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작은 도시 공동체 이야기 2]


공동체의 해석적 순환



 

최규창[각주:1]


공간, 장소, 거처


       많은 사람들은 보편적 ‘공간'에 의미가 부여되면 ‘장소’, 즉 ‘관계공간’이나 ‘역사공간’으로 변화된다는 점을 인식했다. 괴테는 '들판과 숲과 바위와 정원은 언제나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가 그곳들을 장소로 만든다.’고 노래했다. 물건이나 사물에 의미와 목적이 부여되면 ‘도구’가 되듯이,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성의 좌표 속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실존'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들이 우리의 존재론을 공간적으로 모두 설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유에 실천이 첨가되지 않으면 어떤 한계를 넘어가지 못한다. 예를 들어, ‘속도’의 관점으로 근대성을 사유한 폴 빌릴리오도 오늘날과 같은 초고속 이동수단들과 광속 인터넷, 그리고 개인의 사생활까지 가속화시키는 스마트폰의 시대는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속도 자체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정교하고 흥미로운 분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무지막지한 속도의 중독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예언하지 못했다. 원리조차도 새로운 맥락을 만나면 시효가 소멸되는데, 그 결과 그것은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정리에 불과한 것이 된다. 공간이 장소로, 물건이 도구로, 존재가 실존으로 전환되는데는 사유나 의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기에는 경험으로 대변되는 일종의 시간성이 필요한데, 그로 인해 공간과 장소는 어떤 변증법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결국 우리에게는 인생의 의미를 담지하는 ‘중요한' 장소, 즉 ‘거처'가 필요한 것이다.  

       수 년 전, 도시의 삶에 적응하기 힘든 경제적 여건에 처한 몇 젊은 부부들이 거주할 장소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중, 울산 도심에서 떨어진 한 외진 지역에 지어진 조그마한 미분양 아파트 단지를 발견했다. 분양이 되지 않고 방치된 곳이어서 시행사에서도 그들에게 매우 저렴한 가격에 장기 임대를 해 주었고, 심지어 몇 백 만원의 보증금과 휴대폰 사용요금과 비슷한 수준의 월세만 내면 십 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계약도 체결해 주었다. 일단 거주가 해결되자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미 가지고 있던 목공기술, 도배기술, 커피 만들기, 운전면허 등을 활용해서 닥치는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서서히 생업도 안정되어 갔다. 비록 도심까지 진입하는데 다소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거처가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 모든 불편함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장점이었다. 현재 이 공동체에는 열 가정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단단한 가정 교회가 형성되었고, 경제적 부담없이 부모를 모시는 집이 생겨났고, 외부 손님을 수용할 게스트하우스도 마련되어 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소득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버는 돈을 한 군데로 모으고 개인당 일정 금액의 용돈을 매 달 받는다. 공동으로 모인 소득으로 모두에게 의료비, 교육비, 주거비 등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있다. 점점 이 공동체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고, 사람들의 일거리와 가용한 생업 아이템들도 증가하고 있어서, 요즘은 일을 줄이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딘가에 취업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 나서자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자금을 고려하더라도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돈을 더 버는 것 보다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공동체를 더 단단하게 이루는 쪽으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일단 거처가 안정되자, 젊은 부부들은 아기를 낳기 시작했고, 아이를 입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 어떤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소유가 더 늘어난 것도 아니고,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것도 아닌데, 불편한 위치에 있는 저렴한 주택에 함께 모여 삶을 공유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심 속의 가정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삶의 요소들인 가정꾸리기, 교회 유지하기, 생업에서 살아남기 등이 자연스럽게 한꺼번에 해결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포기한 것은 단지 번듯한 직장에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삶 뿐이었다.   


환원근대 속에 상실된 공간


      앤소니 퀸이 주연한 <산체스의 아이들>이라는 영화의 OST 메인 타이틀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희망과 긍지에 대한 꿈이 없다면 사람은 죽을 것이다. 그의 몸은 움직일지라도 그의 마음은 무덤 속에서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땅이 없다면 사람은 꿈꿀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존엄성을 가지고 살 장소가 필요하다.”  


