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묵시록 13 : 자본주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21세기 초반 묵시록 담론의 중심에 자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은 자본주의 묵시록에 의해 대체되었다. 냉전 체제가 붕괴한 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세상의 몰락을 읽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경쟁 속에서 자연과 생태계는 파괴되어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믿음과 세상이 망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을 것이란 자괴적인 인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 자본주의 소비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동원된 반생명적인 기술의 대가는 신체의 질병과 인류가 쌓아 올린 가치의 파괴로 나타났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욕망과 소비의 주체로 만들었다. 이전의 도덕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 이해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인간 이해로 대체되었다. 인간은 경쟁의 상황 속에서 가장 인간적일 수 있고, 세상은 도덕적인 인식이 아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모여도 건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자원으로 전락한 자연은 균형을 잃고 결국 재난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망치고 있고 결국에는 몰락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진단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세상의 파괴와 종말의 묵시록으로 이해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에 의해 디스토피아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 개념이 좀비다. 좀비는 무기력하게 죽음과 삶 사이를 배회하면서, 반죽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살을 뜯어 먹어야 한다. 결코 이길 수 없는 경쟁의 서바이벌 게임을 하도록 강요받고 사는 현대인들은 좀비에서 그들의 아바타를 찾았다. 인간적인 세상은 이미 끝났고, 마지막 세상에서 생존해 있기 위해서 모든 가치의 종말과 패배를 인정하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떠도는 모습이다. 그 상태에서도 유지되는 생각 없는 생산과 소비는 자본주의가 원하는 세상을 완성하고 있다. 인류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좀비 영화들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 인문학의 공통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미국문화의 저변에 묵시록적인 종말론이 흐른다면 미국의 자본주의는 그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실제로 자본주의를 미국의 정신으로 인정하고 미국이 없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상상할 수도 없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종말론을 연결할 수는 없을까?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유명한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추론을 해보자. 베버는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그의 책에서 다뤘지만, 거기서 묵시록의 근거도 찾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에게 미국은 청교도의 나라였고, 그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다면 어떤 종교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베버는 그 이유를 청교도들의 신학 즉 칼빈주의의 예정론에서 찾았다. 구원은 신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예정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저주의 대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상태는 두렵고도 외로운 번민의 상태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의 삶은 외부에서 보기에도 달라야 했다. 그들은 신의 부름을 받아 세상으로 왔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의무를 다하고 충실한 삶을 사는 게 하늘에 합당한 선민의 삶이었다. 베버에 의하면 그런 삶은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모든 맡겨진 일에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임하는 자세를 요구했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일상의 생활에서 성실하고 자신감 있게 산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베버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생각해보자. 베버는 청교도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의식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런 모습이 선택받은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 했지만, 청교도들의 소명의식 중에 세상의 마지막 날을 준비할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한다는 종말론적인 사명을 간과했다. 세상의 사람들과 구분되어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은 그 자체로 종말의 사건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을 신에게 선택된 사람에게 합당한 성실과 열성을 다해 살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만약 베버의 말대로 청교도들의 소명의식이 자본주의 정신의 조건이었다면 그들의 삶은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하는 종말론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적인 삶은 종말의 과도기적인 삶이었고 곧 사라질 시대를 사는 방식이었다는 추론도 제기해볼 수 있다. 그 방식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세계관을 도입해 불필요한 생각과 활동을 제한하고 단순한 삶의 추구를 의미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서구의 기독교 문화 속에서 등장할 수 있었을까 묻는 것은 그 문제가 더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지금도 가치 있는 질문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정신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자본주의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19세기에 자본주의의 탐욕이 아닌 정신을 얘기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베버와 같은 학자의 영향과 자본주의가 체질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모순된 가치라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베버 자신은 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가치가 중세에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탐욕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베버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청교도들이 자본 친화적인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했던 세계관을 칼빈주의의 예정론에서 찾았지만, 그 연결고리가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돈을 벌고 재물을 축적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고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와는 큰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재물을 쌓아두는 행위 그 자체를 죄악이라 생각했던 종교문화 속에서 자본주의가 등장했다고 믿기 위해서는 큰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고 이를 베버는 잘 알고 있었다. 