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법을 바라보는 데리다의 시선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지난 웹진46호에서 필자는 데리다의 ‘해체’에 대한 범박한 정리를 시도하였고, 이어서 데리다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진보. 보수 각 진영이 보이는 (데리다에 대한)입장의 차이와 의심의 근거를 잠시 설명한바 있다. 이번 웹진에서는 올해 미국 대선의 최대 이슈로 등장한 이민법에 대한 데리다의 입장을 따라가면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좀 더 친근하게 놀아보기로 하자.

 

프롤로그:  2012년 미국 대선의 관전포인트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올해 대선을 치룬다.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오바마와 공화당의 룸니의 대결로 좁혀진 미 대선은 몇 가지 측면에서 보수와 진보진영 사이의 첨예한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동성애, 이민법, 그리고 의료보험 논쟁이 그것이다. 우선 지난 5월 오바마가 동성애 결혼 지지선언을 미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하여 공화당에 먼저 싸움을 걸었다. 전통적으로 대선때마다 공화당은 낙태와 동성애 이슈를 물고 들어와 보수기독교세력의 표를 결집시키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의견을 피력하던 민주당 후보의 발목을 잡아왔었다. 특별히 2004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부시와 민주당의 케리가 맞붙었을 때,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명백한 사기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소위 ‘도덕적 승리(moral victory)’를 모토로 미국 기독교 우파의 결집을 이끌어내는데 공화당이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이란 물론 낙태금지와 동성애 반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다르다. 먼저 오바마가 공화당을 상대로 공격적으로 동성애 문제에 시비를 걸었다. ‘변화와 희망’으로 상징되었던 오바마의 개혁적 이미지를 다시 곧추세우고, 다소 느슨해져버린 진보진영 표심을 회복하려는 속셈이 깔려있다는 정치평론이 등장했고,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동성애 결혼을 찬성하는(47%) 비율이 반대하는(43%) 의견보다 높게 나타나 공화당을 경악시켰다. 앞으로 남은 대선 레이스에서 공화. 민주 양당에 동성애 이슈가 어떻게 작동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동성애 이슈 못지않게 이번 미국 대선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이민법에 대한 양당의 입장이다. 지난 2012년 6월 25일 미 연방대법원은 애리조나 이민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서 수시로 국경을 넘는 멕시코 불법이민자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애리조나 주정부는 지난 2010년 재정한 이민법에서 불법이민자들에 대한 반인권적 조항을 삽입하였고, 이에 대해 오바마 행정부는 애리조나 이민단속법이 연방정부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라는 제소를 대법원에 제출한바 있다. 대법원 판결은 애리조나 이민법 가운데 문제가 되었던 4개 조항 중 3개가 위헌이라고 밝혔다. 위헌으로 판결된 3개의 조항은 다음과 같다: (1)이민자가 합법 체류신분 증명 서류를 소지하지 않을 경우 이를 범죄로 간주하는 것, (2)공공장소에서 불법체류자들의 구직행위를 불법화한 것, (3)추방 가능한 범죄가 의심되는 이민자를 경찰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한 것 등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교통법규 등 다른 위반으로 경찰의 검문을 받을 때 체류신분이 의심될 경우 합법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 제시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에 대해서는 위헌 소지가 분명치 않다는 판결을 내려 많은 이민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실제로, 대법원 판결 직후 잰 브루어 애리조나 주지사는 “경찰 검문권 조항을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다”고 밝혀 불법체류자 단속을 강하게 암시하였다. 애리조나 이민법 판결로부터 촉발된 이민법논의는 올 미국 대선을 좌우할 뜨거운 감자로 등장할 것이다. 

