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인사말

교회가 소외된 사람들의 잔치마당으로 변하는 그날을 바라며

 


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1.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눈에 자기도 모르게 해석학적 색안경이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깨우쳐줄 책이 이렇게 이른 시기에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것을 다 함께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자축하고 서로 격려하는 의미로 큰 박수를 칩시다.

2.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세계 각 곳에서 갖 가지 해방운동들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갖 가지 급진적 신학사상들이 등장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남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당하는 격심한 경제적 불의로부터 해방하려는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이 탄생했습니다. 1960년대 초에에는 백인과 흑인 사이에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여기에서 black theology(흑인신학)가 탄생했습니다. 1960년에서 70년대에 한국에서는 급속한 산업화 정책으로 희생을 당하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쟁취 투쟁과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차원에서 소외당한 민중들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젔습니다. 이 맥락에서 민중신학이 탄생했습니다. 민중신학은 현재의 체제 아래서 억압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해방신학과 흑인신학과 같은 궤도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 흑인의 해방, 민중의 해방보다 한 걸음 더 급진적으로 나아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1970년대에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난 여성운동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여성신학(femnist theology)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신학들은 주장하기를 설령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민중의 해방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여성의 해방은 자동적으로 이루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성은 고통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민중들 가운데서도 차별적으로 가장 고통을 당하는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성의 차별과 억압을 당연시하는 현재의 가부장적 제도와 문화를 변혁하지 않고서는 총체적인 인간 해방은 있을 수 없다는 기치를 내걸고 여성해방이야말로 참된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또 한 걸음 더 급진적으로 나아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성소수자 권리 운동입니다.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여성 동성애자, 남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권리옹호라 불리는 이 운동은 남성과 여성 양쪽으로부터 다 배제당하는 특별한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queer theology가 등장했습니다. 이 신학은 성소수자에 속하는 사람들에도 이른바 정상적인 남성/여성과 꼭 마찬가지로 차별없이 그들의 성정체성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 

우리나라에서는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차별금지법안이 2007년 10월에 동성애 조항이 삭제된 채 국회에 제출되어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일부 대형교회와 기독교인 네티즌들의 극렬한 반대운동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회가 약자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가장 배타적이며 보수적 성향의 단체임을 단적으로 반증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교회가 성소수자를 포용해야 하느냐의 가부를 놓고서는 교회가 분열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지경입니다. queer 신학은 교회가 성 문제와 관련된 현 사회의 지배적인 제도와 가치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성소수자의 처지를 단지 예외적 사항으로 보고 시혜적 차원에서 용인해 주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라고 비판합니다. 저자는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증은 잘못된 성서해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성서본문들의 세밀한 해석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4.

독일에는 2년에 한 번씩 Kirchentag이라고 하는 신도대회가 열립니다. 이것은 교회 당국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주관으로 신학적, 교회적, 정치적, 사회적 주요 당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2년마다 약 일주일 간 전국 곳곳으로부터 수십만명이 참가하는 큰 회의입니다. 1974년은 제가 독일에 간 후에 처음으로  Kirchentag이 열리는 해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대회에서 호모섹스의 문제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공론화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호모섹스 집단도 이 대회에 참가 단체로 초청을 받았으며 그들에게도 자기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칠 수 있는 장(場)이 제공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집단이 발표하려는 연제는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3,000여명을 수용하는 대형 강당이 특별히 제공되었습니다. 많은 청중이 예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도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기다렸습니다. 동성애자의 연제가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니까 그가 동성애자로서 그의 상대역 되는 한 남자와 어떻게 동성애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이야기하리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귀을 귀울였는데 그는 한 남자, 즉 예수라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기대와 전혀 달랐지마는 그 동성애자도 예수를 사랑한다면 똑 같은 예수를 사랑하는 우리와 그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Kirchentag 이후에 신학교 게시판에는 동성애자 파트너를 구한하다는 광고가 공공연히 나붙게 되었으며 교회의 목사가 동성애자임을 표명하더라도 해임당하지 않고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예수가 사랑한 남자>입니다. 예수와 한 여자, 예를 들어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에로틱한 로맨스 사건이 일어났다는 가상적 풍설에도 우리는 충격을 받을 터인데 예수와 한 남자 사이에 아가페적 사랑이라면 몰라도 육체적 친밀함이라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더욱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5.

성서는 억압, 차별, 착취, 탐욕, 교만과 같은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불의를 가장 큰 죄악으로 규탄했는데 이와 달리 교회는 인간의 성본능을 가장 가장 큰 죄악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강자들, 즉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과 지배자들의 죄악을 눈감아 줌으로써 그들과 한 편이 되어 특권을 누리는 길을 마련했으며 다른 한 편으로 교회는 성에 대한 죄의식을 극대화하여 그것으로 모든 인간을 꼼짝없이 옭아매고 죄사함이라는 필요불가결한 미끼를 사용하여 그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섹슈앨리티(성애, sexuality)를 죄 중의 죄로 내세우는 난공불락의 신화를 일찍부터 쉽게 구축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교회는 동성애를 가장 혐오스러운 죄악으로 규탄하는 그 한 가지 일로써 교회가 이 사회에서 최선의 윤리를 수호하는 고귀한 투쟁의 최선봉에 서있다는 자기 최면에 빠집니다. 그 결과로 대다수의 이성애적 교인들로 하여금 동성애와 무관하고 이성애적 성관계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성과 관련된 현재의 어떠한 제도와 문화에도 아무런 문제점도 없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6.

이성애를 근거로 하여 대다수의 교인들은 혼인과 가족 제도, 자녀 출산과 같은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되는 완전무결한 절대적 가치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족이 개인에게 안정을 부여하고 자녀 생산이 사회를 존속하게 해 주는 순기능을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본 조직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족 제도는 분리, 사유재산, 지배로 특징지워집니다. 교회가 이 제도를 현재 있는 그대로 영속 불변적인 것으로 보는 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가정의 폭력에 내동이치는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시집하고 장가가는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빛에서 혼인과 가족이라는 현재의 제도를 비판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7.

저자는 작년 이맘 때 이 자리서 “교회와 동성애”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밝혔습니다. 교회의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는 성소수자에 속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교회 밖으로 또는 죽음으로 휘몰아갔다고 고발하면서 교회는 이들에게 끼친 피해와 하나님의 말씀에 끼친 피해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교회가 가진 자들만의 잔치마당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참여하여 즐기는 잔치마당으로 변하는 그 날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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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고통과 예수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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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마가복음 15:33-35]

 
1.

