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모두 끌려갈 것이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부채사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게으름’의 표식인마냥 부끄러운 일이었던 것이 불과 수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얼마의 빚이 없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결혼을 하기 위해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다들 빚을 진다. 필자 주변의 10~20년 차이가 나는 어른들 또한 특출난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심심치 않게 빚을 지고 있다. 처음에는 대단히 어색하게 느껴졌던 대출 회사 광고도 이제는 너무나 범람하다보니 어색한 느낌도 없이 무감각해져버렸다. 길거리에는 대출과 관련된 명함들이 가을철 낙엽처럼 온통 거리를 뒤덮고 있고 TV와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빚을 진다는 일이 삶에 ‘큰 일’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거대한 채무관계의 거미줄에 촘촘하게 얽히고 설켜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 사회에 대해 어떤 수식어를 붙이는 게 유행이라 한다면, 지금 사회는 ‘부채사회’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지 않을까? 이 정도면 과거 전통적으로 인간을 연결시켰던 혈통, 우정, 사랑 등은 사치스럽거나 거추장스러운 관계이고, 오로지 채무 관계가 가장 우선적인 인간 관계라고까지 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이런 진술들은 단순히 필자의 직관이나 느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몇 가지 경제 관련 데이터들은 채무 관계가 곧 우리 삶의 최우선적인 과제이며, 우리 사회의 얼마나 절대적인 지배구조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숫자로 나타난 지표들은 이러한 진단들이 결코 추측이 아님을 이야기 해준다. 한국 사회가 점점 1% 소수 부자들만의 세상으로 구축되어 가고 있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자’라 불리는 금융자산 10억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0.33%인데, 이들의 월 가계수지(2379만원)는 일반가구(158만원)에 비해 15배나 되는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각주:1] 그럼에도 돈은 돌지 않고, 점점 서민들의 삶은 대출이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4.13 총선거를 통해 노동당 구교현 비례대표 후보가 밝혔던 말을 빌린다면,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1166조원을 돌파했다고 한다. 워낙 큰 단위의 돈이다보니 이 금액이 얼마나 큰 돈인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이를 한 사람당 빚으로 환산하면 6200만원이라는 수치가 산출된다고 한다. 지금도 세상의 빛을 처음 보고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나는 바로 그 아기의 인생 또한 ‘마이너스(-)’ 6200만원이라는 통장 잔고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언제 갚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현 정권 들어 매일 2천억원의 빚이 늘었고 작년 한 해만 따지면 하루에 3천억원씩 가계부채가 늘어난 것이다.  



       부채가 왜 심각한 문제인가? 사실 부채라는 것은 본래 그 개념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채란 미래의 소득을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당겨 쓰는 것이기에 그렇다. 사실 부채가 증가하는 만큼 소득이 따라잡을 수만 있다면, 빚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전제가 무너졌다는 점이다. 부채를 소득이 따라잡지 못한다. 부채는 갚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부채는 또다른 부채를 부추겨 그 고통을 눈덩이 굴리듯 불어나게 하고, 그 빠르기 또한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근본적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돈’만이 곧 권력이고, 이름이고, ‘존재’라는 명제는 우리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뿌리깊은 사고의 ‘틀거리’로 똬리 틀고 있다.

       이런 재앙은 거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라는 탈출구 없는 링 위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게임(Death Match) 때문이지만, 특히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발 경제 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지금의 대출 ‘헬게이트’를 연 하나의 특이점이었다. 2008년 이래 미국과 세계경제의 불황은 백약이 무효하여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미국 대선이라는 정치적 빅 이벤트와 맞물려 최저금리 기조는 좀처럼 올라갈 것 같지 않다. 하여 한국의 경제정책 또한 미국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한국 또한 최저금리를 기조로 한 정부의 경기 부양 정책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빚의 제국으로 진입하는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각주:2] 물론, 이 제국은 들어올 때는 쉬웠지만, 나갈 문은 찾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성채와 같이 우리 앞에 서 있다. 



       이렇게 서민들이 대출의 악순환고리에 얽혀 삶의 낭떠러지로 내몰릴 때, 미디어는 돈 빌리기를 더욱 부추기는 악마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케이블 TV에서는 고금리 대부업체 광고가 하루에 1364건이 방영된다고 한다.[각주:3] 하루가 1440분이니 거의 1분에 한 번 꼴로 ‘대출하라’는 말을 우리는 듣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본 방송 프로그램들의 상영시간을 제외하고 사이 시간을 이용해 광고가 나가는 걸 생각하면, 실제로 대단한 양이다. 이 글을 위해 필자가 TV속 대부 광고를 본 결과 과거에 비해 광고의 양도 현격하게 늘어났을 뿐 아니라, 광고의 형태 또한 매우 다양해지고, 광고의 질도 세련되고 더욱 부드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즉, 과거에 공격적이고 노골적으로 ‘돈을 빌리라’는 말을 했다면, 지금은 대출과 관련된 ‘스토리’를 만들어 ‘대출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 감성전략을 사용한다거나, 고정 수입이 없어 1금융권에서 대출이 어려운 전업주부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 전용 대출 등 특정계층을 공략하는 전략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서슴치 않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끝없이 빚을 권하는 사회는 흉측한 괴물이 되었지만, 그 괴물은 우리 앞에 선량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 달콤한 말들로 사람들은 대출의 늪으로 계속해서 이끌어가고 있다.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바빌론의 등장