베버에게 그런 발상의 전환을 체득하여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한 인물이 벤자민 프랭클인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부자가 되는 법>은 그가 살아있던 18세기에 이미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자였다. 그는 지금도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미국인으로 손꼽힌다. 베버는 프랭클린을 청교도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묶어낸 인물로 설정하면서 그의 근면 정신과 시간 이해에 주목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또는 ‘시간은 금이다’와 같은 프랭클린을 통해 알려진 격언들에 그의 인생철학이 담겨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의 핵심은 그의 시간관이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은 언제나 짧다. 시간을 잘 시켜라. 쉬고 싶으면 시간을 잘 써라.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을 수 없다. 시간을 낭비하는 건 인생을 헛사는 길이다. 프랭클린은 청교도의 후예였지만 교회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신 중심의 생활보다는 합리적이고 정직하고 근면한 생활을 더 강조했다. 그의 생각은 매사에 신의 뜻을 찾지 않아도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행위 그 자체에 도덕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재물이 목적이 될 수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 도덕성을 부여하게 된 것은 큰 발상의 전환이었다 할 수 있다. 프랭클린에게서 종말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자본주의 정신이 청교도의 윤리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세속화된 것이라면, 돈과 시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즉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아까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짧아서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등식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론에 불과하지만, 개인의 종말 또는 시대의 종말 앞에서 재물의 있고 없음이 중요하지 않다면 프랭클린에게 자본의 도덕성은 과도기적이거나 마지막 시대의 현상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만약 청교도들이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를 닦았고 또 그들의 삶의 형태가 종말론적인 것이었다면, 청교도들은 그들의 삶, 즉 자본주의적인 삶을 종말론적인 것이라 보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런 생각이 가능하다면 청교도들은 이미 자본주의 종말론 또는 종말의 자본주의를 예견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종말론의 차원에서 이해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내적인 모순으로 인한 과잉생산으로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그 잔재 위에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적인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는 맑스주의의 진단이다. 여기서 종말론은 자본주의가 망해야 천년왕국과 같은 역사의 완성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역사의 구조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가 이 세상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현대 인문학의 진단이다. 맑스주의는 미국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이 예언한 자본주의의 종말과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은 미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 이유를 자본주의가 이미 미국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반대를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자본주의가 미국에서 그만큼 용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청교도 시대부터 현재까지 흐르는 미국의 종말론적인 사상 때문일 가능성이다. 그리스도가 지배할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 혹은 곧 닥칠 환란과 휴거에 대한 기대 때문에 자본주의의 탐욕을 마지막 날의 현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도적 제한을 두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자유를 실천하는 이념이라는 공식이 성립한 후에는 자본에 대한 규제는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자본주의의 ‘자유’를 다가올 천년왕국의 가치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본주의에서 다가올 천년왕국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과 자본주의가 세상을 재난과 파괴의 종말로 이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중립적인 입장은 있을 수 없다.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미국의 제도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가 ‘자유’를 지향하는 시스템으로 포장되어 홍보된 역사가 있다. 자유는 원래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들에 의해 기독교의 본질로 그리고 미국정신의 근거로 뿌리내린 개념이었다. 지금도 자유는 미국을 의미하고 대변하는 개념으로 인정받고 있고, 미국은 곧 자유라는 관념의 등식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자유를 표방하는 개념으로 포장되지 않으면 미국에서 수용될 수 없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미국에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이 주류의 시민 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미국의 정신인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최고의 정치와 경제의 제도가 바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논리가 펴졌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가 미국의 신앙으로 변하게 되기까지 오랜 홍보와 선전의 역사가 있었다. 