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스러운 전쟁: 요한 계시록을 통해 본 폭력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지난 6월 한국은 퀴어 퍼레이드에 반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와 단체 행동으로 시끄러웠다. 얼마 후 미국은 동성결혼이 헌법에 명시된 미국 시민의 기본 권리임을 대법원이 인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대법원 판결이후, ‘동성결혼 반대’를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로 인해 약간의 소동이 있긴 했지만, 미국은 대체적으로 조용했다. 미디어들도 이들의 주장에 크게 동요되지 않는 듯 했고, 오히려 동성결혼 합헌 판정에 기뻐하는 성소수자들의 동향을 전했다. 대법원이 합헌 판정을 내리는 기간에 내가 속해 있는 미국 성공회의 전국회의 (General Convention)가 유타주의 솔레이크 시티에서 열리고 있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이 회의에서, 주교단과 대의원들은 교회법에 명시된 결혼의 정의를 ‘남성과 여성의 결합’에서 ‘성숙한 두 사람’의 결합으로 바꾸는 것을 결정했고, 미국 성공회 역사상 최초로 흑인 의장 주교를 선출하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동성애 문제로 지역 성공회 교회들이 갈라지고, 동성애에 반대하는 신부들과 주교들이 교회를 떠나는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으니, 앞으로 교회가 계속 시끄러울 것 같다.
          동성애와 관련된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을 보면서,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쟁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오히려 어떤 전쟁에 대해서는 지지의 목소리를 보내면서, 성소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중오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유독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성소수자들의 인권이 전쟁의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억압—전쟁, 가난, 가부장제, 동성애 혐오주의, 외국인 혐오주의 등등—은 그 근본을 들여다 보면, 모두 서로 얽혀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양분을 공급해주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 동성애 혐오주의와 군사주의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친밀 관계의 예를 잘 보여주는 성경이 요한 계시록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부터 ‘퀴어 성서 주석 (Queer Bible Commentary)’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요한 계시록 주석을 번역을 위해 천천히 집중해서 읽다 보니,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 왔다.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요한 계시록을 연구하는 권위자로 알려진 티나 피핀(Tina Pippin)과 게이 신학자인 마이클 클락 (Michael Clark)이 함께 쓴 요한 계시록에 대한 퀴어적 해석은, 이 저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 나로 하여금 전쟁의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했다.
          요한 계시록은 단순히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책이 아니라, 전쟁에 관한 책이며, 전쟁과 섹슈얼리티 (sexuality)가 함께 하는 책이다. 신약학자들의 대부분은 요한 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살았던 폭력과 전쟁, 귀족들의 무분별한 쾌락 추구와 억압으로 점철된 1세기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와 관련지어 읽는다. 제 3세계 신학자들은 제국주의 억압에 대항하는 해방의 메세지로 요한 계시록을 바라 보기도 한다. 제3세계 신학자들의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피핀과 클락은 요한 계시록에서 해방의 메세지, 특히 성소수자들을 위한 해방의 메세지를 찾기는 힘들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전쟁과 파괴의 신이며,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을 오히려 외면하는 침묵의 심판자이며, 그가 건설하려는 왕국은 하늘과 땅이 철저히 파괴된 후에야 등장해서 오직 선택 받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동체이다. 피핀과 클락은, “왜 이런 하느님을 우리가 믿어야 하지? 이런 이미지에서 하느님을 해방시켜야 하지 않나?”라고 질문한다.