1962년 미국의 John F. Kennedy 대통령이 암살범의 흉탄에 목숨을 잃었을 때에 전 미주의 TV 방송은 한 시간 동안 흑색 화면에 “SHAME” (수치)이라는 자막만 띄워서 전국에 방영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이 일어난 마지막 일주일을 고난주간이라 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예수의 체포 - 재판 - 처형의 과정을 그의 고난/수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의 고난주간 중에는, 즉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활동하신 마지막 일주일 기간 동안에는 이상하게도 단 한 건의 기적을 행하지도, 단 한 건의 자연계의 기이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예수의 저주 한 마디에 말라버렸다 (마가복음에는 그 이튿날에, 마태복음에는 당장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도함)는 예수의 기적 능력의 과시라기보다는 더 이상 생명을 산출하지 못하는 유대교의 종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다고 보도합니다. 영화 벤허에서처럼 예수의 운명 시각에 천지가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천둥번개와 더불어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자연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에게 내려오는 기이한 현상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 바록 그것이 마가복음의 보도대로 예수의 주관적 체험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 울리지 않았습니다. 낮중에 가장 밝은 시점인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는 현상은 처형 현장의 사람들에게 경외심이나 두려운 감정을 일으킬 자이한 자연현상으로 제시되었기보다는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비참한 끝장에 접하여 눈앞이 캄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당혹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수의 이 십자가 처형 장면을 목도한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실의에 잠겨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길손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당신들이 무슨 일을 두고 그렇게 침통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하고 길손에게 핀찬을 주었습니다. 그 길손은 그들에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나사렛 예수의 활동을 보고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희망을 품고 가슴이 벅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는 기대와는 달리 바참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하여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벅찬 꿈은 산산조각이 나서 허공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에는 벅찬 가슴으로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허탈한 심경에 빠져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다가 그의 허망한 죽음 때문에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은 유독 이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 - 더 정확히 표현해서 죽임 당하신 사건 - 은 예수를 따르던 처음 제자들이 극복해야 했던 가장 어려운 최대의 걸림돌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도된 대로 사흘 만에 일어난 부활 사건으로 십자가 사건의 거리낌이 하루아침에 녹듯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전 1장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감추어서 없애야 할 거리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선포의 내용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처형에도 불구하고’ (inspite of the cruxifiction)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해야 했는데 나중에는 ‘십자가 처형 때문에’ (because of the cruxifiction)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해석 작업이 덧붙여졌습니다. 이렇게 덧붙여진 여러 가지 신학적 해석들은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의 핵심으로 구축한 긍적적 기여를 한 측면도 있지마는 지나친 신학적 해석 일변도가 역사적-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은폐시키는 폐단도 있었습니다.


3.

예수에 대한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은 예수를 종말적 구원자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 예언된 종말적 구원자 상(像)의 대표적인 칭호는 ‘메시야’였습니다. 이 밖에도 ‘사람의 아들’, ‘다윗의 자손’ 등이 있었습니다. 어느 칭호로 지칭되든지 상관 없이 구약성서의 종말적 구원자는 신적 능력을 발휘하여 이스라엘에 또는 세계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할 존재였습니다. 종말적 구원자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패배한다는 것은 구약성서의 종말적 구원자 상과 절대로 부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처형으로 죽임을 당한 나사렛 예수를 구약성서에 예언된 바로 그 종말적 구원자로 믿고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 종말적 구원자가 ‘반드시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는 논리를 펼쳐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낯선 얼굴로 나타나서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 (The Christ should suffer these things and enter into his glory.) 는 것을 증언하고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고 했으나 구체적으로 구약성경의 어느 곳을 지시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만일 하나님이 종말적 구원자가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데는 구원자가 반드시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만 하는 그 일 자체를 필요불가결한 요건으로 설정하셨면 그러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디즘(sadism)에 사로잡힌 분이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죽임당하심이 인간 구원 사업의 필수요건이라면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룟 유다와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는 구원 사업의 필요불가결한 일등 공신으로 찬양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유다복음서> 같은 위경(僞經)은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예수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고 수행한 참된 제자로 내세웠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러한 시각(視角)으로 십자가 처형을 그 현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면 “감사합니다. 멈추지 말고 좀 더 피를 계속 흘리시고 죽으셔서 구원 사업을 이루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과히 사디즘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4.

제2 이사야 (사 40-55장)에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한 시가가 네 개 들어있습니다. 특히 넷째 번에 나오는 시가 (사 53장; 정확하게는 사 52:13-53:12)는 고난을 당하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종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하고 또는 어느 특정한 미지의 역사적 인물을 지칭한다고도 보며 미래의 어떤 이상적인 인물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유대교의 주석에서는 이 여호와의 종과 종말적 구원자인 메시야와 결부시키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초대 그리스도 교회는 아주 일찍부터 이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예수의 고난과 결부시켜서 종말적 구원자인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 이하에 전도자 빌립이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위 관리인 한 내시가 귀국하는 마차 안에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는 장면과 마주칩니다. 그가 마침 읽고 있던 구절은 이것이었습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내시는 빌립에게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입니까?” 하고 물었고 빌립은 이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빌립은 이샤야 53장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결부시켜 해석했음에 틀립없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4절a)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5절a)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8절)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1절c)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12절e)
“그는 그의 영혼을 속죄 제물로 내놓았다.” (10절b)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형벌을 우리를 대신하여 겪었으며 그의 목숨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속죄하는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죄의 응보로서의 형벌과 죽음의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예수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죄값을 다 지불하셨다면, 우리는 이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인간의 삶의 문제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수직적 관계만으로 다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원만히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내 주변에서 불의와 폭력의 희생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셈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떠나서는 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신학적, 종교적 뜻매김이 내 이웃의 문제 해결에 적절하지 않다면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는 왜 그의 삶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까? 성서의 어느 곳도 그의 예루살렘 행의 목적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슨 근거에서, 무슨 죄목으로 처형당했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또는 ‘우리 죄를 위해서’라는 신학적, 종교적 목적 이외는 다른 어떤 근거도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20세기의 신약신학의 거장 R. Bultmann의 주장처럼 예수의 처형은 순전히 사법적인 오판(誤判) 때문이었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집권자들이 예수를 제거해야 할 근거가 무엇인지는 그의 생애 초두에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막 3:6) 예수의 적대자들의 이러한 모의는 마가복음 1:14-3:5에 전개된 예수의 갈릴리 선교 활동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이 자기네의 지배질서와 조화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사정은 예루살렘의 지배층에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막 12:12; 14:1). 집권자들은 예수의 요구에 순응할 수도, 묵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면서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현 사회의 무권자들에게 삶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선교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예수는 이 사람들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사회의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밑바닥 무지레기들이 하나님나라 잔치의 주빈으로 영접되는 것은 현 사회의 지배층르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의 주동자인 예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6.

그리스도교 신학은 고통, 고난, 재난, 불행 등의 문제를 인간 개인의 죄와 관련지어서 너무나 근원적인 차원에만 국한하여 다루기 때문에 이 문제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고통을 예로 들어 봅시다. 고통은 하나님이 죄에 대한 마땅한 응보로서 내리신 징벌이기 때문에 고통의 당사자는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통은 죄인에게 그의 죄를 각성하게 하여 그를 회개시키고 순화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통의 매저키즘(masochism)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뿐만 아니라 고통이나 고난은 인격을 단련시키는 교육적 기능도 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에 만연한 수 많은 이웃의 고통과 불행을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용한 것으로 용인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서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성서는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을 우리의 우리의 인간됨의 주요한 임무로 명했습니다. 성서는 그들이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있든지, 다른 누구에게 있든지 상관 없이 - 따져 본 후에 도우라 하지 않고 그저 도우라고만 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의 노역으로 신음하기 때문에 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노예생활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의 고통과 고난을 용인한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현 세상의 지배자인 파라오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7.

알베르 까뮈가 1947년 발표한 소설 <페스트>가 생각납니다.

