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묵시록 3 


- 청교도 종말론 그리고 사드(THAAD) 감상법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이번 글에선 청교도 종말론이란 주제를 계속해서 앞부분에 다루고 후반엔 약간 우회하여 최근 논란이 되어온 사드배치에 대한 논쟁을 약간 다른 방식에서 읽어보고자 한다) 


코튼 매더


    17세기 미국의 제일 중요한 사상가라 앞서 소개한 코튼 매더의 책엔 유달리 ‘아메리카’란 단어가 제목으로 많이 등장한다. [Magnalia Christi Americana, 1702]이라는 책이 대표적이지만 [Biblia Americana]와 [Psalterium Americanum]이란 저술도 있다. 미국이라는 땅을 학문의 대상으로, 또 미국을 신의 섭리 속에서 이해한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시킨 건 매더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아메리카란 용어를 신대륙을 지칭하는 보편적인 용어로 만들어냈고 아메리카를 담론의 대상으로 창조해낸 사람도 매더였다고 할 수 있다. ‘아메리칸’는 당시만 해도 주로 미국의 원주민들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매더는 자신을 ‘아메리칸’이라 부르기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메리카는 유럽의 종교개혁을 완성시킬 뉴잉글랜드가 아니었고, 그 자체로 의미와 사명이 있는 용어였다. 그러나 그 의미와 사명을 청교도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된 영국의 역사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매더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메리카를 설명해줄 성경의 해석과 인류역사의 구원사적인 이해였고, 그는 오랜 시간 그 작업에 몰입해 자신의 ‘미국사상’을 만들어냈다. 그에게 미국은 성경의 예언이 실현될 예언의 땅이었고, 청교도들은 구원사적인 사명을 안고 미국에 온 선민들이었다. 미국의 종말론적인 이해와 선민사상은 매더가 17세기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지만 현재까지도 세속화된 상태에서 미국의식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18세기 미국의 독립운동과 국가건립에서 19세기 서부개척론 그리고 미국의 부흥운동에서 최근의 미국 예외주의까지의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종말론적 선민사상과 같은 뿌리 깊은 개념을 배제하면 그 정신적 연결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매더는 예수의 재림과 종말의 사건들이 곧 일어날 것이란 확신이 있었고 이를 증거하는 걸 자신의 역할로 이해했다. 성경의 예언들이 자신의 시대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고, 마지막 시대의 신학은 종말론일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이 죽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절박함을 안고 살았다. 그렇다고 매더가 세상을 등지고 말세만을 외치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미국의 청교도 사회의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과학과 진보적인 세상을 상상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청교도들이 미국의 집단무의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매더만큼 이를 잘 대변해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주술적 세계관에 근거한 종말의 상상력과 함께 자연의 과학적 이해를 동시에 추구했던 그의 모습에서 미국문화의 이중적인 모습의 한 원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매더는 미국 청교도들의 종말론에 신학적 논리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세의 날에 대한 예언도 잊지 않았다. 두 번이나 번복했지만 나름대로의 계산을 통해 말세의 해를 예언했다. 근대의 역사에서 미래와 종말의 예언을 한 사람은 흔히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만이 아니었다. 17세기 이후 그런 말세에 대한 계산과 예언을 한 사람들의 이름만큼 과학과 주술과 역사와 예언의 구분이 근대초기에 명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건 없다. 뉴턴은 계산을 통해 종말의 해를 2060년이라고 내다봤으니 아직도 유효하다. 세상이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고, 예수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고,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믿음은 신학적 해석을 떠나 기독교 역사의 본질에 속한다. 종말의 사건이나 그 징조는 서구역사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그때가 언제인지를 파악하고자 성경을 찾았고 자연을 연구했다. 그에 대한 예언은 신과의 교감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당대 학문이 제공하는 상상력에 기초한 계산과 판단의 산물인 경우가 많았다. 산술적인 계산이나 천문학의 관찰에 의거한 판단도 많았고, 최근에는 종교와는 상관없이 환경과학이나 우주생성이론을 근거로 세속적이고 습관적인 종말의 진단을 하는 예도 있다. 몇 년 전 통계에 의하면 미국 기독교인들 중 41%는 예수의 재림이 2050년 이전에 있을 거라 믿고 있다. 복음주의 계통의 기독교인들만을 보면 그 비율이 58%로 훨씬 늘어난다. 19세기엔 종말의 예언이 유럽에서는 뜸해졌지만 미국에서는 황금기를 맞는다. 예수의 재림, 종말사건들의 시작, 휴거 등의 예언은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제7안식일 예수재림교 그리고 전천년주의를 따르던 개신교회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였다. 20세기 한국개신교의 역사도 길선주 목사로부터 시작되는 종말예언으로 점철되어 왔다. 앞으로 다룰 주제이지만, 20세기 세속화된 미국의 역사에선 그 종말의식이 종교만이 아닌 대중의 문화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네이팜과 사드


