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여덟번째[각주:1]


돈과 신앙, '착한 동거'의 논리를 찾아서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시대착오


    국가의 발전과 대형교회로의 성장, 그리고 보수주의, 이 세 가지 범주가 서로를 규정하며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1990년 어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국가는 저성장 상황에 놓였고, 교회는 정체 혹은 역성장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국가는 보수와 진보의 각축장이 되었고, 교회의 보수주의는 분화된 양상을 띠었다.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웰빙-우파’는 바로 이 분화된 보수주의, 그중 가장 뚜렷한 양상의 하나로 등장했다. ‘주권교인의 등장’이 이러한 분화를 읽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떠돌아다니던 주권교인들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형교회가 된 두 개의 교회,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1990년대에 가장 주목받던 성장모델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교회의 캐릭터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2천 년대, 보수대연합의 시대에 교회는 단일대오로 뭉친 보수주의 동맹의 탄탄한 일원이 되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를 담아내기 위해 보수든 진보든 내부 개혁이 필요한 상황인데, 진영 갈등이 모든 것을 먹어버리는 정국이 대두했다. 그나마 진보는 내적으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며 성찰의 시간을 맞고 있었지만, 단일대오처럼 보이는 견고한 정치연합으로 엮인 보수주의는 권력연합으로서는 성공했지만 변화하는 시대를 읽는 능력이 퇴화했다. 해서 이러한 권력연합이 집권하는 시대는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지 않고는 정권이 유지될 수 없는, 시대착오적 시대가 되어야 했다.  

 

경품전도

 

   2010년 한 종교계 일간지는 최근 교회에서 ‘경품’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국민일보〉 2010.10.13.) 그 이후 몇 년 동안 개신교계의 여러 매체들도 같은 논조의 기사들을 쏟아냈고, 개신교계 원로들의 신년메시지나 기념강연 등에서도 배금주의라는 우상숭배를 경계하는 말들이 잇따랐다.  

   교회의 경품의 사례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한 대형교회는 새 신자에게 스테인레스로 된 고급 냄비 세트를 선물할 것이고 교회를 계속 출석하면 성경책과 여행가방을 제공한다는 전단지를 널리 뿌렸다. 또 다른 대형교회는 교회 출석 알바 모집 공고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세 시간 근무, 2만원, 주차비 별도지급’이라는 제법 괜찮은 조건으로 말이다. 심지어 어느 교회는 교회를 나오면 소개팅을 시켜줄 것이라는 전도지를 만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남성용과 여성용 전도지를 따로 만들어 남성용에는 여성교인의 사진과 신상이, 여성용에는 남성들의 사진과 신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전도왕에게 자동차를 경품으로 내놓은교회, 성경 다독왕에게 해외여행 상품권을 내놓은 교회 등도 있었다. 

 

 

 

   2010년이라는 시간, 그 무렵은 이러한 배금주의가 교회에 만연한 현상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시기다. 알다시피 2002년에 광고 카피로 처음 등장한 이후 거의 일상어가 되다시피 한 ‘부자 되세요’라는 문구는 이 시대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IMF관리체제로부터 졸업했다고, 정부 당국과 언론들이 앞다투어 대대적으로 떠벌리던 그 무렵이다. 이후 대부분의 TV 드라마, 오락프로, 서적 등, 무수한 매체들은 부자를 훔쳐보고 그들과의 상상적 동일시의 망상에 빠져들고픈 대중의 욕구를 한껏 증폭시켰다. 2007년 대선은 그러한 대중의 욕구에 부합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입증해주는 계기이기도 했다. 대중은 그가 부패한 자본가이자 정치가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성공한 기업가이고 정치인이라는 걸 주목했다. 무수한 대중은 자기들도, 바로 그이처럼, 과정이야 어떻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감을 그를 통해 충족시키고 싶어 했다. 그는 그것을 국민들에게 선물할 메시아처럼 보였다.

    교회는 전례 없는 열광적 지지를 그에게 쏟아 부었다. ‘장로대통령을 만들자’라는 슬로건 속에는 기독교국가에 대한 열망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그들이 추구한 기독교국가라는 상상력은, 더 이상 IMF 재앙 같은 고난의 시대가 없는, 더욱 더 ‘풍요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와 겹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바람은 그가 이끄는 정권의 탄생으로 실현된 듯했다. 무수한 기독교 대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당시 위축되고 있던 교세에 대한 반전의 기대와 겹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한국개신교는, 이제까지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팽창주의에 몰두했다. 교단마다 ‘몇만(천)교회 달성’ 같은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고, 목사후보자들이 목사가 되려면 (기성교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 결과 그 어간에 교회 설립 수가 크게 늘었다. 동시에 3년 이내에 폐업하는 교회 또한 그만큼 늘었다. 그것은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이에게 폐업하는 교회와 시설, 그리고 교인을 끼워 파는 이상한 관행이 만연하게 되었고, 그것을 ‘공간비용+알파(일종의 권리금)’의 가격으로 중계하는 블랙마켓이 형성되었다. 교회는 교회대로 강도 높은 전도 캠페인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른바 경품전도 현상이 만연하게 되었다. 2010년, 그 어간은 그런 시기였다.  

