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자다 못가의 사람들 [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
― 「요한복음」 5:1-9 중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는 38년간 베드자다 연못가에서 첫 번째로 물에 뛰어들 날만을 기다리던 한 병자가 예수를 만나 몸이 치유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라고 말하자, 그는 몸이 나았고 예수의 말대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몸의 회복’을 한순간에 가능하게 했습니다, 연못의 신비한 힘을 빌지 않고도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치유 사건은 뭔가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습니다. 환자의 치유를 선언하는 타이밍에 예수는 왜 “네 병이 나을 것이다” 또는 “네 병을 고쳐주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 있지 말아야 할 곳에 그 병자가 자리를 깔고 있다는 듯이 “자리를 걷어 떠나라”고 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는 그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14절)라고 권면한 것일까요? 문맥 상 이 두 말은 등가의 의미를 갖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8절의 예수의 치유 선언과 14절의 권면은 “네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떠나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우리는 그 병자가 38년이나 지키고 있던 그 자리가 어디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그 병자가 있었던 자리는 어디인지 함께 생각해보고,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는 예수의 치유선언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 병자가 있던 곳은 ‘양의 문’ 곁, 베드자다 못가입니다(2절).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있었습니다(3절). 예수는 많은 환자들이 누워있는 베드자다 연못가의 주랑을 거닐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그는 거동이 쉽지 않은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를 발견합니다. 그 병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연못만 응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8년이나 앓아온 그 병자는 날이 갈수록 굳어져가는 몸 때문에 이렇게 인생이 끝장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고, 공동체에서 온전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몸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 몸은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온 희망을 연못의 신비한 힘에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병세가 깊어갈수록 더 강한 처방을 원했고, 그렇게 오게 된 곳이 베드자다 연못이었을 듯합니다. 대체 베드자다 연못은 어떤 곳이기에 거동이 힘든 중증 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일까요?

 

