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멘 블루스





나상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목사, 뮤지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요한복음서 8:32



어린 조카가 동화책 읽어달라고 조른다. 보통 한 번에 두 권 읽어주는데, 으레 한 권은 조카가, 또 한 권은 내가 고른다. 마침 잘 됐다 싶어 내가 뭘 골랐겠는가? 그렇다. 그림 형제의 『브레멘 음악대』를 쓱 뽑아서 조카를 옆에 앉히고 근엄한 어조로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대략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주인들을 위해 뼈 빠지게 일했던 동물들이 늙고 병들자, 주인들은 쓸모없어진 동물들을 학대하고 쫓아내고 급기야는 잡아먹으려고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동물들은 생존하기 위해 탈출하여 브레멘을 향해 떠난다. 바로 그곳, 브레멘에 도착하면 음악대를 결성하자고 굳게 의기투합하고선 말이다. 근데 날이 어두워져 쉴 집을 찾다가 도둑들의 소굴을 발견하게 된다. 동물들은 힘을 뭉쳐 도둑들을 놀래켜 집밖으로 쫓아내버린다. 그 뒤, 동물들은 브레멘에 가지 않고 그 집에 남아 날마다 음악회를 열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다 읽고 나서 깜짝 놀랐다. 뭐야? 브레멘에 안 갔단 말이야? 브레멘에 안 가는 걸로 끝맺는 이야기인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 왜 난 동물들이 브레멘에 간 걸로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래도 브레멘에 가야 제목에 걸맞게 ‘브레멘 음악대’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난 깊은 혼란에 빠졌다. 그럼 ‘브레멘’은 도대체 뭔가? 

    브레멘은 동물들이 꿈을 펼치려는 공간이었다. 브레멘에서 같이 밴드활동 열심히 해서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고 음악으로 인정받고 싶었을 게다. 비록 사람대접은 못 받을지언정 음악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맘껏 표출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싶었을 게다. 그런데 동물들은 브레멘에 가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자족적인 음악공동체로 사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브레멘으로 표상되는 시민사회를 향해 가망 없는 인정투쟁을 하기보다는, 공동체 내적으로 끊임없이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며 동물로서의 자아를 긍정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음악대, 그들이 바로 『브레멘(에 안 간) 음악대』가 아닐까? 이런 생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그런데 내 궁금증은 그것만으론 해소가 안 된다. 그렇다면 과연 브레멘 음악대는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했을까? 도대체 어떤 음악을 같이 해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늙고 병들어 버려진 동물들의 울음을 담아낼 그릇으로 무엇이 가장 제격일까? 다행히 음악을 좀 아는 나로서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름하여, 블루스(Blues)! 

    왜 하필 블루스일까? 미국 남북전쟁 전후 흑인공동체의 역사에 관해 얘기를 좀 해야겠다. 

    때는 바야흐로 1619년, 제임스타운이라는 곳에서 최초로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매매된다. 이후 1700년에 이르기까지 북미대륙에서 모든 아프리카 흑인들의 신분은 점점 종신노예로 규정되게 된다. 흑인노예들은 하루에 적어도 15시간에서 20시간 동안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으며, 잠시라도 게으름을 피웠다간 사정없이 매질을 당했다. 흑인여성이 출산하게 되는 경우 산후 3주가 지나면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단다. 농번기가 되면 흑인노예들은 죽도록 일해야 했고, 그 노동에 대한 보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이 시기 흑인노예들은 노동요(Work Songs)[각주:1]를 부르면서 가혹한 노동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내고자 몸부림쳤다. 