    네이팜에 관한 신문기사를 접한 건 오래 전이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한국의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공포와 테러의 대상이었던 네이팜은 그 당시에도 잔혹한 살상의 무기라는 이유로 도덕적 논란을 일으켰다. 신문기사의 내용은 퇴출된 네이팜탄을 폐기처분하기 위해 기차를 통해 시카고를 거쳐 목적지인 인디애나까지 운송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폭탄을 실은 기차가 인구밀집 지역을 통과하는 게 공공의 안녕에 위배되는 위험한 일이라며 이를 반대하고 나선 시카고 시의회 의원들과 지역 정치인들이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에 실어 운반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네이팜은 미국 (하버드 대학의 화학교수가 연구하고) 만들어 일본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에서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분노와 공포의 무기가 아니었나. 뉴스기사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했고, 네이팜의 잔혹한 역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1945년 일본에선 미국의 네이팜 폭격으로 하룻밤 사이 십만 명이 불에 타죽었다. 또 네이팜은 6.25 전쟁 당시 북한을 초토화시킨 ‘넘버 원’ 무기였다. 네이팜은 베트남 전쟁 때 가장 많이 사용됐고, 미군의 무자비한 폭격을 증언하는 반전운동의 상징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사람들이 가장 잘 기억하는 장면도 네이팜이 폭발해 치솟는 불덩어리의 모습이다. 


    네이팜과 사드의 연결점은 무기로서의 유사성이 아니라 슈퍼무기, 즉 적을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를 찾았던 미국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둘 다 미국에서 개발된 무기다. 미국의 한 시대를 상징했던 네이팜을 문화사 측면에서 다룬 책의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 [Napalm, An American Biography]. 사실 무기는 단순히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의 산물만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한 시대의 문화와 가치와 정신을 대변하기도 한다. 네이팜, 핵무기, 핵잠수함, ICBM, 그리고 사드까지의 역사는 슈퍼무기를 찾았던 미국의 정신사의 일부로 읽을 수 있다. 이 역사를 미국역사의 묵시록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핵무기보다 먼저 만들어졌어도 곧 핵무기가 개발되면서 슈퍼무기의 명성은 갖지 못했지만, 미국의 B-29 폭격기에서 떨어지는 네이팜탄은 아마겟돈 전쟁의 악몽을 연상케 했다. 1945년 봄 독일 드레스덴에 가해진 미군의 무자비한 공중폭격을 주제로 한 책의 제목은 [Apocalypse 1945]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고, 코폴라 감독의 [Apocalypse now>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폭격은 독일과 일본과 베트남 등의 나라에선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민족적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북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세기의 역사에서 최후의 무기 또는 종말의 무기는 당연히 핵무기였다. 냉전 이후 지구생명의 역사를 한 순간에 끝낼 핵전쟁이 어는 순간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살아 왔다. 아마겟돈이나 최후의 심판과 같은 종교적인 개념을 믿지 않는 사람들 인간이 억제할 수 없는 최후의 전쟁이 곧 일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핵무기는 종말의 상징이었고, 20세기의 묵시록 그 자체였다. 핵무기의 묵시록을 언급하는 이유는 20세기 중반 이후 문화와 학문의 발전은 핵전쟁의 종말이라는 매우 가까운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에서 해체이론, 추상표현주의에서 비디오아트, 소비자주의에서 환경운동까지의 변화가 어떻게 종말의 담론을 수용하고 있는지 궁금해지지만 이는 따로 알아볼 일이다. 당연히 기독교 신학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21세기엔 마치 테러라는 현실이 20세기 핵무기의 진부함을 대체한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테러리즘을 위험시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통제되지 않는 세력이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다는 가정이기 때문에 핵무기의 묵시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다만 최근의 문화적 상상력은 더 진보해, 이미 이루어진 묵시적 종말 이후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60년대의 영화가 핵폭발과 함께 모두 죽어가는 장면으로 끝났다면, 90년대 이후의 영화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의 얘기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코맥 맥카시의 <로드>라는 책이 대표적인 예다. 


