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초월하는 ‘크리스토파시즘’: 미국 대선을 보면서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인 질라 아이젠스타인(Zillah Eisenstein)은 2016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6년 미국의 대통령 경합은 여성혐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편협한 사람과 제국적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벌어진 지옥으로부터의 선거였다.” 그 ‘지옥으로부터의 선거’에서 미국의 선거인단투표를 통해 승리한 사람은 백인우월주의자이며 여성혐오적이고 반이민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였고, 일반투표에서 이긴 사람은 ‘제국적 페미니스트’인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선거인단투표에서 클린턴이 졌다고 제국건설을 지지하는 ‘제국적 페미니즘’[각주:1]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횡포가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미국을 비판적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더욱 분명해 진 것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경험해 온 소수인종들, 이민자들, 무슬림들, 성소수자들, 저임금 노동자들, 장애인들, 여성들의 삶이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것이다. 벌써 학교를 비롯한 미국내 이곳 저곳에서 스스럼없이 백인우월주의와 극단주의를 표출하면서 유색인종들과 성소수자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이번 미국의 대통령선거에 관해서 많은 분석이 나왔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다양한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보태질 것이다. 예를 들어, 힐러리 클린턴이 여러가지 정치적 불신을 일으켰지만 궁극적으로 당선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젠더와 관련된 분석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성추행과 여성혐오 발언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을 보면 젠더라는 축으로만 이번 미대선의 결과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수 있다. 트럼프의 “아메리카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슬로건이 백인들을 집결 시키는데 성공했고, 트럼프의 ‘아메리카’는 백인들만의 미국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인여성들에겐 백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따른다. 또한, 위싱턴의 집권세력에 의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져 왔던 저소득층 백인들이 월가의 금권정치와 빈부격차의 증가를 비판한 트럼프를 지지했기에 선거에서 이길수 있었다고 하면서 ‘계급’과 관련시키는 분석도 나오고 있지만, 트럼프를 지지한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고학력자와 고소득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에 속하는 백인 남성들과 여성들이라는 점은 ‘계급’으로만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분석의 한계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자본주의, 성차별과 인종차별주의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듯이, ‘트럼프 현상’을 인종이던, 계급이던, 젠더이던 한 가지 축으로만 설명하려는 분석은 미흡할 수 밖에 없다. 


    이번 미 대선과 관련해서 실망스럽지만 놀랍지 않은 사항들 중 하나는 트럼프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이 ‘거듭난’, 혹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백인들이었다는 것이다. 백인들 4명당 1명이 복음주의계열 기독교인들이고, 선거 출구 조사에 따르면 78%-81%의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백인 남성과 여성포함)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한다.[각주:2] 실망스럽지만 그닥 놀랍지도 않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물론 왜 대다수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발언과 행동을 보여온 트럼프를 선택했는지에 관한 분석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이런한 정치적 선택이 놀랍지 않은 것은 지난 몇 십년동안 사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보여온 정치적 편향과 행태 때문일 것이다. 또한, 비록 이번에 투표를 한 소수인종들의 대다수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는 보고가 있지만, 한국계와 중국계 미국인들 중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백인 복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이렇게 지속되는 복음주의자들의 선거 양식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복음주의’ 기독교가 보수적 정치의 동반자임을 더이상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내의 분열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그저 형태만 민주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는 미국의 ‘부드러운 파시즘’과 독일 나찌의 파시즘을 비교하면서,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 (Dorothee Soelle)는 미국의 파시즘을 지지하는 우파기독교를 ‘크리스토파시즘’ (Christofascism)이라고 비판한다.[각주:3] 죌레가 미국의 ‘크리스토파시즘’을 비판하는 상황은 1980년대 레이건 정권하의 미국이지만, 트럼프의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과 결과에서 보여진 ‘크리스토파시즘’의 영향 및 더 이상은 ‘부드러운 파시스트’고 할 수 없는 새정권의 핵심이 될 인물들을 보면 죌레의 비판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각주:4] 죌레에 의하면, ‘크리스토파시즘’은 국가주의, 군사주의, 가족이데올로기,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심등의 이데올로기들이 우파세력에 의해 기독교와 혼합되어진 수단화된 종교이다.[각주:5] 죌레는 기독교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도 이런 ‘크리스토파시즘’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죌레는 ‘크리스토파시즘’의 특징은 구약성서, 즉 유대교성서에 담긴 기독교의 모든 뿌리들을 잘라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의와 하느님이 도우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죄책감이나 고난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크리스토파시즘’에서 ‘희망’은 완전히 개별화되어지고, 개인의 성공으로 축소되어진다. 억압된 사람들과 연대했던 예수는 ‘크리스토파시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로 남는다. 그 대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와 “아메리카를 사랑합니다”라는 구호가 구별하기 어렵게 외쳐질 뿐이라고 한다.[각주:6]  


