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한 배후세력’ 찾기에 담긴 약자혐오와 비민주성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여성과 종교]라는 과목을 몇 년 동안 가르치면서 해가 바뀌어도 계속 사용하는 몇 가지 수업 교재들이 있다. 서리니티 영 (Serinity Young)이 쓴 “티베트를 변화시키는 여성들, 여성들을 변화시키는 티베트” (“Women Changing Tibet, Tibet Changing Women”)라는 글과, “사티야: 적을 위한 기도” (Satya: A Prayer for the Enemy) 라는 짧은 다큐 영화이다.[각주:1]  이 글과 영화는 티베트 여성들, 특히 ‘아니’ (ani, ‘aunt’) 라고 불리면서 티베트 불교에서 정식으로 승려 안수를 받지 못하는 여성 승려들이 중국으로부터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면서 벌이는 비폭력 저항에 관한 것이다. 불교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삶에서 행하는 여성 승려들은 자신들이 체포될 경우 중국 경찰의 지하 감옥에서 행해질 취조와 고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평화적인 독립시위를 이끌어 간다. 그들이 불교의 가름침을 익히고 수행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토론할 주제들이 많은 글과 영화인데 그 중 한가지 주목할 내용은 티베트의 여성 승려들이 시위 도중에 중국 경찰에 의해 체포가 되고 감옥으로 이송된 뒤에 왜 중국당국에 의해 지독한 고문을 받는가이다. 아무리 ‘평화’적인 시위라 해도 중국으로 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으니 당연히 고문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그들이 당하는 고문은 독립시위를 이끌었다는 ‘죄목’에 해당하는 형벌이 아니다. 여성 승려들은 고문 뒤에 재판에 넘겨지고 형이 결정되면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물론 수감 생활 중에도 여러가지 폭력에 노출되지만, 그와 별도로 그들이 법정에서 형을 받기 전에 모진 고문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티베트의 여성 승려들은 독립시위의 ‘배후세력’을 찾아 ‘진실’을 밝혀 내려는 중국 당국으로 부터 고문을 당하는 것이다. 고문을 받을 때 그들이 항상 받는 질문은 ‘배후에 누가 있냐’는 것이다. 여성 승려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하고 실행에 옮긴 평화적인 시위이지만 이를 받아 들이지 않은 채 어떤 ‘불순한 배후’가, 즉 ‘순수하지 않은 배후’가 있는지를 알아 내려고 중국 당국은 여성 승려들을 지속적으로 가혹하게 고문한다. 물론 대부분의 고문은 젠더화된 고문이다.


중국 정부는 어리게는 16살, 17살부터 20대, 30대인 여성 승려들이 스스로 그런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믿지도 못한다. 그런 ‘어린 여성’ 승려들의 ‘배후’에 ‘불순한’ 누군가가 있어서 그들을 조절하는 것이라 믿고, 어떤 ‘남자’ 승려들이나 혹은 더 큰 배후세력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갖가지 고문을 가한다. 이것은 고문에 담긴 여성혐오이다. ‘약한’ 여성은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오직 ‘강한’ 남성만이 배후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여성을 약한 존재, 남성에게 의존하는 존재, 자발적으로 저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존재로 보는 것이 바로 여성을 고문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여성들은 ‘배후세력’이 누군인지를 말하지 않는다고 고문 받고, ‘배후세력’없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저항운동을 펼친 것으로 잠정적으로 결론 지어질 때는 감히 (남성)국가권력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는다. 약하면 약한 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고문과 형벌을 피해 갈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다.

 
글의 저자인 서리니티 영은 중국정부의 ‘배후찾기’가 ‘성평등’을 외치는 중국 정책들의 ‘애매모호성’을 스스로 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친다’라는 구호를 가지고 ‘성평등’을 외쳐온 중국이 실제로는 여성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티베트의 여성 승려들은 정치적인 저항뿐 아니라 중국의 ‘애매모호한’ 성평등 정책을 폭로한 ‘죄’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들의 시위는 티베트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채 파괴한 “자비로운 지배자”로서의 중국에 대한 거부이며, 여성들, 특별히 소수민족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장려한다면서 동시에 그들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중국정부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각주:2]