 

데리다의 유로 2012 관전기

 

데리다 본인은 부인할 수도 있겠으나, 현대철학의 흐름속에서 데리다는 시종일관 해체를 자기 사유의 주제로 삼았던 인물로 기록된다. 하지만, 데리다를 읽는 필자는 늘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가 뭐지?’를 놓고 계속 고민해왔다. 데리다의 저서들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뭔가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데리다 특유의 사유와 레토릭을 경험하면서, 필자는 데리다의 해체는 해체의 대상, 그리고 해체 후에 도래할 또 다른 내용에 포커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가 취하는 태도와 방법이 오히려 해체를 이해하는 중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념에 대한 신뢰와 개념은 미끈하게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필자에게 데리다는 매혹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위험한 인물이다.  
이렇듯 데리다에 대한 동경과 좌절이 마치 미친x 널뛰듯 오락가락하던 내게 얼마 전 끝난 유로 2012에서 스페인 축구팀이 선보인 ‘제로톱’ 전술은 데리다의 해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통로가 될 법도 하다. 펠레나 마라도나, 호나우도가 차지했던 센터포드 자리를 텅 비게하는 스페인의 제로톱은 기존 축구 전술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낯선 사건이었다. 센터포드 자리는 비어있는 기표이고 그 자리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기존의4-3-3이니 4-4-2니 3-5-2니 하는 축구의 전술은 수비-허리-공격을 분할한 후 나름의 입장과 역할을 전제로 한 전술이었다. 사람들은1974년 독일 월드컵때부터 등장한 요한 크루이프로 상징되는 네델란드의 토털사커가 기존의 축구전술을 뒤엎는 세계 축구계의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는 엄격히 말해 공격과 수비수간의 간격을 30-40m 내외로 유지하는 현대 압박축구의 기원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공격수와 수비수간의 경계를 허물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 유로 2012에서 선보인 스페인 축구는 <공격-허리-수비>라는 기존의 체제를 완전히 해체시켰다. 백넘버 상으로 공격수와 수비수를 구별할 수 있겠으나 수비수도 기존의 수비수 개념이 아니다. 양쪽 윙은 끊임없이 오버래핑에 가담하고, 중앙수비수들은 세트플레이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거나 제공권 확보를 위해 센터포드 위치로 이동한다. 적절한 비유가 될런지는 모르겠으나 스페인 축구팀은 마치 영화 테미네이터 II에 나오는 은색 액체 괴물로봇 T-1000 같다. 그 놈은 팔이 녹아내리면 다시 합성이 될 때 팔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되기도 하고, 머리는 계속 머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녹았다가 다시 재생될 때 손이 되거나 배 부위가 되기도 한다. 정말 괴물이다. 스페인 축구가 그렇다. 역할해체, 영역해체를 통해 스페인 축구는 세계 축구계의 괴물로 진화하고 있다. 스페인 축구가 이런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패스에 있다. 다른 세계적 수준의 팀에 비해서도 스페인 축구팀의 패스회수가 3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다. 기존의 시스템에 입각한 축구는 수비에서는 쓰리백, 포백, 공격에서는 원톱, 투톱, 허리에는 중원을 지휘하는 지단 같은 플레이 메이커 등 선수 개개인의 역할과 전술이 주어져 있었고 그것이 얼마만큼 유기적으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미리 약속된 패턴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스페인은 다르다. 수없이 이어지는 패스와 그 패스를 통해 창출되는 순간적이고 무계획적이며 불특정한 공간에 불특정한 다수가 마치 벌집에 벌들이 드나들 듯 골대 주변에서 난장을 부리다 칼침을 놓는다.
지난 웹진(56호)에서 필자는 데리다의 사유의 궤적을 언급하면서 데리다 초기를 나타내는 키워드로 산종, 대체보충, 차이 등을 지목하였고, 후기 데리다는 유령, 정의, 법, 메시아성, 환대 등의 용어가 중심을 이룬다고 했었다. 이 모두가 ‘해체’라는 강력한 원톱을 중심으로 움직일만도 한데, 정작 데리다는 본인이 해체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조차 거북하게 생각했었다. 데리다는 ‘해체가 무엇이냐?’ 는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장의논리에 입각하여 ‘산종’을 이야기 할 때도 있었고, ‘유령’을 언급할 때도 있었다. ‘차이’를 강조했다고는 하나, 어느 날에는 느닷없이 ‘법과 정의’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해체’라는 말을 가급적 자제하며, 스페인 축구로 비유하자면 ‘제로톱’ 전술을 구사하면서, 데리다는 그 비어있는 해체의 중핵을 메우려하지 않았다. 스페인 축구팀이 굳이 센터포드를 두지 않고 제로톱 전술을 구사했던 것처럼 말이다.
해체의 철학자 데리다! 하지만, 해체는 제로톱이고 공갈이다. 그 공갈은 차이, 유령, 환대, 대체보충, 산종, 정의, 메시아성 등의 이름으로 옮겨다니면서 기존 지성계의 판을 어지럽힌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렸던 것은 무엇일까? 물론, 골을 넣는 것이겠지. 그 Goal은?

