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묻는다, 


5월 9일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선택을 할지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리스도인이 선거에 임하는 자세?


    5월 9일이 다가오고 있다. 헌법 최초 탄핵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촛불을 들었건 들지 않았건 모두가 ‘내가 바라는 다음 세상’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나의 소중한 목소리를 내는 소중한 선거란 어떤 것일까? 분명 예년의 투표보다 그 무게가 남다름을 인지하면서도 짧은 선거 기간만큼이나 응축된 생각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하루하루다. 필자는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삶의 신념과 정체성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라 고백하는 1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필자보다 더 오래되고 노련한 정치 의식-행동과 삶의 경륜에 의해 다져진 선택 방법에 대해 존중을 표하고, 아직 한참 모자라고 설익은 한 마디를 내놓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 말이다.

   먼저는 이 질문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갖는 특정한 선거의 방법 또는 선거를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이 과연 누구이기에 선거를 하는 태도가 따로 있다는 것일까? 우리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럼 예수를 우리의 삶과 이 세계의 주인, 통치자로 고백하는 우리는 예수처럼 선거를 하면 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예수를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가만, 생각해보자.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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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예수의 선택?


   그렇다.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없었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통치에 관한 한 황제 1인이 다스리는 군주제도였고 지금 우리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제도가 있었다. 너무 난감하다. 예수의 투표 성향을 분석해서 우리도 그와 같이 투표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예수와 우리 사이에 있는 2천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한반도라는 공간 이 두 가지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라도 한 걸까? 게다가 한 가지 렌즈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티나의 역사적 체험을 전제로 하지만, 유럽의 역사 과정 속에서 탄생한 종교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앙 제도와 해석 체계는 유럽의 경험에 기반을 둔 예수 신앙의 산물이다. 즉,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유럽의 문화로 재해석되고, 그것이 다시 우리의 삶의 기반으로 재구성되어온 역사를 인지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이 다중적인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소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접어두도록 하자. 이미 수많은 텍스트론들이 말하고 있다시피 예수에 대한 재구성은 ‘읽는 이’의 바람과 삶의 경험들에 의해 심하게 교란된다는 것이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 것 자체가 물음표로 던진 이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팔레스티나에 살고 죽었던 하나의 예수’의 구성은 불가능함이 천명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5월 9일에 투표한다면 0번에 찍을 것이다.’라고 점찍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직 말하고 싶은 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선거와 투표, 예수님이 지금 이 시점에 오셔서 투표하신다면? 이런 생각을 하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많다는 것이다. 곁가지로 생각해 보자. 우리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라는 것의 함의, 곧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분, 따라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이 틀거리. 이 언어가 민주주의 사회 즉 백성(民) 또는 시민이 주인이라 하는 2017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그리고 신과 결별하고 ‘생각하는 인간(데카르트)’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 국가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주체라고 이미 천명된 근대 이후의 이 세계 안에서 당신은 정말 뼛속 깊이 이해가 되는가 말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로의 접근이 불가능하였듯이 예수와 선거를 연결짓는 일은 너무 깊은 작업이라 포기해야만 할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불가능하기에 더욱 흥미진진해 보이는 건 나 뿐인가. 비단 정치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아니었던가 말이다.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


    자, 이제 길었던 서문은 제쳐 두고 예수 당시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예수가 보여주었던 삶의 행적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야겠다.

    예수의 모든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이 글에서 모두 다룰 수 없지만, 그의 행위가 최종적으로 다다른 지점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삶이 보여주는 정치적 함의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작년(2016)에 진행된 본 연구소 신학아카데미 탈/향 강좌에서 김진호(본 연구소 연구실장)의 ‘예루살렘에서의 7일’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해 보도록 하자.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이것은 고대의 전형적인 ‘잔혹극’의 한 실례다. 잔혹극이란 ‘희생양’의 배제를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형식으로 공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권력의 지엄함을 승인하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체제는 피압박 대중의 욕망분출 방식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욕망 분출의 기회를 봉쇄하는 극단의 배제집단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배제집단을 천민 계층(마지널 휴먼)이라 하는데, 대중은 이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카타르시스를 일상 속에서 경험한다. 이때 극단의 배제집단은 자신의 욕망분출의 계기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광기’의 사람들, 즉 악령 들린 사람들로 만드는,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배제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사회적 지배의 기재로 활용된다. 다른 한 유형은 잔혹극을 통한 욕망의 카타르시스다. 대중은 출구를 찾아 정처 모르게 내면을 휘젓고 다니는 무의식적 욕망을 분출할 안전한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잔혹극의 희생양이다. 대중은 억압된 욕망에 분풀이라도 하듯 분노를 한껏 그에게 폭발시킨다. 그리하여 권력은 그 대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잔혹하게 처벌한다. 권력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이기라도 한 듯이. 요컨대 잔혹극은 대중의 축제이기도 했다. 그 축제를 축제로서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자신이 역모자의 적극적 추종자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십자가형은 처형자를 위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인 사람을 재판 없이 함께 처형하는 관례를 동반했던 것이다. 