알제리아의 오랑 시에 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병은 급속히 번져갔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도시는 불가항력의 이 재난 앞에서 큰 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성문은 폐쇄되고 외부와의 왕래가 차단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등장인물들 가운데서 특히 주인공인 의사 리외와 예수회 신부 파늘루 신부가 이 재난에 대하여 나타내 보인 극명하게 대조되는 처신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리외는 페스트라는 재난을 막기에 인간은 역부족이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환히 알면서도,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을 있는 힘을 다해서 저항하는 데 투신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것은 하나님이 불신자에게 내리는 천벌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으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라고 설교하면서 페스트와의 투쟁에 방관적 태도를 취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그들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의사 리외: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소. 그런고로 하나님 편에서도, 인간 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는 편이 좋지 않겠는 소? 하늘로 눈을 돌리지 않고 말이오. 보시오,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지 않소.”
신부 파늘루: “그래요, 나도 안다고요. 그러나 당신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일 뿐이지 않소.”
의사 리외: “그렇다고 해서 전투를 중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요.” 

리외의 투쟁은 죄 없는 아기의 죽음을 보고 더욱 고양됩니다. 그리고 신부도 죄 없는 아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입장의 변화를 일으켜서 리외를 도와보건소에 봉사하게 됩니다. 리외는 점점 더 많은 동지를 얻게 되고 결국에 페스트도 일단 정복됩니다. 그렇지만 리외의 아내도, 늘루 신부도 페스트의 희생자 되는 아픔을 남겼습니다.

마침내 페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성문은 다시 열리고 오랑 시는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뤼는 이 질병에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할만한 것 보다는 감탄할 만한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글로 써서 들어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재난과 불행은 승산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을 극복하려고 맞서 싸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원인을 밝히는 것은 문제 해결과 관계 없는 한 한가한 관념의 유희일 따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신론자인 의사 리외의 자세가 신부 파늘루의 자세보다 훨씬 친인간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수행한다는 아이로니를 배우게 됩니다.


8.

이웃의 고난에 무관심한 것은 이웃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죄악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고귀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순전히 종교적인 의미만 부여하는 것은 중대한 왜곡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의 권리를 쟁취하고 수호하려는 데서 불가피하게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어떤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경우에 우리는 그 희생되는 짐승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의 심정에 사로잡히지 그 짐승을 나쁜 놈으로 학대하거나 미워할 리는 전혀 없습니다. 이수현씨는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 사회는 그를 의인이라 칭송합니다. 이사야 53장 12c,d에 “그는 자기 목숨을 죽음에 내맡겼다. 그래서 그는 죄인으로 셈해졌다/여겨졌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그는 죄인들을 중재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남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면 의인으로 칭송받아야 바땅하지 왜 죄인으로 셈해져야 합니까? 그것은 그가 목숨을 바친 것은 인간 일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따돌림 받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지배자층은 그 사람을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의 하나로 지목하여 배척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도 이와 꼭 마찬가지 이치였습니다. 그는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지목 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3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은 남의 고난을 퇴치하기 위하여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재현한다는 것을 뜻하지 인격도야를 위한 육체적 학대나 나 신비주의적 고행을 수행하겠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신도들을 선동하는 그의 적대자들을 겨냥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갈 6:17) 라고 용감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상처 자국’은 예수가 당하신 고난의 길을 뒤따르는 데서 얻은 육체적 상처를 말합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승리의 상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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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과 최악 사이
- 인간중심적인,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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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인간없는 세상_임옥상

“사람이 산다는 것이 벌인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악인가?
아니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인가?
인간도 축생에 다름 아니어늘....
미안하다 용서라 잘 가라


 

1. 헤겔은 인간의 역사 발전 과정을 인간 자유의 신장(伸張)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즉 오직 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던 군주독재 체제가 소수의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귀족정치체제로 바뀌고 귀족정치체제가 많은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민주정치체제로 바뀌었다고 보았습니다. 1789년의 불란서 혁명은 왕과 귀족계급이 독점한 권력을 일반시민도 정치적 권리에 참여할 자유를 안겨주었습니다. 불란서혁명은 시민들이 자기네의 권리를 쟁취하는 이른바 시민혁명이었습니다. 자유가 한 사람만의 전유물에서 소수 사람의 소유물로, 소수 사람의 소유물에서 모든 시민의 소유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볼 때에 불란서 혁명은 인간 자유의 신장 과정에 획기적인 찬란한 이정표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 ‘시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니고 도시에서 상공업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이른바 제3계급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귀족과 성직자 계급인 제1계급과 사회의 밑마닥에 속하는 인민들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계급으로서의 제3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자본주의 혁명과 더불어 사회의 주도권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불란서혁명을 통해서, 그리고 잇따른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서 명목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보장되었다 하더라도 인종적인 차별, 성적인 차별, 빈부상의 차별, 등등 갖가지 차별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흑인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가난한 사람의 해방을 외치는 해방신학, 억압받고 차별받는 소외된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는 민중신학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라는 용어 자체가 완전히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산물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이룩한 일, 인간 사회의 변천을 문제삽습니다. ‘역사’에 대립되는 용어로서 ‘자연사’(自然史, natural history)란 것이 있습니다. 자연사는 자연의 변천사. 즉 하천의 생성과 변화, 화산과 지진의 발생, 지질의 생성, 기후의 변화 등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자연사는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자연적 사건, 예를 들어 큰 지진이나 홍수, 화산폭발 등이 인간의 역사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 역사학의 대상으로 편입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신구약성서에 기록된 역사를 특히 ‘구원사’(救援史, salvation history, redemptive history)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역사를 뜻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문제삼는다고 하면서도 유대교에서는 유대민족의 구원을 중심문제로 다루었으며 그리스도교는 만민족의 구원을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국한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사조였습니다. 여기에서 남미 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은 각각 가난한 사람, 흑인, 여성, 민중을 구원의 중심 주체로 삼고 있습니다.

구원사의 중심 대상은 오로지 인간입니다. 자연계의 구원은 거의 관심 밖이거나 있다하더라도 겨우 끝자락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인간 구원이 너무나 중요하고 급선무라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2. 독일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고려영행사’라고 하는 한국여행사가 개설되어 지사장이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이사왔습니다. 한국에서 가정부 아가씨도 대려왔습니다. 집에서 애완견을 키웠는데 병이 들어 설사를 하는 바람에 마루 바닥은 물론이요 애써 빨아놓은 침대 시트나 소파를 가리지 않고 똥을 마구 싸기 때문에 가정부가 화가 나서 막대기로 개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가 “깽깽” 하고 울어댔습니다. 얼마 후에 경찰 들이닥쳤습니다. 그 아가씨는 동물학대죄로 경찰에 끌려 갔습니다. “깽깽”하는 개 울음 소리를 듣고 이웃집에서 경찰에 동물학대행위로 신고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에 “참 한가한 나라로구나!”하고 속으로 빈정그러렸습니다. 제3세계에는 인권문제로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데 너희들은 ‘견권’(犬權)을 가지고 아단법석이니 가소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학생들 중에서도 제3세계의 인권문제, 반독대 민주화 투쟁등에 연대해서 데모도 하고 운동을 하는 학생들도 있는 반면에 ‘동물학대 방지 운동’을 벌이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닭들이 빽빽한 닭장에 갇혀서 추럭에 실려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확대해서 걸어놓고 닭들이 누려야 권리를 외첬습니다. 그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게도, 그 때에는 나는 이들의 주장에 별다른 감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피옷 반대 캠패인도 벌였습니다. 나는 “그러면 너희들은 구두와 허릿띠는 가죽 대신에 헝겁으로 만들어 쓰느냐?” 하고 속으로 빈정그렸습니다.

