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대한 담론: 정의의 문제이자 실천신학의 주제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최근 독일에 한 달 정도 머문 적이 있다.

    유럽 연합 국가내에서 최고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국가로서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고 불편한 점도 있었다. 동시에, 환경문제 극복을 위한 재생에너지 개발, 재활용 부분면에서 독일 정부와 독일에 사는 사람들이 해내는 멋진 실천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부러웠던 점을 이 지면을 통해 나누고 싶다. 그건 바로 모든 도로에 설치된 자전거전용 도로이다. 

    한달 간의 체류동안 네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보았다.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나찌에 저항해서 개신교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선언을 작성하고 발표한 바르멘이라는 도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항이 작성되고 발표된 비텐베르그, 이 두 도시는 작은 도시에 속한다. 통일독일의 수도이자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를린과 동독 시절, 비폭력 평화기도회를 통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도출했던 기독교교회들이 속한 라이프찌히는 큰 도시에 속한다.

    이 네 개의 도시 어느 곳을 가봐도 모든 도로에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안전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자전거만 건너는 신호등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자전거를 들고 전기차인 trams를 타고, 기차를 탄다. 기차역엔 자전거 승객을 위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기차안엔 자전거를 둘 수 있는 기차객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 모든 제반시설은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적극 독려하고 있다. 이 제반시설을 설치하고 그 설치를 위해 투여된 과학 기술과 재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삶의 방식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있는 독일 사람들의 성숙한 의식과 의지에 감동을 받았다.

    전기차와, 기차, 자전거가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기에 가솔린과 디젤로 인해 생성된 매연을 품어대는 차들이 일반 도시 거리에 별로 없다. 그런 차들은 아마도 고속도로나 아우토반을 가야 만나게 될 것이다. 고속도로에 즐비한 그런 차들이 일반 거리엔 많지 않기에 그 차들이 품어대는 엔진과 머플러 소음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이른바 교통체증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 체증으로 인해 짜증내는 운전자들의 빵빵거리는 경적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았다. 그렇게 깨끗한 공기와 자동차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된 거리에서 독일 사람들의 일상적 하루의 생활들을 보고 감상하는 그 시간이 참 소중했고 아름다웠다.

    자전거 전용도로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독일에서 내가 본 자전거 전용 도로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사는 카나다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스케일의 도로였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최소 자동차도로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자동차 1차선인 곳에도 자전거 전용도로는 마련되어 있었다. 전 세계 도시를 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장담하건대 대다수 도시에 제대로 된 자전거전용도로는 없다고 본다. 만약 있다하더라도 차가 다니는 도로차선에 비하면 아주 작게 할당된 일종의 깍두기, 구색만 갖추어둔 도로일 것이다. 약 1차선, 2차선 도로일 경우, 자전거전용도로를 기대하긴 어렵다. 꽤나 잘 만들어진 4차선 도로라 하더라도 한차선 정도만 할애된 자전거도로가 대부분이다. 4차선 이상되는 도로의 경우는 차들이 너무 빨리 달리고, 그렇게 속도를 내대는 차옆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마치 불나방이 불꽃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위험하다. 자전거를 앞질러 가는 차들이 뿜어대는 매연을 마시면서 자전거를 타는 일 역시 불쾌하고 건강에 해롭다. 그렇기 때문에 차를 안 쓰고, 자전거를 타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쉽게 할 수 없다. 그 의지를 현실화하려면 그 의지를 뒷받침해주는 특, 즉 공간적 제반시설과 제도적 의지가 필요하다.

    여기서 난 인간의 삶이, 아니 인간적인 삶, 특히 약자와 평범한 자들의 삶을 보호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길과, 인간이 만들어낸 공적 제반시설이 주는 중요성간 불가분관계를 보고자 한다.

    퀴어페미니스트이자 문화이론가인 쥬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는 정치적 행위, 즉, 시위, 공적 저항의 모임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모인 자들의 의지, 전술, 전략, 즉, 시위의 목적과 내용만이 아니라 그 모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간, 즉, 제반시설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이 중요성을 적나게하게 드러내고자 제반시설의 약화, 제반시설의 부재에 대한 예를 드는데,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모여 시위를 하는 이유를 제반시설의 부재로 치자. 아니 대부분 우리가 시위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제반시설이 부재하거나, 있더라도 계속 악화되고, 그 상태를 고치고자 하는 정부, 책임자들의 방기가 계속되어가는 점을 지적하고, 그의 개선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위를 하는 거다. 즉, 노숙자, 피난민들을 위한 일시적 대기소, 또는 빈곤층들이 사는 게토화된 주변부 도시들, 이들의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반시설들의 망가짐과 부재가 이런 예들에 속한다. 실제로 이는 책에 등장하는 예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매일의 현실이다. 깨끗한 식수용 청결용 물의 부재, 그런 물의 정화하는 상수도 제반시설의 약화, 또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거나, 마련된 화장실 정수관이 막혀서 실제로 쓸 수 없는 상태, 또 비와 눈,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숙소의 부재와, 숙소의 열악한 상황이다.[각주:1]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정치적 시위를 하는 데 있어 그 시위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는 단순히 시위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그 거리 자체의 실재가 제반시설이라는 그 공간의 담론이 주는 공공선 (public goods)이라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다시말해, 제반시설의 개선과 확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할 때, 그 시위를 가능케하는 그 공간을 지켜내는 일 자체가 정치적 행위이자 시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여기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 물적 조건의 중요성을 각인하는 것이 바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하는 근본적 이유와 직결된다는 그 불가분의 관계를 주장한다. 쉽게 말해, 시위를 할 수 있는 거리가 없다면, 아니 그 거리, 또는 광장이 시위를 하기 어려운 열악한 상태라면, 그 거리와 광장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일이 시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와 직결되는 것이고, 동시에, 구체적인 시위와 저항의 목적과도 연관된다는 것이다. [각주:2]

    물적 토대에 관심을 두는 이론은 막시즘, 그리고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포스트콜로리얼 탈식민주의에서 중요시하는 인식론이다. 즉, 선형적 시간 (linear time)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위계적 식민주의를 가능케한 인식론이었다면, 이를 반박하면서 대안적 인식론으로서 공간적 다수성 (spatial plurality)이 제안된다. 즉, 과거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다른 그룹들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가해자와 피해자, 이주민과 정착민)이 공존하며 살아가기위해 창조되어야 할 그 다름의 공간, (plural differences), 공간적 다수성이 확보되는 담론으로 강조된다.[각주:3] 

   이런 공간의 중요성을 논하는 담론은 동시에 신학적 화두이자 실천신학에서 특별히 관심하는 주제이다. 실천신학은 매일의 삶에 관심한다. 그 매일의 삶이 그냥 다람쥐 쳇바퀴돌아가듯이 관성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매일의 삶이 풍부해지도록 의미있도록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한다. 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각주:4]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각주:5]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 자전거 전용도로 제반시설에 대한 담론은 그런 점에서 실천신학의 주제이자 약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의의 문제이다.

    세계 어느 곳을 가서, 그 곳이 좋다고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그 한 기준은 바로 그 곳이 얼마나 공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가로 가늠된다. 즉, 가진 자, 특권층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평범한 곳, 더 나아가, 약자와 소수자가 안전하고 즐겁게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면, 그 곳이 살기 좋은 곳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즉, 공간이 말한다 (space speaks). 특히, 이런 공적 공간이 사유화, 신자유주의, 그리고 증폭된 경제적 불균등, 독재에 버금가는 전제주의체제의 증가로 피해, 아니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공간에 대한 담론이 신학의 주제로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 점에서 자전거 전용도로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

    한국처럼 석유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남북이 분단되어 그 나마 작은 땅덩이가 절반으로 잘린 채 북적거리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황사와 매연 등으로 최악의 공기를 자랑하는 한국 대도시에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일은 참 어리석다. 그런데도 한국만큼 자동차를 선호하는 나라도 없다. 왜 그럴까? 자동차 산업의 강국이어서?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역할관계로 인해 (우리가 만들었으니 소비해줘야지)? 부의 상징? 허례허식의 폐해? 불편함을 싫어해서?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내게, 복잡한 대도시에서 운전을 해 본 적이 없는 대개, 자동차를 소유하고 매일 교통대란을 겪는 대도시안에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 분들의 대답을 듣고 싶다. 

    한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지만 대도시에 설치된 공공지하철 제반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몰게 하기 위해 여전히 산을 뚫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개선하는데 드는 비용이 자동차를 쓰지 않도록 독려하는 제반시설의 투자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고 대중교통수단의 질을 높이는 논의를 공간에 대한 담론의 한 시도로, 정의의 문제로 실천신학적 주제토론으로 삼으면 어떨까? 


ⓒ 웹진 <제3시대>



  1. Judith Butler, Notes toward a Performance Theology of Assembl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본문으로]
  2. Judith Butler, “Rethinking Vulnerability and Resistance,” in Vulnerability in Resistance, edited by Judith Butler, Zeynep Gambetti, and Letical Sabs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6), 13. [본문으로]
  3. Bill Ashcroft, Gareth Griffiths, and Helen Tiffin, The Empire Writes Back: Theory and Practice in Post-colonial Literature (London: Routledge, 1989), 36—37. [본문으로]
  4. Dorothy C. Bass, ed. Practicing Our Faith: A Way of Life for a Searching People (San Francisco: Jossey-Bass, 1997), X. [본문으로]
  5. 위에서 언급한 Bass, Practicing Our Faith는 몸 존중, 환대, 안식일, 증거, 분별, 공동체 만들기, 용서, 치유, 잘 죽기, 그리고 삶을 노래하기를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반면, 다음 책에선 고통, 치유,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 축복을 신앙을 형성시키고 삶의 도를 알려주는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Bonnie J. Miller-McLemore, The Wiley-Blackwell Companion to Practical Theology (Chichester: Wiley-Blackwell, 2012), 23—8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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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개혁하는” (Semper Reformanda): 2017년 세계개혁교회연합 총회를 앞두고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매 해가 의미있고, 매 해마다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난다. 매 해에 벌어지는 일들에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다. 의미부여, 의미 만들기, 의미해석하기, 이 작업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일이자 또한 신학자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2017년에 대한 신학적 단상을 하고자 한다.

    정치적으로 2017년은 의미있는 해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이자, 박근혜를 탄핵시킨 해이자,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이다.

    종교적으로 2017년 역시 의미있는 해이다. 2017년은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이에 맞추어 세계개혁교회연합 (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 전 세계개혁교회연맹, WCRC) 총회가 6월말 독일에서 열린다.

