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는 가라![각주:1]

: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론 소고(小考)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Intro: 메시아의 귀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메시아주의는 미래의 어느 막연한 시점에서 현실의 절망적 공간안으로 귀환하는 한 슈퍼스타를 기다리는 열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아적 대망은 현실의 고통과 환난을 견디게 하는 종교적 위안이자 미래를 대망하는 종교적 비젼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녀)의 재림으로 인해 체제의 압제로부터 비롯되는 이 땅에서의 고통과 억울함, 분노와 절망은 일거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 땅의 민중들이여,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 이제 곧 그 분이 오신다!” 이것이 메시아주의를 바라보는 범박한 정의이자 주술이라고 한다면 불손한 발언일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역사에서 전개되었던 메시아주의의 현실은 배제와 차별, 적대와 응징의 매카니즘을 양산하면서 비극적 메시아 현상학으로 나타났다. 현실의 역사가운데 전개되었던 메시아적인 열망과 환상은 그것 이외의 것들을 끊임없이 타자화시키는 배제의 매카니즘을 낳았고 폭력을 정당화시켰다. 멀게는 중세 십자군 원정과 근세에 벌어졌던 서구 열강들의 제3세계 침탈 과정에서부터 얼마 전에 있었던 미국의 이라크 전쟁으로 대변되는 ‘테러와의 전쟁’까지, 시대와 이유를 떠나서 그 이면에는 서구열강의 음모를 메시아적 환상으로 등치시키고 그것들 이외의 것은 모두 악으로 규정하는 배제의 매카니즘이 깔려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 안에 깃든 광신성을 감지했던 데리다는 ‘the meesianic without messianism’이라는 다소 과한 표현을 동원하면서 전통적 메시아주의를 향한 적대를 선언한 바 있다.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메시아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서구 메시아론의 지형에서 보면 그 위상이 꽤나 독특하다. 역사적 예수가 성취했던 유일회적 그리스도 사건을 예수라는 어느 한 슈퍼스타의 일인 무용담으로 가두지 않고, 예수와 더불어 함께 한 민중(오클로스)까지를 포함한 사건으로 취급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당대의 화석화된 메시아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까지 민중의 함성과 저항을 통해 이어지는 살아있는 메시아 사건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이유로 민중신학의 메시아론은 주체의 역동과 시대적 사명이 강조되었던 시기에 진보기독교 진영은 물론, 인문-사회과학에 몸담고 있었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당대를 해석하는 중요한 해석학적 창구 역할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광풍이 몰아친 이후 주체의 죽음이 선언되고, 시대의 요구와 당대의 원칙이 대의와 명분에서 실리와 자본으로 바뀌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민중신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진보이론들은 변두리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한 이후 지금까지 자본의 무한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2001년 9.11 테러를 통해서, 2008년 미국을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거치면서 문제점들을 하나씩 노출하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가 갖는 모순들, 즉 체제는 숨기려 하지만 감출 수 없는 틈과 균열이 더 이상 은폐가 안 되고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움츠려 있었던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변혁에 대한 꿈을 다시한번 상상하게 하고 감행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맑스의 세례를 받은 진보적 좌파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리스도교 논쟁이 근래에 핫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로 따지면 빨갱이들이 그리스도교로부터 변혁을 위한 상상을 끌어오고 있는 셈인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논의 주제가 메시아라는 점이다. 왜, 무엇 때문에 다시 메시아는 소환되는가? 이 글은 전 시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현대철학자들의 메시아 논의를 따라가면서 그것이 어떻게 신학적 상상력과 조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수고(手鼓)이다.  


서로 다른 메시아: 유대교 메시아 Vs. 개신교 메시아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유대교 메시아론과 개신교의 메시아론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이는 이후 전개되는 유대계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개신교 메시아주의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작업이다.  

