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각주:1]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I

형. <민중신학>이 출범한지 어언 40년 가까이 되어갑니다. 함께 했던 선배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저는 이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 젊은 신학자들이 내뿜는 패기와 열정에 놀라고, 우리 때와는 다른 그들의 재기 발랄함, 능숙하고 유려한 매체 적응력, 그리고 현란하고 아찔한 공감각적 감수성에 탄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세상은 우리가 살았던 시절과는 많이 변했고, 이런 시대의 변화는 당연히 신학하는 우리들에게도 체질개선을 요구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다문화….등등의 용어들을 풀이하면서 그 말들이 지닌 사회학적 의미에 대해 하나씩 이 자리에서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은 발 빠르게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면서 수요자 중심의 교회, 그 수요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신학을 양산해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벌써 10년도 휠씬 지난 일이네요. 이제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된 듯합니다.
세계화되고 다원화된 오늘날의 현실에는 그 다양성만큼의 편견과 억압과 폭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전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세련된 방식으로 그것들은 교묘히 은폐된 채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고 있지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영토화 된 것이든 탈 영토화 된 것이든,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이 제도에 의한 것이든 관습에 의한 것이든,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이제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종의 매트릭스 안에 갇힌 듯 합니다.
그 매트릭스 안에는 체제에 대한 냉소와 체제를 향한 분노를 분출할 수 있는 장치까지 다 마련되어 있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이 전과 같은 체제의 강제가 아닌 인민들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 체제가 옛날 독재정권과 같은 막가파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아주 폼 나고 우아하게, 아주 부드럽고 나이스하게 체제는 인민들을 스스로 낭떠러지 끝으로 걸어가게 만듭니다.
뉴타운을 조성시켜 집값을 올려주겠다는 공약에 속아, 4대강 사업으로 땅값을 올리겠다는 공약에 넘어가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명박을 찍었고, ‘잘 살아보세!’라는 박정희의 주문은 약발이 다한 그때의 추억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딸을 통하여 엄연한 현실의 질서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그것도 5.16을 연상시키는 51.6%라는 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말입니다. 이를 어찌 해석 해야 할까요? 


II

이런 씁쓸한 현실 속에서 저는 지금 지난날 우리가 함께 일구어냈던 <민중신학>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민중신학을 전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난날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회고하게 되는데,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네요. 혁명의 시대를 건너오면서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함성과 환희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 핍박의 시대 골방에 갇혀 쓰고 또 쓰고 하면서 다듬어진 민중신학의 언어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분명 행복한 세대였습니다.
형도 기억하듯이, 우리가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을 선언할 즈음, 이미 우리 앞에는 유수한 신학적 전통과 권위들이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20세기 서구신학을 장식했던 거장들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들이 이룩해 놓은 풍부한 신학적 토대 위에 많은 후학들이 신학적 담론들을 왕성히 토해내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죠. 과정신학, 세속화 신학, 희망의 신학, 신 죽음의 신학 등이 서구신학의 전통 내에서 발생한 자기갱신의 목소리였다면, 페미니즘 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은 서구신학의 방계전통에서 일구어낸 혁혁한 공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고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그런 권위들에 주눅들지도 않았지만, 물론 살짝 엿보기는 했었겠지만서도, 그렇다고 그들을 밟고 뭐 기막힌 신학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상황 속에서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학에 시비를 걸고 싶었던 것 것뿐이죠. 그 결과 <민중신학>이라는 나름 엣지있는 신학적 영토를 구축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하지만, 현재 민중신학은 더 이상 광장의 아우성도 아니고, 고독한 독방에서의 고투도 아닙니다. 피를 끓게했던 광장의 언어는 이제는 서늘히 식어버려 죽은 놈 뭐 만지는 식의 불임의 언어가 되어버렸고, 독방에서 만들어낸 영감의 언어는 더 이상 소통하지 못하는 밀폐의 언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민중신학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고 조건이라고 한다면 너무 큰 자학일까요.  
미국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세계에서 온 친구들 앞에서 민중신학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놀라하고 무척 흥미롭게 민중신학에 대해 관심을 보이다가도 얼마 안 있어 금방 지루해하며 이렇게 묻더군요: we don’t want to know the past of minjung theology any more because we had heard enough of this. My question is that; “what is the influence of minjung theology on Korea and the Church today?” “How minjung theology can continue to be relevant and functioning in the present age called as global-capitalism, postmodernism?” “Please, tell me about the present and future of minjung theology”
저는 이런 질문들을 받으며 두 가지 점에서 놀랐습니다. 하나는 저의 미국친구들이 이미 민중신학에 대한 개론적 지식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그다지 민중신학의 현재 내지 미래에 대해 그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는 점입니다. 새삼 저의 민중신학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과 무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그 자극이 저의 논문 제목을 최종적으로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으로 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III

요즘 논문을 핑계 삼아 다시 기독교 2천년 역사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 사실은 올곧은 신학이란 언제나 시대의 위기 속에서 비상을 꿈꾸다가 마침내 도약해서는 시대의 아픔을 부등켜안고 추락하고 마는, 마치 봄날 화려하게 피었다가 처연히 흩날리며 낙화하는 목련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개별적인 사건들과 현상들은 하나의 절대적 관념, 즉 신으로 복속될 것이라 주장하고, 서로 상이한 진리들이 언젠가는 더 큰 진리로 통합되고 그 안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될 것이라 믿는 전통적인 신학은 위에서 언급한 신학의 남루하고 초라한 위상을 부정하겠지만, 신학적 진리란 기존의 신학에서 말해왔던 것처럼 복음 안에서의 화해나 종합보다는, 복음을 들고 시대와의 부조화를 선언하고, 복음을 근거로 시대의 균열을 조장하며, 복음과 함께 시대를 가로지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번영을 담보로 차이의 소멸에 공조하는 신학이 아닌, 은폐된 차이와 모순을 드러내고, 시대의 위기를 발설하며, 그 모순과 위기를 향한 구체적 praxis속에서 발견되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온갖 쭉정이 같은 신학들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와 세상을 지켜냈던 신학의 참 모습 이라 믿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요즘 유행하는 지젝의 말을 인용하면서 ‘부정성과 함께 머무는 것!’ 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부정’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negative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不定(Infinite,정해지지 않음 혹은 한계없음)’의 의미입니다. infinite는 현실에서는 deferrable(연기할 수 있는) 혹은 difference(차이), 아니면 emptiness(비어있음)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지젝이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라 했을 때, 얼핏 보면 전자의 ‘부정’을 사용하고 있는 듯 하나, 지젝 사상의 핵심인 실재(the Real)를 이해하려면 오히려 후자의 ‘부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참고로, 21세기 윤리학의 지형을 새로 짜고 있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 데리다의 ‘해체의 윤리학’, 그리고 지젝으로 대변되는 슬로베니아학파의 ‘실재의 윤리학’이 서로 상이한 지적 전통에서 시작되었고, 그래서 각자가 노리는 바가 다르다 할지라도, 셋은 공히 부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민중신학 안에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형태의 부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부정성을 이론적 토대로 삼는 현대의 사상가들과 민중신학이 함께 공모할 수 있는 대목이라 여겨집니다. (이 부분이 논문의 핵심이 될 텐데, 아직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나름 정리가 되고 어느 정도 맥이 잡히면 그 과정과 성과에 대해서 다시 의견 나누겠습니다) 
하지만, 민중신학이 간직하고 있는 부정성에 대한 자각과 그 부정성의 계기들을 어떻게 발화시킬 수 있을지를 둘러싼 모색은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입니다. 즉 ‘부정의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 어법을 민중신학이 산출할 수 있을지?’ 가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말하고자 하는(타도의) 대상에만 관심이 있었지,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몰지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민중신학은 말을 건네는 대상에 집중했던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의 개선을 통해 민중신학의 새로운 준거점을 확보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그 실마리를 윤리에서 찾으려 합니다. <다음 웹진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졸고는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중 서론의 일부를 번역 각색한 원고입니다. 글의 제목으로 사용된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논문을 웹진 원고로 번역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중화자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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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향한 서로 다른 포물선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유감레비나스

