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이웃
- 로버트 박의 방북사건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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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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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4일, 로버트 박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북한의 인권개선을 부르짖으며 항의방북을 단행했다. 그는 28세의 청년이고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특정 기관에서 파송되지 않은 독립 선교사로서, 멕시코 노숙인들을 돌보는 사역에 참여하는 등 사회적 약자에 관한 남다른 호혜적 의지를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탈북자 문제로 관심이 옮겨가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는 활동에 참여했고, 급기야는 북한의 인권유린을 문제시하면서 입북을 단행한 것이다.

입북 당시 그는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죽어가는 북한 인민들을 살릴 식량, 의약품, 생필품 등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도와줄 물품들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국경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정치범 수용소를 폐쇄시키고 정치범들을 석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각종 고문과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도와줄 사역팀이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요구가 담겨 있다.

동시에 그는 한국을 포함해서, 북한과 연관을 맺고 있는 세계의 여러 나라나 국제기구 지도자들을 향한 서신을 타전했는데, 거기에는 김정일 정권에 의해 자행된 강제구금, 강간, 고문, 처형 등에 관해 고발하고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개입을 촉구하고 있다.

필경 그는 북한 인민의 고통의 심각성에 관해 누구보다도 긴박한 위기의식에 휩싸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지도자들이 방관하고 있다는 것에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여 그는 목숨을 걸고 혈혈단신 입북을 감행한 것이겠다.

물론 그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북한 인권을 다루는 세계 100여개 단체간 네트워크 조직인 ‘자유와 생명 2009’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입북 경로와 그가 남긴 서신 등을 세계 각국의 기자들에게 배포함으로써, 박씨의 입북은 이 단체와 사전 협의한 것임이 드러났다. 이어 이 단체는 뉴욕과 도쿄,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북한대사관 앞에서 북한 인권개선을 위한 집회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올 1월 12일에는 임진각에서 인권문제를 해소하라는 성명서 4천 장과 과자를 매단, ‘로버트 박 풍선’이라고 명명한 풍선 2개를 북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에서 로버트 박의 무사귀환과 인권유린의 중단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공고했다.

2월 25일로 공고된 집회는 무산되었다. 로버트 박이 2월 5일 석방되어 미국에 인도된 것이다. 43일만이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하루 전날, 북한 중앙통신에 의하면, 그가 자신의 과오와 무지를 사과하고 속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한다. 석방 이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북시 목숨을 건 소명의식에 불타 있던 야무진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무표정한 얼굴만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목적의식을 상실한, 마치 혼란에 빠진 사람 같기도 했고,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심적 고통에 무기력해진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로버트 박의 입북으로 인해 벌어진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었고, 아무런 변화의 조짐도 없다. 북한은 북한대로, 반북 인권단체들은 그들대로 ...... 그리고 불타는 열정이 한 순간 모두 소진되어버린 한 청년의 소식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2

지난 2월 11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가 ‘북한인권법’을 통과시켜 본회의에 상정했다. 그 골자는 통일부 산하에 북한인권자문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통상부에서는 북한 인권대사를 두며, 북한인권재단을 통일부 산하에 두어 북한의 인권침해사례를 수집 조사하여 매 3년마다 북한인권기본계획을 수립하게 한다는 것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이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게 된다면 한국은 북한인권법을 제정한 세 번째 국가가 된다. 미국은 지난 2004년 고강도의 신냉전주의 정책을 추구했던 부시 정부하에서 북한인권법을 제정하였고, 일본은 2006년, 납치 문제가 한참 불어졌던 때 이 법을 제정하였다. 두 나라는 모두 대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대북압박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이 법안을 제정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양국의 북한인권법은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한데 미국과 일본의 정부가 바뀌고, 이 두 나라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북한의 개방과 인권개선을 모색하는 것으로 대북외교의 기조가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남한의 정부와 여당은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고자 한다.