'양의 문'의 위치


애초에 베드자다 연못은 포로기 이후 강화된 사제 집단의 권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공간이 형성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의 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에 의해 중건된 성벽의 문 중 하나입니다. 「느헤미야」 3:1에서는 이 문이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동료 제사장들이 나서서 만든 것이며 첫 번째 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쪽 지방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성전으로 이어지는 길의 최종 관문과 같았던 ‘양의 문’은 그 이름이 주는 인상과 같이 제의용 가축이 성전으로 대거 유입되는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베드자다 연못은 이러한 도시의 흐름에 맞춰 성전에 제사용 물을 대거나 제의용 동물을 씻기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활동하던 당대에는 성전 안에서 제의용 동물을 거래하는 산업이 이미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이 산업과 관련돼 있습니다.(마태 11:15-19; 마가 11:15-19; 누가 19:45-48; 요한 2:13-22) 아마도 이 산업은 성전 중심 체제가 형성된 초기부터 성장했을 것입니다. 레위기 기록(레 22:17-25)으로 볼 때 제의용 동물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흠이 없는 것’을 선별해야 했는데, 원근 각지에서 성전으로 모이는 이들이 제의용 동물을 온전하게 수송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성전 근처 및 성전 안에서 ‘흠 없는’ 소나 양, 염소 등을 구입하려는 수요가 넘쳐났고, 베드자다 연못은 (자신이 정성스레 가져온 제의용 동물을 씻기는 곳이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누군가가 구입했거나 곧 구입하게 될 제의용 동물을 제사장들의 형식적 검사를 받기 전 잠시 들러 씻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중증 환자들의 집합소가 된 베드자다 연못은 이처럼 성전 중심의 도시공간 배치와 상업화된 제의 방식이 결합된 체제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중증 환자들의 희망의 보루가 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음모론적 상상력을 보태보겠습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구성된 제의 체제에서라면 종교 상품인 동물의 시장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핑계이자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뢰를 주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박물관에 있는 베드자다 연못 모형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높이가 다른 쌍둥이 건물로 구성된 베드자다 연못은 상층의 물이 수로를 통해 하층 건물로 유입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자다 연못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 보니, 오른쪽에 보이는 상층 건물은 동물을 씻기던 곳이었고, 왼쪽 건물은 환자들의 치유센터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동물 씻긴 물이 하층으로 흘러들어가 환자들을 씻기는 치유센터의 물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음모론적 상상을 돕는 촉매제가 되기에는 충분할 듯합니다.
제사장 그룹은 상하층의 물을 모두 동물을 씻기는 데 써도 부족하겠지만, 하층의 회랑을 병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로 내어주자는 결단을 ‘힘겨운 척 쉽게’ 내립니다. 제의용 동물들을 씻긴 물이 신비한 치유의 힘을 갖는다는 소문이 득이 되면 됐지 실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이 제사장들의 음모를 제의용 동물을 구입할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말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짐승(그것도 그다지 거룩해 보이지 않는) 씻긴 물에 ‘나만 안 씻으면 되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상품 구매력을 소유한 이들 사이의 암묵적 합의, 그것이 베드자다 연못에 대한 대중들—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 구매력을 통해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을 능력이 없는 이들—의 소망을 떠받치는 토대였던 것은 아닐까요.
다시 예수와 병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가 병자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묻자, 병자는 원망 섞인 어조로 대답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7절). 함께 누워있는 병자들은 자신이 연못에 들어가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자기를 밀쳐내는 경쟁자들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문득 궁금해집니다, 정말 그곳에는 환자들을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언뜻 생각해보면, 어떤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함께 와서 못에 넣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라면 종들을 거느리고 못가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겠다, 하는 상상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종을 부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이 연못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자다 못에서 씻으라고 한다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사환에게 화를 냈던 것처럼 불쾌해하고 화를 냈겠지요.(열왕기하 5:10-12) 그리고 죄인으로 규정돼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족이 얼마나 냉정한지, 그와 함께 있다가 자신들까지도 율법을 어긴 사람으로 내쳐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9:20-22) 그러니 가족도 그들과 함께 있었던 이, 즉 환자를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몸이 불편한 환자들에게 “내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고 말했을 법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베드자다는 체제의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체제의 작동 논리가 발현되는 장소, 곧 체제 자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전 중심 체제의 곳곳에서 ‘속죄’라는 종교적 가치와 제의용 동물이 상호 교환되는 상업적 종교의례가 일관성 있게 발현되고 있었는데, 베드자다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자다의 하층 연못에서도 구원과 속죄를 바라는 열망이 그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자원을 값으로 지불하게 만들고 종교 상품으로 교환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겠지요. 그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천사가 물을 휘저을 때 제일 먼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며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듯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보니 중증 환자들을 ‘물에 넣어주는 사람’, 밑바닥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이강도(이정진)는 몰락해가는 청계천 금속 가공 상가를 돌아다니며 일수를 회수하는 사람입니다. 일수를 쓴 이들은 쉽게 상환기한을 넘겨버리고 이자는 원금의 열배로 금세 뛰어오릅니다. 강도는 일수를 줄 때 채무자가 상해보험에 가입하도록 요구하고 일수를 갚지 못하면 가차 없이 그의 신체를 훼손해 보험금을 가로챕니다. 일수를 빌려야 하는 이들, 낮은 신용등급을 가진 죄밖에 없는 그들은 그 죄값으로 신체가 영구히 훼손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과 별반 다른 삶의 조건을 갖지 않았을 사람인 것이지요. 형벌의 집행자인 이강도는 ‘빌린 돈’의 달콤함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잔인한 이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요즘의 불경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일수를 갚는 사람은 하나도 담아내지 않고, 일수를 못 갚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이들이 맞게 되는 지옥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것은 불경기 때문에 욕망을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불 능력은 축소됐지만, 이들로부터 이윤을 갈취하는 이들의 욕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욕망의 격차’가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패배자와 무능력자를 생산해내게 됩니다. 이렇게 생산된 패배자와 무능력자들은 ‘일확천금’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 현실에서는 고리대금의 유혹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청계천 금속 상가와 대비되는 주변 건물들

