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16]



지젝과 바울(I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도착에 빠진 세계와 기독교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이는 되도록이면 고통은 피하고 쾌락은 더 느끼려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하였다.[각주:1] 여기에서 프로이드가 말하는 쾌락이란 보통의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쉽게 설명하면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거나 짜증이 나거나 하면 인간은 흥분상태가 된다. 이것이 고통의 상태, 또는 불쾌한 상태이다. 그런 증감된 흥분을 낮추어 주는 것이 바로 쾌락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스트레스를 풀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쾌락의 상태로 간다는 것은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각주:2] 이렇게 보면 쾌락-불쾌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경제학적 관계에 있다. 불쾌함의 강도, 즉 흥분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락의 폭도 증가한다. 즉, 불쾌함을 열심히 저축하면 더 많은 쾌락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어린이는 즉각적인 해소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 어린이가 커서 현실사회에 적응하게 되면 불쾌를 참아내면서 자신에게 허용된 쾌락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그 허용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법 (Moral Law)이다. 만약에 인간이 그 허용치를 넘어서까지 쾌락을 느끼려 한다면 더 이상 쾌락원칙이 통하지 않게 되고 고통이 시작된다. 라깡은 그 이후 부터의 어떤 상태를 쾌락이란 말과 구분되기 위해 향유(Jouissance)라는 말로 표현된다.[각주:4] 이제 쾌락을 넘어선 향유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각주:5] 그래서 향유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담게 되는데, 하나는 어떤 중요한 법에 대한 위반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른 고통과 죄책감을 뜻한다. 위반과 그 위반을 통한 고통에 따라오는 즐거움. 아마 이것이 향유에 대한 간단한 정의가 될 것이다. 바로 쾌락과 불쾌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통 속에서 쾌락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불쾌를 넘어서는 고통인간은 바로 이런 향유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했다.[각주:6] 아담 커스코는 다음의 예를 통해 지젝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향유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도덕법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려는 한 구도자를 상상해 보자. 일체의 욕망과 욕구를 끊어버리고 오로지 타자에 대한 사랑과 희생만으로 그 삶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무지 욕구와 성적 욕망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속이나 사막으로 들어가 세상과의 모든 연결을 끊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육체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인 삶도 아니고 건강한 삶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향유의 행위가 필요하다. 즉, 어느 정도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을 즐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지젝은 ‘inherent transgression’ (내장된 위반)이라 하였다. 예를 들면 규정속도 시속 1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에서 5킬로 정도는 더 과속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듯이, 철저한 법에 대한 준수를 요구하는 신의 목소리에는 이미 약간의 위반을 전제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 바로 초자아적 목소리 (법을 지켜라!)에는 “향유를 즐겨라!”라는 목소리가 숨어있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 (Obscene superego supplement)라 하였다.[각주:7] 기억해 두자. 이러한 향유와 초자아, 달리 말하면 ‘big Other’ (대타자)의 관계가 더 과도해지는 것을 지젝은 ‘도착’ (Perversion)이라 부른다.  

   자, 이제 지젝과 기독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함에 있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Perversion (도착)이라는 개념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원래 프로이드는 이성애에서 정상적인 성행위를 벗어나는 것을 도착이라 불렀으나 라깡은 이후 프로이드가 내린 정의를 변형시켜 성적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임상적 구조로 정의하였고, 자연적인 기준으로 보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각주:8] 이 단어가 지젝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향유(jouissance)와 대타자(the big other)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중 하나를 ‘도착’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가 있는데, Psychosis, perversion, and the two forms of neurosis: obession and hysteria가 그것이다.)[각주:9]


   이러한 향유의 차원은 상징계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바로 상징계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 (The big other)안에서 결여를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충동으로 인해 나타난다. 여기에서 도착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면서’ 향유적 존재인 인간을 여전히 이데올로기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바로 ‘도착’이란 증세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은 아예 상징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되며 히스테리, hysteria에 대해서 지젝은 자주 언급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아담 커스코는 도착이라는 개념에 지젝이 점점 집중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유명한 말인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the perverse core or Christianity)으로부터 지젝과 기독교의 다리놓기를 시도한다고 말한다.[각주:10] 커스코는 여기서 지젝에게 도착이라는 것은 완전한 윤리적 실패 (the ultimate ethical failure)란 것을 강조한다.[각주:11] 지젝에 따르면 도착이란 스스로를 타자의(the Other’s) 향유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로 직접 동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경계들 사이를 읽고 도덕적 법이 실제적으로 위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즉, “도착은 바로 ‘내재된 위반’인 것이다.”[각주:12]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는 공식적 도덕법을 지탱하고 도착은 법을 강화하고 심지어 필요로 하며 도착적 쾌락은 바로 그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착은 전복이 될 수 없다.”[각주:13]

    지젝은 가장 도착적인 예로서 종교적 근본주의 (religious fundamentalism)를 든다. 도착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그것을 정치적 실천의 안내로써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한편으로는 수긍할만한 공개적인 얼굴 (예수는 사랑을 가르친 ‘좋은 사람’)을 놓고 그 밑에는 외설적인 향유 (바로 복수하는 하나님)를 놓아두는 것이다.[각주:14] 동성애자들을 죄인으로 혐오하고 심판을 외치는 사랑 많은 목사님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 (증오와 사랑)은 드러난만큼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데, 바로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좀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상식적인 도덕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다종교사회에서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타종교에 대해 비방과 증오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겉보기에도 모순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타종교의 성지에서 땅밝기를 한다거나)에 책임지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상식이나 도덕에 비추어 보았을때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강력한 필요성 (하나님 나라를 위한)에 의해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정확히 그 겉 사랑에 있지 않고 바로 이러한 도착적 구조에 있다고 지적한다.[각주:15] 결국 위반을 통한 고통을 포함한 쾌락 (향유)에 의해 기독교 근본주의는 유지되는 것이며 이를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 여기서 앞장에서 논했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의 예로서 기독교를 기억해보자. 신앙인이 교회에 들어가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면 그들은 하나님, 또는 교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교회가 보기에, 또는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길은 그것을 가로질러 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결국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비록 계속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머문다고 해서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자가 원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것은 노이로제나 신경증 (neurosis)적 증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책임을 본인에게 지울수는 없기 때문이다.[각주:16] 그러나 도착적인 상황은 다르다. 바로 윤리적 책임을 요청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도착적 상황이 편만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현대사회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다. 바로 ‘인간은 스스로의 향유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라는 지젝의 말이 무서워지는 순간이다.[각주:17] 

    바로 이 지점이, 나의 판단에는, 지젝의 담론으로 윤리와 신학이 파고 들어오는 곳이다.


지젝의 바울, 도착적 기독교의 해결책



    지젝과 신학의 관계가 밀접하다 못해 지젝이 신학을 이용하여 그의 철학의 탈출구를 찾으려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을 쓴 아담 커스코이다. 커스코는 지젝이 자신의 체계와 진리담론의 한 예로써 바울을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바디우는 다음편에서 논할 예정이다.) 지젝은 신학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한다.[각주:18] 지젝의 책, [The Puppet and The Dwarf] (한국어책 제목: 죽은 신을 위하여),의 서론은 그 유명한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역사철학의 첫번째 테제로 시작한다.[각주:19]

    장기를 두는 인형이 있다. 그리고 이 인형은 절대 인간과의 장기게임에서 지는 법이 없다. 알파고를 상상해도 된다. 그 테이블 안을 들여다 보면 한 난장이가 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다. 벤야민은 이 인형이 역사유물론 (historical materialism)이고 그 안의 난장이는 바로 신학 (theology)라고 말한다. 벤야민의 이 유비는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젝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이다.

    우리는 이미 앞장에서 기독교를 하나의 상징계의 산물로써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이해해보았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역사 서술은 벤야민의 지적처럼 ‘승자의 기록’이다. 여기서 승자의 기록은, 바로 살아남은, 또는 상징계 안에 알맞게 포섭되어 기억된 자들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젝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상징계는 결핍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에 그 핵심은 텅비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적은 방식과는 반대의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잊혀진, 사라진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지젝이 보기에 아마도 현실의 상징계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판타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말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유일한 한 사람이 발터 벤야민이라는 것이다.[각주:20] 앞으로 발터 벤야민은 조르지오 아감벤을 다룰때 더욱 심도 깊게 이야기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핵심은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힘은 바로 신학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던 원시공산사회로 부터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져 결국에는 공산사회가 된다는 필연적인 역사유물론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벤야민의 역사론을 지젝은 ‘억압된 것의 귀환’ (return of the repressed)을 응용하여 과거의 실패한 혁명적 시도들과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것들의 귀환이 바로 실재적인 혁명의 상황의 가능성이고 바로 그러한 잊혀진 과거의 실패한 시도들이 구원받는 것이 혁명의 상황이라 말하였다.[각주:21]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역사유물론이 퇴조되고 있는 현시대에서 벤야민의 난장이 유비를 거꾸로 볼 것을 주장한다. 곧 신학이 장기 인형이고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바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벤야민의 시대에는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 신학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잊혀진 과거를 ‘구원’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시대에는 신학으로 부터 역사적 유물론을 재발견하는 것이 혁명적 사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사고로 인해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게임에서 그 안에 숨어있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난장이를 붙잡음으로 혁명에 다가간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지젝은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유물론자이고 어쩌고 저쩌고해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kernel) 이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도 가능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제는 더 강력한 것이다. 바로 이 핵심은 오로지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유물론적 접근은 기독교적 핵심으로서만 접근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통해야만 한다!”[각주:22]


    다시 ‘도착’이란 개념으로 되돌아가보자. 지젝이 말하는 ‘도착’은 매우 중요한 두가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첫번째는 왜 지금 기독교인가? 두번째는 왜 바울인가? 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지젝이 보기에 기독교는 매우 도착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이고 현대는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사회 전체에 편만한 상황이다. 즉,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도착’인데 기독교에 이미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도착’의 할아버지 정도 되는 존재이다. 두번째의 답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에 내재해 있는 ‘도착’에 대해 이미 알아차리고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이다. 고로 바울이 ‘도착’을 해결한 방법이 현재에도 가능하다면 바울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된다는 것이다. 차근 차근 따져보자. 

    커스코는 현대 사회에 대한 지젝의 진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현대사회는 곧 대타자 ‘Big Other’가 죽은 사회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사라진 사회이다. 원래 대타자의 역할은 주체가 상징계에 잘 안착하고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내려진 법 (신의 법)을 어기는 향유를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다.[각주:23] 예를 들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교회에 두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의 목표를 교회를 통해 공급 받으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쾌락을 누리며 (예배를 빠진다거나, 이웃을 미워한다거나)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대타자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지켜야 할 신의 법도 이를 어기며 얻는 쾌락도 존재하지 없다. 갑자기 자신이 믿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을 상상해 보자. 단순히 ‘신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와 부모의 지갑에서 몇만원을 훔치던 스릴과 회개의 기쁨이 없는 무료한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현대의 인간은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어기는 방법으로 대타자의 죽음을 해결해 보려했는데 이것이 정확히 지젝이 지적하는 ‘도착’적 행위이다.[각주:24] 간단한 예를 들어본다면, 보수적인 교회들에서 동성애를 비판할때 이를 수간(동물과의 성행위)으로 연결하여 폄하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매우 ‘도착’적인 행위로 보는데, 여러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의 섹스 스캔들에는 무감각하면서 동성애를 이러한 수간과 같은 매우 원초적인 금지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반응한다. 곧 그들 스스로 전통적인 법을 세워두고 그것을 완전히 위배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만 반응하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보면 그들이 대타자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대신에 스스로의 향유(쥬이상스)를 위해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행위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독교 번영주의도 ‘도착’적 행위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으면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쩌면 복음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이러한 생각이 오히려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이라 여겨지는 것 자체가 ‘도착’적 사고가 편만한 것을 의미한다.

