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병제가 사고를 막아준다고?



 

백승덕*


 

   “2025년이면 인구절벽이 온다!” 남경필 경기도 지사가 모병제를 추진하자고 나서면서 내놓은 이유다. 군 병력을 30만 명으로 줄이면 사병월급을 200만원씩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에 안희정 충남지사가 대권도전 선언을 했던 것이 영향을 줬다는 평가도 있지만 사뭇 합리적인 계산이기는 하다. 인구는 줄고 병영사고는 끊이지 않는데, 언제까지 지금처럼 관성적으로 징병제를 유지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모병제가 훨씬 합리적이라는 셈법은 이제 웬만큼은 상식이 된 모양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문재인 후보가 모병제 이행 공약을 내놓았다가 아슬아슬하게 낙선했다. 정의당은 아예 ‘한국형 모병제’를 대표적인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이쪽 모병제론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일했던 김종대 의원이 주도하고 있다. ‘한국형 모병제’는 2025년까지 병력수를 40만 명으로 줄이고 6개월 의무복무를 유지하되 병력의 대다수는 직업군인으로 채우는 식의 구상이다. 참여정부에서 내놓았던 국방개혁안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남경필이든 김종대든, 한국 정치권에서 모병제를 주장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인구수가 갈수록 주는데 현재 병력수를 고수한다면 현역복무에 부적합한 병사들이 군대에 더 많이 유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총기사고나 자살 등 끔찍한 병영사고도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병력수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가고 싶은 사람들만 가는 군대’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실제로 징병검사 결과 현역대상자로 판정받는 비율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징병검사 대상자의 50% 가량만이 현역 판정을 받았다. 1990년대에는 이 비율이 80%대로 증가했다가 현재는 징병검사 대상자 중 90%가 넘는 인원이 현역 판정을 받고 있다. 모병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현역 판정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서 심리나 인성에 문제가 있는 자들이 군대에 유입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모병제를 운영하는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이들의 주장을 마냥 좇을 수는 없다. 모병제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미군의 경우를 살펴보자. 미군의 경우 현역 군인들 중 10만 명 당 17~1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미국인 평균 자살률이 10만 명 당 13명인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연합뉴스, 2015년 4월 2일) 게다가 미군주둔지에서 미군에 의해 민간인 성폭행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주한미군 기지가 있는 오키나와에서는 올해 들어서 성폭행 및 살해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주민들이 기지철수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가고 싶은 사람들만 가는 군대’가 과연 답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동부전선 GOP총기사고 사건, 28사단 윤모 일병 폭행사망 등 심각한 병영사고가 연달아 터지면서 ‘정신이상자’를 관리하라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지만 이 또한 비현실적인 주문이다. 지금 한국의 병영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이 ‘정신이상자’들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는 믿음은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정신이상자’를 걸러내자!”


   1968년 5월 18일 밤 10시, 안동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문화극장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주말을 앞두고 영화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많아서 극장은 만원이었다. 영화관 문을 나오던 사람들은 대체로 연인들이었고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갑자기 군인 한 사람이 그 앞을 가로막고 서더니 군중 사이로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당시 상황을 취재한 신문기사는 현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날 문화극장의 마지막 프로, 영화 「복수」가 끝난 것은 밤 10시 19분쯤이었다. 4백여 명의 관객이 앞을 다투어 막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8미터 맞은편 사창가 임재순씨(36) 집에서 뛰어 나온 신하사가 앞서나오던 관객 약70명을 향해 수류탄 1개를 내던졌다.

귀가 찢어질 듯한 폭음과 초연 속에 『사람살리라』고 관객들이 아우성치는 사이에 또 수류탄 1발이 터졌다. 연거푸 떨어지는 폭음에 놀란 관객들은 짓밟고 밟히며 도로 극장 안으로 몰려 들어가고 더러는 문을 빠져나가 어둠속으로 도망쳐가기도 했다. (중략)

극장 안 시멘트벽에는 군데군데 파편자국이 할퀴고 극장 문 앞 에는 피범벅이 된 남녀 어린이 고무신 대여섯 켤레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는 주인 잃은 시계 하나가 10시20분을 가리킨 채 멈춰있었다. 19일 낮까지도 핏자국이 낭자한 극장주변 길에는 헌병들이 새끼줄을 치고 통행을 막고 있었다.” (중앙일보 1968년 5월 20일) 


   5명이 사고 현장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심각하게 다친 사람들도 40여 명이나 됐다. ‘안동 수류탄 사건’은 당시 가장 심각한 뉴스로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1968년에는 1월부터 청와대기습 미수사건을 비롯해서 무장공비사건이 이어지면서 박정희 정권이 국가안보를 강조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250만 명을 동원하는 향토예비군 창설을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였다. 당시 야당은 지역마다 향토예비군을 위한 무기를 가져다 놓으면 사고가 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안보가 위협받고 있다고 대꾸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현역 군인이 휴가 중에 민간인들에게 수류탄을 집어던진 것이다. 그것도 두 개를 연달아서. 

   당연히 난리가 났다. 사건의 전말이 공개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신 하사는 휴가 중에 자기 부대로 찾아가서 후임병에게 수류탄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보고체계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정부가 국민들에게는 북한이 쳐들어오고 있으니 그 어느 때보다 정신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던 때에 정작 현역 군인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이도록 방치할 수 있었던 것인가. 야당과 여론은 당연히 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군에서 진행된 수사는 해당 하사의 가해 동기에 초점을 맞춰졌다. 수사를 통해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신 하사는 애인이 변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복수심에 불타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증언했다. 처음에는 애인을 살해하기 위해서 부대를 떠나왔지만 영화관에서 나오던 일반인들이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고 사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는 것이다.

   군 당국은 이 사건을 심리이상자의 일탈로 발표했다. 당시 여론 역시 당국의 발표에 따라서 정신질환자 관리를 요구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 과정에서 신 하사의 개인사가 공개됐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가출을 해서 성매매집결지에서 일을 하고 구두닦이를 하는 등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사건의 원인은 이제 분명해졌다. ‘안동 수류탄 사건’은 현역 사병 및 간부들의 ‘심리’가 문제로 대두되게 만든 계기였다.


