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트 : 자명한(doubtless) 것을 의심(doubt)하라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다우트(doubt)’.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의 제목이다. 유명한 연기파 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플린 신부 역)과 메릴 스트립(알로이시스 수녀 역)이 열연했다는 것이 무색하게도, 올해 초 개봉했던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그러니 이 영화가 ‘망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블로그나 여러 인터넷 글들을 살펴보니 그 반응이 흥미롭다. 마치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 일종의 합의가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본 영화평들의 공통점을 요약하면, 애초부터 잘못된 믿음에 근거해 누군가를 의심(doubt)하던(유죄를 확신하던) 원장수녀가 결국 자신의 확신을 회의(doubt)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청년부 사람들과 이 영화에 대한 인상을 함께 이야기했을 때 나왔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대다수 사람이 이 영화를 읽는 방식에 일종의 ‘합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꼭 ‘오버’는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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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은 의심할 필요 없이 자명해(doubtless) 보이는 ‘교훈’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라는 단어를 ‘삶’이라는 단어로 바꿔 보면,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수용하고 있는 삶의 전제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는지, 그리고 그 전제들을 성찰하지 않는 것이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지 사유할 수 있는 단초를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플린 vs. 알로이시스, 당신은 누구에게 끌리는가?

이 영화의 스토리 전개를 끌고 나가는 주된 동력은 한 카톨릭계 학교에서 벌어지는 주임신부 플린과 원장수녀 알로이시스의 갈등과 대립이다. 이들의 갈등은 새내기 수녀 제임스가 자신이 목격한 플린 신부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원장수녀에게 고백하면서 수면 위로 부상한다. 제임스 수녀는, 수업 중 도널드 밀러를 사제관으로 불렀던 주임신부가 도널드의 속옷을 사물함에 갖다 놓는 것을 목격하고 원장수녀에게 이를 이야기한다. 도널드가 사제관에 다녀온 후 ‘겁에 질린 듯 이상한 자세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술냄새가 났다’는 의혹 혹은 의견도 이야기에 덧붙여졌다. 제임스 수녀의 말을 듣고 ‘이제야 확실한 것을 잡았다’고 확신한 원장수녀는 주임신부를 ‘권력형 아동성추행범’이라 단정 짓고 그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임신부가 ‘설마 이렇게 좋은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을 만큼 타인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말과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반면, 원장수녀는 주임신부와 대조적으로 말과 행동이 차갑고 권위적인, 한마디로 ‘비호감’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의심을 증명할 ‘직접적’ 증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도 않는다. 비호감 원장수녀가 ‘증거’도 없이 호감형 주임신부를 몰아붙이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기본 얼개이다. 원장수녀의 ‘쥐몰이’같은 공격에 질린 주임신부는 마치 자신이 큰 양보를 하듯 학교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학교를 떠난 주임신부는 더 좋은 직위로 ‘승진’해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원장수녀는 “나에게 (믿음에) 회의가 생겼다”는 절규를 한다.(그녀는 ‘진실은 승리한다’는 믿음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결부시키고 있었던 듯하다.)

이 영화는 절묘한 대사의 배치와 장면 구성으로 인물들의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으므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의 느낌을 도저히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정식화하는지를 보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정식화하는 가장 흔한 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편들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방식은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의 갈등관계에서 어느 쪽이든 한쪽이 ‘옳은 편’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영화의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 영화는 원장수녀의 의혹을 정당화해줄 증거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원장수녀는 터무니없는 의혹을 진실인 양 여기며 엄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인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블로거들이 자신의 영화해석을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오버랩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쉽게 확인된다. 한 블로거는 미네르바 사건과 용산참사를 예로 들며 이명박 대통령과 경찰 등이 보이는 행태를 원장수녀의 그것과 동일시하고 ‘도덕적 확신범’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했던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는 한국 보수세력의 터무니없는 태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편들기’가 실패하는 지점

그런데 사실 영화에서 제시된 ‘불충분한 증거’를 문제 삼는다면, 의혹을 제기한 원장수녀만 비난할 수는 없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의혹의 당사자인 플린 신부도 자신의 결백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보이는 몇몇 태도는 그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원장수녀의 면담 요청으로 학교를 방문한 도널드의 어머니(밀러 부인)를 보고 긴장하는 장면, 알로이시스 수녀가 플린의 예전 교구 수녀에게 그에 대해 묻기 위해 전화를 했다는 말을 듣고 ‘왜 주임사제가 아니라 수녀에게 전화했냐’며 흥분하는 장면, 알로이시스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다그치자 ‘수녀님도 죄를 지은 적 있으시죠?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라고 딴소리 하는 장면 등이 그 예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나 플린 신부나 모두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우리는 명확하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편드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도 쉽게 정당화될 수 없는 읽기 방식인 것은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영화를 다시 살펴보면, 이 영화는 오히려 애초부터 특정한 이를 편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이 영화가 은유와 생략을 무수히 나열하는 방식으로 장면들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원장수녀와 제임스 수녀의 대화, 원장수녀와 주임신부의 논쟁, 원장수녀와 밀러 부인의 대화 등에서 대화의 주체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명확하게 지칭하기를 회피하며 끊임없이 은유적인 표현과 암시들을 나열한다. 가령,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의 혐의가 ‘권력형 아동성추행’임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밀러 부인도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는 식이다. 오히려 자신의 결백을 정돈된 언어로 명확히 지칭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알로이시스가 플린에게 두는 혐의는 더 짙어진다. 때문에 이 영화 속의 대화들은 의미를 고정시키고 의사소통을 순조롭게 하기보다는 모호함만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들의 대화나 표정, 몸짓 등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의 경향성 안에 포섭된다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의미의 공백을 만드는 방식으로 서사가 구성되나, 영화를 보는 이는 그 공백을 채우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해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를 채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편들기’를 하게 된다.