    개신교의 메시아주의에는 역사적 종말과 인간의 믿음사이에 일정한 함수 관계가 있지만, 유대교 메시아주의에는 개신교의 그것과는 다르게 세상의 법칙과 하늘의 법칙, 세속적 질서와 신적 질서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구원이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 원리도 아니고, 인간 주체의 변혁을 향한 의지와 노력과도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듯 초월적 질서의 도래가 현실의 세계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대 메시아주의는 개신교 메시아 주의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개신교가 구원을 믿음에 대한 신의 응답으로 이해한다면, 유대교 사상에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구원은 전적 초월의 사건이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유대 메시아론에서 메시아는 그(녀)의 도래를 염원하는 인간의 바람, 노력, 분투와 상관없이 스스로 오는 자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갖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유대교 사상가인 발터벤야민과 자크데리다의 메시아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들의 조상, 발터 벤야민


    현대 좌파 철학자들 가운데 신학적 상상력으로부터 혁명의 기운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자크 데리다, 알랑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야곱 타베스, 슬라보예 지젝 등이 그런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들보다 앞서서 20세기 초반에 벌써 유물론적인 신학, 혹은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언급한 섹시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그들의 광기로 자행된 세계대전이 창궐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벤야민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공히 취급되는 메시아담론을 유물론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혁명을 위한 정치술로 제안하였다. 벤야민은 개신교 메시아주의에서 말하는 강한 메시아가 아니라 약한 메시아를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기념비적 논문 <역사철학테제>에 등장하는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과 연관이 있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이지리라는 기대와 지평 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벤야민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 끔하는 통로로 작용하지만 기존의 메시아론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 않다.


<역사철학테제>가 전하는 새로운 메시아

 

    벤야민은 자신의 유명한 소논문 <역사철학테제>에서 신학과‘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의 결합을 동화와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체스게임 판 앞에 터키풍의 의상을 입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인형이 앉아있다. 이 인형은 게임을 매번 승리로 이끈다. 좀 더 그림을 살펴보면 인형의 배후에는 게임의 명수인 난쟁이 곱추가 있고, 그 둘은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벤야민은 인형을 사적 유물론으로, 체스의 명수인 곱추를 신학으로 비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신학과 사적 유물론이 제휴하면 “그 누구와도 한 판 싸움을 벌일 수 있다”[각주:2]고 말이다.   

    난쟁이 곱추로 그려진 숨어 있는 신은 메시아 혹은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상상속에서 빛나는 메시아의 모습, 혹은 지난 역사에서 유토피아 건설을 가열차게 주장했던 혁명전사들의 늠늠한 모습에 비하면, 난쟁이 곱추로 묘사된 숨어 있는 신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렇듯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은 기존 메시아론과는 다른 느낌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론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한다. 전통적 유대사상에서는 현실의 압제를 풀어줄 슈퍼스타의 등장을 대망해왔는데 그(녀)에 대한 기표가 바로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누구이고, 그는 언제 등장하며, 메시아가 등장한 후에 벌어지는 사건들,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동안 전개되어왔던 주된 메시아론의 토픽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의 핵심은 기존의 메시아론의 시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벤야민에게 있어 구원의 때는 전통적인 메시아관과는 다르게 미래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사후적으로 구성되어[각주:3] 현재 시간을 충만케하는 시간[Jetztzeit]이다.[각주:4] 벤야민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이유는 이런 시간관 때문이다.앞서도 언급했듯이 벤야민의 시간의식은 전통적인 변증법과 다르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지평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변증법적 시간관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벤야민이 “희미한 메시아적 힘”과 “현재시간[Jetztzeit]”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끔 하는 통로이겠지만, 그것은 기존의 메시아관 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는 않다. 그것을 벤야민은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에로의 도약”[각주:5]이라 표현하였다.  

    어쩌면 메시아적 현실은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환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투쟁하던(는)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속에서 재생되어 사후적으로 도래하는 것 아닐까? 벤야민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런지? 이는 마치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모자이크와 같다. 수많은 조각들이 이루어져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듯, 수많은 이들의 꿈과 기억의 퍼즐로 이루어진 것이 메시아적 사건이다. 어느 천재적 화가의 단 한번의 붓질로 미래의 언젠가에 완성되는 그림이 메시아적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파편들이 모이고 자리를 잡고 쌓여서 희미했던 메시아적 힘은 마침내 사건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런 뉘앙스가 벤야민의 메시아론에 깃들어 있는 함의다.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


    자크 데리다는 벤야민의 메시아를 둘러싼 문제의식으로부터 본인 사상의 후기를 대표하는 명제인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각주:6] 을 끌어온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론이라고 할 때 그것은“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 the messianic’은 기존의 ‘메시아론을 배제한다(without messianism)’는 점에서 이채롭다.  