         실제로 요한 계시록은 하느님이 코디네이터로써 소리 없이 전쟁을 주관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하느님의 허락을 받은 네 천사가 지구의 네 귀퉁이에서 차례로 나팔을 불면, 전쟁과 기근 전염병 등의 재앙이 선택받지 못한 이들을 죽음과 질병으로 몰아 넣는다. 전쟁, 기근, 전염병은 따로 떨어진 사건들이 아니라 함께 일어나는 현상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농업 공동체와 지구의 파괴로 인해 기근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기근은 때로 전쟁과 무력 충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전쟁과 기근으로 버려진 사람과 가축 시체로 인하여 전염병이 도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이다. 문제는 전쟁을 일으키고 조정하는 자들은 전쟁터에서 보이질 않는데, 전쟁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죽음의 천사들도 당연히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며, 이 천사들에게 지구를 치라고 명령하는 신의 모습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알지만, 왜 일어났는지, 누가 일으켰는지, 그리고 왜 자신들이 피해자가 되어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 한채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어느 전쟁이나 희생양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희생양들은 여성들, 소수 인종들, 외국인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인 경우가 많다. 피핀과 클락은 제리 파웰 (Jerry Falwell)과 같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종말론의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요한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을 종말의 신호로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이들은 유럽 연합의 탄생을 적그리스도 왕국의 탄생으로, 심지어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몰아가기도 한다. 1차 걸프 전쟁 때도 20세기말 종말론자들은 아마겟돈의 시작이란 억지 주장을 했고, 21세기 들어선 9/11 테러 사건, 이란의 핵무기 개발, 2차 걸프 전쟁 등이 곧 다가올 아마겟돈의 징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에이즈는 말세의 질병으로. 그리고 에이즈 확산의 책임은 동성애자들, 특히 게이들에게 떠넘겨졌다. 결국 계시록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동성애자들이 말세의 기승전결을 알려주는 황당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계시록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등장하여 독자들의 시선을 잡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자색옷을 입은 바벨론의 창녀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모든 타락한 것들의 어미로 그려지고, 해와 달을 입은 여인은 광야에서 해산을 하고 용에게 쫓기다가,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피난처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피핀은 다른 책에서 요한 계시록이 여성 혐오주의로 가득 차 있다고 썼다. 그녀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선과 악의 대결로 점철된 요한 계시록에서 여성의 위치 또한 악녀와 선녀로 나눠진다. 바벨론의 창녀는 죽음 또한 참혹해서 그녀의 시체는 갈갈이 찢겨져 영원히 불타게 되고, 만국 백성들은 그 시체 위에서 기쁨에 넘쳐 축제를 벌인다. 반면에 선한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해와 달을 입은 여인은, 실제로는 모호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녀는 앞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될 남자 아이를 출산하기 때문에, 존재의 가치가 있고 신의 보호를 받는다. 아이가 태어난 후, 광야로 사라진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녀가 예수가 지상에 건설한 천년왕국에 들어 갔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록에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1440명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에서 각각 차출된 남자들이니까. 해와 달을 입은 여인 뿐만 아니라, 예수의 천년왕국에, 그 후에 새로이 건설되는 새 예루살렘에 여자들도 있는지 조차 알 방법이 없다.
         바벨론의 창녀, 해와 달을 입은 여인, 하느님의 인치심을 받은 선택받은 남성들. 이들의 이야기들이 이상하리만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가?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는 마치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인냥 바벨론의 창녀처럼 비난받는 여성들이 항상 존재하고, 아들들과 연인들은 전쟁터에 보내고 꿋꿋이 삶을 지탱해 나가는 자랑스러운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감동의 전쟁 스토리를 보내오는 남성 군인들, 전쟁 영웅들이 있다. 여성학자 신시아 인로 (Cynthia Enloe)에 의하면, 전쟁을 결정하는 국제 정치의 무대와 함께 실제 전시상황이 되면, 사회 곳곳에 잠재해 있던 남성중심주의가 더 강화되는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전쟁과 같은 급박하고, 때론 위험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국제 정치의 장에서 이성적이며, 강인한 남성만큼 제격인 사람은 없다. 마치 요한 계시록의 하느님처럼 새로운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잔인한 전쟁도 불사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언제 질병의 나팔을 불지 (현대전에서 사용되는 생화학 무기 같은 것), 언제 융단 폭격을 가하고 원자 폭탄을 떨어뜨려 한 방에 전쟁을 끝낼지를 냉철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데, 남성 지도자만큼 제격인 사람을 찾긴 힘들 것이다. 