    한국에서도 이러한 ‘크리스토파시즘’의 현상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백인이 아니면서도 ‘백인하나님’, ‘백인예수’를 ‘주’로 선포하면서 우파정치인들과 그들의 정책을 지지해온 한국의 보수 개신교회의 모습에서 죌레가 비판한 ‘크리스토파시즘’이 보인다. 트럼프를 지지한 미국의 ‘크리스토파시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한국의 ‘크리스토파시즘’의 겹쳐지는 모습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지는데, 성차별과 여성혐오 조장, 사회적 약자 멸시,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 이슬라모포비아, 기독교 우월주의, 미 군사주의 지지등이 그러하다. 국경을 넘나드는 ‘크리스토파시즘’의 세력은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그렇다면, 그런 ‘크리스토파시즘’에 대한 저항도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뿌리가 잘린 기독교와 ‘금관의 예수’를 숭배하고, 가해자만을 옹호하면서 ‘값싼 은혜’를 선포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내칠 수 있는 ‘거룩한 분노’가 그런 저항의 동력이 될수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s://www.thecairoreview.com/essays/hillary-clintons-imperial-feminism/ [본문으로]
  2. 물론 이런 통계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분석도 있다.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no-the-majority-of-american-evangelicals-did-not-vote-for-trump. [본문으로]
  3. Dorothee Soelle, The Window of Vulnerability: A Political Spirituali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133-141. 이 글에서 “Christofacism”은 영어발음을 그대로 옮긴 ‘크리스토파시즘’으로 적고 있다. [본문으로]
  4. 단적인 예로, 트럼프정권의 부통령이 될 마이크 펜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기독교 우월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https://theintercept.com/2016/11/15/mike-pence-will-be-the-most-powerful-christian-supremacist-in-us-history/. [본문으로]
  5. Ibid., 138-140.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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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기회론'이라는 망상



 

백승덕*


 

   20세기 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는 생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이 우리를 온통 휩쓸고 있다. 나는 바로 여기서 새로운 문명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미국은 근대성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때가 1930년대였으니 미국은 100년 가까이 근대성과 동일시되어왔다. 미소 간에 체제경쟁을 하던 냉전 중에도 미국은 군사력이나 생산력 등 어느 부분에서도 소련에 대해 항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근대화가 곧 미국화를 의미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대학 신입생끼리 모여서 자기 고향에 햄버거 가게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도시수준을 따지던 때가 있었다. 미국식 생활은 근대성의 지표였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계속 나아가야 할 목표였다. 아이들이 미군 지프차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기브 미 초코렛’을 외치던 땅에서 보기에 미국은 꿈의 나라였다.  


아메리카니즘의 위기


   그랬던 아메리카니즘이 추락하고 있다. 냉전이 끝나고 미국의 세기가 지속될 거란 기대가 금방 무색해졌다. 2008년 금융위기는 결정적이었다. 미국이 그간 누려온 풍요가 사실은 가계부채 위에 쌓은 빚잔치였다는 사실이 준 충격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미국의 대응은 굼떴다. 세계 온갖 군데에 손을 뻗쳤던 터라 발이 묶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에 미군은 중동에서 계속 죽어나갔고, 이어서 IS처럼 이슬람 극단주의가 세력화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미국은 어디에서건 손을 대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마이너스 손’이 돼버렸다.  

   여태껏 미국이 근대성의 상징으로 자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래도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 때문이었다. 나치독일을 비롯한 파시즘 세력에 대항해서 싸웠던 역사가 부여해준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트럼프 돌풍’으로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공화당 유력 대선후보가 마치 히틀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자극적인 표현으로 이민자들과 무슬림 추방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라 반파시즘은 더 이상 미국의 상징이 되기 어려울 지경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해서 이민자들을 막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는 인물을 개그맨이 아니라 대선후보라니.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유력 대선후보로 떠올랐단 사실은 미국을 세계에서 근대성의 상징으로 유지하기 위해 치루는 비용을 미국인들이 얼마나 버거워하는지 보여준다. 트럼프는 구체적인 정책을 이야기할 땐 오락가락하지만 한 가지는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미국 국내 문제, 정확히 말하면 돈 버는 것 말고 다른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IS가 중동에서 뭔 짓을 하든, 북한이 자기 땅에서 핵실험을 하든 개의치 않겠다고 말한다. 동맹국들 역시 방위비를 더 내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거듭 선언하고 있다.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경제중심적인 관점으로 일관하는 것인데, 이런 트럼프를 미국인들 중 절반가량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한국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이런 사정을 ‘축복’으로 환영하는 모양이다. 한국발 트럼프 기회론에는 인터넷 진보언론 <프레시안>이 앞장서고 있다. <프레시안>은 참여정부에서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문정인의 인터뷰를 통해 트럼프 당선이 한국의 자주국방에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트럼프가 주한 미군 급료까지 한국에 부담하게 만들면 한국 여론이 주한미군 철수와 전시작전권 회수에 동의할 거란 이야기다.


한국 진보진영에서 부는 트럼프 기회론


   이러한 주장은 문정인만의 것이 아니다. 이 매체에 실린 다른 칼럼이나 기사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역사학자 이병한 역시 고정 칼럼을 통해 트럼프 당선을 핑크빛으로 그려냈다. 트럼프가 억만장자이기 때문에 군산복합체 등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호전적 정책에서 벗어날 거란 이야기였다. 이병한은 심지어 트럼프가 서구의 근대 민주주의가 지닌 신화를 무너뜨려 유라시아의 옛 문명들을 회생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가 염두에 둔 유라시아의 옛 문명들 속에는 한국의 지분도 들어있을 것이다.

