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과학' 그리고 '종교'


이상현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14세기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창궐했고, 수 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각 도시를 관할하던 통제기구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거리에는 전염병으로 죽어간 시신들이 나뒹굴었지만, 많은 가족들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한 장례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사회 안전망은 붕괴되었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 나머지 비이성적인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1923년, 일본 간토(関東)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진은 수 십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간토지방은 생필품의 공급마저 끊어져 하루하루의 생존조차 불분명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분노를 표출합니다.

   재앙이 사회 전체를 강타할 때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감정 중 하나는 분노입니다. 이 분노는 처음엔 자신들의 평온한 일상을 앗아간 외부 재앙을 향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이 구체적인 누군가로 바뀌게 됩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여전히 진행중인 생존의 위협 속에서 사람들은 극도로 예민해지고, 곧 분노를 표출할 누군가를 찾아내려 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항상 그 사회 안에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럽에서 흑사병이 번졌을 때 사람들이 발견한 분노의 대상은 소수인종이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볼 때, 전염병과 유대인은 그 연결고리가 희박합니다. 하지만 분노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유럽인들은 손쉽게 이 연결고리를 만들어 냅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식수에 독을 풀었다’는 루머였습니다. 이 잘못된 루머로 인해 200여 개의 마을에서 수천 명의 죄없는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간토 대지진에서도 아주 유사한 결과가 이어졌습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를 일삼는다’는 루머가 퍼졌고, 역시 수천 명의 재일교포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전염병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와 같이 사회가 통제기능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정상적이지 않은 그 상황에 대해 분노합니다. 하지만 그 분노의 방향은 그 상황을 야기한 재앙 자체나 그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시스템을 향하기보다는, 그들이 함부로 분노해도 괜찮은 사회적 약자를 향하게 됩니다. 그 상황에서 왜 사회적 약자가 분노의 대상이 되는지는 이 글의 말미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가 혼란해져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에, 사회적 약자는 가장 먼저 분노받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예는 유럽의 흑사병이나 간토 대지진 외에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서기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났을 때, 네로황제와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함으로써 재난상황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9.11 테러를 당했을 때 미국인들은 이슬람인들을 향해 그들의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이 분노에 대해 이슬람인들은 다시 유대인들과 미국을 향해 더 큰 분노로 되갚아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연재해나 테러를 통한 재난상황이 아니어도 사회가 불안정해지면,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적개심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때의 감정은 분노보다는 ‘혐오’라 불립니다. 가령, 1차 대전 이후, 독일이 경제공황에 빠졌을 때 그 분노는 유대인들을 향했고, 그들에 대한 혐오와 탄압은 히틀러를 통해 극대화됩니다. 그리스 경제위기로 유럽의 경제가 동반하락하자 그들의 분노는 이슬람 이민자들을 향합니다. 또한 16-17세기에 벌어졌던 마녀사냥은 지역사회의 갈등과 빈곤의 문제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문제는 당시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던 미망인들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최근 한국사회도 비슷한 일이 발생합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실업이 증가하고 빈부격차가 커지자, 한국인들의 분노와 혐오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일자리와 관련지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분노가 표출되었고, 곧 이 분노는 특정지역이나, 특정외모, 노인, 장애인,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혐오로 이어집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 혐오에 관한 문제는 커다란 사회갈등으로 진행 중입니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은 보호를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혐오의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 혐오는 가시적인 분노로 표출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불안정하고 경제적인 위기가 닥치면, 이 혐오감정은 구체화되어 테러와 폭력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혐오와 분노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은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사회 안에서 어떻게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또 다른 키워드가 바로 ‘과학’입니다. 과학은 경험성과 동일성, 합리성을 바탕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사회적 구성원들 다수의 신념과 배치되더라도 그 이성적 논리를 근거로 올바른 판단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실제로 과학의 역사는 이러한 과학적 판단의 우월성을 여러 번 증명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을 때,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와 같은 과학자들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고, 후에 그들의 주장이 옳았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기상학자였던 베게너(Alfred Lothar Wegener)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쪽 해안선과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선이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현재의 대륙들은 오래 전에 하나의 거대한 초대륙(Pangaea)에서 갈라진 것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엔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베게너의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유전학의 멘델, 면역학의 제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등, 과학적 판단이 당시 다수의 편견을 깬 예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과학은 비정상적인 사회 안에서도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도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을 통해 우리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요? 아무리 대중들이 과학의 합리성을 인정한다하더라도, 과학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푸는 만능열쇠로 인정되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플라톤의 ‘철인(哲人)정치’나, 베이컨의 ‘뉴아틀란티스’는 차치하더라도, 과학적 사고가 다수의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입니다. 하지만 20세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비이성적인 사회 안에서 혐오와 분노가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는 현상을 여전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 사회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도구를 주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과학적 사고 대신에 혐오와 분노의 감정을 약자에게 표출하는 비합리성을 보여줍니다.