‘불순한 배후세력’. 우리도 많이 듣는 말이다. 대중시위나 저항이 있을 때마다 ‘배후’를 먼저 찾는다. 정부나 기업, 혹은 학교를 상대로 일어나는 ‘시위’가 있을 때 흔히 듣는 말이다. ‘온순한’ 주민들이, ‘나약한’ 청소년들이나 학생들이, ‘순응’하는 직원들이, ‘연약한’ 피해자들이 그렇게 시위를 주도하고 이끌리가 없다는 것이다.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 누구인지 엄연히 아는 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배후세력’을 찾아 냄으로써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정부나 경찰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시위나 집회를 대하는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배후세력’을 알고자 하는, 아니 ‘만들어’ 내고자 하는 노력의 집요함이 보인다. 만약 저항이나 시위가 조금이라도 ‘과격’ 해질 경우에는 ‘불순한 배후세력’을 찾으려는 집착은 더 심해진다. 이렇듯 ‘배후세력’을 찾으려는 권력자들의 모습은 한국의 과거 군사독재정권이나 현정권에만 국한 된 것도 아니고, 권력을 쥔 자들이 통치수단의 하나로 사용해온 시대와 국경을 넘는 ‘작업’중의 하나이다. 이런 ‘배후세력’ 찾기와 만들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배후세력’ 찾기나 만들기는 ‘배후’에 대해서 보다는 사실 그 ‘배후’를 찾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배후’를 찾는 사람들은 시위의 참가자가 여성들이거나, 어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근거없는 확신을 ‘배후세력’을 찾는 행위를 통해서 여과없이 보여 준다. 뭔가 큰 일이 있으면 그 주체는 여성들이나 어린 사람들일 수 없고 반드시 뭔가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지닌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는 대부분 지도자급 ‘남성’이거나 ‘남성들로 이루어진 조직’이고, 때로는 ‘외부’ 세력이고, 그 배후세력만이 모든 사건의 전말, 또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실제하든 하지 않든 찾아지고 만들어진 ‘배후세력’이나 ‘진실’은 배후를 찾아내고 만들어 내야만 하는 권력자들의 약자혐오와 비민주적인 의식과 행동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고문과 진실 (Torture and Truth)]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페이지 두보이스 (Page duBois)는 사건의 ‘배후세력’과 ‘진실’을 캐내려고 노예들을 고문했던 고대 그리스의 잔인한 제도에 대해 논의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상한’ 자유인들과 달리 노예들은 항상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고, 그렇기 때문에 고문을 당할 때에만 ‘진실’을 말한다고 믿었다. ‘이성적’인 주인과 달리, 노예들은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오직 고문을 받을 때만 ‘진실’을 얘기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들이 고문 받으면서 내놓은 얘기들만 ‘증거’로 채택되었다. 여기서 ‘진실’은 항상 어딘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찾아 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각주:3]


민주주의의 (democracy) 개념적 토대가 형성된 고대 그리스사회에서 ‘일반 사람’ (demos), 또는 ‘시민’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자유인인 성인 남성들 뿐이었다. 여자들, 아이들, 노예들은 ‘시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21세기인 지금은 어떠한가? 민주사회 구성원들의 자기의사 결정권이나 행동권을 인정하지 않고 시위를 통해 드러내는 그들의 염원을 무시하는 권력기관이나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오직 힘있는 사람들만이 (물론 그 힘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생길 수 있겠다)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비민주적인 태도가 보인다. ‘일반 사람’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구성원인 시민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래서 ‘배후세력’을 밝혀내서 ‘진실’을 찾겠다는 권력기관이 사실은 가장 비민주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진실’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어서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사회의 구성원 (demos)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염원을 시위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진실’인 것이다. 이런 진실을 무시하고 부인하려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세계 곳곳의 대로와 골목길에서 저항의 시위 행렬이 길어지는 또 한해가 될 것 같다.

 

 

ⓒ 웹진 <제3시대>



  1. Serinity Young, “Women Changing Tibet, Activism Changing Women,” in Women’s Buddhism and Buddhism’s Women: Tradition, Revision, Renewal. Ed. Ellison Banks Findly (Wisdom Publications, Boston, 2000). [본문으로]
  2. Ibid., 238-239. [본문으로]
  3. Page duBois, Torture and Truth (New York: Routledge, 199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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