    이후 19세기 동안 노예제도하의 흑인공동체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례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일날 교회에 모여서 흑인영가(Spirituals)[각주:2]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들은 성서에 기록된 구원사를 근거로 하여 하느님이 노예살이로부터 반드시 자신들을 해방시켜주실 거라 굳게 믿고, 그러한 확신을 음악적으로 의례화했는데, 그것이 흑인영가이다. 백인들로부터 철저하게 존재를 부정당하고 굴욕과 자기멸시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일쑤였던 흑인노예들은 교회에 나가 흑인영가를 부르면서 흑인다움(Blackness)을 긍정하고 맘껏 자신을 뽐내며 실존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 중 링컨 대통령이 그 유명한 ‘노예해방선언’(1863.1.1)을 선포한다. 이로써 흑인들은 노예살이로부터 곧 풀려나리란 희망에 부풀었고, 실질적으로는 종전 후 미국 수정헌법 제13~15조의 성립으로 노예제도폐지가 확정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자유로워진 흑인들은 빈곤의 늪에 허덕이게 되고, 어떻게든 연명하기 위해 백인들의 온갖 차별대우를 감수하고 노동현장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일해야 했다. 이러한 남북전쟁 직후의 분위기 속에서 블루스 뮤지션들이 등장한다.  

    수백 년간 노예살이로 신음해야 했던 흑인들은 노예제도가 폐지되자, 이제는 오히려 농장에서 쫓겨나 노동시장에서 도태되어 굶어 죽을까봐 벌벌 떨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수많은 흑인들의 삶이 파국으로 치닫던 이때, 흑인들은 변화된 환경에 처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할 새로운 음악, 블루스를 필요로 했다. “블루스는 파국으로부터 출발한다.”(코넬 웨스트) 

    블루스[각주:3]는 일상의 느낌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게 특징이다. 가사를 살펴보면, 성애에 대한 묘사도 매우 생생하다. 육체적 감각경험에 대한 개방적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개방적인 면은 과거 노동요나 흑인영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동시대 백인음악인 포크(Folk), 컨츄리(Country)에서도 찾기 힘들다. 블루스는 몸의 담론인 것이다. 

    사실, 난 블루스 음악양식(Musical Style)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블루스는 노동요와 흑인영가의 음악적 요소를 고루 간직하고 있다. 노동요로부터 ‘메기고 받기(Call & Response)’를 가져왔고, 흑인영가로부터 ‘블루노트(Blue Note)’를 사용하는 전통을 이어받았다. ‘메기고 받기’를 통해서 연주자들은 음악적으로 대화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블루노트는 3도, 7도를 일부러 반음 내려서 연주하는 음들인데, 연주시 불협화음을 일으켜 긴장감을 유도하기 위해 쓰인다. 선율로 존재의 목소리를 표현한다면, 화성(Harmony)은 그 존재를 둘러싼 세계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놀랍게도, 흑인영가와 블루스는 블루노트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내-존재가 세계와 불화하는 데 따른 부조리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흑인영가와 블루스에서는 실존주의의 의례화를 꾀한 흔적이 엿보인다. 블루노트는 곧 반항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요소와는 별개로, 블루스가 지닌 가장 혁신적인 음악요소는 ‘즉흥연주(Improvisation)’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이것이 즉흥연주의 정신이다. 다시 말해, 우연성, 예측불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혼돈을 향해 존재를 기획투사하는 것이다. 또한 즉흥연주는 불확정성의 연주이며, 선율의 고착화를 피해 끊임없이 변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최종적 표현, 궁극적 표현의 순간은 계속 지연되며, 그 과정에서 차이가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다. 블루스는 매우 짧고 단순한 악곡구성을 지녔음에도 끝없이 열려 있는 텍스트로서 자유의 모험을 의례화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본격 즉흥연주음악인 재즈의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블루스는 대화의 의례요, 반항의 의례요, 자유의 의례이다. 주인들로부터 폐기물 취급을 받은 동물들의 공동체, 브레멘 음악대가 블루스를 연주하는 공동체였다고 상상해보자. 공동체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의례, 그것은 그 공동체에게 있어서 진리와 다름없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아포리즘은 브레멘 음악대에게는 ‘블루스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거야’라는 말로 다가오지 않을까? 