한편, 영화는 종로나 명동의 고층빌딩과 청계천 금속 상가를 한 화면에 보여줌으로써 두 지역 간 건물의 높낮이가 얼마나 다른지, 외양에서 얼마나 큰 격차가 나는지 드러내 보입니다. 한때 청계천 금속 상가는 ‘잘 나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재개발만을 기다리는 곳이 된 느낌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베드자다 연못이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된 이중구조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연못은 성전 중심으로 배치되고 작동하는 종교-사회체제의 일부분입니다. 연못은 이 체제의 작동 논리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고 존재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베드자다 연못에서 소비되고 있는 희망과 꿈의 담론은 체제의 작동 논리와 전혀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하층 베드자다의 ‘신비한 힘’이 성전체제의 배치 속에서 등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구매능력을 가진 자만이 ‘속죄와 구원’을 향유할 수 있는 종교체제 안에서, 불구의 몸뚱어리만 남은 사람들은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죄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 가진 게 몸밖에 없어서 ‘속죄와 구원’을 구매할 수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죄인일 수밖에 없는 한 사내에게 예수는 “네 자리를 걷어서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자다에 일등으로 뛰어들 꿈을 꾸는 한 그는 악한 체제의 작동을 돕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그 꿈, 그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그는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의 불구인 몸을 근거로 그를 죄인이라고 규정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기준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하는 예수의 명령을 듣는 저에게, 예수의 명령이 “꿈 깨”라는 말로 들립니다. 악몽 그만 꾸라고, 악몽 속에서 취해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어찌 들으면, 예수의 이 말은 남의 심정도 모르고 질러대는 ‘훈계’나 ‘계몽적 언사’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을 따라 일어나 걸어간 그 병자가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그다지 밝은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 위로를 주는 말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전승들이 그를 먼발치에서 태평하게 훈계나 던져대는 사람이 아니라 붕괴돼 가는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과 함께 서서 이들을 지지해줬던 분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베드자다A를 떠난 병자가 결국 맞닥뜨리는 현실은 ‘자유’가 아니라 베드자다B, C, D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 곁에서 그 병자가 그를 죄인 취급하는 체제의 시선에 순응하지 않도록 그를 격려하고 일으켜주는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이 글은 한백교회 2012.9.30. 예배의 하늘뜻 나누기(요 5:1-9)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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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문’으로 나아오시오.[각주:1]
―요한복음 10:7~13, 5:1~14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요한복음 10장의 현장 찾기

10:11나는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립니다. 13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8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입니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10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입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습니다. 7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양의 문’입니다. 9내가 그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입니다.