    이번 총회주제는 “Living God, Renew and Transform Us!” 이다. 주제가 명백하게 보여주듯이, 이번 총회는 개혁을 넘어 우리의 신앙과 삶,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본 연합 (WCRC)는 8천만명이 소속된 기독교인들을 대변하는 개혁교회 최대 에큐메니칼 조직이다. 이 조직을 하나로 묶는 신학적 끈은 첫째, “언제나 개혁하는” 개혁교회 신앙의 끈, 둘째, 코이노니아 정신을 모태로 분리가 아니라 연합을 향한 소망의 끈, 그리고, 정의추구가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고백의 끈이다. 이 세가지 끈은 다양한 신앙고백 (1982년 Belhar, 아파타이드 반대) 과 신학 선언 (2004년 Accra, 경제부정의과 제국 반대) 등을 통해 교회를 묶어왔고 엮어왔다.

    2017년 총회 준비 자료 (Prayerful Preparation)를 보면 “언제나 필요한 개혁”(Semper Reformanda) 개혁교회 모토를 신학적으로 조명한다.[각주:1]

    자료집 서문에서 WCRC 총무인 크리스 퍼거슨은 21세기 연합이 품고 가야할 전지구적 사회적 문제로 경제부정의, 즉,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빈부격차와 자본의 횡포가 날로 심각해지는 현실, 또 생태위기, 환경문제, 기상이변과 재해, 오염등으로 약자, 약한 나라, 인간이 아닌 생태계 생명들이 파괴되어가는 현실, 그리고 이주의 문제를 들었다. (다음 기고에 경제부정의, 생태문제, 그리고 이주의 문제를 연이어 다룰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세가지 이슈가 WCRC 를 엮고있는 세가지 끈, 신앙, 연합, 그리고 정의와 어떻게 긴밀하게 연관되는지 설명한다.

    WCRC 연합 의장인 제리 필레는 종교적으로, 성서문자근본주의에 입각한 차별의 문제를 들면서, 개혁교회 신학인 Sola Scriptura의미는 성서가 기득권자,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해 선별적 해석이 되는 것으로 부터 보호할 책임이 개혁교회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Sola Gratia로 연결되는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신학교리에 대한 해석을 한다. 

    성서문자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양한 차별과(성차별, 남성성직자주의, 성소수자, 인종차별) 다양한 폭력 (성폭력, 전쟁폭력, 환경파괴)을 극복하는 신학적 응답과 실천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는 은총의 실천이 신앙의 잣대가 되어야함을 주장한다. 세상의 이데올로기, 선입견, 편견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일만이 궁극적임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의 은혜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 삶, 그리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궁극적 힘이다. 아니, 예수님이 보여주신 은혜를 따르는 일이 선입견, 편견, 차별와 억압을 가능케하는 그 폭력을 끊어내는 저항과 변화의 힘이라는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 페니미스트 신약학자이자 이번 연합 총회 신학교육과정 Global Institute of Theology 책임담당자이자 학장인 무사 두베는 자료집을 통해 로마서 12장 말씀을 해석하면서 사도바울의 철저한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이 본 말씀에 담겨져 있다고 주장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12:1) 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변화되었기에, 부패한 제국이 우리를 억압하지만, 그 더러운 손길이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자유의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다음 구절 역시, 제국에 굴복하지 말고, 아니, 제국과 타협하지 말고 (confirm),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변화(transform)되라는 것이라고 본문에 대한 의미부여를 한다.

    본 자료집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또 한가지 문제는 바로 성차별의 문제이다. WCRC 소속 교회의 연합을 막고 있는 장벽으로 여성안수문제를 지적한다. 이를 위해 나도 자료집 저자로 발탁이 되어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하여, 본 총회를 통해 아직까지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주지 않는 WCRC 소속교단으로 하여금, 앞으로 7년 안에, 즉, 다음 총회까지 안수문제를신앙의 고백으로 실천할 것을 의결하는 안건이 올라와 있다. 동시에 성차별과 가부장제에 입각한 남성성직자주의의 문제는 성소수자에 대한 안수의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걸 지적한다. 그러므로, 21세기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WCRC는 성소수자, 성정체성, 그리고 성 다양성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성찰과 실천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본 총회가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열린다는 그 장소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해석한다. 독일 신학자 울프 크뢰트케 (Krötke)는 자료집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그 해, 동독국가 종말의 시작을 알렸던 그 해부터 벌어진 월요일 비폭력시위 (Monday Demonstrations), 평화를 향한 기도회 (prayer for peace)가 라이프찌히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한다. 라이프찌히는 냉전시기엔 동독에 속한 도시였다. 기독교인들에게 동독에 속해서 종교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회주의체제안에 속한 교회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타협과 절충, 심지어 굴복이었다. 그러나 신앙의 탄압과 교회에 대한 정부의 제제가 강해질수록 동독기독교인들의 저항과 인내의 힘은 줄지 않고 늘었다. 1980년대가 되면서 평화, 비폭력,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퍼져갔다. 그 와중 1989년 10월 9일 동독 국가 40주년 기념식에서 벌어진 시위는 120만명을 전대미문의 참여로 이어졌다. 같은해 벌어진 중국 천안문 사태를 주시하면서, 사회주의, 전제주의체제가 불러오는 폭력, 인권과 종교의 탄압에 대해 라이프찌히에 속한 교회들은 침묵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개혁하는” 개혁교회 정체성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정확히 1달 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500주년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의미는 과거에 대한 향수도 아니요, 기독교 문화 중심주의로 돌아가고자하는 절박함도 아니다. “언제나 개혁하는” 그 신앙, 파격적 (radical)이고 신앙적 (faithful)인 그 개혁교회 정체성을 되새기면서 현재 8천만 개혁교회가 교회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들과 교회가 소속한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예언자적으로 목회적으로 다루자는 의미이다. 


    2017년 세계개혁교회연합 총회가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역사적인 획을 긋는 총회가 되길 기도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켜주소서! 

    “Living God, Renew and Transform Us!”


ⓒ 웹진 <제3시대>



  1. Prayerful Preparation: Exploring the 2017 General Council Them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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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속 정국, 무지에 대한 거부를 통해 헤쳐가기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진 후 약 2주 동안 한국에 대한 뉴스가 카나다 뉴스에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전해지고 있다. 물론 남한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미사일에 관한 뉴스까지 포함한다. 이는 아주 드문 일이다. 지난 주일엔 교회 예배 중보 기도 때, 한 백인 교인이 소리를 내어 북한에 대한 기도를 드렸다. 남북한 정세에 관한 어려운 상황이 카나다에까지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역시 아주 드문 일이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나에게 남한에 대해 북한에 대해 물어본다. “어떻게 될 거 같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내 모국이 걱정이 되어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표현으로 닥쳐오는 이 많은 질문들을 받으며, 난… “글쎄… 모르겠어.”라고 답을 할 수 밖에 없음에 답답하다. 모르기에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무지하기에 위험하다. 이를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오늘은 이에 대해 다루어 보자.

    미디어에 드러나는 북한의 모습은 너무 제한적이고 왜곡되어 있어서 북한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런 내 생각엔 근거가 있다. 올 4월에 남한과 북한의 공식 외교국인 카나다에서 카나다 연합교회 주최로 남북한 기독교 여성 평화 모임이 개최될 예정이었다. 한국 기독교 협의회 여성 위원회가 요청을 했고, 파트너 교회인 카나다연합교회는 이를 긍정적으로 응답함으로써 1년 전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 중인 일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복잡하게 엉켜있는 분단의 실타래를 종교의 관점에서, 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다는 확신에 대한 실천적 모습이었다. 또한 정전을 포함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수십년동안 노력을 해 온 한국 기독교와 전세계 에큐메니칼 진영의 지난한 여정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겠다는 결단의 모습이었다. 이 모임에 전세계 다양한 교단과 단체에서도 참가하려고 대표단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정적인 부담을 안고 이 모임을 치루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연합교회가 “합시다!”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 거의 40년, 은퇴할 때 까지 평생을 사셨던 매리온 커런트 (구애련) 선교사님 덕분이다. 당신이 소천하기 전 유산의 일부를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증하셨다. 그런 보이지 않는 분들의 힘으로 준비된 일이었다. 그런데, 북한기독교 연맹의 동의를 얻고 여성들을 보낸다는 약속을 받고 시작한 일인데, 올 2월 말 북한에서 갑자기 불참 통보를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안타깝게도 모임은 취소되었다.  

    박근혜 탄핵 대법원 만장일치 가결을 축하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박근혜 지지자들의 탄핵 결정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집회도 있었다. 5월 9일 대선을 앞두고 남한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 지 가늠하기 어렵다. 매년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표현하기 위해 3월이 되면 북한이 늘 해 온 일이지만, 올 해3월 북한 미사일 발사는 심상치 않다. 북한의 정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부임한지 고작 2달이 지났는데, 반이민 행정명령과 오바마 도청설, 오바마 케어 무산등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책에 대한 혼란과 저항으로 미국의 정세 역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러한 안개 속 정국을 거닐며 기독교인들은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사순절의 의미는 다양하다. 교단마다 전통마다 또 문화와 신학적 성향에 따라 그 의미는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사순절이 기독교 절기 중 가장 진지한 절기, 즉,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삶에 대해,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통적이다. 그 어느 절기보다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머리속으로 하는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으로 매일의 행위로 훈련하게 하고 결단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순절이 지닌 힘은 대단하다. 소셜 미디어 중독자로 살던 많은 기독교들이 40일 노페이스북을 선언하고, 커피와 초콜렛을 안먹으면 두통으로 하루도 못 버티는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이 음식에 대한 사순절 금식을 선언하고 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이 고기냄새만 맡아도 사죽을 못쓰는 고등학교 남학생 기독교청소년들이 사순절 기간동안 육류 안먹기를 선언했다. 이렇게 내 주위에 내가 아는 가족, 친구들이 이런 육적이고 영적인 거부의 실천을 하고 있다. 이런 선택은 단지 유행을 좇는 즉흥적 반응이 아니다. 이들의 결단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윤리적 이유가 함께 동반된다. 소비주의에 찌들은 자본주의적 삶, 특권층 인간의 소비로 희생당하는 소외된 사람들과 동물, 그리고 생태계의 위기, 미디어에 대한 촉각적 반응에 대해 진득한 고려를 하겠다는 일종의 체화된 기도이자 거부이다.

    어떤 면에서 사순절 의미의 핵심은 거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권력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지만) 그 권력이 저지른 폭력 자체를 거부하신 것이다. 사순절은 그 예수님의 행위를 예수님의 삶 아니 죽음, 죽임당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로 하는 기억이 아니라 몸으로 우리의 매일 매일 삶의 실천으로 동참하는 기억이자 그 기억을 체화하는 거부다.