   분수령은 지난 5월 17일이었다. 이날 트럼프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김정은과 대화할 것이며 그와 대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 알려지자 그에 대한 장밋빛 기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김정은과 대화에 나설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남한이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해서 남북대화를 미루고만 있을 거냐는 이야기였다. 요컨대 이 기회를 빌어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주체성을 키우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일리가 있을 만큼 한국은 안보와 관련해 미국의 힘에 의존해왔다. 주한미국대사가 피습 당하자 한복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서 부채춤을 추면서 쾌유를 기원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최근 <미디어오늘>을 통해 보도된 사실은 충격적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제주해군기지로 보내는 철근 400톤이 배 안에 실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 상당수가 선박 복원력을 약화시키는 위치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과적은 세월호가 침몰하게 된 주요원인으로 꼽혀왔는데, 배에 무리해서 실은 것이 바로 제주해군기지 건설자재였던 것이다. 일부 선원들이 승선을 기피할 정도로 안전에 문제가 있었지만 무리하게 출항한 이유 역시 기지건설 공사기일을 맞추기 위해서였단 이야기도 나온다. 제주해군기지 공사일정은 미국과 약속한 것이기에 시민들의 안전에 우선해서 고려된 것이다.

   조금 더 넓게 보더라도, 그간 미국이 주도한 국제법 질서는 국가 간 계약에 기반을 둔 권력을 해당국가의 사회에 각인시키는 과정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미, 미-일 상호방위조약 등의 계약을 가장 상위에 둔 채로 사회질서가 자리 잡았다. 2005년에 평택으로 미군기지가 이전될 당시에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한국군까지 출동시켰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에 UN 안보리 결의도 없었지만 한국 정부는 한미동맹을 이유로 파병했다. 

   그러니 미국은 그간 사실상 계약을 매개로 한 패권을 휘둘러온 셈이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 지역에 해군기지를 원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공연한 비밀이다. 


중국화하는 동아시아라는 문제


   일각에서는 중화질서를 새로운 대안으로서 호출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동아시아 근대성,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중국화한 동아시아가 미국이 주도한 국제법 질서를 대체할 대안이라는 것이다. 다시 <프레시안>으로 가보자. 이 매체는 오랫동안 칼럼을 써온 역사학자 김기협을 초청하여 기획강연을 열었는데, 김기협은 이 자리에서 중국의 군사력이 서구와 달리 “주변에 있던 지역들을 안정시키는 방어적 성격”이라고 구분 지었다. 게다가 중국의 조공체제가 “약한 국가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하나의 질서를 위해 공헌하자는 식의 유인책”이라고 긍정했다. 이처럼 중국화한 동아시아를 긍정하는 그의 입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와 '대안으로서 동아시아 전통의 가치'에 관한 책을 소개하는 연재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으로 표상된 근대성이 몰락하는 이 시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핑크빛 기대는 두 가지로 수렴된다. 하나는 주체성 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화한 동아시아의 부상이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현실을 돌아보면 핑크빛 기대는 어김없이 깨진다. 최근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보이고 있는 행태를 보면 그렇다.

   최근 중국은 남중국해 남사군도에 있는 암초들을 매립하여 인공섬을 만들고 있다.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무리수다. 이 지역은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이 오래 전부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서 갈등이 이어져온 곳이다. 중국은 인공섬에 활주로 등 군사시설을 배치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실하게 하려고 나선 모양새다. 중국의 군사력이 “주변에 있던 지역들을 안정시키는 방어적 성격”이라던 김기협의 설명이 무색해지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논리는 더욱 기가 막힌다. <주간동아>(2015.11.16)의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작년 11월 한 연설에서 “남중국해 도서들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영토였다”며 “남중국해에서 영토 주권과 해상에서의 정당한 권익을 수호하는 것은 중국 정부가 짊어진 책무”라고 말했다. 명나라 영락제 때 해양원정에 나선 정화의 항해 때부터 이 바다가 중국의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이 기사는 “영해나 EEZ 같은 국제법 용어 대신 ‘정당한 권익’ 같은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섬과 암초의 구분이나 육지로부터의 거리처럼 국제법상의 구체적인 논의를 모두 뛰어넘은 채로 바다에 U자형 선을 긋고 영유권을 주장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중국화한 동아시아가 보여주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말인가? 김기협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조공체제라는 것도 사실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예식을 반복함으로써 유지하는 ‘소극적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적 천하질서에서 ‘평정(平定)’이란 말은 작은 것이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억눌러서 유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했다. 높은 것은 높은 자리에, 낮은 것은 낮은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유교적 평화질서였다. 그러니 지금의 중국이 보이는 행태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계약에 기반을 둔 권력과 전통을 등에 업은 패권 사이에서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메리카니즘 몰락 이후에 현실을 핑크빛으로만 보기가 어렵다. 한국이 더 많은 분담금을 내고 주한미군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하던 방식으로 서해에서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중국화한 동아시아에서 조공체제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선택지는 북한의 길이다. 지난 1월 제4차 핵실험 직후 조선중앙TV는 특별 중대 발표를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엄혹한 현실은 자기 운명은 오직 자기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철의 진리를 다시금 명백히 실증해주고 있다. 사납게 달려드는 승냥이 무리 앞에서 사냥총을 내려놓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이다.” 한국이 주한미군을 떠나보낸 뒤에 오로지 자국의 힘으로만 중국과 상대하려면 이러한 자세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한 자세를 취한 사회가 지금의 북한처럼 경직되지 않을 수 있단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주체성을 위한 고난의 행군 중에는 자국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시민들의 안전을 볼모로 삼는 행태 또한 비일비재했다는 점을 북한의 역사가 보여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메리카니즘의 몰락을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한국 진보진영 일각에서 불고 있는 트럼프 기회론 역시 위험한 망상이다. 우리는 지금 계약에 기반을 둔 권력이 몰락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등에 업은 패권이 발흥하는 걸 상찬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모색해야만 하는 때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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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통신> : 미국 대선을 통해 본 한국 대선 읽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Hyde-Park 사람들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11월7일) 시카고 신학교 채플에서 시카고 대학 역사학 교수로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저자이기도 한 부르스 커밍스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미국 대선이 어제 진보진영(?)의 승리로 끝났고, 이제 남은 우리나라 대선에 대한 전망을 듣기 위해 학교로 가는데, 학교 진입하는 골목마다 경찰들이 깔려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렸다. 오바마가 지금 하이드팍에 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지역이 몇 군데 있는데, 시카고 남부 하이드팍(Hyde-Park)이 그 중 하나다. 시카고대학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후계자라 여겨지는 흑인인권 운동의 대부 제시 젝슨 목사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그 밖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담론들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미국진보 진영의 몇 안 되는 거점이다. 오바마의 집이 바로 이 하이드팍에 위치한다. 오바마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 상원의원시절부터 이곳 하이드팍에 살았고, 오바마의 부인 미셀 오바마는 시카고 대학 병원 행정부원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오바마의 아이들은 시카고 대학내에 있는 부속 중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가끔 아이들을 학교에 ride해 주는 오바마의 모습이 종종 목격되기도 했었다. 우리학교 지하에 위치했던 서점에서 갓 출간된 오바마의 책에 대한 사인회도 열렸고… 이렇듯 하이드팍에는 오바마의 흔적과 추억이 곳곳에 서려있다.