레비나스가 걸어온 사유의 여정은 감동적이다. 현대 사상계의 화려하고 감각적인 내공을 지닌 고수들과 달리 레비나스는 평생 타자와 윤리라는 밋밋한 주제를 갖고 강호를 누볐다. 이런 그의 완고함과 철저함으로 인해 감히 함부로 레비나스와 맞짱을 뜨려는 검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데리다가 그의 생의 초반에 썼던 논문 ‘Violence and Metaphysis: An Essay on the Thought of Emmanuel Levinas’ (『Writing and Difference 』,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pp.79-153)에서 잠시 레비나스를 향해 딴지를 걸었던 것을 빼곤 별로 기억나는 레비나스 비판은 없다.

하지만, 레비나스 윤리학이 선사하는 이러한 감동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존재한다. 쇼펜하우어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비판한 것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레비나스의 ‘표상할 수 없는 타자’라는 테제 앞에서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이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에 그렇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레비나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왜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작아지는가? 급격한 초월의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때문이다. 그 벽은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이 드러날 때 겨우 열린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초월적 타자와 수직적으로 만난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그 순간을 감지하고 찬양하는 숭고함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양자간의 초월적 관계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다. 수많이 타자들이 자아내는 다름과 차이에 대한 숙고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곳이 지금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볼 때 레비나스의 윤리는 작금의 다원화된 세계화된 사회에서 유통가능한 복수의 윤리를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순결하고 완고하다. 위에서 언급한 레비나스 윤리의 완고함 내지 우직함은 레비나스 사상을 지배하는 유대교적 철저함, 즉 무한인 하나님은 오직 타자의 얼굴을 통해 드러낸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궁극적으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신비로 밀어붙였던 것이다.[각주:1] 여기에는 제3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공동체의 자리, 즉 다른 타자들과의 횡적연대를 도모할 여지가 남겨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위치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구조이고, (교회) 공동체에 대한 여전한 신뢰를 놓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그것과도 차이가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번 웹진에서 레비나스 윤리의 외연 확대를 위해 그리스도론에 입각하여 타자의 윤리를 전개하는 본회퍼를 끌고 올 것이다.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존재’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강화시킬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본회퍼의 기독교 윤리

일반적으로 본회퍼는 본인의 신학과 삶을 통해 신앙과 사회적 책임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루터의 ‘두 왕국설’을 임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거나, 나치로 상징되는 정치지도자들이 행하는 악에 방관했던 당시의 교회현실에 맞서 사회적 책임이 신앙의 영역에 포괄된다는 사실을 주장했고 이러한 본회퍼의 사회윤리는 후에 서구의 정치신학과 세속화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각주:2]

본회퍼 신학의 출발점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인간은 추상적 관계의 총체가 아니라 공동체에 바탕한 구체적 관계의 총체이다. 본회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 총체성의 중앙에 위치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현실’[각주:3] 속에서 모든 개인들은 얽히고 연대하여 하나로 모아진다. 그러므로 본회퍼 윤리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고 주어진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계의 현실성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 우리가 얼마만큼 긴밀하게 참여할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기독교윤리의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그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윤리에 있어서는 당위와 존재, 이념과 실현, 동기와 결과의 대립에 의해 그 특징이 드러나지만 기독교 윤리에서는 현실과 현실화, 과거와 현재, 역사와 사건의 관계나 애매한 개념들을 사건의 불분명한 이름으로 대치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가 문제된다. 선에 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문제가 된다.[각주:4]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본회퍼는 칸트 이래 서구 윤리학이 걸어왔던 개인적 차원의 심정윤리학도 거부하였고 동시대에 미국에서 활동했던 라인홀드 니버의 분열된 현실인식 또한 부정한다. 본회퍼에 있어 윤리란 인간의 의지나 정신적 행위에 역점을 두는 존재의 윤리도 아니고, 업적이나 성공, 지위를 강조하는 행위의 윤리도 아니다. 본회퍼에 이르러 주체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로 선언되었고, 이 주체는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묻는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Dietrich Bonhoeffer (1906-45)



타자를 위한 존재

‘그리스도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끌어낼 수 있는가?’ 본회퍼 신학이 묻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회퍼의 하나님은 고통가운데 숨어계시는, ‘없이 계시는 하나님이다.’[각주:5] 하지만, 자칫 이 말은 악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다. 강성영은 이러한 의심에 맞서 본회퍼가 주장하는 신의 자기은폐는 십자가상에서 피조세계의 고통에 참여하는 신의 탄식이었음을 분명히 한다.[각주:6] 이는 그리스도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신 이해이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본회퍼는 비로소 본인의 윤리적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본회퍼의 ‘십자가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단어가 ‘대리(stellvertretung)’이다. 본회퍼는 1941년 여름부터 1942년 초 사이에 쓴 『기독교 윤리』에서 책임의 문제를 다루었다. 본회퍼는 그의 책임윤리를 그리스도론으로 설명하면서 책임적인 삶의 형태가 ‘속박(Bindung)’과 ‘자유(Freiheit)’에 의해 이중적으로 규정됨을 밝힌다. ‘속박’은 ‘대리’와 ‘현실적응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는 ‘생활과 행동의 자기음미’와 ‘구체적인 결단의 모험’으로 드러난다. 본회퍼는 책임이 대리행위를 근거로 생겨난다고 보았고,[각주:7] 그 다음 페이지에서 본인의 사상을 지탱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에 대한 중요한 서술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생명자체이고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대신 사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그가 대신 사신 삶이다. 예수는 결코 스스로가 완전성에 도달하려고 한 단독자가 아니라, 단지 자신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나를 받아들이고 감당하신 분으로 사신사신 것이다. 그의 생활, 행위, 노력의 전체는 대리다. 인간이 살고, 행동하고, 괴로워해야 할 것이 그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의 인간적인 실존을 형성하고 있는 이 진실한 대리의 행위에서 그는 책임을 지는자가 되었다.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모든 생명은 대리된 것으로서 규정된다.[각주:8]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적 타자인 하나님에게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은 없다.신의 입장에서도 인간은 타자이어야 한다. 그래야 신의 신다움이 보장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대리를 통해 양자간의 극복될 수 없었던 타자성은 긍정될 수 있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대리적 죽음으로 파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철저히 ‘타자를 위한 존재’로 규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것은 인간의 전존재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경험이요,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이다. 예수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초월경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에서 비로소 전능, 전지, 편재가 유래한다. 신앙이란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 관여하는 일이다.(수육,십자가,부활).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생각할 수 있는 사고상의 최고, 지대, 최선의 존재-이것은 결코 진정한 초월이 아니다-에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다.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타인을 위한 존재”에 있어서의, 곧 예수의 존재에의 관여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이다.[각주:9]