   슈퍼무기, 최후의 무기를 끊임없이 추구해 온 미국의 역사를 다룬 브루스 프랭클린의 [War stars]라는 책이 있다. 출간된 지 벌써 30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그 논지는 명확하고도 유효한 미국문화사의 고전적인 책이다. 그는 18세기 증기선 개발로 유명한 로버트 풀턴이 추구했던 평화를 이루고 자유를 지킬 슈퍼무기 잠수함 건설에 대한 얘기로 그 역사서술을 시작한다. 이후 미국이 만든 모든 슈퍼무기는 전쟁을 끝내고 영구적인 평화에 기여할 것이란 명분하에 만들어졌다. 폭격기가 그랬고 핵무기, 핵잠수함, ICBM, MD의 역사가 그랬다. 그 사이 순간의 계산착오만으로도 지구의 생명체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체제가 구축되어 왔고, 적의 위협으로부터 평화를 지키고 적의 무기를 무력화 시킬 슈퍼무기 경쟁은 첨예화 되었다. 선택받은 예외주의의 나라 미국은 그 경쟁에서 질 수 없었다. 아마겟돈 전쟁을 무릅쓰고라도 지켜내야 할 군사적 우위였다. 미국의 문화는 무기산업과 군사주의에 우호적으로 발전했다. 네이팜의 불덩어리보다 더 큰 시대의 아이콘은 핵폭발의 버섯구름이었다. 상징은 생각을 낳는다고도 하지만 또 현실을 견디게도 해준다. 종말의 상징인 핵폭발의 버섯구름은 예술가의 손을 통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어느 순간 미국적이라는 것과 군사적이라는 것은 유사한 것이 되었다. 그게 정당화되는 이유는 미국의 의도는 선하다는 인식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 의도는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고 자유는 죽음과도 바꿀만한 가치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심판의 언어는 미국에 가장 가까운 언어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사회비평가 루이스 멈포드는 핵무기 경쟁을 합리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미국의 지도자들을 향해 ‘미쳤다’고 외쳤고, 이들의 행태가 용인되는 이유는 미국인 모두가 똑같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최근에는 그런 비판도 듣기 힘들다. 그 경쟁이 이미 일방적인 승부로 끝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모두가 자살머신에 갇혀 좌절과 절망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드(THAAD)로 돌아가 보자. 사드의 한국배치에 대한 두 관점은 이를 북한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으로 보는 시각과 중국의 ICBM에 대한 미사일 방어체제의 일부라는 시각이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할 관전 포인트는 역사적인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미국의 슈퍼무기 개발의 역사라는 측면이다. 종말의 무기인 핵무기를 효과적으로 소유하려면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선제 핵공격을 하고도 핵보복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상대의 선제 핵공격을 미리 막을 수 있는가이다. ICBM은 상대가 선제적 핵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보복용 무기로 알려져 있다. 보복을 당하지 않는 핵공격은 없다는 걸 증명하는 무기이기 때문에 선제적 공격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양쪽 모두 핵무기가 있다는 전제 하에 성립되는 방정식이다. 만약 ICBM을 공중에서 무력화 시킬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 쪽에선 보복 당하지 않고 공격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이고, 다른 쪽에선 적의 공격에 대응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MD라는 미사일 디펜스 시스템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사드가 MD 체제의 한 축이기 때문에 사드의 한반도 배치문제 문제가 남북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 내가 잘 모르는 - ICBM이나 사드의 전략적 논리가 아니라 적의 첨단의 무기를 무력화 시키는 슈퍼무기를 찾아온 미국의 역사 속에서 사드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드가 ICBM을 공중에서 분해시키는 상황은 최후의 전쟁일 수밖에 없다. 최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는 전략을 묵시적인 아마겟돈 전쟁을 상상하지 않고 구상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 무기의 역사는 사회사 그리고 문화사의 일부다. 1940년대 핵무기 개발은 수없이 많은 각도에서 연구되어 왔다. 핵무기는 전쟁을 종식시킬 무기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세상을 끝낼 수 있는 무기로 아직도 남아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핵무기가 묵시록의 환상을 일깨운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냉전시대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들은 핵무기를 통한 지구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을 다룬 것들이다. 냉전시대의 묵시록은 핵무기를 통해서 쓰였다. 특히 예루살렘을 두고 벌어지는 전쟁이 핵전쟁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한 파멸이 예수의 재림와 천년통치로 이어진다는 설정은 20세기 후반 가장 흔한 전천년주의 말세론의 기본적인 줄거리다.  



