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열네번째[각주:1]


결론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이 연재를 마감하기까지 두 번의 글이 남았다. 이제까지 내가 말하려 한 것은 웰빙우파의 문화공간으로 대형교회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웰빙’이라는 문화적 현상과 ‘우파’라는 사회정치적 범주가 엮이면서 하나의 문화적 주체로 형성되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장(場)으로 대형교회를 주목해보겠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웰빙우파의 문화공간으로서의 대형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총정리해보겠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이 연재 첫 부분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상상적 논점을 제기할 것이다. 최근 대형교회를 주요 장소로 하여 형성된 문화적 주체로서의 웰빙우파가 정치적 주체로서 재구성되고 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일지에 대한 것이다.  


'1990년대', 웰빙우파 형성의 시간적 범주


   ‘1990년대’라는 시간은 이 연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에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사회의 경제성장률이 급강하했는데, 개신교도 성장률이 급락했고 심지어 1995년 이후에는 절대수가 감소하기까지 했다. 한편 이 시기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며, 또 소비사회로의 변화도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본격화된다.


    


   이런 민주화와 소비사회화가 본격화된 시대인 1990년대를 주로 30대의 나이로 겪었던 세대가, 두 번의 베이비부머 세대(제1차: 1955~1963년생/ 제2차: 1968~1974년생) 중 첫 번째 세대다. 이들은 한국 근대사에서 보릿고개를 겪지 않은 첫 세대이고, 최소한 초등과 중등 과정까지 근대적 학교교육의 수혜를 받은 세대다. 또 빠른 경제성장의 대가로 완전취업의 행운을 누렸다. 특히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이들의 경우는 중상위층으로 안착하기에 가장 용이했던 세대다. 이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결혼과 함께 강남과 강동, 분당 등으로 이주하였거나 독립하여 살게 되었는데, 2천 년대에 이 지역의 지대가 급상승함에 따라 자산이 크게 늘은 것이다. 즉 직업의 안정성보다 훨씬 중요하게 지대의 상승 요인이 중상위계층으로의 안착에 유효했다.

   한편 이들, 1990년대에 강남・강동・분당 지역의 30대 고학력의 중상위계층 사람들은 그 무렵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라는 거대한 사회문화적 제도화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그 실행주체로서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2천 년대에 40대가 되었고 2010년대에는 50대가 되었다. 나는 이 세대를 기점으로 해서 ‘웰빙’우파라는 문화적 주체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추정한다.(물론 이 세대에는 여전히 극우주의적 이념주의자들도 많았고,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자도 많았다.) ‘웰빙’은 성장지상주의 시대를 통과하고 나서 소비사회로의 변화, 그리고 신자유주의로의 이행기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지상주의적 주체와는 다른, 중상위계층적 고품격 문화를 가리키는데, 이 세대 이후 웰빙문화는 빠르게 확산되었고 다양하게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웰빙’의 다양한 발전을 단순화하여 ‘우파’와 ‘좌파’로 분류하였는데, 그중 ‘웰빙+우파’의 문화가 발전한 주요 장소로서 대형교회를 제시하였다.  


'(캐릭터)대형교회', 웰빙우파 형성의 장소적 범주


   1990년대에, 내가 분류한,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가 대거 등장했다. 이 연재를 시작하는 글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대형교회를 두 범주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 범주는 한국사회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에 대형교회로 부상한 교회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두 번째 범주는 한국사회와 교회의 성장이 정체 및 퇴조하던 시대에 빠른 성장을 이룩하여 대형화된 교회를 말한다. 즉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는 개신교에 새 신자의 유입이 현저히 줄어든 혹은 감소한 시기에 대형교회로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것은 이들 교회들이, 새신자보다도, 교회를 떠도는 수평이동 신자들의 새로운 정박지로 선택된 결과다. 한데 유념할 것은 수평이동 신자들은 1990년대 이전에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수평이동 신자들은 대개 목사나 은사자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수동화된 팬덤(fandom)에 다름 아니었다. 반면 ‘그 이후’, 즉 1990~2010년대의 수평이동 신자들은 30~50대 연령의 교회 직분(집사, 권사, 장로 등)을 맡은 이가 많았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 꽤 많이 알고 가장 활동적인 교인들 중에 교회를 떠도는 신자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이렇게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들은 1990년대 말 이후 강남・강동・분당 등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이 지역들은 대단지 아파트들이 속속 세워짐으로써 단위 면적에 비해 유입 인구가 특히 많은 신시가지 혹은 신도시인데, 지대가 다른 곳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게 상승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하여 이주자들의 자산이 빠르게 증가하여 중상위계층화한 이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이다. 또한 위치상 이 지역들이 서로 인접해 있음으로 해서 중상위계층의 수가 다른 곳들에 비해 훨씬 많이 밀집된 곳이다. 바로 이런 지역에서 떠돌던 수평이동 신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크게 성공한 교회들, 내가 말한,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들 다수가 이런 교회들이다. 

   이렇게 정박할 곳을 찾은 떠돌이 신자들은 ‘그 교회’에서 현재까지 적어도 20~30년, 혹은 그 이상을 주1회 이상의 공식모임을 같이 했다. 그밖에 교회를 매개로 하는 수많은 비공식 모임을 통해 삶이 엮이었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 장기간 동안 이런 공식・비공식 관계를 통해 경험과 기억이 얽히면서 서로간의 친밀성이 깊어진다. 또한 자녀의 ‘절친’의 부모로 얽히고, 부모의 장례로 얽힌다. 해서 삶의 위기에 높일 때 교인들은 도움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사업을 하거나 취업을 할 때에 혹은 자녀를 유학 보낼 때에도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나아가 자녀들의 혼인 관계로도 얽힌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빠른 도시화로 인해 가족과 이웃의 친밀성이 치명적으로 해체되고 있는 시기에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친밀성의 공간이며 인맥공장이다.

    특히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계층적 다양성이 사라지고, 특정 계층이 집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층적 문화가 형성되기에 용이했다. 학력도 비교적 높고 계층적으로도 안정된 이들이 많았기에 문화적 교류를 나눌 만큼의 여력이 충분했던 덕이다. 하여 바로 이곳에서, 사회의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웰빙우파 문화가 잘 터잡을 수 있었다.


'주권교인', 웰빙우파 형성의 주체


   대형교회들은, 두 범주 모두 예외 없이,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란 교회에서 작용하는 거의 모든 가용자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특정인이 장악하고 있는 현상과 관련된다. 한데 두 번째 범주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첫 번째 범주와는 다르다. 첫째 범주의 대형교회에선 교인들이 수동적이고 충성도가 높아 담임목사의 일방주의적 전횡이 가능했다. 반면 둘째 범주에선 교인들이 과거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탓에 담임목사가 자신의 자원동원능력을 통해 콧대 높아진 교인들을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었는지가 중요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떠돌이 신자들은 교회를 알 만큼 아는 이들이었고, 민주화를 경험하면서 주권의식이 꽤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소비사회를 경험하면서 종교도 상품처럼 선택할 수 있는 자의식이 발전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정보능력도 뛰어나 교회들이 내걸은 상품가치를 판별할 능력도 겸비한 이들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1990년대에 부상한 ‘주권시민’에 상응하는, ‘주권교인’이라고 불렀다.

   하여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주권교인’의 취향에 맞는 방식으로 교회를 개혁했던 ‘개혁군주’형 지도자였다. 즉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들은 주권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불만을 교회 개혁에 반영하고 그이들의 취향에 맞는 요소를 발명해냄으로써 수많은 떠돌이 주권교인들을 정박하게 하는 데 성공한 교회다.

    나는 이러한 ‘개혁적 발명’을 통해 각 교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특성화한 것을 ‘교회의 캐릭터화’라고 불렀다. 이때 캐릭터화를 특징짓는 요소를 여러 연구자들은 ‘개인주의’라고 불렀는데, 나는 ‘웰빙’이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

    가령 1990년대 이후 가열된 자녀교육 열풍은 명문대 지상주의를 낳았고, 이런 현상은 중상위계층에서 더 치열했다. 한데 몇몇 대형교회들은 2천 년대 즈음부터 명문대 지상주의를 넘어서 기독교 지도자를 통해 사회를 계도한다는 이상 아래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겸비한 전인적 소양을 갖춘 엘리트 양성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들을 만들어냈다.

    또 ‘부자 되세요’가 일상어가 될 만큼 신자유주의 시대 성공지상주의적 태도가 전 사회를 휘몰아칠 무렵 자신이 누리고 있는 풍요를 축복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신이 부여한 도덕적 책임의 맥락에서 보고자 하는 ‘청부론’이 일부 대형교회를 통해 확산되었다. 이것 또한 풍요를 천민화하기보다는 귀족적 덕성으로 재해석하는 웰빙신앙의 주요 항목에 속한다. 이렇게 대형교회의 캐릭터화의 기조는 웰빙신앙화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웰빙신앙적 캐릭터화가 얼마나 잘 수행되느냐를 시금석으로 하여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를 규정할 수 있다.