       안식할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유로울 수 없다. 거처가 없는 인간은 노마드 상태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의미를 가지는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인생의 터를 세우는 ‘거처'를 의미한다. 아마도 1960년대 이후 압축근대 시대에, 대대로 살아오던 거처를 떠나 도시로 밀려들어와 도시 빈민이 된 이들에게 거의 유일한 ‘유사 거처’(pseudo-dwelling place)의 역할을 제공했던 곳은 바로 ‘교회’였을 것이다. 새벽마다 하늘 아버지에게 매달리고 울부짖지 않으면 하루도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자연스럽게 교회당은 ‘성전’이 되었고, 집보다 더 깨끗하고 거룩하게 관리해야 할 ‘거처'가 되었다. ‘70~'80년대에 종종 들리던 뉴스처럼, 자신의 장기를 팔아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일부 교회와 신도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믿음이라고까지 해석했다. 1960년대 이후 50여년간 한국 사회는 ‘2년 단위 전세’와 ‘아파트 중심의 주택공급’,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아파트 선분양제’, ‘아파트 가격 폭등’ 등에 힘입은 빈번한 주거지 이동전략을 통한 서민 재산 증식으로 나라를 유지해 왔다. 2년 단위의 잦은 이사는 우리의 의식에서 거처를 소거시켰고, 동일한 구조로 설계된 아파트의 평수를 늘려가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거처가 되어야 할 집은 중산층 진입과 국가의 복지 의무, 자녀 학자금, 교회 헌금을 모두 떠받치는 재원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전 국민의 59%가 아파트에 살고 있고, 85%가 동일하게 설계된 모양의 주택에서 살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는 결국 주거공간의 획일화를 통한 전체주의를 이루어냈고, 잦은 이주를 통한 상실의 정치를 구현했다. 한국의 교회 성장 역시 이 지점에서 동일한 혜택을 입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안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기반인 거처를 (늘 옮겨 다니는) 집에서 찾지 못하고 교회나 다른 동질집단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상대적 공간’ 개념을 통해 제시하듯이, 공간 속에서 생성되는 의미는 관찰자의 관점과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김덕영은 <환원근대>에서,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모든 가치와 전통을 ‘돈이 되는’ 것과 맞바꿈으로써 철저하게 자본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대상/영역의 측면에서는 경제성장으로 환원되고, 주체/담지자의 측면에서는 국가와 재벌로 환원되는 이중적 과정을 거쳤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근대 세계의 토대를 이루는 중요한 지표인 분화와 개인화는 억압되고 저지되었다’는 것이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는 세계는 결국 '공간의 획일화'와 '거처의 상실'을 수반하게 된다. 개인이 존엄성을 가지고 꿈을 꾸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존엄성과 꿈은 가치의 다양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은 다시 말해, 거처의 해체를 통한 전체주의를 도모하는 힘과 그에 저항하는 힘 간의 ‘공간충돌' 또는 ‘공간투쟁'을 상정한다. 우리는 외양으로는 끊임없이 돈을 추구하지만, 내면으로는 계속 거처를 찾는 분열증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거처 탐색의 실패는 ‘헬조선’과 ‘세계 최고의 자살율’로 나타나고 있다. 절대적 빈곤 시대에도 나타나지 않던 현상이, 모두가 밥은 먹고 살 수 있다는 현대에 와서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변화의 고통 : 가치관의 충돌