불트만은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요한복음 10장 1~5절은 6절로 마무리되는 비유(παροιμα)로서, 그 핵심은 목자와 강도 사이의 상반성이라고 말합니다. 즉 목자가 문으로 당당하게 양우리에 들어오는 데 반해 도둑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목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목자인 예수를 따르는 양들이란 다름 아닌 요한공동체 자신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말하는 비유는 정확히 1~5절을 가리키고, 여기서 강조점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청중들은 비유를 듣지만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의 몰이해는 예수로 하여금 7절부터 위의 이 단순한 비유를 확대하게 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설명은 처음 이야기에 비해 조금 복잡합니다. 11절에서 18절에서는 분명 앞서 소개된 선한 목자의 모티브가 반복되면서 아버지와 아들, 선한 목자와 양 사이의 여러 관계가 표현되며 이 관계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예수의 희생이 제시됩니다. 한데 자세히 보니 7~10절이 뭔가 이상합니다. 7절․9절과 8절․10절이 아무리 봐도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8절과 10절은 앞서 1~5절의 목자 모티브의 연장선상에 있는 얘기로 보이지만, 7절과 9절은 갑자기 예수를 목자가 아닌 양의 문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절과 9절을 빼버리면 1절부터 19절까지의 문맥이 한결 자연스러워집니다. 예수 본인이 선한 목자인데, 당신보다 먼저 온 사람, 즉 합법적으로 문을 통해 양우리에 들어가지 않는 자들은 다 도둑이고 강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고요.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지만, 예수 당신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7절과 9절에서 분명 예수는 본인을 ‘양의 문’이라 주장하고, 자신이 그 문이니, 누구든지 자신을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목자와 문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일단 7절과 9절을 1~6절, 8, 10~18절보다 뒤에 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7절과 9절만 빼면, 10장 1~18절의 긴 비유적 담화는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선한 목자와 그가 이끄는 양떼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이 결국 8절과 10절, 그리고 11~13절에 담겨 있는데, 좀 더 자연스럽게 의미를 전달하고자 순서를 약간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의 맨 앞 성서본문표는 그렇게 제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예수는 양떼를 이끌고 문을 통해 양우리로 들어가는 선한 목자인 동시에 한편으로, 그 목자와 양떼들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것. 목자인 동시에 문이라…! 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물론 언뜻 보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양떼들(=신자들)의 선한 목자(=구주)로서, 우리를 푸른 초장(=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 그리고 한편으로 구원의 문 그 자체이신 분. 즉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신 분. 이 두 메타포는 교회 강단에서 정통적인 기독론과 구원론 교리를 뒷받침하는 성서적 근거로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10장 1-18절까지의 본문을 조금 다른 컨텍스트에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고리타분한 교리적 언설이 아닌 당대 이스라엘의 종교문화적 맥락에서, 혹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제기된 비판담론으로 읽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접근을 취하게 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본문이 지니고 있는 논쟁적 어투 때문입니다. 이 본문이 논쟁적이라 함은 예수가 자신을 목자 내지는 양의 문으로 정체화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누군가를 도둑이나 강도로 혹은 삯꾼으로 강하게 비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수 자신이 구원의 인도자나 구원의 통로라는 기독론 혹은 구원론적 교리를 설파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동시대적 어떤 현실을 문제 삼는 비판적/논쟁적 담화를 제기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여기서 예수의 담화가 지닌 현실성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 저는 문학비평에서 종종 사용되는 소설의 현실성 테제를 끌어들여 보고자 합니다. “소설이란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을 도모하는 서사전략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이와 유사하게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논쟁적 담화 역시 예수 당대와 요한공동체의 후대적 정황이 경험의 유사성 차원에서 합류하는 특정한 ‘세계의 시공간’을 무대로 하여(세계의 현실성), 그 세계 안의 인간들이 믿고 있었던 구원의 신화를 문제 삼고(문제의 현실성), 그 구원의 신화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 및 경계를 흔들면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해결의 현실성)라고 보자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요한복음 10장의 본문이 어떤 특정한 ‘세계’에서, 그 어떤 특정한 ‘문제’를 선택하여, 그 문제를 또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출된 담화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담화가 다루고 있는 세계의 현실로 가장 잘 어울리는 본문은 바로 이 곳입니다.

5:1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the sheep gate//προβατικῃ) 곁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행각이 다섯 있었다. 3이 행각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5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6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습니까?” 7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8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당신의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시오.” 9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10그래서 유대인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11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를 낫게 해주신 분이 나더러, ‘당신의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시오’ 하셨소.” 12유대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요?” 13그런데 병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붐비었고, 예수께서는 그 곳을 빠져나가셨기 때문이다. 14그 뒤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보시오! 당신이 말끔히 나았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당신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시오.”

‘양문’의 세계: 예루살렘 북쪽 성문

제가 요한복음 5장을 요한복음 10장 담화가 배태(胚胎)된 현장으로 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이 본문에서 ‘양의 문’ 곧 ‘양문’이 처음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10장 7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일러 ‘양의 문’이라고 하셨는데, 그 ‘양의 문’이 그저 단순히 양들이 드나드는 양우리의 문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너무 심심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외려 7~18절에서 반복적으로 쓰인 ‘도둑’(8, 10절), ‘강도’(8절), ‘목자’(11절), ‘삯꾼’, ‘이리’(12절), ‘다른 양들’, ‘한 목자’, ‘한 무리 양떼’(16절) 등의 단어들이 상징적 알레고리로서 예수운동에 대한 기억으로 소급되는 요한공동체의 정황을 역사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단어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근거하여, ‘양의 문’ 역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으리라 추정됩니다. 