    지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도착’적 현상이야말로 기독교가 생존해온 방법이라고 밀어붙인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이야말로 도착적이라고 말한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기독교 신의 방법은 좋은 것을 위해서 언제나 악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구원이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가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유다에게 스승을 배신하는 길을 걷게하지 않았던가? [죽은 신의 위하여]의 부제가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인데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야말로 ‘뭔가 악한 일을 하고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라는’것 이라고 말한다. [각주:25]그리고 지젝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바울이 찾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젝의 관점과 그 처방을 살펴보자.[각주:26]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유대교의 특이성으로 주목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아니라 욥이다. 모세나 다윗과는 달리 욥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나 다윗은 공동체와 국가를 신의 법과 법칙 위에 세운 인물들이지만 욥은 정면으로 신의 법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말하기를, 모든 종교나 국가는 어떠한 법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 법은 언제나 신의 명령을 통한 금지를 바탕으로 세워지는데 그 저변에는 어떠한 폭력적 살해의 사건이 기반하고 있다고 하였다.[각주:27] 그렇다면 신의 법을 열심히 지키려는 욥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고 시험하는 신의 존재는 프로이드의 초자아와 같은 외설적인 존재이다.[각주:28] 예를 들면, 욥기의 신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인간을 득의의 웃음으로 바라보는 신이다. 욥기의 마지막 40-42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겠지만 지젝이 말하는 욥기의 해석은 성서학에서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욥이 신의 존재와 전능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신 스스로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욥 42:7,8)라는 말로 욥의 불평과 신에 대한 질문이 옳았음을 말했기 때문에, 지젝은 욥이야말로 신의 전능하지 못함을 드러내고 고발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은 욥이 아니라 야웨였던 것이다.[각주:29]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에 두가지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법을 통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생존을 추구하는 ‘도착’적 핵심(Perverse Core)과 그 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외설적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신의 전능성에 의문을 던지는 ‘전복’적 핵심(Subversive kernel)이 그것이다. 지젝은 욥기의 마지막에서 욥이 고개를 숙이고 신의 법에 수긍하면서 유대교의 전복적 핵심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본다. 욥은 비밀을 알았지만 사회의 보전과 공동체의 생명이 더욱 중요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교황이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알면서도 수긍해 주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이후에 용기있게 신의 죽음을 말한 자가 유대교에 나타났으니, 그는 예수와 그의 뒤를 이은 바울이었다.[각주:30]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24)로 대표되는 로마서 7장은 보통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토로하면서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구절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로마서 7장의 해석은 바울이 스스로의 유대인됨을 부끄러워하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 착안하여 본문을 율법폐기론적 (율법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입장) 구절이 아니라 율법의 선함을 강조하면서도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율법의 장단점 정도로 해석한다. 지젝은 로마서 7장이 정확하게 바울이 발견했고, 이미 욥이 발견한 율법과 야웨신에 존재하는 ‘도착’성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내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로마서 7장 18~23)


    욥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불능(Impotence)을 발견했던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법(율법)을 따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을 어길수 밖에 없는 법칙이 그 속에 존재함을 발견했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율법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비밀한 입장을 소개했던 것이다.[각주:31] 정리하면, 바울이 발견한 유대교의 비밀은 바로 전복적 핵심 (kernel)이며 그것은 한마디로 ‘전능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로마서 7장 25절)이라고 말할 때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통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 27장 46절) 신의 불능성이 드러났고 바야흐로 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바야흐로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을 발견함으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으로서만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바로 그 비전을 지젝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라고 보는 듯하다. 이는 다음 웹진에서 논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Dylan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 edition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6), 150. [본문으로]
  2. Sigmund Freu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And Other Writings (PENGUIN CLASSICS, 2007), 66–67. [본문으로]
  3. 김상환, 라깡의 재탄생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2), 102. [본문으로]
  4. 이현우는 그런의미에서 향유라는 번역보다 ‘향락’이라는 번역이 더 원뜻에 가깝다고 하는데 원래 Jouissance라는 단어가 성적쾌락에 대한 의미도 있기 때문에 필자는 옳다고 본다. 그러나 향유라는 말이 많이 쓰이므로 여기서는 향유라고 쓰겠다. https://blog.aladin.co.kr/mramor/category/1216428?CommunityType=MyPaper&page=161&cnt=801 [본문으로]
  5.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93. [본문으로]
  6. Ibid., 102.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57–58. [본문으로]
  8.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41. [본문으로]
  9. Kotsko, Zizek and Theology, 61. [본문으로]
  10. Ibid., 62.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Ibid. [본문으로]
  14. Ibid., 63.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본문으로]
  17. Ibid., 61. [본문으로]
  18. Ibid., 74. [본문으로]
  19. Slavoj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ss.: MIT Press, 2003), 3. [본문으로]
  20.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151. [본문으로]
  21. Ibid., 158. [본문으로]
  22.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6. [본문으로]
  23.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85. [본문으로]
  24.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53. [본문으로]
  25. Kotsko, Zizek and Theology, 88. [본문으로]
  26. 필자는 많은 부분 아담 코스트코의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의 3장 ‘The Christian experience’부분을 참고했다. 아담 코스트코는 이 장에서 [죽은 신을 위하여]이전의 지젝이 평가하는 유대교에 대해 서술한다. 원래 프로이드의 저서 [Moses and Monotheism]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평가하였으나, 그 이후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프로이드를 참고하면서 율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유대교의 특이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Ibid., 88–90. [본문으로]
  27.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93. [본문으로]
  28. Ibid. [본문으로]
  29.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126–127. [본문으로]
  30. Kotsko, Zizek and Theology, 95. [본문으로]
  31. Ibid., 94.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haecceitas
    2016.06.10 11:5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Adam Kotsko는 코스트코/카스코 중 하나로 택일하거나 아니면 코츠커 정도로 음역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2. 한수현
    2016.06.12 11:3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네. 알겠습니다. 원고를 몇번에 나누어 쓰다보니 미쳐 고치지 못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V)
: 쫄지마, 이데올로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다소 긴 프롤로그

독자들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난 솔직히 숨이 막힌다. 답답해서…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의 역학 속에서 인간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 형태를 이데올로기라 부른다고 사전에는 정의되어 있다. 아울러, 이런 설명들도 추가된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존재의 기반이 되는 가치 체계, 혹은 사회적인 조건에 대한 판단의 선택 체계 등등… 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한, 김빠진 콜라 같은 말들인가?
이렇게 밍밍한 콜라를 마시고 있던 우리에게 청량하고 자극적인 신상품이 하나 출시되었다. 그가 바로 지젝이다. 감사하게도 지젝의 이데올로기 논의는 21세기 사상계의 전체 지형에서 볼 때 진정 김빠진 콜라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데올로기 비판을 다시 메뉴판에 당당히 입적시켜 우리로 하여금 간만에 이데올로기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지젝이 일으키는 요란함으로 인해 간혹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젝이 일으키는 이 소동이 좋다.
우선, 온갖 것에 시비를 걸어대는 싸움닭 같은 그의 태도가 나를 매료시킨다. 복서로 따지면 전형적인 인파이터다. 나는 지젝을 읽을 때 마다, 80년대 웰터급의 왕좌를 놓고 토마스 헌즈와 세기의 대결을 연출했던 슈거레이 레너드를 떠올린다. 토마스 헌즈가 큰 키와 긴 리치를 이용하여 날카로운 잽과 강력한 스트레이트를 바탕으로 링 주의를 돌면서 우아한 아웃복싱을 전개했다면, 슈거레이 레너드는 쉴새없이 헌즈를 파고든다. 물론, 레너드의 펀치는 헤비급의 조지포먼 만큼 강력하지도, 미들급 세계챔피언 마빈 헤글러같이 묵직하지도 않았지만, 그 빈도와 펀치가 나가는 다양한 각도만큼은 당대 최고였다. 결국, 학같이 우아했던 헌즈는 레너드의 집요함 앞에 무릅을 꿇고 만다. 지젝의 발언들을 지켜보면서 왜 나는 80년대 전설의 복서였던 슈거레이 레너드가 생각나는 걸까?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젝 증후군’으로 나타나는 그가 일으키는 후폭풍이다. 지젝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지젝의 이론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적 측면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지젝을 오독한 것이다. 자본의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된,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세계를 덥고 있는 현 시점에서 혁명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또한 지젝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현실의 이 엄연함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똘아이처럼 지젝은 마치 이 모든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혁명을 연기한다.
이런 지젝을 지난 시대가 지녔던 혁명의 프레임 안에 집어넣어 바라본다면 불편해진다. 지젝은 혁명 그 자체를 말하려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현시대 이념적 지형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폭력적 증상과 징후들을 하나씩 보여주고, 거기에 적합한 혁명의 조건들을 맛나게 나열한 후에, 최종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엄연한 현실속에서 다시금 혁명에 대한 발칙한 상상을 도발케한다. 이러한 ‘지젝 현상’이 지금 시대를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런지 아직 실험 중이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지젝이 충분히 본인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본다.
사상적으로 지젝이 지닌 특이점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혁명과 정신분석을 결합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로이트로 대변되는 정신분석학은 혁명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왔었다. 지젝은 바로 그 정신분석을 혁명을 이해하는 도구로 끌어들인다. 이 말은 지젝이 혁명을 그 전 인물들과 다르게 해석한다는 말이다. 지젝에게 있어 혁명은 단순히 인민을 굴종시키는 오래된 억압과 착취의 물리적 체제를 전복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전통적 혁명론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모토 하에, 주체의 투철한 의지와 인식론적인 앎이 조화를 이루는 철인의 혁명론이라면, 지젝의 혁명론은 그 주체의 꿈꾸는 방식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이라 자부하는 우리는 무슨 공청회장에서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켜야 된다고, 전인적인 인성교육이 절실하다고 열변을 토하다가도, 정작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글도 모르는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초등학교 3학년부터 아이들을 특목고 대비반에 몰아넣는 속물적인 우리들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자신의 잘못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행동은 계속되는 것인가? 지젝이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정신분석학과 공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시대의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는 자본의 욕망을 건드리지 못하고 그 욕망이 꿈꾸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혁명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지젝은 알아차렸던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본인 사상의 밑그림을 선보이면서, 그것의 첫 단추를 이데올로기 비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지젝을 읽는 것은 우선, 지젝식 이데올로기 비판의 화법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 순서를 거치면서 우리는 지젝이 말하는 실재와 실재의 윤리와 유물론적 믿음과 만난다. 지젝의 발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외치게 하고,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는지는 물론 좀 더 지켜봐야 할 성질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젝을 통해 우리는 사상사를 수놓았던 (지젝을 통과한) 철인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와 대안을 벗삼아 오늘의 문제를 다시 다각도에서 반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혁명을 이야기 할 수 있다면……그래서, 나는 지젝이 일으키고 이 소동이 유쾌하고 흥미롭다. 이제야 비로소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넘어갑니다. Are you 뤠디?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세 가지 차원을 언급하고 있다.
우선, 고전적 의미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아닐까 싶다.[각주:1] 맑스에 의하면, 역사란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과정이고, 이데올로기는 계급에 의해 결정되며,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당파적이다. 계급과 당파는 ‘쭉~’ 계속 보편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변하고 뒤틀리고 역전된다. 그러므로 맑스에게 있어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관계와 그 역학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허위의식과 순진함을 까발리는 일이다. 즉, 체제의 의해 왜곡된 현실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민의 순진함을 해부해 보이는 것이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의 주된 임무였다.
지젝은 이 대목에서 냉소주의를 거론하며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이 지니는 나이브함을 역으로 고발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체제에 의해 자행되는 현실에 대한 왜곡과 모순의 매카니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우리의 집요한 네티즌들과 인터넷 논객들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 시대보다 체제에 편입하고자 더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인가?[각주:2]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결국 지젝의 욕망과 환상에 대한 이론일텐데, 연재를 거듭하면서 이 부분은 계속 보충되고 증액될 것이다.)