 

3. 지난 해 11월 23일에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이래 2011년 1월 28일 현재까지 돼지와 소가 287만 여 마리가 매몰 처리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난 18일에 200만 마리 였던 것이 10일 사이에 근 100만 마리가 늘어난 셈입니다.

[*구제역(口蹄疫 foot-and-mouth disease; 소, 돼지, 양, 염소, 사슴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우제류)에 감염되는 질병으로 전염성이 매우 강하며 입술, 혀, 잇몸, 코, 발굽 사이등에 물집이 생기며 체온이 급격히 상승되고 식욕이 저하되어 심하게 앓거나 죽게 되는 질병으로 국제수역사무국(OIE)에서 A급질병(전파력이 빠르고 국제교역상 경제피해가 매우 큰 질병)으로 분류하며 우리나라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음. 입 구(口), (발)굽 제(蹄), 전염병 역(疫)]

1월 28일 현재 구제역에 걸린 돼지 272만 8천 328 마리 중에서
                                             
263만 1천 240 마리 (96.4%) 살처분 매몰
                         
"        "     소  14만 5천 823 마리 중에서
                                             
14만 4천 589 마리 (99.2%) 살처분 매몰
여기에는 조류 인풀루앤자 살처분된 닭과 오리 약 350만 마리는 계산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 정권하에서 유대인 600만명을 살해한 사건을 역사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수치(羞恥)라고 일컫습니다. 그것을 흔히 ‘유대인 학살 사건’이라 합니다. ‘학살’은 ‘참혹하게 마구 무찔러 죽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300만 마리에 가까운 돼지와 소 (닭과 오리를 합치면 600만 마리가 훨씬 넘을)를 맹매장 하다 싶이 해서 죽이는 것을 일컬어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살처분’(殺處分)했다고 합니다. ‘처분’이라는 말은 ① 처리하여 다룸 ② 행정, 사법 관청이 법규를 적용하는 행위 ③ 권리를 행사하는 일을 뜻한다. 살처분이라는 것은 죽여서 처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살처분이라는 말 속에는 법규의 집행이요 권리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 말 자체 속에는 하등의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셈입니다. 인간은 가축에 대해서 무슨 일이든지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살처분에 대한 비판이 있다면 살처분 자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축을 안락사 시키지 않고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를 산 채로 한 꺼번에 포크래인으로 짂어서 구덩이에 내던져 생매장하는 비인도적 잔인성에 대한 규탄 정도입니다.

 

4. 인간에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마 16:26) 그래서 십계명 중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조항이 인간 관계에서 행하지 말아야 행위 중에서 제일 첫째 조항으로 등장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선포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전혀 사용하지 아니고 그대신에 ‘생명’ 또는 ‘영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중요한 내용을 ‘생명’ 또는 ‘영생’이라는 개념과 바꾸어서 이해해도 될만큼 ‘생명’ / ‘영생’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가치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명이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무슨 대가를 치러더라도/ 어떠한 희생을 치러더라도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때에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로 최선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 10:39) 이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5.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던지신 물음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바보이고 아무리 욕심에 눈이 먼 사람이라 하더라도 정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물음 1: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물음 2: “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는 것이 옳으냐?”

선한 일과 악한 일 중에서 선한 일을 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며 A라는 친밀한 한 사람의 목숨/생명을 두고 그것을 살릴 것이냐 죽일 것이냐 중에서 살리는 것을 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는 물음에는 간단히 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선 무슨 일이냐가 문제되고 또 그 일이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시급하고 중대하냐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또 단순히 A라는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것이냐, 죽일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A라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B라는 사람 또는 그 외의 C, D라는 다른 사람의 희생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그 답변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인간의 윤리사상은 어떤 사람의 목적에 어떤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악으로 규정했습니다마는 인간 이외의 어떠한 자연물 -무생물이나 생물을 막론하고 - 도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인간에게 무한대의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언제부터인가 인간에게 육식할 권리가 허용되었다 하더라도 현재 인간들은 식도락적 향략을 위해서 고기를 과소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축산업자들은 자본논리로 공장식 사육을 함으로써 가축을 학대하고 가축의 면역성을 저하시켰습니다. 현재로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가 수억인데 그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분량의 곡물을 사료로 사용하여 생산한 육류로 가진 자들의 입의 향락을 도와주며 그것으로 돈을 버는 것은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초지를 만들기 위해서 삼림을 무제한적으로 베어냄으로써 기후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석유자원의 무제한적 사용의 부작용으로 환경오염의 정도를 넘어 이제는 기후붕괴의 원년으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6. 1897년에 영국의 작가 B. Skoker가 “드라큘라” (Dracula)라는 소설을 써냈습니다.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성주였는데 이 사람은 죽었으나 밤마다 관속에서 깨어나와서 산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수 많은 흡혈귀 영화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재작년에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박쥐”라는 영화도 장르상으로는 ‘흡혈귀’ 영화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흡혈귀가 된 어떤 특종의 인간이 벌이는 괴이한 행동을 서술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고발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에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인 신부 현상현 (송강호)이 병원에서 이상한 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바라보면서 무력감에 빠집니다. .ㄱ 때에 세계 모처에서 이 병에 대한 백식 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생체실험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험대상이 되겠다고 자원해서 찾아갑니다. 실험 대상이 된 사람으로서 살아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실험대상으로서 현상현도 거의 죽게 되었다가 이상한 피를 수혈받고 살아나서 돌아오게 됩니다. 본국에서는 기적을 일으킨 성자로 그를 추앙하며 그에게 안수 받으러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 때에 그가 옛날 고아원 시절에 알고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이야가는 본 궤도로 접어듭니다. 상현의 친구 강우는 정신박약 장애인입니다. 그에게는 태주 (김옥빈)라는 예쁜 아내가 있었습니다.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생체실험소에서 현상현에게 주입된 이상한 혈액은 상현의 목숨을 구해주었지만 그 대신 그를 흡혈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피를 먹지 않으면 얼굴에 흉칙한 물집이 생깁니다. 상현이 견지지 못하는 수혈하는 환자의 피를 한 모금 빨아먹는 순간 흉칙한 물집은 순간적으로 깜쪽같이 사라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피를 먹고 나면 그는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친구 강우는 어머니가 포목상을 하면서 유족하게 살아가는 가정. 강우는 정신박약 장애인. 태주(김옥빈)라는 예쁜 아내가 있음. 태주는 아마 의리 때문에 결혼했겠지마는 그녀의 결혼 생활은 생지옥과 같았습니다.

강우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상현은 강위 아내 태주와 눈길이 마주칩니다. 태주의 애처로운 눈길에 사로잡힙니다. 병원으로 돌아온 상현은 신앙과 애욕 사이의 갈등에 빠집니다. 그는 육체적 욕망의 유혹을 물리치려고 자기 몸에 물리적 고통을 가하면서 발버둥칩니다.

한편 태주는 생지옥과 같은 숨막히는 가정에서 한 순간이라도 도피하기 위하여 상현이 근무하는 병원에 밤에 자원봉사원으로 오게 됩니다. 이라햐여 두 사람은 사랑의 불꽃 속으로 몸울 내던지게 됩니다.