메시아가 일으킨 변혁을 향한 불, 아니 메시아라는 변혁의 불. 그것을 지르는데 공범이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하는 화재경보기에 놀라 무대에서 흩어져버린다. 이제 그들 중 누구도 성전의 억압의 장치들을 불 질러 태워버려야 한다는 ‘불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다. 화재경보기가 울린 뒤, 불을 냉동시켜버릴 듯 거세게 내뿜을 소방차의 잔인한 물줄기가 온 세상을 뒤덮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세상을 향해 찢어질 듯 경고음을 발한 뒤, 그 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불의 호소’만이 허공 속에서 춤판을 벌이며 남은 공연을 실연할 뿐.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고, 추종자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멀찍이서 침묵 속에 관망하는 가운데, 처절하게 찢겨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예수는 죽어간다. 여기서 ‘신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잔혹극의 가학성, 권력과 대중의 공모 속에 벌어지는 역사의 사디즘(sadism) 속에 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신은 죽었다. 아니 가학성을 가학성으로 보복하는 신은 죽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변혁 행위를 꿈꿨으나 하느님은 변혁행위를 통해 예수와 만나지 않았다. 예수사건은 바로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는 모든 이의 침묵 속에 도살당한다. 바로 그 현장, 신마저 침묵하고 있다는 바로 그 현장에서 변혁 행위의 주체인 신도 도살당한다.[각주:1]


    메시아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물러나 사람들의 마음 따위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피안의 세계를 전파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가 도래하여 통치를 벌이는 하나님의 나라 는 죽음 이후인 내세의 삶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 내면의 안정, 안심을 얻는 ’힐링캠프’는 더더욱 아니다. 메시아란 철저히 현실 내의 정치적인 존재였다. 예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며, 현실적이라 함은 곧 생활 즉 삶을 이야기하는 예수를 통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를 일컫는다. 인간들은 예수를 봄으로써 현실(the Real)을 읽고, 예수를 읽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과 세상은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하나님과 인간 및 세상이 화해한 ‘하나의 장소(One Place)’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까지 말했다. 즉, 우리의 현실은 어디인가? 그리스도라는 공간이다. 그리스도라는 공간 안에 채워진 그리스도의 삶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는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던지며 살았다/죽었다. 예수는 불을 지르는 사람인 동시에 아버지인 신을 도살하는 주체였다. 매일이 반복되는 이 지루한 일상의 세계가 변할 수 있음을 알렸고, 이전부터 약속된 바로 그 ‘야훼의 날’이 오늘 여기에 다가왔다고 선언하며 모든 죄와 아픔을 치료하는 실천적 존재였으며 ‘아버지’로 표상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상(像)을 파탄내는 무뢰배였다. 방금 살펴본 ‘예루살렘에서 7일’간의 행적은 모든 메시아로서의 삶을 축약하고 종합하고 결론짓는 일이었다. 즉, 십자가를 포함한 예수의 삶 전체는 아픈 사람들의 병을 ‘지금 그 자리에서’ 고치고 사회 속에서 ‘죄’라고 여겨졌던 고정된 편견과 맞서서 싸워 논쟁을 일으키고 불화를 일으키는 삶이었다.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누가복음 12:49~53)


    제도정치를 주관하여 이 지루하고 억압된 일상을 마비시킴으로 유지시키고 유지시킴으로 마비시키는 제도의 권력들과 싸웠다. 제도의 권력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였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생각이 마비된 사람들이라면 질문으로 일깨우고, 사회적 시선으로 일상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탄생부터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리고 죽는 순간과 다시 부활하는 그 순간까지 모두 그 한 걸음 걸음이 사람들에게 불을 던지고 일깨우는 정치적 존재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연극의 희생양으로 죽임 당했지만, 메시아 예수를 죽인 그 손들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세상의 곳곳을 치료하며 불의한 세상에 균열을 내고 불을 던지는 사람들로 변화해 갔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특정한 신의 특정한 뜻, 특정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러 온 사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그 하나님의 통치란 다름 아닌 사람이 어느 하나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간에 하나님에게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피는 꽃까지 모두 일일이 살리고 돌보시는 그 원리에 의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그가 민의(民意)의 화육(化肉),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있음/없음들의 몸’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는 비단 정치인들이 떠받드는 - 동시에 떠받들지 않는 - 민심의 지엄함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심의 부끄러운 민낯 또한 만천하에 드러내신 분이기도 하다. 훈련되지 않고 오로지 짐승 같은 대중의 에너지가 어떻게 권력자들에게 악용될 수 있는지 또한 자신의 몸으로 똑똑히 대면시켜 주신 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불을 던져 놓고 그 불이 자기에게로 향하게 되었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자신에게 들이대는 불길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후일에 자신의 죽음 이후에 벌어질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들도 상상하면서 말이다.