장병인권개선에서 정신의학적 처방으로


   사실 병영사고는 그 이전에도 끊임없이 발생했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폭력사고로 인한 사망사건이나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국방 당국은 곤혹스러워했다. 그때마다 군대 내에서 상급자에 의한 불합리한 명령이나 사적 제재가 원인으로 지적됐다. 병영에서 일상적으로 이어지던 ‘기합’ 문화를 일제 잔재로 지목하여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크게 힘을 받고 있었다. 예를 들면 1959년 12월에 1군단에서는 군대 내 폭력사고가 잇따르자 ‘장병인권옹호운동’을 전개했다. 일선부대에서 부하를 때려 숨지게 하거나 품팔이를 시킨 상관들이 처벌됨에 따라서 군단 차원에서 기합을 폐지하고 군 재판을 개혁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인 것이다.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이러한 흐름은 계속 이어졌다. 1963년 4월 김종오 육군참모총장이 전방 훈시 중 ‘말단사병일지라도 인권을 존중하라’고 말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권유린과 사적제재가 군의 단결력을 파괴하고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인권개선 등 뚜렷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군 당국에서도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고 보는 것이 적확할 것이다. 1965년 8월에도 부산 모 경비중대에서 야간 보초 중이던 일병이 내무반에 들어가서 직속상관인 상병과 병장을 불러내어 칼빈 소총을 약 30발을 난사한 사건이 벌어졌다. 군 당국은 이 사건 역시 기합 사적제재 때문에 발생한 하극상이라고 판단했다. 해당 병장이 3명의 상병을 내무반에 데려다놓고 군기문란을 지적하면서 야전용 곡괭이 자루로 무수히 구타하자, 이번엔 기합을 받은 상병 중 한 명이 후임들을 모아놓고 모진 기합을 준 데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일선 부대에서 후임병이 폭행을 당해 사망하거나 반대로 선임병이 폭행에 대한 보복으로 총격을 받는 일이 빈번하게 이어졌다.

   군 당국은 이러한 사건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1966년 9월 육군에 인간관계개선연구위원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발생하던 병영사고의 이유로 지적된 사적 제재 등 불합리한 병영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대처였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군 당국의 홍보에 비해서 뚜렷한 개선 성과를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 와중에 ‘안동 수류탄 사건’이 터진 것이다.

   군 당국은 더 이상 인권개선처럼 복잡하고 추상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국방부는 ‘안동 수류탄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인간관계개선연구위원회를 대신해서 선병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장병인권옹호나 인간관계개선연구가 아니라 문제사병만 골라서 걸러내는 선병(選兵)을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에 따라 병무행정에서도 정신의학적 처방이 적극적으로 도입됐다. 선병위원회에서는 MMPI와 같은 인성검사를 변형해서 자체 검사지를 만들거나 Rorschach 검사 등을 도입했다. 그러나 학술적 타당성과 검사의 신뢰성이 희박하다는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현재까지도 심리‧인성검사를 개발하는 연구가 군 당국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정신의학적 필터링 제도를 일찍부터 도입한 미국의 심리학계에서는 인성검사로 문제사병을 골라내는 데에 한계가 크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뒤늦게 유럽 전선에 참전하게 되면서 프랑스나 영국군에서 발생한 정신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신의학적 필터링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미 국방당국은 정신의학적 필터링을 의심하게 됐다. 전후 육군성 기술 기관지 "War Department Technical Bulletin"에 보고된 한 논문은 인성검사로 인해 신경정신질환자로 판명되는 수가 실제 부적응자에 비해 과하기 때문에 이상 징후가 매우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는 한 제대처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E Jones et al., 2003)

   전후 미국 심리학계에서 나온 연구들은 검사를 통해 경계선에 서있는 병사들에 대한 이상 여부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인성검사를 통해 신경정신질환을 일으킬 것으로 예측했던 병사들 중 상당수가 군 생활을 문제없이 해낸 사례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 연구의 결론은 현역복무부적합 판정율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지만, 반대로 보자면 인성검사를 통해서 군 복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리적 원인을 예측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정신질환으로 제대하는 경우, 개인적 성향보다는 전투의 강도나 병영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현재까지도 심리 및 인성검사는 현재 현저하게 증상이 드러나고 있는 지능문제나 정신질환 등의 사례에서만 타당성을 제한적으로 인정받고 있을 뿐이다. 스트레스를 유발시키는 환경 하에서 반응이나 리더십, 윤리성 등과 관련한 심리적 취약함을 예측하는 검사는 아직까지 없다.(Siow-Ann Chong et al., 2007)


우리에겐 다른 길이 필요하다.


   미국의 사례는 정신의학적 처방의 한계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미국이 모병제로 전환하여 ‘가고 싶은 사람들만 가는 군대’를 운영한 지 이미 40년가량 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에서 최근 일고 있는 모병제 주장을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최근 들어 사병들의 자살뿐만 아니라 전역군인들이 겪고 있는 외상후스트레스(PTSD)로 인해 끔찍한 사고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현역 사병들이 민간인 마을에서 총기를 들고 시위하듯 다닌다거나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사건들이 있었는가 하면 7세 밖에 되지 않은 딸이 알파벳을 모른다고 아내에게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2025년이면 분명히 인구절벽이 온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관성적으로 징병제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 대안이 ‘정신이상자’들을 걸러내자는 것이라면 한국군이 지금까지 해온 일을 관성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설사 모병제라 할지라도 말이다. 일찍부터 정신의학적 처방을 개발하고 모병제로까지 전환한 미군이 겪고 있는 저 사태가 우리의 희망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에겐 다른 길이 필요하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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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teve
    2016.09.08 18:4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다른 시각으로 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돈을 주고 모병제를 해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 돈 안주고 징병제를 한다면 억울한 자들의 눈물과 조국이 싫다고 떠나는 자들...
    국가는 충성을 강요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이 머물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뭔가 국가충성만 강요한다면 분명히 한계가 곧 들어날것입니다


'트럼프 기회론'이라는 망상



 

백승덕*


 

   20세기 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는 생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이 우리를 온통 휩쓸고 있다. 나는 바로 여기서 새로운 문명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미국은 근대성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때가 1930년대였으니 미국은 100년 가까이 근대성과 동일시되어왔다. 미소 간에 체제경쟁을 하던 냉전 중에도 미국은 군사력이나 생산력 등 어느 부분에서도 소련에 대해 항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근대화가 곧 미국화를 의미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대학 신입생끼리 모여서 자기 고향에 햄버거 가게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도시수준을 따지던 때가 있었다. 미국식 생활은 근대성의 지표였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계속 나아가야 할 목표였다. 아이들이 미군 지프차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기브 미 초코렛’을 외치던 땅에서 보기에 미국은 꿈의 나라였다.  