이제 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드러난 ‘타자를 위한 삶‘을 통해 새로운 자기동일성을 획득하였다. 신은 자기동일적인 공간이 아니라, 세상과 타자를 위해 자기를 개방할 때 비로소 신의 신됨이 선포된다. 그리스도의 대리에 나타난 하나님 현현이 그것을 보증한다. 이렇듯 ‘타자를 위한 존재’로 특징지어지는 본회퍼의 사상은 그의 윤리뿐 아니라 교회론에도 영향을 끼쳤다.[각주:10] 이 말은 윤리란 개인의 실존과 공동체를 양대축으로 삼고 전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본회퍼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개인과 공동체를 매개하는 이음새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한 대리자로 고백하는 본회퍼의 사상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당연히 거부할 것이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무한은 오직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타자의 얼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통해 발견되어지는 것이지, 성육신의 도그마에 의존하는 본회퍼의 그리스도 이해를 따라 하나님 앞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고 레비나스는 답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레비나스의 신인식에 대해서는 반박할 필요를 못 느끼겠고, 또 그럴만한 내공도 없다. 개신교 목사라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유대교 석학의 신 이해에 대해 그것이 나의 고백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딴지를 건다면 신앙의 오만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서는 그의 신 인식과는 별개로 묻고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1996), 85. [본문으로]
  2. 본회퍼 연구가 강성영(한신대, 기독교윤리)은 그의 논문 “타자와 민중을 향한 외침: 본회퍼 신학과 한국교회의 미래”에서 이러한 본회퍼의 신학을 ‘실천적 해석학’, ‘참여의 해석학’, 그리고 ‘타자를 위한 삶’으로 요약하고 있다 - 강성영. 『생명 .문화. 윤리: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주제탐구』,(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252. [본문으로]
  3. 본회퍼 저/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 162. [본문으로]
  4. Ibid., 163. [본문으로]
  5.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D. Bonhoeffer, Widerstand and Ergebung, Neuausgabe, hrsg.v.E. Bethge, 3. Aufl, Munchen: 1985(=WEN), 27. 강성영, 앞의 책, 23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6. “그는 하나님의 초월을 피안의 초월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삶의 한가운데 있는 초월을 말하였고, 하나님의 전능을 그의 권력과 지배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무기력함과 약함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의 전능으로 이해하였다.”- 강성영. 『생명 .문화. 윤리: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주제탐구』, 238. [본문으로]
  7. 본회퍼 저/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 193. [본문으로]
  8. Ibid., 194-195. [본문으로]
  9. 본회퍼 저/고범서 역. 『옥중서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개정3판), 229. [본문으로]
  10. “The church is the church only when it exists for others.”- D. Bonhoeffer, Letters & Papres from Prison, ed. E.Bethge.(NY: The Macmillan, 1971), 3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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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간략한 윤리학史, 그리고 레비나스의 위치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살펴보기 이전에 서양윤리사상에서 발생했던 굵직한 윤리적 원칙인 목적론적 윤리, 의무론적 윤리, 그리고 책임윤리에 대한 이해를 먼저 살펴본다. 좋음과 기쁨,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론적 윤리의 계보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에피쿠르스학파, 영국의 경험론, 공리주의로 이어지면서 행위의 결과에 주안점을 두는 윤리학설이다. 이런 까닭에 좋은 결과를 위한 개인의 혹은 공동체의 목적, 이상, 목표 등이 윤리적 이슈로 등장한다. 비록 중세 기독교 문명과 근대의 이성주의를 거치는 동안 그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이는 니체 이후 다시 복권되어 푸코와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면서 억압되고 압제되었던 노예의 도덕이 아닌, 명랑하고 유쾌한 주인의 도덕을 꿈꾸며 21세기 사상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의무론적 윤리는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동기에 무게를 둔다. 칸트가 대표적 인물이고, 목표와 이상에 따라 행위가 달라지는 목적론적 윤리와는 달리 조건에 관계없이 내가 따라야 할 최고법칙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들에 의하면 선이란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선이란 바른 행위를 가능케하는 동력이다.

예를 들어, 현상금 1000만원이 붙은 국가보안법을 어긴 시국사범이 경찰에 쫓기다가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경찰이 문을 두드리면서 지금 누가 들어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이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목적론적 윤리에 따른 행위를 하는 사람은 행복의 기준이 문제가 될 것이다. 1000만원이 주는 물질적 기쁨이 신고를 하는 불쾌보다 큰 사람은 신고를 할 것이고 (양적공리주의), 물질적 기쁨보다 정신의 평온을 중시하는 사람(질적공리주의)은 그 도망자를 숨겨줄 확률이 높다. 의무론적 윤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칸트의 표현대로라면 보편 타당한 입법에 맞게 행위하는 사람이므로 거짓말을 하지마라, 현실의 국가보안법이 보편입법이기에 신고하는 것이 본인의 신념에 맞는 행위이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 이외에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책임윤리를 들 수 있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가 윤리적 판단기준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외삽적 논리싸움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에 대한 문제제기가 발생한다. 이는 윤리 본연의 쟁점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다시 숙고케한다. 책임윤리는 개별적 인간들이 자아내는 관계들에 주목하면서, 결국 윤리적 행위란 관계속에서 발생하는 물음들과 아픔과 상처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입법이 과연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중시하는 책임윤리 안에서는 윤리적 주체와 윤리적 대상간의 관계가 주된 행위의 기준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위에서 살펴본 윤리방법론에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목적론과 의무론, 책임의 원칙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위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윤리적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So What?, 즉 ‘네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 앞으로 우리를 내몬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굳이 이 세가지 범주에서 분류하자면 책임윤리라 부를 수 있겠지만,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라는 레비나스의 발언 속에는 이러한 기계적 분류보다는 더 복잡한 함의가 깔려있다.

레비나스의 사상속에는 서양철학에 대한 안티테제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칸트, 헤겔 또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에 공통으로 깔려있는 존재중심의 사고, 주체 중심의 자율성은 ‘나는 타자를 나의 동일성안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근대의 도그마를 전제한다. 그들에게 있어 타자는 또 하나의 자아이다. 남을 자아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기특한 것이다. 내가 나를 생각하고 배려하듯 타자를 그렇게 대한다는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 사고와 교양으로 채색된 근대인들이 지니는 자기교만이다. 내가 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듯이 남에 대해서도 주체는 나를 알듯이 속속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의 도그마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야만의 근거가 되었다.[각주:1] 레비나스는 이를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서구의 도덕과 책임은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서구철학을 지배했던 유령, 즉 개인(타자)을 전체(동일성)로 환원시키려했던 돌림병 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고, 이를 ‘힘의 철학’[각주:2], ‘전쟁의 존재론’[각주:3]이라 비난한다. 홀로코스트는 이런 서구형이상학의 실재가 돌출하여 인류전체를 베었던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는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론을 펴는 첫 번째 단계에서 동일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타자를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의 얼굴’은 동일성의 폭력에 반대하면서 윤리학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으로의 전환을 도모하려는 레비나스에게 중요한 사유의 거점이 된다. 전통적으로 레비나스를 공부할 때 ‘타자의 얼굴’을 설명하는 대목에 이르면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 그리고 양자를 극복해나가는 레비나스 현상학의 독특함을 거론한 후 ‘타자의 얼굴’에 이르는 순서를 밟는다. 필자는 이런 도식보다는 복음서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환대가 드러난 기사(예수의 비유에 나타난)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상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서고자 한다.

