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그들은 누구인가?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예언서를 연구한다는 것은 주로 예언자들의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빗대어 그들의 메시지를 분석함을 의미한다.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회정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만 정작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예언자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만 연구하고 책으로만 만났으니 역사 한가운데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몸부림쳤던 치열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용히 잠든 세상을 마구 흔들어 깨워 요동치게 만든 예언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로 하여금 역사 앞에 자신의 몸을 과감히 내던지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 랍비는 1962년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했고, 그의 책은 20세기 성서학의 걸작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예언자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각주:1] 헤셸 랍비는 “신의 파토스”(Divine Pathos)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구약성서의 예언자와 예언서를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파토스의 신이라는 것이고 예언자는 신의 파토스를 몸으로 느끼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신의 말을 전단하는 메신저나 또는 장래를 내다보는 선견자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의 연민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도덕 선생도 아니고 이성을 잃은 광분자도 아니다.


   예언자의 글은 신의 파토스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신의 파토스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자비와 사랑 때로는 실망과 분노와 같은 감정으로 표출된다. 예언자들이 열변을 토했던 것이 바로 신의 파토스다. 예언자는 세상의 불의를 보고 고함을 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예언자에 대한 단순한 접근일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신의 파토스는 역사적/사회 비평 같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이 신의 파토스를 전달하는 예언자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진노가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끊고 있어서, 내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 없다”(렘 6:11).[각주:2]


   신의 파토스를 가장 잘 전달해주는 언어가 바로 시다. 구약성서의 예언의 독특한 점 하나가 바로 대부분의 예언이 시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헤셸 랍비는 예언자는 시인이라고 했다. 예언자라는 사람의 경험은 시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시적 영감으로 여기는 것을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부른다. 예언자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감수성, 정열, 상상력을 부여받았다. 


    중세기 저명한 모세 이반 에즈라(Moses ben Jacob ibn Ezra) 랍비는 “히브리어로 시인은 예언자로 불린다”고 주장했다.[각주:3] 실제로 에스겔은 자신의 예언을 당시 사람들이 시가로 받아들이는데 불평을 토로했다: “그들은 너를,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겔 33:32).


    하지만 예언이 시라는 정의는 일리 있는 말이다.[각주:4] 구약성서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는 신의 파토스는 시라는 문학형식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따라서 예언은 시적 상상의 소산이다. 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시 안에서는 나무들이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는 번영과 향락을 일삼으며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여인들을 바산에서 풀을 뜯는 암소로 비아냥거리면서 하나님의 분노(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사마리아 언덕에 사는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어라.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아, 

   저희 남편들에게 마실 술을 가져 오라고 조리는 자들아, 

   주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맹세하신다. 

   두고 보아라. 너희에게 때가 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갈 날, 

   너희 남은 사람들까지도 낚시로 꿰어 잡아갈 때가 온다. (암 4:1-3, 새번역). 


 이사야는 포로귀환의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주어진 포도주와 젖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사 55:1, 새번역).



 예언자는 시인일 뿐 아니라 설교자요 사회 변혁가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역사의 한 가운데서 신의 파토스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는 화산처럼 폭발하는 격정 속에서도 얼음같이 차고 맑은 냉철한 마음과 눈이 있다. 문익환 목사는 예언자의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설상 나는 죽었습니다.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숨쉬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숨쉬는 건 누구입니까? 

   아아아아 그것은 흐느끼며 휘몰아치는 

   바람입니다. 높아만 가는 

   겨레의 숨소리입니다. 

   벗들이여 

   그 속에서 불꽃 튕기는 눈망울 하나 불쑥 나타나 

   얼음같이 찬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각주:5]  