민주주의와 선거와 예수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예수와 민주주의는 사실 애당초에 불가능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떤 투표를 해야하는지 어렴풋하게 실마리를 잡아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2항>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 1조 1항의 말은 언설(言說)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 대한민국은 백성이 주인인 국가이다. 민주 공화국이란 뜻은 사전 뜻풀이를 가져 오자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해서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를 의미한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여 ‘민’이 주인이라는 것은 개별 개체로서 ‘내’가 주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합체로서의 민의’이다. 즉, 공동의 의사 결정이 반영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럼 위에서 말한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 체제는 예수가 꿈꾸었던 정치, 즉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현실적인 정치체제와 모습을 갖추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가 어떻게 통치하는지 그 체제의 정답을 어디에도 계시한 적이 없다. 왕정 시대로 접어들면서 성서 기자는 하나님이 못마땅해 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사 시대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시대였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하나님과 소위 ‘독대’하여 하나님과의 채널이 단일했던 모세-여호수아로 이어지는 광야와 초기 가나안 시절의 ‘임시정부’형 체제가 하나님의 통치에 더 가까웠을까?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족장 시대? 에덴동산…? 대체 우리는 그럼 얼마의 시간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이런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아니면 소위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듯 교회가 많아져서 ‘복음화율’이 높아진다면, 즉 교회에 등록한 기독교 신자들이 늘어나 그 수치가 100에 가까워지면 그 때서야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가장 ‘직접’ 반영하는 정치체제야말로 환상에 가까우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엄명을 어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체제는 현재 잠정적으로 가장 우리에게 적합한 체제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민주주의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 체제가 아니라는, 이것보다 더 나은 정치체제를 고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에겐 정의를 추구하는 능력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하며, 다른 한편 불의를 행하려는 경향성도 지니고 있기에 민주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사회정의 실현에 있다.[각주:2] 오늘날 구약 시대의 신정 정치 즉 하나님께서 특정 매개자를 통해 통치하시는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여러 세속 정치 형태 중에서 민주주의가 희년 정신 즉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해 주는 정치 체제라고 판단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것은 곧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 도래의 선포, 곧 누가복음 4장 16, 17절의 말씀의 내용과 가장 가까운 정신을 구현한 체제일 것이라 고백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170509 대선의 의미


    여기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비단 정치체제의 조형(造形)만이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를 치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 즉, 금번 국정농단 사태, 소위 박근혜-최순실의 비(반)민주적 통치의 상태가 드러낸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은 우리 사회의 곳곳이 어디 하나 빠짐없이 병들어 썩어 문드러진 사회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각주:3] 특히 박근혜-최순실은 삼성의 이재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드러났다.[각주:4]



    즉,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 특히 이번 선거와 이어지는 정치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사회는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정치(제도)의 개혁, 경제의 민주화, 동북아시대를 맞이하면서 통일과 외교에서의 주도권 장악, 점증하는 생태위기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시급하고도 안전한 대책 등이 이번 선거를 시작으로 앞으로 계속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결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체제”의 심판과 그 사태의 종결로서 인지 되어선 안 된다. 이제 대한민국, 아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디자인되어야 그 기초를 쌓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예레미야 31:31)”


그렇다면 나의 목소리를 내는 투표란?


    예수, 나, 민주주의, 그리고 2017 대통령선거라는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이번 대선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일단은 선거를 해야 한다. 아무나 되겠지 하면 정말 ‘아무나’ 된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최악의 지도자로부터 통치를 받을 것이다. 그 때부터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옛날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하자. 마키아벨리를 통치기밀의 폭로를 통한 반-폭정주의 및 공화주의의 실천자로 인식했던 바로크시대 보깔리니는 법정에 선 마키아벨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검사는 마키아벨리가 한밤중 양떼 속에 숨어들어가 ‘개의 이빨로 만든 의치’를 끼우려다 발각되었으며, 그런 행위는 양의 젖을 짜고 털을 깎는 ‘목자들’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며, 이후 양떼는 목자들의 ‘휘파람과 지팡이’를 따르지 않게 될 것이고, ‘밧줄로 둘러친 울타리’로는 더 이상 양떼를 관리할 수 없게 될 것인바, 바로 그때 ‘양털과 치즈의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의 이빨로 만들어진 의치는 양을 개처럼 물어뜯을 수 있게 하는 힘, 목자들의 호명과 지시를 거절하는 힘, 목자들이 매번 재설정하는 목양의 울타리와 영양배분의 경계를, 목자들이 정립한 법의 경계를 무화하는 힘이다. 개의 그 이빨, 그 힘은 검사에 의해 ‘극히 위해한 성격의 안경’으로 기소되는데, 그 안경은 그들 목자들의 법 연관이 양털과 치즈 가격의 관리를 통한 축적의 보호상태임을 문제시하는 시력을, 그런 축적의 보호가 ‘신성의 가장’과 ‘국가이성이라는 폭정의 비밀’에 의해 관철되고 있음을 폭로하는 시력/시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각주:5]