타자의 얼굴_ 예수의 비유를 중심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민중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하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그릇이 사용되어지는가에 따라 음식의 종류와 맛을 상상할 수 있듯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도 몇 가지 종류의 그릇에 담겨 전달되어져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맛과 향을 달리 느끼게한다. 예수가 민중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그릇에 담겨 배달된다. 하나는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가?’, 즉 하나님 나라의 때(시간)와 관련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와 현실세계와의 차이점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이다. 지금부터 언급하려고 하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비유는 대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를 언급하는 본문임과 동시에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예수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받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준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타자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사마리아인에게는 더러운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사회는 사마리아산 포도주나 기름의 사용을 금지하였고,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고기를 먹는 자와 같다’라는 속설이 유대사회 전체에 퍼져있었다.[각주:4] 이렇듯, 유대인에게 있어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율법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우리 인식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타자다. 그런데, 그토록 격멸했던 타자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나 초죽음이 된 유대인을 받아들인 것이다. 본문이 처음 읽혀지고 유포될 당시 유대인 독자들은 모두 의아했을 것이다. 유대사회의 지도층을 대변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피해갔는데 왜 하필 사마리아인가? 이 비유 안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내가 알 수 없는 존재, 내가 모르는 존재에 대한 응답을 의미한다. 타자란 나의 앎과 계산에 의해, 나의 율법과 관습에 의해 선택되고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내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내가 즉각적으로 응답을 해야 할 대상인 셈이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인자는 심판 날에 양을 자기 오른쪽에 염소를 자기 왼편에 세운다. 양과 염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상징한다. 이 심판을 지켜보는 청중이나 오른쪽에 있는 양, 왼쪽에 있는 염소 모두에게 인자의 판정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유는 그 판정기준 때문이었다. 김창락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놀라운 것은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비신자가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무슨 악행을 저질렀거나 의식적으로 범죄를 하였기 때문에 멸망을 선고 받은 것이 아니라 이름없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선고 받았다는 것입니다.”[각주:5]

판정의 기준 못지않게 논란이 되는 대목은 인자의 자기인식이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 23:35-36). 김창락은 이 구절에 기대어 인자가 당대의 타자였음을 분명히 한다: “인자는 자신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완전히 동일시 하였다.”[각주:6] 인자가 타자라는 사실, 즉 내가 모르고 있었고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각주:7] 결국, 위의 예수의 비유를 통해 확인된, 인자가 나의 인식과 나의 결단과 신앙의 도그마 안으로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통해 어느 순간 내게 확 다가와 응답을 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은[각주:8]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각주:9]은 한마디로 타자의 얼굴에 반응하는 것이다. 요즘 같이 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 되고, 신체와 몸과 얼굴이 자본화 권력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시대착오적발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레비나스의 얼굴은 단순히 눈, 코, 입이 조합된 성형외과에서 개조의 대상이 되는 즉물적 개별적 얼굴이 아님은 당연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에서 강조하는 점은 타자의 얼굴로부터 호명되어진 무엇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생채기가 생겨 ‘내가 여기 있나이다’[각주:10]라는 답변을 지닌 채 타자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이다(face to face).[각주:11]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윤리는 새롭게 태어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동일자에 대한 의심, 즉 동일자의 자기중심적 자발성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이 일이 타자(타자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를 통해 일어난다. 타자의 현존으로 인해 나의 자발성에 문제제기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각주:12]

위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주체, 즉 동일자의 자기의식 안에 갇혀있는 그 주체로는 우리가 타자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 이 말은 또한 주체이전에 타자가 먼저 상정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타자를 먼저 인식하고, 그런 타자의 얼굴에 반응(응답)하는 윤리적 주체로 자기를 정립하게 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의 미래, 가능성이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론에 우선하는 윤리학,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다.

사실, 기존의 윤리는 타자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말한다고 하지만 주체중심의 인식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타자에 대한 윤리는 실상은 나의 의지, 판단, 결정의 소산이고, 주체의 그것을 돋는 기저에는 항상 권력관계가 작동한다고 푸코는 비판한 바 있다. 레비나스 역시 푸코가 같은 문제의식을 지녔으나 양자가 취했던 방법은 다르다. 푸코는 주체 대신 자기를 발견하면서 내면으로의 수렴을 강화한 반면, 레비나스는 주체를 향한 수렴대신 초월을 향한 발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가 지녔던 서구윤리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구철학 깊숙히 문신처럼 베어있는 주체중심의 인식론 바깥에 새로이 윤리학을 위치시킬 수는 없을까?” 이러한 전환은 헤겔식의 근대적 주체, 그리고 그 주체가 지녔던 무한한 자유에 대한 반성이자 폐기선언이라 할 만하다.[각주:13] 인간은 근대가 이룩한 정신의 성취가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로부터 비로소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는 존재이다. 그것을 레비나스는 존재론 혹은 주체중심의 인식론에 선행하는 인간이라 표현하였고, 그 결과 윤리학은 레비나스에 와서 제일철학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87-88. [본문으로]
  2. Ibid., 44. [본문으로]
  3. Ibid., 22 [본문으로]
  4. 조태연 외.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84. [본문으로]
  5. 김창락. 『귀로 보는 비유의 세계』 (천안:한국신학연구소,1997), 392.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Messianism is that apogee in Being-a reversal of being persevering in his being”-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60. [본문으로]
  8.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199-200. [본문으로]
  9. Levinas, Emmanuel. Levinas Reader. Edited by Sean Hand, (MA: Balckwell, 1989), 75-87. [본문으로]
  10.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2000), 136. [본문으로]
  11. Ibid., 99. [본문으로]
  12. “A calling into question of the same-which cannot occur within the egoist spontaneity of the same- is brought about by the other. We name this calling into question of my spontaneity by the presence of the Other ethics.”-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43. [본문으로]
  13. Ibid., 196-1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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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서구신학을 쏘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자기의 윤리 vs. 타자의 윤리

‘자기의 윤리학’[각주:1]으로 세상의 눈물과 회한을 닦을 수 있을까? 레비나스의 의심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고 개인을 그 규범에 종속시키려했던 기존의 윤리에 맞서 니체-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계열이 ‘자기의 윤리학’을 전개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학’을 제안한다. 그의 시도는 근대적 주체가 지녔던 자율성(autonomism)에 반하는 타율성(heteronomism)의 추구라 할 수 있다.