‘호감=진실’ vs. ‘비호감=거짓’ 구도 뒤틀기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영화가 초반 장면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호감 vs. 비호감’과 ‘옳은 것 vs. 그른 것’의 배열을 의도적으로 교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앞부분은 알로이시스와 플린의 갈등이 시작되기 전 이들이 각기 어떤 캐릭터인지를 묘사하는 데에 치중하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 교차하며 두 인물에 대한 묘사가 대립되는데, 두 인물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기 전까지 전개됐던 장면에 편의상 이름을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플린의 강해>-<등교 시간>-<교실>-<수녀들의 식사>-<학생 식당>-<교실>-<농구장>-<신부들의 식사>. 이러한 배열 이후 알로이시스는 자신과 플린의 대립을 ‘진실 대 거짓’의 구도로 보고 플린이 은폐하고 있는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표독스럽게 몰아간다. 반면 플린은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진실의 자리에 있고 알로이시스가 거짓의 자리에 서 있다고 항변한다. 아마 위에서 이야기한 장면들 중 <신부들의 식사> 장면이 없었다면 플린의 시각으로만 이 영화의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별 문제가 없었을 수 있다. <신부들의 식사> 장면은 핏물 흐르는 고기를 탐욕스럽게 먹으며 뚱뚱한 모녀에 대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플린과 두 명의 나이든 신부를 담고 있다. 장면 배치 속에 호감=플린, 비호감=알로이시스의 순서를 분명하게 지켜오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 장면은 분명 이물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이물질 같은 장면 때문에 우리는 ‘부당하게’ 누군가를 편들지 않고도 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로이시스 수녀가 부당한 의혹을 전제로 한 신부를 괴롭혔으나, 결말에서 플린 신부가 오히려 승진이라는 보상을 받고 알로이시스는 자신의 확신에 회의를 품게 된다고 보는데,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플린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엇이 ‘사실’인지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서로 자기가 옳다며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한쪽의 주장에 쉽게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이 진실일 가능성은 거의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무서운 상상을 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플린은 이곳저곳 자신이 옮겨온 곳마다 거기서 따돌림 당하기 쉬운 아이를 보호하는 척하며 사실은 성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권위적이지 않고 사교적이며 언변도 좋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윗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평소 비호감이던 한 수녀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플린이 성범죄자라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 사람들은 그 수녀를 더 미워하게 되고 나아가 그녀를 학교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플린을 지지하는 사람이 바로 ‘나’일 가능성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공감의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죽임의 질서’

<신부들의 식사> 장면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가 이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에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우리가 내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들은 우리에게 내면화된 ‘선호’ 또는 ‘공감’의 체계와 칼로 자른 것처럼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가 옳다고 굳게 믿고 했던 행동들을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아보면 그다지 일관성 있지도 않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지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일관성 있게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우리의 ‘올바른 행위들’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플린 신부의 시선을 빌려 현 정권과 보수세력의 아집과 편견을 비판하며 그들을 ‘적’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이 내면화한 아집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위들은 이 사회 보수층의 ‘아집과 편견’을 옹호하고 있다. ‘뉴타운’과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혹은 정책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같은 편’들은 광우병에 반대하며 ‘미친소, 너나 처먹어’라는 공통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말을 따라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기도 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지못미’를 부르짖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편’들이 마치 용산참사는 ‘그런 일이 있었나’ 생각하는 듯 조용하다.

이 글의 논지를 이해하는 이라면, 지금 용산참사를 언급하는 것이 단순히 용산참사 현장에 나가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할 것이다. 또한 이 글의 목표가 현 정권과 보수세력의 편에 서서 그들에 대한 비판에 반비판을 하거나,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에게 편드는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도 이해할 것이다. 요점은, 상대가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을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세대, 계급, 이념적 성향의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사람마저 그에 대한 추모 의례에 참여했던 것을 돌이켜볼 때, 세대, 계급, 이념, 이해관계 등을 기준으로 나뉜 ‘적’은 ‘나’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적과 동지의 명백한 대립이 은폐하는 ‘공감의 체계’, 그 공감의 체계가 있기 때문에 작동하는 ‘죽임의 질서’, 그리고 죽임의 질서에 ‘공모하는 자로서의 나’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까지 이르지 않는 한 ‘참사’는 계속될 것이다.(‘참사’의 의미는 여러분 각자가 채우시라. 우선 나는 그 자리에 ‘이명박 정권’을 두겠다. 바꿔 말하면, ‘이명박 정권’은 ‘적’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참사’(=사건)이다.)