아메리카니즘의 위기


   그랬던 아메리카니즘이 추락하고 있다. 냉전이 끝나고 미국의 세기가 지속될 거란 기대가 금방 무색해졌다. 2008년 금융위기는 결정적이었다. 미국이 그간 누려온 풍요가 사실은 가계부채 위에 쌓은 빚잔치였다는 사실이 준 충격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미국의 대응은 굼떴다. 세계 온갖 군데에 손을 뻗쳤던 터라 발이 묶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에 미군은 중동에서 계속 죽어나갔고, 이어서 IS처럼 이슬람 극단주의가 세력화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미국은 어디에서건 손을 대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마이너스 손’이 돼버렸다.  

   여태껏 미국이 근대성의 상징으로 자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래도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 때문이었다. 나치독일을 비롯한 파시즘 세력에 대항해서 싸웠던 역사가 부여해준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트럼프 돌풍’으로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공화당 유력 대선후보가 마치 히틀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자극적인 표현으로 이민자들과 무슬림 추방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라 반파시즘은 더 이상 미국의 상징이 되기 어려울 지경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해서 이민자들을 막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는 인물을 개그맨이 아니라 대선후보라니.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유력 대선후보로 떠올랐단 사실은 미국을 세계에서 근대성의 상징으로 유지하기 위해 치루는 비용을 미국인들이 얼마나 버거워하는지 보여준다. 트럼프는 구체적인 정책을 이야기할 땐 오락가락하지만 한 가지는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미국 국내 문제, 정확히 말하면 돈 버는 것 말고 다른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IS가 중동에서 뭔 짓을 하든, 북한이 자기 땅에서 핵실험을 하든 개의치 않겠다고 말한다. 동맹국들 역시 방위비를 더 내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거듭 선언하고 있다.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경제중심적인 관점으로 일관하는 것인데, 이런 트럼프를 미국인들 중 절반가량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한국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이런 사정을 ‘축복’으로 환영하는 모양이다. 한국발 트럼프 기회론에는 인터넷 진보언론 <프레시안>이 앞장서고 있다. <프레시안>은 참여정부에서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문정인의 인터뷰를 통해 트럼프 당선이 한국의 자주국방에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트럼프가 주한 미군 급료까지 한국에 부담하게 만들면 한국 여론이 주한미군 철수와 전시작전권 회수에 동의할 거란 이야기다.


한국 진보진영에서 부는 트럼프 기회론


   이러한 주장은 문정인만의 것이 아니다. 이 매체에 실린 다른 칼럼이나 기사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역사학자 이병한 역시 고정 칼럼을 통해 트럼프 당선을 핑크빛으로 그려냈다. 트럼프가 억만장자이기 때문에 군산복합체 등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호전적 정책에서 벗어날 거란 이야기였다. 이병한은 심지어 트럼프가 서구의 근대 민주주의가 지닌 신화를 무너뜨려 유라시아의 옛 문명들을 회생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가 염두에 둔 유라시아의 옛 문명들 속에는 한국의 지분도 들어있을 것이다.

   분수령은 지난 5월 17일이었다. 이날 트럼프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김정은과 대화할 것이며 그와 대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 알려지자 그에 대한 장밋빛 기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김정은과 대화에 나설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남한이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해서 남북대화를 미루고만 있을 거냐는 이야기였다. 요컨대 이 기회를 빌어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주체성을 키우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일리가 있을 만큼 한국은 안보와 관련해 미국의 힘에 의존해왔다. 주한미국대사가 피습 당하자 한복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서 부채춤을 추면서 쾌유를 기원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최근 <미디어오늘>을 통해 보도된 사실은 충격적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제주해군기지로 보내는 철근 400톤이 배 안에 실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 상당수가 선박 복원력을 약화시키는 위치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과적은 세월호가 침몰하게 된 주요원인으로 꼽혀왔는데, 배에 무리해서 실은 것이 바로 제주해군기지 건설자재였던 것이다. 일부 선원들이 승선을 기피할 정도로 안전에 문제가 있었지만 무리하게 출항한 이유 역시 기지건설 공사기일을 맞추기 위해서였단 이야기도 나온다. 제주해군기지 공사일정은 미국과 약속한 것이기에 시민들의 안전에 우선해서 고려된 것이다.

   조금 더 넓게 보더라도, 그간 미국이 주도한 국제법 질서는 국가 간 계약에 기반을 둔 권력을 해당국가의 사회에 각인시키는 과정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미, 미-일 상호방위조약 등의 계약을 가장 상위에 둔 채로 사회질서가 자리 잡았다. 2005년에 평택으로 미군기지가 이전될 당시에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한국군까지 출동시켰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에 UN 안보리 결의도 없었지만 한국 정부는 한미동맹을 이유로 파병했다. 

   그러니 미국은 그간 사실상 계약을 매개로 한 패권을 휘둘러온 셈이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 지역에 해군기지를 원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공연한 비밀이다. 


중국화하는 동아시아라는 문제


   일각에서는 중화질서를 새로운 대안으로서 호출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동아시아 근대성,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중국화한 동아시아가 미국이 주도한 국제법 질서를 대체할 대안이라는 것이다. 다시 <프레시안>으로 가보자. 이 매체는 오랫동안 칼럼을 써온 역사학자 김기협을 초청하여 기획강연을 열었는데, 김기협은 이 자리에서 중국의 군사력이 서구와 달리 “주변에 있던 지역들을 안정시키는 방어적 성격”이라고 구분 지었다. 게다가 중국의 조공체제가 “약한 국가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하나의 질서를 위해 공헌하자는 식의 유인책”이라고 긍정했다. 이처럼 중국화한 동아시아를 긍정하는 그의 입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와 '대안으로서 동아시아 전통의 가치'에 관한 책을 소개하는 연재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으로 표상된 근대성이 몰락하는 이 시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핑크빛 기대는 두 가지로 수렴된다. 하나는 주체성 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화한 동아시아의 부상이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현실을 돌아보면 핑크빛 기대는 어김없이 깨진다. 최근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보이고 있는 행태를 보면 그렇다.