    투표는 가장 작지만 확실하게 당신의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고 가장 적확하다. 15명의 정치인이 대선에 출마했다. 누구를 찍든 찍는 게 당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작이다. 다시 말하건대, 이번 선거는’시작’에 불과하다. 근본부터 시작하는 선거다. 세월호 참사가 던진 질문, ‘과연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삶,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이 곳이, 내가 운명처럼 태어나게 된 이 곳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뜻’이 있다고 믿는 이 곳에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 ‘현실’에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면 이제는 응답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이 단번의 투표에 이룰 수 없다. 투표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당신은 당신이 찍은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 사람과 그 주변의 세계가 당신이 점찍어둔 사람을 찍을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 그 후 어떤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 비록 당신이 찍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 그 때부터 그를 사정없이 움직여야 한다. 정당 가입과 활동으로, 시위와 집회에 참가함으로, 전화로, SNS로 말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당신’의 시작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16 신학 탈/향 강좌 <예수, 트랜스-크리스천 히스토리를 위하여>(강사 : 김진호)의 1강 ‘역사의 출발, 십자가에 달린 그 이’ 중 한 단락을 발췌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2017 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 지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 (2017, 동연) 11쪽 인용 [본문으로]
  3.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두 인물이 있지만, 사실 그들과 그들이 가지고 논 권력을 둘러싸고 있는 층위는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다. 일차적으로 그들을 비호하고 키운 정치 기관들 - 청와대 비서실, 국정원, 검찰, 헌법재판소 등 - 과 그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그리고 군대가 있고, 또한 그들의 충성스러운 ‘입(Speaker)’ 역할을 한 그들의 입장을 매일 매순간 퍼나르고 재생산해낸 언론권력(조중동 등의 일간지, 공영방송과 종편방송 및 포털사이트)이 있을 것이다. 비단 그것 뿐인가. 그들의 권위를 뒷받침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소위 각계각층의 지식팔이 ‘전문가 집단’과 대중의 영적인 상태를 주관하는 종교권력들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자신의 역할들을 충실히 집행함으로써 직접 책임지지는 않지만 모두가 조금씩의 힘을 보태어 만든 사태가 결국 여기-지금 오늘의 생명-삶을 갉아 먹는 체제로 현신(現身)한 것이다. 사회학자 윤인로는 박근혜 정부와 그 주변을 둘러싼 권력들을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간접권력’이란 개념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 보호능력 없는 채로 복종을 요구하고, 정치의 위험을 몸소 받지 않고서 명령권을 가지며, 책임을 다른 기관에 강요하면서 그 기관을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간접권력’ (칼 슈미트, 홉스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 교육과학사). 여기의 간접권력이란 무엇인가. 체계적인 무책임의 통치상태, 곧 기술적(객관적, 기계적, 외적)으로 된 통치체의 중성화(다원화, 분권화, 합리화) 상태, 공모한 사적 당파성들의 ‘영원한 수다’ 상태.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90쪽) [본문으로]
  4. 가장 왼쪽은 실제 타임지(아시아판, 2012. 12. 17) 표지, 그리고 이후 2장의 사진은 패러디물이다. 각각 왼쪽부터 ‘독재자의 딸(박근혜)’, ‘독재자의 딸의 무당(최순실)’, ‘독재자의 딸의 무당의 후원자(이재용)’로 표현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13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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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민주주의 : 역사의 회귀?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번 원고에서 한국의 삶이 왜 이렇게 힘든지 고통의 무게에 대해 쓰면서 글을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그 삶의 무게는 그 삶의 부피는 전혀 줄지않고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어지럽고, 고통스럽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한숨과 저항의 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경제, 사회, 환경, 교육, 여러 분야로 총체적 난국이지만, 이 난국의 원인을 진단하는 의미로 정치, 특히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지면의 한계상 오늘 다룰 민주주의 주제는 다음 원고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2016년 11월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주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주다. 모든 예상을 뒤엎고 도날드 트럼프 (70세)가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선거 바로 다음날부터 미국 전역에 거쳐 많는 시민들이, 특히 많은 젊은 세대 그룹들과 여성들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면서 거리로 나오고 있다. 이들은 선거의 패배를 무기력한 한탄이 아니라 저항의 소리로 바꾸면서 이렇게 외쳤다. “트럼프는 우리 대통령이 아니다” “트럼프가 공공연히 떠드는 여성혐오, 백인우월주의, 반이민, 반이슬람, 반외교정책으로 가득찬 미국은 우리가 믿고 꿈꾸는 미국이 아니다.” 이렇게 거리로 나온 많은 이들에게 선거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꿈꾸는 미국, 인권과 약자, 여성, 종교, 이민, 이주의 자유가 보장되는 삶을 향한 투쟁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시위는 그동안 노력해서 성취해낸 흑인차별반대 운동을 포함한 미국시민인권운동 (civil rights movement)의 역사적 진보가 역행되고 있는 현실을 그냥 앉아서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마치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해 새로 선출된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71세) 은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마약거래를 했다고 의심이 되는 시민들을 공정한 사법절차 없이 마구 죽이고 있다. 히틀러처럼 자신도 수백만명을 죽일 수 있다고 공적 선포를 하고 있다.[각주:1] 도저히 정상적인 민주주의제도 하에서 적법하게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말도 행위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주의적인 악행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전쟁 이후 약 40년간 군사독재 불식을 위해 그토록 많은 투쟁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10년의 김대중, 노무현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드디어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는다고 믿으며 21세기를 열었다. 그러나 짧은 10년이었다. 두번의 정권 교체이후 신자유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군사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세력의 힘으로 (아니 우매한 대중의 선택과 비판적 사고의 결여, 이 부분을 다음 원고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2007년 이명박을 경제대통령이라는 환상으로 만들어 당선시켰다. 이명박과 그를 지지한 보수정권은 지난 5년동안 인권, 경제만을 망친 것이 아니라 환경 (4대강 사업)까지 파괴시키고, 서민, 약자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 5년간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이른바 독재가 양산한 삶의 쓴맛을 덜 봐서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는걸까? 한국은 다시 2012년 12 월 대선에서 독재자의 박정희 딸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선거의 결과전후로 한국에선 새로운 영어-한글 퓨전 용어가 퍼져나갔다: “멘붕 (mental붕괴).” 2016년 11월 8일 트럼프의 당선소식으로 많은 미국인들, 그리고 그 선거를 지켜봤던 전세계는 일종의 “멘붕”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카나다에선 그렇다. 최종확정결과가 워낙 늦게 발표되어, 많은 사람들이 잠을 설쳤다. 11월 9일 이른 아침 발표된 선거결과를 지켜보고 출근해 멍해있는 학교 교수, 직원, 학생들에게 난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멘붕” 용어를 설명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정치적 결과가 미치는 멍때리는 정신상태에 동감한 것이다.