       그러던 요즘, 며칠 전 운전을 하고 가다가 필자의 눈에 대형 건물 광고 간판이 들어왔다. ‘000저축은행 바빌론, 바로 빌려주는 론(Loan, 대출)!’이라는 문구였다. 이 저축은행은 대출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인 ‘신속성’ 즉, 금융 관련 이력과 조건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체 없이 바로 빌려주는 론! 임을 자처하고 그 앞 글자를 따 자신들을 ‘바빌론’이라 칭한 것이다.


  

       이제는 너무 많아서 무뎌질대로 무뎌진 대부업체 광고 중 하나이긴 했지만, 필자는 신호에 걸린 채로 무언가에 홀린 듯 이 간판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바라보았다. 바빌론이라는 글자는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이스라엘 주변에 자리하여 이스라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바로 고대 근동 지방의 대제국 바빌로니아(또는 성경 번역에 따라 바벨론이라고도 불린다.) 말이다. 성서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끝없이 침략하고 결국에는 예루살렘을 겁탈한 ‘제국’이며, 타락한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망치’(예레미야서 50:23)이기도 하다.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은 약소한 예루살렘과 그 거주민들을 사정 없이 침략, 강탈하였고, 예루살렘의 심장이자 야훼와의 언약을 상징하는 성전을 무참히 짓밟았다. 제 1성서(구약)의 수많은 야훼의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소위 갈대아인, 바빌로니아인들은 유다국의 왕을 능멸했다. 왕을 심문하고, 그 자식들을 처형하고, 눈을 빼어 쇠사슬로 묶어 그들의 땅으로 끌고 갔다. (열왕기하 25:6~7)  

       또한 성전, 왕궁, 성벽 등 건물이라는 건물은 다 부숴버리고 거주민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가 버렸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서 절대 보호받을 것만 같던 야훼 신앙의 상징인 성전 내에 있는 집기류들과 거룩한 물품들이 모두 갈대아인의 손에 빼앗겼다. 성서 내에서는 열왕기하 25장에서 일련의 사태를 기록해 놓고 있고, 당시 유다국 전반적인 상황을 김진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에 의해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된 것이다. 두 번의 침공(주전 597년 여호야긴 왕 때; 주전 586년 시드기야 왕 때)으로 거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불타 사라졌고, 수많은 농촌마을 또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무려 85%의 거주지가 역사에서 사라졌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급부상한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은 한때 인구가 일만오천 명에 이르는, 요시아 왕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가 되었으나, 전란 후 오랫동안 그 십분의 일인 일천오백 명을 넘지 않는 소읍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농촌의 경작지들은 거의 쑥대밭이 되었고, 대다수의 주민들은 유민이 되어 타지역으로 이주하여 마을은 거의 비어버렸다. 유대 지역은 이후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한 채 버려진 땅이 된 것이다. [각주:4] 


       모든 것이 끝났다. 바빌로니아는 이방 세력의 침략과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예루살렘의 성전, 궁전 등을 모조리 박살 내었다. 과거 히스기야왕 당시 이방인들의 침략에도 야훼에 대한 신앙을 굳건히 하여 위기를 넘겼던 나라였다. 훨씬 부강했던 북쪽의 이스라엘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훨씬 약소국이었던 유다가 100여년 가까이 무너지지 않고 연명하는 걸 보고 ‘과연 하나님이시로구나!’를 연신 내뱉았겠지만, 바빌로니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유다는 패닉에 빠졌다. 

       그런데, 바빌로니아가 이렇게 유다를 처참하게 짓밟기 전, 바빌로니아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다가 맞고 구금되고 모진 고문을 겪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예레미야와 그 일단의 무리들이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시작한 것은 요시야왕 즉위 후 13년이었다. 요시야 왕에 의해 야훼 신앙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중흥을 위한 시도가 재차 모색되었지만, 강대국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이 상황에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다. 분명 그는 자신의 예언으로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렘 20:7, 9) 예언을 해갔다. 왕실과 기존 권력의 입장에서는 숨기고 싶은 사실을 떠벌리는 예레미야가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핍절한 민중의 삶을 ‘힐링’ 해 줘야 할 예언자가 꼭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듯 쉬지 않고 파멸을 외치니 미움을 살 수밖에. 불온한 예레미야에게 파멸을 선언한 댓가로 모진 형벌이 내려졌지만, 그 고문이 끝나고 나서도 그는 입을 쉬지 않은 모양이다.(렘 20:3~6) 예레미야 입장에서도 피로감이 몰려왔다. 파멸을 선언할수록 유다국이 파멸하기는커녕 자신의 삶만 고달파졌다. 천천히 말려 죽인다고나할까, 도래하지 않는 파국에 대한 허탈함이 커져 갔다. 그치만, 그 신탁의 운명을 한편으로는 체념하고, 또다른 편으로는 뜨거운 불에 달려드는 부나비처럼 뛰어들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런 ‘모두’가 고통받는 상황을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예레미야 20장)