이 전쟁 지도자에게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받칠 선택받은 1440명과 같은 남성군인들이 있어야 하고, 이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국가가 얼마나 정성을 다해 이들을 선택했느가를 끊임없이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이 모든 전쟁 시나리오에서 여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여성들은 그들이 어떤 남성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어 진다. 바벨론의 창녀는 역사적으로 소위말하는 적군의 여성들 (enemy women)이 어떻게 다루어 졌는지와 일맥상통한다. 현대전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여성을 철저히 성적 대상화하면서 가능해 진다. UN의 전시 성폭력에 대한 최근의 보고서 (UN Report on Sexual Violence in Conflict)에 의하면, 성폭력이 전술의 하나로 사용된지 너무 오래 되었다. 적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어 무기력하게 만들고자, 또는 남성 군인들을 하나로 묶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전술적으로 사용된다. 오랜 동안 여성은, 출산과 양육이란 독특한 특성으로 인하여, 한 민족이나 나라의 땅과 문화와 동일시 되었고, 이러한 여성의 몸을 정복하고 파괴하는 것은 적군을 파괴하는 행위와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문제는 보코 하람이나 이슬람 국가 (IS)와 같은 종교 신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과격한 테러 단체가 전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이미 전쟁으로 사회 안전망이 파괴되어 버린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제주 4.3 학살 사건과 같은 국가의 조직적인 폭력이 일어났을 때,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공산당원의 가족이란 이유로, 공산당원으로 의심받는 가족의 구성원이란 이유로 많은 제주 여성들이 서북 청년 당원들, 육지 경찰, 군인들에게 강간당하거나, 그들과 강제 결혼을 당했다. 전쟁 중에 ‘우리편’에 속하지 않은 여성들은 (바벨론의 창녀와 같은) 위험한 여성들로, 전사들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여성들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에게 합당한 벌은 강간하고 죽이는 것.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 그들을 전쟁의 원인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런 비이성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이 전쟁이란 상황에서 (종말이란 상황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이제 성폭력은 여성과 소녀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들, 남성들을 가리지 않는다. 이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레즈비언 여성들을 대상으로 ‘치료를 위한 강간 (corrective rape)’ 범죄가 보고 되고 있고, 시리아와 이라크 분쟁지역과 난민촌에서 성소수자들을 대상으로한 성폭력이 증가하고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사회 부조리와 전쟁의 원인 제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들의 잘못으로 모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이들을 성적으로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 중이라도 살인에 대해 극도의 도덕적 저항감을 느끼는 인간 본연의 심리를 분석한 데이비드 그로스만 (Ltd. David Grossman)은 그의 책 ‘살생에 관하여 (On Killing)’에서 우리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 하면서도,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피하는 분야가 전쟁(살생)과 성(sex)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그의 책이 이 둘의 상관관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 두 분야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독자들에게 권유한다. 전쟁과 성은 우리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지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며, 체계적이며 합리적인 윤리적 행동을 생각해 보는 것을 어렵게 하는 분야이다. 그렇기에 폭력과 성은 마치 공포영화처럼 인간들을 짜릿하게 흥분시키면서도, 동시에 두렵게 만들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 하지만, 계속해서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밧모스 섬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환상을 보았던지 간에, 그 환상은 사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되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전쟁과 폭력, 자유 남성 계층의 무분별한 성적 유희, 여성-노예-소년들이 자유 성인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된 로마제국의 시대상과 사도 요한이 가지고 있던 가부장적 유대민족 독립운동사상이 맞물려 탄생한 책이 전쟁과 성폭력으로 얼룩진 요한 계시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시 성폭력이란 관점에서 요한 계시록을 바라보며, 나는 더이상 미래에 다가올 종말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지나온 역사가,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더 공포스럽다고 느껴졌다. 강제로 군위안부로 끌려가 이국 땅에서 일본군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다가 죽어간 한국 소녀들, 미국 주둔군을 위한 성적 유희 제공자로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어간 기지촌 여성들, 전국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린 304명의 단원고 학생들,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죽은 두살배기 팔레스타인 아기, 레즈비언이란 이유로 집단 강간당하고 머리에 총을 맞아 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살로네 등등. 이들의 이야기가 종말의 이야기이고, 가부장적 폭력으로 가득 찬 군사주의, 여성혐오주의, 동성애 혐오주의가 지구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묵시록적 증언이다.