결론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가 자신의 패배에 절규하는 장면을 보며 통쾌함을 느낄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서사를 모호하게 하고 교란하는 그 지점에 착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굳게 믿는 ‘편들기’의 기준들이 어느 지점에서 교란되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 우리가 죽임의 질서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 구원과 해방의 과정인 것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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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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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열매실
    2009.07.22 17: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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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어내려 가면서 "공감"이 갔다, 안 갔다 했는데,
    "마지막에 엘로이시스가 자신의 패배를 절규하는 장면"이라는 지점에 와서는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본 바로는, 엘로이시스의 마지막 대사는
    "나는 너무 의심스러워!"였던 것 같습니다.
    (명확하진 않지만 그런 뜻이었다고 봅니다.)
    여기서의 의심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이 말이 많은 것을 내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이 어떤 사람의 편에 섰느냐에 따라서
    엘로이시스 자신의 확신이 될 수도 있고
    플린 신부의 행동일 수도 있고, 둘 다 일수도 있겠지요.
    심각하게 말하면 옳고 그름, 윤리와 비윤리 혹은
    자신이 절대화하고 있는 신앙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엘로이시스 비호감, 플린 호감이라는 구도도
    내키지 않습니다.
    겉보기에 냉정하고 완고한 종교인 같지만
    적어도 엘로이시스는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고자 했고
    자기 나름의 정당한 절차를 밟으려 했습니다.
    플린 신부에게 직접적으로 물었고, 아이의 어머니에게 충고했으며
    플린 신부의 직설적인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서 해야 할 바를 한 것이지요.
    플린 신부가 부드럽고 따뜻하고 원장 수녀에 비해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 중요한 식사 장면'에서 보듯이
    비만하지만 단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기가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는 약자처럼 보이지만, 남자의 특권인 강론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왜 신부에게 묻지 않고 수녀에게 물었느냐고
    따지기도 하고, 너는 죄 지은 것이 없느냐고 강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신부들의 회의를 통해 영전해 갑니다.
    하지만 그의 영전이 그의 결백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로 인하여 엘로이시스의 "의심", 그리고 관객인 저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제 생각엔 감독이 비교적 이 두 상반된 인물의 됨됨이와
    사건의 전개 과정을, 그 어느쪽의 편도 들지 않고
    공평하게 전개시키며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편을 들고 공감하는 건 관객의 자유겠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를 어느 한 사람의 승리로 읽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결국 "인간의 의심"에 관한 영화이고
    진실에 관한 영화이고, 더 나아가 과연 그 진실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용산도 마찬가지겠지요.
  2. 유승태
    2009.07.22 21: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열매실님께..

    답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다 써놓고 보면 꼭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열매실님께서 이야기해주신 것들의 대부분은 저도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열매실님께서 '문제화'해주시니 이렇게 더 해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군요.

    제가 보기에, 열매실님은 제가 '영화의 메시지를 어느 한 사람의 승리로 읽'고
    있다고 보셔서 그것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글은 기본적으로 '대다수가 플린에게 공감한다'는 전제(혹은, '상상')에서
    논의를 시작했으니 이 전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아마 그 뒤에 이어진 논의가
    대부분 수긍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알로이시스의 패배' 운운한 것이 제 생각이
    아니라 플린의 시선을 통해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저는 오히려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제가 문제 삼고 있는 건 왜 다수의
    사람들이 플린에게 쉽게 감정이입하고 그에게 공감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감상하냐는
    것이지요.

    <신부들의 식사> 장면을 언급한 것도 플린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이들이 많다고
    생각해서 언급한 것일 뿐입니다. 사실 열매실님이 동의할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제 생각에도 알로이시스가 '비호감'으로만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점점 눈이 멀어가는
    연배 높은 수녀님을 돌봐드리는 행동이라든가 제임스 수녀에게 냉정한 듯하면서도
    그를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은 보기에 따라 '비호감'이 아닐 수도 있지요. '비호감'이라는
    표현도 플린에게 공감하는 많은 이들이 다양하게 표현한 것들을 제 나름 요약한
    것일 뿐입니다. 제게도 알로이시스는, 물론 끌리지 않는 면이 더 많았지만, 나름
    공감도 가고 이해도 되는 인물입니다.

    다만 열매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알로이시스를 '그녀는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서
    해야 할 바를 한 것'이라고 보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한백교회
    청년들과 이야기할 때 나왔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이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아니, 꼭 그런 식으로 해야 해?' 이 질문이 나온 건 알로이시스에게
    공감이 가지 않아서이기도 했을 것이고, 알로이시스가 '객관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플린과 권력을 두고 다투는 '욕망'도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플린과 알로이시스가 서로 상석(?)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 장면이
    이 점을 드러내는 좋은 장면일 것 같습니다.)

    플린과 마찬가지로, 알로이시스를 '우리편'으로 여기는 것도 문제가 많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플린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거나, 알로이시스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게 아니냐는 거지요. 이 지점에서 약간 비약이 있긴 했습니다만,
    우리가 당파성을 전제하고 사안이나 사태를 보려 하는 태도 때문에 서로의 '적대'를
    무화시키는 '공감의 체계'는 쉽게 가시화되지 않고, 이 때문에 '죽임의 질서도'
    작동할 수 있다는 거지요.

