사들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지만 다니엘이 그 꿈의 의미를 해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한 이후 느부갓네살 제국의 영광은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왕이여! 당신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다니엘 2:37). 결국 다니엘 2장 설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너의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 가운데 으뜸가는 신이시오, 

세상의 모든 황제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왕이시라! 

오직 그대만이 이 비밀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 

과연 그대의 하나님은 비밀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로다! (다니엘 2:47)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방 제국 황제의 입술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가장 으뜸가는 나라라는 고백이 나왔다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신을 찬양하는 노래는 다니엘 4장에서 그리고 다리우스의 찬양은 6장에서 각각 예전적 형태의 고백으로 이어진다.[각주:9]


크도다, 이 이적이여! 

능하도다, 이 기사여! 

그 나라 영원하고 그 통치 대대에 이를 것이다! (다니엘 4:3)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을 우르르 보고서 

정신을 되찾았고, 가장 높으신 분을 찬송하고, 

영원하신 분을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의 통치 영원하고 그의 나라 대대로 이어진다! (다니엘 4:34) 


내가 이 법령을 공포한다. 

내 나라에서 나의 통치를 받는 모든 백성들은 반드시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며 그의 권세는 무궁하다 (다니엘 6:26)


 이처럼 다니엘서 2-6장의 설화는 이방제국의 황제의 입을 통해 제국 낸다는 하늘의 심판의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다.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 왕이 베푼 거대한 궁정잔치 중 갑자기 사람의 손이 벽 위에다 글을 쓰는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다니엘은 기록된 글자를 “메네, 메네, 데켈과 바르신” (מנא, תקל, פרס) 이라고 판독한다. 이 아람어의 뜻은 하나님이 벨사살 제국의 무게를 달아보니 그 무게가 모자라 그의 제국을 메대와 페르시아로 나눈다는 심판의 메시지다. 다니엘서 6장은 불의한 제국의 법에 저항하여 사자 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이 구원받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다니엘서 설화와 묵시적 비전은 반제국주의 메시지를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로 보여주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제국의 황제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니엘서 2-6장의 설화는 제국의 힘과 억압적 정책을 “풍자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저항적 묵시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다니엘서 설화의 이러한 풍자적 성격은 다니엘서 7-12장의 묵시적 비전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앞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을 다니엘서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개념 역시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마태복음 6:13). 다니엘서 저자가 살았단 주전 2세기의 유대인들이 셀류커스 헬라제국의 핍박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던 것처럼 예수 역시 의를 위해서 핍박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선포하였다 (마태복음 5:10).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 외래교수,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안병무는 예수시대를 지배하던 묵시문학의 선구를 다니엘서로 보는데, 예수 사역의 역사적 상황을 셀류커스 제국과 같은 헬라제국의 박해로 보고 있다. 따라서 안병무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묵시문학을 민중의 글이라고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안병무의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마가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민중과 한국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본문으로]
  2. 다수의 성서학자들은 다니엘서 최종 편집자는 주전 2세기의 셀류커스 헬라제국의 지배아래 살았단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다니엘서 7-12장의 묵시적 비전에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인 박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John J. Collins, Daniel,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본문으로]
  3. Stephen Breck Reid는 (“Daniel, Book of,"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ed. David N. Freedman [Grad Rapids; Mich.: W. B. Eerdmans, 2003], p. 3) 다니엘서가 두 가지 언어로 기록된 것은 식민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의 언어와 식민지배를 하는 지배자의 언어가 동시에 공존하는 삶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본문으로]
  4. W. Lee Humphreys는 자신의 논문에서(A Life-Style for Diaspora: A Study of the Tales of Esther and Daniel," JBL [1973]: 211-23.) 다니엘서 1-6장의 설화는 본질적으로 제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5. Daniel Smith-Christopher는 다니엘서 1-6장은 제국의 힘보다 더 위대한 하늘의 힘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에서 다니엘서는 결코 제국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Daniel Smith-Christopher, “The Book of Daniel,” New Interpreter's Bible, Vol. VII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본문으로]
  6. A. Lenglet는 자신의 논문 “La Structure littéraire de Daniel 2-7,” Bib 53 (1972): 169-90, 에서 다니엘서 2-7장이 문학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각각 네 제국이라는 도식을 서술하고 있다. 다니엘서 3장과 6장은 각각 불타는 용광로에서 구원받은 다니엘의 세 친구와 사자의 굴에서 구원받은 다니엘을 서술하고 있다. 다니엘서 4장과 5장은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는 이왕제국의 운명을 서술하고 있다. [본문으로]
  7. 아람어 원문에는 단순히 “돌” (אבן) 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 필자는 하나님 나라가 네 금속의 강력한 힘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돌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작은 돌”로 표현한다. [본문으로]
  8. 공관복음의 “작은 돌”로서의 예수 이미지에 대해서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E. F. Siegman, The Stone Hewen from the Mountain (Daniel 2), CBQ 18 (1956): 364-79. “작은 돌”이 하나님 나라로 해석된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Gerhard Pfandl, "Interpretations of the Kingdom of God in Daniel 2:44,"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Vol. 34/2: 249-68. [본문으로]
  9. Daniel Smith-Christopher는 (“The Book of Daniel,” p. 51) 다니엘 2:21-23의 다니엘의 기도와 함께 느부갓네살의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방제국의 세력에 저항을 촉구하는 정치적 찬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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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오경의 약자보호법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기업총수의 가석방 소식을 접하거나 불법 대선자금으로 기소된 정치인들이 솜방망이 처분을 받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허탈해 하면서 종종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법은 만인이 아니라 오직 만명에게만 평등하다.” 법이 부자와 권력자의 방패막이로 전락해 버린 안타까운 사회를 풍자한 말이다. 법이 보호해야 할 대상은 사실 다름 아닌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같은 무시무시한 엄벌주의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부자나 권력자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약자나 가난한자의 눈을 상하게 하면 자신의 눈으로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사실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다. 또한 함무라비 법전은 최저임금을 제정하여 약자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등 인류 최초의 약자 인권 보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약자를 위한 인권 보호법은 함무라비 법전 서문에 잘 나와 있다: “백성의 복지와 안녕을 촉진하고, 정의가 온 땅에 충만하여 악을 멸하고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일이 없고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기 위해 법을 만든다.”[각주:1]


  모세오경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창조 이야기나 출애굽 사건이 아니라 함무라비가 정의의 신 세메쉬에게 법을 수여 받은 것처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즉 법을 수여 받은 것이다. 모세가 받은 법은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더 이상 바로의 억압과 노예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배우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법은 인간실존인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모세오경은 함무라비 법전과 유사한 “계약 법전”(출애굽기 20-23)을 포함하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구체적인 방향을 보여준 “성결 법전” (레위기 17-26)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설정하는 “신명기 법전”(신명기 12-26)도 포함하고 있다. 모세오경을 하나의 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 세 법전이다. 세 법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떤 것일까? 바로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이다: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레위기의 이 말씀은 약자와 가난한 자를 보호하는 성서적인 복지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고 할 수 있다.