       예레미야가 겪는 이 참담함은 우리에게 놓여진 현실과도 많이 닮아 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멸당할 것이라 외치는 예레미야나 단박에 빌려준다는 ‘바빌론(바빌Loan)’, 즉 금융자본제국에 의해 우리가 곧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고발하는 지금의 예언적 무리나 수치를 당하기는 매한가지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는 이들이 받는 대접은 예레미야가 당하는 것만큼 수치스럽다. 금융자본의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선언은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기 십상이다.

       단지, 그 수치의 모양새가 권력에 의한 폭력이 아닌 일반 서민들에 의해 ‘냉소’되는 것으로 수치를 당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차피 파국을 선언해봤자 달라질 게 무엔가’라는 메시지는 주류 언론에서 ‘달관 세대’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리기도 한다.[각주:5] 파국에 대한 선언이 이토록 조롱을 당하는 이유는 그만큼 제국이 안겨줄 비참함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 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지연된 고통을 ‘지금 당장은’, ‘지금만이라도’ 멀리하고 싶은 마음일 게다. 조금이라도 더 미루고 싶은 심정이야말로 매우 힘겨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태어남 자체를 저주했던 예레미야의 말(렘 20:14)처럼 우리는 창자를 부여잡고 대출과 금융자본제국의 파국에 대해 더욱 선언하고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달콤하고 짜릿하게 한 방에 이 고통을 끝내줄 것처럼 말하는 ‘바빌론’에 대해 진지하게 파산을 선언해야 한다. 적어도 법 규제를 통해 미디어를 통한 빚을 권하는 재생산이 줄어들어야 하고, 현재 일부 지자체나 시민단체를 통해 벌어지고 있는 악성 부채 등 빚 탕감에 관한 사회적, 국가적인 논의가 더욱 많아져야 하겠다. 논의를 넓혀 조세도피처와도 같은 상류층에 의해 저질러지는 악질 경제범죄에 대해 시민들 스스로 감시와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각주:6] 특히, 이러한 거대한 자본의 횡포와 맞서 ‘난장이들이 쏘아 올리는 공’에 대한 냉소 또한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달관’ 같은 냉소의 말이야말로 사회의 병폐를 고착시키고 이 체제를 우리 속으로 더욱 내면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바(로) 빌(려주는) 론(Loan, 대출)’의 포로가 되어 모두 끌려가게 될 것이다. 아니, 지금도 이미 그 포로의 행렬은 시작되었고, 계속되고 있다. 단지 내가 지금 빚지지 않고 있다 하여, 포로의 상태가 아닌 게 아니다. 붕괴가 진행중인 금융 자본주의 제국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다. 그 파국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것이 빠를수록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고 그릴 수 있는 시간이 그나마 확보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수치는 2012년의 수치이며, 지금은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김철호, 임태영, 김옥연, 「10등급 국민」 (대장간, 2015), 184쪽. [본문으로]
  2. 경제학자 장하준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세계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 일부에서 불황이 끝났다고 성급히 선언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지만 지속적으로 경기가 회복될지는 아직 불확실한 상태이다. (…) 설사 경기가 지속적으로 회복된다 하더라도 이번 금융 위기의 여파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업과 가계 부문은 원상 복구하는 데에만 몇 년이 걸릴 것이고, 이번 위기로 말미암아 생긴 엄청난 재정 적자를 만회하느라 정부는 공공 투자와 복지 혜택을 줄일 수밖에 없어서 길게는 몇 십 년 동안 경제 성장, 빈곤 문제, 사회 안정성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11~12쪽. [본문으로]
  3. MBC PD수첩 1041회, 「가계빚 1100조,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15. 6. 9 방영) [본문으로]
  4.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3, 웹진 제3시대 제 1호, ‘[시평] 그달리야의 꿈에서 위기를 보다(김진호)’ [본문으로]
  5.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24/2015022400161.html 조선일보는 ‘달관세대가 사는 법’ 이라는 시리즈물을 연재한 바 있다. [본문으로]
  6. http://newstapa.org/tax-haven-2016 , 인터넷 언론인 뉴스타파는 정치인, 경제인들의 조세도피 문제를 국내에서 유일하게 보도한 바 있고, 세계적으로도 이 문제는 큰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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