    우선,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은 벤야민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관부터가 종전 메시아론과 다르다. 데리다는 햄릿에 나오는 대사을 인용하면서, 메시아적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질서와‘시간이 탈구될 것(time is out of the joint)’이라고 예언하였다.[각주:7] 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변증법적 시간관과 더 나아가 변증법적 논리에 입각한 역사발전의 원리를 부정하는 입장을 데리다가 취했기 때문이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예: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예: 새하늘 새땅)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 속에서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는 낙관적 세계관이다. 그런데 데리다가 “시간은 탈구될 것”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데리다는 ‘메시아적인 것’을 언급하면서 햄릿의 대사를 인용했던 것일까?  

    데리다가 ‘메시아적인 것’을 언급하면서 ‘시간이 탈구’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메시아적인 것’이란 메시아주의로 대표되는 신학적 도그마와 교리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피안의 세계에 대한 맹목적 황홀경도 아니다.‘메시아적인 것’이란 나를 한곳에 정주하지 않게 하고 나를 체제에 순응하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인 것’이고,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 교리와 도그마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적인 것’은 역사의 계기에서 스스로를 산종하다가 메시아적 계기를 불어넣고 다시 체계에 갇히지 않고 사라지는 역사의 새로움을 겨냥한다. 전통적인 강한 메시아론이 기실 헤겔적인 변증법의 포로에 불과하다면, 데리다에게서 ‘메시아적인 것’이란 변증법을 넘어서는 진공의 상태 혹은 그 가장자리에서 변증법을 조롱하다 뒤돌아서 예측 불가능성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기표가 차연을 통해서 영원히 지연되는 의미의 껍데기만을 지속적으로 산출해내는 것처럼, 데리다에게 있어 메시아란 하나의 기표일뿐이고, 이 지점에서 일어난 ‘메시아적인 것’역시 단순히 껍데기로서 이후의 전혀 새로운 산종에 자신을 양도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꽉 찬 중심을 지향하는 강한 메시아주의(messianism)와는 다른 개념이다. 메시아주의(messianism)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확신이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던가? 이런 이유로 데리다는‘the messianic’을 그 누구도 정착할 수 없는 탈영토화된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적인 것’을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둔 이유는 보다 더 정치적 속셈이 있다. 텅 빈 기표로서 ‘메시아적인 것’이 현재의 지배적인 시스템속에서 틈과 균열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고, 그 틈과 균열을 통해 도래하는 사건과 희망을 예감하고 전망하자는 취지다. 이 대목에서 ‘메시아적인 것’은 위험한 정치적, 윤리적 상상으로 전환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메시아적인 것'의 정치학, 혹은 윤리학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입장과 생각이 다른 타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억압된 욕망을 건강하게 승화시키는 일은 우리시대 중요한 과제다. 특별히 차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간격을 유지한 채 나이스하게 서로의 다름을 넉넉히 바라볼 줄 아는 미덕,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이 광명한 글로벌하고도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살아가는 명법이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법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왜곡하고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식자들에 의해 의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별히 맑스주의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이런 비판은 드세었는데, 그 중에서도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수평적 다양성이 혁명에 이르는 수직적 적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 지적하였다. 한마디로 사이비 저항을 멈추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대표적 학자로 지목되었고,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되었다. <맑스의 유령들> 출판이후에 이런 오해들이 다소나마 풀리기는 했지만, 데리다를 향한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는 다소 곡해가 있다. 데리다의 차연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차이 자체에는 방점이 없다. 차연은 엄격히 말해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은 불확정성, 비대칭성, 비등가성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데리다는 후에 ‘차연’을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라는 용어로 정치-신학화 하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메시아주의에 대한 대항담론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성되고, 그 자본의 법칙만이 유일한 정언명법이 되어버린 이 세계속에서 ‘메시아주의’가 아닌 ‘메시아적인 것’을 유포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일까?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이 견고한 텍스트에 차이를 발생시켜 균열을 내고, 주름을 만들고, 틈을 내고, 그래서 이 시스템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메시아적인 것’ 안에 담긴 정치적 음모가 아닐까? 그리하여 체제로 하여금 불순세력에 의한 공작이 이 사회속 어딘가에서 획책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고, 뭔가 상스럽지 못한 기운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이고, 거리에선‘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주문이 환청이 되어 들리면서, 이 사회가 결코 안정적이지 않음을 유포시키는 것! 그것이 데리다의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 안에 깃들어있는 정치적 음모이고 윤리적 강령이라 한다면?  