웰빙우파적 문화의 헤게모니화를 우려한다


    1990년대는 권위주의를 넘어서 한국근대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갑자기 다가왔고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내기엔 너무 짧았다. 10년도 못 가서 신자유주의의 괴물적 파괴력에 휘둘리는 시대가 도래했고, 2천 년대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반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여 1990년대에는 도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하위문화적 소리들이 등장했을 뿐 지배적인 대안적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거의 지배적 문화로 부상한 것이 없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웰빙우파’적 문화로 보았다. 오늘 우리 시대에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멋지고 규범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것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 ‘웰빙’이 적합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웰빙을 가장 잘 구체화한 것은 우파적 요소다. 그런데 이런 웰빙우파의 문화가 형성되고 자리잡는 데 가장 중요한 공간이 바로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다. 그런데 이런 대형교회를 매개로 하는 웰빙우파적 문화의 헤게모니화는 다른 계층에 대한 타자화를 정교하게 제도화할 우려가 있다. 마지막 글은 바로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 1199호(2016 11 01)에 실린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14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_id=20161004164036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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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열두번째[각주:1]


교회청년에게 세습되는 웰빙 보수주의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대형교회 대학부와 인맥공장


    거의 모든 교회는 잘 짜인 연령별 조직을 갖고 있다. 대략 유년, 소년, 청년, 장년, 노년 등으로 구성된다. 신자들은 3~4세부터 시작해서 거동 가능한 시기까지 이 연령별 조직들의 일원이 된다. 그러니까 비슷한 연령대의 교인들은 그 교회에 속해 있는 한, 평생 관계가 이어진다. 이렇게 연령별 네트워크가 평생 이어지는 곳은 교회 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1981년 이후 대학생 수가 크게 늘면서 연령별 조직의 순차적인 흐름에 약간의 변수가 생겼다. 몇몇 교회에서나 가능했던 대학생부가 독자적인 조직으로 탄생하는 일이 현저히 늘었다. 그러나 고등부와 청년부 사이에 대학부가 마치 연령별 조직으로 상례화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그때 대학생 수는 급격히 늘었고, 고교졸업자는 감소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대형교회, 특히 강남, 강동, 분당 지역의 대형교회로 갈수록 심화되었다. 이 지역들에선 대학입학에 실패하면 교회를 떠나는 일이 흔했다. 심지어 서울 지역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도 대학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더 극단적으로 명문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이들조차 대학부 참여를 꺼려하는 분위기의 교회들도 있다. 해서 몇몇 교회들은 고등부 졸업자들 중 재수생을 위한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영락교회의 베드로부, 지구촌교회의 꿈사모 등).

   이쯤 되면 강남, 강동, 분당 지역의 대형교회들에서 대학부는 중요한 인맥 만들기의 장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탈퇴하는 것은 삶의 중대한 기회를 상실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대학부에 진입하는 건 단지 시작일 뿐이다. 졸업과 함께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청년부에 순조롭게 진입하지 못한다. 물론 대형교회에서 대학부의 일원으로 있다는 것만으로도 취업은 훨씬 유리하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정보와 특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정보와 특혜를 대학부원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그곳 나름의 평가기준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이들에게 그런 기회가 훨씬 많이 주어진다. ‘교회오빠’니 ‘교회누나’하는 말들 속에 함축된 외모, 옷차림새, 행동거지로 규율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연애도 포함된다. 이를 테면, 명문대학에 다니는 한 여성은 최근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녀는 엄마의 반대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은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녀가 연애하고 있었던 사실조차 몰랐다. 진짜 이유는 엄마가 반대할 것이라고 ‘그녀가 생각’했던 데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엄마’는 집합명사였다는 점이다. 그녀가 상상한 ‘엄마’는 그 교회 대학부 남자들의 ‘엄마들’이다. 그이들은 이 여성의 상상속의 ‘잠재적 시어머니’였던 것이다. 요컨대 그녀는 이들 상상속의 시어머니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의 연애 행위를 규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눠줄 자원이 넘치는 몇몇 대형교회들에서 많은 대학생들이 어떻게 어른 세대의 시선을 내면화하면서 전략적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과정은 그 교회들의 어른 세대의 보수주의가 대학생들에게 전수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편 수가 아주 적었던 시절부터 대학생들은 교회에서 많은 활동을 도맡아야 했다. 다른 종교 기관들에 비해 개신교 교회는 매우 많은 발런티어를 필요로 한다. 그중 많은 부분은 대학생들의 몫이다. 대학생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어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제 많은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나뉘고, 그것은 대학부원으로서의 훌륭한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척도가 되었다.

    교회학교 교사, 교회 청소, 성가대, 각종 봉사부서, 각종 선교프로그램들에서 대학생은 없어서는 안 될 발런티어다. 여기에는 단기선교도 포함된다. 단기선교란 대개 방학기간에 3주 정도 진행되는 해외봉사활동을 의미하는데, 그 비용도 적지 않을 뿐 아니라(남아시아의 경우 70~80만원 정도, 중앙아시아・중동의 경우 100~150만원 정도), 그 기간 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더욱이 사전교육이 2개월 안팎으로 진행된다. 그러니 신앙심이 투철하더라도, 학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몇 탕씩 뛰며 좀더 나은 일자리를 위해 항시 스마트폰의 연락망 안에 있어야 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이 프로그램에 의해 걸러진다. 요컨대 단기선교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이타적 신앙심은 중상위계층 친화적 성격을 지닌다.

   한편 청년부는 엄청난 결혼시장이다. 특히 몇몇 대형교회들의 청년부에는 우리사회 어느 곳보다도 ‘물 좋은’ 결혼 적령기 여자와 남자들이 넘쳐난다. 명문대 출신들만 들어간다는 대형교회 대학부라는 관문을 통과해서 들어온 교회청년부에는 가문 좋고 유능하며 좋은 직장에 다니는 스팩 넘치는 이들로 가득하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30대 비혼률은 2010년 기준으로 20.4%나 된다. 이는 1980년대에 비해 무려 11배나 상승한 수치다. 여기에 40대까지 포함하면(이혼자나 사별자를 제외하더라도) 그 수치는 훨씬 높아진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30~40대 비혼자들의 상당수는 어려운 경제 여건을 감안하여 자발적으로 비혼을 선택한 이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교회에선 좀 다르다. 특히, 앞서 말한 것처럼 강남, 강동, 분당의 많은 대형교회들의 경우 대학부를 거치면서 중하위계층의 20대 청년들이 교회를 속속 이탈했다. 즉 이들 대형교회의 청년부는 경제적 위기를 덜 겪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게다가 교회에서 결혼은 신앙의 성장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목처럼 이해되었다. 가톨릭처럼 독신이 장려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관계를 삶 속에서 체험하는 신이 준 기회로 해석되었다. 즉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유비적이다. 요컨대 여자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남자에게 복종하고 남자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처럼 여자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결혼관으로 남자와 여자 신자를 규율한다. 하여 이런 결혼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신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신의 계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 제도의 관행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으면 대개 장년부에 속할 수 없다. 장년부는,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기혼자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장년부에 속해야 집사, 안수집사, 권사, 장로로 이어지는, 일종의 신앙제도상의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 그래야 신자는 교회라는 인맥 공장의 중심부에 다가갈 기회를 얻는다. 해서 교회는 비혼자 중 ‘미’혼자 수가 훨씬 더 많다. 즉 결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결혼을 아무리 강조해도 미혼률을 줄이기는 쉽지 않다. 30대가 되면 사랑의 열정만으로 결혼을 감수할 수 없을 만큼 현실적 조건들이 까다로워지기도 하거니와, 교회의 성비 불균형이 너무 심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남성에 비해 여성이 6:4의 비율, 혹은 그 이상으로 많다. 이것은 미혼여자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여 여러 대형교회들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청년부와 장년부 사이에 또 하나의 예외적 연령조직(30~40대 미혼자들)인 싱글공동체를 만들곤 했다.

    이 모임을 중심으로 연애특강이 열리고 남녀 간의 스킨십을 늘리는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었다. 나아가 성비 불균형으로 인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타교회 청년들과의 만남도 주선된다. 이것은 개신교 대상의 결혼 매칭 기업들과 결혼 매칭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하는 회사들을 탄생시키게도 했다.


    기독교의 비합리성과 비과학성에 상처받고 목사들의 무식함과 나쁜 행실에 실망한 많은 청년들이 개신교 교회를 떠나가고 있고, 또 새로 개신교로 유입되는 이들도 현저히 줄었다. 한국 개신교 가운데 두 번째로 큰 교파이고 가장 부유한 교파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파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교인 대비 5.8%만이 청년층이다. 이것을 전체 개신교로 확장해서 보아도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2015년의 한 종교인구 조사에 의하면 연령별 개신교인의 구성에서 20대는 유・소년과 청소년을 빼고는 가장 적은 연령층이고 현재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을 차지하는 것이 30대다.


    그럼에도 일부 대형교회들에서 대학부와 청년부는 별로 줄지 않았고 심지어 늘기까지 한 교회들이 있다. 청년층을 유인할 여러 장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데 그중 중상위계층의 청년을 견고히 유지하는 교회들에는 대개 인맥 만들기에 효과적인 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런 교회들의 대학부와 청년부원들은 그들의 부모세대와 비교적 관계가 원만하다. 그것은 부모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른바 교양 있고 합리적인 성향을 보인 탓이기도 하다. 이른바 웰빙 신앙이 잘 정착된 교회에서 청년들은 더 잘 적응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교회들이 청년층에게 줄 수 있는 자원이 많아서 청년층 스스로가 교회 어른들인 부모세대의 시선에 스스로를 규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런 현상을 ‘사회적인 착함’과 후발대형교회의 연관성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 오늘날 교양 있고 합리적이고 배려 있는 성향과 물적 자원의 풍요 간에는 서로 상응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또 빠르게 신자유주의의 야만성에 깊게 노출된 한국사회에서 청년층이 독자적 능력만으로 생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도 몇몇 대형교회 청년들의 자기규율 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하여 이런 대형교회들에서 웰빙보수주의는 청년층에게 세습되고 있다. 유복한 중상위계층의 청년들이 교회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의 웰빙 성향은 좌파보다는 우파적 성향을 지닐 가능성이 큰 이유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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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아홉번째[각주:1]


자기계발의 시대 신자유주의적 귀족교육

성공과 신앙, '착한 동거'의 논리를 찾아서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자기계발서 열풍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사람들은 당황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것이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대답은 하나다. 적어도 그 시대에는 여러 가치관에 따른 다양한 답을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다. 단지 하나만이 절박하게 요청되었다. 돈, 돈을 벌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출판계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러한 추세는 이후 거의 10년 동안 서점가를 휩쓸었다. 이른바 ‘자기계발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가장 높은 판매부수는 단연 소설 분야의 것이었고, 몇몇 소설가들은 밀리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그런데 2천 년대에는 자기계발서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놀랍게도 2천 년대 베스트셀러 20권 중 무려 10권이 자기계발서들이다. 