       이제 여기에 덧붙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거처를 이루는 것은 공간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사람들이기도 하다. 특정한 공간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관계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처가 된다. 그것은 실재적으로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개인이 온전한 참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참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은 ‘의식’(意識)과 ‘이성’만으로는 불가능하고, 내면의 ‘무의식'과 영적인 에너지의 발현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반드시 어떤 형태의 고통과 불편함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반드시 앞 세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삶의 지혜와 충돌을 야기한다. 인간은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든 불편함과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한 시대가 낳은 지혜란 그 경로를 압축적으로 구성한 일정한 구조와 패턴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우리가 건축을 통한 주거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결심했을 때, 구성원들 전부가 양가 부모님들에게서 받았던 압박과 우려는 모두 여기서 기인했다. 한국전쟁을 겪고, 모든 것이 부족했던 어려운 시절을 지나온 그 분들에게 있어 돈을 함께 투자해서 벌이는 ‘경제적 융합 행위’는 실패가 자명한 매우 위험한 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돈을 거래하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게 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돈이 속이지 사람이 속이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속이는 사람은 계속 속인다.’, ‘실패한 사람은 계속 실패한다.’, ‘돈의 유혹을 이길 장사는 없다.’는 것을 삶의 지혜로 터득한 이들에게, 전재산을 걸고 공동체를 건설하기로 한 자식들의 결심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로 비춰졌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심지어 토지 구매잔금을 주기 전날 우리 집에 오셔서, ‘토지 계약금을 포기하고 공사를 하지 마라’고 강하게 충고하셨다. 당신 스스로도 평생 교인들 빚보증을 서주고, 수 많은 사기를 당해 오면서도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셨지만, 자식 마저 그런 상처와 배신 속에 인생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답답했다고 하셨다. 나는 ‘저와 우리 친구들을 믿어달라'고 부탁드렸지만, 교회 내에서도 이런 사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평생 보지 못했던 아버지는 설득을 포기한 채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셨다. 과연 ‘한 번 실패한 사람은 계속 실패한다’는 말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맞는 것일까. 그냥 부모의 삶의 지혜가 농축된 격언들을 따라 살면 인생에 큰 문제가 없이 편안해질 가능성이 클 것이다. 하지만 ‘의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격언들이 우리에게 어떤 에너지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우리의 선택은 자명했다.   

       그러나 이후의 과정은 우리에게 기성세대의 격언들이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해 깨닫게 해 주었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였다. 먼저 건축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격언은 단순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가는 수 많은 이해관계와 구조적인 악으로 가득하다. 애초의 계획과 설계대로 진행되는 것은 거의 없었고, 건축이라는 과정을 진행하면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낭패를 거의 모두 경험해야 했다. 목적에 맞는 땅을 찾는데도 반 년이 걸렸지만, 세 필지를 사서 병합하고자 했던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땅을 중개한 부동산컨설팅사는 애초에 필지병합을 간단한 과정으로 설명했지만, 현실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복잡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결국 구매한 토지의 일부를 포기하고 땅을 설계해야 했고, 그 때문에 막대한 재정적, 시간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토지경계가 잘못 측정되어서 공사가 몇 달 중단되기도 했고, 결국 설계사, 시공사, 감리사도 교체되었다. 제대로 시공하고 있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교대로 휴가를 내고 현장에 상주해야 했고, 구청 공무원, 시공사 소장과의 말다툼은 일상이 되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각자의 재정압박이 심해져서 서로 돈을 융통하면서 버텨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건축이 완료되었지만, 주택 세 채를 분양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다시 큰 재정손해와 2년이 넘는 지루한 법정싸움이 이어졌다. 건축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잃고 길거리에 나가 앉을 뻔한 위기가 몇 번 있었고, 우리는 퇴근 후 밤마다 모여 기도회와 대책회의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때의 적막함이란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참담했다. 이런 과정들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부모님들은 우리를 막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런 류의 프로젝트는 애초부터 시작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자기 시대의 아포리즘으로 형성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이 터널을 지나왔고,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한 번도 포기하거나 서로를 원망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이것이 부모님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점이고, 우리 세대에 새롭게 형성된 삶의 해석방식이었다. 그리고 이후 우리는 14년 반을 함께 거처를 이루었다. 물론 경험이 쌓이고 나서의 공정은 이와 같이 않을 것이다. 실재로 현재 진행중인 2차 공사는 마무리를 한 달 앞두고 있는 현재시점까지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경험이 전무했던 우리들은 모든 과정마다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다.   