여기서 전임정부의 대북유화정책이 현 정부에서 현저히 후퇴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가의 식량지원은 사실상 중지되었고, 민간 차원의 지원도 심한 제약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북한의 식량상황은 더욱 심각한 사정에 있으며, 북한 붕괴론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요컨대 세 나라의 북한인권법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모두 북한의 인권개선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거나 그럴 것이 예상되고, 대북관계를 더욱 냉전적 관계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상의 압박수단으로 이 법안이 활용되었거나 그럴 것이 예상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데 남한의 경우, 북한인권법은 그 이상의 효과를 함축하고 있다. 이제까지 남한에서 대북지원을 수행한 NGO들은 대체로 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 한데 북한인권법이 실효되면 이들 단체들의 대북지원사업은 대단히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또한 북한인권을 주장하던 단체들, 특히 개신교계 교회나 단체들은 대체로 냉전주의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MB 정부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이 있는데, 이들 단체들은 정부에 의해 적지 않은 지원을 받게 될 것이 예측된다. 하여 이들 단체들의 사회적 영향력과 발언권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용산사건에서 보듯 국내의 인권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추세에 있는데 북한인권법이 제정된다는 사실은 불온한 함의를 지닐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보다 열악한 북한인권의 문제를 정부가 주도함으로써 내부의 인권문제가 희석화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3

다시 로버트 박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한 폐쇄적 사회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인권문제를 가슴 아파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항의를 표하는 선교사적 영성은, 적어도 그 뜻과 동기의 측면에서는, 숭고하다. 그런데 그가 북한 국경을 넘어서자마자 교회를 포함한 극우인권단체들과 각국 정부들은 인권문제를 왜곡된 체제의 문제와 연동시켰고, 북한정부는 순진한 청년의 눈과 귀를 봉쇄한 자본주의사회의 위선을 강조하였다. 주장은 다르지만 모두 인권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양측의 상호비난은 어느 정도 사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공방이 북한의 인권개선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단지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 북한과 서방, 북한과 남한 간의 냉전적 대립만 강화시킬 우려만 낳았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박의 선교사적 영성은 위험하다. 그의 순수함, 아니 천진함은 세계의 냉전적 관계를 고조시키고 양측의 냉전주의자들의 세력을 강화시킬 우려가 있다. 북한 인민이 겪고 있을 참혹함은 이러한 냉전주의자들의 체제 아래에서는 거의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로버트 박의 열정적이고 순진한 선교사적 영성은 단순히 그가 그런 성격의 사람이라는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 아니 미국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열정으로 가득한 선교사를 양산하는 신앙제도를 가지고 있다. 인권에 관심을 두든 복음화에 관심을 두든, 그 차이는 별반 다르지 않다. 양자는 모두 자기가 소명받았다고 생각하는 선교지를 어둠의 세계로 보며, 선교를 밝음의 공간에서 어둠의 공간으로 들어가, 어둠을 밝음으로 개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세계를 단순한 것으로 오인한다. 하여 그의 행동은 천진하다. 그런데 그러한 천진성은 신앙제도에 의해 ‘순수함’으로 승화되어 해석되고, 권력은 이것을 이데올로기화적 도구로 활용한다.

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도 그런 점에서 미국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점을 문제제기하고자 한다. 아니 미국사회나 미국교회보다 좀더 심한 반지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한국사회와 교회는 그런 우려를 더욱 진하게 담고 있다. 종교 권력과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의 권력(자본의 권력, 문화권력 등)은 열정에 불타는 천진한 예언자들의 모험주의를 언제든지 도구화하여 자신의 권력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저 천진한 예언자들의 이분법적 세계는 권력의 속성과 너무나 어울리는 사유틀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선교사 혹은 예언자적 영성이 대중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을 때 그것을 도구화하여 권력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성서 속의 한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얘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4

느헤미야 총독이 부임한 이래 예후다(유다) 속주는 인구가 급증했다. 그가 성벽을 건설함으로써 예루살렘 도성의 규모도 확장되었다. 더 이상 유다는 팔레스티나의 가난한 지역이 아니다. 이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어엿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와 전쟁[각주:1]을 벌이느라 제국의 서부 국경지역에 많은 요새와 도로들이 건설되었고, 그 와중에 지중해 무역이 활발해짐으로써 많은 도시들이 기회를 얻었다. 특히 서부 해안 지역은 일종의 전쟁특수를 누린 셈이다. 반면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그러한 기회에서 뒤져 있었는데, 느헤미야 시대에 와서야 뒤늦게 성공대열에 뛰어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유능한 정치인이 주도하여 건설하는 데 성공한 예루살렘 성벽이 바로 페르시아의 대(對) 그리스 방어요새의 하나였던 덕일 것이다.[각주:2]