상현, 강우, 태주 세 사람은 물놀이를 갔습니다. 태주는 남편을 물에 빠뜨려 익사십니다. 상현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강우의 시신을 수몰된 가옥의 장농 속에 숨겨놓음으로써 살인사건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합니다.

그 사이 태주도 자원해서 흡혈귀가 됩니다. 그녀는 더 대담해져서 수혈용 죽은 피를 더 이상 먹으려 하지 않고 산 사람의 신선한 피를 먹으려고 살인을 서스럼없이 행합니다. 어느날 밥입니다. 태주의 집 (사실은 시어머니의 집)에 늘상 와서 마작놀이를 하는 손님들이 모였습니다. 상현과 태주는 그 손님들을 모조리 죽여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승용차로 밤길을 달립니다. 흡혈귀는 아침 햇살을 보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동해의 아침 햇살을 맞으며 죽기 위하여 달리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면서 눈을 감습니다.

상현과 태주는 사람의 피가 필요합니다. 자살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이라 하더라도 생명을 죽이는 것이니까 죄악입니다.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사는 것도 죄요 죽는 것도 죄라는 모순 속에서 수행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 하겠습니다.

 

7.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은 반드시 다른 생명을 요구합니다. 생명이 유지되려는 다른 생명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다만 식물의 생명만은 무기물을 가지고 광합성 작용을 하여 생명을 현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곤충, 물고기, 짐승, 사람 등의 동물은 반드시 다른 생명체를 먹이로 하여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맹수는 배가 고플 때에만 먹이를 사냥합니다. 일정하게 배가 차면 더 이상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이사슬의 최고봉에 있는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향락하기 위하여 먹으며 축재하기 위하여 먹이를 무한대로 생산합니다. 다른 생명을 많이 희생시키고 많이 소유할 수록 성공지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영화 “박쥐”에서 보듯이 인간의 살아 있는 피를 먹을 때에, 즉 인간을 희생 제물로 삼는 인간일 수록 더욱 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Vampire가 된 상현과 태주가 오래 생명을 유지하면 할 수록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하고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악행은 끝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죄악입니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최선도 아니고 최악도 아닌 그 양자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물의 생명 뿐만 아니라 식물의 생명까지도, 심지어는 무기물까지라도 인간이 무한대로 남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제넘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 이 시점에서 인간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가장 큰 죄악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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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미래 - 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보다』

지은이 : 하비 콕스
옮긴이 : 김창락
펴낸날 : 2010년 8월 25일
페이지 : 349쪽
정  가 : 17,000원
펴낸곳 : 문예출판사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1988년 '뉴욕타임스'에서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뽑힌 하비 콕스 교수가 그간 자신의 종교 인생을 집대성하는 의미로 펴냈다. <종교의 미래>는 21세기 종교가 맞닥뜨린 문제의 해답을 예수의 시대와 제3세계에서 새롭게 발흥하는 종교적인 실천에서 찾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예수로부터 시작한 기독교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교조화 되었는지, 미국 근본주의는 어떻게 생겨났는지, 해방신학과 평신도 종교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개괄할 수 있다. 특히 하비 콕스는 기독교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해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하늘에 존재하는 천국을 말하는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의 삶에 기반 한 새로운 기독교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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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여름 신학아카데미 탈/향 - 회원강좌>

성서ㆍ삶ㆍ신앙

■ 강사_ 김창락

■ 일정_ 2009년 7월 9일 ~ 8월 27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30분

장소_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 우체국 신한은행 사이 골목 50m)

수강료_ 8강 8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 이 강좌는 회원강좌이므로 기존 CMS 회원 및 신규 CMS 후원 신청자는 무료로 수강할 수 있습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회원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운영됩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기다립니다.

■ 강의개요_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 비난을 넘어 조롱을 당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다수의 기독교회 또는 기독교인들이 가진 자들의 편에 가담하여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충견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는 ‘그리스도교’라는 그 본래적 신앙 내용에 부합하는 것인가 타락한 것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 담겨 있는 성서에 비추어서 해답을 모색해 보자.

            첫째 마당 :    ‘성서’란 어떤 책인가?
            둘째 마당 :    ‘역사’란 무엇인가?
            셋째 마당 :    ‘예수 운동’이란 무엇인가?
            넷째 마당 :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다섯째 마당 :  ‘역사적 예수’ 문제란 무엇인가?
            여섯째 마당 :  초대교회의 선교 역사에서 획기적 사건은 무엇인가?
            일곱째 마당 :  바울은 어떤 인물인가?
            여덟째 마당 :  그리스도교 복음/신앙의 정수는 무엇인가?

* 필요한 참고자료는 문서파일로 제공함.

■ 강사소개_
본 연구소 소장. 표준새번역 성서 번역위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영어영문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독일 Johannes Gutenberg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 신학과 교수, 미국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객원 교수, 한신대학교 평화연구소장, 한국신약학회장, 한국민중신학회장을 역임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 무엇이 일어났는가?>, <갈라디아서 주석>, <성서읽기 / 역사 읽기>, <새로운 성서 해석과 해방의 실천>을 비롯해, 바울과 예수에 관한 많은 논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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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자필 사망신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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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뭔가 다르겠지.” 이것은 세화여중 김영승 교사의 문제를 놓고 학교측의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동안에 애써 가져본 한 가닥 바람이었다. 그것은 결국 허망한 꿈이었다. 지난 2월 14일 김교사에게 송달된 것은 파면 통고서였다. 지난해 10월에 치른 전국적 초중고등학교 일제고사 사건과 관련하여 서울 지역의 공립학교 초ㆍ중등 교사 7명에게 파면 또는 해임이라는 중징계가 이미 내려졌던 터이지만 세화여중은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참된 교육기관이기를 자부하는 한, 교육청의 압력쯤은 버텨 낼 수 있으며 또 그러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우리는 희망적인 기대를 가져 보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허황한 꿈으로 끝나버렸다.

교사에게 ‘파면’이라는 징계는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셈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 죽는 것은 어느 쪽인가? 김영승 교사가 잃는 것은 교단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일 따름이다. 그 대신에 학생들 앞에서 참된 스승으로서의 양심에 충실하였다는 그의 명예는 길이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죽는 것은 누구인가? 나의 눈에는 이 파면장의 이면에 씌어 있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사망 신고서’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하여 우리는 스스로 죽기로 결의하였음을 만천하에 공고하는 바입니다.” 라는 설명문이 뒤따르고 그 밑에 이 파면을 결의한 징계위원들의 명단과 함께 일주학원이라고 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살아 있으나 죽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본분을 상실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교육기관이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분을 내팽개치면 그 생명은 이미 상실한 것이다. 지난 2월 5일과 12일에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그 때마다 부당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데 두 번 다 당사자인 세화여중 앞은 비워 둔 채  그 옆에 있는 반포여중 앞에서 해야 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세화여중 측에서 시위를 봉쇄하기 위하여 자기네 학교 앞 집회 신고를 미리 해서 허가를 받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임수였다. 교육기관으로서 이러한 속임수를, 그것도 반복해서, 사용했다는 것은 교육기관임을 스스로 포기한 처사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참된 인간을 육성하는 것 아닌가? ‘정직성’을 빼놓고 인격교육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2회에 걸친 징계위원회는 이러한 속임수 연막 속에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그 결의는 원천무효이다.