    내가 좋아하는 탈식민주의 문화이론가이자 퀴어 페미니스트 학자가 있다. 사라 아미드이다. 영국계 엄마와 파키스탄 출신 아빠를 두고 영국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호주로 이민을 갔고, 현재 영국에 살고 있다. 거의 20년동안 8권의 책을 저술하면서, 아미드는 탈식민주의, 이주, 인종, 성, 성정체성, 혼종성, 타자, 문화, 그리고 다름, 이런 굵직한 주제를 탁월한 글솜씨로 다루었다. 가장 최근 출간된 책은 Living a Feminist Life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각주:1]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 그의 이론은 마치 내 살에 닻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삶과 현실에 동떨어진 메마른 이론이 아니라 마치 내 살갗을 뚫고 파고드는 것처럼 날카롭고 신랄하고 살아있다. 그렇게 아미드는 우리 사회, 삶이 지니고 있는 억압, 차별, 불평등, 지배의 문제에 정곡을 찌른다. 나의 삶이 백인 우월사회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가서, 이민자이고, 여성이어서 내게 그렇게 가까이 다가올 수도 있다. 아미드 역시, 소수인종으로 호주/영국에서 살아가고, 성소수자이고, 이민자이고, 여성이어서, 그 경험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에 그의 언어의 선택과 표현이 그렇게 적나라하고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칼보다 펜이 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펜의 힘을 땀에 절여진 개념 (sweaty concepts)이라고 표현한다.[각주:2]

    페미니즘이 책의 핵심화두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 앞서 열거한 이 모든 굵직한 주제가 마치 한 사람의 몸 곳곳에 필요한 피가 동맥과 정맥을 통해 골고루 전해지듯이 녹아들어 있다. 마치 오장육부가 연결되어 있듯이 아미드는 이 주제들이 어떻게 연결 (intersectionality)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의 결론이 특별히 인상적인데, 이 결론을 보면서 난 “거부”의 힘을 보았다.

    아미드는 페미니스트들이 ‘killjoy’ 로 낙인을 찍히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즉, 잔치상에 찬물을 끼얹는 자, 따끈한 있는 분위기를 싸늘케 만든 썰렁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미드는 기죽지 말고 그 일, 그 일이 기쁨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계속하자고 독려한다. 아미드가 제안하는 구체적인 거부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자로서 글을 쓸 때, 이미 기득권자 그룹에 속한 저자들을 인용하는 것을 거부하자고 제안한다. 대신, 소수자, 억압받는 자, 주변부에 속한 학자들 (소수인종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을 인용하자고 주장한다. 아미드는 실제로 이 책을 통해 서구 백인 이성애자 남성 학자들을 인용하지 않아도 훌륭한 학자들, 이론가들, 실천가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주변부 소수학자들을 인용하면서 얼마든지 아니 더 멋지고 이론적이고 비판적이고 생생한 글을 써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자인 내게 가장 도전을 주는 거부제안이다. 실제로 강의를 준비할 때, 책과 저널 아티클을 선정할 때, 교수로서 꼭 해야하는 일이다. 백인 남성,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학자들의 글만을 소개하지 않고, 소수 인종, 여성, 성소수자들, 유럽, 미국을 벗어나 3세계 학자들의 글을 소개하는 형평성을 유지하는 일은 선생으로서 기본 원칙이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로서 저명한 저널에 원고를 기고하고, 저명한 출판사와 계약을 해서 책을 쓸 때, 아미드처럼 기득권 학자들을 거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심지어 치루어야 댓가가 있기에 고통스럽다. 그래서 이 사순절 아미드가 제안하는 거부는 학자에게 교수들에게 글을 쓰는 지식인들에게 특별히 더 의미심장하다.

    두번째,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불편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그 상대방을 대상으로하는 농담 (대부분 여성비하, 성소수자, 인종차별적 발언)을 들을 때 다수에 휩쓸려 웃는 일을 거부하라고 제안한다. 따뜻한 분위기에 찬물을 뿌리는 자가 되라고 한다. 세번째, 이미 지난 일이라고 세상이 말하지만, 역사가 실제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그 역사가 종결되었다는 주장에 거부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정신대 여성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했으니 그 역사는 끝났다고 일본정권이 아무리 말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거부하는 정신대 할머니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 거부의 메아리를 함께 울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득권 세력이 정해놓은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을 거부하자고 한다. 한 예로 “여자가 독신으로 살면 힘들어. 나이가 들었으니 대충 남자 만나 결혼해 그게 행복이야”라는 세상의 규범 (이성가부장결혼제), 순리라는 논리로 치장된 억압적 규제를 차별적 행복이라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그 음식이 몸에 좋다는 허황된 이유 (기득권 논리)로 먹는 것과 같다. 거꾸로 “남자가 되어가지고 울기는… 참아야지” 하는 남성억압적 논리 역시 참지 않고 우는 행위로, 마치 그 음식을 토해내는 것처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 남성에게 종용되는 논리이외에도 억압적 차별적 규제들은 정말 많다.

    아미드가 제안하는 거부의 핵심은 바로 세상이 오리무중이고 안개속 정국이지만, 세상을 탓하면서 무지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곧 운동이다. 지난번 원고에서 무지가 주는 폭력에 대해 말했다. 사실이 거짓으로 진리가 기만으로 둔갑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 비판적 의식의 부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세월호, 미국 선거,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 세상은 오리무중이고 안개속이다. 한국 대선이 어떻게 될 지, 북한 미사일 문제가 어떻게 될 지, 트럼프의 반이민정책, 오바마케어 정책이 어디로 갈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한가지는 있다. “무지가 권력과 야합하면 정의가 대적해야하는 최악의 적으로 둔갑한다”는 걸 말이다.[각주:3]

    남은 사순절 무지가 권력에 야합하지 않도록 무지를 거부하자. 억압과 차별을 행복의 이름으로 세상의 순리라고 치장하고 종용하는 부정의를 거부하자. 사순절을 마치면 그만두는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 꾸준히 우리를 무지하게 만드는 논리, 기득권의 힘을 향해 거부 실천을 하자. 거부가 습관이 되어 우리 몸에 배일때까지. 마치 이빨을 매일 닦듯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하는 실천이 될 때까지. 일상의 거부로부터 (예. 쓰레기만드는 물건 안사기) 큰 역사를 바꾸는 거부의 물결을 일으키자.