참고서적에 대하여


    브루스 프랭클린Bruce Franklin의 책의 원제목은 War Stars: The Superweapon and the American Imagination으로 1988년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에서 출판되었다. 멈포드Mufford에 대한 언급은 원래 1946년 그의 에세이 "Gentlemen: You Are Mad"에 출처가 있지만 프랭클린이 그의 책에서 인용하고 있다. 네이팜을 다룬 책 Napalm - An American Biography의 저자는 로버트 니어Robert M. Neer이고 비교적 최근 2013년 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했다. 두 책 모두 미국 군사무기의 문화사를 다룬다 할 수 있다. 한국어 번역본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매더가 쓴 책들 가운데 구하기 힘든 것도 있지만 그중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Magnalia Christi Americana미국에서의 그리스도의 위대한 업적]은 하버드 대학에서 판이 있다. Post-Apocalyptic 장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코맥 맥카시의 <로드>는 책과 영화 모두 좋은 평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은 장르의 <설국열차>에 대해선 다음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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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느님, 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 국가안보와 두려움의 상관관계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영어 단어 security는 한국어로 안전, 보안, 안보 등으로 문맥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요즘 미국에서 한국 관련 기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security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 개성 공단을 폐쇄하고, 미국의 록히드 마틴사가 제조한 사드 (THAAD)시스템을 들여오려고 하는 한국 정부. 이 틈을 타서, 국제적 문제아인 북한의 핵 위협에서, 자국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위대의 지위를 격상하려는 일본. 한반도에서 커지는 미국의 군세력을 자국 안보의 위협으로 보고 경제적,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는 중국. 그리고 침묵하는 북한.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미국 사이에 세계 평화는 고사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지한 대화와 협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이들 국가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안보의 정의도 군사무기와 힘을 바탕으로 한 영토 수호와 자국 국민들 보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박근혜, 김정은, 시진핑, 오바마가 가진 세계 안보와 평화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만약 21세기 교회와 기독교의 역할이 곽퓌란 (Kwok Pui-Lan)과 요그 리거 (Joerg Rieger)가 “종교를 정복하라 (Occupy Religion)”는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치와 경제 시스템의 현상유지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미국의) 강한 군사력에 의지한 대한민국 국가 안보라는 시스템에 어떤 자극을 가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반 기독교 사상가인 시모니 웨일 (Simone Weil)은 security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안전 (security)은 영혼이 본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안전은 영혼이, 짧은 순간이나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공포나 테러의 무게 아래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비록 영속적인 공포는 잠재적 상태만으로 존재해서, 그것의 고통스러운 효과는 거의 직접적으로 경험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질병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영혼의 준마비 상태이다 (Simone Weil, The Needs for Roots, 1952).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웨일은 반전 운동가는 아니였지만, 두 개의 세계 대전을 경험하면서,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열렬히 비난하였다. 특히 이들 전쟁이 노동자 계급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식민지 민족의 삶을 수탈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렇다면 공포와 테러에서 자유로운 안보/안전은 군사력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성 어거스틴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단순화시켜 생각해 보자. 세속적 왕국이 하늘의 왕국을 대신하지는 못 하더라도, 지상에서 평화와 질서를 지킬 의무가 있다. 외부의 침략으로 부터 영토와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킴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세속 왕국의 지배자가 해야할 의무이다. 비록 어거스틴이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 예방적 전쟁을 허용하기는 하였지만, 상대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란 공포심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도 동의하듯, 어거스틴에게 있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며,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후의 수단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빠른 시일 내에 끝내야만 한다.  