다시, 알튀세를 위하여...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이 지배자와 피지배라는 구조를 전제로 한다면, 이보다 좀 더 진화한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데올로기가 특정 집단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제도를 통해 작동된다는 원리다.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지난 <웹진 51호>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알튀세의 호명이론이 아닐까 싶다.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은 각각 걸어온 길이 다르고, 방법론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을 본인들 사상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닮았다. 맑스에게 있어서는 역사가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이었고, 프로이트에게는 근대적 이성에 기반하고 중심이 꽉 차 있었다고 믿어왔던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이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에게 있어 주체란 명료한 의식이 아닌 불확실한 무의식에 기반한 주체이고, 꽉 차있는 중심이 아닌, 비어있는 중심을 기반으로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각주:3]
알튀세는 바로 이러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공통점을 알아차리고,[각주:4] 양자의 결합을 시도하여, 맑스주의에는 없는 무의식(타자)의 개념을 정신분석학(라깡)에서 끌어온다. 라깡이 무의식의 영역인 상상계와 상징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개인이 주체로 되어가는지를 분석하듯,[각주:5] 알튀세 역시 무의식과도 같은 이데올로기(대중적 표상체계로서의) 속에서 개개인이 어떻게 주체로 만들어지는지에 주목한다. 
근대적 주체는 타자의 영역을 지우고, 그 타자의 영토에 깃발을 휘날리면서 자신의 주인됨을 입증하려 했던 존재였고, 그런 의미에서 타자란 정복과 제거의 대상이지, 성찰과 관조와 대화의 대상이 아니었다. 맑스주의는 이런 근대적 주체론의 결정판이었고…그런데 맑스주의자 알튀세가 우리안의 타자, 즉 무의식을 맑스주의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알튀세는 맑스주의 논쟁사에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대타자의 호명 앞으로!

알튀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허위의식과 순진함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같이 구조화되고 내재화된 이데올로기 장치(ex: 국가)를 통해 작동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길을 가는데 전경이 내 뒤통수에 대고 “어이~, 학생, 가방 좀 봅시다”라고 하면서 나를 불러 세운다. 이때, 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저요? 저 아무짓도 안 했는데요...”라고 반응한다면? 나는 아주 충실한 이데올로기적인 주체로 호명당하는 그 주체이다. 내가 전경에게 급 쫄아서 보인 반응은 사고하고 의식하고 학습해서 보인 반응이 아니다. 사고하고 의식했다면 개겼어야 맞다. 이 말은 우리의 의식보다 먼저 작동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영어로 representation, 번역하면 표상 혹은 재현체계, 즉 구조이다.
본디 의식이란 칸트 이래 인식론적인 전통에서 보면 무엇 무엇에 대한 의식이고, 그 의식은 반드시 표상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이었다. 그것이 칸트에게는 ‘범주’로, 후설에게는 ‘선험적 의식’으로, 가다머에게는 ‘지평’으로 표현되는데, 이 말들에는 공히 우리의 의식에 앞서 어떤 재현체계가 먼저 선행됨이 깔려있다. 그 ‘선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달리 표현해 ‘무의식적!’이라 불러도 어느 정도 무방하리라.
이를 종합하여 내가 전경에게 보인 반응을 판단하면, 나의 국가를 향한 말과 태도는 대한민국(이데올로기 장치)이라는 거대한 표상체계 안에서 드러나는 나의 무의식적 반응이라는 말인데. 결국, 알튀세에게 있어 인간 주체란 무의식적 체계를 통과한 이데올로기적 존재이고, 그 이데올로기는 신념과 지식의 차원이 아닌, 재현의 차원, 즉 구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이란 체계와 구조에 의해 자행되는 이데올로기적 신화화에 대한 비신화화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겠다. 
지젝 역시 라깡을 정치적으로 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알튀세 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알튀세를 넘어간다. 알튀세가 라깡의 초기이론 의지했다면, 지젝은 라깡의 후기이론을 차용하여 본인의 이데올로기론으로 나아간다. (이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웹진부터 전개될 것이다) 

예고편: 지젝이 나를 아프게 하는 이유

살짝 짧게 다음 웹진 원고의 시놉시스를 공개한다. (내가) 헛소리 하지 않도록.
지젝에 있어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맑스가 말하는 기만적인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도 아니고, 알튀세가 지적하는 무의식의 구조화도 아니다. 이 말은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앎의 차원(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녕 이데올로기가 겨냥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다.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왜, 우리는 다 알면서 그렇게 행위하지 않는가? 우리의 행위를 지배하는 그 매커니즘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SNS를 통하여, 페이스북 담벼락에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글을 몇 자 끄적이고, 또 다른 그런 류의 글들에 like 버튼을 힘껏 누르는 것으로 우리는 양심적 진보적 개혁적 민주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식 논리와 정책을 허락하고 그들에게 한 표를 던진 우리들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빛나는 계몽이성을 바탕으로 부단히 학습하고 갈고 닦고 조이면 밝혀질 것 같았던 이데올로기의 정체는 기실 우리의 무의식적 환상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고, 그것을 추동케하는 원리가 바로 욕망이며, 그 욕망에 맞춰 우리는 미친X 널뛰듯 춤을 추고 있다. 그 춤에 대한 연구가, 그 춤을 추게 하는 바람에 대한 연구가 바로 지젝식 이데올로기 비판인 셈이고, 그 비판을 통해 우리는 내 안에 도사린 무의식적 욕망과 섬뜩하게 대면한다. 하여 지젝을 읽는 것은 때때로 불편하고, 그래서 가끔은 아프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The most elementary definition of ideology is probably the well-known phrase from Marx’s Capital: ‘Sie wissen das nicht, aber sie tun es’ – ‘they do not know it, but they are doing it’. The very concept of ideology implies a kind of basic, constitutive naivete.” – Zizek, Slavoj.,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28. [본문으로]
  2. “one knows the falsehood very well, one is well aware of a particular interest hidden behind an ideological universality, but still one does not renounce it.”-Ibid., 29 [본문으로]
  3. 익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근대적 인간이란 의지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꽉 차있는 주체이고, 근대사회는 그 주체가 담지하고 있는 신념과 믿음에 대한 전적 신뢰와 희망에 의지했던 사회였다. 그렇다고 볼 때, 근대적 주체에 대한 딴지와 그 주체가 그려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해 조소를 날렸던 맑스와 프로이트는 포스트모던을 열어젖힌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례로 20세 중반 이후 거세게 몰아친 포스트모던 백가쟁명이 거의 예외없이 맑스와 프로이트로부터 지적 세례를 받은 후예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만 하다. 현대사상에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간의 통섭과 간섭, 그리고 교차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으로]
  4. Louis Althusser,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 trans. Ben Brewster,(New Yoor: Monthly Review, 1971), 218-219. [본문으로]
  5. 알튀세는 라깡의 초기이론(무의식의 구조화)을 받아들여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라깡의 초기 이론은 크게 거울단계와 상징계로 요약할 수 있다. 거울단계는 아이와 엄마 사이 형성되는 완벽한 2항 관계를 일컫는 말로,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때 아이의 자기 동일성은 상상적 오인에 의존하고 있다. 상상계(거울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아이는 언어를 습득하면서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사회화 과정을 의미한다. 아이는 상징계의 질서로 진입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타자의 법과 규율과 관습을 받아들이고, 대타자가 제시하는 기표를 따라 살면서 드디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 주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큰 주체의 부름에 “예”라고 화답하는, 즉 대타자의 호명에 응답하는 주체인 것이다. [본문으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I)
: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 못지 않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이 물어왔던 질문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주변을 떠도는 많은 명제들이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다’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 희망과 행위가 선택되고 결정된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동.서양 공히 신적인 ‘로고스’ 내지 하늘의 이치인 ‘道’에 의해 구성되어지고 운행되어지는 그 인간을 참 인간으로 오랫동안 간주해 왔었다. 사물의 형성과 운행의 법칙이 확고부동한 질서로 실재하고 있는 우주에서 인간은 그 법칙의 한 일원이었을 뿐이다. 어떤 비밀도, 어떠한 사연도 모두 속속들이 하늘의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나야 했고, 인간의 내포와 인간의 외연은 그 빛 아래에서 수미일관하게 하나로 엮어졌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신적인 로고스(내지 天理) 아래 놓여있다는 점에서, 주체적 의지와 신념을 바탕으로 결단하고 행위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인 기표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인간론이다. 구약성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얻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편)”라고 노래하면서, ‘인간이란 전적으로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였다. 포스트 맑시스트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러한 인간이 살던 시대를 다음과 같은 낭만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루카치, <소설의 이론> 서문 中)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인간의 갈 바를 밝혀주던 그 빛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며 점점 광채를 상실하더니, 19세기에 이르러 어둠에 휩싸이고 만다. 빛이 사라진 것이다. 빛이 사라졌다 함은 그 빛 아래에서 살았던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찰스 다윈과 칼 맑스가 그 진앙의 진원였다고 후대 역사가들은 평한다. 맑스는 1845년에 발표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이다”라고 말하였고, 같은 논문에서 “세계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라 주장하면서,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신의 그늘에서 벗어난, 물적 토대에 기반한 인간을 선언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오늘날의 인간이란 오랜 세월 시간을 버티면서 축적한 경험과 기억과 본능과 생존방식의 총체라는 것 이외에 인간에게 더 이상의 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본인이 창안한 ‘정신분석학’을 통해 인간이란 의식이라는 명료한 정신의 활동이 아닌, 알 수 없는 무의식에 의해 떠받쳐져 있는 불안한 실존임을 서늘하게 증명해 보였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던 세 사람었지만, 그들을 통해 신적인 원리에서 벗어난 인간, 오랫동안 익숙하고 낯익은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나는 인간, 그래서 이제는 고향집 아버지가 사라진,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modern 인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난 <웹진 49호>에 이은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두 번째 글의 제목을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로 정하였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질에 관한 여러 이론들을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내 깜냥에 그럴 능력도 없고…… 앞으로 연재를 계속하면서 기독교와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논의를 간헐적으로 끌어들이겠지만, 이번 <웹진 50호>의 주된 내용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발달(?)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웹진에 이어<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나오는 지젝의 라깡 해석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사실 지젝 이론의 화두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개인이 사회적 주체로 전환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던 라깡의 초기이론보다는, 라깡의 후기 이론, 즉 현실(the reality)은 그 자체로 완벽한 무엇이 아니라,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는 그 무엇인데, 그 구멍들이 환상에 의해 봉합되어 구성된 현실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현실보다는 현실을 지탱케하는 그 무엇, 곧 실재(the Real)에 대한 규명이 지젝을 이해하는 첫 단추이고, 그 단추를 풀어가면서 지젝 특유의 (실재의) 정치학, 윤리학, 신학, 문화비평이 전개된다. 졸고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라깡의 초기이론, 즉 주체구성의 상징화 과정에 대한 지젝식 해설이고, 실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웹진부터 전개될 것이다. 자~~이제부터 가 볼까요? 아 유 뤠디?
     
징후(Symptom): 억압된 것의 귀환

지난 <49호 웹진>에서 ‘빗금 그어진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제 1원리를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정의했었고, 그 억압이 숨겨져 있는 지점을 우리가 흔히 ‘무의식’이라 부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무의식은 실증할 수 있는, 덩어리가 있고 물리적 실체가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징후(Symptom)’로서 나타난다.[각주:1] 이 징후에 대한 실례로 우리는 지난 웹진에서 어렸을때 성폭행을 당했던 소녀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어느 문방구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몸이 떨려오고 심장이 격하게 뛰는 예를 들면서 설명한바 있다.
다시 한번 징후에 대해 생각해보자. 징후란 무엇이고 언제 나타나는가? 징후는 뭔가 억압되었던 것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의 재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빌 클린턴이 대통령 재임시절 본인의 집무실에서 백안관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정사를 벌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클린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고,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여론까지 조성되면서 미국 정계 전체가 큰 소용돌이로 휘말렸던 사건이었다. 그 무렵 ‘클린턴이 왜 그랬을까?’를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들이 나돌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클린턴의 어린 시절 성장배경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클린턴의 생부는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그의 나이 4살 때 클린턴은 알코올중독자 로저 클린턴을 계부로 맞이하였다. 그는 자주 취해 폭력을 일삼는 자였고, 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면서 클린턴은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로저 클린턴 사망 후 클린턴의 생모는 세 명의 남자와 세 번 더 결혼하였다. 얼굴도 못 본 생부와 계부 4명, 총 다섯 명의 아버지가 클린턴에게 있었던 것이다. 성장기 내내 클린턴은 자기집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불행한 일이 없는 것처럼 최면을 걸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어렸을 때부터 모순되는 것을 잘 조화시키고 상황에 따라 잘 적응하는 법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불굴의 의지, 승부욕,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강한 욕구 등이 이때 자리잡았고, 그것이 여성에게는 성적욕구로, 정치적으로는 승리에 대한 욕망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던 심리학자들의 인터뷰가 당시 난무했었다. 요약하면, 어린시절 억압되었던 그 무엇인가가 드디어 징후가 되어 귀환하여 대통령이 된 클린턴으로 하여금 르윈스키와 백악관 정사를 벌이게 했다는 결론인데…..
어렸을 때 아무런 억압 없이 성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클린턴과 같은 강렬한 징후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하나씩 그런 징후들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라깡의 사유와 만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왜 생기는가?’라는 물음에 무의식은 어떤 억압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즉 이런 억압이 눌려 저장되어 있는 장소가 무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라깡은 프로이트보다 한 발짝 더 나간다. 라깡은 개별적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반드시 겪게 되는 억압의 경험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이다.