  너의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레아”(רע)는 모세오경에서 “동료”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고(출애굽기 2:13; 11:2; 21:14; 22:7; 레위기 20:10), 때로는 “약자”나 “가난한 자”를 이웃으로 규정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레위기 19:13, 16). “외국인” 혹은 “이방인”으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겔”(גר)은 창세기에 2번, 민수기와 출애굽기에 각각 9번, 레위기에 18번, 신명기에 21번 나온다. 모세오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신명기는 가난한 외국인을 이웃으로 간주하여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법)임을 분명히 있다(신명기 24:10-18).


    신명기에는 추수기에 거두어들인 수확을 반드시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법이 있다. 추수하는 곡식을 가난한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와 나누고 올리브 나무 열매와 포도를 가난한 외국인과 과부와 고아와 함께 나누는 법이다(신명기 24:19-22).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하늘의 선물인 땅의 소산물을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눈다는 신앙고백이며, 우리 신앙인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신명기 법전은 특별하다.


 모세오경의 법전의 약자 보호법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에서 온 것이다. 신명기 법전의 한 조문은 이를 잘 반영한다.


외국 사람과 고아의 소송을 맡아 억울하게 재판해서는 안된다. 과부의 옷을 저당 잡아서는 안된다. 너희가 애굽의 종살이하던 것과 주 하나님이 너희를 거기에서 속량하여 주신 것을 기억하라(신명기 24:17-18).


 계약법전도 약자 보호법을 같은 맥락에서 언급하고 있다.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된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너희는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출애굽기 22:21-22).   


 성경법전도 약자를 억압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출애굽 경험에서 소개하고 있다.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애굽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레위기 19:34).


 고대 이스라엘의 약자 보호법을 고난신학으로 해석하는 김이곤 교수는 신명기 법전의 약자 보호법을 “부르짖음-응답하심”이라는 신명기 사가의 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각주:2] 시편 미드라쉬의 주석에서, “가난한 자와 부자가 함께 재판을 받을 때 세상은 누구의 편을 들어주는가? 부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자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가난한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각주:3] 이 주석을 보완하기 위해 시편 미드라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예증을 보여준다.


 어느 날 일천의 번제물을 가지고 온 아그리빠 왕이 대사제를 향하여 “오늘만은 나 외의 어느 누구의 번제물을 제단에 올리지 마시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뒤이어 찾아 온 한 가난한 자가 두 마리의 비둘기를 내어 놓으며 번제로 드려 달라고 간청하게 되었는데 대사제는 왕명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그때 그 가난한 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매일 네 마리의 비둘기 밖에 잡는 것이 없는데 그 중 둘은 자기 식구가 먹고 나머지 둘은 번제로 드리는 것인데 만일 이것을 드려 주지 않으면 자기의 생계는 끝난다고 애원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대사제는 가난한 자의 청을 들어 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왕은 꿈의 계시를 통하여 가난한 자의 번제와 자기의 번제와 같은 날에 드려졌고 그의 하찮은 번제물이 자신의 일천 번제물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한 번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대사제를 문책하게 된다. 그때 대사제는 사건의 전말을 왕에게 아뢰었다. 아그리빠 왕은 대사제를 치하하면서, “주께서는 가난한자의 비천함을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셨다”라고 했다.[각주:4]


 시편의 3분의 1이 약자나 가난한 자가 하늘의 도움을 요청하는 탄원시다. 탄원시의 기본적인 구조도 역시 신명기 사관의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1) 하나님을 찾음 ⇒ (2) 삶의 구체적인 고난 상황에 대한 탄식 ⇒ (3) 응답/구원. 이처럼 탄원시가 가지고 있는 삼부구조를 통해 인간실존은 하나님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없이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다.[각주:5]


 모세오경의 세 법전(계약법전, 성결법전, 신명기 법전)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 관계정립에 있어서 모세오경의 법전은 강자나 권력자의 불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약자와(과부와 고아) 가난한자의 손을 들어주는 정의를 실천하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 외래교수,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James Prichard,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5). p. 164. [본문으로]
  2. 김이곤, 『구약성서의 고난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101-03쪽. [본문으로]
  3. The Midrash on Psalms, Trans. by W. G. Braud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9/1976), vol. 1:323. [본문으로]
  4. Ibid., pp. 323-324. [본문으로]
  5. C. Westermann, Praise and Lament in the Psalms (Atlanta: John Knox Press, 1981), p. 1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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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왕들의 유대인 하나님 찬양

: 다니엘서 2-6장 다시 읽기[각주:1]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영웅담은 주일학교나 여름성경학교 교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대부분의 교재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내어 이방 땅에서 출세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니엘서의 앞부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이야기(1-6장) 뒷부분은 묵시적 계시(7-12장)로 나누어지는데, 그동안 성서학자들은 뒷부분의 묵시적 계시에서만 제국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최근 성서학자들은 앞부분 이야기와 뒷부분의 묵시적 비전과의 관계를 다시 해석함으로써 아람어로 쓰인 다니엘 설화를(다니엘서 2-6장) 제국에 대한 저항문학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헬라 제국이든 셀류커스 제국의 안티오커스 4세의 지배이든 유대인 민중은 재국의 지배 아래서 고난 받고 박해 받았던 약자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영웅담은 과히 제국의 박해 아래서 고통 받는 민중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로 읽혀왔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니엘서의 아람어 설화를 제국에 대한 저항문학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의 저항의 의미와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은 과연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가? 


   다니엘서 설화의 역사적인 배경은 바벨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지만, 실제로 설화의 최종형태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헬라 시대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다니엘서 2장의 네 번째 제국은 다름 아닌 헬라 제국이기 때문이다.[각주:2] 또 다른 근거로 다니엘서 2장의 “철이 진흙과 섞인다”(다니엘 2:47)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셀류커스 제국과 프톨로미 제국 사이의 혼합 결혼을 의미하므로 다니엘서 아람어로 기록된 설화는 헬라 제국시대에 편집되고 완성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다니엘서가 최종 편집될 당시의 독자는 다름 아닌 헬라 제국 지배 아래 살았던 유대인 민중들이었다.