<참고 문헌>
    Pippin, Tina and J. Michael Clark. “Revelation/Apocalypse.” In The Queer Bible Commentary. Edited by Deryn Guest, Robert E. Goss, Mona West, Thomas Bohache. London: SCM Press, 2006. Kindle Edition.
    Enloe, Cynthia. Bananas, Beaches, and Bases: Making Feminist Sense of International Politics, 2nd Edition.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4. Grossman, David. On Killing: The Psychological Cost of Learning Killing in War and Society, Revised Edition. Open Road Media, 2014. Kindle Edition.
    United Nations Office of the Special Representative of the Secretary-General for Sexual Violence in Conflict, “Key United Nations Initiatives to Address Conflict-Related Sexual Violence.” http://www.un.org/sexualviolenceinconflict/our-work/key-initiatives/
    오금숙.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인권 피해사례.” 제주 4.3 연구소 엮음.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제주 4.3 제 50주년 기념 제2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 보고서.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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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폭력과 비인간화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최근 미국 미주리 주의 퍼거슨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며, 저명한 흑인 학자 코넬 웨스트 (Cornell West)가 한 말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라크에서 하고 있는 일은 미국 내에서 흑인을 대하는 것과 똑같다. (Cornel West, Democracy Matters, 2005)” 코넬 웨스트는 이라크 전쟁 중 미군이 행한 민간인 학살과 전쟁 포로의 인권유린이 미국 내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흑인 청년들에 대한 조직적인 경찰 폭력, 사회적 편견 등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웨스트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16세기 부터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흑인 노예 제도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당시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천부 인권론 등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서구에서, 노예 매매제도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아이러니 입니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흑인을 철저히 비인간화 하며 지속되었습니다. 흑인 남성들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고, 폭력적이며, 성욕과 같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는 이념화 과정이 그것입니다. 비록 흑인 노예제도가 1865년 남북 전쟁과 함께 종료된 것처럼 보이지만, 해방된 흑인들은 그 후로 부터 100년 동안 짐 크로우 법 (Jim Crow Laws) 밑에서 인권을 유린 당하며 살았습니다. 짐 크로우 법은 공공 장소에서의 인종 분리 정책을 합법화한 법으로써, 이 법 아래에서 흑인들은 법정 증언도 할 수 없었고, 공정한 재판도 받을 수 없었으며, 백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어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노예 제도나 짐 크로우 법을 주류 기독교가 오랜 동안 지지했다는 사실은 역사상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짐 크로우 법 시대에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나무에 매달아 죽인 사람들은 백인 기독교인들 이였습니다. 흑인 해방 신학자 제임스 콘은 린치 당하고 죽은 흑인이 매달린 나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직화된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의 상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James Cone, The Cross and the Lynching Tree, 2011). 백인들의 기독교에 의해 철저한 인권 유린과 지속적인 국가 폭력을 경험하는 흑인들이 예수 안에서 자유함과 해방을 누리기 위해서는,  흑인 여성 신학자인 숀 코플랜드(Shawn Copeland)가 이야기하듯,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 그리고 정신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Shawn Copeland, Enfleshing Freedom, 2009). 그래서 흑인 해방 신학과 흑인 여성 신학은 백인 주류 신학이 이야기하는 전지 전능한 하느님이 아닌, 약자와 함께 고통 받는 하느님, 체제의 부조리와 약자를 비인간화 하는 사회구조에 끊임없이 대항하는 하느님, 공동체와 약자를 힐링하는 하느님을 이야기 합니다.