         전쟁은 인간의 공포심을 먹고 사는 괴물이다. 전쟁의 승패는 이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포심을 적절히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전쟁 당시 1.4 후퇴 때, 자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트루만 대통령은 국가 비상상태를 선포한 후에, 공산당에 의해 아시아가 무너지면 미국도 안전하지 않으며, 이는 곧 미국이 하느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자유도 없는 국가로 전락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공산당을 악마와 동일시 하며, 국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한 것이다.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 또한 사실 확인조차 되지 않은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 때문에 시작되었다. 인류의 반을 말살시킬 수도 있다는 대량살상 무기에 대한 공포감은 이라크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사담 후세인도 사라지고, 대량 살상 무기도 이라크에 없다는 것이 확인 되었지만, 이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전쟁은 항상 시작하는 것보다 끝내는 것이 더 어렵다—사실 전쟁의 후유증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그러므로 현대의 평화 운동가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 자체가 평화 운동이며,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전략과 정치, 경제 환경 조성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불평등, 무역 불균형, 국가 간 경제 제재 등 갈등의 근원을 파악해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근원을 해소해 나가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갈등 상황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전 세계 여성 평화 운동을 연구한 영국의 사회학자 신시아 코번은 반전운동은 공포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표현한다. 그 비유는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전쟁 그 자체가 일반 여성들의 삶에 가하는 해가 너무 크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일어난 일본군 위안부, 미군과 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하는 지역들의 성폭력과 조직화된 기지촌 성매매, 전쟁 중의 집단 강간, 여성 군인들에 대한 성폭력, 여성 군인들의 업적 비하 외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와 딸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 등 여성들이 몸으로 정신적으로 겪을 수 있는 전쟁의 폐해는 상상 이상인 경우가 많다. 적국의 여성들을 공격하는 일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적에게 공포심과 무력감을 주는 비열한 전술이다. 여성이 겪은 전쟁 폭력은 전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려지는 경우가 많고, 알려진다 하더라도, 사회나 국가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피해 여성들을 위로하고, 사회 화합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하는 예가 거의 없다. 정신대 피해 여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일본과 협상한 대한민국 정부, 내전 기간 동안 집단 강간을 당한 보스니아 무슬림 여성들의 기념비 건립을 거부하는 세르비아 지역 주민들과 정부. 이들은 모두 여성들에게 그 영혼 깊숙히 공포와 테러를 심어주어서, 준마비 상태로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예이다.  


          코번이 방문하고 인터뷰한 여성 반전 단체들이 전쟁의 공포심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단체들은 전쟁과 군사화가 약속하는 평화가 인간 사회의 공포심을 기반으로 한 거짓이며, 알 수 없는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란 공포심에서 벗어나, 함께 반군사화 운동, 군비감축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말 그대로 국제 정치가 남성중심의 힘과 공포의 논리에서 벗어날 때, 지속 가능한 안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Cynthia Cockburn, From Where We Stand, 2008. 한국어로는 평화학자 김엘리가 번역한 것이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의 다양한 단체와 학자들이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미군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내놓고 있다. 그 연구들 중 하나가 과연 미군이 사용하는 군사 행동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또한 국제 안보에 기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래전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dnt)가 이야기한 것 처럼 폭력은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이 힘을 잃기 시작할 때, 그것이 두려워 다른 집단들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계속 복종시키려 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Hannah Arendt, On Violence, 1970). 아렌트의 논리대로 라면, 더이상 힘을 가진 집단이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미국은 제국으로써, 초강대국으로써의 힘을 더 빠르게 잃기 시작한다. 사회 윤리학자 샤론 웰치 (Sharon Welch)또한, 다양한 사례 연구를 들면서, 미국이 테러리즘에 대한 공격을 빌미로 제개한 군사행동은 군사적으로 윤리적으로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Real Peace, Real Security, 2008). 미국은 군사행동을 통해 오히려 반미정서를 전세계에 퍼뜨렸으며, 이슬람 국가 (IS)같은 급진적 테러집단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괌, 사이판 등의 태평양 섬들과 호주를 잇는 거대지역은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중요한 군사지역이다. 중국의 군사력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끊임없이 이 지역에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명문을 찾고 있다. 이번 북한의 핵실험에 이례적으로 재빠르게 대응하며, 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 사드시스템 배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는 군사 폭력을 통해 세계패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양새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결국 일반 한국시민들이 미국의 군수업체들과 한국의 건설업체들에게 ‘안전함이 보장되지 않는’ ‘안보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인간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세상에 무관심해져서, 정작 두려워 해야할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불합리한 제도와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Silent Cry, 2001). 우리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한국 정부와 미국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두려워 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우리의 공포심을 바탕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북한의 핵이 두렵다. 그러나 한국이 가지고 있는 핵, 원자력 발전소 뒤에 숨어있는 핵, 핵무기 개발을 정당화하는 극우보수주의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핵이 더 무섭다. 그리고 한국의 안보는 이미 세월호가 물 속에 가라앉을 때, 정신대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며 한일협상이 이루어졌을때, 이제 할머니가 된 생존자들에게 죽기 전에 일본을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애국어머니연합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사용자 중심의 노동법을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강요할 때, 등등의 순간에 끝났다. 국가안보는 국경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몸과 마음을 정치적, 종교적, 성적위협, 재난과 재해, 경제적 억압과 착취, 성차별 등으로 부터 지키는 인간중심의 안보가 되어야 한다. 국가가 자국민들을 지킬 능력도, 지킬 마음도 없을 때, 또는 지킴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더이상 국가안보는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 중심의 국가 안보를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정의의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도 상상하기 어렵다. 심판의 칼을 든 하느님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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