윤리는 그동안 세상의 억압과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는 자율적 주체의 윤리적 행위가 무엇인지 물어왔다. 그러나 타자의 윤리학은 그 주체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윤리적 행위가 작동된다고 주장한다. 니체류의 윤리학이 서구 형이상학이 시도했던 초월에 반대하여 자기 안으로의 내재를 전략적 도구로 취했다면, 레비나스는 오히려 서구 형이상학의 초월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윤리적 해석과 실천으로 그것이 지녔던 병폐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즉, 초월적 세계 저편에 있는 타자를 통해 바로 이곳에 있는 우리를 다시 발견하고, 이곳의 문제를 다시 바라본 것이다. 이때의 타자란 레비나스에 의하면 억압받고 소외된 경계 밖의 사람들이다.[각주:2]

결론과도 같은 서론으로 ‘자기의 윤리’와 ‘타자의 윤리’간의 굵직한 논쟁거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기의 윤리와 다른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윤리의 쟁점을 조목조목 열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미국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레비나스에 대한 연구는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후설-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현상학적인 계보를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로젠츠바이크로 대표되는 유대교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가 직접 경험한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영향,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번 웹진부터 네 차례에 걸쳐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 다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전통적인 레비나스 연구의 경향을 따르지도, 레비나스에 대한 주례사적 비평도 지양할 것이다. 그보다는 레비나스의 서구형이상학을 향한 비판, 신학이 어떻게 악(고통)을 정당화 시키는 기재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추적, 그 고리를 파헤쳐가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렸던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본회퍼의 타자론 간의 비교, 그리고 최종적으로 타자의 윤리가 기독교 윤리학 안에서 차지하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예단하는 것이 이번 시리즈의 전체적 그림이다.

그 전에 일종의 워밍업 차원에서 지난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라깡의 사유와 레비나스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이는 서구 전체성을 비판하는 레비나스가 지닌 비난의 탄착군이 어느 지점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레비나스와 라깡

근대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 시기였다. 계몽이성의 빛은 몽매한 중세의 두터운 장벽을 허물며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였고, 인류에게 번영과 진보를 약속하는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근대는 인간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른 생존경쟁의 난투극 속으로 몰아넣은 시기이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주체와 객체로 분류하고 주체로 하여금 대상을 지배하게 하는 논리가 싹튼 시기이기도 하다. 주체와 객체간의 간극은 헤겔에 의하면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진화하여 마침내 절대정신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형이상학이 지녔던 주술이었다.[각주:3] 레비나스는 이를 서양철학이 걸어온 ‘전체성의 향수’ 라 지적하고, 개인들의 고유성을 말살하고 타자를 제거하는 폭력적인 개념이라 비판하면서,[각주:4] 홀로코스트를 서양철학의 전체성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지목한다.

우리는 지난 호 웹진에서 라깡에게 있어 타자가 상징계 속의 타자와 실재계 속 타자로 분류되고 있음을 알았고, 상징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 실재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과 구분하여 향유라고 불렀음을 기억한다. 라깡적으로 해석하면 홀로코스트는 전체성의 철학이 실재(the Real)를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유토피아를 창조하겠다던 현실의 기표와 욕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실재였는지가 확인되었던 순간이, 이성의 법칙이라는 상징적 질서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실재계속 대상소타자가 우리에게 불쑥 다가 온 것이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이렇듯, 라깡이 말하는 타자성의 진면목은 상징계속 타자에 갇히지 않는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레비나스의 표현대로라면 동일성의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연기되면서 미끄러져가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고 볼 때, 라깡이 말하는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기존의 서양철학의 전체성으로 타자를 포획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레비나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양자를 비교하는 이유는 서구 전체성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두 사람은 일정 부분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구체적 분석 틀에 있어서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레비나스와 라깡은 공히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등장하는 주체에 대한 타자의 전유와 배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일성의 폭력안으로 말려들어가지 않는 타자를 다시 정초하려 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 양자는 길을 달리한다. 라깡이 의미의 결정을 계속 연기시키며 미끄러져가는 타자를 상정함으로 전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한 반면, 레비나스는 타자를 급격한 초월, 즉 계시의 단계까지 끌어올림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전체성과의 과격한 분리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갖고 이제 본격적으로 레비나스의 전체성 비판, 특별히 서구 기독교가 어떻게 그것의 옹호에 기여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서구신학은 어떻게 전체성을 옹호하였나?

신정론(Theodicy, 神正論)은 의인에게 닥치는 고난과 악의 명백한 현존 속에서도 신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한다는 사실, 그런 신의 전능과 계획에 의해 악과 고난은 현실적 차원이 아닌 신의 섭리가 작동하는 영역으로 고양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론이다. 근대적 이성이 사상적인 측면에서 주체의 타자를 향한 동일성의 폭력을 정당화한 사례라면, 그리스도교 신학의 신정론은 인간의 삶 속에서 부딪치는 삶의 타자들(죽음, 고통, 악)을 신앙의 동일성안으로 끌어들였던 또다른 폭력이었다고 레비나스는 평가한다.[각주:5]

돌이켜보면 서구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등장하는 악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에 있어 각 시대마다 다른 해법이 있어왔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신정론적인 전제로 묶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제도화 과정에서부터 중세까지 교회를 지배했던 계시신학,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중세신학을 완성한 스콜라철학은 자연의 조화를 인식함으로써 신에 이를 수 있다는 자연신학을 낳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스콜라적인 신학을 부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신에 이르는 ‘십자가 신학’을 모토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다시 꾀한 패러다임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가 신앙의 영역에서 이성을 추방시켰다면, 칸트는 이성의 영역에서 신을 제외시켜 물자체의 영역으로 등극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양자는 라깡의 표현대로라면 ‘거울단계’에서 엄마와 아이가 상상적 양자합을 이루는 것과 같이 서로에 기대고 있다. 하나는 초월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내재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릴 수 있겠지만 ‘궁극적 실재의 다차원적인 존재방식(틸리히)’ 이라는 측면에서 양자는 서로의 거울이며 그림자이다. 헤겔은 이런 해묵은 종교 갈등을 ‘세계는 정신의 자기 전개과정’이라는 말로 통합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치열하게 신론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고난과 악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양자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범박하게 표현하면, 신의 섭리와 은총 안에서 예수 잘 믿으면 보상을 받는다는 주장과 신이 우리의 고난과 함께 참여하면서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간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양자의 정점에는 공히 십자가신학이 있다.[각주:6] 어쩌면 십자가 신학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했던 악의문제를 신앙인들이 직면할 때 마다 그 사건과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권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준 부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레비나스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등 총체성에 입각한 전체주의의 망령을 목도한 후, 고통의 신학화를 통해 이루어낸 고난의 유의미성, 절대정신으로 나가기 위한 발전단계로서의 고난, 신적 섭리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난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되는 고난에 대한 낙관적 해석을 거부하면서 최종적으로 신정론의 폐기를 선언한다.[각주:7] 만일 레비나스의 지적처럼 신정론이 현재의 고난을 미래의 축복으로 연결시킴으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고난을 신앙적으로 무마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맑스의 종교 폄하발언, 즉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표현은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해야하는가? 다음 호 웹진에서 레비나스 사상을 대변하는 키워드인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과 ‘타자의 얼굴’을 고찰함으로써 서구신학 내지 서구윤리에 대한 반성을 도모하고자 한다.