   최근 중국은 남중국해 남사군도에 있는 암초들을 매립하여 인공섬을 만들고 있다.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무리수다. 이 지역은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이 오래 전부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서 갈등이 이어져온 곳이다. 중국은 인공섬에 활주로 등 군사시설을 배치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실하게 하려고 나선 모양새다. 중국의 군사력이 “주변에 있던 지역들을 안정시키는 방어적 성격”이라던 김기협의 설명이 무색해지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논리는 더욱 기가 막힌다. <주간동아>(2015.11.16)의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작년 11월 한 연설에서 “남중국해 도서들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영토였다”며 “남중국해에서 영토 주권과 해상에서의 정당한 권익을 수호하는 것은 중국 정부가 짊어진 책무”라고 말했다. 명나라 영락제 때 해양원정에 나선 정화의 항해 때부터 이 바다가 중국의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이 기사는 “영해나 EEZ 같은 국제법 용어 대신 ‘정당한 권익’ 같은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섬과 암초의 구분이나 육지로부터의 거리처럼 국제법상의 구체적인 논의를 모두 뛰어넘은 채로 바다에 U자형 선을 긋고 영유권을 주장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중국화한 동아시아가 보여주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말인가? 김기협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조공체제라는 것도 사실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예식을 반복함으로써 유지하는 ‘소극적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적 천하질서에서 ‘평정(平定)’이란 말은 작은 것이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억눌러서 유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했다. 높은 것은 높은 자리에, 낮은 것은 낮은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유교적 평화질서였다. 그러니 지금의 중국이 보이는 행태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계약에 기반을 둔 권력과 전통을 등에 업은 패권 사이에서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메리카니즘 몰락 이후에 현실을 핑크빛으로만 보기가 어렵다. 한국이 더 많은 분담금을 내고 주한미군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하던 방식으로 서해에서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중국화한 동아시아에서 조공체제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선택지는 북한의 길이다. 지난 1월 제4차 핵실험 직후 조선중앙TV는 특별 중대 발표를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엄혹한 현실은 자기 운명은 오직 자기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철의 진리를 다시금 명백히 실증해주고 있다. 사납게 달려드는 승냥이 무리 앞에서 사냥총을 내려놓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이다.” 한국이 주한미군을 떠나보낸 뒤에 오로지 자국의 힘으로만 중국과 상대하려면 이러한 자세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한 자세를 취한 사회가 지금의 북한처럼 경직되지 않을 수 있단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주체성을 위한 고난의 행군 중에는 자국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시민들의 안전을 볼모로 삼는 행태 또한 비일비재했다는 점을 북한의 역사가 보여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메리카니즘의 몰락을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한국 진보진영 일각에서 불고 있는 트럼프 기회론 역시 위험한 망상이다. 우리는 지금 계약에 기반을 둔 권력이 몰락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등에 업은 패권이 발흥하는 걸 상찬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모색해야만 하는 때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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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을 지지하는 '현실감각'



 

백승덕*


 

         이번 총선 출구조사 발표가 났을 때 ‘기타 정당’이 비례대표 2석 정도를 받을 수 있을 거란 기사를 보고 반가웠다. 녹색당이 드디어 원내진입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기타 정당’이 기독자유당이란 소식을 접하면서 기대가 경악으로 바뀌었다. 별다른 공약도 없이 ‘반동성애, 반이슬람, 간통죄 부활’을 내세우는 정당에 투표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  

          총선개표를 하는 동안 기독자유당 당사에서 당원들이 통성기도를 하던 장면은 두고두고 잊혀 지지 않을 것 같다. 정당득표율이 원내 진입을 위한 3%에 조금 못 미치는 2.7%에 머무르자 0.3%를 더 달라는 듯이 목소리 높여서 기도하는 정당을 보게 되다니. 2008년 총선 때도 통일교에서 당시 한나라당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전국 선거구에 빠짐없이 후보를 냈던 정당을 내놓았던 적이 있긴 했다. 기독자유당도 선거에 나왔다가 사라지는, 그렇고 그런 정당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아깝게(?) 원내진입에 실패했다. 기독자유당 세력과 교단이 달랐던 기독당이 표를 갈라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한국판 도널드 트럼프들이 국회에 들어갈 뻔했다.  

         비례대표 2석을 챙길 뻔했던 ‘기타 정당’이 다름 아닌 기독자유당이었단 사실이 알려지자 주위에선 진보정당들에게 반성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특히 녹색당이나 노동당처럼 1% 득표도 하지 못한 정당 지지자들의 ‘현실감각’이 공격 대상이었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지적부터 더불어민주당에 들어가서 블록을 만드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라는 주문까지 비판은 다양했다.

         녹색당 지지자로서, 이러한 비판은 곧 나의 ‘현실감각’을 돌아보라는 경고로 느껴진다.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이 0.7%인 정당을 지지한 정치인식이니 100점 만점에 0.7점짜리인 셈인가? 그러나 나는 다시 찍는대도 녹색당이다. 거기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힘! 힘! 힘!’만 이야기했던 총선


         사실, 이번 총선에서 기독자유당이 국회의원을 내지는 못했지만 총선 기간 중에 ‘기독자유당스러운’ 분위기는 이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공식 선거기간이 시작도 되기 전부터 이런 경향이 보였다. 지난 2월 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이 개신교 기도회에 나가서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한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라고 입을 모았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 자리에서 박영선 의원은 “동성애는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말하며 성소수자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그 정도로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같은 당의 표창원, 진선미 후보 역시 개신교 극우세력이 공격을 해오자 “동성애 확산엔 반대한다”거나 “동성애를 권장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대응을 했다. 동성애를 전염병처럼 취급했다는 점에서, 개신교 극우세력의 거센 비난공세에 맞춰서 정치력을 발휘했다고 보기가 곤란할 만큼 모욕적인 발언들이었다.

         선거가 진행되면서 이렇듯 혐오발언이 켜켜이 쌓여가니 기독자유당이 굳이 국회의원을 내지 않아도 될 법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 국회에 나오기도 전에 사망선고부터 받은 셈이다. 이 정도 수준의 차별과 혐오가 우리 사회의 평균값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현실 감각’이라면 그런 감각은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현실을 상수처럼 마냥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나는 병역거부자이다보니 성소수자들이 이번 선거를 통해 겪은 고립감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남북한이 그 어느 때보다 날이 서서 대치하고 있던 와중에 열렸던 선거였던 만큼 새누리당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등의 거대 정당들이 ‘안보는 보수’라는 입장에선 매한가지였다. 야당들의 경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그 전제는 굳건한 한미동맹이나 자주국방처럼 강력한 힘이었다. 힘에 기초해서 강력한 대북제재를 밀어붙이겠다는 점에선 3당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모양새다. 2007년 말 노무현 정부가 발표했던 대체복무제와 같은 계획은 아예 설 자리를 잃었다.