   기독교 출판계도 예외가 아니다. 1999년 번역되어 출간된 《최고 경영자 예수》가 그 신호탄이었다. 이 책은 2년 만에 무려 27쇄, 20만 부 이상 팔렸다. 이후 수많은 기독교 자기계발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2006년 번역 출간된, 미국 최대의 메가처치 레이크우드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엘 오스틴의 책 《긍정의 힘》은 기독교출판물 중 최대의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또 미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메가처치인 새들백교회 담임목사인 릭 워렌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 시리즈도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인 저자 김동환의 책 《다니엘 학습법》의 판매고도 수십만 권에 달했다.  


   이 책들은 거의 모두 ‘성공’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관한 것이다. 이 시기 자기계발서들에 대한 주목할 만한 비평서인 《거대한 사기극》에서 저자 이원석은 이 공통점에 대하여 “바깥의 사회구조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주목하도록" 만드는 신화들이라고 좀더 분석적으로 이야기한다. 즉 자기계발서들이 주장하는 성공 비법들은 개개인의 자기계발에 딸려 있다는 것이다. 하여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개개인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쇄신해야 한다. 그런 쇄신은 무한히 가능하고, 그 쇄신에 따라 성공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이가 남자건 여자건, 부자건 빈자건,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사회적 범주가 어떠하건 상관없다. 쇄신은 사회적 규정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그이 자신의 노력에 좌우된다. 즉 자기계발은 철저히 개개인의 문제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자기계발은 개인적으로 수행되지만, 그 내용은 사회가 이미 규정한 것이라는 점에 있다. 즉 자기계발은 사회가 정한 원리에 따라 개개인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규율하는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이때 사회가 정한 원리란 크게 보면 신자유주의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자기계발은 신자유주의적 삶의 수행법이며, 신자유주의적 인간의 자기 관리법이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교회들의 배금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시기 자기계발서들 속의 신자유주의적 원리가 여과되지 않고 적나라하게 표출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날것 상태의 신자유주의적 양상으로서의 배금주의는 동시대 기독교 출판물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니엘학습 신드롬 - 삶 전체가 투여된 자기계발적 수행


    “서울대 출신 최강의 국・영・수 선생님들이 ( )에서 뭉쳤다.” 여기서 괄호 안에 들어갈 문구는 무엇일까? 참고로 이 전단지에 들어간 다른 문구들은 이렇다. 


 

   “강북 강남 통틀어 이렇게 막강한 선생님들이 한꺼번에 모인 학원은 찾기 어렵습니다.” “수준별, 실력별, 맞춤식 학습을 통해 확실한 실력향상을 목표로 학습이 이루어집니다.”  


    정답은 “장안평 다니엘비전학원”이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학원광고다. 그런데 핫한 학원가로 유명한 대치동도 아니고 분당 정자동도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잘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다니엘’이니 ‘비전’이니 하는 표현으로 봐서는 기독교 냄새가 풀풀 난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섞여 있다. 

   이 학원은, 장안평이라는 지명에서 드러나듯이, 고소득층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 아니라 서민층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기숙학원이다. 흥미로운 것은 새벽 5시 10분에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세 번의 기도와 예배를 통해 철저한 신앙훈련을 하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학대학 입시학원이 아니라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입학을 목적으로 하는 입시학원이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무료학원이라는 점에 있다.  

    원장은 《다니엘학습법》의 저자 김동환이다.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이고 전교수석 졸업자로 알려졌다. 그가 이 학원에서 문제아인 청소년들을 SKY대학들에 입학시켰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그가 창안했다는 공부법인 ‘다니엘학습법’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을 야기시켰다. 입학 문의가 속출했다. 이에 중상위층 학생 대상의 유료학원을 만들려 했다가 재정투명성 문제로 실패했다.  

    그렇지만 책은 전국 도처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그는 전국의 무수한 대형교회들을 돌면서 강연을 했다. 또 다니엘학습법을 주제로 하는 무수한 수련회를 이끌었다. 즉 장안평의 기숙학원은 소문의 진원지뿐이다. 다니엘학습법 신드롬은 전국적 현상이었고, 특히 대학입학을 꿈꾸어도 좋을 중상위계층에서 더 열기를 띠었다.  

    이는, 자기계발서 현상이 단지 독서 행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삶 전체가 투입된 실천적 수행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사례에 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니엘비전학원 전단지에 의하면 “21세기 다니엘 같은 하나님의 준비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다니엘학습법’의 목표다. 즉 ‘21세기 크리스천 인재 양성’, 그것이 바로 ‘다니엘학습법’으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적 기독교 입시교육 신드롬의 지향점인 것이다. 

    김동환은 기숙학원을 통해서 다른 교육, 즉 공교육의 교육과정 전체를 대체하고자 했다. 국・영・수 세 과목의 ‘입시교육’과 예배와 기도라는 ‘종교교육’으로 구성되는, 입시 맞춤형으로 축소된 교육과정으로 크리스천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형교회적 대안학교운동 - 귀족교육으로서의 자기계발적 수행법


    《다니엘학습법》이 대놓고 신자유주의적 성공주의를 드러내고 있다면, 이러한 날것 상태의 자기계발주의와는 달리, 많이 ‘조리된’, 하여 그 욕구를 보다 승화된 양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육운동이 대형교회 대안학교운동이다.


    1990년대 말 이전까지 개신교계 대안학교들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장애인학교 같은 특수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대안학교이고, 둘째는 일종의 진보적 가치의 대안교육운동으로, 입시중심 교육에 반대하는 생태주의나 사회공동체주의적 대안학교다. 그리고 셋째는 근본주의적 신앙에 기반을 홈스쿨링운동이다. 이 세 가지 대안학교들은 모두 주류사회의 질서에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벗어난 교육운동의 성격을 띤다. 그런데 2천 년대 이후 개신교계에는 특히 대형교회가 주도하는 새로운 대안교육운동들이 활기를 띤다.

    이 시기에 대형교회들이 대안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이렇다. 2천 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계, 특히 개신교계 사립학교의 종교교육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거세졌다. 나아가 종교계 사학법인들의 비민주적 재단운영에 대한 사회적 검열의 요구도 빗발쳤다. 여기에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교회학교도 문제였다. 이때 대형교회의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은 두 가지 문제제기가 결합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민주주의적 사회론의 기조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였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사학운영의 전근대성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 두 문제제기가 수렴되는 지점에 ‘21세기 글로벌 시대 크리스천 인재 양성’이라는 목표가 있다. 즉 민주주의적 사회론의 평등주의나 사학운영의 전근대성의 공통된 문제점은 현행의 교육제도가 사회를 이끌어갈 엘리트의 양성을 방해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하여 기독교가 주도해서 엘리트 교육을 위한 대안적 교육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2천 년대 대형교회들이 주목했던 대안학교운동이다.

    그런데 다니엘학습법이 개발자 개인의 교수법에 의존하고 있다면, 대형교회의 대안학교운동은 좀더 제도적이고 시스템적 체계를 중요시했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엘리트로 성장하게끔 하는 제도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장치들이 활용되는 교육기관으로 기독교계 대안학교가 부각된 것이다. 그러므로 개발자 개인의 창의적 교수법 외에는 별다른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전자와는 달리, 후자는 인적, 물적 자원이 기존의 공교육보다 훨씬 더 풍부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이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그 자원을 활용하는 데 있어 지지부진한 논의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신속하게 활용할 수 있는 대형교회에게 가장 용이한 것이었다. 더구나 자녀교육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강남, 강동, 분당의 중상위계층이 대대적으로 결집된 이 지역의 대형교회들에겐 교인들의 필요에 대한 맞춤형 기획인 측면도 강했다.

    하여 대형교회들의 대안학교운동은 일종의 귀족화교육의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명문대학 입학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시대에 맞는 국제적인 인재의 자격을 갖추게 하는 총체적 교육을 추구하는 학교라는 것이다. 유초년 교육기관에서부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까지 다양한 대안교육기관들이 속속 설립되었고, 그 학비는 일반교육기관보다 훨씬 높았다. 단, 교인들에게 입학의 특전이나 학비의 특전을 주는 경우가 많아, 이런 교육운동은 일종의 선교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지역 사회에 대중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일이고 그들을 교인화하기에도 용이하며, 교인들의 결속도를 높이는 방법이기도 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귀족학교들은 배금주의나 성공지상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사실 다니엘학습법처럼 가난한 학생들에게 성공욕구를 부추기는 교육과는 달리, 처음부터 풍요로운 학생들에게 성공이란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니다. 성공도 격조 있게 이룩되어야 한다. 풍요를 위임받은 자가 격조 있게 재산을 관리하는 청부론처럼, 귀족적 대안교육은 성공도 품격을 필요로 하는 삶의 요소임을 강조했다. 신앙은 바로 그러한 품격 있는 성공의 준거다. 하여 귀족적 대안학교의 신앙은 웰빙적 자기계발의 수행법인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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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여섯 번째[각주:1]


교회건축과 대형교회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990년대’라는 시대성, 그 반영으로서의 교회의 캐릭터화


    앞의 글들에서 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개신교 교세의 정체 상황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한 교회들 중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이 교회들의 빠른 성장이 ‘1990년대’라는 변화된 시대성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것을 ‘이성의 기획으로서의 제자훈련’과 ‘감성의 기획으로서의 귀족영성’이라고 요약하였다. 

