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셋. <내 모든 구멍을 채워줘>




 김정원*



         아주 오랜만에 만난 영국 친구 W와의 수다가 한참이었다. 히피 부모 아래서 자란 덕분인지 W는 내가 만난 영국 사람들- 보수적이고, 지루하고, 미들 클라스에 속해있으며 sorry를 연발하는- 과는 달랐기에, 그와의 대화는 늘 즐거웠다. 우리 수다의 주제는 ‘관계’ 였는데, 그는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 하였다. 바로 ‘관계 아나키를 위한 선언’, 원어로는 ‘The short instructional manifesto for relationship anarchy’ 였다.


Love is abundant, and every relationship is unique 

Love and respect instead of entitlement 

Find your core set of relationship values 

Heterosexism is rampant and out there, but don’t let fear lead you 

Build for the lovely unexpected 

Fake it til’ you make it 

Trust is better 

Change through communication 

Customize your commitments[각주:1]


         나는 찬찬히 읽어 내려갔고, 이 후 그와의 대화는 그 어떤 영국친구들과의 대화보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른바 ‘진보적인’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면, 결혼 제도와 일부일처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새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LGBT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소리만큼이나 아주 지극히 ‘옳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다른 이야기들이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특히 사랑, 혹은 관계에 관해서는 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사실은 진짜 사랑을 찾고 싶다’ 라던지, ‘한 사람에게 미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라던지. 이런 상투적인 이야기들이 보다 새롭게 들리는 이유는 ‘왜 꼭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 걸까?’ ‘반드시 사랑이 동반되어야만 섹스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혹은 ‘관계 속에 있는 위계 질서를 나는 거부해’ 와 같은 이야기들을 나를 비롯 나와 직간접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이들에게서 – 친구, 교수, 작가, 활동가, 예술가, 책 등등- 너무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거나 다행스럽거나 인데, 여하튼 목사님들은 이 진보영역에 속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날 W 역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것이 원나잇스탠드에 대한 것도 아니었고, 자유연애를 향한 열망은 더욱 아니었다. 그가 말한 ‘관계 아나키’는 파트너의 동의 하에 다자간의 사랑과 로맨스를 추구하는 폴리아모리(polyamory)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특히, 로맨틱한 섹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위계와 (the Romantic Sex-Based Relationship Hierarchy )와 감정적 위계 (emotional hierarchies of relationships)에 대한 거부를 강조했다. 관계에 관한 기존의 규칙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섹스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인지라, 동성애는 물론 무성애, 종교적 이유로 섹스를 참아내는? 이들까지 거의 전 범위의 관계적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었다. 관계 아나키스트들은 규범적 관계 제도에 저항하며 관계적 자유와 평등을 매우 강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로맨스와 로맨스가 빚어낸 많은 관계들을 부정하고 있었기에, 되레 여러 명의 파트너를 사랑하며 사는 것을 꿈꾸는 폴리아모리가 속 편하게 들렸다.