    지난 4년동안 박근혜 정권하에 한국의 상황은 이명박정권때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아니 그 때 저지른 잘못된 정책의 결과가 이 곳 저 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삶이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 말했다. 그래서 이런 죽음같은 삶을 설명하는 또다른 퓨전용어가 탄생했다: “헬조선.”[각주:2] 멘붕에 비해 훨씬 자조적이고 잔인하고, 강한 혐오가 담겨있는 표현이라 사실 조금 섬짓하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지옥같은 한국의 상황을 표현하기 보다, 지옥이 되어라 하는 자폭과 자신 혐오가 강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헬조선의 현실도 부족한가? 최근 또다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최순실 파일”의 공개사건이다. 이로 1987년 6.10항쟁처럼, 1960년 4.19항쟁처럼 전 국민들이 분노하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도날드 트럼프, 로드리오 두테르테, 박근혜, 이 대통령의 당선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당선이다. 제정신이 있는 자라면, 최소한의 이성적, 비판적 교육을 받은 자라면, 민주주의와 최소한의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들을 대통령이 될만한 지도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들이 당선된 것이다. 그것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정권이 탄생되어서, 이른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들의 권력이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오늘 이런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멘붕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라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해, 아니, 이런 지옥, 죽음같은 상황으로 스스로를 자학하는 민중들과 시민들의 폭력을 끊어내기 위해, 요즘 미국, 한국, 필리핀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로 표현한 학자의 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니퍼 왈쉬는 2016년 CBC - Massey Lectures강의를 맡도록 영광의 선택를 받은 정치학 교수이자 역사학자이다.[각주:3] CBC - Massey Lectures는 카나다 공영방송 (CBC)과 토론토대학 소속 Massey College그리고 House of Anansie 출판사의 합작품으로 매년 카나다인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을 한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 예술가, 문학가 등이 선택되어 자신들의 관심주제를 심도깊게 발표하는 행사이다. 1961년부터 이 강의는 매년 지속되어왔다. 5일동안 5번 강의가 매일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이 되며, 전국을 돌면서 강의가 행해지고, 강의내용은 책으로 출판이 되어 두루 읽힌다. 이른바CBC - Massey Lectures는 공신력있는 카나다의 지적 운동의 양산지라 할 수 있다.[각주:4]

    제니퍼 왈쉬는 현재 이탈리아 플로랑스에 있는 유럽대학 국제관계학과 석좌 교수이자, 최근까지 UN 자문위원으로 국제분쟁문제를 깊이 관여해 온 학자이다. 왈쉬의 CBC Massey강의제목은 “역사의 회귀: 21세기 분쟁, 이주, 그리고 지정학”[각주:5] 이다. 