    그 변화된 시대성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권위주의 시대는 절대권력의 영웅주의적 통치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오직 충성이라는 덕목으로 무장한 수동적 국민이어야 했다. 이 시대에 사회와 함께 동반성장을 이룩한 교회들도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절대일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된 종교집단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정치에서 영웅주의는 퇴출되었고 ‘주권적 존재’로서의 시민이 민주주의를 위한 주역으로 부상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 계기는 대통령 직선제의 도입이었다. 이제 정치인은 주권적 시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캐릭터화해야 했다. 여전히 대통령은 ‘제왕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주권적 시민의 선택을 받기 위한 노력이 절대 필요한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국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같은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들은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시민에게 어필하기 위해 새 정부를 캐릭터화 하려 했던 대표적 흔적들이다. 

    한데 이러한 캐릭터 정부의 출현에서 중요한 전제조건은 주권적 시민의 대두에 있다. 이때는 국민의 생활수준이 한결 높아졌고 고학력층도 비약적으로 늘어난 시기다. 그 무렵 사회에는 민주국가를 설계하기 위한 무수한 강좌와 공부모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저작들이 출간되었다. 인문・사회 비평적 계간잡지의 전성시대이기도 했고, 무수한 논쟁이 벌어지던 때이기도 했다. 전례 없는 광범위한 지적 탐구 붐이 일어난 것이다. 주권적 시민의 대두는 대안적 사회 설계를 위한 이와 같은 활발한 이성적 탐구의 과정에서 나타났다. 

   한편 이 시대는 민주주의의 시대인 동시에 자본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독재권력의 손아귀에서, 국민만이 아니라, 기업도 벗어난 것이다. 아니 실은 기업들은 거의 방임에 가까울 만큼 무분별한 자율공간으로 풀려났다. 고삐 풀린 기업들은 어떠한 공공적 책임의식도 없이 게걸스런 욕구를 무한히 발산하는 시장을 만들어 시민을 유혹했고, 시민은 그곳에서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본주의적 경쟁의 시스템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런데 한번 들어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그 무한경쟁의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몸과 정신이 병들어 갔다. 그 시스템에서 경쟁력을 지닌 이들도 예외 없다. 하여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도 그 체제가 일으키는 질병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은 온갖 치료(therapy)와 치유(healing) 프로그램의 열광적 소비자가 되었다. 이때 치료가 이성의 프로그램이라면 치유는 감성 프로그램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종교적 치유는 감성의 기획으로서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다룬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 일각에서 각각 이성과 감성 부문의 종교적 상품으로 캐릭터화된 신앙 프로그램들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주권교인들은 그것을 열렬히 소비하였다. 이 두 교회의 빠른 성장은 바로 이렇게 1990년대라는 시대성을 반영한 결과였다.  


1980년대, 교회건축과 대형교회의 탄생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보자. 캐릭터화된 대형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1990년대, 교회의 위기가 엄습해오던 그 시기와는 달리, 한국교회가 승승장구하던 1980년대에 그 교회들은 이미 대형교회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즉 그 시대는 캐릭터화된 교회들이 대형교회로서 탄생하던 때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형교회의 탄생이 특정 지역에 몰려 있다는 점이다. 강남, 강동, 분당이 그곳이다. 왜 이곳인가?

    이향순과 이광순의 공동연구인 〈도시 구조의 변동과 대형교회의 성장〉(《선교와 신학》 10집. 2002.12)은 이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이 지역들에서 대형교회가 집중된 것은, 근대도시로 서울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국가 정책의 효과로 발생하게 된 도시구조 변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강북의 사대문 인근과 영등포 지역에 한정된 근대도시 서울의 첫 번째 발전 단계는 과잉도시화(over-urbanization)다. ‘과잉도시화’란 도시의 수용능력을 크게 초과하는 인구 밀집 현상을 뜻한다. 이에 정부는 인구 분산을 위해 도시를 확장하는 정책을 취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발전 단계다. 이때 영동(영등포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오늘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 지구가 개발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 옆의 강동지역까지 확장된다.(이때 강서, 강북 지역도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만 강남과 가까운 강동지역이 과잉발전 하였다.) 또 인근 지역에 신도시들을 개발하여 서울의 부속도시화하는 일련의 단계를 통해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서울이 완성된다. 여기서도 강남과 인접한 분당이 다른 신도시들보다 월등히 발전한다. 이 두 번째 단계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지만, 1980년대에 와서 본격화되고 1990년대에 절정에 이른다. 

'영동' 신시가지 조감도 (1971)


    그런데 강남 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부는 안정계층을 이 지역으로 유치하는 조치들을 노골적으로 밀어붙인다. 특히 이곳에 현대화된 아파트 대단지가 조성됨으로써 자산능력이 있는 젊은층이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다양한 특혜조치가 마련된다. 여기에 토건세력들이 이러한 정책기조에 기생하여 활개 치면서 지대가 다른 지역들보다 놀라울 정도로 크게 상승한다. 즉 이곳으로 이주한 젊은 중산층 이주민들은 지대 상승으로 인해 보다 안정된 중상위계층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강남과 그 주변의 지역들에서 대형교회로의 성장이 집중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단지 아파트로 인구집중이 빠르게 일어난 덕이다. 강남의 인구 증가는 1970년대 빠르게 증가하다 1980년경부터 급가속화되기 시작해서 1990년경 절정에 달하고, 이후 거의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즉 강남으로의 인구 유입의 급격히 일어난 시기는 1980년대이고, 바로 이때에 인구가 많이 유입된 지역들에서 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그것은 1980년대는 인구 유입 현상과 대형교회 현상이 서로 정비례 관계였음을 뜻한다.  

    담임목사들이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교인들의 총화를 이룩했고 그것을 성장에 집중 투여함으로써 대형교회로의 성장이 이룩되었다는 공식은 이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다만 이 시기의 특이점은 그 리더십이 ‘교회 건축’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교인들을 총동원하여 대규모 교회 건축에 성공하였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교회의 비약적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강남, 강동, 분당이라는 지역의 특성과 교회의 독점적 리더십이 결합된 결과 대규모의 교회 건축이 실현되었다는 얘기다.  

    대규모의 교회 건축은 막대한 비용을 조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때 수완 있는 목사들은 교인들을 설득하여 발 빠르게 개발 초기에 큰 땅을 비교적 저렴하게 매입하거나 대단지 아파트의 종교부지 입주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비용 절감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교회당 건축은 일반 건조물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게 상례다. 하여 교인 규모에 비해 월등히 큰 교회당 건축을 시도하는 것은 무모한 계획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특별한 능력에 속한다.  


광림교회 담임목사인 김선도는 신동아 그룹의 회장으로부터 3억 원을 빌렸고 교인들로부터 2억 원을 기부받아 1976년부터 강남구 서초동에 대규모의 교회당 건축을 시작하여 1978년 완공한다.


    물론 그것은 교인들이 그럴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강남, 강동, 분당이 서울과 인근 신도시의 다른 곳들과 명확히 대비되는 점은 대규모의 중상위계층이 유입되어 들어오고 지대의 급격한 상승으로 그들의 자산이 빠르게 증가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은 지대로 인한 초과이윤의 상당부분을 건축헌금으로 교회에 기부했다. 그 결과 대규모의 교회당이 건축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 교회들로 몰려들어왔다. 

    오늘날 강남 못지않은 중상위계층의 밀집지역이고 지대가 급격히 상승한 곳인 목동과 과천의 경우에는 대형교회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지역의 중상위계층의 규모가 강남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그 인근지역은 여전히 중하위계층이 많고 지대상승이 상대적으로 지체된 곳들이기에 대규모 교회당 건축을 위한 재원 마련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요약


    이것을 글 서두에 언급한 교회의 캐릭터화와 연결시켜 정리해보자. 강남의 교회들은 1980년 어간부터 빠르게 증가하는 젊은 중상위층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신흥교회들임에도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 성공의 주된 요인은 대규모 교회당의 건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 건축은 지대의 상승과 밀접히 관련된다. 이때 지대로 인한 초과이윤을 건축헌금으로 기부하도록 이끈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교회 건축과 대형교회로의 부상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교회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은퇴 혹은 사망의 국면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교회 권력구조가 변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가뜩이나 이들 교회의 교인들인 젊은 중상위계층은 고등고육을 받은 데다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를 겪으면서 선행세대보다 더 주권의식이 강했다. 반면 신학대학은 퇴조하고 있었고, 목회자들의 수준은 퇴화했다. 교인들의 의식에서 이러한 지적 역전 현상이 뚜렷이 각인된 시기가 1990년대 이후다. 바로 이 시기에 많은 엘리트 교인들이 교회를 떠도는 현상이 심화되었고 그들이 교회에 정착하는 과정은 주체의식의 차원에서 그들이 주권교인이 되는 것과 겹친다. 이러한 상황의 초기에, 떠돌이 교인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대표적 교회가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다. 시대성과 부합하는 캐릭터화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양적인 성공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이 이 두 교회의 캐릭터를 벤치마킹하여 모방하는 붐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이 두 교회는 1990년대 한국의 대형교회 현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교회의 모델은 2천 년대에 오면 그 위상이 격하되거나 좌초해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대형교회의 캐리터화 현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 많은 교회들이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게 캐릭터화를 모색하는 시대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권교인의 신앙적 정치문화가 새롭게 형성되어 갔다. 한국사회의 보수주의는 1990년대 이후 이렇게 변모하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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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네 번째[각주:1]


주권교인과 캐릭터 교회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주권교인'과 교회의 캐릭터화


    지난 글에서 ‘주의 종’들의 천민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서 ‘주의 종’이란 성직자를 지칭하는 한국 개신교의 독특한 용어다. 이 표현 속에는 역설적으로 대중에게는 주(主)를 대리하는 자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특히 설교는 ‘주님’을 대언하는 행위로서 여겨졌다. 한데 ‘주의 종’들의 학력 저하와 교회 대중의 학력 상승이라는 지적 비대칭성의 심화는 설교에 대한 교회 대중의 불신을 초래했다.