    때문에 저는 이 영화가 '인간의 의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감독이 의도했든 안했든, 이 영화는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에 우리의 정치적 '습속'이 배어나오고 있음을
    이 영화는 사고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물론 여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사실 마지막 장면에서 일종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 강인하고 자기절제의
    화신 같았던 알로이시스가 왜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렸는가 생각해보면,
    바로 앞 장면의 대사를 볼 때 그녀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 은폐와 속임수의
    달인 같던 플린이 학교를 떠남으로써 그의 유죄를 인정하는 행동을 이끌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플린이 일종의 승진을 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믿던 신의 '정의'가 관철되지 않는 학교 밖 세계의 권력을 감지하면서
    무기력과 절망감에 "I have such a doubt!"라는 절규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플린에 대한 알로이시스의 의심이 명확하게 규명된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플린에게만 의심이 깊어질 특별한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알로이시스의 의심이 '허구'로
    밝혀지는 것으로 읽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용산에 대해서도, 개인적 차원에서의 반성이 있었든 어떻든 그건 제가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일 것입니다. 다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용산참사를
    둘러싼 '사회적 행위'의 의미를 어떻게든 규명하고 그것이 개인적 차원의 확인되지
    않는 반성만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죽임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나는 그 작동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닐까 반성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답글이 주저리주저리 또 길어졌네요. 이 답글 때문에 오히려 논쟁거리만 더
    확대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영화평 밖에서 영화평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어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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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경
(월곡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외국인 여성들에게 한국의 문제점들을 묻기 전에
요즘 초등학생들이 느끼는 한국의 문제점들을 사회자가 말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5위 : 정치인들이 맨 날 싸운다.
4위 :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는 것 같다.
3위 :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은 왜 우리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2위 : 어른들은 공부를 잘해야만 알아준다.
1위 : 남한과 북한이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서 나온 자료인지는 모르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사뭇 놀랄 일이다.
어떻게 이런 주제들이 아이들의 가슴에 배이게 되었을까 ?
싸움과 갈등, 긴장과 왜곡, 분열이 배어버린 것이라면 걱정이다.
아니면 평화와 평등, 존중, 화해의 꿈들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를 주도하는 힘이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상대에게 철저히 인색한 정치는 더욱 피폐한 싸움을 예상케 하고
빈부의 양극화는 일정한 추세를 넘어 당연지사로 삼고 있다.
여전히 무소불위 성장경제의 환상은 민족주의를 너머서고, 한편, 낡은 좌우의 빗금을
쳐대며 반쪽짜리 민족주의를 들이댄다. 통일은 커녕 전쟁이 우려되는 위기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꿈이 들어있을까 ? 멍이 들어 있을까 ? 참 쉬운 문제가 아닌가 ?

노무현의 죽음이 슬프다.
그를 죽게 한 세력들은 움추린듯 하지만 그들에게 그게 중요한 변수가 될까 ?
좌향우라고 비판하며 일찍이 정치적 기대를 저버렸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슴이 아프지만
뭐라 보탤 말이 없다.
백무산이 노래한다.
‘우리가 당신을 버렸습니다.  ...말뿐인, 허세뿐인 우리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열 번 스무 번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버리고 나니 난데없는 철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바위벼랑에 떨어진 피투성이 얼굴은 우리의 얼굴이었습니다.
... 이천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사내의 외침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패배가 여러분의 승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피에 굶주린 자들에게 당신을 먹이로 던지고 피의 잔을 나누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 슬픈 선지자의 꿈이여... 당신은 정치가가 아니었습니다. ‘(백무산)
안도현도 노래한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요, 당신, 부서진 뼈를 맞추어 일어나야
우리가 흩으러진 대열을 가다듬고 일어나요.
끊어진 핏줄을 한 가닥씩 이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꾹꾹 눌러둔 분노를 붙잡고 일어나요
피멍든 살을 쓰다듬으며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슬픔을 내던지고 두둥실 일어나요
당신이 일어나야 산하가 꿈틀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동해가 출렁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안도현)

이 독실한(?) 정권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슬픈 전직 대통령에게 이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교회 밖에서 선연한 성서의 이미지들이 뿜어내고 있다.
소위 ‘성령충만’ 하다는 이 땅의 교회들이 이런 외침들을 어떻게 들을까 ?
‘욕심충만’ 한 성공의 신화 속에 예수를 끼워 파는 자들은 어떻게 들을까 ?
아이들의 가슴에 새겨진 멍은 비극의 전조일 수 있다.
아니 ‘바위에 떨어진 피투성이 얼굴 같은’ 삶이 민중의 현실이 될 수 있다.
욕망의 성전들이 정의의 강물을 삼켜버리는 ‘하마’로 보일 수도 있다.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고 ? 이 정권이 강요하는 희망의 황폐보다는 더 낫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어른들을 심판하는 그림자가 멍울져 있다.
가난한 시인들이 첨탑의 꼭대기들을 부끄럽게 한다.
강령도, 전술도 없는 촛불 속에, 등 떠밀지도 않는데 나선 조문의 행렬 속에
성령의 바람이 실려 있다고 한다면, 너무 비신학적인가 ?
성령이 임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눌린 자, 눈먼 자, 갇힌 자에 자유를 숨 쉬게 하고
서로 다른 이들이 소통하며, 함께 살아갈 길을 트게 하는 것이 아닌가 ?
이 소중한 추상을 오늘 우리 삶에 어울리는 구상으로 그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지?  아니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표현으로 ‘어찌 할꼬 ?’ 이다.
이 땅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 ?
기만과 허위의 이념, 언론장악의 맹목, 전쟁의 위기, 치졸한 권세의 폭력을 거슬러
가는 길은 무엇일까 ? 
살면서 물어야 한다. 살아서 그려가야 한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때까지 물어야 한다.
열세와 약세와 한계와 작음에서도 물어야한다.
우울과 비관과 역겨움과 설움에서도 그려가야 한다.
그야말로 또 하나의 희망이, 또 하나의 기쁨이, 또 하나의 용서가
이 슬픔과 좌절과 분노의 복판에 일어나기까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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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24 00:0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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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가 천당서 띄우는 편지


    고졸 출신, 자수 성가
    취임 초 부터 ‘그들’은
    바보를 아예 대통령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재임 5년 동안 사사건건
    시비 걸고 발목 잡고
    탄핵까지 들먹거리고
    대통령 ‘못해 먹게’ 했다