    왈쉬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른바 냉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그 사건을 보면서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해석한 미국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꾸야마를 인용하면서 강의를 열었다.[각주:6] 여기서 후꾸야마가 말하는 종말은 곧, 자본주의-공산주의의 대결의 끝을 의미했다. 동시에,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지칭했다. 궁극적으로 역사는 진보한다는 낙관주의를 과감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후꾸야마의 에세이가 발표되고 25년이 지난 지금 그가 선언한 종말은 커녕 그 종말의 역사가 회귀하고 있다. 이 점이 왈쉬 강의의 핵심테제이다. 죽었다고 믿었던 역사가 좀비처럼 귀신이 되어 다시 현재에 나타난 것이다. 난 왈쉬가 주장하는 역사의 회귀를 좀비로 표현하고 싶다. 이런 좀비의 정체성은 죽음, 죽임이다. 좀비의 유일한 타켓은 살인이고, 억압이고, 정복이다. 좀비는 생존위해 가족까지도 죽여야하는 존재이다. 2010년 방영이후 아직까지 방영되면서 대중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TV 드라마, Walking Dead[각주:7]가 이 죽임의 현현인 좀비현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왈쉬는 적법한 절차없이 공권력에 의해 벌어지는 살인 (앞서 예를 든 필리핀 포함), 소수 인종, 소수 종교인들을 향한 증오와 학살, 전대미문의 기아상황 (자연재해, 환경재해포함), 전대미문의 피난민사태, 그리고 이른바 서구 민주주의의 발원지이자 그러므로 본보기가 되어야 할 국가들 (유럽, 미국) 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불균등, 배타적 외교정책, 백인우월주의, 수국주의, 인종차별의 현실을 자세하게 예로 들면서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아니, 비민주주의적인 역사가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거꾸로 가고 있는 민주주의는 소위 “고대시대, 중세시대 행해진 야만적인” 행위가 민주주의라는 근대주의 (모던니즘)옷을 입고 재등장한 것과 유사하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 전제주의의 행태라는 것이다.

   왈쉬는 우리가 방심하면, 즉, 깨어있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바로 거꾸로 간다고, 추악한 역사로 회귀한다고 조언한다. 왈쉬는 카나다인으로서 유럽에 살면서, 또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를 두루 두루 살핀 오랜 경험과 토대를 기반으로 어떻게 역사가 좀비로의 회귀를 거듭해왔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그 회귀를 막고자 한 인간들의 노력, 분투, 그리고 승리까지도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역사는 한번 진보하면 바뀌지 않는 딱딱한 돌덩이가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행위로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유리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니, 흐르는 물처럼 상황에 민감하고, 그래서 쓰나미처럼 우리 삶을 송두리채 가져갈 수도 있고,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목마른 우리 삶을 살려내는 움직이는 제도이다. 동시에 우리의 바르고 꾸준한 노력으로 더 성숙하게 유지, 지속될 수 있는 역동적 존재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깨지지 않게 그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키기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노력하고, 투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격려를 하면서 강의를 마친다.

    왈쉬의 강의를 들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다. 우리는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대선을 거치면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가 얼마나 역사를 가늠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뼈저리게 배웠다. 상황이 어렵고, 계란에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의미한 노력으로 보여도, 이것이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다. 그 길이, 소중한 인권을 지키고, 약자, 소수자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단순한 이념도 아니고, 부질없는 믿음도 아니다. 이 길은 꿈틀꿈틀 살아있는 심장과 같은 운동이자 끊임없은 개혁되고 지속되어야 하는 여정이다. 힘들고 지치고 온 세계 기운이 흐트려진 오늘, 그 운동의 한 예를 나누면서 소고를 마친다. 

    카나다는 이번해가 전국적으로 지방자치제 선거가 있는 해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Saskatoon에서도 시장을 뽑고 시의회의원들을 뽑는 선거가 10월 26일에 있었다. 새로운 물결,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소망이 있었다. 그리고 기아문제, 인종문제, 원주민 문제, 환경문제등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려는 진보적인 후보 찰리 클락(Charlie Clark)이 있었다.그러나 클락은 선거당일까지 여론조사에서 계속 3위 (후보자 4명 중)에 머물렀다. 즉 여론에 따르면 그가 당선되리라는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그를 지지하고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이들은 쉼없이 뛰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거운동을 했다.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의 소중한 노력과 한 사람 한사람의 투표로 시선거 역사상 전대미문한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면서 찰리 클락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각주:8]