ⓒ 웹진 <제3시대>



  1. Sara Ahmed, Living a Feminist Lif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7). [본문으로]
  2. Ibid., 12. [본문으로]
  3. James Baldwin, No Name in the Street (New York: The Dial Press, 1972). “Ignorance, allied with power, is the most ferocious enemy justice can hav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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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고찰 II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해 11월 원고때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기를 다시한번 고찰한다고 약속을 했다.
지난해 11월 원고를 쓸 땐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한국에선 박근혜 최순실 파일사건으로 매일 매일 한국 국민들이 거리로 나오던 때였다.
지금 1월 이 글을 쓰는 이번주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주다.  특별히 선거기간동안 벌어진 성차별과 여성혐오의 문제에 저항하면서 취임식에 맞추어 1월 21일 여성들의 대대적 시위 (Women March)가 준비되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카나다에서도 여성 동시다발 연대시위가 계획 중이다. 지나 두 달간 한국은 6주에 걸친 엄청난 수백만명의 끈질긴 시위로 인해 12월 9일 국회는 박근혜의 대통령직을 탄핵하는 결의를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취임을 하지만, 트럼프가 제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해 낼지는 오리무중이다. 헌법재판소로 탄핵건이 넘어갔지만, 박근혜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을지 역시 오리무중이다. 알 수 없는 이런 정치적 흐름은 비관적 또는 냉소적 판단이라기 보다는 그만큼 변수와 어려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해준다. 우린 이러한 위기에 대해 자각하는 차원에서, “깨어있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기면서, 11월 소개했던 제니퍼 웰쉬의 역사의 회귀로 돌아가보자.[각주:1]
웰쉬는 역사의 회귀라는 큰 테제를 야만주의; 대다수의 인구의 이주; 냉전체제 그리고 불평등의 회귀라는 소테제로 나누어 어떻게 부정적, 폭력적 역사가 회귀하고 있는지 통찰한다.
웰쉬는18세기 시작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 정립된 서구자유민주주의는 3그룹의 차별을 기반으로 세워졌다고 주장하면서, 서구 자유 민주주의가 지닌 본질적 한계를 날카롭게 집어낸다. 여기서 이 그룹은, 재산이 없는 자, 여성 그리고 유색인종이다. 즉, 서구 자유민주주의는 귀족, 백인, 그리고 남성을 보호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데 기초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20세기 초까지 영국의 경우 투표권은 오직 재산 (부동산)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졌다 (귀족계급). 1918년이 되어서야 서구 유럽사회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1965년이 되어서야 흑인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이런 차별정책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입각한 제국주의 세력 (나치, 일본군국주의)을 패배시킴으로써 본 힘을 갖기 시작했다. 1960년대 유럽식민주의하에 속했던 나라들이 독립을 성취하고 탈식민주의국가로 변화되면서 민주주의는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제는 보편화되어버린 민주주의지만, 완전하지 않은 민주주의의 모습, 위기를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인 야만주의의 회귀의 예는ISIS의 등장이다. 민주주의에 도전을 주는  ISIS의 등장은 아이러니칼하게도2011년 아랍 스프링, 민주주의투쟁의 여파로 등장했다. 중동지역과 아프리카지역 이슬람 대중들은 전제독재주의를 반대하고 독재자 (예. 시리아 바샤 알아사드)들을 권력에서 끌어내는데 성공을 했지만, 그 성공의 여파는 길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 권력의 공백을 틈타ISIS가 권력을 잡았다. ISIS가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는 전쟁에 대한 정당방위논리이다. 2001년 911 테러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쉬의 논리와 비슷하다. 테러를 대항한 전쟁 (War on Terror)를 선포하면서 그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전쟁은 정당화되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 전쟁 후유증은 계속되고 있다. 아니 ISIS의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역사의 회귀와 재현을 논하면서 주목할 점이 있다. 이는 역사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는 점이다.  즉,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그 길로 돌아가고자 하는 대중들의 현재의 욕구를 역사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 새마을 운동 및 경제개발을 그리워하는 이들에 의해 이명박이 경제 대통령이 둔갑을 하고 그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것이 그 한 예가 아닐까?
3장에서 웰쉬는 피난민의 문제는 전대미문의 대다수 이주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소위 “안보주의”라는 이름으로, 타자에 대한 두려움, 기득권자들의 기득권상실에 대한 공격적 표현이 실체화되어 피난민에 대한 배타적인 반응이 더 큰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미국 트럼프의 선거 당선을 볼 필요가 있다. 미국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자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바로 백인기득권자들의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백인 정체성 상실에 대한 화풀이로 표현되었고(p. 154), 그렇게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장벽을 높이고 국수주의 안보를 강화하는 그 댓가 (cost)는 기본 인권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인종, 국적, 성, 계급을 넘어서서 누구나 누릴 권리), 자유 (자유롭게 움직이고 정착하고 살 권리)라는 기본 가치를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p. 158).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발원지에 속하는 유럽의 나라들도 제2 , 제 3의 트럼프를 정치지도자로 선출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국수주의와 인종/종족 말살주의 입장이 공공연하게 세계 곳곳에서 발현되고 있다.
민주주의 또 다른 위기인 냉전체제의 회귀의 단적인 예는 푸틴이다.  2005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냉전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연방체제의 달콤한 과거는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영화로운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런 욕망을 웰쉬는 “근육강화” 정책으로 표현한다 (p. 193). 2011년부터 악화되고 있는 현 시리아 사태 역시 러시아의 근육강화정책의 일환이다. 러시아의 인권유린, 인권침해, 언론의 통제 등 내부 상황과 동시에 주변국가 사이버 공격을 통한 정보유출의 행태는 심각하다. 이런 행태는 주권민주주의 (Sovereign Democracy) 정책의 결과이다 (p. 234). 웰쉬는 이 주권민주주의는 철저하게 국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새로운 교리라고 설명한다. 이 주권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반자유주의다. 그런 점에서 레닌-스탈린 시대의 공산주의독재의 모습과 유사해 보이지만 다르다. 국수주의 측면에서 반자유주의적이지만, 자유시장경제체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자유를 지향하고 동시에 지양하는 이런 모순의 기로를 걷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 소련연방체제와 현 러시아 체제가 같지 않은 이유중 하나는 종교의 자유이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종교는 아편이고, 그러므로 제거될 존재이다. 그러나, 현 러시아 주권민주주의하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영적 양식을 제공하는 곳으로 인정된다. 푸틴 대통령 권위 다음으로 권위를 행사하며 다양한 특혜 (조세, 법) 받고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p. 237).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경제불평등의 회귀이다. 지난주 발표된 옥스팜 보고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62명의 재산을 합하면 세계 인구의 절반 36억명이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합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편차는 매년 놀라운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각주:2] 이런 부의 편중은 1980년대 레이건 미정권과 대처 영국 수상의 시절에 등장했다.  11월 원고에서 인용했듯이, 1989년 후꾸야마학자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외쳤다. 같은 책에서 미국이라는 사회가 얼마나 평등한지, 누구든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계급없는 사회를 주장했다 (p. 256). 그러나 소위 우리는 99%라는 “Occupy Movement”가 미국 전역을 휩쓸 때, 2008년 뉴욕증시가 추락했을 때, 계급이 없기는 커녕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간격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역사는 진보한다는 낭만적이고 안일한 선형적 역사관이 팽배할 1980년대, 신자유자본주의를 견제할 공산주의가 몰락한 그 1980년 후반기부터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사회는 경제적인 정체와 퇴보를 겪고 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대부분 99% 수입은 상대적으로 줄고 있고 1% 수입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1% 그룹은 직접적인 생산노동에 동원되지 않은 그룹을 지칭하며 그 그룹이  자본주의체제하에서 누리는 특혜를 웰쉬는 지적한다 (p. 265). 무슨 직업을 가졌고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부모밑에서 어떤 자산을 상속받고 현재 소유하고 있는지가 부의 증가에 영향을 미친다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한국의 속담은 거짓이다.
웰쉬는 경제불평등은 실제로 인권유린만큼이나 민주주의에 치명적이라고 설명한다. 이자놀이로 1997년 한국경제를 흔들었고 지금도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IMF 국제금융기구조차도 경제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빈부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p. 269). 왜냐하면, 빈부격차에 기반한 불평등 경제는 경제활동기회라는 기본권을 박탈하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된다는 뜻은 개인과 공동체의 존재적 위기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단지 돈이 없다고 또는 일자리가 없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상실, 기본 존엄성의 상실로 이어지기에 그 불평등은 사회적 불안정으로 직결된다. 이 점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불평등이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경제와 정치가 만날 수 밖에 없다. 공공성은 단지 부의 재분배만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정책의 입안이요, 그 정책의 수행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다수가 혜택을 볼 수 있는 공공성, 즉, 공적 관심과 공적 이익을 지향한다.
이 점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도 민주주의 위기 극복에 한 몫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본다. 종교적 삶은 기본적으로 이기주의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서 살기보다 나누고 섬기는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약자와 소수라는 이웃에 대한 관심, 타자에 대한 개방성, 즉 근본적으로 부정의에 저항하는 예언자적 전통이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진보와 낙관을 보장하는 숭배의 대상도 완전한 제도도 아니다.  실제로 민주주의 선봉자 (나찌즘에 맞서) 윈스턴 처치힐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부형태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외 정부형태는 더 최악이기에 이를 지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서구자유민주주의가 지닌 한계와 문제점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전제주의, 공산주의, 군사독재주의보다는 낫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헌신한 그 지도력을, 그 과거를 기억해야하며 이 민주주의가 정체하고 부패하지 않도록 현재 깨어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이렇게 부족하기에 강하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즉,  우리 (공동체)의 바르고 꾸준한 노력으로 더 성숙하게 유지, 지속될 수 있는 역동적 존재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미국의 최근 선거를 보면서 얼마나 무지가 폭력적인지 배웠다. 사실이 거짓으로 진리가 기만으로 둔갑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아니 안하는) 대중들의 무지, 비판적 의식의 부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실감했다. 그래서 난, 인권유린, 경제불평등과 함께 민주주의를 부패시키는 독소는 바로 무지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해방신학에서 critical mass (비판적 대중), 민중신학에서 의식을 가진 주체로서의 민중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본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위기 극복은 공적 지식, 즉, 비판적 의식(critical consciousness), 상생의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실천이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최근 한국의 남녀노소가 다 참여한 대대적 시위를 보면서, 정치를 한다는 권력층이 대중들을 기만할 때, 대중들이 그걸 알았을 때, 그 무지에서 깨어나 뿜어내는 힘은 엄청나다는 것을 보았다. 이 힘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힘을 더 키울 때다.



ⓒ 웹진 <제3시대>


  1. Jennifer Welsh, The Return of History: Conflict, Migration, and Geopolitics in the Twenty-First Century (Toronto: Anansi Press, 2016). [본문으로]
  2. https://www.theguardian.com/business/2016/jan/18/richest-62-billionaires-wealthy-half-world-population-combine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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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민주주의 : 역사의 회귀?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번 원고에서 한국의 삶이 왜 이렇게 힘든지 고통의 무게에 대해 쓰면서 글을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그 삶의 무게는 그 삶의 부피는 전혀 줄지않고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어지럽고, 고통스럽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한숨과 저항의 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경제, 사회, 환경, 교육, 여러 분야로 총체적 난국이지만, 이 난국의 원인을 진단하는 의미로 정치, 특히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지면의 한계상 오늘 다룰 민주주의 주제는 다음 원고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2016년 11월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주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주다. 모든 예상을 뒤엎고 도날드 트럼프 (70세)가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선거 바로 다음날부터 미국 전역에 거쳐 많는 시민들이, 특히 많은 젊은 세대 그룹들과 여성들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면서 거리로 나오고 있다. 이들은 선거의 패배를 무기력한 한탄이 아니라 저항의 소리로 바꾸면서 이렇게 외쳤다. “트럼프는 우리 대통령이 아니다” “트럼프가 공공연히 떠드는 여성혐오, 백인우월주의, 반이민, 반이슬람, 반외교정책으로 가득찬 미국은 우리가 믿고 꿈꾸는 미국이 아니다.” 이렇게 거리로 나온 많은 이들에게 선거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꿈꾸는 미국, 인권과 약자, 여성, 종교, 이민, 이주의 자유가 보장되는 삶을 향한 투쟁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시위는 그동안 노력해서 성취해낸 흑인차별반대 운동을 포함한 미국시민인권운동 (civil rights movement)의 역사적 진보가 역행되고 있는 현실을 그냥 앉아서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마치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해 새로 선출된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71세) 은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마약거래를 했다고 의심이 되는 시민들을 공정한 사법절차 없이 마구 죽이고 있다. 히틀러처럼 자신도 수백만명을 죽일 수 있다고 공적 선포를 하고 있다.[각주:1] 도저히 정상적인 민주주의제도 하에서 적법하게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말도 행위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주의적인 악행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전쟁 이후 약 40년간 군사독재 불식을 위해 그토록 많은 투쟁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10년의 김대중, 노무현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드디어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는다고 믿으며 21세기를 열었다. 그러나 짧은 10년이었다. 두번의 정권 교체이후 신자유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군사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세력의 힘으로 (아니 우매한 대중의 선택과 비판적 사고의 결여, 이 부분을 다음 원고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2007년 이명박을 경제대통령이라는 환상으로 만들어 당선시켰다. 이명박과 그를 지지한 보수정권은 지난 5년동안 인권, 경제만을 망친 것이 아니라 환경 (4대강 사업)까지 파괴시키고, 서민, 약자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 5년간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이른바 독재가 양산한 삶의 쓴맛을 덜 봐서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는걸까? 한국은 다시 2012년 12 월 대선에서 독재자의 박정희 딸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선거의 결과전후로 한국에선 새로운 영어-한글 퓨전 용어가 퍼져나갔다: “멘붕 (mental붕괴).” 2016년 11월 8일 트럼프의 당선소식으로 많은 미국인들, 그리고 그 선거를 지켜봤던 전세계는 일종의 “멘붕”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카나다에선 그렇다. 최종확정결과가 워낙 늦게 발표되어, 많은 사람들이 잠을 설쳤다. 11월 9일 이른 아침 발표된 선거결과를 지켜보고 출근해 멍해있는 학교 교수, 직원, 학생들에게 난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멘붕” 용어를 설명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정치적 결과가 미치는 멍때리는 정신상태에 동감한 것이다.