       부모님 세대의 아포리즘이 현실적이라는 깨달음을 준 두 번째 계기는 우리의 공동체 생활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갈등과 어려움이었다. 공동체는 공유된 가치(shared values)에 동의한 사람들이 형성하는 일종의 배타적 멤버쉽 개념을 포함하지만,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한편으로는 서로의 개성과 ‘임의적 특이성’이 살아 있는 충돌과 투쟁의 장(場)이기도 하다. 결혼이 개인의 결합이나, 양가 집안의 결합을 넘어, 수 십년간 따로 형성된 두 공간의 결합이듯이, 공동체 역시 교집합과 합집합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형성되어가는 하나의 지평융합의 완성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갈등에 의해 해체되든지, 아니며 공존할 수 있는 나름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주거 공동체는 달리 다른 곳으로 도망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자의 방식을 취하게 된다.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비교의식이다. 다섯 가정이 서로에 대해 깊이 알게 될수록 각 방면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들(best practice)에 집중하게 되고 그것을 자신의 가정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졌고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자녀들을 비교하면서 생기게 되는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웃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기 자녀에 대한 주관적 낙관주의로 육아와 교육의 스트레스를 이겨 왔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 아이들의 특징과 개성, 차이는 숨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시까지도 다양성의 가치를 삶으로 배우지 못했던 우리들은 여전히 세속적 기준으로 아이들과 우리의 삶을 재단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우리들은 이런 어려움들이 일종의 지평융합을 통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하비가 ‘상대적 공간’ 개념을 통해 제시하듯이, 공간 속에서 생성되는 의미는 관찰자의 관점과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김덕영은 <환원근대>에서,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모든 가치와 전통을 ‘돈이 되는’ 것과 맞바꿈으로써 철저하게 자본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대상/영역의 측면에서는 경제성장으로 환원되고, 주체/담지자의 측면에서는 국가와 재벌로 환원되는 이중적 과정을 거쳤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근대 세계의 토대를 이루는 중요한 지표인 분화와 개인화는 억압되고 저지되었다’는 것이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는 세계는 결국 '공간의 획일화'와 '거처의 상실'을 수반하게 된다. 개인이 존엄성을 가지고 꿈을 꾸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존엄성과 꿈은 가치의 다양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은 다시 말해, 거처의 해체를 통한 전체주의를 도모하는 힘과 그에 저항하는 힘 간의 ‘공간충돌' 또는 ‘공간투쟁'을 상정한다. 우리는 외양으로는 끊임없이 돈을 추구하지만, 내면으로는 계속 거처를 찾는 분열증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거처 탐색의 실패는 ‘헬조선’과 ‘세계 최고의 자살율’로 나타나고 있다. 절대적 빈곤 시대에도 나타나지 않던 현상이, 모두가 밥은 먹고 살 수 있다는 현대에 와서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순환과 융합 :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함께 하는 시간과 나눔을 통해 우리는 솔직해 지는 법을 배웠다. 그러자 서로에게 잘 보이거나, 가면을 써야 할 이유가 없어지고, 자신의 인격과 자기 가정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모임 중에 부부싸움이 빈번히 일어나고, 부부간에 둘이서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전체 모임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자기를 발견하는 경험이었다. 성장은 이성과 의식만이 아닌, 무질서와 무의식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면이 질서정연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혼돈과 무질서가 함께 공유되어야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 주인공 타일러 더든은 ‘남자는 싸워봐야 진정한 친구가 된다’고 주장한다. 싸움은 무질서의 본능이 올라오는 경험이자, 광기의 행위다. 예수가 우리에게 평화가 아닌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신 것처럼(마태복음10:34) 가정 내의 다툼, 공동체 내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결국은 서로를 더욱 단단하게 결속시키는 힘이 된다. 주거 공동체는 달리 도피할 곳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든 갈등과 고통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융합과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이성적인 대화로 갈등을 설명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차원이 아니라, 여전히 갈등과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채 섭섭함과 분노가 남아 있지만, 서로의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 수 있고, 더 깊은 정과 신뢰로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체험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근대적 주체로 형성된 근대적, 시스템적 공동체에서 경험하기 힘든 새로운 공동체 이해일 수 있다. 우리는 그냥 그런 과정 안에 머물기로 했다. (공동체 내의 무의식의 융합에 대해서는 3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 