 예언자들의 마음을 역사 현장에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신의 파토스다. 따라서 헤셸 랍비는 예언자는 지금 역사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정점이었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 50주년을 기념하여 영화로도 나왔다. 20세기의 예언자로 불리는 헤셸 랍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주도했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정의를 실천하도록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예언자의 삶을 사신 또 다른 두 분이 있다. 바로 문익환 목사와 장준하 선생이다.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장준하 선생의 셋째 아들 장호준 목사가 “역사 바로잡기”라는 내용으로 강의하기 위해 시카고에 왔다. 장 목사의 강의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장준하 선생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장준하를 “선생”으로 부르지만, 강연을 들은 이후 그분을 “우리 시대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로 다짐했다. 해방의 신 야훼가 아니라 가나안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출애굽 해방의 역사적 경험으로 초대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그분을 통해 들었던 것이다. 일본제국 시절 부와 영예를 누릴 수 있는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 광복군으로,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절 그분은 돈을 벌수 있는 많은 길이 있었지만 사상계를 출간하여 돈이 아니라 “생각해야 산다!”는 예언자의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었고, 돈 벌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베트남 파병도 반대하셨다. 그분은 파라오의 진수성찬이나(출애굽기 5장) 금 신상으로 표현되는 우상숭배 (출애굽기 32; 열왕기상 12장), 바알숭배에서 드러나는 풍요와 싸우셨던 것이다.  


 지난 2016년 4월 총선이 끝난 후 장호준 목사가 다시 시카고를 찾았다. 이번에는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준 목사와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 선생의 토크 콘서트”라는 대담의 형식으로 문성근 선생과 동행했다. 특별히 이번 대담은 문익환 목사를 예언자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분은 과히 신의 파토스에 따라 자신의 삶을 던진 이 시대의 예언자임에 틀림없다. 시인이면서 목사요 성서학자요 운동가로서 문익환 목사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예언운동”이라고 규정했다.[각주:6] 문 목사는 “예언운동은 해방을 열망하는 억눌린 민중의 힘이 터져 나오는데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각주:7] 문 목사의 예언 운동은 바로 헤셸 랍비가 말하는 신의 파토스라고 생각한다.  


 헤셸 랍비는 “예언자들을 자세히 보면 결국 예언자들과 사귀게 된다”고 했다.[각주:8]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언자가 되게 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신의 파토스다. 우리는 바로 이 신의 파토스의 영감을 받고 그것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역사 한 가운데서 하늘의 파토스를 전하고자 몸부림치는 예언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서울: 종로서적, 1996). [본문으로]
  2. 헤셸의 신의 파토스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Eliezer Berkovits, "Dr. A.J. Herchel's Theology of Pathos," Tradition 6 no. 2 Spr.-Sum. (1964): pp. 67-104. [본문으로]
  3. Shirath Israel (Berlin, 1924), p. 45. [본문으로]
  4. 헤셸, 172 쪽. [본문으로]
  5.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146쪽. [본문으로]
  6.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본문으로]
  7. 문익환, 136쪽. [본문으로]
  8. 헤셸, 머리말, x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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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히브리 민중사”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시카고 신학대학원 내에 소재한 한국신학연구원(CSKC) 주관으로 지난 2011년 문익환 목사의 책 『히브리 민중사』로 가을 독서모임을 했다. 독서모임의 목적은 한국 성서학자의 저서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수많은 성서 개론서와 해설서 중 문 목사의 책을 선정한 이유는 이렇다. 번역서나 여러 논문들을 짜깁기 한 책들이 난무한 한국의 성서학계에서 문 목사의 책은 한국인의 눈으로 구약성서를 해석한 책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성서 개론서는 아니지만 민중의 시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 하였다는 점에서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부제가 표명하듯(문익환 이야기마당) 문 목사는 구약성서를 이야기 식으로 풀어썼다. 구약성서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주나 인용은 달지 않았지만 수많은 책을 읽고 연구한 흔적이 분명하다.


   『히브리 민중사』는 필자에게 구약성서를 민중의 역사관으로 꿰뚫는 눈을 뜨게 해 주었고 내 삶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저 연구와 집필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에 동참해야 함을 배웠다. 