    실제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던 1990년대는 대학생 수가 가파르게 상승했고 출판 시장도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신학교에서 현대신학의 논의들을 외면하는 가운데, 신학적 고급 정보가 담긴 교양서들이 속속 출간되었고, 심지어 교양서적 시장에서 반기독교적 과학서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합리성과 과학성에 대한 낙관적 태도가 절정에 이른 1990년대에 이러한 대중적 지식의 고급화의 대열에 고학력자가 많은 개신교의 신자들이 대거 참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반면 그 얼마 전까지도 교회 성장의 한 축을 이루었던 부흥회가 도시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고, 폐업하는 산기도원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즉 1990년대의 교회 대중은 목사와 그의 신학적 주도권에 깊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는 민주주의적 제도화를 향한 열망이 거센 풍랑처럼 밀려들던 때였다. 낡은 권위주의를 청산하려는 거대한 파도가 그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낡은 권위주의를 대표하는 구지배적 질서의 표상이었다. 시민사회는 교회를 향하여 따가운 눈길을 던졌고, 매스미디어는 교회에 얽힌 추문들을 앞 다투어 들춰내고 있었다. ‘주의 종’들의 부패와 비리, ‘나쁜’ 종교적 행동들, 성적 추행 등이 연일 세간에 폭로되었다.

   많은 교회 대중은 ‘주의 종’들이 허술한 설교자들일 뿐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인들일 수 있다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에 대한 교인들의 가장 소극적인 저항은 설교를 경청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 활동에 적극적인 교인들 몇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놀랐던 것은, 과거에는 메모하면서 설교를 경청했던 이들이 바로 며칠 전 목사의 설교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행동들도 많았다. 여러 교회의 설교들을 비교하면서 비평적 평가를 서로 나누는 이들도 많아졌다. 2천 년대 초 기독교 잡지 기획자 한종호와 신학자 정용섭이 합작하여 만든 ‘설교비평’ 프로젝트가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설교비평 붐을 일으킨 것은 이러한 현상의 직접적 여파였다. 

   이렇게 각기 설교비평가들이 된 이들이 더 나은 설교를 찾아 교회를 옮겨 다녔다. 지난 글에서 명명했던 ‘주권교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주권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은 설교였지만, 그것이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이들 까다로운 교인들,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적극적 비평가가 된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교회들은, 설교의 내용과 설교자의 테크닉에만 의존하지 않고, 예배 형식, 예배음악, 예배당의 공간 배치, 음향・조명・시각효과 등을 캐릭터화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나아가 교인 프로그램이나 교회건축물에서도 그 교회만의 개성을 추구했다. 바야흐로 이 시기에 성공한 교회가 되려면 자기만의 캐릭터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1990년대 이성적 기획과 감성적 기획의 시대에 성공한 교회들


    1990년대 중반, 교세가 정체 혹은 감소하고 있던 시절, 하여 개신교 교계에서 위기론이 솔솔 번져나가던 시절, 교인들 사이에서 두 교회에 관한 입소문이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이사를 하든, 귀국을 하든, 진학을 하든, 기독교인이 서울로 오게 되면 어느 교회를 방문할까? 이때 추천 1순위의 교회가 바로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다.

   1940~50년대 한국개신교를 대표하는 교회라면 영락교회였고, 1970~1980년대를 상징하는 교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1958년 대조동 산동네에서 시작해서, 1961년 서대문로터리로, 그리고 1971년에 여의도로 교회당을 옮겼다)라면, 이 두 교회는 1990년대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락교회는 월남이주자들에서 시작해서, 군선교와 도시 중상위층 선교의 성과로 이룩된 교회였고,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이농이주자들의 신자화에서 시작해서 도시 중상위층의 신자화로 이어지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교회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신자 규모를 가진 교회다. 하지만 내부 갈등과 사회적 지탄이 겹치면서 이 슈퍼울트라급 초대형교회의 성장세도 꺾이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빠르게 성장세를 탔을 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교회들에 영향을 미친 새로운 주역이 등장한 것이다. 우선 이 두 교회의 성장은 새신자의 유입보다는 여러 교회들을 순방하던 ‘주권교인’들을 정착시킴으로써 이룩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까다로운 ‘주권교인’들의 마음에 든 것일까? 나는 앞에서 이 시대 성공한 교회들은 캐릭터화의 성공과 맞물린다고 보았는데, 바로 이러한 성공을 대표하는 교회가 이 두 교회였다. 단순화하여 말하면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이라는 캐릭터로서, 그리고 온누리교회는 ‘귀족영성’이라는 캐릭터로서 ‘주권교인’을 사로잡았다. 전자는 이성의 기획으로, 후자는 감성의 기획으로 1990년대 교회 대중으로부터 열광을 받았다.

   이 얘기를 하려면 1990년대 한국사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시기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식 인프라가 급성장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사회적 제도화의 중심논리로 부상한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국민의 시민적 주권의식이 급상승했다. 게다가 소비사회로의 급속한 이행기를 맞아 시민 각자의 취향에 대한 권리의식도 크게 신장했다. 이 시기에 사회에는 이성의 기획들이 난무했고, 이는 민주주의적 사회설계를 둘러싼 논쟁들이었다. 물론 1980년대에도 이러한 논쟁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논쟁은 진보적 사회운동의 공론장에 한정된 것이었다. 한데 1990년대 이후 이 논쟁은 범사회적인 공론의 장에서 진행되었다. 한편 이러한 정치적 사회설계를 둘러싼 공론장의 양성화는 논쟁 주체의 전문가화를 촉진했다. 동시에 많은 대중은 지적 관객이 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전문가화’ 현상, 이것은 정치적 사회설계 논쟁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 전 부문에서 전문가화 현상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그만큼 시민들은 각기 전문적 기능들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제 학생들은 거리에서 시위자가 되기보다는 도서관으로 몰려들었고, 시민들의 재교육 붐이 활성화되었다. 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한 사교육 열기도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전례 없이 전 사회적 기조로 치솟게 된 이성의 기획은 전문가로 살아남기 위한 전사회적 경쟁과 맞물리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성주의의 강화와 경쟁 시스템으로의 빠른 전환 속에서 사람들은 감성적인 위로를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사회적 낙오자만이 아니라 상승 가능성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라는 감성의 기획이 요청된 것이다. 이렇게 이 시기의 이성의 기획과 감성의 기획은 사회 엘리트층이라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신앙의 이성적 기획으로서의 '제자훈련'과 1990년대




    그런데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이 교회들의 각기 다른 캐릭터는 이 두 기획에서 굉장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먼저 제자훈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제자훈련’은 일종의 신앙에 대한 이성적 훈련 프로그램을 표상하는 용어다. 그 기원은 딕 요크(Dick York)라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독립선교사에게서 유래한다.

    그는 1960년 대구에서 선교학교를 열었는데, 거기서 10여명의 제자들을 훈육한 훈련 아이템은 성서 읽기와 전도로 요약된다. 성서 읽기 훈련이란 ‘묵독’하고 그 의미를 깊게 되새기는 신앙훈련이다. 그때까지 한국에선 음률에 따라 흥얼거리며 낭송하는, 일종의 전근대 구술사회 선비들의 책읽기 같은, 성서 읽기가 일반적이었는데, 딕 요크의 제자들은 근대적인 문자사회적 읽기 특징인 ‘묵독’의 훈련을 받은 것이다. 낭송이 발성되는 소리의 외면적 효과가 의미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독서법이라면, 묵독은 내면화를 통한 의미 형성이 강화되는 독서법이다. 4-4조니 7-5조니 하는 외면 사회의 관행적인 음률에 따라 낭송되는 글의 호흡과 리듬이 글의 느낌을 만들어내고 그 의미의 기조에 영향을 미친다면, 묵독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던 개인적 기억들이 내면에서 글과 어우러지면서 의미를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다. 이런 묵독의 훈련은 당시 지적인 성향의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1980년대 대학가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흥회식 감성 폭발을 강조하던 교회에선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낯선 신앙 양식으로 취급되었다.  