         이처럼 선거가 온통 ‘힘! 힘! 힘!’으로 돌아가다 보니 성소수자나 병역거부자처럼 ‘약한 자’들은 모욕당하고 배제당하더라도 조용히 있기를 요구받았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원외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 현실감각이 없다고 비판하던 목소리가 바로 그러한 요구의 민낯이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어떤 말들이 오가든지 간에, 그들의 관점에선 힘없는 약한 것들이 대세를 조용히 따랐어야 했다. 마치 전투 중엔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듯이 말이다.


전 지구적으로 움직이는 권력, 일국에 갇힌 대의제 정치


          이번 선거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약함에 대한 혐오가 두드러졌다. 김종인 대표의 컷오프나 안철수의 독자행보가 강단 있는 결단으로 주목 받을수록 정치에서 힘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더욱 커졌다. 역설적이게도 그 힘의 방향은 너무도 모호했다. 4년 전 선거 때는 그래도 경제민주화 같은 정책철학이 공감을 얻었지만 이번 선거에는 뚜렷한 공약도 없이 너나없이 자신이 배신을 당했다며 상대를 심판하겠다고 나섰을 뿐이다. 야권연대 같은 것 고려하지 않고 잘라낼 것은 확실히 잘라내면서 어떻게든 이긴다는 식의 생존주의가 이번 선거의 유일한 대의였다. 무엇을 잘라내겠다는 것인지 어떤 가치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이 천하삼분지계 같은 잔꾀만 넘쳐났다. 

         이처럼 공허하게 세력 과시만 했던 까닭은 역설적으로 대의제가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국회에서 원내 다수당을 차지한다고 해도 국민국가 단위 안에서 할 수 있을 일에는 한계가 커서 그저 자신들끼리 밥그릇 싸움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고 하자.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경제민주화를 얼마나 밀어붙일 수 있었을까? 법인세를 올려서 복지 예산을 늘리겠다고 하면 이미 초국적기업이 된 삼성과 현대 같은 재벌들은 회사를 해외로 이전하겠다며 협박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장 한진중공업만 해도 부산의 영도조선소를 대신해서 노동력이 훨씬 싼 필리핀의 수빅조선소로 일감을 몰아주려고 하지 않았나. 자본의 활동반경은 전지구적인데 비해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만들 수 있는 법안의 영향력은 국가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가 역력하다.

         자본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힘은 또한 어떠한가? 한쪽에는 미국이 전세계적인 패권전략의 일환으로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를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는 G2로 급부상한 중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자리를 잡고 있는 형국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싸드(THAAD) 배치와 관련해서 박근혜 정부가 미중 간의 외교전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던 사건이나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던 사건처럼 일국 단위를 넘어선 패권적 권력의 결정 앞에 정부뿐만 아니라 국회 역시도 속수무책인 경우가 허다하다.

         경제적‧군사적 권력이 초국적인 범위로 움직이는 동안 대의제 정치는 아직도 일국 단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국 국회가 보이는 무기력함은 여기에서 나온다. 자기들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느라 정치를 책임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책임질 수 있을 정치에 한계가 있으니 밥그릇 싸움에만 더욱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국민들 역시 이러한 현실을 직감하고 있다. 그러니 성소수자나 병역거부자와 같은 약한 자들을 위한 정치는 차례를 기다려도 결코 오지 않는다. 일국 단위의 대의제 정치 안에서 정치는 너무도 무력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세력 과시에만 끝없이 몰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1%도 안 되는 득표를 얻는 데 그친 녹색당을 계속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녹색당이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을 두고 고대 아테네 같은 소국에나 어울리는 소리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국 단위에 갇혀서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탓에 하는 소리다. 녹색당이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의 범위는 국민국가를 넘어서 최소한 동아시아 시민사회를 아우른다. 예컨대 정의당의 경우도 동북아 외교국방경제 협의체를 상설화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 간의 외교를 정례화하겠다는 구상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녹색당의 경우는 ‘동아시아 지속가능전환 포럼’을 대표공약으로 내놓았는데, 정부 간의 외교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시민사회 간의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초국적 권력을 견제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다른 정당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러한 구상대로라면 녹색당이 정권을 잡기 전에도 동아시아 지역의 시민사회가 단단한 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을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약한 자들이 지역적 연대를 통해서 전지구적인 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실질적인 힘을 얻을 길이 열리는 것이다.

         1%도 안 되는 득표를 얻은 정당의 구상이니만큼 현실이라는 장벽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직은 선언적인 구상들을 구현해나가기 위해선 전문가들도 많이 필요하고 세력도 어느 정도는 더 모아야 할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들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녹색당에 대한 지지를 거둘 수가 없다. 비록 힘이 약하지만 약한 자로서 살면서 전지구적인 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내놓은 정당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의 ‘현실 감각’ 안에선 그렇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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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이 되어가는 세계



 

백승덕*


 

          장모님 회갑을 맞아 처가식구들과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해외여행이라곤 일본으로 다녀온 신혼여행을 제외하면 10년 전에 가톨릭학생회에서 한국 대표로 아시아 지역 총회에 참가하느라 말레이시아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이나 날아가 본 경험이 없었다. 한 달 조금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방문했으니 그 나라들을 깊게 볼 수는 없었다. 유명한 관광지에 방문해서 사진을 찍고 숙소 주변을 걷는 정도의 일정을 겨우 소화했을 뿐이다.  

          그래도 몇 가지 광경들은 인상에 남았다. 그 중 하나는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군인들이었다. 한국의 군사주의가 예외적으로 대단하다고 하지만 총을 든 군인들을 일상에서 직접 만나기는 어렵다. 반면 로마나 파리의 명소들을 돌아다니는 중에 군인들을 참 많이 만났다. 여행이 끝날 무렵엔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든 군인들이 입구에 서서 직접 검문을 하는 모습이 익숙해지기도 했다. 주요 지하철 역사 내부에도 이런 군인들이 경계를 펴고 있었다. 작년 말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 이후에 유럽에선 이런 광경이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총을 들고 지하철을 탄 군인들을 만났던 것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출근시간이라 사람들로 꽉 채워진 지하철에서 공교롭게도 군인들 바로 옆에 서다보니 총구에 옷깃이 스쳤다. 그 느낌이 아주 묘했다. 내가 손을 조금만 뻗으면 움켜쥘 수 있는 거리에 총이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군인들이 총을 들어 장전할 공간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총을 들고 지하철에 탈 수 있는 것일까.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웬만큼 큰 상점들에는 입구에 선 경비들이 방문객들의 가방을 열어 보이라고 요구했다. 고객들은 너무도 순순히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가방이나 핸드백 속은 가장 사적인 공간일 텐데, 경찰이 아니라 사설 경비원이 일일이 확인을 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게 낯설었다. 한국에선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민주화의 상징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권리와 권한과 관련해 유럽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내가 경험한 유럽은 예상과 적잖이 달랐다.