라깡의 주체론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함은 아기가 제도와 문화와 사회속으로 진입함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환산하면 옹알이를 시작한다는 생후 6개월에서부터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18개월 사이다. 그 기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이전 엄마와 아기의 관계는 연속적이고 합체된 이자관계였다. 아기에게는 나는 나이고, 저것은 엄마라는 주객 이분이 없다. 주관과 객관 사이의 거리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18개월이 지나면서 엄마와 아기사이의 연속성은 서서히 깨어지고 불연속면이 펼쳐지는데, 그 파열을 제공하는 자가 바로 아빠다. 그곳은 엄마의 젖가슴이 곧 나였던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이 지배하는 차가운 상징계를 대변한다.
라깡은 이와 같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설명하기 위해  ‘the ideal ego(이상적 자아)’와 ‘the ego-ideal(자아이상)’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각각은 상상적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동일시와 쌍을 이루는 말이다. 지젝은 상상적 동일시를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표상하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 당하는 장소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소를 동일시 함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고 좋아할 만하게 보이는 것”이라 표현한다.[각주:2]
예를 들어, 엄마의 젖가슴 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와 합일이 가능했던 아이에게, 어느 날 엄마가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나와 합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치자.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는 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성화다. ‘나는 가수다!’ ‘나는 의사다!’ ‘나는 박사다!’……이렇듯 엄마는 자신의 젖가슴만을 탐닉하면서 상상계속에만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닌, 가수, 의사, 박사, 판검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표화된 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제시하는 이름표(기표)를 따는,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라깡은 desire와 jouissance를 구분한다. Desire은 상징계속 주체가 갖는 욕망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CEO되는 것과 같이 어떤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남이 좋아라 하는 시선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상징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볼까?’ 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고, 신부의 집안 배경은? 혼수도 얼마나 했는지? 예식장은 어디? 신혼여행은? 이 모든 사항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정되고 꾸며진다. 반면, jouissance는 상상징계 진입할 때 제거당한(남겨진) 대상을 향한(대한) 욕망이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실재에 대한 부분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런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통과의례를 경험한 주체는 (내가 보기에)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 깊숙히 근원적으로 간직한, 자기소외와 분열과 억압을 동반한 주체다. 왜냐하면, 상징계속 주체(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아기(상상계속 주체)가 지녔던 것이 모두 상징계속 주체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시카고에 살고, 신학으로 박사공부하고 있고, 결혼했고, 목사인 이상철이다. 하지만, 그 이상철으로 완전히 온전히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상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즉 잔여다. 이런 이유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spaltung(파열)이라 표현한다. 이것은 아기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올 때 엄마의 배가 찢어지는 것과 비유할만 하다. 그 고통을 수반해야 아기는 더 이상 자궁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잠재적 주체가 아닌, 세상에서 카운트 되어 살아가는 주체로 설 수 있다. 

결국,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라깡의 답변은 근대철학이 제시하는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계몽이성에 의해 인도받은 근대적 주체는 이성의 빛으로 중세적 어두움을 정복하고 무지와 미지의 지점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세계를 통합하고 종합하면서 전체를 총체적으로 구성해나갈 줄 아는 그런 주체였다. 하지만, 라깡의 주체는 근대적 주체와는 반대로 uncanny하고 weird한 존재이다. 독일말로는 Ungeheuer! 카프카의 <변신>에 보면 한 친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엄청 큰 괴기스러운 벌레로 변신이 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카프가가 쓴 단어가 Ungeheuer이다.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무엇인가를 표시할 때 쓰는 단어다. 예전에 리들리 스콧, 제임스 카메론 감독 같은 대가들이 연출하고 시고니 위버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에어리언>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괴물들의 숙주가 인간의 몸에서 자라는 씬이 나오는데, <변신>에서와 마찬가지로 uncanny하고 Ungeheuer하다는 표현을 쓰기에 딱 걸맞는 장면이었다. 영화 <에어리언>의 그 장면은 라깡의 주체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는 데 가장 탁월한 그림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파열과 분열과 섬뜩함의 도사리고 있는 공간이 있다. 그것은 우리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가 징후가 되어 간간이 우리의 통제와 제약을 넘어 분출한다. 라깡은 징후가 되어 귀환하는, uncanny한 에어리언 같은 ‘내가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이룩한 주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이다. 너무 우울한가?      

<다음 웹진에 계속>

  1.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56. [본문으로]
  2. Ibid., 105. [본문으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
: ‘빗금 그어진 주체($)’ 안에 숨겨진 함의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지젝 연재를 시작하며

소원을 말해봐 니 마음속에 있는 작은 꿈을 말해 봐
니 머리에 있는 이상형을 그려봐 그리고 나를 봐.
난 너의 지니야 꿈이야 지니야~
<중략>
I'm Genie for you, boy!
I'm Genie for your wish!
I'm Genie for your dream!
I'm Genie for your world!

소녀시대가 부른 ‘소원을 말해 봐’의 노래가사 중 일부다. 9명의 소녀시대 멤버들이 내게로 와 소원을 말해보라고 속삭인다. 실제로 그녀들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노래가사처럼 램프에 숨어있던 지니가 ‘뽕’하고 나타나 나의 모든 쾌(快)를 만족시켜 준다면? 아마도 미쳐 터져버리지 않을까?
실제로 그 소원을 끝까지 밀어부쳐 실행한 사람이 있었다. Sadism의 어원이 된 사드(Sade)가 바로 그다. 사드는 칸트와 동시대 인물이다. 하나는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타당한 입법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설파했던 엄숙한 성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우리의 쾌락의 도구로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우리 행동의 보편적인 준칙으로 삼자”[각주:1]고 주장했던 가학적 성 도착증환자 취급을 받는 자다. 라깡은 이 둘을 교차시키면서 정신분석학의 윤리를 정초하려 했고,[각주:2] 이는 현재 지젝으로 대표되는 슬로베니아학파로 이어져 ‘실재의 윤리’로 각색된 채 인문학 전 분야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각주:3]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지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연재될 글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재의 윤리’[각주:4]가 무엇이고, 왜 그것이 이 시기에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지젝으로 신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신학함과 어떻게 다른지? 에 대한 신학적 분석이다. 하지만,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라깡과 지젝을 지날 때 만나게 되는 몇 가지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정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각주:5] 특별히, 라깡과 지젝간의 이론적 접점이라 할 수 있는 실재(the Real)를 규명하는 일이 그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각주:6] 라깡-지젝에게 있어 실재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말하는 ‘the Real’이 사상사의 흐름속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실재, 즉 궁극적 진리, 만물의 원인, 혹은 모든 운동의 동인으로서의 그 ‘실재’와는 의미와 위치가 전혀 다른 새로운 실재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획득된 실재로부터 주체에 대한 논의는 다시 시작되고, 욕망에 대한 시각은 교정된다.
이 작업을 위해 나는 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지젝 사상의 밑그림이라 평가받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Y: Verso, 1989)中 Ch3 ‘Che Vuoi(케보이)?’에 나와있는 라깡의 악명높은 욕망그래프에 대한 지젝의 해석을 먼저 살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성취된 지젝식 주체, 욕망, 실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필자는, 이 글이 진짜로 노리는 지젝식 실재의 윤리와 유물론적 신학이 지닌 함의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예상했겠지만) 앞으로 쓰게 될 원고들의 대부분은 지젝의 이론과 그 이론에 대한 각주로 채워진다. ‘이론을 어떻게, 얼마만큼, 어느 정도의 깊이로 글에 투여해야 할런지?’ 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이론에 함몰되어서도 안되지만, 이론에 쫄아서도 안된다. 이론은 혈액세포로 따지면 체내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 제거를 담당하는 적혈구와도 같다. 산소를 원할히 공급하여 세포의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쓸데없는 분비물을 제거해 신체리듬을 원할히 유지하게 하는 적혈구처럼, 이론은 글의 과잉과 부하를 조절하고 글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한국처럼 이론의 유행이 급격하게 변하는 학문풍토 속에서 이러한 이론에 대한 천착은 근본주의 혹은 교조주의라는 불명예를 쓰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론에 안착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지적일 수는 있어도, 이론을 넘어 횡단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단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지젝 전공자도 아니고, 지젝을 따로 시간을 내어 심도있게 공부한 연구자도 아니다. 단지, 지젝이라는 소문에 귀가 솔깃해 있는 정도의 수준이랄까. 그러기에 지젝을 읽어나가면서 많은 오독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끔한 질책을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바라기는 지젝에 대한 글을 앞으로 웹진을 통해 연재하면서 현재 지젝이라는 소문에만 의지하고 있는 내 지식의 얄팍함이 지젝을 직접보고 대화하는 경지로까지 고양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너무 큰 꿈을 꾸나? 어쨌든… Are you ready?  

케보이(Che Vuoi): “소원을 말해 봐!”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워밍업 차원으로 서두에서 언급했던 소녀시대의 ‘케보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다. ‘케보이’는 주체의 대타자[각주:7]를 향한 질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소녀시대의 열혈팬클럽 회원이다. 소녀시대라는 확고한 대타자가 제공하는 질서속에서 쾌락을 누리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은밀하게 다가와 ‘소원을 말해 봐!’를 속삭이는 소녀시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후 묘한 충동과 고민에 빠진다. 나는 그 동안 대타자 소녀시대의 명령과 바램에 순종하고 부응해왔다고 자부하는데, 내가 뭐가 부족했었나? 내가 그녀들의 바램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녀들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그럼,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욕망해야 되는 걸까?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주체는 상징계의 질서안으로 편입되던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무의식을 떠올리고, 억제되고 차압당했던 본능을 다시 되살린다. 사실 소녀시대의 팬클럽이 되기 위해 나는 팬클럽 규정을 잘 준수했어야 했다. 사진을 찍을 때 다정한 포즈를 취할 수는 있지만, 너무 몸을 밀착한다거나 과도한(섹슈얼한) 애정표현은 자제했어야 했다. 개인 홈페이지에 따뜻한 응원의 말은 올릴 수 있지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발언은 삼가한다. 그녀들의 숙소 앞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릴 수는 있지만, 스토커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저 대타자 소녀시대는 바라만 봐도 좋은 그런 대상이어야 한다. 그 법칙을 인정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소녀시대의 팬클럽이 될 수 있었다. 소녀시대를 브라운관에서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짜릿함과 뭔가 설명할 수 없었던 꿈틀거림을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대타자 소녀시대를 더 가까이서 합법적으로 품기 위해 나는 애초 그 욕동의 일정부분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런데, 소녀시대 팬클럽 회원이라는 상징계의 질서 안으로 편입하기 위해 거세당해야 했던 나의 본심들(?)이 ‘소원을 말해 봐’라고 속삭이는 그녀들의 음성을 들으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What does this mean? 이 지점이 바로 라깡의 유명한 욕망이론이 펼쳐지는 진원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제, 악명 높은 라깡의 욕망그래프로 가야 할 시간이다.[각주:8]
진짜로, Are you ready?