    상상의 나래를 좀 더 펼쳐보자. 브레멘 음악대가 전형적인 화성음악(Homophony)이 아닌 다성음악(Polyphony)[각주:4]으로 블루스를 했다면 어땠을까? 다성음악은 참여자로 하여금 무아지경에 이르게 한다. 참여자가 많아질수록 그 효과는 배가된다. 나의 소리와 다른 이들의 소리가 상호침투하여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혼돈의 난장이 벌어진다. 다성성이 증가할수록 음조(Tonality)의 중심점이 흐트러지며,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면 백색소음 내지 파도소리로 승화하게 된다. 그 경지에서 ‘나’의 소리를 얘기한다는 건 무의미하다. 이미 거대한 소리에 혼합되어 무화되었기 때문이다. 브레멘 음악대가 다성성의 블루스를 추구했다면, 그들은 머물던 집에서 나와 브레멘에 가지 않고선 못 배길 거다. 다성음악의 정신은 더 많은 이들의 소리를 필요로 하니까. 그래서 분명 나중에 브레멘에 가서 더 많은 이들과 더불어 대화적이고 반항적이며 자유로운 문화를 꽃피우기 위한 투쟁으로서 블루스사건을 일으키고자 애쓸 거라고 나는 믿는다. 결코 폐쇄적 정체성에 매몰될 수 없는 탈정체성의 정치로 나아가는 음악적 정체성의 구현체가 바로 다성주의 블루스니까. 아, 이렇게 사유의 장난을 한껏 벌여놓고 나니, 브레멘 음악대의 블루스, 줄여서 ‘브레멘 블루스’의 신화화 작업은 이제 겨우 마무리된 것 같다. 

    신화는 의례에 이르고자 하고, 의례는 신화에 이르고자 한다. 신화와 의례는 상호의존 관계를 잘 맺어야 현실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브레멘 음악대』 이야기를 블루스라는 의례와 어떻게든 결부시켜 신화화하는 장난을 감히 시도해보았다. 또한 공동체의 폐쇄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다성주의 음악이 과연 얼마나 유용한가 고려해보았다. 신화가 결핍된 의례는 공허할 뿐이요, 의례가 결핍된 신화는 황당할 따름이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무엇일까? 아니 기성의 신화와 의례가 아닌, 변화한 시대의 권력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정체성을 표현하는 신화와 의례를 새롭게 모색해보는 건 어떨까?  


ⓒ 웹진 <제3시대>



  1. 참고동영상 https://youtu.be/eX4DYoLrCwM [본문으로]
  2. 참고동영상 https://youtu.be/UKZ8ob_G5uc [본문으로]
  3. 참고동영상 https://youtu.be/VgTWSEfGwEU [본문으로]
  4. 참고동영상 https://youtu.be/-R-QbBwXjU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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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한 울림

나상윤
(본 연구소 회원, 목사)


1

석가탄신일 낮에 열리는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아침 전북 익산으로 향하는 하객전용좌석버스에 올라탔다. 비교적 편안한 자리를 확보한 뒤, 눈을 지긋이 감고 바로 잠들고자 애를 썼다.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가장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자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날 일부러 최선을 다해 밤새우고 나서 버스를 탔다. 잠자기에 최적의 몸을 만들어놓은 상태인지라, 수없이 많은 꿈을 꾸며 무척 단 꿀잠을 잤던 것 같다.