   『히브리 민중사』는 문익환 목사가 안양교도소에 수감생활 중 생활성서에 연재하였던 히브리 민중사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1985년 시작된 네 번째 징역생활로 한번 중단 되었고 또다시 중단된 채 미완성인 히브리 민중사를 삼민사가 출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느헤미야와 에스라 같은 포로 이후 성전 공동체의 문헌을 민중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분석한 부분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와서 다시 『히브리 민중사』를 읽는 이유는 이렇다. 구약성서를 민중의 눈으로 읽는 문 목사의 책은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방법론의 아주 좋은 예가 된다는 생각에서다. 문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는 창세기가 아닌 출애굽기에서 시작한다. 출애굽기의 중심주제는 당시 고대 근동의 맹주 애굽[각주:1] 제국의 억압과 착취에 당당히 맞서 승리한 하비루의 신 야훼의 승리라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애굽의 지배자의 신과는 달리 억압과 착취에서 고통당하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이라는 것과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해방절 이라고 부르는 점은 민중의 시각으로 출애굽기를 보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해방신학자들이 출애굽기 해석에만 집중한 반면, 민중의 시각으로 성서를 읽는 문 목사의 해석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여호수아서를 읽는 독자는 애굽에서 탈출한 해방군이 가나안을 점령한 침략군이 되는 기록을 보면서 의아해 한다. 하지만 문 목사는 히브리인들을 침략군이 아니라 해방군이라고 부른다. 문 목사에 의하면, 여호수아의 하비루 부대는 반 애굽 기치를 들고 일어선 농민 해방군과 출애굽 한 농민 해방군이 합세하여 애굽의 지배를 추방하는 해방전쟁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애굽 지배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도시국가들을 타도하는 일이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준 창녀 라합과의 동맹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여호수아 2:1, 3; 6:17, 23).


    여호수아 6-7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리고 성 함락은 해방전쟁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사기는 200년간 이루어진 해방전쟁을 기록하고 있고 특별히 사사기 5장은 해방전쟁의 승전을 노래하고 있다고 한다. 문 목사는 히브리인 다윗이 블레셋을 굴복시킴으로 농민해방 전쟁이 대단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삼상 29:3).[각주:2]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해방전쟁으로 보는 관점은 조지 맨덴홀(George Mendenhall)의 논문 “히브리인의 팔레스타인 정복”(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1962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맨덴홀은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은 타락한 토착 가나안의 정치 사회적 체계에 대항한 사회적 약자 연대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하부계층과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연대한 농민봉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맨덴홀은 아마르나 편지가 농민봉기의 고고학적 자료라고 주장한다. 후에 노만 갓월드(Norman Golttwald)는 자신의 책 “야훼의 족속들”(The Tribes of Yahweh, 1979)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을 농민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다시 주장하였다. 성서학자 브루거만도 갓월드의 영향을 받아 사회학적 방법론으로 성서를 해석한다. 문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도 맨덴홀, 갓월드, 브루거만과 같은 맥락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성서를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 민중사』는 거의 절반에 가까운 상당히 많은 지면을 민중의 시각으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해석하는데 할애한다. 이는 타락한 이스라엘 왕조에 대항하여 “해방신 신앙을 되살리려는 신앙운동이 예언 운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각주:3] 문 목사는 이스라엘의 예언운동을 하비루 농민 해방군 전통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온 엄청난 물줄기라고 주장한다(아모스 5:24).[각주:4]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설화는 사무엘이 이끄는 예언운동이 출애굽 해방전쟁의 연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구해 낼 것이다. 내 백성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사무엘상 9:16). 문 목사는 사무엘이 출애굽 민중 해방운동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사무엘을 제2의 모세라고 부른다.[각주:5]   


    문 목사는 예언자 사무엘의 뒤를 이은 엘리야도 8세기 예언자들도(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가) 출애굽 해방전통을 이어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 목사에게는 예언운동은 당시 최대 강국인 앗시리아 제국의 비호아래 악행과 억압적 정책을 저지르는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의 지도층과 부유층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재야의 목소리”라고 주장한다.[각주:6]  


    히브리 민중사는 출애굽 해방정신과 그 정신을 이어가는 예언전승이다. 구약성서는 제국의 억압과 폭정에 굴하지 않고 해방정신을 이어갔던 히브리 민중의 신앙과 삶을 기록한 민중의 책이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필자는 고대 이집트를 현대 이집트와 구분하기 위해 히브리어 미츠라임을 이집트라고 번역하지 않고 애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본문으로]
  2.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35-73쪽. [본문으로]
  3. Ibid., 129쪽. [본문으로]
  4. Ibid., 134쪽. [본문으로]
  5. Ibid., 143쪽. [본문으로]
  6. Ibid., 15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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