   다니엘서의 아람어로 기록된 설화는 “이방 왕정이야기”라고 불리는 독특한 장로인데 이는 다니엘서 외에도 구약성서와 외경에서도 각각 발견된다. 다니엘서 설화와 그 이외 다른 이방 왕정 이야기의 공동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이들의 이야기가 역사적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약자이자 피지배자인 유대인 민중에 의해 이방의 왕들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는 신학적 고백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아람어 설화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유대인 포로” (2:25; 5:13; 6:14 [6:13 한국어성경]) 또는 “유대인들” (3:8, 12)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바벨론 제국의 소수인종이다. 아람어 설화는 바벨론 제국의 지배와 힘을 과시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이다: (1) 국왕의 칙령 (다니엘 3장과 6장); (2) 제국관리의 목록 (다니엘 2장, 4장, 6장); (3) 바벨론 마법사 목록 (다니엘 2장); (4) 금 신상 헌정식 (다니엘 3장); (5) 지방행정 목록 (다니엘 6장)


    제국의 지배와 힘을 과시하는 특성들은 사실 유대인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는 문학적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니엘서 2장의 “거대한 입상”은 바벨론, 페르시아, 메대, 그리스 제국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제국 그 자체를 상징한다.[각주:3] 다니엘은 세상의 제국이 산산 조각나 급기야 여름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한다. 거대한 입상을 친 작은 돌은 이제 큰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 찬다고 한다(다니엘 2:35). 이 땅의 거대한 제국은 멸망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는 유대인 민중의 제국의 지배 이데올리기에 대한 저항적 고백을 담고 있다. 


 다니엘서 3장은 다니엘 세 친구의 이야기다. 풀무불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남는 광경을 목격한 느부갓네살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찬양받으실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다니엘 3;28). 다니엘서 4장에서 느부갓네살이 본 “거대한 나무”도 역시 제국의 위엄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제국의 위엄은 유대인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너지고 만다. 급기야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분이며 영원하신 분으로 유대인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고 그의 나라는 대대로 이어진다고 고백한다(다니엘 4:34). 다니엘서 5장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느부갓네살과 달리 유대인의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한 벨사살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서 6장의 설화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오의 고백을 담고 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다리오는 마침내 다니엘의 하나님을 살아계시며 영원하신 분이라며 찬양한다(다니엘 6:26). 아래는 도표는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에서 사용된 과정법과 이방 왕들의 유대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보여주고 있다.


 

과장법 

사건 

사건의 해결 

이방 왕들의 고백 

 다니엘서 2장

거대한 입상 

 느부갓네살의 꿈

 다니엘의 꿈 해석

- 가장 위대하신 신

- 가장 으뜸가는 왕

- 비밀을 드러내시는 분 

 다니엘서 3장 

 금으로 된 거대한 입상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의 

우상숭배 거절

 하나님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구원하심

 - 찬양받으실 분

- 자신의 종들을 구원하시는 왕

 다니엘서 4장

거대한 나무 

느부갓네살의 꿈 

다니엘의 꿈 해석 

- 가장 높으신 분이 인간을 다스리심

- 그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심 

 다니엘서 5장

 거대한 잔치

벽에 쓰인 글씨 

다니엘의 글자 해석 

- 벨사살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함  

 다니엘서 6장

 거대한 제국

 다리오만을 신으로 숭배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원하심

- 살아계신 하나님

- 영원하신 분


 위 도표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니엘서 2-6장의 각 설화는 이 땅의 제국이 위대하고 거대하다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이방 왕들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배우게 되고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방 왕들인 느부갓네살과 다리오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한다:   


 • 가장 위대하신 신 

 • 가장 으뜸가는 왕 

 • 비밀을 드러내시는 분 

 • 찬양 받으실 분 

 • 자신의 종들을 구원하시는 분 

 • 가장 높으신 분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심 

 • 그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심 

 • 살아계신 하나님 

 • 영원하신 분


 이들의 고백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왕인 자신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바벨론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느부갓네살은 약자 유대인의 하나님을 가장 으뜸가는 왕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엘리아스 비컬만(Elias Bikerman)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 중 느부갓네살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상적인 이방 왕이라고 주장한다.[각주:4]  


 외경 마카비하서에 의하면 셀류커스 제국의 군대 22,000명이 예루살렘에 주둔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전통적 유대인 종교행위 금지령(기원전 167년)에 위배되는 자는 모조리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많은 유대인들이 왕의 칙령에 순응하였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박해에 완강히 저항했다. 셀류커스 제국에 저항은 마카비 항쟁의 군사적 저항인 반면,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는 다른 차원에서 저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람어 설화는 “일시적인 세속의 지배” (the temporal human kingship)와 “영원한 천상의 지배” (the eternal heavenly kingship)를 반복하여 강조한다. 아람어 “왕국” (מלכו)은 다니엘 아람어 설화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중 하나다. 이 단어는 때로는 세속의 왕권에 때로는 하늘의 왕권에 적용한다. 즉 아람어 설화의 저자는 제국의 힘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대신 제국의 힘을 제한한다. 아람어 설화는 제국보다 더 위대한 지배자 유대인 포로의 하나님을 다니엘의 입술과 이방왕의 입술(느부갓네살과 다리우스)을 통해 고백하고 있고 이처럼 이방왕이 유대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문학양식은 외경과 사해문서에도 발견된다.  


 • 다니엘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2:20-23) 

 •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2:47) 

 •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3:28) 

 •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3:31-33, 4:31-34) 

 • 다리우스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6:27-28) 

 • 알렉산더 대왕의 하나님 찬양 (요세푸스, Ant. 11.305-339) 

 • 프톨로미 4세의 하나님 찬양 (마카비 3서) 

 • 고레스의 하나님 찬양 (벨과 용, 칠십인역 다니엘) 

 • 네바나이드스의 기도 (사해문서, 4QPrNab ar).  


 다니엘서와 더불어 에스더서, 에스라-느헤미야서, 그리고 역대기서와 같은 포로이후 문서의 특징은 비록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이방제국의 지배 아래 살았지만, 자신들의 하나님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각주:5] 이러한 측면에서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이방왕들의 유대인 하나님 찬양은 주전 2세기 헬라 제국의 박해 아래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즉 그들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 “영원하신 분,” 그리고 “가장 높으신 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최상의 표현은 비록 그들이 억압받는 피 지배자이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지배자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이방왕들의 찬양은 세상의 제국은 일시적이지만 하늘의 나라는 영원하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비록 제국의 지배아래서 고통 받고 있지만 그 고통은 일시적이며 끝난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방왕들의 찬양은 포로 이후 유대인 공동체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 즉, 제국의 지배 아래 살았던 유대 민중들은 제국의 황제가 아닌 자신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들의 삶의 목적을 삼았던 것이다. 다니엘서 2-6장의 설화는 헬라 제국과 이방 왕의 박해에 대해 무력과 전쟁이 아니라 지혜와 기도와 찬양으로 저항하는 포로이후 유대인 공동체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본글은 지난 2011년 시카고에 소재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주최한 제26차 월례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을 알린다. [본문으로]
  2. 제4에스라와 요세푸스는 다니엘서 2장의 네 번째 제국을 로마제국이라고 명시했다. 다니엘서 2장의 네 번째 왕국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John Collins, Daniel (1993), Gerhand F. Hasel, "The Four World Empires against Its Near Eastern Environment," JSOT 12 (1979), 17-30. [본문으로]
  3. 성서학자들은 종종 다니엘서 2장의 네 제국과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을 비교 분석하면서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의 중심주제인 제국의 멸망을 강조한다. A. Lenglet는 “La Structure Litteraire de Daniel 2-7," Bib 53 (1972), 169-190. [본문으로]
  4. Elias Bickerman, Four Strange Books of the Bible (New York: Schocken Books, 1967), 67. [본문으로]
  5. Sweeney, Reading the Hebrew Bible after the Shoah (2008), 2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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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그들은 누구인가?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예언서를 연구한다는 것은 주로 예언자들의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빗대어 그들의 메시지를 분석함을 의미한다.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회정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만 정작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예언자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만 연구하고 책으로만 만났으니 역사 한가운데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몸부림쳤던 치열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용히 잠든 세상을 마구 흔들어 깨워 요동치게 만든 예언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로 하여금 역사 앞에 자신의 몸을 과감히 내던지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 랍비는 1962년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했고, 그의 책은 20세기 성서학의 걸작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예언자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각주:1] 헤셸 랍비는 “신의 파토스”(Divine Pathos)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구약성서의 예언자와 예언서를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파토스의 신이라는 것이고 예언자는 신의 파토스를 몸으로 느끼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신의 말을 전단하는 메신저나 또는 장래를 내다보는 선견자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의 연민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도덕 선생도 아니고 이성을 잃은 광분자도 아니다.