미국에서 ‘기업’이라는 영리를 위한 조직이 19세기에는 법적인 사람의 권리를 갖게 되고, 자유의 주체가 되고, 20세기에는 무소불위의 통제되지 않는 권력으로 부각되는 역사다. 시장의 자유가 그 어떤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자유이고, 시장의 자유를 못 믿는 사람은 자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밀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1960년대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미국의 자유를 자본의 자유와 동일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시장의 자유를 종교적 양심의 자유로 또 미국의 정신으로 승화시킨 건 신자유주의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행태가 용인되어온 미국의 역사 저변에 자본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미국정신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묵시록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픽션이나 실존의 갈등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다.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묵시록의 힘은 어떤 실제적인 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공상과학이란 장르가 묵시록의 테마들을 차용했다고 해서 묵시록이 공상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묵시록에 대한 신뢰가 남다른 미국 보수 기독교인들은 지구온난화의 현상을 믿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종말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선과 악, 재림과 부활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자본주의라는 인간 제도의 남용과 같은 하찮은 이유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온난화의 과학적인 근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미국엔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학적인 사고를 우선시하던 사람들은 묵시록의 종말론을 추종하던 이들을 광신적인 종교에 빠져있고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류가 묵시록의 종말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묵시록을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존적인 픽션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의 묵시록은 급박한 종말의식을 종교적 세계관에서 상식과 과학의 세계관 일부로 만들었다. 냉전 이후에 등장한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는 묵시록의 전환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은 핵무기를 소유한 소수의 국가들에 세상의 운명을 맡기고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불공평한 세상의 현실을 반영했지만, 세계화 시대의 환경재난의 묵시록은 모든 인간을 공범으로 만들어 자본주의 묵시록을 보편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묵시록은 멸망의 묵시록이고 이 시대 유일한 보편적인 담론이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미국의 묵시록 10 : 1950년대 핵폭탄 시대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20세기의 가장 큰 묵시록 사건은 히로시마의 핵폭탄이었다. 서양에선 오랜 시간 신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꾸어 왔지만, 그 능력이 세상을 끝낼 수 있는 힘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히로시마의 핵폭탄 이후 전개된 역사는 세상이 곧 파괴된다는 묵시록의 드라마였다. 냉전이라고도 불렸던 이 드라마는 세상의 종말을 전제로 한,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끝을 공포 속에서 기다려야만 하는 오랜 전쟁이었다. 지금은 희미해진 기억일 수 있으나, 80년대 후반 냉전체제가 와해될 때까지의 역사는 핵폭탄의 묵시록과 씨름하는 시간이었다. 일상의 삶에서 학문과 예술까지 그 묵시록의 그림자는 길고도 뚜렷했다. 미국은 당연히 그 드라마의 주역이었다. 서구역사에서 세상의 끝은 한때 공포의 전쟁과 지옥의 불꽃으로 형상화 되었지만, 핵폭탄은 그 드라마의 끝이 인간이 만든 과학에 있음을 예고했다. 1945년 이후 1950년대 후반까지 미국에서 핵폭탄의 묵시록 시대의 본질을 또 그 시대를 견디고 살아나가는 방식을 예술로 표현한 세 사람이 있다. 비밥(Bebop)재즈의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추상표현주의의 잭슨 폴락(Jackson Pollack), 그리고 비트세대 문학의 잭 케루악(Jack Kerouac)이었다. 


    그들의 작품세계에서 묵시록을 읽는 건 이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파커와 폴락과 케루악이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예술작업을 했고 그들의 장르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이뤄냈다는 사실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이 공유했던 공통적인 가치는 아마도 지금(Now)이라는 순간과 즉흥성이라는 자세의 중요함일 것이다. 시간이 미래에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쌓여있는 게 아니고 다만 지금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직관적 판단을 그들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비트세대의 ‘비트’(Beat)는 여기서 그 순간의 시간이었고, 폴락의 드립페인팅의 드립(Drip)은 붓이 움직이는 시간의 흐름을 부정했다. 폴락과 케루악은 그런 시간과 종말의 동기의식을 재즈에서 찾았다. 특히 케루악과 비트세대의 작가들에게 비밥은 그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길 위에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선 그 책에서 재즈의 리듬을 찾아야 한다. 1947년 뉴욕에서 버스로 길을 떠나 도착한 곳은 당시 재즈의 블루스로 유명했던 시카고였다. 케루악은 서부로 출발하기 전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들은 비밥 재즈의 ‘빛의 소리’는 그의 여정을 위한 축도와도 같았다. 케루악은 찰리 파커에 대한 시를 썼을 정도로 그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고, 자신의 글쓰기 이론을 재즈와 비교해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글쓰기는 비밥의 즉흥적 창의성을 모방한 것이다. 비밥의 독주가들이 누린 시간과 호흡의 자유를 글에서 표현하고자 했고, 색소폰을 불듯이 이미지를 글로 묘사하기 원했다. 케루악은 또 자신의 글이 수정하지 않고, 쉬지도 않고 써내려간 즉흥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남기려 했다. 따라서 케루악 책의 이런 부분을 망각하면 남는 건 피상적이고 밋밋한 글읽기뿐이다. 코폴라 감독이 20년 넘게 그 책을 영화로 제작하려 했지만 실패했던 이유는 케루악의 글의 리듬감을 영상으로 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 사실은 실제 영화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폴락 역시도 밤낮으로 재즈를 들을 만큼 심취해 있었다. 그 시대의 재즈음악을 자신의 미술처럼 예외적이고 창의적인 예술이라 생각했다. 잭슨 폴락이 물감을 캔버스에 떨어트려 남긴 점들과 불규칙적인 선은 즉흥적인 재즈의 선율이었다. 그 선율의 시간은 이어지지 않는 시간, 지금밖에 기약할 수 없는 시간 이었다. 폴락은 자신의 작품을 핵폭탄 시대의 미술로 이해했었고, 그 이해는 음악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남겼다. 