         관계에 대해 꽤 오랫동안 읽고 들으며 고민해왔던 나로서도 ‘알다가도 모르겠는’ 아이디어이지만, 여하튼 쿨하기가 그지 없다. 그런데, 이토록 ‘쿨내’나는 대화가 몹시도 지루했다. 지독하게 반사회적 이야기에 지루함을 느끼는 내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도 지루했다. 일종의 ‘관계 혁명’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부분에 동의를 하고 있기도 했고, ‘진정한 사랑’을 겁내는 이들의 비겁한 변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님포매니악’의 주인공 ‘조’는 제목 그대로 ‘여자 색정광’이다. 그녀의 오르가즘을 향한 변태적 집착과 사도마조히즘 등은 그녀를 사회 ‘밖에’ 머무르게 한다. 그러니까, 남편의 바깥에서, 자식새끼의 바깥에서, 일터의 바깥에서 그리고 사회화된 사랑의 바깥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녀를 섹스 중독자라 칭하며, 그녀에게 치료를 요구하지만, 그녀는 ‘내 추잡한 욕정마저도 사랑한다’고 외치며 치료를 중단한다. 수백의 사람과의 섹스를 하며 그녀가 배제했던 것은 ‘사랑’ 혹은 ‘로맨스’ 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남편에게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의 유명하고도 센슈얼한 대사인 Fill all my holes, 번역하면 내 모든 구멍을 채워줘, 되겠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우울증을 달고 사는 감독과, 또 님포매니악이 우울증 3부작 중 마지막 편이라 일컬어진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녀가 메우고자 했던 것은 텅 비어있던 ‘사랑 구멍’이지 않을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각주:2]라는 한병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뭐 이렇게 단순하고 지독히 친사회적인 비평이 있겠냐 싶겠지만, ‘조’가 찾아 헤맸던 것이 사랑 (혹은 사랑 가득한 섹스거나)이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지금의 내 상태겠다. 그리고 W의 반사회적인 이야기가 지루했던 이유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조’의 섹스에 대한 집착을 육체적 쾌락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로 과장하거나 축소시킬 생각일랑은 아예 없다. 그녀의 섹스 경험담은 계속해서 사회적 제도와 개념들을 곱씹게 만들지만, 그녀가 색 자체를 열망한 것이 아닌, 어떤 영적이고 초월적, 추상적인 사랑을 추구했다고 말하며 그녀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관계 아나키’와 같은 개념들이 그녀와 같은 성소수자들 혹은 반사회적 인물(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주창하며 생긴 이념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지독히도 사회 바깥에서 서성거렸고, 수백의 사람과의 섹스를 하며 자아(오르가즘)를 찾고자 했지만, 그녀가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던 남편을 맞닥뜨린 후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질투’였다.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은 후에도 그녀는 ‘내 모든 구멍을 채워줘’라고 말하고 만다. 결국, 질투를 느끼고 더 ‘많은 양의 관계’를 요구하는 ‘조’는 관계 아나키스트가 될 자격을 얻지 못한다. ‘조’같은 성소수자도 함께하고자 만든 혁명적인 개념일 테지만, 실은 ‘조’는 관계아나키스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W의 이야기를 그저 비아냥거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은연중에 로맨스나 사랑에 집착하는 것은 ‘진보적’이지 않은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싫었다. 내심 진득한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들과 또는 탄탄한 사랑을 기반으로 섹스를 즐기는 사람들을 변론하고 싶었나 보다. 그가 그런 사람들을 비판했던 것이 아닌 것은 물론, 내가 그러한 관계를 족히 동의하는 바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조’같은 여자도 결국엔 질투를 느끼고, 상대로 인해 심연의 빈 구석이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으며, 평행하고도 평등한 관계를 맺는 것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부족한 영어는 그저 경청을 불러왔을 뿐이다.)

         진보적인 것이 꼭 결혼 제도를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게다. 진보적인 것이 집착도 없고, 억압도 없는 관계만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명과의 연애에 흔쾌히 동의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도리어 ‘꼭 그래야만 해’와 같은 당위가 없는 것이 진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연인에게 집착하고, 울고 매달리고, 사랑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진보적인 관계가 될 수 있고, 평생 한 사람하고만 죽자고 살려고 하는 것도, 결혼을 한 후에만 섹스를 한다는 의견도 다 진보적인 ‘관계맺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술에 취해 몇 시간을 울어가며 자기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나, 이제는 그러한 이들의 술주정이 진보적(이라 일컬어지는)인 ‘관계 아나키’와 같은 이야기 보다는 새롭고 재미있다. ‘관계 아나키 선언’에 꽤나 많은 부분을 동의하고 있지만, 질투도 해보고, 가슴 아리게 사랑 좀 해봤던 나로서는, 술주정에 손을 들어주는 바이다.. 

         글을 쓰다 보니, 토끼 같은 눈으로 ‘나는 오직 로맨스를 기다려~!’를 외치던 그 언니가 보고 싶어진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내 진보적인 친구들보다 곱절은 솔직해 보였다. 오랫동안 ‘관계’ 혹은 ‘진정한 사랑’에 냉소적이던 내 마음을 ‘호~’하고 녹여주던 외침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로맨스, 사랑, 에로스’와 같은 이야기들은 내게는 유토피아적인 것이다. 다른 이가 완전히 나를 점거해버리는 사건, 자신의 지양이자 비움[각주:3]같은 축복이 과연 나 같은 여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지는 의아하기만 하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내 모든 구멍을 채워져’라는 대사가 사랑에 대한 찢어지는듯한 갈증으로 느껴진다는 점과, 나아가 그녀가 어서 빨리 눈이 번쩍 뜨이는 오르가즘과 사랑하는 이를 동시에 찾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유시진 대위’가 절대로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말이다. 바꿔 말하면, 쓰리섬이나 혼외정사 같은 이야기보다는 진부하기 그지 없는 사랑 혹은 관계집착적인 이야기에 다시 흥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새 관점과 관심은 어떤 식으로든 진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지 않나 싶다. 그것이 관계 아나키스트든, 현모양처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 부디 진보한 그곳이 오직 현모양처로만 귀결되는 곳은 아니길 바랄 뿐. 못다한 이야기를 다음 호로 미뤄두며 이상, ‘진짜 진보적인 관계’에 대한 단상을 마친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theanarchistlibrary.org/library/andie-nordgren-the-short-instructional-manifesto-for-relationship-anarchy#toc4 [본문으로]
  2.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p22. [본문으로]
  3. 위의 책 p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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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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