   그러므로,‘메시아적인 것’은 신에 대한 경외를 암시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고백과 성찰에서 기인한 말도 아니다. 오히려 신은 텅 빈 기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초월적 메시아가 스스로를 비워 이 땅으로 하강하는 힘이다. 그런 면에서 신은 충만과 충족의 신이라기보다는 결핍과 잉여로서의 신이다. 텅 비어 있는 신 자체를 세계에 집어넣음으로써, 구멍 자체인 신을 기입함으로 세계는, 그리고 상징적 질서인 세계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그것이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이 노리는 계략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혁명은 다시 사유되고 시작된다.  


ⓒ 웹진 <제3시대>



  1. 본고는 에큐메니안에 기고한 기사 '메시아는 가라!'의 원고입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87 [본문으로]
  2. Walter Benjamin,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253. [본문으로]
  3. 벤야민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 세대와 현 세대 사이에 비밀스런 협약이 있다. Our coming(구원을 상징?)이 지구상에서 기대되어 진다. 우리 앞을 살았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희미한(약한) 메시아적 힘이 부여되었다. 과거는 그 힘을 요구할 수 있다.”-Ibid., 254. [본문으로]
  4. “역사는 특정한 구조물의 대상인데, 그 구조물의 자리는 단일하고(동일하고)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Jetztzeit(the presence of the now)에 의해 충만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고대 로마는 지금의 시간에 의해 충전된 과거였다... 프랑스 혁명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간주하였다.”-Ibid., 261. [본문으로]
  5. Ibid., 261. [본문으로]
  6.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by Anidjar (N.Y:Routledge, 2002), 56. [본문으로]
  7.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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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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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를 쓰는 수도사
    2016.08.24 20:4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의미있고 재미있는 설명과 해석입니다. 발터 벤야빈과 자크 데리다의 차이는 시대적 배경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교가 사회적 체제로서 자리잡은 유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신, 하나님은 진작부터 공기같은 존재로 여겨졌지요. 때문에 저는 메시아론을 검토함에 있어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개신교의 차이라고만 규정하기에 뭔가 부족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그런 차이는 구태여 구분하자면 묵시론과 종말론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뭐 어쨌거나 벤야민이나 데리다나 인격적인 또는 외부에서 진입하는 메시아론에는 반대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요, 오늘날 금융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개신교와 같이 걷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는지요? 이른바 메시아닉 유태인들 messianic jews 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적어도 미국에서 이를테면 성서고고학 등의 분야에서 개신교와 공조해왔다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벤야민이나 데리다가 이런 현실을 직시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메시아적 틈새가 과연 어떤 동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개신교의 메시아론이 특별하다고 보십니까? 님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의 메시아는 정치적 함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집단적 기대치라고 말할 수 있고요, 개신교의 메시아론은 도리어 정치적 개념을 탈각시킨 그럼으로써 현실에 대한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대치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집단과 개인 양자를 모두 포괄합니다. 예수가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아를 거부한 것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메시아는 현존하는 모든 인간의 질서 즉 지배를 추구하는 체제에 반하는 하나님의 질서를 이 지구에 항존적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그게 완성되는 시점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파국이지요. 그때까지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되고, 인간의 행위도 계속되겠지요.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로 가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는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가 복잡해지겠지요.

    메시아에 대한 전제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최종국에 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 전체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는 메시아의 나라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오는 그 나라는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이 틀린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론이 틀린 것입니다.