   예언자의 글은 신의 파토스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신의 파토스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자비와 사랑 때로는 실망과 분노와 같은 감정으로 표출된다. 예언자들이 열변을 토했던 것이 바로 신의 파토스다. 예언자는 세상의 불의를 보고 고함을 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예언자에 대한 단순한 접근일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신의 파토스는 역사적/사회 비평 같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이 신의 파토스를 전달하는 예언자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진노가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끊고 있어서, 내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 없다”(렘 6:11).[각주:2]


   신의 파토스를 가장 잘 전달해주는 언어가 바로 시다. 구약성서의 예언의 독특한 점 하나가 바로 대부분의 예언이 시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헤셸 랍비는 예언자는 시인이라고 했다. 예언자라는 사람의 경험은 시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시적 영감으로 여기는 것을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부른다. 예언자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감수성, 정열, 상상력을 부여받았다. 


    중세기 저명한 모세 이반 에즈라(Moses ben Jacob ibn Ezra) 랍비는 “히브리어로 시인은 예언자로 불린다”고 주장했다.[각주:3] 실제로 에스겔은 자신의 예언을 당시 사람들이 시가로 받아들이는데 불평을 토로했다: “그들은 너를,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겔 33:32).


    하지만 예언이 시라는 정의는 일리 있는 말이다.[각주:4] 구약성서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는 신의 파토스는 시라는 문학형식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따라서 예언은 시적 상상의 소산이다. 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시 안에서는 나무들이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는 번영과 향락을 일삼으며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여인들을 바산에서 풀을 뜯는 암소로 비아냥거리면서 하나님의 분노(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사마리아 언덕에 사는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어라.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아, 

   저희 남편들에게 마실 술을 가져 오라고 조리는 자들아, 

   주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맹세하신다. 

   두고 보아라. 너희에게 때가 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갈 날, 

   너희 남은 사람들까지도 낚시로 꿰어 잡아갈 때가 온다. (암 4:1-3, 새번역). 


 이사야는 포로귀환의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주어진 포도주와 젖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사 55:1, 새번역).



 예언자는 시인일 뿐 아니라 설교자요 사회 변혁가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역사의 한 가운데서 신의 파토스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는 화산처럼 폭발하는 격정 속에서도 얼음같이 차고 맑은 냉철한 마음과 눈이 있다. 문익환 목사는 예언자의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설상 나는 죽었습니다.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숨쉬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숨쉬는 건 누구입니까? 

   아아아아 그것은 흐느끼며 휘몰아치는 

   바람입니다. 높아만 가는 

   겨레의 숨소리입니다. 

   벗들이여 

   그 속에서 불꽃 튕기는 눈망울 하나 불쑥 나타나 

   얼음같이 찬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각주:5]  


 예언자들의 마음을 역사 현장에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신의 파토스다. 따라서 헤셸 랍비는 예언자는 지금 역사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정점이었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 50주년을 기념하여 영화로도 나왔다. 20세기의 예언자로 불리는 헤셸 랍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주도했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정의를 실천하도록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예언자의 삶을 사신 또 다른 두 분이 있다. 바로 문익환 목사와 장준하 선생이다.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장준하 선생의 셋째 아들 장호준 목사가 “역사 바로잡기”라는 내용으로 강의하기 위해 시카고에 왔다. 장 목사의 강의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장준하 선생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장준하를 “선생”으로 부르지만, 강연을 들은 이후 그분을 “우리 시대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로 다짐했다. 해방의 신 야훼가 아니라 가나안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출애굽 해방의 역사적 경험으로 초대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그분을 통해 들었던 것이다. 일본제국 시절 부와 영예를 누릴 수 있는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 광복군으로,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절 그분은 돈을 벌수 있는 많은 길이 있었지만 사상계를 출간하여 돈이 아니라 “생각해야 산다!”는 예언자의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었고, 돈 벌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베트남 파병도 반대하셨다. 그분은 파라오의 진수성찬이나(출애굽기 5장) 금 신상으로 표현되는 우상숭배 (출애굽기 32; 열왕기상 12장), 바알숭배에서 드러나는 풍요와 싸우셨던 것이다.  


 지난 2016년 4월 총선이 끝난 후 장호준 목사가 다시 시카고를 찾았다. 이번에는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준 목사와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 선생의 토크 콘서트”라는 대담의 형식으로 문성근 선생과 동행했다. 특별히 이번 대담은 문익환 목사를 예언자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분은 과히 신의 파토스에 따라 자신의 삶을 던진 이 시대의 예언자임에 틀림없다. 시인이면서 목사요 성서학자요 운동가로서 문익환 목사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예언운동”이라고 규정했다.[각주:6] 문 목사는 “예언운동은 해방을 열망하는 억눌린 민중의 힘이 터져 나오는데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각주:7] 문 목사의 예언 운동은 바로 헤셸 랍비가 말하는 신의 파토스라고 생각한다.  