미국 대선의 계산법

대선이 있기 전 하이드팍 사람들은 오바마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여론조사의 추이만을 따져보자면 만만치 않은 접전이 예상되었었다. 미국은 주마다 대통령 선거인단 수가 다르고, 주단위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리하면 그 주 선거인단 수 전체가 모두 해당 대선 후보의 표가 된다. 이런 이유로 전국단위 선거인단 투표율에서 승리했지만, 선거인단 수 확보에 실패하여 대통령이 안된 케이스도 있다. 2000년 공화당 부시와 민주당 엘 고어가 맞붙었을 때가 그랬다. 이번에도 오바마와 롬니 간 투표율에서는 별 차이 없었는데, 선거인단 수에서는 오바마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늘 그랬지만 경합주들의 표심의 향배가 승부를 결정지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나름 확고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다(우리나라보다 더함). 그래서 공화당의 지지기반인 남부 바이블벨트로 상징되는 지역에는 민주당이 선거운동을 포기하고, 민주당의 지지기반인 뉴욕, 시카고, 샌프란 같은 대도시의 표심에 공화당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당락의 관건은 소위 Swing State라 불리는 경합주들의 향배다. 이것이 미국 대선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게임의 법칙이라 볼 수 있다. 플로리다,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위스콘신, 버지니아, 아이오하, 뉴햄프셔, 콜로라도 등이 대표적인 Swing State이다. 대부분 미중서 백인 밀집지역에 몰려있다. 오바마는 초접전이 되리라고 보았던 지역들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대의원수를 확보하여 332명(오바마가 얻은 선거인단수)대 206명(롬니가 얻은 표)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오바마가 잘 해서라기보다는…

오바마 승리의 요인에 대한 많은 분석들이 있었다. 막판에 몰아친 허리케인 샌디가 롬니의 열기를 식혔다는 의견에서부터 여성결정권(낙태)을 둘러싼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망언이 롬니의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에 이르기까지 이번 선거 역시 많은 이야기 거리들을 남겼다. 사실 이번 대선은 4년 전 과는 달리 오바마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커서 오바마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롬니에 대한 경계와 불안 때문에 오바마를 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오바마 1기는 전 부시 행정부의 무리한 전쟁으로 엉망이 된 경제상황, 그로 인한 국론분열, 전쟁 종주국이라는 국제사회에서 추락한 미국의 위상 등 어느 것 하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있었던 것이 없었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의 딴지에도 불구하고 나름 소신껏 경제회생의 의지를 관철시켜 실업률을 선거막판에 7%대로 떨어뜨린 점, 의료보험과 이민법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 등이 그나마 오바마의 자존심을 세워준 부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7%후반에 머물고 있는 실업률,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는 실물경제, 미국민들이 갖고 있는 강한 미국에 대한 미련과 미국의 대외정책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인들의 불신 사이에서 어떻게 대외정책을 지혜롭게 풀어가야 하는지의 문제, 이번 선거에서도 하원 장악에 성공한 공화당, 풀리지 않는 난제인 이스라엘과 중동평화 등등 오바마 집권2기 역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그렇다고 특별히 뾰족한 돌파구는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바마의 지난 4년을 학점으로 따지만 B- 정도, 그리고 앞으로의 4년도 전체적으로 흐림의 상황인데 미국민들은 다시 오바마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민들은 왜 다시 오바마를 선택했고, 이번 미국 대선의 메시지를 한국대선에 어떻게 감정이입을 시켜야 할까?