10장 7절에 쓰인 ‘양의 문’이라고 하는 단어는 원어로는 ‘η θυρα των προβατων’ 인데요, 이 단어는 느헤미야서 3장 1절,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동료 제사장들과 함께 나서서, ‘양문(羊門//πυλην την προβατικην)’을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고, 문짝을 제자리에 달았으며, ‘함메아 망대'와 ‘하나넬 망대'까지 성벽을 쌓아서 봉헌하였다”라고 하는 본문과, 12장 39절의 “‘에브라임 문' 위를 지나,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서, ‘양문(羊門//πυλην την προβατικη)’에까지 이르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멈추었다”라고 하는 본문에서 쓰인 그 ‘양의 문’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킵니다.

적어도 유대인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양문’이란 표현을 듣자마자 즉각 떠올리는 것이 목장의 양우리에 달린 출입문이 아니라, 고유명사로서 예루살렘 성전 북쪽에 위치한, 즉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오는 진입로 역할을 하던 세 가지 동물 이름을 한 문들, 즉 어문(느3:3, 느12:39, 습1:10), 말문(렘31:40) 이외에 또다른 문이었던 ‘양문’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B.C.E 586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가, 이후 근 150년 만인 B.C.E 444년 제3차 귀환한 느헤미야의 주도로 52일 걸려 재건됩니다. 그런데 그 성벽 재건시 가장 먼저 건축된 것이 바로 양문이었습니다(느3:1). 느헤미야서를 잘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나누어 성문들을 수축하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게 또 이 양문입니다. 양문에서 시작해서 양문에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수도의 성벽이란 정치․군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재건된 성벽은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 성벽 보다 확장된 것으로서 특히 12문을 만들어 이스라엘 12지파의 재단결을 상징한 점이 특징적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 형제들, 제사장들이 함께 이 양문을 달았다고 하는 사실은, 이제 왕도 예언자도 부재하는 시대가 도래함과 더불어 이미 부정해 질대로 부정해진 유대사회의 회복을 위해 제사장들이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종말론적으로 택한 자들의 도성(계 21:10)을 상징하기도 하는 바, 이 성벽은 종교적으로 정결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즉 포로로 끌려갔다 귀환한 자들과 그렇지 않고 본토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의 경계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경계선의 역할을 하는 성벽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어 먼저 지어졌고 또 성전으로 출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이 양문이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이 양문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본문이 딱 한 군데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5장 2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행각이 다섯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 본문에서는 ‘양의 문’이 느헤미야서나 요한복음 10장에서와 달리 προβατικῃ(원형은 προβατικο)라고 하는 고유명사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단어는 πρό βά των(양)의 파생어로서 10장 7절의 θύρα των πρό βά των(양의 문)이나 느헤미야서의 πυλην την προβατικην(양의 문)을 한 단어로 축약한 형태입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양문은 다른 문들과 달리 자물쇠가 없었다고 합니다. 24시간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양이나 소와 같은 희생제의용 가축들이 들어가는 문으로서,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성문 가운데는 평민이나 병자와 가난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고, 다만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 같은 특권층들만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이 문으로 성 안에 들어가려면 성전세금을 내고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결국 출입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여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자연스럽게 가축이 드나들던 양문으로 드나들게 된 것입니다.

어차피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었던 성전 광장에서 희생제물용 가축의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있는 자들은 굳이 고향에서부터 희생제물을 준비하여 예루살렘까지 상경할 필요가 없었고, 또한 양문으로 그 가축들과 함께 들어올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 당시에 장사꾼들이 그 양문으로 가축들을 들여왔고, 성전 제의에 참여할 순례객들은 성전의 다른 문을 통해 들어와서 그것을 나중에 구입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의용 가축판매를 독점하고 있던 이들이 대제사장 가문이었고, 특히 예수 시대에는 대제사장 안나스 가문이 이를 관장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제물 거래, 환전, 기부금, 십일조, 토지 수입, 성전세 수입 등에서 유입되는 자금으로 오늘날의 은행 역할을 했습니다. 말 그대로 돈을 내고 구원(속죄)을 구입하는 종교시장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이 종교시장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성전세라든가 가축을 살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만 했기에, 이곳에서 거래되는 구원은 결코 무상(無償) 구원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처형을 결정지은 사건이 소위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던” 사건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한 것입니다(막11:15).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셨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막13:2).