    한편 딕 요크의 전도 훈련은, 부흥회처럼 감성이 분출하는 이벤트 전도와는 달리, 구원의 교리로 설득하는 방식의 포교법을 수련하는 것이다. 이는 성서 묵독과 맞물린다. 즉 묵독하는 이는 내면의 상처와 사투를 벌이면서 그 상흔을 극복하게 했던 구원의 논리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 논리를 타인에게 전하는 것이 전도였다. 당연히 그이는 확신에 차서 매우 논리적 어법으로 타인을 설득하는 방식의 전도를 수행한다. 한데 당시 한국교회는 이런 낯선 전도 방식의 수행자들을 가리켜 구원파라고 비아냥댔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 중 몇이 스스로를 ‘구원파’라고 주체화하면서 신앙분파들을 만들었다. 지난 2014년 침몰한 세월호를 소유한 회사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커다란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유병언을 교주로 하는 기독교복음침례회도 이런 ‘구원파’의 일파였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선교전문의 신앙단체들을 만들었다. 이 선교전문 신앙단체들에서 딕 요크 방식의 성서 읽기와 전도 훈련을 ‘제자훈련’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이성적인 지적 신앙양식은 1980년대까지는 아직 일부 소수의 지식층 사이에서만 활성화될 뿐이었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1990년대에 이성적 기획이 주도하는 시대와 맞물리면서 제자훈련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그것을 주도한 것이 바로 사랑의교회였다. ‘구원파’로 낙인찍힌 이단화된 집단들과 선교전문 신앙단체들의 훈련 프로그램으로 일부 지식인 신앙대중에 국한된 현상이었던 것이, 사랑의교회와 더불어 교회의 캐릭터로 부상했고, 보다 폭넓은 교회 대중, 특히 교회들을 떠돌던 주권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음 글에서는 ‘신앙의 감성적 기획으로서의 귀족영성과 1990년대’를 온누리교회 현상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첫번째 글로, [주간경향]에는 <대형교회는 강력한 웰빙 문화공간이다>(1183호. 2016. 07. 05)로 게재되었습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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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두 번째[각주:1]


대형교회는 왜 보수주의적인가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지난 글에서 나는 대형교회들에 관한 학계의 분류법들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어느 분류법으로 보든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거의 모두 ‘보수주의적’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 단언은 이 연재를 꿰뚫는 핵심적 문제제기인 ‘1990년 어간 이후 한국사회에서 웰빙-우파가 형성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로서 대형교회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의 기저에 깔린 전제다.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대형교회는 ‘보수주의적’이라는 전제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자.


서북주의와 보수주의


대형교회들은, 범주를 어떻게 나누든, 거의 예외 없이 보수주의적이다. 그것은 한국개신교의 성장 과정에서 근본주의와 반공주의가 거의 모든 교회들의 신앙의 모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대형교회의 보수주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썼다. 얼핏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근본주의와 반공주의는 당연히 보수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개신교의 성장 과정에서”라는 말에 있다. 역사적 과정에서 이러한 조합이 타당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형교회와 보수주의


    한국의 개신교 전례과정을 살피면 초기 개신교는 오늘의 한국교회처럼 근본주의 일색은 아니었다. 물론 반공주의도 그리 강한 신앙적 기조가 아니었다. 그런데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면서 개신교는 근본주의를 모태로 하는 종교로 빠르게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는 10여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근본주의는 반공주의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한국개신교 신앙의 모태가 되었다. 즉 오늘 우리가 ‘한국교회는 본래부터 당연히 그랬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1940~50년대에 조성된 ‘만들어진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는 얘기다.

   근본주의와 관련해서는 서북지역의 개신교가 그 뿌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서북(혹은 관서) 지역이라 함은, 조선시대 지역명칭에 따르면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전역을 포함한다. 한데 1893년 이후 서양의 개신교 선교부들 간에 맺은 수차례에 걸친 ‘한반도 선교지 분할협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가 미국 북장로회의 배타적 선교영역이 되고, 함경도는 간도지역을 할당받은 캐나다 연합교회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이후, 함경도 지역은 간도를 가리키는 명칭이던 동북 혹은 관북 지방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이런 개신교적인 표현이 월남자 지식인들이 대종을 이루던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개신교도들에 의해 일상화되면서 서북지역은 이 두 지방을 한정해서 가리키는 명칭된 것으로 보인다.

   한데 서북지역 개신교도들이 처음부터 근본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실은 이곳의 개신교도들 가운데는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진취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잘 알다시피 애국계몽운동은 서북지역의 개신교도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특히 이승훈의 오산학교, 안창호의 대성학교 등으로 대표되는 교육운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반면 서북지역의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들은 이와는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당대 전 세계에서 가장 강성의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물론 미국 북장로회가 근본주의 일색의 교파는 아니었다. 단지 한반도의 선교사로 파송된 이들이 그랬다. 

    그런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이들의 서북지역에서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을 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주도하게 했다. 이 부흥운동의 효과로 북한지역 개신교 신자의 80%에 가까운 이들이 미국 북장로회의 영향권 아래 있는 장로교도가 되었고 한반도 전체 개신교도의 40% 이상이 이들 서북계 장로교도였다. 


    서북계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앙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 종교적 배타주의에 가까웠다. 한데 해방 이후 북한의 개신교도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서북계 개신교도들의 근본주의는 극우 반공주의라는 공격적 정치와 결합되었다. 일종의 정치적 망명자로서 남한으로 이주한 이들 중 다수는 막막한 이민자의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회의 하나를 발견했는데, 반공투쟁을 벌이던 이들에게 고용되는 것이다. 당시 남한의 자산가들과 미군에 고용된 고위층 경찰관리, 그리고 미군 정보당국 등이 그들을 고용한 자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계 개신교의 근본주의 신앙과 공격적 극우반공주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논리처럼 결합되었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러한 정치화된 극우주의적 신앙을 ‘서북주의’라고 부른 바 있다. 서북주의는 이렇게 해방정국 남한의 월남자들 사이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이들이 깊이 개입한 이념갈등은 반공국가로서의 남한 단독정부의 탄생, 그리고 이념과잉의 전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을 야기했다. 이것은 민족에게는 대재앙이었지만 서북주의적 개신교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이 개신교 분파는 한국개신교의 주도세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에서 가장 막강한 자원을 가진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렇게 서북주의적 신앙, 곧 근본주의와 극우반공주의가 결합된 신앙은 한국개신교 신앙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상에서 본 것처럼 서북주의 신앙의 생성과 발전 과정은 반공국가로서의 남한정부, 그리고 반공규율체제로서의 남한사회가 구축되는 과정과 밀접히 연관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한국개신교는 반공주의적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보수주의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성장지상주의와 보수주의


    서북주의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1960년대 이후 약화되고, 새로운 세대가 교회를 주도한다.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인 영락교회가 서북주의적 신앙의 주축이었다면, 1960~1990년 사이, 그러니까 개신교 대부흥시대를 이끈 주역은 서북주의와 거의 연관이 없는 조용기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필두로 하는 성장주의적 개신교 부흥사들이었다. 이때 한국개신교에는 새로운 신앙의 기조가 형성된다. 

    이른바 ‘성장지상주의’다. 디테일하게 이야기하면 성장지상주의와 서북주의는 서로 모순적이다. 전자는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신앙이라면, 후자는 결코 도구화될 수 없는 이념이라는 근본원리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양자는 서로 긴밀히 결합되었다. 

    이는 반공국가로서의 제1공화국과 성장지상주의적 발전국가체제로서의 유신체제 사이의 순접관계와 유사하다. 반공국가가 추구하는 체제는 공산주의라는 적에 대한 ‘증오’를 통해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한데 성장지상주의적 발전국가체제는 그 적에 대한 증오를 ‘성장에 대한 동력’으로 재활용했다. 적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적보다 더 발전해야만 하며, 그것을 위해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장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장지상주의적 개신교는 절대적 이단인 공산주의를 무찌르기 위해 복음화가 절대적이라고 주장했다. 그 적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이 지긋지긋한 가난의 질곡을 만들어 놓았기에, 적과의 싸움은 물리적인 것인 동시에 영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개신교 성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복음화의 내용이다.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하면, 이렇게 서북주의와 성장지상주의가 신앙을 물리적이고 영적인 전쟁으로 해석하였기에, 그러한 전쟁의 신앙을 구현하는 신앙제도는 ‘비상한 체제’여야 했다. 그것은 바로 절대적 1인의 카리스마적 지배를 통한 교회제도로 나타났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국개신교회에서 대형교회는 예외 없이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관철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면 중소형교회는 카리스마적 1인의 지배가 구현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문제는 거의 모든 한국의 개신교회들을 지배하는 신앙담론은 1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교회적 권위주의를 지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권위주의를 구현하지 못한 교회는 스스로를 실패한 혹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교회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1공화국에서 민주화 이전까지 한국사회의 지배적 체제 논리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개신교, 특히 대형교회적 신앙은 이런 권위주의 체제를 향한 보수주의와 친화적이다.


탈성장시대의 대형교회와 보수주의


    여기서 다시 앞의 글에서 대형교회에 관한 대목을 상기해보자. 나는 대형교회를 두 범주로 나누었다. 국가와 교회가 공히 성장일로에 있던 시기인 1980년대까지 대형교회로 부상한 교회들(A)과 저성장 혹은 역성장 시기인 1990년 어간 이후의 교회들(B)이 그것이다. 한데 서북주의적 신앙이나 성장지상주의적 신앙은 A 범주의 대형교회들에서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난다.

    1990년대, 특히 2천 년대에 오면 대형교회를 이룩했던 카리스마적 1인은 은퇴하거나 사망하는 일이 잦아졌다. 세대교체국면이 된 것이다. 문제는 시대가 달라졌다는 데 있다. 1990년 어간에는 알다시피 한국사회에서 권위주의가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하여 그 속도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대개 제도는 좀더 느린 데 반해, 대중의 인식은 좀 더 빠른 변화를 추구한다. 세대교체국면에 진입한 대형교회들도 예외가 아니다.

    A 범주의 교회들은 권위주의 시대에 성공을 이룩한 교회이니 만큼 제도나 인식에서 더 권위주의적이다. 하지만 이 범주의 많은 교회들에서 거의 모든 가용자원을 독점한 카리스마적 1인은 실재하지 않는다. 창립자는 사망했거나 은퇴목사가 되었다. 하여 이 범주의 교회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심지어는 시대착오적인 행보들로 사회의 따가운 시선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한다.