부시의 망령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오바마의 승리요인은 공화당의 시대착오적인 발상과 막혀있는 태도에 대한 반사이익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미국이 영국 식민지 시절 무리한 조세강요에 항거한 ‘보스톤 차사건’(Boston Tea Party, 후에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됨)에서 유래했다는 ‘티 파티’운동은 오바마가 추진하는 각종 경제개혁에 발목을 잡으며, 국가안보 최우선(테러와의 전쟁), 전 국민의료보험 확대 반대에 목소리를 냈는데, 이는 전통적 공화당 지지자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부동층을 끌어안는 데는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하였다. 롬니는 오바마와의 1차 TV토론을 거치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나름 보수적인 이미지를 벗고 중도적 이미지를 보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롬니는 선거운동기간 내내 공화당 출신의 전임 대통령 부시와 비슷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그가 말하는 공약들은 미국민들로 하여금 부시의 악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기업들에게는 세금인하, 친재벌, 탈규제를 약속했고, 불공정무역에 대한 보복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몰아부치며 다시 냉전의 분위기를 연출하려 한다는 점, 오바마의 어정쩡한 정책들이 미국의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켰기에 ‘강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점 등 롬니는 너무나도 Bush스러웠다.  지난 4년으로 부시를 잊기에 미국민들은 부시에게 당한 것이 너무나 많았고 혹독했다.

너무나 닮은 롬니의 사람들과 박근혜의 사람들

롬니의 지지세력은 백인, 부자, 남성들이었다. 이는 오바바의 지지층인 유색인종, 가난한 자, 여성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표심이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여성결정권(낙태)을 찬성하는 오바마에 맞서 보수적 기독교 세력들의 표를 규합하기 위해, “강간에 의한 임신도 하나님의 뜻” 혹은 “강간으로 임신이 안 된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그야말로 남성우월주의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이런 구태는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쳐 20대 유권자의 60%, 30대 유권자의 55%를 오바마로 향하게 했다. 공화당의 여성비하는 여성표에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쳐 여성유권자의 55%가 오바마를, 44%가 롬니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도 정치권에서 발생하는 여성비하 발언과 성추문 사건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사례가 한 두 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온도차는 미국 유권자들과는 전혀 반대다. 예전에 최연희, 박계동 같은 사람들 식당여주인, 여기자 성희롱 사건이 터졌을 때 뻔뻔하게 응수했던 것 기억해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이미지에는 별반 타격이 없었다. 성희롱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던 한나라당 사람들이 버젓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로 무사히들 안착했다. 이러한 현상을 지켜보면서  ‘당대표가 여성이기 때문에 ‘한나라당=성희롱당’ 이미지 성립이 불가되고 있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가진 적도 있었다. 문제는 박근혜의 ‘여성성’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의 의지대로) 반(反)여성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여성성은 철저히 가부장제에 기생하는 여성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는 한국 여성운동의 최고 수혜자일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회운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운동의 열매는 투쟁한 당사자들보다는 권력에 근접한 사람들이 맛보기 마련이다. 여성운동 역시 가부장제 사회의 기득권과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여성이 최대 수혜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 여성은 힘있는 아버지를 둔 딸들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그 굴레가 딱 대통령의 딸, 재벌의 딸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2012 미국 대선 총평, 그리고 한국 대선

한국에 조.중.동이 있다면 미국에도 그에 못지 않는 수구, 보수 언론이 많다. 대표적인 것인 폭스 뉴스와 러시 림보인데, 그곳에 등장하는 조갑제 같은 보수언론인들의 땡깡과 억측과 막말이 이번 미국 대선에서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공화당의 꼴통 이미지를 더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독설로 유명한 폭스뉴스 진행자 빌 오라일리는 6일 선거가 끝난 후 이런 말을 하였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미국이라 할 수 없다. 미국의 인구분포가 바뀌어 백인들이 이제는 소수파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말이다.  아직까지 패배의 원인을 정확하게 감지 못하는 미국 근본주의 세력의 현실감각을 잘 표현해주는 논평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미국대선은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공화당의 롬니보다 오바마의 자유로운 이미지가 아직까지 미국 유권자들에게 약발이 먹히고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대선 때마다 공화당이 물고 늘어졌던 낙태와 동성애 문제에 먼저 선수를 치면서 공격적으로 맞섰고, 의료보험, 이민법 문제 등에서 보여준 오바마의 제스처는 다문화 사회를 걸어왔고, 지향하는 미국의 정체성과도 부합하는 일관된 태도라 볼 수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최초로 레즈비언 상원의원이 탄생했고, 메인주와 메릴랜드 주에서는 동성결혼이 투표로 합법화되어 미국 내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주의 숫자를 아홉으로 늘렸다. 콜로라도와 워싱턴 주에서는 마리화나가 합법화되었다. 이로서 마리화나가 합법화된 주가 19개에 이르렀다. 한국에 계신 분들은 미국 사회가 망조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미국 사회가 매우 치열하게 차이와 다름에 대해 고민하고 몸부림 치면서 다양성을 수용하는 최적의 방식을 놓고 숙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제 12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우리는 미국 대선으로부터 무엇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까?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오바마는 유색인종, 가난한자, 여성들에게 표를 얻어 대통령에 재선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바마는 흑인의 93%, 히스패닉의 71%, 아시아계 70%, 여성55%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들을 무조건 가난한 자 혹은 소수자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백인 남성 위주의 미국 주류사회에서 상대적 약자였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들은 본인들에게 덧칠된 사회적 약자라는 굴레를 극복하고 자신의 계급과 사회적 위치를 자각하면서 그것을 배신하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이번 대선에 참여하였다. 즉 자신의 계급에 반하지 않는 정치 참여가 미국사회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말이다.  4년 전 이명박이 당선되었을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국민은 무능보다는 부패를 선택했다.” 그 다음해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은 서울 강북을 싹쓸이했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지난 선거에서 자신의 계급을 대변하는 후보보다는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 환상을 계속 주입하는 후보에 한 표를 행사했다는 말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남아 있는 대선 기간 동안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자기의 입장과 계급과 위상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각자가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 날, 나의 신념에 부합하는 한 표를 정직하게 행사한다면, 우리사회가 조금 앞으로 옮겨지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은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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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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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20 22: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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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태씨, 이 기사는 내려주시죠. 보기싫군요.