    그 바보는 너무나 바보였다
    반 세기 넘게 쌓이고 쌓인
    한국 사회의 각종 악폐들
    어찌 해보려 혼신을 다했다

    정경 유착 / 금권 정치 타파
    권위 주의 / 지역 감정 해소
    서민 옹호 / 정의 사회 구현
    온 몸을 던져 싸웠다

    앙시엥 레짐에 밀착된 그들
    빨갱이다, 좌파 노선이다
    두 눈에 쌍심지 켜고
    ‘노무현 죽이기’를 작심했다

    그 바보가 낙향한 후에도
    ‘노무현 죽이기’는 이어졌다
    뜻있는 일 해보려는 ’雄志’
    그들에겐 눈엣 가시였다

    권력의 시녀 검찰이 나섰다
    무죄 추정의 원칙
    피의 사실 공포 금지의 원칙
    아랑곳 않고 혐의를 마구 흘렸다

    수구 꼴통 황색 신문들
    얼씨구나 신나서 작문을 써댔다
    억지 ‘진술’를 ‘진실’인 양 호도
    한국식 인민재판으로 몰고 갔다

    포괄적 뇌물죄 라고?
    그럼, 권력 쥔 너가 누구에게
    점심 한 번 얻어 먹은 것은
    포괄적 뇌물이 아니더냐?

    100만 불? 500만 불? 40만 불?
    그래, 백만 불 집사람이 빌려 썼다
    남들같이 자식 키우고 싶은 母情
    나중에 갚을 셈 치고…

    해외에서 500만 불?
    네 얼굴 보고 준 돈이라고?
    너가 몰랐을 리 없다고?
    ‘정황상’ 그렇다고?

    그들끼리 사업상 주고 받은 돈
    바보 얽어 넣으려 억지 춘향
    어느 권력자 어떤 정치인 이라도
    그 ‘정황상’ 잣대를 한번 대봐라


    國監도 못 묻는 ‘특수 활동비’
    법적 보장된 ‘묻지 마’ 예산
    이를 전용 횡령 했다고?
    역대 대통령에 한번 물어봐라
    어디에,어떻게들 ‘탕진’했냐고…

    1억 시계 뇌물로 받았다고?
    명품이 뭣인지도 모르는 바보다
    바보가 그런 따위 걸치고
    거드럭 거리는 속물로 보이더냐

    하나님이 물으신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 라도
    그 세상에서 惡과 싸워야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느냐고

    바보는 눈물 흘리며 대답한다
    ‘죽이기’를 겨눈 화살 칼날
    방어할수록 더욱 옥죄오는 그 强度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고통 그 시련이 나 하나면
    비록 그 것이 惡法이라도
    감옥이고 어디이고
    즐거이 갔을 것 입니다


    그러나, 나 로 인해 고통받는
    수 많은 주변 사람들 가족들
    차마 눈을 뜨고 볼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힘 없는 바보
    자신을 죽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보를 껴안으신다
    너의 자결은 순교와 같니라
    한국 역사상 첫 ‘참 대통령’
    이제 너의 진가가 밝혀지리라

    <장동만: 05/25/09 記>
    ://kr.blog.yahoo.com/dongman1936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1)
: 죽음의 고고학 考古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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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살아남은 자의 슬픔, 당혹, 그리고 질문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이 열리던 시간에 맞춰 시카고와 뉴욕에 거주하며 신학공부하고 있는 한인 유학생들도 추모예배를 드렸다. 뉴져지 드루 대학과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유학생들이 함께 드루대학에 모여 문동환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시카고의 경우는 감리교 신학교인 Garrett 신학교, 장로교 신학교인 McCormick,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 시카고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한인 학생들이 시카고 신학교 채플실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리고, 소찬을 나눈 후에 시국토론회도 개최하고, 성명서도 낭독하였다.

두 경우 모두 지역 언론의 보도를 타서 추모예배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려 한인사회에 알려졌는데, 문제는 추모예배 기사 밑에 달린 댓글들에서 발생하였다.2) 노무현이 크리스챤이 아니었는데 왜 추모예배를 드리냐? 신학교에서 불교신자의 추모예배를 드렸다고 난리다. 노무현이 불교신자였나? 다른 쪽에서는 빨갱이를 걸고 넘어진다. 미국 이민사회에서 좌파와 빨갱이는 한국 본토에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다. 전체 미국사회에 있는 한인 이민자의 상당수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이민 온 경우라, 아직도 반공은 그들의 굳건한 실천이성이다. 이런 까닭에 이민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토론중에 좌파와 빨갱이가 뜨면 모든 상황은 종료된다. 노무현은 바로 그 좌파다. 그런데, 어떻게 좌파에 대한 추모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허허 웃으며 넘어갔는데, 죽음과 자살에 대한 물음 앞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신앙인으로 죽음을, 그리고 그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 선택과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미국에 와서 생활하면서 나는 고국에서 들려온 몇 건의 굵직한 자살소식에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에 나왔던 영화배우 이은주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소식, 그 전에 현대그룹 회장 정몽헌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사건, 작년에 있었던 대스타 최진실의 자살,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까지....인기스타와 재벌, 그리고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한 유혹과 압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했던 강압의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그들의 죽음은 살아남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 존재론적으로 우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만은 분명하다.