ⓒ 웹진 <제3시대>



  1.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6/sep/30/rodrigo-duterte-vows-to-kill-3-million-drug-addicts-and-likens-himself-to-hitler [본문으로]
  2. https://namu.wiki/w/%ED%97%AC%EC%A1%B0%EC%84%A0 [본문으로]
  3. http://www.cbc.ca/books/2016/07/jennifer-welsh-to-present-2016-massey-lectures.html [본문으로]
  4. http://www.cbc.ca/radio/ideas/masseys/about [본문으로]
  5. Jennifer Walsh, The Return of History: Conflict, Migration, and Geopolitics in the Twenty-First Century (Toronto: Anansie Press, 2016). [본문으로]
  6.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New York: Avon Books, 1992). 1989년 에세이 “The end of Histor”y는 저널 The National Interest에 기재되었고, 본 책에 다시 수록되었다. [본문으로]
  7. https://en.wikipedia.org/wiki/The_Walking_Dead_(TV_series) [본문으로]
  8. http://www.charlieclarkformayor.ca/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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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의 경고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카나리아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새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 광부들이 광산의 터널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기 전에 터널 안으로 먼저 날려 보낸 새도 카나리아이다. 카나리아는 오염이 되었거나 독성이 퍼져있는 공기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광산의 터널안으로 날려보낸 카나리아가 돌아오면 터널안의 공기가 광부들이 일하기에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카나리아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 되돌아 오지 않는다면 그 광산안에는 독성의 공기가 만연하여 그 독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광부들이 일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한다. 요즘엔 광산에서 더 이상 카나리아를 사용하지 않지만, ‘광부의 카나리아’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쓰이고 있는데, 여기서 카나리아는 뭔가 위험하고 심각한 상황이 곧 닥칠 것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바드 법과대학 역사상 유색인종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종신교수로 임명된 라니 귀니어 (Lani Guinier) 라는 법학자가 제랄드 토레스 (Gerald Torres)와 공저한 [광부의 카나리아]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인종(race)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 사회 구성원들을 대우하는 정책이나 이론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과연 어떤 “힘” (power) 을 갖고 써야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다.[각주:1] 이 책에서 귀니어와 토레스는 미국 사회의 소수자인 유색인종들을 카나리아에 비유하면서, 미국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인지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여러 유색인종들이 자유롭게 호흡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의 소수자들인 유색인종들이 자유롭게 제대로 숨을 쉬면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사람들이 살만한 괜찮은 사회이지만, 만약 유색인종들이 인종차별과 다른 부정의한 구조 때문에 숨막혀 하면서 살아도 사는 것 같이 않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다. 유색인종들이 잘 살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면 그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제도에 대해, 특히 민주주의를 재점검하고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내의 인종문제를 제대로 다뤄야 한다는 것을 ‘광부의 카나리아’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뉴욕에서 에릭 가너 (Eric Garner)라는 흑인남성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팔다가 경찰에 의해 목주위의 호흡기관이 제압되면서 (chokehold) 11번이나 “숨을 쉴 수가 없다” (“I can’t breathe”)라고 호소하면서 죽어간 사건이 있다. 어떤 무기도 소유하지 않은 남성이 그저 담배를 판다고, 경찰의 불법 제압방식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미국 내의 인종문제와 경찰 폭력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는 한 예이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 폭력에 희생당한 흑인 남녀노소들이 증가하고 있고, 정의를 요구하는 흑인들을 ‘썩어빠진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흑인들이 대다수인 한 도시에서는 납으로 오염된 물이 버젓이 수도꼭지로 흘러 나오는데도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대학내에서도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여 최근 51개 대학의 학생들이 캠퍼스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다양한 요구를 하고 있다.[각주:2] 미국의 유색인종들, 특별히 흑인들은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공화당의 몇몇 대선 후보자들의 캠페인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 반이민정책과 구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최근 더욱 급속히 증가한 반이민정서에 이민자들도 많이 위축되고 시달림을 받고 있다. 또한 무슬림이라면 마치 모두 ‘이슬라믹 테러’와 관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들을 범죄시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미국내의 유색인종들은 국가의 보호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들’로 인식되고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비롯해서 미국의 여러가지 제도와 정책이 재점검되지 않는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독에 오염된 공기를 마신 카나리아처럼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미국에서 유색인종들이 카나리아에 비유되고 있다면, 한국의 카나리아는 누구이고, 그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과연 숨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사회인가? 아니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독성 가득한 공기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사회인가?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독에 오염된 공기에 질식되어 되돌아 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독소’ 조항이 가득한 사회 정책과 제도들로 인해 숨을 쉴 수 없는 카나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회라면 어디서 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염되고 독성이 가득한 공기를 빨리 제거하지 않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현상은 공상소설에 나오는 디스토피아의 상황과 비슷할 수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세상은 디스토피아로 보이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인 것처럼 그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카나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편하게 숨쉬면서 살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종교철학자인 코넬 웨스트(Cornel West)는 [포스트모던시대의 예언자적 사상]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즉, ‘개개인이 피어나는것, 번창하는것’을 위한 수단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인 고통을 없애는 노력에 동참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급진적인 민주주의자 (radical democrat)이다.[각주:3] 