철 지난 미국 대선을 통해 본 2012년 한국 대선 읽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미국에 와서 필자는 두 번의 대선을 경험하였다. 미국에 오자마자(2004년 가을) 재선을 목표로 하던 공화당의 부시와 민주당의 캐리간의 대결과, 2008년 민주당의 오바마와 공화당의 매캐인 간의 대결이 그것이었다. 미국인들은 우리나라 국민과는 다르게 서로 다른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들에 대해 목에 핏대 올리며 고함치지 않는다. 영리한 것인지 예의바른 것인지, 아니면 누가 되든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경험적 진실에 익숙해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와는 안 맞는 선거문화다. 한가지 비슷한 것을 굳이 고르라면 전통적 민주당 텃밭은 뉴욕, 시카고, 샌프란 등 주로 도시주변이고, 공화당은 남부 바이블벨트로 상징되는 시골들이라는 점이 한국과 그나마 비슷하다고 할까.

이번 달 웹진과 다음 달 웹진에 철 지난 미국 대선을 통해 본 2012년 한국 대선 읽기라는 제목으로 2회에 걸쳐 2012년 대선에 대한 단상을 게재한다. 물론, 본토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체감하는 현실인식과는 다를 수도 있고, 그래서 온도차가 있으리라는 예상도 하지만, 외부자(물리적으로)의 시선에서 대상을 향한 다른 안목을 제공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글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지난 연말에 하늘나라로 돌아간 김근태 전 의원의 마지막 메시지, “2012년을 점령하라!”는 유언에 힘입은 바 크다. 십 년도 훨씬 전에 그의 정치적 비젼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모임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지?’ 라는 생각에서부터 저런 정치가가 대한민국에 10명만 있어도 대한민국은 바뀌겠다!’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고인이었지만, 내가 그 모임에서 김근태 의원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의원님, 정치하지 마세요!”였다. 대한민국 국회와 인간 김근태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을 듣고 허허웃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참 선하고 강직하고 논리적이었던 정치가 김근태가 그의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한 마리 학 같았던 그가 숨을 거두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2004년 미국 대선, 그 집단적 타락의 공유

 

필자가 겪었던 미국에서의 두 번의 대선은 선거 기간뿐 아니라, 선거가 끝난 후에도 많은 이슈들을 생산해냈었다. 2004년 민주당 캐리의 패배는 단순히 민주당과 전통적 민주당 지지세력의 패배라고 하기에는 할 말이 많았다. (표면상으로)지도자의 대의명분, 도덕성, 청렴성, 순혈주의(?)를 미덕으로 삼았던 미국 정치문화가 시장 개싸움으로 전락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제거라는 명분을 걸고 시작된 부시의 대이라크 전쟁은 결국 미국의 경제적 손익계산에 따른 선택이었고, 그 거짓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있었던 2004년 대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민은 (국가적)정의와 (국가적)이익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하였다. 모두가 그 전쟁의 공범으로 연루된 것이다. 백안관 대변인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세계평화와 민주주의 수호, 인권증진을 위해 미국은 언제나 노력하고 그것을 위해 숭고한 피를 흘리고 있다…….…(블라블라)……...” 다 뻥이었다 !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백악관 대변인이 말했던, 오로지 미국은 세계평화만을 생각하고 수호한다는 지구방위대식 홍보물과 같은 발언에 전적으로 신뢰는 안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징계의 기표로써 미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니, ‘미국=세계평화라는 상징계의 기표는 미국 보다는 오히려 한국 같은 나라들에서 더 심하고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지구상에서 미국에게 영혼까지 팔아먹은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남한이라 말해야 되지 않을까? 이번에 타결된 굴욕적인 한미FTA체결은 말할것도 없고, 재향군인회 혹은 한기총에서 주관하는 무슨 집회나 구국기도회에서 어김없이 휘날리는 성조기를 볼 때마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정점에서 성령, 혹은 미국의 이름으로 불태워지는 김일성, 김정일의 인형을 볼 때마다 무슨 원시부족에서 벌이는 토템향연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런데 명심하시라. 상징계속 미국과 실재의 미국은 다른 미국이고,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한 위대한 예술가가 조각한 성모 마리아의 순결한 동상이 바티칸에서 공수되어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여는 첫날,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조각의 감상을 위해 몰려 들었다. 작품은 지금 커튼 뒤에 가려져 있고, 유명한 텔렌트 출신의 문화부장관, 부자동네 그 지역 국회의원, 무슨 미술관장, 구청장 등등의 VIP들이 속속 근엄하지만 세련되게 등장하여 손에 쥐고 있던 가위로 동상을 가리고 있던 커튼과 연결된 줄을 자르는 순간, 우리 앞에 드러난 그 마리아는 우리가 예상했던 순결하고 수줍어하는 마리아가 아니었다. 옆 집 정부를 유혹해 격렬한 정사를 벌이고 있는 마리아였던 것이다. 바로 그 마리아가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순결한 마리아의 진짜 모습이라면?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고, 설마 설마 했던 그 실재(The Real)가 확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2004년 대선이 그런 성격을 띠었다. 자신들의 치부와 위선과 진심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그것을 모두 봐 버렸으며, 최종적으로 그들은 그것을 승인하였다. 아마도 2004년 대선은 미국사회에서 있었던 선거에 의한 최초의 전체적, 집단적 타락체험이 아닐까 싶다. ‘, 무엇 때문에 미국민들은 그것을 용인했을까?’ 에 대한 분석이 선거 후에 난무했는데, 지금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경제논리와 국가권력에 대한 권위를 보호해야 한다는 애국심(?) 뭐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선거 후 전통적 민주당 텃밭인 이곳 시카고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가운데 빠져 들어 한참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MB, 부디 변치 마시라!