    B 범주의 경우는 좀더 복잡하다. 세대교체가 성장지상주의로 회귀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사랑의교회) 그런 경우 교회는 더 권력화되면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성장 잠재력이 소진되어 버린다. 또 세대교체가 개혁을 둘러싼 극심한 갈등을 야기하게 될 수도 있다.(소망교회) 하지만 권위주의의 후퇴로 인한 갈등을 덜 경험하면서 퇴행성을 덜 드러내기도 한다.(온누리교회) 한편 이 범주의 교회들에는 아직 은퇴하지 않은 이들이 많은데, 그들 중에는 권위주의적 제도에도 불구하고 강한 독재자이기보다는 부드러운 독재를 통해 계몽적 리더십을 구현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강한 시대적응력과 함께 성장 잠재력을 유지한다.

    하지만 B 범주의 교회들도 기본적으로 제도나 담론에서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계몽군주인지 독재자인지, 부드러운 독재인지 완고한 독재인지만 다를 뿐이다. 수천 혹은 수만의 교인들을 결속시키는 장치는 빈약한데, 대개의 교회들이 그런 것처럼 높은 수준의 통합을 유지하려면 권위주의가 제일 적합하다. 한데 그러려면 담임목사나 소수 특권적 장로 외에는 권리가 극도로 제약되어야 한다. 즉 대형교회의 신앙제도는 교인들의 주권의식을 제약함으로써만 존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적 개혁은 근원적으로 어렵고, 보수주의적 제도와 담론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첫번째 글로, [주간경향]에는 <대형교회는 강력한 웰빙 문화공간이다>(1183호. 2016. 07. 05)로 게재되었습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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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첫 번째[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웰빙-우파'


    이것은 한국사회의 웰빙-우파에 관한 이야기다. ‘웰빙-우파’란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보수주의의 한 양상을 크로키(croquis)하게 스케치한 나의 용어다. 즉 그 사회적 현상을 빠르게 포착하여 특징을 묘사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보수주의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강한 반공주의 성향과 성장지상주의가 결합된 체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사회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그러한 체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무너지고 사회는 다양한 실험 상황에 놓이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문화 영역에서의 창조적 도전들이 속출했다. 그중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중상위계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웰빙’이다. 이것은 먹거리를 필두로 삶의 다층적인 영역에서 빠르게 확산된 문화적 고품격화(gentrification) 현상이다. 특히 중상위계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러한 고품격화를 나는 중상위계층적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of middle/upper class)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웰빙 현상은 1990년대 이후 격화된 ‘보수 대 진보’의 갈등과 엮이곤 하였다. 하여 웰빙 현상을 단순 양분하면 ‘웰빙-우파’와 ‘웰빙-좌파’ 현상으로 나뉜다. 그중 내가 주목하는 것은 웰빙-우파다.


대형교회와 보수주의


    미국적 개념인 ‘메가처치’(mega-church)는 단순히 양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요일 대예배에 출석한 성인교인의 숫자가 2천 명 이상인 교회를 가리킨다. 최근에는 1만 명 이상의 교회들이 많아지면서 ‘기가처치’(giga-church)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한국에는 대략 880여개의 개신교 메가처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만으로 한국교회의 특징을 설명하기는 충분치 않다. 해서 ‘강남대형교회’와 ‘강북대형교회’, ‘중산층 대형교회’와 ‘혼합계층 대형교회’ 같은 공간적 범주로 대형교회를 나누거나,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 같은 시간적 범주로 분류하곤 했다.

    이러한 분류법은 모두 비슷한 현상을 다르게 포착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 대형교회들의 탄생은 두 범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1950년대 월남자교회인 영락교회를 필두로 해서 1990년 어간까지, 그러니까 한국 사회와 개신교가 공히 초고속으로 발전하던 시기에 등장한 대형교회들(A)과, 1990년 어간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한국 사회와 교회가 공히 저성장 혹은 역성장 상황에 있던 시기에 성장한 대형교회들(B)이 그것이다.

    (A)는 서울에서 훨씬 많았지만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적지 아니 등장했다. 이때 서울의 경우는 당연히 강북 지역에 몰려 있다. 당시까지 한강 이남이란 여의도와 영등포 지역에 불과했다. 그리고 교인들의 계층 분포도 시골에서 이주한 도시빈민들에서부터 도시중상위층까지 다양했다.

    (B)는 서울의 강남지역(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지역)과 강동지역, 그리고 분당에서 집중적으로 탄생한다. 이 지역들은 땅값이 빠른 속도로 상승한 곳이고 젊은 중상위계층이 집중적으로 이주한 곳이다. 물론 강북지역이나 일산, 산본, 부천 같은 다른 신도시들에도 대형교회들이 등장했지만, 그 숫자는 강남, 강동, 분당에 비해 매우 적었다.

    한편 대형교회들은, 범주를 어떻게 나누든, 거의 예외 없이 보수주의적이다. 그것은 한국개신교의 성장 과정에서 근본주의와 반공주의가 거의 모든 교회들의 신앙의 모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란 현실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보고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현실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대신 근본 원리에로 돌아가려는 신앙운동이다. 한데 한국개신교가 신봉했던 근본 원리란 미국개신교 근본주의의 가치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개신교의 근본주의는 일종의 ‘친미적 식민주의’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주의적 개신교가 반공국가 건설에 깊이 개입하면서 한국개신교에는 반공국가체제를 수호하는 보수주의 신앙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 대형교회’, 웰빙-우파의 문화공간(champ, field)


    서울의 강남 지역 개발이 본격화된 것은 1970~80년대부터이고, 1990년대에 이르면 이 지역은 한국근대화를 상징하는 중심지역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2천 년대에 이르면 중심지역이 강동과 분당 지역으로 확장된다.

    1970~80년대에 강남으로 이주할 당시 나이가 10~20대인 청소년과 청년들이 1990년대에는 30~40대가 되고 2010년대에는 50~60대가 된다. 그러니까 1990년대에 그들은 핵가족의 중심 역할을 하는 세대이자 직장에서 현장업무를 책임지는 이들로 부상하고, 2010년대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층이 된다. 그런데 이 세대는 한국사회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제1차 베이비붐 세대다. 바로 이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강남의 중상위계층이, 앞에서 말한, 웰빙 현상의 주역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그 시기, 즉 1990년 어간 이후에 강남, 강동, 분당 등에서 집중적으로 대두한 대형교회를 주목해보자. 이들 대형교회들이 강남지역에서 창립하거나 다른 데서 이곳으로 이주한 시기는 대체로 1970년대 말 이후다. 그러니까 2010년대가 되기까지 이 세대는 길게는 30~40년간 함께 예배를 드리고 여러 공식・비공식 행사들 속에서 서로 얽혀 왔다. 이른바 ‘신실한 신자’의 경우 최소한 주1회 이상의 만남을 몇십년 동안 나눈 이들이다. 그러니 이 지역의 대형교회들을 ‘그 대형교회’들이라고 한다면, ‘그 대형교회’들에서 신앙을 매개로 하는 삶의 스타일로서 웰빙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나는 이어지는 글들에서 ‘그 대형교회’들의 웰빙신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웰빙’ 현상에는 웰빙-좌파도 있고 웰빙-우파도 있다. 그렇다면 ‘그 대형교회’들에서 웰빙신앙은 어떤 이념 성향을 지닐까? 한국의 교회들의 신앙의 근간이 보수주의적이니 만큼 웰빙신앙도 우파적 성향을 지녔을 것이겠다.

    한데 웰빙적 삶의 양식이 사람들의 일상에서 형성되는 현장을 ‘웰빙 문화공간’이라고 한다면, 대형교회만큼 자주, 그리고 장기간 지속적으로 웰빙적 일상이 교차하는 문화공간이 또 있을까.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자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웰빙적 문화공간은 다름 아닌 ‘그 대형교회’들이라는 얘기다. 요컨대 ‘그 대형교회’들의 웰빙적 문화공간은 우파적이다. 이 연재는 바로 그것을 탐사할 것이다.


‘웰빙-우파’에서 ‘계몽적 보수주의’로


    지난 4.13 총선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결과의 하나는 ‘중간범주의 등장’이다. 1990년대 이후 격화된 보수-진보의 갈등이 정치영역에서 양당제의 제도적 기반이 되어왔는데 시민들의 투표는 그것에 저항했다. 양당 모두 심하게 교란되었고 특히 거대 여당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새누리당에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결과가, 그 왼편과 오른편 정치세력의 강화가 아닌, 중간범주의 뚜렷한 대두였다.

    중간범주가 정치세력으로 중요하게 부상한 첫 번째 사례는 아마도 2007년 대선 무렵이었다. 당시 보수 영역에는 ‘선진화’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했고, 진보 영역에는 ‘문국현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또 2012년에는 우파 영역에서 경제민주화 카드가 큰 힘을 펼쳤다. 하지만 이 시도들은 보수주의 정권에서 철저히 무력했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약진한 중간범주의 정치운동은, 보수-진보의 의제에 흡수되지 않는, 독자적 의제를 부각시켰다. 그것은 기성 정치세력의 부패를 꾸짖는 ‘도덕적 의제’다. 심지어 기성 정치세력이 보수-진보의 의제보다 중간범주적인 도덕 프레임에 흡수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중간범주적 차원의 ‘정치의 도덕화’를 일종의 ‘정치의 웰빙화’ 현상으로 해석한다. 즉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웰빙 현상이 문화적 생활양식(아비투스)으로 빠르게 정착해왔는데, 그것이 최근 뚜렷이 정치 영역에서도 안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웰빙이라는 문화적 양식은 다분히 ‘쿨’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는데 정치의 웰빙화는 ‘쿨’하기보다는 ‘계몽적’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적인 웰빙-우파’가 ‘정치적인 계몽적 보수주의’로 분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13 총선에서 기독자유당은 약진했지만 한 석도 얻지 못했다. 당초에 다섯 석을 예상했고 선거 당일 출구조사발표에서도 두 석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약진했다고 함은, 이제까지 기독정당들이 얻었던 표보다는 좀더 많은 지지를 받았고, 또 다른 기독정당인 기독민주당이 얻은 표와 산술적으로 합산하면 비례대표 한 석을 얻을 수도 있었다는 데 있다.