잭슨 폴락 (1912~1956)


    폴락은 케루악이 길을 나섰던 1947년 드립페인팅의 실험을 시작했고, 케루악의 책은 폴락이 사망한 다음 해였던 1957년에 출간됐다. 1947년이라는 해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냉전이라는 묵시록의 드라마가 시작하던 시기였고, 그들의 새로운 실험은 그 묵시록에 적응하고 또 저항하려는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에서 우연이 아닌 필연의 가능성을 읽게 만든다. 1947년은 또 시카고의 과학자들이 Doomsday Clock(지구종말시계)라는 걸 만들어 핵폭탄의 위기로 세상이 종말에 얼마나 가까이 와있는지를 측정하기 시작한 해였다. 2016년 12월 말, 그 시계는 종말 3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종말시계는 냉전시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묵시록의 시간을 살고 있음을 망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폴락은 1950년 한 인터뷰에서 그 시대의 화가가 과거의 방식으로 핵폭탄의 시대를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기법을 필요로 한다는 말로 자신의 드립페인팅(Drip Painting)의 방식을 옹호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핵폭탄의 시대를 어떻게 드러냈는지 파악하려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볼 근거가 없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핵폭탄 투하로 잿더미가 된 히로시마의 도심을 공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폴락의 작품을 떠올리는 것은 착시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보인다. 그의 드립페인팅에서 무엇을 보았다고 말해야 할까. 그의 작품에서 갈기갈기 찢겨져 어떤 분별력도 허락하지 않는 황폐한 공간을 읽을 수 있지만, 거기서 서예의 선율을 읽는 사람도 있다. 폴락이 1947년에 완성한 드립페인팅의 초기 작품의 제목은 “Full Fathom Five(다섯 길 바닷속)”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등장하는 대사의 일부다. 풍랑으로 좌초한 배에서 익사한 아버지가 다섯 길 다닷속에 누워있고, 그 뼈는 산호로 변하고, 눈은 진주가 되어버린 처참한 광경을 묘사하는 대사다. <템페스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유토피아와 종말론에 대한 상상력이 뚜렷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신대륙 발견이 제공한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과 17세기 유럽의 종교와 정치가 영국에서 거대한 묵시록의 서사로 발전했던 역사가 그 배경에 있었다. 서양에 근대라는 시대를 열게 해준 이념은 유토피아와 묵시록이라는 뿌리가 같은 상상력이었다. 폴락이 그의 작품에 그런 제목을 붙인 이유가 건 <템페스트>의 묵시록 때문인지 아니면 작품 속에 바닷속 심연의 묵시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해석의 여지만 남길 뿐 명확하지는 않다.