 헤셸 랍비는 “예언자들을 자세히 보면 결국 예언자들과 사귀게 된다”고 했다.[각주:8]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언자가 되게 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신의 파토스다. 우리는 바로 이 신의 파토스의 영감을 받고 그것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역사 한 가운데서 하늘의 파토스를 전하고자 몸부림치는 예언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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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서울: 종로서적, 1996). [본문으로]
  2. 헤셸의 신의 파토스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Eliezer Berkovits, "Dr. A.J. Herchel's Theology of Pathos," Tradition 6 no. 2 Spr.-Sum. (1964): pp. 67-104. [본문으로]
  3. Shirath Israel (Berlin, 1924), p. 45. [본문으로]
  4. 헤셸, 172 쪽. [본문으로]
  5.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146쪽. [본문으로]
  6.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본문으로]
  7. 문익환, 136쪽. [본문으로]
  8. 헤셸, 머리말, x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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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제국주의자 "모세"[각주:1]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도서관 2층에는 중세기 희귀문서를 보관하는 방이 있다. 15세기에서 18세기에 출판된 책들로 무려 300여권을 소장하고 있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직접 작성한 편지와 그가 번역한 성서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이중 오래된 성서 한 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종교개혁 이전에 출판되었던 독일어 성서다(Koberger Bible, 1483). 15세기 성서의 내용이 궁금해서 페이지를 한 장 두 장 넘겨보는데 한 삽화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성서에 삽화가 포함된 이유는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들이 삽화를 보고 성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삽화는 출애굽기 2장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출 2:1-10). 모세의 모친이 모세를 나일강에 띄워 보내고 바로의 딸은 모세를 강에서 건져내어 모세를 자신의 아들로 양육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 2장은 모세의 모친이 모세를 강에 띄워 보낸 것이 아니라 강가 갈대 사이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이 삽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삽화 오른쪽 중간에 모세가 바로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기는 장면이 보인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바로의 왕관을 벗기는 행동을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삽화를 그린 이는 어떤 근거에서 이 장면을 그려 넣었을까? 그 답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2:232-36)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세푸스는 출애굽기 2장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였다: 


   때무티스는 모세를 양자로 삼았다. 어느 날 그녀는 모세를 아버지 바로에게 데려갔다. 자신에게 자식이 없기에 바로의 대를 이을 자가 바로 모세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데리고 온 이 아이는 강의 혜택으로 얻었는데 신의 성품을 가진 아름다운 아이로서 제 자식으로 삼았고, 앞으로 이 제국을 이어갈 황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녀는 바로에게 아이를 건네주었고 바로는 그 아이를 가슴으로 껴안으면서 자신의 왕관을 모세 머리에 얹었다. 하지만 모세는 그 왕관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이는 애굽 제국에 재앙이 임함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애굽의 신령한 학자가 발끈하여 이렇게 말했다. “왕이시여! 이는 하늘이 주는 메시지로서 이 아이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굽 제국은 멸망 할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이 아이를 통해 자신들이 노예에서 해방될 것을 희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무티스는 모세를 보호하기 위해 모세를 잡아챘고 바로도 모세를 즉시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다행히 모세는 바로 딸의 보호 아래서 교육받고 자랐다. 히브리인들은 모세를 의지하게 되었고, 앞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을 희망했다. 반면, 애굽인들은 모세로 인해 일어날 일에 대해 염려했다. 


    요세푸스의 글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가 자신의 왕관을 모세에게 건네주지만 어린 모세는 왕관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애굽 학자의 경고처럼 애굽 제국의 멸망을 의미한다. 즉 모세의 등장이 애굽 제국의 멸망을 의미함과 동시에 모세는 반제국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함께 명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모세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놀라운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요세푸스와 비슷하게 유대인 미드라쉬 전통도 모세가 바로의 왕관을 받아 자신의 머리에 얹으므로 모세가 바로를 대신하는 왕으로 해석한다. 이는 모세의 등장이 억압과 폭정의 애굽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지만 동시에 해방과 나눔의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Tanhuma Exodus 8; Midrash Exodus Rabbah 1.26; Midrash Dueteronomy Rabbah 11.10; Yashar Exodus 131b-132b).


    요세푸스는 정치적으로 친 로마 성향을 보였지만 자신의 뿌리인 유대교 문화와 종교의 우월성을 그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대변한 사람이었다.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로마 제국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묘사하는 모세의 모습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글이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지적을 교묘히 빠져 나가기 위해 요세푸스는 모세가 너무 어려 어린이의 장난으로 바로의 왕관을 집어 던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로마제국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요세푸스의 다니엘서 의역에서도 여전히 드러난다. 요세푸스는 다른 예언자들보다 다니엘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다니엘서가 내포한 묵시 종말론적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니엘서 2장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꿈에서 본 거대한 신상을 소개하고 있다. 정금으로 만든 머리는 바벨론 제국을 상징하고, 은으로 만든 가슴과 팔은 메데 제국을 상징하고, 놋으로 만든 배와 넓적다리는 페르시아 제국을 상징하고, 철로 만든 종아리는 그리스 제국을 상징한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네 왕국은 첫째는 바벨론 제국, 둘째는 페르시아 제국, 셋째는 마케도니아 제국, 넷째는 바로 로마 제국이다(『유대고대사』 [Jewish Antiquities] 10.10.4, §209). 느부갓네살의 거대한 신상 꿈은 세상에 순차적으로 등장한 제국이 하나씩 멸망하지만 마지막에 하늘이 세우는 영원한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묵시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유세푸스는 다른 모든 제국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 역시 멸망의 길로 갈 것이라는 로마 제국의 멸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요세푸스는 로마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각주:2]  


   요한계시록 15장 3절은 짐승(로마제국)을 물리친 자들이 유리바다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가 부른 애굽 제국에 대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다시 재현하고 있다. 이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애굽 제국과 그들의 신을 물리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찬양하는 모세의 노래를 연상케 한다(출애굽기 15장). 모세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출 15:18, 새번역). 이렇게 요세푸스의 글에서 발견되는 모세의 반 제국주의적 이미지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묵시적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이사야 65:17).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이글은 지난 2010년 8월 9일 필자의 블로그 Old Testament Story에 게재한 글을, “Moses in the Koberger Bible (1483),” 수정/보완한 것임을 알린다. [본문으로]
  2. Louis H. Feldman, Josephus's Interpretation of the Bibl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p. 6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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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히브리 민중사”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시카고 신학대학원 내에 소재한 한국신학연구원(CSKC) 주관으로 지난 2011년 문익환 목사의 책 『히브리 민중사』로 가을 독서모임을 했다. 독서모임의 목적은 한국 성서학자의 저서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수많은 성서 개론서와 해설서 중 문 목사의 책을 선정한 이유는 이렇다. 번역서나 여러 논문들을 짜깁기 한 책들이 난무한 한국의 성서학계에서 문 목사의 책은 한국인의 눈으로 구약성서를 해석한 책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성서 개론서는 아니지만 민중의 시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 하였다는 점에서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부제가 표명하듯(문익환 이야기마당) 문 목사는 구약성서를 이야기 식으로 풀어썼다. 구약성서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주나 인용은 달지 않았지만 수많은 책을 읽고 연구한 흔적이 분명하다.


   『히브리 민중사』는 필자에게 구약성서를 민중의 역사관으로 꿰뚫는 눈을 뜨게 해 주었고 내 삶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저 연구와 집필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에 동참해야 함을 배웠다. 