그런데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정적을 제거하는 방식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황제의 명을 받고 부임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집권은 예루살렘에 정착해 있던 구지배세력에 비해 불리한 점이 많았다. 한데 그는 느닷없이 성전 귀빈실에 기거하던 암몬의 토호 도비야를 축출한다. 또 사마리아의 통치자인 산발랏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던 대사제 엘리아십 집안을 축출한다. 요컨대 인근정치세력과 연대하면서 유지해왔던 구지배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권력이 안정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에게는 토착집단에 비해 지역기반이 부족했지만, 과거 제국의 수도에서 황제가 신뢰한 관료였던 그는 그것을 십분 활용하여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 그가 적대시하는 집단은 제국황실에게는 친 그리스파로 해석될 여지가 많았던 것이다. 내부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외부의 대상을 적으로 규정짓고, 그 외부와 연계된 내부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체제의 안정과 발전의 기수가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마리아’라는 적이 발명되었다. 바야흐로 유다-사마리아 분단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느헤미야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이후 얼마 안 되어 에스라가 파견되어 온다. 그 역시 제국황제가 파송한 인물이지만, 총독으로 부임한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직위와 직무가 무엇인지 알 길은 없지만, 「느헤미야기」 8장 1절부터 시작되는, 수문(Water Gate) 앞 광장에서 시작된 율법낭독과 회개의 집회는 우리의 주목을 끈다. 율법공동체를 선포하는 그의 긴 연설이 내포한 중대한 실천은 이웃족속과의 혼인관계 해체에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이방 사람과 관계를 끊었다. 그들은 제자리에 선 채로 자신들의 허물과 조상의 죄를 자백하였다.
―「느헤미야기」 9장 2절

제국황실에서 황제를 보좌하던 이력의 인물 에스라는 필경 천진한 예언자는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유다 백성은 그를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순수한 열정의 사람으로 보았던 것 같다. 하여 대중은 그에게 열광했고, 그 앞에서 회개하고 충성을 다짐하며 순수한 열정의 행동을 감행하겠다고 결단한다. 

이웃족속과의 단절은 느헤미야가 시작한 것이지만, 그는 귀족 일부의 혼인관계를 문제시한 것에 그친다. 하지만 에스라라는 이를 유다공동체 전체의 강령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공동체 내의 이미 결혼한 사람들과 그 자녀들 모두가 해체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졌고, 대단히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느헤미야에게 이웃은 친 그리스파로 낙인찍히는 존재가 되었다면, 에스라에게 이웃은 죄와 벌을 가져다준 부정한 존재들이고, 그런 점에서 악마의 자녀들이었다. 하여 전자는 제국 황제의 심판대에 놓이게 되지만, 후자는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두 인물은 공히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된다. 느헤미야가 씨를 뿌린 사마리아라는 적에 관한 논리는 이렇게 탄생했고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웃을 적으로 만들고 그 적과의 전쟁에 대중을 동원하는 전략은, 실제로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냉전적 공존의 상황을 초래한다. 그러한 냉전주의 아래서 적대감은 계속되며 그러한 적대감 속에서 대중의 삶과 실천을 증오로 점철된다. 천진한 예언자들적 영성은 이러한 증오의 정치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종종 그러한 증오 속에서 자라는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곤 한다.

‘지옥’의 프랑스어를 제목으로 하는 영화 <랑페르>(L'enfer, 2006)는 특정 대상을 향한 편견과 증오가 자기 자신의 상처를 영구화하고 그것으로 인해 예측하지 못한 폭력과 파괴, 그리고 상처가 되풀이되는 악순환의 공간을 지옥(랑페르)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선교사적 영성은 선악으로 나뉜 세상에서 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수하면서 뜨거운 믿음이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질서, 그것의 편견과 증오, 그리고 상처를 보듬는 냉철하지만 따뜻한 믿음과 연관된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전쟁은 기원전 499년부터 450년까지 몇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대규모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본문으로]
  2. 그리스 군의 침공을 방어하려는 요새가 아니라, 페르시아-그리스 간의 전쟁을 기회삼아 독립을 꿈꾸었던 페르시아의 서부 국경지역 식민지들에서 반란이 일어나곤 했기에,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건설된 요새다. 이들 식민국들은 이 전쟁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일종의 비명시적인 그리스 동맹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페르시아 제국은 그렇게 보았다.&#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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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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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호
    2010.03.09 16:2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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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평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었습니다.
    다른 해석을 만난다는 것은 늘 흥미롭고 생각의 활력을 줍니다.