 

다시, 데리다를 생각하다.

 

데리다가 시종일관 그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면서 집착했던 문제는 결국 ‘경계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경계의 문제’는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안과 밖의 문제, 즉 경계의 이편과 저편, 내부와 외부, 주체와 객체를 분할하여 이편과 내부와 주체에게 권리와 자격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종국에는 정치적/윤리적 문제로 귀착된다. 데리다는 이 경계의 조건들이 무슨 장엄하고 숭고한 원칙과 대의가 아니라, 실상은 임의적인 땜질과 봉합, 그 권위의 원천이 다분히 자의적이고 우연스러운, 그래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게다. 그러니 제발, 앵글로 색슨이나 게르만이나 유대인이라고 목에 힘주지도 말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에 산다고 거드름 피지 말라는 말이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했던 미국 애리조나 이민법 문제로 돌아가 데리다식 국가관에 대해 생각해보자. 종교개혁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중세 봉건주의는 서서히 파국을 향해 치달았고, 새롭게 등장한 시민계급은 전시대의 강제와 규율이 아닌, 자신들의 이드와 이익을 존중하고 보장해줄 새로운 형태의 통치시스템을 요청하게 된다. 근대 국가 형성에 영향을 끼친 루소의 ‘사회계약설’에 의하면, 국가는 구성원 전체가 가진 공동의 힘으로 개인의 신체와 재산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고, 개인은 국가란 이름으로 결합되나, 국가의, 국가에 대한 결속과 연대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관과는 비교가 안되는 느슨한 것이었다. 어쩌면 국가는 새롭게 분출되는 시민계급의 well-being(잘 먹고 살 사는 것)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을까? 시민계급에 의한 (중세 봉건시대와는 다른) 권력의 사회적 재전유, 그것이 바로 근대국가의 탄생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내셔널리즘이라는 담론은 근대라는 시간과 공간, 즉 담론을 규정하는 새로운 프레임을 통해 그 권위가 확립되는 것이지, 국가 자체에 무엇인가 숭고하고 고유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단군의 자손, 아리안의 후예 등 온갖 종류의 국가담론과 민족신화는 안과 밖을 대조시켜 안에 있는 나의 특권과 권리를 정당화하려고 설정된 기획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외국인 이민을 반대하거나, 불법외국인 노동자를 색출하려는 국가의 논리는 숭고한 국가질서와 전통을 전제하지만, 기실 그것은 자기의 이익에 방해가 되거나 위협을 가하는 이물질에 대한 응징 내지 박멸 그 이상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데리다는 우리 삶 도처에 세워진 기존의 경계들에 질문을 던지고 되묻는 작업을 감행한다. 우리의 습관과 관행, 우리의 익숙함과 안온함을 위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모든 코드들, 경계지어진 것들의 기원을 집요하게 캐물으며 데리다는 기존의 경계, 코드, 규칙, 법들을 해체하면서 확장한다. 그것이 바로 데리다식 정치이고 윤리이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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