 

청부론

 

    2천 년대 초, 한국개신교계를 강타한 용어가 있다. ‘청부론’이라는 개념어다. 2001년 교회를 설립한 김동호 목사가 그 무렵 설교와 저작들을 통해 ‘청부론’을 제기하였고, 그 직후 ‘청부론이냐 청빈론이냐’를 둘러싸고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개념에 대해 교단의 통제를 받고 있던 신학대학들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반면, 교회 사역사들, 특히 젊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청부론이란, 말 그대로, 신으로부터 풍요를 위탁받은 것에 관한 주장이다. 과거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도 형식에선 유사한 틀이 있다. 하느님이 영적 구원을 베푼다는 것은 동시에 건강과 물질의 구원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1+1’ 패키지로 모둠 선사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요컨대 세속적 풍요와 극적인 거리를 두면서 신앙적 다이내미즘을 추구했던 미국의 근본주의 신앙운동과는 달리, 조용기 류의 은사주의 운동은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놓인 심대한 거리감을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신앙적 다이내미즘을 이끌어냈다. 초기 조용기(1950~60년대)의 경우는 서울 은평구 지역의 달동네에 살고 있던, 지질이 가난하고 심각한 건강의 위기에 놓여 있던 이들에게 영적인 동시에 세속적인 축복을 베푸는 복음이 중심이었던 반면, 미국의 번영신학과 결합한 중후기 조용기(1970년대 이후)는 모든 대중에게 주는 영적이자 세속적인 축복의 메시지로 그 함의를 변형시켰다.  

    그런데 김동호의 청부론은,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거리를 해체하였다는 점에서는 조용기와 일견 유사성이 있지만, 그 맥락은 전혀 다르다. 초기 조용기의 대중은 모든 것을 상실한 이들이었고, 그런 점에서 그의 은사주의의 핵심은 말 그대로 신이 준 물적 선물에 초점이 있다. 그리고 중후기 조용기에게 있어 은사는, 그 대상이 ‘결핍된 대중’이 아니라 ‘욕구과잉의 대중’이라는 점에서, 세속적 선물에 대한 탐욕을 주체 못하는 배금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김동호에게 있어 청부론은, 선물에 대한 욕망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의 관리에 초점이 있다는 점에서, 조용기의 은사론과는 달리, 그것은 일종의 ‘윤리학’이다.  

    그의 윤리학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죄악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돈 자체를 악마화했던 근본주의적 신앙(그 한 예로, 미국 솔트레이트시티의 몰몬계 근본주의자들은 돈을 〈요한계시록〉의 666의 현대판 실체로서 해석하곤 했다. 그밖에도 이런 해석은 근본주의자들의 흔한 논리다.)과는 달리, 돈 자체를 중립적인 것, 쓰임에 따라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도구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하여 그의 윤리학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버는 방식과 쓰는 방식’을 강조한다. 이는 깨끗한 자본가를 롤모델로 하는 신앙윤리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이것은 유산을 자손에게 상속하지 않는, 기부의 메시지로 이어진다.(이러한 그의 논리는 자본주의를 미화하는 담론에 지니자 않다는 반론을 낳는다. ‘청빈론’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부정축재나 세습 등의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부유층의 폐습들에 대한 비판을 동반하게 되며, 그러한 개신교 사회운동 단체들을 후원하는 것으로 교회 선교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교회적 웰빙운동으로서의 청부론

    한국전쟁 이후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야 했던,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의 논리였던 세대가 있었다. 그들에겐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축복이고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이들의 자녀들의 시대는 달랐다. 그들 중에는 처음부터 중상위계층으로 태어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장기에 소비자본주의를 체험했고, 그렇게 변화된 시대의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한 이들이다. 그들은 1990년대 말, IMF 관리시대를 거치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으면서 그야말로 가장 탐욕스런 자본주의 질서의 화신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 중 일부는 그러한 욕구의 문화를 불편해하면서 성찰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때 후자, 특히 개신교도들이 바로 청부론의 주요 소비자들이었다.  

    당시 사회에선 웰빙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깨끗하고 건강한 소비를 지향하는 문화현상인데, 중요한 것은 이 웰빙의 삶은 어느 정도의 초과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웰빙 현상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계층은 중상위계층이다. 금숟가락 태생이면서 소비자본주의 문화를 체험하였으나, 그 게걸스런 탐욕의 메커니즘을 성찰하려 했던 이들이 바로 웰빙의 주요 소비자들이다. 그리고 이 계층이 집중된 곳에 웰빙 시장 형성이 용이했다.  

    웰빙은 먹거리 운동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청부론은 일종의 교회적 웰빙운동의 한 의제였다고 할 수 있다. 탐욕스런 자본주의에 세뇌되어 버린 교회들에 마뜩치 않아 했던 주권교인들이, 그들의 일부가 교회를 떠나 김동호 목사가 시무하는 높은뜻숭의교회로 몰려들었다. 이 교회는 2천 년대에, 자본주의적 욕구의 문화에 한껏 젖어 있던 교회들 사이에서 그것을 지양하고자 하는 새로운 캐릭터로서 청부론을 제시했고, 많은 주권교인들이 이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교회의 배금주의 풍조가 최고조에 이르던 2010년 어간 새로운 캐릭터 대형교회로 탄생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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