       공동체는 이제 우리에게 맞는 형태로 어떤 룰과 구조를 가지게 된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배제와 포용>에서 말하듯, 서로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도 힘들고, 멀어져도 어려워지는 것이 공동체의 속성이다. 흔히 '매우 가까운 관계'에 대한 환상을 갖고 공동체에 접근하지만 그것은 상처를 불러올 수도 있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되면 자신과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사이에 타자를 수용할 공간을 갖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타자가 바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외부의 타자일 수도 있고, 공동체 자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에서는 항상 부분과 전체의 해석적 순환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공동체에서 생겨나는 구조와 룰은 공동체나 구조 자체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항상 구성원들이 참된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가변적이고 과정중심적이다.  

       하이데거나 가다머가 주장하듯이 인간은 자기 시대의 역사성을 벗어날 수 없고, 무전제적인 해석을 할 수 없다. 우리들 자체가 세계를 객체화할 수 없고,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경적 공동체’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우리가 스스로 포함된 공동체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완벽한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다만 자기 시대를 참인간으로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시대적 공동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를 우리의 기준이자 '의미론적 동위체'(움베르토 에코)로 삼는 한계적 순환 속에서 탄생한 어떤 구조나 패턴, 룰이 공동체 안에 존재할 뿐이다. 이것 또한 구성원들에 따라 계속 변화될 것이므로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강요하는 순간 우리는 해석을 멈추게 되고, 시대적 아포리즘에 사로잡혀 버리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울산 외곽의 공동체 역시 자기들에게 맞는 임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그 방식들은 일반화되거나 다른 공동체에 강요될 수 없다. 공동체 내의 갈등이 해결되고 무의식적 차원의 공유가 일어나는 것으로 멈춘다면 우리는 계속 진화하는 공동체의 영속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떤 룰과 구조를 만들지만, 그 구조들이 다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계속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해 가는 것이 공동체의 속성이다. 사람은 공동체를 만들지만, 공동체 역시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돈을 벌거나, 외부에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를 만들거나, 성공을 추구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의 삶을 쫓아가는 참된 인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홀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이 세상을 객체로 만드는 주객논리로는 모순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공동체에 속해야 하고, 그러한 해석적 순환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14년의 첫번째 스테이지는 우리와 공동체가 그런 방식으로 함께 영향을 주고 받는 남다른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늦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박하고 필수불가결한 변화의 요청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새로운 주거 공간을 설계하고 건축하면서 이제 공동체의 목적과 동력을 새롭게 점검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공동체 14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다음 단계의 공동체를 어떻게 구상하고 세웠는지에 대한 새로운 사례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 웹진 <제3시대>

  1.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그 곳에 오래 매여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 수치가 세상변혁이라는 불가능성에 대한 부담과 지나친 민감함에서 나온 혼란이었음을 깨달은 후에 나는 비로소 자연스럽게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 톱니바퀴로부터 일탈하여 나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소박한 대안적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십여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친 후 시작된 법인사업과 생활대안운동은 아직 고전을 면치 못하는 과정 중에 있지만, 그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해가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웹진을 통해 앞으로 4차례에 걸쳐 그 가치생성의 과정을 일부 나눌 예정이다. (주) 포리토리아 대표,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저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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