한 서너 시간 가량 잤을까. 자는 게 좀 지겨워지고 바깥바람이 슬슬 그리워지기 시작할 즈음,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보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버스 안의 하객들이 “어떡해” “어떡하냐” 하며 소란스레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나서야 사람들이 왜 걱정스러워 하는지 파악이 됐다. 길이 차들로 온통 꽉 메워져 있었던 것이다. 차 안에는 각양각색의 탄식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큰일은, 익산의 어느 교회에서 낮 1시에 결혼식을 시작하기로 돼 있는데, 12시 반이 되어도 하객들을 왕창 태운 대형좌석버스는 아직 경기도권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서울에서 출발한 하객들 모두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혼식이 벌써 끝나버렸다는 현지 특파원의 보도를 듣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서로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했다. 오늘 안으로 도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익산까지 꼭 가야만 하는가? 식도 다 끝난 마당에... 아님 서울로 그냥 돌아갈까? 축의금은 은행계좌로 보내주면 되니까... 그래도 신랑신부 얼굴은 보고 축하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저렇게 좌충우돌하며 여러 얘기가 오간 뒤, 신랑과 통화하여 절충안이 발표됐다. 신랑의 고향인 충남 서천군 장항읍에서 신랑신부를 만나, 다함께 삼계탕을 먹고 단체사진 찍고 곧바로 헤어지기로...

삼계탕을 잘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흥미로운 상념에 잠겼다. 목적지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한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그것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면서, 이 버스 안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제 시간에 이르지 못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이들, 앞뒤로 꽉 막힌 상황이 답답해서 죽는 시늉을 하는 이들, 생리적 신호가 오는 걸 감지하고 언제 터질지 모를 불상사를 어떻게든 지연시키고자 가진 애를 다 쓰는 이들, 그리고 이런 저런 소리 듣다 시끄럽고 귀찮으니 그냥 부족한 잠이나 더 채워 자려고 하는 나.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았다.


2

말도 못할 정도로 복장 터지는 일들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텍스트들이 넘쳐난다. 또 한편으로는,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둘러싸고 서로 끊임없는 논쟁을 한다. 그렇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그 말잔치 안에서 대상화된 타자가 겪은 아픔을 몸으로 느끼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내가 직접 비슷한 일을 겪어보지 않고선,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 무언가를 접하고 마음이 울리는 체험을 할 때가 있다. 나아가 무딘 마음이 그 울림으로 녹아들어가, 급기야 그 무언가에 나 자신이 융화되어, 내 속에서 그것이, 그것 속에 내가 살아가게 되는 체험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체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함께하고 서로의 삶이 운명적으로 얽혀 있다고 믿는 집단을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의 비극적인 사건에 우리 마음이 울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사건의 당사자와 우리를 공동체로 엮을 수 있는 감정의 끈이 너무도 가늘어져 너무도 미미한 울림 외에는 일어날 수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대중 모두가 좋아서 함께 따라 부르며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노래가 거의 없다는 것도, 우리 주변의 이름 모를 이웃들과 공동체의식을 공유하기 힘든 상황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아무리 많이 반복해서 듣게 된다 한들,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이웃의 몸과 내 몸이 공명(共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 가운데 그처럼 진부한 얘기를 계속 들어줄 만큼 마음이 한가한 영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랑’이란 게 도대체 가능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비극을 접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의 비극임을 통감하며 아파하는 노래들을 듣고 부르다가, 타자의 아픔에 공명하며 함께 울다 간 흔적들, 그 눈물꽃이 피었다 진 자취를 발견하며 감동하게 되는 일이 있다. 나는 특히 김지하의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주여, 이제는 여기에>(<금관의 예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림)를 부르다 그런 체험을 할 때가 간혹 있는데, 가냘프고 메마른 떨림으로 무겁고 참담한 어조를 내뱉으며 이 노래는 시작된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 대한 나의 음악적 인상을 한번 소개해보고 싶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가단조 4분의 4박자 곡으로,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리고 벌스(verse)와 코러스(chorus)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벌스는 부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어둡고 깊게 침잠하면서 체념적인 단조의 정서가 지배적인 데 반해, 코러스는 장조화성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음높이가 점진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며 치고 올라가면서 점점 더 절박한 감정을 격정적으로 쏟아내게 한다. 그러다 후렴구 끝자락에 와서야 급격히 격정을 가라앉히며 노래를 마무리 짓게 한다.