    아무튼 저는 이 글에서 분단의 뿌리를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 맹아는 바로 이 시대에 제도화되기 시작했고, 그러한 분단의 신학이 탄생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권력은 대체로 경쟁적이고 정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권력간의 갈등은 또한 대체로 일방적으로 결정되기보다는 타협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페르시아 식민지 귀환시대 팔레스티나에서도 그랬지요.
    서로간에 힘의 불균형이 있기는 해도 모든 자원을 독점하는 것보다는 영향력을 비대칭적으로 분점하는 게 효율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위에 있는 세력도 자신의 영향력이 좀처럼 미치기 어려운 지역이나, 그렇게 하려면 너무 비용이 많이 드는 지역에 대해서는 정복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그 지역의 권력을 하위에 두면서 공존하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하위의 권력도 자주권을 얻는 것을 염원하기 마련이지만 주위의 헤게모니 세력과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공존하면서 자기의 입지를 활용하려는 경우가 보다 일반적입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권력은 협상의 전문가들로 채워지곤 합니다.
    이 시기 팔레스티나도 그랬던 것으로 보이고, 해서 사마리아나 암몬 등의 지배세력이 예후다(유다) 지방의 엘리트들과 공존했던 것이지요. 느헤미야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것이 좋은지 나뿐지의 문제는 제 관심이 아닙니다. 그냥 권력 엽합이 어느 정도 적대적 관계 속에서 존속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황은 시간이 흐르면서 양국의 대중의 삶을 관계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을 겁니다. 서로가 혼인관계를 맺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시사하지요.
    대중은 그렇게 서로 얽히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거대담론이긴 하지만, 신화를 공유하는 일종의 종족공동체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니 그런 삶의 연결망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지배세력이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말이지요.

    제 관심은 이것입니다. 대중 간의 삶의 공존, 경험의 공존, 기억의 공존은 더 발전할 수도 있었고, 그러한 공통감각 아래서 사로를 통합하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자라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한데 예후다 지방의 새로운 통치권력이 그러한 가능성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저의 관심입니다. 그것은 주변 권력에 비해 본성이 더 나쁜 권력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나쁜 정치'가 비극을 초래하는 악마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 드렸듯이 어느 정치세력이나 경쟁적이고 정복적입니다. 해서 공존이란 늘상 어렵고, 그런 어려움의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공존의 이유 또한 얼마든지 있고, 그들의 뿌리가 어떻든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한데 어떤 권력들은 서로 공존하고, 다른 권력들은 서로 증오합니다.
    문제는 후자인데, 권력간의 증오는 그 사회의 대중간의 증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가족이 되고 운명공동체로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었는데, 지배층들의 나쁜 정치가 그들을 원수가 되게 했다는 것이지요.
    해서 저는 한 권력이 다른 권력보다 더 좋으니 나쁘니 하는 가치판단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나쁜 정치가 문제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쁜 정치는 그 사회의 대중간의 대화의 가능성을 말살시키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정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요.

    댓글을 다는 일이 제겐 여전히 익숙치 않네요. 그런 탓에 말이 횡설수설합니다. 양해해주시길...
    아무튼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2010.03.09 17:3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긴 댓글로 마음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견해 차이는 존재하는 법이고, 옳고 그름보다는 열린대화가 중요한 법이겠지요.
    분단 극복과 통합에 대한 신학적 과제가 중요하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가지 저와 관심의 차이는
    얽히고 섥힌 대중의 관계적 삶의 좋고 나쁨은 관심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 얽히고 섥히면서 살도록 하는 것 속에 강력한 권력의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식민지 상황에서 유대민족주의 발흥과 저항정신의 약화를 의도한 제국의 의도였고
    특히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앗수르는 타인종과 혼인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저는 민족정신과 종교를 말살하려는 강력한 식민주의 정책을 표던 나라는 무너지고
    각 국의 민족정신과 종교를 권장하는 새로운 식민주의 정책을 세운 나라가 일어나 해방군을 자처함으로 생긴문제로 이해했습니다.