죽음의 무도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는 피겨 요정 김연아 선수가 검정색의(빨강이었나?) 드레스를 입고 연기를 펼치다가 급하게 턴을 돌더니 관객들에게 뇌살적인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연기를 마무리 짓는다. 언론에서는 여자 선수 최초로 200점이 넘은 피겨스케이팅 세계신기록이라고 호들갑이다. 김연아 선수가 연기할 때 흘러 나왔던 음악이 바로 생상의 ‘죽음의 무도’이다. 원래 이 곡은 중세말기에 유행했던 ‘죽음의 무도’ (dance macabre)에서 기원한다. 춤을 추고 추다가 죽음에 이른다는 경이적이고 낭만적인 모멘트, 그 안에 깃든 서글픔, 허무를 초극하려는 의지와 공포에 맞서는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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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무도’는 중세 말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서구 종교와 예술 전반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위에 걸린 그림 Bernt Notke (1435-1508)의 <죽음의 춤>을 비롯한 많은 ‘죽음의 무도’를 그려내는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일반 백성, 귀족, 사제, 심지어는 교황까지 해골과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마치 온 유럽이 죽음과 한판 대동의 춤판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문화사적 영향에서일까, 기독교에서 춤은 중요한 상징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자라난 교회에서 즐겨 불렀던 노래 한 곡이 기억난다. 1960년대 미국 사회운동 전성기에 불리웠던 노래를 번역한 곡이라고 하는데 “춤의 왕”이라는 제목의 노래다. 예수의 일생을 짧게 요약하여 각 절의 가사를 만들고, 후렴구를 반복하는 형식이었는데, 그 후렴구 가사가 이렇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신나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 너 인도하련다.” 예수의 춤을 통해 (예수의 기억 속에) 우리가 새겨진다는 것, 우리의 춤을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 예수가 저장된다는 이 가사의 내용은 사춘기 시절 나에게 예수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한없는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몇 해전 Karen Baker-Fletcher가 <Dancing with God>를 출판했다.3) 책 제목을 처음 접하는 순간 중.고등부 시절 자주 불렀던 ‘춤의 왕’이 생각났다. 이 책의 부제가 The Trinity from a Womanist Perspective 인 것으로 보아 삼위일체 교리를 흑인 신학, 특별히 흑인 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Baker-Fletcher는 Dance를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한다. ‘그녀에게 있어 Dance는 폭력과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용기와 치유’라고 이 책의 서평에 참여한 GTU의 Archie Smiths는 말한다. 결국, Baker-Fletcher가 이 책에서 끌어온 Dance라는 상징도 중세 말 ‘죽음의 무도’이후 서구정신 깊숙이 저장된 춤에 대한 모티브에서 영감을 가져와 그녀 자신의 해석학으로 발전시킨 경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뿐 아니라 중세 말 유럽을 강타한 이슬람 신비주의 계열의 수피교도들에게도 춤은 신에 이르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시카고는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사회이다. 이런 까닭에 신학교들마다 유대교와 이슬람에 대한 관심과 대화의 일환으로 이슬람권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이슬람과 신학의 대화를 도모하기도 하고, 유대교 랍비를 교수로 초빙하여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다리를 놓는 강의를 열기도 한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모스크와 유대교 회당을 방문하여 그들의 예전에 참여하고 이슬람 이맘(이슬람 종교 지도자)이나 유대교 랍비들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궁금증에 대해 묻고 답을 할 기회가 종종 있다. 몇 해전 터키에서 온 이슬람 친구 덕분에 수피교도들이 신과의 만남을 갈망하면서 원색의 양탄자위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이 춤을 추다가 이 춤을 추고 추다가 죽어도 괜찮겠다’라는 위험한(혹은 황홀한) 프로이트적 상상에 빠진 적이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삶을 생동케하는 에너지를 언급하며 에로스(삶의 본능)와 타나토스(죽음 본능)를 거론한다. 프로이트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계기가 된다는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는 바로 이 삶과 죽음의 욕동을 해부하는 책이다. 궂이 프로이트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어쩌면 모든 종교는 삶과 죽음이 매양 하나임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각 종교의 제도화된 종파에서는 교리적 잣대로 어느 정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엄격성을 유지하겠지만, 모든 종교의 신비주의 계열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무화된다. 물론, 역사는 그들을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이단아로 적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듯, 중세 이후 서구사회 깊숙히 각인된 ‘죽음의 무도’라는 상징은 죽음의 일상성, 죽음의 편재라는 절망적 상황을 춤판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와 결합시켜 그 비극미를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비록 대단한 권력과 인기를 가진 왕이나 교황, 혹은 유명한 슈퍼스타라 할지라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의 부제를 ‘죽음의 고고학考古學’이라 붙였다. 푸코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고고학’은 푸코가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관심했던 사항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광기의 역사>, 그를 세상에 알린 <말과 사물>, 그리고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다양한 지식들을 둘러싼 관계들의 역학과 역사를 다룬다. 역사적 주류에 의해 정립된 지식이면에 가리워진, 침묵하는 소리를 발굴하고, 주류 담론학에서는 나오지 않는 잊혀진 과거를 드러내어 당대 지식에 시비를 걸고 흠집을 낸다는 측면에서 푸코의 ‘고고학’은 탈근대적 가치를 지닌다.
죽음이라는 테마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특별히 기독교에서 죽음은 부활과 한 쌍의 완벽한 조합을 이루어, ‘고난-죽음-부활-승천-재림-새하늘 새땅’으로 이루어지는 기독교 주류 담론의 기틀을 형성한다. 내가 이 글의 부제를 ‘죽음의 고고학’이라 명한 이유는 분명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 이외의 침묵하는 죽음에 대한 증언들, 예를 들어 미술, 역사, 철학 등 다양한 유물(?)을 통해 죽음과 결부된 묻혀있는 과거를 발굴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고고학’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죽음이 팽배하고 만연한 우리사회에서 죽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창과 약간의 틈을 낼 수 있다면, 그래서 죽음을 다시 사유하고 물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글의 의미는 족하다. ‘죽음의 시대’에 죽음과 맞서는 구체적 결단과 행위에 대한 부분은 다음 과제로 미룬다.