 여기서 코넬 웨스트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란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지칭하는 “D”가 아니라 “small d”임을 강조한다. 즉, 민주당이란 정당의 당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의 소속 여부와 상관없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개별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코넬 웨스트는 급진적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 바로 모든 개별인들을 평등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으로서 행해야하는 윤리적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즉,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은 나사렛의 예수가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가장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었던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한명 한명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통을 없애는 노력에 참여하는 것이다. 타인의 영적, 물질적인 고통을 없애는 데 동참한다는 것은 높은자가 낮은 자를 대하거나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던지는 자선이나 연민의 눈길과 손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와 타인 한명 한명이 모두 평등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의 고통을 줄이면서 개별인들이 “피어날 수”있도록 ‘힘’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몇몇의 능력있고 힘있는 사람들만 살아 남고 대우받는 사회가 아니라 카나리아 같은 사회의 가장 약자들도 건강하게 숨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라고 할때 곧 제기되는 반론과 질문이 있다. 즉, 그렇게 약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들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고,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이고,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다 괜찮아 질 것이라는 만병통치약과도 같은 ‘긍정의 복음’과 개인의 능력여부를 연결짓는다. 그런데 이렇게 개별인의 부족함이나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인주의적 인간관 아닌가.  


    개인의 잘못과 부족함을 탓하기 전에 과연 그 구성원들 개별인들에게 공정한 기회와 공평한 물적/인적/교육적/제도적 자원이 분배되었는지, 아니면 ‘독소’ 조항이 가득한 정책과 제도로 인해서 숨도 한번 편하게 제대로 못쉬게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개별인이 “급진적 민주주의자”로서 지닌 “힘”이 무엇이고, 누구와 어떻게 그 “힘”을 써야하는 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질적이든, 육체적이든, 아니면 정신적이든, 실질적인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의 고통을 없애는데 동참하는 개별인들의 힘이 모이면 ‘우리’의 힘이 된다. 힘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힘을 넓혀나가는 것, 즉, 혼자만 위로 올라가는 위로의 수직적인 팽창이 아니라 옆으로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그런 힘을 넓히는 것이다. 그런 힘은, 가진자가 없는 자를 누를때 쓰는 힘, 배운자가 덜 배운자들을 누를때 쓰는 힘, 남자가 여자를 누를때 쓰는 힘, 비장애자가 장애자를 누를 때 쓰는 힘,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누를때 쓰는 힘, 권력이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누를 때 쓰는 힘, 연장자가 연소자를 누를 때 쓰는 힘, 내국인이 이주노동자들을 누를 때 쓰는 힘, 그런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는 힘이 아니라 같이 나눌 수 있는 힘, 나누면 나눌수록 많아지고 커지는 그런 힘을 말하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쓰는 힘이 결국은 나를 ‘위하는’ 힘도 되는 것이다. 수직적인 힘을 행사하는 대신에 나누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언제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입을 것을 주었고, 따뜻하게 맞았고, 병들었을 때 보살펴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갔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그런 나눔이 남들을 의식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소에 나와 내 이웃들에게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별인의 나누는 힘과 병행되어져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비롯해서 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구조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카나리아가 되돌아 오지 않는 독성이 가득한 죽음의 광산에 대해서는 폐광이 한가지 답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폐광’으로 문제들이 해결 될 수 없는 복잡한 곳이다. 일시적 폐쇄나 폐광이 답이 아니라면, 개별인이 “급진적 민주주의자”가 되어 ‘독소’ 조항이 가득한 정책과 구조를 제거하는 노력에 동참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런 길에 어떻게 동참할 지는 윤리적 책임을 질 줄 아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로서의 개별인의 몫이다. 그러나 카나리아가 되돌아 오지 않는 상황을 외면한다면 카나리아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곧 “숨을 쉴 수가 없다”를 외치며 쓰러지게 될 것이다. 카나리아의 경고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이다.  


ⓒ 웹진 <제3시대>


  1. Lani Guinier and Gerald Torres, Miner’s Canary: Enlisting Race, Resisting Power, and Transforming Democrac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본문으로]
  2. “Here Are The Demands From Students Protesting Racism At 51 Colleges.” December 3rd, 2015. http://fivethirtyeight.com/features/here-are-the-demands-from-students-protesting-racism-at-51-colleges/ [본문으로]
  3. Cornel West, Prophetic Thought in Postmodern Times (Monroe, Maine: Common Courage Press, 1993), 63-6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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