          미국 남부 미주리주 퍼거슨 시에서 백인 경찰이 비무장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에게 여섯발의 총을 쏘아서 숨지게 한 사건은, 미국 사회에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주의가 어떻게 공권력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현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지역에서 벌리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과 군사 작전, 그리고 퍼거슨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 차별, 폭력적인 공권력에 대항하는 폭력 시위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앞서서 이야기한 것 처럼, 인종 차별은 유색 인종을 비인간화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오랜 동안 흑인들은 짐승 또는 ‘악(evil)’과 동일시 되면서 정복되어야할 백인들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미국의 역사는 실제로 유색인종에 대한 끊임없는 ‘타자화’와 ‘비인간화’의 연속입니다. 미국의 원주민 학자이며 사회 운동가인 안드레아 스미스 (Andrea Smith)의 책 ‘정복 Conquest’은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어떻게 정착 초기부터 미대륙의 원주민들을 타자화 하고, 철저히 비인간화 시키면서 그들의 땅과 문화를 파괴해 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미국의 부와 권력은 수많은 원주민들의 죽음과 흑인 노예들의 죽음 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소리 없는 죽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대륙의 원주민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유럽의 여성 혐오주의에 바탕을 둔 가부장제와 달리 여성의 정치적 의사 결정권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옷 차림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자화 되고 비인간화 되었습니다. 비인간화된 원주민들을 살육하는 것은 동물을 사냥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공동 소유의 원칙을 실천하는 원주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사유 재산화 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동식물과 약품에 관한 다양한 지식도 사유화 하는데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성폭력과 함께 여성들을 대상으로한 피임약과 같은 약물 실험도 원주민들이 감당해야 할 사회 폭력이였습니다. (Andrea Smith, Conquest, 2005)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중에도 적으로 간주된 한국인들과 베트남인들은 타자화와 비인간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한국 전쟁 중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 (노근리 사건, 거창 학살 사건, 포항 피난민 학살 사건 등)과 베트남 전쟁 초기 부터 일어난 민간인 학살 (마이 라이 마을 학살 사건, 네이팜탄 사용 등)은 미국이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 한 데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북한군들과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은 문명화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미개인들이 사용하는 군사 전략과 전술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러한 미개인들과 똑같은 외모와 언어를 가진 남한 사람들, 월남 사람들은 적군과 비슷한 이들이거나, 또는 자기 방어 조차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타자화된 동양인들의 생존은 미군의 자비심에 달려 있었습니다. 한편 개개인으로써의 미국 군인들은 끊임없이 왜 자신들이 들어 본 적도 없는 이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를 물어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적군을 얼마 만큼 성공적으로 타자화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적군이 나와 다른 (또는 주류 사회와 다른) 성별, 인종, 언어, 종교, 문화 등을 가지고 있다면 타자화와 비인간화는 쉬워집니다. 만약 군인들이 적군을 그들과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면, 적군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됩니다. 성공적인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인들로 하여금 적군을 증오하도록 만들고, 타자를 끊임없이 구별해 내며, 적군을 비인간화하는 정신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정신 훈련은 군인들이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육체를 끊이 없이 정신에 복종시키는 작업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정신’이 ‘적’이라고 판단된 것을 보면 즉각적으로 ‘몸’이 반응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반사 신경’을 기르는 것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나 심각한 도덕성 장애(Moral Injury)로 일상 생활이 힘든 참전 군인들 대부분은, 군사 작전 중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거나, 적군에 대한 감정이입을 경험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처럼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끼며, 지켜야할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미국의 군사작전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군사작전의 일부분이란 사실이 감당하기 힘든 양심의 가책 또는 정신적 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은 인종과 성별을 초월하여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에 양심적 가책을 느끼기 때문에, 소시오 패스나 사이코 패스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쟁 중이였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미국도 그러하지만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성을 보면, 한국이 전쟁터 같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어린 학생들이 폭력까지 사용하는 왕따 문제,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각양 각색의 성범죄들, 외국인들 대상으로한 차별과 폭력, 장애인이나 노인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 감정 노동자들을 상대로한 무분별한 언어 폭력과 군대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 골수 우익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무분별한 이념 전쟁까지…… 이 모든 종류의 폭력은 희생자를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타자화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타자화와 비인간화가 만연된 사회에서 물리적 전쟁이 일어나면, 비 전시 상황에서 타자화의 대상이 되었던 약자들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한국 전쟁 발발 시기에 보도 연맹원 학살이나, 서북 청년당이 ‘빨갱이들’과 그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타자화와 비인간화가 이루어졌었기 때문입니다. 

           타자화와 비인간화는 반 기독교적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근간에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거룩한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신 그 삶, 특히 사회가 죄인이라 낙인 찍힌 사람들과 연대한 삶을 지금의 교회들이 그리고 내가 살아 가고 있는지 묵상하는 대림절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쟁에 대한 저항은 타자화와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과 일맥상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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