    하지만 문제는 확장 가능성이 거의 안 보이는 ‘약진’이라는 데 있다. 왜냐면 기독자유당이 내걸은 아젠다가 가장 잘 먹힐 것으로 기대한 지역에서는 득표율이 매우 낮은 반면, 득표율이 높은 지역은 새누리당 이탈자 중 개신교 신자 일부가 이동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몇몇 대형교회들의 목사와 장로들이 기독자유당을 열렬히 지지했다는 점이다. 특히 수도권의 유력한 교계 지도자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들의 교인들 대다수는 목사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지적이든 매우 높은 수준의 엘리트 교인들이 새누리당보다 훨씬 더 극우적인 기독자유당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들 중 다수는 극우적이라기보다는 중도적인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증오의 정치보다는 관용의 정치를 선호했고, ‘적’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는 이념 마케팅보다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실용적 마케팅을 좋아했다. 그런 이들이 과거 2007년 대선 때엔 MB를 지지하는 바이블 벨트에 결속되었고, 2012년에는 박근혜를 지지하는 선거연합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선 그 대열에서 이탈했을 뿐 아니라 중간범주의 정치세력을 등장시키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대형교회적 웰빙보수주의 혹은 계몽적 보수주의는 중간범주의 정치를 어떻게 제도화하게 될까? 이 연재가 묻고자 하는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첫번째 글로, [주간경향]에는 <대형교회는 강력한 웰빙 문화공간이다>(1183호. 2016. 07. 05)로 게재되었습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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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그들이 있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고...
―「열왕기하」 21,3

 

‘산당(山堂)’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마(bamah)는 제1성서에서 80회 이상 등장하는데, 거의 모든 경우에 극단의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산당이 무엇이길래 성서가 그토록 위험시하고 있을까요? 더욱이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거의 모든 왕들은 문제의 산당 예배를 철폐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기원전 7세기 유다국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특히 639~609년 재위에 있던 요시아 왕정의 사관실로 찾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아마도 유다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국의 역사가 편찬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선사(先史), 그리고 예언자들의 문서 등도 편찬되었습니다. 이 문서들이 훗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1성서의 토라(오경), 「사무엘기 상/하」 「사사기」 「열왕기 상/하」, 그리고 「이사야서」 등 예언자들의 책들의 최초 문헌본이 됩니다.

이들 요시아 왕실 사관들은 유다국과 이스라엘국의 선왕들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산당’의 처리 문제에 두었습니다. 오직 두 명의 왕, 유다국의 히스기야와 요시아만이 산당 철폐를 추진한 이로서 칭송할만한 이로 추앙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이사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등의 예언집에서도 한결같이 산당은 문제의 온상처럼 언급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왕국 시조의 한 사람인 솔로몬조차 산당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왕들 가운데 이 일로 가장 극렬하게 비판을 받고 있는 이는 요시아 왕의 아비이자 선대왕인 므낫세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산당 문제가 요시아 왕실 정치의 가장 예민한 의제였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므낫세의 정치적 노선과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요시아 왕실의 문헌 편찬 작업이 왕성하게 펼쳐지고 있는 당시에도 이 문제를 놓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 그렇다면 산당이라는 장소의 존치와 철폐를 놓고 벌인 정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부족동맹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제사장이자 예언자였던 사무엘의 본거지가 실로의 산당이었다는 점입니다(「사무엘기상」 9,19). 그러니까 요시아 왕실 사관들의 주장과는 달리, 산당이라고 모두 우상숭배의 장소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아니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이 생기기 훨씬 전에 산당은 야훼의 전형적인 성소였습니다.
말했듯이 요시아 왕실이 문제시한 산당은 므낫세의 산당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당시 유다국을 식민화하고 있던 아시리아 제국 풍의 일월성신 의례가 벌어지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요시아가 므낫세의 산당을 철폐한 것은 유다국 내에서 친(親)아시리아 세력을 거세하려는 의도였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좀더 앞으로 돌려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의 아비이자 선왕인 히스기야는 당시 강력한 세력으로 메소포타니아 전역과 이집트 지역을 크게 위협하던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다가 처절하게 패배하여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하여 이 전쟁 이후 히스기야는 무력한 왕이 되었고, 조정은 친(親)아시리아파에 의해 죄지우지되고 있었습니다. 하여 몇 년 후 그가 죽자 어린 므낫세가 등극하게 되는데, 그는 아마도 그의 모친은 친(親)아시리아파 가문에 속했을 것입니다. 

12세에 왕이 된 어린 므낫세는 점차 권력의 핵심으로 성장했고 무려 55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친(親)아시리아 동맹의 열렬한 일원으로서 유다국을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그 동안 그는 히스기야의 정치를 철저히 파괴했고, 많은 이들을 살상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한데 그가 죽은 뒤 아들 아몬이 즉위했다가 2년 만에 궁중정변으로 살해당하자, 농민세력(암하아레츠)이 들고 일어나 정변을 수습하고 다른 아들 요시아를 왕으로 추대했는데, 이 왕은 므낫세에 반대하고 히스기야를 계승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것은 므낫세의 정치가 반(反)민적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가 피를 많이 흘린 통치자라는 점은 필경 정적들을 가혹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반(反)민중적 정책으로 많은 농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므낫세-요시아로 이어지는 산당을 둘러싼 갈등의 배후에는 대(對)아시리아 정치만이 아니라 농민의 권익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도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스기야-므낫세-요시아로 이어지는 산당을 둘러싼 격렬한 갈등의 역사가 시종 ‘몰렉 제사’ 문제와 얽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몰렉 제사는 절체절명의 긴박한 위기에 처한 이들이 수행한 제사 형식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신제사는 대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요. 그런데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에 의해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놓였을 때 히스기야의 부친인 아하스 왕이 자기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의례를 지냈고, 마침 그때 거짓말처럼 적들이 물러간 데다, 이 두 나라가 아시리아에 의해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시리아라는 제국이 유다를 구원하기 위해 야훼가 불러일으킨 제국이라는 신앙이 출현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죽이기까지 스스로를 희생한 왕 아하스의 신실함 때문이라는 여론을 낳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유다국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를 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한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그가 유다국을 번성케 할 때, 이 나라의 기득권세력 역시 함께 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만을 갖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장치를 보유한 세력이 형성되었음을 뜻합니다. 대중의 수탈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장치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소’입니다.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를 수행하고 온갖 사적ㆍ공적 재앙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해주는 신의 장소가 성소인데, 그곳이 이들 기득권층의 이해를 위해 종사하는 사제들에 의해 장악되어 대중을 포섭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들이 아하스의 인신제사를 칭송하고, 대중의 수탈을 정당화하던 장소가 바로 산당인 성소였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이 성소, 곧 산당을 철폐하고자 했던 것은 아하스의 정치, 곧 귀족 중심의 정치를 종식하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한데 이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하스 대에 형성된 기득권 세력이 친(親)아시리아파였고, 아시리아의 개입에 의해 반(反)아시리아를 표방한 히스기야가 무력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므낫세의 부상은 친()아시리아파의 승리를 의미했고 민중의 절망을 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시아의 반(反)므낫세 정치는 곧 반()아시리아 노선의 개혁세력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뜻하고, 대중 중심적 정치의 부활을 의미했습니다.

최근 한국은 산업화 시대의 전통적인 극우정부가 재집권했습니다. 복지확대를 주장했고, 경제민주화를 부르짖었음에도, 이 정부가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는 없습니다. 

알다시피 박정희 정부 때 한국은 산업화 시대의 기득권체제가 안착되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기본적으로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압도적인 권력집단으로 부상한 군부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좀 더 넓게 보자면 1970년대 영동(강남권) 개발의 과정에서 관료, 법조계, 정치계, 학계, 언론계를 아우르는 기득권세력으로 부상한 신흥부유층이 군부와의 동맹체제를 구축하게 되면서 형성된 권력 집단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후 민주화를 거치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기득권 동맹이 와해되었다가 다시 군부와 기타 엘리트 세력이 재동맹을 맺고 등장한 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인 것입니다. 

이 정부의 탄생은 다양한 요인들이 우연히 서로 얽히면서 나타난 것이지만, 최근의 국정원 사태는 가장 전형적인 산업화 시대 기득권체제의 행동양식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과거와는 달리 거대한 기획자가 없는 가운데 군부, 경찰, 언론 등이 서로 공명하면서 이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는 그렇게 추정됩니다. 

한데 박근혜 정부는 현재 가공할만큼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정책적 정치적 실패와 국정 운영의 서투름, 그리고 권력 고위층을 둘러싼 추문들이 끊이지 않음에도 지지율은 큰 변화 없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중을 흡수하는 장소들, 마치 7세기 유다국의 산당 같은 장소들을 이들 기득권 세력이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른바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가 어느 때보다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언론이 그 대표적인 장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지점은, 또 다른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가 교회, 특히 대형교회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과거 산업화 시대 고도성장기에도 대중 포섭의 주요한 공간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은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로 일반화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교회에는 대중이 없고 귀족주의적 대중정치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극우주의가 대형교회의 확장을 주도했습니다. 하여 교회에는 산업화 시대적인 기득권체제의 수호자들이 지금도 들끓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또 다른 우리 시대의 산당이 된 것입니다. 하여 오늘의 히스기야에 의해, 오늘의 요시아에 의해 교회는 철거될 운명이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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