    지난 4년동안 박근혜 정권하에 한국의 상황은 이명박정권때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아니 그 때 저지른 잘못된 정책의 결과가 이 곳 저 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삶이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 말했다. 그래서 이런 죽음같은 삶을 설명하는 또다른 퓨전용어가 탄생했다: “헬조선.”[각주:2] 멘붕에 비해 훨씬 자조적이고 잔인하고, 강한 혐오가 담겨있는 표현이라 사실 조금 섬짓하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지옥같은 한국의 상황을 표현하기 보다, 지옥이 되어라 하는 자폭과 자신 혐오가 강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헬조선의 현실도 부족한가? 최근 또다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최순실 파일”의 공개사건이다. 이로 1987년 6.10항쟁처럼, 1960년 4.19항쟁처럼 전 국민들이 분노하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도날드 트럼프, 로드리오 두테르테, 박근혜, 이 대통령의 당선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당선이다. 제정신이 있는 자라면, 최소한의 이성적, 비판적 교육을 받은 자라면, 민주주의와 최소한의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들을 대통령이 될만한 지도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들이 당선된 것이다. 그것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정권이 탄생되어서, 이른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들의 권력이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오늘 이런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멘붕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라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해, 아니, 이런 지옥, 죽음같은 상황으로 스스로를 자학하는 민중들과 시민들의 폭력을 끊어내기 위해, 요즘 미국, 한국, 필리핀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로 표현한 학자의 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니퍼 왈쉬는 2016년 CBC - Massey Lectures강의를 맡도록 영광의 선택를 받은 정치학 교수이자 역사학자이다.[각주:3] CBC - Massey Lectures는 카나다 공영방송 (CBC)과 토론토대학 소속 Massey College그리고 House of Anansie 출판사의 합작품으로 매년 카나다인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을 한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 예술가, 문학가 등이 선택되어 자신들의 관심주제를 심도깊게 발표하는 행사이다. 1961년부터 이 강의는 매년 지속되어왔다. 5일동안 5번 강의가 매일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이 되며, 전국을 돌면서 강의가 행해지고, 강의내용은 책으로 출판이 되어 두루 읽힌다. 이른바CBC - Massey Lectures는 공신력있는 카나다의 지적 운동의 양산지라 할 수 있다.[각주:4]

    제니퍼 왈쉬는 현재 이탈리아 플로랑스에 있는 유럽대학 국제관계학과 석좌 교수이자, 최근까지 UN 자문위원으로 국제분쟁문제를 깊이 관여해 온 학자이다. 왈쉬의 CBC Massey강의제목은 “역사의 회귀: 21세기 분쟁, 이주, 그리고 지정학”[각주:5] 이다. 

    왈쉬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른바 냉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그 사건을 보면서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해석한 미국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꾸야마를 인용하면서 강의를 열었다.[각주:6] 여기서 후꾸야마가 말하는 종말은 곧, 자본주의-공산주의의 대결의 끝을 의미했다. 동시에,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지칭했다. 궁극적으로 역사는 진보한다는 낙관주의를 과감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후꾸야마의 에세이가 발표되고 25년이 지난 지금 그가 선언한 종말은 커녕 그 종말의 역사가 회귀하고 있다. 이 점이 왈쉬 강의의 핵심테제이다. 죽었다고 믿었던 역사가 좀비처럼 귀신이 되어 다시 현재에 나타난 것이다. 난 왈쉬가 주장하는 역사의 회귀를 좀비로 표현하고 싶다. 이런 좀비의 정체성은 죽음, 죽임이다. 좀비의 유일한 타켓은 살인이고, 억압이고, 정복이다. 좀비는 생존위해 가족까지도 죽여야하는 존재이다. 2010년 방영이후 아직까지 방영되면서 대중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TV 드라마, Walking Dead[각주:7]가 이 죽임의 현현인 좀비현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왈쉬는 적법한 절차없이 공권력에 의해 벌어지는 살인 (앞서 예를 든 필리핀 포함), 소수 인종, 소수 종교인들을 향한 증오와 학살, 전대미문의 기아상황 (자연재해, 환경재해포함), 전대미문의 피난민사태, 그리고 이른바 서구 민주주의의 발원지이자 그러므로 본보기가 되어야 할 국가들 (유럽, 미국) 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불균등, 배타적 외교정책, 백인우월주의, 수국주의, 인종차별의 현실을 자세하게 예로 들면서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아니, 비민주주의적인 역사가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거꾸로 가고 있는 민주주의는 소위 “고대시대, 중세시대 행해진 야만적인” 행위가 민주주의라는 근대주의 (모던니즘)옷을 입고 재등장한 것과 유사하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 전제주의의 행태라는 것이다.

   왈쉬는 우리가 방심하면, 즉, 깨어있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바로 거꾸로 간다고, 추악한 역사로 회귀한다고 조언한다. 왈쉬는 카나다인으로서 유럽에 살면서, 또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를 두루 두루 살핀 오랜 경험과 토대를 기반으로 어떻게 역사가 좀비로의 회귀를 거듭해왔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그 회귀를 막고자 한 인간들의 노력, 분투, 그리고 승리까지도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역사는 한번 진보하면 바뀌지 않는 딱딱한 돌덩이가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행위로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유리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니, 흐르는 물처럼 상황에 민감하고, 그래서 쓰나미처럼 우리 삶을 송두리채 가져갈 수도 있고,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목마른 우리 삶을 살려내는 움직이는 제도이다. 동시에 우리의 바르고 꾸준한 노력으로 더 성숙하게 유지, 지속될 수 있는 역동적 존재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깨지지 않게 그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키기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노력하고, 투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격려를 하면서 강의를 마친다.

    왈쉬의 강의를 들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다. 우리는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대선을 거치면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가 얼마나 역사를 가늠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뼈저리게 배웠다. 상황이 어렵고, 계란에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의미한 노력으로 보여도, 이것이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다. 그 길이, 소중한 인권을 지키고, 약자, 소수자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단순한 이념도 아니고, 부질없는 믿음도 아니다. 이 길은 꿈틀꿈틀 살아있는 심장과 같은 운동이자 끊임없은 개혁되고 지속되어야 하는 여정이다. 힘들고 지치고 온 세계 기운이 흐트려진 오늘, 그 운동의 한 예를 나누면서 소고를 마친다. 

    카나다는 이번해가 전국적으로 지방자치제 선거가 있는 해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Saskatoon에서도 시장을 뽑고 시의회의원들을 뽑는 선거가 10월 26일에 있었다. 새로운 물결,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소망이 있었다. 그리고 기아문제, 인종문제, 원주민 문제, 환경문제등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려는 진보적인 후보 찰리 클락(Charlie Clark)이 있었다.그러나 클락은 선거당일까지 여론조사에서 계속 3위 (후보자 4명 중)에 머물렀다. 즉 여론에 따르면 그가 당선되리라는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그를 지지하고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이들은 쉼없이 뛰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거운동을 했다.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의 소중한 노력과 한 사람 한사람의 투표로 시선거 역사상 전대미문한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면서 찰리 클락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각주:8]


ⓒ 웹진 <제3시대>



  1.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6/sep/30/rodrigo-duterte-vows-to-kill-3-million-drug-addicts-and-likens-himself-to-hitler [본문으로]
  2. https://namu.wiki/w/%ED%97%AC%EC%A1%B0%EC%84%A0 [본문으로]
  3. http://www.cbc.ca/books/2016/07/jennifer-welsh-to-present-2016-massey-lectures.html [본문으로]
  4. http://www.cbc.ca/radio/ideas/masseys/about [본문으로]
  5. Jennifer Walsh, The Return of History: Conflict, Migration, and Geopolitics in the Twenty-First Century (Toronto: Anansie Press, 2016). [본문으로]
  6.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New York: Avon Books, 1992). 1989년 에세이 “The end of Histor”y는 저널 The National Interest에 기재되었고, 본 책에 다시 수록되었다. [본문으로]
  7. https://en.wikipedia.org/wiki/The_Walking_Dead_(TV_series) [본문으로]
  8. http://www.charlieclarkformayor.ca/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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ὑπομονή (후포모네) 신앙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 6월에 한국을 잠시 방문했다. 한국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지 얼마 후다. 그런데도 많은 가족들 친구들이 이렇게 살기가 힘들 수가 없다며 한숨을 내어쉬었다. 그 고통의 무게가 그들의 한숨소리로 내게도 강하게 다가왔다. 열심히 사회 운동을 하고, 진보적인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도 분위기는 같았다. 동성애 문제, 이슬람교 종교간 대화 문제, 교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가 없을 정도라고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드셨다. 그 분들의 답답함과 아픔이 전해졌다. 

    이는 한국에 사는 한국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지난 6월 23일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독립을 하기로 국민투표를 했다. 어째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한탄하는 소리가 유럽 전역에 울리고 있다. 7월 첫주 이슬람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절기인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국가 중 대표적인 이라크, 그것도 수도 바그다드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그것도 같은 라마단을 지키고 그 종교를 믿는 이슬람교도(물론시아파, 수니파 이렇게 파는 다르지만)에 의해 벌여진 사건이다. 무고한 시민들 150여명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 희생의 울부짓음 소리가 중동, 서아시아 그리고 세계를 울리고 있다.  

    북미로 가보자. 6월 12일 올란도 한 게이바에서 총기를 든 미국시민권자인 오마 마틴 (동성애혐오주의자이고 반미주의자이자 극단적 이슬람교 출신)이 당시 바에 온 무고한 이들을 마구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약 1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총기난사가 비일비재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조차도 한 사람의 총기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고 보도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마틴이 총 한방에 수십 수백번 총알이 퍼지는 그런 총, 도저히 민간인이 소지해선 안되는 전쟁용 총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월 5일 루이지에나주에서 흑인 남성 앨튼 스털링 (37세)가 CD를 팔고 있다가 백인 경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했다. 다음날 6일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지역에서 젊은 흑인 남성 필란도 카스틸 (32세)가 자신의 차 안에서 백인 경찰이 쏜 총에 의해 사망을 했다. 연일 벌어진 이런 살인사건은 약 2년 전 2014년 8월 미져리주 세인트 루이스에서 벌어진 마이클 브라운의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 그 때도 백인경찰에 의해 쏜 총에 맞아 18세의 젊은 흑인 청년이 사망을 했다.아직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마이클 브라운의 죽음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엄청났다. Black Lives Matter라는 운동 조직을 중심으로 인종에 관계없이 미국 도시 곳곳에서 경찰의 폭력, 인종차별, 그리고, 총기 난사에 대해 반대시위를 벌여왔다.  