익숙한 베를루스코니의 인기


         IS 테러 위협 이전에도 이런 광경이 펼쳐졌던 때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한국인 투어 가이드는 테러를 염려하지 말라며 비슷한 선례가 있었다며 소개해줬다. 2000년대 중반에 소매치기를 박멸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베를루스코니가 명소마다 군인들을 배치했던 것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특공대들을 투입했다.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주민들과 집시들이 이 때 곤욕을 많이 치렀다고 한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런 '단호한' 정책으로 승승장구를 했다. 한국인 투어 가이드는 여기까지 이야기해주며 소매치기 역시 많이 줄었다고 우리를 다시 한 번 안심시켰다.

         숙소에 돌아와서 기사를 검색을 해보니 가이드의 말은 대부분 맞았지만 그가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2010년까지 베를루스코니의 인기는 대단했고 누구도 그의 자리를 넘보기 어려웠다. 2010년 미성년자와 성매매를 했다는 의혹을 받게 되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자신의 스캔들 상대가 소매치기 혐의로 검거 당하자 베를루스코니가 경찰에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소매치기 단속을 위해 특공대씩이나 투입했던 그의 단호한 모습과 너무 모순된 행태였다. 마치 국민들에게 단호한 안보태세를 요구하면서 방위산업 비리로 엉터리 무기를 채워 넣은 한국의 군부를 보는 듯하다. 안보와 치안의 위기 그리고 군대 투입 결정과 높은 지지율까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들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흡사했다.

         흔히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라서 일상이 병영처럼 꽉 막혀버렸다고 하지만 어느 사회든 금세 전쟁 태세를 일상으로 받아들일 만큼 자유의 토대는 취약하다. 사설경비에게 가방을 순순히 열어 보이는 파리 시민들이나 베를루스코니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단호한 군사적 조치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며칠 전 프랑스 의회는 지난 파리 테러 직후에 선포한 국가비상사태를 3개월 더 연장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 안보를 해칠 위험이 있다는 혐의만 있어도 영장 없이 수색과 구속할 수 있는 조치가 5월 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뜻밖에도 낯선 유럽에서 국가보안법이란 익숙한 형체를 만났다.


분단이라는 문제의식의 한계


         물론 안보 위협에 직면해 사회가 병영화된다고 해도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까지 치렀으니 유럽이나 다른 지역과 다른 고유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분단사학’이나 ‘분단체제’와 같은 개념들은 이처럼 고유한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했던 새로운 시각이었다.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유독 민족을 내세우며 독재를 강화하던 때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경제위기를 겪으며 곤란에 빠져있었다. 정부가 나서 차관을 가져다 키운 기업들 중 절반 가까이가 부실화했기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는 탈냉전 국면에서 미군 철수라는 안보 위기도 겪게 되었다. 1971년 대선에선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에도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가 야당 후보인 김대중에게 근소하게 이길 만큼 정권의 안정성이 떨어져있었다. 1972년 시작된 유신체제는 통일을 민족적 과제로 내세워서 권력 안정성을 확보하려던 일종의 쿠데타였다. 유신헌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능률의 극대화”나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 같은 말들은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피치자들의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한 독재자의 수사였다. 

         국가권력의 이러한 움직임에 맞서 저항적 지식인들 중 일부는 민족을 독재권력에 대항하는 주체로 새로이 발견했다. 이들에게 한민족의 얼굴은 독재자 박정희가 아니라 전태일처럼 찢기고 갈리고 빼앗기고 신음하는 민중이었다. 그러니 민족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독재를 포함한 현실을 바꾸는 주체일 수 있었다. 특히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민족과 자주에 기반을 둔 평화통일원칙을 정권 차원에서 내세움으로써 민간 차원에서도 민족의 분단이 민중의 처참한 현실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통일에 대한 뜨거운 기대감을 가졌던 지식인들은 그 직후 선포된 유신체제로 인해 더욱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강만길의 ‘분단사학’이나 백낙청의 ‘분단체제’와 같은 개념은 이와 같은 정치적 지형 속에서 태어났다. 이들과 관점을 공유했던 리영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분단은 한국사회를 “비정상과 일그러짐”으로 이끈 근원이었다. 요컨대 분단이라는 문제의식은 독재정권의 민족주의를 넘어서 한반도에 살고 있는 민중 모두가 민주주의를 매개로 삼아 민족사회의 주인이 되는 이상향을 향하고 있었다.

         분단이라는 문제의식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보면 ‘분단시대의 극복’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국가 수립’이나 ‘올바른 근대화’ 등의 과제와 연관된다. 분단을 강조하는 관점 역시도 민족통일이 그 자체로 평화나 인간해방의 최종적 단계라고 보지 않았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문제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해결하는 가장 근원적인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분단을 강조하는 관점은 민족동질성 회복이라는 과제가 오히려 민중들의 현실을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작년 초 전국건설노조가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외국인 불법 고용 근절하라’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국건설노조 관계자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쿼터를 지키기는커녕 불법체류자도 감독하지 않아 정부에 대해 부글부글 끓는 심정"이라며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불법체류자들 중에는 조선족 ‘동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민족동질성 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법체류자 중 한민족의 피가 섞였다고 볼 수 있을 사람들을 분리하여 구제해주는 식의 대처는 오히려 갈등만 더욱 키울 것이다. 국가주의를 넘어서 민중 전체의 해방을 꿈꿨던 저항적 지식인들의 바람도 그와 같은 ‘그들만의 민주주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 유럽을 병영사회로 몰아가고 있는 테러 역시 ‘그들만의 민주주의’ 바깥에서 도시 외곽으로 밀려난 이민자들에 의해 자양분을 얻고 있다. 현재 기한 없이 연장되고 있는 프랑스의 국가비상사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국가비상사태가 처음 선포된 것은 10년 전이었다. 파리 외곽에서 경찰의 검문을 피해 변압기 쪽으로 피했던 10대 이민자 2명이 감전사를 당한 것에 분노한 도시 외곽 지역 청년들이 짱돌과 화염병을 들고 나선 ‘방리유 사태’가 그때 벌어졌다. 국가의 강력한 진압과 국민 대다수의 지지에 힘입어 이민자들의 봉기는 금세 진압되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차별에 대한 분노는 10년 만에 테러라는 방식으로 돌아오고 있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 테러에 관련된 자들이 대부분 도시외곽지역 이주민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한국이 분단을 극복하겠다며 민족동질성 회복만을 강조한다면 오늘날 유럽이 처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란 보장을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근원적 해결책일 수 있을까?