 

실종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 때에는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들의 조상이 살던 땅에서 그들이 살게 될 것이다. 그 땅에서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서 살 것이며,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될 것이다.
―「에스겔서」 37,25

 

실패한 체제 이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바벨로니아에 의해 강제 유배된 이주민 집단들 내부에서 복잡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제국의 끝이 임박했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되자 이런 논쟁은 폭발적으로 활기를 띱니다. 그리고 많은 대중은 다분히 메시아주의에 들떠 있었습니다. 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은 메시아적 열망을 부추기며 자기들의 미래 기획 속에 저들 대중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과거의 인물 에스겔의 상징성을 추종하는 사제집단들도 당대의 주요 정파였는데, 이들이 추구하는 미래 기획의 핵심은 군주 중심의 체제를 사제 중심의 체제로 대체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사제들의 공간(안뜰)과 평신도의 공간(바깥뜰)을 이분화하고 전자는 사제들이, 그리고 후자는 사제들의 지휘를 받는 레위인들이 주축이 되어 사제 중심적 질서를 이룩하면 야훼의 영광(카보드)이 성전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주장이지요.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회는 진정 회생하게 된다고 그들을 믿었습니다.
이 야훼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로 귀환하는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그리는 묵시적 상상이 「에스겔서」 37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난 고난의 역사 속에서 죽어갔던 동족들, 아무렇게나 흩어져버린 그네들의 뼈들이 되살아나고 그 속에 생기가 들어가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유다국과 이스라엘국 백성이 하나가 되고 한 위대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위대한 족속이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한데 그 통치자는 다름 아닌 유다국의 군주 다윗입니다. 다윗의 통치 아래서 야훼의 백성이 다시는 쫓겨나지 않고 영원히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요.
한데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사제 중심의 성전체제가 미래 기획의 핵심인데, 그렇게 되면 군주인 다윗이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가 이룩될 거라고 합니다. 에스겔 정파가 그리는 사제 중심의 미래 기획은 군주체제의 실패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얘기인 듯하지만, 실은 미래의 시나리오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미래에 귀향해서 구축할 사회가 다시 군주 중심의 체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유다국의 몰락은 군주체제의 실패이고, 하여 군주체제는 청산의 대상입니다. 하여 그들은 새 체제로의 정치개혁을 주장했고, 그 중심에는 군주가 아니라 사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순적인 얘기가 하나로 엮이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텍스트가 두 부류에 대한 포용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왕당파에 대한 포용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대중입니다. 왜냐면 영원히 다스릴 군주가 다름 아닌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중이 다윗이 미래에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메시아니즘’이 바벨로니아 제국 말기에 유대계 유배민 대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자 대중을 정치화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제 중심의 미래 기획이 실현될 때, 왕당파는 과연 이익이 있을까요? 그리고 대중에게도 이익이 있을까요? 상상하자면 왕당파는 사제 중심의 세력 재편과정에서 이익 분점 세력이 될 것입니다. 그 분할 점이 어디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왕당파가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협상할 수 있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중의 경우는 영락없이 토사구팽(兎死狗烹)될 운명입니다. 곧 권력재편이 이뤄지면 단순한 피통치자로 전락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대중은 협상할 자신들의 이해를 제도적 언술로 명료히 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개 대중들이 품고 있는 언어는 열망의 언어이지 제도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빼앗기지도 쫓겨나지도 않으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자자손손 지키며 사는 권리 같은 식입니다. 