학교가 단지 지식 전수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입시학원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아야 할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민주사회의 건전한 시민에 합당한 인격을 양성하는 것 아닌가. 비판이 없는 민주사회란 바람 없이 연을 날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비판하고 저항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는 결국 독재적인 암흑사회로 전락한다. 미친 소가 느닷없이 온 나라의 모든 교실에 나타나 날뛰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들이받고 교육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김영승 교사는 교육자적 양심의 눈으로 일제고사가 마치 이 미친 소처럼 우리나라 교육 자체를 황폐화시킨다는 것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이러한 미친 소의 횡포를 비켜갈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온 몸으로 감히 이 미친 소의 고삐의 한 가닥을 잡아보려고 나섰던 것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그의 환상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비판정신과 용기있는 저항은 상찬할 미덕일지언정 징계할 사유가 될 수 없다. 들판에 가 보면 두 종류의 웅덩이를 보게 된다. 하나는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고 다른 하나는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다. 맑은 물 웅덩이는 그 밑바닥에서 작은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이고 썩은 물 웅덩이는 맑은 물의 공급이 차단된 것이다. 어느 단체나 기관이나 사회든지 밑바닥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비판의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면 결국에 썩고 만다.

일주학원은 지금이라도 김영승 교사의 징계가 부당했음을 자각하고 하루 속히 철회하는 것이 일주학원 자체의 실추된 명예와 질식당하는 이 나라 교육의 생명을 되살리는 길임을 깨달아 하루 속히 현명한 조치를 취하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과거의 거울 속에서 미래를 앞 당겨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이 교육현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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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쪽이
    2009.03.11 00:4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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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다시 또 추스려 힘을 내봅니다. 저는, 우리는 이겼습니다. 그걸 더 확실히 보여주는 것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 글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2009)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작성된 원고입니다.



사상-사건-사회상(社會相)/사회상(社會像)/사회사(社會史)-사회사적/사회학적(=사회과학적) 성서 해석/연구
이 아들은 여전히 ‘거지 왕자’의 신세인가?

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 신약학)

1. 어느 청개구리 집안 이야기 한 마당


청개구리 엄마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들랑 냇가에 묻어다오.”

청개구리 자식들은 평소에 엄마가 시키는 일이면 꼭 반대로 해서 엄마의 속을 썩이었다. 못된 자식들이지만 엄마의 마지막 유언만은 그대로 시행해서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이라도 엄마에게 효도를 하기로 결의하고 엄마의 시신을 냇가에 묻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생겼다. 비가 내릴 때마다 엄마의 무덤이 냇물에 씻겨 내려 갈 위험 때문이다. 그래서 청개구리 자식들은 여름철에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려고 할 때면 엄마의 무덤이 걱정되어 “꽥꽥” 하며 울어대야 하는 것이란다.

물음 1: “청개구리 자식들은 마지막으로 효도를 한 것인가?”
답    : “엄마의 뜻이 유언에 똑 바로 표현되었다면 그렇다.”

물음 2: “청개구리 엄마는 실제로 냇가에 묻히기를 원했는가?”
답    : “속 썩이는 딸이 엄마로부터 ‘이년아, 차라리 죽어버려!’라는 극한적 꾸중을 듣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그것은 엄마의 말의 액면상의 내용에는 부합될지라도 그 말의 진정한 의미/뜻과는 정반대이다. 이 딸은 엄마의 마지막 말 한 마디에서 엄마의 진정한 뜻을 찾을 것이 아니라 엄마와 자기 사이의 평소의 삶의 총체적 관계에서 찾아야 했을 것이다. 청개구리 집안 이야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지적(全知的) 시각을 가지고 있다. 즉 청개구리 엄마는 양지바른 산비탈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것, 자식들이 평생 동안 자기 말을 꼭 반대로 했기 때문에 자기가 유언을 이렇게 하면 자식들은 저렇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산비탈에 묻히기를 원하면서도 정반대로 냇가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시각은 신에게만 속한 것이지 이야기 속의 어느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다. 청개구리 자식들이 진정으로 마지막 효도를 하려고 했다면 엄마의 살아생전의 삶에 비추어서 엄마의 뜻을 조명해야 했을 것이다.”

물음 1과 2는 글 또는 저자의 뜻을 규명하는 해석학의 문제이다.

물음 3: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답    : “이 이야기에 담긴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전통적 성서해석은 바로 이러한 작업이었다. 즉 성서 본문 속에 담긴 신학적 사상, 도덕적 교훈, 윤리적 지 시 사항 등을 끌어내는 것이 성서해석의 해석의 과제였다.”

물음 4: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는가?”
답  : “이것은 역사적-비평적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 또는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에 관련된 물음이다. 성서에 대한 이 접근방법은 성서 본문의 이야기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What happened really?) 또는 ‘그 사건은 정말로 일어났는가?’(Did the event really happen?)를 탐구한다. 이 방법은 더욱 간단하게 역사적 방법(historical method 또는 historical approach)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또한 성서의 각 문서를 역사적 산물로 전제하고 저자와 독자와 누구이며 저작 장소와 연대, 저작의 계기와 목적, 저작에 사용된 자료, 다른 문서와의 문학적 관계 등등을 탐구한다. 역사 연구의 주된 관찰 대상은 과거의 사건이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연쇄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시간이라는 일직선을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관찰하는 것을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방법이라 한다. 이 관찰 방법은 시간이라는 선로(線路) 위에서 사건이 진행하거나 일이 전개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며칠 전에 이라크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대통령 부시의 기자 회견장에서 일어난 사건 말이다. 한 아랍 기자가 그의 신발을 벗어 부시에게 내던졌다고 한다. 이것은 사건이다. 사건은 시간 선을 따라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그 현장에 자동 무비 카메라가 비치되었더라면 그 사건의 진행 과정이 연속으로 촬영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신발 투척 사건이라 하자. 여기서 우선 기자석으로부터 구두 한 짝이 날아와 부시 앞에 떨어진 일만을 떼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일의 맨 처음 장면은 한 기자가 그의 신발을 벗는 동작, 그 다음 장면은 한 손으로 신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 그 다음 장면은 신발이 날아가는 운동, 맨 마지막 장면은 그 신발이 부시 앞에 떨어지는 모습이다. 신발을 벗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부시 앞에 떨어지는 장면까지 진행된 일을 죽 열거하는 것을 사건의 서술(description)이라 한다. 사건은 단순히 서술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다 전달되지 않는다. 우선 그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원인(原因, cause)이라는 것은 물리적 운동을 촉발시킨 작동력을 가리킨다. 신발이 날아간 사건을 순전히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관찰하는 경우에는 한 기자가 신발을 던지는 행위가 이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다. 화재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에 눈앞에 진행된 화재의 과정과 결과만을 진술하지 않고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지, 즉 방화인지, 실화(失火)인지, 전기 누전과 같은 사고로 일어난 것인지를 밝혀주어야만 화재의 내용을 좀 더 실제에 가깝게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사건을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틀에 넣어서 관찰하거나 이 사건을 둘러싼 전후의 더 큰 맥락에 넣어서 관찰하는 것을 사건의 설명/해설(explanation)이라 한다. 그런데 구두 투척과 같은 사건은 사람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는데 우리는 이제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행위를 하게 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행위를 촉발시킨 것이 무엇인지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원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아니하고 동기(動機, motive), 의도(意圖, intention) 또는 목적(目的, purpose) 등등의 용어가 사용된다. 이것을 규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우선 심리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면, 그 사람의 소영웅 심리, 열등감, 원한, 복수심, 피해의식, 당일 부부 싸움으로 인한 의기소침 등등 갖가지 개인의 심리 상태를 그 행위의 동인(動因, drive)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운동에서 원인과 결과는 순전히 기계적으로 잇달아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개입하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는, 동인에서 기계적으로 행위가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 동인과 행위 사이에는 그 행위자의 판단, 의지, 결단과 같은 의식작용이 반드시 개입한다. 이러한 의식작용은 행위를 추동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가 일정한 목표점에 이르도록 진행 방향을 미리 정한다.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에는 행위가 작동하기 전에 예기하는 미래의 결과가 이미 장치되어 있다. 이러한 것을 행위의 의도 또는 목적이라 한다.