빗금 그어진 주체($) 曰: “나는 지난 여름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

일단,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하겠다. 라깡의 주체는 단일하고 독립적이며 이성의 능력으로 모든 우주의 법칙을 관조하는 근대적 주체와는 달리 분열되어 있고 균열이 많은 주체이다. 특별히 라깡에게 있어 주체의 문제는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알파벳을 익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상징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제시하는 규범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고, 대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점점 대타자의 욕망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주체는 상상계의 유아에서 상징계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태초의 본능과 욕구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의 질서가 부과하는, 즉 대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어떤 면에서는 훼손당한 존재다.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를 ‘빗금 그어진 주체($)’로 라깡은 표기하였던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라깡의 욕망그래프는 이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된다. 라깡의 욕망그래프가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주체가 사후적으로 탄생한다는 말이다.[각주:9] 이 부분에서 설명이 좀 필요한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속류 히치콕 영화 혹은 스릴러, 잔혹 복수극, 여성주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패턴이 하나 있다. 극 중 어느 특정 장소에서 현재에서 과거로 오버랩 되는 경우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길을 가다 갑자기 무엇인가 필요해서, 혹은 갑자기 이상한 기운에 이끌려 문방구(or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고 그 점방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찾으며 가게 안을 두리번 거리는데 갑자기 몸이 떨려오고 가슴이 급하게 뛰기 시작한다. 순간 주인공은 정신을 잃고, 화면은 급하게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20년 전 혹은 30년 전 그 문방구(가게)로 카메라는 시간이동을 한다. 주인공의 어렸을 때로 오버랩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5~6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똑같이 그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씬이 나오고, 물론 그 여자아이는 주인공의 어렸을 때를 상징한다. 그 여자아이가 물건을 찾고 있는 사이 주인 아저씨가 가게 문을 닫고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주인 아저씨는 여자아이에게 인형을 주면서 인형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인형을 공짜로 받은 여자아이는 기뻐서 아저씨와 함께 인형놀이를 신나게 하는데…아저씨가 인형 옷을 하나씩 벗기더니 자기 옷도 벗고 내 옷도 벗긴다. 아저씨는 인형을 만지고 나서 그 아이 몸도 만진다. 그때 아이는 ‘어, 뭔가 수상한데…이 아저씨가 왜 이러지?’라고 순간적으로 섬뜩한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인형놀이를 하는 것이니까~’라는 방어기재를 작동하여 그 순간을 덮고 넘어간다. 문방구 사건 이후 20년, 30년이 흘러 성인이 된 주인공이 그 사건에 대한 혐의를 발견하면서 영화는 긴장과 반전을 거듭하며 급물살을 타게 되는데….너무나 우리들이 많이 봐 왔던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위의 기사는 ‘주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말을 잘 드러내고 있는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라깡의 욕망 그래프 I: “주체는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Graph I>[각주:10]

위의 그래프는 라깡 Graph I이다. S에서 S’로 이어지는 벡터는 기표(ex. 말, 목소리)의 진행과정을, △ 에서 $로 이어지는 연쇄는 주체의 진행과정을 상징한다.  S-->S’벡터와 △--> $ 벡터
가 만나는 접점을 편의상 A, B라고 했을 때, S쪽과 가까운 접점을 B, S’쪽과 가까운 접점을 A라고 하자. 성인이 된 주인공이 문방구에 들어가 공포를 느끼는 지점은 B이고, 어린 주인공이 가게 아저씨와 인형놀이를 하면서 성추행을 당한 지점은 A이다. A(억압된 것, 어린 주인공이 당한 성추행 사건)가 원인이고 B(성인이 된 주인공이 뒤 늦게 어렸을 적 사건의 의미를 깨닫는 것)가 증상으로서 A의 효과라면, 아래 그래프 I은 원인(A)을 선행하는 효과(B)를 나타낸다.[각주:11] 즉 주체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A)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의미를 알게 되고, 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주체는(B) ‘빗금 그어진 주체($)’로 남겨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진리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이미 완성된 채 계속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 무엇인데, 여태까지 내게 알려지지 않았던(모르고 있었던) 그 진리가 어느 날 문득 내게 다가왔다”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진리란 원래 과거에 그 차제로서는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시간이 흘러 미래의 어느 시점인 현재에서 소급적으로 진리는 주체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이고,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구성한 그 주체는 과거에 사건을 맞딱드렸던 애초의 주체와는 다른 주체, 즉 빗금 그어진 주체이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라깡의 Graph I은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말은 주체란 언어적, 문화적 과정을 거치면서 ‘빗금 그어진 주체’($)로 등장한다는 말이고, 그 주체에서부터 모든 사건은 다시 출발되고 다시 해석된다. 이 말은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라깡이 인용한 프로이트의 유명한 발언: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각주:12]를 상기시킨다. 위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서 그 동안 배제되어 왔고, 잊혀져 왔던 그 무엇이다. 그것은 앞에서 예를 들었던 영화 속 장면처럼 한 여인이 어렸을 때 문방구 아저씨로부터 당했던 성추행일 수도 있고, 남자아이들의 경우 성장기에 학교(or 동네)형들에게 끌려가 금품을 갈취 당하고 집단구타 당한 후에,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삥 뜨기고 돌림빵 당한 후에, 무릅이 꿇려 복종을 강요당해야 했던 기억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가 ‘모든 억압되었던 것들은 귀환한다’고 했다지? 억압되었던 것의 부활은 위의 예에서처럼 개인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 억압의 차원도 마찬가지다. 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살육은 아무리 집권자들이 숨기고 감추려 했어도 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를 쏟게 했다. 아니,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이 정권들어 용산에서 혹은 쌍용차에서 불타 떨어진 사람들의 넋들은 다시 우리사회로 증환이 되고 예언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어쩌면 역사는 이 사실을 계속 증언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아픔뿐일지도…. 그것이 이 어두움을 건너 우리를 해방케 하리라’를 읊조렸던 어느 가수의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당했던 개인적, 집단적 억압이 끝까지 우리를 압도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바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인 것이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곳을 찍고 와야 한다. 그 자리로 돌아가 그것들과 대면한 후, ‘그때는 내가 어리고 약하고 무지하여 당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비웃어 주고 그곳을 유유히 빠져 나와야 한다. 물론, 그 주체는 애석하게도 에덴에서 지녔던 태초의 순수함와 충만함을 상실한 존재이지만, 바로 그 주체, 즉 ‘빗금 그어진 주체들’에 의해 시간은 계속 이어지고 역사는 다시 쓰여진다. 이것이 바로 라깡의 욕망그래프가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되는 이유다. (계속)

P.S 다음 웹진에서는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되는 라깡의 욕망그래프 II에 나와있는 상상적 동일시, 상징적 동일시에 대해 알아보고, 그래프 III에 나오는 ‘케보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Let us take as the universal maxim of our conduct the right to enjoy any other person whatsoever as the instrument of our pleasure.”- Jacque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Vol. Book VII)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79. [본문으로]
  2. 라깡 세미나 7권 &lt;Ethics of Psychoanlysis&gt;(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와 라깡 &lt;Ecrits&gt;trans. Bruce Fink (New York: W.W. Norton, 2006)중 ‘Kant avec Sade 사드와 함께 칸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3. 포스트모더니즘 윤리학의 세가지 경향 (자기의 윤리-타자의 윤리-실재의 윤리)에 대한 논의는 졸고 <탈경계의 신학>(동연, 2012)중 ‘포스트모던 윤리의 지형’(140-143쪽)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본격적으로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에 입각한 ‘실재의 윤리’를 선보인 책은 주판치치에 의해 2000년에 출판된 Ethics of the Real (NY: Verso, 2000)이다. 지젝은 이 책의 서문에 참여하였고, 본인의 독일어 저작인 Die politische Suspension des ethischen. (Suhrkamp. Frankfurt am Main, 2005)에서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5. 지젝을 구성하는 이론적 층위는 크게 세가지라 볼 수 있다. 맑스-레닌으로 이어지는 꼼뮨주의, 칸트-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 전통, 그리고 라깡주의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라깡을 경유한 지젝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힌다. [본문으로]
  6. 흔히 라깡의 사상은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젝은 라깡 후기 사상인 실재(계)와 욕망에 집중하고 있고. 하지만,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구분이 두부모 자르듯 선명히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얽히고 중첩되고 겹쳐있다. 그러므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연속적인 한 스펙트럼 상에서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지난 웹진 33호(2011년 3월)에 실린 ‘욕망 혹은 그것의 좌절과 얽힌 (욕구)불만에 관한 에세이’, 웹진 34호(2011년 4월) ‘라깡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웹진 35호(2011년 5월)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기사가 라깡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7. 대타자(the big Other)에 대해 지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타자는 주관적 전제라는 위상속에서 비실체적, 혹은 문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며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대타자는 주체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슬라보예 지젝, &lt;How to Read 라깡&gt;, 박정수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21쪽. 결국, 지젝에게 있어 대타자는 실체가 아니라 가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타자가 실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식 대타자의 명령은 한국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법칙이다. 마치 그것이 실제하는 것 처럼 우리는 행동한다. 그래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스승의 날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명박이 아무리 개판으로 나라를 망쳐놔도 나랏님이기에 감히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우리는 뷸효자, 배은망덕한 제자, 그리고 종북좌파 빨갱이가 되고 만다. 그런 낙인이 찍히면 살기 피곤해 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군사부일체’라는 텅 비어있지만, 상징적 세계에서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는 대타자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으로]
  8. &lt;에크리&gt; 마지막 부분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서 라깡은 4회에 걸쳐 그래프를 그려나가면서 본인의 욕망이론을 완성한다. Graph I 은 정신분석학에서 진실이 어떻게 소급적으로 구성되는지? 에 대한 기본문법을 언어학(ex. 기표와 기표의 관계)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Graph II 는 완성된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부분이고, graph III는 케보이, 즉 상징계 속에서 안주 못하는 주체와 그 과정에서 밝혀진 대타자의 비밀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라깡은 graph IV에서 본인의 욕망이론을 완성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9. “The effect of meaning is always produced backwards, après coup.”-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101 [본문으로]
  10. Ibid.,101. [본문으로]
  11. Ibid.,56-57. [본문으로]
  12. “Wo es war, soll Ich warden (Where is was, I am to become)….That ‘I’ which is supposed to come to be where ‘it’ was, and which analysis has taught us to evaluate, is nothing more than that whose root we already found in the ‘I’ which asks itself what it wants.”- Jacque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Vol. Book VII)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7. [본문으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레비나스, 서구신학을 쏘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자기의 윤리 vs. 타자의 윤리

‘자기의 윤리학’[각주:1]으로 세상의 눈물과 회한을 닦을 수 있을까? 레비나스의 의심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고 개인을 그 규범에 종속시키려했던 기존의 윤리에 맞서 니체-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계열이 ‘자기의 윤리학’을 전개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학’을 제안한다. 그의 시도는 근대적 주체가 지녔던 자율성(autonomism)에 반하는 타율성(heteronomism)의 추구라 할 수 있다.

윤리는 그동안 세상의 억압과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는 자율적 주체의 윤리적 행위가 무엇인지 물어왔다. 그러나 타자의 윤리학은 그 주체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윤리적 행위가 작동된다고 주장한다. 니체류의 윤리학이 서구 형이상학이 시도했던 초월에 반대하여 자기 안으로의 내재를 전략적 도구로 취했다면, 레비나스는 오히려 서구 형이상학의 초월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윤리적 해석과 실천으로 그것이 지녔던 병폐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즉, 초월적 세계 저편에 있는 타자를 통해 바로 이곳에 있는 우리를 다시 발견하고, 이곳의 문제를 다시 바라본 것이다. 이때의 타자란 레비나스에 의하면 억압받고 소외된 경계 밖의 사람들이다.[각주:2]

결론과도 같은 서론으로 ‘자기의 윤리’와 ‘타자의 윤리’간의 굵직한 논쟁거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기의 윤리와 다른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윤리의 쟁점을 조목조목 열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미국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레비나스에 대한 연구는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후설-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현상학적인 계보를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로젠츠바이크로 대표되는 유대교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가 직접 경험한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영향,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번 웹진부터 네 차례에 걸쳐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 다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전통적인 레비나스 연구의 경향을 따르지도, 레비나스에 대한 주례사적 비평도 지양할 것이다. 그보다는 레비나스의 서구형이상학을 향한 비판, 신학이 어떻게 악(고통)을 정당화 시키는 기재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추적, 그 고리를 파헤쳐가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렸던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본회퍼의 타자론 간의 비교, 그리고 최종적으로 타자의 윤리가 기독교 윤리학 안에서 차지하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예단하는 것이 이번 시리즈의 전체적 그림이다.