   『히브리 민중사』는 문익환 목사가 안양교도소에 수감생활 중 생활성서에 연재하였던 히브리 민중사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1985년 시작된 네 번째 징역생활로 한번 중단 되었고 또다시 중단된 채 미완성인 히브리 민중사를 삼민사가 출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느헤미야와 에스라 같은 포로 이후 성전 공동체의 문헌을 민중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분석한 부분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와서 다시 『히브리 민중사』를 읽는 이유는 이렇다. 구약성서를 민중의 눈으로 읽는 문 목사의 책은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방법론의 아주 좋은 예가 된다는 생각에서다. 문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는 창세기가 아닌 출애굽기에서 시작한다. 출애굽기의 중심주제는 당시 고대 근동의 맹주 애굽[각주:1] 제국의 억압과 착취에 당당히 맞서 승리한 하비루의 신 야훼의 승리라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애굽의 지배자의 신과는 달리 억압과 착취에서 고통당하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이라는 것과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해방절 이라고 부르는 점은 민중의 시각으로 출애굽기를 보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해방신학자들이 출애굽기 해석에만 집중한 반면, 민중의 시각으로 성서를 읽는 문 목사의 해석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여호수아서를 읽는 독자는 애굽에서 탈출한 해방군이 가나안을 점령한 침략군이 되는 기록을 보면서 의아해 한다. 하지만 문 목사는 히브리인들을 침략군이 아니라 해방군이라고 부른다. 문 목사에 의하면, 여호수아의 하비루 부대는 반 애굽 기치를 들고 일어선 농민 해방군과 출애굽 한 농민 해방군이 합세하여 애굽의 지배를 추방하는 해방전쟁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애굽 지배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도시국가들을 타도하는 일이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준 창녀 라합과의 동맹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여호수아 2:1, 3; 6:17, 23).


    여호수아 6-7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리고 성 함락은 해방전쟁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사기는 200년간 이루어진 해방전쟁을 기록하고 있고 특별히 사사기 5장은 해방전쟁의 승전을 노래하고 있다고 한다. 문 목사는 히브리인 다윗이 블레셋을 굴복시킴으로 농민해방 전쟁이 대단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삼상 29:3).[각주:2]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해방전쟁으로 보는 관점은 조지 맨덴홀(George Mendenhall)의 논문 “히브리인의 팔레스타인 정복”(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1962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맨덴홀은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은 타락한 토착 가나안의 정치 사회적 체계에 대항한 사회적 약자 연대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하부계층과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연대한 농민봉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맨덴홀은 아마르나 편지가 농민봉기의 고고학적 자료라고 주장한다. 후에 노만 갓월드(Norman Golttwald)는 자신의 책 “야훼의 족속들”(The Tribes of Yahweh, 1979)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을 농민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다시 주장하였다. 성서학자 브루거만도 갓월드의 영향을 받아 사회학적 방법론으로 성서를 해석한다. 문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도 맨덴홀, 갓월드, 브루거만과 같은 맥락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성서를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 민중사』는 거의 절반에 가까운 상당히 많은 지면을 민중의 시각으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해석하는데 할애한다. 이는 타락한 이스라엘 왕조에 대항하여 “해방신 신앙을 되살리려는 신앙운동이 예언 운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각주:3] 문 목사는 이스라엘의 예언운동을 하비루 농민 해방군 전통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온 엄청난 물줄기라고 주장한다(아모스 5:24).[각주:4]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설화는 사무엘이 이끄는 예언운동이 출애굽 해방전쟁의 연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구해 낼 것이다. 내 백성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사무엘상 9:16). 문 목사는 사무엘이 출애굽 민중 해방운동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사무엘을 제2의 모세라고 부른다.[각주:5]   


    문 목사는 예언자 사무엘의 뒤를 이은 엘리야도 8세기 예언자들도(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가) 출애굽 해방전통을 이어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 목사에게는 예언운동은 당시 최대 강국인 앗시리아 제국의 비호아래 악행과 억압적 정책을 저지르는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의 지도층과 부유층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재야의 목소리”라고 주장한다.[각주:6]  


    히브리 민중사는 출애굽 해방정신과 그 정신을 이어가는 예언전승이다. 구약성서는 제국의 억압과 폭정에 굴하지 않고 해방정신을 이어갔던 히브리 민중의 신앙과 삶을 기록한 민중의 책이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필자는 고대 이집트를 현대 이집트와 구분하기 위해 히브리어 미츠라임을 이집트라고 번역하지 않고 애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본문으로]
  2.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35-73쪽. [본문으로]
  3. Ibid., 129쪽. [본문으로]
  4. Ibid., 134쪽. [본문으로]
  5. Ibid., 143쪽. [본문으로]
  6. Ibid., 15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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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 


(Walter Brueggemann)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지난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고 많은 미국인들이 열광했다. 교황의 미국방문 중 언론의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바로 교황의 연방의회와 유엔에서의 연설이다. 교황의 중심 메시지는 보편적 복지였다. 이를 위해서 법을 만드는 의회나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모두가 힘을 합쳐 공동이익과 결속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보편적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나친 이분법적 접근, 즉 선과 악 또는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분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리주의가 이웃과의 담을 만들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미국의 이민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은 미국이 “우리가 아닌 그들”이란 말을 사용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경종을 울린다. 교황은 모두를 “우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 안에 진정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성서학자 월트 브루거만도 자신의 책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Journey to the Common Good)에서 교황과 같은 주장을 한다. 미국은 시간이 갈수록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빈부격차를 현재 미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까지 이야기했다(Pew Research Center). 한국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고 비정규직이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구 빈곤층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루거만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와 예언서 예레미야와 이사야를 통해서 본 보편적 복지의 개념을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해답으로 내놓고 있다.


   1.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1장에서 출애굽기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을 언급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중심 주제는 단순히 노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향한 기나긴 여정의 출발로 볼 수 있다. 브루거만은 애굽 왕 바로를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묘사하고 있다. 바로가 지배하는 애굽 제국은 당시 고대근동의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바로가 요셉과 부와 자본을 독점하는 방식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요셉에게 와서 돈으로 곡식을 사는 경제행위를 한다. 결국 애굽과 가나안 땅의 모든 돈이 요셉에게로 몰렸고 요셉은 벌어들인 돈을 바로의 궁으로 보낸다(창세기 47:14). 사람들은 양식과 교환할 돈이 다 떨어지자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을 요셉에게로 끌고 온다(창세기 47:17). 양식과 바꿀 집짐승도 다 떨어지자 사람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몸과 밭을 요셉에게 판다(창세기 47:19). 칼 막스의 이론에 의하면 애굽 제국의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 바로에 의해 독점 지배되고 있는 구조다. 결국 밭에서 생산된 것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치는 애굽 제국의 토지법이 만들어지게 된다(창세기 47:26).[각주:1] 브루거만은 애굽 제국의 노예제도는 소수권력 계층의 교묘한 조작으로 인한 부와 재산의 독점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출애굽기는 단순한 노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애굽 제국의 독점경제에서 광야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대탈출이라고 주장한다.[각주:2] 출애굽기 5장은 무자비한 노동력 착취를 자행하는 바로와 보편적 복지를 위해 출애굽하기를 원하는 모세와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브루거만은 애굽 제국의 독점경제의 시작을 바로가 꾼 악몽에서 보고 있다. 바로의 꿈과 대조적으로 모세는 보편적 복지를 향한 희망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보편적 복지의 삶을 처음으로 배운 곳이 바로 광야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만나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애굽 제국의 피라미드식 생산경제 체제와 구별된다. 첫째, 만나는 일용할 양식으로서(출 16:4), 자신에게 필요한 양만큼 만 거두어 양식을 불의하게 축적하는 애굽 제국의 독점 경제체제와 다르다(출 16:16). 둘째, 만나를 거두는 행위는 애굽 제국의 노예제를 통한 착취된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노동이다(출 16:16). 셋째, 만나를 통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불안과 걱정으로 고통 받는 애굽의 삶과 달리 결핍 속에서도 풍성한 나눔과 감사가 넘치는 아름다운 광야의 삶을 엿볼 수 있다(출 16:18).