(Full Fathom Five, 1947)


    폴락은 기존 회화의 캔버스보다 훨씬 큰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펼쳐놓고 그 위에서 물감을 떨어트렸다. 눈높이의 이젤에 걸쳐진 캔버스에 붓을 든 손을 움직여 그린 그림과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눈높이에서 손을 내밀어 맺는 관계가 개인적인 친밀감을 나타낸다면,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서 맺는 관계는 전체적이고 지배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넓은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폴락 자신도 그림의 일부가 되어 물감이 묻은 발자국을 남기는 일도 있었다. 그의 드립페인팅에서 어떤 묵시록을 읽는다면 무리일까. 물감을 공중에서 떨어트리는 과정이 폭탄을 공중에서 투하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고, 완성된 작품이 폭탄처럼 투하된 물감의 방울들이 퍼지고 번져서 만들어진, 어떤 의미도 용납하지 않는 무엇이라는 사실에서 묵시록의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는 상상이다. 화가가 그림 안에 있어야 했다는 사실은 캔버스가 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헤어 나올 수 없고 객관적인 시각이나 관계가 불가능한 혼돈의 상태 그리고 파괴되고 분열된 전체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그런 형태를 뜻하는 용어는 사구사상에서 묵시록밖에 없다. 폴락에게 드립페인팅의 의미는 핵무기 시대 미술의 도구가 될 수 없었던 이젤과 붓의 죽음 위에 서서 그가 제공한 묵시록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폴락의 드립페인팅에서 묵시록을 읽은 사람이 있다. 당시 유명한 미술비평가 헤롤드 로즌버그(Harold Rosenberg)였다. 폴락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을 ‘묵시록적인 벽지’(Apocalyptic Wallpaper)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그 후 이 표현에 주목한 사람들은 ‘묵시록’보단 ‘벽지’쪽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실제 두 단어의 의미를 함께 살린다면 폴락에 대한 상당히 재미있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Number 1 - Lavender Mist, 1950)


    <벽지란 무엇인가? 19세기 벽지가 상업적으로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이후 벽지는 자체적인 존재감이 없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어떤 평론가가 누군가의 작품을 벽지에 비교한다면 그 내적인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앤디 워홀이 한때 벽지를 순수한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했지만, 팝아트의 입장에서 그런 작업을 했다는 것 자체가 벽지의 낮은 위상을 반증해 주는 것이었다. 폴락의 드립페인팅을 벽지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설명할 수 있는 의미를 찾기도 힘들고, 어디가 중심이고 무엇이 주제인지 파악하기 힘든 추상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다는 한 평론가의 비판을 폴락은 오히려 자신의 의도를 간파한 찬사라 여겼다. 중심이 없고 시작과 끝이 모호한 작품을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준비된 배경에 불과하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로즌버그의 평가도 전문적이었지만 비슷했다. 폴락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품엔 긴장감이 없고 작가들이 만들어낸 캔버스의 세계에 만족하면서 결국은 그들의 예술성을 소멸시키는 자기부정으로 빠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로즌버그는 왜 그런 벽지가 묵시록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폴락의 작품이 분열과 파괴된 상태를 연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하지 않았다. 실제 폴락의 묵시록은 그 작품의 벽지성과 연결되어 있다. 벽지의 그림은 한 장으로 끝나지 않고, 그 중심이 한 가운데 위치해 있지도 않다. 벽지는 한 장씩 연결되어 공간의 전체, 그 세상을 다 채워야 제 역할을 하게 된다. 폴락의 벽지엔 시작도 끝도 구분할 수 없는, 분열되고 파괴된 세상이 존재한다. 한때 폴락은 한쪽 벽에 자신의 작품을 두고 대형 거울로 반사시켜 그림으로 공간 전체를 채우는 실험을 했었다. 자신이 의도했던 핵폭탄 시대의 미술이 그의 드립페인팅이었고, 그 기법을 통해 빠져나올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는 세상의 전체적인 파괴와 몰락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보는 사람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한 게 아니라 묵시록의 벽지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는 요청이었다. 그의 드립페인팅이 삼차원적인 깊이를 추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묵시록의 붕괴된 공간은 세상과 사물의 삼차원적인 특징을 상실한 곳이기 때문이다. 로즌버그는 그의 명성에 어울리는 직감적 통찰력으로 그런 그림을 묵시록의 벽지라 부른 것이다.


    핵폭탄의 묵시록이 지배하던 냉전시대 초기에 치열했던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시각적 경쟁을 포함했다. 핵폭탄 실험 직후 하늘까지 치솟아 오르는 죽음의 버섯구름을 찍은 사진은 즉각 공개되어 환상과 공포의 분위기를 경쟁하듯 키워나갔다. 폭탄은 히로시마에서 이미 터졌고, 묵시록은 더 이상 미래형 종말론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핵폭탄 실험을 기록한 사진들은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묵시록의 드라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이런 묵시록의 이미지가 냉전의 도구이자 무기였다면, 폴락의 미술작품도 그런 시각에서 볼 수는 없을까?