‘양문’의 문제: 성전과 베데스다를 만드는 경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이 성전체제로부터 배제되어 성전 밖에서, 그것도 가축들이 드나들던 양문으로 가셔서, 그 앞에 형성된 또 다른 구원체제, 곧 가난한 자들의 구원체제와 마주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것은 베데스다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미신적인 구원체제였습니다. 그나마 이 미신적인 구원체제는 성전에서 거래되던 구원처럼 돈이 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는 보도처럼, 구원의 시행 횟수가 너무 적고 또한 예측불가능할 정도로 불안정한 것이 문제였지요. 오죽했으면 그곳에는 38년째 오매불망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성전 안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날마다 (유료) 공적 희생제사가 바쳐졌고, 특히 이 본문에서처럼 유월절 같은 명절 축제기간 동안에는 매일 수소 2마리와 숫양 1마리와 새끼양 7마리가 번제물로 바쳐졌으며, 숫염소 1마리가 속제제물로 드려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당시 이 양문 바로 옆에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는데, 히브리어의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이었고, 이 못을 가리켜 양의 못이라고도 불렀답니다. 이 연못은 본래 기원전 2세기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에 세워진 길이 100~110m, 너비 62~80m, 그리고 깊이 7~8m의 두 개의 쌍둥이 연못으로서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 때에 희생양으로 가지고 온 양을 씻는 목적으로 활용되면서, 양의 못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먼 길을 오는 동안 더럽혀진 양과 자기의 몸을 깨끗하게 씻고, 제사장에게 흠이 없음을 검사받은 연후에야 성전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룩한 풍경도 예수님 시대로 넘어오면 거의 사라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전 안에 성전세를 내고 들어가면 이미 장사꾼들이 잘 기른 제의용 가축들을 팔고 있었으니까요.

희생양을 씻기던 기능이 없어진 대신에 이곳에서 씻으면 치료의 효과가 있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늘 집합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물의 성분 중에 뭔가가 있긴 했나 봅니다. 몇 번의 치유 사례가 회자되더니 급기야 그곳을 둘러싼 신화적 전설이 조금씩 만들어졌던 것이겠지요. 천사가 내려오는 곳이라는 식의 말이죠. 성전에서 작동하고 있는 정상적인 구원의 시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자들, 가난하여 병든 자들, 혹은 병들어 가난한 자들은 그 구원체제 밖에서 자신들만의 하위리그를 만들어 그곳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38년 된 이 병자는 하위리그에서도 가장 경쟁력이 없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배제된 자들 가운데서 또 배제된 것이지요.