그 전에 일종의 워밍업 차원에서 지난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라깡의 사유와 레비나스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이는 서구 전체성을 비판하는 레비나스가 지닌 비난의 탄착군이 어느 지점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레비나스와 라깡

근대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 시기였다. 계몽이성의 빛은 몽매한 중세의 두터운 장벽을 허물며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였고, 인류에게 번영과 진보를 약속하는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근대는 인간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른 생존경쟁의 난투극 속으로 몰아넣은 시기이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주체와 객체로 분류하고 주체로 하여금 대상을 지배하게 하는 논리가 싹튼 시기이기도 하다. 주체와 객체간의 간극은 헤겔에 의하면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진화하여 마침내 절대정신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형이상학이 지녔던 주술이었다.[각주:3] 레비나스는 이를 서양철학이 걸어온 ‘전체성의 향수’ 라 지적하고, 개인들의 고유성을 말살하고 타자를 제거하는 폭력적인 개념이라 비판하면서,[각주:4] 홀로코스트를 서양철학의 전체성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지목한다.

우리는 지난 호 웹진에서 라깡에게 있어 타자가 상징계 속의 타자와 실재계 속 타자로 분류되고 있음을 알았고, 상징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 실재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과 구분하여 향유라고 불렀음을 기억한다. 라깡적으로 해석하면 홀로코스트는 전체성의 철학이 실재(the Real)를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유토피아를 창조하겠다던 현실의 기표와 욕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실재였는지가 확인되었던 순간이, 이성의 법칙이라는 상징적 질서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실재계속 대상소타자가 우리에게 불쑥 다가 온 것이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이렇듯, 라깡이 말하는 타자성의 진면목은 상징계속 타자에 갇히지 않는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레비나스의 표현대로라면 동일성의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연기되면서 미끄러져가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고 볼 때, 라깡이 말하는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기존의 서양철학의 전체성으로 타자를 포획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레비나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양자를 비교하는 이유는 서구 전체성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두 사람은 일정 부분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구체적 분석 틀에 있어서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레비나스와 라깡은 공히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등장하는 주체에 대한 타자의 전유와 배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일성의 폭력안으로 말려들어가지 않는 타자를 다시 정초하려 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 양자는 길을 달리한다. 라깡이 의미의 결정을 계속 연기시키며 미끄러져가는 타자를 상정함으로 전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한 반면, 레비나스는 타자를 급격한 초월, 즉 계시의 단계까지 끌어올림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전체성과의 과격한 분리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갖고 이제 본격적으로 레비나스의 전체성 비판, 특별히 서구 기독교가 어떻게 그것의 옹호에 기여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서구신학은 어떻게 전체성을 옹호하였나?

신정론(Theodicy, 神正論)은 의인에게 닥치는 고난과 악의 명백한 현존 속에서도 신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한다는 사실, 그런 신의 전능과 계획에 의해 악과 고난은 현실적 차원이 아닌 신의 섭리가 작동하는 영역으로 고양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론이다. 근대적 이성이 사상적인 측면에서 주체의 타자를 향한 동일성의 폭력을 정당화한 사례라면, 그리스도교 신학의 신정론은 인간의 삶 속에서 부딪치는 삶의 타자들(죽음, 고통, 악)을 신앙의 동일성안으로 끌어들였던 또다른 폭력이었다고 레비나스는 평가한다.[각주:5]

돌이켜보면 서구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등장하는 악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에 있어 각 시대마다 다른 해법이 있어왔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신정론적인 전제로 묶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제도화 과정에서부터 중세까지 교회를 지배했던 계시신학,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중세신학을 완성한 스콜라철학은 자연의 조화를 인식함으로써 신에 이를 수 있다는 자연신학을 낳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스콜라적인 신학을 부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신에 이르는 ‘십자가 신학’을 모토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다시 꾀한 패러다임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가 신앙의 영역에서 이성을 추방시켰다면, 칸트는 이성의 영역에서 신을 제외시켜 물자체의 영역으로 등극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양자는 라깡의 표현대로라면 ‘거울단계’에서 엄마와 아이가 상상적 양자합을 이루는 것과 같이 서로에 기대고 있다. 하나는 초월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내재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릴 수 있겠지만 ‘궁극적 실재의 다차원적인 존재방식(틸리히)’ 이라는 측면에서 양자는 서로의 거울이며 그림자이다. 헤겔은 이런 해묵은 종교 갈등을 ‘세계는 정신의 자기 전개과정’이라는 말로 통합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치열하게 신론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고난과 악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양자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범박하게 표현하면, 신의 섭리와 은총 안에서 예수 잘 믿으면 보상을 받는다는 주장과 신이 우리의 고난과 함께 참여하면서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간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양자의 정점에는 공히 십자가신학이 있다.[각주:6] 어쩌면 십자가 신학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했던 악의문제를 신앙인들이 직면할 때 마다 그 사건과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권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준 부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레비나스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등 총체성에 입각한 전체주의의 망령을 목도한 후, 고통의 신학화를 통해 이루어낸 고난의 유의미성, 절대정신으로 나가기 위한 발전단계로서의 고난, 신적 섭리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난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되는 고난에 대한 낙관적 해석을 거부하면서 최종적으로 신정론의 폐기를 선언한다.[각주:7] 만일 레비나스의 지적처럼 신정론이 현재의 고난을 미래의 축복으로 연결시킴으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고난을 신앙적으로 무마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맑스의 종교 폄하발언, 즉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표현은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해야하는가? 다음 호 웹진에서 레비나스 사상을 대변하는 키워드인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과 ‘타자의 얼굴’을 고찰함으로써 서구신학 내지 서구윤리에 대한 반성을 도모하고자 한다.

ⓒ 웹진 <제3시대>


  1. 웹진 제3시대 29호에 실렸던 필자의 졸고 “자기의 윤리I-주체여, 안녕히!”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35)와 30호 기사 “자기의 윤리II-주체여, 다시 한번!”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41)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2.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1996), 101. [본문으로]
  3. 근대의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많은 글들이 있다. 대부분 백인에 의한 백인의 자기비판 내지 1세계 관점에서 풀어보는 해법으로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얼마 전 출판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대학의 몰락』(동연, 2011)의 저자인 시카고 신학교 서보명 교수는 1.5세 이민자의 눈으로 서구의 근대성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는 학자이다. 그의 저서 A Critique of Western Theological Anthropology: Understanding Human Beings in a Third World Context. (New York: Edwin Mellen Press, 2005)은 이러한 취지를 잘 살린 책이고, 특별히 이 책의 1장 The Project of Modern Theological Anthropology: The Question of Freedom 에 근대성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한 그의 신학적 분석이 잘 전개되고 있다. [본문으로]
  4. “헤겔철학에게서 정점에 이르는 서양철학이 모두 그렇다. 헤겔은 철학 그 자체의 정점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어떻든 영의 차원이든 분별력의 차원이든 모두 앎으로 해결하려고 한 서양철학 속에서는 어디서나 전체성의 향수를 볼 수 있다. 전체성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곧 죄인 것처럼 알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2000), 98. [본문으로]
  5.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96. [본문으로]
  6.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 중에 미국 신학계내에서 십자가신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몇 권의 책을 아래에 소개한다. /// _Jennings, Theodore W., Jr.Transforming Atonement: A Political Theology of the Cro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9.(한국에서는 퀴어신학자으로 알려진 시카고 신학교 제닝스 교수의 주된 관심사는 바울과 제국과의 관계를 데리다, 지젝, 맑스의 이론을 갖고 바라보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틀속에서 제닝스 교수는 십자가 신학이 어떻게 서구문명의 발전과정에서 자리매김을 해왔는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 _ Douglas, Kelly Brown. What’s Faith Got to Do With It? Black Bodies/Christian Souls. N.Y: Orbis Books, 2005.(유명한 The Black Christ 의 저자이기도 한 Kelly Brown Douglas는 이 책에서 흑인에 대한 lynching과 십자가 신학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대속론이 흑인들 스스로에게 체제의 폭력을 견디고 순응하게 하는 기재로 사용되었음을 밝힌다.) /// _Terrell, Joanne. Power in the Blood?: The Cross in the African American Experience. N.Y: Orbis Books, 1998.(시카고 신학교에서 윤리와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Terrell은 유니언 신학교에 있는 흑인신학의 대부 제임스 콘의 직계제자이다. 그녀는 Womanist 관점에서 십자가 신학을 gender와 race, 그리고 power의 문제로 돌려 바라보고 있다.) /// _Westhelle, Vitor. The Scandalous God: The Use and Abuse of the Cro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6(시카고 루터란 신학교에 있는 Vitor Westhelle는 미국신학계에서도 보기드문 헤겔좌파 신학자이고 브라질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탓에 해방신학에도 조예가 깊으며 유럽에서도 활동한 바 있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Vitor는 다양한 문화에서 이해하는 십자가신학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이 책을 통해 선사한다) /// _Joh, Anne. Heart of The Cross: A Postcolonial Christology. Louisville: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6(시카고인근 에반스톤에 위치한 Garrett신학교에서 Theology를 강의하는 Anne Joh교수는 Drew의 Catherine Keller의 제자이고, Heart of The Cross는 그녀의 박사논문으로 출판 당시 신학계에 화제가 되었던 책이다. Anne Joh교수를 언급할 때 흔히 ‘정(jeong, 情)의 신학’을 먼저 거론한다. 전통적인 서구 십자가 신학에 대한 포스트콜로니얼니즘적인 해석(혹은 여성신학적 해석)을 통한 기독교 구원의 재발굴은 한인 이민 2세로 미국땅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 그녀의 고투와 맞물려 많은 착상과 울림으로 미국 신학계로 번져가고 있다. /// _Trelstad, Marit. ed., Cross Examinations: Readings on the Meaning of the Cross Toda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6.(Trelstad가 책임편집에 참여한 이 책은 근래 일고 있는 십자가신학 논쟁을 총망라한 책이라 볼 수 있다. 독일의 Moltmann 교수, 자칫 미시적 차원으로 함몰될 수 있는 목회상담의 영역을 정치와 사회 시스템 등 거시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고 평가 받는 Garrett을 상징하는 미국 목회상담계의 거목 James Poling,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명예교수 Delores S.Williams 등 원로들의 글 뿐 아니라, 시카고 신학교의 Joanne Terrell, 주목받는 일본계 신학자 Rita Nakashima Brock 등 신.구 학자들이 공동으로 이 책에 참여하여 십자가신학의 이슈들을 다시 써 내려간다) [본문으로]
  7.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97. [본문으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1.06.17 15:0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편집자의 실수로 이번 원고에 지난 호 원고 한 문단이 삽입돼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정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혼동을 드린 것 같네요. 이상철 선생님과 이미 글을 읽으신 모든 분께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라깡으로 <트루먼 쇼> 읽기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내 삶 전체가 몰래카메라의 내용이 되어 시청자들에게 다 전달되고 있었다면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라깡이론의 윤리적 전회를 논하기 이전에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짐 케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짐 케리)의 삶이 그랬다. 그 쇼는 거대한 돔 안에 인공도시를 짓고 5천대의 카메라를 도시곳곳에 숨겨 24시간 내내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30년 동안 생중계 했다. 트루먼에게 있어 세트장, 아니 영화속 도시 시헤이븐은 완벽한 아내, 좋은 친구들, 따뜻한 이웃들, 온화한 기후를 갖춘 완벽한 삶의 공간(상징계)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대상소타자가 상징계를 뚫고 실재계의 모습을 간헐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촬영용 조명이 떨어지고,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를 길에서 만나는 등 납득이 안가는 일이 벌어질 무렵, 트루먼은 대학 시절 여자친구였던 실비아로부터 자신의 삶이 모두 연출이고 조작된 삶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어느날 갑자기 실재(the real)가 확 내게로 다가온 것이다. 이후 트루먼은 안락했던 상징계의 질서를 박차고 실재계를 향해 항해를 한 후 세상끝(세트장끝)에 도착하여 마침내 실재계와 상징계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세트장의 벽을 뚫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트루먼의 의지와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진하게 눈물 한 방울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회는 그런 트루먼 같은 사람들을 돈키호테니, 소영웅주의자니, 감상적 낭만주의자니 하면서 시대착오적 인물로 낙인찍는다. 보통의 우리는 현실(상징적 질서)에 구멍이 뚫려 자신의 존재를 들키는 순간 재빨리 이를 봉합하여 현실(상징적 질서)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강박적 주체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고, 세상과 등을 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트루먼처럼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상징계 전체를 배반하고 실재계를 찾아 투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상징계에 갇혀있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를 변형시키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라깡이 제안하는 정신분석학적 윤리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라깡, 칸트에 反하다