“행위의 동인, 동기, 의도, 목적 등등은 행위자의 내면, 즉 그의 심리나 정신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 행위의 원인—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으므로 편의상 그렇게 사용하기기로 하자—을 그 행위자의 외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첫째로 역사적 접근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이 행위에 선행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관계에서 해명하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큰 사건이 앞서 일어났다. 그 행위자의 판단으로 이 전쟁은 이라크 민중을 불행에 빠뜨린 침략전쟁이며 부시가 바로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다. 이러한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거나 이러한 전쟁의 원흉을 응징하는 뜻으로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이라크 전쟁은 이 행위가 일어난 상황이며 폭로나 응징은 이 행위의 목적 또는 의도이다. 둘째로 종교적 접근 방법이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한다. 이러한 종교전쟁의 원흉인 부시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은 알라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행동을 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접근 방법이 있다. 또 이 행위의 의미를 평가하는 데도 이라크 민중의 분노를 대변한 애국적 행위에서부터 국빈에게 외교적 결례를 행한 파렴치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음 5: “청개구리 가족의 삶의 환경은 어떠했는가? 그들의 살림살이 형편은 어떠했는가? 가족 사이의 관계는? 이웃 개구리들과의 교우 관계는?”
답    : “자녀의 배필을 결정하는 경우에 ‘착한 사위/며느리 노릇을 하겠습니다’라는 후보 자의 말 한 마디에만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는 부모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됨됨이는 어떤 말 한 마디에 죄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총체적인 삶에 비추어 볼 때에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청개구리 가족은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살다가 없어졌다고 가정하자. 그들이 남겨 놓은 것은 부모 세대로부터 손자 세대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기간에 그들이 쓴 몇 편의 글들을 남겨 놓고 떠나갔다고 하자. 우리가 이 청개구리 가족이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는 그들의 글들이다.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그들에 관해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게 되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눈감고 지나쳐버린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너무나 많이 알지마는 그들의 먹이가 어느 정도로 결핍했는지 또는 이웃 마을의 황소개구리의 횡포 때문에 날마다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모른다. 이러한 사정은 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남겨 놓은 신약성서의 문서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문서들 중에서도 특히 복음서들과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이단 사상으로 배격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서에서 신학적 내용과 교훈적 사상을 끌어내는 작업을 신학적 해석이라 부르기도 하고 관념론적 해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개구리 가족이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총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일상의 삶을 영위한 구체적인 삶의 정황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그 자리에 본토박이로 살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주자로서 나그네 신세로 살았는지, 그들이 사는 지역은 도시 빈민촌인지 농촌 지역인지, 지역 터줏대감과 황소개구리에게 얼마나 많은 양의 공세를 바쳐야 했는지, 종교적인 문제로 이웃집과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청개구리 엄마는 과부인지, 미혼모인지, 무직자인지, 피고용자인지, 자영업자인지, 청개구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청개구리 자녀들 중에서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을 받은 자가 있는지, 전체적으로 그 청개구리 가족은 개구리 사회 전체에서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그들은 빚 없이 또는 과중한 빚을 떠안고 살아가야 했는지 등등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청개구리 가족의 삶과 관련된 이러한 모든 측면을 총체적으로 일컬어서 사회적 정황이라 한다. 개개인은 고립된 존재로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제도, 기구, 윤리, 가치관 등등의 관계망 속에 얽혀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사회의 이러한 관계망은 역사적 사건과는 달리 그 성격이 정태적(靜態的, static)이다. ‘정태적’이라 함은 불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틀거지인 제도, 기관, 계급, 생산양식, 가치관 등등은 장구하게 동일한 양식으로 동일한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 얽혀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이나 이 관계망 속에 얽혀 살아가는 존재의 사회적 정황을 관찰하는 방법은 사건을 관찰하는 방법과 다를 수밖에 없다. 사건은 시간의 선 위에서 진행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의 전체 과정을 포착하는 데는 무비 카메라가 사용된다. 이러한 관찰 방법을 통시적 방법이라 했다. 그러나 사회의 제도나 기구 따위는 정태적인 것이고 사회 구성원이 이러한 제도를 매개로 해서 맺은 사회적 관계는 정적(靜的)인 상태이다. 정적인 상태라 함은 운동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동일한 상태가 지속된다는 뜻이다. 정적인 상태를 포착하는 데는 무비 카메라가 필요 없고 정지 사진을 찍는 카메라로 충분하다. 이러한 관찰 방법을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방법이라 한다. 공시적 방법은 정지된 동일한 시점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얽혀 있는 모든 관계의 실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사회의 현상이나 인간 삶의 사회적 여러 차원을 서술하는 데 적절하다.”


2. 대상과 방법론 문제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연구 대상은 1세기의 원시그리스도교의 사회이다. 연구의 어려움은 그리스도교 사회라는 것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 세계에 이전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70년 유대 독립전쟁 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70년 이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사회적 성격이 확실하게 다르다. 그리스도교 사회를 탐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사회의 사회적 차원의 삶의 현실을 구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삶의 현실이라는 것은 공시적 관찰 방법으로 특정한 시점에서 파악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회를 지역별로 분류하여 취급한다 하더라도 이 현실이 그 사회의 100년에 걸친 전 기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연구의 목표를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 서술(social description)이다. 이것은 사회적 현실을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사회상(社會相)이다. 그런데 사회학이 사회 현상을 서술하는 경우에는 전형적인 것, 일반적인 것, 동일성이 있는 것을 채택하지 특수한 현상은 배제한다. 빈약한 자료를 이용해서 이렇게 구성한 사회상이 어느 곳, 어느 시점의 특수한 사회 현상인지 전형적인 현상인지 판별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둘째는 그 사회에 대하여 총체적인 성격 규정을 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갱신운동 단체, 사회통합 세력이니 대안사회니 하는 식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사회상(社會像)을 구축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