제도의 언어가 아닌 언어들은 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제도의 언어로 번안되어야 합니다. 가끔은 대중을 포섭하는 단계에서 번안 작업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최근 대선정국에서 각 대선후보 캠프에서 이구동성으로 제시하는 경제민주화론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한데 에스겔을 추종하는 사제세력들은 아직 번안하지 않고 단지 ‘조상이 살던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모호한 말만 하고 있습니다. 가령 ‘희년제도’를 도입하겠다든지, 과거 요시아 정부처럼 지주들에 의한 착취와 착복을 억제하는 각종 제도를 시행한다든지 하는 제도의 언어가 원론적인 열망의 언어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호한 언어들은 제도로 실행되지 않고 ‘약속’으로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유신체제가 모호하게 약속했던 많은 것들이 끝내 바람으로만 남겨졌던 것처럼 제도의 형태로 정착시켜야 하는 부담이 덜한 약속들을 짊어질 만큼 여유 있는 체제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열망의 언어가 메시아주의적 성격을 띨 경우 더욱 그러합니다. 메시아주의적 언어는 최대주의적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고강도의 열망을 외치면서 도래할 가상의 성취감에 몰입되어 있는 이들은 이 성취감만으로도 행복감에 충만히 젖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러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 감당해야 할 과제가 주어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것에 열정적으로 몰입합니다. 이 몰입 과정은 그이들을 정체 모를 희열에 젖게 합니다. 게다가 그 과제가 누군가를 증오하는 일인 경우 그 쾌감어린 열기는 불꽃을 일으키곤 합니다.
이쯤 되면 메시아주의적 열망에 젖은 대중은 길을 잃습니다. 자기들의 열망이 어느 것인지 되돌아볼 여유 없이 메시아주의를 충동질하는 이들이 제시한 과제에 맹렬하게 몰입합니다. 그리고 그 충동질한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곧 메시아주의적 열망이 성공한 권력에 흡수되었을 때, 대중의 그 열망은 흐지부지되어 지리멸렬해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리고 메시아주의는 실종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이익 분점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단지 피지배자가 될 뿐입니다.
에스겔을 추종하는 사제집단이 대중을 그렇게 배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본문은 그렇게 메시아주의에 열광하는 대중을 선동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염원했던 것과 같은 사제 중심적 체제가 몇 세기 후에 실제로 구축되었습니다. 하지만 실현된 사제 중심적 체제가 에스겔을 추종하는 사제집단의 직접적 후예들은 아닙니다. 다만 그이들의 신학을 후대의 체제는 적극 활용했습니다. 한데 이 체제에서 대중은 아무런 이익 분점의 주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세 명의 유력후보들은 예외 없이 경제민주화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알다시피, 지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무수히 많은 대중을 몰락하게 했고, 대부분의 대중으로 하여금 잠재적 몰락자가 되게 했던 것 때문입니다.
대중은 심각한 고통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올 대안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안 부재의 상황에서 대중사회에는 메시아주의가 폭넓게 확산되어 있습니다. 특히 세 명의 유력 후보 중 둘은 그러한 대중적 메시아주의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박정희 메시아주의와 노무현 메시아주의 말입니다. 또 안철수도 유사메시아주의 혹은 원초적 메시아주의라고 할 수 있는 ‘팬덤’ 현상의 주역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대중은 절망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이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세 명의 대선후보들은 이런 메시아주의적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경제민주화에 관한 한, 안 캠프와 문 캠프는 ‘잘 준비되었는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제도의 언어로 번안하려는 데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그것은 집권 이후 어떻게 해서든 실행에 옮겨야 하는 부담을 짊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데 박 캠프는 모호한 원칙적인 말만 되풀이합니다. 더욱이 그런 대중을 향해 박 캠프는 NLL논란 같은 논거 없는 북풍에 대중을 동원합니다. 어쩌면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메시아주의적 대중은 벌써 그이들이 고통 속에서 품어온 메시아주의적 열망을 실종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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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취지_
대선 정국을 해석하는 담론들이 난무한다. 이 글 또한 그러한 해석의 하나다. 특히 이 글은 대선을 둘러싼 최근의 열정을 감정의 차원에서 묻는다. 그 중에서도 종교적 감성을 다룬다. 즉 대선을 ‘의도의 정치’의 차원에서 살피는 게 아니라, ‘종교적 감성의 정치’의 차원에서 묻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박정희 담론과 노무현 담론에서 메시아 정치적 차원을 읽어내고, 그 각각의 특징들을 해석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왜 오늘의 대중은 메시아 정치를 열망하는가의 문제다. 그 속에서 한국의 근대를 대중이 어떻게 체감하고 있고, 그것이 왜 종교적 열정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묻는다. 또한 그 열정이 각기 다른 두 개의 메시아주의적 욕망으로 정치화되고 있는 메커니즘을 살피고, 그것의 문제점을 해석하고자 한다.

발표자_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일시_ 2012.10.29.(월) 7:00~9:30

장소_ 안병무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과 2번 출구. 두 출구 사이 골목 50미터, 좌측 건물의 1층)
문의_ 02-363-9190, 010-4944-2019(정용택 연구원), 010-3043-5058(유승태 연구원), 3era@daum.net
참가비_ 3천원(자료집)


※ 참석자들은 이 글이 수록된 책 『당신들의 대통령. 선출된 왕과 민주주의 그 이후』(지은이: 김상봉, 이택광 외/ 펴낸이: 문주/ 발행일 2012.10.11)을 현장에서 할인가격에 구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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