라깡의 윤리는 근대 서구윤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칸트 윤리학과의 숙명적인 대결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라깡과 칸트 모두 실재계에 대해 언급하였고, 실재에 대한 규정에서부터 윤리학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 칸트에게 있어 실재, 즉 물자체란 인간의 현상계와 단절되어 있는 부분이다. 칸트는 물자체를 신앙의 영역에 포함시켜 언표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였던 서구형이상학의 전통을 비판한 후에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세 1000년을 이어왔던 무한의 철학에 대한 폐기였다. 이는 은총의 빛으로, 신의 시선으로부터 독립한 불안하고 불안전한 인간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함을 의미한다. 아울러, 무한철학의 폐기에 따른 물자체에 대한 선언은 ‘인간의 의식은 인간 스스로가 구성하는 것이다’라는 근대 주체철학을 낳았다. 현실의 사건과 증상들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계시의 빛과 목소리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틀, 입장, 경험을 통해 (이를 칸트는 범주라 표현하였다) 우리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범주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후에 등장하는 많은 사조들이 칸트 철학의 완고한 틀을 언급하면서 그 구조 역시 계급, 역사, 문명, 성에 따라 조건지어졌음을 비판하지만 말이다. 칸트의 범주 혹은 인식의 틀은 라깡적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질서라 말할 수 있다.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 도덕율이 빛난다’는 칸트의 발언과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 타당한 입법에 맞게 행위 하라’는 칸트의 요구는 비록 실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실재에 대한 접근이 상징계 안에 있음을 혹은 실재에 대한 인식이 상징계를 통해야함을 전제한다. 그 결과 ‘도덕율’과 ‘의지의 준칙’이 상징계 안에서 마치 실재의 목소리인양 울려 퍼지게 되었다. 기표에 대한 욕망은 보호하고 실재에 대한 향유는 억압된 윤리, 숭고한 이성의 이름으로 상징계의 질서를 합리화하는 윤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결국, 우리의 감각적 경험 너머의 것에 대해 인간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던 칸트는, 나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캄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좌표를 표시하듯 우리마음에도 우리를 이끌어갈 무엇인가를 상정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칸트에게 있어 윤리란 상징계의 질서들을 굳건히 구축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대문밖으로 추방시켰던 물자체를 실천이성을 언급하면서 다시 후문을 통해 불러들였다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반면, 라깡의 실재계는 칸트와는 다르게 현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 곳곳에서 출현하는 무엇이다. 우리는 상징계의 막을 찢고 나오는 불순물들(대상소타자)을 통해 실재와 대면한다. 하지만, 영화 <트루먼 쇼>에 나오는 짐 케리와는 달리 현실에서의 인간은 그 실재를 끌어당길 힘이 없다. 트루먼처럼 기표체계를 무시할 수도 없고, 영화에서처럼 실재계가 세트 뒤에 뚜렷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지점이 바로 라깡의 윤리가 다다른 마지막 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 질문과 다시 대면한다. 윤리를 우리의 삶과 공동체속에서 타자와 관계맺는 방식과 절차에 관한 문제라고 봤을 때, 윤리의 대상인 타자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고 타자는 필연적으로 그 타자를 상정하는 주체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라깡에 의하면 주체는 이원화되어 있다. ‘욕망하는 주체’와 ‘향유하는 주체’가 그것이다. 상징계의 시스템 속에서 일정한 기표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는 항상 상징계 속 기표들의 차이에 따라 옮겨다니며 놀이를 한다. 그러나, 그 기표란 사회적 인정과 사회적 합의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내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상징계속 기표의 지배를 받은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걸러진다. 문제는 상징계속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주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분명히 다가오지는 않지만 나를 가만히 놔주지 않고 나를 정신적으로 가위눌리게 하는 그 무엇 말이다. 시인 류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애절함으로 그 갈증과 답답함을 훌륭히 표현하였다. 라깡은 이 주체를 ‘욕망하는 주체’와는 구분하여 ‘향유하는 주체’라 부른다.

라깡의 윤리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욕망하는 주체’에서 ‘향유하는 주체’로의 이월이다. 라깡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 기표시스템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혀냈고, 그 위선적 현실을 변혁시킬 원동력을 실재계에서 끌어온다. 그것은 뾰족한 것(대상소타자)을 가지고 상징계를 둘러싸고 있는 막에 구멍을 내어 현실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것이고, 현실의 영역, 상징의 영역, 욕망의 세계가 강제하는 요구에 맞서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실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그 무엇이다.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중에 <환상속의 그대>라는 노래가 있었다. 문득 그 곡의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현실(상징계의 질서)은 환상(판타지)일런지 모른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짐 케리의 일상이 판타지였던 것처럼, 한국땅에서 뉴타운이다 영어공교육이다 하면서 일확천금과 유창한 영어실력을 꿈꾸는 것 또한 환상이다. 그 환상이 있기에 서태지의 노래 속 가사처럼,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있어도 우리는 지금 나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환상은 절대로 현실의 나에게는 발생하지 않는다. 누구나 허각처럼 몇 십만대 일의 경쟁을 뚫고 슈퍼스타 K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 퍼져있는 환상에 대한 집단적 열정 내지 무의식의 강도는 가히 놀랍다. 국내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 나와 다른 민족들과 어울리고, 다른 문화를 접할수록 판타스틱 코리아에 대한 환상은 굳어져만 간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 다이나믹 코리아, 2002년 월드컵 4강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고 애써 긍정적 평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못 믿겠다. 그 환상을 말이다.

라깡적 관점에서 볼 때 상징계속 기표의 욕망을 부추기는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는 너무나도 비윤리적 체제, 그리고 존재이다. 욕망에 대한 추구는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똑같다. 보수적인 사람은 대놓고(까놓고) 그 욕망을 아무데서나 배설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겸연쩍어 하면서도 슬그머니 그 욕망을 수음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그 놈이 그 놈이다. 특별히, 자식교육에 대한 욕망의 강도는 보혁에 관계없이 100% 균일하다. 재산증식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의 욕망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은 어딜까? 아마도 부와 지식의 대물림이 아닐까 싶다. 가히, 그것은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리비도라 할만하다. 재벌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가 머물고 있는 시카고의 대표적 명문대학인 노스웨스턴 대학,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수님, 사장님, 의사, 변호사, 정부고위관료 아드님 따님들이다. 심지어 가장 숭고해야 할 교회 역시 아비 목사에게서 아들목사로의 세습이 상식화 되어가는, 聖과 俗이 맞물려 집단으로 난교를 벌이는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토록 황당한 현실이 용인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역시 그 욕망을 욕망하기에, 우리 역시 상징계속 기표들의 놀이를 즐기고 있기에, 우리 역시 그 주인공이 되고 싶기에 이 모두를 관대히 용서한다.


결론적으로, 현실 속 상징, 욕망, 그리고 환상은 실재(the Real)위를 떠다니는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체계이다. 우리의 불행은 어쩌면 여기(불확실한 환상을 쫓는 현실)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윤리란 그 시스템을 뒷바침하는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기존의 윤리는 상징계에 타격을 가하면서 실재를 드러내는 대상소타자를 악성코드 혹은 악성 바이러스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진압해왔다. 하지만, 더 이상 큰 타자와 제휴하는 윤리, 사회적 욕망을 인정하고 욕망의 충족을 위한 정글의 법칙을 합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윤리의 역할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상징계의 질서를 보존하는 윤리가 아니라 그것의 전복을 꿈꾸는 위험한 윤리를 말해야 한다. 윤리를 도덕이라는 체제에 의해 오염된 해석의 잣대에서 해방시켜 더 이상 그것이 나를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호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라깡은 실재(the Real)의 빈번한 출현으로 인해 상징계의 균열이 폭로되고, 그로 인해 세상의 모순과 진리가 드러날 때 인간은 드디어 윤리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이점이 라깡식 윤리의 미덕이고, 그것은 오늘날 슬라보예 지젝으로 전해져 맹렬히 진화중이다.

ⓒ 웹진 <제3시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타자論 IV: 라깡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For Lacan: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류시화의 詩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2002) 를 소개하며 라깡의 ‘타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연애할 때 한번쯤 류시화의 시를 인용하며 나의 요동치는 속내를, 그 알 수 없는 마음을 전하려 했던 기억이 독자들에게 있을지 모르겠다. 이 시는 우리들의 연애시절 또 다른 작업용 멘트였던 김춘수의 詩 ‘꽃’에서 언급하는 사랑론, 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고백을 비웃으며, 그런 ‘네가 곁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라는 위험한 발언으로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표현이 암시하는 나와 그 사이의 채워지지 않는 간극은 오히려 나와 그 사이의 그리움 혹은 사랑을 완료태가 아닌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계속 남겨둔 채 우리 사랑의 형태를 굳지 않게, 우리 사랑의 열정을 녹지 않게 만든다.

위에서 소개한 류시화의 시와 김춘수의 시는 헤겔의 ‘타자론’과 라깡의 ‘타자론’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기에 좋은 예이다. 헤겔에게 있어 자기의식은 타자를 전유함으로 획득되는, 주인과 노예의 처절한 권력투쟁 후에 획득되는 노획물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자기의식이란 대상을 향한 영토화의 농도가 짙을수록 확실하고 뚜렷해진다. 김춘수는 그의 시에서 주체에 의해 명명되기 이전 존재, 즉 타자를 몸짓이라 표현하였다. 또한 나의 선포를 수용한 타자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다분히 헤겔적이다. 헤겔에 있어 타자는 나의 의식의 망에 의해 걸러진 존재이고, 내 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헤겔의 타자론이 최종적으로 다다른 지점이다. 하지만, 라깡의 타자론은 헤겔이 멈춰선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라깡(Jacques Lacan, 1901-1981)




라깡이 어쨌다구?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단계의 아버지가 현실적 아버지였다면, 라깡의 경우에 있어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이 상징하는 사회문화적 규범이나 법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프로이트는 남근의 유무에 따르는 생물학적 성차별로 환원하나, 라깡은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때 남근(phallus)은 남자의 성기(pennies)가 아니라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법과 규범을 의미하는 일종의 기표(significant)이며, ‘거세공포(castration complex)’ 또한 남근 제거의 공포라기보다 사회적 인정의 박탈을 뜻하는 상징적 기표로 파악된다. 이렇듯, 라깡에게 있어 상징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시스템 속에 편입되는 것이다. 상상계 속에서 엄마와의 2항 관계만을 경험했던 아이로서는 거대한 상징 시스템은 아주 큰 타자, 대타자(the Other)다. 쉽게 말해, 사회(화), 문명(화), 도덕, 윤리 같은 거다. 이렇게 라깡이 프로이트 이론의 지경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구조주의 언어학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각주:1]

라깡의 실험은 프로이트를 다시 태어나게 했을 뿐 아니라, 현재 지젝으로 상징되는 슬로베니아학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정신분석학과 맑시즘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지적 장르 형성에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부터 살펴볼 내용은 프로이트에게는 없지만 라깡에는 있는 특별한 그것, 즉 라깡의 언어관에 대한 부분이다. 라깡에게 있어 타자의 문제는 인간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등장한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알파벳을 알고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시스템속, 즉 기호(상징)들의 체계와 질서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각주:2] 그리고, 그 언어의 작용방식 내지 기능을 일컫는 말이 ‘기표들의 차이(difference)’, ‘기표들의 놀이(play)’라는 용어이다.


play of difference 차이들의 놀이

우리가 (후기)구조주의 책들을 읽다 보면 play of difference(차이들의 놀이)라는 용어를 종종 접한다. 이는 라깡에게 있어서는 상징계속 욕망이 기표들의 차이를 따라 계속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텍스트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설명하는 특수 용어다. 차이와 놀이는 기본적으로 ‘변화(베르그송)’, ‘과정(화이트헤드)’, ‘되기(들뢰즈)’등 현대철학에서 등장하는 생성존재론의 새로운 함의들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각주:3] 존재란 고정되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차이가 있고 운동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창궐하여 돌아다니는 장이다.