    견해 차이를 발견하고...
    또.. 대중에 포커스를 맞추신 목사님의 견해의 의도또한 살펴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리고 그 의도 자체에는 저역시 공감하는 입장입니다만,
    단지 이 구절이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이었기에
    제 의견을 감히 나누었습니다.

    댓글을 다는 일이 저역시도 쉬운일은 아닙니다. ^^
    저역시 오랜만에 생각을 나눌 수 있어서 참 감사하고 좋았습니다.
    부족한 글에 대한 답변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 2010.03.17 09:1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805

    두 분글에 대한 다른 비평이 하나 실렸네요.


로버트가 성탄절에 두만강을 건너 북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며


우리는 지금 충격과 깊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착하고 여린 마음을 가졌던 그가
홀로 이 추운 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로버트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경쟁을 싫어하는 평화롭고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그는 늘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부드러운 아이였지요.
중학교 때 아리조나 투산으로 이사간 이후
그는 학교 공부보다는 어려운 친구를 돕는 활동에 열을 쏟았으며
장애인, 멕시칸 불법 이주민들을 돕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식구만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힘들어하며
길 가다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옷을 벗어주거나 돈을 털어주기도 하는 소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국에 와서 북한에서 온 청소년들과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로버트에게 북한 관련한 일은 매우 복잡하고 
특히 한국의 역사나 상황도 잘 모르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니 
그런 일을 하기에는 무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왔고
사랑이 많은 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노인들과 지내기도 하고
북한에서 온 가족과도 함께 하면서 어느새 한국말을 익히고
북한주민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늘 가난한 자 아픈 자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굶주리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하루 한끼의 식사만 하였습니다.
가족을 보러 와서도 밥은 안 먹고 기도만 하자는 그에게
우리는 가족이란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금식을 하려면 오지 말라”는 심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잦은 단식으로 야위어가는 가는 그를 보면서
우리는 밥 먹이는 데만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북한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고통받고 있는데도
그는 왜 남한 주민들이 북한 동포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우리는 남한 땅에서의 삶도 충분히 불안하고 고단하다고 답했습니다.

세계 방방 곡곡에 빈곤과 불행이 가득하니 단번에
세상 문제를 다 풀려고 하지 말라고도 일렀고
정치적으로 복잡해질 수 있는 북한 문제에 개입하기보다는
당분간은 미국에서 인권운동을 하는게 어떻겠느냐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지 않고] 이곳의 이웃과 함께 있겠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항상 별 볼일 없는 일로 쫓기면서 사는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평화의 기운을 전해주고는 다시 자신의 가난한 친구들에게로 갔습니다.

성탄절 가까워 질 즈음
자기가 좋아한 책들을 부모에게 보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
자기는 아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이메일을 친척에게 보내왔을 때,
사실 우리는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탄절에 두만강을 건너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복잡한 정치외교적 문제나 종교를 둘러싼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어려운 이웃집 아이를 돌보러 가듯
그는 두만강을 건너버렸습니다.
북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북에서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난감하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우리의 조부모님은
늘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런 조부모님을 존경한 손자가 로버트였습니다.
로버트의 ‘무모한 행동’이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부모님의 뜻을 따라 늘 어려운 사람들의 벗이고자 했던
로버트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간 로버트 동훈을 사랑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정을 전합니다.

2009년 12월 31일 해를 애태우며 보내는 로버트의 친척들 씀


* 편집자의 말

이 편지는 로버트 박의 석방을 바라며 친척들이 작성한 편지의 원문이다. 이 편지는 한 언론사를 통해 일전에 공개된 바 있다.

로버트 박은 지난해 12월 25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전 세계가 북한의 현실을 주목"하게 하겠다며 북한에 들어가 억류돼 있다 43일만에 풀려났다. 그는 미국의 한 대북 인권단체에 소속돼 있었으며, 이전부터 빈민문제와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열정적으로 시민단체 활동을 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본명은 박동훈으로 민주화운동을 했던 박형규 목사의 손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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