그동안 나는, 이러한 곡 전반부와 후반부의 극명한 대립이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대립이 양쪽 정서를 극대화시키는 데 이바지하면서, 노래하는 이의 감정을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효과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선율이 지닌 울림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부르다 눈물이 울컥하기 일쑤다. 그렇게 감정이입이 잘 되는 건,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아마도 나락에 떨어진 정서로부터 솟구치길 원하는 대중의 갈망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데 최근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부르다, 이 곡이 지닌 흥미로운 비밀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됐다. 바로, <주여, 이제는 여기에>에서 계명 “미”가 지니는 위상이 범상치 않게 다가온 것이다.

우선, <주여, 이제는 여기에>에 쓰인 음 가운데 “미”가 가장 많이 쓰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벌스에서 가단조의 화성이 전개될 때, 으뜸화음인 ‘A minor’ 코드(chord)에서 “미”는 5도 음의 위치를 차지하는 데, 으뜸음인 “라”보다 “미”를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그 정서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저항적 의지를 드러내는 듯하다. 그리고 다장조로 전조된 상황의 후렴에서, “미”는 으뜸화음 ‘C’ 코드 가운데 장3도 음으로서, 장3도 음이 지니는 밝지만 불안정한 느낌을 선사한다. 요컨대, 이 곡에서 “미”는 체제의 논리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으려 애쓰는 반항적 주체의 표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미”는 <주여, 이제는 여기에>에서 가장 높은 음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후렴에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선율이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 “주여”를 외칠 때와, “여기에 우리와 함께”를 외칠 때, “미”로 가장 높은 음을 부르게 함으로써, 고음이 지닌 특유의 긴장과 함께 불안정한 떨림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지금 이곳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그 간절함이 하늘을 닿을 듯 절정에 이르며, 이 울림을 통해 혁명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끝으로,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미”(low)로 시작해서, “미”(high)로 가장 높게 치솟아 올랐다가 다시 “미”(low)로 마무리 된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이 얼어붙고 태양마저 빛을 잃은 듯, 자연으로부터도 철저히 버림받은 듯한 이들에 대해, 처음에는 비록 “미미”한 떨림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작은 울림들이 모이고 모여 큰 울림을 이루고 난 뒤, 다시 미미(微微)한 울림을 낳을 수밖에 없는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드라마적 구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나는 일상 가운데 미미하게 떨려오는 울림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 비록 그 소리의 내력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무의미한 소음으로 흘려버리기 십상이지만, 그 소리들로 인해 부지불식간 연주하게 되는 내 몸의 떨림, 그 미미한 울림이야말로, 그것과 연루된 수없이 많은 타자와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런 연대를 통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권력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혁명의 씨앗인 것이다.

3

전혀 예상치 못한 교통 정체 상황 속에서 우리는 각자 내면의 지옥을 만들고 그 속에서 괴로워한다. 불안하고 답답하기만한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하나 같이 불쾌하게 다가온다. 그러한 개인의 고통을 경감하고 회피하기도 버거운 판에, 남들이 겪는 고통이 어떻게 마음에 와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내어, 내 몸이 끊임없이 연주하는 미미한 소리에 귀기울여 보자. 그 울음소리에 진정으로 공명하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몸을 조율해보자. 그렇게 주파수를 맞추는 가운데 도처에 수없이 많은 울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우주와 몸이 어우러져 거대한 울림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진정 음악이요, 구원체험이 아니겠는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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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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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4 13: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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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페이지로 보게되어 반갑고. 잘지내지요.
    세상의 소음과 보이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어리둥절하게 되어버리는 때에
    노래에 대해 알게 되는 것같네요. 내용에 대해 잘 모르지만 미미한 음성에
    공감합니다.
  2. 임선이
    2011.03.18 20:5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마음의 여유가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지금 동감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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