ⓒ 웹진 <제3시대>


  1. 웹진 제3시대 29호에 실렸던 필자의 졸고 “자기의 윤리I-주체여, 안녕히!”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35)와 30호 기사 “자기의 윤리II-주체여, 다시 한번!”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41)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2.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1996), 101. [본문으로]
  3. 근대의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많은 글들이 있다. 대부분 백인에 의한 백인의 자기비판 내지 1세계 관점에서 풀어보는 해법으로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얼마 전 출판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대학의 몰락』(동연, 2011)의 저자인 시카고 신학교 서보명 교수는 1.5세 이민자의 눈으로 서구의 근대성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는 학자이다. 그의 저서 A Critique of Western Theological Anthropology: Understanding Human Beings in a Third World Context. (New York: Edwin Mellen Press, 2005)은 이러한 취지를 잘 살린 책이고, 특별히 이 책의 1장 The Project of Modern Theological Anthropology: The Question of Freedom 에 근대성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한 그의 신학적 분석이 잘 전개되고 있다. [본문으로]
  4. “헤겔철학에게서 정점에 이르는 서양철학이 모두 그렇다. 헤겔은 철학 그 자체의 정점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어떻든 영의 차원이든 분별력의 차원이든 모두 앎으로 해결하려고 한 서양철학 속에서는 어디서나 전체성의 향수를 볼 수 있다. 전체성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곧 죄인 것처럼 알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2000), 98. [본문으로]
  5.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96. [본문으로]
  6.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 중에 미국 신학계내에서 십자가신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몇 권의 책을 아래에 소개한다. /// _Jennings, Theodore W., Jr.Transforming Atonement: A Political Theology of the Cro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9.(한국에서는 퀴어신학자으로 알려진 시카고 신학교 제닝스 교수의 주된 관심사는 바울과 제국과의 관계를 데리다, 지젝, 맑스의 이론을 갖고 바라보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틀속에서 제닝스 교수는 십자가 신학이 어떻게 서구문명의 발전과정에서 자리매김을 해왔는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 _ Douglas, Kelly Brown. What’s Faith Got to Do With It? Black Bodies/Christian Souls. N.Y: Orbis Books, 2005.(유명한 The Black Christ 의 저자이기도 한 Kelly Brown Douglas는 이 책에서 흑인에 대한 lynching과 십자가 신학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대속론이 흑인들 스스로에게 체제의 폭력을 견디고 순응하게 하는 기재로 사용되었음을 밝힌다.) /// _Terrell, Joanne. Power in the Blood?: The Cross in the African American Experience. N.Y: Orbis Books, 1998.(시카고 신학교에서 윤리와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Terrell은 유니언 신학교에 있는 흑인신학의 대부 제임스 콘의 직계제자이다. 그녀는 Womanist 관점에서 십자가 신학을 gender와 race, 그리고 power의 문제로 돌려 바라보고 있다.) /// _Westhelle, Vitor. The Scandalous God: The Use and Abuse of the Cro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6(시카고 루터란 신학교에 있는 Vitor Westhelle는 미국신학계에서도 보기드문 헤겔좌파 신학자이고 브라질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탓에 해방신학에도 조예가 깊으며 유럽에서도 활동한 바 있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Vitor는 다양한 문화에서 이해하는 십자가신학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이 책을 통해 선사한다) /// _Joh, Anne. Heart of The Cross: A Postcolonial Christology. Louisville: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6(시카고인근 에반스톤에 위치한 Garrett신학교에서 Theology를 강의하는 Anne Joh교수는 Drew의 Catherine Keller의 제자이고, Heart of The Cross는 그녀의 박사논문으로 출판 당시 신학계에 화제가 되었던 책이다. Anne Joh교수를 언급할 때 흔히 ‘정(jeong, 情)의 신학’을 먼저 거론한다. 전통적인 서구 십자가 신학에 대한 포스트콜로니얼니즘적인 해석(혹은 여성신학적 해석)을 통한 기독교 구원의 재발굴은 한인 이민 2세로 미국땅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 그녀의 고투와 맞물려 많은 착상과 울림으로 미국 신학계로 번져가고 있다. /// _Trelstad, Marit. ed., Cross Examinations: Readings on the Meaning of the Cross Toda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6.(Trelstad가 책임편집에 참여한 이 책은 근래 일고 있는 십자가신학 논쟁을 총망라한 책이라 볼 수 있다. 독일의 Moltmann 교수, 자칫 미시적 차원으로 함몰될 수 있는 목회상담의 영역을 정치와 사회 시스템 등 거시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고 평가 받는 Garrett을 상징하는 미국 목회상담계의 거목 James Poling,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명예교수 Delores S.Williams 등 원로들의 글 뿐 아니라, 시카고 신학교의 Joanne Terrell, 주목받는 일본계 신학자 Rita Nakashima Brock 등 신.구 학자들이 공동으로 이 책에 참여하여 십자가신학의 이슈들을 다시 써 내려간다) [본문으로]
  7.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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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17 15:0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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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실수로 이번 원고에 지난 호 원고 한 문단이 삽입돼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정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혼동을 드린 것 같네요. 이상철 선생님과 이미 글을 읽으신 모든 분께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4)
: 누가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가?

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누가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가?

’주체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현대 철학계의 흐름속에서 주체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스펙트럼상에 존재한다. 주체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디세이처럼 험한 여정을 마감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는, 그래서 자아의 존재를 기어코 발견하고야 마는 가열찬 의지를 지닌 반성적인 주체이고, 또한 주체는 하이데거적인 의미로는 자기 자신에게 현존하는 주체, 그리하여 현실을 완전히 독점하는 주체이며, 이는 또한 세계사를 신의 자기 인식, 자기 생성으로 파악한 헤겔류의 역사철학에 등장하는 무한 진보 신화에 빠져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위에서 거론된 주체는 하나의 개별적 주체가 아니라, 근대성 혹은 근대적 프로그램에 의해 조성되고, 근대(성) 일반이라는 담론의 틀 안에서 주조된 주체라는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후기 구조주의 계열의 학자들은 근대적 프로젝트 일반에 대한 폐기를 선언하면서, 인간의 계몽, 근대적 인식론, 근대적 주체론 등 이른바 근대성의 신화에 입각한 주체에 대한 무효와 해체를 주장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주체의 존재를 절대화한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지만, ‘주체의 죽음’을 운운하는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들과도 선을 긋는다.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무리들 역시, 그보다 앞섰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인격성과 타자성, 인간 존재의 윤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이다.[각주:1]

레비나스의 죽음 이해

레비나스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죽음이 알 수 없는 실재, 즉 삶의 타자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죽음과의 관계가 빛을 통해서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주체가 신비와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2] 죽음은 빛의 영역(인식, 경험, 지식) 밖에서 일어나는 경험, 주체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관계로부터 도래하는 사건이다: “주체는 이제까지 능동적이었다. 나는 ‘수동성의 경험’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경험은 항상 이미 인식, 빛, 주도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비로서의 죽음은 그렇게 이해된 경험과는 구별된다. 내가 만나는 대상은 파악되고, 간단히 말해서 나를 통해 구성된다. 그런데 죽음은 주체가 그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 그것과 관련해서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그런 사건을 알려준다.”[각주:3]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내가 주인이 되는, 내가 주도권을 갖고 끝까지 밀어 부치는 그것이었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 죽음은 절대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상황, 다시 말해 빛의 명증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두움이고,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를 사로잡는 그 무엇(타자)이다. 그 상황은 <시간과 타자>를 비롯한 그의 저서들에서 ‘얼굴/미래/여성성/타인과의 만남’등 레비나스 특유의 레토릭으로 전개된다. 특별히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소위 ‘얼굴의 현상학’을 전개하면서, 타자는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각주:4] 
얼굴은 레비나스에게 있어 현시가 아니다. 얼굴은 물리적 시.공간에 위치를 점하는 감각적인 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굴은 우리에게 깊이와 근거를 알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우리를 향해 침투하고 관여한다.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아우성대며 우리의 응답을 촉구한다. 레비나스가 윤리학을 ‘제 1 철학’[각주:5]으로 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자를 전통적인 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 응답의 차원, 책임의 차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레비나스가 자살을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도 유용하다. 인간의 주체성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발성이다. 주체란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주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인간의 자발성의 영역이 아닐까?’라는 물음도 가능하다. 실제로 현대 철학자들 중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몇몇 있는데, 최후의 순간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이러한 선택에 대해 ‘아니!’라고 답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인간의 주체성은 자발성과 비자발성에 있지 않다.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주체이다. 죽음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기의 책무를 다 했을 때 맞이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책임의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레비나스는 ‘희망’이라 말한다: “주체의 지배가 보장되는 현재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일종의 목숨을 건 모험이다”. 계속하여 레비나스는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며 “나는 숨쉰다, 나는 희망한다”라고 선포하는데,[각주:6] 이러한 고백은 전적으로 레비나스의 나치 치하 포로수용소에서의 체험에 기인한다.[각주:7] 