 

이 글을 읽는 한국에 있는 독자들은 MB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그에 대해 뭐라 하고 싶은 말도 없고, 아무런 궁금증도 없으며,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나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것 같다. 팃낙한 스님이 그랬던가? ‘어떤 대상에 에너지를 주지 않고 바라만보고 있으면 그것은 점점 스스로 죽어서 사라진다고 말이다. 그래도 팃낙한 스님은 중생에 대한 자비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시선을 주는 것 까지는 포기하지 않으셨나 보다. 하지만 나는 MB를 향한 시선조차 에너지라는 생각이 들어 그 눈길조차 아깝다. 이것이 성숙한 스님과 아직 설익은 목사와의 차이라고 비난한다면 할말 없지만

 

2007년 겨울,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웬만한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 이 정권의 말로가 지금처럼 될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상대로 이명박은 4년 내내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지 않았고, 자신의 철학을 거역하지 않았다. 이점은 전직 노무현 대통령보다 낫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이 걸어갔던 정치, 문화적 행보와 경제, 외교분야의 행보는 사실 엇박자였다. 이러한 자기 분열이 그를 항상 괴롭혔고, 인간 노무현은 그것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보통의 정치인들은 그러한 자기분열(혹은 배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정치인으로서 마땅한 통과해야 할 의례로 여기는데 반해, 인간 노무현은 다른 정치꾼들처럼 그다지 뻔뻔하지도 파렴치하지도 못했다. 그런 점에서 바보 노무현!’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다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미일관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놓친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보다 낫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소통을 하라고 타일렀지만 MB DNA 속에는 소통이란 굴복이고 굴욕이어서 더 강한 어조로 자신의 진정성을 설파했야 했으며, 더 강력하게 모든 사안을 밀어부쳐야만 했다. 그는 박정희, 전두환 같은 신화시대에 등장했던 봉건영주들만큼 근성있는 지도자의 면모를 드러내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재임기간 계속되는 악재와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된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냉소적인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심지를 굽히지 않고 꿋꿋하고 씩씩하게  강행했다는 점에서 그의 고집 하나만은 인정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의 권력의지와 통치철학은 정치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부정적 의미에서 타산지석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점이다. 혹시, 이명박 장로에게 성령이 임해서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전향했던 것처럼 눈에 붙어있었던 무엇인가가 떨어져 개과천선하면 어떡하나? 이 대목에서 그가 회심을 하면 정말 코메디인데… MB의 시대정신은 이대로 쭉 가서 자신의 진정성을 부여잡고 장렬히 전사해야 한다. 그래야 이 대하드라마는 멋있고 숭고하게 끝난다. 그러니 MB, 부디 계속 버티며 변치 마시라!

하지만, 이 글의 관심사는 MB에 대한 성토도, MB 정권의 말로에 대한 레퀴엠도 아니다. 4년 전 우리는 무엇에 홀려 이명박을 뽑았고, 이제 우리는 다시 누구를 찍어야 할 것인가? 누구를 선택할 지를 논하는 것은 대선 출마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좀 오바인가? 하지만, 4년 전으로 돌아가서 이명박에게 몰표를 선사한 우리의 집단 무의식에 대해서는 한번쯤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한국사회의 자화상

 