    브루거만은 시내산의 십계명 중 안식일 준수계명은 단순히 예배가 아니라 애굽 제국의 시스템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 끊임없는 소유와 부를 추구하는 물질 만능주의 삶으로부터 해방하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애굽 제국의 경제는 끊임없는 노예의 노동으로 굴러가는 사회로서 히브리 노예는 쉼 없는 노동으로 착취당했던 것이다.[각주:3]


    마가복음 6장의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장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가 실현되는 방식을 예수께서 직접 보여주고 있다. 브루거만은 광야의 만나와 예수의 오병이어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복지는 오늘날 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편적 복지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하늘의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2. 브루거만은 광야 시내산의 핵심인 보편적 복지사회의 메시지가 예언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2장에서 예레미야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예언자적 외침을 언급하고 있다. 브루거만은 예레미야가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악행을 고발하고 있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예레미야는 다윗왕조의 악행의 최고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의 통치를 강하게 비판한다(예레미야 9:23-24). 이어서 브루거만은 솔로몬 왕조의 번영과 부귀를 미국의 부귀영화에 비교한다. 예레미야는 솔로몬의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악행을 하나님의 사랑, 정의, 공의로 맞서고 있다. 브루거만은 이 세 가지 요소는 보편적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하늘의 메시지라고 주장한다.[각주:4]  


   3.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3장에서 이사야의 메시지를 통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한다. 이사야서의 중심 메시지 중 하나는(특히 제 3 이사야- 이사야 56-66) 바로 포로 귀환 공동체의 재건을 위한 새로운 질서 확립이다. 브루거만은 새로운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보편적 복지라는 것이다. 특별히 이사야 65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언급하며 브루거만은 이사야의 비전은 다름 아닌 보편적 복지의 비전이라고 역설한다.  [각주:5]


    이 책은 브루거만이 2008년 10월 레젠트 컬러지에서 강의 한 내용을 토대로 2009년 1월에 출판사와 출판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바로 그때 미국은 경제위기를 맞이하였다. 브루거만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보편적 복지의 상실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예레미야, 이사야가 꿈꾸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보편적 복지라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만들어 나가야한다고 경고한다. 보편적 복지가 실현된 사회를 하나님 나라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누고 섬기는 삶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나가는 하나의 거룩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월트 브루거만,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Journey to the Common Goo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0). [본문으로]
  2. 브루거만, 6쪽. [본문으로]
  3. 브루거만, 26쪽. [본문으로]
  4. 브루거만, 68쪽. [본문으로]
  5. 브루거만, 114-11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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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저항한 묵시문학: 초기 유대교의 저항신학” 


(Anathea E. Portier-Young)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지난 201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성서학회에서 다니엘서 섹션의 논문 발표회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아나띠아 포티어-영(Anathea Portier-Young)이라는 젊은 성서학자의 책 『제국에 저항한 묵시문학: 초기 유대교의 저항신학』(Apocalypse against Empire: Theologies of Resistance in Early Judaism)에 대한 논평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다.[각주:1] 포티어-영의 책이 2011년 출판되자마자 각종 학술저널에서 서평이 쏟아졌고 저명한 성서학자들의 극찬도 이어졌다.

    20세기 초반 성서학자들의 유대교 묵시문학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문학적 장르나 묵시의 사회학적 배경에 집중되었다.[각주:2] 그러나 20세기 후반 성서학자들은 묵시를 제국에 저항한 유대교의 독특한 문학이라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각주:3] 포티어-영의 연구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에서 유대교 묵시문학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포티어-영은 현대 정치 사상가들의 이론을 통해 제국의 지배와 저항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했다. 둘째, 포티어-영의 유대교 묵시문학의 사회적/역사적 배경인 셀류쿠스 제국의 지배를 재해석했다. 셋째, 포티어-영은 저항에 대한 이론적 연구와 셀류쿠스 제국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다니엘서와 에녹서를 재해석했다. 특별히 포티어-영의 다니엘서와 에녹서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공포정치”(Program of terror)에 대한 저항이라는 주장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1. 포티어-영은 마르크스, 베버, 알튀세, 푸코 등의 정치사상 이론과 그람시의 사회주의 사상이론을 바탕으로 셀류쿠스 제국의 지배와 유대교 묵시문학의 저항을 분석한다. 이는 이전의 성서학자들이 주로 묵시문학을 문헌적/역사적으로 접근한 연구방법과는 다른 접근방법임에 틀림없다. 포티어-영은 사회주의와 반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패권”(Hegemony)이론과 마르크스, 베버, 알튀세의 “지배”(Domination)이론,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지배구조를 셀류쿠스 제국의 지배형태에 적용한다.[각주:4]

   패권(Hegemony)은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 우월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를 의미한다.[각주:5] 가령, 표준말 제도는 패권(Hegemony)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표준어의 사전적 정의는 “교육적, 문화적, 정치적인 편의를 위하여 한 나라의 표준이 되게 정한 말로서 우리나라는 서울의 현대 중류 계급이 사용하는 말을 표준어로 삼았다”고 한다. 서울의 현대 중류 계급이 사용하는 말이 표준말이라는 것은 권력의 승자가 사용하는 말이 표준말이 된다는 것과 같다. 사투리를 사용하면 차별받는 표준말 제도는 획일적인 문화 패권의 결과물이다.