2) 시카고 신학교와 드루 대학에서 드렸던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예배 관련 신문기사와 반응을 아래에 링크시킵니다.
http://chi.christianitydaily.com/view.htm?id=183792&code=cg
http://www.usaamen.net/bbs/zboard.php?id=usa3&no=4588

3) Karen Baker-Fletcher, Dancing with God: The Trinity from a Womanist Perspective (Chalice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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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5 21: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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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철 목사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난 5월 드루신학교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예식을 마친 후, 뉴욕, 뉴저지 교계의 반응이 무척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뉴스앤조이 인터넷 언론을 통해 "예배와 예식에 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하는 글을 올린 것이 있어 아래에 링크합니다. 참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357

    그리고 아멘넷에 드루신학교에서 열린 추모예식과 관련해서 공개토론이 있었습니다. 아래에 링크합니다.

    http://www.usaamen.net/bbs/zboard.php?id=sss1&page=1&sn1=&divpage=1&sn=on&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46
  2. 이상철
    2009.06.25 23:0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김남중 목사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정치적 과부와 정치적 시민, 그리고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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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룻이 시어머니에게 대답하였다.
“어머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룻기」 3장 5절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장례식은,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더는 없을 거야”라고 했다.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영웅이었고, 죽음으로 사회적 통합을 가져올 마지막 사람이라는 얘기다. 이제는 그 누구도 시민사회 전체의 애도의 대상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불과 3개월여 만에 우리는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사회적 애도의 의례를 치루게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고가 전해지기 직전까지도 그의 존재는 한국 민주주의의 좌절과 수치스러움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내가 요청받은 원고의 주제는 ‘한국사회와 돈’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포함하여 참여정부 핵심층의 부패에 관한 검찰의 브리핑을 염두에 둔 기획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지난 주 토요일 아침, 마침 내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가 이사하게 되던 날,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뉴스를 들으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전임 대통령의 자살. 어느 일간지는 이것을 ‘시스템 살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자신 이외에 누구도 그의 목숨을 강제로 회수한 이는 없지만, ‘정치적 타살’이라고 할 만큼 마지막 숨구멍까지 압박하며 죄어오는 권력의 조임을 당해야 했다. 또한 일사불란한 명령 계통이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기득권 집단이 제각기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한 치의 가릴 것도 없이 발가벗겨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서거 후 그는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대통령으로 태어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겨레 그림판 (2006.6.6)


한데 삶에서 죽음으로의 극적인 경계 이동만큼이나 수치스러움에서 자랑스러움으로의 생각의 이동은 너무나 극적이었다.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은 반전시켰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대적인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공중파 방송 3사가 장례식과 노제를 생중계하고,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 다큐를 제작 방영했으며, 화장장에서 49제 때까지 유골을 안장하기로 한 사찰 장면까지 생중계되었다.

티비의 오락프로는 애도기간 동안 방영이 중지되었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은 초기 화면에 흑백 톤의 애도 디자인을 넣었다. 전국 수백 곳에 시민들에 의해 분향소가 가설되었으며, 무려 오백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참배를 했다. 대학교 강의실마다 선생들은 견해를 묻는 질문에 답을 해야 했고,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타살의 책임을 물어 현 대통령의 탄핵 서명이 인터넷 공간에서 전개되어 백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하여 어떤 이는 한국에도 자랑스러운 대통령이 생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국민의 다수가 그의 서거에 애통함을 표했고, 나 역시, 비록 몇 가지 주요 사안에 있어서 결코 동의할 수 없어 정치적으로 그의 반대자에 가까웠음에도, 애통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장 깊은 아픔을 겪고 있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권양숙 님[각주:1]일 것이다. 시신을 확인하면서 실신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장례식 때에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나타났다. 필경 그녀가 겪고 있는 자기 존재 파괴의 상태는 비교불가의 절대고통 바로 그것이었겠다.

정치적 타살을 체험한 다른 사례들에 관한 자료를 참조하면, 배우자를 잃은 아내들은 종종 상황에 부적절한 말을 내뱉는 언어 붕괴 현상을 겪게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주던 기억의 교란을 일으키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타살자의 아내들은 그러한 자기 파괴적 비탄 상황에 지속적으로 놓일 수만은 없다. 그녀는 죽은/임당한 남편의 입이 되고 목소리가 되고 몸이 되어야 한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무너져버린 ‘사적인 아내’가 아닌, 그 불의한 죽음을 당한 남편을 대신해서 증언하는 ‘공적인 아내’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며,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다. 

죽은 자, 아니 죽임당한 자는 말하지 못한다. 그 시신의 고요함은 자기 증언의 부재를 의미한다. 바로 이 증언 부재의 침묵에 소리를 부여해주는 이가 바로 배우자 여성인 것이다. 그녀의 눈물, 그녀의 신음, 그녀의 비틀거림이 바로 그러한 증언의 형식이다. 하여 이러한 배우자 여성이 몸으로 하는 증언 행위, 그것은 죽임당한 자의 의례에서 핵심을 이룬다.[각주:2]

이렇게 배우자 여성은 비탄 상황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것에서 증언자가 되어 죽은/임당한 남편의 소리를 대언하는 자로 역할 전이를 일으키게 된다. 아니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는 사회적, 문화적 요청에 직면하게 된다. 곧 정치적 타살자의 아내들은 ‘과부’에서 ‘정치적 과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권양숙 님은 남편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한다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정치적 살해자와 장례를 공유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 컸던 탓이겠다. 그러나 곧 그녀는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녀의 ‘정치적 과부되기’가 국민장의 의전 형식에 의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전 형식의 핵심은 ‘영부인되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거한 이가 대통령임이 그녀를 통해 만천하에 대언되는 것이다.