    냉전시대 미국정부가 미국의 우월성을 알리기 위해 문화예술계를 전략적으로 지원해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미키마우스에서 뮤지컬까지 미국의 대중문화가 전 세계가 갈망하고 향유하는 자본의 보편적인 문화가 되기까지 CIA와 같은 기관의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비밀은 아니었지만, 그 구체적인 정황은 냉전시대의 기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잭슨 폴락의 추상표현주의까지도 그런 전략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폴락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부각시키는데 미국정부의 비밀스런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이 사실은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적인 미술로 홍보되고 부각되는 과정과 냉전체제의 치열했던 경쟁의 단면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상식과 실용을 중요시 했던 미국사회에서 20세기 초반 유럽의 추상적인 예술은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다. 폴락의 드립페인팅은 미국 회화의 전통이 아닌 유럽의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 미국적이라 할 만한 특별한 내용은 없었고, 그가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가로 부각되는 과정도 불분명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이념전쟁이라는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해지는 면이 있다. 추상표현주의는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맛서는 자유진영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소련의 리얼리즘이 통속적이고, 소재의 제한이 많았고, 사회주의 이념의 통제를 받는데 반해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미국의 예술은 표현의 자유와 작가의 자율성이 자본주의의 속성 안에서 절대적으로 보장받는 예술이라는 논리였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자유’였다. 미국에는 자유가 있고 소련에는 통제가 있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CIA에선 당시 극단적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던 추상표현주의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폴락의 그림이 미국의 실용적 진취성과는 거리가 먼 유럽의 데카당스와 허무주의를 대변한다는 비판이 있었어도 ‘자유’라는 깃발 아래 미국적인 것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이런 전략 아래 폴락은 미국적인 작가가 되어야 했다. 언제부턴가는 폴락에 대한 설명으로 ‘와이오밍 주 출신의 카우보이’란 수식어가 붙어 다니며 그를 시골 출신의 토속적인 미국작가로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의 작품의 크기를 미국서부의 거대하고 광활한 공간을 재현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여기서 새로운 질문을 해보자. 폴락의 작품을 CIA에서 주목한 이유를 리얼리즘과 추상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아니라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냉전의 묵시록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냉전이 묵시록의 이미지 전쟁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CIA에서 본 것은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자유로운 작가정신이 아니라 버섯구름의 사진보다 더 큰 묵시록의 암시가 아닐까? 사진의 리얼리즘보다 추상화의 암시가 묵시록의 드라마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강박증을 증폭시킬 수 있고, 냉전의 승리는 그 초조함에 달려있다고 보지는 않았을까? 답은 어디서도 찾을 없다. 폴락의 작품을 보고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위에서 참고한 로즌버그의 글은 그의 유명한 에세이 “The American Action Painters"(1952)이다. 냉전시대 CIA와 미국 예술계의 관계에 대해선 Frances Saunders의 연구가 독보적이다 - Who Paid the Piper?: CIA and the Cultural Cold War. CIA가 비밀리에 지원한 것은 잭슨 폴락만이 아니라 Willem de Kooning과 Mark Rothko와 같은 동시대 미국작가들이 대상이었다. 폴락의 인터뷰 Jackson Pollack: Interviews, Articles, and Reviews란 책에 실려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이 지배하던 냉전시대 초기에 치열했던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시각적 경쟁을 포함했다. 핵폭탄 실험 직후 하늘까지 치솟아 오르는 죽음의 버섯구름을 찍은 사진은 즉각 공개되어 환상과 공포의 분위기를 경쟁하듯 키워나갔다. 폭탄은 히로시마에서 이미 터졌고, 묵시록은 더 이상 미래형 종말론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핵폭탄 실험을 기록한 사진들은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묵시록의 드라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이런 묵시록의 이미지가 냉전의 도구이자 무기였다면, 폴락의 미술작품도 그런 시각에서 볼 수는 없을까?

    핵폭탄의 묵시록이 지배하던 냉전시대 초기에 치열했던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시각적 경쟁을 포함했다. 핵폭탄 실험 직후 하늘까지 치솟아 오르는 죽음의 버섯구름을 찍은 사진은 즉각 공개되어 환상과 공포의 분위기를 경쟁하듯 키워나갔다. 폭탄은 히로시마에서 이미 터졌고, 묵시록은 더 이상 미래형 종말론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핵폭탄 실험을 기록한 사진들은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묵시록의 드라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이런 묵시록의 이미지가 냉전의 도구이자 무기였다면, 폴락의 미술작품도 그런 시각에서 볼 수는 없을까?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1)
특집 (8)
시평 (94)
목회 마당 (60)
신학 정보 (136)
사진에세이 (39)
비평의 눈 (72)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5)
소식 (153)
영화 읽기 (32)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52,578
Today : 62 Yesterday :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