    포티어-영은 그람시의 패권이론의 핵심인 “비폭력적 형태의 지배”(Non-violent forms of control)에 주목하였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인 박해는 살인, 고문, 노예제도, 강압적 규제, 파병 등 폭력적인 통치뿐 아니라 일상의 삶, 즉 관습이나 문화적 가치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박해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 사람을 헬라인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헬라제국의 체육관을 세웠고, 예루살렘 성전을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당이라고 명명하였으며(마카비하 6:2), 히브리 문화와 관습을 헬라 문화와 관습으로 완전히 대체시킨 것이다. 포티어-영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이고 사회적 박해가 바로 패권(Hegemony) 즉, “비폭력적 형태의 지배”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각주:6] 유대 묵시문학은 바로 이러한 비폭력적 형태의 셀류쿠스 제국의 지배에 대하여 대안적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저항하였던 것이다. 대안적 가치는 다니엘서와 에녹서의 기도와 금식이다. 묵시문학은 이러한 대안적 가치로 세상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하늘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제국의 질서와 체계를 전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지배(Domination)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직접적인 억압의 형태를 일컫는다.[각주:7] 안티오커스 4세 이전의 헬라제국의 지배(Domination)는 정복, 살육, 노예, 군사력 과시, 새로운 과세제도 도입, 또는 경제적 억압정책으로 펼쳐졌다. 안티오쿠스 4세의 지배(Domination)는 유대인의 예배, 안식일, 음식규례, 하나님의 주권 등을 무효화하는 정책으로 지배(Domination)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2. 포티어-영은 그동안 불모지나 다름없는 셀류쿠스 제국에 대하여 깊이 있는 연구를 하였다(“Seleucid Domination in Judea”).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바로 주전 200년과 167년 사이에 유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다. 포티어-영은 셀류쿠스 제국의 전략적 지배 체계를 자세히 분석하였고 이 분석의 결과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인 박해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의 유대인 박해는 단순히 유대주의와 헬라주의간의 갈등을 넘어선 제국의 “공포정치”(State of terror or program of terror)라는 것이다.[각주:8] 이러한 접근은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인 박해의 원인을 규명하는 놀라운 학문적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의 법을 금지하고 새로운 종교적 관례를 제정하였다. 마카비하서에 의하면, 22,000명의 셀류쿠스 제국의 군사가 이미 예루살렘에 주둔하였고 수천 명의 유대인을 노예로 삼는 박해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엔티오쿠스 4세는 이제 제국의 지배를 재건하기 위해 다른 차원의 박해를 자행한다. 포티어-영은 안티오쿠스 4세의 현실정책 이라는 렌즈로 그의 박해의 수준과 방법을 분석하였고, 이 분석에 의하면 안티오쿠스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냉소적이고 잔인한 실용주의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3. 포티어-영은 마지막 장에서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 시대에 기록된 것을 추정되는 다니엘서와 에녹서의 일부분을 분석한다(the Apocalypse of Weeks, the Book of Dreams). 포티어-영은 다니엘서를 안티오쿠스 4세의 “공포정치”(Program of terror)에 맞서 언어, 상징, 선포, 가르침을 통한 저항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니엘서 전체를 안티오쿠스 4세 시대의 저항이었다고 보는 견해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다니엘서를 안티오쿠스 4세의 공포정치에 대한 저항이라고 본 것은 객관적 문헌에 근거한 일리 있는 주장이다. 포티어-영은 안티오쿠스 4세의 “공포정치”(Program of terror)에 맞서 다니엘서가 보여주는 저항의 형태는 “비폭력 저항”(Program of nonviolent resistance)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유대 묵시문학의 독특한 점 중 하나는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고대의 전설적인 인물의 이름을 대신해서 사용하는 익명성이다. 포티어-영은 정치사회학자 제임스 스캇(James Scott)의 저항이론인 “숨겨진 사본”[각주:9]에 근거하여 익명성은 묵시문학의 저자가 현실의 위협에 도피하였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글을 고대 위인의 권위를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제국의 불의한 지배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각주:10] 포티어-영은 비폭력 저항을 주장하는 다니엘서와는 반대로 에녹서는 폭력적 저항을 촉구한다는 점도 분명히 밝힌다.[각주:11] 


   결론적으로, 포티어-영의 책은 다음의 네 가지 측면에서 묵시문학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 유대인 묵시문학의 정치 사회적 상황인 셀류쿠스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 안티오쿠스 4세의 공포정치는 다양한 차원의 묵시문학을 태동시켰음을 밝혔다. 

   * 안티오쿠스 4세의 비폭력 형태의 지배는 비폭력 형태의 저항임을 보여주었다. 

   * 고대와 현대의 공포정치에 대한 이론적 방법론적 관계를 정립하였다.[각주:12] 


     묵시문학 연구의 대가인 존 콜린스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유대 묵시문학의 다양한 차원의 전략적 저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미국이 셀류쿠스 제국(특별히 안티오쿠스 4세)과 같은 제국처럼 공포정치를 시행한다면, 포티어-영의 주장처럼 다양한 차원의 전략적 저항이 때때로 테러리스트라는 꼬리표를 달고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각주:13] 마치 일본제국에 저항한 항일 운동자들이 테러리스트라고 불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론적으로, 묵시문학은 무기를 들고 폭력적인 전쟁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념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인 차원을 통해 비폭력적으로 저항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 유대 묵시문학은 현실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도피하는 몽상적 문학이 결코 아니다. 묵시문학은 제국의 억압과 폭력을 하늘의 힘으로 저항하는 고대 학자들의 혁명임을 포티어-영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Anathea E. Portier-Young, Apocalypse Against Empire: Theologies of Resistance in Early Judaism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본문으로]
  2. 대표적으로 Paul Hanson, The Dawn of Apocalyptic (Fortress Press, 1975); John J. Collins, The Apocalyptic Imagination: An Introduction to Jewish Apocalyptic Literature, 2nd edition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8). [본문으로]
  3. 대표적으로, Richard A. Horsley, Revolt of the Scribes: Resistance and Apocalyptic Origin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0). [본문으로]
  4.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ed. Quintin Hoare and Geoffrey Nowell Smith (London: Lawrence and Wishart, 1971). [본문으로]
  5. 포티어-영, pp. 11-12. [본문으로]
  6. 포티어-영, p. 11. [본문으로]
  7. 포티어-영, p. 23. [본문으로]
  8. 포티어-영, p. 136. [본문으로]
  9. James Scott, Domination and the Arts of Resistance: Hidden Transcript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0). [본문으로]
  10. 포티어-영, p. 310. [본문으로]
  11. 포티어-영, p. 371. [본문으로]
  12. 포티어-영, p. 396. [본문으로]
  13. 포티어-영, xii.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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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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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수현
    2015.09.19 00:5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깔끔한 정리와 일목요연한 비평에 감사드립니다. 꽤나 읽기 힘든 (두껍기도하고.. 역사적 서술이 많아서요...ㅜㅜ) 포테이 영의 책을 소개해주셔서 후학들과 저에게 큰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특히나 시험준비하는 저에게 득템이네요... 히브리어도 가르쳐주시고 여러가지로 신세지고 있습니다. ^^ 강건하시길 기원합니다...
  2. 김진양
    2015.09.30 11:4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한 박사님, 시험준비 중이시군요. 잘 마무리 하시길 바랍니다. 늘 번쩍번쩍 빛나는 관점과 학식을 보여주셔서 제가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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