Episode:  아우슈비츠에서 들려온 희망의 근거

필자가 현재 재학중인 시카고 신학교에 올해 나이로 96세인 노학자가 있다. 시카고에 있는 대표적인 진보적 색채의 신학교라 할 수 있는 시카고 신학교와 Northwestern대학 안에 있는 Garrett 신학교에서 유대교를 가르치고 있는 Rabbi Schaalmann 교수이다. 마틴 부버의 제자이고 레비나스와도 교류를 가졌던 분으로 현재 유대교 학자중에는 최고 원로급이며, 그 자체가 교과서인 신화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강의실에 들어가면 text 없이 수업이 진행된다. 학생들이 질문하면 교수님이 대답하는 형식인데, 모든 질문과 어떠한 상상도 허락되는 시간이다. 교수님이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가끔씩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들려주신다;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형제, 자매, 친구들, 가스실, 삶을 차단해 버린 높은 담장과 철조망, 얼굴에 핏기가 없으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되어 끌려가 죽는다. 얼굴에 생기가 있게 비치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어 얼굴에 바르는 사람들…
나치는 응징과 공포의 차원에서 몇몇 마음에 안 드는 유대인들을 골라 시범케이스로 교수대 위에 목을 메달아 공개적으로 죽였다고 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나머지 유대인들은 고개를 들고 그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도하면서 교수대 밑을 빙빙 돌아야 한다. 이렇듯 죽음이 선포되고, 집행되고, 확인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을, 인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피맺힌 절규가 울려 퍼졌다고 Schaalmann 교수는 회고한다.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다: “이번에는 우리가 신을 용서할 차례다. 이제 우리의 신을 놓아주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계속 의미를 묻고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고 Rabbi Schaalmann은 고백한다. 신을 용서하고, 신을 놓아버리니까 (사실, 그 의미가 정확히 뭔지는 필자는 잘 모르겠다. 96살이 되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을런지?), 그 전에는 몰랐던 수용소 하늘 만큼의 자유가, 그리고 희망이 여전히 내게 있다는 것이 전해져 왔고, 죽음의 가스실 담벼락을 비집고 난 풀 한 포기 혹은 감방 창살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 아래로 파랗게 낀 이끼들을 보며 여전한 생명에 대한 고귀함과 집착을 느꼈다고 그는 증언한다. 그 힘이 우리를 끝까지 살아남게 했다고 말이다.

레비나스의 책을 읽다 보면 죽음과 자살, 그리고 희망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급격한 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레비나스를 읽는 독자들에게 난제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이는 다분히 아우슈비츠에 대한 전이해 부족과 유대 신비주의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Schaalmann교수는 지적한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 경험은 그것을 경험한 대부분의 유대 사상가들에게 그렇듯이, 레비나스에게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가 구사하는 문장 곳곳에 숨어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레비나스는 이런 이유로 “주체의 지배가 보장되는 현재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죽음의 언저리에, 죽음의 순간에, 죽어가는 주체에게 주어진다”고 말한 후에 “자살은 모순적 개념”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각주:8] ⓒ 웹진 <제3시대>

  1. 데리다는 자신의 초기 저작인 Writing and Differenc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안에 있는 논문 ‘Violence and Metaphysis: An Essay on the Thought of Emmanuel Levinas’에서 레비나스를 신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레비나스의 타자인식에 대해 분명한 반대입장을 표명한다. 1995년 레비나스가 죽은 후에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회상하며 ’아듀! 레비나스’라는 유명한 추모연설을 하는데, 그 내용이 Adieu to Emmanuel Levians(Stand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란 제목으로 책으로 엮어져 출판되었다. 그 대목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적 타자 발상을 상당부분 수용한다.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타자를 둘러싼 논쟁은 타자 담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타자를 둘러싼 논쟁사: 레비나스와 데리다를 중심으로(가칭)’라는 주제로 차후에 제3시대 웹진을 통해 발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2. 시간과 타자, 77쪽. [본문으로]
  3. Ibid., 77 쪽 [본문으로]
  4. Levinas, Emmanuel.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10;University Press, 1969;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 후반부 전체를 ‘얼굴의 현상학’을 테마로 하여 그의 타자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5. Levinas, Emmanuel. Levinas Reader. Edited by Sean Hand, MA: B. Balckwell, 1989. p.75. [본문으로]
  6. 시간과 타자, 82쪽. [본문으로]
  7. 미국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레비나스에 대한 연구는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후설-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현상학적인 계보를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유대교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가 직접 경험한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영향,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본문으로]
  8. 시간과 타자, 8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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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3)
: 죽음의 고고학 考古學

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요약, 그리고 방향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지난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기인한 죽음에 대한 단상에서 비롯되었다. 이 글이 쓰여지고 있던 기간에도 우리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 구약학자 김찬국 교수의 죽음, 그리고 영화배우 장진영의 죽음을 경험했다. 처음에 글을 시작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톱스타 최진실의 자살, 좀 오래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자살을 이야기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재벌, 스타, 심지어 대통령까지 자살에 대한 압제와 억압에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그렇다면 크리스챤으로서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글을 시작한다고 밝힌바 있다.
필자는 자살에 대한 논의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자살 역시 인간이 맞는 죽음의 방식(형태)이기 때문에 그러했다. 이런 이유로 지난 두 차례의 (웹진 9호, 11호) 글을 통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의 세계관과 근대철학, 현대 실존주의 철학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간략하게 진술하였고, 오늘 하이데거와 하이데거를 넘어가는 레비나스의 죽음이해에 이르렀다. 레비나스는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한 후에 자살에 대한 의견도 피력하는데 그 부분과 자살이 만연하는 한국사회의 자살현상학에 대한 부분은 다음달 마지막 주제를 위해 남겨둔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II: 하이데거

신적 디자인에 의해 움직여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현실을 향해 내던지면서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실존주의적 인간유형은 하이데거에 와서 그 절정을 맞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였다. 그는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향한 일방적 포획으로서의 서구 근대철학은 고전시대(그리스시대)가 지녔던 존재체험을 상실했다고 비판한 후,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근원적 존재체험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 신이 이렇게 현전함 그 자체가 곧 그 구역을 하나의 성스러운 구역으로의 확장이자 경계지움이다.”[각주:1]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신전과 신상, 그리고 신화는 그들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들의 생활은 신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신화는 그들에게 있어 기억의 반복이자 현실의 원칙이었다. ‘신전을 세웠다’함은 근대적 의미로 궁극적 대상을 향한 인식론적 분투라 표현할 수 있겠지만, 고대 인들에게 있어서는 근대인의 그것과는 달랐다. 태초에 신이 먼저 있었고, 그 신이 임재하는 신전을 세움으로 대상과 의식의 합일을 도모했던 근대적 인식론이 아니라, 신전을 건축함으로써 비로소 신이 존재하게 되었고 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한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는 구절의 의미이다. 신전을 건축함으로 신의 세계가 열린 것(개시 開示)이다. 고대 헬라스인들은 신전을 만들어 신을 그 안에 안치시켰고, 그 공간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의 세계, 하이데거적 의미로 ‘생활세계’를 건설하였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생활세계는 실천적 해석을 전제로 하였고, 하이데거는 특별히 사물의 의미를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실존적 주체를 ‘현존재 Dasein’라 불렀다. 