작년 남아공에서 열렸던 2010년 월드컵 우승팀 스페인 축구의 특색이 정확하고 빠른 패스였다. 선 굵은 스타일을 구사하는 힘의 유럽축구와 현란한 개인기에 의존하는 남미의 축구 스타일 사이에서 스페인은 나름의 독창적인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는데 3-4m 안에서 정교한 패스를 구사하며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다. 보통 한 골이 들어가려면 15-18회 패스를 거친다고 하는데, 스페인은 30회가 넘는 패스를 거쳤다고 한다.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30회가 넘는 패스를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볼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스페인 축구의 정교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상징계를 커다란 축구장, 기표들을 축구 선수들의 패스에 의해 옮겨 다니는 공이라고 가정할 때, 축구경기에서 골을 넣기 위해 수많은 패스가 필요했던 것처럼 상징계 안에서 기표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징계속 기표는 축구장에서 공이 패스에 의해 옮겨다니는 것처럼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play of difference(차이의 놀이) 이다.

예를 들어, 나는 수 많은 성씨 중에서 이氏이고, 이씨 중에서도 전주 이씨이며, 전주 이씨 중에서도 양녕 대군의 후손이다(그 족보에 별로 신빙성이 가지는 않지만). 필자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미국, 미국 중에서도 동부도 아니고 서부도 아닌 중부, 중부에 있는 도시 중 위스콘신이나 인디애나가 아닌 시카고에 살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와 진보적인 교단 출신이고, 미국에서 유학하는 현재도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라 평가받는 시카고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나는 순복음 출신이나 총신출신이 아니고, 사우스웨스턴이나 플러 같은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유학하고 있지 않다. 대충 필자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필자 이상철이 지닌 오리지널한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수많은 차이들 한신, 총신, 감신, 장신, 연신 중 한신/ 기장, 예장, 감리, 성결, 순복음 목사중 기장목사/ 그 밖의 수많은 차이들 중 무엇, 그 무엇 무엇을 모으고 조합하는 과정이 라깡이 말하는 play of difference(차이의 놀이)이다.[각주:4]


욕망(desire) in 상징계

어떤 아이가 태어난다 함은 그 순간 이미 이런 언어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록 상상계에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아이는 이런 기표들의 놀이와 차이속으로 빠져든다. 아이 자체는 사라지고 한국, 미국, 일본, 중국…중에서 한국/ 김씨, 이씨, 박씨…중에서 이씨/ 빈곤층, 중산층, 부유층…중 무엇이라는 기표만 남는다. 이런 이유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온 아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상징과 무의식적 욕망에 예속된 소외된 존재를 뜻한다고 라깡은 지적한다.[각주:5]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기표를 부여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일등 신랑감이 되려면 명문대 출신에, 연봉은 1억은 되어야 되고, 최소한 40평정도 되는 아파트와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아야 한다. 이런 기표가 나를 표상하는 선에서 나는 일등 신랑감이 된다. 교육열이 넘치는 한국에서 좋은 자식이란 부모의 기표를 잘 수행하는 아들과 딸들이다. 영어유치원-특목고-과학고-외고-명문대-해외유학-판검사-의사-교수 등등으로 미끄러지면서 부모는 자식에게 심벌릭한 세계를 투영하고 아이는 부모(사회)가 제시한 기표들을 따라 다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의 의지와 노력이 일부 개입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100% 나의 자발적인 선택과 고민의 과정이었는지 묻는다면 어딘가 꺼림칙하다. 누군가가 쳐놓은 망 안에서 뺑뺑이 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 지점에서 라깡은 욕망(desire)과 향유(jouissance)를 구분한다. 욕망은 상징계 안에서의 욕망, 즉 기표들을 따르는 것이다. 그 기표들의 놀이는 연봉 5천에서 1억으로, 30평 아파트에서 40평 아파트로, 소나타에서 그렌저로 이어지며 멈출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만들고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기표들은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하니까 남들이 원하니까 그래야 내가 인정받으니까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라깡이 말하는 상징계 속의 욕망이다. 그 욕망은 새로운 기표를 찾아 상징계(the symbolic) 속을 계속 미끌어져 나간다. 그렇다면 주체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주체란 말인가? 라깡의 다음 질문은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향유(jouissance) in 실재(계)

우리는 지금 상상계(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를 지나 실재(계)(the real)에 이르렀다. 앞서 필자는 상상계속의 아이가 언어를 습득함으로 상징계속 질서로 편입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사회와 규범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이라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상상계속에 있었던 모든것이 상징계안으로 완전히 녹아들어가지는 않는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했던 류시화의 시로 돌아가 보자.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말한다. 라깡에 따르면 앞에 나와있는 ‘그대’는 상징계의 기표이고, 상징계속 욕망의 대상이다. 뒤에 나오는 실재계속 ‘그대’를 찾기 위해 상징계의 기표 ‘그대’를 끊임없이 갈아치우며 play(놀이)를 하지만, 주체는 여전히 실재계속 그대와는 불통한다. 상상계속에 있었으나 상징계속에 편입되지 않고 여전히 저 아래에 남아있는 부유물을 향한 욕망을 라깡은 향유(jousissance, 쥬이상스)라 부르고, 상징계속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desire)과 분리시킨다.[각주:6]

즉,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설 때 제외되는 부분, 엄마와의 2항 관계에서 아버지의 질서로 들어설 때 억압되는 부분, 휴가를 나가기전 역 주변의 쾌락에 대해 동경하나 막상 아무일 없이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올라올 때 느끼는 내 마음 깊숙한 곳의 아쉬움, 그대가 곁에 있는데도 여전히 그리운 그대! 이 모두가 향유를 설명할 수 있는 예라 할 수 있겠는데 영 마땅치가 않다. 왜 깔끔하게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걸까? 복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상상계속에 있었던 그 이미지는 다시 복제가 안된다. 다시 복제가 안되고 복원이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는 것이 향유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곁에 있어도 여전히 나는 그대가 그리운 것이다. 얼마나 슬프고 비극적인가!

라깡은 복구가 안되는 그것을 대상 소타자 혹은 대상 a(objet a 오브제 아)라 부른다. 그것은 실재계에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상징계를 찢고 뚫고 나오는 어떤 것이다. 라깡은 그것의 예로 항문, 페니스, 질, 젖가슴, 목소리(조용하고 엄숙한 연주회장에서의 괴성,비명 같은), 오물, 구멍 같은 것을 든다.[각주:7] 그것은 상징계의 작동을 잠시 멈추게 하는, 그래서 상징계를 지배하는 현실적 원리들에 타격을 가하는 게릴라같은, 혹은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유령’같은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는 실재를 모른다. 복구가 안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나 이상철을 모른다. 나 역시 궁금한 나를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정치적으로는 민노당을 지지하나 막상 대선에서는 노무현을 찍는 나, 문화적으로는 거대자본의 논리로 운영되는 주류 대중문화를 비판하고 이에 반하는 B급 문화를 선호한다고는 하지만 소녀시대나 카라같은 걸그룹의 뮤직비디오도 간간히 침을 흘리며 훔쳐보는 나, 경동교회에서 자라 한신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한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교단인 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인 나, 미국내에서도 신자유주의 문제, 동성애 문제, 낙태문제, 이민정책, 흑백문제, 미국의 패권적 태도 등에 대해 가장 진보적 신학담론을 생산하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 하지만 현재 본토보다도 더 강한 레드 콤플렉스와 좌파히스테리에 빠져있는 이민교회에서 적절히 이곳의 보수적 교민들의 상식에 크게 반하지 않는 설교를 하고 있는 나! 돌이켜보니 나 역시 온통 상징계의 기표들속에서 놀고(play)있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그 이상철이다. 그렇다면 상징계속 질서에서 허우적 거리는 나는 언제 나의 실재와 대면하는가? 라깡에 의하면, 실재계에 존재하고 있었던 '대상 소타자(대상 a)'가 현실세계인 상징계에 구멍을 낼 때다. 오물, 쓰레기, 성기, 괴성, 뾰족한 무엇으로 질서정연한 상징계에 흠집을 내는 순간 실재가 우리에게 잠시 열린다. 이 순간이 바로 라깡이 주목하는 윤리의 새로운 영역이다.[각주:8] <다음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구조주의 언어관: 우리(주체)가 무엇인가(대상)를 보고, 듣고, 만져서 지각(perception)한 후 우리의 이성은 그 모든 정보들을 종합하여 그 사물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 관념(Idea)을 만들어낸다. 내게 관념이 생겼다고 함은 내가 지각했던 그 무엇이 비록 이 순간 내 앞에 없다손 치더라도 내가 다시 그것을 표상(representation)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대철학 전까지 언어란 우리 마음에 있는 관념을 외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구조주의 출현 이후 이러한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반론이 생겨났다. 확고 부동할 것이라고 믿었던 관념이 장(場)의 논리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드는 예로, 의자와 책상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을 의자로, 저것을 책상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의자를 가방이라 부르든, 책상을 나무라 부르든 중요한 것은 둘 간의 차이만 확보되면 된다. 언어의 본질은 그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의 관념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호들의 체계가 중요한 것이다. 책상을 의자로, 의자를 꽃병으로, 나무를 바위로 부르면 어떤가? 그것이 어떤 공동체 속에서 통한다면 그 시스템이 의미를 발생시켰다 함이 옳다. 결론적으로 구조주의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한다 함은 기호들, 기호의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그렇게 확고한 것이 아니다. 단지, 기호(기표)들의 차이와 놀이를 매개로 만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상상계(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는 연속적인 단계가 아니라 얽혀 있는 것이다…. 상징계는 상상계를 잠식해 들어가고, 조직하며 방향을 제공한다. …라깡은 말을 습득한 인간 주체는 그(녀)를 기존의 상징계에 편입시키고, 그리하여 자기의 욕망을 이 계의 체계적 압력들에 복종시킨다고 지적한다: 언어를 받아들임으로써 주체는 자기의 ‘자유로운’ 본능 에너지가 작용되고 조직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Mardan Sarup, Jaques Lacan, (Toronto and Buffal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2), 105-106 [본문으로]
  3. 시카고 신학교의 창의적인 여성신학자 슈나이더(Laurel Schneider) 교수가 2008년에 출간한 Beyond Monotheism: A theology of Multiplicity. (New York: Routeldge, 2008)과 Drew에 있는 설명이 필요없는 신학자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가 쓴 Face of the Deep: A Theology of Becoming. (New York: Routeldge, 2003)은 생성존재론에 입각한 신 개념을 제안하는 도발적인 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본문으로]
  4. “라깡에게 있어 의미는 객관화될 수 없다. 오히려 의미는 근본적으로 그 유연함과 예상불가능에 의해 특징지워 진다. 어떤 기표도 자동적으로 그것에 앞선 기표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주체의 어떤 부분이 기표들 사이의 틈새(차이)에서 드러나게 된다.” – Ibid., 49. [본문으로]
  5. 자끄 라깡, 『욕망이론』, 권택영 외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4), 265-267. [본문으로]
  6. 칸트윤리학에 대한 라깡적 비판을 하고 있는 슬로베니아 학파의 차세대 주자 쥬판치치는 그의 대표작 Ethics of the Real: Kant, Lacan 에서 상징계속으로 용해되지 않는 실재를 ‘자기를 알지 못하는’(this knowledge that does not know itself)/’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 (this knowledge that remains unknown) 으로 적고있다- ,Alenka Zupancic, Ethics of the Real: Kant, Lacan (New Yourk: Verso, 2000), 201 [본문으로]
  7. “대상 소타자(=대상 a)는 (동굴, 管 따위의)구멍 일수도 있고 젖가슴일 수도 있다. 이것은 (날카로운) 끄트머리나 절단과 관계가 있다: 입술, 이빨을 형성하는 울타리, 항문 테두리, 페니스의 끝, 질, 눈까풀에 의해 형성된 가늘고 길게 째진 곳…이 같은 목록에 라깡은 음소(音素), 응시, 목소리를 첨가한다” - Mardan Sarup, Jaques Lacan,, 98. [본문으로]
  8. “the question of ethics is to be articulate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location of man in relation to the real”-Jacques Lacan, Seminar VII: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11 [본문으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04)
특집 (8)
시평 (92)
목회 마당 (58)
신학 정보 (131)
사진에세이 (38)
비평의 눈 (65)
페미&퀴어 (22)
시선의 힘 (131)
소식 (152)
영화 읽기 (30)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27,870
Today : 526 Yesterday : 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