    7월 5일 6일 희생된 흑인 남성들의 죽음에 대한 시위가 8일 달라스에서 일어났다. 평화시위였다. 많은 경찰들이 그 평화 시위를 보호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경찰들을 향해 총기를 겨눈 흑인이 있었다. 아프카니스탄 참정용사 출신인 미가 존슨 (25세)은 백인경찰을 향해 마구 난사를 했고, 5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고 10명이상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그는 이런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이 싫고, 백인 경찰이 싫고, 그래서 그들을 죽이고 싶다고 고백을 했다. 심지어, Black Lives Matter시위도 지겹고 싫다고 말했다. 달라스 경찰 살인사건이 일어난지 열흘이 지났는데, 분위기는 계속 살벌하고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위는 계속되고 있고, 경찰을 향한 분노는 죽음의 협박으로까지 벌어지고 있다.

    경찰의 총기 난사, 특히 흑인과 유색 인종을 향한 폭력의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매일 미국 경찰이 쏜 총에 의해 발생한 사망자는 3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사망자는 거의 흑인이거나 유색인종이다. 가히 충격적이다. 흑인-백인 분리정책이 공식적으로 폐기된지 50년이 지났다. 그런데, 흑인과 백인들 관계는 풀리지 않고 있다. 6월-7월 올 해 벌어지는 일련의 인종관련 폭력 상황을 두고 많은 이들은 1968년 상황이 되풀이 되는 건 아닌지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흑인-백인 관계가 물과 기름처럼 나누어진 것은 아니라고 선언했다. 피부색을 넘어서 대다수 많은 이들이 인종 차별에 항의하고, 총기없는 세상을 외치고, 정책적 변화, 구조적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오바마는 이런 모습을 기술하면서 지금 모두 힘들지만 어렵지만 대안이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절대 희망을 버려선 안된다고 전 미국인들을 향해 호소를 했다.

    이런 희망이 담긴 메시지를 들으면서, 절망하지 말라는 절절한 메시지를 들으면서, 연상되는 성서메시지가 떠올랐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다양한 성서 본문들이 떠오르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별로 인기가 없는, 그래서, 감히 단언하건대, 다들 별로 알지 못하는 성서를 소개하려고 한다.

    히브리서신은 학자들 내에서 신약성서의 고아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인기가 없는 성서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 다음으로 세번째로 긴 장 수를 가지고 있기에 신약성서에서 비중이 있는 성서이지만, 그 내용이 낯설다는 이유로 설교자들, 일반 교인들 모두 기피하는 성서다.

    나도 마찬가지다. 성차별적이고 희생을 강요하는 서신으로 이해하고 기피했다. 지난 22년동안 한번도 히브리서신을 본문으로 택해서 설교를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최근 내가 속한 사스카추완 주립대 교수인 Mary Ann Beavis 와 이 서신을 주석하는 작업을 같이 하면서 이런 생각이 바뀌었다.[각주:1]


    히브리서신은 16장 전체가 하나의 설교다. 마치 유대인출신 초대 기독교인들 공동체에게 서신기자가 긴 설교를 했다고 상상해보라. 이 설교가 선포될 당시 상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상황만큼, 아니 그 이상 심각했다. 이 공동체는 소수였다. 미국의 흑인이나 유색인종처럼, 한국사회 이주민들처럼 소수였다. 유대교를 따르는 대다수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박고, 동시에 로마 제국으로부터도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들이었다. 곧 오실 거라 믿었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자고 깨면 같이 신앙 생활하던 친구들이 순교를 당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살벌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살아야 했던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이 설교가 들려졌다.

   이 설교를 듣는 대부분 교인들은 아마도 자신들도 곧 박해로 인해 순교할 것을 알았다. 죽을 줄 알면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결단하는 이들을 설교자는 위로하고 이들의 믿음을 격려한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11:1)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 서신은 그 공동체가 겪는 고민과 고통을 자신 히브리 신앙의 선배들도 겪었다고 위로를 한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라합도,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이 이런 고생을 겪었다고, 너무나 많은 성서의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위로한다. 이 신앙의 선배들도 당신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곳으로 가지도 못했고, 원하고 바라던 모든 일을 이루어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힘든 길을 갔다고, 그러니 우리도 갈 수 있다고 이들 공동체를 격려한다. 그래서, 이들 모두가 “구름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되어 이 공동체를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다고 확신을 준다. 그러니 보이지 않지만, 지금 보이는 현실이 너무 갑갑하고 어둡지만, 소망하는 그것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고통을 견뎌내고 달려가자고 절절히 외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주석 작업을 하면서 배운 점이 많다. 하나는 후포모네 (hypomone)라는 헬라어의 의미다. 소위 “인내, 감내, 저항”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이 단어는 구약, 신약성서 전역에 걸쳐 나오는데 (예. 시 37:9, 이 51:5; 미 7:7; 스 3:8; 마 24:13, 롬 5:3-5), 히브리서신엔 11장 27절에 나온다. “그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 냈습니다” 라고 설교자는 여기서 모세를 인용하고 후포모네를 썼다. 즉, 후포모네는 고통을 견딘 모세의 파라오 이집트 제국에 대한 저항을 가리킨다. 신약성서에서 히포모네는 저항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저항과 약간 의미가 다르다. 무언가 나서고 드러내고 시위를 하는 저항도 중요하다. 그래서 Black Lives Matter는 오늘도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드러나지 않고 견디어내는 것, 이런 저항도 필요하다. 바로 이 저항을 히브리 서신이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히브리서가 고통을 무조건 감내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더 더욱 고통을 이쁘게 포장하고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는 것, 그 고통이 올 때, 수동적으로 피하지 않고, 감내하겠다는 것, 그 결단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히브리서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론 (그리스도론)을 잠시 살펴보자. 이 서신기자가 펼치고 있는 십자가의 신학이 가히 놀랍다.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인 것은 그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변화되셨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과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펼친다.[각주:2]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사건인 것은 그 사건이 믿는 자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갈 2:20). 그런데, 히브리서신 기자가 보기에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사건인 것은 그 사건이 예수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히 5:7-10; 2:9-18).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 길을 가지 않고 피할 수 있었지만 (5:8), 예수님은 몸소 힘들게 그 길을 갔다고 히브리서신은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통과 죽음으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 아니 피조물 모두가 겪는 고통에 대해 죽음에 대해 철저하게 경험했다는 것이다 (2:9; 2:17). 그래서 우리 인간과 유한한 피조물을 완전하게 이해하시고, 우리와 완전히 공감하시고, 우리를 완전하게 품어내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5:9).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 (12:2)이다. 예수님이 완전하신 건 그 분이 인간의 고통을 완벽하게 공감한다는 의미이다. 그 분이 하나님이신 건, 구세주인 것은, 그 분이 철저하게 인간의 고통, 죽음을 감내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포모네 신앙의 역설이자, 히브리서신이 주는 지혜이다.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모르는 요즘 같은 세상, 살상이 난무하고, 분노가 폭력으로 자행되는 이런 세상, 평화의 길이 도대체 안 보이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으나 감내하는 후포모네 신앙의 저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 한숨이 나오고, 땅이 꺼질 만큼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야하지만, 그런 상황을 견디어 내는 신앙이 필요하다. 그 신앙은 결코 절대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런 고통이 (다른 이에겐 일어나도) 내겐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안일함에 후포모네 신앙은 우리에게 함께 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라고 격려한다. 예수님도 하셨기에, 그 분이 우리와 함께 철처하게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셨기에 우리도 그를 따르는 자들로서 할 수 있다는 히브리서신 공동체의 믿음의 고백을 우리도 할 때다.


ⓒ 웹진 <제3시대>


  1. Mary Ann Beavis and HyeRan Kim-Cragg, Hebrews Wisdom Commentary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15). [본문으로]
  2. Ruth Hoppin, “The Book of the Hebrews Revisited: Implications of the Theology of Hebrews for Gender Equality,” cited in Beavis and Kim-Cragg, Hebrews, 57-5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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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취지


  이주는 시리아 피난민으로 시끄러운 2016년 현상이 아니다. 인류 초기부터 아니 생명을 지닌 모든 이들이 생존을 위해 겪는 현상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현상이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주를 경험한 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이질감, 집에 왔으나 집이 아니요, 낯선 곳이나, 그 곳에서 친숙함을 느끼는 딱히 안정되지 못하는 정체성의 복잡성이 그 한 고통이다. 동시에 대부분의 이주는 자발적이 아니라 폭력적으로 타의적으로 (전쟁, 빈곤) 자행되기에 더 큰 피해와 아픔이 따른다. 

  발제자는 이주를 식민주의, 특히 1947년 이후 탈식민주의 상황과 연결을 시키면서 어떻게 이주의 문제가 인종의 다름, 다름에 대한 배제와 차별로 이어지는지 고찰한다. 

  동시에 이주로 인해 발생하는 중요한 현상, 접촉점 (contact zone)의 문제와 타자화/재현 (representation)의 문제를 주의깊게 살핀다. 이런 이주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성탄절 사건, 소위 예수의 탄생을 이주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면서, 십자로 (crossroads) 경계선상에 함께 서 있는 이주의 하나님을 만난다. 

실천신학의 과제는 바로 이 십자로 경계선, 타자와의 만남, 만남이 가져오는 분쟁과 아픔, 동시에 상호의존, 기쁨에 관심하고, 그 길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여정에 참여하도록 신앙인들을 독려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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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지키기에 대한 단상 

: 삶의 의미 부여 아니면 힘의 기제?





 

김혜란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생명을 가진 모든 삶에는 주기가 있다. 태어나고, 자라고, 시들고, 죽고, 또 태어나고 자라고, 시들고, 죽고.. 돌고 도는 그 시간의 주기엔 의미가 있다. 아니, 우리 인간은 그 반복되는 주기,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기에 반복되지만, 그 반복이 식상하지 않다. 

    종교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 주기는 더욱 의미가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주기를 우리는 절기라 부른다. 유대교인들에겐 유월절이 그 절기의 정점이고, 이슬람교인들에겐 라마단과 이드가 그 절기의 절정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태어남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그 시작이자, 성탄절, 주현절 이어, 사순절, 부활절로 그 절정을 맞이하고, 교회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령강림절 기간으로 절기를 마친다. 매해 반복되는 절기지만, 그 기다림, 탄생, 고난, 죽음, 부활을 상기하는 그 의미는 다르고, 같지만 다르기에 더 의미가 있다.  