셋째는 사회사(社會史)를 기술하는 것이다. 사회사(Sozialgeschichte, social history)는 학문분과로서는 역사학적 사회과학(Historische Sozialwissenschaft)이다. 그것은 일반적 역사과학의 한 특수한 관찰 방법이다. 여기서 ‘사회’(Sozial)라는 구성어는 관찰 방법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관찰 대상을 가리킨다. 즉 여러 집단과 계층과 계급에 따른 사회 구조의 발전을 서술하고 이러한 각 집단의 크기, 처지, 의미를 다루며 나아가서 각 구성 요소들 사이에 상호작용과 사회적 과정의 역사를 구명한다. 그러니까 ‘역사’(-geschichte)라는 구성어는 관찰 방법을 가리키는 동시에 관찰 대상을 한정한다. 즉 그것은 과거의 사회가 연구 대상임을 뜻하는 동시에 장기간에 걸친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역사학적 관찰 방법이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가 연구 대상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적 개념이나 분석 방법을 당연히 사용한다. 사회사라는 말은 이 학문의 연구 결과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상의 세 가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론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사회적’(social)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방법이다. 이것은 ‘사회적 서술’(social description)이라는 표현 속에 나타나 있다. 사회적 서술은 사회의 여러 문제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이용하여 그 사회의 모습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립한 결과물은 사회상(社會相)이다. 여기에는 엄격한 사회과학적인 판단 기준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구성된 사회상이 특수한 현상인지 전형적인 현상인지 판별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둘째는 ‘사회학적’(sociological) 또는 ‘사회과학적’(social-scientific) 방법이다. 여기서 ‘사회학적’이라는 표현은 사회학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을 대표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사회학을 위시해서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인구학 등등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모든 사회과학적 학문분야를 함께 뭉뚱그려 지칭하는 정확한 표현은 ‘사회과학적’이라는 표현이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사회학적 또는 사회과학적 방법은 사회의 모습을 구명하는 데 무엇보다도 사회학의 이론과 분류 체계를 이용한다. 사회학에는 여러 유형의 사회학이 있다. 기능주의 사회학이 있는가 하면 갈등론적 사회학이 있다. 기능주의 사회학 이론을 채택하느냐 갈등론적 사회학 이론을 채택하느냐에 따라서 연구 결과는 정반대로 갈라진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구축되는 전체적인 사회의 모습은 사회상(社會像)이다.

셋째는 ‘사회사적’ 방법이다. 이 방법의 특이성은 역사학적 관찰 방법을 포용한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이 방법은 사회적 사실을 서술하는 점에서는 첫째 방법론을 수용하며 사회학적 분류 도식을 응용한다는 점에서는 둘째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서 형성한 결과물은 일정 기간에 걸친 그리스도교 사회의 역사 즉 사회사이다.


3. ‘거지 왕자’의 신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거룩한 책으로 받아들인다. 사회학을 위시한 사회과학들은 순전히 세속적인 인간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거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연구에 사회과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원수와 결혼한다”는 어느 아프리카 추장의 말이 뜻하듯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전혀 불필요한 일로 여긴다. 하나님의 계시는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세속적 학문을 이용하여 계시를 밝히려는 노력은 배격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전체 그리스도교계를 지배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는 개인의 신앙과 개인 영혼 구원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사회 문제는 전적으로 외면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에서 사회복음 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반짝 강조하다가 곧 신정통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의 위세에 짓눌려 사라져버렸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 남미의 해방신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만 해방신학은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부터이다. 이 이후로 특히 미국 신학계에서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물이 다양하게 산출되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새로운 연구의 물결을 처음으로 일으킨 한 사람만을 언급하겠다. 그는 독일 신학자 타이센(G. Theissen)이다. 그는 1974년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학』이라는 저서를 내놓았다. 이 저서가 연구사적으로 볼 때에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를 촉발시킨 공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저서는 공로 못지않게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큰 한 가지 단점만 지적한다면 기능주의 사회학 이론이 여기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론 때문에 연구 결과 전체가 정반대로 왜곡되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 연구에 종사하면서 많은 귀중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지마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연구는 여전히 서자의 신세에 머물러 있다고 할 것이다.


4. 성서 연구냐 성서 해석이냐?


성서 연구와 성서 해석은 같은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성서 해석은 성서의 말씀, 즉 성서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성서 연구는 성서와 관련된 사항들, 예를 들어 성서의 생성, 성서의 세계, 성서 시대의 역사, 선교의 역사, 사도들의 활동 등등의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 연구는 성서가 전하고자 하는 계시의 내용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해석을 위한 예비 작업이나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학적 방법이나 사회사적 방법으로 올바로 재구성한 성서에 나타나 있는 여러 형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그 공동체의 삶과 관련해서 전해진 성서 본문의 의미가 더욱 생동감 있는 말씀으로 들려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서 연구 자체가 성서 본래의 궁극적 목표, 즉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듣는 것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 본래적 목표는 올바른 성서 해석을 통해서 이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학적 성서 해석이나 사회사적 성서 해석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적 방법이나 사회사적 방법이라는 것은 성서의 본래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동원된 유용한 보조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성서를 읽을 때에 전통적으로 촛불을 사용해서 읽던 것을 훨씬 더 밝은 전등이라는 조명등을 사용하여 읽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성서 읽기의 방법을 비교한다면 다른 점은 조명등이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조명도가 높아지면 읽기가 더 편리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성서 본문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대상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조명이 밝아졌다 하더라도 독자가 찾으려고 목표하는 것 이외의 것이 그의 눈에 띌 수 없다. 전통적인 성서(聖書觀)은 성서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데 이 계시의 내용은 신학적 담론, 즉 신학 사상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은 이 신학 사상을 알기 쉬운 말로 풀이하는 작업이다. 이 경우에 성서 해석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 사상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 놓는 작업이 되는 셈인데 성서 해석의 과제는 한 신학 사상을 다른 하나의 신학 사상으로 풀이해 내는 작업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성서 해석을 신학적 성서 해석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신학적 성서 해석은 오로지 사상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관념적 성서 해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석의 최종 목표인 계시의 내용이 신학 사상이라고 하는 전통적 신학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밝은 조명등으로 바꾸더라도 해석의 결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분하고 인간의 삶을 영적인 삶의 영역과 물질적인 삶의 영역으로 이분하거나 현세와 내세로 이분하여 어느 한 쪽을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 처분하거나 전적으로 무시하는 사고방식은 그리스의 이원론 철학 사상에서 유입된 그릇된 사상이다. 성서가 인간의 구원, 해방, 자유를 말하는 경우에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떠나서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 반쪽 떼어낸 영혼이나 마음이라는 가상 존재가 누리는 어떤 것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계시 사건이다. 그러므로 계시 사건은 육신과 관련해서 해석해야지 육신과 분리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계시 사건의 근본 원리에 위배된다. 계시의 내용을 순전히 신학적 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육신이 된 말씀을 도루 말씀으로 뒤바꾸어 놓는 반역 행위가 아니겠는가?

1970년 대 말에 당시의 서독과 동독, 프랑스, 네덜란드 출신의 몇몇 성서학자들이 사회사적 성서 해석에 종사하다가 전통적 성서 해석을 배격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성서 해석을 제창하려는 취지로 “비관념적 성서 해석” 또는 “물질적 성서 해석”(materialistische Bibelauslegung)이라는 이름을 붙여 해석 모임을 결성했다. 우리나라에는 “실사적(實事的) 성서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이 성서해석 방법은 아직까지는 ‘거지 왕자’의 신세이지마는 성서해석의 본래적 왕자, 참된 적자(嫡子)로 판명될 날이 곧 도래하기를 고대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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