         길지 않은 여행 중에 접한 유럽은 온통 테러에 맞선 비상사태였다. 프랑스에선 ‘빅 브라더 법안’이라고 비판받을 만큼 강력한 반테러 법안이 작년 11월 테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시행 중이었다. 이 법안은 정보기관이 법원의 승인 없이도 전화를 감청하고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 등을 열어볼 수 있도록 했으며 피의자의 기록은 기소만 되어도 40년 간 그대로 남게 했다. 이처럼 강력한 조치가 시민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테러가 벌어지기 반 년 전에 이미 시행되고 있었지만 테러를 막지는 못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북한의 장거리 로켓 실험으로 인해 또다시 비상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북한의 돈줄을 끊기 위해 개성공단 운영을 중단해버렸다. 또한 프랑스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강력한 반테러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압력을 넣고 있다.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비판이 나오더라도, 이 정부는 언제나처럼 그저 밀어붙이고 있었다. 북한과 전쟁을 막기는커녕 사드를 도입해서 중국과도 갈등을 키우고 있다.

         어디를 가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시대다. ‘헬조선’이라고 하지만 딱히 탈출할 곳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근원적인 해결책이 절실하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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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공개토론을 기대하며



 

백승덕*


 

          지난 9일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400명 가까운 지식인들의 명의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검찰이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를 기소한 것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공개토론을 통해 풀자고 제안했다. ‘학문의 자유’의 상징이 돼버린 이 책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학계의 자율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고민들이 모여 만들어낸 자리였다. 국가권력이 법이라는 앙상한 잣대를 들고 학계에 개입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느껴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들의 공개토론 제안은 학계가 법정을 대신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충분히 대변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어쩌면 학계가 이 사태와 관련하여 내놓을 수 있을 가장 적절한 대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위안부’ 생존자 유희남씨는 그러한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했다. “지식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도 되냐?”  

          그의 질문은 ‘위안부’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학자란 무엇이며, 대체 무엇이기에 그처럼 자유롭게 이야기할 권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여태껏 이어졌던 질문의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세웠다. 즉, 지금까지 학자들이 ‘위안부’가 무엇인지 물어왔다면, 유희남씨는 ‘위안부’ 생존자로서 ‘위안부’에 대해 말하는 학계가 무엇인지 되물은 것이다.  


학문의 경계


         학계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사건들은 비단 <제국의 위안부> 사태뿐만 아니라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2015년 한 해 동안 역사학계에는 전문성에 대한 공격이 집중됐다. 그간은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첨예하게 벌어져도 ‘역사는 전문가들에게 맡기자’라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발표라는 초대형 스캔들이 터진 뒤부터는 사정이 완전히 변했다.

         2015년 10월 박근혜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검인정 체제 대신 국정화하겠다고 결정했는데, 학계는 이 사태에서 애초부터 전문성을 부정당했다. 정부와 여당에서 “국사학자 90%가 좌파”라는 색깔론을 공개적으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국사학자들이 교과서 시장에서 밥그릇을 지키려고 한다는 공격도 더해졌다. 색깔론에 밥그릇론까지, 국가가 나서서 학자들을 좌파·이익집단으로 몰아세웠으니 이야기가 더 진행되기 어려워졌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란은 결국 학계 전체가 국가에 찍혀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게 된 사태까지 치닫게 됐다.

         역사학계는 정부의 국정화 방침에 ‘역사의 다양성’을 내세워 맞섰다. 국정교과서가 역사를 획일화하여 죽인 역사만을 가르치는 독재적 발상이라는 것이었다. 학계는 정부의 국정화 방침이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가가 역사해석에 개입한다면 역사가 획일화되어 학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해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실제로 자국의 역사를 국정교과서로 가르치는 국가는 북한, 몽골, 스리랑카 같은 극소수 독재국가 밖에 없다는 사실도 학계의 비판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역사학계가 ‘역사의 다양성’을 한없이 세게 이야기하기는 곤란했다. 역사는 정말 다양한가? 학계는 앞서 검인정 체제에서 뉴라이트 성향의 교학사교과서에 대한 인정을 반대했던 적이 있다. 이 교과서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료들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연도표기를 잘못하는 등 수준미달의 모습도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학계가 교학사교과서에 반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 교과서가 ‘바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교학사 교과서는 ‘친일 독재 미화’라는 비판에 부딪히며 전국 2천300여개 고등학교 중 3개 학교에서만 채택되고 말았다. 보수 정권이 집권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음에도 사실상 채택율이 0%를 기록했으니 참패였다. 이처럼 학계 역시 ‘역사의 다양성’을 무작정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다양성의 기준이다. 어디까지를 학문의 자유로 인정할 것이며, 누가 역사와 역사 아닌 것의 범위를 판단할 것인가? 역사는 다양한 것이므로 공공연히 친일을 미화하는 역사교과서도 얼마든 가능한 것일까? 반대로, 북한 정권이 발행한 교과서를 다양성을 내세워 남한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까?

         학계에서는 친일이나 북한 정권을 무작정 찬양하는 교과서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배나 남북대치가 지금도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교과서를 인정하면 학계의 객관성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를 다뤘다고 어떤 이야기든 역사로 받아들인다면, 박사논문 한편을 쓰기 위해 한 청춘을 연구실에서 보내며 어렵게 훈련 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학계에서 위서(僞書) 취급을 받는 『환단고기』 식의 역사관을 교과서에 싣는 일도 문제 삼을 방법이 사라진다.