   물론 오늘날의 과학은 과거의 잘못된 지식이나 비합리적인 행동들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과거 유럽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유럽인들의 대처는 오늘날의 눈으로는 비합리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흑사병이 오염된 공기로 인해 일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허브잎을 태워 향기로 공기를 정화시키려고 했습니다. 또한 잘못된 의학적 지식 아래, 에머랄드 가루를 갈아서 먹기도 했으며, 감염되지 않은 사람의 소변이나 대변을 몸에 바르고 먹기도 하는 치료법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의학지식은 이러한 기행(奇行)적인 대처를 사전에 차단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식수에 독을 넣었다’는 루머조차도 오늘날에는 과학적 조사로 밝혀낼 문제이지, 아무런 증거없이 그 누군가를 학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과학이 우리사회에 기여한 최고의 공헌은 ‘미신(迷信)’에 대한 타파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를 ‘미신을 없애듯’ 제거할 수는 없는 걸까요? 사회가 불안정할 때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분노와 혐오는 사실 설명하기 어려운 심리학적인 감정입니다. 저는 이 약자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생존을 위한 잘못된 미신’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춘추시대 오(吳)나라의 오자서(伍子胥)는 원수인 초(楚)나라 평왕(平王)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고, 마침내 초나라를 정복하고,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채찍으로 300번 내리치며 복수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복수를 마친 후에 밀려오는 그 허무함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는 오나라의 적국이었던 월(越)나라를 미워하는 것으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오자서에게 적개심 자체는 자신의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었던 겁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감정과, 오자서가 삶의 의미를 갖기 위해 품었던 적개심이 다른 감정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약자에 대한 혐오 감정은, 불안정한 사회 안에서 스스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미신’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확인하고 그들의 고통을 관전함으로써, 불안정한 자신을 애써 안정된 것처럼 유지하고자 하는 심리학적 방어기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종교’라는 마지막 키워드가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종교는 ‘특정한 믿음을 공유하는 신앙공동체’를 뜻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종교는,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기존의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의 신념을 공유하는 ‘미신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이 미신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약자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심지어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며 약자의 고통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혐오가 정당하다는 포교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과학의 대화는 단순히 양쪽의 세계관을 조율하고 공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혐오라는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과학은 19세기 이후 ‘과학만능주의’라는 오만함을 드러내며,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우리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낙관했지만, 실제로 20세기 이후 약자에 대한 비이성적인 혐오와 분노가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혐오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기득권은 이러한 혐오 감정을 이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에서조차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우리사회의 혐오의 미신에서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여전히 많은 교회들은 동성애자나 장애인, 여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미신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몇몇 대형교회들은 우리사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종북’이나 ‘좌파’와 같은 낙인을 찍으며 혐오감정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와 과학의 대화는 약자에 대한 혐오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혐오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와 과학의 대화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 문제에도 폭넓게 관여할 방법을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결국 혐오를 숭배하는 미신종교를 극복하는 것은, 과학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 안에서 혐오를 극복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교회를 통해 선포될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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