Episode:  개시開示 의 기억, 87년 6월

진리가 실존적 삶의 현장에서 개시되었던 사건은 역사상 무수히 많다. 문제는 그 이름없는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신이 신전 안에 현전한다’는 의미는 기독교식으로 ‘말씀이 육화되었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그런 사건이 있었다. 너무나도 또렷하고 생생하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궁극적 진리의 현전을 봐버린 개시의 사건 말이다.
87년 6월이 그러했다. 당시 나는 고3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신촌에 있었는데, 학교와 집을 오갈 때 맡았던 매캐한 췌루탄 가스와 버스 밖 풍경들, 예들 들어 푸른 옷의 전경들, 닭장차, 괴물 같았던 페퍼포그가 질서 있게 혹은 난잡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현재의 전황에 내기를 걸곤 했었다. 이한열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이었는데 그날 나는 학교에 안갔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신촌 일대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봐 그날 임시로 하루 가정학습이라는 명목으로 놀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학교를 땡땡이 쳤던 것 같기도 하고, 고3은 학교에 나와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다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나는 그날 이한열 장례식에 있었다.
장례식 도중에 문익환 목사님이 등장하셨다. 아버지의 대학시절 스승이셨다는데, 아버지는 문목사님이 엄격하고 학문에 열중하셨던 구약 선생님이었다고 회고하신다. 유년시절 수유리 고모네 집에 놀러갈때마다  아버지는 고모네 옆의 옆집이었던 문목사님 댁에 먼저 들르셨다. 그 집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나도 따라 들어가 인사를 드렸는데, 문목사님은 집에 계시던 때보다는 안 계셨을때가 훨씬 더 많았다. 아버지께 ‘목사님 어디 가셨어?’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감옥에 갔어’라고 말해주었다. 바로 그 문익환 목사님이 감옥에서 출소하자 마자 이한열 장례식 연사로 나오신 것이다.
단상에 오르시더니 문목사님은 사자후를 토하시며 “장준하 열사여!…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독재정권하에서 죽어간 20여명의 이름을 하나씩 외치면서 그 넋을 하나씩 불러내기 시작하였다. 어렸을때 보았던 만화영화중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폴이 4차원의 세계로 넘어갈 때 화면 전체가 빙글빙글 돌면서 폴이 무슨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상한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데 마치 그와 같았다. 문목사님이 죽어간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폴처럼 새로운 세계로 빙글 빙글 돌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모였던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로 엮어지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에네르기가 그곳을 휩쓸기 시작하더니, 곳곳에서 사람들이 오열하고, 가슴을 치고,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그러다가 탈진해 쓰러졌다. 내가 무엇을 알았을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바른 것 인지에 대한 이데아가 선재하고 있다가 우연히 87년 6월의 역사적 상황이 그것과 맞아떨어져 내가 그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와 정의와 자유라는 의미가 내 안에 각인되어 있다가 87년 6월에 불현듯 솟아올라 왔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다. 87년 6월 한복판에 내가 우연치 않게 그곳에 서있었고 그 광경을 보고 그 외침과 울음과 노래를 듣고 하는 과정에서 진리가 확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니 현전이니 개시니 하는 암호와 같은 말들을 만날 때 마다 87년 6월의 사건을 회상하며 그 의미를 반추한다.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

궁극적 진리의 현전에 참여하는 주체, 즉 실존론적인 주체개념 하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조차 현실적삶이라는 것 안으로 끌어들여(선취하여) 사유한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 시간의 궤적을 따라 산다.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세계를 자신의 품 안에 받아들이고 나름의 이해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 지평을 갖는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 벌어진 사건에 맞서는 인간의 응전을 삶이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던져진 세상과 맞짱 뜨는 적극적인 측면과 자신이 던져진 세상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어져가는 수동적인 측면을 모두 갖는다. 이런 점이 바로 하이데거의 주저라 할 수 있는 『존재와 시간』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자기 실존의 본질로 깨닫는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인간은 “무”(Nichts) 앞에 서게 되며, 실존적 결단을 하고 깨어있는 본래적인 인간(존재)가 된다. 자신의 죽음을 앞질러 달려가 봄으로써 개시된 근원적 진리를 확인한 현존재가 비로소 전체로서의 진리(인간존재)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인간이해의 근본조건이다. 
종합하면, 하이데거는 존재가 현존재 속에서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근원적 진리로서의 ‘개시開示’를 제시함으로써 대상과 사유의 일치라는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성립하는 파생적 진리와는 다른 진리체험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그의 이해에도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현존재속에서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온전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가능한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주체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V: 임마누엘 레비나스, 하이데거를 넘어서

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죽음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주체가 주체로서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전체성과 무한 Totality and Infinite>과 <시간과 타자 Time and Other>에서 하이데거와는 다른 죽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하이데거의 죽음은 마치 빛의 인식구조 안에 놓여있는 무엇이다: “죽음으로 향한 존재는 하이데거의 본래적 실존에 있어서 최고의 밝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최고의 남성다운 힘이다.”[각주:2]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의 양태를 설명하며 ‘최고의 밝음’, 즉 명증성(lucidity, lucid는 ‘빛나는, 밝은’을 의미)이라 표현을 썼다고 지적한 후, 하이데거 역시 서구 형이상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빛의 현상학’안에 있음을 꼬집는다. 
태양(밝음, 이데아, 근원적 진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형이상학의 동심원적 구조는 변방과 주변으로 갈수록 어두워지고 빛의 영향력을 점점 상실한다.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서구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그 대상들은 타자로 설정되었고 빛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복과 타도와 착취와 왜곡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여성/이교도/흑인/유대인/장애자/동성애자/이주노동자’ 등등의 이름으로 치환되어 당대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왔지만 기본적으로 똑같은 논리이다.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계몽주의’의 영어 스펠링이Enlightenment인데, 가운데에 빛을 의미하는 단어 ‘light’가 배치되어 있는 것도 중세를 암흑(타자)이라 상정하고 그것을 비추고 밝히는 의미에서의 ‘빛’이다. 이렇듯 서구 형이상학 곳곳에는 빛에 대한 동경과 집착이 짙게 베어있다. 하이데거가 서구형이상학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를 하지만, 레비나스가 볼 때는 하이데거 역시 서구의 인식론적 방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빛의 폭력’의 수혜자(or 피해자)인 셈이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폰 헤르만,「예술작품의 근원」,『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기상 옮김,(서울:문예출판사,1997), 583쪽. [본문으로]
  2.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문예출판사,1996), 77-7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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