    이런 기독교 절기를 교회력(church calendar)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달력을 두 개 걸고 사는 셈이다. 아니, 음력과 양력을 동시에 지키는 한국인 기독교인들에겐 교회력까지 포함하면 세개의 달력을 보면서 다사다난한 절기를 지키면서 살아간다. 반복되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절기가 우리 인간, 종교적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특정 날을 지정해서 예를 올리고, 의식을 행하고, 그 날을 축하하고 그 일정기간을 기념하는 일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지루하고 무의미할 것이다. 절기는 더 나아가 무의식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상사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분별있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절기, 반복되는 생명의 순환을 경험하면서 우주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우리 몸과 영의 소리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것이 무조건 다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즉, 절기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절기가 지닌 정치적 의미를 살필 필요가 있다. 절기가 인간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절기는 힘을 갖고 있다.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한, 절기는 권력의 한 기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즉, 누구에 의해서 절기가 만들어졌는가에 따라 절기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들에겐 절기가 부정적인 또는 불편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시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려 한다. 내게 절기에 대한 이런 비판적 가르침은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 (WCC) 짐바브웨 하라레 총회 때 시작되었다. 총회는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행해졌다. 대림절 기간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림절의 상징은 어두움속에서 빛으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그 절기동안 대림절 화환(Advent Wreath)을 둥그렇게 만들어 그 틀 안에 초 4개를 넣고 매 주 켠다. 한 주 한 주 1달동안 초를 켤 때마다 소망, 평화, 기쁨, 그리고 사랑으로 의미부여를 하면서 예수님탄생을 맞을 준비를 한다. 내가 살았던 한국이나 지금 살고 있는 카나다 두지역이 지구 북반구에 속해있기에, 대림절은 한 해 중에 가장 어두운 겨울절기이다. 그래서 추운 겨울 어두움을 뚫고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깜깜한 추위를 가르고 은은하게 비치는 대림절 기간 촛불은 우리의 감성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짐바브웨에서 대림절의 경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녁시간인데도 해가 지지 않아 여전히 밝았다. 춥기는 커녕 날씨는 따뜻했고 온갖 종류의 꽃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생명이 잠을 자는 겨울이 아니라, 만물이 생동하고 수확을 하는 가을로 접어드는 여름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추운 겨울 어두움을 뚫고 오는 예수님의 탄생을 고백하고 찬양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 그곳의 날씨와 맞지 않는 이질적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식민주의 선교를 통해 유럽에 속한 북반구 기독교인들에 의해 소개된 절기가 일방적으로 주입되어 아프리카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작동한 것이다. 마치 스리랑카 기독교인들에게 성찬예식으로 사용되는 밀가루 빵과 포도주가 낯설고 구하기 어렵지만 서구 선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규범이 되어졌기에 불편해도 어울리지 않아도 지켜야 하는 하나의 정통예식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예배학자 러셀이는 이 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를 한다. 만약 예수님이 스리랑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신다면, 보라색 인공색소를 넣은 소다를 원하실까 아니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신선하게 생산된 그 지역차를 나누실까?[각주:1]  

    1998년 경험 이후 난 지구 북반구 서구 유럽 기독교의 절기가 온 세계 규범이 되어 일방적으로 (심지어 억압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동시에 규범화된 절기는 곧 힘의 기제, 즉 헤게모니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규범을 만든 그룹이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기에 힘을 지니지 못한 약자, 소외그룹, 그리고 피식민주의자들에겐 이 절기가 이질적이어도 불편해도 지켜야하는 정통 규범 (orthodox norm)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주 출신 가톨릭 예배학자 클래어 존슨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지구 남반부에 있는 자들에겐 대림절은 어둠과 추위가 아니라, 여름의 절정이며, 부활절은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봄이 아니라, 반대로 동면을 취해야하는 겨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반부 교회에서 제정된 교회력, 교회력이 담고있는 신학과 가르침이 지구 남반부에 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이질적이지만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력은 지키기 힘든 달력을 넘어서서 그들의 정체성 형성에 혼돈을 주는 이질감의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교회력은 단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공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각주:2]   

    이 점은 단지 기독교만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 옆집에 사는 이웃은 방글라데시출신 카나다인이고 독실한 이슬람교인들인데, 라마단 (금식)절기를 카나다에서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호소한 적이 있다. 올해 라마단은 6월 6일부터 7월 5일까지이다. 이는 하지기간이다. 북반구에 속한 카나다에서 이 기간동안 해가 새벽5시에 뜨고, 저녁 9시에 진다. 그만큼 더 오래 금식을 해야하는 것이다. 우리 무슬림 이웃에게 절기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공간의 문제는 존슨의 주장이 타당하다.  

    이런 존슨의 주장은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주장하는 인식론과 상통한다. 우리가 어떤 사건 어떤 지식을 획득할 때, 그걸 어떻게 아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인식론이다. 그 인식론은 결국 지식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 지식을 획득하는 자의 정체성, 힘의 문제이다. 탈식민주의이론에서 인식론은 어떻게 역사를 이해하고 규정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그래서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 역사에 관심하는데 역사는 직선적 시간 (linear time)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공간적 다원성 (spatial plurality)에 의해 규정된다고 본다.[각주:3] 이미 내가 쓴 책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식민주의의 대표적 예를 노예제도라고 본다면, 탈식민주의에서는 “xx가, 아니 xx의 조상이 xx 세기에 노예였다”라는 “시간” 중심의 식민주의적 역사인식론을 반박한다. 대신 “xx가, 아니 노예였던 xx의 조상이 이 공간에서 다양한 다른 그룹 (원주민, 이민자)들과 함께 살았고, 특히 지배자였던 백인과 공존, 충돌, 저항하면서 살았다” 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공존하는 그 “장소”에 관심을 한다.[각주:4] 그 장소에 관심을 두는 순간, 그렇게 역사를 보는 순간, 그 곳에서 복잡다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특히, 소외받고 억압받는 이들의 모습을 드러난다.   

    이렇게 역사관을 바꾸면 마치 중립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시간이, 그 시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절기가 실제로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고 부자연스럽다는 걸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절기의 문제는 헤게모니의 문제라는 것도 드러난다. 즉, 누가 왜 그 절기를 만들었는지, 이 절기를 통해 누가 소외되고, 누가 다수로, 규범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고찰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전 4월 16일 세월호 2주기를 기념했다. 5월 5일 어린이날도, 5월 8일 어버이날도 축하했다. 곧 5.18 광주항쟁과 6.10 민주항쟁을 기념할 것이다. 6월 6일 현충일도 있고, 6.25 한국전쟁도 기념할 것이다. 그 기간 단오절도 들어있다. 교회력으로는 부활절을 마쳤고, 성령강림절 기간으로 절기가 바뀌었다.  

    이 많은 절기 어떻게, 무슨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어떻게 축하하고, 기념하고, 실천할 것인가?   

    이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 또 독자가 속한 다양한 공동체에 달려있다. 다만, 나의 소견은 이렇다. 의미를 부여하자. 축하하자, 기억하고 애도하자. 그네도 뛰고 풍년을 기원하자.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새단장도 하자. 이 모든 걸 하면서, 이런 절기가 우리 이웃들에게, 타자들에게 억압이 되는지, 이질감을 줄 수 있는지도 곰곰이 살피자.  



ⓒ 웹진 <제3시대>

  1. Russell Yee, Worship on the Way: Exploring Asian North American Christian Experience (Valley Forge: Judson Press, 2012), 135. [본문으로]
  2. Clare V. Johnson, “Relating Liturgical Time to ‘Place-Time:’ The Spatiotemporal Dislocation of the Liturgical Year in Australia,” in Christian Worship in Australia: Inculturating Liturgical Tradition, Stephen Burns and Anita Monro, eds. (Strathfield, N.S.W. : St Pauls Publications, 2009), 33-45. [본문으로]
  3. Bill Ashcroft, Gareth Griffiths, and Helen Tiffin, The Empire Writes Back: Theory and Practice in Post-colonial Literatures (London/New York: Routledge, 1989), 36-37. [본문으로]
  4. HyeRan Kim-Cragg, Story and Song: A Postcolonial Interplay between Christian Education and Worship (New York: Peter Lang, 2012), 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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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만들어야 할 길 

: 여성목사 안수와 양성평등의 세상을 향하여





 

김혜란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2016년 3월 8일 한국에서는 어떤 행사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카나다에서는 이 날만이 아니라 전후1주일 내내 이 날을 기리는 많은 행사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국가 공영 방송인 CBC라디오에서는 매 시간 방영하는 기존 프로그램들이 여성문제를 포커스로 해서 다양한 여성인물과 여성문제들을 다루었고, 여성작가들의 책들과, 여성들이 만든 영화, 음악, 다큐멘터리가 소개되었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미국 열악한 작업장의 환경때문에 발생한 화재로 희생당한 여성노동자들을 기념하는 시위와 궐기로부터 그 기원을 찾는다. 1910년 제 2 인터내셔날 노동 여성회의에서 이 미국화재 사건이 보고되었고 독일의 노동운동가 클라라 체트킨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매년 한 날을 정해서, 전 세계의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평등권과 노동권을 주장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안이 통과되면서 1911년 3월 19일 유럽과 북미 전역에서 첫 “세계 여성의 날”이 지켜졌다. 1913년 3월 8일로 날짜가 바뀌었고, 사회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에 의해 여성의 노동권과 평등권을 주장하는 정치적 행사로 오늘날까지 자리잡게 되었다.[각주:1] 당시 한국에서도 이 날이 “국제부녀절” 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1920년부터 자유주의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지도자들에게 의해 준수되었다. 일본제국주의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1945년 해방까지 공식적인 행사들이 쭉 진행되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간보다 해방이후 국제 부녀절을 지키는 운동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해방후 반사회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사회주의 경향을 띠었던 세계 여성의 날이 소위 용공그룹으로 정부의 의심을 받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승만정권부터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 공개적인 행사를 못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난 이후에서야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면서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의 노동권, 인권을 신장하는 매개체로 자리잡게 된다.[각주:2]  