「룻기」 3장 5절에서, 시어미인 나오미가 기획한 몰락한 가문의 회복을 위한 프로젝트에 며느리 룻은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듯이, 죽은 남편의 침묵을 대언하는 씨족의 관습에 의거한 과부의 행동, 그것은 단적으로 정치적 과부되기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주체와 욕망을 지배적인 문화적 코드에 맞추고 그러한 의미망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정치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라는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처럼 권양숙 님 역시 국민장을 수용함과 동시에 국민장의 의전 양식에 맞춘 영부인되기를, 일러준 대로 다 수행한 셈이 되는 것이다.

한편 시민 대다수도 이러한 의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국가의례로 진행된 장례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대대적인 시민의 참여를 동반한 것은 유례가 없을 정도다. 그야말로 국민장이 된 것이다.

하여 시민도 국민장의 의전 양식에 걸맞는 ‘정치적 시민되기’에 참여하였다. 노제가 거행되던 시청 광장과 그 주변지역에 즐비하게 붙어 있는 현 정권에 대한 극단의 증오감을 담은 벽보들에도 불구하고, 결코 국가의례의 일부로 환치될 수 없는 담론의 주역들, 국민장의 시민되기에 동참한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일부인 그들은, 그날 밤 국민장의 시민되기에 동의한 이들답게 ‘얌전한 항의자’였다.

나는 여기서 혼란을 느낀다. 모 신문이 시스템 살해라고 규정했고, 많은 이들이 정부에 의한 타살로 해석하고 있음에도, 왜 그 많은 이들 가운데 다수는 국민장이라는 것에 대해 순순히 동의하고 있는 것일까, 왜 스스로 국민장에 걸맞는 정치적 시민되기를 순순히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전임 대통령의 서거이니 만큼 결과적으로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에 저항하는 격렬한 비판과 논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왜 그토록 ‘조용한 합의’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죽은 이의 침묵을 대언하는 일이 단순한 합의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들었던 것이다.

또 하나,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있어 나를 당혹하게 했던 것은, 한 후배의 고백에서 비롯된다. 그는 얼마 전까지 한・미 FTA를 추진하던 참여정부를 격렬히 비판하던 지식인이었다. 근데 며칠 전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반대를 후회하면서 ‘대통령님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울먹였다. 나는 적지 않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이런 방식으로 애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는다. 위에서 말한 그 ‘조용한 합의’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하나의 징후다. 국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될 법한 주장을 펴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는 듯이 국민장을 받아들이는 이율배반과 상응한다는 얘기다.

그에게 묻지는 않았지만, 필경 그는 한・미 FTA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참여정부의 한・미 FTA는 잘못 추진된 발전기획임이 여전히 타당하다. 하지만 그는 전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자기 신념을 철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통령님을 지키기 위해서’다.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생각을 철회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가 우리 정치사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실행력을 지니면서 통용되고 있다. 그것은 ‘가신’이라는 용어다. 하여 국민장에 즈음한 그의 ‘정치적 시민되기’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신적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본래의 생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그럼에도 그가 일시적으로나마 가신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 때문일 것이다. 압도적인 슬픔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을 감내하게 했을 것이다. 그 순간의 비통함 탓에 생각의 균형이 무너지고, 세상을 ‘노무현 대 반(反) 노무현’이라는 단순 이분도식으로 생각한 결과일 것이라는 얘기다.

한데 과연 그럴까? 다시 원상복귀되는 것일까? 그가 한・미 FTA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으로 다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이 원상복귀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필경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가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한 사람의 정치적 죽음으로 인한 애도의 정치가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때, 애도의 행렬은 세상에 그 죽임당한 이의 목소리를 다시금 울려 퍼지게 한다. 애도하는 이는 그러한 소리의 중개자가 됨으로써 정치적 시민이 된다. 한데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애도의 정치는 종종 정치적 시민되기를 퇴행적으로 만들곤 한다는 것이다. 시도때도 없이 광장에서 통합만을 부르짖는 자기 서사는 이러한 퇴행성의 단적인 사례다. 해서 진보적인 한 일간지 사설은 ‘한・미 FTA나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참여정부의 한계가 아니라 ‘국가의 한계’였다'고 말한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이 그를 무조건 지지하는 ‘가신되기’이며, 가신적 정체성으로 통합되지 않는 모든 비판적 논의를, ‘국가의 한계’와 정부의 한계를 혼돈한 비현실적 몽상가의 의견으로 폄하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애도의 방식에 좀처럼 공감할 수 없었고, 헌화하는 것을 주저해야 했다.

장례식이 끝난 뒤 시청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그 한 구석에 설치된 작은 분향소를 보았다. 거기에는 근래에 죽임당한 정치적 피살자들의 명단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죽었구나 하는 새삼스런 각성에 도달했다. 한 사람의 죽음에서 죽임당한 많은 이들을 기억해내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에 광장에서 목격한 가장 빛나는 애도를 나는 여기서 봤다. ⓒ 웹진 <제3시대>

  1. 그녀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칭호는 물론 ‘영부인’이다. 하지만 그녀를 영부인으로 부르는 것은 그녀가 다양하게 주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단지 하나의 요소로만 환원시키는 것이기에 여기서는 중립적이고 모호한 함의를 지닌 ‘님’이라는 칭호로 부르겠다. [본문으로]
  2. 정치적 타살의 대상이 여성이고 그의 증언자가 남성 배우자 혹은 가족인 경우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남성 배우자/가족의 경우는 정치적 과부와는 다른 방식의 정치적 임무에 대한 요청에 직면한다. 그런데 여성보다 남성의 경우는 그 역할이 훨씬 미미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수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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