결국 이렇게 양문을 경계로 하여 베데스다와 성전이 나뉘어져 있고, 그 각각의 장소에서 서로 다른 구원의 신화가 작동합니다. 양문 이쪽 편 성전에서는 돈을 주고 산 희생제물로 정결함과 죄사함을 획득하는 가진 자들의 구원이 거래되고 있고, 양문의 저쪽 편 베데스다에서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주길 바라는, 더 정확히 말하면 물이 움직인 후에 자신들을 그곳까지 옮겨줄 자비로운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들의 구원신화가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평화롭게 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죄책감과 죄사함이 일반화된 등가 원리에 따라 실물로 교환거래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삶 전체가 걸려 있는 고통과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기적/자비가 역시 등가 원리로 교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 성전에서 생산되는 구원이 구매자와 판매자(대제사장), 브로커(장사꾼) 모두를 만족시키며 연일 판매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면, 베데스다에서 생산되기로 한 구원은 실제 거래가 성사되는 일이 거의 없어 재고만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처럼 그곳의 다섯 행각엔 수많은 병자들이 대기하며, 물이 움직인 뒤에 못에 들어가는 최초의 1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눈치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마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기에, 그나마 그것이 그들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사실 돈이 없고 병이 들어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이들이 그들만의 구원의 체제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내심 반겼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성전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지에 적응하여 그에 맞는 적절한 구원의 체제를 이루어 양문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지 않고 자기들끼리 잘 살아가는 것이 성전 안 사람들에게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혹여나 베데스다 사람들의 그 순진무구한 믿음대로 정말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 일이 일어나면, 그때 한번 가서 아무나 한 사람만 물 안에 넣어주면 자신들의 자비로움이 입증되는 것이니 그보다 좋은 일은 없는 것이죠. 사실 이 점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베데스다의 세계는 자신들의 자비로움을 보증해줄 수 있는 수혜와 봉사의 체제였으니까요.

‘양문’의 해결: ‘양문’을 지나, 무한한 교류의 공간으로

바로 그렇게 양문을 경계로 하여 나뉘어 있던 두 구원체제의 현장을 예수님은 일부러 찾아가셔서, 38년 동안 구원을 갈망해온 한 병자를 오래 동안 유심히 관찰하시다가 그에게 비로소 말을 건넨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 후에 그는 분명히 치유되었습니다. 어떻게 치유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치유된 후에, ‘성전에서’ 예수와 다시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치유되자마자 성전에 들어갔던 것 같고, 거기서 유대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일을 갖고 시비를 걸자, 예수가 자신에게 한 말을 전한 것입니다. 그가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한 문은 당연히 지난 38년 동안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 양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도 이제 병자가 아니기에 성전에 들어가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꿈에도 그리던 성전을 보러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 안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가 치유를 받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지요. 어쩌면 그들은 양문을 경계로 하여 공고하게 나누어져 있던 두 세계가 교란된 사실에 분노했던 것일지 모릅니다. 안식일 규정은 핑계일 뿐 그들은 양문을 통과하여 성전 밖의 세계에서 성전 안의 세계로 넘어온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안식일의 규정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뿐 아니라, 그 거부의 근거를 자신과 아버지의 동등함에서 찾았습니다. 자기와 함께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이 두 세계의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10장의 담화를 이 상황으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양문으로서, 양문 밖에 있던 38년 된 병자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어주셨습니다. 물론 그가 가야할 새로운 세계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또 다른 범죄의 혐의였으니까요. 결국 그가 가야할 세계는 성전이 아닌 다른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다시 만났을 때 했던 말씀, “보시오! 당신이 말끔히 나았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당신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시오”는 그로 하여금 다시금 죄를 짓고 그 죄를 사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새로운 세계는 베데스다도 성전도 아닌, 전혀 다른 제3의 세계입니다.

한편, 성전 안에 있던 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양문이라는 말씀은 그들도 양문을 통과해서 즉 희생제물을 직접 준비하고 베데스다에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한 후에 성전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말씀이자, 양문 밖으로 나와서 자신들이 외면하고 있는 그 세계를 대면하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베데스다의 고통과 눈물을 제물삼아 유지되고 있는 성전의 체제로부터 나와서 자기들이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있는 그 참담한 구원현장을 보라는 것이지요.

결국 양문은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사이의 공간인 것입니다. 이 사이의 공간에서는 더 이상 양문의 안도 밖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문을 경계로 하여 이쪽과 저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각각의 교환체계가 모두 무너지는 그런 장소인 것입니다.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성전의 제의종교/국가종교/시민종교/시장종교와 베데스다의 주술적 민간종교, 이 양자의 영역을 분할하던 경계선 역할을 했던 양문이 이제 두 세계 각각에 대한 외부성으로 도입되어 그 경계를 허무는 교류의 공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베데스다와 성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예수운동이 당대 사회에서 수행한 것은 바로 이 양문의 운동이었습니다. 두 세계 각각에 외부성 혹은 근본적 반성의 기제로 작용하여 닫혀 있던 각 세계의 벽을 허물고 경계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무한한 광장의 공간을 (탈)구축해나간 새로운 종교적․사회적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양문으로 자신들의 양떼와 함께 걸어간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오늘 그 선한 목자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 양문으로 나아오라고 명령하십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지난 2009년 8월에 한숨결교회에서 설교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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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너머 희망의 소리를