      내가 사는 카나다로 잠시 돌아가보자. 내가 사는 지역은 대평원지역으로 알려진 싸스카추완주다. 카나다 서쪽에 속한 대평원 주 (마니토바, 싸스카추완, 알버타) 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참정권을 행사하도록 법안이 통과된 해가 1916년이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 해가 그래서 이 지역에서 특별히 더 의미가 있다. 토론토가 있는 온타리오주와 밴쿠버가 있는 브리키시 콜롬비아는 1917년에, 다른 동쪽지역 주들은 1918년 1919년에 법안이 통과되었고, 그 여새를 몰아 전국적으로 연방차원에서 1919년에 여성의 참정권이 통과되었다.[각주:3]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서쪽 대평원주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여성의 참정권 문제를 해결했을까? 누구 아니 어떤 지도력이 발휘된 것일까? 여기서 한 기독교 여성을 소개한다: 넬리 맥클렁(Nellie McClung, 1875-1951)은 온타리오에서 태어나 7살때 마니토바주로 이사를 하고 젊은 시절을 보낸다. 독실한 감리교 기독교인—나중에 카나다 연합교회— 이었던 넬리는 의식있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음주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 (여성 폭력, 실업)를 공론화시킨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이 문제를 정부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부딪친다. 왜냐하면 여성은 법적으로 인간이 아니기에 (women are not eligible persons), 즉, 참정권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번번히 묵살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여성의 입장을 담아낼 법제화 기제가 없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넬리는 여성의 참정권, 인간으로서 양성평등권을 위해 지도력을 행사한다. 마니토바주 수도인 위니펙에서 넬리는 창조적이고 해학적, 풍자적인 방법들 (연극)을 이용해서 대중들을 의식화하고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다. 결국, 대평원주인 마니토바주에서 카나다에서 제일 처음으로 여성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다. 같은 해 마니토바 옆 주인 싸스카투완과 알버타주가 이 법안을 통과하게 된다 그 후 넬리는 알버타 주로 이사를 하고, 그 주에서도 역시 여성의 인권, 정치적 권리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한다. 특별히 선거권을 넘어서 여성이 상원의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이끌어 1929년 첫 여성 상원의원을 배출해 낸다.[각주:4]  

       넬리 맥클렁이 이렇게 양성평등을 주장하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예언자적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깊게 내재했다. 창세기 1장 26-27장에 근거해서, 남자,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그 믿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신학이 넬리의 삶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더불어 넬리와 뜻을 함께 한 대다수 지도자 여성들이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 생활을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넬리는 선도적으로 아무도 걷지 않았고, 상상할 수 없었던 그 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신학자 캐서린 켈러는 중국 철학자 Lux Xun를 인용하면서 희망을 길과 빗대어 설명한다. “희망은 긍정을 하는 것도 부정을 하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시골 한 켠에 어느날 나타난 길과 같다. 원래 길은 없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곳을 밟고 걸으면서, 하나의 길이 나타난 것이다.”[각주:5] 희망이란 수많은 이들의 뜻있는 수고과 반복적인 실천, 행위, 운동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귀한 지혜를 말해주고 있다. 즉, 포기하지 않는것, 한번 하고, 그만두는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이 결국 새로운 길, 새 세상을 만든다는 교훈이다.

       2016년은 카나다 연합교회 역사에서 또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이다. 올해 2016년은 카나다 연합교회 여성 목사 안수 80주년을 기리고 축하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리디아 그루치 (Lydia Gruchy)는 카나다에서 최초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각주:6] 카나다연합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여성이다. 리디아 그루치가 여성으로서 목사 안수를 받는 길 역시 험난한 과정이었다. 졸업 후 아무도 가지 않는 교회에서 이미 아주 성공적으로 하고 있었던 목회를 하고 있던 리디아에게 안수를 줄 것을 싸스카추완 연회는 총회에 안건으로 올렸다. 그 1926년 총회는 이 안건으로 발칵 뒤집혔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반대와 저항은 컸다. 리디아는 휴거노 (프랑스 개신교인) 출신으로 프랑스 가톨릭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피신을 갔다가 싸스카추완주로 이민을 온 가정에서 태어났다. 불어가 모국어지만 영어를 배워야 하는 소수민족의 경험을 경험한 리디아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조건에 있는 피난민들(러시아 출신 기독교인들)을 위해 교육을 했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해 여러 분야의 목회를 했다. 10년 간의 소위 Xun 철학자가 말하는 희망의 운동을 해서 드디어 안수라는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을 때, 그 길을 처음 딛게 되는 영광을 안은 리디아의 소감은 너무 겸손했다: “나는 안수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나를 들어 쓰셨고, 교회는 그 하나님께 응답을 했을 뿐이다.”[각주:7] 이 희망의 운동에 애를 쓴 여성들 중에 핵심 지도자는 누굴까? 넬리 맥클렁이다. 그는 교회안에 팽배한 성차별을 이렇게 날카롭게 지적한다. “목회는 너무 어렵다고 그래서 여성은 할 수 없다고, 여성이 목회를 할 경우 교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남성 설교자가 많은 데 굳이 여자까지 설교를 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이런 모든 이유가 성서 (사도바울 서신) 에 있기에 정당하다고 말한다. 여성 상원을 배출하는 이 시대에 금녀의 집이 두곳이 있다. 이는 바로 교회와 술집이다.”[각주:8] 더불어 리디아가 신학교육을 받도록 물심양면 애를 쓴 신학교 총장 에드몬트 올리버 (Edmond Oliver, 나중에 카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을 역임) 등 남성 지도자들의 역할이 컸다. 

       내가 3월의 글 주제로 세계 여성의 날로 잡고 글을 쓰면서 넬리 맥클렁과 리디아 그루치 카나다 여성 기독교 지도자를 언급한 데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2010년 세계개혁교회 연합 (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 WCRC)이 첫 총회를 하면서 결단한 안건이 있는데, 이는 소속된 모든 교회들이 바로 여성의 목사 안수 문제와 성평등의 문제를 진지하고 신학적으로 다루자는 내용이었다. WCRC은 약 8천만명의 기독교인들을 묶어주는 에큐메니컬 연합체로서 전세계 약 100여개 나라의 225개 교단들이 함께 하는 개신교 최대 연합조직이다.[각주:9] 이런 안건이 나오게 된 배경은 명백하다: 교회 안에 성차별이 심각하며,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들이 현저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 총회 안건을 받들어 지난해부터 다음 2017년 ( 종교 개혁 500주년 기념의 해)를 준비하면서 여성의 목사 안수 문제와 양성평등의 문제를 신학적이고, 성서적으로 다루는 노력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225개 모든 교단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안수를 주지 않는 차별의 장벽을 제거하는 그 희망을 꿈꾸고 있다. 과연 내년 2017년 그 희망의 길이 만들어질까? 종교개혁의 참 뜻을 성찰하고 이어가는데, 여성의 목사안수와 성차별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한 지역의 인재가 불러낸 고통의 불씨가 죽지 않고 동기 세대들에 의해 살아났다. 그렇게 세계 여성의 날이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과거의 의미를 되집고 현재를 성찰하는 기회로 자리매김을 한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한 지도자의 예언자적 희망과 그 희망의 푯대를 함께 들고 걸어간 수많은 지도자들의 발걸음으로 여성목사 안수의 길이 자리매김이 되었고, 우리는 그 단맛을 누리고 있다. 그를 위해 애쓴 우리 선배들의 노고를 기억하자. 그러나 단맛뒤에 씁쓸함이 공존함을 잊지 말자. 우리에게 아니 우리 다음세대를 위해 우리가 걸어내야 할 몫이 있다.  

       이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일은 엄청나게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길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아니, 그 길때문에 또 다른 소외와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데는 더 많은 이들의 땀이 흘러야 한다. 1916년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이1919년에 걸쳐 일어났다고 앞서 언급했다. 그러나 해당되는 여성은 오직 백인 여성들이었다. 어찌보면 카나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백인우월주의의 잔재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유색인종 여성들과 원주민 여성들은 제외되었고 이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기까지 또 수십년의 피나는 수고를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각주:10] 길은 만들어졌으나 온전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다른 소수들을 배제하는 댓가를 치루고 얻은 길이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그래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내선 안된다.  

       이제 사순절을 보내고 곧 부활절을 맞는다. 이 글을 마치며 안치환의 ‘마른잎이 다시 살아나’ 노래가 떠오른다. 고문익환 목사님은 이 노래를 부활의 노래라고 칭하시고, 평양 봉수교회에서 손수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세계 여성의 날, 여성 목사안수, 양성평등의 불씨를 살려야 할 몫은 이제 우리 세대에게 주어졌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는 것처럼,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을 푸르게 하는 살리는 일을 위해 부활의 영의 도움을 청하자.  



ⓒ 웹진 <제3시대>

  1. 정유진. '세계 여성의 날'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경향신문. 2015년 3월 8일. [본문으로]
  2. 民族(민족) 民主(민주) 民衆(민중)과 함께하는 女性(여성)운동. 매일경제. 1985년 3월 11일. [본문으로]
  3. http://www.cbc.ca/strombo/news/women-the-right-to-vote-in-canada-an-important-clarification.html [본문으로]
  4. http://www.canadahistoryproject.ca/1914/1914-07-mcclung.html [본문으로]
  5. Catherine Keller, Apocalypse Now and Then (Boston: Beacon, 1996), xiv. [본문으로]
  6. 그 최초 여성 신학생을 배출한 학교가 내가 속한 St. Andrew’s College 이고, 나는 이 신학교에서 리디아 그루치를 기리면서 만들어진 석좌교수자리, 리디아 그루치 실천신학 교수로서 일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본문으로]
  7. Patricia Wotton, “With Love, Lydia: The Story of Canada’s First Woman Ordained Minister,” (Friesens, Manitoba, D & P Wotton, 2012), 114. [본문으로]
  8. Mary Hallett, “Nellie McClung and the Fight for the Ordination of Women in The United Church of Canada,” Atlantis (Spring 1979): 11, 14. [본문으로]
  9. http://new.wcrc.eu.server3.reformiert-info.de/ [본문으로]
  10. http://section15.ca/features/news/1997/05/30/women_take_right_vote/. 유색인종은 1948년, 원주민여성은 1960년에 비로소 선거권을 획득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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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지난 30년 동안 많은 성서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이 탈식민주의 이론과의 대화를 시도 해왔다. 그러나 실천신학 영역에서는 이런 노력이 많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 10년동안 예배학자들과 기독교 교육학자들을 중심으로 실천신학과 탈식민주의 담론을 이론화하고 실천적으로 고찰하는 노력이 보인다. 본 작업은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예배 중 성찬의 문제를 세가지 측면에서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한다. 첫째, 성찬을 문서화된 예식으로 강조될 때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진단한다. 소위 “문서주의의 헤게모니”를 다루면서 탈식민주의에서 관심하는 “행위로서의 지식”과 대조적으로 성찰한다. 둘째, 성찬을 둘러싼 지도력의 문제를 다룬다. 소위 성직자의 특권인 집례 권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살피면서 공적 의식으로 성찬, 공동체적 참여로서의 성찬의 역할을 조명한다. 셋째, 성찬에 쓰이는 빵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자본주의적으로 획일화되어 상품화되어가는 영성체, 성찬 요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서구화 획일화의 문제와 탈서구화와 토착화의 문제를 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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