1980년 이후 한국 현대사를 나누는 굵직했던 사건을 꼽자면 80년 광주, 87 6월 항쟁, 그리고 97 IMF가 아닐까 싶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를 상당부분 해소시켰고, 대중들로 하여금 20세기 한국땅에서 벌어졌던 (군사독재로 인한) 야만과 자기혐오의 원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제 잔치는 끝났고, 우리를 짓눌렀던 액운은 10년 동안 계속된 푸닥거리로 어느 정도 풀렸다. 이 말은 앞으로는 옛날 80년대식 운동 경력 내지 무협지 같은 무용담을 이야기 하면서 대중들을 혹하게 했던 약발이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고, 투쟁의 경력은 더 이상의 자랑거리도, 더 이상의 감동의 요소도 아니라는 말이다. 한번은 통했는지 모르지만 두 번은 다시 안 통한다. 2007년 대선 당시 분명 대중은 가열찬 의지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자칭 투사들의 몰이배식 말투와 억양에 피곤해 있었다. 이것은 그 무렵 휘몰아친 다양한 위기 담론의 발생과도 무관치 않다. 인문학의 위기, 문학의 위기, 그리고 신학의 위기……. 모든 위기담론의 근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상실된 시대의 고민과 혁명에 성공하지도 못하고 더 이상 무엇을 잉태하지도 못하는 불임의 시대에 대한 아픔이 깊게 베어있다. 이 모든 현상의 원인과 전제가 되었던 사건이 바로 IMF이다. 왜냐하면, IMF이후 우리 삶의 지평이 그동안 우리를 지탱했던 윤리의 문제에서 앞으로 우리를 위협할 생존의 문제로 그 관심사가 180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윤리, 민주주의, 자유, 정의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의 우선 순위가 아니다. 심지어는 누군가가 대화석상에서 이런 주제를 꺼내면 우리들은 지루해 하거나, 혹은 무슨 중세적, 시대착오적 발상이냐며 마음속으로 무시하며 그 질문들을 폐기한다.

 

실제로IMF 이후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재편되었다. 비교적 진보적이고 도덕적이라고 믿었던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민주정부는 공교롭게도 IMF가 터진 97년 겨울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대권을 쟁취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들의 예상보다 훨씬 충실하고, 착실하게, 그리고 단호히 신자유주의 원리를 이 땅에 이식하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한나라당이나 조..동에서 말하듯 좌파정권도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도 아니다. 이 표현은 너무나 과장되고 부풀려져 있는 말이다. 물론 이전 정권들과는 다르게 확실히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진전이 있었고, 문화와 사회전반을 향한 열린자세와 남북관계에 대한 전향적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는 그 공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신자유주의를 대하는 자세와 정책에 있어서는 김대중-노무현의 10년은 이명박 정권의 그것과 강도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인 틀 자체는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시스템을 대하는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의 무력감과 한계는 인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윤리가, 이념이, 그리고 정의가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구나!”를 각인시켜주었던 10년이었고,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그러한 의심과 회의를 최종적으로 확정지어준 사건이었다.

이 말은 이명박 정권은 어느 날 뚝딱 만들어진 정권이 아니라는 말이다. MB는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졌던 민주정부, 그러나 너무나도 신자유주의에 무력했던 10년 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난 숙주와 같다. 이런 이유에서 일까? MB는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난 미숙아 이기에 앞시대의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한국 현대 정치사라는 지형에서 볼 때 일종의 변종 바이러스 같은 성격을 지닌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적어도 그 전까지의 정권은 김대중, 노무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김영삼 조차, 그들은 적어도 일정기간 상징적인 자기희생을 통과한 지도자들이었다. 70,80년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대중 정치인 김대중과 김영삼,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온몸을 던졌던 노무현! 이렇듯 그 전까지 대중은 지도자의 덕목으로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을 통과의례처럼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명박은 어떤가? 정치적 자산과 자기 희생의 전력이 전무한 MB, 그것도 선거 직전 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 다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표차로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IMF이후 우리를 압박했던 생존의 문제 10년이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닥치고 탐욕이란 물화(物化)된 시대정신으로 화려하게 만개하는 순간이었다.

 

글의 전반부에서 2004년 미국 대선이 미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비양심과 몰염치를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라고 설명한바 있는데, 2007년 한국 대선도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이제 대통령이 누가 되든 상관없다. “강바닥을 파헤쳐 온 국토가 망가져도, 뉴타운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옥상에서 불타 떨어져도, 내 집값과 내 땅값만 올라가기만 한다면 그가 누가 되든 상관없다. 난 그를 위해 표를 던진다!” 그것이 우리들의 2007년 표심이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죄의식을 다같이 내려놔 버렸고,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 누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세상을 살게 되었다. 이런 야만스런 상황속에서 우리는 이제 총선을, 그리고 대선을 앞두고 있다. , 이제 누구를 찍어야 할까? (다음 호에 계속)  

 

에필로그: 매번 선거때만 되면 우리는 누구를 찍어야 될지?’를 놓고 고민한다. 87 6월 항쟁 후에 있었던 대선 때부터 (양 김이 분열되고 노태우가 당선되었던) 등장한 비판적 지지어쩌구하는 고뇌에(?) 찬 구호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년 대선까지 소위 양심적 시민들의 표심을 대변하는 슬로건이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어차피 최선이 아니라면 최악을 피하는 선택이 합리적이고 역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현명하게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라는 발언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표현처럼(그는 맑스의 유령에서 햄릿의 대사를 인용하며 “The time is out of joint”라 말했다), 아니 성경에 적혀있는 구절처럼 그 날과 그때는 점진적 발전과정이 아니라 도적처럼 임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매번 대선 때 마다 살짝 권영길를 찍을까 김대중을 찍을까? 노무현을 찍을까 권영길을 찍을까?를 놓고 고민했지만, 항상 나의 선택은 민노당 후보였다 (정동영이 나왔던 지난 대선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대선 때는 미국에 있었다). 하지만, ‘최선에 대한 믿음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최악은 피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강박이 얼마 전부터 내게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에 너무 오래 있었나? 나이가 들었나? 아니면 이명박에게 너무 질렸거나 or 난 원래 최선에 대한 믿음이 없었거나 혹은 내가 변했거나어쨌든 선거는 사람의 마음을 참 묘하고 드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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