양미강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 연구소 운영위원)

지난 주일 예배 찬송소리가 유난히 작았다. 노래가 어려워서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대충 눈치를 챘나? 교회 주보 알림난에 실린 교우소식. 그 난에 새겨진 김영승 선생의 일제고사 거부로 인한 파면소식. 나는 주보를 만들면서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 난감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 걸까? 이미 교인들은 매스컴을 통해서 파면소식을 전해들은 것 같다. 중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막상 파면통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맥이 풀리고 화가 난다.

지난해 10월부터 불거진 일제고사 거부로 인한 전교조의 대량해직 사태. 이미 서울에 있는 공립학교 선생님 7명이 해임, 파면된 상황이고, 사립학교에서는 김영승 선생이 유일하게 파면조치를 받았다. 강원도에서도 4명에 대한 중징계가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80년대 전교조의 대량해직 이후 일제고사문제로 많은 수의 교사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아이들을 일렬로 세우는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갈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알려준 것이 교사가 학교현장으로부터 내몰려야 할 범법행위인가? 학생들에게 부모님과 상의해서 일제고사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주는 일이 해임과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받을 정도인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가? 아니면 판단할 권리가 없는가? 아이들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고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이 정 믿기 어렵다면 부모님들이 그 판단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이 그 선택권을 아이들과 부모에게 돌려주었다고 해서 교사에게 사형선고인 파면과 해임조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9월말 미국에서 1년간의 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서울의 모습은 횡횡했다. 미국에서 먼저 들어온 후배가 귀국할 때 심호흡을 하고 들어오라고 한 말이 실감났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시민단체들은 빨간색 좌파로 몰리기 일쑤였고, 날마다 국회로부터 각종 감사에 시달려야만 했다. 찍히면 죽는다 했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불순하게 규정되면 전후좌우 무시되고 오직 한가지, 솎아내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색깔은 ‘빨강과 파랑’, 그리고 방향은 ‘좌와 우’뿐인 것 같다. 그러니 세상을 표현하는 무늬는 동그라미 두 개 뿐이다. 겹쳐지지 않는 동그라미 두 개 말이다. 좌파와 우파만이 존재하는 이 세상. ‘편가름’과 ‘솎아내기’가 이 시대를 담아내는 키워드인 셈이다.

좌우 할 것 없이 입으로 되뇌던 다양성, 창의성, 민주성은 다 어디로 갔을까? 치열한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선 다양성, 창의성, 민주성은 옷에 붙이는 자크처럼 편리하게도 사용된다. 일제고사를 거부해서 나름대로 인생의 최대고비를 맞고 있는 교인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왜 찍혔소? 남들처럼 적당히 살아가면 되지. 뭐하러 소신을 분명하게 말해서 ‘솎아냄’을 당했소? 수만 명의 교사가 다 그럭저럭 순응하며 사는데 당신 하나 소리지른다고 세상이 변할 것 같소? 혼자만 다친다오. 세상 더럽네 하면서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리고 살면 속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소?

그러나 차마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 당신이라면 뭐라 이야기할까?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에게 병 낫기 위해 거적을 가지고 연못가로 달려가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네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셨던 태도를 보면, 그의 태도는 더욱 분명하지 않을까? 자리를 걷어차버려! 하면서 단호하게 호통칠 예수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 이거야... 남들은 파면을 당하면 다 끝났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아니야. 다시 시작이다. 이제부터라고 다짐하는 오늘 기자회견장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희망을 떠올리고 있다. 매서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함께 모여있는 아이들과 부모들, 그리고 선생님들에게서 고통 너머 희망의 소리를 듣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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