          그러니 학계는 역사와 역사가 아닌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자 애쓴다. 문제는 학계가 사회적으로 권위가 있을 때에만 이러한 구분 역시 실질적인 효력을 얻는다는 점이다. 반대로 학계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면 어떤 주장이든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그만큼 커진다. 이러한 경우에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권위가 더더욱 약해지기 때문에 역사와 역사가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기 십상이다. 이런 공간에서는 소수자들의 역사처럼 그간 억눌렸던 기억들이 새로 조명을 받기도 하지만 홀로코스트와 같은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반동이 힘을 받을 위험도 크다. 한국의 넷우익들 역시 역사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광주항쟁이 북한의 사주로 일어났다는 주장을 하며 ‘팩트’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의 세기가 저물고 있다


         그런데 조금 넓게 보면 학계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생산/인정해온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역사학이 전문 분과로 등장했으니 이제 200년 정도 지속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우에 따라 조선 후기의 실학사서까지 소급해서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청구학회(1930년), 진단학회(1934년) 등이 결성되고서야 비로소 학회 중심의 학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근대 역사학계는 자연과학이 과학적 사실을 생산해내는 방식을 모방하여 학회를 중심으로 태동했다. 16~17세기 무렵부터 과학자들은 동료들을 초대하여 실험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을 공증 받았다. 진실은 과학자 사회의 인정으로만 효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학회(society)는 진실을 공증하는 공신력 있는 과학자 사회로서 자리매김했다. 19세기에 들어 역사학계 또한 자연과학의 체계를 뒤따라 학회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공증하기 시작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체계를 통해 생산되었다. 이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단독으로 역사적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역사적 사실은 오직 동료 역사학자들의 공증을 통해서만 학문적 진실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학회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학계가 그러한 공증을 담당했다. 학회지에 논문이 투고되면 보통 2~3인 정도의 심사자들이 이를 검토하여 통과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현재까지 가장 보편화된 절차다.

         근대에 들어 역사학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한국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다른 지역의 역사와 구분하여 ‘국사(國史)’라고 부르며 특별히 다뤄왔다. 국사는 과학의 이름으로 국가와 민족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힘이 있었다. 국가의 관점에서 한국사는 더 이상 세계사의 하위 범주가 아니었다. 세계사는 다만 한국사가 다루지 않는 여분의 세계에 관한 것일 뿐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국적 있는 교육’을 내세워 국사교육을 강화했다. 중등교육에서 국사교과가 독립되고, 모든 대학에서 국사가 필수교양이 됐다. 국가권력과 학계가 국사를 매개로 밀월관계를 맺었던 시기가 반세기 조금 못 미치게 이어졌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새에 사정이 바뀌었다. 국가가 역사학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던 시대가 급격히 저문 것이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나자 어느 보수적인 지식인의 선언처럼 역사가 끝난 듯이 보였다.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영원히 머물 것만 같이 보였다. 역사가 끝났으니 역사학에 지원을 해야 할 이유도 급격히 줄었다. 북한이 세계의 섬처럼 고립된 상황이라 한국 정부가 이전처럼 국사에 지원할 필요도 사라졌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소수의 학자들만 있으면 충분할 뿐이다. 국가의 취향만 변한 것이 아니다. 역사학을 포함해서 대학 인문학 역시 소수 엘리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면 그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학계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다. 학술지 논문은 저자와 심사자 정도만 읽을 정도로 끼리끼리만 돌려보고 말 뿐이다 보니 국가지원이 없다면 연구를 지속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연구비를 받기 위해 국가의 입맛에 맞춰 연구계획을 짜는 일이 관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국가에 대한 의존도도 너무 높아졌다. 자립도가 상당히 취약해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국가가 학계를 공공연히 ‘왕따’시키겠다고 나선 이상 국가재정에 기대던 학계의 기존 습속은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렵다.

          학계가 직면한 위기는 돈 문제만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학계가 자기점검을 해볼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계가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려면 독립적인 재정도 확보해야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이 역사학의 인식론이나 방법론과 같은 ‘게임의 룰’을 공유하고 있어야 학계라는 공론장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양으로 평가되는 개인의 학술 업적 기준을 채우기 위해 논문을 생산해온 학자들에겐 학계를 돌아볼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역사는 학계에 맡기자’라고 주장하기도 참 머쓱해졌다. 학자 개개인이 개인사업자처럼 생존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첨예한 역사 관련 논란들을 깊이 있게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에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해방직후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학계에 대한 지원은 늘 부족했고, 그 뒤엔 오랜 군사독재 치하에 놓였다. 이런 역사 속에서 학문의 자유는 항상 위험에 노출됐다. 학자들은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공안 당국에 끌려가 험한 꼴을 당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기의 독립운동을 연구해도 사회주의 계열을 ‘잘못’ 다루면 공안사범이 될 판이었다.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이나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민주화 이후에 잠시 숨통이 트인다 했더니 곧이어 잔인한 생존경쟁이 학계를 위협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교수든 학생이든 누구나 1인 기업처럼 자기 스스로를 경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학계가 언제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냐고 반문할 법하다.


'학문의 자유'는 최소한의 보호장치


         그러나 역사학계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보다 근본적이다. 학계가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를 의심받으며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학계는 <제국의 위안부> 사태와 같은 갈등을 다룰만한 사회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학계가 이러한 논란을 다룰 수 있을 건강한 공론장인가? 회의적이다. 앞서 말했듯 학술지 논문은 저자와 심사자들 정도나 읽고, 대중서는 논란이 되면 산발적으로 발표회를 열고 마는 현실이다. 익명의 심사자들은 심사평으로 “역겹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발표회에서는 나이 어린 학자의 비판을 “예의가 없다”고 정리해버리기 일쑤다. 이처럼 학문의 공론장이란 게 과연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희남씨의 질문은 뼈아프다. “지식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도 되냐?”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답은 아마도 ‘그러한 자유는 없다’가 될 것이다. 기존 학계에 머물면서 학계 바깥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고자 내세우는 ‘학문의 자유’는 환영에 불과하다. 가뜩이나 학문의 공론장이란 것의 실체도 의심스러운데, 단순히 교수가 낸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보호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학문의 자유’는 학자라는 신분에 따라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새로운 공론장을 함께 열어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보호장비에 불과하다.

         그간 법정과 학계라는 이분법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정작 학문적 공론장은 썩은 도끼자루가 돼버렸다. 이러한 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깊게 공감한다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박유하 교수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공개토론을 제안한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대학 안팎에 걸쳐서 활동을 하고 있는 만큼 이들이 열어갈 공론장은 기존 학계로 수렴되지 않는 새로운 무언가일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공론장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 개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면서도 그러한 존엄성을 위협했던 권력과 폭력의 구조를 드러낼 수 있을 말들이 조율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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